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다시 찾은 행복 그리고
웃을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미국에서의 첫날. 혜원은 잠시 잊고 있던 반가운 얼굴의 등장에 환한 미소로 그를 반겼다.
“필립!”
“혜원!”
서로를 부둥켜안고 기쁨의 재회를 누리고 있는 두 녀석의 모습에 혜윤은 마치 보호자라도 된 듯 흐뭇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역시 혜원을 데리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립은 혜원을 자신의 친동생처럼 살뜰히 챙겼다. 혜윤이 있음에도 그녀보다 더 꼼꼼히 혜원을 보살피며 그의 기분을 살폈다. 그가 왜, 무슨 연유로 미국행을 선택했는지 잘 알고 있었던 필립이었기에 그의 모든 신경은 혜원에게 쏠려있었다.
여기에서만은 혜원이 예전처럼 환하게 웃고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에 필립은 거의 자신의 모든 생활 패턴을 그에게 맞춰가며 생활했다.
혜윤은 대학 입학을 준비하느라 공부에 열중하는 날이 많아졌고, 아직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찾지 못한 혜원은 공부보다는 휴식을 택했다. 그리고 그런 혜원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는 건 당연히 필립이었다.
애인인 자신보다 혜원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필립에게 혜윤이 질투 섞인 농담을 던질 정도로 둘의 사이는 돈독했다.
“혜원아, 예전에 내가 발견한 맛집이 있는데 우리 오늘은 거기 한번 가보지 않을래?”
먹여도 먹여도 살이 찌지 않는 혜원의 비실비실한 몸을 이리저리 훑어보던 필립은 순간 좋은 생각이 난 듯 그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그래? 거기가 어딘데 형?”
아직 밖에 나가는 걸 어색해하는 혜원이 마지 못해 따라 일어나며 물었다. 필립에게 친근하게 형이라고 부를 만큼 가까워진 둘은 어느새 떼려야 떼어낼 수 없는 단짝이 되어있었다.
필립이 자신을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지 잘 아는 혜원은 웬만해서는 그의 부탁은 뭐든 들어주려 했다.
“차 타고 두 시간 정도 떨어진 해안가 근처에 있는 가게인데, 피시 앤 칩으로 유명해. 전에 한번 혜윤이랑 먹으러 갔는데 나중에 너도 꼭 데리고 오겠다고 마음먹었던 곳이야. 같이 가자 혜원아.”
“지금?”
갑자기 두 시간이 걸리는 곳으로 밥을 점심을 먹으러 가자니?! 아무리 필립의 부탁이었지만 가는 데 두 시간 먹는 데 한 시간 또 오는 데 두 시간, 왠지 오늘 하루는 그곳에서 다 보내고 올 것 같아 혜원은 살짝 망설였다.
사실 운전해야 하는 필립에게 미안했고 또 굳이 점심 한 끼 먹으러 그 먼 곳까지 가는 것도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필립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혜원에게 좀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자꾸 집에만 있으려고 하는 혜원에게 바다를 보여주면 기분전환도 되고 또 답답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필립은 최대한 혜원의 귀여운 얼굴을 살려주는 옷으로 그를 단장시키며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오랜만에 장거리 데이트라 그런지 필립은 한껏 들떠 있었다.
**
바닷가에 도착한 혜원은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맨발로 해변을 걸었다. 햇볕에 데워진 따끈따끈한 모래사장을 밟는 기분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뒤에서는 필립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혜원의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마치 주인과 산책 나온 강아지처럼 필립은 조심조심 혜원의 뒤를 걸으며 장난칠 기회를 엿봤다. 혜원이 필립을 부르려 뒤를 돌아본 순간 필립은 대뜸 그의 모자를 벗겨 들고 달리며 말했다.
“캐치 미!”
“엇! 내 모자!!”
순식간에 모자를 빼앗긴 혜원이 그를 따라 해변을 달렸다. 뛰려고 다리에 힘을 줄 때마다 푹푹 모래 깊숙이 발이 박히는 통에 필립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스텝이 꼬여버린 혜원이 몸을 휘청이며 넘어지자 앞서 달리던 필립이 다시 뒤를 돌아 달려왔다. 그는 넘어진 채 하늘을 올려다보며 멍하니 누워있는 혜원의 곁에 나란히 누우며 말했다.
“어때? 마음이 좀 시원해?”
“응….”
귀신같이 우울한 자신의 마음을 알아채며 위로해 주는 필립의 다정함에 혜원이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기특하네, 우리 혜원이.”
오랜만에 혜원의 웃는 모습을 보고 기분이 좋아진 필립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혜원이 재빨리 필립의 손에 들려있던 모자를 낚아채 가며 소리쳤다.
“잡았다!”
