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다가오는 이별의 시간(1) (7/12)

7. 다가오는 이별의 시간(1)

재희는 오늘도 자신의 가슴에 안겨 잠든 루이를 바라보며 찬찬히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무엇이 또 그를 이토록 불안하게 만든 것인지, 재희는 한 번씩 그가 이렇게 무너질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대체 윤결이라는 남자가 뭐길래 형의 마음을 이토록 아프게 하는지…. 지켜보는 재희의 마음도 아프기는 마찬가지였다.

“형. 꼭 그 사람이어야만 하는 거야? 왜 자꾸 형은 힘든 길만 가려고 해.”

안타까움에 그를 한번 꽉 안아준 재희는 아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자는 루이에게 이불을 꼼꼼히 덮어 주며 먼저 침대에서 일어났다.

사실 혜원을 만나 같이 점심을 먹으려 했으나, 지금 루이의 상태로 봐서는 아쉽지만, 오늘은 그의 곁에 있어 줘야 할 것 같았다. 재희가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가고 얼마 안 돼 루이가 잠에서 깼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윤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 음성만 연거푸 들려오자 그는 화가 치민 듯 휴대폰을 내던지며 미친 듯이 소리를 내질렀다.

“아악!!!”

처절한 루이의 비명에 샤워를 하던 재희가 깜짝 놀라 곧장 침실로 달려왔다.

“형! 무슨 일이야 왜 그래!”

재희는 물기가 뚝뚝 흐르는 몸에 대충 수건만 걸친 채로 헐레벌떡 뛰어와 루이의 곁에 앉으며 물었다. 하지만 부들부들 두 손만 달달 떨어대는 루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걱정된 재희가 그를 가슴에 끌어안으며 말했다.

“제발 형. 왜 이러는 건데.”

“… 했잖아.”

“뭐?”

재희가 어두운 표정으로 루이의 얼굴을 마주 보며 물었다.

“… 경고했잖아. 내가 부르면 재깍 달려오라고 내가 분명 경고했잖아. 당신이 자초한 거야. 다 당신이 자초한 일이야.”

루이는 넋을 놓은 듯 혼자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재희가 그의 어깨를 흔들며 정신 좀 차리라고 소리를 질러도, 루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생각했다.

‘원한다면 내가 직접 찾아가 줄게 한윤결.’

**

샤워를 마친 루이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말끔히 옷을 차려입고 외출 준비를 했다. 그는 오늘따라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재희를 향해 물었다.

“오늘은 혜원이 안 만나?”

“응. 그런데 형은 어디 가? 혹시 그 윤결인가 뭔가 하는 남자 또 만나러 가?”

“아니. 오늘은 윤결 씨 안 만나. 하지만 혼자 점심 먹기는 싫고, 그렇다고 나 때문에 네가 혜원이를 못 만나는 것도 원치 않아. 그럴 바엔 같이 만나 그 아이. 같이 점심이나 먹자. 나도 기분전환도 좀 할 겸.”

“뭐? 정말? 괜찮겠어?”

재희는 의외로 흔쾌히 혜원과 함께 점심을 먹자고 제안하는 루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 형이 또 무슨 변덕인지 왜 갑자기 혜원이와 같이 밥을 먹자는 건지 살짝 의문이 들긴 했으나, 재희로서는 사실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형을 혼자 놔두지 않아도 되고 또 보고 싶은 혜원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재희는 서둘러 외투를 꺼내 입으며 말했다.

“그래. 오늘은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즐기자. 혜원이랑 같이 시간 보내면 형도 분명 기분이 좋아질 거야.”

“뭐…. 어쩌면 그럴 수도.”

루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과연 자신이 혜원을 만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윤결은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지금 루이의 머릿속엔 어떻게 그의 얼굴을 일그러트려 버릴지, 그것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재희에게조차 말하지 않은 그의 검은 속내. 루이는 기쁜 얼굴로 혜원에게 전화를 걸며 약속을 잡는 재희를 빤히 쳐다보며 입가를 굳혔다.

윤결이 출근을 한 뒤 뒤늦게 일어난 혜원은 졸린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왔다. 찌뿌둥한 몸은 그래도 한결 나아있었다.

엉거주춤한 걸음으로 물을 마시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선 혜원은 식탁에 차려진 아침상에 깜짝 놀라 다가갔다. 너무도 정갈하게 차려진 음식들에 혜원은 웃음이 났다. 분명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출근했을 텐데, 언제 또 이런 걸 준비하고 나갔는지…. 새삼 사랑받는 기분에 볼이 빨개졌다.

마치 어제의 일들이 모두 꿈만 같았다. 혜원이 봉숭아처럼 붉어진 얼굴로 식탁에 앉아 윤결이 차려놓은 음식을 먹으려던 찰라,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어? 윤결 형인가?”

혜원은 혹시나 윤결의 전화일까 싶어 재빨리 방으로 들어가 휴대폰을 확인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전화를 건 사람은 재희였다. 오늘 만나기로 하진 않았지만, 재희와의 만남은 늘 즐겁고 유쾌했기에 혜원은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형, 어젠 잘 들어갔어요?”

[응. 너는 저녁 잘 먹었어?]

“아. 응. 뭐…. 그랬지.”

혜원은 밥보다는 뜨거웠던 윤결과의 밤이 떠올라 수줍게 대답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따 점심 같이 먹을래?]

“점심? 정말? 어디서?”

[우선 호텔 앞에서 보자. 참, 우리 형도 같이 갈까 하는데 괜찮을까?]

“음. 나는 괜찮아. 그럼 빨리 준비해서 내가 1시까지 호텔 앞으로 갈게!”

[그래. 그럼 조금 이따 만나자.]

통화를 마친 혜원은 먹으려던 아침을 다시 조심스럽게 냉장고에 넣은 뒤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사실 혜원은 파리에서 겨우 한 번 만났던 루이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어제 호텔에서 윤결과 함께 있었던 외국인이 루이였다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고, 재희와 루이의 관계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혜원과 함께 점심을 먹을 생각에 기쁜 얼굴로 맛집을 찾아보던 재희는 대충 간추린 레스토랑 리스트를 루이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형은 뭐가 먹고 싶어? 여기 내가 찾은 곳 중에서 마음에 드는 곳 있어?”

“음…. 나는 그냥 호텔에서 먹고 싶은데?”

“어? 굳이 여기서 먹겠다고?”

“응. 여기 호텔 레스토랑 괜찮잖아.”

“아니 그렇긴 한데….”

“나랑 점심 먹고 너희들은 따로 나가. 나는 점심만 먹고 다시 호텔로 돌아와서 쉬려고 그래.”

“형 어디 몸 안 좋은 데 있어? 어디 아픈 건 아니지?”

“그런 거 아니야.”

루이가 힘없이 소파에 내려앉으며 피곤해하자 재희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말했다.

“그럼 오늘 점심은 호텔 레스토랑에서 먹고 형은 방에서 조금 쉬어. 혜원이는 1시쯤 도착할 것 같아.”

“그래? 알았어.”

루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분명 경고했지. 한윤결.”

루이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윤결의 휴대폰으로 문자 보냈다.

[XX 호텔. 1시. 내 전화 받는 게 좋았을 텐데 말이지. 똑똑히 들어. 오늘 일어날 일의 책임은 전부 당신이 지게 되는 거야. 내 연락 무시하지 말라고 난 분명 경고했으니까.]

루이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귀신같이 윤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말한 대로야. 1시. 당신이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한 강혜원과 1시에 호텔에서 만나서 점심 먹기로 했어. 그러니까 정말 아무 사이 아니라면 다 같이 1시에 만나서 점심이나 먹자고. 만약 그게 아니라면 나랑 30분 일찍 만나든가. 그럼 우리 넷이 얼굴 붉히며 만날 일은 없겠지? 나 배고파. 늦지 않게 와. 기다릴게.”

[야!!]

윤결의 날카로운 외마디 외침에도 루이는 차갑게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아직은 윤결의 목줄을 잡고 살살 조이는 것도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가 불안해하는 모습, 초조함에 이성을 잃어 가는 모습을 천천히 구경하는 것도 꽤 짜릿하니까 말이다.

편집증 환자 같은 루이의 도를 넘는 행패에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윤결은 그길로 바로 호텔로 향했다. 아직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루이의 정체를 혜원이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우선은 그들의 만남을 막아야 했기에 윤결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약속한 시각보다 5분 더 일찍 호텔에 도착한 윤결은 곧장 루이에게 전화해 그를 불러냈다. 1분이 10분과도 같이 느껴지는 상황 속에서도 루이는 여유만만한 웃음을 지으며 나타났다.

“굉장히 급했나 봐. 나를 이렇게 보고 싶어 하는 줄은 몰랐네?”

“됐고. 빨리 따라 나와.”

윤결은 거칠게 그의 손목을 잡아끌며 호텔을 빠져나갔다. 지금은 언제 어디서 혜원이 나타날지 모르는 이 위험한 곳에 잠시도 더 있고 싶지 않았다.

**

반면 재희는 갑자기 약속을 취소하고 나가버린 루이가 걱정됐지만, 윤결을 만나러 간다는 말에 더는 그를 잡을 수 없었다. 사실 윤결이라면 지난번 혜원과 넷이서 만나 같이 밥 먹은 적도 있어 다 같이 만나도 될법한데 극구 둘이 먹겠다고 나간 루이가 의아했다.

이렇게 보면 윤결도 아주 루이에게 관심이 없어 보이진 않는데, 그저 어딘가 모르게 아슬아슬하기만 한 둘의 분위기에 재희는 혼란스러웠다. 아무래도 오늘 혜원을 만나면 윤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물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호텔에 도착한 혜원은 멋쩍은 웃음과 함께 약속이 변경되어 둘이서만 점심을 먹자는 재희의 말에 괜찮다며 생각해 둔 식당으로 향했다.

오늘 혜원이 선택한 음식은 매콤함이 일품인 닭갈비였다. 어젠 달달한 고기의 세계를 알게 해주었다면 이번엔 한국인이라면 싫어할 수 없는 매콤한 고기의 세계를 경험해 보게 해주고 싶었다.

“형, 매운 것도 먹을 수 있어?”

