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새로운 시작
한편 데이트고 뭐고 서둘러 혜윤과 함께 집으로 향하는 필립의 얼굴은 어둡게 변해갔다. 혜윤보다도 더 혜원을 걱정하며 전전긍긍하던 필립은 급기야 그를 혼자 두고 영화를 보러 나온 제 잘못이라며 자책까지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옆에서 혜윤이 달래고 진정을 시켜도 좀처럼 필립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때마침 울리는 혜윤의 휴대폰. 필립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의 휴대폰을 쳐다봤다. 발신자는 윤결이었다.
갑작스러운 윤결의 전화에 혜윤이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윤결의 목소리는 어딘가 모르게 다급하고 초조해 보이기까지 했다.
“윤결 씨. 무슨 일 있어요?”
[나 지금 공항이야. 조금 있으면 집에 도착할 거야. 혜원이는? 혜원이 왜 전화 안 받아? 혹시 같이 있어?]
“아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당신이 지금 미국에 왔다고요?”
[혜원이 어디 있냐고!]
“나도 집으로 가는 중이에요. 혜원이도 아마 지금쯤 집으로 오고 있겠죠.”
[그런데 왜 전화를 안 받아? 대체 이 시간까지 혜원이가 왜 혼자 밖에 있는 건데? 아니 그보다 연락이 왜 안 되는 건데?]
“하아…. 사정이 좀 있었어요. 우선 집에 가서 봐요.”
[10분이면 도착해.]
“알겠어요.”
제대로 흥분한 윤결을 보니 이번에도 또 혜원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혜윤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윤결도 그렇고 필립도 그렇고, 혜윤은 마치 혜원을 초등학생 소년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품에서 끼고 돌려고 하는 이 두 남정네들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물론 혜원이 손이 많이 가는 건 사실이었지만, 어째 이 남자들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더 혜원을 어린애 취급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다.
밤새 비행기를 타고 와 피곤할 법도 한데 윤결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곧장 혜원의 집으로 향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엔 연락이 되지 않는 혜원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안 그래도 지난번 필립의 심상치 않은 문자 때문에 불안해 죽겠는데 이렇게 연락까지 되지 않자 그의 인내심은 이미 바닥이 나 버렸다.
집 가까이에 다다르자 멀리서 누군가에게 기댄 채 차에서 내리는 혜원을 발견한 윤결은 쏜살같이 차에서 내려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갔다.
“강혜원!”
어디선가 들려오는 윤결의 목소리에 몸을 휘청이던 혜원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정신이었지만 혜원은 단번에 그가 윤결임을 알아차렸다.
“… 윤결… 형??”
동시에 에이든 또한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윤결을 바라봤다. 윤결의 눈에서 풍겨오는 살기 어린 눈빛에 에이든은 그가 바로 혜원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사람임을 알아챘다.
“너 이 새끼 혜원이한테서 손 떼!”
헐레벌떡 달려온 윤결은 다짜고짜 에이든의 손을 거칠게 내려치며 소리쳤다. 앞뒤 사정 따질 것 없이 혜원이 낯선 남자에게 안겨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윤결이 이성을 잃기 충분한 상황이었다.
“하아…. 진짜. 술 취한 녀석 안전하게 집으로 데리고 와준 사람한테 이거 너무 한 거 아닌가요?”
“뭐라고? 이게 진짜!”
“고맙다고 절을 해도 모자랄 판에 대체 제가 뭘 잘못했다고 보자마자 소리를 지르십니까?”
윤결은 도리어 큰소리를 치는 에이든의 당당한 말투와 눈빛에 손을 부들부들 떨며 그를 노려봤다. 혜원을 가운데 두고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는 윤결과 에이든. 두 사람 모두 전혀 물러설 기색이 없어 보였다.
순간 둘의 숨 막히는 긴장감을 깨고 혜원이 살며시 손을 뻗어 윤결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윤결 형이다… 진짜 우리 윤결 형이다.”
아련한 얼굴로 눈물을 글썽이는 혜원의 투명한 눈빛에 윤결의 마음이 눈 녹듯 녹아내렸다.
기다렸다는 듯 그대로 윤결의 품에 안긴 혜원. 더 이상 윤결에겐 화를 낼 이유도, 질투를 느낄 필요도 없었다.
윤결은 알 수 있었다. 혜원의 눈에는 오직 자신만이 들어있다는 것을.
이 둘의 애틋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에이든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팔짱을 끼며 그들을 바라봤다. 윤결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너무도 행복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혜원을 보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시작도 못 하고 접어야 하는 마음이 쓰리긴 했지만, 이 녀석의 행복을 빌어주기로 마음먹은 이상 이것 또한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보호자에게 안전하게 넘겨 드렸으니 전 이만 갑니다. 그리고 혜원 씨. 앞으로는 제 앞에서 애인 보고 싶다고 울지 마세요. 아무리 저라도 참기 힘드니까요.”
“어? 사, 사장님….”
그제야 자신을 집까지 데려다준 사람이 에이든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혜원이 재빨리 윤결의 품을 벗어나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혜원은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에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에이든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혜원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애인이 남자인 줄 알았다면, 저도 노려볼 걸 그랬네요. 강혜원 씨. 언제라도 애인이 울리면 저한테 오세요.”
“네, 네??”
그러자 윤결은 마치 못 들을 걸 들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는 혜원을 재빨리 자신의 품에 가두며 에이든을 향해 소리쳤다.
“그런 헛소리 지껄일 시간에 가서 애인이나 만들든가. 우리 혜원이는 울어도 내 곁에서만 울 테니까. 너 같은 녀석은 감히 상상도 못 할 만큼 야하게 말이야.”
가소롭다는 듯 입꼬리를 올려 능글맞게 웃는 윤결의 모습에 기가 찬 에이든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더욱 혜원 씨를 데리고 오고 싶네요. 혜원 씨, 잘 생각해봐요.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까. 먼저 갈게요. 내일 카페에서 봐요.”
“저 새끼가 끝까지!”
“아, 안녕히 가세요. 감사합니다. 나중에 카페에서 봬요!”
혜원은 또다시 발끈하는 윤결을 온몸으로 말리며 멀어져가는 에이든을 향해 소리쳤다.
“또 보긴 뭘 또 봐!”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윤결이 씩씩거리자 혜원이 그의 허리를 살며시 감싸며 울먹였다.
“보고 싶었어….”
혜원에게만큼은 한없이 약한 윤결은 자신의 허리를 감싼 혜원의 손위에 제 손을 가지런히 올리며 말했다.
“나도 너무 보고 싶었어. 혜원아. 그리고 너무 늦게 데리러 와서 미안해.”
혜원은 고개를 마구 저으며 그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이렇게 와준 것만으로도 말할 수 없을 만큼 고마웠고 행복했다.
윤결은 조심스럽게 혜원을 자신의 허리에서 떼어낸 뒤 한쪽 무릎을 굽히며 그의 앞에 내려앉았다.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보니 가슴 한쪽이 찌릿하게 아파져 왔지만, 윤결은 끝까지 혜원이 자신을 믿고 기다려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미안해. 다시 만나면 프러포즈를 할 거라고 했는데, 너무 급하게 오느라 반지를 준비하지 못했어.”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네가 내 것이라는 표시를 난 꼭 해야겠으니까. 그래야 저런 날파리 같은 자식들이 안 꼬이지. 혜원아, 난 네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질투가 나고 화가 나.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이기적인 놈이라는 것도 잘 아는데, 그래도 난 네가 무조건 나만 바라봤으면 좋겠어.”
윤결이 혜원의 작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혜원은 작게 웃으며 윤결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순간 가늘고 딱딱한 무언가가 윤결의 손끝에 닿았다. 깜짝 놀란 윤결이 고개를 들어 혜원을 바라봤다.
그제야 혜원이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꺼내 그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다른 반지는 필요 없어. 나에겐 이 반지가 세상 그 어떤 반지보다도 소중하고 귀하니까. 형에게 처음 받은 반지니까.”
“혜, 혜원아!”
윤결은 설마 혜원이 이 반지를 간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너무도 큰 아픔과 상처를 줬기에 차마 혜원에게 반지까지 가지고 있어 달라 말하지 못했고, 그가 버린다 한들 그를 말릴 자격 또한 없었다. 하지만 혜원은 윤결이 준 반지를 남몰래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었고, 그것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또 한 번 그가 혜원에게 반하는 순간이었다.
“혜원아, 나랑 결혼해 줄래?”
혜원의 깜짝 고백에 감동한 윤결이 그를 번쩍 안아 들며 소리쳤다.
윤결의 대범하고도 열정적인 프러포즈에 길을 지나던 사람들의 함성과 기립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순간 그들의 뜨거운 시선이 부끄러워진 혜원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버리자, 윤결이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외쳤다.
“나랑 결혼하자 강혜원! 결혼한다고 할 때까지 이 앞에서 소리칠 거다!”
“아 정말!! 형. 그, 그만. 알았어. 알았으니까 좀 조용히 해!”
가뜩이나 창피해 죽겠는데 이대로 두었다간 정말로 밤새도록 소리를 지를 것만 같아, 혜원은 재빨리 손을 뻗어 그의 입술을 막으며 말했다.
“아주 동네방네 소문을 내지 그래?”
그때였다. 데이트 도중 필립의 부탁으로 모든 것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온 혜윤이 윤결의 품에 안겨 버둥거리는 혜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강혜윤. 너 혜원이를 너무 방치하는 거 아니야? 대체 둘이 어디를 다녀오는 거야 혜원이 혼자 두고?”
윤결이 그녀의 손을 걷어내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다섯 살 먹은 꼬마도 아니고, 하루 정도는 혼자 있을 수도 있지 뭐가 그리 걱정이 돼서 여기까지 날아왔대요?”
“뭐? 너 조금 전까지 혜원이 어떤 자식이랑 있었는지 알기나 해?”
“이렇게 멀쩡히 잘 있는 거 보니, 굉장히 괜찮은 자식이랑 같이 있었나 보네. 나는 지금 데이트까지 포기하고 달려왔거든요? 당신 애인 당신이 잘 지키든가!”
“야, 혜원이 네 동생 아니야?”
“나 원래 동생 강하게 키우는데?”
“됐다.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겠냐….”
또박또박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드는 혜윤에게 질렸다는 듯 윤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찼다.
물론 혜윤 역시 말은 이렇게 했으나 동생 혜원을 걱정하는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온 건 마찬가지였다. 만났다 하면 티격태격 싸움부터 하고 보는 둘의 성격을 모르지 않은 필립이 슬쩍 혜윤을 제 곁으로 데리고 오며 말했다.
“혜윤아. 우리 아직 저녁 못 먹었는데…. 저, 저녁 먹으러 갈까?”
혜원도 무사하고 윤결까지 그의 곁에 있는 걸 보니 그제야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는지, 필립이 배시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아…. 뭐 그러든가. 야, 강혜원. 너 때문에 다들 밥도 못 먹고 이게 뭐야! 너 진짜 집에 가서 아주 눈물 쏙 빠지게 혼날 줄 알아!”
혜윤은 윤결의 품에 아예 얼굴을 파묻은 채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혜원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혜원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힐끔 윤결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너무도 다정한 얼굴로 웃고 있는 윤결의 얼굴에 마음이 놓인 혜원이 슬그머니 그의 품에서 기어 내려오려 하자, 윤결이 그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그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깜짝 놀란 혜원이 몸을 버둥거리자 윤결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방금 못 들었어? 지금 집에 들어가면 혜윤이가 아주 널 잡아먹을 것 같은데…. 나랑 있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
“어, 어?”
전혀 자신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윤결의 모습에 혜원이 당황해하며 얼굴을 붉혔다.
“진짜 가지가지 하십니다. 강혜원, 넌 나중에 보자. 더 이상 보고 있다가는 내 눈이 썩을 것 같아서 이만 빠져줄게. 그리고 한윤결 씨, 그렇게 혜원이가 걱정되면 이제 그만 끼고 살든가. 주위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초특급 독설을 퍼부은 혜윤은 윤결과 자신의 눈치를 보며 난감해하는 필립의 손을 잡고 차로 향했다. 물론 그녀의 속 깊은 마음을 모르지 않는 윤결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싸우면서 정든다 했던가? 이젠 혜윤의 저런 독설에도 그녀의 따뜻한 진심이 느껴질 만큼 둘의 우정은 돈독해져 있었다.
오랜만에 재회한 둘을 위해 자리를 피해 주는 혜윤. 뒤돌아 멀어지는 그녀의 얼굴엔 어느새 환한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필립과 혜윤이 둘만의 데이트를 계속하기 위해 자리를 뜨자, 그제야 윤결이 혜원을 품에서 놓아주며 말했다.
“형이랑 같이 살래?”
“…….”
하지만 혜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 당당히 그의 옆에 있고 싶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었다.
“아니면, 내가 혜원이랑 같이 살까?”
윤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땅만 내려다보는 혜원의 작고 동그란 머리에 입맞춤을 하며 말했다.
언제나 냉철하고 화를 잘 내지 않던 그의 성격이 이렇게 변하게 된 것 또한 혜원의 영향이 가장 컸다. 윤결은 자꾸만 변하는 자신이 무서웠다. 혜원이 곁에 없으면 마치 엄마 잃은 소년이라도 된 것처럼 불안했고, 그를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은 그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윤결은 이제 혜원 없이는 단 하루로 살 수 없을 만큼 절박하게 그가 필요했다.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이젠 혜원을 더는 혼자 둘 수 없었다.
“난 혜원이가 곁에 있어야만 온전한 내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없는 나는 절대 완벽할 수가 없어. 그러니까 혜원아, 나랑 같이 있어 주라. 내가 잘할게. 내가 앞으로 더 잘할게. 혜원아.”
“내가 뭐라고…. 대체 내가 뭐라고 형이 이렇게까지 해….”
결국, 마음이 약해진 혜원은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혜원이라고 왜 같이 있고 싶지 않을까. 윤결 없인 하루도 더 버티기 힘든 혜원의 여린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너니까.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내 사람, 내 연인, 내 사랑 강혜원이니까. 우리 결혼하자 혜원아.”
“… 바보. 나중에 후회해도 몰라.”
“설마…. 내가 후회할 일은 죽어도 없을 거야.”
“이젠 내가 형 안 놓아줄 거야.”
“그래 주면 더 고맙고.”
“… 사랑해.”
“나도. 나도 우리 혜원이 너무 사랑해.”
윤결은 천천히 얼굴을 내려 눈물에 젖은 혜원의 입술에 진한 키스를 했다. 오랜만에 하는 둘의 입맞춤은 애틋하고 애절했다. 서로의 혀를 휘감으며 열정적인 키스가 이어졌다. 숨 막힐 듯 흥분되는 뜨거운 분위기에 혜원이 작게 신음을 터트렸다.
“하읏!”
여전히 키스를 할 때마다 숨을 참는 혜원의 서툰 모습에 윤결은 웃음이 났다. 윤결은 이대로 끝까지 밀어 붙여버리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으며 혜원의 도톰한 입술을 살짝 베어 물었다. 살며시 벌어진 입술 사이도 혜원의 뜨거운 입김이 새어 나왔다.
마치 계속해달라고 조르는 듯 혜원의 혀가 닿을 듯 말 듯 윤결의 입술을 건드리자, 윤결이 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콩 내리박으며 말했다.
“그래서, 신혼집은 어디서 시작했으면 좋겠어?”
“어? 시, 신혼집?”
신혼이라는 말조차 어색한 혜원이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네가 원한다면 한국이든 미국이든 난 상관없어.”
“하지만 부모님은….”
여전히 양가 부모님의 반대가 마음에 걸린 혜원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다 알아서 할게. 혜원아. 이젠 속이지 않을 거야. 당당하게 밝히고 허락해 주실 때까지 행복하게 사는 모습 보여드리면 되는 거야. 우린 잘못한 게 없잖아?”
“그, 그래도….”