혜원은 뺏어 든 모자를 머리에 꾹 눌러 쓰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지금만큼은 필립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혜원의 복잡한 심경을 눈치챈 듯, 필립도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 숙인 혜원의 손을 잡고 말없이 걸었다.
얼마나 보고 싶을까, 얼마나 돌아가고 싶을까. 보고 있기 안쓰러울 정도로 가슴 아픈 혜원의 사랑에 필립은 그저 묵묵히 그의 곁을 지켜줄 뿐이었다.
필립이 추천한 식당은 맛집으로 소문이 나서인지 테이블이 비길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미 출발하기 전 예약을 마친 필립과 혜원은 다행히 바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기대했던 것처럼 음식의 맛은 훌륭했다. 겉은 바삭 속은 촉촉한 생선튀김은 입맛이 까다로운 혜원도 홀딱 반하게 만들었다. 튀김을 반으로 쪼개니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새어 나왔다. 그 사이로 보이는 통통하고 새하얀 생선 살은 입에 넣자마자 사르륵 녹아내렸다.
너무도 맛있게 먹는 혜원의 모습에 필립은 뿌듯했다.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그가 조금이나마 걱정과 근심을 내려놓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를 바라며 필립은 자신의 몫까지 혜원의 그릇에 놓아주며 말했다.
“혜원이가 잘 먹으니까 너무 좋다. 분명 윤결 씨도 봤으면 좋아했을 거야.”
“… 응.”
윤결이라는 말에 순간 혜원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괜찮다는 듯 살며시 손을 잡아주는 필립의 모습에 혜원 또한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지금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람이 필립이 아니라 윤결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혜원은 여전히 윤결을 마음속에서 밀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그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리고 혜원은 필립에게만은 윤결에 대한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한 사람에게만은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조금이나마 숨을 쉬고 싶었다.
이런 혜원의 마음을 너무도 잘 이해해주는 필립은 애써 눈물을 삼키며 참아내는 혜원을 품에 안아주며 말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건 나쁜 게 아니야. 상대가 남자라는 이유로 비판을 받을 필요도, 도망칠 필요는 더더욱 없어. 그러니까 혜원아, 난 네가 윤결 씨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해. 두 사람처럼 잘 어울리고 아름다운 사랑을 하는 사람, 난 아직까지 보지 못했는걸? 네가 윤결 씨가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윤결 씨도 네가 없으면 안 돼. 둘은 기적 같은 운명으로 만난 사람들이니까.”
너무도 따뜻한 필립의 말에 혜원은 그만 왈칵 눈물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혜원은 깨달았다. 감추고 숨긴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렇게 필립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혜원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지금까지는 윤결에게 방해가 될까 봐 도망치려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젠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과 함께 언젠가 그를 다시 만나게 되면 한층 성장한 모습으로 그를 기쁘게 해주고 싶어졌다.
윤결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한 혜원은 뒤늦게 혜윤과 함께 공부를 시작했다.
목표가 생긴 혜원은 누구보다 독하게 공부에 매달렸다. 밤을 새우거나 코피를 쏟는 날도 많았고 이를 말리다 보다 못한 혜준과 혜윤이 그의 책을 숨겨버릴 정도로 혜원은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렸다.
그렇게 혜원이 공부를 시작한 지 세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석 달이라는 시간 동안 혜원은 앳된 미소년의 이미지에서 어느새 성숙미가 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청년이 되어있었다.
누구나 한 번쯤 뒤돌아 말을 걸고 싶게 만들 만큼 물오른 혜원의 미모는 이미 동네에선 소문이 자자해져 있었다. 말이라도 걸어보기 위해 그를 노리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혜윤과 필립의 경계도 만만치 않았지만 말이다.
**
혜원이 떠나고 윤결은 정신없이 일에 매달렸다. 하루라도 더 빨리 혜원에게 가기 위해 윤결은 잠자는 시간도, 밥 먹는 시간도 줄여가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들을 소화해 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만나야 하는 바이어들과의 미팅들. 이동하는 차에서도 그는 서류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피로가 밀려와 잠시 눈을 붙일 때도 윤결의 머릿속엔 온통 혜원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윤결은 온통 혜원의 흔적으로 가득한 거실에 서서 주인 없는 방을 바라보며 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혜원아, 오늘도 잘 다녀왔어.”
혜원의 옷과 신발, 그가 쓰던 칫솔과 수저까지. 윤결은 그 무엇 하나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며 그와 함께 지내는 것처럼 생활했다. 혜원의 체향이 배어 있는 베개를 베고 눈을 감으면 마치 그와 함께 자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 혜원이, 형 없다고 울고 있으면 안 되는데…. 우리 울보 혜원이 옆에 있어 줘야 하는데…. 빨리 갈게 혜원아. 조금만 기다려줘.”