“매운 거? 글쎄? 많이 먹어보진 않았지만, 그렇게 못 먹을 것 같진 않은데?”

“그럼 우리 오늘은 닭갈비 먹자. 나름 여기 맛집이래.”

혜원은 오늘도 배시시 귀여운 웃음을 지으며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런 해맑은 혜원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진 재희도 잠시 루이에 대한 생각은 내려놓고 그와 함께 즐기기로 했다.

적당히 매콤하고 양념이 잘 밴 닭갈비는 재희의 입맛에도 딱 맞았다. 하나하나 먹는 법을 설명해 주는 혜원의 얼굴에도 생기가 넘쳤다.

웃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도, 이렇게 재잘재잘 떠드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재희에겐 더없는 큰 행복한 시간이었다. 어느 정도 식사가 끝나가자 재희는 슬슬 마음속에 벼르던 이야기를 꺼냈다.

“저기 혜원아.”

“응?”

그도 배가 찼는지 수저를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그, 윤결이라는 사람 말이야.”

“어, 어? 윤결 형?”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재희의 입에서 윤결의 이름이 나오자 혜원이 살짝 긴장한 듯 입가를 파르르 떨며 물었다.

“아니. 내가 듣기로는 네 쌍둥이 누나랑 정략 결혼한 사이라고…. 하지만 말 그대로 정략결혼이지, 네 누나를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

혜원은 자신이 한 번도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 재희가 너무도 정확히 알고 있자 순간 그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지 겁이 났다.

“기분 나빴다면 미안. 저번에 파리에서 윤결 씨가 형한테 하는 말 들었거든.”

“아… 그, 그랬구나. 히끕!”

혜원은 철렁 내려앉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이 날 듯 말 듯 하지만 대충 윤결이 그때 그런 말을 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또 다른데…. 혜원은 혹시 재희가 그와 자신의 관계를 눈치채고 캐물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지레 겁을 먹고는 놀라 딸꾹질을 하고 말았다.

“괜찮아 혜원아? 여기 물 좀 먹어.”

재희가 찬찬히 혜원의 등을 쓸어 주며 물을 건넸다. 너무 갑작스러운 질문인가 싶어 재희도 약간 미안했다.

“고마워 형. 근데 윤결 형은 갑자기 왜?”

“다른 게 아니고, 누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콜록콜록! 누, 누가??”

생각지도 못한 재희의 말에 이번엔 사레가 걸린 듯 혜원이 가쁜 기침을 해대며 물었다.

‘혹시 눈치챘나? 내가 너무 티 나게 윤결 형을 좋아했나?’

혜원은 좌불안석이었다. 혹시라도 자신들의 비밀을 들키게 될까 봐, 그래서 지금의 이 작은 행복이 사라져버릴까 봐 두려워졌다.

“있어. 내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이. 그나저나 그래서 그럼 윤결 씨는 지금 좋아하는 사람이나 사귀는 사람이 있는 건가?”

재희는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만약 있다면 그게 누구든 차라리 그를 단념시키는 게 더 나을 것이라 생각할 만큼, 재희는 절대 루이가 윤결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글쎄. 그건 나도 잘.”

“그래? 너라면 알 거라 생각했는데….”

“내, 내가?”

“너, 같이 산다는 형 말이야. 그 사람 윤결 씨 맞지?”

보육원 생활을 해봐서인지 재희는 눈치 하나는 귀신같이 빨랐다.

“그,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사정이 있는 거겠지. 어차피 네 누나랑 좋아서 결혼한 것도 아니니 그날 신혼여행도 너랑 온 거 아니겠어? 하여튼 너희 누나도 대단한 거 같아. 뭐 너에게 그런 부탁을 할 만큼 둘이 친한 거 보면 살짝 부럽기도 하고.”

“하하…. 혜윤이가 좀 유별나긴 해.”

“아무튼. 그래서 혹시 윤결 씨에 대해 뭔가 아는 게 있나 했지.”

“아…. 미안. 나도 잘 모르겠어.”

혜원은 괜한 죄책감에 고개를 푹 숙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뭐라고 정의할 수 없는 윤결과의 관계.

표면상으로 그는 누나 혜윤의 남편이었고 물론 둘이 아무 사이가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긴 하지만, 남들 눈에는 윤결과 자신의 관계 또한 정상적으로 보일 수 없다는 생각에 혜원은 재희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순간 재희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윤결의 이야기만 나오면 알게 모르게 긴장을 하는 혜원. 마치 무언가를 숨기는 것처럼 말수가 적어지는 그를 보는 재희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원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무서운 루이의 집착과 욕심을 모르지 않는 재희는 순간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틀리길 바랐다. 하지만 묘하게 붉어진 혜원의 얼굴과 유독 그를 경계하던 루이의 모습이 동시에 떠오르며 재희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으로 혜원을 쳐다봤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정말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원치 않는 답을 듣게 될까 봐 재희는 선뜻 물을 수 없었다.

“재희 형, 우리 다 먹었으면 그만 나갈까?”

갑자기 어색해진 분위기에 혜원이 살짝 재희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아, 그래. 나도 다 먹었어. 나가자.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아니. 혀, 형은?”

“나도 마침 해야 할 일이 생각 나서 오늘은 점심만 먹고 헤어져야 할 것 같은데.”

“그래? 그럼 할 수 없네. 나도 슬슬 집에 가야겠다.”

“그런데 혜원아…. 저기….”

“응?”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혜원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지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 재희의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달라져 있었다.

“아니야. 바로 집으로 갈 거지?”

“응. 아마도.”

“그래. 그럼 됐어.”

식당을 나온 둘은 말없이 걸었다. 혜원은 혜원대로 머릿속이 복잡했고, 재희는 이 모든 열쇠를 손에 쥔 루이를 당장 만나야 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호텔 앞에 도착했다.

재희는 혜원을 먼저 보낸 뒤 루이에게 전화했다.

“형, 지금 어디야?”

[왜? 갑자기 형이 보고 싶어졌어, 우리 재희?]

“나 장난하는 거 아니야. 형 지금 어디야.”

[밥 먹어.]

“언제 와?”

[알아서 갈게 기다리지 마.]

“기다릴 테니까 빨리 돌아와.”

[기다리지 말라고 서재희.]

“올 때까지 기다릴게. 나 지금 너무 술이 마시고 싶거든.”

[야, 너 술 근처에도 가지 마! 알랜!! 너 진짜 술 마시기만 해봐!]

“그럼 형이 와서 날 말려 보든가.”

다급히 들려오는 루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재희는 근처 편의점으로 가 여러 종류의 술을 샀다. 언제 마지막으로 마셨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사실 재희에게 술은 좋은 기억이 아니었다. 하지만 재희는 지금 당장 술을 필요로 할 만큼 감당할 수 없는 복잡한 상황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만나면 만날수록 자신이 많이 좋아하고 있다고 자각하기 시작한 혜원이 어쩌면 형이 좋아하는 남자와 특별한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물론 자신이 혜원을 포기한다고 해도 루이는 절대로 윤결을 포기하지 않을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재희는 더욱더 심란해졌다. 이대로는 절대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는 걸 재희는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윤결은 전화를 받자마자 지나치게 얼굴이 어두워진 루이를 쳐다보며 물었다.

“뭐야? 뭔데 또 그런 얼굴인데?”

“입 닥쳐.”

“하! 진짜 미친 새끼.”

“오늘은 먼저 일어날게.”

“이야기 끝내고 가.”

“나중에 해.”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루이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지금은 다시 엉망으로 망가져 버릴지도 모를 재희를 빨리 다시 찾아야만 했다.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끔찍했던 재희의 모습. 루이는 그날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손이 덜덜 떨릴 만큼 불안해했다. 하지만 이미 짜증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윤결은 매섭게 그를 쏘아보며 소리쳤다.

“거기서! 지금 끝내고 가!”

“나한테 이래라저래라하지 마.”

“너 혜원이한테 손끝 하나 대지 마. 나도 마지막으로 경고하는 거야.”

“당신이 나한테 경고 따위를 할 상황은 아닐 텐데?”

“하, 씨발. 나한테 도대체 뭘 원하는 건데 너!”

“당신이 불행해지는 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차갑게 말을 던진 루이의 한마디에 윤결 또한 입술을 짓씹으며 그를 노려봤다.

어울리지 않게 심각한 얼굴로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루이가 서둘러 식당을 빠져나갔다. 윤결은 혜원을 미끼로 멋대로 구는 루이의 도가 지나친 태도에 점점 질려갔다. 혜원이 알기 전에 정리해야 하는데 시간만 갈 뿐 일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윤결은 답답함이 밀려왔다.

차라리 혜원에게 모든 걸 말해 버리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무엇 하나 혜원에게 상처가 된다면 감추고 싶었고, 그가 모르는 선에서 정리하고 싶었다.

루이와의 하룻밤은 윤결에겐 그저 수많은 원나잇 중 하루일 뿐이었지만 루이에겐 잊지 못할 하룻밤이 되어 이렇게 독으로 돌아온 것처럼, 어쩌면 혜원에게도 지워지지 않은 상처가 될까 봐 그것 또한 망설여졌다.

윤결은 멀어지는 루이를 빤히 쳐다봤다. 이럴 바엔 차라리 혜원의 유학을 서두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잠시도 혜원과 헤어져 있고 싶진 않았지만, 지금은 최대한 루이로부터 혜원을 떨어트려 놓아야만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재희는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병째로 술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쓰디쓴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알싸한 느낌에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그렇게 재희는 잘 마시지도, 그렇다고 좋아하지도 않는 술을 한 모금 두 모금 마시며 술병들을 비워 나갔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이명처럼 들리는 누군가의 목소리. 재희는 스스로 목을 조르며 괴로워했다.

‘고아 새끼가 잘난 부모 만나서 프랑스인 행세하는 거 웃기지 않아? 알랜? 어디서 감히 프랑스 이름을 갖다 붙이면서 프랑스인 행세야. 루이가 감싸주니까 이 세상이 다 네 세상 같아? 건방진 동양인 새끼가. 차라리 죽어버려. 나 같으면 벌써 자살했어. 자기네 나라에서도 버림받은 새끼가 낯짝도 두꺼워.’

