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혼란스러운 감정 (4/12)

4. 혼란스러운 감정

한편 윤결은 한참이 지나도 혜원이 돌아올 생각을 안 하자 안 되겠다 싶어 그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혹시나 해서 복사기가 있는 곳으로 향했으나 역시 있을 리 없었다. 그는 탕비실부터 회의실까지 하나하나 직접 문을 열어가며 혜원을 찾았다.

그때였다.

멀리서 정현의 동생이자 고모의 아들인 재현의 손을 잡고 해맑게 웃으며 걸어오는 혜원을 발견한 윤결은 차게 식은 얼굴로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짜증을 넘어 분노가 치밀어 오른 윤결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혜원이 자신을 알아볼 때까지 노려봤다.

그리고 그런 윤결을 먼저 알아본 건 재현이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고개를 돌려 윤결의 무시무시한 얼굴을 마주한 혜원 또한 깜짝 놀라며 발걸음을 멈췄다.

“어? 윤결 형.”

“너 지금 감히 누구 손을 잡고 걸어오는 거야?”

“혀, 형. 아니…. 오, 오빠.”

무시무시한 기운을 풍기는 윤결의 모습에 기가 죽은 혜원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싸늘해 보이는 윤결의 사나운 눈빛에 혜원은 슬그머니 재현의 손에 잡힌 자신의 손을 빼내며 윤결의 곁으로 다가갔다.

“야, 강 혜워… 혜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내가 시킨 일은 다 하고 이렇게 시시덕거리고 다니는 거야?”

“아니 그게…. 그러니까요….”

잔뜩 화가 나 보이는 윤결의 목소리에 겁먹은 혜원은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윤결 형. 아니 한 이사님. 뭔가 단단히 오해하신 것 같은데….”

재현이 머뭇거리는 혜원을 대신해 그의 앞으로 다가오며 변명을 하려 하자 윤결이 매섭게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아. 넌 유학 갔다가 입국한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지? 여긴 내 와이프 강혜윤.”

“뭐? 와이프? 이 사람이 형 와이프라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재현이 눈썹을 움찔거리며 윤결을 빤히 쳐다봤다.

한평생 그의 곁에 여자라고는 본 적이 없었다. 소개팅은커녕, 여자 사람 친구조차 만들지 않던 그가 갑자기 결혼이라니? 순간 당황한 듯 재현이 아무 말 없이 쳐다보기만 하자, 윤결이 재빨리 혜원의 손을 잡아 자신의 옆으로 데리고 오며 말했다.

“왜, 못 믿겠어?”

얼떨결에 윤결의 코앞으로 끌려간 혜원이 미처 무슨 일을 당하는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윤결이 혜원의 턱을 잡아 들며 그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읍!!”

갑작스러운 키스 세례에 깜짝 놀란 혜원이 손을 뻗어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려 하자, 윤결은 살벌한 목소리로 입술을 살짝 뗀 채 혜원의 눈을 노려보며 말했다.

“한 번만 더 반항해봐. 이대로 여기서 안아버릴 테니까. 그대로 입 벌리고 있어. 얌전히. 내가 지금 화가 굉장히 많이 났거든 강혜원.”

무서웠다. 너무도 차갑고 냉정한 윤결의 눈빛에 혜원은 그대로 입을 벌린 채 지독히도 아픈 그와의 잔혹한 키스를 이어갔다.

숨이 막히고 입 안이 얼얼할 정도로 강렬한 키스. 결국, 혜원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오고 나서야 윤결은 천천히 혜원의 입술을 놓아주며 그를 자신의 가슴에 와락 끌어안았다.

훌쩍이는 혜원의 떨리는 등을 찬찬히 쓰다듬어 주던 윤결은 재현을 향해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

“봤지? 우리 이렇게 뜨거운 사이인 거. 그러니까 앞으로 내 와이프 앞에 얼쩡대지 마. 아, 정현이한테도 꼭 전해. 혜윤이 근처에 한 번만 더 얼쩡거리다 걸리면 뼈도 못 추리게 만들어 줄 거라고. 내가 또 한다면 하는 성격이잖아?”

얼굴이 어둡게 굳어버린 재현이 뭐라 말을 채 꺼내기도 전에 윤결은 등을 돌려 혜원을 데리고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멀어져 가는 윤결과 혜원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재현은 순간 무언가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 충격에 휩싸였다.

윤결의 정략결혼에 대해서는 얼핏 들은 것 같았으나 정말 그 결혼을 했을 줄이야. 그리고 그의 와이프가 이렇게 귀엽고 어린 숙녀였단 사실에 한 번 더 놀랐다. 자신보다 한발 빠른 그의 행운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묘하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는 생각에 재현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앞으로 가족 모임에서 종종 보게 될 귀여운 꼬마 형수를 생각하니 앞으로의 한국 생활이 더욱 기대되려 했다.

**

훌쩍이는 혜원을 데리고 사무실로 돌아온 윤결은 아직 분이 다 풀리지 않는 듯 팔짱을 낀 채 자리에 앉아 창밖을 응시했다. 정말이지 자신이 옆에 끼고 있으면 다 괜찮을 줄 알았다. 하지만 어떻게 감히 낯선 남자의 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잡으며 자신의 앞에 나타날 수 있는지, 아무리 생각 없고 철없는 녀석이라 할지라도 도저히 용서되지 않았다.

씩씩거리는 윤결과는 달리, 혜원은 눈물이 가득 차오른 서러운 눈망울로 윤결을 멍하니 쳐다보며 울음을 애써 참고 있었다.

첫 키스였다. 20년 만에 처음으로 누군가와 키스란 걸 해 본 혜원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리고 자신의 첫 키스가 이토록 거칠고 무서울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는 듯, 끅끅 소리까지 내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는 혜원의 모습에, 윤결이 뒤를 돌아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뭐가 그렇게 서러워서 우는 건데!”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호통을 치는 윤결의 말에 혜원은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쳐다볼 뿐 입을 꽉 다물어 버렸다. 정말이지 잠시나마 이 남자가 다정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바보 같다고 생각될 만큼 혜원은 윤결에게 크나큰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너는 네 행동이 나한테 얼마나 상처를 주는지는 생각조차 안 하지?”

또 혼자 삐친 듯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혜원의 앞으로 윤결이 다가와 그의 뺨에 두 손을 가져다 대며 물었다. 의외로 윤결은 자신이 더 상처받은 듯한 애잔한 눈빛으로 혜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남자 지금 뭐라는 거야? 상처? 내가 자기한테 무슨 상처를 줬다고 또 나한테 뒤집어씌워?’

예상치 못한 윤결의 반응에 혜원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윤결의 얼굴은 슬퍼 보였다. 조금 지쳐 보이기도 했고, 어딘가 초조해 보이기까지 했다. 왠지 그의 말처럼 자신이 그에게 큰 상처를 준 것 같은 죄책감까지 들게 만드는 윤결의 쓸쓸해 보이는 눈빛에 혜원은 작은 목소리로 사과를 했다.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모르겠다. 사실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항상 당당하고 자신감에 넘쳐있던 남자의 이런 풀죽은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하아…. 왜 미안한데? 뭐가 미안한 건데 강혜원.”

“모르겠어요. 흑흑…. 그냥 다 잘못했어요.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이제 화 풀어요.”

“정말. 모르겠어? 내가 왜 너한테 그렇게까지 화가 났는지, 왜 그 새끼 앞에서 네게 키스했는지 정말 모르겠어?”

“몰라요. 모른다고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말해주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아냐고요.”

서러움이 복받쳐 오른 혜원이 고개를 마구 저으며 소리쳤다.

그가 하는 말이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다. 대체 뭘 더 어쩌라는 건지…. 그저 혜원은 모든 게 너무 어렵기만 했다.

“강혜원. 똑똑히 들어. 겨우 그딴 키스 가지고 이렇게 애처럼 질질 짜지 마. 난 그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어. 네가 자꾸 내 손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키스 따위가 아닌 그보다 더한 것도 그 새끼 앞에서 할 수 있다고. 그러니까 자꾸만 내 속 뒤집는 짓 좀 하지 마. 제발 혜원아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내 옆에만 있어.”

윤결은 혜원이 앉은 소파 밑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얼굴을 자신의 어깨로 당겨 안으며 말했다. 얌전히 안긴 혜원이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감싸 안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윤결이 말을 이어갔다.

“난 네 몸에 다른 사람 손 닿는 거 싫어. 그러니까 혜원아, 네가 의지하고 기댈 사람은 항상 나여야 한다는 거 잊지 마. 알았지? 다시는 그 새끼 손 잡고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아니 그냥 넌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 마.”

마치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 윤결의 고백에 혜원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다시 다정한 윤결의 모습으로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저기…. 윤결 형.”

문득 무언가 놓친 듯한 기분에 혜원이 조심스럽게 얼굴을 들어 윤결을 불렀다.