혜원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커갈수록 단단해지는 윤결의 마음. 그를 데리러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오늘도 윤결의 얼굴엔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
혜원은 조용한 카페에서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다. 다행히 집 앞에는 그가 좋아할 만한 정원처럼 꾸며진 작은 카페가 있었다.
매일 아침 해가 잘 드는 창가에 앉아 시원한 아메리카노와 크랜베리 스콘으로 아침을 시작하는 혜원은 이미 카페 직원들 사이에서는 유명했다. 귀밑까지 자란 단발머리를 질끈 묶고 가늘고 흰 목선이 훤히 드러나는 브이넥 셔츠에 청바지만 입고 나왔을 뿐인데도 청초함이 물씬 풍겼다.
그가 매일 같이 이곳에 온다는 것을 아는 몇몇 단골들은 혜원이 오는 시간에 맞춰 일부러 자리를 잡고 앉아 기다릴 정도였다. 하지만 늘 이어폰을 끼고 공부에 열중하는 혜원은 그런 사람들의 시선들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한 번씩 피곤한 눈을 쉬게 해주기 위해 혜원이 고개를 들어 정원을 바라볼 때면 직원들은 일제히 그를 바라보며 흐뭇해했고 혜원이 카페에 오래 머물러 주길 바랐다.
작은 종이 딸랑 울리며 한 남자가 카페 안으로 들어오자, 직원들은 일제히 그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익숙하다는 듯 카페 매니저를 부르며 그가 왔음을 알렸다.
“매니저님! 사장님 오셨어요!”
큰 소리로 부르는 직원의 목소리에 잠시 창밖을 내다보던 혜원이 그를 쳐다봤다. 순간 눈이 마주친 혜원은 깜짝 놀라며 잠시 남자를 멍하니 쳐다봤다. 닮아도 너무 닮은 사람. 매일 같이 생각하던 사람이 눈앞에 나타난 것 같은 꿈같은 상황에 혜원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윤결 형….’
그동안 애써 참고 있던 윤결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 가슴을 아프게 쑤셔왔다.
남자는 자신을 쳐다보며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는 혜원의 모습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물론 같은 동양인이라는 사실도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너무도 사랑스러운 혜원의 놀란 모습에 첫눈에 반해버리기라도 한 듯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에이든, 왔어? 뭐 해?”
매니저는 오랜만에 카페를 방문한 카페 사장이자 절친인 에이든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어. 저 사람 누구?”
“아, 우리 카페 단골. 예쁘지?”
그는 넋을 잃고 혜원을 바라보는 에이든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언제부터?”
“네가 잠적한 다음부터? 한 두세 달 됐나? 매번 이 시간에 와서 두 시간 정도 있다가 가더라고. 학생인 것 같던데…. 어때? 꽤 예쁘지 않아? 눈독 들이는 사람 많아. 너도 줄 서야 할걸?”
“이름은?”
“그거야 모르지. 한 번도 말을 걸어 본 적은 없어.”
“단골이라며.”
“단골이긴 한데, 굉장히 철벽을 친다고 할까? 음료를 주문할 때 외엔 말을 하지도, 우리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아. 가끔은 시간 맞춰서 데리러 오는 사람도 있고.”
“애인?”
“글쎄? 애인 같지는 않았지만, 엄청 챙기던데? 왜 관심이 생기셨어?”
그답지 않게 누군가에게 관심을 보이는 에이든의 모습에 매니저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뜨며 물었다. 학창시절 내내 친구로 지냈지만, 그가 누군가에게 이 정도로 관심을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
장난스러운 그의 물음에도 에이든은 무슨 생각인지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허겁지겁 짐을 챙겨 카페를 나가려는 혜원의 테이블로 다가가며 그의 앞에 멈춰 섰다.
에이든은 ‘강혜원’이라고 적혀있는 책을 무심코 내려다보며 그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혜원은 갑자기 자신의 앞에 우뚝 멈춰선 남자의 등장에 짐을 챙겨 일어나려던 움직임을 멈추며 살며시 그를 올려다봤다.
그는 한쪽 눈을 살짝 찡그린 채 혜원이 손도 대지 않은 스콘과 반도 마시지 않은 커피를 내려다보며 한국말로 물었다.
“맛이 없었나 봅니다.”
“… 네?”
“손도 대지 않으셨네요.”
“아….”
그제야 혜원은 아직 한 입도 먹지 못한 스콘을 힐끔 내려다봤다.
“혹시라도 입맛에 맞지 않았다면 죄송합니다. 다른 것으로 바꿔 드릴까요?”
“아, 아니에요! 맛있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빵인걸요. 다만 오늘은 제가 시, 시간이 없어서 포장해서 가려고요. 맛없어서 안 먹은 거 아닌데…. 어? 저기 그러니까…?”
