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우 속으로 (6/22)

꿈도 없이 긴 잠을 잤다. 눈을 뜨자마자 다스의 모습이 보여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다스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게 노래를 불렀다.

가사도 음계도 낯선 노래지만, 그의 낮은 음색으로 듣기에 무척 달았다. 졸린 눈을 끔벅거리다가 하마터면 그의 노래와 함께 다시 잠들 뻔했다. 다스의 손바닥에 뺨을 비비며 졸음을 쫓으려 애썼다.

“일어나서 밥 먹자.”

그가 내 상체를 안아 일으켜 주었다. 좀 더 칭얼거리고 싶은 마음과 괜히 귀찮게 했다가 미움을 살까 겁내는 마음이 뒤엉켰다.

나를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히고 다친 발밑에다 베개를 받쳐 준 뒤 밖으로 나간 다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트레이에 밥과 국, 밑반찬을 들고 왔다. 일부러 사람을 고용해서 냉장고를 제대로 된 음식으로 꽉꽉 채워 놓았다는 다스의 말에 좀 놀랐다.

“갑자기 왜? 너 밥해 먹는 거 귀찮아하잖아.”

“이제 나갈 일도 없는데, 집에만 있으면 제대로 먹어야지.”

하긴, 애들하고 놀러 다니다가 식당에서 끼니를 때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 하지만 발을 못 쓰는 나는 몰라도 다스는 계속 애들하고 놀 텐데. 클럽도 계속 관리해야 할 테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백용태랑은 어떻게 됐지…. 그 새끼가 다스에게 빚을 지웠단 사실이 떠올라 새삼 화가 났다.

“저… 다스야.”

“‘저’ 빼고 불러.”

“백용태하고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거야?”

최대한 조심스레 물었는데도 아니나 다를까 그의 얼굴이 좀 험악해졌다.

“나도 알아야지. 나… 때문에 그런 건데….”

얼른 덧붙였다. 백용태가 나를 달라며 다스를 괴롭힐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가 뭐라고. 그리고 다스가 나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렇게까지 할 줄은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상관하지 말라거나 내 알 바 아니라며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다행히도 다스는 표정을 풀었다.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 넘겨 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탁 트인 시야가 아직도 어색했다.

“넌 그런 거 걱정하지 말고, 생각도 하지 말고, 그냥 내가 시키는 것만 하면 돼.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그래도 내 일인데 내가 알아야 하지 않나…. 나는 다스가 다치는 게 싫었다. 다스가 왜 나를 위해 그렇게까지 위험을 무릅쓰는지도 알 수 없어 갑갑했다. 하지만 더 묻지 않고 얌전히 수저를 들었다.

미움을 샀다간 그가 당장 백용태에게 나를 줘 버리겠지. 그러므로 참아야 했다. 어떻게든 그의 착한 귤이 되어야 했다.

***

장마라고 했다. 비가 어마어마하게 쏟아졌다. 발등이 깨지고 나흘 지나서 그 의사 선생님인지 누구인지 모를 남자가 와서 깁스를 바꾸고 소독도 해주었다. 가운도 안 입고 돌팔이 같아 보이는데 다스는 그 선생님을 믿는 모양이었다. 사실 나한테 주사를 놔 주고 깁스를 바꾸는 동작이 능숙해 보이긴 했다. 그래서 나도 믿기로 했다.

어찌 된 건지 발은 갈수록 더 아팠다. 원래 골절상이 그렇다고 했다. 하지만 어떤 날은 지독하게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다. 아픈 티를 내면 다스가 걱정스럽다는 투로 미간을 슬쩍 구기곤 했다. 그 구겨지는 얼굴이 섹시해서 고통을 잠깐 잊을 수 있었다.

다친 지 일주일 되는 날, 다스는 나를 안아 들고 욕실로 가서 직접 머리를 감겨 주었다. 내가 혼자 할 수 있다고 우겨도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솔직히 다스의 병 수발을 받는 게 좋았다. 바닥에 앉아 욕조에 머리를 기대게 하고 물을 흘려 주는 그 손길이 너무너무 좋아서 그가 내 발등을 또 깨부숴 주었으면 싶을 정도였다. 두 발이 다 부서지면 다스가 두 배로 다정해지지 않을까.

“눈 감아. 샴푸 들어간다.”

눈을 감고 있자니 머리칼에 복작복작 감기는 거품 소리가 들렸다. 다스의 체온도 느껴졌다. 그의 티셔츠 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머리칼 사이로 파고드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읽었다. 두피를 가볍게 누르며 문지르는 힘에 신음이 나올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내 머리를 감겨 주는 다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해 살며시 눈을 떠 보았다. 제법 진중한 얼굴을 한 그가 내 머리를 감기다가 시선을 주었다.