“응? 왜 혜원아?”

“나 근데 형이 복사하라고 한 거. 하나도 못 했어요.”

“넌 지금 이 상황에서 꼭 그 말이 하고 싶었어?”

“아, 아니요. 그냥. 그렇다고요.”

혜원이 작게 미소를 짓더니, 다시 그의 어깨에 얼굴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지금은 이대로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분명 눈이 빨개지도록 울었지만 왜 울었는지 기억이 안 날 만큼 윤결의 품은 따뜻했다.

윤결의 마음도 풀린 듯했고, 혜원도 어느덧 안정을 되찾아 가며 둘 사이엔 또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더 이상 혜원에게 일 따위를 시킬 마음이 사라진 윤결은 그를 사무실 안 자신의 작은 방으로 다시 밀어 넣으며 말했다.

“너 그 문제집 다 풀 때까지 나올 생각하지 말고 공부해 알았어?”

“히익! 이걸 어떻게 다 풀어요. 오늘 다 못 풀어요!”

“대학 가기 싫은가 봐? 뭐 안가도 난 상관없지만. 내 옆에서 평생 내 와이프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어때?”

“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됐어요! 나 오늘 이거 다 풀 거니까 말이나 시키지 마세요!”

낯 뜨거운 와이프라는 말에 혜원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풀라면 못 풀 줄 알고!! 자신도 한번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겠다는 듯 혜원이 문제집을 펼쳤다.

문제집을 싸울 기세로 뜨겁게 노려보는 혜원이 그저 귀엽기만 한 윤결은 열심히 해보라는 듯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방문을 받고 나왔다.

**

“이사님?”

의자를 돌려 창문을 향해 젖히고 앉아 눈을 감고 잠시 쉬고 있던 윤결을 깨운 건 기획 1팀 과장 재현이었다.

“뭐야 넌. 네가 여길 왜 들어와?”

오늘따라 저 보기 싫은 얼굴을 너무 많이 마주한다는 생각에 윤결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역시 싫은 만큼, 말도 곱게 나가지 않았다.

“저 결재….”

“거기 내려놓고 나가.”

“형.”

“….”

형이라고 자신을 부르는 재현의 목소리에 말없이 그를 노려보는 윤결의 눈빛은 여전히 싸늘했다.

감히 누구더러 형이라고 부르는 건지! 어렸을 때부터 사람 가리지 않고 넉살 좋은 녀석인 건 알았지만, 오늘따라 그런 그의 모습이 꼴 보기 싫을 만큼 윤결은 자제력을 잃고 있었다.

“윤결 형.”

“왜. 또 뭐?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짜증스러운 듯 윤결이 거칠게 의자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향하며 물었다.

“그 사람이 형 와이프인 줄 정말 몰랐어. 나 집안일에 별로 관심 없잖아. 유학 갔다 와서 이것저것 일도 바빴고 회사 들어온 지 이제 겨우 일주일이었어. 오자마자 무능력한 낙하산 과장이라는 소리도 듣기 싫었고, 형한테 미움도 받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결국, 또 형한테 이렇게 미운털 박혔네.”

“그래서 뭐? 미운털 박힌 거 빼달라고 투정 부리는 건가?”

“아니. 그냥 궁금해서.”

“뭐가?”

윤결은 나가지 않고 계속 대화를 이어가는 재현을 노려보며 물었다.

“우선 형을 오해한 부분이 있었어. 그것부터 사과할게."

“오해? 사과?”

“난 사실 형이 너무 여자한테 관심이 없어서 혹시 남자를 좋아하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했었어.”

“뭐, 뭐라고?”

윤결은 아무도 모르는 자신의 비밀을 들킨 것 같은 초조함에 눈을 치켜뜨며 재현을 노려봤다. 설마 이 자식. 알고 말하는 건가? 아니면 뭣도 모르면서 그냥 지껄이는 건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늘 감정이 먼저인 정현과는 다르게 재현은 굉장히 이성적인 아이였다. 그래서 어쩌면 정현보다 더 주의해야 할 놈이기도 했다.

윤결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한 줄 흘러내렸다. 그는 순간 마음속으로 절실히 외쳤다.

‘강혜원. 너 절대 그 방에서 나오지 마라!’

너무도 정곡을 찌르는 재현의 물음에 윤결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더 들어보기로 했다. 여차하면 잡아떼면 될 것이기에 윤결은 천천히 입가를 굳히며 조용히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재현은 이내 자신이 틀렸었다는 걸 인정이라도 한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네. 형은 그냥 눈이 아주 높은 거였구나? 저렇게 귀엽고 예쁜 혜윤이와 결혼에 성공한 걸 보면. 잠깐, 그런데 강혜윤이면 그 강 회장님 손녀? 나이도 굉장히 어린…. 그 꼬마? 완전 대박.”

재현은 얼굴까진 기억하지 못해도 집안끼리는 잘 알고 있었기에 혜윤이 아직 고등학생이란 걸 생각해냈다. 그리고는 마치 도둑놈을 보는 듯한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윤결을 쳐다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안 하겠다던 그 정략결혼을 한 윤결도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고등학생 주제에 윤결과 결혼을 하겠다고 한 혜윤도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과는 다르게 재현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쏠리자 윤결은 그제야 안심이 된 듯 몸을 일으켜 담배를 꺼내 들며 말했다.

“꼬마는 아니고, 아직 고등학생 신분이지만 나이는 먹을 만큼 먹은 스무 살 성인이거든? 아, 사실 이젠 고등학생도 아니다. 자퇴하고 수능 준비하니까. 아무튼, 그래서 대체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아무리 혜원이 어리다지만, 그래도 성인인데 쓸데없는 오해는 풀어줘야 할 것 같아 변명을 조금 덧붙였다.

“아니 그냥 결혼 축하한다고. 뭐 많이 늦긴 했지만. 그리고 언제 한번 우리끼리 모여서 밥 한번 먹자. 나 형 되게 좋아했는데. 아, 물론 지금도 좋아해. 그런데 언제부터 형이 우리를 멀리하는 것 같아서 조금 서운하긴 했어. 내가 혹시 뭐 형한테 잘못한 게 있나 조금 걱정도 했거든. 그리고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사과하고 풀고 싶어.”

재현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없어. 잘못한 것도 사과해야 할 것도 없어. 난 그냥 지금처럼 가깝지도 멀지도 않는 이 거리가 적당해서 좋을 뿐이야. 그리고 너도 회사에선 형이라고 부르는 거 오늘이 마지막이었으면 하고.”

윤결이 창문을 살짝 열어 담배 연기를 밖으로 내뿜으며 말했다.

“하아…. 어렵다. 알았습니다. 한윤결 이사님. 그래도 다음부터는 그 험상궂은 인상은 좀 펴고 인사 받아주라. 형이 이러니까 다들 형한테 아니 이사님한테 결재받으러 오는 걸 두려워하잖아. 아무튼, 잘 알겠습니다.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사석에서는 꼭 동생 취급이라도 해주세요. 이사님.”

들어왔을 때처럼 사람 좋은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나가는 재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윤결은 잠시 옛 생각에 잠겼다.

그의 말대로 중학교 때까지는 나름 잘 지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고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닫고 나면서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편치 않았다.

혹시나 자신의 비밀을 들키기라도 할까 봐 윤결은 그들을 멀리했었다. 그렇게 철저히 혼자 고립된 채 지내다 보니 어느덧 자신이 의도적으로 할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기 위해 그들과 멀어진 것처럼 이야기가 와전되어 있었다.

늘 오빠의 아들인 윤결만 끼고도는 한 회장의 모습에 윤결의 고모인 재현의 모친은 극도로 윤결을 경계하며 자신의 아들들을 회사로 밀어 넣어 일에 매달리게 했다.

다른 이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후계자 싸움. 하지만 윤결의 눈에는 너무도 훤히 보이는 그런 기 싸움이 싫었다. 그렇게 그들을 멀리하다 보니 어느새 윤결은 차갑고 냉정한, 일밖에 모르는 독한 인간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혼자 고립된 삶을 자처해 살아가고 있었다.

지독히 외롭고 어둠뿐이던 윤결의 삶에 한 줄기 따뜻한 빛처럼 파고들어 그를 변하게 해준 강혜원. 이제 윤결은 그런 혜원을 뺏길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더욱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도 혜원의 진짜 정체를 알아챌 수 없게, 누구도 혜원을 자신의 곁에서 뺏어 갈 수 없게 말이다.

윤결은 겨우 두 모금 정도 빨던 담배를 짓이겨 껐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혜원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창 열심히 공부 중인 혜원이 보였다. 정말로 그 두꺼운 문제집을 다 풀 생각인지 혜원은 집중하며 또박또박 답을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한번 집중해서 빠져들면 고개도 들지 않고 파고드는 성격이라 아직 혜원은 윤결이 방에 들어온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윤결은 조용히 침대에 걸터앉아 공부에 열중인 혜원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과연 이 녀석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나를 혐오할까? 다시는 곁에 오지 말라고 자신에게서 멀리 도망가 버리려나? 아니면 자신을 속였다 원망을 하며 또 옥구슬 같은 눈물을 흘려댈까?