하지만 순간 혜원은 그가 한국말로 자신에게 질문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며 그를 쳐다봤다. 윤결과 닮은 것도 모자라 한국인이었다니.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혜원에게 그는 웃으며 말했다.
“네. 저 한국 사람 맞습니다. 그리고 이 카페 사장이고요. 스콘은 바로 구웠을 때가 가장 맛있거든요. 시간이 지나면 딱딱해지고 수분이 빠져나가서 본래의 맛을 느낄 수 없죠. 잠시만요. 카터?”
에이든은 손가락을 튕기며 매니저인 카터를 불렀다. 영문도 모른 채 불려온 카터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다가와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손님이 포장해가실 스콘 다른 것으로 준비해 드려. 방금 나온 거로. 이거 집에 가져가 봤자 맛없어.”
“아, 안 그래도 돼요! 그냥 이거 가져갈게요. 포장해주세요!”
갑자기 민폐 손님이 된 것 같은 미안함에 혜원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하지만 에이든의 마음을 눈치챈 카터가 재빨리 스콘이 담긴 접시를 가져가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바로 포장해서 드릴게요.”
“그, 그냥 그대로 주세요!”
멀어지는 카터를 향해 혜원이 소심한 목소리로 말하자, 그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든은 민망해하는 혜원의 앞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포장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는데 앉아서 기다리시죠?”
“정말 괜찮은데….”
“아닙니다. 전 저희 카페에 오신 손님은 모두 최고의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원칙이 있어서 이렇게 다 식은 맛없는 스콘을 포장해드리는 건 용납할 수 없어서요.”
“그래도요. 너무 죄송해서.”
너무도 미안해하는 혜원의 모습에 에이든은 좋은 생각이 난 듯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정 그렇게 미안하시면, 언제 한번 시간 내주세요. 이렇게 낯선 외국에서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나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전 당신을 만나서 굉장히 반갑거든요. 강혜원 씨.”
“네?? 어, 어떻게 제 이름을….”
갑자기 오늘 처음 본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순간 긴장한 혜원이 잔뜩 그를 경계하며 물었다.
“테이블에 놓인 책에 이름이 적혀있길래. 전 단지 반가워서 불렀던 것뿐입니다. 다른 뜻은 없으니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아, 책…. 제가 책에 이름을 적는 버릇이 있어서….”
괜히 민망해진 혜원이 슬쩍 책을 들어 가슴에 안으며 말했다.
어느덧 카터가 포장된 스콘을 가지고 오자 혜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건넨 봉투를 챙기며 카터와 에이든에게 인사를 건넸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맛있게 드셔주시는 것만으로 감사한걸요. 다음에 시간 꼭 내주세요. 혜원 씨.”
“네. 그, 그럼 안녕히 계세요.”
에이든은 쏜살같이 밖으로 나가는 혜원의 뒷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오랜만에 카페에 출근 도장 찍게 생겼는걸? 자주 봐요. 강혜원 씨.’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혜원은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카페에서부터 두근거리던 심장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마, 말도 안 돼. 어쩜 저렇게 닮을 수 있어? 내 눈이 이상해진 건가?”
미국에서 처음 만난 한국인이기도 했지만, 너무도 윤결과 닮은 외모에 혜원은 기분이 이상했다.
오랜만에 느긋하게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필립은 예상보다 빨리 집으로 들어가는 혜원을 발견하고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서둘러 그의 집으로 향했다.
“혜원아? 문 열어봐. 나야 필립!”
쿵쿵거리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멍때리고 있던 혜원이 정신을 차리며 문을 열고 나왔다.
“어? 필립 형.”
“너 무슨 일 있어? 왜 이렇게 땀을 흘려?”
필립은 벌게진 얼굴로 숨을 헐떡이는 혜원을 이리저리 살피며 물었다. 혹시 잠시 혼자 놔둔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당한 건 아닌지 그의 몸 이곳저곳을 꼼꼼히 확인했다.
“진짜 아무 일 없었어. 내가 뛰어와서 그런가 봐. 미안.”
혜원은 본의 아니게 또 그에게 걱정을 끼친 것 같아 멋쩍은 듯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며 말했다.
“정말이지?”
“응. 봐봐. 나 멀쩡하잖아.”
“그럼 다행이고. 그런데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너 아직 집에 올 시간 아닌데?”
이미 혜원의 스케줄을 꿰차고 있는 필립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냥 오늘은 집에서 공부하고 싶어서. 참, 필립 형. 스콘 먹을래? 방금 구운 거라 맛있어. 같이 먹자.”
“먹고 오지 뭘 또 사 왔어.”
“아, 이거 카페 사장님이 챙겨주셨어.”
“뭐? 사장이? 왜?”
“음. 글쎄…. 아 맞다. 근데 그거 알아? 카페 사장님이 한국 분이셨어. 아마 그래서 더 챙겨주신 거 같기도 하고. 정말 신기했어.”
