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그 녀석과의 아슬아슬한 동거(2권) (5/12)

5. 그 녀석과의 아슬아슬한 동거

혜원이 마음을 열고 윤결의 고백을 받아들인 다음부터 그의 눈빛이 급격히 달라졌다. 윤결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혜원의 일거수일투족을 집요하게 쫓으며 더욱 집착했다.

“이사님, 회의 자료 다 준비했어요. 말씀해주신 것처럼 10부씩 묶어서 집어 놨고, 여기 보시면 중요한 부분 제가 형광펜으로…. 아 진짜 좀! 집중 안 해요!? 어딜 만져요!!”

정리한 서류를 윤결에게 전달하며 꼼꼼히 설명을 해주는 혜원의 손목을 더듬어 올라가던 윤결이 기어코 그에게 한 소리 듣고 말았다.

종종 윤결은 이런 애정 표현을 서슴없이 해댔다. 그의 사무실에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화장실에서도,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틈만 나면 이렇게 혜원을 만져댔다.

혹시라도 들킬까 봐 전전긍긍해 하는 혜원과는 반대로 윤결은 은근 발끈하는 혜원의 모습을 즐기는 듯했다.

“계속 설명해. 다 듣고 있으니까.”

“이렇게 계속 만져대는데, 어, 어떻게 집중을 해요!”

참다못한 혜원이 그의 책상에서 멀찌감치 물러서며 씩씩거렸다.

정말이지 이 남자 손버릇 하나는 고약했다. 시도 때도 없이 목덜미부터 허리 심지어 엉덩이까지 주물럭거리니 말이다. 이러다 제 몸이 남아나질 않겠다는 생각에 혜원은 이번만큼은 꼭 회사에서는 안 그러겠다는 윤결의 다짐을 받아내고야 말겠다 단단히 마음먹었다.

“아니 애인 손목 좀 만졌다고 이렇게 발끈 하나?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는 없죠! 여기는 회사고 또 지금은…!”

“아아아아 몰라 몰라. 강혜원 넌 진짜 너무 시끄러워. 아무도 없는 내 공간에서 내가 내 와이프 만지지도 못해?”

“아, 정말! 회사에선 그러지 말라고요! 그, 그리고 누가 누구 와이프라는 거예요. 지금!”

“설마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테고. 하지만 뭐 혹시나 몰라서 묻는다면 다신 잊어버리지 않게 여기서 바로 가르쳐 줄 수도 있는데?”

“뭐…. 뭐… 뭐라고요? 오, 오지 마! 오기만 해 봐!”

순간 느닷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윤결의 모습에 흠칫 놀란 혜원이 뒷걸음질을 치며 도망가려 했다. 하지만 이미 잡아먹겠다 마음먹은 혜원을 쉽게 놓아줄 윤결이 아니었다.

“으아악!! 하읏!!”

순간 혜원은 자신을 팔을 덥석 잡아 끌어당기는 윤결의 품에 안기며 요란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윤결은 그런 혜원의 입술에 키스를 하며 그의 입을 막았다. 깜짝 놀란 혜원이 그를 밀어내려 했으나 그럴수록 윤결은 더욱 집요하게 그의 혀를 빨아 당기며 강렬한 키스를 이어갔다. 잠시 혜원에게 숨 쉴 틈을 내어주며 윤결이 부드럽게 그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그제야 혜원이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혀, 혀엉….”

“우리 혜원이, 키스부터 다시 가르쳐야겠는데?”

열정적이던 키스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지, 혜원이 눈을 깜빡이며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자 윤결이 그의 머리를 살며시 끌어당겨 자신의 가슴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뜨거운 열기에 혜원은 정신이 혼미해져 갔다.

윤결을 밀어내려던 손은 어느새 그의 등을 감싸고 있었다. 이상하게 그의 품에 안기면 거부할 수 없는 마성의 힘이라도 생겨나는 것인지, 한없이 편안했고 또 따뜻했다.

“제, 제가 그렇게 키스를 못해요?”

어느덧 정신이 돌아왔는지 혜원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윤결의 눈을 마주 보며 물었다.

“응. 우리 혜원인 뽀뽀는 잘하는데 아직 키스는 서툰 거 같은데?”

“미안해요.”

시무룩해진 혜원이 고개를 다시 숙이며 말했다. 하지만 윤결은 자신의 장난을 또 혼자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혜원이 귀여워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그런데 난 혜원이가 못하는 게 많을수록 기분이 좋아.”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칫….”

“정말인데…. 너의 처음을 같이 시작하는 사람이 나라서 행복하고, 서툰 너에게 하나씩 가르쳐 줄 수 있는 시간들이 즐겁고, 그리고 또….”

“또, 또 뭔데요.”

들을수록 눈물 나게 만드는 윤결의 말에 혜원이 울음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꽉 깨물며 물었다.

“그리고 한결같은 실수투성이 꼬맹이 강혜원이라서 너무 사랑스러워. 우리 꼬맹이 절대 변하지 마라. 언제나 내 손길이 필요한, 나만의 강혜원으로 오래오래 옆에 있어 주어라. 사랑해 혜원아.”

‘이러면 반칙이잖아. 왜 지금, 여기서 사랑 고백을 하는 건데!’

순간 혜원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두근두근 제멋대로 뛰기 시작한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혜원은 행복했다. 윤결이 주는 사랑은 너무도 따뜻했고, 달콤했고 또 고마웠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짓던 혜원이 그의 등을 감싼 손에 더욱 힘을 주며 말했다.

“나도 형이 좋아. 이런 나라도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형이 너무 좋아. 그러니까 형도 오래오래 내 옆에 있어 줘야 해. 알았지?”

“그래 혜원아. 형은 절대 너 혼자 두고 어디 안 가.”

혜원은 천천히 까치발을 들어 윤결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순간 윤결의 심장이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혜원이 스스로 먼저 건넨 키스. 그 어떤 키스보다 감동적이고 사랑스러운 첫 키스였다.

**

“혜원아 다 챙겼어? 늦겠다 빨리 나와!”

“어어 잠깐만!!”

헐레벌떡 가방을 챙겨 뛰어나오는 혜원의 얼굴엔 긴장감이 가득했다. 수능. 드디어 혜원의 수능 날이 다가왔다.

“떨지 말고 천천히 알았지?”

“응. 떨지 말고 천천히.”

“끝날 때쯤 형이 마중 갈 테니까 우리 혜원이 오늘 파이팅!”

윤결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혜원의 목에 두꺼운 목도리를 돌돌 감싸주며 말했다.

“응! 형도 오늘 하루 나 없이 파이팅!”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며 집을 나서는 혜원의 모습에 윤결은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더 넓은 세상을 향해 한 발 더 뻗어 나갈 준비를 하는 그가 기특하고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혜원은 대학생이 되면 하고 싶은 것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그중 윤결의 귀를 사로잡은 한마디.

“그리고 드디어 나도 성인 영화 볼 수 있어요!”

‘뭐라고? 지금 무슨 영화라고?’

혼자 야한 생각에 귀까지 빨개진 윤결이 힐끔 혜원을 쳐다봤다. 저 쪼끄만 게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 다시 입 밖으로 꺼내기도 민망한 성인 영화라는 말에 윤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학교를 일 년 늦게 들어가서 나이로만 따지면 이미 성인이었다. 그랬기에 보고 싶었으면 얼마든지 볼 수 있었을 텐데, 굳이 대학생이 될 때까지 기다린 녀석의 고지식함에 윤결은 박수를 보냈다.

“그, 그래서 보고 싶은 성인 영화가 뭐였는데?”

“그거 있잖아요. 그 어떤 여자랑 남자랑 나오는! 형이랑 같이 보고 싶었는데….”

“뭐?? 여, 여자랑 남자랑?”

순간 윤결은 자신이 모르는 또 다른 인격을 가진 혜원을 태우고 가는 건가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영화를 보려고 생각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걸 자신과 함께 보겠다고 말하는 저 대범한 꼬맹이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게 제목이 뭐더라? 남자가 조직 두목이고, 여자는 킬러로 나오는 영화. 그거 엄청 잔인하다고 하던데. 그거 꼭 형이랑 봐야 한다고요. 혹시라도 무서운 장면 나오면 형이 나 눈 가려줘야 하니깐요. 헤헷!”

“뭐…. 뭐?”

순간 윤결은 허탈한 얼굴로 너무도 순진무구한 웃음을 짓고 있는 혜원을 멍하니 쳐다봤다. 혜원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핸드폰 속 영화 리뷰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혼자 싱글벙글하였다. 아직 혜원은 실망감에 푹 젖어 있는 윤결의 허망한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 모습에 윤결은 또다시 웃음이 났다. 대체 이런 꼬맹이를 데리고 혼자 무슨 엉뚱한 상상을 한 것인지.

‘그래, 천천히 가자. 천천히.’

윤결은 여태껏 잘 참아 왔는데 앞으로 한두 달 더 못 참을까 하는 마음으로 혜원의 머리를 다정스레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형이 예매해 놓을게. 조만간 같이 보러 가자.”

“진짜? 응! 나 시험 잘 보고 올게!!”

시험장에 도착한 혜원은 윤결을 향해 씩씩하게 인사를 하며 뛰어 들어갔다.

윤결은 천천히 핸들에 턱을 내려놓으며 멀어지는 혜원을 오랫동안 지켜봤다. 많은 학생 사이에서도 빛이 나는 강혜원. 그렇게 오직 혜원만을 눈에 담은 윤결은 그가 교실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

[수험번호 XXXXX 합격.]

“형!! 나 합격이래!! 나 합격했데!”

당당히 대학 합격 통지서를 받은 혜원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윤결에게 달려왔다. 혹시라도 떨어졌을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물론 떨어졌다고 그를 나무랄 사람도 손가락질할 사람도 없었음에도 혜원은 초조해하며 결과를 기다렸었다. 사실 윤결은 그가 대학에 붙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가 떨어지길 은근 바랐는지도 몰랐다.

대학에 가면 분명 바빠질 것이고 그만큼 함께 하는 시간이 줄어들 것이기에 윤결은 차라리 대학을 안 가는 것도 아주 좋은 방법이지 않을까 하는 엉큼한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에겐 혜원의 합격 소식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너무도 신나 하는 혜원의 모습에 윤결은 자신의 시커먼 속마음을 숨기며 기쁘게 축하해 주었다.

“우리 혜원이. 인제 보니 머리가 돌은 아니었구나?”

“뭐? 돌?? 이것 봐봐! 나 당당히 차석으로 붙었다고! 누구더러 돌이래!!”

합격도 모자라 당당히 차석까지 해버린 혜원. 윤결은 끙하고 속으로 아쉬움을 삭이며 그의 똑똑한 공부 머리를 원망했다. 아니, 요리도 못해, 청소도 못해 심지어 세탁기 쓰는 법도 모르는 녀석이 공부는 왜 저렇게 잘하는 건지! 새삼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는 옛말이 하나 틀린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뭐 차석까지 한 걸 보니 조금은 똑똑한 돌인 거 같기도 하고.”

“이씨! 자꾸 돌돌 그럴 거야!!”

혜원은 능글맞게 놀리기만 하는 윤결이 얄미워진 나머지 대뜸 그의 이마에 박치기를 하며 소리쳤다.

-쿵!

눈에 별이 보일 만큼 세게 머리를 들이박은 혜원. 하지만 어째 윤결은 멀쩡해 보이는데 제 머리만 더 아픈 게 억울하다는 듯 혜원은 아픈 머리를 감싸 쥐며 그를 째려봤다.

“아흑! 아파라…. 이 씨….”

“얼씨구? 돌이라고 했더니 진짜 무슨 네 머리가 돌덩인 줄 알아? 괜찮아? 이리 와봐.”

윤결은 눈물까지 찔끔 흘리는 혜원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물론 그가 들이박은 이마는 혹이 날 것처럼 화끈거렸지만 이 나이에 체면이 있지! 저런 철없는 꼬맹이 앞에서 아픈 티를 내고 싶진 않았다.

반면 축하한다는 말은 못 해줄망정 돌머리 운운하며 놀려대는 윤결 때문에 속이 잔뜩 상한 혜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네네…. 그 돌머리는 이만 굴러가 드릴 테니 내일부터 형 혼자 출근하세요. 저는 누구 말처럼 돌머리라 챙겨야 할 것도 많고 준비해야 할 것도 많아서 내일부터 출근은 못 할 것 같네요. 그럼 이만.”

“야! 강혜원! 거기 서! 야!”

순간 너무 심했나 싶은 윤결이 재빨리 그를 뒤 따라갔으나 이미 혜원은 문을 쾅 닫고 걸어 잠근 후였다. 난감해진 윤결이 조심스럽게 그의 방 문을 두드렸으나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차석. 사실 평범한 가정에서라면 당연히 축하받고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 혜원을 품에서 놓고 싶지 않은 윤결에게는 달갑지 않은 소식일 뿐이었다. 차석까지 했으니 들어가자마자 유명세를 치를 것이고, 그에게 달라붙는 쓸데없는 방해물들이 많이 생길 것이란 생각에 벌써부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윤결은 소파에 널브러진 채 이마에 손을 올리며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차라리 대학에 떨어져서 우울한 혜원을 달래는 게 지금보다는 백배 더 쉬울 것 같았다.

한편, 방에 들어와 합격 통지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혜원은 순간 잊고 있던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

[강혜윤]

합격자의 이름은 자신이 아닌 강혜윤, 그녀의 이름이었다. 당연했다. 여태까지 그는 한국에서 강혜윤으로 살고 있었고, 수능도 당연히 그녀의 이름으로 치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혜원.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원망 섞인 목소리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뭐야…. 근데 나 대학은 다닐 수 있는 거야? 강혜윤. 너 진짜 오긴 하는 거야?”

그녀가 곧 돌아올 거란 생각에 수능조차 그녀의 이름으로 치를 만큼 혜원은 아직까지도 그녀가 한국으로 돌아올 거라 믿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희망은 점점 더 희미해졌고, 혜원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캄캄한 앞날이 너무 두렵기만 했다.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에 괜히 더 우울해지기만 하자 혜원은 그대로 침대 속으로 들어가 눈을 감아 버렸다.

사실 그녀가 돌아온다 해도 걱정이었다. 이제야 겨우 윤결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는데, 만약 그녀가 다시 돌아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사실대로 말할 수도, 그렇다고 윤결의 곁을 떠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살아갈 자신도 없었다. 순식간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오려면 빨리 왔어야지. 인제 와서 나보고 어떡하라고…. 너 정말…. 나빠 강혜윤.”

또르륵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혜원은 몸을 더욱 동그랗게 말았다. 이대로 잠들어 버리고 싶었다. 지금은 대학도 혜윤도 그리고 사랑하게 돼버린 윤결도,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

소파에 누워 잠깐 잠이 들었던 윤결이 어둑어둑해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지금 몇 시야? 얼마나 잔 거야?”

시계를 확인한 윤결은 문뜩 혜원이 밥도 먹지 않고 방에 처박혀 있다는 생각에 서둘러 그의 방으로 향했다.

잠긴 문을 여는 건 간단했다. 벌써 잠든 것인지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리고 누워있는 혜원의 곁으로 다가간 윤결은 조심스럽게 이불을 내려 그의 얼굴을 살폈다. 많이 울었는지 눈가가 촉촉이 젖어있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윤결은 침대맡에 걸터앉아 퉁퉁 부어있는 혜원의 눈가를 다정히 쓰다듬었다. 순간 혜원이 잠결에 몸을 돌리며 윤결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혜원아….”

이런 울보 녀석을 그 위험한 대학이라는 곳에 보내야 한다니. 윤결은 속이 쓰렸다. 하지만 그를 평생 세상과 단절시킨 채로 살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자신의 욕심이 과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인지, 윤결이 어느새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축하해 혜원아. 우리 혜원이 너무 장하다. 대학생 된 거 정말 축하해.”

윤결은 그대로 혜원의 곁에 누워 그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얌전히 안겨든 혜원의 얼굴엔 얼핏 미소가 비친 듯했다. 너무도 따뜻한 온기. 이젠 너무도 익숙해진 혜원의 체향에 윤결은 스르륵 눈이 감겼다. 서로를 품에 안은 채 잠든 혜원과 윤결. 그들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틈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느덧 몸을 꿈틀거리며 잠에서 깨기 시작한 혜원은 무언가 자신을 꽉 안고 있는 답답한 느낌에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자신의 옆을 내리쳤다.

“읔!!”

말캉하면서도 단단한 무언가가 제 손끝에 닿음과 동시에 터져 나온 날카로운 신음. 혜원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제 옆을 쳐다봤다. 놀랍게도 그곳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윤결이 아픈 코를 쥐어 잡은 채 신음을 삼키고 있었다.

“으앗! 뭐, 뭐야!?”

‘분명 혼자 자고 있었는데?’

대체 윤결은 언제 들어온 건지! 그만 그의 높디높은 코를 주먹으로 세게 내리치고 만 혜원은 화들짝 놀라며 다시 이불 속으로 몸을 숨겨버렸다.

‘어, 어떡해! 난 죽었다!’

감히 겁도 없이 저 잘난 남자의 코를 박살 내다니…. 아무래도 오늘 밤 조용히 넘어가긴 그른 듯한 예감에 혜원은 이불을 생명줄처럼 꽉 움켜쥐며 모을 바들바들 떨어댔다.

“야, 강혜원.”

“….”

“일어나지?”

“….”

“하나… 두울….”

“아… 왜, 왜요!! 그러니까 누가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와서 자래요? 몰랐다고요! 몰랐다니까? 아 몰라, 몰라. 그럼 형도 내 코 때리든가!”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윤결은 아무 말도 않았음에도 지레 겁을 먹고 큰소리를 치는 혜원의 뺨을 집게손가락으로 살짝 잡았다 놓으며 말했다.

