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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위험한 만남 (6/12)

6. 위험한 만남

투명할 정도로 희고 예쁜 얼굴로 무표정하게 앉아 기다란 손가락으로 따닥따닥 책상을 두드리는 루이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핸드폰 속 윤결의 연락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눈가를 가늘게 찌푸렸다.

한국으로 돌아간 지도 벌써 여러 달이 지났음에도 연락 한번 없는 그가 야속하기도 했지만, 이대로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가 찾지 않으면 그를 찾아가겠다 마음먹은 루이는 어떤 식으로든 윤결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었다. 그게 몸이든 마음이든 아니면 약점이든.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루이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들어와.”

“형, 뭐 하고 있었어?”

몇 달 사이 재희는 더욱 남자다워지면서도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로 인해 어느새 앳된 소년에서 매력적인 성숙미를 뿜어내고 있었다. 한층 더 성장한 그의 모습에 루이가 흐뭇한 눈으로 올려다봤다.

서재희. 그를 입양할 당시 루이는 일곱 살이었다.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그의 부모는 혼자인 루이를 위해 동생을 입양하기로 했었다. 부모님의 손을 잡고 고아원을 방문했던 루이는 창가에 홀로 앉아 멍하니 밖을 내다보는 재희를 보고 첫눈에 반했었다.

윤기가 흐를 만큼 부드러운 까만 머리카락과 흐린 갈색 눈동자를 가진 신비한 아이. 당시 아이는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창가에 앉아 그들이 노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루이는 한참 원장과 대화 중인 아빠의 손을 살며시 놓으며 아이에게 다가갔다.

순간 자신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루이를 쳐다봤다. 어딘가 굉장히 슬퍼 보이는 눈동자를 가진 아이의 모습에 루이는 심장이 쿵쿵거렸다. 동시에 그 녀석이 가지고 싶었다.

루이가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아이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은 채 다시 창가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부드러운 그의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느낌이 꽤나 기분 좋았다. 루이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너 이름이 뭐야?”

“….”

“나이는?”

“….”

하지만 아이는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루이는 아이의 옆에 내려앉으며 그를 따라 창밖을 바라봤다. 또래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노는 모습을 아이는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순간 놀고 있던 아이 중 한 명이 낯선 루이의 등장에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그에게 달려왔다.

“넌 누구야? 새로 왔어? 너도 앞으로 우리랑 같이 사는 거야?”

일곱에서 여덟 살 정도 돼 보이는 소년은 루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아니. 나 부모님이랑 같이 왔는데? 내 동생 데리러.”

순간 동생을 데리러 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오랜 고아원 생활을 통해 눈치챈 소년이 루이의 손을 덥석 잡으며 물었다.

“정말?? 그래서? 네 동생이 누군데? 응? 나 정말 너랑 잘 놀아줄 수 있는데. 내가 말이지 얼마나 잘하는 게 많냐면….”

흥분한 얼굴로 조잘조잘 제 앞에서 쉬지 않고 떠드는 소년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루이는 다시금 고개를 돌려 아이를 쳐다봤다. 하지만 아이의 시선은 오로지 창밖을 향해 있었고, 별다른 반응도 없었다. 루이는 자꾸만 시끄럽게 떠드는 소년이 귀찮은 듯 그의 손을 살짝 쳐내며 말했다.

“내 동생 이 아인데?”

“뭐…. 뭐?”

소년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루이가 가리킨 아이를 빤히 노려봤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 말조차 통하지 않는 저런 말라비틀어진 동양인을 선택한 루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소년은 짓궂은 웃음과 함께 아이의 머리를 툭툭 때리며 말했다.

“이거 벙어리야 벙어리. 말도 못 하고, 말도 못 알아듣는 벙어리라고. 저런 애가 어떻게 네 동생이 될 수 있어?”

순간 자신이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주던 아이의 예쁜 머리를 험하게 손으로 때리는 소년을 세차게 옆으로 밀치며 루이가 소리쳤다.

“내 동생한테 함부로 손대지 마!”

“뭐? 이씨! 너 방금 날 밀쳤어? 저 새끼가 뭐라고! 저 벙어리 새끼가 뭔데!”

넘어진 소년은 분하다는 듯 벌떡 일어나 그대로 아이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머리채를 잡힌 아이는 아프단 소리조차 하지 못한 채 벌벌 떨며 눈물을 꾹 참아낼 뿐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다.

“야! 내 동생한테 그 더러운 손 치우란 말이야!”

순간 화가 치민 루이가 그대로 소년에게 달려들며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아악! 너!! 이게 진짜!”

순식간에 아이들의 몸싸움이 시작됐다. 소란한 소리에 원장과 루이의 부모가 한걸음에 달려왔고 그들을 즉시 떼어냈다. 하지만 소년은 분이 덜 풀렸는지 연신 발길질을 해대며 소리쳤다.

“나도 너 같은 새끼 필요 없어! 저딴 벙어리가 뭐가 좋다고! ”

“저게 끝까지!”

루이 또한 지지 않고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순간 그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고개를 젓는 아이의 손길에 루이는 움직임을 멈추며 아이를 내려다봤다. 엉망이 된 머리카락 그리고 빨갛게 부어오른 새하얀 뺨. 루이는 천천히 몸을 돌려 아이를 안아주며 말했다.

“나랑 같이 가자. 내가 지켜줄게. 이제 너 혼자 두지 않을게.”

아이는 마치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루이는 아이의 손을 꽉 잡으며 부모에게 말했다.

“내 동생은 이 아이야. 이 아이 아니면 싫어. 다 필요 없다고!!”

루이의 부모는 난감한 표정으로 두 아이를 쳐다봤다. 사실 루이가 한번 고집을 피우면 꺾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루이의 동생인 만큼 그의 의견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루이의 부모는 조용히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잔뜩 겁을 먹은 아이의 손과 제 아들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너, 우리 집에 같이 갈래?”

“….”

아이는 그들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듯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을 깜빡이며 루이와 그의 부모를 번갈아 쳐다봤다. 루이는 망설이는 아이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입양 절차는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고 그렇게 재희는 그날로 바로 루이의 동생이 되었다. 그에겐 알랜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생겼고 루이와 새로 생긴 부모의 보살핌 속에서 누구보다 밝고 예쁜 아이로 성장했다.

루이는 그렇게 귀엽고 눈물 많던 녀석이 언제 이렇게 어엿한 남자가 되었는지 새삼 놀라웠다. 만약 그가 자신의 동생이 아니었다면, 한입에 잡아먹었을 만큼 자신의 이상형으로 자란 녀석. 루이는 그만큼 재희에 대한 집착도 남달랐다.

“뭐 하긴. 그냥. 아, 맞다 재희야. 너 혹시 그 아이 기억해?”

“누구?”

“그 예전에 만났던 아이. 윤결 씨랑 같이 왔던….”

“아. 혜원이?”

순간 재희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짐과 동시에 그의 눈이 반짝였다.

간간이 서로 이메일을 주고받긴 했지만, 역시 함께 있을 때가 더욱 즐거웠던 혜원. 재희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다는 듯 루이의 책상 위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그런데 혜원이는 왜?”

“너 혹시 그 아이랑 아직도 연락해?”

“응. 그냥 가끔 안부 묻는 정도?”

루이는 왠지 자신의 동생마저 그 녀석에게 빠져 있는 것 같은 불안함에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너 혹시 그 녀석 좋아해?”

“뭐? 뭐래. 그냥 동생이야 동생. 모든 사람이 다 형같이 남자를 애인으로 보진 않는다고.”

뜬금없는 루이의 물음에 흠칫 놀란 재희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그, 그런데 갑자기 혜원이는 왜?”

“그게 말이야, 사실 이번에 나 한국에 가볼까 하는데….”

“뭐?? 한국에? 갑자기? 형 아는 사람도 없잖아. 여행 가는 거야?”

한국을 가겠다는 루이의 말에 재희는 깜짝 놀란 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쳐다봤다. 그가 동양인을 좋아하고 특히 자신의 고향인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가겠다고 한 적은 처음이었다.

“여행일 수도 있고, 사랑을 찾으러 가는 것일 수도 있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형.”

“아무튼. 같이 가자 재희.”

“진심이야?”

재희는 갑작스러운 그의 제안에 당황했다. 루이는 손가락을 까딱이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재희는 그대로 루이의 곁으로 다가가 앉아 있는 그를 내려다봤다.

루이는 어서 자신의 무릎 위에 앉으라는 듯 자신의 허벅지를 툭툭 두어 번 두드렸다. 하지만 재희는 어이없는 그의 요구에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형은 아직도 내가 다섯 살 난 꼬마로 보여? 나 형보다 키도 한 뼘은 더 큰 거 알지?”

“그래서? 이젠 내 무릎에 못 앉겠다는 거야? 그래 봤자 다섯 살이나 어린 꼬맹이 주제에?”

루이가 어서 앉으라는 듯 그의 팔을 잡아 내리며 말했다. 재희는 피식 웃으며 마지못해 그의 다리에 살짝 걸터앉았다.

“형을 누가 말려. 진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예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재희가 귀여운지, 루이가 그의 까만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잊지 마. 넌 내 거야. 내 동생이라고. 아무한테도 안 줄 거니까 아무한테나 그렇게 웃어주지 마.”

어렸을 때부터 보였던 그의 이런 집착은 사실 재희에겐 익숙했다. 그랬기에 재희 또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형을 떠나는 일은 없을 거야. 영원히.”

“그러니까 같이 가자. 한국에.”

“알았어. 그러자.”

자신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루이의 손길이 기분 좋은지 재희도 그의 어깨를 다정히 두드려주며 말했다.

한국이라.

루이는 이번에야말로 한윤결 그를 완벽히 제 것으로 갖고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말도 안 되는 정략결혼이라는 걸림돌도, 눈엣가시처럼 그의 곁에 들러붙어 있던 강혜원이라는 녀석도 제 눈에서 치워 버리고만 싶었다.

이런 루이의 계략을 알 리 없는 재희는 오랜만에 혜원을 만날 생각으로 들떠 있었다. 방으로 돌아온 재희는 침대에 누워 아까 루이가 한 말을 떠올렸다. 혜원을 좋아하냐고 묻는 그의 질문에 말도 안 된다고 버럭 소리는 질렀지만 사실 마음은 복잡했다.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건 또 아니었다. 사실 혜원은 특별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눈이 가는 아이였고, 이렇게 떨어져 있으니 더욱 생각나는 녀석. 이런 게 좋아하는 감정이 맞는다면, 자신은 혜원을 좋아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희 형! 오늘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 우리 다음에 꼭 한국에서 만나자. 꼭이다!’

다시 만나자는 약속. 혜원과의 운명 같은 두 번째 만남을 준비하는 재희의 입가에도 어느새 기대에 찬 흐뭇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

혜윤과 필립이 미국으로 돌아간 후 혜원의 외로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늘 가족에게 둘러싸여 귀여운 막내로서 사랑을 받으며 자라온 혜원에게 감추고 숨겨야 할 것이 많은 이 비밀 결혼은 그에겐 너무도 힘든 생활이었다.

아무리 윤결이 최선을 다해 챙겨준다 해도 이렇게 한 번씩 쓸쓸함이 밀려올 때면 혜원은 하루 종일 우울해했고, 때로는 혼자 몰래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그랬기에 이번 혜윤과 필립의 방문은 외로웠던 혜원에게 너무도 큰 행복을 선물해 주었고, 그만큼 그들의 빈자리는 클 수밖에 없었다.

“혜원아, 형 회사 갔다 올게.”

“응….”

“아침은 차려놨고 데워 먹기만 하면 돼. 점심이랑 저녁은 형이 시간 맞춰서 배달시킬 테니까 거르지 말고 꼭 챙겨 먹고.”

“응….”

“약도 여기 두고 갈 테니까 밥 먹고 꼭 챙겨 먹어. 알았지? 형이 이따 전화해서 확인할 거야.”

“알았어. 빨리 출근이나 해. 이러다 지각하겠다.”

혜원은 갈 생각을 안 하고 자꾸만 머뭇거리는 윤결을 향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윤결은 알았다는 듯 눈웃음을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아 다시 이불 속으로 넣어주었다.

또다시 졸음이 밀려오는지 혜원의 눈꺼풀이 가물거렸다. 윤결은 천천히 손을 올려 그의 눈을 덮어 주었다. 혜원은 그제야 편안히 눈을 감으며 점점 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파르르 떨리는 혜원의 긴 속눈썹이 제 손바닥에 닿자 윤결은 열에 들떠 뜨거운 그의 이마에 다정한 입맞춤을 해주었다.

예전 같으면 버선발로 뛰어나와 윤결을 배웅했을 혜원이었지만, 얼마 전부터 시름시름 앓던 혜원은 결국 몸살이 심하게 오고 말았다. 윤결은 아픈 그를 혼자 두고 가고 싶진 않았지만, 오전에 잡혀 있는 간부 회의 때문에 더는 지체할 수 없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아침부터 혜원의 걱정으로 윤결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그가 도착함과 동시에 사무실에 퍼지는 무시무시한 기운에 직원들도 모두 그의 눈치를 보며 회의를 준비했다.

재현 또한 어딘가 모르게 싸늘한 윤결의 모습에 오늘 하루 그를 피해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할 만큼 누가 봐도 지금 윤결의 얼굴은 최악이었다.

결국 회의 내내 도무지 집중하지 못하던 윤결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사장인 자신의 아버지에게 양해를 구하며 먼저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한 번도 이렇게 회사 일을 내팽개친 적 없던 윤결의 허둥대는 모습에 당황한 한 사장의 얼굴이 어둡게 굳어졌다. 그는 윤결이 나간 회의장 문을 빤히 노려보며 더 이상 의미 없는 회의를 중단시켰다.