자신은 그렇다 치더라도 많은 것을 잃고 포기해야 하는 윤결을 생각하니 혜원은 아직도 두렵기만 했다.
“이래 봬도 형 능력 있어. 다행히 지금 진행하는 일이 잘 돼서 협력 제의도 많이 들어오고 있고, 우리 혜원이 먹여 살릴 능력쯤은 얼마든지 된다고. 그러니까 넌 아무 걱정 하지 말고 지금처럼 네가 하고 싶은 것에만 집중하면 돼. 물론 내 곁에서.”
윤결은 혜원의 코를 잡아 살짝 비틀며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동시에 이렇게 겁많은 녀석을 너무 오래 혼자 두었다는 생각에 이젠 슬슬 그를 제 곁으로 데리고 와야겠다 다짐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사는 곳은 어디든 상관없었다. 혜원이가 좋다면, 혜원이만 행복하다면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혜원의 손을 꽉 잡으며 집으로 들어온 윤결은 그제야 피곤함이 밀려왔는지 소파에 내려앉으며 혜원을 제 무릎 위에 올려 앉혔다.
“형, 피곤하지? 내가 목욕물 받아줄까?”
“아니. 조금만 더 이렇게 있자.”
“나 무거운데….”
“이렇게 널 안고 있어야 마음이 놓여. 잠시라도 내가 놓아주면 어김없이 다른 남자를 끌어들이는 통에 내가 얼마나 불안한지 알아?”
윤결은 행여나 그의 휴식에 방해될까 싶어 몸을 꼼지락거리던 혜원의 목덜미에 지친 얼굴을 내려놓으며 작게 속삭였다. 그러자 혜원이 떨리는 손끝으로 윤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미안해. 이제 걱정 끼치지 않을게. 다른 사람한테 눈길도 안 주고 형만 바라보면서 그렇게 지낼게. 사랑해 형.”
윤결은 눈물이 날 뻔한 걸 꾹 참았다. 언제 이렇게 의젓한 녀석이 된 건지, 이젠 사랑한다는 말도 곧잘 해주는 혜원이 너무도 기특했다.
“우리 혜원이 나 없는 사이에 너무 야해졌는걸?”
“어?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잔잔히 무르익어 가던 분위기를 깨며 윤결이 짓궂은 목소리로 묻자 깜짝 놀란 혜원이 고개를 번쩍 들며 소리쳤다.
“여기 봐봐. 자꾸 네가 엉덩이를 치대면서 무슨 짓을 했는지.”
순간 혜원은 자신의 엉덩이 사이로 딱딱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혜원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다.
“자, 잠깐만!!”
“잠깐은 무슨. 설마 날 이렇게 만들어 놓고 혼자만 도망갈 생각은 아니지?”
갑자기 능글맞은 눈빛으로 자신의 몸을 결박하며 윤결이 놓아주지 않자, 위험을 감지한 혜원이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버둥거렸다. 하지만 마치 뱀이 먹이를 발견하고 똬리를 튼 것처럼 혜원의 허리를 두 다리로 단단히 옮아 맨 윤결은 그를 자신의 품 안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점점 더 단단히 발기하기 시작한 윤결의 성기에 잔뜩 겁을 먹은 혜원이 엉덩이를 들었다 올리며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서툰 움직임은 더욱 윤결을 흥분하게 했고, 그런 혜원의 귀여운 움직임에 윤결이 그만 참지 못하고 그를 번쩍 들어 소파 위로 돌려 눕히며 말했다.
“그렇게 엉덩이를 흔드는 건 누구한테 배웠을까? 난 가르쳐 준 적 없는 것 같은데.”
“무,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형, 피, 피곤하지 않아? 샤워, 샤워해야지!”
“그래?”
“응!! 샤워!”
“그럼 그러지 뭐.”
입가에 묘한 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킨 윤결은 대뜸 혜원을 들어 자신의 어깨에 둘러멨다.
“악! 내려놔. 뭐 하는 거야!”
그러자 거센 혜원의 발버둥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윤결은 욕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며 말했다.
“화장실에서 하면 소리가 더 야하게 들리는 거 알면서 부추긴 거지? 이젠 봐주는 거 없다 강혜원. 네가 먼저 시작한 거니까.”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내려놔. 빨리 내려놔!”
윤결의 어깨를 마구 내리치며 반항하는 혜원의 간절한 외침에도 윤결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윤결은 사랑스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혜원의 작은 엉덩이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자꾸 반항하면 이따가 여기 아프게 할지도 몰라.”
혜원으로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지만, 그래도 윤결이 이렇게나 자신을 원한다는 생각에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아프게 하면, 진짜 미워할 거야.”
삐친 듯 뿌루퉁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혜원의 말에 윤결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러니 천하의 윤결이 혜원의 매력에 푹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수밖에….
**
욕실로 들어온 윤결은 조심스럽게 혜원을 욕조 안에 내려놓았다. 여전히 혜원은 부끄러운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도망칠 궁리를 했다. 눈에 뻔히 보이는 순진한 행동에 윤결은 행여나 혜원이 도망가지 못하게 재빨리 그의 옷들을 하나둘씩 벗겨내기 시작했다.
“내, 내가 할게! 내가 한다고.”
순식간에 상의가 벗겨지며 옷가지들이 욕조 밖으로 내동댕이쳐지자 화들짝 놀란 혜원이 마지막 자존심인 바지를 꽉 움켜쥐며 소리쳤다. 윤결은 알겠다는 듯 웃으며 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주었다.
힐끔힐끔 윤결의 눈치를 보던 혜원은 재빨리 뒤를 돌아 천천히 바지를 벗었다. 어느덧 브리프만 입고 있는 상황. 혜원은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보려 발을 동동 굴렀으나 더는 참고 기다려줄 윤결이 아니었다.
“아니, 어차피 벗고 같이 샤워할 건데 대체 뭐가 그렇게 부끄럽다고 등을 돌리고 서 있는 거야? 이미 볼 것 못 볼 것 다 본 사이에.”
“아니 난 그냥 마음의 준비를….”
“샤워를 하는 데 마음의 준비까지 해야 해? 엉큼해졌는걸?”
혜원 놀리기에 맛 들인 윤결이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그게 아니고!! 아, 몰라. 나가! 나 혼자 샤워할 거야!”
혼자만 옷을 홀딱 벗고 있는 것도 부끄러워 죽겠는데 윤결이 자꾸만 놀려대자 발끈한 혜원이 그를 욕조 밖으로 밀어내며 소리쳤다.
“알았어. 안 그럴게. 화 풀어. 어떡하면 우리 혜원이가 날 용서해줄까? 하라는 거 다 할게. 응? 말만 해.”
새침하게 돌아선 혜원의 기분을 풀어주려 윤결이 살며시 그의 등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 그러자 혜원 또한 못 이기는 척 그의 사과를 받아주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에 맞닿은 그의 넓은 가슴에 혜원의 심장이 쿵쿵거렸다. 혜원은 살며시 뒤를 돌아 뭐든 다 들어 줄 듯 다정한 목소리로 묻는 윤결의 목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정말 내가 말하면 다 들어 줄 거야?”
“당연하지.”
윤결은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달달한 눈빛으로 혜원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그럼 형도 옷 벗어. 그래야 공평하지.”
“뭐? 뭘 하라고??”
생각지도 못한 깜찍한 혜원의 요구에 윤결이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옷…. 벗으라고.”
혜원은 혹시나 윤결의 기분이 상했을까 봐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살폈다. 잠시 넋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윤결은 대뜸 혜원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그럼 네가 벗겨주든가. 그래야 네 말처럼 공.평.하.지. 않겠어?”
“내가?”
옷을 벗으라고 말한 것도 그냥 오기로, 윤결을 골탕 먹이려 내뱉은 말인데 이렇게 역으로 치고 들어오니 혜원은 순간 당황했다. 쿵쿵거리는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오진 않을까 걱정이 될 만큼 혜원의 심장이 빠르게 날뛰었다. 하지만 동시에 윤결의 가슴에 올려진 손에서 전달되는 그의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지자, 혜원은 용기를 내어 그의 상의를 들쳐 올리며 말했다.
“내, 내가 하라면 못할 줄 알고?”
“우리 혜원이 나 없는 사이에 진짜 많이 컸네. 하마터면 이런 귀여운 혜원이 모습을 놓칠 뻔했네.”
윤결은 벗긴 자신의 상의를 손에 들고 뺨을 붉히고 선 혜원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혜원은 다시 천천히 손을 움직여 윤결의 버클을 풀고는 바지를 벗겨 내렸다. 그러자 브리프를 뚫고 나올 기세로 부풀어 있는 윤결의 성기를 마주하고 만 혜원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했다. 아무래도 그를 잘못 자극했다는 생각에 후회가 밀려오고 있었다.
혜원이 주춤거리며 망설이는 사이 윤결은 재빨리 자신의 속옷을 벗어버리고는 혜원의 마지막 남은 브리프를 벗겨버리며 그를 뒤돌려 세웠다.
“혀, 형! 잠깐만 아직…!”
겁먹은 혜원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명을 내질렀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저렇게 큰 성기가 안으로 들어온다고 생각을 하니 눈물부터 차올랐다. 하지만 윤결은 오히려 부드럽게 그의 허벅지 사이에 자신의 성기를 밀어 넣으며 말했다.
“아직은 우리 혜원이 아프게 할 생각 없어. 다만 멋대로 흥분한 이놈은 진정시켜야 할 것 같아서. 미안. 빨리 한 발만 먼저 뺄게.”
다리가 벌어지지 않게 단단히 혜원의 엉덩이를 붙잡은 윤결이 천천히 자신의 골반을 앞뒤로 흔들었다.
순간 반동을 버티지 못한 혜원이 다리에 힘이 빠지며 앞으로 넘어지려 하자, 윤결이 재빨리 그의 가슴을 끌어안으며 목덜미를 강하게 깨물었다.
“하읏!”
신음 섞인 야릇한 혜원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느덧 뜨거운 입김을 쏟아내며 숨을 헐떡이는 혜원의 귓가에 대고 윤결이 속삭였다.
“아프게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미안하지만 그 약속 못 지킬 것 같아.”
“하아…. 하아…. 지킬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어.”
암묵적인 혜원의 허락이 떨어지자 윤결은 뒤돌아선 그를 자신을 향해 돌려세우며 번쩍 안아 들었다. 혜원 또한 윤결의 허리에 두 다리를 휘감으며 떨어지지 않으려 매달렸다.
마음이 급해진 윤결은 손에 잡히는 대로 샤워 젤을 꺼내 들며 손을 적셨다. 한 개, 두 개 윤결의 손가락이 혜원의 엉덩이를 헤집고 들어가자 혜원이 고개를 격하게 뒤로 젖히며 아파했다.
“하앗. 아, 아파.”
손가락이 잘려 나갈 듯 강하게 엉덩이를 조이는 혜원. 윤결은 더욱 깊숙이 혜원의 안을 파고들며 그를 자극했다. 질척이는 샤워 젤의 마찰음과 혜원의 야릇한 신음이 욕실 안에 울려 퍼졌다.
어느 정도 무르익었다 생각한 윤결은 혜원의 엉덩이를 헤집던 손가락을 빼내고는 재빨리 자신의 성기를 집어넣었다.
“아앗! 그, 그렇게 갑자기! 아파… 하읏. 자, 잠깐만!”
단번에 그것도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든 윤결의 성기에 혜원은 고통에 찬 신음을 삼키며 그의 목덜미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 퍽!퍽!퍽!
윤결의 거친 허리 짓이 시작됐다. 대체 어디까지 들어오려는 건지 윤결의 성기는 혜원의 아랫배를 가득 채우고도 더 올라가지 못해 안달이 난 듯 거침없이 쑤셔댔다.
“혜원아, 너 진짜 작정했어? 대체 어디까지 넣어줘야 만족하는 거야?”
“하앗… 제발 천천히, 아파… 배, 배가 터질 것 같아.”
말 한마디 내뱉는 것조차 힘겨울 만큼, 혜원은 윤결의 성기를 버거워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멈추는 건 싫었다. 윤결과 이어진 이 황홀한 느낌을 계속 느끼고 싶었고, 아프지만 머리가 하얘질 만큼 기분 좋은 이 행위를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혜원에겐 더 이상 부끄러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조금 더 깊이 자신의 안으로 들어와 줬으면 하는, 이대로 그의 품에 안겨 죽어도 좋을 만큼 혜원 또한 윤결을 절실히 원했다.
“혜원아, 사랑해. 죽을 만큼 사랑해.”
“… 무서워. 나 놓지 마….”
“걱정 마. 떨어지지 않게 꽉 안고 있으니까.”
“절대로 나 놓으면 안 돼. 이제 나 절대 혼자 두면 안 돼.”
파르르 떨리는 혜원의 입술 사이로 들려오는 작은 흐느낌. 윤결은 울먹이는 혜원의 얼굴을 따뜻하게 감싸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혜원이 살며시 윤결의 어깨에 얼굴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나 정말 무서운데…. 만약 사랑에도 유효기간이 있다면, 우리 사랑의 유효기간은 과연 언제일까?”
“글쎄…. 굳이 정하자면 내 심장이 멈추는 날? 겁쟁이 혜원이보다 내가 딱 하루만 더 오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할게. 나 없이는 하루도 널 혼자 두기 싫은 내 미친 욕심이라 해두자. 세상에 우리 둘만 남아서 먼저 가야 하는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네가 첫 번째, 그리고 내가 두 번째로 하자. 네 마지막 기억에 내가 남을 수 있도록, 그리고 내 마지막 기억에 네가 남을 수 있도록 말이야. 아마 우리 사랑의 유효기간은 그때가 아닐까….”
혜원의 새하얀 얼굴로 한 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거부할 수 없는 지독한 사랑의 운명. 혜원은 이제 그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토록 사랑하는 사람을, 이젠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된 이 사람을 다시는 잃고 싶지 않았다.
**
“형, 정말 안 돌아가도 돼?”
둘만의 뜨거운 밤을 보낸 뒤 윤결의 품에 안겨 꼼지락거리던 혜원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말했지? 너는 아무 걱정 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 아직 너무 졸린데. 우리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전혀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윤결이 머리 위까지 이불을 덮어쓰며 혜원을 가슴팍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아무런 저항 없이 끌려온 혜원이 다시 그의 품에 안기며 말했다.
“우리 같이 한국 갈까?”
“… 뭐?”
도망치듯 미국으로 온 혜원이었기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자는 말에 윤결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는 이내 혜원이 자신 때문에 원치 않는 선택을 또 하게 할 순 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서두를 필요 없어 혜원아. 네 마음이 편해지면, 네가 가고 싶어질 때 그때 가면 돼. 너 아직 하고 싶은 거 많잖아. 아직 돌아가고 싶은 거 아니잖아. 내가 같이 있어 줄게. 그러니까 혜원아, 나 때문에 돌아가지 않아도 돼.”
“아니야. 내가 돌아가고 싶어서 그래.”
“혜원아….”
윤결은 불안한 듯 혜원의 얼굴을 감싸며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행여나 또다시 그가 상처를 받게 되는 일이 생길까 봐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다. 적어도 양가 부모님들의 마음이 어느 정도 수그러든 후에 혜원과 같이 돌아가고 싶었다.
“같이 가자 형. 앞으로는 형 혼자 다 감당하게 하지 않을 거야. 나도 이제 어린애 아니야. 내 사랑은 내가 지킬 수 있다고. 아니, 그러고 싶어졌어. 부모님께 같이 가서 허락받자.”
“그래. 그러자. 우리 같이 가서 허락받자.”
확고한 혜원의 마음을 확인한 윤결이 그의 머리를 찬찬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언제 이렇게 어른이 돼버린 것인지, 아직까지 그를 어리게만 본 것이 너무도 부끄럽게 생각됐다.
심장을 통째로 울리는 것같이 아프도록 선명하게 전해지는 그의 사랑 고백에 윤결은 코끝이 찡해졌다.