하지만 혜원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필립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관심 없는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 리 없었기에 카페 사장이라는 사람의 지나친 친절과 관심이 필립은 내심 마음에 걸렸다.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혜원이야 같은 한국 사람이니 반가운 마음에 받았을 수도 있으나, 경계심이 강한 필립은 카페 사장의 관심이 좋게만은 보이지 않았다. 필립은 잔뜩 날이 선 눈빛으로 혜원이 건넨 스콘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강혜원, 내가 말했지. 아무나 따라가지 말고,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거 덥석 받지 말라고.”
“응. 근데 이건 그냥 카페 사장님이….”
“너 그 카페 사장 잘 알아? 이름은? 나이는? 사는 곳은?”
“아, 아니. 그런 건 나도 모르지….”
“그러니까. 그럼 모르는 사람인 거야. 앞으로 그 사람이 주는 거 함부로 받지 마.”
“알았어.”
또 필립에게 잔소리를 듣고 만 혜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동시에 혜원은 남자의 웃는 얼굴이 낯설지 않아 힐끔 필립의 눈치를 살피며 생각했다.
‘그렇게 나쁜 사람처럼은 안 보였는데….’
윤결과 닮아서 그런지 그 남자에게선 왠지 모르게 친숙한 느낌까지 들었다. 하지만 역시, 필립에게 걱정을 끼칠 수는 없었기에 혜원은 잠자코 알겠다고 말하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혜원이 방으로 들어간 뒤 그래도 불안함이 가시지 않았는지 필립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는 익숙한 번호를 눌러 무언가를 적으며 전송 버튼을 눌렀다.
아무래도 너무 오래 혜원을 혼자 두는 건 위험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고, 지금 혜원의 곁에서 그를 지킬 사람은 오직 이 남자뿐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한윤결 씨. 대체 혜원이 언제까지 혼자 둘 겁니까? 지키는 것도 한계가 있고, 기다리는 것도 너무 오래되면 지쳐 포기하는 법입니다. 슬슬 데리러 와야 하지 않을까요? 이러다 힘들게 키운 혜원이 다른 사람이 채갈지도 모르는데…. 괜찮겠어요?]
필립이 보낸 의미심장한 문자 한 통. 그리고 이 문자를 받은 윤결은 모든 일정을 뒤로 미루고 바로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어떻게 키운 혜원인데 감히 그를 넘보는 사람이 생겨났다는 말에 윤결은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감히 누굴 넘봐? 내가 너무 풀어줬네. 강혜원. 이상한 새끼나 꼬이게 하고 말이야. 얌전히 있어야 할 거야. 아니면 형이 굉장히 화가 날 것 같거든.”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도 윤결의 질투 섞인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반면, 그가 온다는 것을 알 리 없는 혜원은 여전히 윤결의 사진을 바라보며 남몰래 그를 향한 그리운 속마음을 털어놨다.
“나 오늘 형이랑 굉장히 닮은 사람은 만났어. 신기하지? 마치 내가 형을 보고 싶어 하는 걸 알고 하늘에서 선물이라도 내려준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니까. 형은 잘 지내고 있지? 보고 싶다. 매일매일 보고 싶어 윤결 형.”
**
다음 날 아침. 혜원은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카페로 향했다. 물론 어제 본 남자가 혹시나 오늘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긴 했으나, 그가 있든 없든 딱히 중요하진 않았다.
카페에서 공부를 하는 건 매일 아침 학교에 출석하는 것처럼 혜원에게는 여느 때와 변함없이 평범한 아침 일과일 뿐이었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자리에 앉아 커피와 스콘을 시킨 혜원은 잠시 카페 안을 둘러봤다. 다행히 어제 만났던 사장이라는 남자는 없는 듯 보였다.
혜원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책을 폈다. 단어 하나하나에 하이라이트를 치며 집중하기 시작한 혜원은 누군가 자신의 곁으로 걸어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열중하기 시작했다.
“Exhaustive, comprehensive, complete, all-inclusive…….”
“SAT 준비 중이신가 봐요?”
“네?”
주문한 커피와 따끈따끈 잘 구워진 스콘을 들고 나타난 에이든의 모습에 혜원은 깜짝 놀라며 들고 있던 연필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음식이 담긴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에이든이 떨어진 혜원의 연필을 주워 그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대학 입학 준비하시는 건가요?”
“아. 네. 생각보다 많이 어려워서…. 저기…. 가, 감사합니다.”
혜원은 굳이 가져다줄 필요가 없음에도 직접 자리까지 음식을 가지고 와준 에이든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넨 뒤 다시 고개를 돌려 책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하지만 역시 그의 얼굴을 다시 마주하니 머릿속이 복잡해지며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다.
“저랑 한 약속, 잊지는 않으셨죠?”
