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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위험한 남자의 위험한 제안 (2/12)

2. 위험한 남자의 위험한 제안

“윤…. 흐응…. 전화 와.”

루이가 잠결에 윤결의 가슴에 안기며 인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

“미안. 더 자 루이.”

윤결은 투정 부리는 루이의 이마에 다정한 키스를 해주며 조용히 휴대폰을 들고 나갔다.

“여보세요.”

[윤결!! 너 지금 어디야!! 혜원이 어딨어!”]

“강혜준?? 갑자기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여기서 왜 혜원이를 찾아? 아니 너랑 있는 애를 왜 나한테서 찾아?”

[아 진짜! 너 지금 혜원이 아니 그럼 혜윤이랑 같이 있어?]

“아니, 난 잠깐 밖에. 혜윤이는 호텔에 있지. 아, 뭔데 그래? 왜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이 난리야?”

[하아…. 윤결아 놀라지 말고 잘 들어. 지금 쌍둥이들이 사고를 쳤어. 그것도 아주 대형 사고! 지금 나랑 같이 미국에 있는 녀석이 혜윤이고, 너랑 같이 신혼여행을 간 녀석은 혜원이라고! 이것들이 우리 몰래 바꿔치기를 해버렸다고!]

“뭐, 뭐라고? 너 지금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나 지금 긴말할 시간 없어. 너 지금 당장 혜원이한테 가! 혜원이 절대 혼자 두지 마. 걔 겁 많은 애란 말이야! 우선 혜원이 곁에 딱 붙어 있어. 내가 오늘 당장 날아갈 테니까 기다리라고!]

“진짜 이게 무슨! 아니. 우선 알았고, 나 지금 호텔로 돌아갈 거니까 전화 끊어.”

난데없는 황당한 전화에 윤결은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호텔로 향했다.

뜬금없이 무슨 혜윤이 혜원이라는 생뚱맞은 말을 해대는지. 혼자 두지 말라는 혜준의 다급한 부탁에 급히 호텔로 향하긴 했지만 윤결은 호텔로 가는 내내 생각에 잠겼다.

사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혜윤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자신이 알던 모습과 많이 달랐었다. 잔뜩 겁먹은 듯한 표정과 자꾸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 갑자기 바뀌어버린 식성과 툭하면 울 것 같은 여린 눈망울.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의심스러웠던 자신을 대하는 너무도 공손한 그녀의 태도.

‘설마…. 설마?’

윤결은 얼굴을 굳힌 채 입술을 거칠게 짓씹으며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를 생각했다. 정말 자신과 같이 온 게 혜원이라면 대체 이들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꾸몄는지, 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호텔에 도착한 윤결은 심호흡을 한번 크게 내쉬며 호텔 방 문을 열었다.

불이 모두 꺼져 있는 거실을 지나 혜윤 아니 혜원의 방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는 열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까이 조금 더 가까이. 윤결이 침대맡에 다다르자 몸을 웅크린 채 베개를 꽉 끌어안고 잠들어 있는 혜원이 보였다. 그는 윤결이 자신의 방에 들어올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듯 그 어떤 변장도 하고 있지 않았다.

긴 머리 역시 가발이었다. 천천히 시선을 내려 혜원의 밋밋한 가슴을 보는 순간 윤결은 그가 혜원임을 확신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의 상의를 슬며시 올려 보았다. 하얗고 마른 몸에 앙증맞게 솟아 있는 작고 귀여운 분홍빛 유두, 살점 하나 없이 평평한 그의 맨 가슴. 설마 했던 모든 것이 사실로 밝혀지자 윤결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과연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도무지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겁도 없이 자신을 깜찍하게 속인 이 발칙한 꼬마를 도저히 쉽게 용서해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우선 내일 일어나서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보기로 한 윤결은 조금만 더 그들의 계획에 속아 주기로 했다.

“나한테 겁도 없이 시집올 생각까지 했으면 앞으로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강혜원.”

윤결은 어느새 자신과 함께 신혼여행을 온 아이가 혜윤이 아니라 혜원이라는 사실에 입가에 흥미로운 미소를 띠었다. 그는 살며시 침대 속으로 들어가 잠든 혜원을 끌어안아 보았다. 아무런 저항 없이 끌려와 자신의 가슴에 턱 안기는 모습은 상상 이상으로 꽤 귀여웠다. 그리고 잠결에 중얼거리는 혜원의 결정적인 한마디.

“흐음…. 혜윤아, 나 시키는 대로 다 했다. 그러니까 이제 빨리 바꾸자. 나 그 형 무서워. 너무 무서워 혜윤아. 나 두고 어디 가면 안 돼. 진짜 안 돼.”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무섭대? 잠꼬대 한번 고약하게 하네.’

윤결은 자신의 품으로 굴러 들어온 혜원을 따뜻하게 안아주며 그의 목덜미에 코를 지분거렸다. 은은한 베이비파우더 냄새가 향긋하게 풍겨 올라오는 게 딱 잡아먹고 싶어지게 만드는 귀여운 향이었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줄도 모르고 깊은 잠에 빠진 혜원. 그리고 그런 그를 끌어안은 윤결의 입가엔 어느새 사심 가득한 미소가 번졌다.

귀여운 혜원의 발칙한 도발에 윤결은 당분간 이 위험한 동거를 이어가고 싶어졌다. 아마도 그는 이 비밀스러운 문제의 결혼을 깨고 싶지 않은 단 하나의 유일한 사람일 듯했다.

“강혜원. 잘해 보자.”

새하얀 혜원의 볼을 살살 어루만지는 윤결의 손길은 너무도 다정했다. 그리고 마치 귀여운 새끼 새를 품은 엄마 새의 품처럼 따뜻한 윤결의 가슴으로 더욱 깊게 파고드는 혜원. 그의 험난한 앞날은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

늦은 아침 눈을 뜬 혜원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일어났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지금 호텔에 있고 윤결과 신혼여행을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 가발부터 찾았다.

“아씨…. 가발, 가발. 어딨어!! 그 가슴 뽕은 또 어딨는 거야! 어디에 벗어 놨지?”

혜원은 뒤늦게 어젯밤 침대 밑에 벗어 던진 가발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잡아채 뒤집어썼다. 혜윤이 가르쳐 준 대로 어색한 브라를 가슴에 채우고는 뽕까지 꼼꼼하게 넣어 가슴을 최대한 빵빵하게 부풀렸다. 어느덧 얼추 모양새가 갖춰지자 혜원은 거울 앞에 서서 최종 점검을 하고는 살며시 방문을 열고 나갔다.

거실에는 윤결이 언제 일어났는지 모닝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보고 있었다. 그는 우스꽝스러운 몰골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오는 혜원을 발견하고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는 중이었다.

꼴에 꾸민다고 가발에 가슴까지 만들고 나온 혜원의 모습은 눈 뜨고 봐줄 수 없을 만큼 엉성했다. 그래도 반바지 사이로 보이는 하얗고 가느다란 그의 다리는 남자치고는 털도 없이 매끈한 것이 한 번쯤 만져 보고 싶을 정도로 예뻤다.

“어제 대체 뭘 했길래 이렇게 늦게까지 일어날 생각을 안 해?”

“아. 죄송해요. 제, 제가 원래 아침잠이 많아요.”

혜원은 슬쩍 윤결의 눈치를 보더니 배가 고픈지 아무 생각 없이 상의를 살짝 들춰 배를 살살 문지르며 소파로 다가가 내려앉으며 말했다.

지금 윤결의 앞에서는 분명 혜윤이어야 할 텐데 저렇게 조심성 없는 혜원의 행동에 윤결은 어이가 없었다. 저럴 거면서 어떻게 신혼여행 내내 자신의 눈을 속일 생각을 했는지. 누가 봐도 어설픈 그의 연기에 윤결은 그저 황당하기만 했다. 겁이 없어도 너무 없는 녀석의 무방비한 모습에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그럼 앞으로 혼자 재우면 안 되겠는걸? 내가 같이 자면서 제때제때 깨워줘야 할 것 같으니 말이야. 난 계획대로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데 게으른 너 때문에 내 일정이 꼬이게 할 순 없잖아?”

