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국과의 경계선 (10/22)

오랜만의 깊고 긴 잠에서 깼을 때,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색소 옅은 다스의 눈동자였다. 그가 내 코앞에서 그 예쁜 눈을 깜박, 깜박 하더니 이내 희미한 웃음을 담아냈다.

“일어났어?”

아침마다 매일 그의 좆에 박히는 일만 익숙했는데, 이렇게 오랜만에 눈을 보고 아침을 맞이하자 깨어난 게 아니라 꿈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눈앞에 있는 다스를 실감하고 싶어서 손을 뻗었다. 그를 만지기도 전에 먼저 내 손목에 감긴 붕대를 보고 현실감을 느꼈다. 그래, 어제 내가 헛짓을 해서….

갈 곳 없이 허공에 멈춘 내 손을 다스가 잡아 그대로 제 얼굴까지 가져갔다. 손끝에 다스의 뺨이 닿자 안도감이 들었다. 여기는 꿈이 아니다. 현실의 다스가 있는, 내 집이다. 그러니 나는 괜찮아야 했다.

다시 눈을 감자 다스가 내 상체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 온기가 익숙해 나도 모르게 옷깃을 잡고 마주 당겼다. 이마에 그의 어깨가 닿았다.

“더 잘래?”

“아니, 그냥 누워 있을래….”

다스의 체취를 들이마시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다스의 숨결과 달리 내 가슴은 불규칙적으로, 느리게 뛰고 있었다. 마치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한참을 더 누워 있다가 그가 나를 번쩍 들고서야 침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전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다스는 나를 식탁에 앉히고 밥을 먹였다. 그마저도 속이 더부룩해서 몇 술 뜨지 못했지만 말이다.

얼마 되지 않는 식사가 끝나고 다스는 소화를 도와준다며 내 손발을 조물거렸다. 커다란 다스의 손이 내 손과 발을 차례대로 덮어 가며 살 없는 몸을 주물렀지만 여전히 감각은 둔했다.

“시원해? 여기도 주물러 줄까?”

그의 손이 내 허리를 불쑥 장난스레 파고들었다가, 내가 반응하지 않자 그대로 빠져나와 내 뺨을 감쌌다.

“잠깐만 기다려. 내가 사과 갈아 줄게. 너 좋아하는 꿀도 넣고 먹자.”

주방으로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좀 시간이 지난 뒤에야 천천히 일어나서 그를 따라갔다. 다스는 조각낸 사과를 블렌더에 넣고 찬장에서 꿀을 찾고 있었다.

별 의미 없이 주방을 둘러보다가 조리대 위에 놓인 과도를 집어 들었다. 며칠 전에 다스가 새로 갈아서 날이 바짝 서 있었다.

반짝이는 칼날을 보자 다시 새벽의 기억이 떠올랐다. 손목의 붕대에는 아직 희미하게 피가 배어 나오는데도 지난 새벽이 아주 먼 기억처럼 느껴졌다. 어젠 내가 왜 그랬을까….

칼에 비친 내 모습을 멍하니 보는데 무언가 눈앞에 불쑥 끼어들더니 칼을 빼앗아 갔다.

“너 지금 뭐 하냐? 그걸로 또 뭔 짓 하려고?”

몸이 옆으로 홱, 기울었다. 사나운 손길에 상체가 마구 뒤흔들렸다. 뒤이어 숨이 턱 막혔다. 그가 내 목을 틀어쥐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쿨럭거렸으나 그를 밀치지는 않았다.

“말로 해선 안 되겠네.”

그가 목을 놓고 대신 내 머리채를 잡아챘다. 그대로 몸뚱이 전체가 질질 끌려갔다. 아직 덜 나은 발이 이리저리 꺾이고 바닥에 질질 끌렸다.

다스는 나를 그대로 거실까지 끌고 갔다. 물건처럼 끌려가면서도 나는 한 마디 비명조차 내지르지 않았다. 그럴 힘도 없었다. 그저 내가 또 뭔가 잘못했겠지. 멍청한 손규인이 다스를 화나게 한 거지. 뻔했다.