‘죽어버려! 너 같은 건 프랑스인의 수치야!’

그들은 매일같이 돌아가며 재희를 구타했다. 하지만 맞는 순간의 끔찍했던 고통보다도 자신 때문에 욕을 먹는 부모님과 형 루이에게 미안해 재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무리 중 한 명이 하얀색 약을 재희에게 던져주며 소리쳤었다.

‘죽는 방법을 모른다면 가르쳐 줄 수도 있는데. 이거 술이랑 같이 먹어봐. 고통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깔끔하게 죽게 될 테니.’

재희의 머리맡으로 던져진 이름 모를 하얀색 가루약. 아직 사춘기였고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쳤던 재희는 순순히 그 약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었다.

종종 형 루이가 마시던 술을 몰래 꺼내 들고 방으로 가지고 들어온 재희는 약과 함께 거침없이 술을 마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끔찍한 복통을 호소하며 방 안에 쓰러졌다.

한밤에 들려온 날카로운 비명. 바로 옆방에서 자던 루이가 가장 먼저 재희에게로 달려왔고 너무도 충격적인 재희의 모습에 루이는 분노했다.

바닥을 구르며 고통 속에 몸을 비틀던 재희. 그의 입가에 흘러나온 정체 모를 타액들과 침대맡에 떨어져 있는 술병들. 재희는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고 바로 응급치료에 들어갔다. 대부분의 약을 토해내며 겨우 위험한 상황을 넘긴 재희를 보며 루이는 그날로 집 안의 모든 술을 치워 버렸다.

꼬박 이틀을 입원하고 넋이 나간 얼굴로 퇴원한 재희의 곁을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지킨 루이. 재희의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한 건 병원 치료도, 정신과 상담도 아닌 루이의 지극정성이었다.

하지만 루이는 자신의 하나뿐인 동생을 이렇게 만들어 버린 무리를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이 끔찍한 사건의 주동자와 가해자들을 모두 찾아낸 루이는 한 명 한 명 찾아가 그들이 살려달라고 울부짖을 때까지 그들을 짓밟으며 복수를 했다.

끝까지 재희가 알지 못하게 처리하려고 했으나, 마지막 한 녀석을 처리할 때 우연히 재희에게 들키고 말았고, 재희가 온몸으로 막아서며 말리는 바람에 성에 차지 않는 방법으로 끝나버린 피의 복수.

그날 이후로 재희는 절대 우울하거나 슬픈 표정을 짓지 않았다. 물론 술 또한 가까이하지 않았다. 더 이상 자신 때문에 가족들이 걱정하는 걸 원치 않았던 재희는 그날부터 자신의 모든 상처와 아픔을 가슴에 숨긴 채 세상에서 가장 착한 아들, 착한 동생의 가면을 쓰며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가 술을 마시고 싶다고 말하자 루이는 전에 없이 긴장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황급히 호텔 문을 열고 들어선 거실엔 재희가 이미 술에 취해 울고 있었다.

얼마나 목을 할퀴어댔는지 울긋불긋 손톱자국이 즐비한 그의 목덜미를 발견한 루이가 재빨리 그를 부르며 달려갔다.

“알랜!”

“… 아니야. 아니라고.”

정신조차 차리지 못한 재희는 계속 아니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힘겨워했다. 루이는 대충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술병들을 훑어봤다. 족히 혼자 다섯 병은 마신 듯했다.

다행히 약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루이는 조심스럽게 재희를 부축해 침실로 들어갔다. 머리가 아픈지 재희는 연신 미간을 찌푸리며 루이의 손길을 거부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재희는 곧 의식을 잃으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쌕쌕거리던 그의 거친 숨소리가 고르게 들려오자 그제야 루이도 안심한 듯 털썩 그의 침대맡에 내려앉았다.

“너 갑자기 왜 이래 알랜. 그날 이후로 이런 적 한 번도 없었잖아.”

루이는 열로 인해 뜨거운 그의 이마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차가운 루이의 손길에 재희가 끄응 앓는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웅크렸다. 루이는 잠든 그를 잠시 두고 나와 엉망이 된 거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남은 술병은 모조리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며 루이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분명 그는 기쁜 마음으로 혜원은 만나러 갔었다. 그랬던 그가 몇 시간 만에 이런 모습으로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자 루이는 또 이 모든 원인을 혜원에게로 돌렸다.

“그러니까 내가 그 녀석한테 마음 주지 말라고 했잖아. 이렇게 되면 둘 다 용서하고 싶지 않아지잖아.”

차갑게 식은 루이의 눈빛이 재희가 잠들어 있는 방을 향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재희의 침실로 들어갔다. 어디가 아픈 건지 몸을 바들바들 떨며 또다시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목을 손으로 조르려는 재희를 제지하며 루이가 그를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를 혼자 재울 수 없었던 수많은 밤이 하나둘씩 루이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런 식으로 재희마저 잃을 순 없었다. 이젠 뭐가 됐든 이 지독한 악연을 마무리 지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윤결의 사랑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자신이 고통받은 만큼 불행해지길 바랐고, 그 불행의 시작과 끝이 모두 강혜원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질투에 눈이 먼 루이는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발을 들여놓으려 하고 있었다. 그것이 모두를 파멸시키게 되는 길임에도 루이는 오직 윤결의 불행을 절실히 바랄 뿐이었다.

**

늦은 밤 잠에서 깬 재희는 아픈 머리를 움켜쥐며 눈을 떴다. 속이 뒤집힐 것 같은 역겨움에 몸을 일으키려던 재희는 자신을 꽉 안고 있는 루이의 팔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언제 왔어 형….’

루이가 잠든 것으로 생각한 재희가 슬그머니 그의 팔에서 벗어나려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루이는 더욱 그를 바짝 끌어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마시지 말라고 했지.”

“… 이거 놔.”

“나 또 미치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죽지 않았잖아. 이번에도….”

“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순간 화가 난 루이가 벌떡 일어나 재희를 일으켜 앉히며 소리쳤다.

늘 씩씩하고 다정한 재희였지만 한 번씩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고집을 피우며 속을 썩일 때마다 루이는 속이 뒤집혔다.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된 사람처럼 모든 것을 놓은 듯 초점 잃은 눈으로 중얼거리는 재희. 아직도 자신에게 완벽히 마음을 열지 않은 듯한 그의 모습에 루이는 속상했다.

재희는 화를 내는 루이를 조용히 밀치며 화장실로 향했다. 쓰린 속에 변기를 붙잡고 소화가 채 되지 않은 음식들과 술을 게워낸 재희는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차가운 물로 샤워를 했다.

젖은 머리에서는 찬물이 뚝뚝 떨어졌다. 재희는 수건으로 대충 머리를 말리며 다시 루이가 있는 침실로 향했다. 이젠 그와 모든 진실을 마주해야 했다.

루이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팔짱을 낀 채 재희를 쳐다봤다. 반나절 만에 얼굴이 반쪽이 되어 버린 재희를 보며 루이는 인상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재희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 나한테 할 말 없어?”

“무슨 말.”

“혜원이. 그리고 그 윤결이라는 사람. 형은 분명 뭔가 알고 있는 거지?”

“왜? 혜원이가 뭐라고 했어? 대체 무슨 말을 들었길래 네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까? 형 속상하게.”

루이가 천천히 손을 뻗어 다시 재희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며 물었다. 하지만 재희는 거칠게 그의 손을 쳐내며 말했다.

“아무 말도 한 거 없어. 그냥 형으로부터 진실을 듣고 싶은 거야. 형은 분명 다 알고 있는 거지? 그래서 지금 계속 윤결이라는 남자한테 매달리는 거잖아.”

“누가 매달린다는 거야! 난 이제 그 남자한테 관심 없어.”

“뭐…?”

너무도 냉정한 얼굴로 관심 없다는 루이의 말에 재희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더 이상 사랑 따위 바라지 않아. 하지만 그렇다고 내 상처가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내가 받은 고통만큼 돌려주려는 것뿐이야.”

“그래서 거기에 혜원이가 포함되어 있는 거야?”

“… 원인 제공자니까.”

“형!”

루이는 한 번도 자신에게 대든 적 없던 재희가 눈을 부릅뜨며 노려보자 그것 또한 혜원의 탓으로 돌리며 쏘아붙였다.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그딴 녀석한테 정 주지 말라고. 적당히 데리고 놀다가 버리라고!”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해? 대체 혜원이가 뭘 어쨌다는 건데!”

“남의 남자를 가로채 갔잖아. 그것도 제 누나의 남편을 말이야. 순진한 얼굴로 그런 엄청난 일을 벌일 정도면 말 다 한 거 아닌가? 그런 녀석은 좋아할 것도, 동정할 필요도 없어 알랜.”

“하아…. 그래도 혜원이는 건드리지 마.”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차라리 내가 도와줄게. 그 윤결이라는 남자, 내가 형에게 돌아가게 해줄 테니까 혜원이는 제발 건드리지 마.”

순간 루이는 솔깃했는지 말없이 재희를 쳐다봤다. 윤결을 포기한 이유가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미련 가득한 애증 때문이었기에 그가 다시 돌아와 준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흔들리는 루이의 마음을 눈치챈 재희가 살며시 그의 어깨를 감싸며 달래듯 말했다.

“그러니까, 제발 혜원이는 건드리지 마.”

“너 그 녀석 정말로 좋아해? 왜? 윤결 씨랑 나 연결해 주고 넌 혜원이랑 사귀기라도 하게?”

“그런 거 아냐. 그리고 내가 좋아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감추고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난…. 형이랑 달라.”

“아니. 다르다고 믿고 싶은 것일 뿐이겠지. 너도 나와 다르지 않아. 아무튼. 어디 한번 해봐. 그리 오래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진 않지만. 그리고, 다시 한번 이딴 짓 하면 아무리 너라도 진짜 가만 안 둬.”

루이는 피곤한 듯 다시 침대 속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은 재희도 짧은 한숨과 함께 자신의 방으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오늘은 여기서 자.”

“그냥 내 방에서 잘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알랜.”

