소설리스트

4권-파편 (2) (12/22)

문이 닫히고 단 둘이 남겨진 방에 적막이 들어찼다. 백용태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내 모습을 눈으로 빤히 읽기만 했다. 연회색의 멀끔한 정장은 마른 체형인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얼굴의 새 흉터가 유독 눈에 띄었다. 저거, 분명히 다스가 낸 거 맞을 거다.

“뭔데? 할 말 있으면 하고, 때릴 거면 때리고 빨리 꺼….”

말을 미처 맺기도 전에 손이 날아왔다. 짝, 소리와 함께 시야가 돌아갔다. 쓰러지려는 몸을 겨우 세웠으나 눈앞이 핑핑 돌았다.

“꿇어.”

백용태가 명령했다. 나는 선 채로 꿈쩍도 않고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러자 그가 내 머리채를 잡았다. 머리통을 끌어 내리는 손길이 거칠고 아팠다. 다시 고개를 들고 그를 노려보고 싶었으나 손힘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잡힌 머리채가 더 당겨지고서야 내 머리통이 그의 다리 사이에 위치한 것을 깨달았다. 뒤통수를 감싼 손아귀에 힘이 더 들어갔다. 물컹한 감촉이 이마에 닿자 진저리가 쳐졌다.

“홍다환이한테 빠는 법은 배웠나?”

바지 지퍼 위에 얼굴이 짓눌렸다. 불쾌감에 몸서리가 났다. 백용태에게 몸이 닿는 것 자체가 불쾌하니 그곳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무래도 너를 좀 길들여서 써먹어야 할 것 같은데.”

그가 지퍼를 내렸다. 입을 꾹 다물었으나 입술 위로 닿는 물컹한 감촉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반쯤 발기하기 시작한 것이 억지로 다문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입 제대로 벌려.”

그의 명령을 들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 자리에서 죽기 직전까지 쥐어 터진다 해도 말이다. 여태 나를 죽이지 않은 걸 보면 쉽게 죽일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그래, 나를 빌미로 아버지를 써먹을 때까지 써먹어야겠지. 제가 말한 대로 화풀이도 실컷 하고 말이다.

“입, 벌려.”

강압적인 명령에도 여전히 입을 벌릴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입술을 있는 힘껏 닫았다. 어금니와 턱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씨발, 말 뒈지게 안 듣지. 누가 키운 개새낀지.”

백용태는 내 양쪽 볼을 홀쭉하게 눌러 입을 억지로 벌리게 했다. 앞니 사이로 밀고 드는 불쾌한 살덩어리를 느낄 수 있었다.

잡힌 머리채가 몹시 아팠다. 억울하게도, 내 몸은 이 개자식이 주는 자극과 다스가 주던 자극을 비슷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지독히도 불쾌한 감각 속에서도 아래쪽은 발기했다.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

“제대로 안 벌리면 턱을 뽑아서 넣는 수가 있다.”

위협하는 말도 내게는 소용이 없었다. 그저 이 불쾌한 감각을 가능한 한 피하고 싶었다. 정말 턱이 뽑히더라도 말이다.

그가 다른 손으로 내 입을 헤집었다. 앙다물린 윗니와 아랫니 사이를 기어코 비집고 열어 그 틈으로 제 발기한 좆을 쑤셔 넣었다.

딱딱해진 것이 억지로 입 안으로 들어와 볼 안쪽을 쑤셔 댔다. 들어온 놈은 다스가 아닌데도 다스의 것을 여러 번 빨아 본 입은 혀부터 내밀었다. 내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 그 새끼가 빠는 법도 제대로 가르치긴 했나 보네.”

와중에도 나는 백용태가 조금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뒤틀리는 입매와 굳은 표정에서 조급함이 읽혔다. 싸움을 앞두고 있기 때문일까. 이 건물은 어느 정도 비울 셈일까. 생각이 많아서 사실 입에 들어온 더러운 좆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혀 위에 기둥이 스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다스의 것밖에 빨아 본 적 없기에 입에 들어온 게 남의 것임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몸의 반사적인 반응과 거부감이 동시에 나타나는 까닭은 알 수 없었다.

“턱에 힘 빼라.”

문득 나는 깨달았다. 다스랑 내가 얼마나 많이, 얼마나 자주 몸을 섞었는지. 어떤 날은 거의 습관처럼 섞기도 했다. 그러나 다스와의 섹스는 매번 달랐다. 매번 처음 해 보는 것 같이 즐겁고 또 버거웠다.

다스는 어땠을까. 그도 그랬을까. 나를 거칠게 대하고 폭력적으로 굴던 날들은 그에게 있어 불만족스러운 날들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나를 버린 걸까. 더 이상 좆집으로도 재미가 없어져서 말이다.

그런 줄 알았으면 진작 내가 노력했을 텐데. 그가 내게 질리지 않도록 뭐라도 해 봤을 텐데 싶어 마음이 아렸다. 그와 조금이라도 더 함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눈치채지 못해서 놓친 것 같아서.

“제대로 안 하냐.”

