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다가오는 이별의 시간(2)
소파에 앉아 복잡한 마음을 추스르던 윤결은 바닥에 반짝이는 작은 유리 파편을 발견했다. 뭔가 싶은 마음에 가까이 다가간 윤결은 미처 깨끗이 닦이지 않은 얼룩진 바닥에 남은 핏자국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혜원의 방을 쳐다봤다.
자꾸만 밀려드는 안 좋은 생각에 윤결은 다시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의 방 문을 열었다. 어느덧 일어나 침대에 앉아 있는 혜원의 모습에 윤결은 단번에 그에게 달려갔다.
“혜원아! 너 괜찮아?”
핏자국에 놀란 윤결이 이리저리 그의 몸을 살피며 물었다. 다행히 그의 손이나 얼굴에선 아무런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윤결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혜원을 와락 끌어안았다.
“형, 갑자기 웬일이야? 무슨 일 있었어? 회사는 어쩌고 온 거야?”
“너 진짜 괜찮은 거야? 나한테 할 말이나 물어보고 싶은 거 없어?”
윤결은 너무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신의 안부를 먼저 묻는 혜원을 향해 잔뜩 긴장한 눈빛으로 물었다.
“응? 나? 없는데? 대체 왜 그러는데 형?”
“너, 혜준이한테 전화했다며.”
“아. 응. 그냥 혜준 형 안 본 지도 오래됐고, 형이 미국 가는 거 물어보니까 갑자기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그냥 안부차 전화한 거야.”
혜원이 정말로 아무 일 없다는 듯 순진한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하지만 윤결은 의심 어린 눈으로 그에게 휴대폰을 건네며 물었다.
“그럼 재희는?”
“어?”
“전화… 왜 받았어?”
순간 혜원의 눈가가 살짝 흔들렸다.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움찔거리는 혜원의 모습에 윤결의 얼굴이 어둡게 변해갔다.
“미안. 근데 정말 별말 안 했어. 오늘 못 나갈 것 같다고 말하고 끊은 게 다야. 정말이야.”
혜원은 전화를 받지 말라고 한 윤결의 말을 어긴 것이 미안해 그의 눈치를 살피며 애꿎은 손가락을 꼬집어댔다.
“정말… 그게 다야? 그 녀석이 다른 말 한 건 없고?”
“응. 재희 형도 알았다고 하고 바로 끊었어. 약속 어겨서 미안해 형.”
여전히 의심쩍은 얼굴로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윤결을 향해 혜원이 멋쩍게 웃음을 지으며 사과했다. 하지만 그래도 윤결은 영 께름칙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럼 거실에 유리 조각은 뭐야? 그리고 핏자국도 보이던데. 그건 다 뭐야 강혜원?”
“아…. 그거….”
깨끗이 치운다고 치웠음에도 윤결에게 들켜버리자 혜원은 또다시 할 말을 잃고 헤매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떤 변명을 하든 어차피 곧 들킬 것이란 생각에 혜원은 천천히 이불을 걷어 자신의 발을 보여주었다. 피로 얼룩진 붕대를 마주한 윤결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야, 너 대체 이게 뭐야? 발이 왜 이래!!”
치료를 제대로 하지 않아 지혈조차 잘되지 않았는지, 윤결의 눈에 비친 혜원의 발은 끔찍했다. 혜원의 대답을 기다릴 새도 없이 윤결은 그를 번쩍 안아 들고 욕실로 향했다. 어설프게 감아두었던 붕대를 풀어주며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자, 혜원은 따가운지 발을 꼼지락거리며 작은 신음을 냈다.
“아얏.”
“아픈 건 알아? 대체 발이 왜 이 모양이야. 집에서 뭘 했던 거야?”
“그게 컵을 떨어트려서 깼는데, 모르고 유리를 밟아서…. 미안.”
“너 바보야? 유리를 어떻게 밟으면 발이 양쪽 다 이 지경이 돼?”
너무도 깊어 보이는 상처에 속상해진 윤결이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혼자 두는 것도 걱정, 곁에 두는 것도 걱정. 윤결은 그의 작은 발에 생긴 상처들을 조심스럽게 씻어주며 입술을 짓씹었다.
“미안. 앞으로 정말 조심할게.”
“제발 혜원아. 다치지 말자.”
“응.”
배시시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는 혜원의 귀여운 모습에 더 이상 화조차 낼 수 없던 윤결은 고개를 내려 그의 발에 키스를 해주며 말했다.
“예쁜 발에 상처 났잖아. 내겐 너의 모든 것이 너무 소중해 혜원아.”
눈물이 날 만큼 다정한 윤결의 속삭임. 혜원은 부끄러움에 빨개진 얼굴로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안겨들었다.
재희에게 들었던 모든 말들이 차라리 모두 꿈이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 하지만 이런 다정함이 오직 자신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혜원은 눈물이 났다.
아직도 윤결을 사랑하고 있다는 그 남자. 윤결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남자를 떠올린 혜원은 너무도 작고 초라한 자신이 윤결의 곁에 있는 것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나한테 이렇게 잘해 주지 마. 나 자꾸 착각해. 형이 정말로 나를 좋아한다고…. 이젠 그럼 안 되는데…. 아는데도 자꾸 기대하게 돼.’
처음부터 가질 수 없는 남자를 원한 자신의 욕심. 그리고 지금은 그 벌을 받는 것만 같았다.
상처를 다 씻고 어느 정도 지혈도 된 듯하자, 윤결은 그의 발을 따뜻한 물로 적신 수건에 돌돌 말아 안아 들고 거실로 나왔다. 괜찮다고 내려 달라고 하는 혜원의 부탁을 가볍게 무시한 윤결은 그를 소파에 내려놓은 뒤 구급상자를 꺼내 소독부터 꼼꼼하게 했다.
차가운 알코올이 상처에 스며들자 혜원은 발을 움찔움찔 떨며 버둥거렸다.
“소독하는 것조차 아프다고 끙끙거리면서 뭐가 괜찮다고….”
“칫. 형이 너무 꼼꼼히 발라서 그래. 대충 하면 되는데.”
“네가 안 다쳤으면 이럴 일도 없거든?
“내가 뭐 다치고 싶어서 다쳤나.”
입술을 삐죽이는 투덜거리는 귀여운 혜원의 투정이 윤결은 피식 웃으며 그의 발에 붕대를 감아주었다. 다행히 별다른 일은 없었던 것 같아 안심이 되면서도 혜원의 휴대폰으로 걸려왔던 재희의 전화가 계속 신경이 쓰였다.
아무래도 더 늦기 전에 모든 일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에 윤결은 최대한 빨리 혜원을 미국으로 보내야겠다 마음먹었다. 그게 당장 내일이 되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혜원아, 형이 할 말이 있는데….”
힘겹게 마음을 굳힌 윤결이 혜원의 곁에 앉아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아 맞다. 형. 그런데 초밥은? 초밥 사 온다며. 나 아직 밥 안 먹었는데. 왜 빈손이야?”
“어? 초밥? 혜원아 너 배고파? 점심 안 먹었어?”
“응.”
윤결은 갑자기 배가 고프다며 초밥 타령을 하는 혜원의 말에 살짝 당황한 듯 시계를 확인했다. 아무래도 우선은 혜원의 배를 채워주는 것이 먼저일 듯싶었다. 점심시간도 훌쩍 넘긴 시간인데 아직까지 밥도 먹지 않았다는 말에 윤결은 서둘러 부엌으로 향했다.
