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고뭉치 강혜원
한국으로 돌아온 혜원은 집이 아닌 둘이 함께 살 신혼집으로 향했다. 이렇게 오래 가족과 떨어져 본 적도 처음이었고, 갑자기 변해버린 낯선 환경에 혜원은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윤결은 그런 심란한 혜원의 마음을 눈치챈 듯, 그의 기분을 풀어주러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혜원아 여기가 우리 신혼집. 혜윤이는 결혼 전에 한 번 와봤는데 너는 처음이지?”
“네.”
“여기가 네 방이야. 필요한 건 차차 채워 넣기로 하고 자, 받아. 앞으로 지내면서 필요한 거나 사고 싶은 거 있으면 이걸로 쓰면 돼.”
“정말요? 이거 제가 얼마까지 쓸 수 있는데요? 헤헷!”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혜원은 자신의 손에 올려진 고급스러워 보이는 검은색 카드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물었다.
“아이고. 얼마나 쓰시게요?”
“마, 많이 안 써요. 그냥 그래도 혹시 한 달에 얼마까지 써라, 뭐 그런 건 있잖아요. 우리 부모님은 한 달에 딱 백만 원까지만 쓰라고 했거든요. 물론 뭐 그것도 혜윤이가 절반 이상 다 뺏어 썼지만….”
윤결은 소심한 혜원의 모습에 웃음이 날 뻔했다. 하지만 그는 웃음을 꾹 참으며 빤히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번엔 또 무슨 엉뚱한 말을 내뱉을지 기대되기까지 했다.
“… 백만 원은 너무 많은가? 그럼…. 음…. 오십만 원이라도. 아 몰라. 대체 얼마를 쓰라는 건데요? 말을 해줘야 알지. 칫….”
윤결이 아무 말도 없이 무섭게 굳은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기만 하자, 민망해진 혜원이 슬쩍 그의 시선을 피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윤결은 순간 웃음을 참지 못하며 너무도 순진한 혜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것보다 많이 써도 돼. 금액 같은 거 신경 쓰지 말고 필요한 만큼 써 혜원아. 형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능력이 좋으니까.”
“진짜요? 고마워요. 형! 헤헤…. 그래도 아껴 쓸게요!”
역시 예상했던 것처럼 기특하고 귀여운 혜원. 사실 혜윤은 혼전 계약서를 작성할 당시, 윤결에게 한 달에 천만 원까지 가능하냐고 물었었다. 그리고 윤결은 금전적인 것에 있어서는 크게 터치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그렇게 하라며 고개를 끄덕여 줬었고, 지금 혜원에게 전달한 카드는 한도가 한 달에 오천만 원인 카드였다. 그런데 고작 백만 원까지 써도 되냐고 물어오는 이 순진하고 욕심 없는 혜원을 보며 이젠 그저 웃음밖에 나지 않았다.
“이따 저녁에 우리 부모님 댁에 갈 거니까 조금 쉬고 있어. 많이 피곤하잖아.”
“네. 아 맞다! 저 그럼 어떡해요? 옷은 뭐 입고 가요? 저 가발이랑 뽕브라 잃어버려서 다시 사야 하는데….”
순간 혜원은 다시 시작된 여장에 대한 공포와 지금 당장 다시 머리에 뒤집어쓰고 가슴에 집어넣어야 하는 그 흉측한 물건들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몰라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눈물이 차오를 만큼 혜원은 초조해졌다.
“아, 가발. 그건 좀 문제네. 뭐 내가 알아서 구해 올 테니까 너는 그냥 집에서 쉬고 있어.”
“정말요?”
“그래. 다녀올게. 어디 나가지 말고 꼼짝 말고 집에 있어. 나가면 너 또 길 잃어버린다.”
“내가 무슨 어린애인 줄 아세요? 그리고 여긴 한국이거든요!!”
“한번 길치는 영원한 길치지. 잔말 말고 집에 있어. 티브이를 보든가 잠을 자든가.”
“네네….”
혜원은 아직도 자신을 어린애 취급만 하는 윤결에게 살짝 삐진 듯 입술을 삐쭉 내밀며 말했다. 그리고는 이내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워 티브이를 보기 시작했다. 윤결은 저게 어딜 봐서 애가 아니라는 건지 웃음이 튀어나왔다.
하는 짓은 꼭 다섯 살 난 아이처럼 행동하면서 입으로는 어른인 양 지지 않고 대드는 혜원을 보니, 앞으로 그와의 동거 생활이 생각처럼 순탄치만은 않을 것 같은 험난한 예감이 들었다.
**
윤결은 오늘 저녁 혜원에게 가장 필요한 가발과 가슴에 집어넣을 모형을 사러 지인이 운영하는 VIP 전용 성인용품 가게에 들렀다. 이곳을 알게 된 건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자주 가는 바에서 종종 얼굴을 익히며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던 남자와 마음이 잘 맞아 우연히 친해지게 되었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의 직업도 알게 되었다.
처음에 남자는 성인용품을 개발해서 유통하는, 나름 업계에서는 알아주는 큰 회사에 다녔었다. 그러던 중 이젠 그 노하우를 가지고 자신의 가게를 차렸다는 말에 호기심에 몇 번 놀러 갔던 적이 있었다.
봐도 봐도 신기한 기구들과 흥미로운 물건들. 저런 걸 어떻게 입을까 싶을 휘황찬란한 코스프레 의상까지 다양하게 전시해 놓고 파는 그의 가게는 가끔 스트레스를 풀거나 기분전환을 하러 오기에 딱 좋은 장소였다.
올 때마다 남자는 종종 신제품이라며 몇몇 도구들을 윤결에게 선물로 주었는데 그저 전리품처럼 집에 차곡차곡 쌓여만 있을 뿐 딱히 써본 적은 없었다. 당연히 그의 가게엔 가발을 포함한 성(性)에 대한 모든 것을 취급했기에 윤결은 혜원에게 필요한 가슴의 뽕까지 무리 없이 구할 수 있었다.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대체 이게 왜 필요한데? 요즘 나 모르는 이상한 취미라도 생긴 거야?”
남자는 눈꼬리를 치켜세우며 음흉한 시선으로 윤결을 위아래로 끈적하게 훑어보며 물었다.
“설마 그럴 리가. 네 기대를 저버리게 해서 미안하지만, 이것들은 그냥 누가 좀 필요해서 구해 달라고 한 거야.”
윤결은 검은 긴 생머리 가발과 아담하게 보이는 모형 가슴을 집어 들며 말했다.
“아, 그래? 그것참 아쉽네. 이번에야말로 한윤결이 드디어 내 물건에 빠져들었나 싶어 은근 기대했는데 말이지. 나름 잘나가는 것들인데 왜 유독 너한테는 이렇게 인기가 없는 건지.”
“내가 아직은 그렇게까지 타락하지 않고 깨끗하다는 증거겠지.”
“야. 섹스에 있어서 깨끗이란 없어. 오직 쾌락과 쾌감 그리고 동물적 본능만 있을 뿐이지. 넌 보기보다 너무 재미없게 사는 거 같아. 이젠 좀 즐겨.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인데 그렇게 도도하게 선비같이 산다고 잘 살았다 알아주는 사람 없어. 저세상 가서 만나면 다 똑같아. 아마 더 재밌고 즐겁게 놀지 못한 걸 후회할걸?”
“퍽이나 그러겠다.”
어이없다는 남자의 논리에 윤결이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야, 나 농담 아니야. 내 요즘 새로 생긴 신조가 뭔지 아냐? 모든 섹스를 마지막 섹스처럼이야. 모든 순간을 내 생에 마지막인 것처럼 열렬히 불태운다는 거지. 너도 잘 생각해봐. 당장 내일 죽는다고 생각했을 때, 네가 가장 해보고 싶었던 체위의 섹스를 못 해 보고 죽었다는 생각. 아마 관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기어 나오고 싶을걸?”
“그럴 일 없습니다. 섹스 전도사님.”
“야야. 그건 지금 네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야. 만약 너에게 죽을 만큼 사랑하는 단 하나의 연인이 있다고 치자. 그 사람이랑 정말 다시는 느끼지 못할, 불타는 섹스를 해보지도 못하고 네가 죽어버린다면 너 기분이 어떨 거 같아? 그리고 그런 섹스를 그 사람이 네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한다면? 너 아마 꼭지 돌아서 미쳐 버릴걸? 즉, 할 수 있을 때 열렬히 사랑하라는 거야. 이 헛똑똑아.”
너무도 구구절절한 그의 설명에 윤결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내 손님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손님이 누군지 아냐? 암 환자였어. 그것도 간암 말기. 그런데 여자친구를 너무 아껴주는 바람에 자신이 암에 걸릴 때까지 섹스를 딸랑 두 번밖에 못 해 봤단다. 그리고 지금은 그게 너무 억울해서 죽을 수가 없겠더래. 그래서 죽는 날까지 원하는 섹스를 마음껏 하겠다며 여기 있는 제품들 거의 다 사 갔을걸? 아마 그 사람 무지 행복하게 죽지 않았을까 싶다.”
남자의 말에 윤결의 표정이 점점 더 심각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자꾸 그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느새 심장까지 미친 듯이 뛰어댔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이런 것도 좀 챙겨가라고. 사랑하는 사람 생기면 제발 그 빌어먹을 이성은 좀 집어치우고, 저 밑바닥에 숨겨둔 네 동물적 본능을 깨우란 말이다 한윤결. 생긴 건 이런 거 종류별로 수집하게 생겨서는 샌님처럼 굴기는. 훗….”
“야. 나는 이런 거 없이도 얼마든지 만족시킬….”
“됐고요. 선물이야. 챙겨가. 언젠가 나한테 진짜 고마워할 거다. 나 바쁘니까 인제 그만 가주세요. 돈 안 되는 손님!”
대체 이런 걸 어디에다 쓰라고 주는 건지. 민망해진 윤결이 봉투에 담긴 것들을 재빨리 들고 나가려다, 잠시 손을 멈추고 한곳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리고 무언가 재미난 게 생각이 난 듯, 음흉한 미소를 지은 채 남자에게 한 가지를 더 요구했다.
“야, 이왕 주는 거 세트로 이것도 하나 줘.”
“대박! 너 진짜! 원래 이런 거 좋아하는 놈이었어? 야. 그래그래. 그것도 가져가. 대박이다 한윤결. 너 이제 다시 보게 되는데?”
남자는 연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입가에 커다랗게 걸린 웃음을 터트리며 그가 가리킨 것을 가져다주었다. 만족스러운 윤결이 가게를 나가기 전 카운터에 지폐를 여러 장 꺼내 올려놓으며 말했다.
“하여튼 넌 입으로 먹고사는 거 하나는 딱이다. 다음에 또 올게. 나 이만 간다.”
“그래! 이왕 가져간 거 잘 쓰고! 나름 그거 찾는 사람 많다고!”
찢어지는 듯한 그의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윤결은 서둘러 차에 올라 받아온 물건들을 뒷좌석에 고이 모셔두었다.
윤결은 그것들을 착용하고 침대 위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애교를 부릴 혜원을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그런 상상만으로도 윤결의 아랫도리는 이미 바지를 뚫고 나올 듯 거대하게 몸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가면을 쓴 늑대의 집에 멋모르고 끌려온 위험한 강혜원.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혜원만이 이 동거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 듯했다. 한윤결, 그 또한 혜원과의 이 장난스러운 동거에서 무사할지 이젠 장담할 수 없었다.
그는 한없이 어리고 순수하기만 한 혜원을 과연 자신이 언제까지 손대지 않고 잘 참을 수 있을지, 그것부터가 걱정이었다. 하지만 뭐 이미 벌어진 일. 윤결은 서둘러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갔다.
벌써부터 사랑스러운 와이프 혜원이 너무 보고 싶었다.
**
집으로 돌아온 윤결은 정신없이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는 혜원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자신의 방에 들어가 사 온 것들을 잽싸게 감췄다. 아직 윤결은 이런 것들을 순진한 혜원에게 보여줄 마음이 없었다. 아직은 말이다.
그는 다시 거실로 나와 세상모르고 단잠에 빠진 혜원의 곁에 앉았다. 그리고 아까 가게에서 들었던 말들을 천천히 떠올렸다.
[그건 지금 네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야. 만약 너에게 죽을 만큼 사랑하는 단 하나의 연인이 있다고 치자. 그 사람이랑 정말 다시는 느끼지 못할, 불타는 섹스를 해보지도 못하고 네가 죽어버린다면 너 기분이 어떨 거 같아? 그리고 그런 섹스를 그 사람이 네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한다면? 너 아마 꼭지 돌아서 미쳐 버릴걸?]
순간 윤결은 혜원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섹스를 한다는 상상만으로도 그 상상 속의 상대를 죽여 버릴 만큼 강한 질투에 휩싸였다.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그리고 죽을 때까지. 윤결은 혜원을 가지기 위해 또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 각오가 되어있었다.
“강혜원. 네 처음도 마지막도 전부 내 거야. 그러니 넌 얌전히 내 곁에만 있으면 돼. 지금처럼. 사랑한다.”
그가 자신의 손길에만 익숙해지도록, 자신이 아니면 절대 만족하지 못하도록 길들여 버리겠다는 굳은 의지, 집착 그리고 사랑.
어느덧 중력에 이끌리듯 잠식되어 가던 혜원을 향한 지독한 소유욕이 서서히 그 불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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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결은 잠이 든 혜원의 머리맡에 앉아 그의 얼굴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여장을 하고 있어도 전혀 위화감이 없는 얼굴이었다. 자신도 그가 혜윤이라고 깜빡 속을 만큼 혜원은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화장과 가발 그리고 여장을 때려치운 지금의 혜원은 귀여운 다람쥐 상을 한, 앳된 미소년. 딱 자신의 취향이었다.
이제 겨우 스무 살. 자신의 취향대로 키워서 잡아먹기 딱 알맞은 나이. 윤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어쩌면 이 결혼은 신이 그에게 내려준 마지막 선물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해맑은 천사의 얼굴로 잠들어 있는 혜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윤결은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혜원아, 우리 잘 살아 보자. 여기까지 와서 겁먹고 도망가버리면 진짜 가만 안 둔다.”
순간 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혜원이 고개를 움직이며 입가에 조그마한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 둘만의 평화로운 시간이 오래오래 지속되길 바라는 윤결도 그의 이마에 키스를 해주며 웃어주었다.
"으아악! 지금 며, 몇 시예요!??”
소파에 누워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게 자신도 모르게 깊게 잠들어 버리자, 화들짝 놀란 혜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외쳤다.
“아직 시간 있어. 뭘 그렇게 놀라?”
샤워를 하고 나온 윤결이 젖은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혜원에게 다가와 물었다.
순간 자신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아 제 머리를 쓰다듬는 윤결의 행동에 당황한 혜원이 벌떡 일어나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달려갔다.
이놈의 심장은 시도 때도 없이 날뛰어 댔다. 혜원은 아무래도 심장이 단단히 고장이 난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야 강혜원! 어디 가? 네 방 안에 가발이랑 가슴 뽕 가져다 놨으니까 준비하고 나와!”
윤결은 뭐에 또 놀란 건지 몰라도 갑작스럽게 자신의 방으로 뛰어 들어가는 혜원을 향해 외쳤다. 사춘기인지 원래 덤벙거리고 부끄러움이 많아서 그런 것인지, 아직 혜원의 성격을 잘 파악하지 못한 윤결은 그가 사라진 방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내 자신도 슬슬 부모님 댁에 갈 준비를 해야 했기에 몸을 일으켜 방으로 들어갔다.
윤결을 피해 방으로 도망쳐 온 혜원은 쿵쿵거리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는 빨개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뒤, 방 안을 빙글빙글 돌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왜 저렇게 잘생긴 거야?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는 모습을 보고 같은 남자지만 숨넘어갈 뻔했잖아!!’
만약 자신이 혜윤이었으면 못 이기는 척 결혼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째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자신은 남자였고 그도 남자였다. 좋아한들 성립될 수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되는 관계였다.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하는 생각들을 떨쳐버리려 혜원은 머리를 마구 저으며 속으로 외쳤다.
‘혜윤아 빨리 돌아와! 저 남자 너무 위험해!’
어느 정도 마음을 진정시킨 혜원이 책상 위에 올려진 가발과 가슴 뽕을 보고는 땅이 꺼질 것 같은 깊은 한숨을 지으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대체 이 귀신 보따리 같은 걸 언제까지 해야 하냐고! 짜증 나!”
혜원은 대충 가발을 뒤집어쓴 뒤, 가슴에 뽕을 집어넣으며 씩씩거렸다. 정말이지 하나부터 열까지 어색하기만 했다. 특히 이 가슴 뽕의 감촉은 자꾸만 자신의 유두를 건드리는 통에 이상야릇한 기분까지 들게 했다.
대충 여장을 끝내고 단정해 보이는 원피스로 갈아입은 혜원이 살며시 문을 열고 나왔다. 거실에는 어느새 멋스러운 정장으로 깔끔하게 옷을 갈아입은 윤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주, 준비 다 됐는데요.”
하지만 문을 열고 나온 혜원을 발견한 윤결은 너무도 어설픈 그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한눈에 봐도 가슴은 짝짝이고 가발은 빗질도 제대로 하지 않아 여기저기 엉켜있기까지 했다. 누가 보면 머리채라도 잡고 싸웠다고 해도 믿을 모습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입고 나온 건지, 그냥 딱 들키기로 작정하지 않고서야 절대 나올 수 없는 모습에 기가 찼다.
“야 강혜원. 너 진짜 오늘 다시 미국 들어가고 싶냐?”
“아니요. 왜요?”
혜원은 갑자기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인상을 구기고 서 있는 윤결의 모습에 부끄러워졌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하아…. 이리 와봐.”
대체 뭐가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오라고 손짓하는 그를 무시할 수는 없어 혜원은 쭈뼛쭈뼛 그에게 다가갔다.
물론 윤결에겐 지금 혜원의 모습도 충분히 귀엽고 꼴렸지만, 부모님을 뵈러 가야 했기 때문에 절대 조금의 빈틈도 보일 수가 없었다.
그는 스스럼없이 혜원의 원피스를 들추고 가슴을 향해 손을 집어넣었다.
“으아아악!!! 뭐, 뭐 하는 거예요!!”
화들짝 놀란 혜원이 그에게서 벗어나려 뒷걸음을 쳤지만 바로 뒤는 꽉 막힌 벽이었다. 혜원의 비명에도 윤결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슴에서 손을 빼지 않은 채 그의 다리 사이에 자신의 다리를 끼워 넣어 혜원이 도망가지 못하게 고정시키며 말했다.