백용태가 낮게 읊조리듯 말한 뒤 내 머리채를 더 세게 잡아당겼다. 목이 뒤로 젖혀지는가 싶더니 조금 벌어진 입 속으로 발기한 페니스가 더 깊숙이 들어왔다. 동시에 숨이 막혀 컥,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불쾌했다. 더러운 좆도 좆이지만 다스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다가 방해받은 것이 말이다. 눈을 뜨고 위를 노려보았다. 백용태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뭔 생각 하냐?”

손에 잡힌 머리칼이 죄다 뽑힐 것 같이 따가웠다. 눈이 아릴 정도였다.

“아직도 잡생각 할 마음이 드는 걸 보면 애새끼는 애새끼란 말이지.”

다 들어왔다고 생각한 페니스가 목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목젖 근처에 닿는 이물감에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네 목숨줄 쥐고 있는 게 나인 건 알지도 못하고.”

그가 틀렸다. 열아홉 살에 그 지옥에서 탈출한 후부터 지금까지 내 목숨은 오직 다스의 손에 달려 있었다. 지금 이 순간도 예외는 아니었다.

애써 벌리고 있던 입에 힘을 주었다. 일부러 이를 세우자 물컹한 살덩어리가 쓸리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나를 내려다보던 백용태의 눈에도 날이 섰다.

“이 새끼가….”

거의 목젖까지 들어왔던 페니스가 단번에 빠져나갔다. 뒤이어 몸이 내동댕이쳐졌다. 바닥에 무너진 몸을 일으키려 애썼으나 금세 다시 무너졌다. 내 몸 위에 발길질이 쏟아졌다. 머리채를 잡힌 것보다 몇 배는 아팠다.

백용태의 발이 나를 멋대로 짓밟고 걷어찼다. 보통 힘이 아니었다. 발이 닿는 곳마다 뼈라도 부러진 듯 아픈 걸 보니 꼭 나를 두들겨 패서 죽일 기세였다.

발이 짓누를 때마다 내 보잘것없는 몸뚱이는 비명이라도 질러 댈 것처럼 고통을 자아냈다. 참고 싶었지만 결국 잇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으윽….”

“내가, 씨발, 좆만 한 새끼들 때문에 이게 무슨, 씨발.”

와중에도 그가 내뱉은 단어들 중 ‘새끼들’이라는 단어가 신경 쓰였다. 무언가를 깨달은 머릿속에 소름이 끼치듯 찌릿한 쾌감이 일었다.

‘다스는 역시 살아 있어.’

그러지 않고서야 굳이 복수형으로 말할 이유가 없으니까.

두들겨 맞고 있는 몸은 여전히 지독하게 아팠으나 기분이 좋아서 웃음이 비실비실 나올 지경이었다. 잠깐이라도 나쁜 생각을 했던 내 불경함을 몹시 꾸짖었다. 내가 아니면 누가 다스를 믿어 주겠어.

계속 날아들던 발길질이 어느 순간 뚝 멈췄다. 위를 올려다보자 백용태의 얼굴이 식어 있었다.

“아, 차라리 어디 한 군데를 아예 못 쓰게 만들어 줘 버릴까.”

백용태가 하는 말은 무섭지 않았다. 다만 다스를 찾아야 한단 생각만 가득했다. 내 몸을 훑어보던 그가 다친 발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 발은, 누가 그런 거냐?”

입을 다물었다. 놈의 구둣발이 내 발 위에 닿아도 아무렇지 않은 척 백용태의 얼굴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나 힘을 줘서 짓밟을 때에는 어쩔 수 없이 몸이 반사적으로 떨렸다. 그가 바지춤을 추스르더니 내 발치에 앉아 신발을 벗겼다.

“혹시… 이것도 홍다환이가 너 길들인다고 그런 거냐?”

그가 주먹으로 발등을 짓누르자 불쾌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발은 이미 다 나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견딜 만한 정도라고 생각했다. 놈이 품에서 잭나이프를 꺼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백용태의 얼굴에 비죽이 미소가 떠올랐다.

“어디 얼마나 버티나 한번 보자고.”

칼날이 허공에서 번뜩이는가 싶더니 이내 발등에 날카로운 통증이 찍혔다. 비명을 억지로 삼켰다.

“그래 봤자 스무 살 애새끼인데.”

칼날의 딱딱한 감각이 그대로 발 속에 느껴지는 듯했다. 다스가 부쉈던 딱 그 자리였다.

“네깟 게 나를 그렇게 노려봤자지.”

칼날이 더 깊이 파고들자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아팠다. 다스가 부쉈을 때보다 더 괴로웠다.

나는 다스를 떠올렸다. 마치 그를 떠올리는 일이 모든 일의 해결책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이깟 건 아무것도 아니야. 다스가 없는 것보다는, 그에게서 버림받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 스스로를 다독이며 억지로 버텼다.

그러나 몸은 한없이 유약하기만 하고 나 역시 많이 유약해진 모양이었다. 비명을 참기가 점점 어려워질 즈음이었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백용태가 있는 대로 짜증을 내며 발에 박힌 칼을 빼냈다.

“흐윽….”