혜원에게 빠져들수록 원하는 만큼 더 다가갈 수 없음에 애가 탔고, 애가 탈수록 그가 자신의 손에서 빠져나가 버릴까 봐 두려웠다.

복잡하면서도 심란한 내적 갈등에 윤결이 무의식적으로 짧은 한숨을 내쉬자, 문득 드는 인기척에 혜원이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봤다.

혜원은 언제 들어왔는지 침대에 앉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윤결을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곁에 앉으며 말을 걸었다.

“나 보고 꼼짝 말고 공부하라고 했으면서 형은 왜 일 안 하고 여기서 농땡이 피우는 거예요?”

“나 농땡이 피우는 거 아닌데.”

“그럼요? 이게 농땡이가 아님 뭐래요?”

“강혜원 충전하는 중.”

“뭐, 뭐라고요. 뭔 충전??”

이 형이 또 더위를 집어 먹었나!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잘도 부끄러운 말을 내던지는 윤결의 모습에 혜원이 기가 막힌다는 듯 멍하니 그를 쳐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윤결은 피식 웃더니 살며시 혜원의 허리를 끌어안아 그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

“혜원아….”

“왜, 왜요. 또.”

혜원은 갑자기 다정하게 자신을 안아오는 윤결의 손길에 민망한 듯 고개를 숙여 그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넌 내가 이렇게 널 안으면 기분이 어때? 막 소름 끼치게 싫고, 도망가고 싶어져?”

그러자 놀란 혜원이 고개를 들고 윤결을 쳐다봤다.

이건 또 무슨 다람쥐 도토리 까먹다 벼랑 끝에 먹던 도토리 떨어트리는 아찔한 소리인지! 아니 그보다 왜 갑자기 그런 걸 묻는 거지?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혜원은 진지하게 그가 던진 질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가 이렇게 자신을 안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 번도 진심으로 그가 싫었던 적은 없었다. 그리고 사실 아까 윤결과의 첫 키스도 거칠어서 놀랐을 뿐 싫은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조금 더 부드럽게 해줬으면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한마디로 혜원은 여태까지 윤결이 그에게 했던 그 어떤 스킨십도 싫거나 소름 끼쳤던 적은 없었다. 순간 혜원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성향인 건지 아니면 그게 윤결이기에 아무렇지 않은 건지 이젠 정말 헷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행여나 듣기 싫은 말이 나올까 봐 내심 걱정하던 윤결은 예상 밖의 대답에 흠칫 놀란 듯 번쩍 고개를 들고 혜원을 쳐다봤다.

혜원이 수줍은 듯 고개를 가만히 숙이고만 있자 윤결은 천천히 그의 고개를 들게 하며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그럼 내가 만약 이 자리에서 너한테 또 키스하면, 넌 도망갈 거야?”

또다시 혜원은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윤결은 그게 혜원의 답이라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자신의 옆에 내려 앉혔다. 몸을 휘청이던 혜원이 엉겁결에 윤결의 품에 안기게 되자 윤결은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키스를 했다.

“흐읍!!”

깜짝 놀란 혜원의 신음과 함께 벌어진 그의 입 안으로 윤결의 뜨거운 혀가 들이닥쳤다. 윤결은 최대한 부드럽게 혀를 움직여 혜원의 고른 치열 사이를 핥으며 그의 입 안을 탐했다.

떨리는 손을 어찌할 줄 몰라 주먹만 꽉 쥐어 잡은 채 바들거리는 혜원이 너무 귀여웠다. 윤결은 또다시 천천히 혜원의 혀를 휘어 감아 빨아 당겼다. 어느덧 윤결의 입 속으로 혜원의 작고 귀여운 혀가 빨려 들어왔다. 윤결은 혀끝으로 살살 그의 혀를 쓸어 올리며 혜원을 자극했다.

더욱 깊게 맞물린 두 입술 사이는 공기 하나 통과하지 못할 정도로 밀착되었다. 질척이는 둘의 야릇한 키스 소리가 작은 방 안에 가득 울려 퍼지며 뜨거운 열기를 불태우고 있었다.

“하앗! 흐응…. 그, 그만. 혀엉…. 그, 그만. 흡!!”

부드럽지만 열정적인 윤결의 키스로 진이 다 빠져버린 혜원이 결국 먼저 손을 들어 그의 가슴을 살며시 밀쳐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아쉬운 듯 입술을 떼어낸 윤결은 퉁퉁 부어오른 혜원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속삭였다.

“혜원아. 난 너한테 이보다 더한 것도 하고 싶은데. 그럼 우리 혜원이 놀라서 또 울려나?”

“혀, 형 이제 그만해요. 나 무서워.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혜원은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머릿속이 하얘지며 심장이 터질 듯 빠르게 뛰어대기 시작했다.

자신이 이 남자를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분위기에 휩쓸려 그와 실수로 키스를 해버린 것인지, 도저히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혜원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무서웠다.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역시 키스가 문제였다. 혜원은 이 남자와 키스를 나눈 순간부터 자신이 이상해졌단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정신이 돌아오자 혜원은 자신이 윤결과 두 번이나 키스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 그의 손을 뿌리치고는 창가로 도망치며 소리쳤다.

“대체 왜 이래요?? 나한테 왜 이래! 형은 혜윤이랑 결혼한 거지 나랑 한 거 아니잖아! 형은 혜윤이 남편이잖아! 그, 그런데 나한테 왜 그래요? 나 헷갈리게 왜 그래요 정말!!”

혜원은 누나의 남편과 두 번이나 키스를 했다는 것과 또 그와의 키스가 설렜고 싫지 않았다는 죄책감에 머리를 감싸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그와 있으면 자신도 이상하게 변해버리는 것만 같았다. 혜원은 생전 처음 느껴 보는 이 뜨거운 감정이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위험한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아슬아슬함. 아직 한없이 순수하기만 한 혜원이 감당해 내기엔 너무도 어려운 감정이었다.

그러나 혼자 혜윤과 자기 사이를 오해하고 있는 혜원의 외침에 윤결은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결혼? 남편? 그래 그딴 격식 차리는 결혼식은 혜윤이랑 했다고 쳐. 하지만 나랑 신혼여행부터 지금까지 쭉 내 와이프로 살고 있는 건 너, 강혜원 아닌가? 막말로 미국에 있는 혜윤이 아직까지 오매불망 나만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자유롭게 남자를 만나고 다니는지, 연애를 하고 다니는지 내가 알 게 뭐야? 물론 그래 준다면 나야 고맙지만. 난 지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살게 돼서 혜윤이에게 아주 고마운 마음이거든. 뭐든 해달라는 건 다 해주고 싶을 만큼 말이야. 어차피 둘 다 사랑 없는 결혼식만 올린 것일 뿐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문제가 된다는 건데? 다시 알아듣기 쉽게 말해줘? 널 좋아한다고, 널 사랑한다고 강혜원.”

“뭐, 뭐라고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혜원은 갑작스러운 윤결의 사랑 고백에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저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들을 요약하자면 자신과 이 말도 안 되는 위장 결혼을 유지하는 이유가, 혜윤이 돌아올 때까지 어른들의 눈을 속이려는 게 아니라 정말로 자신을 사랑해서라고 말하고 있는 저 남자.

도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그의 진심인 건지, 혜원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만 해대는 윤결의 모습에 점점 더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도 안 되고 그럴 리도 없었다.

자신은 남자고 그도 남잔데, 어떻게 사랑이란 감정이 성립될 수 있는 걸까? 하지만 너무도 단호한 윤결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혜원을 향해 있었다. 창백하게 질려가는 혜원의 모습에 윤결이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그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왜 그렇게 놀라? 마치 불륜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혜윤이도 나도 서로 사랑 같은 거 하는 사이 아닌 건 네가 더 잘 알 거고. 그렇게 겁먹은 얼굴로 떨고 있으면 뭐가 달라지나? 너랑 내가 키스한 게 없던 일이라도 된데?”

“그, 그렇게 말하지 마요. 나는 그러니까….”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고요. 대체 형이 갑자기 나한테 왜 이러는지 모르겠단 말이에요.’

이 어색한 분위기를 피하고만 싶은 혜원은 점점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는 윤결을 피해 그에게서 멀어지려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혜원은 이내 몇 걸음 가지 못해 창가 옆 책상에 쿵 하고 부딪히고 말았다.

윤결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던 혜원의 어깨에 재빨리 손을 뻗어 그를 끌어당겼다. 윤결은 자신의 품에 와락 안겨진 혜원의 이마에 입맞춤을 하며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혜원아….”