“너 가슴에 뽕도 제대로 못 넣고 옷만 주워 입으면 다야? 아주 그냥 나 강혜원입니다 하고 광고를 하지 그래? 그리고 남자끼리 가슴 좀 만졌다고 왜 그리 호들갑?”
“그, 그래도 말이나 하고 만지든가요! 노, 놀랬잖아요!”
혜원은 울상을 지으며 자신의 가슴을 엑스자로 가리며 소리쳤다. 정말이지 불쑥불쑥 자신의 몸을 만져대는 윤결 때문에 혜원은 잠시도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아, 됐고 시간 없으니까 그 손 좀 치워 봐. 제대로 넣어야 할 거 아니야.”
시간은 없었고, 무서운 얼굴로 윤결이 다그치자 혜원은 천천히 손을 내리며 그의 시선을 피해 얼굴을 돌렸다. 억울하다는 듯 잔뜩 입이 나와 있는 혜원의 모습에 윤결은 씩 웃음을 지으며 뽕의 위치를 잡기 시작했다.
“흐읏….”
이미 뽕에 쓸려 예민해진 혜원의 유두에 윤결의 손길이 닿자, 혜원은 얼굴이 빨개지며 새어 나오는 신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 정말. 대충 집어넣지 왜 자꾸. 하윽…. 만지는 거야. 하앗…. 기분이 이상해지잖아!!’
귀여운 혜원의 솔직한 반응에 피식 웃음을 짓는 윤결. 그는 약속 시간이고 뭐고 좀 더 그를 놀려 주기 위해 뽕의 위치를 잡는 척하며 혜원의 가슴 곳곳을 멋대로 주물러댔다.
예민하게 솟아오른 유두의 탱탱한 느낌에 윤결은 그대로 혜원을 눕혀버리고 쪽쪽 빨아대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랬다간 분명 이 겁 많은 녀석은 기겁하고 도망갈 것이기에 윤결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며 천천히 손을 빼냈다. 그리고는 씩씩거리는 혜원의 헝클어진 가발을 매만져 주며 말했다.
“너 앞으로 가슴에 뽕 이따위로 집어넣을 거면 차라리 나보고 넣어 달라고 해. 알았어?”
“… 네.”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수치심과 생전 처음 겪어보는 야릇한 자극에 어느덧 혜원의 눈가에는 눈물이 찔끔 맺혀있었다.
“자, 이제 얼추 다 된 것 같으니 그만 출발하자. 어른들 기다리시겠다. 오늘 실수하지 말고 잘해. 알았지?”
“네….”
이미 윤결의 야릇한 손길에 기력이 다 빨려버린 혜원은 힘없이 대답하며 그의 손에 이끌려 차로 향했다. 대체 조금 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혼란스러워졌다. 부끄러웠지만 싫지는 않았고, 힘껏 밀어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상하게 그의 말대로 움직여지는 자신의 행동에 혜원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위험했다. 자꾸만 그에게 기대려는 자신이 너무도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
“어머, 우리 예쁜 며느리 오느라 힘들었지?”
윤결의 부모님은 혜원을 마치 공주님 모시듯 반갑게 맞아주었다. 불면 날아갈까 쥐면 부서질까 조심스럽게 그를 자리에 앉히며 궁금했던 신혼여행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우리 아가, 여행은 어땠어? 윤결이가 잘해 줬어? 어디 아픈 데는 없었고?”
“네. 아주 재밌었어요. 어머니. 윤결 형 아니 윤결 오빠가 너무 잘해 줘서 하나도 안 힘들었어요.”
“아휴 그랬어? 당연히 그래야지. 이렇게 예쁜 우리 아가를 데리고 사는데 당연히 잘해야지. 그렇지 한윤결? 너같이 까탈스러운 녀석이 어디서 이렇게 예쁘고 착한 어린 신붓감을 구하겠어? 할아버지한테 감사해. 정말 천운인 거야 너는.”
“네, 알아요 어머니. 잘할게요. 걱정 마세요.”
‘그럼. 당연히 천운이지. 그렇고 말고요.’
자신 같은 게이에게 혜원 같은 복덩이가 스스로 굴러들어왔는데 업고 다니다 못해 배 속에 집어넣고 다녀도 모자랐으니 말이다. 윤결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손목이 잡혀 어쩔 줄 몰라 하는 귀여운 혜원을 바라보며 싱긋 웃음을 지었다.
‘오빠. 오빠라….’
학교 다닐 때는 그렇게 듣기 싫었던 그 오빠라는 단어가 혜원에 입에서 나오니 왜 이렇게 달달하게만 들리는지. 지금 당장이라도 침대에 눕혀 오빠라고 부르게 하며 울리고 싶을 정도였다.
“아가, 용돈은 있어? 이 시아빠가 용돈 좀 줄까? 이제 조금 있으면 대학생인데 예쁜 옷도 입고 싶고, 사고 싶은 것도 많아질 텐데. 뭐 가지고 싶은 건 없니?”
윤결의 아버지인 한 사장도 지지 않겠다는 듯 물질 공세를 펼치며 환심을 사기 위해 달려들었다.
“아, 아니에요. 아버님. 오빠가 용돈으로 쓰라고 카드 줬어요. 저는 그거면 돼요. 정말 괜찮아요.”
“어머. 어쩜 마음씨도 이렇게 고울까! 정말 윤결이한테 아까울 정도야. 그렇죠, 여보?”
“그럼, 강 회장님이 끼고도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 복덩이가 들어왔어 복덩이가. 강 사장이 그렇게 아까워하면서 시집보낸 딸 아닌가! 허허허….”
한 사장 부부는 더 예뻐해 주지 못해 안달이 난 듯 혜원의 작은 손을 놓지 못한 채 흐뭇해했다.
“아버지, 어머니. 혜윤이 그만 좀 괴롭히고 저녁이나 주세요. 저희 오늘 막 도착해서 정말 피곤해요. 저녁 먹고 바로 돌아가서 내일 출근 준비도 해야 하고요.”
“어머나 내 정신 좀 봐. 그래. 우리 아가 배고프겠네. 어서 식사하러 들어가자.”
그제야 손의 자유를 찾은 혜원이 힐끔 윤결을 노려봤다. 자신은 들킬까 봐 조마조마해 죽겠는데 저 능글맞은 윤결은 뭐가 그리 좋다고 헤실헤실 웃기만 하는지!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자리가 어색하고 불편하기만 한 혜원은 밥이고 뭐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이것 좀 먹어봐, 우리 혜윤이 고기 좋아한다고 해서 일부러 한우 특급으로 준비했지. 많이 먹어 아가.”
맙소사. 혜원은 이 자리에서 엉엉 울고만 싶었다. 이 몹쓸 자리바꿈을 조만간 끝내든가 해야지, 그렇지 않았다가는 위장병으로 먼저 저세상으로 갈 판이었다.
혜원은 윤결의 어머니가 손수 건네주신 고기를 질겅질겅 씹고 삼키고를 반복했다. 그러다 도저히 더는 먹지 못할 상태가 되자 도움을 요청하는 간절한 눈빛으로 윤결을 바라봤다. 여기서 한 입만 더 먹었다가는 이 자리에서 바로 모두 토해 버릴 것만 같았다.
“어머니, 혜윤이가 알아서 먹게 좀 놔두세요. 프랑스에서 고기 질리도록 먹었다고요.”
“그런가? 그럼 뭐가 먹고 싶어 아가? 맛있는 거 많이 했으니까 먹고 싶은 거 잘 골라서 먹으렴. 건강해야 나중에 아기도 쑥쑥 잘 낳지.”
“풉!! 콜록콜록….”
순간 혜원이 거친 기침을 해대며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기라니?? 나보고 뭘 낳으라고?? 하아…. 정말 강혜윤!! 너 빨리 돌아오라고! 나 너무 무섭다고!!’
“어머 아가야 괜찮니? 아이고 이를 어째. 체하겠다. 천천히 먹어. 응?”
“죄, 죄송해요. 콜록콜록….”
점점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는 혜원을 보고 윤결은 안 되겠다는 듯 서둘러 식사를 마쳤다.
아쉬운 얼굴로 좀 더 있다가 가라는 부모님을 뒤로한 채 윤결은 다음에 또 들르겠다며 서둘러 혜원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내내 혜원의 얼굴은 심각하게 창백해져 갔다. 또 속이 아픈 건지 시름시름 앓는 소리를 내던 혜원은 배를 움켜쥐며 식은땀을 흘려댔다.
“적당히 먹지 그걸 왜 다 받아먹어 강혜원. 잘 먹지도 못하면서….”
“부모님이 주시는데 어떻게 안 먹어요! 하읏…. 소, 소리 지르지 마요. 머리 아파요. 우, 우웁. 우웁!!”
“야! 야!! 안 돼! 너 이 차에서 토할 생각 하지도 마!! 야 강혜원 참아. 참으라니까!”
윤결의 다급한 외침과 동시에 그는 정말 꿈에서도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을 경험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동시에 윤결의 비명 섞인 절규가 차 안에 울려 퍼졌다.
혜원은 참기 힘든 복통과 울렁거리는 멀미 때문에 결국 참지 못하고 윤결의 차에 크나큰 실례를 하고야 말았다.
“우웁!! 콜록콜록…. 하앗.”
소화도 되지 않는 음식물들을 흥건히 쏟아내고도 아직 아픔이 가시지 않는지, 혜원은 눈물까지 대롱대롱 매단 채 고통스러워했다.
결벽증이 있다고 생각될 만큼 깔끔한 성격의 윤결이었지만, 엉망이 된 차보다도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몸을 바들바들 떠는 혜원이 점점 걱정되기 시작했다.
“혜원아. 조금만 참아? 응? 집에 다 왔어. 혜원아! 강혜원!”
윤결은 운전을 하는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꿈쩍도 못 하는 혜원의 손을 꽉 잡은 채, 초조하게 그를 바라보며 전속력으로 밟기 시작했다.
집에 도착한 윤결은 서둘러 혜원을 들쳐 안고 욕실로 향했다. 그의 원피스를 재빨리 벗겨내고 따뜻한 물로 그의 몸을 씻겨 내려갔다.
먹은 걸 모조리 토해내 이미 홀쭉해진 자신의 배를 무의식적으로 감싸는 혜원의 몸짓에 심각성을 느낀 윤결은 그를 수건으로 돌돌 말아 침실로 데리고 왔다. 간신히 혜원을 침대에 눕힌 뒤, 옷을 입힐 상황은 안 될 것 같아 그대로 이불을 덮어 주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약이라도 사 와야겠다는 생각에 방을 나서려는 순간, 혜원이 손을 뻗어 윤결의 손을 꽉 잡으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형아. 아파. 혜준 형. 나 배 아파. 흑흑…. 배가 너무 아파.”
“혜원아….”
윤결은 눈물 섞인 혜원의 부름에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소화불량과 위염을 달고 사는 혜원은 이렇게 한 번씩 심하게 아플 때마다 혜준을 찾았었다. 그의 따뜻한 손길이 배에 닿아야만 혜원은 아픔이 가셨고 마음이 놓였다. 오늘도 그런 혜준의 손길을 그리워하며 혜원은 무의식중에 윤결의 손을 잡았다.
아파하는 혜원의 모습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던 윤결은 그대로 다시 침대맡에 걸터앉아 그의 차가운 이마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강혜원. 오늘 혼자 두지 말라고 나 잡은 거지? 너 내일 아침에 기억 안 난다고 울고불고하지 마. 네가 내 손 먼저 잡은 거다.”
윤결은 점점 더 차가워만 지는 그의 몸을 자신의 열기로 따뜻하게 녹여주고 싶었다. 잠시 고민하던 윤결은 혜원의 곁에 눕기 위해 옷을 하나둘씩 벗었다. 그리고는 살며시 혜원의 등 뒤로 가 그를 끌어안으며 아픈 듯 웅크리고 있는 그의 배에 손을 가져다 댔다.
말랑말랑한 혜원의 마른 배에 원을 그리듯 쓸어 주며 윤결이 그의 배를 어루만져주기 시작했다.
“형. 흑흑…. 혜준 형아.”
정신이 없는 와중에 윤결을 혜준으로 착각하며 점점 더 그에게 밀착해 오는 혜원의 살 내음에 윤결은 머리가 다 어질어질해질 지경이었다.
미치도록 안고 싶은 혜원.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그를 안기에는 자신이 너무 짐승 같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윤결은 홀로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외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윤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아래는 발딱발딱 고개를 치켜세우기 시작했고, 이 귀여운 다람쥐 같은 혜원은 엉덩이를 움찔거리며 윤결의 성기에 바짝 들이대기 시작했다. 윤결으로서는 참기 힘든 유혹이었다.
“하읏! 혜원아. 움직이지 마. 진짜 형 참기 힘들다.”
윤결은 더 이상 그의 배를 쓰다듬어 주는 것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예민하게 반응하는 자신의 몸 때문에 혜원에게 손을 댈 수조차 없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혜원 너 진짜! 이런 몸으로 다른 남자한테 안기면 진짜 가만 안 둬.”
윤결은 어쩔 수 없이 한껏 부풀어 오른 자신의 성기를 쥐어 잡고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래도 풀리지 않는 욕정에 살며시 혜원의 입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혜원아. 빨아봐. 응? 흐읏!”
잠결에 반응을 하는 듯 혜원은 자신의 입 안에 침입한 길고 굵은 윤결의 손가락들을 혀로 살살 핥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마치 맛있는 막대 사탕이라도 빨아 먹는 듯 아예 그의 손을 쥐어 잡으며 더욱 깊숙이 자신의 입 안으로 손가락들을 밀어 넣으며 쪽쪽 빨기 시작했다.
혜원의 뜨겁고 촉촉한 혀가 손가락 마디마디를 핥아대자 윤결의 심장이 터질 듯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윤결은 허리를 더욱 거칠게 움직이며 자신의 성기를 흔들어댔다. 어느덧 절정에 다다르자 윤결은 날카로운 신음을 내뱉으며 혜원의 엉덩이를 향해 질펀한 정액을 쏘아 올리며 사정을 했다.
“하아…. 강혜원. 씹! 먹고 싶어. 언제 다 자랄래? 응? 이 형아 오래 못 기다릴 것 같은데….”
윤결은 자신의 정액으로 흥건히 젖은 혜원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아쉬운 듯 그의 목덜미에 진한 키스를 하며 속삭였다.
어느덧 혜원의 입 속을 헤집고 다니던 손가락을 빼내며 윤결은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제 손가락을 혀로 핥았다. 동시에 그는 정신없이 잠든 혜원을 자신의 품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윤결은 저항 없이 끌려오는 가벼운 혜원을 기분 좋게 껴안으며 서서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귀여운 녀석이라면 이 말도 안 되는 결혼생활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에 올인해야 할 것 같았다.
**
“흐응…. 하아. 몇 시야. 나 언제 잠든 거야. 진짜….”
혜원은 졸린 눈을 비비며 시계를 찾았다. 하지만 아직 비몽사몽인 혜원은 어떻게 집으로 온건 지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분명 어제 윤결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차를 타고…. 속이 아파서…. 응?? 순간 혜원은 눈을 번쩍 뜨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 설마…. 형 차에 토한 거야? 정말? 레알…. 진짜??”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지금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알몸 상태라는 것을 깨닫고는 소리를 꽥 지르고 말았다.
“으아악! 내 옷은? 뭐, 뭐야?? 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혜원은 서둘러 이불로 자신의 맨몸을 감싸며 침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 놓인 쪽지를 발견하고 떨리는 손으로 메모를 읽어 내려갔다.
[강혜원. 나 출근한다. 일어나면 죽 챙겨 먹고 세탁기나 돌려놔. 너 어제 내 차에 토하고 기절해서 내 옷, 네 옷 할 거 없이 다 네 토로 범벅됐다. 너 벗기고 씻기는 것만으로 어제 내 체력 방전됐어. 왜 옷을 안 입혔냐는 그따위 투정할 생각이라면 곱게 다시 네 주둥이 속으로 집어넣어라. 진짜 너 한 번만 더 이따위 짓 하면 미국으로 쫓아내 버린다! 청소랑 빨래해놓고 얌전히 집에서 기다려. 먹고 싶은 거 있음 카드로 사 먹고 싸돌아다니지 말고 집 잘 지키고 있어. -남편-]
“으악! 미쳤어! 내가 미친놈이야!!”
혜원은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시뻘게진 얼굴로 재빨리 옷들을 꺼내 입었다. 그래도 화끈거리는 열기가 가시지 않자 혜원은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소리를 질러댔다.
정말이지 이 살얼음판 같은 결혼생활을 제대로 해 나갈 수 있을지 혜원의 걱정은 날로 늘어만 갔다.
터벅터벅 무거운 발걸음으로 거실로 나온 혜원은 어제 자신이 저지른 대참사가 담겨있는 세탁기를 한번 쳐다봤다. 그는 태어나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무시무시하게 생긴 네모난 물건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뭘 누르라는 건지, 버튼은 또 왜 이리 많은지!! 머리를 마구 들쑤시며 한숨만 푹푹 쉬던 혜원은 할 수 없이 빨래를 다 꺼내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빨래를 해두라고 했으니 빨래는 해야겠고 저 거대한 물건은 도통 쓸 줄 모르니 아무래도 손빨래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한참을 망설이던 혜원은 빨래 더미를 들어 욕조 속에 집어넣고는 물을 받기 시작했다. 엉성한 손동작으로 세제를 탈탈 집어넣어 욕조 안을 마구 뛰며 나름 열심히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 신나게 핸드폰 음악까지 틀어가며 욕조를 뛰어다니는 혜원. 이건 뭐 빨래를 하는 것인지, 물놀이를 하는 건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신이 나 있었다.
넘치는 물로 흥건한 욕실 바닥과 어느새 이리저리 튄 거품으로 화장실은 점점 초토화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사이 집에 중요한 서류를 깜빡 두고 간 윤결이 다시 집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욕조를 쳐다보며 의아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음악을 틀어 놓은 채 발광을 하고 있는 혜원과 엉망이 되어버린 욕실의 모습에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그를 노려봤다.
반면 윤결이 돌아왔음을 알 리 없는 혜원은 목청껏 노래를 따라 부르며 흥에 겨워 있었다. 순간 너무 방방 뛰던 나머지 혜원은 그만 거품을 밟고 미끄러지더니 그대로 ‘어어어!’ 하는 외침과 함께 욕조 뒤로 꽈당! 하고 넘어지고 말았다.