혜원은 점심을 준비하는 윤결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직은 듣고 싶지 않았다. 조금 더 그와의 행복한 시간들을 기억하고 싶은 혜원. 그의 입에서 나올 말들을 받아들이기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질 않았다. 어쩐지 그의 입에서 듣게 된다면 모든 게 끝일 것만 같은 생각에, 혜원은 진실을 최대한 뒤로 미루고만 싶었다.
윤결이 정성껏 치료해 준 발을 내려다보며 혜원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런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또다시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띠링!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혜원은 정적을 깨고 도착한 문자에 윤결의 눈치를 살피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처음 보는 번호로 도착한 의문의 문자. 무심코 눌러 확인한 문자 내용에 혜원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이제 우리도 만날 때가 된 것 같은데. 강혜원? 알고 싶은 것도 많을 거고, 듣고 싶은 것도 있지 않아? 네가 궁금해하는 거 내가 전부 알려 줄 테니까 연락해. 루이]
머릿속에 강렬히 꽂혀버린 루이라는 이름에 혜원의 눈가가 잘게 떨렸다. 답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점심 준비를 마친 윤결이 거실로 나오며 말했다.
“혜원아, 볶음밥 괜찮아? 우선 급해서 대충 만들었는데, 이거 먹고 저녁엔 외식할까?”
“응. 우와 근데 냄새 정말 좋은데?"
“이리 와. 걷기 힘들잖아.”
"괴, 괜찮아. 걸을 수 있어.”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는 혜원의 손을 잡아 그대로 번쩍 안아 든 윤결이 그의 하얗고 동그란 이마에 입맞춤하며 말했다.
“그 다리로 걷다가는 하루 종일 걸릴걸? 그러다 배고파 죽을지도 몰라.”
“뭐, 뭐래….”
오늘따라 더욱 다정한 그의 손길에 혜원이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 남아 있는 어두운 진실에 혜원은 심란했다.
배는 그다지 고프진 않았지만, 너무도 정성스럽게 차린 음식에 혜원은 꾸역꾸역 밥 한 그릇을 다 먹었다. 윤결은 기특하게도 밥을 열심히 먹는 혜원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봤다.
말할 타이밍을 기다리던 윤결이 슬슬 빈 그릇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혜원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역시나 불편한 다리로 걸으려니 쉽지 않았다. 한 발짝 발을 내디딜 때마다 심호흡을 해야 할 만큼 아팠지만, 혹시나 윤결이 걱정할까 봐 혜원은 최대한 숨을 죽이며 몸을 움직였다.
윤결은 그런 혜원의 뒷모습을 몰래몰래 쳐다봤다. 당장 달려가 안아주고 싶었지만, 어쩌면 그 또한 조금 더 시간을 벌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뒷정리를 마친 윤결이 거실로 나가기 직전 윤결의 휴대폰이 울렸다. 갑작스럽게 사라진 윤결을 찾는 전화였다. 급한 결재들이 밀려있었고, 오후에는 간부 회의까지 잡혀 있었기에 아쉽지만 윤결은 다시 회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다녀와서 찬찬히 이야기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윤결은 서둘러 다시 회사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옷을 챙겨입는 윤결의 분주한 모습에 겨우 소파에 내려앉은 혜원이 고개를 돌려 그를 향해 물었다.
“어디 가?”
“회사에. 급한 일만 처리하고 빨리 올게.”
“괜히 나 때문에. 미안.”
“아니야. 내가 너 보고 싶어서 온 거야. 올 때 맛있는 거 사 올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집에서 쉬고 있어. 알았지?”
“응. 어차피 이 발로 어디 가지도 못해.”
혜원이 두 다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말했다. 윤결은 그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며 서둘러 회사로 돌아갔다.
윤결이 떠나고 혼자 남은 혜원은 다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밥을 먹는 내내 사실 혜원은 루이에게서 온 문자가 계속해서 신경이 쓰였다.
혜원은 떨리는 마음으로 루이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딱 한 번만. 이번 딱 한 번만 더 윤결의 말을 어기는 한이 있어도 그에게 꼭 묻고 싶은 말들이 있었다.
신호가 가는 내내 혜원은 전화하는 것이 과연 잘하는 것인지 수없이 많은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그가 전화를 받지 않길 바라며 망설이는 사이 수화기 너머로 가늘고 고운 목소리가 들렸다.
[혜원?]
“네….”
[생각보다 빨리 전화했네? 궁금한 게 많은가 봐? 윤결 씨는 알고 있나?]
“아, 아니요. 형은 몰라요. 그러니까 형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주세요.”
어딘가 모르게 날이 선 듯한 차가운 루이의 물음에 혜원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모든 진실의 열쇠를 쥐고 있는 루이. 혜원은 그에게서 모든 사실을 직접 듣고 싶었다.
[좋아. 언제 만날까? 난 오늘이라도 좋은데.]
“오늘은 제가 몸이 좀 안 좋아서 나가기 힘들 것 같아요.”
[어디 아파?]
“아니요. 그냥 좀 다쳐서.”
[할 수 없네. 그럼 넌 언제가 좋은데?]
“내일 제가 호텔 근처로 갈게요.”
얼떨결에 약속까지 잡아버린 혜원은 기분이 한층 더 가라앉아 버렸다. 언젠가는 그와 마주해야 한다 생각했지만, 역시 윤결이 사랑했다는 남자를 마주한다는 건 떨리는 일이었다.
혜원은 아픈 다리를 소파 위로 끌어 올리며 지친 몸을 뉘었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고, 머리는 바늘로 쿡쿡 찔러대는 것처럼 아팠다.
눈을 감으니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울지 않겠다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만, 점점 더 진실을 마주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자 혜원도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는 것이 너무도 힘이 들었다.
혜원과의 통화를 마친 루이는 재희가 잠시 방을 비운 틈을 타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까 살짝 그의 방을 엿봤을 때 얼핏 책상 속에 무언가를 숨기는 것을 목격한 루이는 분명 그것이 윤결과 관련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샤워를 하는지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리자 루이는 재빨리 서랍을 열어 재희가 숨긴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곧 서랍 깊숙이 감춰둔 녹음기를 발견했다. 루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주머니 속에 넣으며 방을 나왔다.
방문을 걸어 잠근 뒤 녹음기를 돌려보던 루이는 들어왔을 때랑은 다르게 점점 더 얼굴이 굳어갔다. 그딴 꼬맹이 녀석이 대체 뭐라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고 당당히 말하는지, 마치 혜원이 자신의 전부인 듯 아끼는 윤결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루이는 두 눈에 독기를 가득 품은 채 녹음기를 노려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이젠 윤결의 마음 따위는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그의 곁에 남을 최후의 사람이 혜원만 아니라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 치욕스러운 마음이 조금은 해소될 것 같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재희는 갑자기 또 기분이 가라앉은 루이의 모습에 물끄러미 서서 그를 바라봤다. 윤결이란 남자를 만나고부터 루이의 얼굴에선 언제부터인가 웃음이 사라졌다.
늘 자신에게 다정하고 밝았던 형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오직 질투와 복수에 눈이 먼 루이의 모습에 재희는 걱정이 됐다. 그리고 형을 이렇게 변하게 만든 사람이 윤결이라는 생각에 그 또한 두 주먹을 꽉 쥐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화가 나면서도 자신 또한 루이를 닮아가는 건 아닌 건가 하는 혼란스러움. 차라리 형을 데리고 윤결이 없는 곳으로 가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 만큼, 지금 루이의 모습은 하루하루가 위태로워 보였다.
