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기다림, 그 끝에 (9/12)

9. 기다림, 그 끝에

병원에 도착한 루이는 응급 수술에 들어갔다. 머리를 심하게 다쳐 수술이 기적적으로 성공한다고 해도 그가 예전처럼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재희는 무조건 살라만 달라며 매달렸다. 그렇게 기약 없는 길고 긴 수술이 시작되었다. 재희는 두 손을 모으며 수술실 밖 대기실에 앉아 기도했다. 제발 형을 살려 달라고 빌었다.

재희는 문뜩 어린 시절 자신에게 누구보다 상냥하고 다정했던 루이가 떠올랐다. 어려운 프랑스어를 배우다 도망쳐 정원 한구석에 몸을 숨긴 채 울고 있던 재희를 찾아온 루이. 입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모든 것이 서툴고 무섭기만 한 재희의 곁에 다가온 루이는 그에게 한글로 된 책을 구해와 건네주며 말했었다.

“무서워하지 마. 내가 같이 있어 줄게. 프랑스어도 어려우면 배우지 마. 내가 한국어를 배우면 되니까.”

“정말?”

“그럼. 재희는 내 사랑하는 동생이니까 내가 평생 지켜줄 거야.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내가 꼭 지켜줄 거야.”

그때부터였던 것 같았다. 루이를 향한 무한 신뢰와 사랑이 생겨난 것이. 뒤늦게 깨달은 사랑에 재희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루이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말리지 못한 것과 그를 돕겠다고 자신이 선택한 무모한 방법을 후회했다. 이제 와서 후회한들 돌이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차라리 여기서 멈출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형. 제발 살아서 내 곁에 돌아만 와줘. 이젠 내가 지켜줄게. 평생 옆에서 형만 바라보면서 무섭지 않게 지켜줄게. 그러니까 제발 내게 돌아와 줘.”

피를 말리는 긴 시간이 흘렀다. 예상했던 수술 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 드디어 굳게 닫혀 있던 수술실 문이 열리며 지친 기색이 역력한 의사들이 먼저 밖으로 나왔다.

재희는 벌떡 일어나 루이의 수술 결과를 물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데다, 다친 곳이 머리여서 예기치 못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했다. 재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수술 침대에 누워 중환자실로 옮겨지는 루이를 멍하니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의사를 향해 물었다.

“생명에 지장은 없는 거죠? 언제쯤 깨어날까요?”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깨어나는 것도 사실 언제라고 저희가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의외로 당장 내일이라도 깨어날 수 있는 것이 뇌수술이니까요.”

의사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들려주지 못해 미안해하며 재희의 어깨를 찬찬히 두드려 주었다. 모두가 떠나고 난 뒤, 혼자 남은 재희는 루이의 병실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다행이다. 이렇게 다시 내게 다시 돌아와 줘서 고마워 형.”

**

병원으로 실려 가는 루이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던 윤결은 후회와 자책 속에 발걸음을 옮겨 집으로 향했다. 혹시라도 혜원이 있을까 하는 기대 속에 도착한 집.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혜원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전원마저 꺼져 있는 혜원의 휴대폰. 연락이 닿지 않는 혜원 때문에 윤결은 일분일초가 지옥 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윤결은 혜원의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너무도 해맑은 목소리로 반겨주시는 그녀의 모습에 차마 혜원에 대해 물을 수 없었다. 대충 얼버무리며 전화를 끊은 윤결은 머리를 감싸며 괴로워했다.

“대체 어디로 간 거야 강혜원.”

처음부터 진실을 말했더라면 지금과는 달랐을까? 하지만 윤결은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어떤 핑계를 대도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킬 수 없었다. 재희의 말처럼 자신은 두 사람의 인생을 망가트린 죄인일 뿐이었다.

처음엔 루이를 원망하고 증오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건 그저 비겁한 핑계에 불과했다. 말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혜원에게만은 부끄러웠던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싶었다.

진실을 말하는 대신 그의 눈과 귀를 막는 치졸한 방법을 선택한 결과였기에 그 누구를 원망할 자격도 후회할 자격도 없었다.

**

목적지 없이 무조건 택시를 잡아탄 혜원은 모든 것을 되돌리기로 마음먹었다. 처음부터 윤결은 피해자일 뿐이었다. 혹시나 윤결이 그의 부모님을 만나 사실을 털어놓기 전에 자신이 먼저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디로 갈지 마음을 정한 혜원은 윤결의 본가로 향했다. 지금 혜원의 머릿속엔 어떡해서든 윤결의 무모한 선택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 하나뿐이었다. 벌을 받아야 한다면 그건 이런 무서운 일을 벌인 자신들이지 윤결은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혜원은 더는 윤결의 뒤에 숨는 겁쟁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할 마음으로 자신을 선택해준 만큼, 혜원 또한 이것이 윤결을 위한 최선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택시가 집 앞에 멈추자 혜원은 돈을 지불한 뒤 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아직 들어갈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혜원은 집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든 혜원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전원을 켰다. 요란하게 울리는 부재중 전화 알림에 혜원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는 모두 윤결에게서 온 것이었다.

‘미안해 형.’

지금쯤 얼마나 그가 자신을 찾으며 걱정하고 있을지 알면서도 차마 그의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 대신 혜원은 미국에 있는 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든 사실을 밝히게 되면 자신 만큼이나 큰 타격을 받을 사람이 바로 혜윤이라는 생각에 혜원은 미안함이 앞섰다.

[여보세요? 혜원이? 무슨 일이야 동생?]

여전히 밝은 목소리의 그녀는 행복한 듯 보였다. 혜원은 입술을 꽉 깨물며 눈물을 삼켰다. 모든 일을 밝히기 전에 그녀에게도 마음의 준비를 가질 시간을 주어야 한다 생각했다.

혹시라도 돌아와 모든 일을 정리하고 싶다면 고마운 거고, 필립과 도망쳐 자유롭게 살고 싶다면 그것 또한 존중해 주고 싶었다.

윤결과 아픈 사랑을 경험하고 있는 혜원은 원치 않는 이별이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운지 이미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굳이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는 혜윤마저 망가트리고 싶지 않았다.

“잘 지냈어?”

[너 뭐야?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잔뜩 가라앉은 혜원의 목소리에서는 어딘가 모를 쓸쓸함이 느껴졌다. 쌍둥이였기에 느낄 수 있는 그녀만의 직감. 밝게 전화를 받았던 그녀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미안해 혜윤아. 내가 다 미안해….”

울먹이는 목소리로 혜원이 작게 속삭였다.

[혜원아. 괜찮아, 다 괜찮으니까 천천히 말해봐.]

갑작스러운 혜원의 젖은 목소리에 불안해진 혜윤이 천천히 그를 타이르며 말했다.

“내가… 좋아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내가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내가 다 망쳐 버렸어. 혜윤아.”

[기다려. 내가 갈 테니까 기다려 강혜원.]

“아니. 오지 마. 내가 다 다시 돌려놓을게. 나만 포기하면 다 되는 거였어. 그러니까 너는 절대 오지 마.”

[무슨 바보 같은 짓을 하려고 그러는 거야! 강혜원. 아무것도 하지 마. 내가 곧 갈 테니까 넌 아무것도 하지 마!]

전화기 너머로 다급한 혜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혜원은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모든 마음의 준비를 마친 혜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심호흡을 했다. 윤결과 함께 왔던 본가에 이렇게 혼자서 온 건 처음이라 살짝 긴장도 되었다. 벨을 누르고 대답을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조차 길게만 느껴질 만큼 혜원은 아직도 자신이 하려는 일이 실감이 나질 않았다.

순간 인터폰으로 누구냐는 물음이 들려왔다. 혜원은 자신을 혜윤으로 소개해야 할지 혜원으로 소개해야 할지 망설였다. 하지만 혜원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철컹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다. 혜원은 떨리는 마음을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이라도 뒤돌아 도망치고 싶었다. 그만큼 혜원은 아직도 이 모든 결정이 실감이 나질 않았다.

“아니 이게 누구야? 혜원이??”

“어, 어머님.”

당연히 혜윤인 줄 알고 반가운 마음에 달려 나간 윤결의 모친은 깜짝 놀란 얼굴로 혜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얼핏 혜윤이라고 생각하고 문을 열었지만, 민낯의 파래한 얼굴을 한 미소년의 모습에 그녀는 곧 그가 혜윤의 쌍둥이 동생인 혜원임을 알아챘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를 잠시 쳐다봤다. 미국으로 유학을 간 혜원이 한국에 들어왔다는 소리는 들은 적 없었고, 그가 한국에 왔다 한들 이렇게 갑자기 자신의 집을 방문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같이 창백한 얼굴로 힘겹게 서 있는 혜원을 우선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온 그녀는 따뜻한 물을 그의 앞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혜원아, 무슨 일 있니? 괜찮은 거니?”

“죄,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어머님.”

다짜고짜 소파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미안하다 사과를 하는 혜원의 모습에 그녀는 당황한 듯 서둘러 그를 일으켜 세웠다.

“혜원아, 왜 이래, 응? 대체 이게 무슨….”

미안함과 죄송함, 그리고 그동안 자신에게 너무도 다정히 대해주었던 그녀를 속였다는 죄책감에 혜원은 눈물이 터져 나왔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하지만 혜원은 이내 마음을 다시 다잡으며 천천히 그동안의 일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

갑작스러운 혜원의 전화를 받은 혜윤은 불길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분명 혜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혜윤은 대체 혜원을 이렇게 불안하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다 문득 윤결을 떠올렸다. 혜원이 이렇게 갑자기 전화한 것이 혹시나 윤결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이른 혜윤은 서둘러 윤결에게 전화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윤결은 허겁지겁 전화를 받았다. 동시에 혜윤의 얼굴이 더욱 어둡게 굳어졌다. 둘 사이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해 보였다. 윤결은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혜원이 어딨는지부터 물었다.

초조해 보이는 윤결의 목소리에 혜윤은 그를 진정시키며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리고 모든 진실을 알게 된 혜윤은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판단이 섰다.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 자신의 말도 안 되는 이기적인 결정에서 시작되었기에 혜윤 또한 크나큰 자책을 느꼈다. 너무 늦은 것일 수도 있으나 더 이상 혜원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하게 할 순 없었다.