단호한 루이의 말에 재희는 다시 그의 곁으로 다가가 등 뒤에 나란히 누웠다. 루이는 몸을 돌려 재희의 품에 안겨들었다. 누구에게도 뺏기고 싶지 않은 동생, 재희. 지금은 그를 안심 시키기 위해 혜원을 건들지 않겠다고 했지만, 루이는 절대 재희를 혜원에게 보낼 마음이 없었다.

**

오늘따라 야근을 하고 늦은 밤 집에 도착한 윤결은 오자마자 혜원부터 찾았다. 하지만 잠꾸러기 혜원은 이번에도 역시 윤결을 기다리다 못해 먼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이불은 모두 걷어차고 윤결의 베개를 다리 사이에 끼워 넣은 채 잠든 혜원의 모습에 윤결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이젠 혜원이 없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윤결은 그가 집에 없으면 불안했다. 그런 혜원과 원치 않게 떨어져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들자 윤결은 미간을 찌푸리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와 함께 미국으로 갈 준비를 하느라 사실 윤결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혜원은 유학을, 그리고 자신은 미국 지사로 나가기 위한 절차를 차근차근 밟아가는 과정에 들이닥친 루이라는 방해물. 생각지 못한 방해물은 상상 이상으로 윤결의 목을 조여왔고, 윤결은 하루하루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렵게 얻은 혜원을 어이없이 잃을 수는 없었다. 윤결은 고단한 몸을 침대에 눕히며 혜원을 끌어안았다. 따뜻한 이 녀석의 온기가 주는 안락함과 편안함. 이젠 혜원의 온기가 없으면 윤결은 잠조차 오지 않았다.

“강혜원. 널 정말 어떻게 해야 하니.”

힘주어 안은 윤결의 손이 파르르 떨려 왔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누군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생각보다 강하게 윤결을 뒤흔들었다.

**

“뭐야…. 무거워….”

무언가 답답하게 자신의 가슴을 꽉 짓누르는 느낌에 혜원이 인상을 구기며 눈을 떴다. 언제 왔는지 옷도 제대로 벗지 않고 잠들어 있는 윤결을 발견한 혜원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이 형은 옷도 안 벗고 왜 이러고 자는 거야. 못 살아 정말.”

많이 피곤한지 거칠게 부르튼 입술이 안쓰럽게 보였다. 혜원은 손을 뻗어 그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까칠까칠한 입술이 손끝에 닿자 혜원은 괜히 미안해졌다. 자신이 신나게 놀고 있는 동안 윤결 혼자만 고생하는 것 같아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래도 옷은 벗고 편히 자게 해야 할 것 같아, 혜원은 잠든 윤결의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그의 상의를 벗겼다. 답답해 보이는 정장 재킷을 힘겹게 벗긴 혜원은 잠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우와. 진짜. 어쩜 세상에 이렇게 안 도와주냐. 형 진짜 무겁다고….”

끙끙거리며 재킷을 하나 벗겼을 뿐인데 혜원의 체력은 이미 바닥이 나버렸다. 아무래도 셔츠까지 다 벗기려면 날밤을 새워야 할 것 같아, 혜원은 그의 목을 꽉 조이고 있는 넥타이와 셔츠의 단추만 풀어주기로 하고는 단정히 묶여 있는 그의 넥타이를 풀어 침대 옆 탁자에 고이 올려두었다.

꽉 묶인 셔츠의 단추가 생각보다 쉽게 풀어지지 않자, 혜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단추 푸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윤결은 사실 혜원이 옷을 벗길 때부터 잠에서 깨 있었으나 허둥대며 제 옷을 벗기기 위해 바둥거리는 그의 모습이 귀여워 잠든 척 눈을 감고 있었다.

“이놈의 단추는 왜 이렇게 뻑뻑하게 잠겨 있는 거야. 이씨… 손가락 아파.”

대여섯 개의 단추를 풀고는 지쳐버린 듯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운 혜원. 그는 눈을 감고 씩씩거리느라 윤결이 몸을 일으켜 그의 곁으로 다가온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윤결은 대뜸 혜원을 들어 올리더니 자신의 가슴 위로 내려 앉혔다. 얼떨결에 윤결의 품에 안겨 버린 혜원이 깜짝 놀라 소리를 꽥 질렀다.

“으아악!”

“우리 혜원이 잘 먹고는 다니는 거야? 왜 이렇게 가벼워?”

“어, 언제 깼어요!”

“네가 그렇게 야하게 옷을 벗겨대는데, 내가 안 깰 수 있겠어? 엉큼해졌어. 우리 혜원이.”

“아니, 나는 그러니까 형 펴, 편히 자라고….”

이상야릇한 눈빛으로 자신을 울려다 보는 윤결의 뜨거운 시선에 혜원이 얼굴을 붉히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나는 이렇게 혜원이만 안고 있으면 편하게 잘 수 있는데. 뭐 거기다 키스까지 해주면 숙면을 취할 수도 있을 것 같고.”

“어?? 뭐, 뭐래….”

“진짠데.”

윤결이 슬며시 혜원의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혜원의 눈동자는 이미 그다음 행위를 예상이라도 한 듯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윤결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빨갛게 물들어가는 혜원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며 그에게 키스를 했다.

달콤했다. 한참 동안 혜원의 입술을 핥던 윤결은 촉촉이 젖어 든 그의 입 안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별다른 저항 없이 매끄럽게 혜원의 혀를 휘감은 윤결의 혀가 분주히 움직였다. 메말라가는 사막에서 생명수라도 발견한 듯 윤결은 격렬하게 혜원의 혀를 물고 빨며 애무했다.

“흐응!”

윤결의 거친 키스를 따라가지 못한 혜원의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숨을 쉬기 위해 뜨거운 입김을 내뱉으며 물기에 젖은 눈으로 자신을 애처롭게 내려다보는 혜원의 얼굴에 윤결은 흥분했다. 이대로 가다간 키스만으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혜원아. 사랑해.”

윤결은 와락 그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으며 속삭였다. 혜원 또한 떨리는 손으로 윤결의 등을 바짝 끌어안았다. 오늘 밤, 어쩌면 이대로 잠들고 싶지 않은 건 윤결만은 아닌 듯했다.

**

서로의 팔에 안겨 눈을 뜬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아침이 밝았다. 혜원은 침대에 누운 채 출근하기 위해 먼저 일어난 윤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누가 봐도 멋지고 잘난 남자의 탄탄하고 훌륭한 가슴. 그리고 어제 저 탐나는 가슴으로 자신을 누구보다 꽉 안아주며 사랑한다고 속삭여 준 윤결의 고백에 다시 한번 마음이 설렜다.

머리만 살짝 이불 밖으로 빼낸 혜원의 동그란 눈은 이리저리 동분서주하는 윤결의 동선을 따라가기 바빴다. 어느덧 준비를 다 마친 윤결이 침대맡에 앉아 헝클어진 혜원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말했다.

“우리 혜원이 누굴 그렇게 몰래몰래 훔쳐보는 거야?”

“내가 언제 훔쳐봤다고…. 당당히 쳐다본 건데?”

입술을 삐쭉 내밀며 귀엽게 눈웃음을 짓던 혜원이 그를 향해 팔을 뻗으며 말했다.

윤결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혜원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동시에 그를 안아 들었다. 떨어지기 싫은 혜원은 윤결의 허리에 다리를 휘감으며 그의 가슴에 얌전히 얼굴을 기댔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혜원아.”

“응?”

“잠시 미국에 가 있는 건 어때?”

“어? 유, 윤결 형도 같이?”

갑작스러운 윤결의 물음에 혜원이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슬퍼 보이는 윤결의 얼굴에 시무룩해진 혜원이 고개를 숙이며 다시 그의 품에 안겼다.

“혜준이 곁에 잠시 있으면 형이 여기 일 다 정리하고 데리러 갈게.”

“왜? 갑자기 왜 그래야 하는데?”

“형이….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있어서 그래.”

“내가 있으면 안 되는 거야? 내가 방해돼서 그래?”

여전히 자신은 윤결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존재라는 사실에 혜원은 상처를 받은 듯 눈물을 글썽였다.

“아니야 혜원아, 그런 거 아니야. 형이 혜원이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런데 왜 날 보내려고 그래?”

혜원은 자신을 사랑한다는 윤결의 말을 믿으면서도 이젠 너무 어린애 같은 자신이 질려 버린 걸까 하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동시에 눈부시게 아름답게 생긴 남자와 팔짱을 끼고 호텔을 나가던 윤결의 모습이 떠오르자, 글썽이던 눈물이 떨리는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갑작스러운 혜원의 눈물에 놀란 윤결이 그를 달랬지만 한번 울음이 터진 혜원은 쉽게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이제야 겨우 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는데 이렇게 또 버림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러움이 밀려왔다.

“아니야 혜원아. 내 옆에 있으면 네가 다칠까 봐 그래. 미국에서 조금만 기다리면 형이 다 정리하고 데리러 갈게 약속할게. 혜원아.”

“그냥 옆에 있으면 안 돼? 방해 안 되게 조용히 있을게. 울지도 않고 아프다고 하지도 않을게. 응? 나 보내지 마, 형.”

눈물로 애원하는 혜원의 부탁에 윤결은 눈을 지그시 눌러 감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은 누구보다 컸다. 하지만 이대로는 안전하게 혜원을 지킬 수 없었다. 루이도 루이였지만, 이제 슬슬 혜윤과의 문제도 정리해야 했고, 이 문제로 두 집안 모두 가만히 있지 않을 거란 건 불 보듯 뻔했다.

이미 마음을 굳힌 윤결은 모든 비난은 자신의 선에서 끝내고 싶었다. 혜원만은 이 험난한 길을 걷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혜준이라면, 자신이 한국에서 두 집안 어른들을 설득하는 동안 누구보다 살뜰히 혜원을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윤결은 혜원의 눈물 앞에 한없이 흔들렸다.

혜원은 살며시 고개를 들어 윤결을 올려다봤다. 어떡해서든 그의 마음을 돌리고 싶은 혜원이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윤결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너무도 애틋한 키스에 윤결 또한 눈물이 났다. 열리지 않는 윤결의 입술을 파고들려 혀를 내미는 혜원의 서툰 키스. 윤결이 굳게 다물었던 입을 살짝 벌리며 그를 받아들이자, 혜원은 더욱 집요하게 윤결의 혀를 휘감으며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서로의 타액이 오가는 야릇한 키스였음에도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너무도 애달팠다.