**
얼마나 오래 잠에 빠져 있었는지, 혜원이 눈을 떴을 땐 이미 주위는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시계를 보니 일곱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때마침 울리는 벨소리에 혜원은 휴대폰을 확인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혜원의 얼굴이 환해지며 입가엔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응. 어디야?”
[거의 다 왔어. 배고프지?]
“아니. 자다가 방금 깼어. 배는 조금?”
[5분이면 도착하니까 조금만 기다려 혜원아.]
“천천히 와.”
윤결이 거의 다 도착했다는 전화에 혜원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향했다. 힘들게 일하고 왔을 윤결을 조금이나마 돕고 싶은 혜원은 그릇과 숟가락들을 꺼내 식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아직 상처 난 발이 아플 법도 했지만, 혜원은 가지런히 그릇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둘만의 오붓한 저녁을 준비했다. 어느덧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윤결이 혜원의 이름을 부르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혜원아, 어딨어?”
부엌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발견한 윤결이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혜원이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 그러자 윤결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짓더니 사가지고 온 초밥 봉투를 흔들며 말했다.
“나를 기다린 거야, 초밥을 기다린 거야?”
“당연히 초밥이지!!”
“뭐?”
재빨리 초밥 봉투를 낚아챈 혜원이 혀를 날름 내밀며 쏜살같이 부엌으로 들어갔다. 당황한 윤결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이내 머리를 긁적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기분이 좋아 보여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윤결은 분주히 음식들을 꺼내며 식탁을 차리는 혜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역시 이 귀엽고 소중한 아이를 절대 잃을 수 없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윤결은 천천히 그의 뒤로 다가가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우리 혜원이 많이 먹고 빨리 자라야겠는걸? 너무 말라서 형이 한입에 잡아먹겠다.”
“칫. 언제는 안 잡아먹었나?”
“응??”
농담으로 던진 말에 혜원이 어깨를 움찔 떨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깜짝 놀란 윤결이 재빨리 그를 돌려세웠다. 어디서 깜찍하게 저런 위험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지. 윤결은 당장에라도 그를 안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터질 듯 요동을 쳤다.
평소 같았으면 부끄러움에 시선을 피하거나 그를 뿌리쳤을 혜원이었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 얌전히 윤결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며 안겨 오는 혜원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오늘따라 우리 혜원이가 왜 이럴까?”
“뭐가?”
“귀여워서. 사랑스러워서.”
“칫. 오늘만?”
“아니. 매일 매일.”
“나도. 나도 형 매일 매일 보고 싶고 사랑해.”
혜원의 수줍은 미소에 윤결은 빙그레 웃으며 그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모든 근심과 걱정을 내려놓게 만드는 혜원의 작은 미소에 윤결은 행복했다. 그리고 이 행복을 지키기 위해 뭐든 하겠다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배가 고플 혜원을 위해 서둘러 자리에 앉힌 윤결은 앞접시에 그가 좋아하는 대왕 연어 초밥을 놓아주며 먹길 기다렸다. 혜원이 입을 크게 벌리며 한 입 베어 물자, 윤결이 흐뭇한 얼굴로 바라봤다. 사랑하는 혜원의 입에 음식이 들어가기만 해도 행복한 윤결.
팔불출 그의 얼굴에 지어진 웃음은 사라질 줄 몰랐다.
“형도 먹어봐. 맛있는데….”
한 손에는 반쯤 남은 초밥을 들고, 볼이 볼록 튀어나올 정도로 입 안 가득 초밥을 넣은 혜원이 입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윤결은 피식 웃으며 그의 손에 들린 초밥을 향해 얼굴을 가져다 대더니, 혜원의 손가락 채로 입 안에 쏙 집어넣으며 말했다.
“우리 혜원이가 주니까 더 맛있다.”
깜짝 놀란 혜원이 콜록대며 얼굴을 붉혔다. 그의 이런 장난에도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혜원은 어느새 윤결에게 푹 빠져버렸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다정하게 대할수록 혜원의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해져 갔다.
재희가 했던 말들도, 루이의 문자도 모두 다 떠올리고 싶지 않을 만큼 혜원은 지금 윤결과의 이 행복한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던 혜원이 살며시 자신의 손가락을 빼내며 윤결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짧게 닿았다 떨어진 혜원의 입술이 멀어질세라 윤결이 그의 뒷머리를 재빠르게 낚아채며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읍!”
거칠게 혀를 들이밀며 입술을 벌리고 들어오는 윤결의 키스에 혜원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그의 혀를 감쌌다. 이상하게 코끝이 찡해지며 눈물이 났다. 윤결은 그대로 혜원을 번쩍 안아 들어 식탁 위에 올려 앉혔다.
“우리 혜원이 많이 컸네? 깜찍하게 형 유혹할 줄도 알고.”
“뭐래…. 나 아직 밥 다 안 먹었는데….”
“나보다 초밥이 더 먹고 싶다는 건가?”
야릇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윤결을 향해 혜원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지금은 초밥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허락이라도 한 듯 수줍게 안겨 오는 혜원을 그대로 식탁 위로 밀어 넘어트린 윤결은 붉게 물든 그의 뺨을 쓸어내렸다.
오늘따라 더욱 애달프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혜원의 눈빛에 윤결은 참지 못하고 그의 목덜미를 강하게 깨물었다.
“아앗…. 아파.”
옅은 신음을 내뱉으며 혜원이 눈을 꾹 내리감자, 윤결은 더욱더 집요하게 혜원의 목덜미를 물고 빨았다. 희고 가는 혜원의 목덜미에 금세 빨간 멍울이 생겼다. 윤결은 빠르게 혜원의 상의를 벗겨냈다. 하얗고 마른 혜원의 맨 가슴이 드러나자, 윤결은 천천히 고개를 내려 그의 가슴으로 향했다.
뜨거운 혀가 목덜미를 지나 쇄골과 유두를 차례로 핥아 내려가자, 혜원은 몸을 파르르 떨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쾌감에 혜원은 머리끝이 다 쭈뼛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흥분한 윤결의 손이 바빠졌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혜원의 바지를 벗겨버리고는 그의 작은 성기를 잡아 위아래로 천천히 흔들기 시작했다.
“혀, 형! 잠깐만…. 자, 잠깐… 하앗!”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지, 혜원이 재빨리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으며 소리쳤다. 하지만 오히려 윤결은 혜원의 손을 자신의 부풀어 오른 성기에 가져가 대며 말했다.
“그 손은 거기가 아니라 여길 만져줘야지. 혜원아.”
단단히 부풀어 오른 성기의 크기에 놀란 혜원이 화들짝 놀라 손을 떼려 했다. 하지만 혜원의 손을 놓칠세라 윤결이 재빨리 그의 손에 자신의 왼손을 올리며 말했다.
“둘 중 한 명이라도 한 발 빼야 네 안으로 들어가는 게 편할 텐데? 지금 형은 너무 급해서 젤 따위를 가지러 갈 시간이 없거든. 어때 혜원아? 네 손이라면 내가 먼저 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 그런 말 좀 하지 마. 흐응.”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이는 손, 그리고 발기한 윤결의 성기가 주는 묵직한 존재감에 혜원은 머리가 하얘질 정도로 이성을 잃기 시작했다.
자신의 손가락을 입에 넣으며 애써 신음을 참아내려는 혜원의 모습에 윤결은 야릇한 미소를 내비쳤다. 그는 이내 혜원의 성기와 자신의 성기를 맞잡으며 힘주어 위아래로 흔들기 시작했다. 작고 귀엽던 혜원의 성기도 점점 몸집을 부풀리며 사정이 임박해 왔음을 알려왔다. 혜원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윤결을 애처롭게 올려다보며 애원했다.