혜윤은 그길로 혜준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물론 필립을 포기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다만, 모든 것을 깨끗하게 정리한 뒤 당당히 그를 부모님께 소개하기 위해서는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는 선택이라 생각했다.

혜윤은 울먹이며 얼마가 됐든 꼭 기다리겠다는 필립에게 웃으며 짧은 작별을 고했다.

“오빠, 내가 정말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걸까?”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혜윤은 붉어진 눈시울로 혜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만약 자신이 혜원을 억지로 그 자리로 떠밀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행복한 유학 생활을 즐기며 웃고 있었을 텐데…. 마치 자신이 그의 행복을 가로챈 것만 같은 죄책감에 혜윤의 마음이 무거웠다.

“혜윤아. 누구도 너에게 손가락질할 자격은 없어. 다만, 네가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이 결혼을 처음부터 진행하지 않았더라면 혜원이가 덜 아프긴 했겠지.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거고, 이렇게 혜윤이가 큰맘 먹고 돌아가 모든 것을 정리하겠다고 결정해 준 것만으로도 오빠는 혜윤이가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해.”

“하지만 혜원이는? 바보같이 착하기만 한 혜원이는?”

자꾸만 떠오르는 혜원의 힘없는 목소리에 혜윤은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그에게 못 할 짓을 해버렸는지 깨달았다. 안쓰러운 얼굴로 자신을 위로해 주는 혜준의 따뜻한 말에도 혜윤은 쉬이 떨리는 가슴이 진정되질 않았다.

“아마 우리 겁쟁이 혜원이도 이번 일로 많은 것을 배우지 않았을까? 오빠는 이번 일로 너희들이 많은 것을 깨닫고 배웠을 거라고 생각해. 물론 그만큼 책임의 무게는 무겁겠지만.”

“미안해. 오빠. 내가 잘못했어.”

혜윤은 처음으로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모든 것이 꼬여 버린 상황이 속상했다. 그저 혜원도 윤결과 행복하게 잘 살면 될 거라는 막연한 생각에 이번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했다.

근심 어린 혜윤의 얼굴에 혜준 또한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꽉 끌어안아 주었다. 그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동생들이 이 힘든 성장통을 무사히 견디고 이겨내 주길 바랄 뿐이었다.

**

“혜원아, 지금 이게 다 무슨 말이니?”

너무도 어이없고 황당한 이야기였다. 윤결의 모친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어처구니없는 혜원의 고백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신혼여행부터 지금까지 쭉 윤결과 함께 있던 아이가 혜원이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당장 윤결을 불러들였다. 도저히 혜원의 말만으로는 그 어떤 것도 믿을 수 없었다.

윤결과 통화하는 내내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다정했던 목소리 또한 냉랭하게 변하며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 길지 않은 통화였지만 그녀는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 전화를 끊은 뒤에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녀의 차가운 모습에 혜원은 겁이 났다.

“죄송해요 어머님. 정말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다 제 잘못이에요. 윤결 형은 아무것도 몰랐어요. 정말이에요.”

겁에 질린 혜원이 그녀를 향해 두 손을 모아 싹싹 빌며 눈물로 호소했다.

“혜원아 괜찮아. 윤결이 오면 다시 이야기하자. 밥은 먹었니? 왜 이렇게 말랐어. 저번에 왔을 때보다 더 핼쑥해진 것 같은데…. 속상하게 왜 이렇게….”

지난번 봤을 때보다 더 갸름해진 혜원의 얼굴이 안쓰러웠는지 그녀는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의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믿을 수도 믿기지도 않는 상황에 그녀 또한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아이가 혜윤이건 혜원이건 그동안 정들었던 아이의 우는 모습에 그녀는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한편, 어머니의 전화를 받은 윤결은 다급히 집으로 향했다. 설마 혜원이 본가로 갔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강혜원! 대체 무슨 생각으로 혼자 거기에 간 거야!”

윤결은 핸들을 쾅쾅 내리치며 속도를 높였다. 동시에 그는 회사에 있는 아버지에게도 연락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모두에게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작스러운 윤결의 전화를 받은 한 사장 또한 영문도 모른 채 서둘러 집으로 출발했다.

무섭거나 겁이 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윤결 또한 오늘의 이 고백이 자신과 혜원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너무도 두려웠다. 하지만 처음부터 마음먹었던 일이고 최후의 방법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혜원을 데리고 도망갈 마음까지 먹고 있었기에, 지금은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저 강혜원, 그 녀석만 무사히 자신의 곁에 있어 준다면 모든 것을 잃어도 아깝지 않았다.

** ㅈㅅ

문이 열리는 소리에 혜원이 불안한 눈으로 현관을 바라봤다. 땀에 젖은 얼굴로 달려 들어오는 윤결의 모습에 혜원은 살짝 겁을 먹은 듯 몸을 움찔 떨었다.

“강혜원!”

혜원을 발견한 윤결이 안도의 한숨과 함께 그의 어깨를 감싸며 소리쳤다.

“형. 저기…. 제발… 이것 좀….”

하지만 혜원은 윤결의 어머니를 의식한 듯 살며시 그를 밀어냈다.

둘의 애틋한 모습에 기가 찬 듯 그녀는 허망한 눈으로 윤결을 쳐다봤다. 믿었던 아들이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여태껏 두 가족 모두를 감쪽같이 속여왔다는 생각에 괘씸함을 넘어 배신감까지 들었다.

어느덧 그녀의 차가운 시선을 느낀 윤결이 혜원의 옆에 앉으며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너. 혜원이가 한 말들이 모두 사실이야?”

“네. 사실입니다.”

부들부들 떨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윤결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철썩!

순간 화를 참지 못한 그녀가 윤결의 뺨을 때리며 소리쳤다.

“뭐가 그렇게 당당해! 정말 사실이라고? 다시 말해봐. 네 입으로 똑똑히 다시 말해봐!”

사랑하는 아들의 뺨을 처음 때린 그녀 또한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윤결은 겁에 질려 놀란 혜원을 먼저 챙기며 그를 달랬다.

“괜찮아 혜원아. 형이 다 알아서 할게. 괜찮아.”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혜원은 소리를 죽이며 눈물을 쏟아냈다. 예상하지 못한 결과는 아니었지만, 마주한 현실은 너무도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어머니. 혜원이는 아무 잘못 없어요. 제가 밀어붙였어요. 사랑해서, 제가 혜원이를 너무 사랑해서,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요. 다 제 잘못이에요.”

“뭐…. 뭐? 너 지금 그게 무슨….”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충격에 그녀가 가슴을 움켜잡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혜원이를 사랑한다고요. 죽을 만큼 혜원이를 사랑해요. 이젠 제가 혜원이 없으면 안 돼요. 어머니.”

그때였다. 현관 입구에서 모든 것을 듣고 있던 한 사장이 윤결의 멱살을 잡아 바닥으로 내팽개치며 소리쳤다.

“다시 말해봐. 감히 누굴 사랑한다고! 혜윤이도 아니고 혜원이? 혜원이는 남자야! 너 지금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야!”

“사랑한다고요. 남자든 여자든 그딴 거 상관없이 그냥 여기 제 옆에 있는 이 아이를 사랑한다고요. 아버지.”

넘어진 몸을 일으켜 한 사장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윤결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보다 믿었고 사랑했던 아들에게서 돌아온 크나큰 배신감에 한 사장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분노를 넘어 절망감에 휩싸인 한 사장은 그대로 윤결의 뺨을 연달아 때리며 소리쳤다.

“이런 정신 나간 새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를 데려다가 네가 지금 얼마나 엄청난 짓을 저지른 건지 알아? 강 사장님께 뭐라고 말할 거야! 대체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하려고 이딴 짓을 저질러!”

“아, 아버님! 진정하세요. 형은 아무 잘못 없어요. 다 제가 꾸민 일이에요. 그러니까 제발 형은 때리지 마세요!”

혜원은 쓰러진 윤결을 온몸으로 감싸며 애원했다. 작은 몸으로 어떡해서든 윤결을 지키려는 혜원의 처절한 몸부림에 한 사장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마를 부여잡았다. 지금은 어떡해서든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정리해야 했다.

“괜찮아 혜원아. 많이 놀랐지? 미안해.”

“내가 잘못했잖아…. 형 미안해. 정말 미안해.”

혜원은 윤결의 품에 안긴 채 펑펑 목 놓아 울었다. 이래서 혜원을 하루빨리 보내려고 했었다. 윤결은 그 하루를 지켜내지 못한 저 자신을 자책하며 혜원을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우선 혜원이 넌, 집으로 가 있어. 강 사장님께 전화해 둘게.”

더 이상 둘을 보고 있기 힘들어진 한 사장이 화를 조금 가라앉히며 말했다.

“네? 그, 그럼 윤결 형은요….”

“저 미친 녀석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집으로 가 있어.”

“아, 아버님….”

“혜원아. 지금은 네게서 아버님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구나. 미안하지만 이만 돌아가 줄래? 김 기사가 데려다줄 거야.”

한 사장은 피곤한 듯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미간을 좁혔다. 동시에 그는 시선을 돌려 김 기사에게 혜원을 데려다주라고 지시했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괜찮아 혜원아. 형이 곧 데리러 갈게. 그러니까 우리 혜원이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집에 가 있어. 알았지?”

윤결은 차마 발을 떼지 못하고 울기만 하는 혜원의 등을 떠밀며 그를 김 기사에게 보냈다.

한 사장은 끝까지 혜원을 걱정하는 윤결의 모습에 못마땅한 얼굴로 매섭게 그를 노려봤다. 이런 엄청난 일을 벌인 쌍둥이들보다도, 모든 것을 알면서 묵인하고 오히려 혜원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윤결에게 더욱 큰 배신감을 느꼈다.

혜원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한 사장은 다시 윤결을 자신의 앞으로 불러 앉혔다.

“혜윤이는, 그럼 혜윤이는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미국이요.”

“하…. 진짜 뭐 이런 말 같지도 않은!! 그래서 넌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었어?”