사랑했고 사랑하고 또 앞으로도 사랑할 단 하나뿐인 연인 강혜원.
윤결은 자신의 품에 안긴 혜원의 입술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 길고 긴 입맞춤은 계속되었고 그들은 그렇게 그날 오후 내내 침대에서 나오지 못했다.
**
“혜원아, 정말 돌아가는 거야?”
윤결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혜원의 말에 필립이 그의 두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 물론 언젠가는 돌아가리라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떠난다고 하니 왠지 모르게 서운함이 밀려왔다.
“또 놀러 올게. 필립. 아니면 혜윤이랑 다시 한국으로 와도 좋고.”
“야, 넌 내가 시간이 남아도는 줄 알아? 나 이제 곧 대학생이거든? 누굴 오라 가라야.”
둘의 눈물겨운 대화를 듣고 있던 혜윤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아. 그렇겠네. 내가 그럼 놀러 올게.”
“뭐. 그러든가 말든가.”
혜원이 윤결과 한국으로 돌아가는 건 찬성이었지만, 역시 같이 살던 녀석이 떠난다고 생각하니 섭섭한 건 혜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톡 쏘아대며 말했지만, 어느덧 그녀의 눈가는 촉촉이 젖어 있었다.
얼마 뒤, 혜원은 윤결과 한국으로 출국 준비를 했다. 윤결은 조금 더 있다가 가도 된다고 했지만, 혜원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젠 내가 당당히 말하고 싶어. 윤결 형 달라고, 결혼하게 해달라고 말이야.”
“나 지금 요 작은 다람쥐한테 코 꿰인 거지?”
“응. 평생. 이제 도망도 못가 형.”
“누가 할 소리. 가자 강혜원.”
너무도 가벼운 둘의 발걸음과 환한 미소를 뒤로하며 필립과 혜윤 또한 그들의 새로운 시작에 응원을 보냈다.
**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윤결과 혜원은 미국에서 혼인 신고를 마쳤다. 동성 간의 혼인이 합법화된 미국이기에 둘의 결혼은 문제없이 진행되었다.
서로의 손에 반지를 끼워 주며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하겠다는 사랑의 서약을 마치고 난 뒤, 둘은 뜨거운 키스를 했다. 증인으로 혜준과 혜윤 그리고 필립이 이 자리에 함께했다.
혜준은 평범하지 않은 힘든 길을 가려는 혜원을 걱정하며 그를 살며시 안아주었다. 그리고 동시에 눈에 힘을 주어 윤결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윤결. 친구 이전에 혜원이의 형으로서 말할게. 다신 우리 혜원이 눈에서 눈물 나게 하지 마. 둘이서 어렵고 힘들게 지켜낸 사랑인 만큼,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아. 너희들의 선택에 후회가 남지 않게 그렇게 서로를 아끼면서 살아.”
“그럴게 혜준아. 고맙다.”
드디어 정식으로 부부가 된 둘은 더욱 서로를 아껴 줄 것을 굳게 다짐하며 한국으로 출발했다.
부모님의 허락이라는 가장 큰 숙제가 남아 있었지만, 혜원은 예전처럼 두렵거나 겁이 나진 않았다. 자신의 손을 꽉 잡아주며 함께해주는 윤결이 있으니 혜원은 그 어떤 때보다도 용기가 생겨났다.
**
한국으로 돌아온 윤결은 바빠졌다. 회사를 떠나 새로 시작한 사업도 어느 정도 몸집이 생기면서 여기저기 협력 제안이 쏟아졌다. 집안에 직접 알리지는 않았지만, 혜원이 한국에 들어온 것도 어느 정도 아는 눈치라 윤결은 최대한 모든 일을 최고의 위치에 올려두고 당당히 혜원과의 결혼을 알리고 싶었다.
한국에 온 뒤 혜원은 바쁜 윤결의 곁에서 그의 비서로서 일을 조금씩 도왔다. 당장 학교에 다니는 것보다 사랑하는 윤결의 곁에서 그를 돕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된 혜원의 선택이었다.
그와 함께 있을 수 있어 행복했고, 그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꼼꼼하고 섬세한 성격의 혜원은 생각 외로 비서가 적성에 잘 맞는지 열심히 했다. 윤결이 놓친 부분까지 잡아낼 정도로 어느새 혜원은 윤결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윤결이 현재 가장 많이 신경 쓰며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바로 자신의 아버지이자 한 사장이 대표로 있는 기업과의 프로젝트였다. 물론 재현의 도움으로 처음 연결이 되었지만 이젠 여기저기서 그와의 협력을 원할 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는 만큼, 한 사장도 알면서 눈감아 주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 어떤 도움도 일절 받지 않았기에 여기까지 온 것 자체가 윤결의 능력이었다. 한 사장은 비록 내친 아들이었으나 그의 능력만큼은 높이 평가했다.
오늘도 윤결은 집에 갈 생각도 없이 서류 확인에 몰두해 있었다. 내일 중요한 미팅이 잡혀 있는 만큼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기에 그는 준비된 자료를 읽고 또 읽었다. 물론 혜원이 한번 검토하고 결재 올린 자료라 숫자나 수치가 틀린 건 없었지만 그래도 윤결은 한 사장이 직접 참여하는 미팅인 만큼 긴장됐다.
-똑똑
“들어와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 혜원은 넥타이까지 풀어 헤친 채 일에 열중인 윤결의 앞에 작은 도시락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거 먹고 해.”
“어? 혜원아. 아직 안 갔어? 먼저 가라고 했잖아. 형 오늘 많이 늦는데.”
“괜찮아. 같이 가자. 혼자 집에 가면 심심하단 말이야.”
“아직 끝나려면 멀었는데…. 오늘은 집에 먼저 가 혜원아. 응?”
“싫어. 그럼 또 밥도 안 먹고 밤새 일만 할거잖아. 오늘 저녁도 제대로 안 먹었잖아.”
혜원은 요즘 들어 부쩍 예민해진 윤결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 내일 있을 미팅이 얼마나 중요한지, 왜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혜원은 좀 더 윤결의 곁에 있어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아직 말하지 않았지만, 내일 함께 동행까지 각오하고 있었다.
“그럼 이것만 먹고 같이 집에 가자. 그럼 됐지?”
윤결은 자신 때문에 혜원까지 고생시킬 순 없어 서둘러 서류를 접으며 말했다.
“응!”
혜원은 귀엽게 웃으며 사 온 도시락을 꺼냈다. 정갈한 반찬들과 따끈따끈한 국까지. 출출함까지 잊고 일에 매달려있던 윤결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도시락을 보니 순간 허기가 밀려오는 듯했다.
“같이 먹자 혜원아.”
“나, 나도??”
“그럼, 나 혼자 먹으라고? 너무한다 강혜원. 혼자 먹는 거 싫어하는 거 알면서.”
“그, 그럼 나도 먹을까. 하하….”
사실 윤결을 위한 도시락이었기에 일부러 고기반찬을 골라 사 온 혜원은 같이 먹자는 윤결의 말에 뜨끔했다. 하지만 같이 안 먹으면 손도 안 댈 것처럼 팔짱을 낀 채 노려보는 윤결의 모습에 하는 수 없이 그의 앞에 앉았다.
고기를 잘 먹지 않는 혜원의 편식. 윤결은 꼭 이것만은 고쳐주고 싶었다. 밤 10시가 넘어가는 늦은 시간 둘만의 저녁 만찬. 윤결은 혜원의 입에 작은 고기를 한 조각 넣어주며 그가 다 씹어 넘길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고기 한 점 씹는 데 몇 분이 걸릴 만큼 느릿느릿 먹는 혜원이었지만, 윤결은 절대로 재촉하지 않았다. 먹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고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알콩달콩한 저녁을 끝낸 뒤 둘은 11시가 훌쩍 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윤결은 피곤한지 씻지도 않고 누우려는 혜원을 살살 달래 세수와 양치까지 시키고 나서야 그를 침대에 눕혔다. 눕자마자 잠이 들 정도로 혜원은 사실 졸음을 꾹꾹 참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혜원의 잠든 모습이 귀엽기만 윤결은 하얗고 예쁜 혜원의 이마에 키스를 해주며 그의 옆에 나란히 누웠다.
서로를 품에 안은 채 잠든 둘의 모습. 그 어느 부부보다도 행복해 보였고 잘 어울리는 부부였다.
**
다음 날 아침. 윤결은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검은 정장에 뒤로 넘긴 머리가 너무도 잘 어울리는 남자. 혜원은 이 멋진 남자가 자신과 결혼 했다는 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보고 있어도 미소가 절로 지어질 만큼 잘생긴 남자. 자신을 향해 늘 환한 웃음을 지어주는 이 남자를 혜원은 너무도 사랑했다.
“뭘 그렇게 봐 혜원아?”
대충 준비를 마친 윤결이 거울 속에 비친 혜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 남편.”
“뭐??”
“내 사랑스러운 남편 보는 중이라고.”
혜원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수줍음 많고 소심한 혜원에게 결코 쉽게 들을 수 없는 말이었기에 윤결은 놀란 눈을 깜빡이며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이내 사랑스러워 미치겠다는 듯 그를 와락 품에 안으며 말했다.
“너 정말! 자꾸 이렇게 귀여운 짓 할 거야?”
“뭐, 뭐가. 내가 틀린 말 한 건 아니잖아? 여기 봐봐. 손에 반지까지 있잖아. 어디 가서 이제 총각행세도 못 한다고.”
“누가 총각행세 하겠대? 그리고 그러는 너도 손에 나랑 똑같은 반지 껴있거든? 너도 내 거거든?”
“아, 아니 뭐 누가 뭐래. 말이 그렇다는 거지. 헤헷.”
“안 되겠다. 이리 와!”
“으악!!”
윤결은 혜원을 번쩍 안고는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서로의 혀가 감기며 내는 질척이는 소리에 윤결은 흥분됐다. 혜원은 윤결의 허리에 다리를 휘감으며 떨어지지 않으려 매달렸다. 거침없는 키스에 둘의 호흡이 가빠졌다.
“하아…. 혀, 형. 그만… 흐읏….”
“혜원아. 조금만…. 응? 조금만 더.”
출근해야 하는 윤결을 조심스럽게 밀어내며 혜원이 입술을 떼려 하자, 윤결은 그의 젖은 아랫입술을 살며시 깨물며 놓지 않았다.
“출근…. 하읏. 형 오늘 중요한 미팅 있잖아.”
“하아… 젠장.”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윤결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리며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윤결은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혜원의 머리카락에 키스를 하며 말했다.
“사랑한다 강혜원. 네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절대 놓칠 수 없을 만큼 사랑해.”
혜원은 행복했다. 이런 과분한 사랑을 받는 것이 행복했고, 또 이런 사랑을 주는 존재가 윤결임에 더욱 행복했다.
회사에 도착한 윤결은 다시 한번 프레젠테이션 자료와 미팅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나갈 시간이 되자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사무실을 나섰다.
“혜원아. 다녀올게.”
“형, 아니 대표님. 저도 같이 가요.”
“뭐? 너, 너도 따라간다고?”
자신이 오늘 가는 곳이 어디인지, 누굴 만나야 하는지 모르지 않는 혜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같이 가자는 그의 말에 윤결은 잠시 당황했다. 분명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텐데…. 윤경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대표님이 가는데 비서인 내가 안 따라가면 그쪽에서 뭐라고 생각하겠어. 안 그래?”
“그, 그래도 혜원아… 거긴….”
“왜? 설마 나 말고 다른 비서라도 숨겨놨어?”
물론 아닌 걸 알지만, 혜원은 짐짓 의심의 눈초리로 윤결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 정말 괜찮겠어?”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거기 가면…. 아버지 만나야 할 수도 있어.”
“알아.”
“그래도 괜찮아?”
“형이 있는데 무슨 걱정? 우리 이제 부부잖아. 나 이제 도망가지 않아 형.”
언제 이렇게 어른스럽게 성장했는지, 윤결은 부부라고 힘주어 말하는 혜원의 말에 감동한 듯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그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혜원의 손을 꽉 잡았다.
이젠 정말로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는 생각에 윤결은 더욱 힘이 나는 것 같았다.
물론 쉽지 않은 하루가 될 거라 예상은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만은 한결 편안해졌다. 혜원과 같이 있어서 그런지 윤결은 모든 것이 다 잘될 것만 같은 기분 좋은 느낌이 들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회의가 시작되었다. 이번 회의에는 한 사장, 김재현 그리고 몇몇 중요 간부가 참석했다. 이들 중 윤결을 반기는 사람은 오직 재현뿐이었지만, 윤결은 묵묵히 그들의 날 선 질문에 대답하며 차분히 회의를 이끌어 나갔다.
사실 공격 자체가 무의미할 만큼 완벽한 프레젠테이션이었고, 그와 함께하지 않는 것이 손해라는 것 정도는 그를 탐탁지 않아 하는 간부들까지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결국, 만장일치로 두 회사 간의 협력이 이루어졌다. 하나둘씩 사람들이 회의장을 빠져나가자 어느새 방 안엔 한 사장과 김재현 그리고 윤결과 혜원만이 남았다. 눈치 빠른 재현이 축하의 인사와 함께 윤결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먼저 방을 나갔다.
윤결은 웃으며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셋. 윤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한 사장을 바라봤다.
그는 윤결의 옆에 서 있는 혜원을 힐끔 쳐다보고는 입술을 작게 움찔거렸다. 그래도 공과 사는 구분하는 한 사장이었기에 천천히 윤결의 앞으로 다가가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생각보다 준비를 잘했더구나.”
“감사합니다.”
“뭐 내게 감사할 건 없다. 다 네가 준비해서 성사시킨 일이니까.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한다.”
“… 네”
할 말을 마친 한 사장이 윤결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않아 우뚝 멈춰 선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윤결과 혜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꼭 이렇게 해야 하는 거였니? 꼭 그 아이였어야만 했니?”
“네.”
“모진 녀석. 천하의 못된 녀석.”
“….”
“죽어도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지.”
“잘못한 게 없는걸요. 혜원이를 사랑한 것이 용서를 빌어야 할 죄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절대 혜원이는 제가 아버지께 죄송하다고, 용서해달라고 빌어야 할 존재가 아니니까요.”
한 사장은 너무도 확고한 윤결의 말에 온몸에 힘이 다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왜… 대체 왜….”
“사랑하니까요. 제가, 제가 윤결 형을 죽을 만큼 사랑하니까요. 아버님….”
모두의 예상을 깨고 윤결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혜원의 애잔한 고백에 한 사장과 윤결은 동시에 그를 쳐다봤다.
혜원이 울고 있었다.
그렇게 혜원은 떨리는 목소리로 윤결을 사랑한다고 계속해서 중얼거리며 울고 있었다.
“혜원아….”
윤결은 재빨리 그를 품에 안았다.
너무도 애틋한 둘의 모습에 한 사장은 더는 그들을 반대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 둘의 운명이 태어났을 때부터 정해진 게 아니었을까 하는 착각이 들 만큼, 이젠 그들을 막을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언제 한번 날 잡아서 집으로 오거라.”
한 사장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혜원의 머리를 다정한 손길로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아버지.”
“너 좋으라고 허락하는 거 아니야. 너 같은 놈 만나서 앞으로 고생할 이 아이, 혜원이 때문에 허락하는 거야.”
“감사합니다.”
“그만 데리고 가거라.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은데.”
“나중에 찾아뵐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어느덧 한 사장의 얼굴에도 인자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렇게 허락을 하고 나니 아무것도 아닌 것을 그동안 왜 그렇게 미워하고 원망하고 살았는지, 그저 아이들을 멀리했던 지난날이 허탈해지기까지 했다.
“아, 아버님.”
그때였다. 뒤돌아 나가려는 한 사장의 옷깃을 살며시 쥐며 혜원이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어느새 혜원은 윤결의 품을 벗어나 한 사장 앞에 섰다.
“왜 그러니 혜원아.”
“저, 저도 죄송하다는 말 안 할 거예요.”