“형, 하앗. 손 좀 놔줘. 응? 제발. 나 진짜 갈 것 같아. 제발!”
“가도 돼 혜원아. 보고 싶어 우리 혜원이 가는 모습.”
“시, 싫어. 형 제발 응? 여기선 싫어!”
“난 좋은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네 모든 것이 너무도 잘 보여서 난 좋기만 하다고 강혜원.”
침실도 아니고 부엌에서, 그것도 환하게 불까지 켜져 있는 곳에서 이런 낯 뜨거운 행위를 하는 것 자체가 너무도 부끄럽고 어색하기만 한 혜원의 눈물 섞인 부탁에도 윤결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끝까지 참아보려 입술을 질끈 깨문 혜원도 절정에 다다랐는지, 결국 외마디 비명과 함께 사정을 하고 말았다.
“하앗!”
우윳빛의 묽은 정액이 윤결의 손과 혜원의 가슴으로 튀어 올랐다. 마치 백 미터 달리기라도 한 듯 혜원이 가쁜 숨소리를 내뱉으며 힘겨워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윤결도 혜원의 가슴에 질퍽한 사정을 하며 자신의 손에 묻은 정액을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가지고 싶어. 널 갖고 싶어 미치겠어. 강혜원.”
다 가졌다 싶으면서도 늘 어딘가 모르게 부족했었다. 작은 빈틈만 보여도 언제든지 자신의 곁을 떠나버릴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혜원의 모습에 윤결은 초조했다. 이렇게 그를 안고 있는 이 순간에도 윤결은 혜원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웠다.
“갖고 싶으면 가지면 되잖아. 왜 망설이는 건데?”
“뭐? 강혜원 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말하는 거야?”
순간 윤결은 예상하지 못한 혜원의 반응에 할 말을 잃은 듯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혜원을 번쩍 안아 들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렇게까지 혜원이가 나를 원하고 있는 줄 몰랐네. 역시 초밥보단 이게 먹고 싶었구나? 야한 꼬맹이였네?”
윤결은 또다시 발기해 발딱 선 자신의 성기를 혜원의 엉덩이 사이에 슬며시 밀어 넣었다. 이미 정액으로 번들거리던 성기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혜원의 엉덩이를 벌리고 들어갔다. 자세가 자세인지라 윤결의 단단한 성기는 한 번에 혜원의 깊은 곳까지 쑤시고 들어갔다.
“아앗! 너무…. 깊어! 흐응!”
갑작스러운 삽입에 자지러지는 혜원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혜원은 발버둥을 치는 대신 그의 허리에 자신의 두 다리를 휘감으며 더욱 적극적으로 윤결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혜원은 조금이라도 이 아픔을 잊어보려 재빨리 윤결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이렇게 시작된 둘의 뜨거운 밤. 윤결의 사랑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은 혜원의 애절함이 왠지 모르게 더욱 서글프게 느껴지는 키스. 침실로 향하는 내내 둘의 뜨거운 키스가 이어졌다.
부서질 듯 가느다란 혜원의 몸을 안고 침실로 들어온 윤결은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그를 눕혔다. 윤결의 성기를 그대로 머금고 있던 혜원의 구멍이 움찔거리며 조여오자 윤결이 작게 인상을 쓰며 혜원의 가슴 위로 올라탔다. 쌕쌕거리는 가냘픈 심호흡을 내뱉으며 젖은 눈으로 윤결을 올려다보는 혜원. 그리고 그런 혜원의 모습에 윤결은 극도로 흥분했다.
야무지게 자신의 성기를 잘 물고 있는 혜원이 기특했는지, 윤결은 그의 입술을 살짝 깨물며 키스를 했다. 혜원은 윤결과의 키스를 좋아했다. 뜨거운 그의 혀가 입 안으로 들어올 때면 혜원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그에게 매달렸다. 서로의 타액이 입가에 흥건히 새어 나왔다. 어느 정도 혜원이 긴장을 푼 듯 보이자, 윤결은 슬슬 허리 짓을 시작하면 그의 안을 파고들었다.
“아앗!”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단번에 깊숙이 파고드는 윤결의 성기에 혜원이 몸을 떨며 비명을 내질렀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혜원의 몸은 파르르 떨렸고, 격한 윤결의 움직임에 혜원은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 하지만 윤결은 혜원의 눈물을 혀로 핥아주며 다시 한번 강한 허리 짓을 이어갔다.
-퍽.퍽.퍽.
정신없이 몰아세우고 싶었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은 짙은 욕망과 욕정. 혜원의 눈물은 윤결을 부추길 뿐이었다.
아픔을 참으며 필사적으로 윤결에게 매달려있던 혜원의 손이 툭 하고 침대 위로 떨어지며 그가 정신을 잃자, 그제야 제정신이 돌아온 윤결이 움직임을 멈추며 의식을 잃은 혜원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정신없이 안는 동안에도 혜원은 거부는커녕 아프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윤결을 받아들였다. 얼마나 참고 울었는지 그 작은 얼굴이 눈물바다가 될 때까지 짐승처럼 혜원의 위에서 날뛰어대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진 윤결이 입술을 꽉 깨물며 혜원을 와락 끌어안았다.
무섭고 두려웠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혜원이 곁에 있다는 사실조차 없던 일이 돼버릴까 봐 겁이 났다. 윤결은 기절한 혜원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며 욕실로 향했다. 정액과 땀으로 엉망이 된 그의 몸도, 눈물로 범벅이 된 붉게 물든 그의 작은 얼굴도 모두 깨끗이 씻겨주고만 싶었다.
따뜻한 물을 받고 욕조에 물이 차는 동안 윤결은 가만히 혜원을 품에 안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콸콸콸 물이 채워지는 소리에도 윤결의 시선은 오직 혜원을 향해 있었다. 어느 정도 물이 차오르자 그제야 몸을 일으켜 물을 잠그며 혜원을 조심스럽게 물속에 집어넣었다.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혜원의 작은 발. 한차례 치료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물에 닿으면 아플까 봐 윤결은 재빨리 물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어깨에 그의 두 다리를 올려주며 그를 안아 들었다.
조심스럽게 혜원의 등을 욕조 가장자리에 내려놓으며 칭칭 감긴 발의 붕대를 풀어냈다. 피는 다행히 다 멈춘 듯했다. 윤결은 그의 발바닥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키스를 했다.
“사랑해 혜원아. 죽을 만큼 사랑해.”
샤워를 끝낸 윤결은 혜원을 다시 침대에 눕힌 뒤 그가 잠든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사이 그의 휴대폰에는 수십 개의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와있었다.
[김재현: 형, 혜원이 비행기표 주말로 끊을게. 그런데 정말 혜원이 보낼 거야? 외삼촌, 아니 사장님한테는 뭐라고 말하려고? 진짜 다 고백할 거야?]
[김재현: 전화 좀 받아. 형 미국 지사 신청 반려됐어. 사장님이 직접 반려하셨어. 형이 전화 안 받는다고 나한테 전화하셨어. 집 아니야? 연락해.]
[아버지: 한윤결. 갑자기 무슨 미국 지사야.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승진 준비나 해. 그리고 혜윤이 유학은 내년으로 미뤄. 혼자 보내는 건 절대 안 돼. 강 사장님한테는 내가 잘 설명할 테니 그렇게 알아. 김재현이 들고 온 서류 다 반려했어. 내일 회사에서 다시 이야기해.]