그는 거실 바닥에 나를 던지듯 내려놓고는 허리띠를 풀었다. 손목이 등 뒤로 당겨지더니 그대로 허리띠에 묶였다. 새벽에 입은 상처가 가죽 벨트에 짓눌려 아팠지만 한마디도 않았다. 반항할 기운도 없었다. 그저 소파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앉은 채 그가 나를 혼내기만 기다렸다.

하지만 내 손을 묶은 다스는 나를 혼내지 않았다. 다만 담배를 꺼내 물고 불붙였다. 창문이 닫혀 있는 거실에 연기가 금세 차올랐다.

“너, 평생 묶여 있고 싶어?”

손에 담배를 옮겨 쥔 다스가 물었다. 고개를 돌리고 빠르게 담배 연기를 내뱉고 다시 빨기를 반복하는 다스는 어딘가 조급해 보였다. 더위를 다 잃어 가면서도 밝기는 더럽게 밝은 여름 막바지의 햇빛 아래 그의 검은 머리칼이 갈색으로 드문드문 시들고 있었다.

“귤아, 내가 묻잖아. 평생 묶여서 지내고 싶어?”

그가 묻는데도 대답이 선뜻 나오질 않았다. 묶여 지내고 싶으냐고. 그래, 그래도 상관이 없을 것 같기도 하고….

툭, 하고 무언가 바닥으로 떨어져 눈길을 따라갔다. 담뱃재가 러그 위에 떨어져 있었다.

그가 내 다친 발을 끌고 갔다. 붕대가 감긴 내 발을 빤히 내려다보던 그가 주먹을 쥐고 위로 쳐들더니, 그대로 아래로 내리쳤다.

퍼억, 제법 큰 소리와 함께 둔한 통증이 발 위로 퍼졌다. 다 나은 줄 알았던 발에 익숙한 통증이 깨어났다. 그러나 통증과 별개로 머릿속은 여전히 뿌옇게 흐렸다.

“정신 안 차려?”

그가 다시 내 발을 내리쳤다. 이번에는 흐윽, 하고 신음이 터질 만큼 아팠다. 세 번째로 같은 곳을 내리쳤을 때에는 급기야 비명이 터졌다.

“아…!”

다스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내 발을 내리찍던 손을 뻗어 와 이번에는 내 뺨을 쳤다. 소파에 힘없이 기대어 있던 상체가 그대로 쓰러지자 머리채를 잡고 도로 일으켰다.

“정신, 안 차리냐고.”

아픈 것보다 그의 화를 풀어 줄 수 없단 사실이 더 괴로웠다. 똑바로 눈을 뜨고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말하고 싶은데 몸도 머리도 말을 듣질 않았다.

그가 다시 내 뺨을 때렸다. 짜악, 하는 소리와 함께 입 안에 피 맛이 돌았다.

“나 봐.”

그의 명령에도 내 시선은 멍하니 바닥을 향했다. 그리고 다시 한 대.

“왜 나를 안 봐, 귤아.”

얻어맞은 뺨이 몹시 아팠지만, 다스를 화나게 만든 나 자신은 더 싫었지만 나는 어디 갇히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쉰 그가 꽁초를 마룻바닥에다 아무렇게나 비벼 끄곤 담배 한 대를 더 물었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으며 내 앞에 앉았다.

“이젠 내 꼴도 보기 싫어? 쳐다도 보기 싫다, 이거야?”

물음이 외국어처럼 낯설었다. 그럴 리 없잖아. 내가 왜 네가 보기 싫어…. 몸만큼이나 둔한 시선을 움직여 그를 마주했다. 다스는 울고 있지 않았지만, 지난 새벽에 나를 보며 울던 때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한테 나밖에 없다면서. 그런데 왜 나를 안 봐.”

그러게…. 나한텐 다스밖에 없는데. 그런데 왜 이럴까. 무거운 입술을 겨우 달싹거려 입을 열었다.

“네가… 멀리 있는 것 같아.”

이렇게 코앞에 있는데, 내 앞에 있는데도 꼭 벽 너머에 있는 것 같아.