“으악!!”
“야! 강혜원 조심해!!”
넘어지는 혜원과 달려가는 윤결. 하지만 아쉽게도 혜원의 넘어지는 속도가 조금 더 빨랐다. 화장실 벽에 머리를 쿵 하고 박으며 넘어진 혜원은 너무 아픈지 일어설 생각도 못 하고 욕조 속에 널브러져 끙끙거리고 있었다.
“아파…. 아야….”
“혜원아 괜찮아? 일어설 수 있겠어?”
“어? 윤결 형? 어, 언제 왔어요? 회사는요?”
분명 아까 회사 간다고 나갔던 사람인데 어느새 또 자신의 눈앞에 와있자 어안이 벙벙해진 혜원이 몸을 일으키려 버둥거리며 물었다.
“다시 갈 거야. 근데 넌 대체 왜 이러고 있는 거야?? 이젠 아주 정신 줄 놨어?”
“아, 아니요. 그게…. 빠, 빨래해 놓으라고 해서…. 나 사실 세탁기 쓸 줄 몰라요.”
혜원은 아픈 머리를 어루만지며 욕조에서 일어나려 애쓰며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넘어지면서 다리까지 삐었는지 혜원은 일어서자마자 끊어질 듯 아픈 발목에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픈 발목 때문에 다시 허리를 굽히고 주저앉아 버린 혜원은 울상을 지으며 발목을 감쌌다.
“아얏! 아파라….”
“뭐야? 너 또 왜 그러는데?”
곁에 있던 윤결이 인상을 쓰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혜원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바, 발목을 삔 것 같아요. 너무 아파요.”
그제야 혜원은 기어들어 갈 것 같은 목소리로 윤결의 눈치를 보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 그리고 그런 혜원의 모습에 윤결은 속이 또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너 진짜. 가지가지 한다, 가지가지 해!!”
윤결은 비틀거리며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혜원을 공주님 안기로 안아 들고 거실로 나왔다. 발목을 보아하니 빨갛게 부어오른 게 아무래도 심하게 삔 듯했다.
정말이지 하루가 멀다고 사고를 치는 그의 모습에 윤결은 이제 한숨이 습관처럼 나왔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자신이 선택한 다람쥐인 걸. 윤결은 미간을 찌푸리며 병원으로 가기 위해 혜원을 안아 조심스럽게 차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너 앞으로 아무것도 하지 마라. 그냥 코로 숨만 쉬고 있어. 내가 불안해서 일을 할 수가 없다 강혜원. 아주 밥이라도 해놓으라고 했으면 집에 불을 낼 놈이야 넌.”
“미, 미안해요. 형.”
윤결의 호통에 혜원은 기가 죽어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까지 글썽였다. 어느덧 소심해진 혜원의 시무룩해진 모습에 마음이 약해지기 시작한 윤결은 화를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윤결이 정말 화가 난 이유. 그딴 화장실이 엉망이 되고 혜원이 빨래를 못해서가 아니었다.
혜원이 욕조에서 넘어지던 순간 그가 크게 다칠까 봐 심장이 땅으로 꺼질 뻔했던 윤결이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속마음을 말할 수 없는 윤결은 애써 그의 진심을 숨기며 혜원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호통을 쳐버린 것이다. 정말이지 이 사고뭉치 말썽쟁이 강혜원을 혼자 두면 둘수록 불안해지는 불안증이 생길 것만 같았다.
말로만 듣던 분리불안 장애. 다 늦은 서른이라는 나이에도 발병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윤결은 머리가 다 지끈지끈 아파왔다. 데리고 다닐 수도 그렇다고 혼자 두기도 불안한 꼬마 녀석. 윤결의 걱정과 근심이 하늘을 찔렀다.
들어는 봤는가, 성은 팔이요 이름은 불출. 오늘 새롭게 생긴 윤결의 또 다른 이름. 팔불출. 지금 이 순간, 이보다 더 그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은 없을 듯했다.
**
병원에 도착하여 근육이 놀라 부어오른 혜원의 발목을 치료하고 나자 윤결은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왠지 이대로 집으로 보내면 또 말도 안 되는 사고를 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어디 보낼 곳도 마땅치 않았던 윤결은 어차피 오늘은 오전 근무만 할 예정이니 회사로 데리고 갔다가 데리고 오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강혜원. 나 지금 너 집에 데려다줄 시간 없거든? 그러니까 그냥 나랑 같이 회사로 갔다가 오자. 마침 오늘 오전에만 잠깐 일하고 일찍 올 생각이었으니까.”
“에엑? 말도 안 돼요! 제가 형이랑 같이 회사에 가서 뭘 해요? 할 것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그리고 저 어디에 있으라고요! 싫어요!! 저 그냥 집에 갈래요. 여기서 내려주세요! 빨리요!”
혜원은 깜짝 놀라 손을 휘휘 내저으며 절대 안 가겠다 버티기 시작했다.
“그럼 너 그 다리로 여기부터 혼자 집에 가겠다고?”
“어쩔 수 없잖아요. 택시 타고 갈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니, 널 뭘 믿고? 천상 길치에다 어리바리해서 딱 잡혀가기 좋아 보이는 너 같은 얼빵한 꼬맹이를 어떻게 길 한복판에 놓고 가라는 거야! 됐고, 잔말 말고 따라와. 어차피 내 사무실엔 나밖에 없으니까 소파에 앉아 있든지, 누워있든지. 아니면 너 제일 잘하는 잠이나 자든가.”
“아, 진짜 형.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혜원은 세상 불편한 얼굴로 말도 안 된다는 듯 소리쳤다. 아니 회사가 일하러 가는 곳이지 자러 가는 곳이냔 말이다! 가끔 보면 이 형은 생긴 거랑 다르게 대책 없는 말을 너무 쉽게 내뱉었다.
“너 원래 그렇게 말이 많았냐? 내 사무실이니까 내 마음이지. 아무튼, 나 지금 회사로 가는 중이니까 그 툭 튀어나온 입 좀 집어넣고 조용히 따라와.”
“하아…. 정말 무슨 독재자도 아니고 이 꼴로 어떻게 가라고. 정말 나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태어난 거 맞냐고 어이없어 진짜….”
혜원은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엉덩이를 뒤로 길게 빼고 드러누운 듯한 자세로 핸드폰을 보기 시작했다.
‘될 대로 되라지.’
그쪽 회사지 내 회사냐 라는 마음에 혜원도 입을 꾹 다문 채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혜윤과 혜준이 있는 단체 대화방에 말을 걸기 시작했다.
[Message]
-멋진 혜원: 혜윤아!? 누나! 누나! 누나! 언제 올 거야? ㅠㅠ
-내 사랑 혜쭌 형♡: 왜 그래? 혜원아 무슨 일 있어?
-혜윤 마녀: ..... (읽씹)
-멋진 혜원: 형.. 혜윤이는?
-내 사랑 혜쭌 형♡: 글쎄? 방에서 자나? 아닌데 이 시간에 벌써 잘리는 없고. 형이 방에 가서 확인해 볼까? 급한 거야?
-멋진 혜원: 누나야!! 제발 빨리 마음 돌리고 돌아와!! ㅜㅜ
-혜윤 마녀: 아 정말!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징징거려 강혜원! 이딴 말 할 거면 나 카톡방 나간다! 때가 되면 누님이 알아서 가시겠지. 동생아, 조금 더 신혼을 즐기렴. 그럼 난 이만….
[End of Message]
“아아아악!! 이 못된 마녀! 진짜 이 악녀! 너 진짜! 한국 오기만 해봐!! 아아악!!”
뜬금없이 문자를 하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혜원의 모습에 깜짝 놀란 윤결이 그의 뒤통수를 한 대 툭 치며 말했다.
“야 강혜원. 진짜 죽고 싶냐? 나 운전 중이다. 지랄발광 좀 하지 마.”
“아…. 응. 미안.”
혜원은 민망한 듯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휴대폰을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얌전히 눈을 감았다. 어디로 끌려는 건지 이젠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그러길 일 분도 되지 않아 순간 혜원은 번뜩 그가 회사로 향한다는 말에 자신의 옷차림이 마음에 걸렸다.
“자, 잠깐!! 진짜, 잠깐! 차 스톱!!”
갑자기 또 한 번 크게 소리를 꽥 지르며 당황하게 하는 혜원 때문에 머리에 뚜껑이 열리기 일보 직전인 윤결이 서둘러 차를 갓길에 세웠다.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 했다던가. 윤결은 깊은숨을 세 번 내쉬더니 눈을 치켜뜨고 혜원을 노려보며 물었다.
“아! 정말 이 꼬맹이가 진짜! 뭐, 뭐? 또 왜? 뭔데?”
“옷이요! 나 가발도 없고 가슴도 없는데 이대로 회사에 같이 가자고요? 날 뭐라고 소개하려고요?”
아차차….
순간 차 안은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싸해지며 윤결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번엔 혜원의 말이 맞았다. 지금 그는 강혜원이 아니라 강혜윤이었다. 그리고 지금 혜원의 모습은 절대 자신과 결혼한 새침한 새댁 혜윤의 모습이 아니었다.
잠깐 고민하던 윤결은 서둘러 그를 데리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최대한 여성스러운 원피스를 사서 입히고 가발도 사서 씌웠다. 가슴은 어쩔 수 없이 브라에 양말을 대충 쑤셔 넣어 얼추 비슷한 모습으로 보이게 만들고는 최종 점검을 위해 그를 전신 거울 앞에 세웠다. 역시 쌍둥이는 쌍둥이였다. 가발과 원피스만 입혔을 뿐인데 어느새 혜원은 완벽한 혜윤이 되어있었다.
“이만하면 됐어! 가자 강혜원.”
한껏 꾸민 그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지 휘파람까지 불어대며 혜원의 팔짱을 끼고 백화점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한윤결. 혜원은 그의 민첩함과 용의주도함 그리고 빠른 상황 판단력과 결단력에 혀를 내둘렸다. 변장하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집으로 돌려보내 줄 거라고 생각했던 혜원의 들뜬 희망이 산산조각이 나는 순간이었다.
이 남자, 정말로 자신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는 듯했다.
**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윤결의 회사. 혜원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초조하게 윤결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윤결은 다 괜찮을 거라는 듯 혜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그의 손을 잡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윤결이 안심시켜주어도 모든 것이 그저 어색하기만 한 혜원은 그에게 바짝 붙어 걸었다.
사무실로 올라가는 내내 혜원은 얼굴이 따가워 죽을 맛이었다. 이유인즉 윤결은 만나는 사람마다 혜원을 자신의 와이프 혹은 어린 신부라고 소개를 해댔고 혜원의 허리에 손까지 두르며 완벽한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엘리베이터에서는 허리에 두른 손을 위아래로 쓸어내리며 혜원의 엉덩이까지 만져댔다.
혜원이 도끼눈을 뜨고 만지지 말라고 계속해서 윤결을 째려봤으나 이 능글맞은 늑대는 그의 이런 신호를 말끔히 무시한 채 계속 혜원의 허리만 주물러 댔다. 그렇게 모든 직원의 부러움을 사며 도착한 윤결의 사무실. 혜원은 사무실 문이 닫히자마자 소파에 대자로 누우며 말했다.
“하아…. 정말. 허리랑 엉덩이 만진 거 진짜 오늘만 봐준 거예요! 사람들 보는 눈이 있어서 내가 참은 거라고요!! 정말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요. 나 완전 소름 돋았어!”
“소름?? 정말 소름만 돋았어? 기분이 좋거나, 막 설레거나 가슴이 두근두근하진 않았고?”
“아니요. 전혀….”
진담인지 농담인지, 얼굴은 웃고 있으면서도 눈빛은 절절함이 묻어나 보이는 윤결의 질문에 혜원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알쏭달쏭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사실 조금 헷갈리기는 했다. 자신의 가슴이 뛰는 이유가 설레어서 그랬던 건지, 놀래서 그랬던 건지. 좋아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싫어서 그랬던 건지.
가슴이 뛴 건 맞았지만 뛴 이유까지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계속 생각하면 머리만 더 아파질 것 같았다.
“아무튼, 형은 일 보세요. 저는 소파에 누워서 좀 잘래요. 아침부터 빨래한다고 설쳤더니 피곤해 죽겠어.”
괜히 민망해진 혜원은 소파에 있는 쿠션을 베개 삼아 머리에 베고 누우며 말했다.
“그러든가.”
윤결은 혜원이 자는 동안 빨리 일을 끝내고 퇴근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빠졌다.
그가 빠르게 이메일과 서류들을 확인하는 가운데, 어느덧 드르릉 코 고는 소리에 윤결의 귀가 쫑긋거렸다. 아니 소파에 누운 지 10분도 안 돼 잠에 빠지는 경우는 또 뭐람? 전생에 무슨 잠 못 자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 게 아니고서야 정말 어디서든 잠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자는 녀석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 참 어이없어서….”
윤결은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혜원에게 다가갔다.
아픈 다리는 소파 밑에 내려 두고 팔은 아기처럼 양쪽으로 벌리고 자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절대로 이제 막 대학생이 되는 소녀가 자는 모습이라고는 볼 수 없었지만, 웃음이 날 만큼 꽤 귀여웠다.
불편해 보이는 다리는 다시 소파 위에 올려주고 다른 쿠션 하나를 그의 다리 밑에 넣어 다친 다리를 높이 올려주었다. 마지막으로 윤결은 자신의 카디건을 가져와 그의 배 위에 덮어 주며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해 주었다. 어느덧 윤결은 한층 더 편안해진 모습으로 잠에 빠진 혜원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긴 속눈썹에 뽀얗고 하얀 피부, 빨갛고 오동통한 입술을 움찔거리는 모습까지 너무 귀여워 웃음이 나고 말았다. 윤결은 살며시 그의 입술에 도둑 키스를 해주며 속삭였다.
“난 이대로 혜윤이 영영 미국에서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혜원아.”
윤결은 잠시 혜원의 곁에 앉아 잘 자라는 듯 그의 가슴을 토닥여주었다. 이상하게 이 녀석 곁에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졌고, 동시에 조바심이 났다. 자신의 손에 들어왔음에도 잠시만 한 눈을 팔면 사라져버릴 것 같은 불안함. 오늘도 채워지지 않는 욕구에 윤결의 눈빛이 짙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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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늘어지게 자다 문득 잠에서 깬 혜원은 텅 빈 사무실의 모습에 의아해하며 윤결을 찾았다. 하지만 사무실 밖으로는 나가기가 무서웠던 혜원은 그냥 안에서 그를 기다리는 방법을 택했다.
그렇게 아무리 기다려도 윤결은 오지 않고, 슬슬 배는 고프고, 화장실도 가고 싶고! 마음이 급해진 혜원이 초조함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순간이었다.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혜원은 단연 윤결일 거란 생각에 절뚝거리는 다리로 달려가 소리를 질렀다.
“아 정말! 윤결…. 혀어어 엉…? 어?”
깜짝 놀란 혜원의 외마디 외침. 하지만 간절한 그의 바람과는 달리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자. 그리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훑어보는 남자. 왠지 그의 시선이 달갑지 않았다.
“누, 누구세요?”
“어? 강혜윤? 네가 윤결이 사무실엔 무슨 일로? 남편 보고 싶어서 온 거야 귀여운 꼬마 신부님?”
윤결과 혜윤을 아는 듯한 그의 모습에 혜원은 입을 꾹 다문 채 얼어붙고 말았다.
‘누구지? 대체 당신은 또 누구야? 난 널 몰라. 제발 말 걸지 마. 다가오지 마. 저리 가!!’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얗게 질린 혜원이 그에게서 멀어지려 계속 뒷걸음질을 치자, 의문의 남자는 의아한 듯 혜원을 향해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야, 강혜윤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어딜 자꾸 가?”
어느덧 절뚝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던 혜원이 결국 다리가 꼬이며 뒤로 넘어지려 하자, 남자가 재빨리 뛰어와 혜원을 끌어안음과 동시에 윤결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뭐 하는 짓이야!”
자신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혜원을 발견한 순간 윤결은 완전히 이성을 잃고 말았다. 윤결은 무섭게 남자에게 달려들며 혜원을 떼어냈다.
“야, 김정현 너 죽고 싶냐? 나 내 거에 손대는 거 싫어하는 거 잘 알 텐데? 사촌이건 팔촌이건 나 그딴 거 안 따져. 씨발, 너 지금 누구한테 손댄 거야? 어? 이 미친 새끼가! 아무나 옷만 걸치면 다 꼴려서 발정해대는 개새끼가 지금 누굴 건든 거냐고!!”
“어이없네 한윤결? 내가 뭘 어쨌다고? 네 꼬마 신부가 넘어지길래 살짝 안아준 건데, 그것도 못 해줘? 그리고 그래, 나 여자든 남자든 얼굴 꼴리게 생긴 애들 겁나게 좋아해. 그래서 네가 보태준 거 있냐? 여자를 대준 적이 있냐? 남자를 대준 적이 있냐? 언제부터 내 사생활에 이렇게 관심 있었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드냐?”
“뭐야? 이 미친 새끼가! 당장 나가. 당장 여기서 꺼져!”
그날 혜원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윤결의 폭발하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그리고 웬만한 조폭 못지않은 사나운 눈빛으로 서로를 물어뜯을 듯 노려보는 두 남자의 모습에 혜원은 점점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역시 이곳은 자신이 와서는 안 되는 곳이었단 생각에 혜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오늘 과연 자신이 이 사무실을 살아서 나갈 수 있을지…. 생전 처음 겪는 무서움과 서러움에 혜원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지금은 뭐 꺼져 줄 건데, 너도 자꾸 나 건들지 마라. 나 자극해서 좋을 거 없을 텐데?”
“뭐? 이게 끝까지!”
화를 참지 못한 윤결이 빈정거리는 정현의 멱살을 쥐어 잡자, 그제야 그들을 말려야겠다는 생각에 혜원이 다급히 윤결의 팔을 잡으며 애원했다.
“제, 제발. 그만해요. 네? 제발요.”
아픈 다리로 여기까지 걸어와 울먹이며 자신을 말리는 혜원의 모습에 윤결은 거칠게 정현의 멱살을 놓으며 소리쳤다.
“앞으로 혜윤이 주위에 얼씬도 하지 마. 눈도 마주치지 말고 입도 뻥끗하지 말라고!”
“그러니까 나 자꾸 자극하지 말라고. 오늘은 이만 간다. 귀여운 혜윤! 우린 나중에 또 보자. 저 윤결이 자식이 울리면 오빠한테 와도 돼.”