한 사장마저 회의장을 떠나자 팽팽했던 긴장감 사이로 불안해 보이는 직원들의 술렁임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런 아슬아슬한 상황이 재밌다는 듯 묘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정현이 동생 재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뭔가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 같지 않아? 방금 외삼촌 아니 한 사장님 표정 장난 아니시던데. 한윤결 괜찮을까 몰라.”

“형은 지금 이 상황이 웃겨?”

아직도 철없이 윤결을 질투하며 강 건너 불구경하듯 빈정거리는 정현의 모습에 재현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럼 웃기지 넌 안 웃겨? 오늘 회의가 얼마나 중요한 회의였는데. 외삼촌까지 참석한 간부 회의라고. 한윤결 저거 오늘 실수한 거야. 후계자는 무슨. 공과 사도 구별 못 하고 회의 도중에 건방지게 뛰어나간 놈이.”

“아, 형 좀!”

오래전부터 윤결의 후계자 선언에 불만을 품고 있던 정현의 삐딱한 말에 참지 못한 재현이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너도 잘 생각해. 어머니 말씀대로 저 한윤결 밀어내고 후계자가 될 생각을 하라고. 병신처럼 저 새끼 옆에서 비위나 맞추지 말고. 그런다고 한윤결이 너를 거들떠보기나 할 것 같아?”

“대체 누가 누구 비위를 맞춘다는 거야? 난 그저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야.”

“네 일? 어이 김재현 과장님. 겨우 과장 자리하나 얻었다고 설마 거기에 만족하는 거야?”

“됐다. 형이랑 무슨 말을 더해. 갈게.”

순간 재현마저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화가 치민 정현이 그를 거칠게 돌려세워 멱살을 쥐어 잡으며 말했다.

“똑똑히 들어. 난, 한윤결을 밟고 올라갈 거야. 그리고 거기에 네가 걸림돌이 된다면, 난 주저 없이 너도 치워 버릴 거야. 그러니까, 내가 동생이라고 봐줄 때 가만히 있어. 괜히 지금처럼 내 성질 돋우지 말고.”

어려서부터 쌓인 무서운 열등감. 정현은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말없이 자신을 노려보기만 하는 재현의 모습에 정현은 천천히 그를 놓아주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앞으로 잘하라는 듯 재현의 뺨을 툭툭 두드렸다. 점점 더 도를 넘는 정현의 거친 행동에 재현은 차갑게 그의 손을 쳐내며 회의실을 나섰다.

**

느지막이 잠에서 깬 혜원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향했다. 몸에서 나는 열기에 갈증이 난 듯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던 혜원은 출근하기 전 윤결이 차려둔 음식을 발견했다.

언제 만들었는지 먹음직스러운 죽과 정갈한 반찬이 놓인 식탁엔 작은 메모도 함께 있었다.

[혜원아, 아파도 죽이랑 약은 꼭 챙겨 먹어. 형 일찍 올게. 사랑한다.]

코끝이 찡할 정도로 감동적인 메모에 혜원은 웃음이 났다. 왠지 안 먹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에 사실 별로 식욕은 없었지만, 혜원은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한 입 두 입 떠먹은 죽은 식었음에도 굉장히 맛있었다. 하지만 역시 입맛이 없었던 혜원은 반도 다 먹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결까지 출근하고 나니 더욱 쓸쓸해 보이는 집. 혜원은 몸을 부르르 떨며 담요를 찾아 어깨에 걸쳤다. 따끈한 우유를 데워 마시며 소파에 앉은 혜원은 휴대폰을 켰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단연 필립이 보낸 사진들과 이메일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혜윤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듯, 그가 보내오는 사진들엔 늘 웃음이 가득했다.

아쉬움을 뒤로 하며 혜원이 휴대폰을 끄려던 순간, 메시지 도착 알림음이 들리더니 이메일이 하나 도착했다. 윤결은 혹시 또 필립인가 하는 마음에 재빨리 이메일을 확인했다. 하지만 보내온 사람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어? 재희 형?”

가끔 연락을 주고받긴 했지만, 한동안 뜸했던 그의 연락에 혜원은 들뜬 마음으로 이메일을 읽어내려갔다.

“우와!!! 진짜? 진짜, 진짜!?”

메일 내용을 확인한 혜원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가 한국으로 자신을 보러 온다는 말에 혜원은 날아갈 것같이 기뻤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혜원이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며 재빨리 그에게 답문을 보냈다. 빨리 오라는 말과 보고 싶다는 말을 보내고는 다시 소파에 벌렁 누워 히죽히죽 웃음을 짓기 시작한 혜원. 그는 거의 반년 만에 보는 재희가 너무도 기다려졌다.

한편 혜원이 보낸 답장을 확인한 재희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저 빨리 오라고, 보고 싶다고 한 줄 써서 보낸 그의 답장이었지만, 마치 대단한 사랑 고백이라도 들은 듯 재희의 심장이 빠르게 뛰어댔다.

그 녀석 특유의 귀여운 얼굴로 자신을 반겨줄 모습을 상상하니, 당장 내일이라도 한국으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마저 생겼다. 재희는 어느 날 뜬금없이 날아든 이 작고 귀여운 녀석이 이렇게 자신의 가슴에 깊게 파고들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그리고 그날 자신이 혜원을 발견한 건 어쩌면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기다려 혜원아. 나도 너무너무 보고 싶다.”

앞으로 일주일. 재희에겐 길고 긴 기다림의 시간임과 동시에 설레는 시간이기도 했다. 재희는 오랜만에 느껴 보는 심장이 간질간질한 느낌에 웃음이 났다. 하루빨리 혜원에게 가고 싶은 마음. 재희 또한 이번 한국행이 너무도 기대됐다.

**

오랜만에 혜원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 감기몸살 때문에 머리가 어지럽고 몸이 으슬으슬 떨리긴 했으나, 좀 있으면 만날 재희를 생각하니 이렇게 골골대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원은 재빨리 약을 챙겨 먹고는 다시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잘 먹고 잘 자야 빨리 낫는다는 의사의 말이 떠올랐는지, 혜원은 눈을 꾹 눌러 감으며 잠을 청했다.

다행히 약에 수면제 효능이 있어선지, 혜원은 눕자마자 또다시 빠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아침에 보였던 우울했던 얼굴이 아닌 어딘가 모르게 밝아진, 언뜻 미소까지 엿보이는 귀여운 얼굴로 잠이 들었다.

한편 회의장을 박차고 나올 만큼 혜원에 대한 걱정으로 초조해하던 윤결은 결국 출근한 지 반나절도 안 돼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역시 아픈 녀석을 혼자 두는 건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혹시라도 자고 있는 그가 깰까,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윤결은 먼저 부엌으로 들어가 그가 아침을 먹었는지부터 살폈다. 그래도 반쯤 비워진 죽 그릇에 윤결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발길을 돌려 혜원의 방으로 향했다. 기특하게도 아침을 잘 챙겨 먹었다는 생각에 윤결은 한결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방 안으로 들어서니 역시 몸을 동그랗게 만 채 윤결의 베개를 안고 자는 혜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잘 때면 꼭 무언가 안고 자는 귀여운 습관을 가진 혜원은 윤결과 함께 잘 때면 윤결의 품에 꼭 안긴 채 잠을 잤고, 그가 없을 땐 이렇게 그의 베개를 안고 잠을 자곤 했다.

윤결은 그의 팔에 안긴 베개를 질투라도 하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겉옷과 답답한 넥타이를 살며시 풀어 침대 옆 탁자에 올려놓은 윤결은 조심스럽게 혜원의 곁에 몸을 뉘었다.

“으응….”

누군가 자신의 몸을 끌어안는 인기척에 혜원은 귀여운 소리를 내며 몸을 더욱 둥글게 말았다. 윤결은 살며시 혜원의 품에 있던 베개를 뺏으며 그의 머릿밑으로 자신의 팔을 집어넣었다. 잠시 불편한 듯 몸을 뒤척이던 혜원은 이내 다시 평온한 얼굴로 윤결의 품에 바짝 안겨들었다.

혜원의 뜨거운 숨결이 가슴에 와닿자, 윤결은 천천히 손을 뻗어 혜원의 상의 속으로 집어넣으며 그의 부드럽고 따뜻한 가슴을 어루만졌다.

아직 열이 다 내리지 않아 혜원의 가슴은 후끈거렸다. 윤결은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이며 혜원의 작고 귀여운 유두를 쓸어내렸다. 낯선 이의 손길에 혜원의 앙증맞은 유두가 꼿꼿이 몸을 세우며 반응했다.

윤결은 잠결에도 착실히 반응하는 모습이 귀여운지 이번엔 조금 더 과감히 손을 움직였다. 솟아오른 유두를 살짝 잡았다 놓으며 장난을 치기 시작한 윤결. 그럼에도 아직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혜원이 조금은 야속하다는 듯, 윤결은 자신의 다리를 그의 허벅지 사이에 밀어 넣었다.

“흐응….”

이번엔 혜원도 잘게 몸을 떨며 몸을 잔뜩 움츠렸다. 윤결의 허벅지에 닿은 혜원의 앙증맞은 성기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꼴에 남자라고 조금만 자극을 줘도 금세 반응하는 혜원의 예민한 모습에 윤결은 웃음이 났다.

하지만 윤결은 아픈 녀석을 괴롭힐 생각은 없었다. 아쉽긴 했으나, 더 이상 그를 자극했다간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윤결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다리를 빼내며 그의 엉덩이를 토닥여주었다. 먹고 싶은 건 아껴뒀다가 맛있게 익었을 때 먹는 것이 제맛이기에, 윤결은 그가 다 나을 때까지 기다려주기로 했다.

윤결은 그래도 아침에 나갈 때보다는 편안해진 얼굴로 잠든 혜원을 보니 조금은 안심이 되는 듯했다. 세상에서 혜원이 아픈 것만큼 윤결에게 무서운 건 없었다.

“제발 형 걱정 좀 시키지 마 강혜원.”

윤결은 그의 이마에 자신의 머리를 쿵 내리박으며 속삭였다. 뜨거운 혜원의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했지만, 윤결은 그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혜원을 꽉 끌어안은 윤결의 모습은 마치 대형견이 제 새끼를 품은 모습과도 같이 애틋해 보였다.

둘만의 행복한 시간.

윤결에게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은 시간이었다.

**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혜원은 지금쯤 회사에 있어야 할 윤결이 자신의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리 봐도 아직 저녁은 안 된 것 같은데…. 혜원은 자신을 꽉 안고 있는 윤결의 손을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 윤결의 안쓰러운 모습에 혜원은 조심스럽게 손을 올려 그의 오뚝한 콧날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이렇게 자고 있으니까 조금 귀여운 거 같기도 하고.”

혜원은 무릎을 세워 살며시 제 얼굴을 무릎 사이에 내려놓으며 잠든 윤결의 얼굴을 감상했다.

너무도 편안히 자는 모습에 장난기가 발동한 혜원이 그의 코를 살짝 잡아당겼다. 얼마 안 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윤결이 심기 불편한 눈으로 혜원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감히 겁도 없이 내 코에 손을 댔겠다!”

“어? 깨, 깨우려던 건 아닌데….”

순간 깜짝 놀라 당황하는 혜원을 향해 몸을 벌떡 일으킨 윤결이 그를 침대 위로 밀어 넘어트리며 말했다.

“잠자는 형을 깨웠으면 그만한 벌은 받아야겠지?”

“버, 벌?”

순식간에 다시 침대 위에 눕혀진 혜원이 바들바들 떨리는 눈으로 윤결을 올려다봤다. 분명 자신이 그의 코를 잡은 건 사실이었지만, 그게 이렇게 윤결을 화나게 한 일인가 싶어 갑자기 서러움이 밀려왔다. 아직 다 낫지 않은 몸에선 다시 열이 피어올랐고, 혜원은 겁에 질린 나머지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히끕…. 미안. 형. 히끕…. 잘못했어.”

어느새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 만큼 겁먹은 혜원의 모습에 윤결은 아차 싶어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어깨까지 들썩이며 흐느끼는 혜원의 울음소리가 점점 더 크게 새어 나왔다.

사실 윤결은 혜원이 일어나기 전부터 깨어있었고,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 궁금해서 자는 척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열에 들뜬 혜원의 얼굴이 점점 빨갛게 변해가자, 윤결은 서둘러 그를 품에 안으며 거실로 나왔다.

“내가 잘못했어. 히끕…. 내려줘 응? 내가 깨워서 화 많이 났어? 미안해.”

윤결이 무서운 얼굴로 말도 없이 거실로 향하자 불안해진 혜원이 버둥거리며 말했다.

“얌전히 있어. 형 화난 거 아니야.”

마치 어린아이 달래듯, 혜원의 등을 살살 어루만지는 윤결의 다정한 손길에 혜원은 얌전히 그의 어깨에 얼굴을 내려놓았다.

거실로 나온 윤결은 조심스럽게 혜원을 소파 위에 내려놓은 뒤, 체온계를 찾아 그의 귀에 살며시 집어넣었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38.9라는 숫자가 찍혔다.

윤결은 다시금 입술을 꽉 깨물며 체온계를 집어넣었다. 아침보다는 나아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약을 먹어도 떨어지지 않는 열에 윤결은 또다시 걱정이 밀려왔다. 다시 병원에라도 데리고 가고 싶었으나, 병원이라면 칠색 팔색을 하는 혜원 때문에 그것 또한 쉽지 않아 보였다.

“혜원아, 점심 먹고 약 한 번 더 먹어보고, 그래도 열이 안 내려가면 형이랑 병원 가자. 응?”