나도 내가 왜 이런지 알 수 없었다. 왜 이렇게 자꾸 우울하기만 하고 무기력한지, 왜 완벽해야 할 나날들이 이렇게 자꾸 망가지는지.

“그리고 나는 갇혀 있는 것 같아. 나갈 수가 없어.”

손으로 내 가슴을 가리켰다.

“다스야, 나는 여기서 나갈 수가… 없어.”

문이 있는 곳에 갇혀 있다면 문을 열고 나가면 될 텐데, 내 안에 내가 갇혀 있는 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가게 해 줘.”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홍다스의 좆집, 홍다스의 개새끼인 귤이로,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던 다스와의 평범한 생활로 돌아가고 싶었다.

다스가 가슴 위를 어설프게 가린 내 손을 가져갔다. 반지를 끼고 있는 손이었다. 담배를 한쪽 손에 든 그가 허리를 숙이더니 그대로 내 손등 위에 얼굴을 묻었다. 마치 손등에 입을 맞추는 듯한 동작이었다. 잘생긴 얼굴의 요철이 하나하나 느껴졌다.

“나오기 힘들면 나오지 마.”

그가 내 손등에 대고 말했다.

“네가 어디 있든 내가 따라 들어가면 되니까.”

그리고 뒤이은 말은 내 손등을 붙든 그대로 얼굴만 살짝 들고서 말했다.

멍청하고 멍하던 머릿속이 조금씩 맑아지는 게 느껴졌다. 그는 이토록 내게 기적만을 주는데, 나는 왜 아직도 이렇게 바보 같을까.

“…때려서… 미안.”

뒤이어 들리는 말은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미안’은 다스가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바보처럼 계속 멍하니 있는 내가 그에게 할 말이지.

조금 놀라서 얼굴을 빤히 마주 봤다. 내 시선을 슬쩍 피하는 다스의 뺨이 아주 조금 붉어진 건 착각일까.

둔한 몸을 끌어다 그의 품에 이마를 대었다. 다스가 나를 안아 주는 동안 나는 그의 등에 팔을 꽉 감았다. 놓지 않으려 꽉 쥔 손에 반지가 느껴졌다. 그것을 엄지로 문지르고 또 문지르며 몇 번이고 확인했다. 마치 그것이 나를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열쇠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

그날 저녁, 우리는 오랜만에 술을 마셨다. 처음엔 맥주로 시작했다가 기분이 좋아진 다스가 소주까지 꺼내서 신나게 섞어 마셨다.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눈앞이 핑핑 돌았다. 하도 오랜만이라 그런지 금방 취했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앉은 채로 상체를 좌우로 흔들흔들 기울였다. 맞은편에 앉은 다스가 그때마다 함께 흔들흔들 기우는 듯했다.

다스는 휴대폰으로 음악을 틀었다. 꼭 비싼 와인 바 같은 데에서나 틀어 줄 법한 음악이었다. 이게 뭐더라, 스윙… 이라고 하는 음악이었던가.

“일어나. 춤추자.”

“뭐?”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다스가 나를 안아 일으켰다. 휘청거리는 나를 안고서 곧장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쏘맥을 말아 먹다가 스윙에 맞춰서 춤을 추는 상황이 너무 웃겨서 나는 그에게 안긴 채로 낄낄거리며 웃었다. 다스도 함께 웃었다.

그는 취해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나를 이리저리 이끌면서 한참 거실을 헤집더니 단번에 번쩍 안아 들어 소파까지 데려다주었다.

소파에 엎드린 나는 졸음을 깨기 위해 테이블 아래 놓인 잡지 책을 집어 들었다. 당연히 다스는 잡지 같은 걸 안 읽고, 음식 해 주시는 분이 며칠 전에 잊고 놔두고 간 것이라고 했다.

다스는 애들이랑 문자를 하는지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나는 아무렇게나 휙휙 책장을 넘겼다. 의미 없이 넘기던 손길이 어느 페이지에서 멈췄다.

연극 ‘천국과의 경계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