[아버지: 혜윤이 데리고 집으로 한번 와. 못 본 지 오래된 것 같은데. 네 엄마가 혜윤이 보고 싶어 해. 내일 같이 저녁 먹으러 오거라.]
“하…. 씨발.”
무엇 하나 제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 짜증이 나는 듯 윤결은 휴대폰을 거칠게 소파에 내던지며 창가로 향했다.
모든 것을 밝혀야 하는 시간이 가까이 다가왔다는 생각에 그의 얼굴이 점점 더 어둡게 굳어졌다. 순간 또다시 윤결의 휴대폰이 울렸다. 윤결은 짧게 혀를 차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어 말해.”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무슨 일인데?”
[혜원이 진짜 이번 주에 보낼 거야?]
“어. 그대로 진행해.”
[외삼촌은? 대체 어떻게 하려고?]
“다 말해야지. 더 이상 숨기는 것도 무의미하고.”
[형. 진짜 괜찮겠어?]
“뭐가.”
[… 알잖아. 아마 아무도 형 편에 서지 않을 거라는 거.]
“그래서 너한테 부탁했잖아.”
[혜원이는…. 혜원이한테는 정말 말 안 할 거야?]
“그 녀석은 아무것도 몰라야 해. 그러니까 무조건 이번 주말에 미국 보낼 거야. 혜준이한테는 내가 따로 연락할 거야. 이틀 남았으니까, 그때까지만 잘 버텨봐야지.”
이틀. 자신에게 주어진 이틀이라는 시간 동안만이라도 혜원과 둘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 윤결. 전화를 끊은 윤결은 말없이 혜원의 방을 쳐다봤다.
제발 이 폭풍전야가 혜원만은 비켜 지나가 주길 윤결은 빌고 또 빌었다.
**
다음 날 윤결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는 혜원을 남겨 둔 채 회사로 향했다. 해결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였지만 우선은 아버지를 만나 내일까지 시간을 벌어야 했다. 윤결은 곧장 사장실로 향했다.
한 사장 또한 기다렸다는 듯 그를 자리에 앉히며 물었다.
“대체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미국 지사라니. 무슨 생각이야?”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일입니다. 그리고 곧 혜윤이도 유학을 갈 거니까 같이….”
“혜윤이 유학이 급한 건 아니잖아? 그리고 그건 내가 혜윤이와 강 사장님께 잘 설명할 테니까 당분간은 회사 일에 더 신경 써. 다음 달에 상무 승진 안 할 거야?”
“승진이 중요한 건 아니잖습니까. 꼭 다음 달에 승진해야 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중요하지 않다고? 넌 회사가 장난이야? 내 아들이니까 당연히 시간이 지나면 사장 자리에 오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건방지게?”
한 사장은 요즘 들어 대체 무슨 일에 정신이 팔려있는지 혼이 나간 사람처럼 회사 일을 내팽개치는 윤결을 못마땅해하며 소리쳤다.
“그런 거 아닙니다.”
“시끄럽고 미국 지사는 접어. 그리고 오늘 저녁에 혜윤이 데리고 집에 한번 오고.”
“오늘은 안 됩니다.”
“왜?”
“혜윤이가 조금 아픕니다. 그래서 저도 내일까지 휴가를 썼으면 합니다.”
“뭐? 어디가 아픈데? 그걸 왜 지금 말하는 거야? 병원은 데리고 갔어?”
“네. 그냥 몸살이라 내일까지 쉬면 괜찮을 겁니다.”
윤결이 눈을 가늘게 내리깔며 대답했다. 지금 이렇게 아버지와 입씨름을 하는 시간조차도 아깝다고 생각할 만큼, 지금 그의 마음엔 여유 따윈 없어 보였다.
“하아…. 오늘은 이만 들어가. 하지만 내일은 잠깐 회사에 나와. 중요한 간부 회의야. 회장님도 참석하시는 회의야. 그런 줄 알고 오늘은 집에 가서 혜윤이 잘 돌봐줘.”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대충 얼버무리고 나왔지만 윤결은 미국 지사도, 혜원의 미국 유학도 전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점심시간 전까지 급한 일을 대충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에 윤결은 잠시 재현을 불러 사무실로 들어갔다. 재현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윤결을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 혜원이 아무것도 모른 채 떠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그렇게 만들어야지. 내일이야. 내일 하루만 잘 지키면 돼.”
“혜원이가 가겠다고 했어?”
“아니.”
“대체 형은 무슨 생각이야!”
“부탁해야지. 제발 이번 한 번만 아무것도 묻지 말고 믿어 달라고 부탁해야지.”
“난 걱정돼 형.”
“뭐가?”
“둘 다. 형도 혜원이도 걱정돼 미치겠어. 혹시라도 잘못될까 봐 두려워 미치겠다고.”
재현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올리며 말했다. 늘 냉철하고 이성적이던 윤결이 이렇게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도 처음이었고, 혜원과의 관계를 모두 밝히겠다는 그의 결심조차 너무 위험한 도박이라 생각했다.
“내 걱정하지 말고 준비나 잘해. 나 먼저 간다.”
걱정하는 재현을 뒤로하며 윤결이 사무실을 나갔다.
그는 집에 가는 길에 혜원이 좋아하는 베이커리에 들러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샀다. 그리고는 혜원이 상처받지 않는 선에서 그를 잘 타일러 웃는 얼굴로 보내겠다 마음먹었다.
**
한편 그 시각, 잠에서 깬 혜원은 텅 빈 윤결의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마치 뜨거웠던 어젯밤이 모두 꿈이었던 것처럼, 온기 없는 그의 빈자리가 오늘따라 쓸쓸하게 보였다.
세수를 하고 대충 옷을 챙겨 입은 혜원은 아직은 다 낫지 않아 걸을 때마다 쓰라린 발을 한번 쓱 내려다봤다. 그래도 못 걸을 정도도 아니고 마침 윤결도 집에 없으니, 빨리 루이를 만나고 와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호텔로 가는 내내 혜원은 수많은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그를 만나는 것이 잘하는 짓인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차라리 영영 모른 척 귀를 막는 것이 더 나았을까? 두려움 반 걱정 반, 무거운 마음으로 호텔로 향하는 혜원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혜원의 연락을 받은 루이는 지난번 재희의 방에서 몰래 가져온 녹음기를 챙겼다.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를 기회였기에 모든 걸 확실히 마무리 지어야 했다. 혜원이 도착할 시간이 다가오자 루이는 재희의 방을 말없이 바라보며 발길을 돌렸다. 굳이 재희가 알아야 할 필요도 알아서도 안 됐기에 루이는 조용히 호텔 방을 빠져나갔다.
로비 소파에 앉아 잔뜩 긴장한 얼굴로 손가락만 물어뜯고 있는 혜원의 앞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왔다. 혜원은 본능적으로 그 그림자의 주인이 루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강혜원?”
루이의 부름에 혜원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봤다. 창백하리만큼 하얀 얼굴과 붉은 입술, 빛이 나는 금발에 영롱한 파란 눈동자.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루이의 모습에 혜원은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비하면 너무도 보잘것없는 평범한 제모습에 혜원은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안녕하세요.”
겨우 마음을 다잡으며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혜원을 향해 루이가 가소로운 듯 웃음을 띠며 말했다.
“귀엽네? 아니면 멍청한 건가?”
“…네?”
“못 알아듣는 척하기는. 따라 나와.”
짜증 섞인 말투로 루이가 먼저 뒤를 돌아 나가자 혜원도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루이는 예전에 윤결과 함께 왔던 조용한 카페로 들어갔다.