“저 개자식이 끝까지!”
윤결은 주먹을 불끈 쥐며 다시 그를 노려봤지만, 정현은 이미 사무실 밖으로 나가 버린 후였다. 혜원은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주르륵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강혜원. 일어나! 넌 뭘 잘했다고 울어!”
“나, 나도 무서웠단 말이에요! 흑흑…. 자고 일어났는데 형은 없고, 저 사람은 막 나 아는 것처럼 말하고…. 내가 뭘 어쨌다고 형이 자꾸 화내는데!!”
사실 혜원이 잘못한 건 없었다. 그가 자는 사이 서류를 결재받으러 잠시 자리를 비운 건 자신이었고, 저 망할 김정현이 하필이면 그때 찾아온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지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은 혜원이 무슨 죄가 있겠느냐. 하지만 조금 전 정현의 품에 안겨 있는 혜원의 모습을 보는 순간 윤결은 꼭지가 돌아버렸다. 누구의 손도 타선 안 되는 자신만의 혜원이었기에 그가 다른 남자와 한 공간에 같이 있는 것만 봐도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윤결은 어느덧 혜원의 일이라면 이성보단 감정이 먼저 발끈하는 자신의 생소한 모습에 조금 놀랐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화낼 일만도 아니었지만 윤결은 자신도 모르게 화부터 내고 있었다. 아마도 정현이 안고 있었던 녀석이 혜윤이 아니라 혜원이었기에 더 그랬을지도 몰랐다. 윤결은 미안한 마음에 엉엉 우는 혜원을 일으켜 세워 다시 소파에 앉혔다.
“울지 마 혜원아. 형이 미안해. 혼자 둔 것도, 무섭게 만든 것도 형이 다 미안해.”
“흑흑…. 다시는 나 혼자 두고 어디 가지 마요.”
혜원은 서러운 마음에 윤결을 와락 끌어안으며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켰다.
“미안해 혜원아.”
윤결은 자신을 꽉 안으며 벌벌 떠는 혜원의 등을 쓸어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에게 의지를 해주는 혜원이 고마웠다.
어느 정도 혜원이 진정이 되자 마침 점심시간이기도 해 윤결은 서둘러 일을 마무리하고 회사를 나섰다. 김정현 그 개또라이 같은 녀석이랑 같은 곳에 단 한시도 혜원을 두고 싶지 않았다.
“이사님, 퇴근하시게요?”
“네. 나머지 일들은 내일 처리하도록 하죠. 수고.”
혜원의 손을 꽉 잡으며 그를 부축해 주는 윤결의 모습에 사무실의 여직원들은 탄성을 쏟아내며 부러워했다. 자신들이 꿈에 그리던 완벽한 남편의 모습. 달달하다 못해 꿀이 떨어질 것 같은 둘의 모습에 그들은 그저 한없이 혜원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어쩜 저리 다정하고 완벽할까? 저런 남자라면 정략결혼이라도 정말 해보고 싶다.”
“정략결혼이 뭐니? 그냥 무작정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늘어져야지.”
“야 너희들은 아직도 그런 순진한 소리를 하고 있니? 겨우 그런 거 가지고 이사님 안주인 자리에 들어앉을 수 있겠어? 저런 남자한테는 하룻밤 불타게 몸을 바쳐야지만 겨우 이루어질까 말까 하는 거라고 이 한심한 것들아.”
“참나. 그렇게 잘 알면 네가 한번 해보지 그랬냐?”
“그, 그게 말이지 음. 아마도 다음 생에 내가 좀 예쁘게 태어나면 가능하지 않을까?”
같이 수다를 떨던 여직원들은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퍽이나 그러시겠다. 다음 생이 아니라 다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도 혜원처럼 귀엽고 사랑스럽게 태어나지 못할 그녀를 보며 모두들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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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아 우리 밥 먹고 들어갈까?”
윤결은 새침해 있는 혜원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은 마음에 그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물었다.
“나 별로 배 안 고픈데….”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혜원은 조금 전 가슴 철렁한 사건 이후로 식욕이 뚝 떨어져 버렸다. 밥이고 뭐고 빨리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집에 가도 먹을 거 없어. 이왕 같이 나온 거 밥 먹고, 장도 보고 들어가자.”
윤결은 집에 가고 싶다는 혜원을 살살 구슬려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이대로 집에 가 봤자 혜원은 분명 또 제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을 것이기에, 윤결은 조금 더 그와의 오붓한 데이트를 즐기고 싶었다.
“형. 나 이제 이 가발이랑 옷 좀 갈아입으면 안 돼? 아, 정말 불편해….”
“그래. 식당 도착하면 화장실 가서 갈아입자.”
어차피 밖이고 아는 사람을 만날 일도 없을 것이니, 윤결도 뭐 상관없겠다 싶었다. 사실 윤결도 슬슬 귀신같은 가발은 벗어도 될 것 같단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침 혜원의 머리 길이는 여자들도 자주 하는 숏커트 길이 정도는 되었다. 미용실에 가서 조금만 더 여성스럽게 다듬어서 자연스럽게 기르는 것도 나빠 보이지 않았다.
“앗싸! 고마워요. 형. 헤헷!”
“그냥 이번 기회에 가발은 아예 벗어 버리자. 미용실 가서 머리끝만 조금 다듬으면 앞으로 가발 따위는 안 써도 될 것 같은데? 어때?”
“저야 완전 땡큐죠!!”
오랜만에 제대로 신이 나 보이는 혜원의 밝은 모습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윤결도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이 녀석은 웃는 얼굴이 제일 잘 어울렸고, 웃을 때 더 빛이 났다.
둘은 요즘 젊은 학생들이 선호한다는 한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윤결이 주차를 하는 사이 혜원은 먼저 차에서 내려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고는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아침에 집에서 나왔을 때 입었던 옷으로 다시 갈아입고 치렁치렁한 가발도 벗어 던졌다. 머리가 가벼워지는 시원한 느낌과 함께 혜원은 재빨리 자신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제법 길어 있는 혜원의 머리는 윤결의 말대로 조금만 다듬으면 여성스러워 보일 정도의 길이였다. 가발을 벗어도 된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혜원은 대충 머리끝에 물을 적셔 뻗친 머리를 정돈한 뒤, 한결 개운해진 기분으로 화장실을 나섰다. 식당에 먼저 도착한 혜원은 아직 윤결이 도착하지 않은 듯해 식당 앞에 서서 그를 기다렸다.
마침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식당으로 걸어오던 윤결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모습의 혜원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분명 오전에 입고 나왔던 옷들을 다시 입었을 뿐인데,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난간에 기대앉아 다친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고 있는 혜원의 모습은 또다시 윤결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소년인 듯 소녀인 듯 미묘한 중성미를 풍기며 비스듬히 서 있는 혜원의 모습에 이번만큼은 식당이 아닌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올랐다.
하루빨리 저 조그마한 다람쥐 같은 녀석을 한입에 집어삼키고 싶은 야한 늑대의 본성을 억누른 채 기회만 엿보는 윤결. 오늘따라 그의 앞에 무방비한 모습으로 서 있는 혜원이 위험해 보였다.
“어? 형 왔어요? 빨리 들어가요. 나 슬슬 배고파졌어요.”
‘꿀꺽. 나도 네가 너무 먹고 싶다 혜원아.’
윤결은 애써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윤결은 스스럼없이 혜원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유유히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런 둘의 모습에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허둥대던 레스토랑 직원은 서둘러 그들에게 자리를 안내해 주며 얼굴을 붉혔다.
이때까지도 혜원은 직원이 왜 저렇게 긴장을 하고 얼굴이 벌게진 채 자신들을 쳐다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은 지금 혜윤이었고 윤결과 함께 식당을 찾은 건데 그게 그렇게 이상한가 하는 생각을 하던 중, 순간 혜원은 자신이 방금 변장을 때려치우고 옷을 갈아입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뿔싸!! 바보 멍청이 강혜원!! 정신머리를 어따 팔아먹은 거야!!’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혜원은 자신의 허리에 둘린 윤결의 팔을 세게 꼬집으며 그를 노려봤다.
“아얏! 너 뭐야 왜 꼬집어! 아니 눈은 또 왜 도끼눈인데!”
영문도 모르고 갑자기 공격을 당한 윤결이 꼬집힌 팔을 문지르며 얼굴을 잔뜩 구긴 채 혜원을 째려봤다. 정말이지 이 탁구공 같은 녀석은 시도 때도 없이 그를 놀라게 했고, 늘 어디로 튈지 몰라 긴장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윤결의 사나운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혜원이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앉으며 쏘아붙였다.
“앞으로 아무 데서나 나한테 손대지 마세요. 아, 정말. 내가 창피해서 못 살아!!”
“왜? 뭐 또? 내가 뭘!”
“나 지금 혜윤이 아니거든요?? 직원이 이상하게 보잖아요! 형이 내 허리에 손 올리고 들어와서! 아니 왜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을 만져대요!!”
“아….”
윤결은 뭐 그럴 수도 있지 그게 그렇게 난리 칠 일인가 싶은 생각에 혜원에게 뭐라고 쏘아대려던 찰라, 정말로 자신들을 안내했던 직원이 빨개진 얼굴로 자신들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시선에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하아…. 정말 짜증 제대로네. 이래서 우리나라의 동성애자에 대한 인식이 선진국을 따라가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외국에서는 남자끼리 팔짱을 끼든 손을 잡든 심지어 술집에서 키스해도 이런 눈치를 받은 적 없었는데 말이다. 윤결은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었고, 그럼에도 잔뜩 성이나 삐쳐있는 혜원의 얼굴이 귀여울 뿐이었다. 하긴 팔불출 윤결의 눈에 뭔들 귀엽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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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든히 점심을 먹고 데이트까지는 못하더라도 카페에서 맛있는 디저트까지 꽉꽉 챙겨 먹은 혜원은 빵빵하게 부른 배를 두드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이내 난장판이 된 욕실의 모습에 한숨이 절로 푹푹 새어 나왔다.
‘저걸 또 언제 다 치우지….’
혜원은 뒤따라 들어오는 윤결의 눈치를 살피며, 절뚝거리는 다리로 손빨래를 하던 옷들을 주섬주섬 주워 담기 시작했다. 순간 욕실로 따라 들어온 윤결이 재빨리 그에게서 빨래들을 걷어가며 말했다.
“야, 강혜원. 너 멀쩡한 다리마저 부러지고 싶냐? 됐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앉아 있어. 네가 손만 대면 사고를 쳐서 이젠 내가 너한테 뭐 시키는 것도 겁나니까.”
“칫. 형이 빨래하라고 해서 이렇게 된 거잖아요!”
“기가 막혀서. 나도 쓸 줄 아는 세탁기를 설마 네가 못 쓸 줄 내가 알았겠냐? 그리고 애초에 네가 내 차에 그런 더러운 짓만 하지 않았어도…!”
“아 진짜! 내가 토하고 싶어서 토했나? 이게 다 형네 집에 가서 못 먹는 고기 먹어서 이렇게 된 거잖아요!!”
“누가 먹으래? 그러니까 작작 먹으라고 했잖아! 준다고 그걸 다 받아먹냐 미련하게? 먹지도 못하는 걸? 너 바보야? 팔푼이야? 머리는 뒀다가 어디다 쓰게?”
“어른이 주는데 어떻게 안 먹어요!! 형이 알아서 해준다며! 그럼 형이 진작 말리지! 이씨, 나 안 해! 혜윤이 불러와! 당장 혜윤이 데려오라고!!”
자꾸 타박만 하는 윤결 때문에 결국 참고 있던 혜원이 폭발하고 말았다.
그래도 잘 보이고 싶었다.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시는 그의 부모님을 실망시켜 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 자신의 마음도 모르고 소리만 지르는 윤결이 너무도 밉고 야속해 혜원은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혜원의 눈물에 윤결은 당황했다. 이렇게까지 울리려고 한 건 아닌데…. 머쓱해진 윤결이 그를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강혜원. 하아…. 이리 와봐.”
“싫어요. 안 가요. 흑흑…. 형 미워요.”
그의 부름에도 혜원은 움직일 생각도 안 하고 눈물만 쏟아냈다. 모든 것이 다 서러웠다. 자신을 이런 상황으로 밀어 넣은 혜윤도 미웠고, 자신을 몰아붙이는 윤결도 미웠다. 지금 이 순간, 혜원은 늘 자신의 편을 들어주던 다정한 혜준과 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었다.
“미안. 소리 질러서 미안해.”
윤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훌쩍이는 혜원을 살며시 끌어안아 주며 말했다. 그러자 혜원은 서러움이 더 폭발해버렸는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는 더욱 서럽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나한테 자꾸 소리 지르지 말란 말이에요. 흐어엉….”
“알았어. 이제 소리 안 지를게. 미안해 혜원아. 울지 마. 응? 형이 잘못했어.”
윤결은 오랫동안 그를 품에 안고 달랬다. 마음이 여리디여린 혜원인 걸 알면서도 순간 화를 참지 못했다. 다친 다리로 욕실에 들어가 빨래를 꺼내는 모습에 혹시 또 다칠까 봐 걱정해서 한 소리였는데, 마음과는 다르게 자꾸만 그를 속상하게 만드는 것 같아, 윤결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느덧 울 만큼 울었는지 혜원이 울음을 그치자, 그제야 윤결은 물에 폭삭 젖은 빨래들을 걷어와 세탁기에 넣으며 말했다.
“혜원아. 넌 거기 그냥 앉아 있어. 오늘은 형이 할 거니까. 세탁기 사용법도 나중에 가르쳐줄게. 너 다리 다 나으면.”
“응.”
혜원은 얌전히 소파에 앉아 윤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듬직하고 넓은 어깨. 그는 뭘 해도 멋있게 보였다. 아니 어떻게 빨래를 하는 모습까지도 광고를 찍는 것처럼 완벽할까? 새삼 그와 결혼할 여자가 부러워졌다.
‘아니 아니지. 나 지금 무슨 생각 하는 거야. 그나저나 혜윤이는 알까? 윤결 형의 저런 모습을? 만약 봤다면 그렇게 무작정 도망가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바보 강혜윤. 윤결 형 진짜 괜찮은데.’
혜원은 아쉬운 마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소파에 배를 깔고 누웠다. 아쉬워한들 자신이 여자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혜원은 옆에 있던 쿠션을 끌어안고 누웠다.
열린 창문 사이로 바람이 솔솔 불어오니 하품이 났다. 어차피 할 일도 없고 몸도 피곤해진 혜원은 천천히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러길 5분도 안 돼, 잠꾸러기 혜원은 또다시 길고 긴 낮잠을 자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이 정도면 기면증이 있다고 해도 믿을 만큼, 혜원은 어디서든 잠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잤다.
빨래를 다 돌리고 건조기에 넣어 대충 마무리를 한 윤결이 한숨 돌리기 위해 거실로 나와 혜원을 찾았다. 그리고 그는 어느새 배를 뒤집어 깐 채 소파와 한 몸이 되어있는 혜원을 발견했다.
“와 진짜. 아무것도 하지 말랬다고 또 자냐? 완전 이건 무슨 겨울잠 자는 북극곰도 아니고 뭐 머리만 닿았다 하면 자? 혹시 이것도 이 녀석 버릇인 거야?”
윤결은 어느새 드르릉 코까지 골고 자는 혜원의 모습에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러면서도 불편할까 봐 그를 안아 침대로 옮겨주며 이불까지 꼼꼼히 덮어 주는 윤결. 그는 자신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혜원에게 빠져 있음을 인정했다. 윤결은 위험한 잠버릇을 가진 귀엽고 사랑스러운 혜원의 입술에 살며시 키스를 해주며 방을 나왔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너무도 먼 순수하기만 한 강혜원. 윤결 같은 위험한 늑대와 한집에 살면서도 늘 허점을 보이며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철없는 꼬마 녀석. 하지만 어쩌겠는가. 완벽히 잡아먹으려면 아직 좀 더 시간이 필요한 것을. 오늘도 윤결은 혼자 조용히 화장실로 향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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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과 윤결의 아슬아슬한 동거는 어느새 한 달을 훌쩍 넘겼다. 이젠 둘이 함께 있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 되어있었다. 이젠 둘 중 한 명이 집에 없으면 허전해할 정도로 어느덧 그들은 서로에게 익숙해져 있었다.
“혜원아, 일찍 올게. 저녁은 이따 같이 먹자. 너 어차피 혼자 먹는 거 싫어하잖아.”
“응. 알았어, 안 먹고 기다릴 거니까 맛있는 거 사 와.”
“뭐가 먹고 싶은데 우리 혜원이?”
“음. 연어 초밥!! 그 왜 탱글탱글하고 쫄깃한 형네 회사 앞에 맛집 있잖아, 거기서 사와 꼭! 난 거기 연어 초밥이 제일 맛있더라.”
“알았어. 집 잘 보고 있어. 다녀올게.”
어느새 윤결은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혜원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 습관이 되어있었고, 혜원 또한 그런 그의 손길을 받으며 그를 배웅하는 것이 익숙했다. 그렇게 둘은 진짜 신혼부부라도 된 것 같은 평범하면서도 달콤한 일상을 이어나갔다.
윤결이 출근을 하자 혜원은 책을 들고 집 근처 카페로 향했다. 혜윤은 결혼과 동시에 졸업을 한 학기 남겨 두고 자퇴를 선언했다.
대외적으로는 창피하게 결혼까지 하고 고등학교에 다니기 싫어 검정고시와 수능을 쳐서 대학에 들어가겠다고 했지만, 그녀의 숨은 뜻은 따로 있었다.
사실 이건 그녀가 미국으로 도망가고 난 뒤, 자신 대신 윤결과 신혼생활을 유지할 혜원을 위한 작은 선물이었다.
아무튼, 그녀의 이런 약아빠진 배려로 혜원은 그나마 학교는 안 가도 되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낮에는 주로 카페에서 공부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어차피 혜원 또한 공식적으로는 유학을 간 상태라 친구를 불러서 놀 수도 없었고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렇게 공부를 하거나 혼자 영화를 보거나 윤결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전부였다.
뭐 다행히 시험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기에 이 정도 답답함쯤은 참을 수 있었다.
“아. 날씨 정말 좋다. 공부만 하기엔 너무 아까운 날씨야.”
혜원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쭉 들이켜며 화창하리만큼 맑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뭔가 번뜩 생각난 듯 서둘러 가방을 챙겨 카페 밖으로 나갔다.