결국 신음이 새어 나왔다. 끔찍한 통증이 발부터 정수리까지 순식간에 번져 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장을 입은 놈 하나가 백용태의 눈치를 보았다.

“씨발, 뭐야?”

“저, 잠깐 나와 보셔야 할 것 같….”

뒤이어 매캐한 냄새가 코끝에 느껴졌다. 탄내였다.

“이거 뭐야, 씨발….”

“큰형님, 큰일 났습니다. 지금….”

뒤이은 말을 잘라먹듯 문이 닫혔다. 동시에 공포가 밀려들었다. 건물에 불이 났다면, 나는 어떡하지.

방에는 창문 하나도 없었다. 갇힌다면 그대로 질식해 죽을 것이다. 급히 문에 달려들어 주먹으로 두드렸다.

“문 열어 줘! 내보내 줘!”

때맞춰 터진 사이렌 소리에 내 목소리가 묻혔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칼에 찔린 발은 지독히도 아파서 한 걸음을 내딛기도 버거웠다. 꼭 대못이 박혀 있는 것 같았으나 억지로 구두를 도로 신었다.

기분 탓인지, 혹은 정말로 그런지 몰라도 주변 공기가 점점 매캐해지는 것 같았다. 당장 나가야 했다. 다스가 밖에 살아 있는데 내가 여기서 죽을 순 없었다. 다리를 절며 욕실로 들어갔다. 손님 받는 방인데 창문이 없으니 적어도 환풍구는 있겠지.

다행히도 천장에 환풍구로 추정되는 사각형이 보였다. 내 몸이 들어갈 정도로 컸지만 키가 닿지 않는 게 문제였다. 다시 밖으로 나가 감시하는 놈들이 앉던 의자를 끌고 왔다.

한쪽 발을 쓰지 않고 의자를 끌어당기는 일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줄은 몰랐다. 조심해야 된단 사실을 알면서도 마음이 급해 결국 아픈 발에 힘을 주었다.

“흐으…!”

고통을 참으며 욕실까지 의자를 끌고 오는 데만 몇 분은 지난 듯이 느껴졌다. 수건에 물을 대충 축여 입과 코를 감싸곤 뒤통수에서 묶었다. 덜덜 떨리는 몸뚱이를 억지로 의자 위에 세웠다.

환풍구는 오히려 방보다 더 매캐한 냄새가 났다. 순간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방에 있으면 백 퍼센트 죽을 것이란 생각에 이를 악물고 몸을 위로 던졌다.

일단은 불빛이 보이는 곳까지 기어가야지 하는 생각으로 움직였다. 발등이 쓸릴 때마다 욕이 나오게 아팠다.

환풍구 아래쪽은 몹시 소란스러웠다. 어떤 곳은 벌써 불이 번졌는지 숨 막히는 열기가 끼치기도 했다. 너무 뜨거운 곳은 피해 가며 계속 이동했다.

한참 기어가다가 인적이 드문 복도에 내려섰다. 매캐한 냄새는 났지만 공기가 뜨겁지는 않았다. 말을 듣지 않는 발을 억지로 움직여 몸을 숨겼다.

“그러니까, 씨발, 갑자기 불이 난 이유가 뭐냐고.”

“모르겠습니다, 형님. 일단 애들 보냈는데 지금 연락도 안 되고 정신이 없어서….”

정장 입은 놈들이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갔다. 고작해야 모퉁이 하나만 돌면 내 모습이 훤히 보였을 텐데. 놈들도 경황이 없어 나를 확인하지 못한 듯해 다행이었다.

“씨발, 누가 일부러 지른 거 아냐? 내일 그 좆같은 카지노 가기 싫다고?”

“아, 형님, 애새끼도 아니고 어떤 놈이….”

“그럴 만도 하잖아. 씨발, 큰 형님이 꼭 도살장에다가 우리 몰아넣는 것 같다고.”

카지노…. 역시 내 짐작이 맞았다. 아무리 민간 기업 소유라고 해도 시에서 관리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곳일 텐데, 백용태는 무슨 만용으로 거길 쳐들어가려 했을까. 그만큼 뭔가 불안한 걸까….

생각을 이으며 나는 복도에 사람이 없는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내려가려면 계단실을 찾아야 했다.

복도는 생각보다 복잡했다. 그리고 내가 있던 방의 입구와 비슷하게 생긴 문이 여러 개 늘어서 있었다. 지나온 곳인지 처음 걷는 곳인지도 잘 구분 가지 않을 정도였다. 공기 중에 연기가 부옇게 서려 있어서 더 그랬다.

백용태에게 찔린 발은 제대로 딛지도 못할 만큼 아프고 목은 연기 때문에 따가웠다. 물에 젖은 수건도 딱히 소용이 없는 듯했다. 무엇보다 빨리 움직이지 못하는 게 제일 갑갑했다. 놈들이 나타나도 한 발로 움직여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행동반경이 제한되었다. 신발을 신어 피가 바닥에 묻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침착하자.’