바로 이곳에서 윤결에게 매몰차게 거절당했던 일을 루이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당했던 그 기분을 혜원에게도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고 싶었던 루이는 일부러 같은 장소를 택해 그를 데리고 왔다.
“앉아.”
혜원은 말없이 그의 앞에 앉았다. 물어보고 싶은 것도 듣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지금 혜원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질문만이 맴돌았다. 팔짱을 낀 채 말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루이를 향해 혜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직도 윤결 형 사랑하세요?”
“당연한 거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직접 여기까지 날아왔겠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에 혜원은 눈물이 차올랐다.
“하지만….”
“하지만 뭐? 아, 지금은 너랑 만나고 있으니까 깨진 거 아니냐, 뭐 이런 걸 묻고 싶은 거야?”
“….”
혜원은 조용히 루이를 올려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윤결 씨는 원래 그런 남자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줄 것처럼 다정하게 대해주면서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악마 같은 남자 말이야. 설마 한윤결이 나랑만 잤을까? 하지만 뭐 그런 건 상관없었어. 어차피 나한테 돌아올 남자였으니까. 너, 윤결 씨랑 잤지? 분명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랑한다 속삭였을 테고, 뭐든 다 해줄 것처럼 너를 안았겠지. 근데 과연 너한테만 그랬을까? 착각하지 마 강혜원. 넌 그저 그에게 불량식품 같은 거야. 우리라고 매일 몸에 좋은 음식만 먹고 살 순 없잖아? 가끔은 너 같은 일회용 불량식품에도 잠깐 눈이 갈 수 있거든. 넌 윤결 씨에게 딱 그런 존재야. 잠깐의 호기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그러니까 너 따위는 우리 사이를 방해할 그 어떤 이유도 되지 않는다는 거야.”
“아니에요. 윤결 형은 그렇지 않아요.”
이 정도면 상처를 받고 뛰쳐나가지나 않으면 다행일 거라고 생각했던 루이는 의외로 잘 버티며 오히려 당당히 아니라고 반격하는 혜원을 노려봤다.
“뭐?”
“제가 아는 윤결 형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요.”
“그럼, 나랑은 왜 잤을까? 사랑한다고, 나랑 했던 섹스가 최고였다고 속삭여줄 만큼 우린 뜨거운 밤을 함께 보냈는데…. 그럼 그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그, 그건….”
너무도 적나라한 그의 표현에 혜원의 시선이 흔들렸다. 사실 혜원에겐 아무런 확신이 없었다. 윤결이 아직 저 남자와 사랑하고 있는 사이일 수도 있었고, 그의 말처럼 자신은 윤결에게 한낱 호기심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윤결과의 관계에 혜원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윤결이 어떤 남자인지 내가 직접 보여줄까?”
“뭐, 뭐라고요?”
“보여준다고. 우리 사이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사이가 아니라는 걸.”
불안하게 흔들리는 혜원의 눈빛을 눈치챈 루이는 점점 더 그를 몰아세우며 말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윤결의 번호를 눌렀다. 깜짝 놀란 혜원이 그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루이는 거칠게 혜원의 손을 쳐내며 말했다.
“똑똑히 지켜봐. 한윤결의 실체를.”
**
혜원이 좋아하는 케이크를 사 들고 집으로 향하던 윤결은 오늘만큼은 그에게 최고로 행복한 하루를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에 아파트 근처 꽃가게로 향했다. 혜원을 닮은 예쁜 꽃다발을 한 손에 들고 아파트 입구에 다다르자 윤결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혹시 혜원인가 싶어 기쁜 마음으로 발신자를 확인한 윤결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지며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루. 딱 하루만 그를 달래면 된다는 생각에 윤결은 불편한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뭐야.”
[웬일로 한 번에 전화를 받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나 바빠.”
[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해?]
“무슨 소리야.”
[당신이 이겼어. 나 프랑스로 돌아가 줄게. 대신 나 당신한테 듣고 싶은 말이 있어.]
“뭐? 너 지금 뭐라고? 도, 돌아간다고?”
갑자기 프랑스로 돌아가겠다는 루이의 말에 윤결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다급히 되물었다. 그가 이대로 돌아만 가준다면 사실 걱정의 반 이상을 덜 수 있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 돌아가겠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마음을 접고 돌아가겠다고 한 건 윤결에게 있어서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의 마음이 굳어지도록 그를 달래야 했다.
혜원의 일이라면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윤결은 지금 판단력조차 매우 흐려져 있었다.
생각했던 것처럼 윤결이 너무 쉽게 미끼를 물자 루이는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스피커폰으로 바꾼 뒤 혜원을 쳐다봤다.
희게 질려가는 혜원의 얼굴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시하던 루이가 말투를 바꿔 정말로 떠날 사람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프랑스에서 나랑 잤을 때, 나 사랑했어?”
[그땐…. 그래 그땐 그랬어. 네게 진심이었어.]
“나랑 또 자고 싶을 만큼 나랑 잔 거 좋았잖아. 만약에, 만약 지금 당신 곁에 그 꼬마가 없었더라면, 나한테 이렇게 차갑게 대하지도 않았을 거잖아.”
[루이 그건….]
“기억나? 나 깰까 봐 팔베개까지 해주면서 더 자라고 속삭여준 거, 나한테 최고라고 말해준 거. 우리 정말 잘 맞았잖아. 아니었어?”
[…그래. 너와 함께 했던 순간은 진심이었어. 그 시간만큼은 널 사랑했었어.]
어떡해서든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잠시 머뭇거리던 윤결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시 자고 싶을 만큼?”
[그래. 다시 자고 싶을 만큼]
“그거면 됐어. 충분해.”
[… 루이. 너 정말 돌아가는 거야?]
“그전에 한마디만 해줄래?”
[뭐?]
“그때 나를 안았을 때 해줬던 것처럼, 다정하게 다시 한번만 내 이름 부르면서 사랑했다고 말해줄래?”
[… 사랑했어. 루이. 그리고 너에게 상처를 줬다면 내가 다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전화가 끊어질 때까지 혜원은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둘의 다정한 대화를 다 들어버린 혜원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흘러내렸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 앞에 혜원은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힘없이 고개를 떨군 채 눈물만 뚝뚝 흘리는 혜원을 향해 루이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진실을 알게 되니 어때? 이런 남자를 계속 사랑할 수 있겠어?”
“… 괜찮아요.”
“뭐?”
루이는 기대했던 대답이 아닌,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주제에 끝까지 괜찮다고 말하는 혜원을 무섭게 노려봤다.
“지금은, 지금은 당신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니까 난 괜찮아요.”
“하. 기가 막혀서. 순진한 바보 녀석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영악하고 독한 녀석이었네?”
“차라리 알게 돼서 다행이에요. 매 순간순간 진심인 형을 알게 돼서 기쁘고, 지금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 줄 알게 돼서 난 좋아요. 그러니까 다 괜찮아요. 당신은 그냥 형의 과거일 뿐이잖아요. 난 아무렇지 않아요. 저는 형을 믿으니까요.”
“좋아 인정. 지금 윤결 씨가 너에게 미쳐있는 건 인정할게. 하지만 그 사람이 너 때문에 잃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 봤어?”
머리가 좋은 루이는 이 정도로는 혜원이 쉽게 윤결을 단념하지 않을 거란 생각에 이번에 사랑이 아닌 윤결이 앞으로 잃어야 하는 것들로 그를 흔들기로 했다.