“때리긴 뭘 때려. 쥐똥만 한 녀석 때릴 곳이 어딨다고. 일어나라고 밥 먹자고….”

“응? 바, 밥?”

화를 내기는커녕 밥 먹자며 웃는 윤결의 모습에 살짝 긴장을 놓은 혜원이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라고 할 줄 알았냐? 밥 같은 소리 하네! 감히 내 코를! 겁도 없이 때렸겠다!”

“아악! 몰랐다고! 몰랐다고 했잖아! 치사해!”

갑자기 달려들어 혜원의 코를 잡아 비트는 윤결의 반격에 혜원이 울상을 지으며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윤결은 쉽게 혜원을 품에서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버둥거리는 그를 더욱 꽉 끌어안아 팔다리를 결박시키며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든 뒤 혜원의 이마에 키스를 해주며 속삭였다.

“진짜로 밥 먹으러 가자고 혜원아. 우리 혜원이 배가 홀쭉하네?”

“지, 진짜 이번엔 밥 먹으러 가는 거 맞아?”

“이번엔 진짜. 나도 배고프다. 뭐 시켜 먹을까?”

윤결은 여전히 못 미더운지 입술을 삐죽이며 눈을 흘기는 혜원의 뺨을 살살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럼 초밥!”

“뭐? 또?”

“응!!”

그럼 그렇지. 누가 물고기 귀신 아니랄까 봐. 골고루 영양가 있게 먹이고 싶었지만, 오늘만큼은 그가 먹고 싶은 걸 먹이고 싶은 생각에 윤결이 그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며 말했다.

“알았어. 대신 내일은 꼭 고기 먹는 거야.”

“치잇….”

“대답!”

“네….”

조삼모사라고 했던가. 어느덧 윤결은 혜원을 길들이는 방법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배가 고팠던 혜원은 음식이 도착하자마자 게 눈 감추듯 빠르게 흡입하기 시작했다. 혜원이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른 윤결은 자신의 몫까지 혜원에게 나눠주며 잘 먹는 그의 모습에 흐뭇해했다.

금세 배가 부른 혜원은 소파에 누워 빈 용기들을 치우는 윤결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만약 이번에 대학을 안 가겠다고 하면 과연 그는 뭐라고 말을 할까? 안 그래도 돌머리라고 놀리는데, 학교마저 안 가겠다고 하면 분명 실망하겠지? 하지만 그가 자신에게 실망한다고 해도 이번 일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윤이 올 때까지 휴학 말고는 답이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어느덧 뒷정리를 마친 윤결이 젖은 손을 탈탈 털며 거실로 나오자, 혜원이 결심한 듯 몸을 일으켜 앉으며 말했다.

“윤결 형.”

“왜? 또 뭐 먹고 싶어? 아직 배 안 찼어?”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럼 뭔데? 난 네가 그렇게 기운 없는 목소리로 부르면 겁나더라…. 또 사고 쳤을까 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신나게 초밥을 먹어 치우던 녀석이 갑자기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눈치를 보자, 윤결은 이 짧은 시간에 또 무슨 사고를 친 건 아닌지 거실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대학 말이야…. 나 대학….”

“대학? 대학이 뭐? 설마 신입생 입학식 때 와달라 뭐 그런 유치한 부탁 하려고? 뭐, 네가 와달라고 하면 물론 내가 아주아주 바쁜 사람이긴 하지만 까짓것 가줄 수는….”

“하아…. 그게 아니고! 나 이번에 휴학할까 해.”

“뭐? 뭘 해?? 휴학!?”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 분명 아침만 해도 대학에 붙었다고 좋다고 방방 뛰던 녀석이 갑자기 이렇게 힘없는 얼굴로 휴학을 한다는 말에 윤결은 속으로 뜨끔했다.

설마 자신이 돌머리라고 놀려 댄 것이 이렇게 큰 충격이었나? 물론 그가 휴학한다면 두 팔 걷어붙이고 좋아할 윤결이었지만, 그래도 입학도 해보기 전에 휴학이라니. 윤결은 웃음기를 거둔 채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혜원아. 힘들게 공부해서 붙은 대학인데 왜 안가. 형이 놀려서 그런 거면 미안해. 진짜 우리 혜원이 머리 나쁘다고 놀린 거 아닌데. 형은 우리 혜원이가 차석으로 붙어서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몰라. 정말인데.”

“내가 자랑스러워?”

“당연하지.”

“그럼 내가 휴학을 하면… 나한테 실망할 거야?”

어느새 혜원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윤결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고 이제야 그가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기 시작했는데, 또다시 그를 실망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러워지기 시작했다.

윤결은 갑작스러운 혜원의 심경 변화에 당황했다. 그가 대학에 가든 안 가든 자신이 혜원에게 실망할 일은 결코 없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안 가준다면 고마워서 업고 다닐지도 모를 마당에 실망이라니? 하지만 기쁨도 잠시, 윤결은 지금 혜원의 휴학 발언이 단순한 변덕임이 아님을 느끼고는 물기 어린 그의 눈가를 어루만져주며 말했다.

“내가 감히 어떻게 우리 혜원이한테 실망해. 네가 대학을 가도 가지 않아도, 나에겐 세상 누구보다 소중하고 귀여운 혜원이야. 그러니까 네가 원하는 대로 해 혜원아.”

“그럼 나 휴학할 거야. 혜윤이 이름으로 대학 다니고 싶지 않아 형.”

진심 어린 윤결의 말에 안심이 된 듯 혜원이 살며시 그의 품으로 파고들며 중얼거렸다.

그제야 윤결은 혜원의 복잡한 마음이 모두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는 이 모든 게 자신의 욕심에서 시작된 일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원에게 다시 모든 걸 제자리로 돌리자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어쩌면 포기해야 하는 게 더 많아질 혜원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했지만, 그는 한 번 더 욕심을 내기로 했다. 윤결은 다정한 손길로 혜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다니지 마 혜원아. 그냥 형이랑 같이 있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형이 지켜줄 테니까 넌 그냥 지금처럼 내 옆에만 있어.”

알겠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혜원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

혜원은 결국 휴학 신청을 했다. 물론 양가 가족 중 그 누구도 휴학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번 기회에 신부수업이라도 받으라는 듯 오히려 혜원의 집에서는 휴학을 반기기까지 했다.

시집간 후로 도통 얼굴을 안 보여주는 딸내미가 못내 서운한 듯 휴학한 김에 자주 집에 오라는 부모님의 부탁. 마음 여린 혜원으로서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이었다.

사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혜원이 집에 가지 않은 지도 벌써 여러 달이 지났다. 그동안은 민감한 수험생이란 타이틀과 바쁜 인턴 생활을 핑계로 어영부영 넘어갈 수 있었지만, 새해에는 꼭 윤결과 함께 집으로 오라는 부모님의 간절한 부탁에 혜원은 알겠다고 대충 얼버무렸었다. 역시 거짓말하면서 사는 건 이래저래 너무도 고달픈 일이었다.

“하아…. 진짜. 답답해. 이러다 정말 들킬 것 같아.”

시무룩한 얼굴로 복사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한숨을 짓는 혜원을 발견한 윤결이 살며시 뒤로 다가와 그의 어깨를 감싸며 물었다.

“대체 이번엔 또 뭐가 문제야?”

“앗! 깜짝이야.”

화들짝 놀란 혜원이 서류들을 후드득 떨어트리며 뒤를 돌아봤다. 자신은 머리가 복잡해 죽겠는데, 이놈의 인간은 뭐가 그리 좋아서 맨날 싱글벙글한지! 울컥 화딱지가 났다가도 자꾸만 자신을 보며 방긋방긋 웃는 그의 다정한 얼굴에 슬며시 또 화가 가라앉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잘생긴 얼굴에 흠뻑 빠져 이 말도 안 되는 계약 결혼을 이어가는 자신이 제일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황한 듯 빨개진 얼굴로 눈을 치켜뜬 혜원의 모습에 윤결이 떨어진 서류들을 주워 그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또 혼자 되지도 않는 고민하지 말고 털어놔 봐. 이번에 뭐가 또 걱정돼서 이렇게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는 건데?”

“몰라요. 회사에선 제발 갑자기 이러지 좀 말아요. 하아…. 정말….”

혜원은 윤결이 건네준 서류들을 탁탁 정리하여 복사기 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고민을 말한다 한들, 뭐 또 혜윤이로 변장하고 가면 된다고 가볍게 넘길 거면서. 가끔은 저만 이런 고민을 하고 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너무도 당당하고 태연한 윤결이 태도가 신기해 보이기까지 했다.

물론 부모님도 가끔 혜원과 혜윤을 구별 못 한 적이 있긴 했지만, 그건 초등학생 때였고 지금은 아무리 바꿔치기를 한다 해도 분명 들킬 것이란 생각에 혜원의 한숨이 늘어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한편, 꼬맹이 주제에 걱정은 뭐가 그리 많은지. 윤결은 또 혼자 속으로 끙끙거리는 혜원을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났다. 사실 혜원의 부모님께 전화를 받은 건 윤결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구정에는 꼭 혜윤과 함께 집에 오라는 말에 윤결도 웃으며 알겠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윤결의 그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진작부터 윤결은 자신에게는 은인이지만,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인 강혜윤 그녀를 이 계약에 끌어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혜원아. 내가 다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 너는 그냥 내 옆에 잘 붙어있기만 하면 돼. 알았지?”

“뭐래요. 됐어요. 칫. 복사해서 갈게요 먼저 가 계세요.”

“그래. 형아 외로우니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고 빨리 와. 알았지?”

윤결은 이번엔 꽤 오래 토라져 있다는 생각에 어서 마음 풀고 오라는 듯 그의 작은 엉덩이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아 정말!! 그 손 좀!”

혜원은 안 그래도 머릿속이 터질 것 같은데, 능글거리며 자신의 엉덩이를 만지작거리는 윤결의 손을 세차게 내치며 소리쳤다. 정말이지 계약이고 뭐고 이러다 제 심장이 먼저 폭발해 저세상으로 갈 판이었다.

씩씩거리는 혜원을 잠시 혼자 두고 사무실로 돌아온 윤결은 바로 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끝까지 오지 않겠다고 하면 스스로 오게 만들어 버리면 그만이란 생각에 윤결은 입가에 미소까지 지은 채 그녀가 전화를 받기를 기다렸다. 어차피 그녀의 약점은 자신이 쥐고 있으니 말이다.

[여보세요? 이게 누구야, 호적상 남편님?]

“강혜윤. 인제 그만하고 돌아오지?”

[뭘 그만 해요? 그리고 돌아가긴 누가 돌아간다고 그래요? 저는 아직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 그럼 혜원이는 대체 어떻게 하려고?”

[당신이 조금만 더 데리고 있어요. 걔 말도 잘 듣고 귀엽고 착해서 아직까지 데리고 사는 데 아무 문제 없잖아요? 안 그래요?]

“너 진짜 이기적인 거 알지? 너 때문에 혜원이가 얼마나!! 하아…. 그 녀석 요즘 많이 힘들어. 돌아와서 정리 좀 하자.”

[참나. 이런 말도 안 되는 결혼은 계획한 어른들이 이기적인 거지 내가 뭘요? 나 그리고 남자친구 생겼단 말이에요. 못 가요. 우리 달링이랑 절대 못 헤어져요. 당신 같은 꼰대 아저씨랑은 비교도 안 되는 우리 허니를 두고 내가 어떻게 가요?]

“그래? 그럼 그 귀엽고 예쁜 강혜원. 내가 데리고 산다. 평생. 내일 당장 부모님께 말하지 뭐.”

[뭐, 뭐라고요?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요? 누굴 평생 데리고 살아요?]

“강혜원. 착하고 귀엽고 순진하고 예쁜 강혜원. 내가 데리고 산다고. 안 그래도 딱 내 스타일이라 어떻게 잡아먹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잘됐네. 이번에 다 밝히고 혜원이 내가 데리고 살지 뭐.”

[야 이 미친! 당신 혜원이한테 손가락 하나 댔단 봐! 가만 안 둬! 우리 혜원이 건들기만 해봐 이 변태야!]

생각지도 못한 윤결의 반격에 당황한 혜윤의 절규가 터져 나왔다. 감히 동생 혜원을 넘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특히 윤결의 성향을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혜원을 들이민 자신의 크나큰 실수에 그녀는 분노했다.

“그러니까, 그 귀여운 혜원이 홀라당 나한테 먹히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당장 튀어 오든가. 뭐 나도 달링인가 뭔가 하는 놈이랑 네가 헤어지는 건 바라지 않아. 하지만, 그 전에 너도 혜원이를 위해 뭔가 해줘야 하지 않겠어? 긴말 안 해. 당장 한국으로 날아와.”

[야!! 한윤결!!]

비명에 가까운 혜윤의 외침에도 윤결은 거침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미끼는 던졌고 이제 그녀가 한국에 오는 건 시간문제였다.

**

윤결의 전화를 받고 난 혜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혜준에게 들키고 난 뒤, 윤결이 모든 걸 알게 됐다는 걸 알았을 때도 이렇게 초조하진 않았다. 자신이 돌아가지 않으면 모든 게 알아서 해결될 거라 생각했다.

물론 시간은 걸리겠지만 이 말도 안 되는 정략결혼도 없던 일이 되고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가겠지란 생각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감히 윤결이 순진한 혜원에게 손을 대려 한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상황이 180도 바뀌어버렸다.

이 늑대 같은 인간이 언감생심 혜원을 노린다는 생각에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짓을 벌였는지 깨닫게 된 혜윤은 몰래 한국에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사랑스러운 자신의 허니를 지키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래도 누나로서의 양심이 있지, 하나뿐인 동생을 늑대의 주둥이에 던져 놓고 방관할 수는 없었다.

“혜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그녀의 말처럼 금발에 푸른 눈을 한 귀여운 강아지상의 필립이 갑자기 어둡게 굳은 그녀의 모습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나 잠시 한국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한국에? 왜? 무슨 일 있어? 다시 돌아오는 거지?”

갑자기 전화 한 통에 한국에 돌아간다는 혜윤의 말에 필립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그녀의 두 손을 움켜쥐며 물었다. 어딘가 모르게 동생 혜원과 비슷할 정도로 눈물이 많고 귀여운 필립의 모습에 혜윤은 그의 머리를 다정스레 쓰다듬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우리 귀여운 달링을 두고 가는데, 최대한 빨리 올게.”

“정말? 나 얌전히 기다리면 되는 거야? 하지만 혜윤이가 보고 싶으면 어떡해? 보내기 싫다….”

그녀와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필립이 시무룩해진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몸이 약해 병원 생활이 잦던 필립은 또래 친구가 없었다. 그래서 옆집에 이사 온 씩씩하고 당찬 소녀 혜윤에게 첫눈에 반해 버렸고, 금발의 파란 눈동자를 가진 귀여운 필립이 딱 이상형이었던 혜윤의 프러포즈로 둘은 만나자마자 사귀는 사이로 발전하게 된 것이었다.

혜준이 출근하고 나면 심심했던 혜윤은 거의 매일 필립과 함께 지내다시피 했고, 이젠 필립 또한 그녀 없이는 하루도 혼자 지내지 못할 지경까지 이르고야 말았다.

“안 되겠다. 필립 너 짐 싸. 같이 가자. 너 혼자 두면 불안해서 안 되겠어.”

“뭐? 가, 같이? 정말?”

같이 가자는 혜윤의 말에 필립이 반색을 하며 그녀를 쳐다봤다. 한국이라는 곳을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었지만, 그녀와 함께라면 어디든 상관없을 것 같았다. 이미 혜윤의 스파르타 교육으로 한국어도 곧잘 하는 필립. 그녀와 함께 하는 첫 여행이라 그런지 필립은 한국으로의 여행이 기대되기까지 했다.

그렇게 혜윤은 남자친구 필립을 대동한 특별한 한국행을 준비했다. 한국에는 윤결에게만 말하고 가는 극비리 출국인 만큼 혜준에게도 입단속을 단단히 시켰다. 절대 이 일이 부모님 귀에 들어가지 않게 말이다.

보기 있기만 해도 아슬아슬한 혜윤과 윤결의 이 황당한 계약을 지켜보는 혜준의 한숨은 늘어만 갔다. 여태껏 눈 감고 있다가 지금 와서 안 된다고 말릴 수도 없고, 제발 이번 기회에 한윤결 그 자식이 모든 것을 제대로 돌려놔 주길 바랄 뿐이었다.

**

주말이면 늘 늦잠을 자던 윤결이 오늘따라 나갈 준비로 분주해 보이자, 혜원이 빼꼼히 문을 열고 나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물었다.

“형 어디 가? 응? 나도 같이 가? 나는? 나는 준비 안 해도 돼?”

“저리 좀 가 있어. 형 바빠.”

“칫!”

윤결은 한 번도 주말에 혜원을 혼자 집에 두고 나간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이상하게 같이 가자는 말도, 어딜 간다는 말도 없이 혼자서 나갈 채비를 하는 윤결의 모습에 혜원도 슬슬 화가 나려 했다.

어느덧 준비를 마친 윤결이 차 키를 집어 들며 혜원을 향해 말했다.

“금방 다녀올 테니까 집 어지르지 말고 얌전히 있어. 배고프면 뭐 시켜 먹고. 아무나 문 열어주지 말고. 알았지?”

“아, 뭔데? 어디 가는데!! 말해주고 가! 아니면 못 가!”

궁금증이 폭발해버린 혜원이 재빨리 윤결의 허리에 매달려 그를 못 가게 막아서며 소리쳤다. 귀여운 혜원의 반발에 윤결은 번쩍 그를 들어 올려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형한테 뽀뽀해 주면 말해줄게.”