“이, 이거 놔요! 흑흑…. 이거 놓으라고요!!”

결국, 혜원은 울음을 터트렸다. 그는 윤결의 어깨며 가슴을 마구 내리치며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도망가야 했다. 자꾸만 자신의 머릿속을 휘저으며 이상한 생각만 들게 만드는 이 위험한 남자로부터 멀리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괜찮아 혜원아. 쉬이…. 울지 마, 응? 네가 무서워하면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울지 마. 미안해. 우리 혜원이 놀라게 해서 형이 미안해.”

겁먹은 혜원의 모습에 아직은 무리라고 생각한 듯, 윤결이 찬찬히 그의 떨리는 등을 쓸어 주며 말했다. 그제야 혜원도 버둥거림을 멈추며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겼다.

혜원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윤결의 가슴에 기댄 채 쉽게 진정되지 않는 울음을 애써 참아내며 말했다.

“형도, 나도 남자잖아요. 내가 형을 존경하고 좋아할 수는 있어도 사랑할 수는 없어요. 우린 그러면 안 되잖아요. 형은 그냥 나한테 내가 존경하는, 좋아하는 다정한 형으로 있어 주면 안 돼요? 나 형을 다시 못 보는 건 정말 싫을 것 같아요. 흑흑…. 그래서 너무 무서워.”

“그래 혜원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까 그만 울어, 응? 벌써 머리에 열이 올랐잖아. 알았으니까 뚝 그치자 혜원아.”

이런 겁 많은 녀석을 자극해 봤자, 더욱 겁을 먹고 도망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윤결은 잠시 자신이 한발 뒤로 물러서 주기로 했다. 지금은 이 녀석을 달래고 구슬려 겹겹이 쌓여있는 그의 경계심을 푸는 것이 우선이었다.

“나 집에 갈래요. 집에 호, 혼자 갈래요.”

“그럼 차 내줄 테니까 그거 타고 집에 가. 너 혼자는 내가 걱정돼서 안 되겠어.”

윤결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충격에 몸을 바들바들 떠는 혜원을 부축하며 말했다.

혜원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어차피 자신도 지금 이 상태로는 멀쩡히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윤결의 지시로 그의 비서가 사무실로 올라왔다. 윤결은 빨갛게 부은 눈으로 책가방만 힘주어 잡고 있는 혜원을 그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곧장 집으로 가. 혜윤이 집에 들어가는 거 꼭 끝까지 다 보고 돌아오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이사님.”

“혜워… 하아… 혜윤아. 집에 도착하면 전화하고. 몸이 더 안 좋아지면 꼭 나한테 꼭 연락하고. 알았지?”

혜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할 기운도 그를 올려다볼 용기도 나지 않은 혜원은 그대로 윤결의 비서를 따라 사무실을 나섰다. 너무도 엄청난 사실을 들어 버린 혜원은 이 위험한 관계를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 겁이 났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그와의 키스. 혜원은 가만히 손을 올려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동시의 그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집에 도착한 혜원은 대충 바닥에 가방을 툭 떨어트리고는 힘없이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옷을 벗을 기력도 씻을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침대로 올라가 이불을 머리까지 푹 뒤집어썼다.

혜원은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대체 윤결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또 혜윤은 정말로 돌아올 마음이 없는 건지….

사실 이젠 점점 그녀가 돌아올 거란 희망조차 사라지려 했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졌다. 지금은 이런 복잡한 것들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혜준 형. 나 이제 어떡해? 너무 무서워.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정말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어.”

두려움에 휩싸인 혜원이 작게 흐느꼈다. 혹시라도 윤결을 좋아하는 마음이 저도 모르게 생겨버릴까 봐 겁이 났다. 그를 보며 동경하던 모습들이 혹시나 그를 좋아하는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까 봐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이 너무도 무서웠다.

한편 사무실에 혼자 남은 윤결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집으로 돌아가 버린 혜원의 걱정에 일조차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 혹시라도 집안에 모든 것을 밝히고 이 위장 결혼을 청산하겠다고 할까 봐 초조해졌다. 혜원에게 너무도 푹 빠져 있는 윤결은 이제 그 녀석이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막말로 모든 게 밝혀진다면 그를 납치해서라도 둘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도망가 함께 있고 싶을 만큼 어느덧 혜원은 그에게 간절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윤결은 너무 서툴게 다가간 오늘을 조금 후회했다.

그는 당장 집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으며 소파에 누워 눈을 감았다. 아직도 울먹이는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히 들리는 것 같았다.

“미안해 혜원아. 하아…. 내가 다 미안해.”

**

-삑삑삑….

늦은 밤, 퇴근하고 돌아온 윤결은 벨을 누를까 하다가 혹시라도 혜원이 자고 있을지 몰라 번호 키를 누르고 들어갔다. 현관문을 여는 소리에도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설마…. 집에 없는 건가?’

혹시 몰래 집을 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진 윤결이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왔다. 너무도 조용하기만 한 거실. 윤결은 재빨리 혜원의 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다행히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든 혜원의 모습에 그제야 윤결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윤결은 침대에 걸터앉으며 이불을 살짝 내려보았다. 집에서도 많이 울었는지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듯한 혜원의 벌게진 눈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겁을 먹고 도망이라도 갔을까 봐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모른다. 이렇게 귀여운 얼굴로 새근새근 잠든 모습을 보니 조금 전 먹먹했던 가슴이 뚫리는 듯했다. 윤결은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젖은 눈가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제 나도 널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어. 널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커져 버려서 자꾸 네가 욕심이 나. 그래서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너를 놓아줄 수는 없을 것 같아. 아마도 넌 또 많이 울겠지? 하지만 그만큼 내가 더 잘할게. 절대 네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내가 끝까지 지켜줄게.”

더 자라는 듯 이불을 다시 꼼꼼히 덮어 주며 방을 나오는 윤결의 어깨가 어딘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밥은 먹고 자는 것인지 부엌을 들여다본 윤결은 역시 무언가를 먹은 흔적이 없는 부엌을 보고는 짧게 혀를 찼다. 아마도 충격이 컸겠지. 혜원에게 향해 있는 무서운 집착과 질투. 회사에서 재현과 함께 있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화가 치솟았고, 혜원의 잘못이 아님에도 그에게 화를 내고 말았다.

윤결은 답답하고 짜증 나는 자신의 상황에 화가 치미는 듯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다. 다 밝혀 버리고 싶었다. 혹시라도 들킬까 봐 꽁꽁 감추고 있었던 자신의 성향도 그리고 지금 자신이 사랑하게 된 사람이 누구인지도 말이다.

그리고 만약 이로 인해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된다 해도, 윤결은 오직 혜원만 자신의 곁에 둘 수 있다면 미련 없이 다 내려놓을 만큼 그를 사랑하게 돼버렸다.

하지만 그런 그가 사실을 밝히지 못하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혹시라도 혜원이 겁을 먹고 도망가 버릴까 봐, 그래서 영영 그를 놓쳐버릴까 봐 아직은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아직은 조금 더 혜원에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

한참 깊은 잠에 빠져 있던 혜원이 배고픔에 잠에서 깨며 거실로 나왔다. 잠결에 눈을 비비며 부엌으로 향하던 혜원은 미처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윤결을 보지 못한 듯 그를 지나치며 바로 부엌으로 들어갔다.

“하암…. 배고파. 대체 지금 몇 시야? 나 얼마나 잔 거지?”

상의 속에 손을 집어넣어 홀쭉한 배를 살살 문지르며 냉장고 안을 열심히 훑어보는 혜원. 하지만 역시 자신이 원하는 걸 찾지 못했는지 아쉬운 얼굴로 다시 냉장고 문을 닫고는 정수기로 향했다.

고픈 배를 물로 채울 작정인지 커다란 컵 가득 물만 채워 나오던 혜원은 순간 불도 켜지 않은 소파에 앉아 있는 윤결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컵을 내동댕이치며 소리를 질렀다.

“으아악!! 도, 도둑이야!!”

어두운 거실에 누군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은 검은 사람의 형태. 혜원은 돌부처라도 된 듯 바들바들 떨며 움직이지도 못한 채 굳어 버렸다.

‘도둑!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 집에는 윤결 형도 없는데. 무기! 아, 이 집엔 무기도 없는데…. 어, 어떡하지?’

겁에 질려가는 혜원의 머릿속은 바빠졌지만, 그의 몸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나야 혜원아!”

소파에 앉아 잠깐 졸던 윤결은 요란한 혜원의 비명에 화들짝 놀라 그에게 달려가며 외쳤다.

“저, 저리 가! 나 아무것도 없어요! 이, 이 집도 내 거 아니고 나 돈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겁에 질린 나머지 혜원은 두 눈을 질끈 감고는 잡힌 팔을 마구 휘저으며 소리쳤다. 그가 누구인지 알 게 뭐야! 도둑인데!! 혜원은 그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혜원아 정신 차려봐! 나라니까? 윤결 형이라고!”