“혜원아.”

“나 버리지 마, 형. 내가 더 잘할게. 응?”

“내가 널 어떻게 버려. 울지 마. 당장 가라는 거 아니니까 진정해 혜원아.”

윤결의 품에서 어느 정도 안정이 된 혜원이 조심스럽게 바닥으로 내려왔다. 출근 준비를 마친 윤결의 셔츠에 눈물 자국이 번져있자, 혜원은 서둘러 옷장에서 깨끗한 하얀색 셔츠를 꺼내 들고 왔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윤결의 셔츠를 벗기고 넥타이를 풀었다.

윤결은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몸을 맡겼다. 혜원의 손에 의해 셔츠가 벗겨지고, 새로운 셔츠가 입혀질 때까지 윤결은 말없이 혜원을 바라봤다. 아직 넥타이 매는 것이 서툰 혜원이 순서를 버벅대자 윤결은 씩 웃으며 넥타이를 들고 거울 앞으로 갔다. 윤결은 혜원의 목에 넥타이를 걸어주며 하나하나 매는 법을 손수 보여주었다.

“자 이렇게 하면 마무리. 이쪽을 올려봐. 쭉 하고 올라가지? 이젠 여기를 살짝 풀어서 형 목에 혜원이가 다시 걸어줄래?”

“응.”

윤결의 손에 잡힌 자신의 손을 살며시 움직여 다시 넥타이를 그의 목에 걸어주던 혜원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하니까 형이랑 나랑 꼭 진짜 신혼부부 같다.”

혜원의 입에서 나온 신혼부부라는 말에 윤결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렇게 귀여운 녀석을 어떻게 품에서 떠나보내야 할지, 윤결은 벌써부터 목이 메였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혜원을 힘겹게 집에 두고 회사로 출근한 윤결은 준비했던 일들을 하나둘씩 처리하기로 했다.

어차피 자신의 성향과 혜원과 관계를 털어놓으면 더 이상 이 집안에서 자신의 편은 없을 것이기에, 회사를 떠나도 혜원을 데리고 살 만큼의 재력은 확보해야 했다. 물론 워낙 사업 수완이 좋고 머리가 좋은 윤결은 이미 미국에서 새로 진행할 사업을 따로 차근차근 따로 준비한 상태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방해가 만만치 않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런 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윤결은 자신의 사업 계획에 재현을 끌어들였다. 그래도 믿을 만한 집안사람 하나쯤은 포섭해둬야 할 것 같았고, 윤결을 동경하고 좋아하고 있던 재현은 그에게 딱 어울리는 사업 파트너였다.

출근과 동시에 윤결은 재현을 불러 미팅과 출장 계획을 세웠다. 혜원과 함께 출국하기 위한 출장이었다. 어느 정도 사업의 윤곽이 잡히고 미팅도 마무리가 되어 가던 중, 윤결의 전화로 문자가 도착했다.

[서재희입니다. 무턱대고 연락을 드려 죄송하지만, 우리 좀 만나죠? 그럴 이유,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순간 윤결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루이에 이어 이제 재희까지 건방지게 끼어들려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나같이 혜원의 곁에 독이 될 형제였다. 윤결은 그에게 호텔로 가겠다는 문자를 남겼다. 좋든 싫든, 어차피 한 번은 모두가 모여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

윤결의 문자를 확인한 재희는 슬슬 나갈 준비를 했다. 물론 윤결을 단념시킬 방법은 없었다. 다만, 혜원을 위해서라면 적어도 어떤 식으로든 시도는 해야 했다. 재희는 문득 어제 루이가 한 말이 떠올렸다.

‘다르다고 믿고 싶은 것일 뿐이겠지. 너도 나와 다르지 않아.’

자신이 혜원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이 정말 루이가 윤결을 향해 집착하는 광적인 사랑과 같은 것일까?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는 재희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혜원을 정말로 포기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봤다. 그리고 또렷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답은 ‘없다’였다.

루이를 위해서 윤결을 설득하려는 마음보다도 어쩌면 재희 또한 혜원을 완전히 갖기 위해 마음먹은 일일지도 몰랐다. 애써 아니라고 부정해 봤지만, 재희 역시 이대로 혜원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윤결이 혜원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혜원이 윤결을 포기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까지 이른 재희의 눈빛이 전에 없이 차갑게 굳었다. 상처받은 혜원을 다독여 주며 그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것 또한 아주 나쁜 방법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대한 혜원이 상처받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가 됐으면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가장 아픈 방법으로 그가 많이 약해져 있을 때 그의 마음을 파고드는 것, 그것만이 이 엇갈린 사랑의 해답이라는 판단이 섰다.

혜원을 향한 집착이 강해질수록 재희는 자신도 모르게 루이와 같은 방법으로 사랑을 쟁취하려 하고 있었다.

준비를 마친 재희가 시계를 확인했다. 어느덧 윤결이 도착할 시간이 다 되어가자 그는 거실에 앉아 평소처럼 여유로운 얼굴로 커피를 마시는 루이를 쳐다봤다. 재희에게는 누구보다 소중한 형이었다. 어쩌면 생명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재희에게 모든 것을 헌신했던 루이. 재희는 늘 그에게 빚을 지고 산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재희는 그 빚을 갚을 기회라 생각했다.

“잠시 나갔다 올게. 형.”

“그래.”

오늘따라 너무도 평온해 보이는 루이를 뒤로하며 재희가 호텔 방을 나섰다.

로비로 걸어 나오던 재희는 한눈에 윤결을 찾을 수 있었다. 남자인 자신이 봐도 눈에 띄게 잘난 남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함으로 무장한 윤결의 모습에 재희는 입술을 꽉 깨물며 긴장했다.

역시 루이가 반할 만하다 생각했다. 재희가 윤결을 향해 걸어가자, 그의 시선을 느낀 윤결이 재희를 쳐다봤다. 윤결은 눈가를 잔뜩 찌푸려지며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재희를 노려봤다.

“일찍 오셨네요. 한윤결 씨.”

재희가 손을 내밀며 먼저 악수를 청했다. 하지만 윤결은 빤히 그의 손을 내려다볼 뿐 악수를 받지 않았다.

“우리가 악수씩이나 나눌 정겨운 사이는 아니지 않나? 따라와.”

“생각보다 더 냉정하시네요? 우리 형이 화가 날 만하네. 뭐 그게 당신의 큰 실수였지만 말이야.”

“뭐라고?”

“한 대 치시겠어요. 우리 형한테도 그랬어요?”

은근슬쩍 비꼬는 가시 돋친 말투가 거슬리는 듯 윤결이 그를 흘겨보자, 재희는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더욱 그를 자극하듯 말했다. 어쩌면 루이보다도 더 위험한 녀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재희는 윤결의 따가운 눈빛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윤결은 더 이상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아 다시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호텔을 빠져나와 인적이 드문 골목에 위치한 한적한 카페 안으로 들어간 윤결은 자리를 잡고 앉아 뒤따라 들어오는 재희를 쳐다봤다.

지금부터 그와 마주해야 할 대화가 결코 쉽지 않을 거란 생각에 윤결은 벌써부터 피곤이 몰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

마주 앉은 두 남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음료를 주문하고 나오는 그 짧은 시간이 길게 느껴질 만큼 둘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리고 그 정적을 먼저 깬 것은 재희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당신 인제 그만 혜원이한테서 손 떼세요.”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그만큼 데리고 놀았으면 충분한 거 아닌가?”

“그 입 닥쳐.”

“지나가는 사람 잡고 물어봐. 아내의 동생이랑 바람피우는 남편이라…. 아니지. 누나의 남편이랑 바람피우는 동생이 더 자극적이려나?”

“뭐? 이런 미친 새끼가!”

저속한 말들로 자극하는 재희의 노골적인 비아냥거림에 참지 못한 윤결이 그의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다.

“성질 하며. 뭐 여기서 소문이라도 내게? 이 손 치워 한윤결. 아직 당신은 나한테 큰소리칠 입장은 아니잖아?”

“개자식들.”

윤결이 거칠게 손을 거둬들이며 말했다. 그의 입에서 나올 말들이야 뻔했지만, 그의 말마따나 혜원이 엮여 있는 이상 지금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는 관계를 굳이 이어가면서까지 혜원이를 세상 밖에 나오지 못하게 하려는 이유가 뭐야? 사랑? 그 잘난 사랑 때문에 아직 앞날이 창창한 아이를 당신 곁에만 붙들어놓고, 귀도 막고 눈도 막고 가족들과 단절시켜 버리려고?”

“그럴 일 없어.”

“그건 당신 생각이고. 혜원이 생각은? 과연 강혜원 그 마음 여린 녀석이 부모 형제와 의절까지 해가면서 당신과의 사랑을 지킬 수 있을까?”

“내가 알아서 해.”

“아니 당신은 또 혜원에게 숨기려고만 하겠지. 그리고 난 그걸 막기 위해 여기 나온 거고.”

“네가 대체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야! 보자 보자 하니까 이 새끼가!”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루이와 같이 사랑 타령이나 복수를 하겠다는 터무니없는 협박이나 하러 나온 녀석이 아니라는 생각에 윤결은 눈을 부릅뜨며 그를 쏘아봤다.

“나는 선택지를 주려는 것뿐이야. 지금 이 상태로 혜원이 다치지 않게 알아서 물러나든가, 아니면 그 녀석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버티다가 만신창이가 된 녀석을 빼앗기든가.”

“내가 과연 혜원이에게 그런 일이 생기도록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

“글쎄? 생각보다 진실은 잔인하고, 현실은 냉정해. 당신이 지금 만든 일 자체가 그 누구에게 용서받을 수도 이해를 받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그러니까 아랫도리 잘 굴리고 다니지 그랬어. 당신이 그렇게 지저분하게 이 남자 저 남자 안 가리고 데리고 잤던 건 혜원이가 알아?”

“난 혜원이를 만난 후로는 한 번도 눈 돌린 적 없어.”