“뭐…. 뭐??”

뽀뽀라는 말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혜원이 당황한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아니 갑자기 뽀뽀라니! 궁금한 건 궁금한 거였지만, 뽀뽀라는 말은 아직도 소심한 혜원에겐 낯부끄러운 말이었다.

“아니 키스를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뽀뽀해달라는데, 설마 그것도 못 해줘? 부부 사이에?”

“부, 부부라니! 뭐래 이 아저씨가 정말!”

“그럼 우리가 부부가 아니면 뭔데? 같은 집에 살고, 같은 침대에서 자고 일어나고. 이렇게 안아도 주고 재워주고, 먹여주고 달래 주고. 이런 우리가 부부가 아닌 게 더 이상하지 않아? 자, 빨리해줘. 형 시간 없어. 싫으면 말고.”

“아, 알았어. 잠깐만. 누, 눈 감아.”

혜원은 슬쩍 그의 눈치를 살피더니 재빨리 손바닥으로 윤결의 눈을 가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가 보는 앞에서는 도저히 뽀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나마 이렇게 눈을 가리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혜원은 짧게 심호흡을 하며 윤결의 입술에 조심스럽게 뽀뽀를 했다. 하지만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윤결이 아니었다. 그는 재빨리 한쪽 손을 들어 혜원의 뒤통수를 잡아 고정시키며 그의 입술을 삼켰다.

“웁! 흐읍!”

깜짝 놀란 혜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결을 노려봤으나, 그는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는 듯 더욱 거침없이 혜원의 혀를 물고 빨며 질척이는 키스를 이어갔다. 순식간에 둘의 입가에는 누구 것인지도 모를 타액이 흥건히 흘러넘쳤다. 헐떡이는 혜원의 가쁜 호흡에 윤결이 천천히 그의 입술을 놓아주며 눈물이 촉촉이 배어드는 그의 눈가에 가볍게 키스를 하며 말했다.

“역시 우리 혜원이 입술이 제일 맛있다. 형 다녀올게. 올 때, 우리 혜원이 기뻐할 선물 가지고 올 테니까 기대해.”

갑작스러운 키스에 정신이 멍해 있던 혜원은 어느덧 시야에서 사라져가는 윤결을 뒷모습에 정신이 퍼뜩 돌아온 듯 제 입술을 벅벅 문지르며 소리쳤다.

“이 거짓말쟁이 변태 아저씨야! 집에 오기만 해봐! 씨!”

이번엔 자신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단단히 다짐한 혜원. 그는 깔끔한 윤결이 제일 싫어하는 방법으로 그를 놀래줄 깜찍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

윤결은 늦지 않게 서둘러 공항으로 향했다. 까칠한 그녀의 성격상 혹시라도 늦으면 또 무슨 트집을 잡을지 몰랐다.

남자친구와 함께 온다는 말에 왠지 성가신 일이 생길 것 같아 귀찮긴 했으나, 이번에 말끔히 정리해야 혜원과 좀 더 안정적인 신혼을 즐길 수 있다는 생각에 마지못해 허락했었다.

그래도 사랑을 찾겠다 이 사달을 만들고 도망친 그녀가 떡하니 남자친구와 함께 귀국이라니. 역시 강단 있는 그녀의 당찬 성격은 알아줘야 했다.

공항에 도착해 그녀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던 윤결은 멀리서 혜원과 똑 닮은 얼굴이지만 묘하게 차가운 냉기를 풍기며 독기 품은 눈빛을 하고 나오는 혜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는 아무리 쌍둥이라도 풍기는 분위기까지는 닮을 수 없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역시 귀여운 혜원과 살기를 백번 천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혜윤! 여기!”

“거기서 딱 기다려요!”

씩씩거리는 혜윤의 뒤를 겁먹은 강아지처럼 쫄래쫄래 따라오는 푸른 눈의 외국인. 설마 사귄다는 남자친구가 또 외국인이었어? 윤결은 자신만큼 대책 없는 혜윤의 자유분방한 연애에 혀를 찼다. 정말 어른들이 모르시는 게 다행이지, 아셨다간 둘 다 머리 밀고 절로 쫓겨날 판이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우선 집으로 가서 이야기하지?”

윤결은 대놓고 한 대 칠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의 코앞에 바짝 다가온 혜윤의 어깨를 살짝 돌려세워 주차장으로 향하며 말했다. 혜윤이 왜 화가 나 있는지 영문을 모르는 필립은 어색한 웃음으로 윤결에게 인사를 하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차에 오른 뒤에도 냉랭한 공기만 풍기는 혜윤과 윤결 사이에서 눈치만 살피던 필립이 살며시 혜윤의 손을 잡아 왔다. 순간 혜윤은 굳었던 얼굴을 피며 필립의 손을 살살 어루만지며 말했다.

“괜찮아 필립. 저 인간한테서 내 동생만 구해내면 바로 다시 돌아갈 거야.”

“응!”

혜윤의 다정한 말 한마디에 금세 기분이 좋아져 헤실거리는 필립. 백미러 뒤로 보이는 둘의 알콩달콩한 모습에 윤결은 갑자기 집에 두고 온 혜원이 더욱 보고 싶어졌다.

저 필립이라는 노랑머리 강아지도 나름 귀엽긴 했지만, 집에 있는 강혜원 다람쥐 녀석이 백배는 더 귀여우니 말이다.

**

그 시각, 윤결이 누굴 데리러 갔는지 알 리 없는 혜원은 무슨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 결의에 찬 눈빛으로 윤결의 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실 윤결이 집에 없어도 그의 방만큼은 멋대로 들어간 적 없었다.

물론 들어갈 일도 없었지만, 그의 개인적인 공간에 함부로 들어가는 건 예의 없는 짓이라 생각해 왔기에 여태껏 한 번도 허락 없이 들어가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혜원은 이번만큼은 자신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겠다는 듯 성큼성큼 그의 방으로 들어가 지난번 크리스마스 때 윤결이 회사에서 받아 들고 온 초콜릿을 몰래 꺼내 들었다.

단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혜원이었건만, 이상하게 윤결은 이 초콜릿만은 그에게 주지 않고 숨겨버렸었다. 예쁘고 작은 술병 모양의 고급스러워 보이는 초콜릿을 본 순간 혜원은 재빨리 그의 침대에 누워 초콜릿을 하나둘 까먹기 시작했다.

달콤 쌉쌀한 초콜릿과 함께 알싸한 액체가 입 안에서 펑 터져 나오자 혜원은 순간 눈을 찡그리며 한 번에 꿀꺽 삼켜 버렸다.

“으윽…. 이거 뭐야. 안에 뭐가 들은 거야. 되게 쓰네….”

처음 맛보는 위스키의 맛. 그다지 혜원이 좋아하는 맛은 아니었다. 하지만 윤결이 애지중지 숨겨둔 초콜릿을 모조리 먹어 치워 버리겠다 결심한 혜원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바로 다음 초콜릿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렇게 한 개 두 개 집어먹다 어느덧 열 개나 먹어 치워 버린 혜원은 슬슬 몸에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얼굴도 벌게지고 정신도 몽롱해지는 것이 아무래도 처음 접하는 술이 그에게 영 맞지 않는 듯했다.

갑자기 더워지고 몸에서 열이 나자 혜원은 입고 있던 잠옷 바지를 벗어 던지며 침대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내친김에 상의도 벗어 버리고 싶었으나 첫 단추에서 손가락이 미끄러져 버리자, 이내 귀찮은 듯 혜원은 단추 푸는 것을 포기하며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혼자만 이런 거 숨겨 놓고 먹고. 뭐 그렇게 맛있는 것도 아니구먼…. 히끕…. 치사하게 숨기고 그래…. 칫….”

반쯤 취한 채로 침대에 누워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이리저리 휘젓던 혜원은 문득 그가 자신 몰래 또 맛있는 것을 숨겨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형, 혹시 이거 말고 또 다른 것도 숨겨 놓은 거 아니야? 이씨…. 이번에 내가 다 털어먹어 줄 거야. 흥.”

낑낑거리며 힘겹게 몸을 일으킨 혜원은 다짜고짜 그의 옷장 문을 거침없이 열어젖혔다. 하지만 깔끔한 윤결의 성격을 보여주듯 정갈히 걸려 있는 셔츠들과 정장들뿐 옷장에는 딱히 특별한 게 없어 보였다. 시무룩해진 혜원이 옷장 문을 닫으려는 찰라, 옷장 구석 모퉁이에 놓인 검은색 상자가 그의 눈에 띄었다.

“흐음?? 뭐지? 웬 상자?”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옷장 안을 비집고 들어가 발견한 상자. 왠지 열면 안 될 것 같은 위화감마저 풍기는 상자를 빤히 쳐다보던 혜원은 배시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손으로 가리며 상자를 끄집어냈다. 무언가 엄청나게 맛있는 게 숨겨져 있을 거란 생각에 혜원은 거침없이 상자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또 나 몰래 혼자 먹으려고!!”

신나게 상자를 열어 안을 살펴보던 혜원은 순간 당황한 듯 손을 멈춘 채 멍하니 상자 속에 담긴 물건들을 쳐다봤다. 동물의 귀가 달린 머리띠와 털이 보송보송 달린 커다란 털 뭉치. 대체 이건 뭣에 쓰는 물건인가 싶은 혜원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그것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가죽끈 같은 것도 보이고, 끝에 깃털이 달린 얇고 긴 막대기와 노란 방울이 달린 작은 목걸이까지! 전혀 예상치 못한 물건들에 혜원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중얼거렸다.

“뭐야? 설마…. 고양이라도 입양하려고? 이거 혹시 고양이 장난감인가?? 앗! 혹시 집에 혼자 있으면 심심할까 봐 나 몰래 준비한 선물인가?”

갑자기 얼굴에 급 화색이 돌기 시작한 혜원은 순간 조금 전 윤결의 소중한 초콜릿을 먹어 치운 것이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이, 이럴 거면 미리 알려주지. 헤헷…. 고양이, 고양이….”

어렸을 때부터 동물을 키우고 싶어 했으나,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던 혜윤 때문에 키우지 못한 게 한이라면 한이었었다. 술도 마셨겠다 기분까지 좋아진 혜원은 귀가 동글납작한 머리띠를 집어 들어 제 머리에 뒤집어썼다. 내친김에 방울 목걸이까지 목에 달고는 방 안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 혜원. 그렇게 그의 귀여운 주사가 시작되어 버렸다.

“고양이는 대체 언제 사주려고 이런 걸 준비했데? 헤헷…. 내 생일? 아닌데 내 생일은 아직 멀었는데. 사주려면 빨리 사주지.”

마치 고양이라도 된 것처럼 방 안을 날뛰던 혜원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멍하니 거울을 쳐다보며 말했다.

“근데 귀는 고양이 귀가 아닌데…. 넌 누구냐? 호랑이냐 곰이냐! 아 맞다. 아까 그 털 뭉치!”

혜원은 재빨리 상자 속을 뒤져 복슬복슬한 갈색 털 뭉치를 꺼내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털 뭉치 가운데에 삼각형 모양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부분을 보니 어딘가에 넣어야 하는 건가? 싶은 생각에 양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심각한 고민에 빠진 혜원. 그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과 손에 달린 털 뭉치를 번갈아 보며 중얼거렸다.

“흐음…. 이렇게 보면 내가 뭐 다람쥐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정말이지 술에 취해 벌게진 얼굴로 동물 귀가 달린 머리띠를 한 혜원의 모습은 입 안 가득 도토리를 가득 숨긴 다람쥐와 얼추 비슷해 보이기까지 했다. 도대체 이 꼬리를 어떻게 다는 건가 싶어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는 사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윤결의 목소리가 들렸다.

“혜원아?”

분명 소파에 누워 티브이를 보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혜원이 보이지 않자, 불안해진 윤결이 재빨리 혜윤의 짐을 바닥에 내팽개치며 혜원의 방 문을 열었다. 하지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야 강혜원!! 어딨어!”

윤결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덩달아 긴장한 혜윤이 그를 밀치고 거실로 들어서며 혜원을 불렀다.

“야 강혜원! 누나 왔어! 좋은 말로 할 때 튀어나와라!”

그때였다. 별안간 윤결의 방 문이 벌컥 열리더니 술에 취해 휘청이는 몸으로 혜원이 윤결을 향해 달려 나오며 소리쳤다.

“윤결 형아!! 헤헷!”

“너!! 너 지금!!”

그 누구 하나 입도 뻥긋하지 못하는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술에 취해 하의까지 탈의하고 귀여운 머리띠를 한 채 윤결에게 안겨든 혜원. 세상 귀엽고 야릇한 그의 모습에 윤결의 심장은 요동을 쳐댔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그가 이런 모습으로 제 앞에 나타나서는 안 되는 타이밍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혜원의 깜짝 사고에 사색이 된 윤결이 번쩍 그를 안아 들고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내려놓으라 발버둥 치는 혜원을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히며 윤결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너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내 방에는 왜 들어갔어?”

“응? 내가 뭐? 형이 먼저…. 히끕. 거짓말하고 막 나 속이고…. 히끕.”

“어쭈? 이게 술까지 마셨어??”

“아니? 나 초콜릿 먹었는데? 그게 왜 술이야?”

“너 설마…. 내 방에 있는!”

윤결은 제발 혜원이 도수 높은 위스키가 잔뜩 들어간 그 초콜릿만은 먹질 않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 펼쳐진 방의 풍경은 한마디로 난장판이었다.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초콜릿 껍질들과 단단히 감춰두었다고 생각했던 문제의 검은 상자를 보는 순간 그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거실을 힐끔 쳐다봤다. 그리고 그곳엔 눈에 불을 켠 채 자신을 죽을 듯 노려보는 꼬마 숙녀 강혜윤이 서 있었다.

“하아…. 미치겠네.”

한쪽 손을 머리에 올린 채 눈을 질끈 내려 감은 윤결. 그는 앞으로 저 사고뭉치 강혜원과의 동거가 생각보다 더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지기 시작했다.

술에 취해 비몽사몽인 녀석을 다그친다 한들 꼬일 대로 꼬인 이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 않아 윤결은 우선 그를 재우기로 했다. 팔짱을 낀 채 무섭게 노려보는 혜윤을 살짝 밀어내며 혜원의 방으로 들어가는 윤결. 그는 뒤통수가 타들어 갈 것 같은 강렬한 찌릿함에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지금 이 상황이 어이없는 건 나도 이해하는데, 우선 저 녀석 좀 재우고 우리 이성적으로 대화하자 강혜윤.”

“이성 같은 소리 하시네. 술도 못 마셔본 녀석한테 술이나 퍼먹인 사람하고 무슨 이성적인 대화?!”

“아니 진짜! 내가 준 거 아니거든? 하아…. 됐고. 우선 저 시끄러운 자식 재우고 나올게. 기다려.”

하지만 혜원의 방으로 들어간 윤결이 살며시 문을 닫으려 하자, 혜윤이 재빨리 그를 따라 들어가 윤결의 손을 쳐내며 소리쳤다.

“문 닫고 자는 애한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문 열고 재워!”

“야, 나도 자는 애 건드릴 만큼 정신 나간 놈 아니거든!?”

“그런 사람이 애한테 술을 먹여!”

“내가 안 먹였다고!!”

“혜원이가 먹을 수 있는 곳에 놓아둔 것 자체가 잘못인 거지!”

“야, 막말로 혜원이가 애냐? 저 녀석 이래 봬도 성인이야. 술 좀 마실 수도 있지!”

“뭐, 뭐라고? 저 녀석한테 술 먹이고 뭐 하려고? 대체 당신 혜원이한테 술 먹이고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거야?”

“무, 무슨 짓?? 와, 진짜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렇게 소중한 동생을 나한테 떠넘기고 간 사람이 누구더라? 네가 버리고 간 강혜원 내가 주워서 잘 키워주고 사랑해 주는데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뭐라고? 이 인간이 진짜! 말이면 다야? 이씨!”

-퍽!

“혜, 혜윤아!”

분을 참지 못한 혜윤이 윤결의 정강이를 발로 걷어차며 씩씩거리자, 놀란 눈으로 둘의 눈치만 보던 필립이 재빨리 달려와 그녀를 자신의 뒤로 돌려세웠다. 역시 겁은 많아서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혜윤만은 지키겠다는 듯 윤결의 앞을 막아선 필립. 그는 눈을 질끈 감으며 큰 소리로 윤결에게 부탁했다.

“미, 미안해요! 혜윤이 때, 때리지 마세요. 차라리 절 때리세요!”

“뭐? 때려? 하아…. 가지가지 하네 진짜. 됐고, 어이 거기 노랑머리. 너는 저 천방지축 혜윤이나 잘 지키고 있어. 이따 다시 얘기해.”

“야! 변태! 너 어딜 들어가!”

혜윤은 쾅 하고 방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윤결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혜윤아 그만 참아, 응? 말로 해, 말로.”

한국에 오자마자 이게 무슨 난리인지. 심장이 폭발할 것처럼 두근거리던 필립은 혹시나 그녀가 또다시 윤결에게 달려들다 맞기라도 할까 봐 필사적으로 그녀를 말렸다.

그나마 제일 이성적인 필립의 판단으로는 지금은 우선 그녀를 진정시키고 찬찬히 윤결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아 짜증 나 정말. 강혜원 저 바보 멍청이는 진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제풀에 지친 혜윤이 소파에 털썩 내려앉으며 윤결이 들어간 방을 뚫어지게 노려봤다. 그리고 그가 한 말 중 자신의 뼈를 때리는 한마디가 내내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소중한 동생을 나한테 떠넘기고 간 사람이 누구였더라!’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혜원을 저런 시커먼 늑대의 입에 집어넣은 것이 자신이라는 생각에 깊은 자책을 했다.