‘윤결 형?’

다급하게 들려온 윤결이라는 이름에 혜원이 눈을 번쩍 뜨며 눈물이 잔뜩 고인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윤결 형?”

“불을 켠다는 게…. 미안. 소파에서 깜빡 졸았나 봐. 네가 깰 줄 몰랐어. 놀라게 해서 미안.”

그제서야 혜원은 긴장이 풀린 듯 윤결에게 안겨들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흑흑…. 형 진짜!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정말 도둑이 든 줄 알고 내가 얼마나…. 놀랬는데!! 앞으로 그러지 마요. 나 무섭게 혼자 두지 말란 말이야!”

누가 겁쟁이 울보 아니랄까 봐 혼자 있는 것도, 어두운 곳도 칠색 팔색을 하는 우주 최강 겁쟁이 혜원에게 오늘은 정말이지 최악의 날이었다.

“미안해. 응? 혜원아 그만 울어. 앞으로 꼭 불 켜고 있을게. 내가 잘못했어.”

“진짜 한 번만 더 이랬단 봐요. 나 우리 집에 갈 거야. 진짜 우리 집에 갈 거라고요!”

“알았어. 알았어 혜원아.”

아직도 긴장이 가시지 않았는지 바르르 몸을 떨며 울먹이는 혜원을 겨우 어르고 달래 진정시킨 윤결은 그를 번쩍 들어 소파에 앉혔다.

그제야 혜원은 자신의 발밑에 유리 파편이 널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놀라서 떨어트린 컵이 아주 박살이 난 듯했다.

“형, 미안. 내가 치울게. 아까는 내가 너무 놀라서….”

“아니야. 넌 거기 얌전히 앉아 있어. 형이 치울게. 괜히 또 다칠라….”

윤결은 내려와 도우려는 혜원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며 그를 다시 소파 위에 앉혔다.

혹시 또 혜원이 다치기라도 할까 봐 윤결은 최대한 서둘러 유리 조각들을 치워 버리고는 남아 있을지 모를 유리 부스러기까지 청소기로 깨끗이 밀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윤결이 혜원의 작은 발에 슬리퍼를 신겨주며 물었다.

“저녁 안 먹은 것 같은데, 배고프지? 형이 저녁 해줄게. 늦었지만 같이 먹을래?”

“응. 나 너무 배고파.”

어느덧 자신이 알던 다정한 형의 모습으로 돌아와 손을 내밀어 주는 윤결의 모습에 혜원은 환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어쩌면 조금은, 아주 조금은 혜원의 마음이 윤결에게로 기울어가는 것인지도 몰랐다.

**

윤결은 오랜만에 음식 솜씨를 발휘했다. 혼자 살면서 음식 같은 건 종종 해 먹었고, 나름 미식가라 자부하는 윤결은 배가 고플 혜원을 위해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스파게티를 만들기 시작했다.

면을 삶고 재료를 다듬는 손길을 넋 놓고 바라보던 혜원은 신기한 듯 딱딱했던 면과 야채들이 순식간에 뚝딱뚝딱 음식이 되어가는 모습에 군침을 질질 흘리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느덧 김이 모락모락 나는 크림 스파게티가 완성되자 윤결은 예쁜 그릇에 담아 혜원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는 어서 먹어보라는 듯 손수 포크까지 집어 주며 혜원의 앞에 앉아 마치 칭찬을 기다리는 강아지라도 된 것처럼 혜원이 먹기만을 기다렸다.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형은 일등 신랑감인 것 같아요. 요리도 잘해, 청소도 잘해, 일도 잘하고 돈도 많아 거기다 잘생기고 다정하기까지! 정말 나중에 형이랑 같이 살 사람은 진짜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겠어요!”

혜원은 감동한 듯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스파게티를 입 안 가득 넣어 오물오물 씹으며 칭찬을 이어갔다.

그만큼 윤결이 만든 스파게티는 어느 유명 레스토랑 못지않게 훌륭했고, 혜원의 입에 너무도 잘 맞았다.

혜원의 감동 어린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윤결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그래? 맛있다니 다행이다. 많이 먹어. 많이 먹고 형한테 시집오면 되겠다.”

“으응?”

‘아니 자꾸 뭐라는 거야 이 아저씨가!’

입가에 크림을 잔뜩 묻히고 정신없이 스파게티를 먹던 혜원이 순간 고개를 들어 윤결을 올려다봤다.

‘뭔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졸지에 먹던 손을 멈추며 놀란 눈으로 말똥말똥 자신을 쳐다보는 혜원을 보며 윤결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니 뭐…. 말이 그렇다고. 너는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잖아? 요리도 못해, 청소도 못 해, 손만 대면 사고만 쳐, 뭐 그러니까 나중에 장가 못 가면 형한테 시집오라는 거지.”

“아 정말 말이라도!! 사람 좀 놀라게 하지 말아요!”

하나같이 모두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는 없었지만, 너무도 적나라하게 나열하는 윤결이 못마땅하다는 듯 혜원은 입술을 삐죽이며 소리쳤다.

역시 시끄럽지 않으면 혜원이 아니었다. 윤결은 쫑알거리는 모습조차 귀엽다는 듯, 혜원의 입가에 묻은 크림을 엄지로 쓱 닦아 자신의 입 속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짹짹거리고 마저 먹어.”

혜원은 농담을 너무 진담처럼 마구 던지는 윤결 때문에 하루에도 열두 번씩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러다가는 정말 없던 심장병마저 생겨버릴 것 같았다.

윤결은 씩씩거리는 혜원에게 먼저 씻으러 갈 테니 천천히 다 먹고, 그릇은 그냥 식탁에 두라고 말하고는 욕실로 향했다. 하지만 사람이 그래도 염치가 있지! 혜원은 자신이 먹은 건 자신이 치워야 한다 생각하며 설거지에 도전하기로 했다.

물론 귀한 강씨 집안의 막내인 혜원이 손에 물을 묻혀봤을 리 없었고, 설거지는 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본 건 있어서 무조건 세제를 많이 넣고 거품을 만든 다음 닦으면 된다고 생각한 혜원. 그는 다 먹은 그릇들을 싱크대에 넣고는 수세미에 세제를 가득 부었다. 어느덧 보글보글 하얀 거품이 일기 시작하자 혜원은 씩 웃으며 힘주어 그릇을 닦기 시작했다.

“칫. 별거 아니네! 뭐,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다고!”

새하얀 모습을 드러내며 깨끗해진 접시를 보며 혜원이 기세등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당당했던 순간도 잠시, 혜원은 미끄러운 거품에 그만 접시를 놓쳐버리는 불상사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쨍그랑!!”

“으악!!! 어, 어떡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추락한 접시.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스파게티를 품고 있던 동글동글한 예쁜 접시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혜원은 힐끔 욕실을 쳐다보고는 후다닥 유리 조각들을 치워나가기 시작했다.

분명 윤결이 화장실에서 나오면 또 잔소리를 한가득 해댈 거란 생각에 작은 손을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며 파편들을 주워나갔다.

“뭐야. 왜 이렇게 조각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거야! 아얏!!!”

역시 모든 것이 서툴기만 한 혜원은 급한 마음에 맨손으로 유리 파편을 집으려다 결국 손바닥을 베이고 말았다.

“앗! 따가워. 휴지, 휴지 어딨지?”

살짝 스친 것 같았는데 어느새 핏방울이 맺혀오자 당황한 혜원이 피를 뚝뚝 흘리며 휴지를 찾았다. 하지만 그가 부엌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샤워를 마친 윤결이 욕실을 나서는 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란 혜원이 조심스럽게 손을 뒤로 감춘 뒤 슬금슬금 그의 눈치를 살피며 거실로 나왔다. 소파 옆에 있는 티슈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던 혜원의 어색한 걸음걸이를 수상하게 여긴 윤결이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며 다가왔다. 그리고 곧 부엌부터 뚝뚝 떨어져 있는 붉은 핏자국에 기함하며 소리를 질렀다.

“뭐야 강혜원? 야!! 이거 뭐야?”

“아…. 그게, 그러니까 진짜 미안! 정말 미안해 형! 내가 실수로 접시를 떨어트려서…. 그래서 내가 치우려고…. 아, 아니 치우려고 했는데….”

역시나 어김없이 들려오는 윤결의 호통에 잔뜩 겁을 먹은 혜원은 그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손 내놔봐.”

“난 괜찮은데…. 저기 접시가 깨져서 어떡해? 미안. 진짜 미안. 내, 내가 도로 붙여 놓을까? 응? 이거 형이 아끼는 접시였어?”