“벼, 병원? 싫어! 이제 병원은 안 갈 거야. 약 잘 먹고 잘 자면 된다고 했잖아. 나 약도 잘 먹었고, 이제 진짜 나아지고 있다니까? 응? 제발, 형!”

역시 예상했던 것처럼 혜원은 소파 뒤로 몸을 바짝 밀어붙이며 경계의 눈초리로 윤결을 향해 소리쳤다. 윤결은 답답함에 속이 타들어 갔다.

갑자기 몸살이 난 혜원의 건강을 걱정한 윤결이 가기 싫다고 반항하던 혜원을 억지로 병원에 데리고 간 것이 문제였다. 건강 검진 겸 이왕 병원에 온 김에 제대로 검사를 받자며 오만 검사를 다 받느라 겁 많은 혜원의 가느다란 팔뚝에 수차례 바늘이 들어갔었다.

그럴 때마다 혜원은 검사받기 싫다며 눈물로 호소를 했었고, 겨우겨우 그를 달래 검사를 마친 윤결도 온몸에 힘이 쫙 빠질 정도로 애를 먹었었다.

결국, 더 이상 이 녀석을 울려봤자 좋을 것 없다는 판단이 선 윤결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형이 점심 준비할 동안 얌전히 누워있어. 점심 먹고 약 먹자. 알았지?”

“응. 아 맞다 그런데 형 있잖아, 다음 주에….”

그제야 한층 밝아진 혜원이 잠시 잊고 있던 재희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려던 순간, 윤결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윤결의 얼굴이 어둡게 굳어지더니 그는 이내 혜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전화를 받았다.

“네. 아버지.”

‘아버지?’

놀란 혜원이 번쩍 고개를 들어 윤결을 올려다봤다. 윤결의 어두워진 얼굴이 걱정된 혜원이 조심스럽게 그의 옷깃을 잡아 오자, 윤결은 괜찮다는 듯 작게 미소를 지어주며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혜원은 걱정을 떨칠 수가 없었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분명 회사에 있어야 할 시간에 그가 이렇게 버젓이 집에 있는 것도, 요 며칠 퇴근 시간이 되기도 전에 그가 집으로 돌아온 것도 모두 다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자 혜원은 미안함이 폭풍처럼 몰려왔다.

혜원은 조심스럽게 윤결의 방 앞에 귀를 가져다 대며 그의 통화를 엿들었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사정이 있었습니다.”

[무슨 사정! 오늘 내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기나 해? 얼마나 중요한 회의였는데! 특히 네 상무 승진이 거론되던 자리였는데 어떻게 네가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

“죄송합니다.”

[앞으로 절대 이런 일 없게 해. 잘하던 녀석이 대체 요즘 왜 이러는 거야! 회사가 얼마나 말이 많고 위험한 곳인지 내 누누이 말했거늘….]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똑바로 처신해. 내 아들이라고 봐주는 거 없어.]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끊어 버린 한 사장의 전화에 윤결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앞으로 이런 일 없을 거라 말은 했지만, 또다시 혜원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과연 자신이 냉정히 이 말을 지킬 수 있을지 윤결은 자신이 서질 않았다.

윤결이 잠시 방에서 머리를 식히며 문을 열고 나옴과 동시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혜원이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아얏.”

미처 그가 나오는 것을 피하지 못한 혜원은 제 머리를 감싸 쥐며 울상을 지었다. 아니 방문에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던 건지, 너무도 세게 머리를 부딪친 혜원은 바닥에서 일어날 생각도 못 한 채 널브러져 있었다.

“혜, 혜원아. 너 뭐야? 갑자기 왜 이래?”

깜짝 놀란 윤결이 재빨리 혜원의 곁으로 달려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눈물까지 찔끔 흘린 혜원은 차마 그의 방문 앞에서 엿듣다 이렇게 됐다는 걸 들킬 수는 없어 원망스러운 눈망울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배, 배고파서…. 밥 언제 먹냐고 물어보려고….”

“나 참. 강혜원 너는 진짜!”

하여튼 사고 치는 방법도 가지가지라며 짧게 한숨을 내쉰 윤결이 서둘러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배가 고파서 달려왔다는 혜원의 말에 윤결은 그저 웃어줄 수밖에 없었다.

윤결이 점심을 준비하러 다시 부엌으로 들어간 사이 혜원은 소파에 앉아 슬금슬금 그의 눈치를 살폈다. 분명 아까 아버님과의 통화에서 그가 많이 혼난 것 같아 계속 신경이 쓰였다.

혜원은 아무래도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조금이나마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에 윤결 몰래 핸드폰을 챙겨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님]

한 번도 이 번호로 먼저 전화를 걸 일 따위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전화하려고 마음을 먹으니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혜원은 심호흡을 몇 번 내쉰 다음 천천히 저장된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울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사장이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이게 누구야? 우리 귀여운 혜윤이 아니야? 어쩐 일로 전화를 다 했을까?]

혜윤이라면 껌벅 죽는 한 사장은 예기치 않았던 귀여운 며느리의 전화가 반가워 한껏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리 집에 오라고 해도 아직 신혼이라 그런지 이런저런 이유로 자주 보지 못했기에, 오랜만에 받아보는 혜윤의 전화에 한 사장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 아버님. 안녕하셨어요?”

서먹서먹한 마음에 혜원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우리 혜윤이 목소리가 왜 이래? 어디 아파?]

어딘가 모르게 잠긴 듯한 혜원의 목소리에 한 사장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혹시라도 아픈 것이라면 제 아들을 아주 혼쭐을 내기라고 하겠다는 듯, 한 사장의 목소리에서는 초조함마저 느껴졌다.

“아, 아니에요. 감기 때문에…. 조금…. 콜록콜록.”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병원은 갔어? 아니 윤결이 이 녀석은 대체 애를 어떻게 보고 있는 거야? 옆에 윤결이 있니? 있으면 좀 바꿔봐 혜윤아.]

“아니에요! 병원도 다녀왔고 윤결 혀, 아니 윤결 오빠가 간호도 해주고, 죽도 끓여주고 옆에서 많이 챙겨줘요.”

혜원은 혹시나 자신이 전화해서 괜히 윤결이 더 혼나기라도 할까 봐 재차 그를 감싸며 말했다.

[그, 그래?]

한 사장은 내심 의아해하며 의심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리 제 아들이라지만, 누군가를 위해 직접 무언가를 만들거나 남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성격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기에, 혜윤의 말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죄송해요. 아버님!”

[뭐가? 우리 혜윤이가 뭐가 죄송하다는 거지? 나는 잘 모르겠는데?]

한 사장은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픈 와중에도 자신에게 전화를 한 걸 보면 무언가 중요한 일일 거라는 생각에 한 사장은 그가 편히 이야기하도록 천천히 기다려주었다.

“사실은요. 오늘 윤결… 오, 오빠가 일찍 퇴근하고 집에 온 거 다 저 때문이에요. 제가 아픈 바람에 걱정이 돼서 그런 거예요. 죄송해요. 다신 그런 일 없게 제가 잘할게요. 윤결 오빠는 아무 잘못 없어요. 진짜예요. 집에서라도 회사 일하라고 잘 말할게요. 그러니까 아버님 윤결 오빠한테 화내지 마세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콜록콜록.”

한 사장은 그제야 회의 시작부터 넋을 잃은 듯 어딘가 초조해 보였던 윤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사무실이 떠나가라 함박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제 아들이 이제야 임자를 제대로 만났다는 생각과 함께, 혜윤 때문에 그렇게 불안해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니 왠지 짠한 마음까지 들었다. 뭐 이런 이유라면 조퇴가 아니라 휴가까지 내줄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한 사장은 인간미 없던 제 아들의 변화된 모습에 내심 흐뭇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아무렴 내가 우리 혜윤이 간호하러 간 녀석을 혼낼까 봐? 우리 혜윤이 남편 걱정이 아주 대단한데?]

“네?? 나, 남편…. 걱정…. 아, 아…. 저 그게….”

[나는 전혀 화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말고 건강부터 챙겨. 절대 아프면 안 된다 혜윤아. 알았지?]

“네….”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 모를 정도로 머리가 새하얘질 만큼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홍당무가 된 자신의 두 뺨을 짝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내리친 혜원은 민망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남편, 남편이라니!’

하지만 한편으로는 윤결에 대한 오해가 조금은 풀린 것 같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작게나마 그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에 혜원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한편, 늦은 점심 준비에 한창이던 윤결은 한 사장으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 뜻밖의 휴가를 얻게 되자, 당황한 얼굴로 혜원의 방을 쳐다봤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미리 말을 할 것이지! 혜윤이한테 잘해. 너 같은 녀석을 그 아이만큼 걱정해 주고 생각해 주는 아이도 없을 거다. 혜윤이, 보기보다 훨씬 더 귀여운 아이더구나. 장가 잘 간 줄 알아! 아무튼, 혜윤이 다 나을 때까지 휴가 써.]

도대체 이 녀석 또 무슨 일을 벌인 거야?! 느닷없이 휴가를 쓰라는 한 사장의 전화에 어안이 벙벙해 있는 윤결을 향해 혜원이 불쑥 방에서 뛰어나오며 소리쳤다.

“윤결 형, 점심 다 됐어? 나 배고파.”

귀여운 웃음을 입가에 띤 채 달려 나오는 혜원. 윤결은 어디서 저런 복덩이가 굴러들어왔나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눈으로 팔을 활짝 벌려 그를 반기며 말했다.

“아 왜? 아주 먹여 달라고 하지? 준비 다 됐어. 이리와 밥 먹자.”

동시에 자신의 품에 쏙 안겨들 만큼 작고 여린 혜원의 몸을 보며 윤결은 심각한 얼굴로 다짐했다.

‘휴가 끝나기 전에 무조건 내가 너 살부터 빵빵하게 찌우게 하고 만다!’

역시 윤결의 요리 솜씨는 최고였다. 입맛이 없던 혜원의 입에도 딱 알맞게 음식을 차려낸 윤결은 너무도 맛있게 잘 먹는 혜원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뒤 윤결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 나온 혜원은 할 말이 있다는 얼굴로 윤결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왜 또? 할 말 있으면 빨리해. 무슨 미어캣도 아니고 뭘 그리 목을 빼고 내 눈치를 봐?”

“아. 형. 있잖아…. 그게…. 다음 주에 재희 형이 한국에 온대!”

“누구?”

윤결은 어디서 들어본 듯하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는 생소한 이름에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

“왜 있잖아, 프랑스에서 나 도와줬던….”

“아! 혹시 그 루이 동생이라던?”

윤결은 그제야 생각이 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루이를 떠올리면 아직은 조금 서먹하긴 했으나, 다 지난 일이었고 원나잇이었을 뿐 지금은 별다른 감정이 없었기에 윤결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무튼, 그래서 나 다음 주부터는 재희 형 가이드 해줘야 해서 미리 말해주는 거야. 나 찾지 마요.”

“뭐? 누구한테 뭘 해줘?”

말이 가이드지, 이건 뭐 꼭 둘이 데이트라도 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혜원의 당당한 발언에 윤결은 또 두통이 도지려 했다.

“아니, 그 자식은 혼자 온대?”

“형이랑 같이 온다는 것 같던데….”

“루이랑 같이?”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윤결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혜원을 노려봤다.

다시 만날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루이가 한국으로 온다는 말에 윤결은 바짝 긴장했다. 재희라면 모를까, 루이까지 한국으로 온다는 것이 왠지 모르게 꺼림칙했다.

설마 자신을 만나러 오는 건 아닐 거란 생각에 윤결은 싱글벙글 웃고 있는 혜원을 잠시 물끄러미 쳐다봤다.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위험한 불장난 같았던 하룻밤의 실수.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에 뒤늦은 자책을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한없이 후회가 밀려왔다. 그리고 윤결은 본능적으로 혜원과 그들의 만남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원아, 너 그 재희인가 뭔가 하는 녀석, 꼭 만나야겠어?”

“응? 당연하지. 나 보러 한국에 오는 건데. 그때 파리에서 얼마나 나한테 잘해 줬는데. 내가 한국에 오면 무조건 가이드 해준다고 약속했단 말이야.”

“아니 빈말로 한국에 오라고 한다고 진짜 오는 미친놈이 어딨어?”

“뭐? 빈말? 미친놈? 나 빈말 아니었거든? 그리고, 재희 형이 왜 미친놈이야? 윤결 형 오늘 이상해.”

자꾸 심술궂은 말만 해대는 윤결이 못마땅한 혜원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또 혼자 토라져 있는 혜원을 보니 윤결은 이번에도 그에게 져줄 수밖에 없을 것 같은 기분에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제야 오붓한 둘만의 신혼생활을 지내나 했더니, 난데없이 등장한 불청객에 윤결의 마음은 착잡해졌다. 하지만 들이닥치는 만큼 방어력 또한 만만찮은 윤결이었기에 이번 또한 무사히 지나갈 것이라 생각하며 삐죽 튀어나온 혜원의 입술을 살살 꼬집으며 말했다.

“알았어. 대신 무조건 형한테 허락받고 가. 어딜 가는지 무얼 하는지. 연락하면 꼭 받고. 알았지?”

“응! 그건 걱정하지 마.”

그제야 마음이 풀린 혜원도 예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단순하리만큼 좋고 싫음이 얼굴에 확연히 나타나는 혜원의 순수함에 윤결은 그의 작고 귀여운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훗날 윤결은 오늘 이 허락을 땅을 치고 후회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

재희에게 한국은 모국이었지만 낯선 나라이기도 했다. 태어나자마자 입양을 갔고 얼마 안 돼 또다시 파양을 당했었다. 물론 그 후에 루이의 부모님을 만나 더없이 행복한 삶을 살았지만, 재희의 마음속에 그는 프랑스인도 그렇다고 한국인도 아닌, 그 어디에도 낄 수 없는 이방인일 뿐이었다.