답답한 카페보다는 역시 탁 트인 공원에서 공부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혜원은 그가 자주 찾았던 분수대가 있는 공원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시원하게 폭포수처럼 내리치는 분수를 보며 혜원은 물속에 들어가고 싶은 충동까지 느꼈다. 주위를 둘러보니 많은 연인이 이미 분수대 근처에서 사진을 찍으며 알콩달콩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었고 혜원은 그들이 괜히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나도 사진이나 하나 찍어 볼까?’
혜원은 분수대 앞에 앉아 인공 폭포와 분수가 잘 보이도록 각도를 잡고 셀카를 찍기 시작했다. 혀도 내밀어 보고 눈도 찡그려 보며 그만의 귀여운 포즈를 취하며 신나게 사진을 찍어 댔다. 그리고는 그중 마음에 드는 사진 몇 장을 윤결에게 보내주며 문자를 보냈다.
[오늘 연어 초밥 안 사 오면 진~짜 미워할 거예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혜원이 마지막으로 한 장 더 찍으려는 찰나, 멀리서 공놀이를 하던 아이가 실수로 던진 공에 손이 맞으며 혜원은 그만 분수 속으로 휴대폰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으아아악! 내 휴대폰!”
깜짝 놀란 혜원이 울상이 되어 물에 빠진 휴대폰을 재빨리 건졌으나 이미 물을 흠뻑 먹은 휴대폰은 전원조차 제대로 켜지지 않았다.
“미안해요. 누나. 제가 그만 공을…. 정말 미안해요. 흐아앙!”
겁먹은 아이는 울음을 터트리며 사과를 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아이가 너무 서럽게 울자 마음이 약해진 혜원은 괜찮다며 그를 달랬다.
“괜찮아. 대신 다음부터는 조심해서 놀아야 해. 알았지?”
“네. 흑흑…. 누나. 정말 죄송해요.”
웃으며 괜찮다고 말해주는 혜원의 다정한 모습에 아이는 다시 한번 꾸벅 배꼽 인사를 하고는 공을 안고 뛰어갔다.
“이따가 A/S 받으러 가야겠네. 아주 먹통이네! 먹통이야. 그런데 왜 자꾸 나보고 누나래. 내 머리가 벌써 그렇게 길었나? 아 몰라, 몰라. 그나저나 휴대폰 어쩌지….”
혜원은 휴대폰도 고장 나고 더 이상 공부를 할 기분도 아닌 것 같아 그길로 곧장 집으로 향했다.
한없이 우울해졌지만 그나마 윤결이 저녁에 자신이 좋아하는 초밥을 사 온다고 했으니, 거기에 기대를 걸어 보는 수밖에….
** ㅈㅅ
한편 윤결은 골치 아픈 사고들을 처리하느라 얼굴이 펴질 새가 없었다.
“이건 아직 오더 확정이 된 것도 아닌데 왜 벌써부터 업체를 선정해서 계약을 진행한 겁니까? 이러다 오더 캔슬 되면 계약금 누가 책임집니까! 이렇게밖에 못하십니까?”
“죄송합니다. 이사님. 거의 70% 진행된 건이고 업체도 하도 빨리 계약 해달라 난리를 쳐서. 지금 계약하면 가격을 낮춰 준다고….”
“조르면 다 해줍니까? 깎아준다고요? 10원, 20원 깎아주는 게 그렇게 대수입니까? 90%도 아니고 70%인데 이걸 확정으로 보십니까 부장님은? 오더 캔슬 되면 대책은 마련해 두시고 결정하신 겁니까? 업체에서는 분명 자재 미리 구매했다고 계약금 내놓으라고 할 텐데, 그건 누가 감당할 겁니까? 그렇게 자신 있게 밀어붙이신 건이니 그럼 무조건 이 오더 성사시키세요. 아니면 경위서 가지고 들어오시든가…. 나가 보세요.”
“죄, 죄송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됐습니다. 나가 보세요.”
화가 풀리지 않은 윤결은 그가 두고 간 서류를 거칠게 구겨 버리며 혀를 찼다. 업체에서 뒷돈을 그렇게 받아먹었으니 어디 한번 끝까지 수습해 보시든가. 윤결은 그의 비리가 담긴 장부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슬슬 그를 정리해야 할 때가 되었다 생각했다.
아침 내내 회의에 결재에 바쁜 업무에 지쳐있던 윤결의 휴대폰으로 때마침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사진과 함께 전송된 문자를 보자마자 윤결은 박장대소를 하며 웃고 말았다. 이런 사진을 자신에게 보낼 만한 사람은 역시 강혜원, 그 녀석뿐이었다.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초밥을 안 사 오면 미워할 거라는 문자에 윤결의 얼굴이 환하게 꽃을 피웠다.
“하하하…. 정말 강혜원. 내가 너 때문에 미치겠다.”
온종일 짜증의 연속이었는데 혜원이 보낸 이 문자와 사진 한 장으로 윤결은 모든 피로가 싹 다 날아가 버린 것만 같았다.
“나도 벌써 보고 싶다 강혜원.”
윤결은 오랫동안 혜원이 보낸 사진을 바라봤다.
봐도 봐도 계속 보고 싶고 웃음이 나게 만드는 귀여운 혜원의 사진. 윤결은 피식 웃음을 짓더니 바로 그 사진을 자신의 휴대폰 배경으로 저장해 버렸다. 이로써 윤결은 공식적으로 혜원의 팔불출 남편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오늘은 꼭 일찍 퇴근을 해야지라는 생각에 윤결이 다시 펜을 잡는 순간, 회사 전체 메일로 회식 공지가 날아들었다. 그것도 자신이 주인공인 회식. 그동안 미루고 미루던 회식이 하필이면 오늘이었던 것이다.
“하아…. 정말 오늘 되는 일 없네. 초밥 사 가야 하는데….”
윤결의 얼굴이 한순간에 또 사납게 구겨지기 시작했다.
한 번도 회사 일에 불만을 느껴 본 적 없었고, 일찍 퇴근하는 걸 좋아했던 적도 없었다. 하지만 혜원과 함께 살게 된 후부터 윤결의 삶은 변해있었다. 그의 삶이 혜원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윤결은 혜원을 혼자 두기 싫어했고 그에게 맞춰 생활했다.
정말이지 이사임에도 퇴근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니! 이미 혜원 바라기로 전락해버린 윤결은 눈치 없이 도착한 회식 공지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윤결은 빠질 수 없는 회식 참석 요청에 잔뜩 짜증 난 얼굴로 혜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까 받은 사진을 보아하니 아직도 밖에서 놀고 있는 듯했다.
하는 수 없이 윤결은 회식이라는 말과 함께 초밥은 내일 꼭 사 간다며, 먼저 밥을 먹으라고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일찍 퇴근할 수 없는 아쉬움을 혜원이 보낸 사진으로 달래며 다시 업무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한편 이미 고장 난 휴대폰 때문에 이런 사실을 꿈에도 알 리 없는 혜원은 점심까지 거르고, 저녁에 먹을 맛있는 초밥만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와 텔레비전을 켰다.
샤워해서 나른하기도 했고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는 영화는 딱 졸기 좋은 내용이었다. 혜원은 가물거리는 눈을 꿈뻑이더니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그대로 소파에 벌러덩 누워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어느덧 그의 꿈속에선 맛있는 초밥들이 춤을 추고 있었고 행복한 미소와 함께 혜원의 입가엔 웃음꽃이 피어 가고 있었다.
“헤헤…. 초밥이다. 어디가 초밥아! 내 입으로 들어와야지. 음냐 음냐…. 맛있다. 어?? 거긴 안 돼! 낭떠러진데. 안 돼! 내 초밥!!”
다리 한쪽을 소파 위에 올린 채 드르렁드르렁 잠을 자던 혜원은 꿈속에서 초밥이 낭떠러지로 추락을 해버리자 기겁을 하며 잠에서 깼다.
이미 주위는 어두컴컴해졌고 티브이에서는 아까 봤던 영화가 아닌 새로운 영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신이 꽤 오랫동안 잠을 잤다는 사실에 혜원은 벌떡 몸을 일으켜 시계를 봤다. 시간은 이미 9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이상하다? 형이 분명 일찍 온다고 했는데. 내 초밥은 언제 오는 거야?!’
순간 배도 고프고 시무룩해진 혜원이 감감무소식인 윤결을 기다리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이렇게 늦을 거면 전화라도 한 통 주든가! 라는 생각에 휴대폰을 확인하려던 혜원은 그제야 자신의 휴대폰이 먹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맞다. 하아…. 내일은 이놈부터 고치러 가야겠다. 아무래도 오늘 윤결 형 늦나 보다. 나 배고픈데. 나가서 뭐라도 사 와야겠다.”
윤결이 늦는 것엔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에 혜원은 종일 굶어 홀쭉한 배를 살살 문지르며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편의점 앞에는 껄렁껄렁해 보이는 학생들과 반쯤 술에 취한 듯한 남자가 들어가는 입구를 장악하고 있었다.
남자와 잠깐 눈이 마주친 혜원은 흠칫 놀라 서둘러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윤결 없이 밤에 혼자 나오는 건 엄청나게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흐음! 뭘 먹지?”
다행히 편의점에는 혜원이 좋아하는 군것질거리들이 가득했다. 물론 초밥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훌륭한 저녁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저것 간편히 빨리 먹을 수 있는 것들로 바리바리 고른 혜원은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철저한 관리주의자 윤결이 절대 혜원에게 먹지 못하게 했던 음식 중 하나가 바로 편의점 음식이었다. 균형 있게 영양가 있는 음식들을 먹어야 키가 큰다나 어쩐다나? 이미 다 커버린 키이거늘.
늘 귀가 따갑도록 잔소리를 해대는 윤결 때문에 혜원은 이렇게 그가 없을 때만 몰래 편의점을 이용하곤 했다. 물론 나중에 들키면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하겠지만, 그건 뭐 나중의 일이고! 그리고 이번에 먼저 약속을 어긴 건 윤결이니까 혜원도 나름 변명거리가 생겼다.
사실 이렇게 윤결이 없을 때 먹는 편의점 음식은 혜원의 소심한 복수이기도 했다. 결제 내역이 모두 윤결에게 보내지기 때문에 그가 모를 수는 없었다. 혜원은 혼자 또 씩씩거릴 윤결의 얼굴이 상상된다는 듯 혀를 날름 내밀며 카드를 꺼냈다.
순간 그의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맥주 두 병을 떡 하니 계산대 위에 올리며 같이 계산하라는 듯 혜원을 쳐다봤다. 아까 입구에서 마주친 기분 나쁜 남자였다.
“뭐, 뭐예요?”
“계산하라고. 같이.”
“제가 왜요? 아저씨 저 알아요?”
혜원은 다짜고짜 자신에게 계산하라는 남자의 어이없는 요구에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
“거, 한눈에 봐도 부티나 보이는 그 프리미엄 카드로 결제하기엔 너무 자존심 상하는 것들만 고르길래. 뭐 이것까지 계산한다고 해도 티도 안 날 금액인데, 그냥 좋게 말할 때 같이 계산하지 꼬마?”
“뭐, 뭐라고요? 꼬마?”
순간 편의점 점원은 경찰을 불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불안한 눈빛으로 혜원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 손님. 저기 계산은. 어, 어떻게….”
“따로.”
“같이.”
동시에 말에 내뱉은 남자가 마치 한 대 칠 것같이 매섭게 혜원을 노려보자, 혜원은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겠느냐란 생각에 그냥 같이 계산한다고 말하고는 카드를 내밀었다.
남자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맥주 두 병을 가지고 먼저 편의점을 나섰다. 혜원은 황당한 얼굴로 남자의 뒤통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아 진짜.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하아…. 그러니까요. 세상엔 별 미친놈이 다 있다니깐요. 그저 정상인이 참을 수밖에요. 괜찮으세요 손님?”
편의점 점원은 미안해하며 짧은 한숨과 함께 혜원을 위로했다.
“괜찮아요. 그쪽도 고생이네요.”
“저야 뭐. 일이니까요.”
“그럼 수고하세요.”
계산을 마친 혜원은 점원을 향해 멋쩍게 웃어주며 편의점을 나왔다.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던 혜원은 왠지 자꾸 뒤에서 자신을 쫓아오는 듯한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슬슬 겁이 나기 시작한 혜원은 발걸음을 재촉하며 집으로 향했다. 힐끔힐끔 뒤를 돌아봤으나 딱히 누가 따라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내가 예민한 건가?’
다행히 무사히 아파트 입구에 도착한 혜원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려는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혜원이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길래 곱게 계산했으면 되잖아. 어디서 건방지게 눈을 치켜뜨고 지랄이야. 어린놈의 자식이 이딴 어울리지도 않는 카드나 긁고 다니면서. 오늘 아저씨가 이런 카드는 어떻게 쓰는 건지 보여주마. 고맙다, 잘 쓸게.”
편의점에서 마주쳤던 남자는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 혜원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그의 카드를 뺏어 들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
“이사님! 결혼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와이프분이 아직 너무 어리고 예뻐서 혼자 집에 두기 불안하시겠어요.”
“하하…. 그렇죠. 예뻐 죽겠네요. 신혼이라 그런지 지금도 빨리 집에 가고 싶은데….”
“아, 이사님! 그건 안 됩니다! 오늘은 진짜 안 돼요!”
직원들은 혹시라도 그가 먼저 일어설까 봐 입구를 봉쇄하며 소리쳤다.
이게 얼마 만의 회식인데. 절대 안 되지! 여직원들 또한 윤결이 합석한 흔치 않은 회식으로 기분이 들떠 있었기에 적극적으로 그를 말리며 붙잡았다. 하지만 윤결은 낮부터 연락이 닿지 않는 혜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지금쯤은 당연히 집에 있을 시간인데 받지도 또 걸려오지도 않는 혜원의 전화. 초밥도 안 사 오고 회식까지 한다는 말에 아무래도 혜원이 단단히 삐친 것 같단 생각에 윤결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윤결은 어떻게 그의 기분을 풀어줘야 할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순간 죽은 듯이 조용하기만 하던 윤결의 휴대폰으로 한 통의 문자가 도착했다. 드디어 혜원의 화가 풀어졌나? 라는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문자를 확인한 윤결의 얼굴이 굳어졌다.
“편의점?”
이 녀석이 작정하고 또 편의점 음식을 샀다는 생각에 윤결은 부글부글 속이 타들어 갔다. 아니 식당도 있고 정 안되면 배달이라도 시켜 먹든가! 보란 듯이 편의점을 이용해주시는 청개구리 혜원 때문에 윤결은 한시라도 빨리 이 빌어먹을 회식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만 싶었다.
그렇게 집에 가기 위해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일어날 준비를 하는 윤결의 휴대폰으로 또 하나의 문자가 도착했다.
그러자 아까와는 차원이 다르게 윤결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까지 화가 난 윤결의 모습을 처음 본 직원들은 모두들 깜짝 놀라 그를 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윤결은 알아서 먹고 계산하라며 직원들에게 자신의 카드를 넘겨주고는 서둘러 차에 올랐다. 그는 지체 없이 그대로 차를 몰고 문자에 찍힌 곳으로 향했다.
[XXX 단란주점]
대체 강혜원이 이 사고뭉치 꼬맹이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건지! 뜬금없이 단란주점에서 긁힌 300만 원에 윤결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하지만 그러길 얼마 안 돼, 이번엔 다른 곳에서 긁힌 문자가 또 하나 도착했다.
[XXX 러브호텔]
“이런 미친! 야, 강혜원 너 지금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이미 윤결은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그는 재빨리 차를 돌려 문자가 온 호텔로 향했다.
아무리 자신이 약속을 어겼어도 그렇지, 윤결은 아무리 막 나가도 이런 막장이 없다며 이번만큼은 절대 조용히 넘어가지 않겠다 단단히 마음먹었다.
호텔에 도착한 윤결은 도난카드 사용이라는 이유로 직원을 협박해 문자가 찍힌 시간에 결제한 사람이 몇 호인지 알아내 곧장 방으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그곳엔 예상 밖의 두 남녀가 엉겨 붙은 채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상하다. 뭐지? 설마 혜원이 진짜 카드를 잃어버린 건가?’
윤결은 당황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순간 시뻘게진 얼굴로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은 남자가 쏜살같이 윤결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미 술에 취해 제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한 남자는 윤결의 손에 가볍게 제압됐다.
“이 미친 새끼가! 네가 왜 이 카드를 가지고 있는 건데!!”
“너, 넌 뭐야? 이, 이거 놔!!”
“이 카드 어디서 났어!”
윤결이 그의 팔목을 거칠게 꺾어 바닥에 내리꽂으며 물었다.
“그, 그. 어떤 학생한테서. 읔…. 바, 받은 거야.”
바닥에 곤두박질 처진 남자가 꺾인 팔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받아? 이 개자식이! 혜원이 어딨어!! 너 혜원이 어떻게 한 거야!”
잃어버린 걸 주운 것도 아니고, 받았다는 말에 더 화가 치민 윤결이 그를 일으켜 벽으로 거칠게 내팽개치며 소리쳤다.
“모, 몰라. 하읏…. 주, 죽었나? 훗… 씨발…. 그깟 카드 가지고 같잖게 설쳐 대기에 손 좀 봐 줬다. 왜? 어쩔 건데!! 병으로 처맞았으니 죽었을지도!”
“뭐, 뭐라고? 지금 누굴….”
윤결은 남자의 목을 조였던 손을 힘없이 풀며 중얼거렸다.
병으로 내리쳤다는 말에 눈앞이 하얘지고 손이 덜덜 떨렸다. 윤결은 핏발선 사나운 눈빛으로 남자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순간 위험을 감지한 남자가 외마디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윤결은 그대로 남자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하기 시작했다.
방어할 새도 없이 갑자기 공격을 당한 남자는 얼마 안 가 기절한 듯 의식이 없이 축 늘어져 버렸다. 윤결은 그를 바닥에 던져 버린 채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윤결은 제발 혜원이 무사해 주길, 제발 그에게 아무 일 없기를 빌고 또 빌었다.
전속력으로 밟아 아파트에 도착한 윤결은 입구부터 적나라하게 남아 있는 핏자국에 발걸음을 멈췄다. 아니어야만 했다. 이 끔찍한 핏자국은 절대 혜원의 것이 아니어야만 했다.
**
그 시각 공격을 받고 쓰러진 혜원은 동네 주민의 신고로 응급실로 옮겨졌다. 하지만 주머니에 달랑 카드 한 장 들고 나갔던 혜원이라 그를 입증할 그 무엇도 찾을 수 없어 신원 조회조차 되지 않고 있었다.