“네? 약속이요?”
“전에 시간 한번 내주신다고 하신 거요.”
“아…. 그거요. 저기 그러니까…. 그럼 혹시 언제 시간이 괜찮으세요?”
그가 진심으로 시간을 내어달라고 할 줄은 몰랐기에 혜원은 다소 당황한 듯 말까지 더듬으며 물었다. 사실 누구의 부탁이든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혜원의 성격상 이런 상황은 그에게 너무도 부담스러웠다.
“오늘 저녁은 어떠세요?”
“오늘 저녁이요?”
“혹시 저녁에 약속이 있으세요?”
“아니, 그건 아닌데요….”
혜원은 굳이 저녁에 다시 집 밖으로 나오고 싶지 않아 적당한 핑곗거리를 생각해 봤다. 하지만 거짓말이 익숙하지 않은 혜원은 얼굴에 티가 나게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에 잠겼다.
윤결과 닮은 건 닮은 거고 그렇다고 그와 무언가를 할 생각은 결코 없었기에 혜원은 난감해했다.
“특별한 일이 있으신 게 아니면 저녁에 잠깐 만날까요? 마침 제가 근사한 식당도 알고 있거든요.”
“그, 그래도 제가 너무 신세를 지는 것 같은데….”
“제가 혼자 저녁 먹기 싫어서 그래요. 마침 같은 한국 사람을 만나서 저도 굉장히 반갑고 신기하기도 해서요. 저녁 같이 먹어 주실 거죠?”
“그럼 그렇게 해요. 제가 이따가 카페 앞으로 나올게요. 사장님.”
“아니에요. 제가 집 앞으로 데리러 갈게요. 굳이 여기까지 올 거 없어요. 그리고 제 이름, 사장님 아닙니다. 에이든 리. 그냥 에이든이라고 부르시면 돼요.”
“아. 네. 에이든 씨.”
신세 진 것도 있고 친절한 그에게 계속해서 거절하기 미안해진 혜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소를 알려주었다.
어찌 됐든 윤결과 닮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혜원의 경계심은 그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에이든은 웃으며 나중에 보자고 인사를 건네고는 카운터로 돌아왔다.
“대박. 에이든. 너 지금 뭐 한 거냐?”
카터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저렇게 쉽게 그의 주소를 얻을 수 있는지 보고서도 두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하지만 에이든은 호들갑스러운 카터의 반응에도 카운터 테이블에 턱을 괸 채 물끄러미 혜원을 바라봤다.
그의 작은 몸짓 하나하나에도 시선이 쏠리고 입가에 환한 미소가 지어질 만큼 에이든은 자신의 눈에 들어온 혜원이 마냥 귀엽기만 했다. 어디서 저렇게 귀여운 녀석이 굴러들어왔는지, 미국 생활 20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관심을 끈 혜원이 그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혜원은 어떻게 집으로 왔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뛰어 집으로 돌아왔다. 얼떨결에 잡은 저녁 약속이라 약간 걱정되긴 했지만, 빨리 밥만 먹고 오면 될 거란 생각에 필립이나 혜윤에게는 비밀로 하기로 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인데 괜히 말했다가 또 잔소리를 잔뜩 들을 생각을 하니 역시 혼자 조용히 다녀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마침 오늘은 필립과 혜윤이 영화를 보고 늦게 들어올 예정이라 들킬 걱정도 없어 보였다. 혼자서 완벽한 계획을 짰다고 생각하는 혜원. 그리고 오늘 밤, 윤결이 미국에 도착할 예정이라는 걸 꿈에도 모르는 혜원의 깜찍한 계획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말이다.
**
이른 마감을 하고 혜원의 집으로 향하는 에이든은 오랜만에 향수까지 뿌리며 신경을 썼다. 이런 만남 자체가 오랜만이었고 특히 이번처럼 마음에 쏙 드는 녀석을 만난 것도 처음이라 에이든도 살짝 긴장됐다.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고, 좋은 것만 보게 해주고 싶은 마음. 아마 이게 연애의 감정일까 싶은 두근거림까지. 에이든은 보면 볼수록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드는 혜원의 묘한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어느덧 그의 집 앞에 도착해 주차하려 하자, 때마침 혜원도 집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에이든은 반가운 마음에 차창 문을 열고 그를 불렀다.
“혜원 씨!”
역시 외국에서 들리는 모국어는 혜원의 귀에 쏙 들어왔다. 혜원은 자신을 부르는 우렁찬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며 주차된 차를 쳐다봤다. 사람 좋은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는 에이든을 발견한 혜원이 종종걸음으로 달려가며 말했다.
“제가 좀 늦었죠? 죄송해요.”
“아니에요. 저도 방금 왔는걸요?”