비슷해 보이지만 조금씩 다른 흠집이나 얼룩을 눈여겨보며 지나온 곳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그러나 곳곳에 흑매파 놈들이 돌아다녀서 복도를 한 번 지나치기도 힘들었다. 놈들의 숫자가 이렇게 많았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백용태가 몇 개 조직을 병합한 게 분명했다.

“그 새끼는 어디 있어?”

“큰 형님이 찾는 놈? 됐어, 빨리 1층 내려가서 나갈 생각이나 해, 씨발! 우리가 뒈지게 생겼는데, 무슨….”

그리고 백용태는 내가 도망간 걸 알고 있는 듯했다.

다친 발을 질질 끌며 몇 번을 헤매고서야 계단실을 찾아냈다. 문 너머는 불이 켜지지도 않고 복도보다 열기가 더 강했다. 다른 층에서 생긴 불길이 계단실을 통해서 번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놈들이 1층으로 내려간다고 하니 불은 위에서 난 모양이었다.

불이 났는데도 계단실에 인기척이 없는 걸 보면 아마 다른 쪽에도 통로가 있긴 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죄다 나를 찾느라 이동을 못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길게 생각 않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말이 뛰어 내려가는 것이지 거의 난간에 매달려 껑충거리는 꼴이었다.

몇 계단 내려가다 팔에 힘이 빠져 넘어졌다. 보잘것없는 몸을 속으로 욕하며 계단을 몇 바퀴 굴렀다. 다친 발이 계단 모서리에 몇 번 부딪쳤다. 팔꿈치와 머리도 부딪쳤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몸 구르는 소리를 막아 주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층계참에 누워 있던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빌어먹을 계단이 어두워서 층수가 보이질 않았다. 1층까지 내려가려면 얼마나 남았나 싶어 어둑한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아래쪽에는 불이 켜져 있었으나 높이가 까마득해 보였다.

‘…차라리 굴러 버릴까.’

머리를 싸매고 구르면 더 빠르지 않을까, 생각했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여기서 더 다치면 움직이기 더 불편해질 거야.’

밖에 나간다 해도 흑매파 놈들이 지키고 있을지 모르고, 이 발로 얼마나 이동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내려가야 했다. 다스가 밖에 있다면, 그가 살아 있다면, 그래서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말이다.

끙끙거리며 한 층씩 지겨운 속도로 이동했다. 그나마 계단에는 흑매파 놈들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걱정이 씨가 되었는지 갑자기 머리 위에서 불빛과 함께 목소리들이 왕왕 쏟아져 내려왔다. 다섯 층 정도 위였다.

“씨발, 엘리베이터도 고장 나고 이게 뭐야.”

“원래 불났을 땐 엘리베이터 타면 안 됩니다, 형님.”

“닥치고 빨리 내려가! 야, 누가 후레쉬 좀 비춰 봐라.”

황급히 한쪽으로 몸을 숨겼으나 잠깐이었다. 휴대폰 불빛 서너 개가 내 몸을 시선처럼 훑고 지나갔다.

“야, 저 새끼 큰 형님이 찾는 걔 아니냐?”

한 녀석의 물음과 동시에 나는 절뚝거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씨발, 잡아! 뭐 해!”

계단에 발을 디딜 때마다 끔찍한 통증이 몸을 찌르듯 훑었다.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고통이었으나 무시하고 계속 달렸다. 절뚝거리며 겨우 걷는 나와 녀석들의 거리가 금세 좁혀졌다.

여기서 붙잡힐 순 없었다. 괜찮아, 할 수 있어. 아픈 발을 질질 끌며 난간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내려가다 결국 몇 바퀴를 나뒹굴었다. 통증을 참느라 이를 앙다물었다.

“빨리 내려가, 씨발! 뭐 하냐고!”

한 층만, 한 층만 더 내려가면 일 층이었다. 물론 그곳에도 놈들이 있을 테지만. 뻣뻣한 두 다리를 끌고 마지막 한 층을 내려갔다.

몸을 던지다시피 해서 열린 문으로 내달렸다. 들어가자마자 문을 닫고, 잠갔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주방이었다. 즐비한 도구들을 보니 중식당 같았다. 흑매파가 운영하는 곳인 모양이었다. 이런 식당 같은 곳을 이용해서 돈세탁도 한다고 얼핏 전에 다스가 말한 게 기억났다. 조금 작은 사이즈의 식칼 하나를 행주로 대충 싸서 재킷 안쪽에 넣었다.

계단으로 내려온 놈들이 금방 문을 따고 들어올 것 같아서 주방으로 연결된 반대쪽 입구로 천천히 이동했다. 다친 발은 바닥을 디딜 때마다 지독하게 아픈데, 동시에 감각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식당이면 시끄러울 줄 알았는데, 어쩐 일인지 주방과 연결된 바깥은 조금 조용한 듯했다. 인기척이 없는지 계속 살피며 밖으로 나갔다.

바깥은 몹시 화려했다. 쨍한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장식한 벽은 한눈에도 중국풍이었다. 넓은 홀에는 족히 오십 명은 앉아도 될 법한 테이블이 의자를 얹고 늘어서 있었다.