“눈 감으라니까.”

그리고 내 코에다 거품을 한 덩이 콕, 얹었다. 킥킥거리며 묻은 거품을 닦아 냈다.

다스는 능숙하게 내 머리를 감겨 주고, 닦아 주고, 드라이기로 말려 주기까지 했다. 나는 그 황송한 수발을 얌전히 받으면서 계속 다스의 티셔츠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집에 있을 때 다스는 점퍼를 입고 있지 않았다. 커다란 프린팅이 된 티셔츠를 주로 입었는데 어깨가 유독 넓은 다스에게 잘 어울렸다.

‘왜 이렇게 나한테 잘해 줘?’

물음이 턱 끝까지 올라왔다. 다스는 내가 허튼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내게 잘해 준다고 했지만, 이러다가 그가 내게 질릴까 겁이 났다.

다스는 침대에 누운 내게 태블릿 PC를 안겨 주곤 옆에 앉아 강태와 통화를 했다. 나는 이어폰을 끼고 태블릿 PC에서 스트리밍 서비스 앱을 선택했다.

별생각 없이 메뉴를 쭉쭉 내리다가 문득 ‘라이브 공연’ 탭에서 뚝 멈췄다. 유명한 연극이나 뮤지컬이 여러 작품 있었다.

썸네일 속 배우들을 보자마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막혔던 피가 도는 듯이, 아주 느리게 감각이 돌아왔다. 깁스 속의 발이 찌릿찌릿하게 아팠다.

당장 감상하고 싶었지만 다스의 눈치가 보였다. 연극을 하겠다며 나대다가 발등까지 깨져 누워 있는데 또 연극을 보고 있으면 그건 미친놈이지.

‘그래도 보고 싶은데….’

손가락이 썸네일 앞을 헤매는데 다스가 전화를 끊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화면을 위로 올렸다.

그가 테이블 위에 놓인 물컵에 물을 따랐다. 다행히도 의심하는 기색은 없어 보였다. 쿵쿵 뛰는 가슴을 숨기려 이불을 코 아래까지 덮은 뒤 아무렇지 않은 척 스트리밍 서비스 앱을 끄고 게임을 켰다. 다스가 내게 물컵을 불쑥 내밀었을 땐 놀라서 정말로 심장을 뱉을 뻔했다.

“약 먹자.”

“또 먹어?”

짐짓 아무렇지 않은 양 물으며 그가 내민 알약을 받아 들었다. 다스는 이게 나를 낫게 해 주는 약이라고 했는데, 이상하게 먹기가 싫었다. 그래도 꾹 참고 삼켰다. 그의 병 수발이 즐거워서, 그래서 낫기 싫어서 먹기가 싫은가.

“착하네.”

하지만 내게 착하다고 해 주는 다스의 미소를 보는 일 역시 끝내주게 즐거웠다.

문득 손끝이 가시가 박힌 것처럼 따끔따끔했다. 확인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

나는 거의 하루 종일 잠만 잤다. 아무래도 약이 독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약을 먹어도 깁스한 발은 여전히 아팠다. 그 통증이 사실은 좀 달가웠다. 다스가 알면 뭘 잘했다고 좋냐고 핀잔을 줄 테지만 이거 때문에 다스가 나를 보살피니까.

그러나 상처는 내게 불안감도 함께 주었다. 병 수발이 오래가면 분명히 그는 질릴 것이다. 그래서 나는 빨리 낫고 싶지 않은 동시에 빨리 낫고 싶었다.

쏟아지는 비를 보고 있자니 어쩔 수 없이 호프집에 숨겨 둔 대본이 떠올랐다. 안 그래도 비가 많이 오면 젖을까 싶어서 매번 비닐 봉투에 꽁꽁 싸매 두기는 했었다. 지대가 좀 높은 곳이고 비가 쉽게 들이칠 만한 곳은 아니라서 푹 젖을 일은 없으리라 믿었는데, 장마까지는 미처 생각 못 했다.

‘괜찮겠지…?’

이제 연극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왜 대본이 신경 쓰이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사라고에 가지도 못하고, 연극 연습은커녕 공연 영상을 보는 일도 다스의 눈치를 봐야 하는데, 왜 자꾸 그곳에 숨겨 둔 대본이 떠오를까.

생각하지 말자. 스스로를 꾸짖으며 애써 게임이나 만화책 따위에 집중하려 애썼지만, 내 머릿속에는 아직도 남자 1의 대사가 새긴 듯 박혀 있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해. 우리 꿈은 그렇게 쉽게 부서지지 않아. 남자 1은 우희를 바라본다. 그리고 객석을 바라본다. 우리가 떨어져 있다고 해도 꿈은 흩어지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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