이런 순애보 사랑을 고집하는 녀석들은 자신의 희생은 견디면서도 상대방이 당해야 하는 고통에 있어서는 매우 약하다는 걸 루이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잃게 되는 거…?”
당황한 혜원이 입가를 파르르 떨며 루이를 쳐다봤다.
설마 자신이 모르는 또 다른 일이 있는 건가 싶은 불안함. 너무도 당당한 루이의 얼굴에 혜원은 불길한 기운이 엄습해왔다.
혼란스러워하는 혜원의 마음을 눈치챈 루이가 천천히 그의 앞에 녹음기를 꺼내놓으며 말했다.
“너 따위 때문에 윤결 씨가 앞으로 겪게 될 일에 대해 한 번이라도 생각해 봤어? 아, 넌 아무것도 모르겠지? 온실 속의 화초처럼 곱게 자란 네가 견뎌낼 수 있는 일도 아니겠지만. 뭐 그래서 윤결 씨도 너에게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일 테지만. 알아듣겠어? 넌 그에게 짐밖에 되지 못해.”
“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떨림이 느껴지는 혜원의 목소리에 루이는 녹음기를 따닥따닥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그를 노려봤다.
당당히 윤결을 믿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 맹랑한 녀석이 그가 자신을 위해 무엇을 포기하려 하는지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
한편, 루이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린 재희는 왠지 모를 불길함에 재빨리 서랍 속에 넣어둔 녹음기를 찾았다. 하지만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녹음기의 행방에 재희는 떨리는 손으로 루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루이가 받지 않자, 재희는 서둘러 옷을 챙겨 입으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대체 어디로 간 것인지 알 수 없는 답답함에 재희는 혜원에게 전화했다. 하지만 혜원 역시 전화를 받지 않자, 더욱 불안해진 재희는 윤결에게 전화를 걸었다. 달갑지 않은 말투로 전화를 받은 윤결은 다급히 혜원을 찾는 재희의 목소리에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집 앞에 다다랐던 윤결이 빠른 걸음으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지만 텅 빈 집 안의 모습에 윤결은 손에 들고 있던 케이크와 꽃다발을 내팽개친 채 혜원을 불렀다. 신발도 벗지 않고 방문이란 방문은 다 열어젖히며 혜원을 찾았다.
“강혜원!!”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혜원. 윤결은 집 밖으로 달려 나가며 혜원에게 전화했다. 하지만 신호음이 끊길 때까지 혜원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윤결은 그제야 조금 전 루이에게서 걸려왔던 전화가 생각났다. 혹시나 하면서도 윤결은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루이에게 전화했다. 다행히 전화를 받은 루이에게 윤결은 그가 혹시 혜원과 같이 있는지 물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그의 대답.
[그게 그렇게 궁금하면 우리가 전에 만났던 카페로 지금 당장 달려오든가. 뭐,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야, 이 미친 새끼야!!”
결국, 이성을 잃은 윤결이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윤결은 서둘러 차를 몰고 루이가 말한 카페로 향했다. 처음부터 의심했었어야 했다. 악에 받친 루이가 이렇게 순순히 물러날 리 없다는 걸 진작에 알아차렸어야 했다.
“씨발! 한윤결 이 병신 같은 새끼!!”
윤결은 거칠게 운전대를 쾅쾅 내리치며 속도를 높였다. 바보같이 또다시 그의 손에 놀아났다는 생각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쳐올랐다.
같은 시각 재희 또한 연락이 닿지 않는 혜원의 걱정에 속이 타들어 갔다. 재희가 계속해서 혜원에게 전화를 거는 사이 그의 휴대폰으로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루이에게서 온 문자였다. 아무런 설명 없이 적혀있는 카페 이름과 주소. 그리고 바로 그곳에 혜원이 있을 거라는 확신인 든 재희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 도착해야 했다.
마치 이 모든 것이 재미난 게임인 듯 즐기고 있는 루이. 그는 떨리는 시선으로 녹음기를 바라보는 혜원을 향해 말했다.
“윤결 씨가 나에게 이렇게 휘둘리는 것도 당연히 너 때문이고, 그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도 다 너 때문인 거야. 나도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넌 네가 그 사람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형이 뭘 포기한다는 건데요? 형이 뭘 잃게 된다는 건데요!!”
자꾸만 알 수 없는 말들로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루이를 향해 참지 못한 혜원이 소리쳤다.
그제야 루이는 플레이 버튼을 누르며 녹음기를 들려주었다. 최악의 상황까지 맛봐야 윤결을 포기하겠다면, 그렇게 해주는 수밖에.
[들어줄 말도 해줄 말도 없는 것 같으니까 먼저 일어날게. 난 절대 혜원이를 포기할 생각이 없거든. 곧 집안에도 모든 사실을 말할 거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도 다 되어 있어.]
‘안 돼!’
모든 진실을 알게 된 혜원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언젠가는 그와의 관계를 밝혀야 하는 순간이 올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사실 용기가 나질 않았다. 아직 혜원은 가족의 반대와 주위의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넘길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뒤늦게 알게 된 윤결의 확고한 결심에 혜원은 죄책감이 밀려왔다. 자신이 망설이고 회피하는 사이 모든 준비를 마친 채 혼자서 짊어지고 가려는 윤결의 선택에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이 윤결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냐는 루이의 질문에 혜원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혜원은 이제껏 윤결이 힘들게 이뤄온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는 말에 정신 나간 사람처럼 마구 고개를 저었다. 그는 윤결에게 결코 그런 말도 안 되는 선택을 하게 할 순 없었다. 누구보다 회사에 진심이고 일을 사랑하는 윤결에게 그것들을 포기하라는 건 너무도 이기적이고 잔인한 일이었다.
혜원은 그제야 자신이 윤결을 얼마나 망가트리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의 다정함에 눈이 멀어 현실을 보려 하지 않았다. 그가 지금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자신이 부리는 투정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감정이었는지 알게 되자 혜원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더 이상 윤결을 망가트리는 이런 위험한 관계는 그만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혜원의 약해진 마음을 알아챈 루이가 그의 손에 녹음기를 건네주며 말했다.
“네가 정말 윤결 씨를 사랑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겠지?”
한층 나긋해진 루이의 목소리에 떨리는 손으로 녹음기를 집어 든 혜원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이 흐려질 만큼 머리가 어지러웠다.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지만 후들거리는 다리는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순간 카페 문을 열고 뛰어 들어온 윤결을 발견한 혜원이 당황한 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이 시간에 어떻게 이곳을 찾아왔는지, 마치 큰 죄라도 진 사람처럼 혜원은 심장이 떨려 왔다.
“강혜원!!”
카페 안 모든 손님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릴 정도로 큰 소리로 혜원을 부르며 달려오는 윤결의 목소리에서는 쓰디쓴 절망감마저 묻어났다.
윤결은 입술을 움찔거리며 할 말을 찾지 못해 망설이고 서 있기만 한 혜원의 손을 잡아채며 소리쳤다.
“너 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왜 네가 저 자식이랑 같이 있는 거야!”
“형….”
“나와. 집에 가자고!”
우물쭈물 망설이는 혜원의 손목을 강하게 눌러 잡은 윤결이 거칠게 그를 끌고 나가려 했다.
“잠깐만. 형 잠깐만.”
혜원은 흥분한 윤결을 진정시키며 그에게 잡힌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자신의 손을 움켜잡고 있는 윤결의 손에서 전해지는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혜원아. 내가 다 설명할게. 그러니까 우선 집으로 가자.”
“아니. 내가 먼저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 그러고 나서 들을게.”
“강혜원!”