“네, 네??”

순간 혜원은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인지 깜짝 놀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안 되지 절대 안 되지! 지금 누구 침대에 기어들어 오겠다는 거야 저 늑대 새끼가!! 혜윤아. 너 정말 큰일 날 뻔했어!’

혜원은 커다란 눈동자를 마구 깜빡이며 그를 쳐다봤다.

“뭘 그렇게 놀라? 옛날엔 너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애도 낳았는데. 너보고 지금 애 낳으란 소리도 아니고 남편이랑 같은 침대에서 잔다는 말이 그렇게 놀랄 말인가? 뭐, 한 침대에 누우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너 무슨 죄지었어?”

발끈하는 혜원의 반응에 더욱 재미를 붙인 윤결이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와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히이익!! 악!! 저, 저리 가요!!”

갑작스러운 윤결의 스킨십에 화들짝 놀란 혜원이 벌떡 일어나 저만치 멀리 도망을 치며 눈을 흘겼다. 아직도 그의 콩알만 한 가슴은 마구 쿵쾅거리며 날뛰어 댔다.

“호, 혼전 계약서!! 왜 약속 안 지켜요!!”

“그래? 그 잘난 혼전 계약서에 뭐라고 썼는지 기억은 나고? 그럼 결혼하고 일 년 뒤에 무조건 애 낳기로 한 약속도 기억하겠네?”

물론 그런 말도 안 되는 조항은 들어있지도 않았지만, 그걸 알 턱이 없는 혜원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뭐, 뭐 뭘 낳아요?”

혜원의 얼굴은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라 폭죽 꽃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저런 능구렁이한테 혜윤을 시집보낸 엄마 아빠는 정말 무슨 생각이셨는지!! 혜원은 후다닥 자신의 방으로 달려가 방문 손잡이를 생명줄처럼 꽉 쥐어 잡으며 윤결을 향해 소리쳤다.

“내, 내 방에 허, 허락 없이 들어오기만 해!!”

“그래?? 들어가면?”

윤결이 가소로운 듯 혜원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이씨!! 그, 그쪽 거시기를 발로 확 걷어차 버릴 거야!!”

-쾅!!

‘뭐라고? 지금 저 쪼끄만 애새끼가 뭐라고 지껄이고 문을 닫은 거야?’

윤결은 어이가 없어 그 자리에 멈춰선 채 멍하니 닫힌 문을 쳐다봤다. 같은 남자라 어디를 때려야 치명적인지 안다는 뭐 이런 건가? 웃기지도 않은 도발이었다. 감히 내 소중이를 걷어차게 가만히 둘 거라 생각하는 건지. 그의 황당한 협박에 그저 웃음만 나왔다.

-띠리링!

순간 윤결은 아침부터 걸려오는 전화가 거슬리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다.

“어, 말해 루이.”

[어제 왜 말도 없이 그렇게 급하게 갔어? 나 아침에 한 번 더 하고 싶었는데….]

“아 미안. 어제 급한 일이 생겨서 말이지.”

[급한 일?]

“있어 그런 일. 내 꼬마 신부가 아주 골 때리거든….”

[신부라니? 당신 결혼했어?]

“아, 내가 말 안 했나? 나 신혼여행 온 건데?”

[뭐? 당신 뭐야! 당신이 어, 어떻게 결혼은 해? 당신 여자는 안 되잖아! 어제 나랑 잤잖아!]

“굳이 말하자면 집안끼리 정략결혼이라 어쩔 수 없이 한 거야. 나도 좋아서 한 건 아니었다고. 그리고 어제 너랑 잔 건 정말 네가 좋아서 잔 거야. 그리고 지금도 넌 최고야 루이.”

[정략…. 결혼? 그렇구나. 그럼 우리 또 만날 수 있지?]

“글쎄. 내 어린 신부님이 워낙 말괄량이라서 당분간 좀 돌봐야 할 것 같긴 한데, 언제 시간 되면 점심이나 같이 먹든가.”

[그래. 그 귀여운 꼬마 신부 프랑스 구경이나 잘 시켜줘.]

“넌 역시 쿨해 루이. 그럼 나 한국 들어가기 전에 줄리앙이랑 다 같이 밥이나 먹자.”

[알았어. 연락해 윤.]

차분하게 꾹꾹 화를 참아가며 통화를 마친 루이의 표정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결혼? 게이 주제에 여자랑 결혼했다는 것도, 또 그딴 여자 때문에 자신과 만남을 미루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제 그와의 밤은 최고였다. 거칠었지만 부드러웠고 뜨거우면서도 다정했다. 그렇게 황홀한 섹스가 처음이었던 루이는 한 번으로는 절대 만족할 수 없었다. 어린 와이프? 그의 말처럼 어차피 정략결혼이었다.

루이는 비릿한 냉소를 지으며 윤결이 다시 자신을 찾게 하고 말겠다 다짐을 하며 얼굴을 굳혔다. 어렵게 찾은 자신의 운명 같은 남자를 절대 어린 애송이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형 왔어?”

“응. 알랜. 아니 재희. 그런데 넌 왜 아직도 한국 이름을 고집하는 거야?”

외박하고 아침이 돼서야 집에 들어온 루이는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재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야 난 한국인이잖아. 아무리 내가 프랑스인이라 우겨도 난 어차피 이방인이니까.”

“알랜.”

루이는 안쓰러운 얼굴로 재희를 바라봤다.

고등학교 때 한차례 심한 아우팅을 당한 후로 재희는 단 한 번도 프랑스 이름을 쓰지 않았고 오직 한국 이름만을 고집했다. 이제 대학에 왔으니 다시 알랜으로 돌아오라고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는 고집불통 동생. 입양 왔을 당시 너무 작고 말라서 그가 혹시라도 밤새 죽지 않을까 걱정을 하며 품에 안고 재울 만큼 루이에게 재희는 각별했다.

“그것보다 형은 어제 또 집에 안 들어왔더라? 엄마 걱정하시는데.”

“걱정은 무슨. 내가 집에 안 들어온 게 뭐 한두 번인가? 참! 맞다. 어제 형이 또 화끈하게 놀다 만난 남자가 있는데….”

“제발 그 입 좀!!”

재희가 재빨리 그의 입을 막으며 소리쳤다. 형인 루이의 성 정체성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부모님은 모르시기에 늘 조마조마한 재희와는 달리 루이는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들키면 들키는 거고 걸리면 걸리는 거고. 하지만 입양 와서 자신에게 온갖 정성과 사랑을 쏟아 부어준 부모님의 슬픈 모습을 보기 싫은 재희는 항상 자유분방한 루이의 입을 조심시키기 바빴다.

“아무튼. 어제 내 생애 최고의 남자를 만났거든. 지금 생각해도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제 나왔나 싶을 정도로 멋진 남자.”

“그렇게 좋았어? 그럼 붙잡지 그랬어?”

재희가 아쉬워하는 루이의 무릎을 베고 누우며 물었다. 그리고 동시에 재희도 어제 만난 혜원을 생각하며 입가에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데 결혼했데. 여자랑. 게이 주제에.”

“혀, 형.”

이어지는 말에 재희는 벌떡 일어나 안타까운 눈으로 루이를 바라봤다.

왜 항상 이렇게 가망 없는 아픈 사랑만 하려는 건지. 언제나 그의 사랑은 위태로웠고 가슴 아프기만 했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만 고집하는 루이를 보며 오늘도 재희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청개구리마냥, 좋다는 사람은 마다하고 자꾸 힘든 길만 걸으려 하는 형의 모습에 재희의 눈가가 어두워졌다.

“재희야.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마라. 형 설렌다. 나 동양인들한테 약한 거 알잖아. 너 진짜 내 동생만 아니었으면 딱 내 스타일인 거 알지? 내 앞에서 조심해. 그리고 나 그 남자 포기한 거 아니야. 정략결혼이래. 그 말인즉 나한테도 기회는 아직 있다는 거지.”