‘…엄청 넓네. 흑매파 놈들은 왜 안 보이지….’

1층으로 내려간 놈들이 꽤 있을 텐데 인적이 아예 없는 것을 봐서 아마 식당 너머에 또 다른 공간이 있는 듯했다. 다행히 매캐한 냄새가 훨씬 덜해서 입을 가리고 있던 수건을 벗어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던졌다.

식당 정문 쪽으로 곧장 절룩거리며 걸어갔지만 거대한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유리도 아니라 무언가로 깨뜨릴 수도 없어 보였다.

‘어떡하지….’

분명 다른 입구가 있을 텐데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쪽으로 나가면 흑매파 놈들이랑 마주치겠지. 그렇다고 여기서 기다려 봤자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들킬 텐데, 어쩐다. 그리고 지금쯤이면 나를 본 놈들이 내가 식당으로 갔단 사실을 백용태에게 알렸을 터다.

굳게 닫힌 문에 등을 대고 주저앉아 다친 발을 살폈다. 그제야 구두 안에 흥건하게 고인 피가 느껴졌다. 상처를 확인해야 했지만 보기가 두려웠다.

접은 무릎 위에 두 손을 모아 얹었다. 다스의 반지가 어둑한 주변을 밝히기라도 하듯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보고 싶어.’

둔한 머리를 굴려도 모자란 와중에 그가 보고 싶다는 생각 따위나 하는 내가 한심했지만, 당장 일어나서 무슨 방법이든 찾아보아야 했지만, 지금 당장은 그저 다스가 너무 보고 싶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울지는 않았다. 울기 시작하면 그땐 정말 약해질 것 같았다.

어디 잠깐 몸이라도 숨긴 채 생각을 해 보려는데, 식당 한쪽에서 기척이 들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어둑한 곳에 빛줄기가 들어왔다.

뚜벅, 뚜벅, 발소리만으로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불쾌감에 소름이 끼쳤다.

“씨발, 이게 도대체 무슨 지랄인지….”

백용태의 목소리가 홀에 울렸다. 굳은 몸을 억지로 일으켜 벽을 따라 움직였다. 다행히도 의자를 올린 테이블 사이로 룸 같은 것이 보였다.

남은 힘을 짜내 룸 쪽으로 기다시피 이동했다.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발이 원망스러웠다.

백용태를 따라온 놈들이 제법 많았다. 족히 열은 되어 보였다. 그들은 식당 홀을 둘러싸듯이 퍼졌다. 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포위하는 듯했다.

룸인 줄 알았던 곳은 문 대신 비즈로 된 가림막이 달린 칸막이 좌석이었다. 소파 형태의 좌석에 기어 올라가 몸을 웅크렸지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네 명은 네가 재촉하는구나….”

짜증과 귀찮음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홀에 울렸다. 홀에 퍼진 놈들이 야구 배트와 칼 같은 것들을 각자 들고 칸막이를 하나씩 살피기 시작했다. 나를 찾는 듯했다.

비즈 사이로 보이는, 정장 입은 그놈들은 덩치가 하나같이 큰 데다 무기 흔드는 본새가 제법 잡혀 있었다. 아마 백용태가 아끼는 애들을 추린 것 같았다.

“홍다환이한테 하듯이 나한테 구멍이라도 팔면, 혹시 알아? 내가 너 예뻐해서 살려 주기라도 할지.”

역시 놈은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사는 이유는 다스밖에 없는데. 멍청하긴.

조용히 다른 칸막이로 이동할까, 생각했지만 들킬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빠져나갈 방법은 전혀 없는 듯이 느껴졌다. 이대로 끝인 걸까. 막막한데 현실감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기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내게는 다스가 곧 종교이자 신이니 빌 곳도 없었다. 내가 지켜야 할 사람에게 내 운을 빌어 달라 할 순 없잖은가.

발걸음 하나가 내 쪽으로 가까워졌다.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아니면, 믿을 구석이라도 뭐 따로 있는 건가?”

가림막 아래 두 개의 발이 뚝, 멈췄다.

손이 뻗어 와 멱살을 쥐고 당겼다. 몸 전체가 물건처럼 밖으로 딸려 나갔다. 바닥의 딱딱한 감촉에 뒤이어 각목이 날아들었다.

퍽, 소리와 함께 배 안쪽에 꿀렁거리는 충격이 가해졌다. 맞은 곳은 배 한가운데인데 뼈라도 부서진 것 같았다. 숨쉬기가 힘들었다.

정신 차릴 새도 없이 다시 한 대가 더 날아들었다. 그리고 또 한 대. 백용태는 이제 와서 본격적인 화풀이라도 시작할 셈인지 밑도 끝도 없이 나를 때렸다.

지독한 통증이 몸 곳곳에 날아들었다. 놈은 아무 말도 않았다. 그게 더 불안했다. 차라리 계속 지껄이던 때에는 놈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티라도 냈으니까.

한동안 약해진 몸으로는 통증을 견디기 어려웠다. 날아드는 각목이 무지막지하기도 했다. 여태껏 그에게 두들겨 맞은 게 장난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아파….’