“… 그래.”
한 사장은 바들바들 떨면서도 자신을 피하지 않는 혜원이 어느새 기특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감사해요.”
“….”
“윤결 형 낳아주셔서, 그리고 저한테 윤결 형 보내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하지만 혜원은 차마 그를 계속해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너무 죄송하고 미안했다.
“혜원아.”
“네….”
“고개 들어봐.”
너무도 따뜻한 한 사장의 목소리에 혜원이 천천히 고개를 들고 그를 올려다봤다.
“누가 들으면 아들 뺏기는 줄 알겠네. 오히려 내게 이렇게 귀엽고 착한 아들이 하나 더 생기는 건데 말이야.”
“아, 아버님.”
“그러니까 혜원아. 그동안 내게 서운했던 건 모두 다 잊고 앞으로 행복했으면 한다.”
“그럴게요. 꼭 그럴게요.”
너무도 다정해 보이는 둘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윤결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윤결은 환한 웃음과 함께 사무실을 나가는 한 사장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가장 힘들고 어려운 산을 하나 넘겼다는 생각에 무거웠던 마음의 짐을 덜은 가벼운 기분마저 들었다.
사업도 승승장구, 혜원과의 사랑도 이상 무. 지금이 윤결의 인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닐까 싶었다.
**
오랜만에 일찍 퇴근한 윤결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혜원은 한순간에 모든 긴장이 풀리며 엄청난 피로가 몰려왔다.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했지만 역시 마음 여린 혜원에게는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죽은 듯이 소파에 늘어져 있는 혜원에게 가벼운 입맞춤을 해준 윤결은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혜원은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자신의 연인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 정말 결혼 잘한 거 같아. 너무 행복해.’
그렇게 혜원이 행복에 겨운 시간을 보내는 사이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혜원은 당연히 혜윤이나 혜준일 거란 생각에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혜원이니?]
순간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준엄한 목소리에 혜원은 순식간에 얼굴이 사색이 된 채 얼어붙어 버렸다.
“누구 전화?”
부엌에서 요리를 하던 윤결이 전화 소리를 듣고 거실로 나오며 물었다. 하지만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 바들바들 떨기만 하는 혜원을 보자 윤결은 재빨리 그의 전화를 뺏어 들었다.
“아, 아빠. 아빠가….”
“괜찮아 혜원아. 내가 받을게.”
너무 놀라, 말을 잇지 못하는 혜원의 전화를 대신 받아든 윤결이 괜찮다는 듯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방으로 들어갔다.
“여보세요? 저 윤결입니다.”
[결국, 혜원이랑 같이 들어온 건가?]
“네. 아버님.”
[혜원이는…. 잘 있고?]
“네. 잘 있습니다. 조만간 찾아뵐게요.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언제는 미리 말했고?]
“… 면목이 없습니다.”
[됐다…. 빠른 시일에 혜원이랑 함께 집에 들르거라.]
“알겠습니다. 아버님.”
“우리 혜원이, 밥은 잘 먹고 지내는 건가?”
“그럼요. 제가 잘 챙기고 있습니다.”
“그래…. 아무렴 그렇겠지. 알겠네. 이만 끊네.”
이미 각오했던 일이었기에 윤결은 차라리 그가 먼저 전화를 걸어주셔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전화를 끊고 다시 거실로 나온 윤결은 무릎을 가슴팍까지 끌어올리고 불안해하는 혜원에게 다가와 그를 살포시 안아주었다.
분명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예고 없이 전화가 오자 혜원은 당황했다. 윤결의 품에서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듯 혜원이 천천히 고개를 들며 물었다.
“아, 아빠가 뭐라셔? 화 많이 나셨어?”
“아니. 별말씀 안 하셨는데?”
“거짓말….”
“정말.”
“…….”
“언제 한번 들르라고.”
“그래. 그러자.”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었는지 혜원이 작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윤결은 배가 고플 혜원을 위해 마저 음식을 준비하러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보글보글 고소한 찌개 끓는 냄새가 거실에 가득 퍼져나갔다. 혜원은 소파에서 일어나 맛있는 냄새를 따라 부엌으로 향했다. 분주히 움직이는 윤결의 모습에 혜원은 조용히 식탁에 앉아 그를 지켜봤다.
앞치마가 잘 어울리는 남자. 요리하는 뒷모습이 멋있는 남자. 혜원은 기분이 좋아진 듯 발까지 휘휘 내저으며 흐뭇하게 바라봤다.
어느 정도 저녁 준비가 끝나자 윤결은 식탁을 차리기 위해 앞치마를 벗으며 뒤돌아섰다. 순간 언제 들어왔는지 식탁에 얌전히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혜원을 발견한 윤결이 멋쩍은 듯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식탁까지 완벽하게 차리고 부르려 했으나 인기척도 없이 들어와 구경을 하고 있는 그를 마주하자 괜히 부끄러워졌다.
“뭐야 강혜원?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음. 아까 아까부터?”
“들어왔으면 왔다고 말을 하든가! 엉큼하게 남편 뒷모습이나 훔쳐보고!”
“내, 내가 언제!”
“어쭈? 이젠 오리발까지! 관람료 내놔!”
어느새 혜원의 곁으로 바짝 다가온 윤결이 짓궂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너무 가까이 다가온 윤결이 부담스러워진 혜원이 슬그머니 엉덩이를 뒤로 빼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윤결은 재빨리 그의 뒷머리를 감싸며 도망가지 못하게 고정시켰다.
“으악!”
깜짝 놀란 혜원이 소리를 지르며 버둥거렸으나 윤결은 쉽사리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백번 양보해서 키스 한 번으로 봐줄게.”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내, 내가 왜!”
“뭐 그럼 저녁 대신 하루 종일 침대에서 뒹굴든가.”
“아, 정말!”
어느새 목까지 빨개지며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한 혜원은 눈을 꾹 감고는 재빨리 윤결의 입술에 키스했다.
1초도 안 돼 끝나버린 아쉬운 키스에 윤결은 떨어지려는 혜원의 입술을 다시 덮쳤다.
“하읏!!”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입 안을 파고드는 윤결의 뜨거운 키스에 혜원이 짧은 신음을 흘렸다. 요즘 들어 윤결은 틈만 나면 키스를 해댔고 혜원은 점점 더 그의 능글맞은 요구에 익숙해져 갔다.
“자, 잠깐. 그만!”
숨이 막힐 것같이 길고 긴 키스를 견디다 못한 혜원이 윤결의 가슴을 콩콩 두드리며 밀어내자 윤결이 마지못해 그의 입술을 놓아주며 말했다.
“잘 먹었다. 강혜원 입술.”
어째 윤결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능구렁이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윤결은 잠깐 기다리라며 혜원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빠르게 저녁 식탁을 차렸다. 조금 전 강 사장의 전화가 신경이 쓰여서인지 오늘만큼은 혜원을 꼭 배불리 먹어야 할 것 같은 사명감까지 들었다.
다행히 혜원은 윤결이 차린 저녁을 맛있게 먹어 주었다. 반찬 투정 한번 한 적 없는 기특한 혜원을 보며 윤결은 하루하루 그와 함께 하는 신혼생활이 더없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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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 신고까지 마치고 정식 부부가 된 윤결과 혜원은 이제 양가 부모님께도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윤결은 양가 부모님과 함께 만나는 자리를 마련하기로 했다. 다행히 두 분은 모두 찬성을 하셨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윤결과 혜원은 한국에 온 뒤 처음으로 양가 부모님을 함께 마주했다.
잔뜩 긴장한 혜원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부모님들을 기다리며 초조해하자 윤결은 다정스레 그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겁먹을 거 없어. 내가 있잖아. 네 곁엔 항상 내가 있다는 걸 잊지 마, 혜원아.”
“응.”
그의 따뜻한 한마디에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 혜원이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윤결과 혜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도착한 사람은 강 사장 부부였다. 혜원의 모친은 들어서자마자 혜원을 끌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엄마….”
혜원 또한 참고 있던 눈물을 흘리며 울먹였다. 너무도 보고 싶고 그리웠던 엄마였다. 이대로 영영 엄마를 보지 못하게 될까 봐 남몰래 마음 졸였던 혜원은 그녀를 보자마자 서러움에 복받쳐 울음을 터트렸다.
두 모자의 눈물겨운 상봉을 지켜보던 강 사장도 말없이 눈물을 삼켰다. 그래도 생각보다 좋아 보이는 아들의 모습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윤결은 강 사장을 향해 허리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를 했다. 강 사장 또한 그의 인사를 받아주며 자리에 앉았다.
얼마 뒤 한 사장 부부까지 도착하자 드디어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다. 역시나 어색한 자리인 만큼 혜원은 두 부모님의 눈치를 보느라 어찌할 줄 몰라 했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끌어봤자 혜원이만 힘들어질 것 같단 생각에 윤결이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밝혔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아버님, 어머님. 전 혜원이와 절대 헤어질 생각이 없습니다. 아니 이젠 헤어질 수 없어요. 저희 이미 미국에서 혼인 신고 마쳤습니다. 법적으로 부부입니다.”
“…….”
생각지도 못한 윤결의 충격적인 선언에 모든 이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강 사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눈으로 혜원과 윤결을 번갈아 보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반면 어느 정도 예상한 한 사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아꼈다.
계속되는 침묵에 불안해진 혜원이 살며시 고개를 들어 윤결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윤결의 눈빛에선 그 어떤 때보다 굳건한 단호함이 느껴졌다.
“… 강혜원. 너는? 너는 정말 윤결이랑 끝까지 함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무거운 정적을 깨고 드디어 강 사장이 입을 열었다.
“응. 아빠. 나도 윤결 형 사랑해. 우리 이제 정말 헤어질 수 없어요.”
“하아….”
혜원이 이렇게까지 말을 하니 강 사장 또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물론 이 자리에 나오기로 마음먹었을 땐 어느 정도 둘의 사이를 인정했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혼인 신고라니! 생각지도 못한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강 사장은 다시 한번 가슴이 무너져내렸다.
지금도 많이 어리고 세상 물정 모르는 막내아들을 강 사장은 아직 품에서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랬기에 지금 이 모든 일이 그에겐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 제가 정말 잘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윤결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강 사장. 미안하지만, 내 아들 한 번만 받아주게. 못난 아들이지만 나를 봐서라도 이번 한 번만 아이들을 믿어 보고 지켜보세.”
윤결에 이어 한 사장의 간곡한 부탁에 강 사장은 깊은 고심 끝에 고개를 끄덕이며 둘의 사이를 받아드렸다. 둘이 이렇게나 절절한데 더 이상 반대를 하고 떼어놓는다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였다.
“아빠….”
울지 않겠다 다짐했던 혜원의 두 눈엔 끝내 또다시 눈물이 맺히고 말았다.
“대신 누구보다 행복해야 한다 혜원아. 내 귀에 혹시라도 네가 힘들어한다는 말이 들리면 당장 데리고 올 거야.”
“응. 아빠. 꼭 행복할 게. 나 꼭 행복할 거야.”
“걱정 마세요. 아버님. 혜원이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줄게요.”
“나 빈말하는 거 아니야. 아무리 혜원이가 울고불고 싫다고 해도 그땐 무조건 데리고 올 거야. 명심해. 한 서방.”
“… 네 아버님. 감사합니다.”
한 서방. 강 사장은 어쩔 수 없이 받아준다는 듯 무뚝뚝한 말투로 말했지만, 한 서방이라는 한 마디에 그가 얼마나 윤결을 믿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무거웠던 분위기는 어느덧 윤결과 혜원의 결혼식 이야기까지 오갈 정도로 화기애애하게 흘러갔다.
결혼식은 어디서 하고, 식장은 어디로 잡고 또 신혼여행은 어디로 갈 건지까지, 다시 하는 결혼인 만큼 제대로 하자는 의견에 두 집안 모두 만장일치를 봤다.
두 어머니의 열띤 대화를 들으며 혜원은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마음 편히 웃음을 지었다.
혜원은 테이블 밑으로 마주 잡은 윤결의 손을 다시 한번 꽉 쥐며 그를 올려다봤다. 윤결은 입을 벙긋거리며 혜원에게 속삭였다.
‘사랑해 강혜원.’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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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락을 받고 나니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사실 혜원은 혼인 신고까지 다 마친 어엿한 부부인데 굳이 번거롭게 다시 결혼식을 할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혜원의 인생에서 누구보다 축하받고 축복받아야 할 순간인 만큼 강 사장은 둘의 결혼식만큼은 꼭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뭐든 하면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게 강 사장의 신조였기에 혜원은 아버지의 소원대로 결혼식은 하되, 대신 가족끼리 하는 스몰 웨딩으로 합의를 봤다.
혜원의 결혼식 날짜가 잡혔다는 소식에 혜윤과 필립 그리고 혜준이 급히 한국으로 들어왔다.
문제는 강 사장 부부가 필립을 실제로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이었다. 노랑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예비 사위를 마주한 강 사장은 어떻게 그를 대해야 할지 몰라 어색한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그런 강 사장의 타들어 가는 속도 모르고 혜윤은 자신도 하루빨리 필립과 결혼하고 싶다고 강 사장에게 졸라대기 시작했다. 아니, 윤결은 집안끼리 아는 녀석이라 우여곡절 끝에 허락했다 치지만, 필립이라는 녀석은 대체 언제 봤다고 다짜고짜 결혼시켜 달라고 성화인지 하루가 멀다고 사고를 치는 천방지축 딸의 모습에 강 사장은 골치가 아파졌다.
지금은 어쨌든 혜원의 결혼으로 한국에 온 것이니 그 일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슬쩍 대화를 피해 봤으나 혜윤은 요지부동 이번에 꼭 아빠의 허락을 받고 말겠다며 버텼다.
정말이지 한배에서 나온 쌍둥이라 그런지 사고를 치는 수준도 막상막하였다.
“안녕하세요. 필립 그린데일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옥신각신 혜윤과 열을 올리는 강 사장의 앞으로 필립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유창하게 한국말을 하는 필립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강 사장은 혹시나 자신과 혜윤의 말다툼을 다 알아들었을까 봐 힐끔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아… 필립. 반가워요. 한국말… 아주 잘하네요?”
“네. 혜윤이한테 맞으면서 배웠어요.”
“뭐??”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이는 필립의 얼굴에서 강 사장은 얼핏 어린 시절의 혜원이 떠올랐다.
‘설마….’
강 사장은 능청스러운 얼굴로 옆에서 딴청을 피우는 혜윤을 도끼눈으로 노려봤다. 감히 남의 집 귀한 아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것인지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혜원을 부려 먹더니, 이젠 남자친구라고 데리고 온 녀석마저 제 손에 쥐고 사는 딸아이를 보니 이번엔 왠지 필립이 불쌍해지려 했다.
이쯤 되면 모두가 혜윤의 손에서 놀아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 생각마저 들었다.
“필립. 자네 정말 혜윤이랑 사귀는 거 다시 한번 생각해봐. 이건 진짜 내가 자네를 아들처럼 생각하고 하는 말이야.”
“왜요?”
“혜원이를 보고도 왜라는 말이 나와?”
“혜원이 지금 너무 행복해 보이는데…. 저도 그렇고요. 혜윤이는 정말 멋진 아이인걸요? 저는 혜윤이가 제 곁에 있어 줘서 너무 좋아요.”
강 사장은 배시시 웃으며 얼굴을 붉히는 필립을 보며 콩깍지가 씌어도 단단히 씌운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왈가닥 딸을 이토록 사랑해 주고 아껴 주는 필립을 보며 꽤 괜찮은 녀석이라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혜윤에게 잘 어울리는 짝을 만난 것 같아 내심 안심이 되기까지 했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몰래 속닥거리는 거야?”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른 혜윤이 행여나 필립에게 이상한 소리를 할까 봐 그를 자신의 곁으로 재빨리 끌고 오며 물었다.