“하…. 힘들다. 루이 형.”

장난스럽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트리는 루이를 보며 재희가 다시 그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우며 말했다.

“괜찮아. 다시 내가 그를 가질 거니까. 그러니까 난 괜찮아 재희야.”

지독한 소유욕. 그리고 한번 마음에 담은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가지고야 마는 루이의 정신병적인 집착. 어느덧 윤결을 향한 그의 맹목적인 사랑이 서서히 눈을 뜨려 했다.

**

한편 혜원은 오늘따라 밖에 나갈 생각을 안 하고 호텔에 처박혀 꼼짝도 안 하는 윤결의 모습에 속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빨리 재희를 만나러 가야 하는데 저놈의 인간은 왜 나갈 생각을 안 하는 건지!! 혜원은 우선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서며 그를 향해 심드렁한 얼굴로 슬쩍 말을 흘렸다.

“오늘은 어디 안 나가세요? 전 지금 나갈 건데.”

“뭐? 어딜 가는데? 혼자?”

“그, 그냥 산책이요.”

“그럼 같이 가.”

윤결이 보던 책을 덮고는 안경을 벗어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 아니에요! 책 마저 보세요. 전 혼자 다녀올게요. 멀리 갈 것도 아니라. 괜찮아요.”

“길도 모르고 겁도 많으면서 혼자 어딜 간다고. 기다려 같이 가게.”

윤결이 정말 같이 나갈 심산인지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손에 들며 말하자, 혜원은 재빨리 그를 다시 소파에 앉히며 말했다.

“저 호, 혼자 갔다 올게요! 정말 괜찮아요. 저는 전혀 신경 쓰지 마세요. 기분 전환도 할 겸, 조심해서 다녀올게요. 지금은 또 낮이라 거리에 사람들도 많고….”

“그래. 알았으니까 그럼 조심해서 다녀와. 일찍 들어오고. 너무 멀리 가지 말고!”

“네! 다녀올게요!!”

뭔가 많이 의심쩍은 혜원이었지만 윤결은 우선 자리에 앉아 알겠다고 말하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제야 환한 웃음을 지으며 쏜살같이 호텔을 빠져나가는 혜원의 모습에 윤결은 역시 그를 혼자 보내기엔 왠지 모르게 불안해졌다.

결국, 걱정 끝에 혜원의 뒤를 따라가기로 한 윤결은 호텔을 벗어나자마자 가발과 브라 그리고 뽕을 재빨리 벗어 가방에 집어넣는 혜원을 보고는 혀를 찼다.

‘어쭈? 간단히 산책만 한다더니 왜 가발은 다 벗고 난리래?’

슬슬 의심이 커지기 시작한 윤결은 그의 뒤를 바짝 쫓기 시작했다. 마치 바람피우는 와이프의 불륜 현장을 밟는 것처럼 윤결은 왠지 모를 묘한 긴장감에 얼굴이 어둡게 굳어갔다.

“형! 나 이제 호텔 나가요. 우리 어제 만났던 에펠탑 앞에서 볼래요?”

[아, 그래? 나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잠깐 먼저 근처 구경하고 있을래? 샤요궁전 한번 가 봐도 좋고. 거기서 에펠탑 내려다봐도 예쁘거든. 내가 최대한 빨리 갈게 혜원아. 꼭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응! 천천히 와요. 재희 형!”

전화를 끊은 혜원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에펠탑으로 향했다. 이미 어제 한번 와 봤던 곳이라 무섭진 않았다. 하지만 혜원의 생각과는 달리 이곳은 관광객에게는 너무도 위험한 곳이었다.

사방이 구걸하는 사람과 소매치기들 천지라 아무런 정보도 의심도 없는 혜원은 정말이지 딱 잡아먹히기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눈에 혜원의 최신형 핸드폰이 딱 걸려들었다.

두 명의 남자가 혜원에게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더니 손짓으로 혜원의 휴대폰을 가리키며 전화를 한 번만 빌려도 되겠냐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단순히 전화를 빌려달라는 그들의 행동에 순진한 혜원은 웃으며 휴대폰을 빌려주었다. 그러자 남자들은 휴대폰을 건네받자마자 무서운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야!! 안 돼! 내놔! 그거 내놔 이 도둑놈들아!”

당황한 혜원이 그들을 향해 같이 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자신의 눈앞에서 혜원이 사라지자 놀란 윤결도 사람들을 밀치며 마구 뛰기 시작했다.

“강혜원!! 어디 있어? 대답해!!”

아무리 불러도 혜원은 대답이 없었고 대체 어디로 뛰어갔는지 알 수도 없었다. 윤결은 숨이 턱 막혀 오며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파리…. 이 위험한 도시에서 혜원이 사라졌다.

**

“야! 거기 서!! 내 전화기 내놔!! 빨리 내놔!”

혜원은 정체불명의 남자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있는 힘껏 달렸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도 빨랐고 골목골목을 제집처럼 휘젓고 다니는 통에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허탈하게 남자들을 놓쳐버리자 혜원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울상을 지으며 신세 한탄을 하기 시작했다.

“하아…. 안 되는데. 차라리 지갑을 가져가라고. 재희 형이 전화할 건데. 아. 정말 어떡해. 내 전화기….”

억울하고 원통함에 한참을 울먹이던 혜원은 결국 휴대폰을 포기하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탈탈 털며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작정 뛰기 바빴던 혜원은 대체 여기가 어딘지, 어느 골목으로 가야 큰길이 나오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아까부터 자꾸만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또 다른 무리 때문에 슬슬 겁도 나기 시작한 혜원은 발걸음을 재촉해 빨리 걷기 시작했다.

걸어도 걸어도 오래된 집들이 즐비한 으슥한 골목만 나올 뿐 그 흔한 상가나 가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순간 언제 왔는지 낯선 무리의 남자들이 가까이 다가와 혜원을 둘러싸며 빠르게 말을 걸어왔다. 당연히 알아들을 리 없는 혜원은 뒷걸음질과 함께 고개를 마구 휘저으며 프랑스 말을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저… 몰라요. 무, 무슨 말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고요. 보, 보내주세요. 저, 저리 가요!”

하지만 그들은 더욱더 혜원을 조여 오며 자신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지껄이더니 한 명씩 혜원의 팔을 붙잡고 결박하기 시작했다.

“아악! 저리 가! 이, 이거 놔!!”

말도 안 통하고 도움도 구할 수 없는 외진 곳에서 너무 무서워진 혜원은 발버둥을 치며 그들에게서 벗어나려 애를 썼다. 그들은 혜원의 반항이 거세지자 재빨리 그의 주머니를 뒤져 귀중품과 돈을 꺼내 챙겼다.

“손대지 마!! 아악! 저리 가란 말이야!! 무, 무서워! 형아!! 혜윤아!!”

자꾸만 버둥거리는 혜원이 귀찮아진 남자들은 혜원의 배를 집중해서 때리기 시작했다. 명치를 강타한 극심한 고통에 혜원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앗… 아흑…. 아, 아파….”

그들은 아무리 뒤져도 원하는 만큼의 돈이 나오지 않자 화가 난 듯 혜원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쳐버리고는 한 명씩 돌아가며 그에게 발길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혜원은 최대한 손으로 머리를 가리고 몸을 동그랗게 말며 그들의 폭력을 피해 보려 했다. 하지만 그들의 숫자는 너무 많았고 혜원은 너무 약했다.

피할 새도 없이 퍼붓는 공격에 혜원은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순간 골목에서 혜원을 애타게 부르는 윤결의 목소리가 들리자 남자들은 재빨리 혜원의 가방과 얼마간의 돈을 챙겨 골목 안쪽으로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쳐버린 혜원은 그대로 차가운 길바닥에 쓰러진 채 신음만 흘려댔다.

“혜원아!!”