설마 윤결이 남자를 좋아하는 성향이었을 줄이야. 물론 자신과의 결혼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며 각자의 프라이버시만 지켜주면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을 때부터 의심했었어야 했다. 오직 이 족쇄 같은 결혼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너무 그를 쉽게 본 게 실수라면 실수였다.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에 혜윤의 얼굴이 계속 어둡게 굳어있자 걱정된 필립이 살며시 그녀를 안아주며 말했다.

“혜윤아.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지켜줄게. 이번엔 내가 너 꼭 지켜줄게. 그러니까 인상 펴. 응?”

“뭐래. 필립. 너는 그럴 필요 없어. 그리고, 너 아까 꽤 용감하던데? 나 대신 맞아주려고 했어?”

“어? 그래도…. 내가 맞는 게 네가 맞는 거보단 나을 것 같아서. 내가 남자친구이고, 그래도 내가 남자고…. 또….”

“그러지 마. 필립.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절대 너를 함부로 하지 마. 그게 비록 나를 위한 일일지라도. 난 네가 다치면 가슴 아프단 말이야. 그러니까 절대 내 앞에서 다치지 마 필립.”

“너 꼭 내 엄마처럼 말한다? 너는 내 애인이지 엄마가 아니거든? 내가 걱정하는 게 싫으면, 그런 일을 만들지 말든가. 나는 앞으로도 네가 위험에 빠지면 가장 먼저 너를 구하러 갈 거니까.”

필립이 다정스럽게 혜윤의 이마에 키스를 하며 말했다. 물론 윤결에게 대드는 건 겁이 났으나, 그래도 혜윤이 다치는 건 볼 수 없었다. 씩씩하고 늘 강한 척하는 그녀였지만, 속마음은 누구보다 여린 사람이라는 걸 필립은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필립은 더더욱 그녀의 편이 되어 주고 싶었다.

**

“우리 형아 나 몰래 고양이 키우려고 했어? 응응? 나 고양이 되게 좋아하는데…. 헤헤….”

아직도 무슨 고양이 타령을 하며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혜원을 보니 윤결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숨긴다고 숨긴 건데, 어떻게 그걸 또 찾아 먹었는지. 도수가 높은 것이라 혜원 몰래 술이 생각날 때 하나씩 먹으려고 했던 것을 한꺼번에 한 판을 다 먹어 치운 녀석이 오늘따라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가 먹는 건 상관없었다. 하지만 왜 하필 그걸 오늘 먹었느냔 말이다. 그리고! 문제의 다람쥐 귀와 꼬리! 이건 정말이지 윤결조차도 잊고 있었던 물건이었다.

“아 진짜…. 그 녀석은 왜 그때 이걸 보여줘서는….”

물론 혹하는 마음에 받아 든 건 자신이었지만, 이걸 들킬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솔직히 윤결은 지금 혜원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귀엽고 깜찍한 혜원의 모습에 만약 혜윤만 아니었다면 어쩌면 오늘 밤 윤결은 정말로 그를 잡아먹었을지도 몰랐다.

“형아 나는 어떤 고양이가 좋냐면…. 음냐…. 꼬리가…. 막 이렇게 풍성하고….”

순간 혜원이 손에 들린 다람쥐 꼬리 털 뭉치를 제 엉덩이에 비벼대며 중얼거렸다. 다행히 속옷은 입고 있어 제대로 넣지는 못했지만, 혜원은 본능적으로 꼬리를 제 엉덩이 틈 사이로 밀어 넣으려 하고 있었다.

“아, 알았어. 혜원아. 고양이든 다람쥐든 다 사줄 테니까 지금은 얌전히 자자 응?”

당황한 윤결이 재빨리 혜원의 손에서 꼬리를 뺏으려 했으나 혜원은 손가락에 더욱 힘을 주어 꼬리 털을 뺏기지 않으려 와락 움켜쥐며 소리쳤다.

“내 꼬리 건들지 마! 내 꼬리야. 내 거라구…. 꼬리는 엉덩이에 있는 건데…. 내 엉덩이에는 왜 꼬리가 없지. 꼬리 달아줘 꼬리…. 흐잉….”

“야, 손 좀! 아니 오늘따라 왜 이렇게 힘이 세? 미치겠네! 정말.”

과하게 귀여운 애교 섞인 혜원의 술주정. 윤결은 날아가기 일보 직전의 이성을 최대한 끌어모으며 꼬리 뺏기를 포기한 채 혜원에게 이불을 덮어 주며 말했다.

“좋게 말로 할 때 곱게 자라 강혜원. 그래도 너는 이대로 잠이라도 잘 수 있지, 나는 지금부터 거실에서 날 기다리는 강혜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방어를 해야 한다고. 그래도 나 하나 죽는 게 낫지. 우리 혜원이는 내가 지킨다. 형만 믿어. 강혜원.”

꼬리 타령을 하며 소란을 피우던 혜원은 어느새 새근새근 귀여운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들었다. 붉게 물든 혜원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윤결은 잠결에도 놓지 않고 꽉 쥐고 자는 꼬리를 그대로 그의 손에 쥐여주고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

혜원이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는 윤결을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보는 혜윤. 빨리 와서 앉으라는 그녀의 소리 없는 협박성 눈빛에 윤결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그녀의 앞에 앉았다.

솔직히 누가 봐도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기에 윤결에 대한 그녀의 불신은 하늘을 찔렀다. 데리고 있으랬더니, 마치 무슨 애완동물처럼 조련시키고 있는 그의 모습에 혜윤은 기가 막혔다.

처음엔 혜원이 제 이상형이고, 좋아하고 데리고 살고 싶다는 윤결의 말이 그저 저를 한국에 불러들이기 위한 미끼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어쩌면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윤은 불길했다. 그리고, 문제는 그런 혜윤의 동물적 감각은 언제나 적중했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로 술은 내가 먹인 거 아니야. 내가 선물 받은 초콜릿이 있는데, 알코올이 들어간 거라 내 방에 숨겨뒀었어. 아마도 혜원이 그걸 몰래 찾아서 먹은 것 같아. 뭐 아무튼, 내가 더 잘 숨겼어야 했는데 그건 미안해.”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윤결은 이 사건의 발단이 되었을 그 망할 초콜릿에 대해 설명을 했다.

“좋아, 그럼 다음. 혜원이 머리에 있는 그 유치한 머리띠, 목줄, 그리고 그 불결한 꼬리!! 대체 뭐야?”

입에 올리기도 싫다는 듯 혜윤이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 순진한 혜원과는 달리 그 물건들이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혜윤이 사납게 윤결을 노려보며 물었다.

“아. 그건….”

역시 아무리 당당한 윤결이라도 이 부분에서는 깨갱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물건을 받아 온 것 자체가 사실 언젠가 혜원에게 입혀보고 사용해 보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었기에, 윤결은 낮게 신음을 뱉으며 난감해했다.

“왜? 이건 뭐 다른 사람한테 사용하려고 했는데 재수 없게 혜원이 먼저 발견한 거라고 왜 말 못 해?”

혜윤은 차라리 윤결이 이렇게 말해주길 은근 바라며 비꼬듯이 쏘아붙였다. 하지만 윤결은 굳이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모든 걸 바로 잡고 혜원을 제 사람이라 통보하기 위해 그녀를 부른 것이기에 한 번은 부딪혀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뭐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지만, 언젠가는 혜원이와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준비한 건 맞아.”

“뭐라고??”

순간 혜윤의 눈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는 듯 그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윤결의 멱살을 잡아챘다. 알게 모르게 어렸을 때부터 혜원을 지켜온 건 쌍둥이 누나 혜윤이었다. 절대 이런 변태에게 갖다 바치기 위해 지켜온 동생이 아니란 말이다! 혜윤의 거친 돌발 행동에 식겁한 필립이 재빨리 그녀를 윤결에게서 떼어내며 말했다.

“혜, 혜윤아, 말로 하라니까. 응?”

“이게 지금 말로 해서 될 문제야? 저 자식 하는 말 들었어? 저딴 불결한 물건을 감히 누구한테 쓴다고?”

필립에게 양손이 붙잡혔음에도 분이 풀리지 않은 혜윤이 이번엔 마구잡이로 발길질을 해대며 발악을 했다. 하지만 윤결은 말없이 그녀의 행패를 모두 받아주었다. 이렇게라도 그녀의 화가 풀린다면 맞아주는 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윤결이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자 혜윤은 안 되겠는지 마음을 바꿔 혜원의 방으로 향했다.

“하, 내가 왜 당신이랑 이렇게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는지. 혜원이 저 녀석을 잡으면 되는데 말이지. 강혜원 저 바보 녀석 진짜 아주 등짝에 불이 나도록 맞아야 정신 차리지!”

순간 혜원의 방으로 향하려는 혜윤의 팔을 거칠게 잡아채 돌려세우며 윤결이 무섭게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혜원이 몸에 손가락 하나 댔단 봐. 아무리 강혜윤 너라도 절대 용서 안 해.”

“뭐, 뭐라고?”

순간 당황한 혜윤이 발걸음을 멈추며 윤결을 쳐다봤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날카로운 그의 눈빛에는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혜윤은 깨달아버렸다. 한윤결. 그가 진심으로 혜원을 마음에 두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화풀이는 나한테만 해. 아무것도 모르는 혜원이는 건드리지 마.”

“화, 화풀이는 누가 화풀이를 한다고 그래요?”

그래도 혜원을 소중히 대하는 윤결의 진심 어린 마음을 알아버린 혜윤이 화를 살짝 누그러트리며 말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윤결은 최고의 결혼 상대임은 틀림없었다. 잘나가는 기업의 외아들이자 준수하다 못해 눈에 띄게 잘난 외모와 형식상일지는 모르겠으나 나름 다정한 성격. 몇 번 안 만나봤지만, 그와 종종 밥을 먹을 때마다 느꼈던 부분들이었다.

다만, 자신은 멋진 결혼 상대가 필요한 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싶었던 것일 뿐이었고, 그 과정에서 윤결이 밀려난 것이지 그가 결코 모자라거나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성의 가치관에 대해서도 나름 자유분방했던 혜윤은 윤결이 남자를 좋아하든 여자를 좋아하든 딱히 문제 삼고 싶지 않았다. 그게 왜 하필 제 동생 혜원이냐는 것만 빼고는 말이다.

설마 이 남자, 순진한 녀석을 꼬셔서 데리고 놀다 버리는 건 아닌지, 혜윤은 아직 윤결에 대한 신뢰도가 제로에 가까웠기에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나에게 막말하거나 화를 내는 건 참을 수 있지만, 혜원이한테까지 그러는 건 내가 못 참아. 안 그래도 너랑 나 때문에 이미 힘든 녀석이야.”

윤결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자신에겐 만족스러운 결혼생활이었고, 혜윤 또한 제 짝을 만나 자유롭게 연애도 하고 할 것 다 누리고 사는 동안, 정작 혜원만은 혼자 끙끙거리며 혼란스러워했다는 걸 윤결은 옆에서 쭉 지켜봐 왔었다.

그런 소심한 녀석이 이제야 마음을 열고 제 곁에 있어 주겠다는데, 난데없이 들이닥친 혜윤이 이를 망치게 두고 볼 순 없었다. 이젠 그게 뭐가 됐든, 그를 힘들게 하는 것들은 모두 다 제 손으로 치워 버리고 싶었다.

“당신 혜원이한테 정말 진심이야?”

혜윤 또한 너무도 진지한 윤결의 모습에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 이마에 손을 짚으며 물었다. 점점 더 이 위험한 결혼 계약이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에 혜윤 또한 마음이 복잡해졌다.

“진심이니까 너를 불러드렸겠지.”

“대체 뭘 어쩌자는 건데.”

“우선 다음 주에 너희 부모님 뵈러 가자.”

“뭐? 미친 거 아냐? 내가 거길 왜 가!! 절대 못 가! 안 가!”

새파랗게 질린 혜윤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기까지 온 것도 부모님께 다 털어놓겠다는 그의 협박과 강혜원 저 바보 녀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온 것인데, 이젠 대놓고 집으로 가자니. 혜윤의 입장에서는 놀랠 노 자였다.

길길이 날뛰는 혜윤의 모습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윤결은 미간을 찡그린 채 그녀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저 둘 사이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는 필립의 얼굴만이 새하얗게 질려갈 뿐이었다.

혜윤은 안 되겠는지 다시 짐을 싸서 미국으로 돌아가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는 일어서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편하게 앉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눈치를 보는 필립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기며 말했다.

“필립. 일어나. 우리 잘못 온 것 같아. 보아하니 저 인간 혜원이 잡아먹을 인간도 아니고, 아니 잡아먹든 말든 이제 내가 상관할 일도 아닌 것 같네. 이만 가자. 일어나 빨리.”

“혜, 혜윤아…. 그래도….”

무섭게 자신들을 노려보는 윤결의 눈빛에 필립이 그녀를 말리며 주춤거렸다. 윤결 또한 그 틈을 타 재빨리 필립의 손을 낚아채 다시 소파로 내려 앉히며 말했다.

“너희 둘만 발 뻗고 편하게 지내겠다고? 내가 그렇게는 못 놔주지!”

“필립!!”

갑자기 윤결의 품에 안기다시피 넘어진 필립을 보며 혜윤이 다시 그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소리쳤다. 하지만 윤결은 오히려 필립의 어깨를 더욱 바짝 끌어당기며 말했다.

“내가 혜원이를 마음에 뒀다는 건, 내가 어떤 성향인지 오픈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괜찮겠어? 필립을 내가 이렇게 안고 있어도?”

“뭐 이런 변태 같은 인간이 다 있어! 우리 필립한테서 빨리 손 안 떼?!”

필립의 팔을 필사적으로 잡고 늘어지는 혜윤과 절대 필립을 놓지 않겠다는 듯 더욱 그의 어깨를 강하게 끌어안은 윤결의 힘 싸움. 그 둘 사이에서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들바들 떨며 그만하라고 중얼거리는 필립의 힘없는 외침. 결국, 필립이 다칠까 봐 먼저 그의 팔을 놓아준 혜윤이 다시 소파에 내려앉으며 말했다.

“좋게 말로 할 때 필립 이리 내.”

“그럼 너도 좋게 말로 할 때, 내 계획 좀 끝까지 들어.”

“계획? 대체 또 무슨 뚱딴지같은 계획을 세웠길래 이렇게 당당해? 내가 납득할 수 없는 계획이면 정말 나, 자리에서 필립이랑 혀 깨물고 죽을 거니까 알아서 해!”

순간 필립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이기 시작했다. 죽는다니! 아니 이 머나먼 이국땅에 와서 혜윤을 구해주진 못할망정 같이 죽어버릴 거란 말에 필립은 적잖게 충격을 받은 듯했다.

마음 여리기로는 강혜원급으로 약해 보이는 필립의 희게 질린 얼굴에 윤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재수 없게 죽는다는 소리나 하지 말고 좀 진정해. 너 때문에 죄 없는 저 녀석마저 총각 귀신 만들 생각하지 말고.”

그제야 혜윤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슬쩍 필립의 얼굴을 쳐다봤다. 역시 소심하고 겁 많은 필립은 죽는다는 말이 나온 순간부터 입술까지 바들바들 떨며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필립. 미안. 내가 잘못했어, 응? 울지 마.”

어렸을 때부터 병원에서 오래 살지 못할 거란 말을 달고 살았던 필립에게 죽음이란 말은 그가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말이었다. 혜윤은 자신이 너무 흥분해 그의 앞에서 해선 안 되는 말을 해버렸다는 사실에 미안함이 밀려왔다.

“혜윤아, 바, 방법이 있을 거야. 윤결 씨가 설마 아무런 계획도 없이 너를 한국으로 부, 불렀을 리 없잖아.”

혼자 눈물을 흘린 게 부끄러웠는지 필립이 재빨리 눈물을 닦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나마 거기 노랑머리 강아지, 그래도 네가 여기서 제일 이성적이네. 저 다혈질에 앞뒤 분간 못 하고 설치는 강혜윤 혼자 오지 않은 게 어쩌면 다행인지도….”

“뭐라고?”

눈에서 불꽃이 튈 정도로 사납게 눈을 치켜뜬 혜윤이 재빨리 필립을 제 품에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정말이지 하루라도 빨리 한국 땅을 떠야겠단 생각에 그녀는 이를 갈며 씩씩거렸다.

윤결은 혹시라도 이 소란스러움에 혜원이 잠에서 깨기라도 했을까 봐 슬쩍 그의 방을 쳐다보며 다시 본론을 꺼냈다.

“일이 좀 심각해졌어.”

“뭐가?”

어느덧 진지해진 혜윤도 심각한 윤결의 모습에 화를 삭이며 물었다.

“난 혜원이와의 이 결혼생활을 포기할 생각 없어.”

“당신 진짜…. 어쩌려고!”

“그러는 너는? 어쩌려고 이 사달을 벌였어? 필립은 또 어떻게 하려고? 이 위험한 계획을 준비했을 때 너도 나름 각오를 하고 시작한 거 아니었어?”

“나는, 단지 이 결혼을 피하고 싶었을 뿐이야.”

혜윤은 속상한 마음에 입술을 꽉 짓씹으며 말했다.

“그래. 넌 그랬겠지. 하지만 난 이제 이 결혼을 지키고 싶어졌어.”

“하아…. 그러니까 한윤결. 대체 무슨 생각인 건데? 좀 알아듣게 이야기해 보라고요.”

“아무리 서류상 부부라고 해도 나 너보다 열 살은 많다. 한윤결이 뭐냐 한윤결이!”