“보호자가 빨리 와야 할 텐데….”
“경찰이랑 구급요원이 아파트 주민을 상대로 확인해 본다고 했으니 곧 오겠죠.”
의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찢어진 혜원의 머리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정밀 검사를 하려면 피라도 멈추게 해야 했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아파트 입구에 주저앉아 있는 윤결을 향해 경비원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단번에 윤결을 알아본 경비원은 잔뜩 굳은 얼굴로 바닥의 피만 멍하니 응시하는 윤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며 혜원이 실려 간 병원을 알려 주었다. 마음이 급해진 윤결은 그길로 병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한 병원 응급실, 그는 어느새 치료를 마치고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잠들어 있는 혜원을 발견했다.
붕대 사이로 비치는 붉은 핏자국과 소독약 자국. 도저히 아침에 자신에게 잘 다녀오라 인사를 했던 녀석의 모습이 아니었다. 너무도 창백해 보이는 혜원의 모습에 윤결은 아까 그 자식을 죽여버리지 않은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혜원아. 눈 좀 떠봐.”
윤결은 떨리는 손으로 혜원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을 잡으며 그를 불렀다. 보호자가 왔다는 말에 윤결의 곁으로 담당 의사가 다가왔다. 그는 몇 가지 질문을 하고는 정밀 검사를 위해 혜원을 치료실로 옮겼다.
검사 결과 다행히 머리가 찢어진 것 외에 큰 이상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윤결은 더 많은 검사를 요청했고 더 정밀한 검사를 원했다. 만에 하나 혜원이 잘못된다면 절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자신이 좀 더 잘 보살폈어야 했었다. 카드만 손에 쥐여주면 다해준 것마냥 그를 너무 무방비하게 방치했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를 살뜰히 보살피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윤결은 눈을 질끈 감으며 입술을 짓씹었다.
윤결이 안타까운 얼굴로 혜원의 뺨을 쓰다듬는 사이 어느덧 눈꺼풀을 꼼지락거리며 혜원이 잠에서 깨어났다.
“아야야…. 아파… 윽….”
“혜원아!! 강혜원! 괜찮아? 어디 아픈 데 없어?”
“어? 형! 아얏. 아… 머리야….”
윤결의 얼굴을 마주한 기쁨도 잠시 혜원은 날카롭게 머리를 찌르는 듯한 고통에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다친 머리를 더듬기 시작했다.
생생하게 잡혀 오는 까슬까슬한 붕대의 촉감에 혜원은 다시 스르르 눈을 뜨며 기억을 더듬어 올라갔다.
누군가 자신의 뒤를 쫓아왔고 자신이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강하게 무언가로 머리를 맞았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기억난 혜원은 갑자기 자신의 주머니를 뒤져 카드를 찾기 시작했다.
“어? 어디 갔지? 없어! 어, 어떡해!!”
“혜원아, 뭘 찾는데? 응? 뭐가 없는데?”
“형이 준 카드요. 잃어버렸나 봐요. 어떡해요? 미안해. 정말 미안해요. 그거 잃어버리면 안 되는데….”
윤결은 황당하고 어이없는 혜원의 말에 무섭게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아니 지금 그딴 카드 쪼가리가 중요하냔 말이다! 자신의 머리가 터진 건 알고 있는지, 기절하고 얼마 만에 깨어난 건진 알고 있는지! 겨우 카드 따위를 잃어버려 시무룩해 있는 혜원을 보니 이 답답한 녀석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교육해야 할지 앞날이 깜깜해지기 시작했다.
“너 지금 그깟 카드가 중요해? 네가 다쳤다고! 네가 머리를 다쳤다고 강혜원! 내가 정말 얼마나 놀랐는데!! 전화는 대체 왜 안 받고!”
“아, 아까 낮에 휴대폰이 물에 빠져서 고, 고장이 나는 바람에….”
“하아…. 그럼 바로 고치든가 사든가 했어야지! 연락이 안 돼서 내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
“제 걱정하셨어요?”
혜원은 대뜸 윤결이 자신을 걱정했다는 말에 이유 모를 두근거림으로 두 뺨이 붉게 물들어갔다.
“하아…. 됐다. 내가 진짜 너 같은 맹꽁이를 데리고 뭘 하겠다는 건지. 깨어났으면 집에 가자. 다행히 머리 찢어진 거 말고는 큰 이상 없대.”
“헤헤…. 제가 또 한 머리 하죠!!”
혜원이 실실 웃으며 침대에서 내려오다 갑자기 몸을 휘청거리자 윤결이 재빨리 그의 팔을 잡아 부축하며 물었다.
“왜 그래! 어디가 또 안 좋아?”
“그, 그게 갑자기 좀 어지러워서.”
순간 혜원의 배 속에서는 지금 이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민망한 소리를 내보냈다. 그리고 동시에 혜원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왜 하필 지금!!’
혜원은 부끄러움에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머리가 터진 것보다 지금은 배 속의 배고픔이 몇 배는 더 크고 절실하게 다가왔다.
“너 혹시 저녁 안 먹었어?”
-끄덕끄덕
“그럼 점심은 먹었어?”
-도리도리
혜원은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고 겨우 고개만 까딱이며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너 정말! 카드는 왜 들고 다니냐? 어? 제때제때 챙겨 먹으랬지! 너 바보야?”
“아, 아니 형이 초밥 사 온다고 해서 그거 사 오면 먹으려고 기다렸단 말이에요. 형이 이렇게 늦게 올지 누가 알았나!!”
배는 고프고 머리는 아프고. 갑자기 이 시간까지 초밥은커녕 밥 한 끼 못 먹은 서러움이 파도처럼 솟구쳐오르자 혜원이 눈물을 글썽이며 소리쳤다.
한마디만 더 하면 우두둑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 억울함에 눈을 부릅뜨고 대드는 혜원을 보며 윤결은 이번 일 또한 명백히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인정했다.
망할 놈의 회식. 앞으로 자신 앞에서 다시는 회식의 ‘회’ 자도 꺼내지 못하게 하겠다고 단단히 결심한 윤결은 울먹이는 혜원을 자신의 품으로 데려와 다정히 안아주며 말했다.
“미안해.”
“흑흑…. 맨날 형은 소리만 질러.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니까. 우리 혜원이가 뭘 잘못했다고. 형이 나빴어. 미안해. 너무 걱정돼서 그랬어. 네가 너무 걱정돼서.”
윤결은 어느덧 어깨까지 들썩이며 울기 시작하는 혜원의 등을 천천히 토닥이며 그를 달랬다.
그의 머리에서 풍기는 어울리지 않는 소독약 냄새와 칭칭 감겨 있는 붕대, 피로 울긋불긋 얼룩져있는 그의 상의와 머리카락들.
정말이지 윤결은 다시는 혜원에게 이런 끔찍한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품에서 잠시도 떨어트리고 싶지 않은, 너무도 소중하고 사랑하는 녀석. 윤결은 조심스럽게 그를 부축해 병원을 나서며 말했다.
“빨리 밥 먹으러 가자. 우리 혜원이 배고프겠네.”
“으응! 나 진짜 진짜 배고파요. 빨리 집에 가요!”
윤결은 문 닫기 일보 직전인 초밥집에 전화를 걸어 혜원이 좋아하는 초밥들을 주문하고 포장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원하는 만큼 지불할 테니 꼭 기다려 달라는 부탁과 함께 말이다.
간신히 초밥을 픽업해 집으로 돌아온 윤결은 아무래도 먹기 전 혜원을 씻겨야 할 것 같아 그를 욕실로 집어넣고 물을 틀었다.
“혀, 형. 저 혼자 씻어도 되는데.”
“아니야. 너 하루 종일 굶었고 머리도 다쳤는데, 혼자 씻다가 또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떡해. 머리에 물도 들어가면 안 되고. 어서 벗어. 형이 씻겨줄게.”
“네에. 그럼 부탁 좀 할게요!”
혜원은 자신을 씻겨준다는 윤결의 말에 스스럼없이 옷을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같은 남자고 형이랑 목욕탕도 자주 갔던 혜원이라 어색하진 않았다. 사실 몸도 피곤한데 씻겨준다는 윤결의 말이 너무도 달콤하게 들렸다. 하지만 윤결은 곧 자신이 내뱉은 말을 후회하고 말았다. 하얗고 가느다란 혜원의 몸을 보는 순간 또다시 그의 아랫도리가 마음대로 꿈틀꿈틀 몸을 부풀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 나 진짜. 가지가지 한다 한윤결!! 지금 혜원이 벗은 몸만 보고 발정한 거야? 너 그렇게 굶주렸어? 미친 자식. 정신 차려!!’
윤결은 혜원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서둘러 따뜻한 물로 그의 몸을 씻긴 뒤, 조심스럽게 머리에 물도 묻혀가며 핏자국들을 씻어 나갔다.
“혜, 혜원아 잠깐 뒤 좀 돌아봐.”
“응!”
“읔!”
순간 휙 몸을 돌리다 그만 팔로 윤결의 중심을 건드리고 만 혜원. 윤결은 심장이 얼어붙을 것처럼 섬뜩해지더니 결국 작게 신음을 내뱉고야 말았다.
‘미치겠네. 강혜원. 하필 거긴 왜 건드려서는! 아니 그런데 이 자식 엉덩이는 또 왜 이렇게 작고 예쁜 거야!’
이미 뒤를 돌았기에 윤결이 알아채지는 못했지만, 윤결의 그곳을 본의 아니게 건드려 버린 혜원도 식겁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어, 어떻게 저렇게 볼록 튀어나올 수가 있지? 대체 이 형은 고추도 왜 이렇게 어, 엄청나게 큰 거야? 앞으로 다시는 형이랑 같이 목욕 안 할래. 쪽팔려!! 엄청 비교되잖아!!’
서로 다른 의미로 얼굴을 붉히며 머릿속이 복잡해진 윤결과 혜원. 그리고 그들은 말 못 할 어색함 속에 서둘러 샤워를 끝내기 위해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샤워를 끝낸 혜원을 수건으로 돌돌 싸매고 밖으로 먼저 내보낸 윤결은 자신도 샤워하고 나갈 것이니 먼저 내려가서 초밥을 먹으라고 말한 뒤 화장실 문을 걸어 잠갔다.
잠시 후 혜원이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자 윤결은 재빨리 옷을 벗고 샤워기에 물을 틀고는 자신의 성기를 쥐어 잡고 위아래로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하앗…. 강혜원. 너 진짜. 하읏…. 예뻐 죽겠어. 그렇게 야한 몸으로 벗으라고 한다고 아무 데서나 훌러덩 옷을 벗어대고 말이야. 그 작고 여물지 않은 엉덩이는 내가 처음이어야 할 거야. 하읏! 아무 데서나 엉덩이 흔들고 다니면 정말 나 미쳐서 날뛸지도 모르니까. 얌전히 있다가 남편 앞에서만 흔드는 거다, 강혜원.”
점점 더 거칠어지는 호흡과 빨라진 손놀림 그리고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그의 성기는 마침내 탁하고 끈적한 정액을 욕조 안에 흥건히 뿌려 대며 사정을 했다.
그럼에도 윤결은 성에 차지 않는 듯 혜원의 벗은 몸을 상상했다. 미치도록 아름다운 몸이었다. 하루빨리 그를 안고 싶어 안달이 난 윤결은 말도 안 되는 이 각방 생활부터 청산해야겠다 생각했다.
순진한 혜원을 꼬드겨 자신의 침실로 기어들어 오게 할 만한 계기. 지금 윤결의 머릿속은 그를 안고 자고 말겠다는 집념으로 가득했다.
힘겹게 홀로 샤워를 마친 윤결이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거실로 나왔다. 윤결은 식탁에 앉아 입 안 가득 초밥을 넣은 채 맛있게 늦은 저녁을 먹고 있는 혜원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배가 정말 많이 고팠구나.’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어긴 약속 때문에 이렇게 늦은 시간에 밥을 먹고 있으면서도 행복해하는 귀여운 혜원의 모습에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미안하고도 안쓰러운 마음에 윤결이 천천히 혜원의 뒤로 다가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던 순간, 혜원이 흠칫 놀란 듯 그의 손길에 격하게 반응을 하며 어깨를 떨었다.
갑작스러운 윤결의 손길에 혜원은 몸을 파르르 떨며 결국 집었던 초밥까지 떨어뜨리며 두려움이 서려 있는 눈빛으로 윤결을 올려다봤다. 예상치 못한 혜원의 반응에 놀라기는 윤결도 마찬가지였다. 윤결은 천천히 허리를 숙여 떨어진 초밥을 주워 식탁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혜원아, 너 왜 그래? 왜 갑자기 그렇게 겁에 질린 얼굴로 몸을 떨고 그래, 응? 어디가 또 안 좋아?”
혜원은 그제야 자신의 곁에 다가온 사람이 윤결임을 알고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놀랬던 마음을 진정시키며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윤결의 손을 살며시 잡아 오며 떨리는 목소리로 부탁을 했다.
“혀, 형. 정말 미안한데요, 오늘 저 잘 때까지만 제 옆에 있어 주시면 안 돼요?”
“뭐, 뭐라고?”
“그, 그게 자꾸 아까 그 일이 떠올라서 혼자 자기가 좀 무, 무서워서….”
정말로 아직 무서움이 가시지 않았는지 윤결의 손을 잡은 혜원의 작은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무리 괜찮은 척해도 조금 전 일어난 무차별 공격은 그에게 심각한 트라우마로 남아 버린 듯했다.
윤결은 안 된다고 하면 금방 눈물이라도 쏟아낼 것 같은 혜원의 겁먹은 얼굴을 자신의 가슴에 살며시 끌어당겨 그를 품에 안아주며 말했다.
“그래. 형이 오늘 재워 줄 테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말고 푹 자 혜원아. 우리 혜원이 무섭게 하는 일 이제 없을 거야. 앞으로도 항상 형이 이렇게 곁에서 지켜줄 거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혜원아.”
그제야 잔뜩 긴장했던 몸이 풀렸는지 혜원은 천천히 손을 들어 윤결의 허리에 두르며 더욱 그의 품 안으로 바짝 파고들었다. 정말이지 아까 겪었던 일은 다시 떠올리기도 싫을 만큼 무서웠다. 그리고 오늘만큼은 자신의 곁에 윤결이 있음에 감사하며 오래오래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눈을 감았다.
**
초밥을 먹고 윤결과 소파에 앉아 영화를 보던 혜원은 어느덧 고개가 풀썩 앞으로 쏠리더니 스르르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잠이 들었음에도 윤결의 옷깃만은 꽉 붙들고 있는 혜원의 모습에 윤결은 웃음이 났다.
티브이를 끈 뒤 윤결은 조심스럽게 혜원을 안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붕대가 감겨 있는 머리가 아프지 않게 살며시 배개 위에 놓아주며 그를 침대에 눕혔다. 이렇게 빨리 혜원과 같은 침대에서 자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잠든 혜원을 바라보는 윤결의 눈엔 사랑스러움이 가득했다.
많이 고단했는지 세상모르게 잠에 빠진 혜원의 얼굴을 찬찬히 쓰다듬어 주던 윤결이 그의 이마에 키스를 해주며 속삭였다.
“오늘이 우리 첫날밤인데, 이렇게 혼자 모른 척 잠만 자면 반칙이다, 강혜원.”
피곤한 하루였던 건 윤결에게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도 슬슬 졸음이 몰려왔다. 윤결은 천천히 침대 위로 올라가 혜원의 옆자리에 몸을 뉘었다. 무언가 따뜻한 감촉을 느꼈는지, 혜원이 몸을 돌려 윤결의 가슴으로 바짝 파고들었다.
윤결은 피식 웃으며 혜원의 등을 감싸 안았다. 너무도 따뜻한 혜원의 온기에 윤결 또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윤결은 그대로 혜원의 목덜미에 코를 문지르며 그의 체향을 맘껏 들이켜기 시작했다.
어느덧 두근대던 가슴이 진정되며 서서히 잠에 빠져든 윤결. 베이비파우더 향처럼 귀여운 혜원의 향기는 어느덧 윤결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 될 달콤한 수면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윤결은 잠결에 갑갑하게 자신의 배 위를 누군가 누르는 듯한 느낌에 실눈을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정신이 흐릿한 가운데, 상의를 벗어 던진 채 눈부신 나신으로 자신의 허리 위에 올라앉아 손가락을 빨고 있는 혜원을 발견한 윤결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이게 뭐지?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 거지? 혜, 혜원이가 왜?’
하지만 윤결이 이 위험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혜원의 엉덩이골에 비벼지던 그의 성기가 점점 발기하며 아랫배가 아프게 뭉치는 뻐근함이 밀려왔다. 동시에 야릇한 시선으로 윤결을 내려다보던 혜원이 천천히 몸을 겹쳐 내려와 그의 귓불을 잘근잘근 씹어대며 속삭이기 시작했다.
“하아…. 형. 나 좀 안아줘. 흐읏! 몸이 너무 뜨거워. 타버릴 것 같아. 첫날밤이라며…. 나 이렇게 혼자 둬도 되는 거야? 하읏!”
뜨거운 혜원의 입김이 그대로 윤결의 귓가를 간지럽히며 그의 몸을 예민하게 자극해왔다. 참지 못한 윤결은 치명적인 혜원의 유혹에 자신의 두 다리를 세워 혜원의 허리를 휘어 감으며 그를 결박했다.
윤결은 얌전히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혜원의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타액으로 이미 번들거리기 시작한 혜원의 탐스러운 입술. 빨리 키스를 해달라 조르는 것처럼 입을 벌리며 유혹하는 혜원의 모습에 윤결이 그대로 그의 입술을 파고 들어갔다.
“하읏! 흐응….”
-추르릅. 추르릅.
서로를 잡아먹을 듯 얽혀드는 두 혀의 강렬한 움직임에 혜원의 숨이 밀리기 시작했다.
“하앗… 흐응… 혀엉… 입술 아파… 하앗….”
“집중해 강혜원. 네가 먼저 시작한 거야.”
윤결은 봐주지 않겠다는 듯 더욱 집요하게 혜원의 입 안을 헤집으며 도망치는 그의 혀를 휘감았다. 윤결의 격정적인 키스가 힘겨운 듯 혜원이 울먹이며 도망치려 하자, 윤결은 그의 작은 뒤통수를 바짝 끌어당기며 더욱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으읍!”
윤결은 깊고 좁은, 마치 미지의 동굴과도 같은 혜원의 목구멍 깊숙이 혀를 집어넣으며 그를 괴롭혔다. 아직 이런 강렬한 키스가 처음인 혜원은 헛구역질이 올라올 것만 같은 격한 키스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버거워했다.