정신없이 골목을 들쑤시고 다니던 윤결이 한쪽 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쓰러져있는 혜원을 발견했다. 한눈에 봐도 엉망이 되어있는 심각한 혜원의 상태에 그는 분노가 치솟았다.

“혜원아. 정신 차려봐 응?? 눈 좀 떠봐!”

“아파… 형아…. 나…. 너무… 아파….”

혜원은 가물거리는 정신으로 자신에게 달려오는 윤결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번쩍 안아 들고 서둘러 어디론가 향하는 윤결의 얼굴을 멀어져 가는 의식으로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꼭 왕자님 같다. 어디서 봤는데. 이 얼굴, 어디서 많이 봤는데….’

한참 무언가 기억하려는 듯 눈을 깜빡이던 혜원은 결국 밀려오는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눈을 감아 버렸다.

윤결은 의식을 잃은 혜원을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 응급치료와 정밀 검사까지 다 받고 큰 외상은 없다는 의사의 말에 그나마 한시름 놓았다. 하지만 그의 하얗고 마른 가슴과 허리엔 어느새 여기저기 긁힌 자국과 시퍼런 멍들이 생겨 버렸다. 어디가 아픈 건지 잠결임에도 눈을 움찔거리는 그의 모습에 윤결은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바로 옆에 있었다. 그럼에도 혜원을 지키지 못하고 놓쳐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그를 이렇게 다치게까지 했다는 사실에 윤결은 절대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혜준이 절대 떨어지지 말라고 부탁까지 했었다. 겁도 많고 눈물도 많다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윤결은 아직 깨어나지 못하는 혜원의 작은 손을 붙잡고 그의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쓸어 주며 말했다.

“혜원아 많이 아파? 눈 좀 떠봐 제발…. 내가 미안해. 지켜주지 못해서 형이 너무 미안해.”

**

혜원은 오랜만에 꿈을 꿨다. 어린 시절 혜윤과 숨바꼭질을 하던 꿈이었다. 옷이 더러워질까 봐 안 한다고 했는데 바득바득 우기며 끝까지 고집을 피워대는 혜윤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숨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장미 덩굴에 들어가 숨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혜윤은 자신을 찾으러 오지 않았다. 비도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하고 몸도 으슬으슬 떨려 점점 눈이 감겨왔다. 그렇게 한참을 자고 일어나도 아무도 자신을 찾으러 오지 않았다. 무서운 마음에 혜원은 울기 시작했다.

“엄마 무서워. 아빠…. 흑흑…. 나 너무 무서워.”

순간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은 동화책 속의 잘생긴 왕자님이 다가와 자신을 안아주며 어디론가 데려가 주었다. 그리고 그때 혜원은 그 왕자님을 올려다보며 말했었다.

“으응? 하아…. 왕자님이다. 혜윤이랑 동화책에서 봤던 왕자님이다. 혜원이 구해주고 나중에 혜원이랑 결혼하는 왕자님이다. 헤헷….”

서서히 꿈에서 깨어난 혜원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조금 전 그 꿈속에서 본 왕자님이 자신의 손을 잡고 슬픈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혜원아! 정신이 들어?? 나 보여?”

끄덕끄덕….

말하는 것조차 버거웠는지 혜원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이 사람이었구나. 그날 정원에서 나를 찾아 준 사람이. 이번에도 나를 찾아 줬구나. 나를 또 구해줬구나. 그게 당신이었구나….’

“혜원아. 많이 아파?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

‘아픈 데? 불편한 곳? 글쎄. 여기저기 다 아픈데…. 그렇다고 다 아프다고 말할 순 없잖아. 지금도 이렇게 걱정만 하는데. 괜히 더 걱정하겠지?’

혜원은 말없이 고개를 저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냥 빨리 다시 호텔로 돌아가고 싶었다. 지금은 그저 자신이 제일 안전하다고 생각한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나…. 빨리 호텔로 돌아가고 싶어요.”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혜원의 얼굴을 다정하게 어루만져주며 윤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돌아가자. 같이 가자 혜원아.”

눈물이 날 것같이 따뜻한 그의 말을 끝으로 혜원은 또다시 밀려오는 약 기운에 흐릿해지는 눈을 감았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너무도 무섭고 고단한 하루였다.

하지만! 이날 혜원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윤결이 자신을 혜원이라고 부른 것을 말이다.

**

다음 날 혜원은 여기저기 쑤시고 결린 몸으로 눈을 뜨며 어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도난 사건. 그리고 집단 폭행. 하지만 그것 말고도 지금 혜원은 중요한 무언가를 잊은 느낌이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윤결의 외침.

혜원은 어제 다른 사람도 아닌 윤결이 자신을 구하러 왔었다는 것이 기억나 버렸다. 사색이 된 얼굴로 갑자기 번뜩 무언가 떠오른 혜원은 헐레벌떡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맙소사!!’

어제 잃어버린 가방 안에 있던 가발과 뽕브라. 자신의 생명줄과도 같은 것들을 결국 모두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혜원은 갑자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지금 이따위 얼굴 터진 게 문제가 아니었다. 저 차갑고 무시무시한 윤결이라면, 자신이 혜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정말로 자신을 잡아먹으려 할지도 몰랐다.

시간이 필요했다. 최대한 길게 시간을 끌어야 했다.

혜원은 재빨리 이불 속으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자는 척. 지금은 자는 척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미 깨버린 잠은 다시 와주지 않았고 언제 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올지 모르는 윤결 때문에 혜원은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결단의 시간이 오고야 말았다.

겁먹은 혜원이 눈을 꼭 감고 몸을 바들바들 떠는 동안 윤결이 연고와 약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어느덧 침대맡에 앉아 혜원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혜원은 눈을 작게 움찔거리며 참았다. 절대 눈을 뜨면 안 된다, 절대 눈을 뜨면 안 된다 스스로 주문을 외우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의 어설픈 연기는 세 살짜리 어린애도 다 알아차릴 만큼 어색했다.

윤결은 대체 언제까지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하고 있을지 호기심이 생겨 그의 얼굴을 살살 쓰다듬기 시작했다. 점점 더 크게 경련하면서도 눈꺼풀을 뜨지 않기 위해 무진장 애를 쓰는 혜원을 보니 점점 더 그를 놀려 주고 싶어졌다. 윤결은 슬그머니 혜원의 잠옷 상의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가느다란 옆구리를 스쳐 지나며 그의 앙증맞은 유두에 손을 대는 순간! 참지 못한 혜원이 소리를 꽥 지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버렸다.

“으아악!! 손 치워요!!”

“드디어 일어났네. 언제 일어나나 했어. 강혜원.”

윤결은 혜원의 이름을 정확히, 또박또박 불렀다.

‘어버버버…!!!’

혜원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방황하기 시작했다.

‘난 이제 강혜윤한테 맞아 죽고 말 거야. 이씨… 이럴 거면 그냥 어제 깡패들한테 맞아 죽을걸! 강혜윤이 훨씬 더 무서운데!’

정말이지 어제부터 되는 일이 없단 생각만 들었다. 동시에 혜원은 앞으로 이 남자의 손에 달린 자신의 운명이 너무 처량하게 생각됐다.

“너희들. 이게 언제까지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어?”

“네, 네? 뭐, 뭐가요? 하하…. 저 아세요? 그러니까 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혜원은 그에게서 최대한 멀찌감치 떨어져 서서 머리를 긁적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차하면 그대로 줄행랑이라도 칠 기세였다.

“혜준이 오고 있어. 오늘 도착할 거야.”

“네? 마, 말도 안 돼!! 우리 형이 알아요? 정말요? 혜, 혜윤이는요? 혜윤이도 와요?”

혜원은 혜준이 오고 있다는 말에 깜짝 놀라면서도 나름 혜윤이도 같이 오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품었다. 그럼 자신은 안전하게 이 위험한 남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으니깐 말이다. 그래도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는 생각에 어느새 죽을상이던 혜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네가 혜윤이라면 오겠냐?”