에이든은 단발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가벼운 후드 차림에 면바지를 입고 나온 혜원을 맞이하러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그는 친절히 조수석 문을 열어주며 혜원이 타기를 기다렸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혜원이 차에 오르자 에이든은 천천히 차를 출발시키며 예약한 식당으로 향했다.
캐주얼한 펍 형태의 레스토랑은 젊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거기다 신나는 음악까지 흘러나오는 요즘 핫한 곳으로 혜원에게는 처음 와보는 신세계였다. 술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혜원은 음료수처럼 맥주를 병째 들고 마시는 사람들이 그저 신기해 보이기만 했다.
에이든은 넋을 놓은 채 주변을 구경하는 혜원을 대신해 이 집의 대표 음식과 간단히 맥주 한 잔씩을 주문했다. 혜원이 이런 곳에 자주 와보지 않았을 거라는 건 짐작했지만, 서툰 그의 행동과 놀란 표정들은 에이든으로 하여금 흐뭇한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에이든은 먹기 좋게 잘라 혜원의 앞으로 밀어주며 말했다.
“여기 스테이크 맛있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혜원은 지글지글 소리까지 내며 맛있게 시즐링이 되어 나온 스테이크를 내려다보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음식은 훌륭해 보였지만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혜원은 그다지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접해 주는 사람의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어 혜원은 작은 고기 조각 하나를 입에 넣으며 동시에 옆에 놓인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지만 그것이 혜원이 먹은 스테이크의 전부였다. 그 한 입을 끝으로 혜원은 더 이상 고기에 손을 대지 않았다.
생각보다 혜원이 너무 먹지를 못하자, 에이든은 의아한 얼굴로 그에게 고기를 더 권했다. 그러자 난감해진 혜원이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사실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죄송해요.”
“저런. 제가 물어보고 주문할 걸 그랬군요. 이곳은 스테이크가 유명한 집이라 꼭 한번 대접하고 싶었는데. 이것 참. 죄송하게 됐어요.”
“아니에요. 맛집까지 데리고 오셔 줬는데 제가 못 먹어서 더 죄송한걸요. 만약 윤결 형이었으면 안 먹는다고 혼냈을걸요?”
“윤결 형이요?”
“아, 아니에요.”
“음…. 못 들은 척하기엔 이미 누군지 너무 궁금해졌는데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에이든이 윤결에 대해 묻자, 혜원은 그를 힐끔 쳐다보며 말을 아꼈다.
윤결을 닮은 에이든에게 친근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사실이었으나, 역시 누군가 윤결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싫었다. 그만큼 윤결을 향한 혜원의 마음 또한 한결같았다.
혜원은 갑자기 윤결이 너무 보고 싶어졌다. 조금 전 마신 맥주 때문일 수도 있었으나 취기가 살짝 오르기 시작한 혜원은 윤결을 향한 그리움을 술술 털어놓기 시작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요…. 너무너무 사랑하는 사람인데…. 지금은 여기 없어.”
“…그래요.”
“매일매일 보고 싶은데…. 형이 너무 보고 싶은데…. 분명 데리러 온다고 했는데……. 안 와요. 이제 내가 싫은 건가…. 아닌데….”
에이든은 구구절절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며 술주정을 하는 혜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신이 한발 늦었음이 아쉽긴 했지만, 이렇게 귀여운 녀석이 사랑 때문에 아파하는 모습을 보니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했다. 그리고 동시에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이렇게 눈물 많은 녀석을 혼자 두며 외롭게 만드는지 괘씸한 생각까지 들었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절대 이 녀석을 혼자 두지 않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이 술은 뭔데 이렇게 맛이 없데요?”
맥주가 익숙하지 않은 혜원이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아까는 멋모르고 마셨으나 맛을 알고 나니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또 기분은 알쏭달쏭한 것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아 한잔 더 마시러 혜원이 맥주잔을 향해 손을 뻗자, 에이든이 그의 손을 잡아 말리며 말했다.
“이미 취한 것 같은데, 그만 마시죠?”
“왜요? 저 기분 좋은데. 더 마시고 싶은데….”
고기는 먹으라고 하면서 술은 마시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억울한지, 혜원이 테이블 위에 턱을 괴며 투덜거렸다. 눈이 살짝 풀린 혜원의 투정은 듣는 이로 하여금 계속해서 놀리고 싶어지게 만들 만큼 귀여웠다.
‘이 녀석 혼자 술 마시게 하면 위험하겠는데?’
에이든은 귀여운 혜원의 술주정에 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해했다.
**
한편, 집에 혼자 있을 혜원이 걱정된 필립은 그가 저녁이라도 잘 챙겨 먹었을지 걱정이 돼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이 울린 후 어딘가 모르게 부정확한 발음으로 혜원이 전화를 받자, 필립은 단번에 무언가 잘못된 것 같은 불안한 기운을 느꼈다.
[여보세요?]