혜원은 타액과 흘러내린 눈물로 범벅이 된 입술을 조심스럽게 떼어내 윤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하아…. 형, 키스만으로 나를 죽여 버릴 셈이야? 하읏…. 숨 막혀.”
“그럼 우리 혜원이는 다른 곳으로 죽여주길 원하는 건가?”
순간 윤결의 눈빛이 뜨겁게 변하며 그의 손이 혜원의 바지 속으로 향했다. 너무도 쉽게 벗겨진 바지 그리고 그의 손은 거침없이 혜원의 구멍을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처음 느껴 보는 강렬한 자극에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바짝 긴장한 혜원.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혜원이 윤결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동시에 누구에게도 허락한 적 없는 자신의 엉덩이 사이에 윤결의 손길이 닿자 혜원은 저도 모르게 엉덩이에 힘을 꽉 주며 옅은 신음을 내뱉었다.
“하읏! 혀, 형! 흐응!”
어느덧 허리까지 들썩이며 신음을 내지르는 혜원의 모습에 윤결은 점점 더 뜨겁게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엉덩이에 힘을 줄 때마다 벌렁이는 구멍은 어서 들어와 달라는 듯 윤결을 유혹하고 있었다. 처음인 혜원을 배려해 가운뎃손가락을 천천히 구멍 안으로 밀어 넣은 윤결은 그의 좁고 따뜻한 구멍의 감촉에 탄성을 내질렀다.
“하읏! 강혜원. 넌 진짜 상상했던 것 이상이야!”
윤결은 점점 더 몸짓을 키워가며 벌떡이는 제 성기의 모습에 마음이 급해졌다. 동시에 혜원의 안을 휘젓던 손놀림이 빨라질수록 혜원의 신음도 애절해졌다.
“흐읏…하앙…혀엉… 천천히… 응? 제발… 하앗!”
뻑뻑한 혜원의 구멍은 윤결의 손가락이 들어가고 나올 때마다 여린 내벽이 같이 딸려 나왔다.
아파하는 혜원의 모습에 안 되겠는지 윤결은 자세를 바꿔 혜원을 침대에 눕혀버렸다. 아무런 반항도 저항도 없이 침대 위에 얌전히 눕혀진 혜원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윤결. 그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혜원의 두 다리를 양쪽으로 힘껏 벌렸다.
“흐읏! 형…. 부, 부끄러워. 하지 마. 응? 이 자세 싫어. 윤결이 형….”
혜원은 빨개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며 힘없이 벌어진 다리를 파르르 떨었다. 윤결은 그런 혜원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의 구멍에 혀를 집어넣으며 회음부를 핥아대기 시작했다.
“아흣!! 흐응!”
갑작스러운 혀의 침입에 혜원은 구멍을 있는 대로 조이며 허리까지 튕겨댔다. 매혹적인 혜원의 모습에 윤결은 그가 움직이지 못하게 골반을 단단히 쥐어 잡고는, 더욱 깊숙이 자신의 혀를 밀어 넣으며 그의 구멍을 유린했다.
“아앗! 하앙…. 흐응….”
앙앙거리며 애달프게 신음을 흘리는 혜원의 목소리에 참을 수 없는 성욕을 느낀 윤결은 천천히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윤결은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자신의 성기를 한 손으로 쥐고는 다른 한 손으로는 혜원의 허벅지를 단단히 잡아 고정시켰다. 혜원은 무언가 딱딱하고도 거대한 것이 자신의 구멍을 지분거리자 깜짝 놀라며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뭐, 뭐야? 흐읏! 혀, 형 지금 뭐 하는 거야? 기분이 이상해. 무, 무서워!!”
“뭐 하긴 우리 혜원이 우유 먹여줄 준비하지. 보이지? 지금 형 안에 우유가 꽉 차서 터질 것 같거든? 우리 혜원이 배고프잖아. 그렇지? 먹고 싶어 죽겠지, 우리 아기?”
혜원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정상인의 성기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 흡사 도깨비방망이처럼 보이는 거대한 윤결의 성기를 두려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호기심 때문인지 뜨겁게 타오른 쾌감 때문인지, 혜원은 반항을 멈춘 채 그윽한 눈빛으로 윤결을 올려다봤다.
혜원의 색기 가득한 얼굴과 야릇한 눈빛에 주체할 수 없는 성욕을 느낀 윤결은 아직 제대로 벌어지지도 않는 혜원의 구멍에 자신의 성기를 강하게 쑤셔 넣었다.
“아악!!! 아파!! 흑흑 너무, 너무 아파!”
순간 자지러지는 혜원의 비명과 격렬한 몸부림이 시작되었다. 혜원이 발버둥 치면 칠수록 그의 구멍은 더욱더 윤결의 성기를 옴짝달싹 못 하게 감싸며 자극했다.
계속해서 강하게 조여대는 혜원의 구멍에 결국 윤결은 절정을 맞이하며 질퍽하게 그의 안에 사정함과 동시에 혜원의 가슴으로 쓰러져 내렸다.
“하아…. 혜원아. 기특하게 벌써 우유도 이렇게 잘 받아먹고. 이러니 안 예뻐하려야 안 예뻐할 수가 없네. 착하네, 우리 아기?”
더운 숨을 몰아쉬며 만족스러운 듯 혜원의 허리를 쓰다듬는 윤결. 하지만 이미 한 번 사정해 축 늘어진 자신의 성기를 혜원이 자꾸만 주물러 오자, 윤결은 또다시 흥분하며 성기를 발딱 세우기 시작했다.
“혜원아, 그만… 하읏… 너 자꾸 이러면 형이 멈출 수가 없잖아, 응?”
듣는 건지 마는 건지 혜원이 계속해서 자신의 성기를 주물럭거리며 터질 듯 쥐어 잡자, 아픔을 참으며 신음을 내뱉던 윤결의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아팠다. 불알을 터트릴 기세로 점점 더 세게 자신의 성기를 쥐어 잡으며 사악하게 눈웃음을 짓고 있는 혜원의 얼굴에 깜짝 놀란 윤결이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그가 눈을 번쩍 떴다.
“으아악!!”
윤결은 헐떡이는 숨을 진정시키며 놀란 눈으로 자신의 옆을 바라봤다. 입을 벌린 채 침을 질질 흘리며 너무도 곤히 잠들어 있는 혜원의 얼굴을 보자, 그제야 그는 혜원과의 황홀한 섹스가 꿈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아…. 나 정말 이게 무슨. 욕구불만이 쌓였나 보네. 미친 거 아냐? 한윤결.”
윤결은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으며 팔을 들어 눈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누군가 자신의 성기를 만지는 듯한 생생한 느낌에 다시 팔을 내려 천천히 자신의 아래를 내려다본 윤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잠버릇이 상당히 고약한 혜원. 그는 언제 또 아래로 기어 내려갔는지, 윤결의 허벅지를 베개 삼아 누운 채로 그의 성기를 마치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듯 조물조물 만져대며 히죽히죽 웃고 있는 것이었다!
어찌나 야릇한 손길로 자신의 성기를 어루만지는지 윤결은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바로 사정을 할 것만 같은 흥분감이 밀려 올라왔다. 그리고 이것은 꿈이 아니었다.
“아, 나 진짜. 강혜원. 하읏! 미치겠네. 소, 손 떼 혜원아. 응? 착하지?”
윤결이 일어나지도 못하고 혜원의 머리통만 살살 문질러 대자, 혜원은 귀찮은 듯 인상을 찡그리며 더욱 힘을 주어 그의 성기를 조몰락거리기 시작했다.
“아흣! 혜, 혜원아. 형 쌀 거 같아! 그, 그만 만지라고!”
“흐응…. 엄마가…. 호떡은 손으로 세게 주물러야 반죽이…. 반죽이…. 찰지다고….”
이젠 대놓고 자신의 성기를 호떡 반죽에 비유하며 만져대기 시작한 혜원의 모습에 윤결은 죽을 맛이었다.
어느덧 반죽이 끝났는지 입맛까지 다시며 윤결의 성기를 와락 쥐어 잡은 혜원의 압력에 윤결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있는 힘껏 버텼다.
하지만 결국 윤결은 끓어오르는 쾌락을 이기지 못하고 혜원의 손에 또 한 번 질퍽한 사정을 하고 말았다. 순간 빵빵했던 윤결의 성기가 수축하자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그제야 혜원이 그의 성기에서 손을 떼어냈다.
잠결임에도 아쉬움을 느낀 혜원은 그대로 윤결의 정액으로 흥건한 자신의 손가락을 쪽쪽 빨며 몸을 돌리더니 다시 윤결의 다리를 끌어안고 자기 시작했다.
이미 두 번의 사정으로 예민해진 몸. 거기다 입가에 정액을 덕지덕지 묻힌 채 손가락을 빨고 자는 혜원의 모습. 그리고 혜원이 숨을 내쉴 때마다 자신의 허벅지에 와 닿는 그의 뜨거운 입김까지! 이미 잠이고 뭐고 싹 다 달아나 버린 윤결은 이 녀석과의 동거가 앞으로 굉장히 위험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아…. 강혜원. 이번엔 꿈이었지만, 다음엔 우리 정말로 뜨거운 첫날 밤 보내는 거다? 네가 이렇게까지 예쁜 짓을 했는데, 형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안 그래?”
윤결은 지난번 성인용품점에서 가지고 왔던 코스튬을 입은 혜원을 상상해 봤다. 정말이지 24시간 입혀 두고 자신의 다리 밑에서 울려 버리고 싶은 위험한 상상까지 하게 만드는 야한 새끼 다람쥐 강혜원. 그의 아찔한 운명은 어쩌면 그도 모르는 사이 윤결에 의해 이미 정해져 버린 듯했다.
윤결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아기처럼 손을 빨며 잠이 든 혜원을 다시 살며시 끌어 올려 자신의 옆에 눕혔다. 그리고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손가락이 아쉬운 듯 힘겹게 빨아대는 혜원의 이마에 키스를 해주며 그를 품에 바짝 끌어안았다.
“다음엔 손가락 말고 다른 거 빨자 혜원아. 훗….”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사랑스러운 혜원의 잠버릇. 그리고 윤결은 비밀스러운 이런 혜원의 잠버릇마저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
다음 날 혜원은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뭔가가 입가에 말라붙어 있는 찝찝한 기분. 하지만 단순한 혜원은 아마도 자신이 자면서 침을 질질 흘렸나 보다 생각을 하며 대수롭지 않게 화장실로 가 세수를 했다.
이빨까지 꼼꼼히 닦고 다시 거실로 나오자 언제 준비했는지 윤결이 아침까지 싹 다 차려 놓고 혜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자리에 앉는 혜원을 쳐다보며 말했다.
“강혜원. 내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널 혼자 두는 건 영 내키지 않아서 말이야. 그냥 이참에 나랑 같이 회사로 출근할래?”
“네에에??”
자리에 앉자마자 다시 벌떡 일어난 혜원이 어이없는 눈으로 윤결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게 지금 무슨 생쥐가 사자 주둥이로 얼굴을 들이미는 소리냔 말이다. 도대체가 이 형은 가만 보면 회사를 너무 날로 다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사무실을 자기 집 안방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인턴 같은 거 말이야. 어차피 너도 나중에 대학 졸업하면 우리 회사나 너희 아버지 회사에 들어갈 거잖아. 그러니까 지금부터 하나씩 미리미리 배운다 생각하고 나오는 건 어때?”
“싫어요! 됐어요! 안 해요! 나 아직 대학은 들어도 안 갔거든요?”
혜원이 털썩 자리에 내려앉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게 말이야 방귀야!
“너 이제 수능만 보면 내일모레 대학생이거든? 언제까지 그렇게 빈둥거리고 집에만 있을 건데?”
“뭐 비, 빈둥?? 하, 참나! 기가 막혀서. 내가 어, 언제 빈둥거렸는데요!”
마치 자신을 식충이 취급하는 윤결의 말에 혜원은 숟가락을 들다 말고 소리를 꽥 지르며 그를 살벌하게 노려봤다.
나름 청소도 한다고 하고 있고 물론 윤결이 다시 하는 수준이긴 했지만…. 빨래도 배워서 가끔 돌리기도 했고 물론 윤결이 다시 돌리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 집안일도 하고 공부도 하는데, 빈둥빈둥 이라니! 자존심이 확 상한 혜원이 입을 삐죽 내민 채, 밥그릇을 멀리 밀어내며 말했다.
“형이 해준 밥 안 먹어요, 빈둥거리는 식충이가 밥은 먹어서 뭐 해요.”
단단히 삐쳐버린 혜원의 모습에 아차 싶은 윤결이 다시 그의 앞으로 밥그릇을 슬며시 밀어주며 말했다.
“그래 빈둥은 취소. 하지만 너 혼자 있으니까 밥도 제대로 안 챙겨 먹고 자꾸 편의점 음식만 사 먹잖아. 거기다 이상한 날파리나 꼬여서 머리나 깨지고. 역시 안 되겠어. 공부도 뭐 24시간 하는 건 아니잖아? 내 사무실 안에 작은방이 하나 더 있어. 내가 가끔 눈 붙일 때 쓰는 방. 그 방 비워 줄게 거기서 공부해. 그리고 가끔 인턴처럼 내 심부름도 좀 하고. 뭐 어려운 건 아니야. 자료 복사나 회의 자료 정리 등 간단한 업무야. 이런 건 배워 둬서 나쁠 것도 없고. 어때?”
“저…. 그, 그래도 이건 좀….”
“너도 혼자 있는 거 무서워하잖아. 나 야근하고 밤에 늦게 오면 어떡할 건데? 그땐 누구한테 재워달라고 하려고?”
구구절절 틀리지 않은 윤결의 말에 혜원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역시 혼자 집에 있는 건 이젠 무서워서 안 될 것 같았다. 특히 밤에는 더욱더.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회사로 같이 출근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고민하는 사이, 어느덧 윤결이 혜원의 등 뒤로 와 살며시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순간 화들짝 놀란 혜원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몸을 바르르 떨기 시작했다.
“으아악!! 저, 저리 가!”
몸이 먼저 기억하는 트라우마 그리고 생생히 기억나는 끔찍했던 그 날의 밤. 혜원은 아직도 누군가 뒤에서 자신을 만지는 것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이것 봐. 넌 지금 내가 이렇게 뒤에서 안기만 해도 겁먹고 벌벌 떨잖아. 당분간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나랑 같이 출근하자.”
“아, 알았어.”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던 혜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래도 혼자 있는 것보단 윤결의 곁이 더 안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그의 말처럼 곧 대학생이 되는 만큼 맨날 집에서 쌀만 축내는 것보단 뭐라도 일을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자신이 제대로 할 수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저기, 그런데 그럼 저 또 여장하고 있어야 해요?”
“아…. 그건 어쩔 수 없긴 한데 대신 가발은 안 써도 되잖아. 그리고 옷도 편하게 청바지에 니트 정도로 입어. 치마나 원피스는 안 입어도 돼. 하지만 가슴은 넣자. 그 정도는 괜찮지?”
“응. 좋아!”
뭐 그 정도면 감지덕지하지! 치렁치렁한 가발과 걸을 때마다 사타구니가 신경 쓰이는 원피스를 안 입는 게 어디야. 혜원은 금세 자신의 고민이 무엇이었는지 새까맣게 잊어버리고는 들뜬 마음으로 다시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정말 단순해도 너무 단순한 혜원. 그리고 점점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이는 순진한 혜원의 모습에 윤결의 입가에는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아침을 다 먹은 혜원이 대충 이것저것 준비를 하고는 출근하려는 윤결의 옆에 나란히 섰다. 이번엔 가슴 뽕까지 혼자 잘 집어넣어 완벽한 여학생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혜원의 모습에 윤결은 웃음을 꾹 참으며 기특하다는 듯 그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아, 정말. 이거 성희롱이라고요! 제 엉덩이 자꾸 만지지 말라니까요?”
이에 또 발끈한 혜원이 눈을 흘기며 윤결의 못된 손을 쳐냈다.
“나 네 남편이야. 남편이 자기 와이프 엉덩이 만지는 게 언제부터 성희롱이 됐어?”
역시 이리저리 잘 빠져나가는 능구렁이 같은 한윤결! 너무도 뻔뻔한 그의 태도에 얼굴을 빨갛게 불태우며 윤결을 째려보던 혜원은 급기야 혼전 계약서를 들먹이며 따지기 시작했다.
“잊었어요? 혼전 계약서! 우리 각자 서로의 사생활은 좀 지켜줍시다!”
“그런 사람이 어제 그렇게 울먹이면서 같이 자 달라고 애원했나?”
어느덧 혜원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민 윤결이 게슴츠레 눈을 뜨며 그의 귀여운 입술을 툭툭 건드리자, 깜짝 놀란 혜원이 팔짝 뛰며 소리를 질렀다.
“내, 내가 언제!! 가, 같이 자 달라고 했어요!! 그냥 잘 때까지 옆에 있어 달라고 했지!!”
“그게 그거지. 뭐가 달라? 발악하기는. 제발 오늘은 그 시끄러운 입 좀 다물고 조용히 가자. 색시야.”
“새, 색…. 뭐라고요? 미, 미쳤나 봐 이 아저씨가!! 비켜요! 나가게!”
꿈에서도 들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뜬금없는 ‘색시’라는 단어에 당황한 혜원은 씩씩거리며 거칠게 가방을 둘러멘 뒤 현관문을 박차고 나갔다.
윤결은 뛰어 봤자 자신의 손바닥 안인 혜원의 뒤를 따라 나가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놀리면 놀릴수록 더욱 격하게 반응하는 혜원을 보는 것에 톡톡히 재미가 들려버린 윤결. 이젠 집이 아닌 사무실에서도 그의 귀여운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다른 것들은 이미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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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윤결과 함께 차에 올라 회사로 향하는 혜원의 마음은 여전히 복잡하기만 했다.
과연 이렇게 회사에 같이 출근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심히 걱정되기 시작한 혜원은 차에 타자마자 조가비처럼 입을 꽉 다물고는 묵묵히 창밖만 내다봤다.
윤결과는 말 한마디 섞지 않겠다는 듯, 마치 자기는 지금 매우 심각하게 삐쳐있다는 것을 어필하며 윤결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혜원의 뾰로통한 모습을 한 방에 무너트린 윤결의 한마디.
“너 자꾸 그러면 이따 밤에 혼자 재운다?”