“결혼시켜 달라며? 뭐 결혼은 너 혼자 하냐? 필립 의견도 물어봐야지. 그래도 남자 하나는 잘 골라 온 것 같네.”
“정말? 아빠 그럼 우리 결혼 허락하는 거야?”
“하아… 필립도 같은 생각이면 뭐 더는 반대 안 하마. 대신”
“대신?”
혜윤은 눈을 반짝이며 아빠를 올려다봤다.
“필립은 울리지 말고 잘 살아.”
“내가 걔를 왜 울려!”
“허구한 날 혜원이를 못살게 굴고 울린 네 전적을 내가 아는데? 양심 좀 있어라. 강혜윤. 아무리 내 딸이라지만 이젠 필립이 가여워지려고 하니까.”
“별걱정을!”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혀를 내미는 철없는 딸을 보니 강 사장은 어째 걱정이 두 배로 늘어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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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가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동시 입장을 한 혜원은 윤결의 손을 꽉 잡았다. 잔뜩 긴장한 혜원의 손이 잘게 떨렸다. 윤결은 그런 혜원의 손을 더욱 꽉 잡아주며 자신의 곁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이제 부부로서 첫발을 내딛는 만큼 윤결은 자신에게 와준 선물 같은 이 녀석을 평생을 바쳐 사랑할 것을 굳게 다짐했다.
하얀 정장을 입고 가슴에 꽃을 달고 윤결의 옆에 선 혜원은 천사처럼 예뻤다. 그리고 그런 혜원의 손을 잡고 입장하는 윤결의 모습까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둘의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혜원의 엄마는 연신 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바라봤다. 혜윤의 결혼식에서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리는 엄마의 모습에 혜원은 잘 살겠다는 듯 환한 웃음으로 그녀를 위로했다.
하지만 복병은 따로 있었다. 혜원의 보호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만큼 그를 아끼고 챙겼던 그의 하나뿐인 형 혜준. 결혼식이 진행되는 내내 우리 혜원이, 우리 혜원이를 부르며 걱정 어린 시선으로 그를 지켜봤다.
마치 윤결을 도둑놈으로 여기는 듯 결혼식이 끝나도 계속해서 윤결의 곁을 배회하며 혜원이를 울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협박 아닌 협박을 해댔다.
“너, 내가 마음에 들어서 혜원이 보내는 거 아니야. 혜원이가 원하니까 어쩔 수 없이 들어준 거라고. 언제라도 혜원이가 싫다고 하면 다시 데려올 거야. 그러니까 너 똑바로 정신 차리고 잘해.”
“알겠습니다. 형님. 됐지?”
윤결은 깍듯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며 상처받은 눈으로 자신을 구박하는 혜준을 달랬다.
아무렴 혜원이 싫다고 도망이라도 가면 정작 가장 큰 일 날 사람은 윤결, 자신일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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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의 결혼식은 가족들만 모인 비공개로 진행되었지만, 결혼식이라기보다 가족 여행에 가까웠다. 결혼식이 끝나고 신혼여행을 가기 전, 바쁜 일정으로 가족 모임 자체가 오랜만이었던 혜원은 윤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부탁했다.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바로 신혼여행을 계획했던 윤결에겐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을 혜원을 생각하니, 이 정도 소원쯤은 양보해야 한다 생각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뭐 대신 신혼의 첫날 밤만 뜨겁게 보낸다면야 그곳이 어디든 윤결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혜원은 오랜만의 가족 여행에 신이 나 있었다. 거기에 좋아하는 필립까지 함께하니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가기라도 한 듯 천진난만한 웃음을 띠며 모래사장을 달렸다.
필립과 앞서니 뒤서니 하며 달리는 혜원의 모습을 뒤에서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며 구경하는 윤결과 혜윤 그리고 혜준. 마치 셋은 두 녀석의 보호자가 된 기분으로 행여나 넘어지지는 않을까 다치지는 않을까 하는 표정으로 그들을 뒤따랐다.
“필립 형. 나중에 혜윤이랑 결혼하면 나 꼭 부를 거지?”
“당연하지. 나 결혼할 때 너한테 내 베스트 맨 해 달라고 부탁해도 돼?”
“정말? 그거 내가 해도 돼?”
“응. 혜원이 네가 해주면 나 너무 행복할 것 같아.”
“약속한 거다! 내가 꼭 할게. 형 베스트 맨.”
무언가 중대한 임무라도 맡은 것처럼 비장한 얼굴을 한 혜원이 그를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
순간 누군가 혜원의 뒷덜미를 잡아채더니 재빨리 둘을 떼어내며 소리쳤다.
“야 강혜원! 너 진짜!”
언제 달려왔는지 얼굴이 시뻘게진 윤결이 씩씩거리며 혜원을 노려봤다. 아니 결혼식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외간 남자를 끌어안으며 눈웃음을 치는지! 윤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혜원을 번쩍 안아 들며 말했다.
“어디 남편 앞에서 다른 남자를 껴안을 생각을 해? 나 하나만으로는 부족했어? 지금 당장 방에 올라갈까?”
“뭐, 뭐라는 거야 진짜! 필립 형이잖아! 내가 뭐 어쨌다고….”
혜원은 필립이 보는 앞에서 너무도 낯 뜨거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윤결을 힐끔 노려보며 말했다.
“필립은 남자 아니야? 내 눈엔 다 늑대 같아 보인다고!”
“와, 나 기가 막혀서. 지금 여기서 가장 파렴치한 늑대가 누군데 감히 우리 필립한테 늑대니 뭐니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행여나 마음 여린 필립이 놀랐을까 봐 한걸음에 달려온 혜윤이 윤결을 위아래로 쏘아보며 소리쳤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한참이나 어린 혜원을 꼬신 것도 모자라 결혼까지 한 윤결이 할 말이냔 말이다.
“안 돼. 필립이든 혜준이는 너든. 앞으로 내 허락 없이 혜원이 끌어안는 거 절대 허락 못 해.”
“웃겨. 혜원이 생각도 있거든? 야, 강혜원. 넌 어떻게 생각해? 지금이라도 당장 결혼 물려도 되니까 솔직히 말해.”
혜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한 혜윤은 팔짱까지 끼며 기세등등하게 물었다.
“그, 그럴게. 대신 윤결 형도 나 말고 다른 사람 막 안고 그럼 안 돼. 알았지?”
맙소사….
혜윤은 들으면서도 믿을 수 없는 혜원의 소심하면서도 당찬 발언에 기가 찼다. 자신이 알던 수줍음을 타고 부끄러움이 많던 강혜원의 놀라운 변화에 할 말을 잃은 듯 허망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당연하지. 누구 명령인데.”
“뭐…. 명령?”
들으면 들을수록 혜윤은 어이가 없었다.
“그럼. 난 우리 혜원이 말이라면 당장 죽으라고 해도 죽을 수 있다고.”
“안 돼! 윤결 형. 그런 무서운 말 하지 마.”
죽는다는 말에 화들짝 놀란 혜원이 눈물을 글썽이며 윤결의 허리에 매달렸다.
아주 가관이었다.
혜윤은 이 상황을 보며 피식피식 웃고 있는 오빠 혜준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웃겨? 오빠는 지금 이 상황이 웃겨?”
“웃기지. 저 얼음장같이 냉정하던 윤결이 자식이 이렇게까지 절절매는 모습이 웃기지 않으면 그럼 울 일이냐?”
“와…. 난 지금 내 동생 강혜원 뺏긴 기분인데….”
자신의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며 제 편에 섰던 혜원이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혜윤은 묘하게 서운함을 느꼈다.
“혜윤아. 내가 잘할게. 내가 혜원이의 빈자리를 다 채우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너 외롭지 않게 내가 더 잘할게.”
어느덧 혜윤의 기분을 알아챈 필립이 살며시 다가와 그녀를 안아주며 말했다.
“뭐래. 넌 나에게 누구보다 특별한 녀석이라고. 절대 누구 대신이 될 수 없어 필립. 그러니까 미안해하지도 불안해하지도 마. 나도 강혜원 필요 없어. 쳇. 남자 좋다고 누나 떠난 녀석이 뭐가 예쁘다고.”
혜윤은 너무도 다정한 필립의 말에 어느덧 서운함을 떨치며 씩씩하게 말했다. 하지만 쌍둥이 혜원은 그녀의 마음을 너무도 잘 느낄 수 있었다. 혜원은 처음으로 혜윤의 머리에 손을 올려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혜윤이 많이 컸네?”
“뭐 우리 혜윤이? 이게 누나한테!”
“으아악! 미안! 미안 미안!!”
눈을 치켜뜨며 또 싸움을 걸 기세로 자신을 노려보는 혜윤을 피해 혜원이 소리를 지르며 윤결의 뒤로 숨어버렸다.
이리 오라며 혜원을 잡으려는 혜윤과 제발 살려달라며 윤결의 곁을 빙빙 돌며 도망치는 혜원, 그리고 이런 두 녀석의 귀여운 모습을 바라보는 혜준의 눈엔 사랑스러움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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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챙겼지?”
“응.”
윤결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비행기 티켓을 손에 꽉 쥔 채 방긋 웃는 혜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멋모르고 혜윤의 손에 이끌려 여장을 하고 이곳에서 윤결을 만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어엿한 부부가 되어 다시 공항에 오니 기분이 새로웠다. 마치 지금까지의 일들이 모두 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혜원은 그저 모든 것이 신기했고 또 행복했다.
목적지는 파리.
윤결과 혜원이 신혼여행지로 선택한 곳은 다름 아닌 파리였다. 사실 혜원이 파리로 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 윤결은 망설였다. 좋은 기억보다 안 좋은 기억이 더 많았고, 지금도 딱히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혜원의 생각은 달랐다. 서로 어긋난 만남의 시작이었던 파리였지만, 그 또한 혜원에겐 윤결을 만날 수 있게 된 소중한 순간들이라 생각했다. 그랬기에 혜원은 파리에서의 안 좋은 기억들까지도 다시 윤결과의 행복한 시간으로 채워 나가고 싶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혜원은 윤결과 함께 한 모든 순간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어 했고, 그 시작점이 이 위험한 동거가 시작된 파리행 비행기를 타던 그날부터라고 생각했다.
이런 혜원의 마음을 알게 된 윤결도 혜원의 속 깊은 마음에 감동하며 그의 소원대로 여행지를 파리로 정한 것이었다.
비행기 탑승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혜원은 긴장한 나머지 잠시 비틀거리며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혜원아, 괜찮아?”
깜짝 놀란 윤결이 그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응. 미안. 나도 모르게 긴장이 돼서. 하하….”
그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음에도 유독 혜원은 이번 신혼여행을 준비하는 내내 어딘가 모르게 긴장돼 보였다.
윤결은 안 되겠는지 그의 무릎과 허리에 손을 두르며 그를 번쩍 안아 들었다.
“으악! 혀, 형! 뭐 하는 거야! 내려놔, 아 진짜 빨리 내려놔!”
“조용히 해 강혜원. 자꾸 발버둥 치면 이대로 확 덮쳐버리는 수가 있어.”
귓가를 간지럽히는 그의 야릇한 속삭임에 혜원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무래도 윤결이 쉽게 내려줄 것 같지 않자, 혜원은 차라리 얌전히 안겨 있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밀려드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여버린 혜원이 슬금슬금 윤결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윤결은 하는 짓마저 귀엽기 짝이 없는 혜원을 더욱 단단히 안으며 탑승을 기다렸다. 그런 윤결의 모습을 보고 헐레벌떡 달려온 승무원이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윤결은 와이프가 고소 공포증이 있어서 겁을 좀 먹었으니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빨리 입장을 서둘러 달라고 부탁했다.
‘뭐? 와, 와이프? 이 형이 진짜!’
혜원은 차라리 얼굴이 보이지 않는 편이 낫겠다 생각하며 두 손으로 얼굴을 완전히 가려 버렸다. 안겨 있는 것만으로도 손발이 다 오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반면 자신의 타들어 가는 속도 모르고 윤결은 뭐가 좋다고 배시시 웃고 있는지, 이젠 능글맞은 그의 얼굴을 꼬집어버리고 싶기까지 했다.
우여곡절 끝에 비행기에 탑승한 혜원은 자리에 앉자마자 창가로 고개를 획 돌려 버리며 윤결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나름 삐졌다고 시위를 하는 듯 보였으나 윤결은 개의치 않고 혜원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지분거리며 말했다.
“우리 혜원이가 왜 이렇게 화가 났을까?”
“몰라. 말 시키지 마.”
어째 단단히 토라진 듯했다. 혜원은 이번에야말로 자꾸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려는 윤결의 버릇을 고쳐주겠다고 마음먹은 듯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곧 이륙 사인이 뜨고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며 기체가 흔들리자 혜원의 결심은 단번에 무너지고 말았다.
‘무, 무서워.’
이미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손잡이를 있는 힘껏 잡았으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덜컹!
이륙하느라 점점 더 속력이 가해진 기체가 심하게 흔들리자 이내 혜원은 애처로운 눈빛으로 윤결을 올려다봤다.
‘어째 그날과 하나도 변한 게 없냐 강혜원.’
윤결은 울 것 같은 혜원의 얼굴을 감싸며 살며시 자신의 가슴에 기댔다. 떨리는 혜원의 손을 꽉 잡아주며 이마에 입맞춤을 해주는 윤결. 그의 입술이 머문 자리가 뜨거웠다.
키스는 이마에서 멈추지 않았다. 혜원의 콧등을 지나 어느새 그의 입술까지 내려온 윤결의 다정한 베이비 키스. 그는 들어가도 되냐고 물어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혜원의 입술을 혀로 핥았다.
벌어질 듯 말 듯 조금씩 틈을 보이는 혜원의 입술을 헤집고 들어간 윤결의 뜨거운 혀에 혜원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윤결은 커다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버둥거리는 혜원을 더욱 바짝 품에 끌어안았다.
“으읍!”
도망치려는 혜원의 혀를 휘감으며 제압하는 윤결의 거친 키스에 혜원은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아직 약도 먹지 못했지만, 혜원은 그런 이성적인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었다. 서로의 타액이 엉키고 질척이는 뜨거운 키스가 절정에 다다를 때쯤 혜원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를 밀어냈다.
“하앗! 하아…. 하아….”
눈물이 고일 만큼 격정적인 키스에 혜원은 붉어진 입술을 마구 비비며 부끄러워했다. 반면 짧게 끝나버린 키스에 만족하지 못한 윤결은 아쉬움이 잔뜩 담긴 눈으로 혜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보다 더 잘 듣는 약도 없을 걸 강혜원?”
“하앗… 뭐, 뭐라는 거야.”
아직도 혼란스럽기만 한 혜원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너, 약 안 먹었다고.”
“!!”
순간 혜원은 자신의 바지 속에 고스란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약을 발견하고는 또다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윤결과의 키스에 약 먹는 것까지 잊어버리고 그에게 매달렸다는 사실에 얼굴이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괜찮아. 이런 약 같은 거 안 먹어도 앞으로 내가 우리 겁쟁이 혜원이 지켜줄 거니까, 너는 지금처럼 계속 이렇게 내 곁에만 있으면 돼.”
윤결은 부끄러움에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혜원의 머리에 입맞춤을 해주며 다정히 속삭였다.
그제야 혜원도 조금 진정이 됐는지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겼다. 정말 우연하게도 약을 먹지 않고 비행기를 탄 그 모든 순간 윤결이 함께 있었고, 죽을 듯이 밀려오던 공포도 그의 품에만 안기면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어느새 기분이 좋아진 듯 수줍게 웃기까지 하는 혜원의 모습에 윤결은 다시 그를 울려 버리고 싶은 못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물론 방긋방긋 웃는 그의 순수한 모습도 좋았으나, 침대에서 울면서 매달리는 야릇한 모습 또한 윤결이 사랑하는 모습 중 하나였다.
‘아 빨리 호텔 방에 데리고 가서 눕혀버리고 싶다!’