“아, 아니요….”

너무도 정곡을 찌르는 윤결의 말에 역시 자신은 이제 죽을 일만 남았다 생각한 혜원은 다시 울상을 지으며 급 시무룩해졌다. 그럼 그렇지. 혜윤이 자신을 구하러 올 리 없었다. 결국은 또 자신만 혜준 형과 이 남자에게 붙들려 죽어나게 생겼다고 생각하니, 정말 어디로든 도망가고만 싶었다.

“자 그럼. 겁대가리 상실한 혜원 군. 우리 혜준이 오기 전에 거래 하나만 할까?”

“거, 거래요?”

불안한 표정의 혜원은 이 남자가 또 자신에게 무슨 엉뚱한 거래를 하자는 것인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왠지 이 남자는 강혜윤급으로 위험해 보였다.

만약 이 둘이 정말로 결혼을 했으면 피 터지게 싸우며 매일같이 경찰이 출동했을지도 모를 만큼 말이다.

“잘 생각해봐. 어른들은 우리가 결혼한 줄 알고 있고 혜윤은 미국에서 돌아올 생각이 없고. 하지만 나는 너와 이대로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것에 불만이 없어. 너는 어때?”

“저, 저요? 그, 그게 무슨….”

뜬금없는 윤결의 말에 혜원은 선뜻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힐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괜찮다니?’

남자인 자신과 이 위장 결혼을 유지하는 것에 아무런 불만이 없다고? 이 남자 대체 뭐지?

“내 말은 일을 크게 벌이지 말자는 거야. 당분간 어른들은 네가 혜윤으로 알고 계시게 놔두자고. 어차피 혜윤은 지금 당장 한국 올 마음 따윈 없는 것 같은데. 뭐 물론 그 마음이 당분간인지 평생인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아, 아니에요! 꼭 돌아올 거예요. 설마 저를 그쪽이랑 평생 살게 할 생각은 아닐 거라고요. 잠시 머리만 식히고 분명 돌아올 거예요. 혜윤이가 아무리 못돼먹은 마녀라도 저를 이렇게 버릴 아이는 아니라고요!”

혜원이 발끈하며 말했다. 그렇게 혜윤에게 속으면서도 혜원은 아직도 그녀를 굳게 믿고 있었다.

“과연 그럴까? 혜윤인 처음부터 다시 돌아올 생각 따윈 없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지금 사실대로 어른들께 말씀드리면 아마 네 분 모두 쓰러지실걸? 특히 할아버지께서는 연세도 많으신데 과연 이 충격을 버티실지. 그럼 혜윤은 또 어떻게 될까? 잘 생각해 혜원아.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현명한 선택이 무엇인지.”

그의 말대로 지금 이대로 한국에 들어가서 이실직고를 해봤자 혜윤은 안 끌려오겠다 버틸 것이고 끌려와도 죽는다고 난리를 칠 것이다. 그러면 자신은 또 죄인처럼 혜윤에게 맞아 죽겠지?

하아…. 그냥 자신 하나 희생하면 모두가 행복할 것 같은 이 미묘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혜원은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이내 결심한 듯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 그럼 당분간 혜윤이가 진정하고 돌아올 때까지만 유지하는 거로 해요.”

“좋아.”

윤결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걸려들었다. 이 순진한 혜원은 그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물었고, 윤결은 이제 그가 자신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혜윤은 절대, 절대 혜원을 위해 자유를 포기하고 돌아올 녀석이 아니었다.

윤결보다도 더 혜윤을 모르는 불쌍한 혜원. 그리고 그런 그를 돌볼 사람은 앞으로 자신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윤결은, 어리바리 순둥이 혜원과의 결혼생활이 왠지 재밌을 것 같은 예감마저 들었다. 이대로 쭉 데리고 살아도 될 만큼 혜원은 귀여웠으니까 말이다.

“그, 그리고 그 혼전 계약서 꼭 지키세요!”

“어떤 부분?”

“그, 그러니까…. 사, 사생활 침해하지 마시라고요.”

“쪼그만 게 사생활 침해는. 알았고 너도 앞으로 내 와이프 역할은 똑똑히 해야 할 거야.”

“와, 와이프 역할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혜원은 생각지도 않던 충격적인 ‘와이프 역할’이라는 발언에 눈에 바짝 힘을 주며 놀란 고양이 같은 얼굴로 소리쳤다.

“난 직장인이야. 회사에 다니고 있고 거기다 임원이야. 모임도 당연히 많이 있고. 거기에 맞게 부부 동반 모임도 있을 거라는 거지. 그리고 중요한 모임엔 너도 나와 같이 얼굴을 비춰야 해.”

“제, 제가요?? 말도 안 돼. 못해요! 저 그런 거 못 해요. 진짜!!”

“왜 못해? 이렇게 철저하게 나를 속이고 신혼여행까지 따라온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별로 어려운 거 없어. 그냥 앉아 있다가 오기만 하면 돼. 어차피 네가 한참이나 어린 거 다 알고 있으니까. 거기다 네가 누구네 집 자식인지 다 아는데 감히 누가 널 건들겠어? 걱정할 거 없어. 그냥 얌전히 내 옆에만 있으면 돼.”

“아, 알겠어요. 그럼 그거 말고는 없는 거죠? 진짜 더는 없는 거죠?”

혜원이 여전히 의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흘겨보며 물었다.

“그래. 우선은 그게 다야. 겁먹기는. 귀엽게.”

“거, 겁먹는 거 아, 아니거든요! 칫. 이런 건 걱정이라고 하는 거죠. 걱정! 아 몰라. 나중에 걸려도 난 몰라요. 진짜.”

“알았어. 그럼 이따가 혜준이 오면 이렇게 우리는 만장일치 본 거로 통보할게. 이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이니까.”

“그렇게 하든가요.”

“그럼 쉬어. 조금 이따가 브런치나 먹으러 나가자.”

“네….”

뭔가 찝찝한 듯했지만, 그의 말대로 지금은 이게 최선인 듯했다.

혜원은 갑자기 더 복잡해진 것 같은 상황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그의 단순한 머리통이 생각할 수 있는 건 그저 어른들 앞에서는 절대 들키지 말자, 이것뿐이었다.

방으로 들어온 혜원이 침대에 벌러덩 누워 어제 한심하게 잃어버린 아까운 휴대폰을 생각하다 문뜩 재희와 약속했던 것이 생각이 났다.

“히익! 어떡해! 으악. 재희 형!! 난 정말 미친놈이야. 어떻게 그걸 잊고 있을 수 있어!”

혜원은 벌떡 일어나 자신의 머리를 마구 쥐어박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이미 휴대폰은 행방불명된 지 오래고 재희의 번호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정말이지 울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프랑스 타지에서 만난 소중한 형인데…. 혜원은 시무룩해진 얼굴로 베개에 머리를 파묻으며 소리쳤다.

“아. 진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

어느새 말끔히 차려입은 윤결은 혼자 방에서 이유 모를 발악을 해대는 혜원을 데리고 근처 브런치 맛집으로 향했다.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혜원을 위해 나름 샐러드로 유명한 레스토랑을 선택했다. 역시나 예상대로 혜원은 눈을 반짝이며 좋아했다.

웨이터가 테이블에 접시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혜원은 허겁지겁 연어 샐러드를 먹기 시작했다.

“우와! 이거 진짜 맛있어요! 이거 드레싱이 뭐지? 제가 먹어 본 것 중 최고예요!”

정말이지 새콤달콤한 것이 딱 초딩 입맛인 혜원에겐 완벽한 맛이었다. 먹어도 먹어도 자꾸 손이 가는 샐러드에 푹 빠진 혜원은 어느덧 자신의 몫을 다 먹어 치우고도 조금 부족한지, 전혀 손도 대지 않은 윤결의 샐러드를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그거 안 드시면 음식물 쓰레기 만드시는 건데.”

“그럼 네가 대신 먹어 주면 되겠네. 먹을래?”