“이혼이요. 혜윤이와 이혼하고 모든 걸 정리하겠습니다.”

“그래. 이혼은 당연한 거고.”

“그러고 나서 혜원이와 함께 미국으로 가서 결혼해서 살겠습니다.”

“뭐??”

“너 지금 그게 무슨!!”

사과하고 잘못했다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한술 더 떠 혜원을 데리고 미국으로 가서 결혼하겠다는 윤결의 발언에 한 사장은 꾹 눌러 참았던 분노가 터지고 말았다.

누구보다 믿음직스럽고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이제 승진도 하고 제 뒤를 이어 회사를 잘 이끌어 나가기만 하면 되는 완벽한 위치에 있는 아들의 무모한 선택에 한 사장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미친 새끼. 강 사장님이 그걸 허락하실 것 같아? 나라도 절대 용납 못 해, 너 앞으로 다신 혜원이 만날 생각하지 마.”

“그건 안 됩니다. 아버지!”

-철썩!

“어디서 건방지게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봐. 뭘 잘했다고! 지금 네가 하려는 행동들이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럼 앞으로 회사는! 네가 저지른 이 엄청난 일들을 임원들이 알게 되면 과연 너를 가만히 두고 볼 것 같아? 아무리 내 아들이라도 파면이야! 결혼? 남자가 남자랑, 그것도 강 사장님 아들내미랑 결혼을 하겠다고? 이 미친 자식! 정신 나간 자식!”

이만하면 굽히고 들어올 줄 알았던 윤결의 완강한 태도에 한 사장은 화를 참지 못하고 그의 뺨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이라면요? 아무리 말리셔도 혜원이랑 저 절대 헤어질 수….”

“이게 진짜 듣자 듣자 하니까!”

“둘 다 그만해요!”

화를 참지 못한 한 사장이 윤결을 향해 다시 한번 손찌검을 하려 하자, 눈물만 흘려대던 윤결의 모친이 자신의 남편을 말리며 소리쳤다.

격해지는 부자의 말다툼에 그녀 또한 그 누구의 편도 들지 못한 채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을 허망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결국, 한발 물러선 한 사장이 짧게 혀를 차며 자리에 앉자 그녀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뻗어 윤결의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윤결아. 이제 그만하자. 응? 이 결혼 다시 없던 일로 깨끗이 정리하고 새 출발 하자. 엄마가 이렇게 빌게. 제발 그렇게 하자 윤결아.”

“…죄송해요 어머니.”

“윤결아… 제발.”

흐느끼며 부탁하는 그녀를 차마 볼 수 없었던 윤결은 고개를 숙여 버렸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혜원을 포기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미 한 번의 실수로 혜원에게 크나큰 상처를 주었기엔 이번엔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어디 한번 네 마음대로 해봐. 오늘부터 넌 내 아들도 아니야. 내 눈앞에서 썩 꺼져!”

“여보! 제발요.”

“당신도 똑똑히 들어. 저 자식 앞으로 이 집에 발도 들이게 하지 마. 아들 하나 있는 거 죽었다고 생각해.”

“윤결아, 빨리 와서 사과해. 다신 안 그러겠다고 어서 아버지한테 빌어. 윤결아.”

윤결의 어머니는 재빨리 윤결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으며 눈물로 애원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눈물 어린 호소에도 윤결은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너무도 확고한 아들의 결정 앞에 그녀는 끝내 정신을 놓아버렸다.

“어머니!”

“여보!”

쓰러진 그녀를 향해 한 사장과 윤결이 다급히 달려갔다. 하지만 그녀를 안아 든 한 사장은 윤결의 손을 거칠게 쳐내며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한윤결. 나가. 내 집에서 당장 나가!”

한 사장의 호통에 윤결은 입술을 짓씹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은 그 어떤 말로도 부모님을 이해시킬 수도, 설득할 수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힘없이 집을 나서는 윤결의 어깨가 오늘따라 더없이 무거워 보였다. 하지만 윤결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혜원을 위해서라면 이런 고통쯤은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었고, 또 반드시 견뎌내야만 했다.

**

집으로 돌아온 혜원은 차마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시는 부모님께 너무도 큰 불효를 저지른 것 같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안해 엄마. 미안해….”

현관 손잡이를 꽉 잡은 채로 흐느껴 울던 혜원은 그대로 집 앞에 주저앉았다.

자꾸만 윤결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집에 가 있으면 꼭 데리러 오겠다던 윤결의 말이 마치 그와의 마지막인 것만 같아 겁이 났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 버리면 다신 그를 만나지 못할까 봐 차마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없었다.

얼마나 쭈그리고 앉아 있었는지 어느덧 주위가 어둑어둑해지며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비에 젖어 있던 혜원이 열에 들뜬 얼굴로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였다. 한 사장의 연락을 받고 황급히 도착한 강 사장이 휘청이는 혜원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달려왔다.

“혜원아!”

그립고 반가운 목소리에 혜원이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달려오는 아빠를 쳐다봤다.

‘아빠….’

하지만 너무도 지쳐있던 혜원은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아빠라는 한 마디를 끝으로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쓰러지는 혜원을 가까스로 안아 든 강 사장이 서둘러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창백한 얼굴로 축 늘어진 아들의 모습에 강 사장은 두려움이 휘몰아쳤다. 마치 당장에라도 죽을 사람처럼 아련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혜원의 모습에 그의 두 손이 떨려 왔다.

묻고 싶은 것도 듣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지금은 아들의 건강이 우선이었다. 강 사장은 서둘러 혜원을 방으로 옮겼다.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혜원을 안고 들어오는 남편의 모습에 혜원의 모친 또한 혼비백산한 채 방으로 따라 들어왔다.

“이, 이게 무슨 일이에요? 혜원이가 왜 여기에…. 혜원아, 혜원아 눈 떠봐. 엄마야 혜원아. 우리 혜원이 대체 왜 이래요!”

“우선 정 박사부터 불러요.”

강 사장은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혜원을 끌어안으며 오열하는 아내를 달래며 말했다. 그녀가 주치의인 정 박사를 부르는 동안 강 사장은 혜원의 젖은 옷을 갈아입히며 그를 따뜻한 물로 씻겼다. 다 큰 아들이 이리도 가벼웠나 싶을 정도로 혜원은 많이 야위어 있었다.

조금 전 한 사장의 연락을 받았을 땐, 머리가 하얘지며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분명 무언가 잘못된 거라고 생각했다. 누구보다 착하고 순한 혜원이 이런 무서운 일을 저질렀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혜원을 보니 강 사장은 그동안 자신이 혜원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진심으로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언제나 말 잘 듣는 착한 아들이었기에 굳이 생각해 보지 않았던 그의 깊은 속마음을 알아주지 못해 미안해졌다. 분명 혜원 성격에 이렇게 오래 이 일을 숨기고 있는 것 자체가 힘들고 부담이었을 텐데, 강 사장은 처음으로 이 결혼을 감행한 것을 후회했다.

혜원이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던 것도 분명 혜윤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고, 이 모든 일이 어른들의 욕심에서 시작된 것이란 생각에 그는 가슴을 내리치며 뒤늦은 자책을 했다.

**

집으로 온 혜원은 꼬박 이틀을 앓아누웠다. 그동안의 스트레스와 쌓인 피로가 상당했는지 혜원은 죽은 듯이 잠에 빠져 있었다.

그사이 미국에서 황급히 돌아온 혜준과 혜윤이 그동안의 일들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결혼식 이후부터 신혼여행과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직접 다 들은 강 사장은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이며 울먹이는 딸의 모습에 강 사장은 관자놀이를 꾹꾹 문지르며 땅이 꺼질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이내 혜윤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혜윤아, 아빠가 미안하다.”

“아니야 내가 미안해. 내가 말 안 한 거잖아. 차라리 결혼하기 싫다고 처음부터 솔직히 말했어야 했는데, 그땐 모든 게 너무 빨리 진행되었고 싫다는 말을 도저히 꺼낼 수가 없었어. 혜원이랑 자리를 바꾸고 시간을 조금 벌면, 어떤 식으로든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었어. 이렇게 일이 커져 버릴 거라고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어. 미안해 아빠. 정말 미안해.”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는 혜윤의 눈물에 강 사장이 굳었던 얼굴을 풀어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라도 사실대로 말해줘서 고마워 혜윤아. 시간이 조금 지나면 혜원이도 괜찮아질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아빠…. 혜원이 잘못되면 나 진짜… 못 살 것 같아.”

혜윤은 밀려드는 후회와 죄책감에 오랫동안 아빠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렸다.

**

본가에서 쫓겨난 윤결은 집으로 향했다. 당장에라도 혜원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지금은 그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역시 혜원이 없는 텅 빈 집은 쓸쓸했다. 그 어디에도 혜원의 흔적이 없는 곳이 없었다.

‘손빨래하는 중인데요? 형이 빨래해 놓으라면서요. 저는 세탁기 쓸 줄 모른단 말이에요.’

‘우와. 형은 요리사 해도 되겠다. 이거 진짜 맛있어요!’

‘형이 머리 말려주는 거 너무 좋다. 따뜻해.’

‘잘 때는 건들지 말라니깐요! 간지럽다구요!’

화장실과 부엌을 지나칠 때도 그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에 열어본 침실에서도…. 윤결의 발길이 닿는 모든 곳에는 혜원의 여운이 짙게 남아 있었다.

“보고 싶다. 강혜원.”

마치 몰래 숨어 있다 어디에선가 불쑥 튀어나올 것 같은 그 겁 많고 작은 녀석이 오늘따라 사무치게 그립고 그리웠다.

간단히 샤워를 마친 윤결은 오랜만에 혼자 침대에 누웠다. 혜원과 있을 때는 그리 넓다고 느껴 보지 못한 침대가 오늘따라 한층 더 허전하고 외롭게 느껴졌다.

윤결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평소대로 출근했다. 한 사장 또한 묵묵히 이를 지켜볼 뿐 폭풍전야와 같은 고요함이 이어지며 팽팽한 신경전으로 긴장감이 휘몰아치는 날들이 지나갔다. 하지만 끝까지 사과를 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기까지 한 윤결의 모습에 한 사장은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윤결을 파직시켰다. 물론 지금이라도 달려와 무릎 꿇고 빌면 용서해 줄 마음도 있었으나, 윤결은 너무도 덤덤하게 모든 결정을 받아들이고 회사를 떠났다.