낯선 나라에서의 첫걸음. 공항에 발을 내딛는 재희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이를 눈치 빠르게 알아차린 루이가 그의 어깨를 감싸 제 곁으로 바짝 끌어당기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약속했잖아. 절대 혼자 두지 않겠다고.”

“걱정은 무슨.”

여전히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루이의 걱정스러운 얼굴에 재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드디어 도착한 한국. 재희는 한시라도 빨리 혜원을 보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 기분 나쁜 우울함도 그를 다시 만나면 싹 다 날아갈 것만 같았다.

호텔에 도착해 짐을 풀고 난 루이는 먼저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재희는 침대에 누워 혜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몸이 피곤할 법도 했으나 그에겐 긴 여행의 피로보다도 혜원의 밝고 귀여운 목소리를 듣는 것이 먼저였다.

[여보세요? 재희 형? 도착한 거야?]

“응. 방금. 우리 혜원이 잘 지냈어?”

[당연하지. 형 오면 어디 어디 갈지 생각하느라 머리에 쥐 나는 줄 알았다고!]

“혜원이 머리에 쥐 나면 안 되는데?”

재희는 혜원의 모든 것이 귀엽다는 듯 미소가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다.

마침 샤워를 마치고 나온 루이가 침대에 누워 통화하는 재희를 발견하고는 그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재희는 왔냐며 루이에게 살짝 눈웃음을 지어준 뒤 계속 통화를 이어갔다.

“그럼 우리 내일 만나는 거로 하고 오늘은 푹 쉬어 혜원아.”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은 재희는 젖은 머리로 제 곁에 앉아 심드렁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루이에게 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또 머리 안 말리고 나왔지.”

“그 녀석이 그렇게 좋아?”

“어? 혜원이?”

“입이 아주 찢어지겠네.”

뭐가 또 그의 심기를 건드린 것인지 까칠한 루이의 반응에 재희가 그의 젖은 머리를 대신 말려주며 말했다.

“그래도 형만큼은 아니니까 기분 좀 풀지?”

“말로만.”

“정말이야.”

루이는 그에게 머리를 맡기며 눈을 질끈 감았다.

어려서부터 유독 재희에 대한 집착이 남달랐던 루이는 재희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들도, 재희가 관심을 가지는 것들도 경계했다.

그 무서운 질투는 사실 재희를 고립시킬 정도로 강한 집착이었지만, 아직까지 루이 외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재희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어느 정도 머리가 다 마르자 재희가 루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그를 불렀다.

“그래서 형은 정말 그 윤결이라는 남자를 다시 만나려고?”

“당연하지. 내가 말했잖아. 내 거라고.”

루이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재희의 뺨을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살면서 그가 이렇게 강한 소유욕을 보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당연히 재희였고, 두 번째는 너무도 황홀한 하룻밤을 함께 보냈던 남자, 한윤결이었다. 그랬기에 루이는 더욱 그를 놓치기 싫었고 모두 다 제 곁에 두고 말겠다는 무서운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오늘은 이만 자자 재희.”

루이는 그대로 재희의 침대에 벌러덩 누우며 말했다.

“형은 형 침대로 가서 자지?”

“오늘만 같이 자자. 피곤해.”

움직이기 귀찮은 듯 루이가 이불을 푹 뒤집어쓰며 침대 속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재희는 한 번씩 이렇게 어리광을 부리는 귀여운 루이의 모습에 웃음을 지으며 그의 옆에 누웠다. 어렸을 땐 물론이고 재희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 침대에서 잤던 루이의 이런 모습은 사실 재희에겐 낯선 모습도 아니었다.

재희는 잘 자라는 듯 루이의 가슴을 두드려 주며 졸린 눈을 감았다. 어느덧 재희가 깊이 잠에 빠져들자 루이는 살며시 눈을 떠 잠든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속삭였다.

“혜원이든 뭐든, 그렇게 좋아 죽겠다는 얼굴로 관심 두지 마.”

**

윤결은 아침부터 재희를 만날 생각에 들뜬 혜원을 보며 심란한 마음으로 출근을 했다. 마지못해 허락은 했지만 역시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특히 그 녀석이 다름 아닌 루이의 동생이라는 게 가장 많이 신경이 쓰였다. 그 순간, 심기 불편한 얼굴로 서류를 읽어내려가는 윤결의 휴대폰으로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안녕 윤? 나 루이야. 꽤 오랜만이지? 우리 좀 만날까?]

뜬금없는 루이의 문자에 당황한 윤결이 눈을 찌푸리며 문자가 온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윤결 씨? 급했나 봐? 이렇게 빨리 연락할 줄은 몰랐는데…. 나 보고 싶었어?]

“너 지금 어디야? 갑자기 한국엔 왜 온 거야? 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한 번에 하나씩만 물어봐. 우리 윤결 씨 숨넘어가겠네.]

예쁘게 웃으며 대답하는 루이의 목소리에 윤결은 짜증이 나는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물었다.

“한국엔 무슨 일이야?”

[뭐 당신한테 할 말도 있었고, 또 여긴 내 동생 고향이잖아? 이유를 찾자면 뭐 많지 않겠어?]

“나한테 대체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건데?”

[뭐 그건 만나서 얘기하고.]

“하아…. 어디서.”

윤결은 한 번은 그를 만나 이야기해야겠다는 생각에 입술을 질끈 깨물며 말했다.

[한국에도 분위기 좋은 바가 많다던데…. 당신이 추천해 줘. 내가 지내는 호텔 주소 줄 테니까 이따 여기로 데리러 와. 기다릴게.]

너무도 당당한 그의 요구에 윤결은 짜증이 밀려왔지만,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아 알겠다고 대답하며 전화를 끊었다.

이미 혜원에게 푹 빠져 있는 윤결로서는 루이의 방문이 전혀 반갑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에겐 지우고 싶은 과거일 뿐이었다.

** ㅈㅅ

오랜만에 재희를 만난 혜원은 너무도 반갑게 그를 맞이하며 기뻐했다. 처음 방문하는 한국이라 조금 어색한지 재희의 얼굴에선 살짝 긴장감이 엿보였다.

언제나 당당하고 활발했던 재희의 낯설어하는 모습이 생소한지 혜원은 그에게 이것저것 설명을 해주며 굳어있는 그를 풀어주려 노력했다. 프랑스에 있었을 때와는 달리 한결 편안해 보이고 즐거워 보이는 혜원을 보니 재희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한국에 왔으면 한국 음식부터 맛봐야 한다며 혜원은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찾아 놓은 숨은 맛집으로 재희를 데리고 갔다. 사람이 북적이는 걸 보니 잘 찾아온 것 같아 혜원은 뿌듯했다.

번호표를 받고 기다리는 동안 혜원은 혹시라도 재희가 배가 고플까 봐 힐끔힐끔 그의 얼굴을 살폈다. 생각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혜원은 조바심이 났다. 눈에 띄게 초조해하는 혜원의 모습에 재희는 그의 머리에 살며시 손을 얹으며 말했다.

“나 괜찮아. 혜원이가 배고픈 건가?”

“아, 아니? 나도 괜찮은데…. 여기 진짜 맛있나 봐. 헤헷!”

싫은 기색 없이 다정히 웃어주는 재희의 얼굴에 안심이 된 혜원이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리고는 기대가 가득 담긴 눈으로 다시 고개를 돌려 가게 안을 들여다봤다. 먹고 싶어 죽겠다는 혜원의 뜨거운 눈빛에 재희는 절로 웃음이 났다.

오래 기다렸던 만큼 음식은 훌륭했다. 끝도 없이 나오는 반찬들에 재희와 혜원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하나씩 다 맛보기도 바쁠 정도였다.

맛있게 양념이 된 불고기는 모두 재희의 앞으로 밀어 넣으며 혜원은 어서 먹어보라는 표정으로 그가 먹기만을 기다렸다. 그 모습이 마치 꼬리만 없을 뿐이지 칭찬을 받고 싶어하는 강아지처럼 보였다.

재희는 그의 기대에 서둘러 젓가락을 들어 고기를 한 점 먹으며 맛있다고 감탄을 쏟아냈다. 그제야 혜원도 음식을 조금씩 먹으며 고픈 배를 채웠다. 재희가 맛있게 먹는 모습에 혜원은 무슨 큰일이라도 해낸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비록 다 먹지는 못했지만, 배불리 점심을 먹고 나온 그들은 소화도 시킬 겸 근처 카페로 향했다.

“혜원아, 점심 진짜 맛있게 잘 먹었어. 그렇게 반찬이 많이 나오는 식당은 처음이야. 진짜 한국은 너무 신기한 곳인 것 같아.”

“다행이다. 형이 잘 먹어서 내가 다 뿌듯했어. 앞으로도 갈 곳 많으니까 기대해!”

“그래. 혜원이만 믿는다.”

테이블에 턱을 괴고 앉아 배시시 웃는 혜원의 얼굴에 재희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그의 뺨에 가져다 댔다.

함께 있으면 다른 일들은 까맣게 잊게 만드는 순진무구한 혜원의 매력에 재희는 한국에 온 것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오래오래 그와 함께 있고 싶은 작은 욕심에 재희는 이번 여행이 어쩌면 계획했던 것보다 조금 더 길어질 것 같단 기분 좋은 느낌까지 들었다.

따뜻한 라테와 아메리카노를 시킨 둘은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목이 말랐던 혜원이 거품 가득한 라테를 한 모금 마시자, 그의 입술 위로 하얀 우유 거품이 살짝 묻어났다. 또 한 번 재희의 손이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거품이 묻은 줄도 모르고 재잘거리는 혜원의 입술에 엄지를 가져다 대며 쓱 훑던 재희는 손가락에 묻은 거품을 제 입으로 가져갔다.

“어? 내 입술에 뭐 묻었어?”

갑작스러운 재희의 손길에 깜짝 놀란 혜원이 제 입술을 마구 비비며 물었다.

“거품. 얼마나 맛있나 먹어 봤는데. 역시 맛있네. 여태까지 먹어 본 거 중에 제일.”

“아. 그럼 형도 그거 말고 라테로 다시 시켜 줄까?”

민망한 듯 입술을 닦아대던 혜원이 식어가는 재희의 아메리카노를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아니. 그래 봤자 이 맛 안 나. 괜찮아. 마저 마셔 혜원아. 그보다 난 다음 코스가 너무 기대되는데?”

“어? 그래? 그, 그럼 나 긴장하는데. 이거 마시고 우리 경복궁이라고 옛날 임금님들이 살았던 궁 보러 가자. 거기 진짜 예쁘거든! 형한테 꼭 보여주고 싶었어.”

“경복궁?”

“응!”

“그래. 벌써부터 기대된다.”

무얼 해도 혜원과 함께라면 지루하지 않다는 생각에 재희는 한 입도 마시지 않은 자신의 아메리카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아무리 쓰고 차게 식은 이 아메리카노라도 혜원의 입술이 닿으면 왠지 굉장히 달고 맛있을 것 같다는 엉큼한 생각을 말이다.

카페를 나와 궁으로 향한 재희와 혜원은 역시 한복 대여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재희에게 멋진 추억을 선물해 주고 싶은 혜원은 머뭇거리는 그의 손을 잡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이왕이면 그에게 한복 체험도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둘이 나란히 가게에 들어서자, 예쁘장한 혜원의 모습에 그를 재희의 여자친구로 착각한 주인이 그들에게 각각 남녀 전통 혼례복을 추천해 주었다. 주인은 훈남 훈녀의 방문에 내심 기분이 좋았는지, 너무 잘 어울릴 것 같다며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해댔다.

혜원은 그래도 여자 한복을, 그것도 재희와 같이 혼례복을 입는 건 아닌 것 같아 거절하려 하자, 재희가 재빨리 한복들을 받아 챙기며 말했다.

“정말 너무 예쁘네요. 옷은 어디서 갈아입나요?”

“어? 재희 형. 이, 이거 입게?”

자신보다도 행여나 재희가 불편해할까 봐 거절하려 했던 건데, 그가 흔쾌히 입겠다고 하자 혜원이 당황한 듯 그의 팔을 살며시 잡으며 물었다.

“응. 뭐 어때? 이것도 기념인데, 재밌겠는걸?”

“그, 그래? 그럼 한번 입어 볼까?”

그의 말처럼 어차피 경복궁을 구경하는 동안 재미로 입는 건데 뭐 어떻겠냐는 생각에 혜원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혼례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재희와 혜원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다 멈추게 할 만큼 잘 어울렸다. 마치 서로 연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자연스러운 둘의 모습에 가게 주인은 흐뭇해하며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둘을 마주 보게 했다.

“어어어??”

얼떨결에 그에게 휴대폰을 넘겨주고 재희와 마주 본 채 사진까지 찍히자 혜원은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재희는 수줍어하는 혜원의 모습이 귀엽다는 듯 그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를 하며 말했다.

“얼굴 터지겠다 강혜원. 근데, 너 지금 굉장히 예뻐.”

“아, 혀, 형!!”

갑자기 말도 없이 이마에 키스를 해오는 재희의 돌발 행동에 깜짝 놀란 혜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뒷걸음질을 쳤다. 윤결 외에 키스를 받아본 게 처음인 혜원은 너무 놀라 심장이 쿵쿵 뛰어댔다.

“귀여운 혜원이. 놀랐어? 아직 애기네? 인사한 건데. 프랑스에선 가볍게 이런 식으로 반가움을 표하거든. 미리 말해주고 할걸. 많이 놀랐어?”

“아, 그래? 그래도 미리 말해주지. 나 완전 놀랐잖아.”