“왜? 설마… 내가 오빠라고 불러주길 바라는 건 아니지?”

윤결은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바득바득 대드는 혜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하긴 그녀에게 오빠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것도 그다지 기분이 좋진 않을 듯했다.

“됐다. 그냥 하던 대로 이름으로 불러. 아무튼. 다음 주에는 부모님 댁에 같이 가.”

“아니 그러니까 내가 거길 어떻게 가냐고!”

“너니까 갈 수 있지! 그럼 내가 진짜 혜원이 데리고 가서 다 들통났으면 좋겠어? 됐고, 너 가서 너희 부모님께 미국 유학 간다고 해.”

“뭐, 뭐라고? 그게 가능할 거 같아? 절대 나 혼자는 안 보내줄걸?”

“나도 옆에서 도울게. 네 유학 적극적으로 찬성하면서 나도 곧 미국 지사 발령받아서 나가면 된다고 둘러댈 테니까 우선은 혜원이 숨 좀 쉬게 한국에 없는 것으로 하는 게 낫겠어. 물론 뉴욕 지사 발령이 거짓말은 아니야. 사실 예전부터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었어. 여기보단 거기가 둘이 살기 더 편하겠지.”

“한윤결. 당신 진짜 혜원이한테 진심이야?”

순간 혜윤은 그가 어쩌면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타고난 계략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층 더 불안해진 얼굴로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대체 어느 부분이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됐어? 네가 저 필립이라는 녀석과의 연애가 진심이듯, 나도 혜원이한테 진심이야. 내가 네 편이 되어 주는 대신 꼭 설득시켜. 너희 부모님 무조건 네가 설득시키라고. 그때까진 너도 한국 못 떠나. 그러니까 강혜윤, 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 또한 다 네 손에 달려있는 거야. 잘해 봐.”

입가에 당당히 미소까지 지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하는 윤결에게 뒤통수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분함을 느낀 혜윤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대신 내가 도와주는 건 여기까지야. 내가 다시 미국 들어가면 그땐 정말 우리 마주치지 말고 각자 알아서 사는 거야. 알겠어?”

“좋아. 나도 원하던 바야.”

적의 적은 동지라 했던가. 딱히 마음에 드는 계획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윤결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음에 혜원도 동의했다.

**

한편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혜원이 몽롱한 정신으로 눈을 떴다. 어둑어둑해진 창밖의 풍경에 혜원이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오다 바지도 입지 않은 자신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소리를 꽥 질렀다. 동시에 발이 꼬이며 몸의 중심을 잃은 혜원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엄마야!! 내 바지!!”

거실에서 서류를 검토하던 윤결이 방 안에서 들려오는 우당쾅쾅거리는 소리에 재빨리 일어나 혜원의 방으로 뛰어가며 그를 찾았다.

“혜원아 무슨 일이야?!”

하지만 이내 윤결은 발걸음을 멈춘 채 웃음을 참기 힘든 듯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큭큭거렸다. 방 안에는 아직까지 머리띠와 방울 목걸이를 그대로 한 혜원이 바닥에 엎어져 아픈 엉덩이를 문지르고 있었다.

“아야…. 아파라. 아니 내 바지는 어딨어? 내가 부, 분명 형 방에서 초콜릿을 먹고…. 그다음엔 뭘 했지?”

찌릿찌릿 아파오는 머리와 드문드문 끊겨버린 기억. 순간 혜원은 머리를 긁적이다 손에 닿은 보송보송한 물체에 깜짝 놀라 머리를 마구 흔들며 괴성을 질렀다.

“으아악! 머, 머리에 뭐가 있어!”

혼비백산하며 머리에서 뚝 떨어진 머리띠를 볼 생각도 못 하고 다시 이불 속으로 달려 들어간 혜원의 소란스러움에, 옆방에서 쉬고 있던 필립과 혜윤까지도 그의 방으로 달려왔다.

“뭐야? 강혜원 너 일어났어? 일어났으면 냉큼 기어 나와! 나 할 말 많다고!”

‘어라?’

많이 들어본 익숙한 목소리. 하지만, 결코 그녀일 리 없는 목소리에 혜원은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만약 그녀가 맞다면 어떻게 해야 하고, 또 그녀가 아니라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아직 혜윤을 만날 아무런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혜원은 혼란스러웠다. 왜 하필 지금 여기에 그녀가?

손이 달달 떨렸고 도저히 그녀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윤결을 좋아하는 마음을 들키기라도 할까 봐, 그래서 그녀가 돌아왔으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지 말았으면 하는 나쁜 마음마저 먹었던 제 속마음을 들킬까 봐 겁이 났다.

‘어떡하지? 어, 어떡하지!’

혜원이 이불 속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자 성질 급한 혜윤이 그의 이불을 들쳐 올리며 소리쳤다.

“누나 왔다고 강혜원, 이 술주정뱅이야! 감히 누나 허락도 없이 술을 마셔?!”

그 순간, 혜원은 눈앞이 노래지고 자신이 윤결의 방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모두 기억나버리고 말았다. 얼굴이 타들어 갈 만큼 부끄러운 기억과 지금 이런 모습으로 절대 보고 싶지 않은 그녀가 눈앞에 보이자, 혜원은 차라리 다시 기절이라도 하고 싶어졌다. 간절히, 그것도 아주 간절히 말이다.

“자는 척하지 말고 일어나 강혜원. 깬 거 다 알아.”

날카로운 혜윤의 호통에 마지못해 혜원이 꿈틀거리며 고개를 내밀었다. 반가움 반, 걱정 반이 섞인 애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는 혜원의 눈가에는 어느새 이슬 같은 작은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혜윤아….”

사실 너무도 보고 싶었다. 태어나서 지금껏 한 번도 떨어져 본 적 없던 쌍둥이 남매. 어려서부터 그녀를 많이 의지하고 있던 혜원이었기에 이제야 제 눈앞에 나타난 혜윤이 야속하다는 듯 눈물을 글썽였다.

“넌 어떻게 나이를 한 살 더 먹어도 이렇게 눈물이 많냐. 하긴, 뭐 너보다 두 살이나 많은 저 녀석도 툭하면 눈물 바람이니 원…. 이러면 내가 화를 낼 수가 없잖아. 강혜원.”

살며시 혜원의 어깨를 감싸며 잘 있었냐는 듯 다정히 두드려 주는 그녀의 손길은 역시 따뜻했다. 사실 걱정을 안 했다면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다만, 혜윤도 무서웠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 필사적으로 강한 척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이렇게 잘 지내고 있는 혜원의 모습에 어느덧 혜윤의 입가에도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 그런데 혜윤아. 이제 아주 온 거야?”

슬며시 그녀의 품을 벗어난 혜원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며 물었다. 갑자기 말도 없이 온 것이 놀랍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그녀가 돌아올 마음을 먹은 건 다행이다 싶었다. 어차피 조만간 부모님도 뵈러 가야 했고 좋든 싫든 원래 대로 돌아가야 맞는 거니까 말이다. 하지만 말없이 씩 웃음을 짓는 혜윤의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불길했다. 그리고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그녀의 웃음에 혜원은 흠칫 몸을 떨었다.

‘저 웃음…. 어디서 봤더라….’

그리고 그는 곧 자신에게 이 위험한 바꿔치기를 제안했던 잊을 수 없는 그날의 혜윤이 떠올랐다.

‘설마…. 또 무슨 일을 꾸미는 건 아니겠지?’라는 걱정도 잠시, 혜원은 윤결의 곁에서 자신을 너무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노랑머리를 한 정체불명의 남자를 발견하고는 또 한 번 기함을 내질렀다.

“엄마야!! 누구야!! 윤결 형! 여, 옆에 귀신 있다!”

윤결과 혜윤은 고개를 돌려 혜원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쪽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런 찢어지는 혜원의 비명에 놀란 건 오히려 필립이었다.

“미, 미안.”

빨개진 얼굴로 후다닥 윤결의 뒤로 숨어버린 필립.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혜윤과 똑같은 모습으로 침대에 앉아 귀여운 방울 목걸이를 달고 있는 혜원이 너무도 귀여워 그만 넋을 잃고 그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들켜버리자 마치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또 재빨리 숨는 그의 모습에 윤결도 그리고 혜윤도 그저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어느덧 침대에서 일어나 필립의 곁으로 다가간 혜윤이 그의 팔을 살며시 잡아 제 옆으로 데리고 오며 말했다.

“강혜원. 호들갑 떨지 말고, 인사해. 누나 남자친구. 필립 그린데일.”

“응? 뭐? 누구라고?”

남자친구라는 말에 다시 한번 놀란 눈을 깜빡이는 혜원. 아무리 자신의 쌍둥이 누나라지만 그녀의 거침없는 행동력은 볼 때마다 놀라웠다.

“안녕? 난 필립. 네가 혜윤이 동생 혜원이구나? 반가워. 너 진짜 귀엽다.”

수줍게 먼저 손을 내미는 필립의 모습에 얼떨결에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혜원은 순간 자신이 바지를 입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재빨리 이불을 잡아채 허리에 돌돌 감싸며 말했다.

“바, 반가워요. 그런데 제가 그러니까 지금… 어… 인사를 할 상황이…. 그러니까… 옷을 안 입고 있어서….”

“아, 미안! 난 나가 있을게. 준비하고 천천히 나와.”

옷을 안 입고 있는 건 혜원이었건만 마치 자신이 안 입기라도 한 듯 목까지 빨개진 필립이 후다닥 밖으로 나가자, 혜원 또한 빼꼼히 얼굴을 내밀어 거실을 쳐다봤다. 어느새 다소곳이 소파에 앉아 무릎에 두 주먹을 살포시 내리고 있는 모습이 왠지 귀엽게 느껴졌다.

혜윤 또한 필립을 따라 거실로 나가 버리자, 윤결이 살며시 방문을 닫고는 혜원의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래서? 감히 내 방에 몰래 숨어 들어가서 술이 들어간 초콜릿을 한 통이나 다 먹어 치우고, 그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일어난 소감이 어때, 강혜원?”

“으응? 그러니까…. 형이 자꾸 거짓말하고 그러니까 나도 막 화가 나서….”

“화가 나서? 아~ 화가 나서 그렇게 귀엽게 입고 술까지 먹고 형을 기다렸어?”

“어? 그건 아닌데…. 아니 기다린 건 맞는데…. 술이 들어있는지 몰랐다고. 그, 그리고 술이 들어갔으면 들어갔다고 말해주든가!”

에라 모르겠다. 우선 큰소리부터 치고 보자 결심한 혜원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하지만 동시에 제 눈에 들어온 웬 낯익은 털 뭉치에 식겁 놀란 혜원이 그것을 살며시 들어 올리며 물었다.

“엇? 그런데 형. 이건 뭐야?”

“어? 그거? 이, 이리 내! 조그만 게 진짜 별걸 다 뒤져서는!”

윤결은 순진한 혜원이 아직 그 꼬리의 용도를 알아채지 못했음에 살짝 안도하며 서둘러 꼬리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머리띠를 챙겼다. 그사이 혜원은 옷장에서 바지를 꺼내 입고 거실로 나갈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그가 문을 열려는 순간 윤결이 재빨리 그의 곁에 다가오며 말했다.

“야! 모, 목걸이. 이리 와봐.”

귀엽기는 하나 자신 외에는 절대 보여줄 수 없다는 듯 윤결은 재빨리 혜원의 목에서 목걸이를 빼 꼬리와 함께 챙겼다.

이러니 정말 집에 놔둬도 밖에 내놔도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는 말썽쟁이 강혜원. 윤결은 새삼 자신이 육아에 이렇게 소질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몸이 고달파도 마음이 찢어져도 한번 혜원에게 빠진 이상, 윤결이 평생 지고 가야 할 숙제인 강혜원 돌보기. 윤결은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피식피식 웃음을 지으며 혜원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

드디어 거실에 다 모인 두 커플. 당당한 얼굴로 서로를 빤히 쳐다보는 혜윤, 윤결과는 달리 서로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는 필립과 혜원은 눈조차 제대로 맞추지 못하며 어색한 듯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그리고 그 무거운 정적을 깨고 혜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근데, 혜윤아. 너 이제 어떻게 하려고 한국에 온 거야? 엄마랑 아빠는 아셔?”

혜윤이 돌아왔다는 반가움도 잠시, 남자친구까지 데리고 온 그녀의 대범함에 혜원이 걱정 가득한 눈길로 물었다. 대체 앞으로 어떻게 하려는 건지…. 그녀가 윤결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다행이었지만, 이렇게 빨리 제 사랑을 찾아서 불쑥 나타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기에 혜원은 도통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당연히 부모님은 내가 한국에 온 거 모르셔. 문제는 너야 강혜원. 하지만 네가 술 취해서 자는 사이에 이미 윤결 씨랑은 이야기 다 끝냈어. 그러니 동생아 너는 아무 걱정하지 마.”

“뭐…. 뭐를?”

대체 무슨 이야기를 끝냈다는 건지 알 리 없는 혜원의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아무튼 나 다음 주에 바로 부모님 만나러 가서 정리 좀 하고 올 거야.”

“정리? 나, 나는? 너 그럼 한국 들어오는 거야? 유, 윤결 형이랑… 같이 사는 거야? 그럼 저기 필립은? 설마 셋이 같이 살게? 아니다…. 나까지 넷인가? 우리 다 같이 살아?”

“너 지금 장난하냐?? 누가 누구랑 같이 살아! 너 진짜 누구 뒷목 잡게 하려고 작정했어? 그냥 너는 가만히 있어 혜원아. 누나 또 혈압 오르려고 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어떻게 저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은 다 상상을 초월하는 대답들인지…. 발끈하는 혜윤도, 듣고 있던 윤결도 그저 기가 찬 얼굴로 혜원을 쳐다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피식피식 웃음을 참으며 혜원이 귀엽다는 듯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혜윤의 속을 뒤집는 필립의 한마디.

“나는 좋은데. 귀여운 혜원이랑 다 같이 살아도 재밌을 것 같은데….”

맙소사….

저 녀석은 대체 어느 별에서 온 녀석이지? 지금 이 타이밍이 그 말을 할 타이밍은 아니지 않나? 혜윤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필립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런 엉뚱한 필립의 말에 머리를 긁적이며 배시시 웃는 혜원. 엉뚱하고 소심한 혜원과 필립이 환상의 콤비라면, 혜윤과 윤결 또한 아주 확실한 취향을 가지고 있음에는 분명했다.

저렇게 완벽히 똑같은 성향의 애인을 곁에 두고 키우고 있으니 말이다.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대충 저녁을 챙겨 먹은 뒤, 혜윤은 필립과 함께 머물 곳을 알아보기로 했다. 하루 정도는 윤결의 집에서 머문다고 해도, 앞으로 일주일은 더 한국에 머물러야 할지도 모르는데 계속 그의 집에서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혜윤이 머물 호텔을 찾아보는 동안 필립은 과일 씻기에 열심인 혜원의 곁을 맴돌았다.

사실 사과를 깎으려 했으나 윤결의 강력한 반대에 어쩔 수 없이 뽀득뽀득 깨끗이 씻기에 열중인 혜원. 씻어만 두면 윤결이 샤워를 끝내고 깎아주겠다 신신당부를 했기에 혜원은 열정적으로 과일 씻기에 빠져 있었다.

필립은 그의 주위를 왔다 갔다 하며 말을 걸 타이밍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에 한번 빠지면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 않는 혜원은 곁에 다가온 필립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형은 칼을 대체 어디다 숨겨 둔 거야. 이제 다 씻어 가는데…. 그냥 내가 깎아도 되는데. 칫. 왜 그렇게 사람을 못 믿는지…. 내가 뭐 다섯 살짜리 애도 아니고….”

“그, 그럼 내가 가서 한번 물어볼까? 칼이 어딨는지?”

“으앗! 까, 깜짝이야!”

혜원은 혼잣말을 하는 와중에 누군가 옆에서 말을 걸어오자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사과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소리를 내질렀다.

“미, 미안!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닌데…. 미안. 어디 안 다쳤어?”

자신 때문에 혼비백산해 혜원이 사과까지 떨어트리자, 미안해진 필립이 재빨리 떨어진 사과를 집어 그에게 건네주며 물었다.

“괜찮아요. 그, 그냥 거실에서 혜윤이랑 같이 앉아 있어도 되는데….”

혜원은 소리까지 지른 것이 민망했는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나도 뭐라도 돕고 싶어서. 내가 뭐 도울 건 없어?”

“진짜 괜찮은데….”

“같이 하면 안 돼? 나도 과일 잘 씻는데….”

필립이 물에 빠져 있는 과일들을 보며 슬쩍 혜원의 얼굴을 쳐다봤다. 누가 봐도 같이 하게 해달라는 호소력 짙은 필립의 눈빛. 혜원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음…. 그럼 같이 할까요? 제가 씻어서 드리면 물기를 탈탈 털어서 접시에 올려놔 주실래요?”

“응! 그런 거라면 나도 자신 있어!”

드디어 그에게 무언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필립이 재빨리 혜원의 옆으로 와 접시를 꺼내 들었다.

둘은 생각보다 호흡이 잘 맞았다. 그사이 샤워를 끝낸 윤결이 부엌으로 내려왔다. 그는 도란도란 수다를 떨며 주거니 받거니 하는 둘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 그리고 어느덧 호텔 찾기를 끝낸 혜윤도 곁에 보이지 않는 필립을 찾아 나섰다. 혜윤은 들어가지는 않고 벽에 기대 팔짱을 낀 채 부엌 안을 빤히 쳐다보기만 하는 윤결을 발견하고는 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왜 안 들어가고 서 있어요?”

“쉿. 저기 좀 봐봐.”

“뭘?”