한 사장은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나는 윤결을 멀리서 지켜봤다. 자신을 닮아 한번 하겠다 마음먹은 것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꼭 해내 버리고야 마는 윤결의 대쪽 같은 성격을 모르진 않았지만, 이렇게 쉽게 회사를 포기한 그에게 내심 서운함과 괘씸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래도 하나뿐인 아들인지라 한 사장은 끝까지 윤결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재현을 사장실로 불렀다.

“재현아.”

“네. 사장님.”

“윤결이 자리에 네가 앉거라.”

“네? 사장님, 아니 외삼촌. 윤결 형 정말 이대로 내보내시려고요? 안 됩니다. 제발 다시 생각해 주세요.”

“그러니까. 그래서 너더러 그 자리에 앉으라는 거야.”

“네…?”

재현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정현이가 아니라 널 그 자리에 앉히려는 이유. 눈치 빠른 너라면 어느 정도 알아챘을 줄 알았는데…. 아닌가?”

“… 사장님.”

그제야 재현의 얼굴에 긴장감이 가시며 한 사장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재현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마치 재현과 윤결의 은밀한 거래를 알고 있기라도 한 듯, 한 사장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윤결의 빈자리에 재현을 앉혔다.

물론 회사가 떠들썩해질 만큼 엄청난 조직변경이었고 뒤늦게 자신이 재현에게 밀려났다는 사실에 정현이 미친개처럼 날뛰며 사무실을 들쑤시긴 했지만, 윤결을 견제하던 인사들에겐 어떻게 보면 잘된 일이었기에 더 이상의 반대는 없었다.

얼마 안 되는 짐을 정리해 회사를 나온 윤결은 미리 준비해둔 이혼 서류를 챙겨 혜원의 집으로 향했다. 이미 혜준과 혜윤이 얼마 전 한국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기에 더 미룰 것도 없었다. 최대한 빨리 모든 서류를 정리하고 혜원과 새로운 출발을 하려는 윤결의 얼굴은 그 어떤 때보다도 진지했다.

한편, 윤결이 집으로 온다는 소식에 강 사장 또한 모든 일정을 접고 집으로 향했다. 혜윤의 고백대로 처음 원인 제공을 쌍둥이들이 했다 치더라도, 생각이 있고 그들보다 훨씬 어른이고 이성적이었어야 하는 윤결은 당연히 이를 말렸어야 했다. 그러나 오히려 심약한 혜원을 부추기며 일을 이 지경까지 끌고 왔다는 생각에 윤결을 향한 실망과 크나큰 배신감 또한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먼저 집에 도착한 강 사장은 혜준과 혜윤을 거실로 모이게 했다. 아직 벗어나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혜원에겐 윤결이 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더 이상 윤결과 연관된 그 어떤 일도 혜원의 귀에 들어가게 하고 싶지 않았다. 더는 둘이 만나는 일조차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어느덧 윤결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벨 소리가 들리자, 강 사장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윤결이 보였다. 한 손에는 과일 바구니를 그리고 한 손에는 누런 봉투를 들고 서 있는 그가 오늘따라 달갑게 보이지 않았다.

“들어오게.”

어딘가 모르게 가시가 박혀있는 듯한 강 사장의 차디찬 목소리에 윤결 또한 마른침을 삼키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긴장감이 느껴지는 거실에는 혜준과 혜윤이 윤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윤결은 고개를 숙여 다시 한번 강 사장에게 인사를 한 다음 자리에 앉았다. 그는 가지고 온 서류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며 강 사장을 향해 말했다.

“강 사장님. 무슨 말을 해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결혼, 없던 것으로 돌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강 사장은 어차피 이렇게 돼야 했었다고 생각한 듯 한동안 가만히 그가 내민 서류를 바라봤다. 하지만 뒤이어 윤결이 꺼낸 한마디에 세 사람의 시선이 모두 윤결에게로 향했다.

서류를 거칠게 구긴 강 사장이 핏발선 눈으로 윤결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다시 한번 말해봐.”

“혜윤이와 이혼하고 대신 혜원이를 책임지고 싶습니다.”

“뭐? 책임?”

“네. 혜원이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강혜준. 지금 한윤결 이사가 뭐라고 말하는 거야?”

강 사장은 사나운 시선을 윤결에게서 떼지 않은 채 화를 억지로 참아가며 혜준을 향해 물었다.

물론 혜원과 윤결의 관계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혜준 또한 어리둥절한 얼굴로 윤결을 쳐다봤다.

설마 여태껏 이 위험한 결혼을 유지하겠다고 한 이유가 혜윤에게 시간을 주기 위함이 아닌 정말로 혜원을 좋아해서였을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오랜 시간 윤결의 절친이라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다.

“유, 윤결아. 아니지? 너 정말…. 아니지?”

혜준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윤결을 쳐다보며 물었다. 하지만 윤결은 전혀 흔들림 없는 눈으로 다시 한번 강 사장을 향해 말했다.

“제가 책임지게 해주십시오. 혜원이 제가 데리고 살게요.”

“못 들은 거로 할 테니까, 이혼 서류만 두고 나가주게.”

강 사장은 최대한 자제력을 잃지 않으려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아슬아슬한 둘의 분위기에 혜윤이 안쓰러운 얼굴로 윤결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대책 없이 막무가내긴 했지만 윤결 또한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 사장님!”

“나가라고!”

더는 듣기 싫다는 듯 강 사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조용했던 집 안에 울려 퍼진 거친 고함에 방에 있던 혜원이 깜짝 놀라 거실로 나왔다. 며칠 새 부쩍 야윈 것 같은 윤결의 얼굴을 마주한 혜원은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혜원아.”

윤결은 너무도 보고 싶었던 혜원을 발견하자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프다는 말을 들었으나 찾아올 수 없었다. 자신이 없는 동안 정말 많이 아팠는지 예전의 생기 가득했던 혜원의 얼굴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윤결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아픔을 느끼며 그에 다가갔다. 하지만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강 사장의 호통에 멈춰 섰다.

“강혜원. 넌 들어가. 그리고 한윤결. 자네는 이만 나가주게. 들을 말은 다 들은 것 같으니 이제 다신 볼 일 없었으면 하네.”

“아버님.”

“아버님? 어디서 감히!”

“죄송합니다.”

“죄송했으면, 정말로 죄송했으면! 그딴 말은 꺼내지 말았어야지. 설사 자네의 감정이 진심이라고 해도 감췄어야지! 죽을 때까지, 끝까지 숨겼어야지!!”

“….”

윤결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말이 틀린 건 없었다. 부모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이었고, 윤결 또한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순간 조용히 듣고만 있던 혜원이 윤결의 앞으로 다가왔다. 혜원은 불안한 얼굴로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혜준에게 작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살며시 옆으로 밀어 세웠다.

자신을 위해 이렇게 큰 용기를 내어준 윤결을 마지막으로 본 것만으로도 혜원은 행복했다. 그리고 이젠 윤결의 앞날을 위해 자신이 그를 먼저 놓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빠. 윤결 형 잘못한 거 없어요. 제가 먼저 좋아한걸요? 안 되는 거 알면서 제가 형을 좋아했어요.”

“강혜원! 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들어가.”

“아빠….”

“듣고 싶지 않으니까 방으로 들어가라고 강혜원!”

강 사장은 더 이상 혜원을 이 일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보다 못한 그가 혜원의 손목을 잡아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려 하자, 혜원이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 그런데 이젠 아니야.”

“뭐?”

“이젠 아니라고. 나 이제 윤결 형 안 좋아해.”

믿기지 않는 혜원의 고백에 깜짝 놀란 윤결이 벌떡 일어나 그의 앞으로 달려왔다.

“미안해. 우리 혜원이 마음 아프게 해서 형이 미안해. 다 돌려놓을게. 형이 전부 다 다시 돌려놓을게. 그러니까 화 풀어 혜원아. 응?”

“진심이야. 집에 오고 나서 깨달았어. 다 착각이었다는 걸. 내가 혜윤이인 척 형이랑 같이 살면서 잠시 착각하고 있었어. 내가 마치 진짜 형이랑 결혼한 혜윤이인 양 착각을 했던 거였어. 그새 며칠 지났다고 이젠 형을 안 봐도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니까 우리 이제 그만하자. 어차피 우린 가짜였잖아.”

“혜원아! 제발 이러지 마. 형이 다 잘못했어. 제발 혜원아.”

처절하리만큼 절박한 윤결의 울부짖음에 혜윤은 차마 그를 더 보고 있을 수 없어 시선을 돌려버렸다.

누구보다 혜원을 사랑하는 윤결의 마음을 가장 잘 알고 있는 혜윤. 그녀 또한 지금 혜원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순하디순했던 혜원이 이렇게 독하게 윤결을 밀어내려는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이것이 서로에게 옳은 선택인지 그녀 또한 혼란스러웠다.

“미안해. 그러니까 형도 그만 형 자리 찾아가. 난 이제 형이 안 찾아왔으면 좋겠어.”

말을 마친 혜원은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윤결은 멍하니 서서 멀어지는 혜원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정신이 번쩍 든 윤결은 방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마구 돌리며 소리쳤다.

“혜원아.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혜원아 문 좀 열어봐. 제발 문 좀 열어봐 혜원아!”

절규에 가까운 윤결의 외침에도 굳게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마음이 심란해진 강 사장은 혜준에게 윤결을 돌려보내라고 말한 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윤결은 혜원의 방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혜준은 간신히 그를 일으켜 세워 소파에 앉혔다. 냉정하고 차갑게만 보이던 윤결의 얼굴에 눈물이 비치자, 그제야 혜준은 혜원을 향한 윤결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걸 깨달았다.

한 번도 그의 연애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그가 제대로 된 연애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단 생각이 이제서야 어렴풋이 떠올랐다.