모든 것을 단념한 듯한 체념 섞인 혜원의 말에 화가 난 윤결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화를 냈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알아버린 혜원은 절대 윤결 혼자서 모든 것을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루이의 말처럼, 고작 자신 하나 때문에 그가 여태까지 이뤄왔던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포기하게 할 순 없었다.
“형도 생각할 시간을 가지려고 나에게 말하지 않은 거 아니야? 그러니까 나도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것뿐이야.”
단단히 결심한 혜원은 약해지지 않으려고 일부러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아니야. 아니라고. 말하지 않은 건 미안해. 내가 사과할게. 그러니까 집에 가서 다시 얘기하자.”
“아니. 형은 끝까지 고민한 거였잖아. 저 남자와 나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말하지 않은 거였잖아.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잖아. 그러니까 나도 생각하고 고민할 시간을 줘. 부탁이야.”
“아니야. 고민하느라 말하지 못한 게 아니야. 후회하느라 말하지 못했어. 내가 왜 이따위로 살아왔나, 여태껏 내가 해왔던 행동들을 후회하느라 미안해서, 너에게 너무 미안해서 말하지 못했어. 너에게 제일 먼저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네가 이렇게 상처받고 힘들어할까 봐 겁이 나서 말하지 못했어. 내가 다 잘못했어. 혜원아.”
무릎까지 꿇어가며 매달리는 윤결의 모습에 혜원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그를 외면했다. 여기서 마음이 약해지면 또다시 윤결이 힘들어질 것이란 생각에 혜원은 애써 그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그래도 말했어야지. 형은 그래도 나한테 다 말했어야지.”
원망 섞인 혜원의 눈빛에 윤결은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둘의 눈물겨운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루이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윤결을 향해 말했다.
“그러게 나한테 빌지 그랬어. 입 다물어 달라고, 차라리 나한테 무릎이라도 꿇고 빌기라도 해보지 그랬어?”
“너 이 새끼. 그걸 지금 말이라고 지껄이는 거야? 네가 뭔데, 너 따위가 대체 뭐라고!”
결국, 폭발해 버린 윤결이 루이의 뺨을 세차게 내리치며 소리쳤다. 우당 쾅쾅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쓰러진 루이의 곁으로 언제 도착했는지, 재희가 그를 부르며 쏜살같이 달려왔다.
“형!”
재희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넘어진 루이를 노려보고 선 윤결을 거칠게 밀어젖히며 루이를 부축해 일으켰다. 찢어진 루이의 입가에선 붉은 핏방울이 맺혀있었다. 재희는 감히 함부로 루이에게 손을 댄 윤결을 용서할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가해진 폭력에 루이는 떨리는 시선으로 윤결을 바라봤다. 그래도 한때 사랑했던 남자였고, 지금도 사실 너무도 사랑하고 있는 남자. 충격에 휩싸인 루이의 안쓰러운 모습에 보다 못한 재희가 윤결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그의 주먹이 윤결의 얼굴에 닿기 직전 루이가 재빨리 재희를 껴안으며 그를 말렸다.
“하지 마!”
필사적으로 재희의 등을 끌어안으며 말리는 루이의 제지로 윤결은 가까스로 그의 주먹을 피할 수 있었다.
“이거 놔 형! 어떻게 형을 때릴 수 있어? 뭘 잘했다고 형을 때리냐고! 이 남자 저 남자 가리지 않고 만나고 다닌 주제에, 형 인생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주제에! 지가 뭘 잘했다고 형을 때리냐고!”
“그러지 마. 재희야 제발 그러지 마. 부탁이야.”
아무리 자신을 버린 남자라 할지라도, 루이는 끝까지 윤결을 미워할 수 없었다.
질투에 눈이 멀어 이런 엄청난 일을 꾸몄지만, 아직도 루이는 진심으로 윤결을 사랑하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악행을 정당화시킬 만큼 맹목적인 사랑. 그리고 죽을 만큼 아픈 그 사랑 하나로 하루하루를 버텼던 루이였다. 자신이 모두 망쳐버린 관계였지만 마지막 순간 루이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혜원은 그제야 재희가 했던 말이 자신을 겁주기 위해 했던 말이 아님을 깨달았다. 윤결을 위해 죽을 수도 있을 만큼 그를 사랑한다던 루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루이는 정말로 목숨이라도 내놓을 것처럼 애틋해 보였다.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혜원의 모습에 정신이 돌아온 재희가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혜원아…. 미안해.”
하지만 혜원은 그를 피해 뒷걸음질을 쳤다.
“혜원아.”
윤결 또한 너무 놀라 바들바들 떨기만 하는 혜원에게 다가가며 그를 불렀다. 윤결이 조심스럽게 혜원의 손을 잡으려는 찰나, 혜원이 힘없이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말했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잘못된 거였어. 형 옆에 있어야 할 사람은 그때도 지금도 내가 아니었잖아. 그래서 벌 받는 거야. 내가 형을 욕심내서 그 벌을 받는 거야 지금.”
말을 마침과 동시에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혜원은 계속해서 고개를 저으며 윤결의 손길을 피했다. 혜원은 그저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재빨리 뒤돌아 달렸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기다려 강혜원!”
당황한 윤결이 재빨리 그의 뒤를 따랐다. 이에 윤결을 놓칠 수 없었던 루이 또한 상처받은 눈빛으로 윤결을 말리기 위해 달려갔다.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윤결을 잡고 싶은 루이의 처절한 모습에 재희는 차마 그를 잡을 수 없었다.
카페를 벗어난 혜원은 아무 택시나 잡아탔다. 멀리서 윤결의 모습이 보이자 혜원은 서둘러 기사에게 출발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저씨 빨리 출발해주세요! 빨리요.”
“혜원아!!”
간발의 차이로 혜원을 태운 택시가 출발했다. 차선을 변경해 멀어지는 택시를 향해 윤결이 힘껏 달렸다. 혜원은 귀를 막으며 그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했다.
윤결은 차선을 마구 가로지르며 큰 소리로 혜원을 소리쳐 불렀다. 순간 뒤에서 속도를 멈추지 못한 차가 윤결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윤결이 피할 생각을 않자, 루이가 찻길로 달려들며 있는 힘껏 윤결을 밀쳐냈다.
“기다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재희가 말리기도 전에 루이는 제 몸을 던져 윤결을 최대한 찻길에서 멀리 밀어냈다.
-끼이익! 쿵!
그리고 이어진 요란한 급정거 소리와 함께 루이가 쓰러졌다.
“형!?”
혼비백산해진 재희가 재빨리 루이의 곁으로 달려갔다. 쓰러진 루이는 의식이 없었다. 머리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나와 그의 새하얀 얼굴을 적셨다. 재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루이를 끌어안으며 울부짖었다.
“눈 떠봐. 눈 좀 떠보라고 형!”
아무리 흔들어도 루이는 깨어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꿈인 것만 같았다. 멀찌감치 쓰러져 있던 윤결도 정신을 차린 듯 비틀거리며 루이의 곁에 다가왔다. 루이를 끌어안은 재희의 옷이 피로 물들어 갈 때쯤 멀리서 구급차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루이….”
“저리 꺼져! 다신 우리 형 앞에 나타나지 마. 형 잘못되면, 너 절대 용서 안 해!”
재희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루이에게 손을 내미는 윤결을 거칠게 밀어 버리고는 독기가 가득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윤결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머리를 움켜잡으며 오열했다. 그 와중에 다친 사람이 혜원이 아닌 것에 잠시나마 안심했던 자신의 혐오스러운 모습에 윤결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