혜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가 가리킨 곳을 쳐다봤다. 그리고 곧 그녀의 입가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지며 윤결과 같은 귀여워 죽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녀석들을 바라봤다.

“제법 귀여운 녀석을 주워왔어. 강혜윤.”

“그러는 당신도 보는 눈 있어서 굉장히 귀여운 녀석을 손에 넣었잖아?”

“그러게…. 우리 애인들 꽤 사랑스럽지?”

“그걸 말이라고….”

그리고 이어진 둘의 흐뭇한 미소. 이 평화로운 시간이 오래오래 이어지길 바라는 간절한 소원과 함께 윤결과 혜윤의 요란 법석했던 하루도 어느덧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

“진짜 호텔로 가게? 나랑 조금 더 여기 같이 있으면 안 돼?”

다음 날 호텔로 향하려는 필립과 혜윤을 보내기 싫은 듯 애처로운 눈빛으로 울먹이는 혜원의 눈물에 윤결은 결국 또 그의 소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마침 일요일. 혜원은 한국이 처음인 필립을 위해 아침부터 관광 코스를 짜겠다 난리였다.

동서남북이 어느 방향인지도 모를 만큼 심각한 길치인 주제에 필립의 앞에서는 마치 제가 한국 땅을 다 아는 것처럼 조잘거리는 혜원. 윤결과 혜윤은 소파에 앉아 그가 꾸미는 코스를 잠자코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필립. 골라봐봐. 1번! 위로 가면 남산타워랑 케이블카가 있고, 2번! 저 아래쪽으로 가면 동물원이랑 놀이 공원, 3번! 중간 지점인 이곳으로 가면 아쿠아리움이 있어. 어디를 먼저 가고 싶어? 응?”

마치 자신이 더 신난 듯, 핸드폰을 꺼내 사진까지 보여주며 열성을 보이는 혜원의 설명에 필립은 어디부터 가야 할지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동물원도 가고 싶고, 케이블카도 타보고 싶고, 아쿠아리움은 생각만 해도 멋질 것 같아 도무지 선택할 수 없어 보였다. 곤란해하는 필립을 보며 혜원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그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사실 다 가도 돼요…. 헤헷.”

“진짜?”

“물론 오늘 다 가는 건 무리지만, 앞으로 일주일 동안 있을 거라면서요? 윤결 형은 회사 때문에 같이 못 다녀도, 제가 있잖아요! 저랑 같이 가요.”

“우와. 정말? 벌써부터 기대된다. 고마워 혜원아.”

얼씨구? 길치 주제에 누굴 데리고 다니겠다는 건지! 자신만 쏙 빼고 감히 저 노랑머리 강아지와 데이트 아닌 데이트 계획을 세우는 혜원이 윤결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그는 굳이 묻지도 않았건만 그들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며 한마디 던졌다.

“아, 그리고 이번 주부터 나 휴가를 쓸 건데 말이지….”

“네?? 휴가요? 갑자기?”

뜬금없는 휴가라는 말에 놀란 혜원이 입을 떡 벌리며 윤결을 쳐다봤다. 분명 자신에겐 휴가에 대해 입도 뻥끗한 적 없었는데? 하지만 역시 눈치 빠른 혜윤은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잘 알겠다는 듯 제 옆에 앉은 윤결을 빤히 노려보며 말했다.

“그렇게나 불안해요?”

“뭐. 뭐가? 큼큼….”

날카로운 혜윤의 질문에 윤결이 헛기침을 하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아무리 저 노랑머리 강아지가 귀엽고 순하다 한들 언제 돌변해 자신의 혜원을 잡아먹을지 모르는 일이니, 항상 조심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에 빠져있는 팔불출 한윤결.

어째 혜원과 함께 있으면 자신마저 점점 더 유치해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만큼 윤결은 사고뭉치 혜원이 곁에 없으면 초조해했고, 또 불안해했다.

고심 끝에 그들의 첫 번째 관광 코스는 동물원과 놀이 공원으로 결정했다. 동물을 좋아하는 혜원과 놀이 기구를 한 번도 타보지 못한 필립을 위한 최적의 선택이자 완벽한 코스였다.

아침부터 들뜬 혜원은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놀러 나갈 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반면 혜윤의 손에 꼼짝없이 잡힌 필립은 제 몫의 아침을 싹싹 비우고, 약까지 꼼꼼히 챙겨 먹은 후에야 식탁을 벗어날 수 있었다.

뭐부터 챙겨야 하나? 라며 신나게 흥얼거리는 혜원은 조그마한 가방에 닥치는 대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냉장고를 열어젖히며 음료수와 과일, 초콜릿과 과자 등을 빵빵하게 챙긴 혜원은 더 이상 넣을 공간이 없을 만큼 가방을 가득 채우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듯 필립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옆에 꼭 붙어있어요. 어차피 먹을 것 들은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요! 특별히 필립만 줄게요.”

“고마워 혜원아. 꼭 네 옆에 붙어있을게.”

마치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 듯 서로의 귀에 속닥거리는 귀여운 두 남자. 그래 봤자 저 배낭은 곧 윤결의 손에 넘어갈 것일 텐데 말이다.

마침 오늘은 나들이하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아직 쌀쌀한 바람이 불긴 했지만 들뜬 혜원과 필립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동물원 입구에 도착해 표를 나눠 가진 뒤, 나란히 앞서 걸으며 신난 두 녀석의 뒤를 따라 걷는 윤결과 혜윤. 사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둘은 완벽히 잘 어울리는 부부의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혜원의 뒤를 빠르게 따라가는 윤결의 발걸음엔 어느새 초조함이 느껴졌다. 사실 혜원이 애도 아니고, 동물원에 풀어두고 자유롭게 놀다 점심 먹을 시간 맞춰서 오라고 해도 될 법한데, 윤결은 굳이 그를 따라다니는 것을 택했다. 혜윤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말없이 윤결의 곁을 따라 걷던 혜윤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그를 멈춰 세우며 물었다.

“아니, 굳이 이렇게 둘을 졸졸 따라다니는 이유가 뭐예요? 혹시 의처증 있어요?”

“또 사라질까 봐.”

혜윤의 농담 섞인 질문에도 윤결은 한시도 혜원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사라지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걷다가도 언제 어디로 뛸지 몰라. 그리고 한번 사라지면, 이 넓은 곳에서 어떻게 찾겠어. 위험한 상황이라도 발생하면 어떡하라고. 저 녀석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녀석이니까. 그리고 다신 저 녀석 혼자 두지 않겠다고 약속했단 말이야.”

혜윤은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갑자기 어두워진 윤결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하지만 윤결은 또다시 그날의 악몽이 떠오르기라도 한 듯, 입술을 짓씹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파리의 어느 좁은 골목에서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혜원. 그리고 그 짧은 시간 동안 피투성이가 되도록 구타를 당했던 혜원의 모습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히 떠올랐다. 그리고 이곳이 아무리 한국이라 하더라도, 윤결은 잠시도 혜원을 제 눈 밖에 두고 싶지 않았다.

무슨 날다람쥐라도 된 듯, 이리저리 동물원을 정신없이 휘젓고 다니던 혜원은 점점 자신의 어깨에 매달린 가방이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체력이라면 꽝인 혜원에게 한 시간 남짓 그 무거운 배낭을 메고 다닌 건 그의 인생 신기록에 가까웠다.

발걸음이 무거워지고 어깨가 빠질 듯 아파오자, 혜원은 잠시 발걸음을 멈춰 뒤를 살짝 돌아봤다. 빈손으로 너무도 편하게 자신의 뒤를 따라 걷는 윤결을 보자 억울함이 밀려왔는지 슬며시 가방을 내리며 아픈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혜원의 계획은 어서 빨리 윤결이 달려와 제 가방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혜원이 어깨를 주무르기가 무섭게 필립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의 가방을 대신 어깨에 둘러메며 말했다.

“이제 내가 멜게. 이 가방 굉장히 무거웠네. 혜원아 어깨 많이 아파?”

“필립! 빠, 빨리 가방 내려놔요!”

순간 재빨리 필립의 어깨에서 가방을 뺏어 다시 바닥에 내려놓은 혜원이 다시 한번 힐끔 뒤를 돌아봤다. 다행히 아직 윤결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어리둥절해 있는 필립의 얼굴에 혜원이 개구진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왜 혜원아?”

영문을 모르는 필립이 얌전히 그의 얼굴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이 가방을 메 줄 사람은 저 뒤에 따로 있어요. 그러니까 필립 우린 좀 더 편하게 구경하면 돼요.”

“그, 그게 무슨 소리야?”

“히힛. 그런 게 있어요. 잠시만 기다려 봐요.”

또 무슨 작당 모의를 하는지 키득키득 웃는 혜원의 모습에 이미 그의 계략 정도는 눈치챈 윤결이 바닥에 놓인 가방을 들어 다시 혜원의 어깨에 메주며 말했다.

“여기 있는 간식 모조리 나한테 다 뺏기고 싶지 않으면 어서 다시 메시지?”

“에엑??”

“왜? 내가 다 먹어도 돼?”

“아, 아니 그건 아니고요…. 됐어요.”

순간 자신의 계획과는 반대로 절대 들어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윤결의 모습에 좌절한 혜원이 기가 푹 죽은 얼굴로 다시 가방을 메며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왠지 모를 서러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옆에서 불안한 눈으로 혜원을 힐끔힐끔 바라보며 그의 기분을 살피는 필립의 모습에 혜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윤결에게 쏘아댔다.

“어른이면 좀 어른답게 행동하든가. 진짜 유치해서 못 봐 주겠네!”

“내가 뭘? 이런 어린이들이나 데리고 오는 동물원에 함께 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거 아닌가?”

“아니 그럼 당신이 어린이 둘 데리고 왔지 그럼 누굴 데리고 왔다고 생각했어요? 설마 당신 눈에 저 녀석들이 정상적인 어른으로 보인단 말이에요?”

“뭐, 뭐??”

윤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두 살이나 많은 자신의 남자친구와 쌍둥이 동생을 꼬마 취급하는 혜윤의 당당한 모습에 기가 찼다. 왠지 그녀에게만큼은 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빠른 걸음으로 혜원의 가방을 낚아챈 윤결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빨리 말해. 강혜원. 형이 최고라고.”

“어어? 헤헷…. 응. 윤결 형 최고!!”

금세 기분 좋은 얼굴로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천진난만한 혜원의 모습에 윤결은 가슴이 또 뭉클해졌다.

‘하아. 내가 이러니 이 녀석을 절대 혼자 못 두지!’

팔불출 중의 팔불출 한윤결이 있다면, 그의 머리 위에는 강혜윤이 있었다. 당돌하리만큼 위험한 이 여자. 세 남자를 손에 쥐고 제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기 동물 포육실을 지나 귀여운 원숭이 우리와 토끼 우리까지. 혜원은 집으로 다 데려오지 못해 아쉬운 눈빛으로 동물들을 바라보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정신없이 동물원을 휩쓸고 다니던 필립과 혜원의 눈앞에 어느덧 동물원과 연결된 놀이 공원 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쉬워하는 혜원과는 달리 필립이 반짝이는 두 눈으로 휘황찬란한 놀이기구를 쳐다보며 말했다.

“우와, 한국은 정말 재미난 곳이구나! 나 저거 다 타봐도 돼?”

오랜만에 보는 필립의 들뜬 모습에 혜윤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나이 제한, 키 제한 그리고 필립 제한 있으니까 꼭 허락받고 타. 타자마자 울면서 내린다고 하지 말고.”

“내, 내가 언제 울었다고!!”

이 나이에 설마 놀이기구를 타고 울겠냐는 듯 반항 섞인 눈초리로 혜윤에게 대드는 필립을 향해 던진 그녀의 한마디.

“혜원이는 울면서 내리고 토했어. 너도 뭐 강혜원 과라 별반 다르지 않겠구먼. 뭐. 조심해라, 바지에 오줌 싸지 말고.”

“뭐, 뭐?!”

“야! 강혜윤! 너 죽을래?”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혜원과 놀란 필립의 외침에도 혜윤은 유유히 놀이 공원을 향해 먼저 입장을 하며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저기 뱅글뱅글 도는 열차 보이지? 너희들이 저거 타도 울지 않고 내리면 방금 내가 한 말 취소할게.”

순간 벙어리가 된 듯 동시에 입을 꾹 다물어 버린 혜원과 필립. 그리고 그 뒤로는 이 내기가 내심 기다려진다는 듯 흐뭇한 얼굴을 한 윤결이 망부석같이 서 있는 그들의 등을 떠밀며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

혜윤이 가리킨 열차는 높은 곳에서 쏜살같이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다 쭈뼛쭈뼛 설 만큼 무시무시한 열차를 올려다보는 혜원과 필립의 얼굴엔 공포가 휘몰아쳤다.

설마 정말로 저걸 타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라는 눈빛으로 혜윤을 바라보는 필립. 동시에 제발 말려달라는 표정으로 윤결을 올려다보는 혜원. 세상에 재밌고 안전한 놀이기구도 많은데 하필이면 저런 위험천만한 열차를 타보라며 등을 떠미는 그들이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중학교 때인가 딱 한 번 순진했던 혜원은 말괄량이 혜윤의 손에 이끌려 멋모르고 바이킹을 탄 적이 있었더랬다. 그땐 그저 큰 배에 탄다는 생각에 마냥 해맑은 얼굴로 맨 뒷자리에 앉아 배가 움직이기만을 기다렸었다. 하지만, 여유롭게 웃던 그의 얼굴은 배가 출발함과 동시에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혜원은 재밌다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죽을 것 같은 공포에 목청껏 세워달라고 울부짖었었다. 그는 배가 멈추자마자 후들거리는 다리로 화장실로 달려갔고 조금 전 혜윤이 말했던 것처럼 혜원은 그날 먹은 모든 것들을 토해냈었다. 물론 그날 혜윤은 부모님과 혜준의 따끔한 꾸지람을 받긴 했지만, 혜원으로서는 절대 잊을 수 없는 끔찍했던 기억이었다.

하지만 지금 제 눈앞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는 저 열차는 그것보다 백배는 더 무서워 보였다. 혜원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녀에게 보란 듯이 당당히 열차에 탑승할 것인가, 아니면 소중한 목숨을 지키기 위해 한발 뒤로 물러설 것인가.

혜원은 옆에서 불안한 눈을 감추지 못한 채 울상을 짓고 있는 필립을 힐끔 올려다봤다. 그리고는 그를 위해 결심한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더니 불쑥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 오늘만 미성년자 해요. 저런 건 사람이 탈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빠, 빨리 가요, 필립!”

“그, 그렇지?”

얼떨결에 혜원의 손에 이끌려 아무도 타지 않는 회전목마 쪽으로 은근슬쩍 발걸음을 돌리는 필립. 그는 처음으로 혜원이 곁에 있어 든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는 사람이 없어서 줄조차 설 필요가 없는 느릿느릿 돌아가는 회전목마를 시작으로 혜원과 필립은 정말로 어린이용 놀이기구만을 골라서 타기 시작했다. 그들이 고른 것 중 가장 무서운 것이라 봤자 동그란 통에 앉아 앞뒤로 구르는 것이 전부인 다람쥐 통. 그럼에도 어찌나 소리를 질러대는지, 누가 보면 초등학생 둘이 탄 것으로 오해할 정도였다.

그저 그들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지루한 하품을 해대던 혜윤은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놀이공원에서의 마지막 장식은 귀신의 집으로 정했다.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돋워 주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어두 컴컴한 입구. 혜원과 필립은 두 명씩 들어가야 한다는 관계자의 말에 망설이기 시작했다. 겁쟁이로 치면 1, 2위를 다투는 둘이 같이 들어가 봤자 서로에게 도움이 안 될 것 같단 생각에 이번만큼은 찢어지기로 마음먹은 듯, 혜원이 살며시 윤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여, 여긴 형이랑 갈래요. 내가 너무 필립이랑 붙어 다녀서 혜윤이가 삐질지도 모르고, 또 필립은 혜윤이 남자친구니까 이번엔 제가 양보해야죠.”

마치 인심 썼다는 듯 말하는 혜원의 뻔뻔한 태도에 윤결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혜원 스스로 선택한 이상 어디 한번 잘 버텨보라는 듯 윤결이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귀신은 꼬마만 따라다닌다던데.”

“누가 꼬마라는 건데요!”

무슨 소리냐는 듯 동그란 눈을 부릅뜨며 발끈하는 혜원의 어깨를 잡아 다시 앞으로 돌려세운 윤결이 천천히 그를 입구로 밀어 넣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꼬마가 아니면 뭐 걱정할 거 없겠네? 귀신이 나오든 말든.”

“그, 그럼요. 전 하나도 겁 안 나요.”

큰소리는 쳤지만 한 발 한 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향해 걷기 시작한 혜원은 무의식적으로 윤결의 손을 꽉 잡았다. 들어서자마자 등골이 오싹해지고 비명이 절로 나오려는 것을 꾹꾹 참아내던 혜원이 결국은 그의 앞으로 튀어 오른 귀신 모형의 인형에 혼비백산하며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으아악!!”

한번 주저앉은 다리는 일어서려 하지 않았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고, 주저앉으면서도 윤결의 손만은 놓지 않은 혜원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어, 얼마나 더 가야 해요?”

이제 겨우 입구인데. 아무리 빨리 간다고 해도 10분은 족히 걸릴 이 코스는 역시 혜원에겐 무리인 듯했다. 바닥에 주저앉아 오들오들 떠는 혜원을 힐끔 바라보던 사람들은 어느덧 그들을 지나쳐 저 멀리 앞서 걷기 시작했다.