여태 잊고 있던 고통들이 모조리 한꺼번에 몰려드는 듯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내가 다스를 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이대로 모두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것이 나의 가장 큰 고통이었다.

온몸 중 한 군데도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고 느낄 무렵이었다. 쾅,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며 백용태가 발길질을 멈췄다.

“뭐야?”

숨을 고르는 백용태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쾅.

홀에 퍼지는 긴장감을 나도 느낄 수 있었다. 둔탁한 소리는 문 쪽에서 났다. 그리고 세 번째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굳게 잠겨 있던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공기가 흘러들고, 빛이 비쳤다. 몸의 피가 먼저 요동치기 시작했다. 냄새가 가장 먼저 느껴졌다. 그 특유의 철 냄새.

“…저기… 있네.”

기적이 다가오자 온몸의 고통이 사라졌다.

“내가 믿을… 구석.”

도끼를 쥔 다스가 부서진 문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가 시선을 틀어 내 모습을 발견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만큼은 하나도 괴롭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도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아팠지만 나는 괜찮았다.

“…다스야.”

멀리 있는 그에게는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으나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이름을 불렀다. 역광인 데다 자꾸 눈이 감겨서 다스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웃고 있음은 알 수 있었다.

반가움은 잠깐이었다. 백용태의 개새끼 열 명이 하나둘씩 다스에게 덤벼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그가 혼자 왔음을 깨달았다. 흑매파 놈들 중에서도 제일 제대로 된 놈들로 추려 데려왔을 텐데 다스가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지 겁이 났다.

‘안 돼, 다스야.’

아픈 몸을 억지로 일으키려 했으나 방금 전까지 백용태에게 두들겨 맞은 몸은 고작해야 푸들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나라도 도와야 했다. 다스가 크게 다칠지도 모른다. 아무리 다스가 싸움을 잘한다 해도 칼과 야구 배트를 든 조폭들 여럿과 싸워서 이길 가망성은….

“뭐 하냐, 이 새끼들아. 애 하나 가지고.”

그리고 나는 내 불경함을 또 꾸짖어야 했다.

다스는 날아드는 야구 배트와 각목을 그대로 맞아 가며 내 쪽으로 왔다. 뿐만 아니라 칼날까지. 다스가 상처를 입으면서도 전혀 물러나지 않자 놈들은 질린 듯했다.

그의 몸이 망가져 가는 것이 이곳에서도 보였다. 하지 마, 다스야. 그러지 마, 그냥 도망쳐. 바보처럼 이러지 말고, 너라도 도망쳐.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다스는 여전히 열 명이나 되는 놈들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 가며 조금씩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왜… 온 거야?’

그것도 혼자서, 흑매파가 여기 있단 사실을 알면서. 대체 왜 온 걸까. 다스는 바보가 아닌데. 죽으려고 온 것도 아닐 텐데.

“윽…!”

생각을 잇던 중, 비명 소리가 들렸다. 다스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칼을 든 놈들 중 하나였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우세가 바뀌고 있었다. 칼에 찔리고 몽둥이로 맞아 가면서도 쓰러지지 않는 다스는 내가 보아도 무시무시했다.

역광을 받으며 도끼를 미친 듯이 휘두르는 다스는 얼핏 보면 아무렇게나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자세히 보면 칼을 든 놈들부터 차례대로 공략하고 있었다.

방어를 거의 하지 않고 움직이는 동작은 싸움 잘하는 놈들이라 해도 예측하기 힘들 터다. 아니나 다를까 놈들은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벌써 쓰러져서 바닥을 나뒹굴며 끔찍한 비명을 질러 대는 놈들도 있었다.

홀에 늘어서 있던 테이블과 의자들이 부서져 나뒹굴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다른 손에 의자 하나를 들고 무기처럼 휘둘렀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다스가 이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억지로 끌고 바닥을 기어가려는데, 뒷덜미가 짓눌렸다.

“그 개새끼에 그 주인이네. 상황 모르고 설쳐 대는 꼴이.”

얼굴이 바닥에 뭉개지고 숨이 턱 막혔다. 백용태가 나를 밟은 것이었다.

그가 내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백용태의 팔에 감긴 몸이 축 늘어졌다. 도끼를 휘두르던 다스의 손이 조금 느려졌다. 내가 붙들린 것을 보고 당황한 듯했다. 붙들린 팔에서 벗어나려고 작게나마 버둥거렸으나 전혀 소용없었다.

“둘 다 똑같이 머리가 나쁜 건지, 뭔지…. 혼자 와서 뭘 어쩌겠다고.”

다스랑 싸우던 놈들 중 대부분은 이미 쓰러졌고, 한 놈은 백용태의 눈치를 보다 부서진 문 밖으로 도망가 버렸다.

“애들 불러와.”

“예.”

백용태가 명령하자 남은 하나가 황급히 어딘가로 달려갔다. 홀에 가득한 피비린내가 그제야 느껴졌다.

다스가 쥐고 있던 의자를 내던지고 도끼를 고쳐 쥐었다. 내가 붙들려 있어서 쉽사리 다가오지 못하는 듯했다.