무섭게 굳은 얼굴로 자신의 손만 빤히 내려다보는 윤결의 얼굴에 혜원이 안절부절못해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이놈의 접시는 왜 하필 지금 깨져서는! 아까는 컵을 깨고 이번엔 접시를 깨고. 자신이 윤결이라도 아마 화가 단단히 났을 거란 생각에 혜원은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정말이지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하루란 생각이 들었다.

“혜원아. 그릇 말고 네 손. 손 이리 내밀어봐.”

조용히 하지만 단호히 손을 내밀라는 윤결의 말에 그제야 혜원은 피로 얼룩진 자신의 손을 윤결의 앞에 내밀었다.

생각보다 깊게 베인 듯 살점이 사이가 벌어져 있는 혜원의 손바닥을 보니 윤결은 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렇게 깊게 베였으면서도 그릇 타령이나 하는 그의 무심한 모습에 그저 황당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그가 봐온 혜원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녀석이란 생각에 이젠 화보다도 한숨이 먼저 나왔다.

윤결은 서둘러 그를 욕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따뜻한 물을 틀어 피를 닦아주며 선반에 있던 구급상자에서 약과 밴드를 꺼내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많이 혼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혜원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의 손바닥을 치료해 주는 윤결을 슬그머니 올려다봤다. 그러자 윤결은 혜원의 뒤통수를 감싸 자신의 이마로 당겨와 쿵! 하고 이마를 맞부딪히며 말했다.

“제발 혜원아. 아무것도 하지 마. 그리고 자꾸 네 몸에 상처 좀 내지 마.”

“미안해요. 형.”

자신이 더 아픈 것 같은 슬픈 눈으로 상처를 내지 말라는 윤결의 다정한 말에 혜원은 가슴이 간질간질해지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맞닿은 이마에서 열이 나는 것처럼 얼굴이 뜨겁게 타올랐다. 윤결은 그대로 손을 뻗어 혜원의 등을 감싸며 그를 안아 들었다. 예전의 혜원 갔었으면 또 발버둥을 치고 발악을 했을 일이었지만, 이상하게 지금은 그의 품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윤결의 품에 안겨 침실로 들어온 혜원은 그대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윤결은 그런 혜원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주며 말했다.

“졸리면 먼저 자. 형은 마저 정리 좀 하고 올게.”

“형. 미안해요. 진짜 미안해.”

혜원은 괜찮다고 웃으며 나가는 윤결의 등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픈 손바닥이 찌릿찌릿 아려 왔지만, 혜원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혜원은 그가 치료해 준 손을 소중히 감싼 채 다시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차라리 그를 방에 넣어 놓고 치우는 게 낫겠다 생각한 윤결은 혜원을 침대로 옮긴 뒤 서둘러 유리 파편들을 치워나갔다. 바닥에 선명하게 떨어져 있는 혜원의 핏자국에 윤결의 한숨이 깊어만 갔다.

정말이지 손만 대면 사고를 치는 녀석 때문에 불안해서 혼자 놔둘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동시에 계속 사고를 쳐도 좋으니 자신의 곁에서 도망만 치지 말았으면 하는 작은 기대감도 생겨났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 밤. 윤결은 다시 생각이 많아졌다.

한 번도 이렇게 초조해 본 적이 없었던 윤결은 이 작은 밤톨만 한 녀석을 어떻게 휘어잡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필사적으로 도망가기 바쁜 혜원과 죽을힘을 다해 그를 붙잡아야 하는 윤결. 머리가 아프도록 답을 찾지 못해 헤매는 윤결의 길고 긴 밤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밤새 한숨도 못 잔 윤결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눈을 떴다.

윤결은 어제 회사에서의 기습 키스로 혜원이 아직 어색해할지 몰라, 그를 계속 데리고 출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데리고 가봤자 서로 불편할 것이란 생각에 그를 집에 두고 가기로 한 윤결은 혼자 출근 준비를 했다.

밖에서 들리는 분주한 소리에 잠에서 깬 혜원이 졸린 눈을 비비며 방에서 나왔다. 혜원은 어느새 옷까지 다 입고 준비를 싹 마친 윤결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욕실로 뛰어가며 말했다.

“아 형! 먼저 일어났으면 나도 좀 깨워주지. 몇 시까지 준비해야 해요? 늦었나? 아씨…. 빨리 준비할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알았죠? 나 버리고 가면 안 돼요!!”

‘설마 같이 계속 출근을 하려는 건가? 아무렇지 않게?’

윤결은 당연히 혜원이 자신과의 출근을 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제 사무실에서의 키스와 고백은 그에게 적잖은 충격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같이 출근하겠다고 욕실로 뛰어가는 혜원의 모습에 윤결은 살짝 당황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자신을 멀리하려 하지 않는 혜원의 모습에서 윤결은 작은 희망이 생겨났다.

어느덧 세수를 마치고 헐레벌떡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는 혜원을 보며 윤결이 팔짱을 낀 채 그의 방 문에 기대서서 말했다.

“천천히 해. 너 버리고 안 가.”

무얼 해도 귀여운 강혜원. 다시는 울리고 싶지 않은, 다시는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녀석.

서른 살 늦은 나이에 뒤늦게 시작된 윤결의 첫사랑이었다.

**

첫날과 마찬가지로 혜원은 오전에 공부를 했고 오후에는 윤결의 일을 도왔다. 간단한 복사나 정리 심부름을 벗어나 이젠 문서 정리와 엑셀 작성까지 척척 해내며 일당을 톡톡히 해냈다.

집중력이 강하고 한번 시작하면 뚝심 있게 일을 해내는 혜원은 뭐든 빨리 배워 나갔고 윤결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있었다. 신입사원으로 취직해도 될 만큼 혜원은 회사에 빠르게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한 달 새, 이젠 그가 없으면 안 될 것처럼 윤결은 사무실에서 그를 부르는 일이 잦아졌다.

“혜원아, 복사!”

“혜원아, 자료 분석표!”

“혜원아, 회의 자료!”

“혜원아, 내 볼펜 어디 갔지?”

“강혜원 우리….”

“아 진짜! 작작 좀 부려먹으시죠?”

닳고 닳도록 제 이름을 불러대는 윤결을 향해 참다못한 혜원이 꽥 소리를 지르며 노려봤다. 아니 볼펜 같은 건 본인이 좀 찾으면 안 돼?

“강혜원, 우리 밥 먹자.”

눈을 찌푸리며 씩씩거리는 혜원의 머리에 윤결이 다정히 손을 얹으며 말했다. 사소한 이유라도 붙여 그를 제 곁으로 부르고 싶은 윤결의 마음을 알 리 없는 혜원의 토라진 모습조차 윤결에겐 귀여울 뿐이었으니 말이다.

“칫. 나 배고프니까 오늘은 진짜 맛있는 거 사줘야 해!”

밥 먹으러 가자는 윤결의 말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설레며 뺨을 붉히던 혜원이 그의 손이 닿았던 머리를 슬쩍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래. 가자. 오늘은 네가 먹고 싶은 거 다 사줄게.”

툴툴거리며 앞장서는 혜원의 뒤를 따라나서는 윤결의 얼굴엔 행복에 겨운 환한 미소가 끊이지를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행복하기만 할 것 같은 윤결의 심기를 건드리는 한 사람. 바로 김재현! 혜원과 재현은 한 달 새 너무도 친한 사이가 되어있었다.

물론 아직 혜원의 정체를 알 리 없는 재현은 그가 윤결의 어린 와이프이고 또 인턴이라 많이 도와주고 가르쳐 주는 것뿐이었지만 윤결은 불안했다. 혹시라도 자신들의 비밀을 알아채 버릴까 봐 그리고 그 비밀의 파장이 혜원을 다치게 할까 봐 말이다.

이래저래 심란한 마음을 숨기며 혜원의 허리에 손을 감싼 채 점심을 먹으러 내려가는 둘의 앞에 귀신처럼 나타난 재현. 환했던 윤결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지는 순간이었다.

“재현 과장님, 오늘도 점심 안 드세요?”

“어? 우리 귀여운 혜윤이네? 꼬마 형수님은 이제 점심 먹으러 가는 건가?”

재현이 반갑게 웃으며 혜원에게 다가왔다. 사실 재현은 그의 형 정현과는 달리 노력파였고 회사에서 인정받기 위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어떻게 보면 윤결에게 꼭 필요한 인재였다. 하지만 혜원과 가까이 지내는 건 역시 달갑지 않았다.

“네. 이사님이랑 이제 먹으러 가려고요. 아! 과장님도 같이 가요! 네? 우리 밥은 먹고 일해요!”

어느새 자신의 손을 덥석 잡으며 같이 가자는 혜원의 애교 섞인 부탁에 난감해진 재현이 슬며시 윤결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눈치라고는 약에 쓰려고 해도 없는 혜원은 휙 고개를 돌려 윤결을 쳐다보며 재현도 같이 가자며 떼를 쓰기 시작했다.

“이사님! 재현 과장님도 같이 가요, 네? 맨날 나 모르는 거 도와주고 진짜 내가 신세 많이 지고 있단 말이에요. 네? 네? 같이 가요!”