순간 혜원의 눈동자가 갈피를 잃고 심하게 흔들렸다.
‘치사해. 정말 치사해!!’
혜원은 불만이 가득한 눈빛으로 윤결을 노려봤다. 그러자 윤결이 부풀어 있는 혜원의 볼을 살며시 꼬집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삐쳐있지 말라고요, 귀여운 와이프님. 회사에 도착해서까지 이러면 우리 소문난다? 벌써부터 부부 싸움한다고.”
“칫! 됐거든요. 그러든가 말든가.”
“알았어. 이제 진짜 안 놀릴게. 화 풀어. 응?”
“… 진짜 놀리지 마요.”
윤결의 자상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에 어느새 모든 화가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린 혜원이 마지못해 사과를 받아들이며 말했다.
가까이 갈수록 위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자석처럼 자신을 끌어당기는 이 남자. 혜원은 슬쩍 고개를 들어 운전 중인 윤결의 옆모습을 몰래 바라봤다. 같은 남자지만 슈트발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멋진 남자란 생각에 왠지 모를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진짜든 가짜든 지금은 이 멋진 남자가 자신의 남편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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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인턴으로 제 일을 도와줄 강혜윤입니다. 많이들 도와주시고, 너무 괴롭히지는 마세요. 아, 그리고 제 일만 전담할 거니까 혜윤이한테 일 시킬 생각들은 마시고요. 아시겠죠?”
“네. 이사님.”
아무렴 감히 누가 이사님의 와이프에게 일을 시킬 수 있겠느냔 말이다! 다들 혹시라도 일을 시키라고 할까 봐 가슴을 졸이고 있었는데, 다행히 자신들이 원하는 말을 먼저 해준 윤결에게 고맙기까지 했다.
간단히 소개를 끝내고 윤결의 방으로 따라 들어간 혜원은 사무실 한구석에 마련되어 있는 또 하나의 작은방을 발견하고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윤결의 휴식 공간이라 그런지 그곳에는 책상과 침대, 냉장고에 티브이까지 설치되어 있어 흡사 작은 호텔 방과도 같았다. 아담하지만 모든 것이 편리하게 잘 꾸며진 방. 그리고 혜원은 그런 윤결의 방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럼 이제부터 저 여기서 공부하는 거예요?”
“그래. 오전에는 거기서 공부하고 오후에는 잠깐 내 일 도와주고. 나쁘지 않지?”
혜원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긴! 좋아도 너무 좋았다. 매일 집에 혼자 있으면 심심하기도 했고, 그렇다고 밖에 나가봤자 할 수 있는 게 많지도 않던 혜원에게 이곳은 천국과도 같았다.
“그럼 점심 먹기 전까지 공부해. 나는 이만 나가줄게.”
“응! 이따 봐. 윤결 형!”
저렇게 귀여운 얼굴로 형이라고 부르다니. 윤결은 벌써부터 가슴이 간질거렸다. 역시 그를 데리고 오길 정말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오전의 바쁜 업무를 벼락치기로 끝내고 어느덧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윤결은 혜원을 데리러 방으로 향했다. 혹시라도 방해될까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공부는 개뿔! 어김없이 또 침대에 대자로 뻗어 잠든 혜원을 보니 기가 찼다.
“하! 이 녀석 진짜. 아니 또 자? 여기가 네 호텔 방이냐? 공부하랬더니….”
하지만 윤결은 말만 그렇게 할 뿐 이불도 덮지 않고 자는 혜원에게 살포시 이불을 덮어 주며 그의 곁에 내려앉았다.
다행히 머리는 붕대 대신 이젠 커다란 반창고를 붙여 두었지만 그래도 볼 때마다 안쓰러웠다.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든 윤결은 혜원이 좋아하는 일식집에 전화를 걸어 배달을 요청했다. 그렇게 점심 주문을 끝낸 윤결은 조심스럽게 혜원의 곁에 누워 그의 가슴을 토닥여주며 말했다.
“우리 혜원이, 이렇게 귀엽고 예쁜데 나중에 형한테 시집온 거 후회한다는 말 안 들으려면 형이 정말 잘해야 할 것 같네. 다신 이런 상처 달고 다니지 않게 말이야.”
윤결은 혜원의 등을 자신의 가슴에 바짝 밀착시키며 그의 목덜미에 진하고 강렬한 키스를 퍼부었다. 기어코 혜원의 목에 자신의 것이라는 영역 표시와도 같은 붉은 키스 마크를 만들어 버린 윤결. 그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혜원을 뒤돌려 안았다.
“으응… 흐응… 저리 가. 무거워.”
걸리적거리는 답답함에 혜원이 눈살을 찌푸리며 칭얼거리자, 윤결은 그의 부드러운 입술을 살며시 베어 물었다.
말캉한 혜원의 혀를 쪽쪽 빨아 당기며 단물을 빼먹듯 물고 핥아대는 윤결의 뜨거운 키스에 혜원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윤결의 목을 감싸 왔다. 그렇게 서로의 몸이 밀착되며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옅은 신음과 젖은 목소리. 잠결이었지만 이미 여러 번 윤결의 손길을 느껴 본 혜원의 몸과 입술은 이미 그를 받아들이는 것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었다.
그렇게 점점 윤결이 흥분에 휩싸이며 혜원의 가슴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려는 찰나,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윤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윤결은 못내 아쉬운 듯 혜원의 상의에서 손을 빼내 혜원의 젖은 입술을 엄지로 부드럽게 닦아주며 말했다.
“이다음은 점심 먹고 다시 이어서 해볼까 혜원아?”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대답할 리 없는 혜원의 부드러운 뺨을 쓰다듬으며 그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이는 윤결. 이방을 만든 이래 오늘처럼 흡족한 적도 없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윤결의 기분은 최고였다.
**
“혜원아 일어나! 점심 먹어야지! 네가 좋아하는 연어 초밥이랑 연어 샐러드 시켰는데. 싫으면 말고.”
‘초밥? 연어?’
순간 눈이 번쩍 떠진 혜원은 입가에 흘러내린 침을 쓱 닦으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세팅까지 모두 끝나있는 영롱한 자태의 초밥들을 초롱초롱 반짝이는 눈빛으로 내려다보던 혜원이 군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헤헤. 나는 정말 강에서 태어났어야 했나 봐.”
“응? 갑자기 웬 강 타령?”
“연어가 너무 좋아서요! 매일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을 만큼! 근데 연어는 강에 살잖아요!”
맙소사! 연어가 좋아 강에서 태어나고 싶다는 영락없는 철부지 소년. 강에서 태어났으면 너도 물고기 중 한 마리로 태어났을 터. 연어를 먹었다기보단 네가 먹혔을 것 같은데 혜원아? 이 사실을 알려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지만 윤결은 저렇게 행복해하는 얼굴에 어떻게 찬물을 끼얹겠냐는 생각에 그저 작은 눈웃음과 함께 혜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먹기나 해. 오후에는 너도 일 좀 해야지?”
“네!”
초밥이 눈앞에 있어서 그런지, 혜원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물어보지도 않은 채 씩씩하게 대답부터 했다. 하긴. 연어들이 눈앞에 누워있는데, 뭔들 그의 귀에 들어올까 싶었다.
순식간에 모든 초밥과 샐러드 속의 연어만을 쏙쏙 다 골라 먹은 혜원이 배가 부른 듯 자신의 배를 통통 두드리고 있자, 윤결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그의 손을 잡아 멈춰 세우며 말했다.
“야, 넌 생긴 건 곱상하게 생겨서 하는 짓은 어쩜 정말 그렇게 우리 할아버지 같냐?”
“에?? 뭐, 뭐가? 내가 뭘요?!”
혜원은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먹자마자 또 시비를 걸어오는 윤결을 흘겨보며 소리쳤다.
“그 배 두드리는 거. 너 설마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그럴 건 아니지?”
“아, 이거? 헤헷… 스, 습관이 돼서….”
먹는 것에 비해 늘 소화 기능이 떨어지던 혜원은 어렸을 때부터 그의 아버지가 민간요법이라며 가르쳐준 배 두드리기를 틈만 나면 해댔었고 이젠 그게 하나의 습관이 되어있었다. 몰래몰래 사람들이 안 볼 때 한다고 하지만, 가끔 이렇게 들킬 때면 살짝 민망하기도 했다.
괜히 머쓱해진 혜원이 어색함에 머리를 긁적이려다 그만 상처를 건드리고 말았다.
“아얏!! 아팟. 아파라… 아야야….”
“왜 그래 혜원아!!”
자지러지는 혜원의 비명에 깜짝 놀란 윤결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살피며 소리쳤다.
커다란 혜원의 두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찡그린 얼굴을 펴지도 못한 채 아파하던 혜원이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 너무 아파요. 머리 터진 곳….”
혜원이 아프다는 한마디에 윤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혜원의 머리를 이리저리 살폈다. 다행히 피가 번져 나오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상처가 쓸려서 아팠던 모양이었다.
“머리는 괜찮아. 강혜원, 제발 그 방정맞은 손 좀 가만히 있어 줄래? 머리에 상처 난 거 뻔히 알면서 머리는 왜 긁어서는!”
“까, 깜빡했단 말이에요.”
“아니 깜빡할 게 따로 있지!! 넌 대체 생각이…!”
혈압이 오르는 듯 씩씩거리던 윤결은 순간 아차 싶은 마음에 말을 멈췄다.
그는 슬쩍 고개를 들어 혜원의 눈치를 살폈다. 눈물이 떨어질 듯 말 듯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아슬아슬한 모습에 윤결은 속으로 셋을 세고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 또 오해하지 마라! 형 화내는 거 아니다. 진짜 아니야. 너 걱정돼서 그런 거야. 절대, 절대 화낸 거 아니야. 이리 와봐 강혜원.”
붉어진 눈으로 한마디만 더 하면 울려고 준비했던 혜원도 뜻밖에 윤결의 수그러든 모습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겼다.
윤결의 다정한 손길에 이상하게 더 큰 서러움이 밀려왔다. 왜지? 왜 자꾸 이 남자의 품이 익숙해진 듯, 그가 안아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까? 대체 왜?
혜원은 자꾸만 제멋대로 날뛰어 대는 심장 소리를 혹시라도 윤결이 들을까 봐 몸을 재빨리 떼어내며 물었다.
“이, 이제 괜찮아요. 그런데 내가 도와드릴 일이 뭔데요?”
“아, 그거. 뭐 별거 아니야. 다 먹었으면 우선 나가자 사무실로.”
윤결은 조금 더 혜원을 안고 싶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음식물 쓰레기들을 챙겨 사무실로 나오며 말했다.
그는 멀뚱멀뚱 어색하게 서 있는 혜원에게 책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있는 서류뭉치를 건네주며 부탁했다.
“혜원아, 여기 있는 것들 순서대로 열 부씩 복사해서 가지고 올래?”
“열 부씩이요? 순서대로. 오케이! 금방 갔다 올게요!!”
“잠깐! 혜, 혜워….”
둘이 있으면 자꾸만 이상한 생각만 드는 통에 잠시라도 그를 피하고 싶었던 혜원은 이때가 기회라는 듯, 잽싸게 서류를 들고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직 다 설명을 해주지 못해 다급히 혜원을 부르던 윤결은 기다렸다는 듯이 쌩하고 나가 버린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며 실웃음을 지었다.
아니 대체 회사 구조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나가 버리면 어쩌자는 건지. 세탁기도 못 돌리면서 과연 복사기 쓰는 법은 제대로 알기나 할까? 아니 그보다 대체 복사기가 어디 있는 줄은 알고서 뛰쳐나가는 거냔 말이다.
하여튼 같이 있어도 냇가에 풀어둔 아이처럼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인 듯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자리에 앉아 턱을 매만지며 지그시 웃음을 짓는 윤결. 그는 혜원에게 주어진 이 첫 과제를 세상 엉뚱한 그가 과연 어떻게 완성해 올지 내심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아 맞다! 복사기! 복사기는 어디 있지? 하아…. 아까 형한테 물어볼걸.”
당당히 사무실 문을 열고 복사를 하겠다며 복도로 뛰쳐나왔지만, 혜원은 이내 울상을 지으며 복도를 서성이기 시작했다.
아직 회사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했으니 당연히 복사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 리 없는 혜원. 하지만 한심하게 복사기를 찾지 못해 다시 윤결에게 돌아가 물어볼 순 없었다.
그래도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무조건 이번엔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겠다 결심한 혜원은 눈을 부릅뜨고는 복도 이곳 저것을 기웃거리며 복사기를 찾기 시작했다.
“여긴가? 뭐야. 이씨…. 여기도 아닌가 봐. 무슨 회사가 이렇게 넓어. 짜증 나.”
고민하고 고민하다 선택한 막다른 골목엔 정수기만이 버젓이 놓여있을 뿐이었다. 시무룩해진 혜원이 뒤를 도는 순간 굉장히 잘생긴 남자 직원이 그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 어떡해? 저 아저씨 뭐야? 왜 나한테 다가오는 거야? 엄마야 어떡해! 난 몰라!!’
깜짝 놀란 혜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딱히 도망칠 곳은 보이지 않았고 남자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덜컥 겁이 난 혜원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혜원을 향해 다가오던 남자는 유유히 그를 지나쳐 정수기에서 물을 따른 뒤 뒤돌아 가려다, 어디가 아픈 것처럼 눈을 감고 서 있는 혜원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저기…. 혹시 어디 안 좋으세요?”
“으아아아악!!”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건드려오자 화들짝 놀란 혜원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그는 남자의 손에 들린 종이컵을 빤히 쳐다보며 그저 물을 마시러 온 사람에게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군 것 같아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지금 이 순간이 민망해 죽겠는 혜원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도 작게 대답했다.
“아니요. 그, 그게. 제가 갑자기 배, 배가 아파서. 그, 급해서 이만. 죄, 죄송해요!!”
혜원은 한시라도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아무 곳이나 눈에 보이는 곳을 향해 냅다 달렸다.
“어 저기 화장실은 그쪽이 아닌…데.”
순간 화장실과는 정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혜원을 멍하니 바라보던 남자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남자는 급해 보이던 혜원을 뒤따라갔다. 이런 재미 없는 회사에서 발견한 의외의 인물. 어쩌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회사 생활이 나쁘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미쳤어! 미쳤어! 거기서 배가 왜 아파! 왜 하필 나와도 그런 말이 나오냐고!! 하아…. 정말. 똥멍충이 강혜원!”
차라리 복사기의 위치를 물어봤어야 했다.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도망친 자신이 너무 한심해 벽에 머리를 쿵쿵 박아 대는 혜원! 아직 복사는 한 장도 하지 못하고 가슴에 꽉 안아 들고 있는 서류 뭉치를 보니 한숨만 새어 나왔다. 하지만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했던가?! 복도 한구석에 발걸음을 멈춘 채 혼자 자책을 하는 혜원의 곁으로 아까 만났던 잘생긴 남자가 급하게 뛰어오더니 대뜸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걸었다.
“저기. 이쪽은 화장실 쪽이 아닌데….”
“네, 네에? 그, 그게 그, 그러니까….”
혜원은 너무 당황해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왜? 왜 따라온 건데!! 이 남자 뭐야 진짜?’
낯선 남자의 등장에 바짝 긴장한 티가 역력한 혜원의 모습에 남자는 귀엽다는 듯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쪽이 화장실이랑 반대쪽으로 뛰길래요. 화장실은 저쪽 복도 끝에 있거든요. 배가 아파 보이는데 급한 것 같아서요, 데려다줄까요?”
“네….”
‘… 가 아니고!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란 말을 내뱉은 줄 알았는데 데려다 달라는 말을 해버린 혜원은 정말이지 자신의 주둥이를 확 꿰매 버리고 싶었다.
혜원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인 채 남자의 뒤를 터벅터벅 따라 걸었다. 어느덧 화장실 앞에 다다르자 자연스럽게 남자 화장실로 들어가려던 혜원의 팔을 재빨리 잡아 돌려세우며 남자가 다급하게 말했다.
“거긴 남자 화장실인데. 여자 화장실은 이쪽이요.”
순간 혜원의 얼굴은 터지기 직전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네? 아, 네. 가, 감사해요. 제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안녕히 돌아가세요.”
어색하게 인사를 한 뒤 재빨리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버린 혜원은 정말이지 울고 싶었다.
회사에서의 첫날이 점점 더 공포영화가 되어 가는 것만 같았다. 벌게진 얼굴을 진정시키고 옷차림을 다시 한번 매만지며 화장실을 나오던 혜원은 순간 화장실 앞에서 아직도 그를 기다리고 서 있는 남자를 마주하고는 흠칫 놀라 소리를 꽥 지르고 말았다.
“엄마야!!”
“아. 저기 저예요!”
남자는 너무 놀라 뒷걸음질을 치려다 몸을 휘청이는 혜원을 재빨리 붙잡아 세우며 말했다.
“왜, 왜 기다린 건데요!! 노, 놀랬잖아요!”
“아니 가시는 길을 모르실까 봐 혹시나 해서요. 오늘 처음 보는 직원인 것 같아서.”
“괘,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갈게요.”
굳이 기다려줄 건 또 뭐람? 물론 복사기가 있는 곳은커녕, 이젠 윤결의 사무실도 어딘지 알 길이 없었지만, 자꾸만 부딪히는 이 남자는 위험했다.
“여기 생각보다 넓고 또 복잡해서 처음 오면 많이들 헤매요. 저도 처음 입사했을 때 많이 헤맸어요. 제 사수님이 복사해오라고 시킨 것도 삼십 분이나 걸릴 만큼 길을 헤맸거든요. 가요. 데려다줄게요.”
‘복사!! 아, 맞다 복사!’
순간 혜원은 복사를 해오라고 부탁했던 윤결의 서류 뭉치를 한번 힐끔 내려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한 혜원이 그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그런데요…. 그 보, 복사기는 대체 어디 있어요?”
“네? 복사기요? 아, 저 따라오세요.”
남자는 신줏단지 모시듯 두 손에 힘주어 안고 있는 혜원의 서류 뭉치들을 바라보며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자꾸만 눈이 가는 예쁘고 귀여운 사람이라는 생각에 남자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그런 남자의 미소는 안중에도 없는 혜원은 드디어 윤결이 부탁한 첫 임무를 완성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자신의 손이 지금 누구에게 잡혀 있는지 따위는 생각도 않은 채 쫄래쫄래 낯선 남자를 따라가며 해맑게 웃고 있는 가여운 혜원. 그리고 앞으로 그에게 다가올 후폭풍은 오직 혜원만이 감당해야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