재희가 웃으며 재밌어하자 민망해진 혜원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하지만 뭐 인사법이라면 이 정도쯤은 이해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가게 주인에게 휴대폰을 다시 넘겨받은 혜원은 찍힌 사진들을 확인했다. 한 장 한 장 확인하던 혜원은 그래도 재미난 추억을 하나 더 만들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혜원은 찍은 사진들을 재희에게도 전송해 주며 들뜬 발걸음으로 가게를 나섰다.

넓디넓은 궁 안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둘은 그렇게 친구처럼, 연인처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궁을 누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어느덧 윤결과 약속한 통금시간이 다가오자 혜원이 아쉬운 얼굴로 재희를 쳐다보며 말했다.

“형, 나 7시까지는 집에 들어가야 해서 이제 슬슬 가봐야겠다.”

“정말? 이렇게 빨리? 저녁도 안 먹고?”

“응. 오늘은 일찍 들어간다고 약속해서 이만 헤어져야겠다.”

“그래? 아쉽네. 그럼 나 호텔까지만 같이 가줄래?”

혜원과 헤어지기 싫은 재희가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아 오며 부탁했다.

“그럴까? 맞다. 아직 서울 길도 잘 모르는데, 가다가 길 잃어서 호텔에 못 찾아가면 안 되니까 내가 호텔까지 데려다줄게! 가자.”

무언가 재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혜원이 당당히 앞장서 걸으며 말했다. 마침 재희가 머무는 호텔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았고, 그에게 제대로 된 대접을 하고 싶었던 혜원은 내심 재희의 이런 허물없는 부탁이 좋았다.

행여나 길이라도 잃을까 자신의 손을 꽉 잡고 걷는 혜원의 모습에 정작 재희는 계속해서 웃음이 났다. 설마 자신이 진짜로 길을 잃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그저 너무 순수하고 해맑은 혜원의 모습에 재희는 앞으로도 계속 길치인 척 속아 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도착한 호텔 앞. 어느새 주위는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금세 어두워지는 하늘에 재희는 슬슬 혜원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왠지 이 녀석은 한국에서도 길을 잃고 헤맬 것처럼 보였다.

“혜원아. 너 근데 진짜 혼자 돌아갈 수 있겠어? 어두운데….”

“응. 택시 타면 금방 가.”

“그래도. 내가 데려다줄까?”

“뭐래! 여기 한국이거든? 빨리 들어가. 형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

“그래도….”

“난 괜찮으니까 형이나 빨리 들어가세요!”

머뭇거리며 망설이는 재희의 등을 억지로 떠밀며 혜원이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쉬운 발걸음으로 멀어지는 재희를 보며 혜원도 슬슬 집에 갈 준비를 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6시 30분. 서둘러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에 혜원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려는 찰나, 그에게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혜원아. 형 오늘 일이 좀 많아서 늦을 것 같아. 먼저 집에 가서 저녁 먹고 있어. 최대한 빨리 갈게. 꼭 집으로 가. 확인할 거야.]

“뭐야. 이럴 거면서 왜 집에 일찍 오라고 한 거야. 칫…. 혼자 먹기 싫은데.”

갑작스러운 윤결의 야근 통보에 시무룩해진 혜원이 툴툴거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쉬운 마음에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혜원이 호텔을 나서려던 순간, 그는 호텔 안으로 들어오는 윤결을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윤결에게 달려가려던 혜원은 흠칫 발걸음을 멈추며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혜원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차마 멀어지는 윤결을 부를 수가 없었다.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이상하게 심장이 찌릿찌릿 아팠다.

**

루이의 전화에 이미 신경이 바짝 곤두선 윤결은 신경질적으로 시계만 쳐다봤다. 퇴근 시간이 다가올수록 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안 그래도 재희를 만나 신나게 놀고 있을 혜원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인데, 퇴근하고도 바로 집이 아닌 루이를 만나러 가야 한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다.

“이사님, 결재.”

“어? 어. 그래.”

윤결은 결재를 받으러 온 재현의 부름에 정신이 번쩍 든 듯 말없이 결재 서류를 확인했다. 하지만 뭐라고 쓰여 있는지 도통 머릿속에 들어오질 않았다. 대충 사인을 하고 서류를 건네는 윤결의 모습이 오늘따라 이상하다 생각한 재현이 그의 책상을 두어 번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형, 괜찮아? 무슨 일 있어?”

“아니야. 일은 무슨….”

“혜윤이는 잘 있지? 유학 준비로 바쁘다며. 그래도 혜윤이가 있을 땐 사무실 분위기가 살았는데, 없으니까 허전하네. 그나저나 형 대단해.”

“뭐가?”

안 그래도 심란해 죽겠는데 나가지 않고 자꾸만 자신의 속을 박박 긁는 재현을 쳐다보며 윤결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혜윤이 유학 말이야. 난 설마 형이 찬성할 줄은 몰랐거든. 나라면 절대 그렇게 귀여운 혜윤이 혼자 안 보내. 형이라면 나랑 같은 생각일 줄 알았는데, 의외여서.”

“야. 할 말 다 했으면 나가. 나 지금 너랑 노닥거릴 기분 아니야.”

“네네. 알겠습니다. 혜윤이한테 안부나 전해줘. 언제 한번 놀러 오라고.”

“가라고 좀!”

귀찮은 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그를 쫓아내다시피 한 윤결은 생각에 잠겼다.

재현의 말처럼 윤결은 혜원을 혼자 두는 것이 싫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혜원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생각에 그를 끌고 와 집에 가둬버리고 싶을 정도로 윤결의 질투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하지만, 우선은 눈앞에 나타난 루이를 먼저 처리해야 했기에 그는 깊게 한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차 키를 집어 들었다.

루이가 말한 호텔로 차를 몰고 가면서 윤결은 자신을 기다릴 혜원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무래도 루이와의 이야기가 일찍 끝날 것 같지 않아, 혜원에게 먼저 저녁을 먹으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굳이 누굴 왜 만나는지 일일이 다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윤결은 야근이라 대충 둘러댔다.

그는 호텔에 도착함과 동시에 루이에게 내려오라고 연락을 하며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루이는 이미 로비에서 그가 오기만을 기다린 듯 윤결이 들어옴과 동시에 그에게 달려갔다.

“잘 지냈어 윤?”

반갑게 달려들어 포옹을 하는 루이를 살며시 밀어낸 윤결이 귀찮다는 듯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말했다.

“여긴 한국이야. 이렇게 들러붙지 좀 말지?”

“와. 윤결 씨 원래 이렇게 차가운 사람이었어? 반가워서 인사한 거 가지고. 서운한데?”

“됐고. 우선 나가자. 나가서 얘기하자.”

“그래. 나가자.”

은근슬쩍 그의 팔짱을 끼는 루이를 짜증스럽게 내려다보던 윤결은 차라리 빨리 나가는 게 낫겠다 싶어 서둘러 그를 데리고 호텔 밖으로 나갔다.

안타깝게도 그는 이 모든 걸 혜원이 지켜봤다는 걸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고 이 둘의 사이를 완벽히 오해한 혜원은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떠나질 못했다.

**

혜원은 천천히 휴대폰을 꺼내 윤결이 보낸 문자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혜원아. 형 오늘 일이 좀 많아서 늦을 것 같아. 먼저 집에 가서 저녁 먹고 있어. 최대한 빨리 갈게. 꼭 집으로 가. 확인할 거야.]

일. 분명 일이 많아서 늦어진다고 했다. 설마 이것도 일의 연장이라는 건가? 도대체 뭐가 뭔지 똑바로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휴대폰 화면에 뚝뚝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에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 혜원이 말없이 눈물을 쓱 닦았다. 어느덧 호텔 로비 한복판에 서서 울고 있는 그를 향해 직원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다.

“저기, 괜찮으세요?”

“아…. 네.”

혜원은 자신이 아직 호텔 안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서둘러 발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혹시 자신이 잘못 봤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혜원은 무작정 윤결의 사무실로 향했다. 하지만 가는 내내 혜원의 불안함은 사라지질 않았다.

혹시라도 그곳에 윤결이 없다면? 막상 그가 회사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혜원은 다시 발걸음을 멈췄다. 알고 싶지 않았고 두 번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분명 일이라고 했으니, 그 남자를 만나는 것도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혜원은 애써 눈물을 참으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온 혜원은 불조차 켜지 않은 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짹깍짹깍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조용한 거실에 울려 퍼졌다. 혜원은 무릎을 세워 얌전히 끌어안았다. 분명 저녁을 먹지 않았음에도 배조차 고프지 않았다.

순간 휴대폰의 진동음과 함께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혜원아. 또 편의점에서 이상한 거 사 먹지 말고 밥 먹어. 저녁 배달시켰으니까 먼저 먹고 있어. 졸리면 먼저 자고. 이따 집에서 보자.]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은 다정함이 묻어나는 윤결의 문자에 혜원은 또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하지만 혜원은 다시 한번 윤결을 믿어 보기로 했다. 분명 일이라고 했으니까 그는 열심히 일하는 중일 거라 스스로 주문을 걸며 애써 아까 본 장면을 머릿속에서 떨쳐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리며 배달 음식이 도착했다. 혜원은 움직이고 싶지 않았지만 윤결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우선 음식을 가지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음식이 담긴 봉투를 보아하니 혜원이 좋아하는 초밥을 시킨 듯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혜원은 초밥에 손이 가지 않았다. 포장도 뜯지 않은 초밥을 그대로 테이블에 올려둔 채 혜원은 다시 소파에 몸을 뉘었다.

그저 윤결이 집에 없을 뿐인데, 텅 빈 집은 너무도 허전했고 혜원의 마음은 그보다 더 공허했다. 외로움. 혼자라는 두려움이 그를 집어삼킨 듯 눈을 감고 누운 혜원의 눈가에 작은 물기가 번져갔다.

**

윤결은 루이와 함께 호텔 근처에 있는 조용한 와인바로 향했다.

너무 시끄럽지도 또 어둡지도 않은 조용하고 분위기 좋은 바는 루이의 마음에도 쏙 들어 보였다. 하지만 이 시간이 마냥 불편하기만 한 윤결이 먼저 자리에 앉아 팔짱을 낀 채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대체 나한테 할 말이 뭔데? 아니, 애당초 한국에 온 이유가 뭐야?”

한눈에 봐도 자신을 전혀 반기지 않는 윤결의 날 선 질문에 루이는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해버렸다. 그만큼 루이의 신경 또한 날카롭게 변해갔다.

“연락한다며. 어떻게 한국으로 돌아간 지 반년이 넘도록 연락 한번 안 해?”

“하아…. 고작 그거 때문에 이렇게 막무가내로 한국으로 온 거야?”

“고작? 당신에겐 그날 밤이, 내가 겨우 고작 하룻밤이었다는 거야?”

생각했던 것보다 더 차갑게 자신을 대하는 윤결의 모습에 루이는 슬슬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렇게 다정하게 안아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차갑게 돌변한 그의 모습에 배신감이 밀려왔다.

“그날은…. 미안. 내가 실수했어. 다신 너랑 그런 일 없을 거야.”

울 것 같이 상처받은 얼굴로 쏘아붙이는 루이의 물음에 윤결은 그날 일을 후회하기라도 하는 듯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하지만 실수라는 그의 말에 루이의 인내심은 끝내 폭발하고 말았다. 그는 사납게 윤결을 노려보며 물었다.

“왜? 갑자기 왜 그렇게 조신해진 건데?”

“말했지만 난 결혼했고, 이제 이런 취미 없어.”

“게이 주제에 결혼? 정략결혼이라며. 여자랑은 안 되잖아 당신!”

와인잔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릴 만큼 루이는 흥분상태였다. 어디서 감히 결혼을 지껄이는지 이유 같지도 않은 윤결의 변명에 루이는 이제껏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경멸에 찬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너한테 일일이 설명할 이유 없어. 이만 일어나. 나 바빠.”

“설마. 그 녀석이야?”

“뭐?”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윤결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루이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네가 결혼했다던 어린 신부의 쌍둥이 동생 말이야. 이름이 강혜원…. 이랬나?”

“대체 너 지금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하는 거야!”

그의 입에서 혜원의 이름이 나오자 윤결은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리고 그런 윤결의 당황한 모습에 루이는 확신했다. 지금 그의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녀석은 다름 아닌 결혼 했다는 여자의 쌍둥이 동생, 강혜원이라는 것을. 일이 재밌게 흘러간다는 생각에 루이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설마설마했는데…. 정말로 그 녀석을 좋아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그래? 그럼 네가 전에 말한 어린 신부. 나한테 보여 줘봐. 그럼 네 결혼 인정해 줄게.”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윤결이 이를 악물며 화를 누른 듯 격양된 목소리로 물었다. 어차피 그의 인정 따위가 필요한 부분도 아니었거니와, 겨우 하룻밤 즐긴 사이일 뿐인데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구는 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럼 내가 찾아갈까? 강혜원?”

“뭐? 너 진짜 뭐 하자는 거야!”

결국, 이번에도 먼저 자제력을 잃고 발끈 한 건 윤결이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루이의 멱살을 잡아 올리며 소리쳤다.

“나한테 이래 봤자 당신한테 좋을 거 없을 텐데? 이 손 놔.”

멱살이 잡힌 채 순순히 끌려온 루이가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의 말처럼 지금은 우선 루이를 달래야 했기에 윤결은 마지못해 그를 놓아주며 자리에 앉았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당신이 저지른 그 실수가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를 지금부터 깨닫게 해주려는 것일 뿐이야.”

“뭐라고?”