윤결은 속이 타들어 갔지만 사랑스러운 혜원의 앞에서 속 좁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재현의 손을 잡고 있는 혜원을 재빨리 제 옆으로 바짝 데리고 오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김재현. 너도 따라오든가.”

“정말요?! 저야 고맙죠. 와 정말 형이랑 같이 밥 먹은 게 얼마 만인지….”

생각지 못한 윤결의 허락에 재현 또한 금세 환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어렸을 때부터 제 친형보다 더 따르며 동경해오던 윤결에게 조금은 인정을 받은 것 같아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셋이 도착한 식당은 회사 앞에 위치한 고급 일식집이었다. 정말이지 연어를 너무 사랑하는 혜원 때문에 일주일에 세 번은 무조건 연어 초밥을 먹으러 오는 그들만의 단골 가게였다.

“오! 형 여기 초밥 정말 맛있는데. 가격은 좀 세지만. 역시 꼬마 형수, 우리 형한테 사랑 엄청 받고 있나 봐요? 매일 이렇게 붙어서 출퇴근하고, 이런 걸 점심으로 사주는 걸 보면.”

“재현 과장님. 여기 초밥 비싸요?”

사실 혜원은 먹기는 많이 먹었어도 가격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혜원은 가격이 세다는 재현의 말에 문득 자신이 늘 먹어온 이 맛 나는 초밥의 가격이 궁금해졌다.

“아 우리 혜윤이는 모를 수도 있구나. 여기 정식이 인당 20만 원 정도 할걸?”

“에에?? 어, 얼마요??”

너무도 어마어마한 가격을 듣고 만 혜원은 갑자기 식욕이 싹 사라져버렸다. 여태 맛있다고 먹던 초밥이 한 끼에 20만 원이었다니!! 자신의 인턴 월급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의 음식을 점심으로, 그것도 일주일에 3번씩이나 먹고 있었다는 사실에 혜원의 콩알만 한 심장이 마구 뛰어댔다.

“야, 김재현 너는 왜 쓸데없는 얘기를 해서 애 밥을 못 먹게 만들어! 하여튼 데려오지 말았어야 해. 쯧!”

“아. 비, 비밀이었나? 하하…. 미안.”

윤결의 짜증 섞인 타박에 재현이 머리를 살살 긁적이며 혜원을 쳐다봤다. 역시 딱딱하게 굳어있는 그의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초밥 가격이 심히 충격인 듯했다.

“저, 저기…. 이사님.”

아무리 초밥이 좋아도 이건 아니다 싶은 혜원이 순간 젓가락을 살며시 내려놓으며 조심스럽게 윤결을 불렀다. 먹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제 앞에 있는 생선을 뒤집어쓴 밥 덩이가 하나에 2만 원도 넘는다니. 몰랐으면 모를까, 알면서도 염치없이 먹을 수는 없었다.

혜원이 초밥과 윤결을 번갈아 보며 입만 벙긋거리고 있자 윤결이 그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아무 걱정 하지 말고 많이 먹어 혜윤아. 난 우리 혜윤이가 먹는 거라면 그게 얼마가 됐든 하나도 아깝지 않으니까.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먹는 건데, 설마 돈 걱정이나 하면서 먹일 사람처럼 보였어? 많이 먹어. 먹고 싶으며 더 시키고.”

말을 마친 윤결이 조심스럽게 혜원의 손을 잡아주며 눈웃음을 지었다.

순간 혜원의 심장이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지금 이 시점에서 그에게 반하면 안 되는데!’

부끄러움에 얼굴이 새빨개진 혜원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손을 꽉 잡고 있는 윤결의 크고 따듯한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윤결은 분명 자신을 향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혜원은 윤결의 눈에 들어가 있는 자신을 또렷이 보았다.

어쩌면 그가 정말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혜원의 심장은 터질 듯 벅차올랐다.

**

무슨 정신으로 초밥을 먹었는지 체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서둘러 제 몫을 먹어 치운 혜원이 화장실을 가겠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결은 혹시나 또 어디가 아프진 않은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가 나간 문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싸늘한 시선으로 재현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 아직 안 갔어? 다 먹었으면 눈치껏 일어나지? 언제까지 따라다닐 건데?”

“어? 나? 다 머, 먹었지. 어. 다 먹었지. 잘 먹었어. 그럼 난 먼저 일어나볼게. 혜윤이 오면 인사 못 하고 먼저 가서 미안하다고 대신 전해줘.”

윤결의 질투 섞인 뜨거운 눈빛에 재현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사무실로 돌아가던 재현은 입이 찢어지게 크게 웃으며 조금 전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던 윤결을 떠올렸다.

차갑고 냉정한, 카리스마 넘치던 윤결은 온데간데없고 꼬리만 없다 뿐이지 연신 더 챙겨주지 못해 안달을 내던 강아지 같은 윤결의 모습에 자꾸만 웃음이 났다.

천생연분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이었던가? 그렇게 여자에게 관심 없던 그가 결혼한 것도 의외였지만, 저렇게 귀여운 와이프를 데리고 살면서 180도 변한 윤결의 모습도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화장실에 다녀온 혜원은 방에 혼자 남은 윤결을 힐끔 보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재현을 찾았다.

“재현 과장은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회사로 들어갔어.”

“아…. 그랬구나. 그럼 형 우리도 이, 이만 갈까요?”

“벌써 가게? 아직 시간 좀 남았는데.”

윤결은 재빨리 일어나 신발을 신는 혜원의 등 뒤로 다가와 살며시 그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히이익! 지, 지금 뭐, 뭐 하는 거예요!”

갑작스러운 포옹에 놀란 듯 혜원이 몸을 움찔거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굳이 그를 밀쳐 내거나 벗어나려 하진 않았다. 어느 정도 이런 포옹이 익숙해진 것일까? 꿈쩍도 못 하고 서 있는 혜원의 목덜미에 고개를 내린 윤결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혜원아, 우리 이대로 놀러 나갈까?”

“뭐, 뭐라는 거예요. 놀러 가긴 어딜 놀러 가요.”

“요즘 맨날 공부하고 회사 일 돕느라 우리 혜원이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놀지도 못했잖아.”

“그건 그렇지만…. 회사는요?”

“음…. 외근?”

“그게 뭐야. 헤헷.”

너무도 달콤한 일탈의 유혹. 혜원은 배시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 귀여운 혜원의 웃음에 윤결이 그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그래서 우리 혜원이는 어디 가고 싶어?”

“저요? 음….”

순간 혜원은 평소에 티브이로만 보던 핑크 뮬리가 가득한 외각에 떨어져 있던 공원을 떠올렸다. 마치 핑크빛 솜사탕이 하늘거리는 것 같은 예쁜 공원. 그곳에 있으면 왠지 구름 위에 걸어 다니는 것 같은 포근한 기분이 들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 거기에 가도 될까? 하는 생각에 혜원이 망설이는 듯 보이자 윤결이 그의 손을 잡아 차로 향하며 말했다.

“혜원아. 나는 지금 네가 해변을 걷고 싶다고 하면 하와이라도 갈 준비가 되어있으니까 하와이보다 먼 곳이면 이대로 회사로 가고 아니면 빨리 말하지?”

“네에?? 어버버버 진짜…. 그게 무슨…!”

“그러니까, 대체 그 작은 머릿속으로 생각한 곳이 어디냐고.”

“피… 핑크….”

“핑크?”

“핑크 뮬리 보러 가고 싶어요. 그런데 사실 나 거기가 어딘지는 몰라요.”

혜원이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티브이에서 딱 한 번 봤을 뿐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에 있다는 것밖에 사실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윤결은 알겠다는 듯 혜원을 서둘러 차에 태우고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는 무언가 빠르게 검색을 하더니 씩 웃음을 지으며 운전석에 올랐다. 마침 지금은 딱 핑크 뮬리들이 가장 예쁘게 피어 있을 시즌이라고 했기에 윤결도 은근 기대가 됐다.

다행히 낮이라 도로는 한적했다. 혜원은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사실 어딜 가든 상관없을 것 같았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먹는 건데….’

혜원은 아직도 그가 아까 한 말이 계속해서 머리에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그가 말한 이름이 혜윤이었다는 사실에 묘한 질투가 생겨났다.

‘뭐지? 다, 당연한 거 아닌가? 윤결 형은 혜윤이랑 결혼했고 다들 그렇게 알고 있고, 그러니까 혜윤이라고 말하는 게 당연한 건데….’

머리로는 이해가 됐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기분이 상한 혜원이 입술을 꽉 깨물며 윤결을 쳐다봤다. 자꾸만 자신을 헷갈리게 만드는 이 남자. 분명 이번에도 짓궂은 장난을 친 것이란 생각에 괜히 심술이 났다. 그런 혜원의 기분을 알아챘는지 윤결이 그를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왜? 마음이 바뀌었어? 거기 말고 다른 곳에 가고 싶은 거야? 입은 왜 또 튀어나온 거야?”