물론 혜준 자신 또한 과하다 싶을 정도로 동생 혜원을 챙기고 회사 일에 집중하느라 서른이 되도록 연애라는 걸 제대로 해보지 않았기에, 윤결이 오랜 시간 혼자 지내는 것이 그리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혜준은 고개를 숙인 채 제 머리카락을 거칠게 움켜쥐며 괴로워하는 윤결의 어깨를 다정히 두드려 주며 말했다.

“윤결아. 오늘은 이만 가고 나중에,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혜준아. 나는…. 아직 나는….”

이대로 혜원과 헤어질 수 없는 윤결이 다급히 혜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런 윤결의 곁으로 혜윤이 다가왔다. 그녀는 이 모든 일에 대한 깊은 자책을 느끼고 있었다. 그랬기에 절망에 빠져 있는 윤결을 이대로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자신이 필립을 만나 행복한 나날들을 보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윤결과 혜원 덕분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혜윤. 그녀는 이번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둘의 편이 되어 주고 싶었다.

“겨우 이 정도로 혜원이를 포기하려고 했어요? 방금 그 말, 그 녀석 진심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잖아요. 당신만 흔들리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면 돼요. 그때까지 제가 혜원이 잘 돌볼 테니까 당신은 앞으로의 일들을 잘 정리하고 혜원이 데리러 오세요.”

“혜윤아 너 그게 무슨 소리야!”

말리지는 못할망정 더욱 윤결을 부추기는 혜윤의 위험한 발언에 혜준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세게 누르며 소리쳤다. 하지만 혜윤은 그런 혜준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단호한 얼굴로 윤결에게 말했다.

“대신 모든 걸 다 깨끗하게 정리하고 오세요.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혜원을 울리지 못하게, 혜원이 걱정하는 일 없게 이렇게 또 혜원이가 도망치는 일 없게, 모든 것을 다 깨끗이 정리하고 오시라고요.”

“그래. 그럴게. 혜원이… 잘 부탁한다 강혜윤. 그리고 고맙다.”

누구도 자신의 편이 되어 주지 않는 이 상황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혜윤의 응원에 윤결은 다시금 마음을 굳게 다잡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은 그녀의 말처럼 확실한 주변 정리가 필요했다.

다시 한번 마음을 굳게 먹은 윤결은 강 사장이 들어간 방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 뒤, 혜윤과 혜준에게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집을 나섰다.

그가 떠나자 혜준은 무섭게 굳은 얼굴로 혜윤을 어깨를 돌려 잡으며 물었다.

“강혜윤. 한 번은, 한 번은 오빠가 눈감아주고 봐줄 수 있어. 하지만 두 번은 안 돼. 너 대체 윤결이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더 이상 네 마음대로 혜원이 휘두르지 마. 이번엔 오빠 정말 화낼 거야.”

그러자 혜윤이 말없이 혜준을 올려다보며 그의 손을 잡아 혜원의 방으로 향하며 말했다.

“오빠도 오빠 눈으로 직접 보고 나서 말해. 그러면 다 이해될 테니까.”

조심스럽게 잠긴 문을 열고 들어간 혜준과 혜윤은 이불 속에 몸을 웅크린 채 서럽게 울고 있는 혜원을 발견했다.

뭐가 그리 슬픈지, 끅끅거리는 신음을 참으며 울음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최대한 숨죽여 울고 있는 혜원의 모습에 혜준은 당장에서도 달려가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혜원이 우는 이유가 어쩌면 정말로 윤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혜준은 차마 그에게 선뜻 다가갈 수 없었다. 우는 아이를 달래며 뭐라고 위로를 해줘야 할지 도무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괜찮다고 말해 줄 수도, 그렇다고 윤결을 만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약속 또한 해줄 수 없었다. 그저 서글프게 울기만 하는 녀석을 바라볼 수밖에 없음에 혜준 또한 가슴이 아팠다.

안타까운 마음에 결국 발걸음을 돌려 나가려는 혜준의 손을 붙잡으며 혜윤이 말했다.

“오빠. 여태까지 나는, 나만 생각하고, 내 위주로만 생각하느라 혜원이를 힘들게 한 거 맞아. 혜원이가 착하고 순하니까 그 점을 이용한 것도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혜원이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야. 나 누구보다 혜원이, 내 동생 사랑해. 그래서 이번엔 이 녀석의 행복을 꼭 이루어줄 거야. 오빠도 모른 척하고 싶은 거지, 이젠 모르지 않잖아. 윤결 씨랑 혜원이 사랑하는 사이 맞아. 절대로 헤어질 수 없을 만큼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이라고.”

“야 강혜윤. 너 정말 얼마나 일을 더 심각하게 만들려고 이러는 거야? 여기까지만 해. 이 이상은 윤결이도 혜원이도 더 힘들어지기만 해. 접을 수 있을 때 마음 접게 도와주는 게 둘을 위한 길이야. 그러니까 너 더 이상 혜원이한테 이상한 소리 하지 마.”

“그럼 오빠는 혜원이가 평생 상처를 안은 채, 저렇게 울면서 한윤결만 그리워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어? 당연히 혜원이는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겠지! 하지만 혜원이는 절대 행복하지 못해. 한윤결이 아니면, 그 누구도 혜원이를 다시 웃게 해주지 못한다고. 오빠, 나도 경고하는데 혜원이 흔들지 마. 내 동생이고 나랑 같이 엄마 배 속에서부터 함께 해온 저 녀석은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안다고! 그러니까 오빠 제발 후회할 짓 하지 마. 난 이미 이렇게 후회하고 있잖아. 오빠도 생각 잘해. 그 누구도 아닌 혜원이를 위해서 말이야.”

마치 혜원을 위해서라면 죽을 각오라도 하겠다는 듯 확고한 그녀의 결심 앞에 혜준은 또다시 근심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혜원의 침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느새 울다 지쳐 잠들었는지 그는 움직임이 없었다. 혜준은 혜원의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이불을 들쳐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벌게진 눈가와 눈물에 흠뻑 젖은 얼굴. 혜준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왜 이렇게 혜원의 일이라면 마음이 약해지는지. 그는 어느덧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네가 정말로 원하는 거라면 도와줄게. 그럴 수밖에 없잖아. 내가 네 형인데. 하지만 한윤결. 괘씸한 너는 내 동생 다시 찾으려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많이 노력해야 할 거다. 절대 전처럼 쉽게 내어주지 않을 거니까.”

**

윤결은 하나둘씩 주변 정리를 해 나갔다. 이미 재현을 통해 회사가 돌아가는 일쯤은 어느 정도 파악해 두고 있었다. 미국에 자본을 투자해 시작하기로 한 사업도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혔기에 윤결도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그의 가슴 한편에는 루이를 향한 미안함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벌써 사고가 발생한 지 2주가 흘렀다. 몇 번이나 병원으로 찾아가려고 했지만 차마 그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한 번은 꼭 그를 찾아가 사과를 하고 싶었다. 그래야만 앞으로 혜원을 조금이라도 더 당당히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모두를 위한 최소한의 사죄라 생각했다.

윤결은 오랜만에 재희에게 연락했다. 하지만 역시 예상했던 대로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윤결은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뒤로 젖히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그에겐 풀어야 숙제가 많이 남아 있었다.

**

사고 후 일주일 만에 눈을 뜬 루이는 심각한 후유증으로 한동안 말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처음엔 기억하지 못했다. 재희의 피나는 노력과 정성으로 겨우 입을 열 수 있었으나 그는 끝내 사고의 원인도 윤결도 그리고 재희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누구 전화야?”

시끄럽게 울리는 휴대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하는 재희를 향해 루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 아니야. 아무도 아니야 형.”

행여나 루이가 걱정이라도 할까 봐 재희는 서둘러 휴대폰을 끈 뒤 주머니 속에 넣으며 말했다. 재희는 신경 쓰지 말고 마저 먹으라며 루이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루이는 부끄러운 듯 뺨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은 잘나지 않았지만, 너무도 다정하고 재희를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설렜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루이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죽을 먹으려 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손에 힘이 들어가지지 않아 그만 숟가락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쨍그랑!

“형 괜찮아??”

자꾸만 반복되는 실수에 의기소침해진 루이를 향해 재희가 재빨리 몸을 일으켜 그를 살피며 물었다.

“미안.”

“뭐가 미안해.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 괜찮아?”

“응. 괜찮아.”

사실 루이는 사고 후유증으로 오른쪽 팔의 신경이 망가져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열심히 재활치료도 받고 있었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재희는 움찔움찔 떠는 루이의 팔을 주물러 주며 말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라고. 내가 있잖아. 형 곁에는 내가 있으니까 형은 아무 걱정하지 마.”

“근데 재희야….”

“응?”

“너 진짜 그냥 내 동생이야?”

루이는 딱 봐도 친동생이라고 하기엔 자신과 너무도 다른 재희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물었다.

“왜?”

“그냥. 이상하게 너만 보면 누군가 떠오를 것 같은데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서….”

“아니면?”

“응? 뭐가?”

“우리가 만약 평범한 형 동생 사이가 아니라면? 내가… 형에게 다른 의미의 동생이라면?”

“어? 그, 그게 무슨 말이야?”

깜짝 놀란 루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재희를 쳐다봤다. 잔잔했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대며 재희를 바라보는 시선이 자꾸만 흔들렸다.

“형.”

“… 어?”

“나 형 사랑해.”

순간 루이가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재희의 입술이 그를 덮쳤다. 뜨거운 재희의 혀가 루이의 입 안을 정신없이 헤집어대자 당황한 루이가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

“뭐, 뭐 하는 거야. 하읏!”

“우리 이런 사이라고. 형이 생각하는 평범한 형, 동생 따위가 아니라고.”

“너…. 그게 무슨 소리야….”

너무도 충격적인 재희의 고백에 루이는 파르르 떨리는 손을 들어 자신의 입술을 가리며 혼란스러워했다.

“형은…. 싫었어? 형은 내가 싫어?”

“… 아니. 싫지 않아. 그렇지만….”

잠시 머뭇거리던 루이가 고개를 푹 숙이며 작게 속삭였다. 그와의 키스가 싫은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달콤하고 설렜다. 하지만 여전히 루이의 머릿속은 어지럽기만 했다. 자신이 설마 동생을 사랑했던 건가? 도무지 기억나지 않은 일들에 머리가 아파져 왔다.