“그, 그럴까요? 이대로 버리면 아, 아까우니까요! 정말 제가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까우니까…. 그럼…. 헤헤!”

먹어도 된다는 윤결의 말에 혜원은 재빨리 샐러드를 자신의 앞으로 가져왔다. 그리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작은 입을 바쁘게 움직이며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윤결은 고작 이런 샐러드 하나에 신이 난 혜원의 모습이 귀여웠다. 어디서 애완동물을 데려와 길러도 지금의 강혜원보다 귀엽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정신없이 샐러드를 먹고 있는 혜원의 볼에 살짝 묻은 드레싱을 닦아주고 싶은 마음에 윤결이 그의 뺨에 손을 대려는 찰나, 누군가 그를 아는 체하며 윤결의 앞에 멈춰 섰다.

“윤?”

“어? 루이?”

“아니 여긴 어쩐 일이야? 브런치 중인 거야? 그 옆에 꼬마는 누구?”

루이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양 볼에 연어와 샐러드를 빵빵하게 넣은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혜원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 있어. 말썽꾸러기 꼬마.”

“설마, 네가 말한 그 꼬마 신부?”

“아니. 그 신부는 이 꼬마의 쌍둥이 누나. 사정이 있어서 일이 좀 꼬여 버렸어. 그러는 너는 여기 어쩐 일이야?”

“나도 동생이랑 브런치 먹으러 왔어. 이 집이 파스타랑 샐러드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잖아.”

“그래? 그럼 잘됐네, 같이 합석하자. 어차피 이 시간에는 자리도 없을걸?”

“나야 좋지. 그런데 얘는 어딜 가서 아직 안 오는지.”

루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멀리서 재희가 손을 흔들며 그에게 다가왔다.

“형! 여기 자리가 없는 거 같은…. 어?? 혜원?”

자리가 없어 난감해하던 재희는 루이에게 다가가던 중 혜원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며 그를 불렀다.

“어? 재희 형!! 진짜 미안! 나 어제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다시는 형 못 보는 줄 알고…. 형 어제 나 많이 기다렸어? 글쎄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면…!”

혜원은 보고 싶었던 재희를 우연히 만나게 되자 너무 반가운 나머지 먹던 샐러드도 마다하고 그에게 조잘조잘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혜원아 천천히. 숨 좀 쉬면서 말해.”

“뭐야, 둘도 아는 사이야?”

이미 서로 알고 있는 듯 너무도 다정한 둘의 모습에 루이가 재희를 자신의 옆자리에 앉히며 물었다.

“아, 응. 어제 그제 왜 형 외박하고 온 날 우연히 에펠탑 앞에서 만나서 같이 돌아다니다가 저녁 먹었거든. 같은 한국인이기도 하고 그때 혜원이가 소매치기를 당해서 돈도 없어서 겸사겸사? 그래서 그때 친해졌어.”

순간 윤결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지며 혜원에게 물었다.

“야, 강혜원. 너 첫날부터 소매치기당했어?”

“어? 어, 어 그, 그게 나도 몰랐어요. 사진 찍느라 주머니 속에 넣어둔 돈이 없어진 줄 몰랐어요. 미안요.”

“너 진짜!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한테 먼저 말을 했어야지!”

“아, 아니 말을 할 시간도 없었잖아요!! 그쪽은 그날 집에 오지도 않았으면서!”

생각하고 싶지 않던 그날의 무서웠던 기억이 떠오르며 급격히 서러워진 혜원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어느덧 그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기 시작했다.

‘누군 뭐 소매치기당하고 싶어서 당했나? 그날 혼자 얼마나 무서웠는데! 자기는 외박까지 하고 온 주제에!!’

혜원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버럭 화부터 내는 윤결의 호통에 억울함이 밀려왔다.

“그, 그래 윤. 그만해. 그날은 윤이 외박했잖아.”

그 외박을 하게 만든 장본인인 루이가 머쓱해진 얼굴로 윤결을 말리며 말했다. 물론 윤결도 혜원이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빨리 알았더라면, 만약 혜원이 혜윤이 아니었다는 걸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더라면 자신은 어쩌면 그날 바에 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윤결은 괜히 그날 루이와의 원나잇이 후회가 됐다.

“하아…. 화내서 미안해 혜원아. 다신 그런 일 없을 거야.”

“됐어요. 그러든지 말든지. 칫….”

윤결의 사과에도 혜원은 좀처럼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그가 준 돈을 잃어버린 것 때문에 말도 못 하고 혼자서 얼마나 애를 태웠는데. 자신의 마음도 모르고 버럭 소리만 내지르는 윤결 때문에 혜원은 이미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해버렸다.

“그런데 혜원아, 너 얼굴이 왜 이래? 어제 무슨 일 있었지!”

순간 재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혜원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물었다. 분명 이전에 없던 멍 자국과 긁힌 상처들이 그의 작은 얼굴에 가득했다. 재희는 심상치 않은 혜원의 얼굴이 신경 쓰였다.

“그게 어제 형이랑 통화하고 바로 휴대폰을 도둑맞았거든. 그거 찾으려고 따라가다가 이렇게 돼버렸어. 헤헤….”

“야, 강혜원! 여기가 한국인 줄 알아? 여기선 그런 사람 쫓아가면 안 돼. 더 위험해진다고. 잃어버렸으면 다음부터는 그냥 포기해. 알았어?”

재희는 어제 그를 혼자 있게 해서 이렇게 됐단 생각에 죄책감이 들었다. 괜히 먼저 구경하고 있으라고 한 것 같아 미안함이 밀려왔다.

“그래도 이쪽이 구하러 와줘서 이만한 거야. 아니면 더 얻어터졌을걸?”

혜원은 괜찮다는 듯 윤결을 힐끔 올려다보며 말했다.

“자랑이다 강혜원. 앞으로 진짜 너 혼자 다니기만 해봐!”

윤결은 너무도 천진난만한 혜원의 말에 어이가 없어 한 소리 했다.

얻어터진 게 뭐가 좋다고 저리도 해맑게 웃는지. 아직도 윤결은 어제 일만 생각하면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데 말이다.

정말로 혜원을 잃어버리는 줄만 알았다. 다시는 못 보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이런 자신의 답답한 속도 모르고 철없는 꼬맹이처럼 실실 웃는 그의 모습에 화가 나려 했다. 하지만 역시 그의 말대로 혜원을 혼자 둔 건 자신이었기에 윤결도 더는 그를 다그치지 못했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 다시 만난 반가움에 함께 브런치를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어느덧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재희 형, 전화번호 알려주라. 내가 한국 가서 휴대폰 사면 꼭 연락할게. 이번엔 절대 안 잃어버릴게.”

“그래, 자 이건 내 전화번호고 이건 내 이메일이야. 이번엔 절대 잃어버리지 마. 알았지?”

“응 재희 형! 오늘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 우리 다음에 꼭 한국에서 만나자. 꼭이다!”

어떻게 재희에게 연락해야 할지 몰라 고민만 하고 있던 혜원은 기적처럼 자신의 앞에 나타나 준 그가 너무도 고마웠다. 혜원은 이대로 재희를 보내기 아쉬운 듯 덥석 그의 품에 안기며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다.

“윤. 나도 반가웠어. 이렇게 밥도 사줘서 고맙고. 안 그래도 되는데. 언제 우리 둘이 한잔 안 할래?”

“고맙긴. 뭐 얼마나 한다고. 혜원이가 신세 진 것도 있고. 그나저나 한국 가기 전까지 시간이 날지는 잘 모르겠네. 나중에 시간 되면 보고 아니면 언제 한번 한국에 놀러 와.”

헤어지기 싫어 아쉬운 마음에 루이도 윤결을 살며시 끌어안으며 그의 뺨에 키스를 했다.

물론 윤결에게는 단순한 인사였을지 몰라도 루이는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그의 뺨에 닿고 싶었다.

“Au revoir.” (다시 만나요.)