아직 도착하지도 않은 파리에서의 첫날밤을 손꼽아 기다리는 한윤결. 드디어 늑대 같은 그의 본성이 서서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
“아, 윤결 형! 빨리 나가자, 응? 나 보고 싶은 거 많단 말이야!”
파리에 도착해 호텔에 대충 짐을 풀어놓은 뒤, 혜원은 침대에 누워 움직일 생각을 안 하는 윤결의 팔을 잡아끌며 재촉했다. 어쩐 일인지 윤결은 피곤하다며 침대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몰라. 나 지금 너무 피곤해. 조금만 쉬었다 나가자.”
“조금 있으면 어두워지잖아. 응? 잠깐만 나갔다 오자. 나 샹 드 마르스 공원 데리고 가준다고 했잖아!”
하지만 아무리 혜원이 나가자고 졸라도 윤결은 요지부동이었다. 화가 난 혜원이 조르기를 포기한 듯 입을 꾹 다물며 침실을 나가 버리자, 그제야 윤결이 힐끔 그를 쳐다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칫. 내가 형 없으면 못 나갈 줄 알고?”
혜원은 호텔 입구에서 챙긴 거리 지도와 카메라 그리고 얼마의 현금을 챙겨 쌩하니 호텔 방을 나가버렸다.
“저 녀석이 진짜!”
여전히 겁 없이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혜원의 무방비한 모습에 윤결은 머리를 긁적이며 서둘러 뒤를 따라 나갔다.
전에 그렇게 호되게 당했으면서도 이상한 똥고집이 있는 혜원은 한번 하겠다고 마음을 정하면 꺾지를 않았다.
그사이 어디서 본 건 있어서 혜원은 오는 길에 사 들고 온 바게트를 들고 에펠탑이 잘 보이게 나란히 들고 사진 찍기에 열중이었다. 숨을 참아도 보고 앞으로 뒤로 움직여도 봤지만, 생각처럼 사진 찍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니까 여기서 빵을 들고 사진을 찍으면….”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기 위해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뒷걸음질을 치던 혜원은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와 부딪히자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쿵
“으… 으아악!!”
동시에 그의 가슴에 기댄 채 안기게 되고 만 혜원은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사과를 했다.
“Je suis désolé!”
[미안해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눈까지 꾹 감고 사과를 하는 바람에 혜원은 정확히 자신이 부딪힌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조차 하지 못했다.
“Est-ce que ça va?”
[괜찮으세요?]
‘아씨… 뭐라는 거야!!’
여행을 위해 급하게 공부한 단어라고는 ‘안녕하세요’, ‘미안합니다’와 ‘감사합니다’가 전부인 혜원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처럼 숙인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얼어붙어 버렸다.
“말도 제대로 못 알아들으면서 무슨 용기로 나 없이 혼자 뛰쳐나가는 거야 강혜원?”
“…어… 어?”
익숙한 언어와 친근한 목소리에 잔뜩 긴장했던 혜원은 슬며시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얼굴을 확인한 혜원은 왈칵 눈물이 나올 뻔했다.
윤결은 빨개진 눈으로 울음을 참으려 입술을 꽉 깨물고 서 있는 혜원을 내려다봤다. 이럴 거면서 무슨 용기로 혼자 뛰쳐나갔는지.
“이리 와.”
윤결은 살며시 혜원을 감싸 안으며 떨리는 그의 어깨를 토닥토닥 쓰다듬어 주었다.
“나 아직 호텔 갈 생각 없어.”
“알았어.”
“그리고 나 에펠탑 꼭대기도 올라갈 거야.”
“알았어.”
“튈르리 정원에서 산책도 할 거야. 그리고 ….”
“그리고 또 뭐?”
윤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의 얼굴엔 어디 한번 마음껏 말해 보라는 듯 여유로움까지 보였다.
“그리고 형이 나랑 같이 다녀 줬으면 좋겠어.”
“그 당연한 걸 참 빨리도 말한다.”
“미안해…. 혼자 멋대로 나와서. 그리고 고마워.”
혜원은 윤결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그의 품에 푹 안겼다. 넓은 그의 가슴에 코를 문지르며 익숙한 그의 향기에 작게 미소를 지었다.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존재이자 따뜻한 윤결의 품이 그리웠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윤결의 빈자리는 혜원에게 너무도 컸고, 혜원은 다시 한번 그의 소중함을 가슴 깊이 새기며 오랫동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
윤결은 약속대로 혜원이 원한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들어주며 따라다녀 주었다.
호기심 많은 다람쥐처럼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혜원을 따라다니기에 피곤할 법도 한데 그는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모든 일정을 소화했다.
어느덧 파리의 저녁이 다가오며 주위가 예쁜 노을빛으로 물들어 갈 때쯤이 되자 서서히 배고픔을 느낀 혜원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배고프다. 다리 아파.”
눈앞에 보이는 벤치에 털썩 내려앉은 혜원이 아픈 다리를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렇게 예쁜 야경을 두고 호텔로 들어가긴 싫었다. 배는 고프고 야경은 보고 싶고. 혜원은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서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혜원. 또 뭔데? 뭐가 문제야?”
윤결은 말없이 한숨만 푹푹 내쉬는 혜원의 곁에 앉으며 물었다. 정말이지 저 작은 머리통으로 생각한다고 해도 나오는 건 늘 엉뚱한 결과뿐인 것을, 대체 또 뭐가 그의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아니. 그게, 나 너무 배가 고파.”
“그럼 밥 먹으러 가면 되잖아. 뭐가 문제야?”
“근데 야경이 너무 예쁘잖아. 밥 먹느라 이 예쁜 풍경을 놓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저녁도 먹고 싶고 야경도 보고 싶다 이거 아니야?”
“…응.”
혜원은 자신이 윤결을 너무 귀찮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힐끔 그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피곤해서 호텔에 있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나온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또다시 그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 같아 살짝 눈치가 보였다.
“난 또 뭐라고. 잠깐만 여기 앉아 있어.”
윤결은 별것 아니라는 듯 빙그레 웃더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며 일어섰다. 벤치에서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유창한 프랑스 말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윤결은 환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를 끊었다.
혜원은 궁금한 얼굴로 윤결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통화를 마친 윤결이 혜원에게 다가오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원하는 거 다 들어 줄게. 대신 너도 오늘 밤 내가 원하는 거 다 들어 줘야 해. 알았지?”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밥도 먹고 야경도 볼 수 있는 곳으로 가자고.”
“어? 진짜?”
순간 혜원이 눈을 반짝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윤결이 마치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경이로운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어떻게 말만 하면 모든 걸 뚝딱 알아서 해결해주는지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가자.”
윤결은 기대에 찬 눈망울로 자신을 바라보는 혜원의 손을 잡으며 예약한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오늘 윤결은 그의 소원이자 자신의 소원을 바로 그곳에서 해결하겠다 마음먹었다.
윤결이 혜원을 데리고 도착한 곳은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는 강가에 정박되어 있는 꽤 큰 요트였다. 혜원은 대체 여긴 왜 왔냐는 듯한 얼굴로 윤결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밥은? 야경을 먼저 본다는 건가? 배고픈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요트와 윤결을 번갈아 보던 혜원이 망설이며 발걸음을 멈추자, 윤결이 그의 손을 잡고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며 말했다.
“타. 우리 오늘 이거 타고 밥도 먹고 야경 구경도 하고 잠도 자고 갈 거니까.”
“뭐??”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지 혜원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얼떨결에 윤결의 손에 이끌려 요트 안으로 끌려들어 가면서도 혜원은 여기서 뭘 하겠다는 건지 의심 섞인 눈초리로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정작 그를 따라 이 층 선상으로 올라간 혜원은 입이 떡 벌어지며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둘만의 테이블이 준비된 선상에는 은은한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야경을 즐기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언제 주문했는지 식탁에는 먹음직스러운 연어 샐러드와 방금 구운 듯 따끈따끈한 식전 빵이 놓여있었다.
“이, 이게 다 뭐야?”
“뭐긴. 네가 부탁한 것들이지. 야경도 보고 밥도 먹고.”
“아니… 그렇긴 한데….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자신의 부탁에 이 정도로 준비해 줄 것이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기껏해야 야경이 보이는 적당한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을 것으로 생각하던 혜원은 상상 밖의 럭셔리 디너에 말문이 다 막힐 정도였다.
배로 야경을 둘러보는 것도 모자라 선상에서 풀코스 저녁이라니! 어떻게 보면 이런 것들이 그저 수많은 일상 중 하나였을 윤결에겐 아무것도 아닌 일이겠지만, 털털하고 소박한 성격의 혜원에겐 깜짝 놀라고도 남을 일이었다.
“다 먹고 야경 구경 조금 더 하고 일 층 룸에서 자고 갈 거야.”
“여기서 잠도 자? 물 위에서?”
아무래도 호텔이 아닌 배 위에서 잠을 잔다는 게 어색한 혜원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생각보다 이 요트 편안해. 물 위에 떠 있는 느낌조차 안 들 테니까 미리 걱정부터 하지 말고 여기 앉아. 곧 메인 음식 나올 거야.”
“그래도….”
혜원은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준비된 음식은 먹어야 했기에 조심스럽게 의자를 빼며 자리에 앉았다.
배가 많이 고팠던 혜원은 샐러드 위에 빛깔 좋게 올려있는 연어를 먼저 맛봤다. 입에서 살살 녹는 훈제 연어의 맛은 일품이었다. 앞에 놓인 빵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혜원은 허겁지겁 연어 샐러드를 입에 넣기 바빴다.
윤결은 멀찌감치 서 있는 웨이터를 향해 손짓하며 빵을 가져가라고 지시했다. 웨이터가 오든지 말든지 샐러드에 정신이 팔려있던 혜원은 하나둘씩 사라지는 연어 조각에 아쉬워했다.
“혜원아, 여기 더 있으니까 천천히 먹어.”
“형은 안 먹어?”
“응. 나는 메인 나오면 그거 먹으면 돼.”
“헤헷! 그럼 이거 내가 다 먹는다!”
“얼마든지.”
윤결은 자신의 연어 조각을 그의 샐러드 위에 올려주며 말했다. 혜원이 먹는 것만 봐도 흐뭇했고, 그가 좋다면 연어로 성을 쌓아 달래도 만들어 줄 만큼 윤결은 혜원이 잘 먹는 것에 감사했다.
물론 먹는 것이라곤 풀떼기와 연어가 전부라 아무리 먹여도 살이 붙지 않는 게 고민이라면 고민이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좋아하는 음식이 있고 그것을 그에게 먹여 줄 수 있음에 행복했다.
어느 정도 샐러드로 혜원이 배를 채워 나가고 있을 때쯤 대망의 메인 디쉬가 등장했다. 지글거리는 시즐링 소리에 번쩍 고개를 든 혜원은 군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우, 우와! 형 이거 우리 거야?”
“그럼! 이 배에 우리 말고 또 누가 있다고. 다 혜원이 네 거야.”
눈이 오듯 요리된 연어 위에 알맞게 뿌려진 시즈닝. 핑크빛 살이 구릿빛으로 보기 좋게 익어있는 연어 스테이크의 모습에 혜원은 침이 고였다.
웨이터는 웃으며 뜨거우니 조심하라고 말을 하며 접시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이를 알아들을 리 없는 혜원은 마구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고 말을 했다.
혜원이 양손에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연어를 향하려는 찰나 윤결이 재빨리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
“잠깐. 이건 형이 해줄게.”
“응? 왜? 나도 할 수 있어. 내가 할게!”
눈앞의 고기가 윤결의 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 혜원이 대뜸 접시를 움켜잡으며 말했다.
그때였다.
“앗 뜨거!!”
그만 뜨거운 접시에 손가락을 덴 혜원이 화들짝 놀라 손을 떼며 귀를 잡았다.
“야!!”
분명 이럴까 봐 자신이 잘라서 주려고 했던 것인데 윤결은 이번에도 예상을 저버리지 않고 사고를 친 혜원 때문에 속이 타들어 갔다.
윤결은 서둘러 웨이터에게 아이스 팩을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다. 혜원은 손가락이 따끔따끔 아픔에도 지은 죄가 있어서 윤결의 눈치를 보느라 아픈 티도 내지 못했다.
웨이터가 얼음을 가지고 오자 윤결은 조심스럽게 혜원을 손을 살폈다. 울긋불긋한 것이 조금 있으면 물집이 잡힐 것 같았다.
“괜찮아. 진짜 별거 아닌데… 헤헤….”
건들기만 해도 움찔거릴 만큼 따끔하면서도 혜원은 괜찮다며 웃었다. 윤결은 안쓰러운 얼굴로 혜원의 손에 얼음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괜찮기는. 아프잖아. 화낸 거 아니야. 네가 아픈 게 싫어서 그랬어. 형이 더 조심해야 했는데 미안해.”
“아니야! 형이 미안할 게 뭐가 있어. 내가 조심성이 없어서 그런 거지. 앞으로 진짜 조심할게. 미안.”
혜원이 배시시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윤결은 빨개진 혜원의 손가락에 키스를 해주며 말했다.
“이 작은 손가락 하나하나까지 다 내 거니까 함부로 상처 내지 마 강혜원.”
작은 소동이었지만, 혜원은 윤결의 달콤한 속삭임에 얼굴이 붉어질 만큼 행복했다.
윤결은 문제의 연어 스테이크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혜원의 입에 넣어주었다. 입을 크게 벌려 넙죽 연어를 받아먹은 혜원은 오물거리며 맛있게 먹었다.
혜원의 먹는 모습만 봐도 윤결은 배가 불렀다. 양 볼 가득 음식을 넣고 웃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윤결은 그대로 혜원을 침대로 데려가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물론 오늘 밤 그를 쉽게 재울 생각은 없었지만, 밤새도록 그를 울리려면 그의 배를 든든히 채워줘야 하니 지금은 꾹 참을 수밖에.
어느 정도 저녁을 마무리한 뒤, 테이블이 깨끗이 치워졌고 예쁜 색깔의 와인과 칵테일 그리고 후식이 나왔다.
윤결은 혜원을 위해 달달한 과일이 섞인 칵테일을 주문했다. 역시 혜원은 눈을 반짝이며 관심을 보였다.
천천히 움직이는 요트는 어느덧 밤에 더욱 빛을 발하는 아름다운 노트르담 성당 주변을 돌고 있었다. 시원하게 부는 바람과 멋진 야경 그리고 분위기 좋은 음악까지.
혜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요트 끝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아름다운 파리의 밤을 구경했다. 칵테일과 와인잔을 들고 혜원의 곁에 다가선 윤결이 그에게 잔을 건네며 말했다.
“나랑 결혼해줘서 고마워 혜원아.”
“…나두.”
윤결이 건넨 칵테일 잔을 받아 들며 수줍은 목소리로 혜원이 대답했다.
서로의 잔을 부딪치며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윤결과 혜원. 점점 더 뜨거워지는 둘의 눈빛에 더 이상 야경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느덧 한 모금 마신 술에 취해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한 혜원의 눈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윤결은 그의 손에 들린 잔을 뺏어 테이블에 올려놓은 뒤 혜원을 안아 들었다.
“우리 혜원이 소원 들어줬으니까, 이젠 혜원이가 형 소원 들어줄 차례지?”
혜원도 그의 말이 무슨 뜻인 줄 알아들었다는 듯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은근 기다리고 있었던 거 아냐? 많이 야해졌는걸?”
“뭐, 뭐라는 거야! 내가 언제! 내려놔. 아 몰라 빨리 내려놔!”
속마음을 들킨 것이 부끄러웠는지 혜원은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소리쳤다. 하지만 혜원의 솜방망이 같은 주먹 공격마저도 윤결의 눈엔 그저 사랑스러운 애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알아서 내려줄 테니까 얌전히 좀 안겨 있지? 이러다 침대까지 가기도 전에 잡아먹는 수가 있어.”
“아 정말! 그 입 좀!”