“우린 어차피 피가 섞인 형제도 아니잖아. 뭐가 걱정인 건데? 문제 될 게 있어?”

“혹시 부, 부모님도 아셔?”

“아니. 아직은 모르셔. 하지만 뭐 말 못 할 것도 없지. 형이 원하면 정식으로 말씀드릴게.”

“… 대, 대체 뭘 말씀드린다는 거야?”

“파양.”

“뭐?”

루이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 왔다. 파양이라니? 절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다.

처음 눈을 뜨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상황에서도 이상하게 재희에게만큼은 쉽게 마음을 열었고, 그의 말이라면 뭐든 믿음이 갈 만큼 재희는 루이에게 큰 의지가 되어 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일까, 루이는 이젠 재희가 없으면 불안했고 그의 앞에서만큼은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천진난만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

루이는 이런 재희가 자신의 동생이라서 굉장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랬던 그가 갑자기 파양을 이야기하자, 루이는 자신을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재희가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

“나 이미 성인이야. 혼자 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그래도 가족이잖아. 우린…. 가족이잖아.”

“난 가족으로서 형의 동생으로 남고 싶지 않아.”

“그, 그러면?”

“연인. 차라리 가족이 아니라 형의 연인으로서 평생을 함께하고 싶어.”

“재희야….”

루이는 눈물이 차올랐다.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혼자 희생하려는 재희를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사고 후유증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불편한 한쪽 팔과 반쪽뿐인 기억. 그리고 한 번씩 예고 없이 발작을 일으키는 문제 많은 몸으로 앞날이 창창한 재희를 욕심낼 수는 없었다. 루이는 재희의 인생에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가끔은 어제 무엇을 먹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루이의 머리는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한 상태였다. 이 증상이 언제 나아질지, 완벽히 나을 수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루이까지 알고 있는 이 사실을 재희가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루이는 더욱 재희의 마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돌아가자.”

“….”

“우리 프랑스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자.”

재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울기만 하는 루이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속삭였다.

이제야 10여 년 전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들여 주었던 따뜻하고 정 많던 루이를 다시 찾은 것만 같았다. 처음부터 자신의 감정을 조금 더 빨리 깨달았다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히려 재희는 미안했다.

루이가 사고를 당하고 수술대 위에 누워있던 순간만 생각하면, 재희는 아직도 식은땀을 흘리며 악몽에 시달릴 만큼 괴로워했다. 루이를 완전히 잃을 수도 있었던 그날은 재희에게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재희는 더욱 루이를 소중히 대했고 그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루이가 피곤한 듯 보이자 재희는 그를 침대에 눕히며 천천히 가슴을 토닥여주었다. 아직 몸 상태가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루이는 무언가 깊게 생각하거나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쉽게 지쳤다. 어느덧 졸음이 몰려오던 루이는 다정한 재희의 손길을 느끼며 잠에 빠져들었다.

루이가 잠이 들자 재희는 조용히 병실을 나왔다. 재희는 루이의 경과를 조금 더 지켜보고 늦어도 다음 달 안으로는 프랑스로 돌아가기 위해 휴대폰으로 비행기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앞에 우뚝 멈춰 선 검은 그림자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너 이 새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눈앞에 나타나자 재희는 대뜸 그의 멱살을 잡으며 벽으로 밀쳤다. 감히 어떻게, 무슨 생각으로 루이의 앞에 나타날 생각을 했는지 순간 재희는 분노가 치솟았다.

“미안해.”

“미안? 당신 때문에 우리 형이 죽을 뻔했어. 그런데 미안하다고?”

“루이는…. 괜찮아?”

“괜찮냐고? 왜? 다 죽어가던 형을 보니까 없던 동정심이라도 생겼어? 됐으니까 꺼져. 앞으로 다시는 우리 형 앞에 나타나지 마.”

재희는 그의 멱살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소리쳤다. 이제 와서 사과고 용서가 다 무슨 소용이라고…. 모든 것이 부질없고 그저 짜증스럽기만 한 재희는 그를 잡았던 손을 힘없이 놓으며 뒤돌아섰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용서를 빌면 안 될까?”

윤결은 차갑게 돌아선 재희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부탁했다. 아무리 그간의 악연으로 얽힌 사이라고 해도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내던진 루이를 이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용서할 건 용서하고, 사과할 건 사과하며 깨끗이 그와의 마지막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것이 혜원도 원하는 일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개수작 부리지 말고 꺼져. 누구 좋으라고? 너 혼자만 다 털어놓고 마음 편하게 지내겠다? 됐으니까 꺼져. 앞으로 네가 우리 형을 볼 일은 절대 없을 거야.”

그의 부탁에도 재희는 여전히 날카로운 눈빛으로 윤결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아무것도 모르는 루이에게 더 이상 아픈 기억을 떠오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모든 걸 잊은 채 살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병실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고함 소리에 루이가 잠에서 깨버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밖으로 나온 루이는 윤결과 대치 중인 재희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재희야, 무슨 일이야? 이 사람 누군데?”

“아무것도 아니야. 좀 더 자지 왜 나왔어. 들어가자.”

잠든 줄 알았던 루이가 밖으로 나오자 당황한 재희가 그를 재빨리 병실 안으로 들여보내며 말했다.

“아니. 네가 없길래. 그런데 재희야, 저 사람 너 아는 분이셔?”

재희에게 등 떠밀려 들어가면서도 넋이 나간 얼굴로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남자를 향해 루이가 고개를 기웃거리며 물었다.

“중요한 사람 아니야. 그것보다 형 혼자 이렇게 움직이지 말라고 했지! 일어나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괜찮아. 팔만 조금 불편한 건데 뭐. 다리는 멀쩡하거든?”

루이는 자꾸만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며 과보호하려는 재희를 향해 못마땅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재희는 혹시나 윤결이 그 말을 들었을까 봐 힐끔 뒤를 돌아 그의 얼굴을 살폈다. 역시나 윤결의 얼굴이 어둡게 굳어지는 것을 보니 루이의 상태를 들은 듯했다. 재희는 짧게 혀를 차며 윤결을 향해 말했다.

“당신은 거기서 기다려요.”

고개를 끄덕이는 윤결을 뒤로 하며 재희는 병실 문을 닫았다.

윤결의 등장에 루이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침대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누구야? 응? 엄청 잘생겼다. 너만 아니었으면 내가 아마….”

“형!!”

“앗. 깜짝이야. 왜…. 뭐….”

벼락같은 재희의 호통에 화들짝 놀란 루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나만 아니었으면 뭐? 어쩌게? 가서 사귀기라도 하게?”

“아니, 나는 그냥 농담으로…. 그리고 내가 널 두고 누굴 사귄다고….”

“하지 마. 농담으로라도 그런 무서운 말 하지 마. 형.”

“아, 알았어. 안 할게. 미안해 재희야. 나 진짜 너밖에 없어. 정말인데….”

루이가 미안해하며 재희의 어깨에 얼굴을 내렸다. 정말로 그 남자가 자신의 이상형에 가깝긴 했으나, 역시 재희만큼은 아니라는 생각에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 잠시 나갔다 올 테니까 꼼짝 말고 누워있어. 알았지?”

“응. 알았어. 대신 금방 와야 해.”

“걱정 마. 형 두고 어디 안 가니까.”

재희는 루이를 다시 침대에 눕힌 뒤 가볍게 그의 입술에 키스를 하며 병실을 나갔다.

문밖에서 재희를 기다리던 윤결의 얼굴엔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루이는 둘째 치더라도 힘없이 축 늘어진 그의 오른팔을 마주한 순간 윤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밀려드는 죄책감으로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결코 이런 결과를 원한 건 아니었다.

“미안해 루이. 정말…. 미안하다….”

윤결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사죄하고 또 사죄했다. 재희의 말대로 어쩌면 이대로 그의 눈앞에서 사라져 주는 것이 루이를 위한 마지막 배려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병실을 나와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윤결에게 다가온 재희는 그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잠시 나가서 이야기하죠? 여기 있다가 형이 또 들으면 안 될 것 같으니까. 따라 나와요.”

재희의 말에 몸을 일으킨 윤결은 마지막으로 루이의 병실을 말없이 바라봤다. 그래도 그의 웃는 얼굴이 나쁘지 않아 보여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윤결은 다시 몸을 돌려 재희의 뒤를 따랐다.

병원 밖 벤치에 앉은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숨 막힐 듯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봐서 알겠지만, 형이 조금 아파요. 하지만 이제 와서 당신을 탓할 생각 없어요. 서로 잘한 거 없으니까. 인정해요. 우리가 혜원이 괴롭게 한 거. 혜원이에겐 입이 열 개라고 할 말 없어요. 나 대신 사과는 꼭 전해주세요. 참 그리고 나… 루이 형 사랑해요.”

“…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루이를 사랑한다는 재희의 고백에 가만히 고개를 숙여 듣고만 있던 윤결이 흠칫 놀란 듯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사랑한다고요. 형 동생, 그런 단순한 감정 아니에요. 평생 아껴주고 지켜주고 싶을 만큼 사랑해요. 그러니까 당신도 이제 우리 형 잊어요. 다신 떠올리지 마세요. 제가 할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 그래. 내가 이런 말 할 자격은 없지만, 루이를 잘 부탁해. 그리고 미안해.”

잠자코 재희의 말들 듣고 있던 윤결이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의 양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말했다.

“됐어요. 그런 말 듣자고 이러는 거 아니니까. 당신이나 앞으로 잘해요. 우연이라도 다신 만나는 일 없길 바랍니다. 진심으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재희가 먼저 벤치에서 일어나 병원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겨진 윤결은 오랜만에 편안한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루이의 병실을 올려다봤다.

“이번엔 네가 꼭 행복했으면 좋겠다. 상처 줘서 정말 미안했어. 루이.”

아픈 만큼 상처도 깊었지만 그만큼 혜원을 향한 윤결의 사랑은 더욱 단단해져 있었다.