문득 백용태가 일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홍다환이가 안 뒈졌으면, 내가 진작 너 죽였어.’

놈은 다스를 자극하기 위해 나를 죽일 거라 했었다. 그때가 지금일까. 팔에 목이 졸려 자꾸 감기려는 눈을 간신히 뜨고 다스를 보았다.

피를 뒤집어쓴 채 도끼를 든 그는 내가 본 중에 가장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렇게 화가 난 다스를 나는 본 적이 없었다.

“그 손 놔.”

다스가 말했고, 백용태는 대답 대신 내 목을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놈이 나를 붙든 채 한 걸음 물러서자 흠칫거리는 기색이 내게도 전해졌다.

나를 붙들지 않은 반대쪽 손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관자놀이에 무언가가 닿았다. 실제로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지금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게 뭔지는 알 수 있었다. 다스가 걸음을 다시 옮기려다 뚝 멈췄다.

“여기는 왜 또 왔냐.”

백용태가 다스에게 물었다. 다스의 얼굴에는 얼핏 표정이 없어 보였으나 어둠 속에서 커다랗게 뜨인 눈에는 내게 보인 적 없는 감정들이 들끓고 있었다.

“너 죽이려고.”

다스가 대답하며 한 걸음을 내디뎠다. 백용태 역시 한 걸음을 뒤로 물러섰다.

“이 새끼 대가리 날아가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대답해라.”

관자놀이에 닿은 것에서 철컥, 하고 쇠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미친 새끼가 아니고서야 씨발, 두 번이나 뒈질 뻔하고 또 찾아오는 건 말이 안 되거든.”

백용태의 목소리가 티 날 정도로 떨렸다. 뭔가 이상했다. 불이 나서 정신이 없다고는 하지만 아직 건물에 다른 놈들이 한참 남아 있을 텐데, 백용태는 뭘 두려워하고 있을까.

“너 죽일 때까지 계속 찾아오려고 했지. 그리고 나 미친 새끼 맞아.”

“씨발, 가까이 오지 마라.”

관자놀이에 닿은 딱딱한 것이 살을 더 짓눌렀다. 나도 모르게 미간을 구기자 다가오려던 다스가 다시 멈칫했다.

백용태를 보던 다스의 시선이 천천히 내 쪽을 향했다. 살의와 분노가 뚝뚝 흐르던 눈동자가 얼핏 슬픔 비슷한 것을 담아냈다.

“귤아.”

다스의 음색으로 듣는 내 이름이 너무 오랜만인데, 어쩐지 이게 마지막인 것 같아서 아쉬웠다.

그가 입은 검은 민소매 티셔츠도, 검은 스카쟌도 핏자국이 크게 티가 나지 않았지만 그가 크게 다쳤음은 나도 알 수 있었다. 날아드는 몽둥이와 칼을 맨몸으로 그대로 맞았으니 멀쩡할 리가 절대 없었다. 병원… 가야 할 텐데. 지금 당장이라도.

‘같이 죽을까, 귤아?’

그 물음을 지금 내게 다시 묻는다면, 나는 그때와 똑같이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왜 나 같은 거랑 죽으려고 하느냐고, 사람이 죽는다고 그의 세상이 같이 죽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느냐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스가 왜 이렇게 몸을 만신창이로 다쳐 가면서까지 내 앞에 서 있는지.

“나랑 여기서 살아 나갈래?”

그의 물음과 함께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점점 가까워지는 여러 대의 사이렌 소리를 듣고 안도했다. 다스는 혼자 온 게 아니었다. 백용태가 불안해한 까닭도 그것이었다. 다스가 절대 혼자 왔을 리 없으니까.

딸려 오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거의 동시에 다스가 달려왔다.

관자놀이에 닿아 있던 것이 떨어졌다. 그게 어디를 향할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백용태가 다스를 쏘지 못하도록 남은 힘을 짜내 등 뒤에 들러붙은 그의 몸을 옆으로 틀었다.

탕, 하고 한 발의 총성이 빈 홀에 크게 울렸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큰 소리였다. 나는 다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내가 밀친 덕인지 다행히도 맞지 않았다.

“하, 씨발, 이것들이…!”

거의 코앞까지 온 다스가 도끼를 위로 쳐들었다. 백용태는 나를 방패처럼 내밀며 옆으로 몸을 비켰다. 동시에 다시 한번 총성이 울렸다.

총성과 함께 다스의 몸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도 나는 믿지 않았다. 내가 아는 그는 절대적인 존재니까. 그렇게 크게 다치고서도 지금 내 앞에 서 있으니까, 괜찮을 줄 알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들고 있던 도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스의 어깨가 피로 젖어 가는 게 어둠 속에서도 보였다. 눈으로 보고서도 믿기 어려웠다.

“도대체가, 무슨 애새끼가, 씨발, 뒈지지를 않아.”

총을 쥔 백용태의 손이 다시 뻗어 나가자마자 다스가 놈의 손목을 붙들었다. 세 번째 총알은 허공으로 발사되었다.