“웃기는군. 어떤 식으로 포장을 하든, 진실은 단 하나야. 당신은 한 남자의 인생을 망가트렸다는 거. 그리고 당신이 직시해야 할 현실은 어떤 식으로든 그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거야. 그리고 당신의 가장 큰 실수는 그 누구도 아닌, 우리 형을 건드렸다는 거지.”

재희는 입꼬리를 한쪽으로 올려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루이의 집안은 프랑스에서 알아주는 나름 재력과 권력을 가진 유서 깊은 귀족 집안이었다. 그런 집안의 외아들인 루이. 어렸을 때부터 그의 말은 곧 법이었다.

부모조차 그를 한 번도 말리거나 터치한 적이 없었다. 하고 싶은 건 늘 하면서 살아왔고, 가지고 싶었던 것 또한 모두 손에 넣었던, 한 번도 실패를 경험해 보지 못했던 루이에게 윤결은 그가 처음으로 겪은 패배였다. 그리고 그 첫 경험은 루이에게 너무도 큰 충격과 상처로 다가왔다.

루이의 이런 집착이 낯설지 않은 재희. 사실 그가 루이의 집에 입양이 될 수 있었던 것조차 루이의 선택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루이의 부모가 원했던 아이는 작고 귀여운 프랑스 여자아이로 이미 결정이 되어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루이의 한마디에 모든 것이 뒤집힐 만큼, 그의 말은 곧 현실이 되었다.

다만 윤결의 실수는 루이의 실체를 알지 못한 채 너무도 완벽하게 그와의 하룻밤을 보냈다는 것이었다. 그저 윤결에겐 많고 많은 원나잇 중 하나였던 밤. 하지만 루이에겐 황홀하리만큼 만족스러웠던,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은 남자로 각인되어 버리고 만 것이었다.

루이의 병적인 집착과 소유욕. 그것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집요했다.

“더 들어줄 말도 해줄 말도 없는 것 같으니까 먼저 일어날게. 난 절대 혜원이를 포기할 생각이 없거든. 곧 집안에도 모든 사실을 말할 거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도 다 되어있어. 그러니까 더 이상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로 나한테 연락하지 마. 혜원이가 상처를 받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그래. 좋아. 이것이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나도 더는 부탁할 생각 없어. 하지만 그거 알아? 당신은 나보다도 혜원이를 더 모르고 있다는 거. 모든 것을 잃은 당신을 혜원은 과연 어떤 눈으로 바라볼까? 나 역시 기대되네. 그럼 잘 가요. 한윤결 씨. Bonne chance(행운을 빌어요).”

다시 한번 재희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본 윤결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갔다.

재희는 천천히 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낸 뒤,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항상 어디서나 말조심해야지 한윤결 씨. 혜원은 당신이 모든 걸 잃게 되면, 당신을 떠날 수밖에 없어. 그 아인 절대 당신이 그런 일을 겪도록 놔둘 아이가 아니거든. 어떡하나…. 혜원이가 좀 많이 울겠네.”

**

사무실로 돌아온 윤결은 제일 먼저 미국행 비행기 표를 알아봤다. 당장 내일이라도 혜원을 미국으로 보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루이와는 달리 재희의 눈빛은 당장 무슨 일이라도 벌일 것처럼 차가웠다.

“씨발….”

윤결은 땅이 꺼질듯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지킬 것이라고는 정말 강혜원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그를 지키려 하면 할수록 더욱 득달같이 달려드는 방해물들에 윤결은 지금 최고로 예민해져 있었다. 그리고 재희가 한 말들이 모두 틀린 말이 아니라는 사실에 더욱 화가 났다. 하지만 이제 와 후회를 한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윤결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혜원에게 전화했다. 오늘부터 그 어떤 이유에서든 재희와의 만남을 막아야만 했다.

“혜원아, 어디야?”

[나? 집인데?]

“오늘은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서 형 기다려.”

[왜? 무슨 일 있어?]

“형이 할 말 있어서 그래,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나가지 마. 나 외에는 문도 열어주지 말고 전화도 받지 마.”

[형 왜 그래 무섭게. 왜 그러는 건데….]

“그냥 이번 한 번만 형이 하자는 대로 해주면 안 될까 혜원아? 가서 말해줄게.”

[응. 그럴게.]

“전화도 내 전화 외엔 받지 마. 약속할 수 있지?”

[재희 형 전화도 안 돼?]

“어. 안 돼. 형이 다 가서 설명할 테니까 혜원아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있어.”

[응. 빨리 와.]

“최대한 빨리 갈게. 우리 혜원이 좋아하는 초밥 사서.”

통화를 마친 윤결은 제일 먼저 재현을 불러들였다. 더는 느긋하게 일을 진행할 여유가 없었다. 지금 그에게 가장 든든한 조력자이자 믿음이 가는 재현이었기에 이젠 슬슬 그에게도 혜원과 자신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털어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크와 함께 재현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윤결은 답답하게 조여 맨 넥타이를 풀며 그에게 앞으로 와 앉으라고 손짓했다. 재현은 잔뜩 가지고 온 서류를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갑자기 왜? 아까 회의 때 웬만한 일은 다 정리된 거 아니었어?”

“뭐 대충. 그것보다 조금 더 개인적인 일로 상의할 게 있어. 아니 뭐 상의라기보단 나와 함께 일을 시작하기 전에 네가 꼭 알아야 할 문제이기도 하지만.”

“뭔데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말하는 거야? 대체 무슨 일인데.”

단단히 마음을 먹고 그를 불렀으나 역시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여태껏 윤결이 보아온 재현은 그의 형 정현과는 다르게 성실하고 정직한 녀석이었다. 자신에게 보여주는 악의 없는 친절과 형으로서 그리고 상사로서 동경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윤결은 밝혀야 하는 진실이 어쩌면 그에게 커다란 충격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신뢰를 깨버리는 일이 될 수도 있음에 그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진심으로 걱정하는 재현의 얼굴에 윤결은 결심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지금 나와 함께 사는 아이, 혜윤이가 아니라 혜원이야.”

“뭐?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난 처음부터 혜윤이 아닌 혜원이랑 살고 있었다고. 네가 알고 있는 그 강혜윤은 진짜 혜윤이 아니라 그 녀석의 쌍둥이 동생 강혜원이라고.”

“아니 그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너무 놀란 재현은 입도 다물지 못한 채 멍하니 윤결을 바라봤다. 지금 자신이 들은 이 엄청난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잔뜩 굳은 윤결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재현은 이것이 사실임을 깨닫고 말았다.

듣고서도 믿기지 않은 충격에 재현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윤결이 마른세수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그는 서랍 깊숙이 넣어 두었던 담배를 하나 꺼내 물며 깊은 연기를 창밖으로 뿜어냈다.

“형 담배 끊은 거 아니었어?”

“그랬었지….”

“똑바로 이야기해 봐.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너도 사실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지 않았어?”

“난 몰랐어. 정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형이 벌일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다고.”

떨리는 재현의 목소리에 윤결은 다시 한번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빨았다.

뿌연 연기가 복잡한 그의 머릿속을 대변하듯 어지럽게 퍼져 나왔다. 윤결은 그동안의 일들을 차근차근 재현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당돌한 혜윤의 어이없는 바꿔치기부터 혜원을 사랑하게 된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마치 신부님 앞에서 고백성사라도 보는 것처럼 하나하나 그동안의 감정들을 정리해가며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털어놓았다.

“나 혜원이 사랑해. 누구보다 그 아이 사랑한다고.”

“형, 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사장님이 아시면, 아니 집안에서 알게 되면….”

“알아. 그래서 혜원이부터 피신시키고 나서 말씀드리려고.”

“혜원이네 집안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하아…. 그것도 잘 알고 있어.”

“혜원이, 많이 다칠지도 몰라.”

“그래서 너한테 도움을 요청하는 거잖아 김재현. 혜원이는 절대 다치면 안 되니까. 절대 아무것도 몰라야 하니까.”

재현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윤결의 간절한 부탁에 지금 그가 얼마나 혜원을 사랑하고 걱정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언제 어디서나 당당했고, 그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 한 번 한 적 없던 윤결이 먼저 도움을 요청했다는 사실 또한 재현에겐 충격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그가 처음으로 속마음을 털어놓은 사람이 자신이라는 사실에 어딘가 모르게 묘한 뿌듯함을 느꼈다.

도와주고 싶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윤결이 선택한 이 어려운 사랑을 지지해 주고 싶어졌다.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해주면 되는 건데?”

어느새 윤결의 곁에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부드러운 웃음을 짓는 재현. 윤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따뜻한 그의 눈빛에선 진심이 느껴졌다. 든든한 지원군이 생겼다는 안도감에 그제야 윤결의 얼굴에도 여유가 비치는 듯했다.

“내가 너한테 이런 부탁을 하게 될 줄이야.”

“그만큼 강혜원이 형에게 큰 변화를 준 거겠지. 뭐, 그래서 형이 그 아이를 이렇게나 곁에 두고 싶어 하는 거겠지만.”

“고맙다 김재현.”

“고마우면 앞으로 나한테 더 잘해 주든가. 한 이사님.”

“미국 지사 나가서 새로 할 사업, 너는 우선 빠져.”

“그게 무슨 소리야? 나라도 있어야….”

도움을 요청한 마당에 갑자기 하던 일에서 손을 떼라는 윤결의 말에 재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니. 넌 내 마지막 카드가 될 거야. 그러니까 그때까지 철저히 나와의 일은 비밀로 해. 난 결국 집안에서 내쳐질 거야. 그러니까 그때를 대비해서 넌 내 사업의 가장 큰 투자자가 되어야 한다고.”

“정말 끝까지 치밀하네. 형은.”

“혜원이를 지켜야 하니까. 그 아이만큼은 아무 걱정 없이 웃게 해주고 싶으니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사랑을 지키려는 윤결의 순애보에 재현은 속으로 그를 응원했다.

처음으로 그가 자신과 똑같은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만큼, 재현은 달라진 그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자신을 이렇게까지 철저히 속이며 연기를 한 발칙한 강혜원을 언젠가는 한번 눈물 쏙 빠지게 울려 버리고 말겠다는 생각을 하며 재현은 그의 방을 나섰다.

같은 시각. 혜원은 윤결의 전화에 왠지 모를 불안을 느끼며 손톱을 깨물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마침 걸려온 재희의 전화.