윤결은 이제야 풀리지 않을 것처럼 엉망으로 엉켜버린 실타래의 끝이 보이는 것 같은 작은 희망을 얻었다. 그는 진심으로 루이와 재희의 행복을 빌며 왔을 때보다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병원을 나섰다.

금방 오겠다던 재희가 늦어지자 기다리기 지루해진 루이가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예쁜 꽃이 만발인 병원 정원을 보니 잠시 산책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얇은 카디건을 어깨에 걸친 뒤 정원으로 향했다.

시원한 바람과 향기로운 꽃향기에 취해 정처 없이 걷던 루이는 아까 병원에 찾아왔던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재희를 발견했다. 무슨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지 둘의 얼굴이 너무도 어두워 보여 루이는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잠시 멀찌감치 서서 그들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루이는 재희가 먼저 일어서 다시 병원 안으로 들어가자, 서둘러 몸을 돌려 그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낯선 남자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에 루이는 가던 걸음을 멈추며 잠시 뒤돌아 그를 바라봤다.

‘누구지?’

기억이 날 듯 말 듯, 어딘가 익숙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 루이가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해내려 애를 썼다. 하지만 역시 떠오르는 건 없었다.

무리해서 기억하려 했던 것이 탈이 났는지 루이는 갑자기 심한 두통이 밀려왔다. 빨리 병실로 돌아가야겠단 마음과는 달리 바들바들 떨리는 루이의 몸은 쉽게 말을 듣지 않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또다시 발작이 시작되려는지 루이는 몸을 크게 휘청이며 비틀거렸다.

“형!!”

그때였다. 뒤늦게 루이가 사라진 것을 알아챈 재희가 혼비백산한 얼굴로 달려왔다. 다행히 정원 쪽으로 산책하러 나갔다는 간호사의 말에 재희는 간신히 루이가 쓰러지기 직전 그를 찾을 수 있었다.

“대체 왜 혼자 나온 거야! 형 괜찮아?”

“…미, 미안. 하읏…. 그런데 나 머리가 너무 아파. 방에 가고 싶어.”

“알았어. 빨리 들어가자. 의사 선생님 곧 오실 거야. 조금만 참아 형.”

“마음대로 나와서 미안해.”

루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재희에게 걱정을 끼친 것을 미안해했다.

“형은 아무 잘못 없어. 형을 혼자 놔둔 내가 잘못한 거야. 미안해. 앞으로 절대 혼자 두지 않을게.”

재희는 제대로 걷지 못하는 루이를 번쩍 안아 들며 말했다.

이대로 그가 영원히 아픈 상처는 기억하지 못한 채, 자신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길 바랐다.

한쪽 팔이 불편해도 기억을 잃어도 이렇게 한 번씩 발작해도 좋았다. 그 큰 사고에서 살아나 줘서 고마웠고 힘든 수술을 무사히 견뎌내 주어서 고마웠다.

다시 한번 루이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확인한 재희는 언젠가 그의 기억이 돌아와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그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

윤결이 다녀가고 여러 날이 흘렀다. 그사이 이미 혜윤과 윤결의 서류 문제는 깨끗이 정리되었고 혜윤도 필립과의 연애를 당당히 집안에 알렸다.

당연히 강 사장은 노발대발 한바탕 난리를 치고 펄쩍 뛰었으나 여장부 혜윤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거기에 혜원까지 합세해 혜윤의 편을 드는 통에 강 사장은 결국 둘의 사이를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인정이라기보다는 이번 혜원과 윤결의 일을 겪으면서 그도 느낀 바가 많았기에 무작정 반대할 수만은 없었기에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혜준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혜윤도 정식으로 미국 유학 절차를 밟으며 돌아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혜윤은 혼자 남겨질 혜원이 걱정돼 그에게도 같이 미국으로 가자고 권했다.

잠시 고민하던 혜원은 어차피 윤결을 잊기로 마음먹은 이상 한국을 떠나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혜원의 결심에 강 사장은 그가 마음을 다잡고 미국으로 갈 마음을 먹어 준 것이 기특하고 고마웠다. 그는 앞으로 혜원이 원하는 것들은 그게 무엇이 됐든 아낌없이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하며 크게 기뻐했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생활을 정리하며 혜원은 최대한 괜찮은 척 웃으며 지냈다. 부모님이 걱정하시는 것도, 혜원이 미안해하는 것도 원치 않았다. 혼자만 참아내고 이겨내면 다시 예전처럼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혜원은 윤결이 보고 싶은 것도, 가고 싶지 않은 미국을 가는 것도 참아내며 홀로 힘겹게 버텼다.

어느덧 미국으로 출국할 날이 다가왔고 별로 쌀 것도 없는 짐들을 가방에 집어넣던 혜원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떠나면 정말로 윤결과 끝일 거란 생각에 느리게 움직이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짐을 싸던 손을 멈추며 혜원은 몸을 웅크린 채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눈가에 고인 눈물이 흘러넘치며 그의 작은 얼굴을 적셨다. 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마음 놓고 크게 울 수도 없었다.

잘한 일이다, 이것이 모두를 위한 최선이었다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만, 해일처럼 밀려드는 서러움은 혜원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너무도 컸다.

“혜원아, 오늘 저녁에….”

저녁에 잡혀 있는 가족 외식에 늦지 않기 위해 혜원을 챙기러 그의 방을 찾은 혜윤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물론 그동안 보여준 혜원의 행동이 자연스럽다고는 볼 수 없었으나, 그가 이렇게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역시 이대로 미국으로 가버리는 건 혜원을 위해서도 좋지 않을 것이란 판단이 섰다.

혜윤은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망설이듯 누군가의 번호를 눌렀다 지우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윤결이야 절대 혜원을 포기할 리 없으니 걱정 없었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혜원에겐 어쩌면 이번이 그가 떠나기 전 윤결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녀는 레스토랑의 이름과 시간을 윤결에게 문자로 전송해 주었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미소로 혜원의 방을 바라보며 말했다.

“울지 마 강혜원. 네 옆엔 든든한 누나가 있잖아. 지금부턴 이 누나가 지켜줄게.”

**

혜원이 미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은 이미 윤결의 귀에도 들어간 상태였다. 사실 처음부터 혜원의 미국행을 준비하고 있던 윤결이었기에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윤결은 혜원이 떠나기 전 그에게 전하고 싶은 말들이 있었기에 어떻게든 강 사장 몰래 그를 만날 기회를 만들려 애를 쓰는 중이었다. 하지만 웬만해선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혜원을 만나기란 역시 쉽지 않았다.

정 안되면 혜준이나 혜윤에게 도움이라도 청해야겠다는 마음까지 먹을 만큼 절박한 윤결에게 도착한 한 통의 문자. 윤결은 그 단 한 줄의 문자에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반색했다.

강혜윤, 적일 때는 살벌했지만 아군일 때는 누구보다 든든한 녀석이었다.

윤결은 오래전부터 준비했던 작은 선물을 주머니 속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누가 봐도 신나 보이는 그의 모습에 함께 있던 재현이 물었다.

“이렇게 일찍 퇴근하려는 걸 보니 형 혹시?”

“응. 그 혹시 맞아. 그러니까 오늘은 아무리 급한 일 있어도 나 찾지 마라.”

“그걸 말이라고. 알았어. 잘하고 와 형.”

“고맙다.”

윤결은 재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며 서둘러 혜윤이 알려준 호텔로 향했다.

재현은 팔불출도 저런 팔불출이 없다는 생각에 윤결이 나간 문을 바라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하루라도 그의 입에서 혜원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면 한윤결이 아니었다. 저런 사랑꾼이 그동안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숨기고 살았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무서운 사람이란 생각이 들 정도니 말이다.

재현은 하루라도 빨리 저 인간도 미국으로 쫓아내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누구보다 윤결과 혜원을 응원하는 재현. 어느덧 그는 윤결에게 없어서는 안 될 든든한 후원자이자 조력자가 되어있었다.

**

“꼭 가야 해? 나 오늘 너무 피곤해.”

혜원은 이불에 몸을 돌돌 만 채 얼굴만 빼꼼 내밀며 말했다.

“미국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가족 외식하는 거거든? 어리광 그만 피우고 나가자.”

“나 진짜 피곤한데. 내일 비행기 타는 것도 무섭단 말이야.”

“오늘은 무조건 가야 해. 너 진짜 내가 장담하는데 오늘 안 가면 죽을 때까지 후회한다.”

가기 싫다고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혜원의 엉덩이를 살살 두드리며 혜윤이 그를 달래 일으켰다.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난 혜원은 대충 옷을 챙겨입으며 나갈 채비를 마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혜윤은 혀를 차며 다시 그를 옷장으로 끌고 갔다.

“확 그냥! 벗어. 너 절대 그 꼴로 못 가.”

“뭐 어때. 밥만 먹고 올 건데….”

“됐고. 이거, 이거, 그리고 이걸로 다시 갈아입어. 다 입으면 내려와.”

귀찮다고 투덜거리면서도 혜원은 그녀가 건넨 옷으로 다 갈아입고 나왔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저녁. 혜원의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그런 그를 바라보는 혜윤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강 사장은 그동안의 일들도 사과하고 앞으로 미국에서 새롭게 시작할 혜원의 앞날을 위해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 좋은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마치 데이트라도 하러 온 것처럼 예쁘게 차려입은 혜원의 모습에 혜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윤결이 한눈에 반한 게 이해가 될 만큼, 오늘 혜원의 모습은 귀엽고 예뻤다.

“혜원아, 미국 가면 충분히 휴식을 먼저 가진 다음에 하고 싶은 걸 생각해 보도록 해. 아빠가 우리 혜원이 하고 싶은 건 뭐든 다 하게 해줄게.”

“응.”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막내아들을 보며 강 사장은 안쓰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조금 더 옆에 끼고 돌봐주고 싶을 만큼 불안해 보이기만 하는 막내를 향한 강 사장의 부성애는 애틋했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을 떠나 혜준과 혜윤의 곁에서 함께 지내는 것이 그를 위해 더 나은 길이란 생각에 아쉬움을 감춘 채 그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혜원이 제가 잘 돌볼게요.”