루이는 천천히 그를 놓아주며 멀어지는 윤결을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루이의 곁으로 재희가 다가와 그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 안으며 말했다.

“형이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저 윤결이라는 남자.”

“응.”

“멋있네. 형이 좋아할 만큼.”

“가지고 싶어 재희야. 물론 그렇게 될 테지만.”

루이가 부드러운 재희의 머리카락을 지분거리며 말했다.

너무도 탐이 났고 욕심이 났다. 어디에 내놔도 눈부시게 잘난 저 남자를 루이는 꼭 자신의 옆에 두고 싶었다.

**

만족스러운 점심을 마친 둘은 곧장 공항으로 향했다. 이제 슬슬 혜준이 도착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혜원은 너무도 보고 싶었던 형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미 흥분할 대로 흥분해 있었다.

항상 어렸을 때부터 혜윤에게 시달리고 있으면 쏜살같이 달려와 자신을 달래 주며 지켜준 엄마 같은 형이었다. 몸이 약해 자주 나가 놀지 못했던 혜원과 놀아주고 늘 그를 자신의 품에 끼고 살던 혜준. 그만큼 혜원은 혜준에게 각별했고, 혜원 역시 혜준에게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목이 빠지게 출구를 바라보며 조바심을 내던 혜원은 멀리서 그토록 보고 싶던 혜준의 얼굴이 보이자 한걸음에 달려 나가 그에게 안겼다.

“혜준 형!!”

“야! 강혜원! 이 말썽꾸러기가 정말!!”

혜준도 짐이고 뭐고 다 팽개쳐 버리고 달려와 혜원을 끌어안았다. 정말이지 누가 보면 몇십 년 만에 만난 이산가족 상봉인 줄 알 만큼 요란한 형제의 만남. 윤결은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형! 너무 보고 싶었어!”

“퍽이나 그랬겠다. 너 오늘 진짜 형한테 엉덩이 맞을 각오 하고 따라와 강혜원! 잠깐. 야, 너 얼굴! 얼굴은 또 왜 이래! 야, 한윤결!! 내 동생 왜 이래!”

혜준은 이곳저곳 상처 난 혜원의 얼굴을 살펴보며 분노를 참지 못했다. 벼락같은 혜준의 외침에 윤결은 슬슬 자리를 피해 그의 짐을 들고 서둘러 공항 밖으로 피신했다. 멀리서 씩씩거리며 죽일 듯이 쏘아보는 혜준의 눈치를 살피던 윤결이 작은 목소리로 그들을 부르며 말했다.

“태, 택시 떠난다. 빨리들 와.”

“나 진짜 괜찮아! 형, 빨리 가자!”

어느새 자신의 품에 안겨 애교를 피우며 괜찮다는 혜원을 보니 혜준은 또 한없이 마음이 약해졌다. 하…. 정말 이것들을 어떻게 또 바꿔 놓아야 할지! 그저 대책 없는 녀석들의 대형 사고 앞에 혜준의 한숨이 깊어만 갈 뿐이었다.

**

호텔에 도착한 혜준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이 어이없는 사건에 대해 캐묻기 시작했다. 역시나 자신의 예상대로 이 모든 게 혜윤의 독단적인 결정과 협박이었다는 사실에, 혜준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기며 소파에 앉았다.

여기서 시간을 끌어봤자 상황만 더 나빠질 것 같은 생각에 혜준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윤결에게 먼저 사과를 했다.

“윤결아 이번 일은 내가 미안하다. 많이 당황하고 놀랐을 거 알아. 하아…. 너한테는 정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다. 다시 한번 내가 사과할게.”

“난 괜찮은데?”

놀란 기색이나 싫은 기색 없이 너무도 느긋한 윤결의 반응에 혜준은 살짝 놀랐다. 하지만 그의 옆에서 죄인처럼 벌벌 떨고 있는 혜원을 보자, 어서 빨리 이일을 마무리 짓고 그를 데리고 한국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혜준은 살며시 혜원의 손을 잡으며 윤결을 향해 말했다.

“괜찮기는. 나도 이렇게 어이가 없는데 당사자인 너는 얼마나 황당했겠어. 내가 모두 다시 바로잡을게. 미안하다.”

“아니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아.”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건지, 왜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만 꺼내놓는 윤결의 말에 혜준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반면 이 모든 게 절호의 기회인 윤결은 조금 전 혜원과 합의했던 내용에 대해 차근차근 혜준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 말인즉, 지금 이대로 부모님께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다면 분명 더 큰 사달이 일어날 터이니 혜윤이 마음잡고 돌아올 때까지 혜원과 이 결혼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말이었다. 과연 이게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벌이는 일들인지! 혜준은 아무리 냉정하게 생각하려고 해도 윤결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이들 중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 그리고 가장 힘들 사람은 단연코 마음 여린 순둥이 혜원이였기 때문에 혜준은 이 결정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혜원 또한 혜윤을 위해서 다른 방도를 찾을 때까지 좀 더 이 결혼생활을 유지해 보겠다고 하니, 혜준으로서는 더는 무조건 안 된다고 반대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한숨만 팍팍 쉬던 혜준도 마지못해 그들의 계획에 동참하며 눈감아주었지만, 여전히 그는 불안했고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바로 당장 신혼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분명 윤결의 본가에 인사도 하러 가야 할 텐데, 혜원이 들키지 않고 잘 넘어갈 수 있을지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혜원의 모든 것이 걱정인 혜준은 이 순진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동생을 혼자 두고 가기가 너무 불안했다. 하지만 그 역시 부모님이 걱정하시지 않게 정상적으로 출근은 해야 했고, 또 아무리 제 앞가림 잘하는 당찬 혜윤이라도 아직은 어린 그녀를 너무 오래 혼자 둘 수는 없었다.

결국, 혜준은 다음 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혜원은 윤결과 남기로 했다. 그렇게 울보 혜원은 또다시 눈물범벅이 되고 말았다. 혜원은 형을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의 옷자락을 꽉 쥐어 잡으며 말했다.

“형. 한국에 꼭 자주 와야 해? 흑흑…. 알았지?”

“알았어. 휴가 때마다 갈게. 울지 말고. 정말 잘 할 수 있지? 힘들면 언제든지 형한테 말해 혜원아. 형은 너 힘든 거 싫어. 형이 다 해결해 줄 테니까 못 견디겠으면 언제든지 말해. 알았지?”

“응. 알았어. 형. 조심해서 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이산가족의 애틋한 헤어짐을 공항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눈물 콧물 다 짜내는 혜원의 모습에 윤결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이 눈물 많은 울보 꼬마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했다.

“강혜원. 혜준이가 가는 게 그렇게 슬퍼?”

“흑흑…. 네.”

“혜준이가 그렇게 좋아?”

“네에.”

“얼마만큼 좋은데?”

“결혼하고 싶을 만큼이요. 다른 사람 다 필요 없어요. 전 혜준 형만 있으면 돼요. 어렸을 때 꿈이 형이랑 결혼하는 거였는데. 우리 형을 또 언제 보냐고요!”

순간 윤결이 눈을 부릅뜨며 그를 노려봤다.

‘뭐 결혼?’

이 맹추 같은 꼬맹이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앞으로 자신이 쭉, 평생 같이 살 멋진 남편이 코앞에 있는데, 꼭 이렇게 생뚱맞은 사랑 고백을 터트려서 자신의 심장을 후벼 파야겠느냔 말이다. 정말이지 한마디 한마디 하나도 걸러지지 않고 그대로 쏟아내는 솔직한 혜원의 말들은 윤결의 가슴에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콕콕 내리꽂혔다.

“하아…. 이리 와 봐. 강혜원. 울지 마라. 너 그렇게 울면 이 형 가슴 아프다. 내가 잘해 줄게. 혜준이만큼 아니 그 녀석보다 내가 더 잘해 줄 테니까, 이렇게 울지 마, 혜원아. 그러니까 앞으로 나한테도 형이라고 불러. 윤결 형.”

“…응.”