“오늘은 이만 갈게. 나도 더 이상 당신이랑 말하고 싶은 기분 아니니까. 그런데, 내가 부르면 알아서 재깍 달려와야 할 거야. 당신의 그 소중한 녀석이 알면 안 되는 비밀이 우리에겐 있잖아?”

“야, 루이!”

벗어날 수 없는 올가미에 걸려 버린 듯 윤결은 얼굴을 사납게 구기며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하지만 그날은 엄연한 자신의 실수였고 혜원이 절대로 알아서는 안 될 사고였기에 윤결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우선은 어떻게든 루이를 달래서 조용히 프랑스로 보내 버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 윤결이 한층 나긋해진 목소리로 다시 조용히 그를 불렀다.

“하아…. 루이. 그만하자.”

“뭘? 나는 아직 시작한 것도 없는데. 당신이 나랑 다시 자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난 프랑스로 돌아갈 생각 없으니까 그렇게 알아둬,”

“내가 너한테 그런 미친 소리를 할 일은 절대 없을 거야.”

더 이상 대화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윤결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매섭게 쏘아보며 말했다.

“절대라는 말, 함부로 내뱉지 마.”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난 루이가 헝클어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윤결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어차피 윤결이 흔들리기 시작한 이상, 이 게임에서 유리한 건 자신이라 확신했다.

강혜원. 처음부터 윤결이 끼고도는 모습이 눈에 거슬렸었다. 특히나 재희까지 그에게 빠져 있는 지금, 루이의 눈에 혜원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차갑게 뒤돌아 나가는 루이의 빤히 노려보던 윤결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털썩 자리에 앉았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와인을 무섭게 노려보던 윤결은 목이 타는 듯 벌컥벌컥 와인을 들이켰다.

“한 잔 더.”

순식간에 와인 한 잔을 비운 윤결이 또 한 잔을 주문했다. 마셔도 마셔도 지워지지 않는 불안감. 루이의 방문이 예사롭지 않음에 윤결 또한 긴장했다. 빈속에 연거푸 들이켠 와인에 윤결은 취기가 오른 듯 머리가 아파왔다. 그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바의 주인이 재빨리 그를 부축하며 말했다.

“차를 가져오셨으면 대리를 불러드릴까요?”

“됐습니다.”

어지러운 머리도 식힐 겸 윤결은 잠시나마 걷고 싶었다. 술값을 지불하고 나온 윤결은 어느덧 어둑어둑해진 주위를 둘러보며 문득 집에 혼자 있을 혜원이 떠올랐다.

“또 혼자 울고 있으면 안 되는데….”

그와 함께 저녁을 먹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게 못내 미안했는지 윤결은 서둘러 택시를 잡아탔다.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윤결은 갑갑한 듯 넥타이를 풀어 헤치며 등을 길게 뒤로 젖혔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나지막이 혜원의 이름을 불렀다.

“혜원아…. 강혜원.”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잠재워줄 녀석의 숨결이 너무나 그리웠다. 상처받는 일 없이 지켜내겠다 다짐했었고, 모든 비난과 화살은 자신에게만 향하게 하겠다 마음먹었었다.

언젠가 둘의 사이가 알려진다 하더라도, 혜원이 상처받는 일은 없도록 그 녀석만은 아무것도 모르게 하고 싶었다. 그런 윤결의 계획에 사실 루이는 들어있지 않았다. 그리고 루이라는 복병은 너무도 치명적인 윤결의 실수였다.

**

어느덧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윤결은 온기 하나 없이 싸늘한 거실의 공기에 다급히 혜원부터 찾았다. 설마 벌써 자고 있는 건가 싶어 시계를 확인했지만, 아직 9시. 아무리 혜원이 잠이 많다고 해도 9시에 잠이 들 녀석이 아니란 생각에 윤결은 살며시 그의 방 문을 열었다. 하지만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을 만큼 깔끔히 정돈된 그의 침대에 윤결은 서둘러 문을 닫으며 거실로 향했다.

눈앞이 캄캄할 정도로 당황한 윤결이 휴대폰을 꺼내 들려던 찰나, 그는 이내 소파에 몸을 동그랗게 만 채 잠들어 있는 혜원을 발견했다. 모든 근심 걱정이 한 번에 씻겨 내려가는 듯한 안도의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깅혜원. 너 진짜….”

서둘러 혜원에게 다가가려던 윤결은 문득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초밥 봉투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분명 먹으라고 배달을 시켜 준 것이었으나, 봉지에는 손을 댄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윤결은 또다시 눈살을 찌푸리며 잠든 혜원을 내려다봤다. 안 그래도 마른 녀석이 자꾸 저녁을 거르는 것 같아 속이 상한 윤결이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순간 윤결의 손끝에 물기가 만져지자, 깜짝 놀란 윤결이 혜원을 얼굴을 살폈다. 군데군데 눈물이 번진 자국을 확인한 윤결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다.

윤결이 조심스럽게 혜원을 깨우려 할 때였다. 작은 빛을 반짝이며 혜원의 휴대폰으로 문자가 도착했다. 무심코 윤결이 휴대폰을 확인하니 발신자는 재희였다.

윤결은 섬뜩한 눈빛으로 문자 내용을 확인했다.

[혜원아, 잘 들어갔어? 우리 오늘 찍은 사진 중에 이게 제일 마음에 든다. 우리 내일 사진 현상하러 갈까? 어때?]

간단한 문자와 함께 도착한 한 통의 사진. 그리고 윤결은 그 사진을 끝으로 이성을 놓고 말았다.

“일어나 강혜원. 당장 일어나!”

윤결은 서슴없이 혜원을 흔들어 깨웠다. 사진 한 장에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 윤결은 흥분상태였다. 고작 밥이나 먹고 시내 구경이나 하고 돌아올 거라 생각하고 허락해 준 만남이었다.

감히 자신과도 입어 보지 않은 혼례복에 거기다가 키스까지? 윤결은 꼭지가 돌아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물론 술을 마셨기에 이성보다 감정이 더 앞선 그였지만, 안 그래도 루이로 인해 마음이 복잡해진 윤결은 이대로 혜원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에 더 이상의 여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으응. 형 왔어요?”

부스스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난 혜원이 귀엽게 웃으며 윤결을 향해 손을 뻗어왔다.

“강혜원.”

하지만 안아주기는커녕 단호한 얼굴로 자신을 부르는 차가운 윤결의 목소리에 잠시 놀란 혜원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나지막이 물었다.

“왜, 왜….”

“너 오늘 하루 종일 뭐 하고 돌아다녔어?”

“오늘?”

“사실대로 다 말해.”

별로 그가 신경 쓸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혜원은 갑자기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우며 다그치는 윤결이 야속해지려 했다. 일찍 와서 같이 밥을 먹겠다는 약속을 어긴 것도, 이 시간까지 혼자 둔 것도 윤결이면서 왜 자신에게 화를 내는지 참고 있던 서러움이 밀려왔다.

혜원은 순간 아까 호텔에서 마주친 윤결과 낯선 남자의 모습이 떠오르자 눈에 힘을 주며 역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러는 형은 오늘 왜 늦었어?”

“뭐?”

울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묻는 혜원의 질문에 윤결이 당황한 듯 잠시 주춤거렸다. 분명 일 때문에 늦을 거라고 문자를 보냈는데, 설마 보지 못한 건가 하는 생각에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일 때문에 늦는다고 문자 보냈잖아. 그리고 보내준 저녁은 왜 안 먹은 건데?”

“진짜 일 때문이야? 정말 일만 하다 온 거 맞아?”

“뭐라고? 너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이런 사진이나 찍고 다니면서 대체 뭘 잘했다고!!”

윤결은 변명이라도 해보라는 듯 그의 앞에 재희가 보낸 사진을 들이밀며 소리쳤다. 혜원은 다정한 얼굴로 자신의 이마에 키스를 하는 재희와의 사진을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윤결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게 뭐 어쨌다고…. 그냥 사진이잖아.”

“야. 강혜원. 네 눈엔 이게 그냥 평범한 사진처럼 보여?”

“그, 그럼 뭔데….”

한국에 온 기념으로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은 것일 뿐이고, 반가운 마음에 재희가 이마에 뽀뽀를 한 건 별 뜻 없이 그저 외국식 인사뿐이었다. 맹세코 다른 의도는 없었기에 그가 화를 낼 이유도 자신이 사과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넌 아무하고 이렇게 키스하고 다녀?”

“내가 언제! 이건 그냥 반가워서 형이 가볍게 인사한 것뿐이야.”

“가볍게 인사? 얼마나 반가웠으면 그 새끼가 주둥이부터 들이밀었을까? 또 너는 그걸 좋다고 헤헤거리면서 가만히 있었고?”

“그런 거 아니라고! 그러는 형은…!”

‘형은…. 나한테 거짓말했잖아. 일한다고 하고는 호텔에서…. 호텔에서….’

혜원은 차마 그가 다른 남자와 호텔에서 나가는 것을 봤다고 말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 남자가 윤결의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할까 봐, 그래서 자신이 더 초라해질까 봐 혜원은 입술을 꽉 깨물며 눈물을 글썽였다.

혜원은 이미 윤결을 너무 좋아하게 돼버렸고, 이젠 그가 자신을 버릴까 봐 겁이 났다. 아직 이런 감정이 혼란스럽기만 한 혜원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원망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같이 있고 싶었고 함께 하고 싶었다.

눈을 떴을 때 그의 얼굴이 보여서 안심이 되었고, 그가 자신에게 돌아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지금 윤결의 모습은 자신이 기대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늘 다정하게 자신을 대해주던 따뜻한 한윤결이 아닌, 몹시 거칠고 흥분한 그의 모습에 혜원은 겁이 났다.

“강혜원. 얌전히 내 곁에만 있으라는 말이 그렇게 어려운 부탁이야?”

윤결이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 헤치며 혜원을 와락 끌어안았다. 술김에 화가 나서 그에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지만, 그를 울릴 생각도 아프게 할 생각도 없었다. 그저 누군가의 품에 안겨 키스를 받는 모습에 화가 치솟았고, 혜원을 뺏기게 될까 봐 두려웠다.

혜원의 말대로 정말 아무 의미 없는 인사였을 수도 있었다. 분명 혜원이라면 그렇게 생각하고도 남을 녀석이니까. 하지만 재희의 얼굴에서 풍기던 짙은 미소는 절대 반가운 동생을 대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자신과 똑같이 혜원을 향해 있는 욕망이 다분히 느껴지는 재희의 뜨거운 눈빛에 윤결은 불안했다.

“형이 먼저 약속 어겼잖아. 나는 제때 집에 왔어. 근데 약속 안 지킨 건 형이잖아. 그런데 왜 형이 나한테 화를 내?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

결국, 윤결의 품에서 서러운 눈물을 터트린 혜원. 윤결의 셔츠가 축축이 젖어 들 만큼 혜원은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윤결은 떨리는 손을 들어 혜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미안해 혜원아. 형이 다 미안해. 잘못했어.”

어쩌면 자신을 향해 있던 분노였을지도 몰랐다. 혜원에게 거짓말을 하고 루이를 만난 것도,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 엿 같은 상황도 모두 자신이 자초한 일이었음에 윤결은 혜원에게 화를 낼 자격도 없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윤결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분노가 치솟았다. 그게 술 때문인지, 아니면 혜원을 뺏길지도 모른다는 초조함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윤결은 자신을 향해 있던 화를 혜원에게 쏟아낸 것이 미안해졌다.

“나 정말 아무 짓도 안 했어. 형이 이렇게 화낼 만한 짓 한 거 없단 말이야.”

혜원은 서럽고 억울한 마음에 윤결의 어깨를 주먹으로 마구 내려치며 소리쳤다.

윤결은 고스란히 그의 힘없는 주먹질을 맞아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순진한 녀석이 절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윤결은 질투에 휩싸여 또다시 그를 울리고 말았다는 생각에 성급했던 자신을 자책했다.

어느 정도 혜원이 진정을 한 듯하자, 윤결이 살며시 그를 품에서 떼어내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눈물에 젖은 새하얀 혜원의 얼굴에 참을 수 없는 욕정이 불타올랐다. 이대로 그를 한입에 삼켜버리고 싶은 뜨거운 욕망과 질투. 윤결은 그대로 혜원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읍!! 유, 윤결 형…. 흡!”

갑작스러운 키스에 깜짝 놀란 혜원이 버둥거리며 그를 밀어냈다. 하지만 윤결은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더욱 강하게 그를 끌어안으며 도망치느라 바쁜 혜원의 혀를 잘근 깨물었다.

“흐읏!”

몸을 움찔거리며 혜원이 아픔을 호소했다. 짜릿하게 온몸의 휘감는 뜨거운 키스에 혜원의 심장이 빠르게 뛰어댔다. 서로의 혀가 정신없이 맞물리며 숨이 멎을 것 같은 강렬한 키스가 한동안 이어졌다.

이런 키스가 처음인 혜원이 제대로 호흡을 내뱉지 못해 힘겨워하자, 윤결은 그제야 피식 웃음을 지으며 그의 입술을 놓아주었다. 입술을 떼자 가느다란 실선의 타액들이 둘의 입술 사이를 아슬아슬 이으며 야릇한 광경을 자아냈다. 흥분으로 가득한 혜원의 가쁜 숨소리가 거실에 가득 울려 퍼졌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번들거리는 입술로 멍하니 윤결을 쳐다보는 혜원의 모습은 이대로 얌전히 놓아줄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이었다. 윤결은 번쩍 그를 안아 들며 침실로 향했다. 아직 이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한 혜원은 얌전히 윤결의 어깨에 매달리며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윤결만큼이나 혜원도 간절히 그를 원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혜원을 침대에 가지런히 내려놓은 윤결이 자신의 옷을 하나둘씩 벗어젖히며 혜원의 앞에 다가섰다. 불빛 하나 없어 깜깜한 방에는 오직 윤결이 옷을 벗으며 내는 작은 마찰음이 전부였다. 혜원은 마른침을 삼키며 이불을 꽉 쥐어 잡았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혜원은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그의 몸을 처음 보는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오늘따라 더욱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느덧 윤결은 탄탄한 몸매를 뽐내며 침대 위에 몸을 웅크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혜원의 앞으로 다가와 그의 얼굴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조금은 부었지만 촉촉하고 매끄러운 혜원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손으로 훑으며 그윽한 눈길로 바라봤다.