간간이 들려오는 비명과 음산한 음악. 귀신들의 웃음소리와 무언가 튀어나와 자신의 손을 잡아끌고 어디론가 데리고 갈 것만 같은 스산한 분위기에 혜원은 재빨리 두 귀를 막고는 눈을 감아 버렸다. 이대로는 정말 한 발짝도 더 걷지 못할 것 같았다.

겁에 질려 꼼짝도 못 하는 혜원의 모습에 윤결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되겠는지 어서 빨리 혜원을 데리고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살며시 그를 일으켜 그대로 품에 꼭 안아 가두며 말했다.

“우리 혜원이 이대로 형한테 매달릴래?”

“… 그래도 돼?”

윤결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조심스럽게 묻는 혜원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잔뜩 묻어났다. 마치 엄마 품에 안긴 새끼 코알라처럼 윤결의 목을 꽉 끌어안으며 덥석 안겨버린 혜원. 지금 자신이 믿고 의지할 사람은 윤결밖에 없다는 듯 그를 안은 혜원의 손에는 힘이 바짝 들어갔다.

혜원은 윤결의 따뜻한 온기에 조금 안정이 됐는지 슬며시 얼굴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고마워 형.”

“고마우면 눈 감아봐.”

“누, 눈? 응.”

갑자기 눈을 감아보라는 윤결의 말에 혜원이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얌전히 눈을 내리감았다. 살짝 긴장했는지 혜원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 왔다.

윤결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혜원의 촉촉한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의 입술이 닿자 흠칫 놀란 혜원이 눈을 번쩍 떴다. 하지만 너무도 따뜻한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윤결의 얼굴에 혜원은 도로 눈을 감으며 살며시 입술을 벌렸다.

예상치 못한 혜원의 과감함에 윤결 또한 피식 웃음을 지으며 그의 입술을 벌리고 들어가 진한 키스를 했다. 열기에 들뜬 두 혀는 거침없이 서로의 입 안을 오가며 야릇한 소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 소중한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윤결은 천천히 몸을 뒤로 움직이며 더욱 어두운 구석을 향해 몸을 밀어 넣었다. 어느덧 너무 어두워 서로의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후미진 구석까지 들어온 윤결과 혜원.

윤결은 손에 힘을 주어 더욱 바짝 혜원을 끌어안으며 뜨거운 키스를 이어갔다.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흘러넘칠 만큼 키스는 점점 더 격렬해졌고 숨이 막혀 헐떡이던 혜원이 윤결의 혀를 살짝 깨물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온 윤결이 천천히 그의 입술을 놓아주며 말했다.

“넌 가끔 이렇게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어 강혜원.”

“하아…. 형… 흐응!”

윤결은 숨이 차올라 가쁜 호흡을 내뱉는 혜원의 목덜미를 강하게 빨아당기며 아쉬운 듯 그의 머리카락에 코를 문지르며 그의 엉덩이를 살살 두드렸다. 그럼에도 혜원은 아직도 조금 전 강렬한 키스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아무런 반항조차 하지 않았다.

둘만의 야릇한 밀회를 즐긴 윤결은 다시 그를 고쳐 안고 출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가는 내내 들려오는 기묘한 비명도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끔찍한 분장의 귀신들도 더 이상 이들에게 그 어떤 자극도 주지 못했다.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를 띠며 혜원을 안고 나오는 윤결의 모습에 먼저 나와 있던 혜윤과 필립이 깜짝 놀라 달려오며 소리쳤다.

“혜원아!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다쳤어?”

요란 법석한 혜윤의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혜원이 살며시 윤결의 품에서 내려와 고개를 푹 숙이며 기어들어 가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나 이제 놀이 공원 안 올래.”

부끄러움에 고개도 들지 못하고 그대로 먼저 앞서 걷는 혜원과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의 곁에 바짝 서서 걷는 필립의 모습에 혜윤이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듯 사납게 윤결을 노려보며 물었다.

“당신, 저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일은 무슨 일? 생각해봐. 연인끼리 공포영화를 보러 가는 진짜 이유를 말이야. 난 그저 내 본능에 충실했고 우리 혜원이를 지켜준 것밖에는 없는데?”

여유로운 웃음과 함께 어깨를 으쓱이며 앞서 걷는 윤결의 얄미운 모습에 혜윤이 그의 종아리를 걷어차며 말했다.

“함부로 혜원이한테 손댈 생각 하지 마, 이 변태 아저씨야!”

순간 가던 걸음을 멈춘 윤결이 빠르게 그녀의 곁으로 다시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이번엔 혜원이가 먼저 시작했다고. 그리고 자꾸 잊어버리는 것 같아서 말해주는데, 혜원이도 성인이야. 우리가 무슨 짓을 하든, 이젠 네 허락 따위 필요 없다고 강혜윤.”

능글맞은 웃음과 함께 유유히 자신을 지나쳐 걷는 윤결의 당당함에 혜윤은 분통이 터졌으나 어쩌겠는가, 이 사달의 시작도 원인도 다 자신이었음에 그저 입술을 꾹 깨물며 참을 수밖에….

**

한바탕 정신없는 놀이 공원 데이트를 끝낸 필립과 혜원은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이를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던 윤결이 이내 웃음기를 거둔 진지한 얼굴로 혜윤을 불렀다.

“강혜윤. 내일은 부모님 뵈러 가야 하는 거 알지?”

“하아…. 알아. 안다고.”

뭐 딱히 걸릴 일은 없었지만, 점점 일이 커지는 것 같은 이 말도 안 되는 계약이 슬슬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정말 윤결은 혜원과 결혼까지 할 생각인 건가? 나중에 이 일이 밝혀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분명 가장 상처받는 건 혜원일 텐데…. 아무리 강심장 혜윤이라도 걱정을 안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걱정돼? 미국에 못 돌아갈까 봐?”

“아니. 그딴 건 걱정 안 해. 난 돌아갈 거니까. 다만, 내가 걱정하는 건 혜원이야.”

“혜원이?”

뜬금없이 혜원이 걱정이라는 말에 윤결이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창밖을 응시하며 내내 어두운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던 혜윤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윤결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당신. 이 모든 것이 밝혀졌을 때 어른들 감당할 수 있겠어? 그래도 끝까지 혜원이랑 결혼 유지할 수 있겠냐고.”

“이제 와서 그런 걱정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내가 설마 아무런 각오도 없이 저 녀석을 데리고 산다고 했을 것 같아? 그런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내일 가서 부모님 허락이나 잘 받아내. 혜원이는 내가 알아서 잘 지킬 테니까.”

“나 돌아가도 혜원이 잘 부탁해.”

혜윤은 처음으로 윤결에게 부탁이라는 말을 했다. 지금은 혜원의 곁에서 그를 지켜줄 사람이 윤결밖에 없음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윤결은 알겠다는 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집 앞에 도착해 주차까지 마친 윤결이 혜원과 필립을 깨우기 위해 뒤를 돌아봤다. 서로의 머리를 맞댄 채 세상모르고 잠에 빠져 있는 두 녀석을 보고 있으니, 새삼 부모가 되고 아이를 키우는 게 이런 기분인 걸까 하는 생각에까지 잠긴 윤결. 하지만 역시 강혜원 하나 키우는 것도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데, 아이는 이 녀석 하나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뭐라 해도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은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을 들었다 놨다 하는 저 꼬맹이 강혜원이니까 말이다.

**

오랜만에 부모님을 만난다는 생각에 혜윤도 살짝 긴장되는지 차에 타서도 쓸데없이 가방을 뒤적이며 초조해했다. 그 모습에 윤결은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려 농담 섞인 말투로 웃으며 말했다.

“이럴 때 보면 혜원이랑 비슷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 나를 어떻게 그런 울보 녀석이랑 비교해요? 됐거든요?”

자존심이 확 상한 듯 혜윤이 눈꼬리를 치켜세우며 윤결을 노려봤다.

“알았어. 조금 있으면 도착하니까, 준비해. 실수하지 말고.”

“당신이나 실수하지 말아요.”

오랜만에 보는 뚱해 있는 혜윤이 귀여운 듯 윤결은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리며 쓰다듬어 주었다. 다를 때 같으면 버럭 화를 내고 그를 죽일 듯이 노려봤을 그녀였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이내 혜윤은 한윤결이라는 남자가 이렇게 든든한 사람이었나라는 생각과 함께, 새삼 그가 자신의 편이라는 것이 고마웠고 안심이 되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를 반기는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간 혜윤은 오랜만에 보는 부모님의 모습에 눈물이 핑 돌았다.

“어머 우리 딸!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 시험 보느라 고생 많았어. 인턴도 한다며? 일은 할 만해?”

“응. 뭐 그럭저럭. 참, 엄마! 여행은 잘 다녀왔어요?”

“그럼. 다음엔 우리 혜윤이랑도 같이 가려고. 엄마가 벌써 코스까지 다 짜놨잖니!”

“어? 어, 그래. 나중에 같이 가자. 하하….”

눈물이 쏙 들어갈 정도로 귀에 내려꽂히는 여행 코스라는 말에 혜윤은 멋쩍은 웃음으로 대답을 회피했다. 아직 유학의 ‘유’ 자도 꺼내지 못했는데 여행을 같이 가자니. 혜윤으로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혜원을 유학 보내고 혜윤도 시집을 보내 적적했던 강 사장 부부는 그동안 미뤄 두었던 유럽 여행을 다녀온 뒤였다. 마침 이제 혜윤이도 휴학했으니, 앞으로 함께 할 시간이 많아졌다는 생각에 그들은 벌써부터 그녀와의 여행을 계획 중인 듯했다.

“한 서방도 잘 지냈지? 한 사장이 아주 아들 하나는 잘 뒀지 뭐야. 이렇게 듬직하고 잘생긴 사위가 어디 또 있겠어?”

“과찬이십니다. 혜윤이같이 귀엽고 예쁜 딸을 주셨는데, 제가 더 감사하죠.”

어른들 앞에서는 늘 예의 바른 깍듯한 윤결의 모습에 혜윤이 코웃음을 치며 생각했다.

‘저러면서 우리 혜원이한테 그런 이상한 머리띠나 하게 하고. 혜원 바라기 우리 엄마가 아셨으면 당신 진짜 뺨 맞을 뻔한 거 내가 참아주는 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서로의 약점을 쥐고 있는 이상 눈감아 줄 수밖엔 없었지만, 연기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하는 윤결이란 생각에 혜윤은 혀를 내둘렀다.

그들은 준비된 저녁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다. 물론 여행에서의 크고 작은 에피소드가 주된 이야기의 내용이었지만 여전히 행복해 보이는 부모님의 얼굴에 혜윤도 안심이 되었다.

이제 슬슬 본론을 꺼내야 한다는 무거운 마음에 혜윤이 슬쩍 윤결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 혜윤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윤결은 다 잘 될 거라는 듯 그녀의 손을 다정히 잡아주었다. 너무도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에 강 사장 부부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윤결의 든든한 지원에 힘입어 혜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빠, 엄마. 나 있잖아, 할 말 있어.”

“응? 뭔데 우리 딸?”

“나도 유학 보내줘!”

“뭐, 뭐? 유학?!”

하나뿐인 외동딸의 난데없는 유학 선언에 깜짝 놀란 강 사장은 마시던 커피잔을 급하게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혜준과 혜원도 한국에 없는데, 혜윤까지 유학이라니. 그는 절대 못 보낸다는 듯 잔뜩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유학이라니. 휴학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리고 너 유학 가버리면 한 서방은 어쩌고? 난 우리 잘난 사위 기러기 되는 꼴 못 본다. 한 서방. 걱정하지 마. 나는 무조건 자네 편이야. 혜윤이가 아무리 고집을 피워도 절대 유학 갈 일 없으니까 안심해.”

강 사장은 아무 걱정 하지 말라는 듯 윤결을 향해 굳은 의지를 내비쳤다. 아무리 사랑하고 아끼는 딸의 부탁이라도 이번만은 절대 들어 줄 수 없었다.

사실 집안의 분위기 메이커이자 애교쟁이 막내 혜원을 미국으로 보낸 것을 너무도 후회하는 중이었기에 혜윤만큼은 꼭 자신들의 곁에 두고 싶었다.

혜윤은 예상했다는 듯 입술을 꽉 깨물며 윤결을 올려다봤다. 이렇게 쉽게 유학을 허락해 줄 리 없었다. 절대 안 된다고 고개를 저으며 단호한 표정을 짓는 강 사장을 향해 조용히 듣기만 하던 윤결이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제 편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님.”

“당연하지! 사위 사랑은 장인이지!”

“그래서 말인데요, 전 혜윤이가 유학을 갔으면 합니다.”

“그럼. 당연히 그래야…. 뭐라고? 자네 지금 그게 무슨 소린가?”

분명 반대를 할 거라 생각했던 윤결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나오자 강 사장은 당황한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하지만 윤결은 침착한 목소리로 혜윤의 손을 잡은 제 손에 더욱 힘을 주며 말했다.

“혜윤이 아직 어리잖아요. 하고 싶은 것도 배우고 싶은 것도 많을 나이이기도 하고요. 휴학도 사실 유학을 가기 위해 결정한 거였어요. 혜준이랑 혜원이도 가는 유학을 혜윤이만 딸이라서 아니면 저와 결혼을 해서라는 이유로 막고 싶지는 않습니다. 전 혜윤이의 꿈을 지지합니다. 얼마든지 기다려 줄 수 있어요. 그리고 아버님과 어머님이 안심하실 수 있도록 조만간 제가 뉴욕 지사로 나가서 혜윤이와 함께 지내도록 할게요. 저도 이번만큼은 혜윤이의 꿈을 밀어주고 싶습니다.”

조곤조곤 그녀를 유학 보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윤결의 눈빛엔 확신이 차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신혼인데….”

“신혼이기도 하지만 혜윤이에겐 모처럼의 대학 생활이잖아요. 저는 혜윤이가 행복했으면 좋겠고, 신혼은 언제든지 즐길 수 있지만 스무 살의 설렘 가득한 대학 생활은 다신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에요. 전 혜윤이가 이 모든 걸 충분히 누렸으면 합니다.”

“남편인 자네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내가 끝까지 말릴 수는 없겠다만, 정말 괜찮은 건가? 혜윤이가 유학을 가도?”

“그럼요. 제가 사랑하는 혜윤이의 부탁인걸요.”

여전히 걱정이 가득한 강 사장의 물음에도 윤결은 한결같이 다정한 눈빛으로 혜윤을 바라보며 말했다. 윤결의 간곡한 부탁에 강 사장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혜윤의 유학을 허락했다.

물론 언제든지 보러 와도 된다는 윤결의 말이 결정적인 한 방이 되긴 했으나, 사실 강 사장은 윤결의 속 깊은 마음에 감동했다. 이렇게 다정하고 따뜻한 윤결의 곁에 있는 혜윤이라면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무사히 유학 허락을 받아내고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혜윤은 경악에 찬 눈빛으로 윤결을 노려보며 혀를 찼다. 누가 봐도 깜빡 속을 만큼 자상한 남편의 모습으로 자신의 부모를 설득시킨 윤결의 연기는 단연 대상감이었다.

속이 울렁일 정도로 낯 뜨거운 윤결의 사랑 고백에 혜윤은 정말이지 제가 먼저 참지 못하고 뛰쳐나갈 뻔했다. 너무도 능숙한 그의 거짓말과 능청스러운 연기에 할 말을 잃은 혜윤이 빤히 노려보기만 하자, 불편한 시선이 거슬렸는지 윤결이 그녀를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뭐?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그렇게 눈에서 레이저만 쏘아대지 말고.”

“나 정말 궁금해 죽겠어서 묻는 건데….”

“그러니까 그 궁금해 죽겠는 게 뭔데?”

“만약 유학 보내달라고 한 사람이 정말로 혜원이었어도 아까처럼 그렇게 애절하게 사랑 타령하면서 허락해 달라고 했을까?”

“뭐, 뭐라고?”

정곡을 찌르는 혜윤의 날카로운 질문에 윤결은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만약 유학을 보내 달라는 게 혜원이었더라면? 당연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어떤 유인책을 써서라도 그를 회유했을 것이고, 정 안 되면 꽁꽁 묶어둬서라도 자신의 곁에 뒀을 것이었다. 윤결은 절대 혜원을 자유롭게 풀어 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다시 말해줘요? 혜원이 정말 유학 보낼 수 있냐고요!”

“그, 그건 안 되지! 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미국으로 돌아갈 준비나 해.”

당황하며 말까지 더듬는 윤결의 모습에 더욱 심술이 발동 혜윤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와, 어떻게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날 사랑한다고 거짓말을 해요?”

“나 거짓말한 건 없는데?”

“아니 그럼 방금 그건 뭔데요?”

갑자기 정색하고 거짓말하지 않았다는 윤결의 말에 혜윤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너를 혜원이라고 생각하고 말한 거니까. 이 모든 건 혜원이를 위해 시작한 거잖아? 사랑하는 혜원이를 지키는 일인데, 그 정도 연기는 해줘야 하지 않겠어? 난 절대 혜원이를 내 곁에서 놔줄 생각이 없거든.”

“이제 보니 당신 진짜 위험한 남자였네. 혜원이도 알까? 당신의 이 미친 집착을?”

“뭐 알았다 한들 이미 늦었지만, 아마 죽을 때까지 그 녀석은 모를 듯싶다.”

“혜원이 눈에 눈물 나게 했단 봐.”

“그러는 너 나 혜원이 울리지 마.”

티격태격하는 둘의 대화에도 사실 서로에 대한 나쁜 감정은 없었다. 둘 다 혜원을 사랑하는 마음은 같으니까 말이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혜원에게 닿는 사랑의 온도가 윤결이 조금 더 뜨거웠을 뿐이었다.