혜원의 눈물에 마음이 약해진 윤결이 훌쩍이는 그를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어느새 윤결은 어디로 튈지 몰라 손이 많이 가는 혜원에게 진심이 되어가고 있었다. 윤결은 자신의 가슴을 파고드는 이 귀엽고 엉뚱한 소년이 어느 순간부터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혜원은 바람 따라 일렁이는 파도 같은 윤결의 마음에 움직일 수 없는 닻을 내리기 시작했다.

눈물로 혜준을 보내고 시무룩해 있는 혜원과의 마지막 하루 남은 신혼여행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 윤결은 야경 투어를 예약했다. 배를 타고 센강을 따라 바라보는 파리의 야경은 혜원에게 한 번쯤은 꼭 보여주고 싶은 멋진 광경이었다. 윤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프랑스에서의 마지막 추억은 불빛으로 반짝이는 파리의 야경으로 결정했다.

깜깜한 밤, 불빛들이 물결 위를 춤추듯 하늘거리는 모습에 이미 혜원은 들떠있었다. 배에 올라타자마자 혜원은 이 층으로 올라가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아름다운 파리의 모습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입가에 힘을 준 채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혜원의 모습은 역시나 사랑스러웠다. 흡사 먹이를 입에 물고 숨길 곳을 찾는 귀여운 다람쥐의 결의에 찬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아 윤결의 얼굴에도 곧 따뜻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배가 출발을 하고 양옆으로 보이는 주요 유명 건물들을 지나며 멀리서 반짝이는 에펠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혜원은 탄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물속에 뛰어들 기세로 배의 맨 앞쪽 난간을 향해 뛰었다. 그리고 그는 난간을 꽉 잡은 채 고개를 내밀어 차가운 강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소리쳤다.

“우와! 정말 예뻐요! 반짝거리는 별빛들 같아요. 윤결 형. 여기 너무 예뻐요! 나 이렇게 예쁜 곳 처음 와봐요!”

아무래도 강가라 밤에는 제법 바람이 세게 불기에 옷을 얇게 입고 나온 혜원이 부르르 팔을 떨며 말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윤결은 자신의 카디건을 벗어 그의 어깨에 걸쳐주며 말했다.

“혜원아. 이런 거 가지고 벌써 이렇게 감동하면 곤란한데. 난 아직 너에게 보여줄 것이 수백 가지는 더 남았으니까 말이야.”

“정말요? 헤헷…. 매일매일이 신혼여행이었으면 좋겠다.”

귀엽고 엉뚱한 혜원의 말에 윤결이 웃으며 생각했다.

‘나도 그래. 강혜원.’

그리고 살며시 혜원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아주었다.

**

한밤의 멋있는 야경 투어가 끝나고 윤결의 손을 잡고 호텔로 돌아온 혜원은 피곤한 듯 그대로 침대에 뛰어들었다.

“으.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잘 때는 호텔 이불 속이 최고야. 너무 좋다.”

“강혜원. 씻고 자. 빨리.”

“알았어요. 조금만 이렇게 있다가 씻을게요.”

혜원은 푹신푹신한 호텔 침대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왜 꼭 집에 있는 침대의 이불은 아무리 좋은 것을 사도 호텔 것과 비교하면 이렇게 편안하지 않은 것인지 정말 미스터리였지만 말이다.

어느덧 많이 고단했던 혜원은 조금만 잔다는 것이 그만 마성의 침대에 빨려 들어가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먼저 씻고 나온 윤결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따뜻한 수건으로 그의 얼굴과 손 그리고 발을 꼼꼼히 닦아주었다.

대충 혜원을 닦이고 나가려던 윤결은 잠깐 고민을 하는 듯하더니 살며시 혜원의 등 뒤에 몸을 뉘며 그를 끌어안았다.

“으응….”

귀여운 잠투정과 함께 몸을 동그랗게 말고 윤결의 가슴으로 파고드는 귀여운 혜원의 몸부림에 윤결은 웃음이 났다. 안고 잘 수록 포근한 곰돌이 인형을 안고 있는 듯한 편안한 느낌에 혜원의 목덜미에 살며시 얼굴을 내려 그의 체향을 맡았다. 그에게서 달콤한 향이라도 흘러나오는 듯 윤결은 부드럽게 자신의 코를 문지르며 혜원의 귓가에 속삭였다.

‘잘 자고 빨리 자라자. 내 어린 신부 혜원아.’

어느덧 윤결은 간만에 수면제라도 먹은 듯 혜원의 품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불면증을 달고 살던 윤결에게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물론 혜원이 그에게 날아든 것 자체가 윤결에겐 이미 기적의 시작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아침이 밝아 왔고 눈 부신 햇살이 창문 사이로 따갑게 내리쬐는 사이, 몸을 꿈틀거리던 혜원이 먼저 눈을 떴다. 그는 졸린 눈을 깜빡이며 아직 깨고 싶지 않다는 듯 다시 이불 속을 파고 들어갔다.

하지만 웬걸? 혜원은 뭔가 말캉한 듯 단단한 것이 자신의 등에 닿는 이질적인 느낌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으아악! 뭐, 뭐야!”

혜원은 깜짝 놀라 제 등 뒤를 돌아봤다. 언제 침실로 기어들어 왔는지 자신의 뒤에는 윤결이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고, 그의 분신이 아침 기상을 알리며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이 변태 아저씨가 진짜!!”

호텔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는 혜원의 비명에 윤결이 잠에서 깨어났다. 몸에 이불을 돌돌 만 채 경악에 찬 얼굴로 자신을 향해 입을 크게 벌리며 부르르 떠는 혜원의 모습에, 윤결은 그의 팔을 잡아 다시 자신의 옆에 눕히며 말했다.

“아침부터 시끄럽게. 좀 더 자.”

“아, 아 왜 여기서 자냐고요!! 형 침대로 가라고요!”

혜원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몸을 버둥거리며 말했다.

“어제 너 안 씻고 자서 내가 다 손수 닦아준 거 알지? 형 지금 많이 피곤해. 좀 조용히 자자. 아침부터 참새 새끼도 아니고. 넌 다 좋은데 가끔 너무 시끄러워.”

“아 정말!! 시, 시끄러우면 형 방으로 가라고요!!”

혜원은 피곤하면 자기 침대에서 편하게 잘 것이지 왜 자신을 인형처럼 끌어안고 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잘난 아래는 왜 아침부터 잔뜩 세우고 있는지! 혜원은 정말이지 이 위험한 형의 잠버릇을 알게 되자 점점 더 그와의 동거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 남자, 과연 믿어도 되는 걸까?!

하지만 이미 혜준 형은 떠나갔고 자신은 남겠다 선택했다. 그러니 이 모든 부작용도 자신이 다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받아들인 혜원은 이내 반항을 포기한 듯, 조용히 윤결의 옆에 몸을 말아 누우며 눈을 감았다.

차라리 깨어있는 것보단 잠이 드는 게 더 나을 듯했다. 그렇게 한차례 요란한 아침을 보낸 후 둘은 느지막이 일어나 공항으로 향했다.

‘안녕 파리. 안녕 에펠탑! 나중에 다시 올게.’

혜원은 차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 내내 창밖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파리의 황홀한 풍경을 감상했다. 모든 것이 처음이고 신기한 혜원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파리의 아름다운 경치를 눈에 담았다.

자신의 감정에 너무도 솔직하고 숨김없는 혜원의 모습에 윤결 또한 절로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졌다. 윤결은 천천히 손을 뻗어 혜원의 머리를 다정하게 어루만져주었다.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혜원을 보니 이리저리 새로운 꽃을 찾아 스치는 바람처럼 머물다가는 사랑이 아닌, 이젠 한곳에 정착하여 사랑을 뿌리내리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작은 녀석에게 그 사랑을 전부 쏟아부어, 그가 자신만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꽃으로 성장할 수 있게 그를 길들이고 싶어졌다. 그만큼 어느덧 혜원은 윤결의 마음속 깊이 자리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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