-쿵쾅쿵쾅!

혜원의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빠르게 날뛰어 댔다.

천천히 그의 가슴을 밀어 침대 위로 넘어트린 윤결은 거침없이 그의 상의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순간 얼굴이 타들어 갈 것같이 부끄러워진 혜원이 재빨리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처음 느껴보는 윤결의 뜨거운 손길에 바짝 긴장한 듯 혜원의 가느다란 허리가 잘게 떨렸다. 윤결은 예쁜 얼굴을 가린 혜원의 손을 살며시 내리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혜원아…. 무서워?”

“조, 조금. 형, 저기 그러니까…. 나는….”

아직 혜원에겐 누군가와 사랑을 나눈다는 것 자체가 처음이고 낯설었다.

그것도 남자와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리 없는 혜원은 그저 윤결의 손에 몸을 의지한 채 바들바들 떨 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의 손길을 거부하고 싶진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기겁을 하고 도망을 가거나 문을 걸어 잠갔을 혜원이었지만, 아까 낮에 본 남자의 모습이 떠오른 혜원은 더욱 바짝 윤결에게 매달렸다.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은 형이었고, 자신만 바라봐 주길 바라는 혜원의 절박함이 느껴지는 강렬한 포옹에 윤결이 나지막이 웃으며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혜원아. 아프게 하지 않을게. 절대 다치게 하지 않을게.”

모든 걱정을 내려놓게 만들며 혜원을 무장해제 시키는 윤결의 따뜻한 한마디. 혜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순순히 몸을 맡겼다.

앞으로 어떻게 되든 다른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윤결이 그 남자가 아닌 자신에게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혜원은 모든 것을 다 잊고 용서할 수 있었다.

윤결은 거추장스러운 혜원의 옷들을 빠르게 벗겨 내려갔다. 하나둘 침대 밑으로 떨어져 내리는 옷들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던 혜원은 순식간에 나체가 된 제 몸이 부끄러운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윤결은 귀여운 혜원의 반응에 재빨리 그의 위로 몸을 겹쳐 내리며 가늘고 하얀 혜원의 목덜미를 강하게 빨아 당겼다.

“아흣!”

너무도 아찔한 감각에 혜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크게 벌렸다. 뜨거운 그의 가슴이 제 몸에 닿자 혜원은 갈 곳 없이 방황하던 두 손을 조심스럽게 뻗어 윤결의 등을 감싸 안았다. 어느새 한 몸이 된 듯 서로에게 바짝 밀착한 채 달 뜬 신음을 삼키는 둘의 뜨거운 숨소리.

그들의 뜨거운 밤은 이제 막 시작하려 했다.

모든 것이 서툰 혜원은 윤결을 끌어안고 있는 것 말고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윤결은 힘주어 빨아대던 그의 목덜미를 놓아주며 혀로 문지르듯 부드럽게 핥아 내렸다.

“하읏…. 형…. 윤결 형. 자, 잠깐만!”

간지러우면서도 소름이 돋을 것처럼 강렬한 떨림이 이어졌다. 윤결의 혀가 닿기만 해도 타들어 갈 것처럼 혜원의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윤결은 천천히 그의 몸을 훑고 내려와 그의 아담하고도 귀여운 성기를 덥석 입에 물었다.

생전 처음 누군가가 자신의 성기를 빨아주는 짜릿한 쾌감에 혜원이 허리를 들썩이며 다리를 파르르 떨었다. 윤결은 작정한 듯 혜원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는 조금 더 편히 그의 성기를 가지고 놀 수 있게 허벅지를 잡아 양쪽으로 활짝 벌렸다.

힘없이 벌어진 두 다리 사이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은 윤결이 목구멍 깊숙이 혜원의 성기를 빨아 당기며 애무를 시작했다. 쪽쪽 소리가 들릴 만큼 강하게 빨다가도 이를 세워 그의 귀두 끝부분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아앗! 하, 하지 마! 흐읏…. 이상해…. 기분이 너무….”

밀려드는 쾌감에 자지러지는 혜원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 허리를 들썩일 정도로 괴로워하는 혜원의 허리를 손으로 고정시키며 윤결은 끈적한 혀 놀림을 이어 갔다. 혀끝을 세워 혜원의 귀두를 들쑤실 때마다 몸서리를 치며 버둥거리던 혜원이 순간적으로 윤결의 머리채를 잡았다.

“윽! 야, 강혜원!”

윤결은 두피가 뜯겨나갈 정도로 세게 머리카락을 휘어잡은 혜원을 노려보며 그의 손을 떼어 내려 했지만, 혜원은 두 눈을 질끈 눌러 감으며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겁에 질린 혜원은 이것이 최후의 방어라고 생각하는 듯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하는 수없이 윤결은 그의 정신을 딴 곳으로 팔리게 하기 위해 한 번도 누군가를 받아들인 적 없는 그의 좁은 구멍에 손가락을 하나 집어넣었다.

“하앗! 하지 마! 형! 잠깐만…!”

살짝 밀어 넣었을 뿐인데 혜원은 엉덩이에 힘을 바짝 주며 더 이상의 진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그만둘 윤결도 아니었기에 이번엔 귀엽게 움찔거리는 혜원의 구멍을 혀로 핥아대기 시작했다. 질척이는 마찰음이 적나라하게 침실 안에 울려 퍼졌다. 혀를 넣었다 뺄 때마다 윤결의 머리채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혜원아, 손 좀!”

한 번씩 힘을 줄 때마다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앙칼진 혜원의 행동에 윤결은 안 되겠는지 억지로 그의 손을 잡아 결박했다.

한순간 그의 두 손목이 윤결에게 잡혀 버리자, 혜원이 바들바들 떨리는 눈으로 윤결을 올려다봤다. 이미 눈이 벌게질 만큼 흥분한 윤결. 그는 젖을 대로 젖어있는 혜원의 구멍에 슬슬 제 성기를 들이밀며 말했다.

“아프지 않게 한다고 했잖아 혜원아. 겁먹지 말고 몸에 힘을 빼봐. 손은 내 목에 두르고. 할 수 있지? 이번엔 내 머리채 말고 목에 두르는 거다?”

윤결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놓아주었다. 혜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윤결의 목을 끌어안았다.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지만, 혜원은 윤결을 믿었다.

얌전히 몸을 내어주는 혜원의 순종적인 모습에 윤결도 기분이 좋아졌는지 살며시 그의 이마에 키스를 하며 말했다.

“앞으로 네게 키스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야. 이 예쁜 이마에도, 탐스럽게 젖은 이 야한 입술에도, 물어뜯어 버리고 싶을 만큼 새하얀 네 목덜미에도, 입술을 가져다 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야. 강혜원. 알겠어?”

“응….”

뜨거운 입술이 이마에 닿은 느낌이 좋았다. 윤결은 어느 정도 혜원이 긴장을 푼 듯하자 다시 한번 그의 안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약간 뻑뻑했지만, 아까보단 부드럽게 귀두 끝이 들어갔다.

“아앗! 흐읏…. 형 잠깐…. 흐읏!”

익숙지 않은 아픔에 혜원은 또다시 엉덩이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리 윤결의 목을 끌어안고 있어도 묵직한 이물질이 안으로 들어오는 생소한 느낌에 혜원은 잔뜩 긴장했다. 천천히 들어가는 게 아무래도 더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윤결은 작정한 듯 잠시 성기를 뒤로 뺐다가 혜원이 긴장을 놓는 순간을 기다렸다.

윤결이 예상한 대로 성기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자마자 혜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에서 힘을 뺐다. 그리고 윤결은 바로 그 순간을 노렸다. 윤결은 재빨리 그의 구멍에 제 성기를 끝까지 밀어 넣으며 혜원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흐응!!”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혜원의 눈에서 가냘픈 눈물이 흘러나왔다. 너무도 끔찍한 고통에 혜원은 기절할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엉덩이에 힘을 주는 것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을 만큼 벌어진 혜원의 구멍엔 윤결의 성기가 꽉 물려있었다.

윤결은 천천히 혜원의 입술을 놓아주며 그가 숨을 쉬도록 쉬쉬 달랬다. 열린 입가로 농밀하고도 끈적이는 타액과 붉고 도톰한 혜원의 혀가 보였다. 윤결은 흥분과 쾌감이 뒤섞인 뜨거운 눈빛으로 혜원의 입술을 노려봤다.

경련이 일 듯 잘게 입술을 떨며 더운 입김을 내뱉는 그의 모습에 윤결은 금방이라도 사정을 할 것처럼 몸이 달아올랐다. 윤결은 천천히, 하지만 작정한 듯 허리를 강하게 움직이며 그의 안을 파고들었다.

“아앗!”

이번에는 입술이 막히지 않아 고통에 찬 혜원의 야릇한 비명이 거침없이 새어 나왔다.

-퍽!퍽!퍽!

이어지는 윤결의 추삽질에 혜원의 가느다란 허리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미 혜원의 얼굴은 눈물로 흥건히 젖어 들기 시작했다.

“아파…. 형. 그만! 하앗… 아파!”

아프다고 칭얼거리는 혜원의 애원에도 윤결은 그의 몸을 탐하고 또 탐했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그의 엉덩이는 야하다 못해 음탕해 보일 정도였다. 이젠 제법 윤결의 성기를 물고 있는 자세 또한 안정적이었다. 요염한 혜원의 구멍은 들락날락하는 윤결의 성기를 빈틈없이 감쌌다 놓으며 그의 쾌감을 증폭시켰다.

점점 절정을 향해 치닫기 시작한 윤결. 이미 핏줄이 바짝 설 만큼 발기한 성기는 사정이 임박해 왔음을 알려왔다. 한동안 이어진 허리 짓은 혜원의 깊숙한 곳을 짓누르며 그가 자지러지는 포인트를 집중해서 찧어댔다. 아픔을 넘어선 쾌락에 혜원은 점점 정신을 잃어 갔다. 기분이 좋은 듯하면서도 한 번씩 찌를 듯 격렬하게 파고드는 그의 성기가 버겁기도 했지만, 혜원은 윤결을 밀어내지 않았다.

부끄러움에 발그레 상기된 뺨과 살짝살짝 찌푸린 미간. 벌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호흡을 내쉬는 혜원의 모습은 숨 막히도록 섹시해 보이기까지 했다. 윤결은 더 이상 버틸 이성조차 남지 않았다. 아래가 터질 듯한 사정감이 밀려왔다.

윤결은 입술을 짓씹으며 더욱 깊숙이 자신의 성기를 혜원의 안으로 쑤셔 넣었다. 그의 고환이 연결된 부분에 닿을 만큼 깊숙이, 더욱 깊숙이 더 이상 들어가지 않을 때까지 밀어 넣었다.

“아파! 하앗!”

윤결의 성기에 돋아난 굵은 핏줄까지 모두 느껴질 만큼 혜원의 내벽은 예민하게 반응했고, 그는 연신 비명을 내질렀다.

이내 뜨거운 무언가가 폭발하듯 혜원의 안에 퍼지며 윤결의 거센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그제야 혜원도 몸의 힘을 빼며 툭 하고 윤결의 목에 둘렀던 손을 힘없이 떨어트렸다.

둘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윤결은 처음으로 혜원의 전부를 가졌다는 사실에 물기에 젖은 그의 눈가를 어루만져주며 물었다.

“혜원아. 나랑 결혼할래?”

“… 싫어.”

하지만 혜원은 고개를 저으며 울먹였다. 당황한 윤결이 조심스럽게 성기를 그의 안에서 빼내며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그가 뿜어낸 정액들이 성기와 함께 흥건히 빠져나왔다. 성기가 머물다 나간 자리는 허전함과 동시에 쓰리고 아팠다. 혜원이 끙끙거리며 몸을 돌려 눕자, 윤결이 조심스럽게 그를 이불로 돌돌 말아 안아 들며 물었다.

“혜원아. 나랑 결혼하기 싫어?”

“….”

혜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건 좋고 싫고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같은 남자끼리 결혼이라니. 결혼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말하는 결혼은 그저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윤결의 의도라고 생각한 혜원은 아무 의미 없는 결혼이라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자는 윤결의 말은 싫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와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달콤한 환상일 뿐,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을 며느리처럼 아껴 주시는 아버님과 어머님, 그리고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해 주는 부모님을 실망하게 해드리면서까지 이 사랑을 이어갈 수 있을지 혜원은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윤결이 자신의 곁을 떠나는 것 또한 원치 않았다.

복잡한 마음에 혜원은 머리가 아파왔다. 몸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지금은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혜원의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윤결이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할게. 혜원아. 네가 걱정하는 모든 것들, 내가 다 없애줄게. 사랑해. 지금 이대로 널 데리고 도망가 버리고 싶을 만큼 사랑해, 혜원아.”

혜원은 눈물이 났다. 그의 말대로 차라리 이대로 그와 함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을 만큼 혜원도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

호텔로 돌아온 루이는 이 치욕을 어떻게 갚아 줘야 할지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자신을 겨우 하룻밤 노리게 정도로 생각한 윤결의 괘씸한 행동이 도저히 용서되질 않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게 혜원의 탓이라 생각한 루이. 그는 그 녀석만 아니었다면 자신이 이런 취급을 받을 일도 없었을 거란 생각에 모든 분노를 혜원에게 돌리고 있었다.