혜원은 잠시 망설였다. 휴대폰의 벨 소리가 울리면 울릴수록 혜원의 손끝이 떨렸다. 이상하게 받으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면서도 혜원의 손은 통화 버튼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기 직전, 누구의 전화도 받지 말라던 윤결의 당부가 떠오르자 혜원은 주춤하며 망설였다. 오늘따라 집요하게 울리는 벨소리에 혜원은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혜원아. 뭐 하고 있었어?]

“아, 나 그냥 집.”

[그래? 전화를 늦게 받길래 밖인 줄 알았어.]

“잠깐 뭐 좀 하느라. 무슨 일 있어 형?”

[뭐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전화하나? 오늘따라 왜 이렇게 목소리가 가라앉았어 혜원아? 너야말로 무슨 일 있어? 내가 갈까? 우리 만날래?]

“아니야! 아, 아니야. 오늘은 그냥 집에 있을래.”

하지만 다급히 대답하는 혜원의 목소리에서 재희는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분명, 혜원은 예전과 달라져 있었다. 항상 들뜬 목소리로 반갑게 맞아주던 혜원의 석연치 않은 행동에 재희는 윤결이 간섭했음을 직감했다. 마음이 급해진 재희는 더 늦기 전에 그를 빨리 만나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혜원아. 너 윤결이라는 남자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너에게 이 말을 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무척 망설였는데, 계속 숨기는 건 널 위해서도 아닌 것 같아서 아무래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아.]

“내가…. 알아야 할 일?”

[우선 만나자. 만나서 얘기해.]

“지금?”

[내가 그리로 갈게. 주소 알려줘.]

“어. 아, 알았어.”

잠시 망설이던 혜원은 왠지 꼭 들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그에게 주소를 가르쳐 주고는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한번 시작된 손의 떨림은 멈추질 않았다.

윤결에 대해 알아야 할 일이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오전에 윤결에게서 걸려온 전화로 심란했던 혜원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일들이 동시에 떠오르며 급기야 혜원의 눈엔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한편, 윤결을 만나고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재희가 다시 나갈 준비를 하자 루이가 그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봤다. 항상 웃던 재희의 얼굴에선 웃음이 사려져 있었다. 잔뜩 굳은 얼굴로 호텔을 나가는 재희를 빤히 쳐다보던 루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다급한 걸음으로 택시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는 재희를 놓칠세라 루이 또한 뒤이어 도착한 택시를 타고 그를 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는 한 고급 아파트 단지 앞에 멈춰 섰다. 아마도 혜원에게 전화한 듯한 재희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자 루이 또한 문이 닫히기 직전 그를 따라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재희가 몇 층에서 멈추는지 확인한 루이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감추고 숨기기 바빴던 녀석을 드디어 찾았다는 생각에 루이는 천천히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3층. 루이는 굳게 닫힌 현관문을 빤히 노려보며 가까이 다가갔다. 손만 뻗으면 열릴 것 같은 문. 루이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

**

“어서 와. 찾는 데 힘들진 않았어?”

“주소만 보여주면 알아서 찾아가시던데 뭐.”

“그랬구나. 들어와.”

혜원은 붉어진 눈을 숨기려 재빨리 뒤돌아서 거실로 그를 안내하며 말했다. 재희는 얼핏 혜원의 눈가가 부어있는 것을 보고는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멈춰 세웠다.

“혜원아.”

하지만 재희의 손이 어깨에 닿자 몸을 흠칫 떨던 혜원이 그대로 자리에 멈춰 선 채 말했다.

“뭐 마실 거라도 줄까? 아, 저, 점심은 먹었어? 집에 마땅히 줄 게 없는데. 어떡하지? 과일이라도….”

“됐어. 나 여기 먹으러 온 거 아니야. 나 좀 봐봐 혜원아.”

여전히 뒤돌아선 채 등을 돌리고 있는 혜원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재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혜원은 잠시 머뭇거리다 천천히 몸을 돌려 그를 올려다봤다.

울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이상하게 그의 입에서 나올 말들이 자신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닐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에 벌써부터 눈시울이 붉어졌다.

“형 잠깐 여기 앉아 있을래? 마실 것 좀 가지고 올게.”

눈물이 떨어지기 직전 혜원은 그를 거실 소파로 안내한 뒤 서둘러 부엌으로 들어갔다. 떨어지려는 눈물을 재빨리 닦아낸 혜원이 입술을 굳게 다물며 깊은 심호흡을 했다. 그가 해야 할 말이 무엇이든 이미 듣기로 마음먹고 그를 부른 이상 더는 물러설 곳도 없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됐는지 혜원이 거실로 나와 재희의 앞에 음료를 내려놓으며 그의 앞에 앉았다. 여느 때와 달라 보이는 재희의 모습에 혜원은 긴장했지만 이내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윤결 형에 대해 내가 알아야 하는 게 뭔데?”

“너 윤결이라는 남자 혹시 좋아해?”

“그게 중요해?”

재희는 그의 성격상 분명 아니라는 말을 할 것이라 생각했던 혜원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나오자 잠시 주춤했다.

“중요할 수도 아닐 수도. 하지만, 네가 그 사람을 정말로 좋아하고 있는 거라면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겠지.”

“말해. 어차피 형은 다 말하려고 온 거잖아.”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듯 덤덤히 말하는 혜원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재희는 알겠다는 듯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남자와 네 관계에 대해서는 내가 상관할 문제는 아니니까, 난 네가 알아야 하는 사실만 말할게. 우리 형이랑 윤결 씨랑은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어.”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좋은 일이 아닐 거라 예상은 했지만, 막상 듣고 나니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기 시작한 혜원이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컵을 꽉 손에 쥐며 물었다.

“우리 형은 아직 그 남자랑 헤어질 마음이 없다고.”

“헤어질 마음이라니…. 그럼 서로 좋아했던 사이였어?”

“글쎄. 내가 뭐라고 말할 순 없겠지만, 서로 사랑했으니까 몸 부대끼고 잤겠지?”

“뭐…?”

믿을 수 없는 사실에 깜짝 놀란 혜원이 그만 들고 있던 컵을 떨어트리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져버린 컵은 안중에도 없는지 혜원이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혜원아!”

너무 놀라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혜원의 모습에 재희가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며 소리쳤다.

“오, 오지 마! 제발 오지 마.”

혜원은 다가오려는 그를 제지하며 외쳤다.

“미안해 혜원아. 너를 아프게 할 생각은 없었어. 하지만, 계속 너에게 진실을 숨길 수는 없었어. 너를 위해서도 그리고 우리 형을 위해서도.”

“어, 언제?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좀 오래….”

“그러니까 그게 언제부터였는데?”

“프랑스에서…. 사실 그때부터 알고 있었어.”

“뭐…. 뭐?”

순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충격을 받은 혜원이 쓰러지듯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미안해 혜원아. 미리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난, 너랑 그 남자가 깊은 관계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어. 정말이야.”

“그때부터였다고…. 그때부터….”

그제야 혜원은 파리에서 만났던 재희의 형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리고 얼마 전 호텔에서 윤결의 팔짱을 끼고 나갔던 그 외국인이 바로 그였음을 기억해 냈다.

혜원은 절망했다. 이젠 윤결도 재희도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을 알고 한국에 온 재희도, 이런 엄청난 사실을 철저히 자신에게 숨기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윤결도 모두가 원망스럽고 무서웠다.

비 오듯 펑펑 눈물을 쏟아내는 혜원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던 재희가 그에게 조금씩 다가가려 하자 혜원이 손을 뻗어 막아서며 말했다.

“형. 오늘은 이만 가줘. 부탁이야. 제발 그냥 가줘.”

“혜원아. 내가, 내가 잘못했어. 내가 사과할게. 그러니까….”

“아니. 형은 아무 잘못 없잖아. 형이 나한테 왜 사과를 해. 오늘은 잠시 혼자 있고 싶어. 그러니까 다음에, 우리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자. 미안해. 오늘은 그냥 가주라.”

힘들어하는 혜원을 위로해 주고 싶었던 재희는 단호히 자신을 거절하는 모습에 더는 다가갈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재희가 천천히 뒤를 돌아 현관으로 향했다. 순간 혜원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사람은 윤결 형 아직도 많이 사랑한대?"

“응.”

“얼마큼?”

“아마…. 죽을 수도 있을 만큼.”

“….”

그 뒤로 더는 혜원의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재희는 그대로 한참을 서 있다 다시 현관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났지만, 혜원은 그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리가 떨려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도무지 뭐가 뭔지 온통 혼란스럽기만 했다. 윤결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도, 그리고 아직까지 윤결을 잊지 못하고 한국까지 날아온 재희의 형이라는 사람도 하나같이 모두 거짓말 같았다.

“나한테 왜 이래요. 이제 와서 나보고 어떡하라고…. 대체 나보고 어떡하라고….”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은 잔혹했고, 혜원이 마주한 진실은 무거웠다.

모든 기억을 싹 지워 버리고 싶을 만큼 혜원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때마침 울리는 전화에 혜원은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봤다. 윤결의 전화였다. 이 와중에도 그를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았는지 혜원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시나무 떨듯 파르르 떨리는 손과 힘조차 들어가지지 않는 다리로 비틀거리며 한 발 한 발 걸어가던 혜원은 깨진 유리를 밟았는지 잠시 움찔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이내 그는 발걸음을 옮기며 그대로 유리를 밟고 테이블에 놓여있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전화가 끊기기 바로 직전 통화 버튼을 누른 혜원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전화를 받았다.

“응. 형. 나야.”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일은 무슨.”

[목소리는 왜 그래? 너 울었어? 강혜원 너 어디야? 무슨 일 있었지!]

“아니야. 자다 깨서 그래. 일은 무슨. 그리고 형이 나가지 말라며. 전화도 받지 말고. 이러는 형이 더 이상해. 형 괜찮아? 무슨 일 있어?”

[아니야. 아무 일 없으면 됐어. 나 오늘 일찍 퇴근할 거니까 집에서 기다려 알았지?]

“알았어. 아까도 전화해서 똑같은 말 한 거 알지? 정말 이상해. 나 아무 일 없으니까 열심히 일해. 내 걱정하지 말고. 이따 봐 형.”