이번에야말로 다시 한번 확실한 답을 받겠다 다짐한 혜원이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아까 했던 말…. 있잖아요.”

“아까? 내가 아까 무슨 말을 했는데?”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던 말. 그거 진심이세요?”

순간 윤결은 급정거를 할 만큼 심장이 쿵 하고 아래도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애써 평정심을 되찾으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언제 너한테 거짓말한 적 있어? 그보다 그건 갑자기 왜? 당연히 난 진심이었는데?”

“그, 그럼… 진짜 혜윤이 사랑하세요?”

“뭐??”

아니 갑자기 이야기가 왜 그리로 튀는 거지?! 대체 얼마나 사랑한다고 보여줘야 이 의심 많은 녀석이 믿어 줄는지. 그를 좀 더 놀려 주고 싶어진 윤결은 일부러 말없이 시선을 돌려 계속 운전을 했다.

윤결이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민망해진 혜원도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괜히 물어본 것 같은 서운함이 밀려왔다.

‘아니면 말지…. 뭘 시선까지 피하고 그래…. 칫….’

어색한 공기 속에 도착한 공원. 윤결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아직까지 삐쳐있는 혜원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렇게 보고 싶었던 핑크 뮬리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혜원이 꼼짝도 하지 않자 윤결이 웃음을 감추며 조수석 문을 열었다.

“이제 그만 나오지? 설마 내가 안고 나와 달라고 시위하는 건 아니지?”

“아, 아니거든요!! 참나, 기가 막혀서!”

혜원은 얼굴을 붉히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재빨리 차에서 내려 멀찌감치 혼자 걷기 시작했다. 윤결은 그런 혜원의 뒤를 졸졸 따라 걸었다. 입장권을 끊고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둘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느덧 눈 앞에 펼쳐진 너무도 아름다운 핑크빛 물결에 혜원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치 핑크빛 구름 속에 서 있는 기분. 그는 천천히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혜원아.”

하지만 혜원은 윤결의 다정한 부름을 듣지 못했는지 계속 앞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강혜원!”

조금 더 목소리를 높여 그를 부르는 소리에 혜원이 활짝 웃으며 뒤를 돌았다.

“왜요!”

너무도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며 뒤돌아보는 혜원의 모습에 윤결은 순간 할 말을 잃은 듯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도 그보다 예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윤결은 조용히 웃으며 혜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말없이 다가오는 윤결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혜원은 민망한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윤결은 살며시 그의 어깨를 감싸 자신의 품으로 데리고 왔다.

다정한 그의 포옹에 어리둥절해진 혜원은 얼떨결에 윤결의 품에 안기게 되자 심장이 폭발할 듯 빠르게 뛰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윤결의 심장도 마찬가지였는지, 그의 빠른 심장 고동이 혜원에게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너야….”

“…??”

“바로 너라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그리고 앞으로 쭉 함께하고 싶은 사람도 다른 누구도 아닌 강혜원 바로 너라고.”

“마, 말도 안 돼.”

순간 혜원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니라고 부정했었고, 안된다고 뿌리쳤었다. 하지만,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고 우울함이 밀려왔었다.

“내가 다 알아서 할게. 혜원아. 그러니까 나 믿고 따라와 주면 안 될까?”

“나…. 할 줄 아는 것도 하나도 없고, 맨날 사고만 치고…. 형 화나게 할지도 몰라요.”

“괜찮아.”

“나는 형처럼 멋있지도 않고, 겁도 많고, 소심하고…. 또….”

“괜찮아.”

“그리고 나는… 여자가 아닌걸요.”

“그게 가장 마음에 들어.”

윤결은 흐뭇한 미소를 띤 얼굴로 그의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윤결의 고백이 꽤나 충격이었는지, 혜원은 목부터 차츰차츰 붉어지더니 얼굴 전체가 홍당무가 되고 말았다.

이제야 자신의 마음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한 혜원의 작은 변화.

윤결에게는 그 어떤 사업 체결보다도 더욱 짜릿하고 흥분되는 순간이었다.

여자가 아니어도 좋다. 아니 여자가 아니어서 더 좋다는 윤결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그저 아직도 모든 게 혼란스럽기만 한 혜원은 그대로 윤결의 가슴에 푹 안긴 채 눈을 감았다.

깊게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머리만 아파져 왔다. 윤결과 함께 있는 지금이 좋고, 자신을 사랑한다는 윤결이 좋았다.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그저 다른 모든 건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 혜원도 어느덧 윤결에게 진심이 되어가고 있었다.

선선한 바람 사이로 향긋한 풀 내음이 풍겨왔다. 이왕 이곳까지 왔는데 골치 아픈 생각은 일단 접어버리고 싶었다.

“형.”

혜원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윤결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왜?”

여전히 혜원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짓고 있는 윤결의 얼굴엔 사랑스러움이 가득 묻어나 보였다.

“티브이에서 보니까, 이런 곳엔 연인…들이 많이 온대요. 우, 우리 그냥 딴 데 갈까요?”

수줍은 듯 다시 고개를 숙이는 혜원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싼 윤결이 살며시 그의 얼굴을 들어 올려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아직도 모르겠어? 너랑 나. 우린 지금부터 연인으로 이곳에서 첫 데이트를 시작할 예정이라고.”

“데, 데이트요?”

부끄럽게 갑자기 데이트라니. 하지만 딱히 반박할 마음도 반박할 이유도 떠오르지 않았다.

혜원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려 했다. 이렇게 예쁜 곳에서 이런 달콤한 말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남자를 뿌리칠 수 있는 게 이상한 거겠지. 그런 혜원의 복잡한 마음을 알아차린 윤결이 조금 더 용기를 냈다. 그는 천천히 혜원의 이마에 입술을 내려놓으며 속삭였다.

“모든 순간순간이 잊지 못할 만큼 행복으로 가득한 기분. 너는 알까? 그리고 그게 나에겐 너와 함께 있는 지금이라는 것도 말이야.”

촉촉한 그의 입술이 이마에 닿자 혜원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 남자…. 정말로 날 사랑하는구나….’

그리고 이내 혜원의 입가에도 작은 미소가 번졌다. 행복했다. 사랑받는 기분이 설렜고, 그 대상이 윤결이라 더욱 떨렸다.

윤결은 천천히 입술을 떼어내며 혜원의 손을 잡아 자신의 곁에 바짝 붙여 세웠다. 나란히 선 둘의 모습은 여느 다정한 연인 못지않게 잘 어울렸다.

“사실 핑크 뮬리 따위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네가 더 사랑스럽지만, 이번 달이 핑크 뮬리가 가장 예쁘게 피는 시기래. 그래도 왔으니까 구경은 해야겠지?”

“네.”

붉어진 얼굴로 귀엽게 웃으며 맞잡은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혜원. 윤결은 그런 혜원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으며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바람결에 혜원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윤결은 옆으로 고개를 돌려 핑크 뮬리를 구경하느라 정신없는 혜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슬로우 모션 비디오 속에 갇힌 것처럼 혜원의 모든 것들이 느리게 윤결의 눈을 스쳐 지나갔고, 윤결은 마치 구름 속에 단둘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혜원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웃는 얼굴이 가장 예쁜 아이. 어렵게 제 손에 들어온 이 아이를 지켜주고 싶었다. 이 아이의 웃음을 그리고 이 아이와 함께할 미래를 말이다.

“형! 진짜 여기 너무너무 예뻤어요. 데리고 와주셔서 고마워요! 오래오래 생각날 것 같아요. 그래도 이번 달까지만 피고 진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아쉽고 아깝다.”

두 시간 남짓의 구경을 마친 혜원이 공원을 나서며 아쉬운 듯 발을 떼지 못하며 말했다.

“내년에 또 오면 되지.”

“정말요? 정말 내년에 우리 여기 또 와요?!”

순식간에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핀 혜원이 기대가 가득 찬 눈으로 윤결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내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또 그다음 해에도. 네가 질릴 때까지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

“에이…. 전 질릴 일 없을 것 같은데요? 이렇게 예쁜데 어떻게 질려요? 난 매일매일 보고 싶은데. 나 핑크 뮬리 너무 마음에 들어요!”

“나도.”

“네?”

“나도 그렇다고. 매일 매일 봐도 안 질리고, 매일매일 보고 싶은 강혜원, 네가 너무 좋다고.”

“뭐, 뭐래요….”

예고 없이 불쑥 들어오는 그의 사랑 고백은 아직까지도 혜원에겐 너무도 민망하고 쑥스러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가슴은 벅찼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이 가슴 떨리는 고백을 자신에게 해주는 사람이 바로 윤결이라는 사실에 혜원은 더없이 행복했다.

@Made by 진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