“뭐 어때. 어차피 알아듣는 사람도 없는데. 안 그래? 그런 걱정 할 시간에 네 걱정이나 하시지? 내가 우리 혜원이를 발가벗겨서 잡아먹든 꽁꽁 묶어서 잡아먹든 지금부터는 내 시간이다. 강혜원. 그러니까 각오해!”
“미쳤어. 진짜!!”
후끈거리는 얼굴을 들지도 못하고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여 버린 혜원. 이미 그의 심장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
일 층에 마련된 방은 생각보다 넓고 편안했다. 침대도 호텔 못지않게 푹신푹신했고 무엇보다 성인 세 명은 족히 누울 만큼 넉넉했다.
윤결은 조심스레 혜원을 침대 위에 내려놓은 뒤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무언가 찾는 듯 이리저리 살피던 그는 드디어 원하던 것을 발견한 듯 씩 웃으며 봉투가 놓인 곳으로 다가갔다.
“줄리앙 자식. 그래도 용케 잘 찾아서 가져다 놨네.”
<몇 시간 전>
“줄리앙 난데. 부탁이 있어서.”
[부탁? 뭔데? 아니 그것보다, 오자마자 얼굴도 안 보여주고 부탁부터 하냐?]
“급해서 그래.”
[궁금하네. 우리 한윤결을 이렇게 초조하게 만들면서 부탁까지 하게 만드는 사람이 누군지.]
“됐고, 네가 소유한 그 요트 하루만 빌리자.”
[왜? 뭐 프러포즈라도 하게?]
“뭐…. 비슷해. 결혼한 사람이랑 같이 왔거든.”
[겨, 결혼한 사람? 무슨 소리야? 너 결혼했어? 루이는? 아니 그보다 나도 아는 사람이야?]
“궁금한 것도 많다. 나중에. 나중에 소개해 줄게. 아무튼, 요트랑 저녁 좀 준비해 줘. 아 그리고 내가 호텔 주소 줄 테니까 내 방에서 물건 하나만 가져다주라.”
[물건?]
“응. 있어. 가보면 알 거야. 트렁크 안에 작은 상자 하나 있을 거야.”
[그래. 알았다. 나중에 꼭 소개해 줘!]
**
윤결의 이 깜짝 이벤트를 가능하게 만들어 준 인물 줄리앙. 그리고 그가 가져다준 그 작은 선물 때문에 혜원의 엉덩이는 오늘 밤 너무 위태로워 보였다.
혜원은 요트 안에 이렇게 넓고 좋은 방이 있는 것이 신기한지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침대에서 퐁퐁 뛰어 보기도 하고, 침대에 대자로 누워 팔다리를 휘저으며 혼자 놀기에 푹 빠져 있었다.
윤결은 그런 혜원의 곁으로 다가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 놀 만큼 다 놀았지?”
“어? 어… 그러니까…. 음….”
갑자기 윤결이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 대자, 머쓱해진 혜원이 슬쩍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좋으면서도 왠지 모를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한눈에 봐도 당황한 듯 허둥대는 귀여운 혜원의 모습에 윤결은 그의 두 눈을 가리며 말했다.
“잠시만 이대로 눈 감고 있어 혜원아.”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은 혜원을 확인한 윤결은 조심스럽게 봉투에 담긴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는 검은 끈을 꺼내 그의 눈을 가렸다. 깜짝 놀란 혜원이 눈을 뜨려 했으나 이미 눈을 가린 끈이 머리 뒤로 꽁꽁 묶여 제대로 앞을 볼 수조차 없었다.
“혀, 형!”
앞이 보이지 않자 불안해진 혜원이 손을 허우적거리며 윤결을 찾았다.
“괜찮아. 나 여기 있어.”
윤결은 혜원의 손을 잡아주며 천천히 그를 일으켜 침대 위에 앉혔다.
“형 어디 가면 안 돼. 알았지?”
앞이 보이지 않자 겁먹은 혜원이 윤결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하루 종일 네 옆에 붙어있을 테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걱정은 안 해도 돼. 자 그럼 천천히 팔 좀 들어볼래?”
윤결의 리드에 혜원이 얌전히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렸다. 그러자 윤결이 재빨리 혜원의 상의를 벗기며 그를 침대 위로 밀어 눕혔다.
새하얀 그의 가슴과 핑크빛 작은 유두에 윤결은 벌써부터 아래가 불끈거렸다. 마음이 급해진 윤결은 서둘러 혜원의 바지와 브리프까지 거침없이 벗겨냈다.
“자, 잠깐만 형!”
순식간에 알몸이 되자 부끄러워진 혜원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이미 혜원의 다리 사이를 점령한 윤결은 그의 허벅지를 단단히 잡아 벌리며 고정시켰다.
가느다란 두 다리 사이에 자리한 아담한 성기를 내려다보며 윤결은 천천히 몸을 내려 그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하앗! 형! 나 아직 주, 준비가. 잠깐만!”
눈도 보이지 않는 데다 그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어 잔뜩 긴장한 혜원은 갑작스러운 그의 펠라에 몸을 굳히며 신음을 터트렸다.
천천히 부드럽게 혀를 움직이며 성기를 빨아대는 윤결의 뜨거운 펠라에 혜원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윤결은 입술을 잔뜩 오므린 채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혜원의 성기를 조였다 풀어주며 그를 애태웠다.
“하아… 제발…. 형 거기 너무… 흐응!”
자지러지는 혜원의 신음에 윤결은 천천히 그의 성기를 놓아주며 허벅지를 조금 더 벌렸다. 그리고는 꽉 다물려 있던 혜원의 구멍을 향해 혀를 밀어 넣었다.
“하앗! 안 돼!”
잔뜩 긴장한 혜원이 강하게 구멍을 조이며 저항했다. 하지만 윤결은 오히려 손가락까지 집어넣으며 그의 구멍을 풀어주기 위해 쉼 없이 움직였다.
구멍을 조이느라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혜원이 순간적으로 엉덩이에 힘을 풀자, 윤결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혀를 깊숙이 집어넣으며 그를 자극했다.
치밀어 오르는 쾌감에 허공을 휘젓던 혜원의 손이 자연스레 윤결의 머리로 향했다. 무엇이든 잡아야 했고 혜원은 윤결의 머리카락을 힘껏 움켜잡으며 입을 크게 벌렸다.
“흐응… 하아….”
윤결은 점점 더 야릇한 신음을 내며 쾌감에 젖어 가는 혜원의 얼굴을 감상했다. 어느덧 혜원의 성기가 잔뜩 몸을 부풀리며 찔끔찔끔 정액을 흘려대자, 윤결은 손을 뻗어 상자 속에 담긴 물건을 꺼내 들었다.
“잘 봐 혜원아. 이걸 어디에 쓰는 것인지 말이야.”
그의 구멍을 부드럽게 휘저으며 적시던 윤결의 혀가 빠져나가자 혜원의 작은 구멍이 아쉬운 듯 벌렁였다. 그리고 윤결은 순식간에 다람쥐 꼬리 모양의 딜도를 그의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지난번 윤결이 혜원에게 들켜버린 장난감 꼬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된 딜도였다. 힘들게 구한 만큼 원 없이 사용하리라 마음먹은 윤결. 그는 자지러지는 신음을 터트리는 혜원의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흐뭇해했다.
“아앗! 아, 아파! 흐앙!”
차갑고 단단한 무언가가 엉덩이 깊숙이 가르고 들어오자 혜원은 두 다리를 휘저으며 몸부림을 쳤다. 익숙지 않은 짧은 아픔이었다. 울먹이며 버둥거리던 혜원이 재빨리 몸을 돌려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려 했다. 윤결은 도망치는 혜원을 순순히 놓아주며 다음 장난감을 손에 들었다.
귀여운 다람쥐 귀 모양의 머리띠와 방울 목걸이. 윤결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그것들을 들고 혜원에게 다가갔다.
“이, 이거 뭐야. 이상해…. 흑흑… 이상해.”
엉덩이에 묵직이 달린 무언가에 놀란 혜원이 손으로 제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울먹였다. 솜 뭉치 같은 부드러운 무언가가 달랑달랑하자 혜원은 더욱 겁을 먹은 듯 그것을 빼내려 했다.
“잠깐. 거기까지. 아직 빼면 안 되지 강혜원.”
윤결에 의해 다시 손이 머리 위로 결박된 채 엉덩이가 치켜 들린 자세가 된 혜원. 윤결은 재빨리 그의 머리에 머리띠를 씌운 뒤 목에는 귀여운 방울 목걸이까지 달아주었다. 혜원은 계속해서 엉덩이를 움찔거리며 난데없이 침입한 불청객을 밀어내려 애썼다.
윤결은 혜원의 손을 놓아주며 다음 단계를 위해 혜원의 허리를 단단히 잡았다. 딜도의 버튼 중 가장 낮은 단계의 버튼을 누르자 잔잔한 진동과 함께 안에 박힌 딜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앗…. 하앗… 흐응…!! 이상해. 형! 자, 잠깐만 아, 안에… 하읏!”
실제로 삽입 섹스를 하는 것처럼 스스로 움직이는 딜도는 혜원의 예민한 부분을 건드리며 그를 점점 더 흥분하게 만들었다.
윤결은 재빨리 혜원의 몸을 뒤집어 자신을 마주 보게 눕혔다. 그리고는 눈을 가렸던 가리게 풀어주며 그의 눈을 마주 봤다. 촉촉이 젖은 혜원의 눈을 보니 윤결은 참을 수 없는 욕정이 터져 나왔다.
윤결은 그를 안아 들며 자신의 허벅지 위에 내려 앉혔다. 혜원은 본능적으로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딜도가 자극하는 엉덩이 깊은 곳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느덧 진동의 강도가 점점 더 높아지자 혜원은 마구 고개를 저으며 윤결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극한의 쾌락에 잠식되어 가던 혜원은 스스로 엉덩이를 들썩이며 기분 좋은 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앗…. 흐응… 조금만… 더… 하아….”
너무도 귀여운 혜원의 모습에 윤결은 이대로 그가 절정에 이르는 것을 보고 싶었으나 자신이 아닌 고작 장난감에 혜원을 빼앗기기는 싫었다.
혜원의 성기는 이미 언제 사정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단단해져 있었다. 더 이상 참기 힘들 만큼 아픔을 느낀 혜원이 목을 강하게 뒤로 젖히며 빠른 허리 짓을 시작했다.
“그건 안 되지 강혜원! 어디 감히 이딴 장난감 따위한테 발정하고 그래?”
윤결은 재빨리 혜원의 구멍을 틀어막고 있던 딜도를 뽑아내 버렸다. 그리고는 아직 다물리지 않은 혜원의 안으로 자신의 발기한 성기를 깊숙이 찔러 넣었다.
“아앗…! 너무… 하아… 깊어! 흐응!”
딜도가 주는 아픔과는 차원이 다른 고통이었다.
두꺼운 윤결의 성기는 거침없이 혜원이 자지러지는 부분을 한 번에 공격했고, 동시에 극도의 쾌감을 느낀 혜원이 우윳빛 정액을 쏘아 올리며 사정했다. 하지만 혜원이 잠깐 쉴 새도 없이 윤결은 그의 아랫배를 뚫을 기세로 강하게 추삽질을 이어갔다.
윤결의 허벅지 위에서 춤을 추듯 혜원의 가느다란 몸이 나풀거렸다.
“보여 혜원아? 여기 볼록 튀어나온 거 말이야.”
“하앗. 거기 마, 만지지 마. 제발!”
배꼽 위까지 깊이 삽입된 성기로 인해 살짝 튀어나온 혜원의 배를 살살 어루만지며 윤결이 짓궂게 애태우자, 또다시 사정감이 밀려온 혜원이 그의 가슴을 벗어나려 버둥거리며 소리쳤다.
더 이상 들어왔다간 망가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혜원이 몸을 비틀며 울부짖었다.
“조금만, 혜원아 조금만 더.”
- 퍽! 퍽! 퍽!
윤결은 그의 모든 것을 가지고 싶었고 누구도 갖지 못한 그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고 싶었다. 성기에 핏줄이 설 만큼 강도 높은 추삽질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만큼 혜원의 흐느낌은 커졌다.
“아파… 흐응…. 하앗! 흑흑… 아파.”
그의 작은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어갈 때쯤 절정에 치달은 윤결이 사정을 하며 혜원을 침대 위로 밀어 넘어트렸다.
“미치겠어. 강혜원. 너무 좋아.”
혜원의 가슴 위로 쓰러져 내린 윤결이 그의 목덜미에 코를 묻으며 속삭였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혜원이 윤결의 등을 감쌌다. 윤결은 재빨리 몸을 뒤집어 혜원을 자신의 가슴 위로 올려 눕혔다. 아직 윤결의 성기가 혜원의 안에 그대로 있었기에 움직일 때마다 혜원은 움찔움찔 몸을 떨며 엉덩이를 조였다.
“형. 우, 움직이지 마.”
목이 쉴 만큼 소리를 질렀던 터라 혜원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윤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정말이지 더는 소리를 지를 힘도 없었다.
“그럼 이렇게 조이지나 말든가.”
윤결은 자신을 꽉 잡고 놓지 않는 혜원의 탓이라는 듯 그의 허리에 다리를 둘러 그를 더욱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진짜야. 나 정말 아프단 말이야.”
그를 밀어낼 힘조차 없는지 혜원은 아무런 저항도 못 하고 윤결의 품에 얌전히 안겼다.
사실 처음 느껴보는 생소한 감각과 눈을 가려서 더욱 예민해졌던 몸은 아직도 윤결의 손이 닿기만 해도 흠칫 떨었다.
윤결은 귀여운 다람쥐 머리띠를 하고 안겨 있는 혜원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성기를 빼냈다.
“하읏….”
혜원이 앓는 신음을 삼키며 윤결의 목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 혜원도 윤결에게 바짝 안겨들었다.
한 번으로 끝내고 싶진 않았지만, 오늘 본 귀여운 혜원의 모습은 꽤 만족스러웠다. 겨우 첫날밤이 지났을 뿐이었다. 내일도 그리고 다음 날도 혜원과 함께할 날은 셀 수 없이 많았기에 윤결은 혜원의 머리카락 쓰다듬으며 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윤결은 쌕쌕 고른 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드는 혜원의 단정하고 고운 이마에 입맞춤을 해주었다. 아무리 안아도 갈증이 가시지 않을 만큼 혜원은 늘 새로웠고 가슴 설레게 했다.
어느덧 깊이 잠든 혜원을 이불 속에 넣어주며 그에게 팔베개를 해주었다. 꼼지락거리며 따뜻한 윤결의 품으로 파고드는 혜원. 그새 편안해진 듯 혜원의 얼굴에 피어난 작은 미소에 윤결의 입가에도 덩달아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랑할 수밖에 없고, 사랑밖에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이 작은 녀석을 윤결은 죽을 때까지 평생을 사랑하고 지켜주겠다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
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혜원은 온몸을 두들겨 맞은 것 같은 통증에 끙끙거렸다. 눈은 떴으나 도저히 움직여지지 않는 몸 상태에 억울해지기까지 했다.
파리에서의 하루하루는 너무도 순식간에 지나가기에 아직 볼 것도 많고, 갈 곳도 많은 혜원은 이렇게 침대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깨지 않은 윤결을 바라보며 시무룩해 있는 혜원의 뜨거운 시선을 느낀 것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윤결이 잔뜩 피곤한 얼굴로 잠에서 깼다.
어젯밤에 얼마나 울었는지 퉁퉁 부어있는 혜원의 눈을 보니 미안함이 올라왔다. 윤결은 살며시 손을 뻗어 혜원의 눈가를 어루만져주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Bonjour! 우리 혜원이 잘 잤어? 일찍 일어났네?”
“일찍은 무슨 아야야….”
혜원은 이미 해가 중천에 떴는데 뭐가 일찍이라고 자꾸만 자신을 다시 이불 속으로 집어넣으려는 윤결을 야무지게 뿌리치며 말했다.