[그래. 우리 혜원이 착하다. 형 금방 갈게. 사랑해.]

“응….”

겨우겨우 울음을 참아내던 혜원은 윤결의 사랑한다는 말에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재빨리 전화를 끊은 혜원은 휴대폰을 두 손으로 꽉 쥔 채 들을 수 없는 윤결을 향해 나지막이 속삭였다.

“나도. 나도 형 많이 사랑해….”

**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없이 윤결의 집을 나오던 재희는 자신의 앞에 떡하니 서 있는 루이를 발견하고는 잔뜩 굳은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아무리 질투에 눈이 먼 루이라도 여기까지 따라올 줄 생각하지 못한 재희는 적잖게 놀란 듯했다. 동시에 그는 원치 않게 혜원에게 커다란 상처를 줬다는 죄책감에 루이의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여기까진 왜 따라온 거야.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

“내가 따라와서 방해한 건 없잖아? 그냥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야.”

“대체 뭘 확인하고 싶은 건데.”

결국, 집요한 루이의 집착에 지쳐버린 재희가 그의 어깨를 밀쳐 내며 말했다.

시작은 했지만 상처받은 혜원의 얼굴에 재희는 모든 것이 후회됐다. 처음엔 윤결에게서 혜원을 뺏기 위해, 그리고 루이의 복수를 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 하지만, 감당하지 못할 충격에 울고 있던 혜원의 모습을 떠올리니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각오하고 시작한 일 아니었어? 뭐 이런 거 가지고 벌써부터 그런 죽을상을 짓고 있는 거야?”

“됐어. 그만 가자.”

“내가 언제 너한테 부탁했어? 왜 나한테 화를 내는 건데?”

“형한테 화내는 거 아니야.”

“그럼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 서재희.”

“미안해. 그러니까 이만 가자.”

짧은 한숨과 함께 사과를 한 재희가 루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하지만 루이는 여전히 재희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며 웃어주던 재희의 달라진 모습에 스멀스멀 화가 치솟았다.

겨우 이 정도로 마음이 약해져서 힘들어하는 재희를 보니 역시 마무리는 자신이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발길을 돌렸다.

호텔로 돌아온 재희는 곧장 방으로 들어가 윤결과의 대화를 녹음했던 녹음기를 꺼내 들었다. 굳이 이것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이미 혜원은 크나큰 상처를 받았기에, 더는 그를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재희는 착잡한 마음에 녹음기를 서랍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리고 이미 벌인 일에 더는 후회하지 않기로 다시 한번 굳게 마음먹었다.

이제 모든 것은 시간만이 해결해 줄 수 있었다. 언젠가 시간이 지나 혜원이 자신에게 조금 더 마음을 열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재희는 얼마 전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을 꺼내 들었다.

활짝 웃는 귀여운 혜원의 모습에 굳어있던 재희의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미소가 지어졌다.

**

혼자 남은 혜원은 어질러진 거실을 치우기 시작했다. 유리가 박혀 상처투성이가 된 발에서는 피가 흥건히 새어 나왔다. 박힌 유리 조각들을 조심스럽게 빼내던 혜원이 고통을 참아내려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한 조각 한 조각 빠져나올 때마다 붉은 핏방울이 뚝뚝 바닥에 떨어졌다.

“아프다….”

발에 난 상처보다도 가슴에 깊이 새겨진 상처가 더 큰 아픔으로 다가왔다.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깨진 유리 조각을 치우고 나니 온몸에 힘이 빠진 듯 지쳐버렸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벌어진 상처가 바닥에 쓸려 말할 수 없을 만큼 극심한 고통이 뒤따랐다. 덕지덕지 붕대로 대충 동여맨 두 발은 걷기조차 힘들 만큼 쓰라렸다.

더 이상 걷기를 포기한 혜원이 조심스럽게 소파에 내려앉았다. 재희의 말이 사실이 아니길 바라기엔 그동안의 일들이 너무도 다 잘 맞아떨어졌다.

갑작스럽게 미국으로 가라는 윤결의 제안과 오늘따라 더욱 불안하게 들렸던 그의 목소리. 호텔에서 그와 함께 있던 남자와 요즘 들어 자신에게 무언가 숨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 모두, 자신의 착각이나 오해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혜원은 너무도 바보 같았던 자신을 원망했다.

혜원은 지금 이 순간 누군가의 따뜻한 위로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는 오랜만에 혜준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가는 내내 혜원은 처음부터 자신이 혜준을 따라 미국으로 갔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윤결을 만나 행복했던 시간까지 후회하는 건 아니었다.

어쩌면 그와의 시간이 너무도 행복했기에 지금의 이 진실이 더 괴로운 것일지도 몰랐다.

얼마 가지 않아 목소리가 잔뜩 잠긴 혜준이 전화를 받았다.

[혜원이? 혜원아 무슨 일 있어?]

“아. 지금 거기 새벽인가? 미안. 내가 형 깨웠어?”

순간 시차를 생각하지 못한 혜원은 생각 없이 전화한 자신을 자책하며 대답했다.

[아니야 혜원아. 괜찮아. 무슨 일 있어? 응?]

“아니. 그냥. 형 보고 싶어서. 못 본 지 너무 오래돼서 그런가? 형 많이 보고 싶다.”

[형도 우리 혜원이 많이 보고 싶어. 혹시 윤결이랑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응. 일은 무슨. 윤결 형이 잘해 줘. 참, 혜윤이는 잘 지내?”

[그 녀석은 걱정 마. 아주 물 만난 물고기처럼 얼굴 보기도 힘들 정도로 잘 지내니까.]

“다행이다.”

혜원은 그래도 혜윤이라도 행복하게 잘 지내는 것 같아 안심한 듯 작게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듣는 혜준의 목소리에 혜원은 꾹꾹 참고 있던 그리움이 솟구쳐 올랐다. 울먹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혜원은 수화기를 막으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혜원아, 형이 갈까?]

“아니. 괜찮아. 그냥 형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한 거야. 진짜 아무 일 없어.”

[그래. 알았어. 언제든 전화해도 되니까 힘든 일 있으면 꼭 형한테 말해. 알았지?]

“응.”

짧은 통화를 마친 혜원은 울적한 마음에 방으로 들어가 몸을 구겨 넣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져 왔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음에도 식욕조차 없었다. 눈을 감자마자 눈물이 핑 돌았다. 엄마도 아빠도 심지어 잔소리쟁이 혜윤도 오늘은 가족의 품이 너무도 그리웠다.

갑작스러운 혜원의 전화에 심란해진 혜준은 더 이상 잠이 오질 않았다. 평소와 다르게 현저히 가라앉은 혜원의 목소리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걱정을 떨치지 못한 혜준은 바로 윤결에게 전화했다. 분명 혜원에게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것 같은 불안한 느낌에 혜준은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윤결. 혜원이한테 무슨 일 있어?”

[갑자기 전화해서 무슨 소리야?]

“방금 혜원이가 전화했는데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어.”

[혜원이가 너한테 전화를 했어?]

윤결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미국에 잠시 가 있으라는 말을 해서 그런가 싶으면서도, 가지 않겠다고 울먹이던 혜원을 떠올리니 갑자기 이 시간에 전화했다는 것에 이상함을 느꼈다.

서둘러 통화를 마친 윤결은 다시 혜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혜원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초조해진 윤결은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운전하고 가는 내내 윤결은 계속해서 혜원에게 전화했다. 하지만 그 긴 시간 내내 혜원은 단 한 번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강혜원!”

허겁지겁 집 안으로 들어온 윤결은 혜원부터 찾았다. 거실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윤결은 재빨리 혜원의 신발이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현관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혜원의 운동화. 다행히 밖으로 나간 건 아닌 듯했다.

다시 거실로 들어온 윤결은 혜원의 방으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어보니 조그마한 혜원의 머리가 이불 밖으로 살짝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윤결이 조심스럽게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불을 들쳐 혜원의 얼굴을 확인한 윤결은 순식간에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윤결은 누가 봐도 운 것 같은 그의 붉어진 눈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울면서 혜준에게 전화할 만큼 절박했던 일이 무엇이었을까? 순간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긴 윤결의 시선이 혜원의 휴대폰에 멈춰 섰다.

윤결은 입술을 꽉 깨물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혜원의 통화 기록을 하나하나 확인해 나가던 윤결의 눈에 들어온 재희의 이름. 윤결은 시선을 돌려 혜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과연 그 미친 자식이 어디까지 말을 했을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끝까지 모르게 하고 싶었던 과거를 끄집어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윤결은 피가 거꾸로 솟을 만큼 화가 치밀어 올랐다. 조금 더 빨리 혜원을 미국으로 보내지 않은 것이 후회됐다.

윤결은 잠든 혜원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말했다.

“전화 받지 말라고 했잖아. 이번만큼은 형 말을 들어주면 안 됐어? 네가 이렇게 울까 봐 말하지 못했어. 네가 이렇게 상처받을까 봐 말할 수 없었어.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혜원아.”

돌이킬 수 없는 참담한 현실 앞에 윤결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으며 혜원의 손을 잡았다. 미안했다. 자신 때문에 살면서 평생 겪지 않아도 될 아픔을 겪게 한 것만 같아 너무도 미안했다.

부족한 것 하나 없는 집안에서 사랑받는 아이로 자라 평범한 사랑을 하며 누구보다 행복할 수 있는 아이였다. 그런 순진한 녀석을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으로 아프게만 한 것 같아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

윤결은 잠든 혜원의 이마에 키스를 하며 조용히 방을 나왔다. 지금은 어떻게든 벌어진 일의 수습이 시급했다.

윤결이 나간 뒤 잠들었다 생각했던 혜원이 천천히 눈을 떠 그가 나간 방문을 쳐다봤다. 너무도 애틋한 그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혜원은 오히려 윤결을 걱정했다. 그가 말하지 못한 것 또한 사정이 있을 것이고, 스스로 말해 줄 때까지 기다려주고 싶었다.

재희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 할지라도 혜원은 윤결을 믿고 싶었다. 그가 아니라고 말해주면 그대로 믿어 주고 싶을 만큼, 이미 혜원의 마음속엔 윤결이 너무도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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