내 눈앞에서 두 사람의 손이 힘겨루기를 했다. 다스는 총을 맞은 팔을 쓰지 못하고 백용태는 한 손으로 나를 방패 삼아야 하니 결국 한 손끼리의 싸움이었다. 다스가 그렇게 많이 다쳤는데도 두 사람의 힘이 비등했다.

“…귤아.”

다스의 갈라진 음색에 내 마음도 같이 쩍쩍 갈라지는 듯했다. 나는 아까 주방에서 가지고 나온 칼을 떠올렸다. 얻어맞아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팔을 백용태 몰래 움직여 꺼낼 방법이 있을까. 지금도 놈에게 목이 단단히 붙들려 있는데.

여러 대의 사이렌 소리가 귀를 찢을 듯이 바짝 가까워지더니 사람들의 기척이 들렸다. 경찰이 분명했다. 문밖으로 불빛이 비치고 부산스러움도 점차 가까워졌다. 백용태가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지금 내 뒤로 와, 빨리!”

다스의 목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총성이 허공에 울렸다. 그가 백용태의 손목을 비트는 것을 보고 곧바로 품에 손을 넣었다.

칼을 꺼내자마자 다스의 뒤로 가는 대신 백용태의 옆구리를 찔렀다. 제대로 찔렀는지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다스가 나를 끌어당겼다.

커다란 등이 나를 보호하듯 시야를 가로막았다. 어느새 총이 다스의 손에 들려 있었다.

백용태가 달려들었고, 총성이 다시 한번 울렸다. 다음 순간, 다스가 다친 팔로 나를 감싸며 뒤로 물러났다.

우리 쪽으로 달려들려던 백용태가 주춤거렸다. 옅은 회색의 정장, 배 한가운데에 피가 번지고 있었다. 옆구리에는 내가 찌른 칼이 아직도 박힌 채였다.

“…다스야….”

“괜찮아.”

다시 한 걸음. 다스가 물러나는 조심스러운 움직임을 따라 나도 발길을 옮겼다.

“씨, 발….”

백용태가 물을 머금은 듯한 목소리로 욕을 중얼거렸다. 경찰들의 기척이 점차 가까워졌다. 뭐라고 더 말을 내뱉으려던 백용태가 마침내 바닥으로 쓰러졌다. 다스는 들고 있던 총을 내던졌다.

경찰들의 보호를 받으며 나갈 거라는 내 짐작과 달리 다스는 나를 더 어두운 쪽으로 이끌었다.

“어디….”

“이쪽으로 와.”

그가 이끄는 대로 다리를 절룩거리며 걸었다. 걸을 때마다 백용태에게 맞은 온몸이 아팠지만, 발은 거의 딛지 못할 정도로 괴로웠지만 다스가 더 많이 다쳤을 테니 꾹 참고 따라갔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내가 아까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작은 복도였다. 식당과 건너편 공간을 가로지르는 곳인 듯했다. 발소리가 왕왕 울려서 누가 들을까 두려웠다. 우리 둘의 그림자가 우리를 감시하듯 발아래로 길게 따라붙었다.

계단실과 똑같이 생긴 문을 열고 나오자 어둑한 골목이 드러났다. 바깥은 해가 지기 시작하는 저녁이었다. 만신창이인 몸뚱이를 서로에게 기대며 기어코 몸을 숨길 곳에 도착한 우리는 그제야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오랜만에 본 다스는 많이 말라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근사하고 아름다웠다.

“다, 다스야.”

“응.”

내 얼굴을 쓰다듬는 다스의 손이 크게 떨렸다. 총을 맞지 않은 쪽인데 이쪽도 다친 모양이었다.

“다친 데 없어?”

그가 물었다. 백용태가 나를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팼지만, 발도 칼에 찔렸지만 그냥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실제로 하나도 아프지 않기도 했다.

“그래. 이제 괜찮아. 이제….”

내 뺨을 쓰다듬던 손이 결국 힘을 잃고 아래로 툭 떨어졌다. 다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미안, 해. 귤아. 미안. 내가… 너를 안을 수가 없네. 씨발, 팔이….”

스카쟌 소매 아래로 흐르는 피를 보니 숨이 턱 막혔다. 아까 싸울 때 칼에 찔린 모양이었다. 총에 맞은 반대쪽 팔도 심각해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눈앞이 흐렸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무언가가 목으로 자꾸만 울컥울컥 치솟았다.

“…팔이….”

그가 다시 말을 잇기 전에 있는 힘껏 다스의 상체를 껴안았다. 그가 나를 안지 못해도 괜찮다고 느끼길 바라면서. 내 마지막 남은 힘을 모조리 모아서.

“울지 마, 귤아. 울지 마. 이제 괜찮아….”

다스의 뺨과 내 뺨이 닿았다. 익숙한 온기에 깊이 안도했다.

부서지고 망가진 우리는 그렇게 어둠 속에서 서로에게 기댄 채 오래도록 서 있었다. 머리 위 먼 하늘에서는 노을이 번졌다.

흑매파 놈들을 검거 중인지 골목 밖은 소란스러웠으나 우리를 가린 세상의 그림자만큼은 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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