그런 강 사장의 마음을 알아챈 장남 혜준이 혜원의 머리를 다정스레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듬직한 혜준의 말에 강 사장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빠 걱정 마. 우리 혜원이 건드리는 놈은 내가 가만히 안 둘 거니까. 아주 이단 옆차기로 얼굴이 두 쪽 나게 발길질을 해줄 거야. 그러니까….”

“강혜윤.”

“응? 왜 아빠?”

“너나 혜원이 괴롭히지 마. 난 네가 제일 걱정이야.”

강 사장은 못 미더운 눈초리로 재잘재잘 떠는 혜윤을 흘겨보며 말했다.

“내, 내가 뭐!”

“이번에도 사고 치면 넌 무조건 한국으로 강제소환인 줄 알아.”

“뭐? 그런 게 어딨어! 싫어. 그럼 우리 필립은? 나 필립이랑 절대 못 떨어져. 그럼 필립도 같이 소환해. 그럼 생각해 볼게.”

“그걸 말이라고…. 참나, 죽어도 사고 안 친다는 말은 안 하지?”

어이없는 혜윤의 외침에 혜준은 한심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도대체가 철이 든 것 같으면서도 한 번씩 이렇게 사람 속을 뒤집는 말을 할 때면 아직 가르쳐야 할 것 많아 보였다.

이들의 투닥거리는 모습에 혜원은 웃음이 났다. 그 웃음은 혜원이 윤결과 헤어진 뒤 처음 보이는 편안한 웃음이었다. 서로 으르렁거리며 티격태격하던 혜준과 혜윤은 잠시 시선을 돌려 웃고 있는 혜원을 바라봤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화사한 웃음에 둘은 가슴이 뭉클했다.

“아빠 나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나온 음식을 반도 채 먹지 않은 혜원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염려된 혜준이 같이 일어서며 말했다.

“혜원아 어디 아파? 혹시 또 속이 안 좋아? 형이 같이 갈까?”

“아픈 거 아니야. 금방 다녀올게.”

혜준은 괜찮다고 손을 저으며 혼자 화장실로 향하는 혜원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혜원이한테 신경 쓰는 거 반만이라도 나한테 좀 써보지? 똑같은 동생인데 이거 엄연한 차별이다?”

혜윤이 서운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며 혜준에게 넋두리했다. 하지만 그녀는 동시에 멀어지는 혜원을 쳐다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혜윤은 자신에게 힐끔 눈짓하며 혜원의 뒤를 재빨리 따라가는 윤결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둘만의 은밀한 사인을 주고받았다.

‘나 이제 너한테 빚진 거 조금은 갚은 거다, 강혜원.’

**

역시 불편한 자리였다. 아무리 괜찮은 척 웃으려 해도 혜원의 얼굴에 지어지는 억지웃음은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어색했다.

체할 것 같은 분위기 속에 잠시 화장실로 도망쳐온 혜원은 천천히 손을 씻으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쳐다봤다. 핏기없는 희멀건 얼굴이 오늘따라 더욱 볼품없이 느껴졌다.

혜원은 정신이 번쩍 나게 찬물로 세수를 했다. 모두가 행복에 잠겨 있는 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자신 때문에 망칠 수는 없었다. 테이블로 돌아가기 전 혜원은 다시 자연스럽게 웃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입을 벌렸다 오므리며 연습을 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윤결을 발견한 혜원은 깜짝 놀란 듯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젖은 얼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목덜미를 스치며 그의 옷깃을 적셨다.

윤결이 다가오려 하자 혜원은 흠칫 몸을 떨며 뒷걸음질을 쳤다. 이리저리 흐트러진 그의 시선은 마치 도망갈 곳을 찾는 것처럼 초조해 보였다.

“혜원아.”

윤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러 세우며 손을 내밀었다.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은 혜원이라도 결코 뿌리칠 수 없는 윤결의 다정한 부름에 혜원이 그제야 시선을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느덧 윤결의 눈가엔 눈물이 맺혀있었다.

“… 형.”

혜원은 눈앞에 서 있는 윤결에게 다가갈 수도 그렇다고 이대로 도망칠 수도 없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 그를 만날 수 있어 다행이라는 기쁨도 잠시, 혜원은 오늘이면 이제 그와 영영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고개를 떨구며 울컥 눈물을 쏟아냈다.

“나는 혜원이 많이 보고 싶었는데. 안 본 사이에 더 멋있어진 것 같기도 하고. 오늘 보니까 우리 혜원이 너무 예쁜데?”

물기에 젖은 윤결의 떨리는 목소리가 혜원의 가슴을 아프게 후벼팠다.

“… 나 내일 미국 가.”

“알아.”

“가면 나 다신 한국 안 올 거야.”

“… 그래.”

화도 내고 소리라도 지를 줄 알았지만 의외로 윤결은 덤덤히 혜원의 통보를 받아들였다.

혜원은 이제 윤결도 자신을 향한 마음을 완전히 접었다는 생각에 서러움이 밀려왔다. 물론 자신이 먼저 이별을 통보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픈 건 숨길 수 없었다.

‘진짜 마지막이구나. 형도 이제 나한테 정말 질려버렸구나.’

말없이 서 있기만 한 윤결을 향해 혜원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아쉬운 발걸음으로 그의 곁을 스쳐 지났다.

순간 나가려던 혜원의 팔을 잡아 멈춰 세운 윤결이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얼떨결에 윤결의 품에 안기게 된 혜원이 화들짝 놀라 그를 밀어냈다. 하지만 윤결은 혜원을 놓아주는 대신 더욱 그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미안해 혜원아. 아프게 해서 형이 다 미안해.”

“대체 나한테 왜 이래. 나보고 어떡하라고…. 이제 와서 나보고 어쩌라고….”

혜원은 힘없이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울먹였다.

윤결은 그의 뒷머리는 찬찬히 쓰다듬으며 그를 달랬다. 이제 혜원이 해야 하는 건 없었다. 앞으로의 모든 일은 모두 윤결의 몫이니까 말이다. 윤결은 흐느껴 우는 혜원을 살며시 떼어내 그의 얼굴을 마주 봤다.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잘 우는 이 마음 여린 녀석을 미국으로 보낼 생각을 하니 윤결은 또다시 그를 데리고 도망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더 이상 일을 그르칠 수 없단 생각에 윤결은 애써 욕심을 눌러 참으며 준비해 온 작은 상자를 혜원의 손에 올려주었다.

“이, 이게 뭐야?”

혜원이 가늘게 떨리는 눈으로 의문의 상자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혜원아. 조금만 기다려주라. 내가 꼭 데리러 갈게.”

“그게 무슨….”

“그리고 그땐 꼭 결혼해 주라.”

윤결은 혼란스러워하는 혜원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상자 속 반지를 꺼내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당연히 혜원은 받지 않았다. 아니, 받을 수 없었다. 혜원은 마구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나, 난 못 들은 거로 할래. 나 이거 못 받아. 나한테 이러지 마. 제발! 나도 너무 힘들단 말이야!”

“그럼 버려. 정 못 받겠으면 네가 직접 버려 강혜원. 그건 너에게 주려고 했던 반지니까 주인이 없어졌으면 나에게도 의미 없는 반지야. 그렇게 싫으면 네가 버려. 그리고 내가 방금 한 말, 빈말 아니야. 네가 이 반지를 지금 받든 버리든 내가 다시 널 찾는 날, 나는 네게 정식으로 프러포즈를 할 거야.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네가 받아 줄 때까지. 오늘은 이만 갈게 혜원아. 부모님 기다리시겠다. 내일 출국 잘하고, 그리고 사랑한다 강혜원.”

“이거 가져가! 지, 진짜 버릴 거야. 버릴 거라고!!”

웃으며 돌아서 나가는 윤결을 향해 혜원이 반지를 든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에 꽉 쥐어진 반지. 하지만 혜원은 차마 반지를 던질 수 없었다.

윤결이 떠나고 견디기 힘든 벅찬 마음에 혜원은 벽에 기대 미끄러지듯 바닥에 내려앉았다. 기다리라는, 꼭 데리러 오겠다는 말에 혜원은 마치 자신을 놓지 말아 달라는 속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도 가기 싫어. 나도 형 두고 혼자 가기 너무 싫어…. 나도, 나도 형이랑 오래오래 같이 있고 싶어.”

혜원은 그의 다정함에 또다시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어 버렸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늪에 빠진 것처럼 무기력해지는 다짐들. 혜원은 그렇게 한동안 울음을 삼키며 아픔을 참아냈다.

그 시각, 올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도 혜원이 돌아오질 않자 걱정이 된 강 사장이 그를 찾아 화장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간 강 회장은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아들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너무도 구슬픈 목소리로 윤결을 찾는 혜원의 울먹임에 강 사장은 선뜻 그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모른 척한다고 모든 것이 괜찮아질 리 없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 사장은 이번 미국행이 혜원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는 생각엔 변함없었다.

처음엔 모두에게 힘들고 아픈 시간이겠지만 차차 나아질 거라 생각했다. 차마 아파하는 아들에게 다가가지 못한 강 사장은 다시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제발 모두에게 힘든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 주길 바랄 뿐이었다.

**

드디어 출국일 아침이 밝았다. 혜원은 씩씩한 얼굴로 거울 앞에 섰다. 더 이상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칠 순 없다는 생각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결정한 미국행인 만큼, 마지막까지 웃는 모습을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싶었다.

“혜원아, 만약에 힘들면 언제라도 돌아와. 알았지?”

여전히 이대로 보내기 불안하기만 혜원의 모친이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엄마, 나도 이제 어른이야.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된다고. 그리고 혜준 형도 있고 혜윤이도 있는데 뭘.”

혜원은 여자인 혜윤보다도 자신을 더 걱정하는 엄마의 모습에 멋쩍어하며 방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새롭게 시작하는 새로운 곳에서의 첫걸음. 혜원은 부모님과 아쉬운 작별을 하며 출국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런 혜원을 멀리서 지켜보는 한 사람. 한윤결. 멀어지는 혜원을 바라보는 윤결의 눈빛은 헤어짐에 대한 슬픔이 아닌, 곧 다시 만날 거란 확신에 찬 자신감 넘치는 눈빛이었다.

‘조금만 기다려 혜원아. 형이 데리러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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