**

한편 본의 아니게 필립과 함께 집을 지키게 된 혜원은 그에게 맛있는 저녁을 대접하고 싶단 생각에 신중히 메뉴를 고르기 시작했다. 물론 직접 만드는 건 자신 없었기에 배달을 시키기로 한 혜원은 여러 종류의 전단지를 필립의 앞에 펼쳐 놓으며 물었다.

“한식! 중식! 일식! 그리고 양식! 종류별로 다 있어요. 필립은 뭐가 먹고 싶어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많은 메뉴 앞에 필립이 군침을 꿀꺽 삼키며 감탄했다. 새삼 한국의 놀라운 배달 문화에 감동하는 중이었다. 한국에 왔으니 무조건 한국 음식을 꼭 먹겠다고 마음먹은 필립이 조심스럽게 한식 전단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먹어보고 싶은데 사실 난 봐도 도통 뭐가 뭔지 모르겠어. 혜원이가 알아서 시켜 주면 안 될까? 나 진짜 아무거나 잘 먹어.”

수줍게 말하는 필립을 보며 혜원은 자신만 믿으라는 듯 비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문제는 혜원도 배달 음식을 자주 시켜 먹어보진 않았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 전단지도 윤결이 집에 없을 때 살짝 시켜 먹어볼 심산으로 몰래 모아둔 것이었기에 혜원이 직접 배달을 시키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윤결도 없고, 드디어 이 전단지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 오자 혜원은 망설이지 않고 전부터 먹어보고 싶었던 매운 닭발과 매운 족발을 주문했다.

딱 봐도 일반적인 식사라기보단, 술안주에 가까운 음식들을 저녁으로 시켜버린 혜원. 그는 음식이 오길 기다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식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벨 소리와 함께 기다리던 음식이 도착했다. 신이 난 혜원은 재빨리 포장된 음식들을 식탁 위에 하나둘씩 꺼내놓았다. 하지만 비닐을 뜯자마자 사진에선 느낄 수 없었던 매운 냄새가 훅하고 올라오자, 혜원은 순간 얼어붙은 듯 빨간 닭발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것들은 생각보다 더 빨갛고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요리된 닭발을 보는 것이 처음인 필립 또한 잔뜩 굳은 얼굴로 음식들을 내려다볼 뿐 손을 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안 되겠다 싶은 혜원이 그래도 족발은 좀 낫지 않겠나 싶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족발 하나를 집었다.

하지만 킁킁 냄새를 맡던 혜원은 이내 다시 살며시 족발을 내려놓으며 울상을 짓기 시작했다. 너무도 매운 냄새에 코부터 마비될 것만 같았다.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음식을 시켜버린 혜원이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체 혜윤이는 이게 뭐가 맛있다고 한 거야.”

매운 것을 너무도 좋아하는 혜윤에겐 최애의 음식인 매운 닭발과 족발. 반면 매운 것이라고는 입에도 대지 못하는 혜원을 놀리며 그녀가 즐겨 먹던 음식이었기에, 사실 혜원은 꼭 한 번은 먹어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더랬다. 하지만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음식들의 모습에 혜원은 자신의 무모한 선택을 후회했다. 배는 고프고, 필립에겐 너무도 미안했다.

어느덧 그런 혜원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필립이 용기 있게 매운 족발을 집으며 말했다.

“아, 이게 혜윤이가 좋아하는 음식이었구나? 그럼 나도 먹어봐야겠다.”

“어? 그, 그런데 그거 매울 텐데…. 많이 많이 매울 것 같은데….”

“뭐 매워 봤자 얼마나 맵겠어. 혜원이가 정성스럽게 시켜 준 건데 내가 먼저 먹어볼게!”

시무룩해진 혜원을 위해 용기 있게 먼저 도전하기로 한 필립. 하지만 그는 미처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그 끔찍한 시간을 이때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

집으로 향하던 혜윤은 갑자기 오한이 든 것 같은 싸한 기분에 몸을 잘게 떨었다. 어딘가 모르게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에 혜윤은 문뜩 윤결을 쳐다봤다. 하지만 멀쩡히 운전하는 그에게 문제가 생긴 건 아닌 것 같았다.

혜윤은 다시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가시지 않는 찝찝한 기분을 떨쳐보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이런 불길한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무언가 큰일이 생길 것만 같은 불안함에 그녀는 입가에 엄지를 가져다 대며 질근질근 씹어대기 시작했다.

‘뭐지. 이 꺼림칙한 기분은?’

걱정하던 유학 허락도 무사히 받았겠다, 사실 그녀가 이렇게 초조해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머릿속에 번뜩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강혜원, 그리고 필립. 이 문제아 둘을 나란히 집에 두고 왔다는 사실에 혜윤은 입술을 꽉 깨물며 소리쳤다.

“윤결 씨! 예감이 안 좋아. 속력 좀 내 봐요. 빨리!”

“응? 왜? 무슨 일인데? 어디 아파? 뭐, 그, 급해?”

얌전히 잘 있다가 갑자기 빨리 속력을 내라고 닦달하는 혜윤의 알 수 없는 변덕에 윤결이 게슴츠레 눈을 흘기며 물었다. 설마, 여기서 화장실이라도 가야겠다는 건가? 하지만 잔뜩 굳어있는 혜윤의 심상치 않은 얼굴에 윤결은 심각성을 느낀 듯 말없이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쌍둥이들만의 무서운 직감. 그리고 특히 혜윤의 경우는 그 능력이 더 특별했다.

윤결의 차가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혜윤은 재빨리 차에서 내려 집으로 뛰어갔다. 뛰는 내내 혜윤은 제발 자신의 이 불길한 예감이 이번엔 틀리길 간절히 바랐다.

**

그 시각. 용감하게 족발을 집어 든 필립은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혜원을 향해 싱긋 웃어주며 조심스럽게 족발을 한 입 베어 먹었다.

하지만 입에 닿자마자 느껴지는 공포에 가까운 매운 향에 필립의 입 안은 얼얼함을 넘어선 혀가 베이는 듯한 고통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윽!”

결국, 한 입도 먹지 못한 채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버린 필립. 그는 연신 무거운 기침을 내뱉으며 괴로워했다.

“필립! 괜찮아요? 어떡해, 어, 어떡하지! 전화기, 전화기 어딨지!”

고통스러워하는 필립의 모습에 혜원 또한 혼비백산하여 그를 끌어안으며 울먹였다. 허리를 펴지도 못할 만큼 가쁜 기침을 연이어 쏟아내던 필립의 얼굴이 점점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쌕쌕거리는 그의 숨소리 또한 심상치 않았다. 급기야 온몸의 힘이 다 빠진 듯 축 늘어지는 필립은 이제 기침을 하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겁에 질린 혜원이 떨리는 손으로 윤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가 전화를 받지 않자 다시 혜윤에게 전화를 걸려던 순간, 그녀가 귀신같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며 혜원을 소리쳐 불렀다.

“강혜원! 필립!”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혜윤의 이마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혜, 혜윤아!!”

부엌에서 들려오는 애처로운 혜원의 목소리에 혜윤은 서둘러 그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뒤를 따라 헐레벌떡 집 안으로 들어온 윤결 또한 재빨리 부엌으로 달려갔다.

쓰러져있는 필립과 울고 있는 혜원.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혜윤은 필립에게 달려가며 그를 불렀다.

“피, 필립!!”

하지만 비정상적으로 들려오는 그의 거친 호흡에 혜윤은 서둘러 그의 방으로 달려가 약을 챙겨 들고 나왔다.

“비켜 강혜원!”

눈물범벅인 채로 필립을 안고 울기만 하는 혜원을 밀쳐 낸 혜윤이 침착하게 필립의 입 안으로 약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옆에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서 있는 윤결에게 그를 침대로 옮겨달라 부탁했다.

윤결은 조심스럽게 필립을 안아 들어 침대로 옮겼다. 어느덧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며 필립의 얼굴에도 혈색이 돌아왔다. 혜윤은 그제야 안심이 된 듯 필립의 차가운 두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제 뺨에 가져다 댔다.

어려서부터 심한 천식과 폐렴을 앓아오던 필립.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많이 나아져 병원 생활은 면했지만, 그가 한번 기침을 시작하면 발작적인 호흡곤란으로 변질되기에 항상 조심해야 했다.

남들이 가볍게 내뱉는 기침조차도 그에겐 생명의 위험이 될 만큼 사실 필립의 기관지는 좋지 않았다.

“필립, 정신 좀 차려봐….”

파르르 떨리던 혜윤의 눈가에 어느덧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혜윤의 눈물에 윤결은 찬찬히 그녀의 어깨를 다독여 주며 방을 나왔다. 지금은 그 어떤 말로도 그녀를 위로해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조용히 문을 닫고 방을 나온 윤결은 혜원을 찾아 부엌으로 향했다. 필립이 쓰러진 것이 꽤 큰 충격이었는지 혜원은 바들바들 떨리는 팔로 겨우 바닥을 지탱하며 혼자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혜원아…. 괜찮아?”

다정한 윤결의 물음에도 혜원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자신의 잘못이라고 중얼거리며 연신 눈물만 쏟아내는 혜원을 보니 윤결은 가슴이 아팠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식탁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그는 곧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윤결은 문제의 음식들을 서둘러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까이 가기만 해도 진하게 풍겨 올라오는 매운 향에 윤결은 미간을 찌푸리며 혜원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어깨까지 들썩이며 우는 녀석에게 차마 모진 말을 할 수 없어 그는 다시 말없이 음식들을 정리해 쓰레기통에 넣었다.

“흑흑…. 필립 형. 미안해요. 내가 다 미안해요.”

급기야 혜원은 엉엉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너무도 서럽게 우는 혜원의 모습에 윤결이 그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달랬다. 하지만 혜원의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혜원은 두려웠다. 필립이 영영 눈을 뜨지 않을까 봐 무서웠고, 처음 보는 혜윤의 냉정한 모습에 너무도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윤결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그의 가슴이 다 젖을 때까지 혜원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러다 혜원까지 탈진할까 봐 걱정된 윤결은 조심스럽게 그를 안아 소파에 내려 앉혔다. 윤결은 파르르 몸을 떠는 혜원의 어깨 담요를 덮어 주었다. 그는 이내 혜원의 곁에 앉아 살며시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혜원아. 필립 괜찮을 거야. 혜윤이가 곁에 있잖아.”

“내가, 내가 그런 것만 안 시켰어도 필립 형이 아프지 않을 수 있었는데…. 다 내가 잘못해서 흑흑…. 나 때문에 형이 아픈 거잖아요.”

혜원은 그를 끝까지 말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떨칠 수 없었다. 자신을 밀쳐 내던 혜윤의 차가운 눈빛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한 번도 자신을 차갑게 대한 적 없던 혜윤의 낯선 모습에 혜원은 더 움츠러들었다. 혜원은 다리를 가슴까지 끌어올려 감싸 안으며 두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는 서럽게 울어댔다.

“혜원아. 이리 와.”

그런 혜원의 모습이 너무도 안쓰러운 윤결이 그를 다시 자신의 품에 고쳐 안으며 말했다. 힘없이 제 품에 안기면서도 잘게 떨려오는 그의 어깨에 윤결은 지금 혜원이 얼마나 겁에 질려있는지를 짐작했다.

한참 동안 혜원의 어깨를 토닥이며 달래 주던 윤결은 어느덧 문을 열고 나오는 혜윤을 발견하고는 그녀를 올려다봤다. 모질게 한마디 할 것 같은 그녀의 단호한 눈빛에 윤결은 안쓰러운 얼굴로 혜원을 내려다봤다. 그녀가 나온 것도 모르고 어느새 울다 잠든 혜원. 윤결은 조심스럽게 그를 소파에 내려 눕히며 혜윤에게로 다가갔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

“일부러가 아니라도 혼날 건 혼나야죠! 어떻게 그런 걸 먹을 생각을 해요?”

“하아…. 필립이 저 정도로 못 먹을 줄 몰랐겠지. 아니 애초에 필립이 아픈 것도 혜원이는 몰랐잖아. 그러니까 이번엔….”

“지금 내가 필립 때문에 이러는 거 같아요?”

“뭐…?”

윤결은 씩씩거리며 화를 참지 못하는 혜윤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혜윤은 거칠게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잠든 혜원을 쳐다보며 말했다.

“혜원이도 못 먹어요. 혜원이도 매운 거 못 먹는다고요. 특히 저런 거 먹으면 안 된다고요. 혜원이는.”

“그게 무슨….”

“혜원이도 어렸을 때부터 위가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더더욱 자극적인 음식은 먹이지 않았다고요. 물론 철이 없을 땐 혜원이를 놀리려고 일부러 저 녀석 앞에서 몇 번 먹으면서 놀리긴 했지만, 그래도 절대 먹진 못하게 했다고요.”

“그래도 안 먹었으니까 이번에 그냥 조용히 넘어가자.”

“그랬다가 또 몰래 먹으면요? 이참에 아주 혼쭐을 내줘야 한다고요. 저 녀석은!”

너무도 아찔했던 순간이었기 때문일까, 혜윤은 놀란 마음을 애써 누르며 소리쳤다.

그때였다. 깜빡 잠이 들었던 혜원이 잠에서 깨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둘러봤다. 언제 방에서 나왔는지 단단히 화가 난 혜윤을 발견한 혜원은 다시 담요 속으로 얼굴을 쏙 집어넣으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왠지 지금은 그녀를 보는 것이 너무나 무서웠고, 아직은 그녀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강혜원 이리 와.”

하지만 혜윤의 단호한 부름에 혜원은 스르륵 일어나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지은 죄가 있어서인지 혜원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그녀의 앞에 섰다. 차마 그녀를 올려다볼 용기까지는 나지 않았다.

윤결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멀찌감치 서서 그들을 지켜봤다. 혜윤을 말리고 싶은 마음은 가득했으나, 그녀의 마음 또한 모르는 게 아니라 차마 말릴 수도 없었다. 그래도 너무 심하게 화를 낸다 싶으면 그녀를 말릴 생각으로 윤결은 혜원의 뒤에 바짝 다가서며 혜윤의 눈치를 살폈다.

“너, 뭘 잘못했는지 알아?”

“응…. 나 때문에 필립 형이 아픈 거….”

“또.”

“내가 대신 먼저 먹었어야 했는데….”

“하아…. 진짜 이게….”

혜윤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눈을 치켜뜨며 노려보자, 화들짝 놀란 혜원이 닭똥 같은 눈물을 마구 흘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미안해. 혜윤아. 필립 형 어떡해. 흑흑…. 형 많이 아파? 내가 잘못했어. 내가 대신 먹었어야 했는데 미안해.”

자신이 대신 먹지 못해 미안하다는 혜원의 말에 혜윤은 그저 기가 찰 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저 바보같이 착하고 순진해 빠진 혜원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이란 생각에 이젠 화조차 나오지 않았다. 혜윤은 천천히 그의 곁으로 다가가 살며시 끌어안으며 말했다.

“혜원아. 너도 먹지 말아야지. 네가 먹었어도 나는 똑같이 화를 냈을 거야. 넌 내 소중한 동생이니까. 어쩌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화를 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혜원아, 내가 미국으로 돌아가도 이런 걱정하지 않게 약속해 지금. 다시는 이런 무모한 짓 하지 않겠다고.”

“응.”

예상치 못한 혜윤의 다정한 포옹과 따뜻한 위로의 말에 혜원은 가라앉았던 서러움이 다시 밀물처럼 훅 밀려들어 왔다.

“저 인간한테 확인할 거야. 약속을 잘 지키는지 아닌지.”

“응.”

혜윤의 품에서 훌쩍이면서도 꼬박꼬박 대답하는 혜원의 입가에는 어느새 조그마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그런 애틋한 쌍둥이들의 포옹에 윤결 또한 눈시울이 붉어졌다. 새삼 형제 하나 없는 자신이 불쌍해 보이기까지 할 정도로 둘 사이에 흐르는 애틋함에 윤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한차례 소동이 지나간 후, 정신이 돌아온 필립 또한 연신 혜원에게 사과하며 미안해했다. 먹지 말라고 한 혜원의 말을 듣지 않고 먹은 건 자신이라며 열변을 토하며 혜원을 감싸는 필립의 모습에 혜윤도 더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서로를 향해 다시는 그런 음식들을 쳐다도 보지 말자며 약속을 하는 혜원과 필립의 모습에 윤결은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

어느덧 혜윤과 필립이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 다가왔다. 혜원에게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작별은 너무도 어려운 일 중 하나였다. 역시 혜원은 공항에서도 필립의 두 손을 꽉 잡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돌아가기 싫은 건 필립도 마찬가지였는지, 가서 꼭 연락하겠다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출국장으로 향했다.

멀어지는 둘의 모습에 혜원은 또다시 혼자가 된 것 같은 쓸쓸함이 밀려왔다. 그리고 그런 혜원의 쓸쓸한 마음을 눈치챈 윤결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 바짝 자신의 가슴팍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편이 옆에 있는데 자꾸 혜원이가 그런 눈을 하면, 형 기분이 어떨까?”

“뭐, 뭐라는 거야 진짜.”

머쓱해진 혜원이 재빨리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질투 난다고. 형 한번 질투하기 시작하면 무서운 거 알지? 하루 종일 널 울릴지도 몰라.”

“나를? 왜?”

울린다는 의미를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순진한 혜원이 예쁜 눈을 반짝이며 올려다보자, 윤결은 진심으로 그를 제대로 울려보고 싶은 충동마저 일었다.

“그런 게 있어. 뭐 알고 싶으면 계속 질투하게 해보든가….”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혜원의 볼을 살살 어루만지는 윤결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너무도 위험한 강혜원, 어쩌면 윤결이 그를 울릴 시간이 그리 멀지만은 않은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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