루이는 욕실에서 샤워 중인 재희를 힐끔 쳐다보며 그의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가 혜원과 다정히 대화를 주고받은 것만으로도 루이는 강한 질투에 휩싸였다.

그 순간 한 장의 사진이 루이의 시선을 사로잡고 말았다.

너무도 예쁜 얼굴로 혜원의 이마에 키스를 해주는 재희의 사진이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노려보던 루이는 차게 식은 눈빛으로 과감히 사진을 지워버렸다. 감히 윤결에 이어 자신의 동생에게까지 꼬리를 친다는 생각에 도저히 가만두고 볼 수만은 없단 생각이 들었다.

“한윤결. 당신이 그렇게 아끼고 감추는 녀석을 흔들어 버린다면, 과연 당신은 어떤 얼굴로 나에게 매달리게 될까?”

하지만 아직은 그에게 자신의 최후의 카드를 보여줄 생각이 없었다. 천천히 그를 옭아매 피를 말리는 고통을 먼저 겪게 해주고 싶었다.

어느새 샤워를 마친 재희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자신의 침대에 앉아 있는 루이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 듯 다가가며 물었다.

“형 언제 왔어? 그 윤결이라는 사람은 잘 만났어?”

“어. 만났어.”

“밥은 먹었어?”

“재희야.”

“어? 왜?”

“강혜원이랑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마.”

“그게 무슨 말이야?”

재희는 젖은 머리를 말리다 말고 루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중에 상처받지 말고 그 녀석이랑 적당히 놀다 헤어지라고.”

말을 마친 루이가 무섭게 굳은 얼굴로 방을 나가려 하자, 재희가 재빨리 그의 팔을 잡아 멈춰 세우며 말했다.

“왜 그래 형. 혹시 오늘 하루 종일 혜원이랑 놀러 다녀서 화났어? 아니 나는 오늘 형이 윤결이란 사람 만난다고 해서….”

“그런 거 아니니까 이거 놔. 아파.”

한 번도 제게 이렇게 차갑게 대한 적 없는 루이가 표정 없는 얼굴로 싸늘하게 말하자 재희도 잡은 팔을 살며시 놓으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미안해 형.”

결국, 재희가 먼저 그에게 사과를 했다.

“이따 방으로 와. 재워 줘. 오늘 혼자 못 잘 것 같아.”

“알았어. 씻고 나와. 기다릴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욕실로 들어가는 루이를 보며 재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 뭐가 형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인지 오늘따라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이는 루이의 모습에 재희는 바짝 긴장했다.

지금 그의 눈빛은 몇 년 전 자신을 아웃팅했던 녀석을 반 죽을 정도로 만들어 버렸던 그날의 잔혹했던 눈빛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재희는 제발 아무 일 아니길 바라며 루이의 방으로 향했다. 자신에게 한없이 다정하고 따뜻한 형이었지만, 한 번씩 이렇게 삐뚤어질 때면 재희조차 감당이 안 됐다.

물소리가 나는 걸 보니 이제 막 샤워를 시작한 듯했다. 재희는 천천히 루이의 침대에 몸을 눕히며 눈을 감았다.

그는 아까 낮에 혜원과 보냈던 즐거운 시간을 떠올렸다. 한 장면 한 장면 머릿속에 떠올릴수록 입가에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루이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재희는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이미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재희의 미소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던 루이가 그의 곁에 내려앉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난 분명 경고했다. 다치기 전에 그 녀석한테서 손 떼라고. 너까지 다치면 난 정말 그 녀석 죽여버릴지도 모를 거 같거든.”

**

온몸이 난도질당한 것처럼 아팠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울 만큼 혜원은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들어 옆을 보니 윤결의 얼굴이 보였다. 마치 자신을 죽부인이라도 된 듯 꽉 껴안고 있는 그의 모습에 혜원은 웃음이 났다.

혜원은 천천히 손가락을 뻗어 그의 입술을 살짝 건드렸다.

“으음….”

잠결에 윤결이 입술을 움찔거리며 작은 소리를 냈다. 하지만 많이 피곤했는지 그는 다행히 깨지 않았다. 혜원은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보았다.

“아앗…. 아파라….”

역시나 엉덩이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허리를 관통하는 찌릿한 통증에 혜원은 다시 몸을 동그랗게 말며 신음을 삼켰다.

무언가 엉덩이 사이에 주르륵 흘러나오는 이질적인 느낌에 혜원이 깜짝 놀란 듯 살포시 이불을 들춰보았다. 다리 사이로 보이는 희멀건 액체의 존재에 혜원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와 몸을 섞은 것이 꿈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혜원은 쥐구멍에라도 숨고만 싶었다. 혜원은 조심스럽게 그의 팔을 밀어내며 침대 밖으로 기어 나왔다.

“으앗!”

하지만 두 다리가 바닥에 닿기가 무섭게 혜원은 그만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순간 혜원은 재빨리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는 슬쩍 고개를 돌려 침대 위를 올려다봤다. 행여나 윤결이 깨기라도 했을까 봐 혜원의 작은 심장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혜원은 바닥을 기다시피 몸을 움직여 겨우 방을 벗어났다. 하지만 이내 실오라기 하나 없는 자신의 나체가 부끄러웠는지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담요로 재빨리 몸을 감쌌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배가 미친 듯이 고팠다. 도저히 뭔가를 만들어 먹을 힘도 없었던 혜원은 순간 테이블에 놓인 초밥 봉지가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좀 지났긴 했지만, 저거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혜원은 조심스럽게 봉지를 열었다. 바스락거리는 봉지 소리가 귀에 거슬린 듯 혜원이 힐끔힐끔 방문을 쳐다봤다. 어느덧 초밥이 먹음직스러운 자태를 뽐내며 혜원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두툼한 연어가 올라간 초밥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잘 먹겠습니다!”

혜원이 잔뜩 기대에 찬 눈으로 도톰한 연어 초밥을 집어 입으로 넣으려던 순간, 누군가의 손이 그의 초밥을 낚아채 가버렸다.

“어… 어??”

흠칫 놀란 혜원이 고개를 들자, 언제 일어났는지 윤결이 못마땅한 얼굴로 초밥을 머리 위로 올려 든 채 혜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테이블에 있던 초밥들을 죄다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강혜원. 배고프면 나를 깨웠어야지. 설마 이걸 먹으려고 했어?”

“아, 아니…. 난 그냥….”

“하아…. 이거 먹으면 배 아파 강혜원. 오래된 거잖아.”

“그렇게 오래된 거 아닌데….”

혜원이 아쉬운 듯 쓰레기통에 버려진 초밥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됐고, 잠깐만 여기 앉아 있어. 금방 만들어 줄게.”

“괴, 괜찮아. 그냥 잘게.”

“배고프잖아. 너 저녁도 안 먹었잖아.”

“그래도. 형 힘들잖아. 나 진짜 괜찮아.”

혜원이 부엌으로 향하려는 윤결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이 몇 시인데. 내일 출근해야 하는 윤결을 이 시간까지 부려 먹고 싶진 않았다.

“나도 저녁 안 먹었어. 같이 먹자 혜원아.”

윤결이 혜원의 뺨을 살살 어루만져주며 말했다. 물론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하고선 약속을 어긴 것도 미안했고, 밥도 먹지 못한 녀석을 밤새 울린 것도 미안했다.

같이 먹자는 말에 혜원이 다시 환하게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윤결이 서둘러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혜원은 소파에 앉아 물끄러미 윤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벗은 등 근육마저 섹시해 보일 정도로 윤결의 몸매는 탄탄했다.

혜원은 슬쩍 자신의 말라비틀어진 가슴을 내려봤다. 내일부터는 운동이라도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형편없이 마른 모습에 혜원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윤결은 무슨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건지 고소한 냄새가 거실에까지 솔솔 풍겨왔다.

혜원은 졸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꾸만 눈이 감겼다. 지칠 대로 지친 몸은 조금만 긴장을 풀어도 잠이 쏟아져 내렸다. 결국, 그새를 참지 못하고 혜원은 또 고개를 떨구며 새근새근 잠에 빠져들었다.

윤결은 시간도 너무 늦었고 배가 많이 고플 혜원을 위해 간단한 오믈렛을 만들었다. 계란과 치즈가 들어가서 부드러웠고, 각종 야채가 어우러진 고소하고 담백한 오믈렛이 완성되자 윤결은 만족스러운 듯 접시에 담아내고는 혜원에게로 향했다.

“혜원아, 배고프지, 이제 먹….”

하지만 이내 고개를 떨군 채 잠에 빠진 혜원의 모습에 윤결은 조심스럽게 접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혜원의 옆에 앉았다. 담요를 두르고 있어도 그의 빼빼 마른 몸이 훤히 다 드러날 만큼 가냘픈 혜원을 보며 윤결은 번쩍 그를 안아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그제야 화들짝 잠에서 깬 혜원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윤결을 바라보며 말했다.

“혀, 형. 내려줘. 앉아서 먹을게.”

“됐어. 너 지금 손 하나 까딱할 힘도 없는 거 내가 아는데 뭐.”

“아니야. 그 정도는 아니거든? 내려줘. 내가 먹을게.”

“진짜? 그 말 책임질 수 있어? 아직도 힘이 남았단 말이지?”

순간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윤결이 혜원의 허리에 손을 감싸며 말했다. 윤결의 뜨거운 손길이 허리에 닿자 혜원은 전기가 찌르르 관통하는 느낌에 흠칫 몸을 떨며 마구 고개를 저어댔다. 더 이상은 무리였다.

“그러니까. 얌전히 안겨 있어. 이거 다 먹여줄 때까지.”

“아, 알았어.”

부끄럽고 민망한 자세에 혜원이 수줍게 대답을 하며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윤결은 기특하다는 듯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오믈렛을 잘게 잘라 혜원의 입에 넣어주었다.

배가 고팠던 혜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건넨 오믈렛을 받아먹었다. 입에서 살살 녹는 부드러운 치즈와 아삭아삭한 야채들의 식감이 혜원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한 입 두 입 받아먹던 혜원은 어느새 접시를 핥아먹을 기세로 윤결을 재촉했다. 눈 깜짝할 새 오믈렛을 다 먹어 치운 혜원은 그제야 배가 부른지 윤결의 가슴에 살짝 등을 기대며 말했다.

“형 진짜 맛있었어. 아니 어쩜 요리도 이렇게 잘해?”

“우리 혜원이 데리고 살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안 그래?”

“뭐, 뭐래….”

또다시 부끄러움이 밀려온 혜원이 뺨을 발그레 붉히며 말했다.

윤결은 천천히 혜원의 고개를 돌려 자신을 마주 보게 했다. 토마토처럼 달아오른 혜원의 얼굴은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날 만큼 귀여웠다. 윤결은 스스럼없이 혜원의 입가에 묻은 치즈를 핥아주며 속삭였다.

“우리 귀여운 혜원이. 이건 남겨뒀다가 겨울잠 자면서 먹으려고 여기다 묻혀둔 건가?”

“아, 아니 잠깐만!”

윤결의 뜨거운 혀가 입술을 스치자 흠칫 놀란 혜원이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막으며 소리쳤다. 여기서 더 했다가는 내일 정말로 침대에서 일어도 나지 못할 것 같았다.

“맛있다. 우리 강혜원 입술.”

윤결은 아쉬운 듯 혜원의 이마에 키스를 해주며 그를 품에 끌어안았다. 물론 윤결도 더는 그를 안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작은 손길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긴장하는 혜원의 모습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윤결은 그를 번쩍 안아 다시 침실로 향했다. 분명 뭔가를 먹였음에도 한결같이 가볍기만 한 혜원. 윤결은 내일부터 한약이라도 지어 먹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를 다시 이불 속에 집어넣었다. 윤결의 가슴이 등 뒤에 닿자 혜원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러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혜원이 눈을 질끈 감으며 작게 속삭였다.

“혀, 형 옷 좀 입으면 안 돼?”

“입었는데?”

“어…. 어?”

혜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자 윤결이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내려놓으며 속삭였다.

“입었잖아. 여기. 강혜원.”

‘뜨악! 뭐라는 거야 이 남자!’

오늘 밤. 아무래도 혜원은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을 듯했다. 자신의 목덜미를 뜨겁게 달구는 윤결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끼며 혜원은 눈을 꾹 눌러 감았다. 1, 2, 3…. 도대체 숫자의 단위가 어디까지인지 한번 끝까지 세어보겠다는 듯 혜원은 속으로 빠르게 숫자를 세었다. 99, 100, 101. 그렇게 숫자와 씨름을 하는 사이 어느덧 혜원도 중얼거림을 멈추며 잠에 빠져들었다. 누구보다 행복한 둘만의 꿈같은 시간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윤결은 늦은 새벽에 겨우 잠든 혜원의 이마에 키스를 해주며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그는 출근 준비와 동시에 혜원이 일어나서 먹을 수 있게 아침을 준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비록 두 시간 정도밖에 자지 못했지만, 윤결은 그 어느 때보다 상쾌하고 기분이 좋았다.

출근과 함께 벌써부터 퇴근을 기다리는 윤결의 콧노래가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의 웃음을 한순간에 식어버리게 만드는 불청객의 전화에 윤결은 차게 식은 눈빛으로 휴대폰을 노려봤다.

[루이]

지금은 절대 받고 싶지 않은 전화였다. 윤결은 그의 전화를 무시하며 업무를 시작했다. 계속 울리는 휴대폰의 전원을 아예 꺼버린 윤결. 그리고 그것은 윤결의 크나큰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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