하지만 동시에 엉덩이 깊숙한 곳부터 허리까지 올라오는 찌릿찌릿한 통증에 잔뜩 얼굴을 찡그렸다.
“혜원아, 많이 아파?”
“씨이… 말 시키지 마”
말하는 것조차 힘든지 혜원은 배개에 고개를 파묻으며 말했다.
미안해진 윤결이 몸을 일으키더니 화장실로 가 뜨거운 물과 수건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불을 살짝 들어 그의 가느다란 허리를 쓰다듬는 윤결의 손길에 화들짝 놀란 혜원이 고개를 들며 소리쳤다.
“으아악! 형 뭐 하는 거야. 설마 또 할 생각 아니지?!”
솜털이 다 쭈뼛 설 만큼 또다시 혜원의 몸이 예민해졌다. 이상하게도 윤결의 손이 닿은 곳은 뜨겁게 달아올랐고, 아파죽겠지만 몸은 또 즉각 반응했다.
“가만히 있어. 나를 대체 뭐로 생각하는 거야? 병든 병아리처럼 비실거리는 녀석 또 잡아먹을 만큼 양심 없지 않다고.”
“나 아파. 진짜 아프다고.”
혜원은 다시 얌전히 베개에 고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윤결은 아무런 생각도 없었는데 혼자만 어젯밤을 떠올린 것 같아 순간 너무도 부끄러워졌다.
윤결은 뜨거운 물에 적신 수건으로 혜원의 허리와 엉덩이를 마사지해 나가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은 듯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혜원이 작게 웃음을 지었다.
아픈 곳을 잘도 찾아내 시원하게 꾹꾹 눌러주는 윤결의 손길에 혜원은 슬슬 잠이 쏟아지려 했다.
‘아…. 오늘 갈 곳 많은데…. 공원…. 공원 가서 놀이기구 타야…. 하는데….’
머릿속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득했으나 역시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어느새 꾸벅꾸벅 잠에 빠지고 만 혜원. 윤결은 귀여운 혜원의 눈을 가리는 앞머리를 쓸어 올려주며 사랑스러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혜원과 처음 파리에 온 날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듯 윤결은 생각이 많아졌다.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고, 그에게 상처를 줬던 모든 시간을 되돌리고만 싶었다. 가슴이 뭉클해질 만큼 그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윤결은 새근새근 귀여운 숨소리를 내며 잠든 혜원의 입술에 다정히 키스를 해주며 속삭였다.
‘앞으로 웃는 일만 생기게 해줄게. 사랑한다 우리 혜원이.’
**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잠에서 깬 혜원이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기 전에 분명 옆에 있던 윤결이 보이지 않자 혜원은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래도 그를 찾아 나서야겠다는 생각에 혜원은 서둘러 어제 입었던 옷을 찾았다. 하지만 방 안 어디에도 옷은 보이지 않았다.
“뭐, 뭐야? 옷이 다 어디 간 거야?”
밖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는 마당에 벗은 채로 나갈 수도 없고…. 난감해하던 혜원은 마침 윤결의 옷인 것 같은 셔츠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몸에 걸쳤다.
허벅지를 반이나 가리는 넉넉한 사이즈에 마치 아들이 아빠 옷을 입은 꼴이었으나, 그래도 안 입는 것보단 나았기에 혜원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윤결을 찾아 선상 위로 올라갔다.
혜원은 선실 이곳저곳을 종종걸음으로 돌아다니며 윤결을 찾아다녔다. 그때였다. 때마침 브런치를 준비해 방으로 내려가려는 윤결을 발견한 혜원은 한걸음에 그를 부르며 달려갔다.
“윤결 형!”
아직 자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혜원이 자신의 셔츠를 입은 채로 달려오자 윤결은 또다시 심장이 두근거렸다.
속옷을 입지 않아 보일 듯 말 듯 한 그의 은밀한 부위에 윤결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꾹 눌러 참고 있던 늑대 같은 본성이 자꾸만 멋대로 튀어나오려 했다.
어느덧 윤결의 눈앞까지 달려와 멈춰 선 혜원을 보며 윤결이 애써 속마음을 감추며 말했다.
“아직 몸도 다 낫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뛰고 그래. 그러다 넘어지면 어쩌려고.”
“아니야. 나 이제 다 나았어. 하나도 안 아파. 형이 마사지해 줘서 그런가 너무 개운해!”
“그, 그래? 진짜 안 아파?”
“응. 아픈 곳은 없는데 나 배고파!”
천진난만한 혜원의 투정에 윤결이 씩 웃으며 손에 들린 트레이를 그의 앞에 보여 줬다.
언제 준비했는지 자신이 좋아하는 과일과 토스트가 가지런히 놓여있는 트레이에 눈을 반짝이던 혜원은 재빨리 블루베리를 한 움큼 입에 넣었다.
양 볼이 볼록 튀어나올 만큼 욕심 사납게 집어넣어서인지 혜원이 가쁜 기침을 해댔다.
“또또! 천천히 먹어! 누가 안 뺏어 먹어.”
혹시나 목에 걸릴까 싶어 윤결이 혜원의 등을 탕탕 두드려 주며 말했다.
많이 먹지도 못하는 녀석이 은근 좋아하는 음식에서는 과한 식탐을 보여 윤결은 늘 그를 말리기 바빴다.
원래는 방으로 브런치를 대령하려고 했으나, 혜원이 제 발로 나와 준 덕분에 윤결은 경치가 좋은 선상 정중앙에 마련된 테이블에 트레이를 내려놓으며 혜원을 불렀다.
혜원이 다가와 윤결의 앞자리에 앉으려 하자 윤결은 재빨리 그의 팔을 잡아 다시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며 말했다.
“누가 겁도 없이 그런 야한 차림으로 멋대로 방 안에서 나오래?”
“뭐, 뭐? 옷이 없는 걸 어쩌라고…. 대체 내 옷은 다 어디에 둔 거야? 왜 옷이 없어?”
“나 없는 사이에 무슨 사고라도 칠까 봐 옷을 숨겨놨더니, 그새를 못 참고 또 이걸 찾아서 입고 나온 거야?”
윤결이 셔츠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혜원의 가슴을 지분거리며 말했다. 정말이지 이 배에 아무도 없어서 망정이지, 누군가 있었다면 그 사람의 눈을 도려내 버릴 만큼 혜원에게 강한 집착을 보이며 말했다.
“아니 내가 무슨 사고를 친다고 옷을 숨겨! 그리고 소, 손 좀 빼! 어딜 만지는 거야!”
혜원은 다리를 벌리고 그의 허벅지 위에 앉은 자세도 불편해 죽겠는데, 자꾸만 자신의 가슴을 지분거리는 윤결의 손길에 버럭 소리를 지르며 부끄러워했다.
“만지라고 이런 옷 입고 나온 거 아니야?”
하지만 윤결은 오히려 더욱 바짝 끌어안으며 점점 더 그를 자극했다. 어느덧 바지를 뚫고 나올 기세로 부풀어 오른 윤결의 앞섶에 민망해진 혜원이 몸을 비틀며 내려가기 위해 버둥거리며 말했다.
“형, 자, 잠깐만…. 그러니까 저기… 내 자리에 앉으면 안 될까? 나 배고픈데….”
“먹어. 누가 먹지 말래? 뭐 먹고 싶은데? 딸기? 포도?”
“내가 알아서 먹을게. 나 좀 내려…. 하읏!”
힐끔힐끔 윤결의 눈치를 보던 혜원이 자꾸만 품을 벗어나려 하자, 윤결은 그윽한 시선으로 눈웃음을 지으며 그의 가슴을 핥았다. 윤결의 뜨거운 혀가 유두에 닿자 혜원은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떨었다.
잘근잘근 씹어대는 야릇한 감각에 혜원은 애처로운 눈으로 윤결을 쳐다봤다.
“형은 우리 혜원이가 맛있는데…. 그러니까 빨리 먹고 싶은 거 말해. 아니면 계속 형이 먹고 싶은 거 먹을 테니까.”
“… 나… 하읏… 딸기! 형 나 딸기 먹고 싶어… 흐읏!”
이대로는 도저히 버틸 자신이었었는지 혜원은 생각나는 대로 눈에 보이는 아무 과일이나 내뱉었다. 그러자 윤결은 고개를 끄덕이며 딸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혜원의 입술로 다가가며 툭툭 두드렸다.
잠시 망설이던 혜원은 천천히 입을 벌려 딸기를 베어 물었다. 하지만 혜원이 차마 입을 다물기도 전에 윤결이 불쑥 혀를 집어넣으며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입 안에서 맴돌던 딸기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붉은 딸기즙이 혜원의 입가에 흘러내렸다. 거친 호흡과 야릇한 신음, 그리고 두 혀가 엉키며 내는 질척한 소리에 둘은 점점 서로에게 빠져들며 흥분했다.
어느새 발기해버린 혜원의 성기가 윤결의 배에 닿았다. 윤결은 피식 웃으며 천천히 버클을 풀며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자신의 성기를 뺐다.
“혀, 형 빨리. 어떻게 좀 해 줘… 응? 빠, 빨리… 흐응!”
사정하고 싶어 몸을 파르르 떠는 가냘픈 혜원의 애원에 윤결은 두 성기를 맞잡으며 위아래로 힘주어 움직였다.
“하읏!”
예민해진 혜원이 윤결의 목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동시에 윤결의 손이 빨라졌다. 허리까지 들썩이며 애타게 윤결에게 매달려 있는 혜원의 가느다란 목덜미엔 어느새 핏줄이 바짝 섰다. 순간 윤결의 눈빛이 뜨겁게 변했다.
“하읏… 강혜원 진짜.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야하게 입고 나온 거야?”
윤결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혜원의 목덜미를 핥아 내렸다. 목덜미의 핏줄을 터트려 그의 목을 온통 붉은 피로 물들이고 싶은 잔인하리만큼 짙은 욕망이 들끓었다.
사정 직전까지 몰린 둘의 성기 끝에선 한두 방울씩 묽은 정액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참지 못한 혜원이 먼저 사정을 함과 동시에 윤결도 혜원의 목을 깨물며 사정을 했다.
“아흑! 하아… 하아….”
짧은 고통과 함께 찾아온 쾌락에 혜원은 그대로 윤결의 품에 안겼다.
어깨 위로 반쯤 흘러내린 셔츠 사이로 울긋불긋 붉은 자국이 생겨났다.
윤결은 혜원의 뒷머리를 찬찬히 쓰다듬어 주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를 달랬다.
“내가 배고프다고 했는데….”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혜원이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윤결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정말이지 이젠 배가 고파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미안.”
“나 딸기 다 먹지도 못했는데….”
“미안.”
윤결은 한순간의 유혹을 참지 못하고 또다시 혜원을 울리고 말았다는 생각에 미안해하며 말했다.
“나, 블루베리.”
혜원이 원하는 과일을 말하며 입을 벌리자 윤결이 웃으며 그의 입에 블루베리를 넣어주었다.
“사과.”
“그래.”
“오렌지.”
“그래.”
“복숭아.”
“그래.”
혜원은 계속해서 원하는 과일들을 말하며 윤결이 입에 넣어주는 과일들을 받아먹었다. 하지만 이내 혜원은 무언가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윤결을 노려보며 말했다.
“대체 언제 딸기처럼 먹여줄 건데? 딸기는 맛있었는데 다른 과일들은 맛없어. 나 딸기처럼 먹여주면 안 돼?”
“어? 딸기처럼?”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딸기로 시선을 돌리는 혜원의 모습에 윤결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귀여우면서도 엉큼한 강혜원. 언제 이렇게 변했나 싶을 정도로 혜원은 어느새 조금씩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고 있었다.
윤결은 너무도 사랑스러운 혜원을 품에 꼭 안아주며 뜨거운 키스를 했다.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둘은 오래오래 진한 키스를 나눴다. 그 어떤 키스보다 감미롭고 황홀한 키스에 혜원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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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서 뒹굴며 시간을 다 보낸 탓에 혜원이 다시 선상 위로 올라왔을 땐 이미 날이 다 저문 뒤였다. 하지만 혜원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이는 얼굴로 출렁이는 강을 내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불빛에 반짝이는 강은 마치 불꽃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예뻐 보였다. 손을 뻗으면 잡힐 것처럼 별이 쏟아지는 하늘도 너무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평범해 보일지 모를 이 모든 것들이 윤결과 함께여서 더 특별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 만큼, 어느덧 혜원의 마음은 윤결로 가득 차 있었다.
쌀쌀한 밤바람에 감기라도 걸릴까 싶어 윤결이 카디건을 들고 혜원의 곁으로 다가왔다. 윤결이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낀 혜원이 방긋 웃으며 그를 올려다봤다.
“안 추워?”
“추워.”
“그런데 왜 이렇게 얇게 입고 나와 있어.”
윤결이 그의 어깨에 카디건을 덮어 주며 말했다.
“어차피 이렇게 형이 챙겨 줄 거잖아.”
“나 없으면 어떻게 살려고?”
“내가 그 걱정을 왜 해야 해? 형이 그랬잖아.”
“내가? 흐음… 내가 뭐라고 했을까? 우리 혜원이한테?”
윤결이 궁금하다는 듯 그의 어깨를 살며시 끌어안으며 물었다. 따뜻한 온기에 혜원은 차가웠던 몸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아 더욱 바짝 안겨들며 말했다.
“욕심쟁이 형이 그랬잖아. 나보다 딱 하루만 더 살겠다고. 형 없이는 하루도 못 사는 나니까, 형이 나보다 딱 하루 더 살고 오겠다고.”
“그래…. 내가 그랬지.”
“나 형 없으면 못 사는 거 맞아. 형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것도 맞아. 형이 나보다 하루 더 살아 줬으면 하는 것도 맞아. 그러니까 형. 나보다 먼저 사라지지 마.”
“미안해 혜원아. 그동안 아프게 해서 너무 미안해.”
자신의 욕심 어린 고백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혜원에게 미안해진 윤결이 그의 어깨에 이마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또한, 그렇게 큰 상처를 주고 아프게만 한 자신을 이토록 믿고 의지해 주는 혜원에게 고마워 목이 메었다.
“누구나 처음은 있는 거잖아. 많이 서툴고, 많이 아프기 때문에 처음인 거잖아. 형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우린 모두 사랑이 서툴렀기에 아팠던 거야. 그러니까 이제 우리 그만 미안해하자.
물기에 젖은 듯 떨림이 느껴지는 혜원의 목소리에 어느덧 윤결의 눈가에도 눈물이 맺혔다. 윤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는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나를 용서해 줘서 고맙고, 내게 다시 돌아와 줘서 고마워. 이런 너를 가질 자격조차 없는 나지만, 이번 생이 끝나 다음 생이 온다 해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열렬히 사랑하자. 강혜원, 우리 꼭 그렇게 사랑하자.’
서로를 향한 뜨거운 눈빛 그리고 눈물에 젖은 키스. 밤이 깊어가도록 두 사람의 달콤한 입맞춤은 계속되었다.
우리의 사랑을 정의하자면 처음부터 뜨겁게 불타오르는 눈 부신 태양 같은 사랑은 아니었지만, 매 순간순간 뜨거워지며 심장으로 스며드는 따스한 햇볕 같은 사랑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너에게서 나로, 그리고 나에게서 너로 스며들며 하나가 되어가는 시간 동안 난 행복했고 또 그 시간들은 찬란하게 빛났다. 바로 강혜원, 다람쥐같이 귀여운 너로 인해.
누군들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우리의 이 위험한 동거가 이렇게 달콤한 사랑의 결실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특히 이 모든 발칙한 동거의 시작인 강혜윤, 그 녀석에겐 더더욱 상상하지 못했던 결과였으니 말이다.
어렵게 돌아온 사랑의 종착점. 그리고 시작되는 첫사랑.
누구를 위해서도, 누가 원해서도가 아닌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기에 운명처럼 시작된 사랑이라는 인연. 시간이 지나도 절대 바래지 않는 선명한 기억 속엔 너와 나 그리고 우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