“혜원아, 너 집 아니야? 지금 어디야?”
[아…. 어…. 잠깐 밖에…. 여기가 어디냐면….]
“밖에 어디! 야 강혜원 너 진짜!”
말도 없이 외출한 것도 모자라 술까지 마신 듯한 혜원의 어눌한 말투에 필립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대체 어디서 누구와 무얼 하는지 너무 걱정이 된 필립은 당장 달려갈 기세로 다그쳤다. 하지만 여전히 혜원이 대답을 못 하고 얼버무리기만 하자 필립은 속이 타들어 갔다.
머뭇거리며 망설이는 혜원의 모습에 통화를 듣고 있던 에이든이 전화를 대신 받으며 말했다.
“혜원 씨가 맥주를 한잔했는데 취한 것 같네요. 제가 집까지 잘 데려다줄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 누굽니까? 누구인데 혜원이랑 같이 있는 거예요? 혜원이 술 못 마신다고요! 애한테 지금 무슨 짓을 한 거냐고요! 당장 어딘지 말해요. 내가 갈 테니까!]
“술을 이렇게 못 마시는 줄 몰랐을 뿐이지, 혜원 씨를 어떻게 할 생각 같은 건 없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데려다주겠습니다. 이만 끊겠습니다.”
[책임이고 뭐고 어디냐고! 야!]
혜원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녀석을 건드릴 만큼 양심이 없지는 않았기에 에이든은 자신을 파렴치한으로 모는 필립의 날 선 반응이 기분 좋지만은 않았다.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에이든은 아무래도 이 술주정뱅이 녀석을 더 늦기 전에 집에 데려다줘야 할 것 같아 그를 흔들어 깨웠다.
하지만 가물거리던 혜원의 눈이 완전히 감기며 꾸벅꾸벅 고개를 떨구자, 에이든이 그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그래서 그 윤결이라는 사람이 왜 당신을 이렇게 혼자 두는 건데요? 나라면 절대 당신을 혼자 두지 않을 텐데. 당신은 그 사람이 또 얼마나 좋다고 이렇게까지 그리워하면서 기다리는 겁니까? 질투 나게…. 정말 질투 나게 말입니다 강혜원 씨.”
어느덧 그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잠시 동안 잠든 혜원의 얼굴을 감상하던 에이든은 그의 어깨를 살며시 흔들어 그를 깨웠다.
“일어나세요. 혜원 씨. 데려다줄게요.”
“왜요? 오늘은 혜윤이도 늦게 들어오는 날이라 일찍 안 가도 되는데.”
“아마 일찍 들어올 겁니다. 그러니까 이따 후회하지 말고 빨리 일어나요.”
“진짜 괜찮은데. 집에 가도 윤결 형도 없단 말이에요. 집에 혼자 있으면 우리 윤결이 형 더 보고 싶어지는데…. 안 갈래요. 저 집에 안 갈래요.”
에이든은 사람 속도 모르고 안가겠다고 조르는 혜원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저도 보내고 싶어서 이러는 거 아닙니다. 그러니까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일어나요.”
“… 네.”
윤결은 아니지만 그를 닮은 에이든의 얼굴을 좀 더 보고 싶었던 혜원이 짧은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오늘따라 윤결을 보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커져가는 우울한 기분에 혜원은 당장에라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당당히 대학에 들어가 멋진 모습으로 그의 앞에 서고 싶었기에 혜원은 오늘도 애써 그리움을 감춘 채 에이든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이미 비틀거리기 시작한 혜원은 혼자 걷는 것조차 너무 불안해 보였다.
이를 지켜보던 에이든은 하는 수 없이 혜원의 어깨에 손을 두르며 그를 부축했다. 품 안에 쏙 들어올 만큼 아담한 혜원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에이든은 그의 사랑을 받을 연인이 무척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또 한편으로는 이 정도로 애틋하게 그리워하면서까지 떨어져 지내야 하는 것이라면 필히 사정이 있을 것이란 생각에, 어쩌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역시 이렇게까지 보고 싶어 사람이라면 자신이 들어갈 자리는 없는 듯 보였다.
“당신이 기다리라고 하면 기다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마도 그건 힘들겠죠? 힘내요. 강혜원 씨. 너무 힘들면 가끔 나한테 기대고.”
비록 연인의 자리는 못 되더라도 든든한 친구로라도 그의 곁에 있어 주고 싶었다. 에이든은 자신의 속마음을 숨긴 채 조심스럽게 혜원을 차에 태우며 집으로 향했다.
운전을 하면서도 에이든은 혹시나 술 취한 혜원이 멀미라도 하지 않을까 싶어 창문을 조금 열어주며 그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서 그런지 혜원의 얼굴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집으로 향하는 내내 에이든은 혜원의 손을 잡아주며 그의 사랑을 응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