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운명적인 만남(1권) (1/12)

1. 운명적인 만남

[결혼식 전날]

“야 강혜원, 내 말 잘 들어. 내일 내 결혼식 끝나고 가는 유학, 미안하지만 그거 내가 가야 할 것 같아. 그러니까 넌 내일 나 대신 결혼식 끝나고 신혼여행을 가는 거야.”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강혜윤!!”

“확! 너 내일 신문기사 일면에 나 죽었다는 기사 대문짝만하게 실리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그렇게 하는 거다!”

눈을 부릅뜬 혜윤이 혜원의 턱을 잡아 살살 흔들며 협박했다.

“아니 그게 말이 되냐고!!”

항상 엉뚱한 일들로 자신을 못살게 구는 혜윤이었지만 정말이지 혜원은 이번만은 참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 무시무시한 남자랑 신혼여행을 대신 가라는 건지! 아무리 자신의 쌍둥이 누나라지만 대책 없는 여자였다.

“왜 못해! 잠깐만 하고 있어. 나중에 내가 바로잡아 줄게. 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고. 내가 우선 해외로 도망가고 나면 부모님도 어쩔 수 없이 널 이혼시켜서라도 빼내 올 거야. 내가 도망가고 나서 네가 이실직고를 하든 아니면 내가 이실직고를 하든 하면 되잖아. 그러니까 무조건 넌 내일 나랑 공항에서 바꿔치기하는 거다! 아니면 진짜 나 내일 콱 죽어버릴 거야!!”

“싫어! 안 해! 아니 못해!! 그게 말이 돼? 신혼여행이면, 그, 그, 처, 첫날밤은 어쩌고!!”

혜원이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듯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문제의 첫날밤을 언급하며 소리를 질렀다. 아무렴, 남자와 같이 잘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아이고! 귀여운 우리 막내. 벌써 거기까지 생각한 거야? 보기보다 야하네! 우리 꼬맹이!”

혜윤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녀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혜원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리며 울기 직전인 그를 놀려댔다.

“아 정말!! 강혜윤! 아니 누나. 이건 아니잖아.”

도대체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냔 말이다! 혜원으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혜윤은 자신이 남자라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모양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아니면 그냥 대놓고 무시하고 있거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엄청난 계획을 혼자 꾸미고 있었다는 사실에도 적잖게 놀랐다.

역시 강혜윤, 항상 상상을 초월하는 엉뚱한 녀석이었다.

“아무튼, 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허락할 때까지 각방 쓰기로 이미 약속했다고. 혼전 계약서에.”

“뭐? 혼전…. 뭔 계약??”

혜원이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멍하니 혜윤을 바라봤다. 당최 그녀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도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하아…. 어른들만의 세계엔 그런 게 있단다. 그러니까 막내야, 그런 건 조금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네 순결만은 내가 꼭 지켜줄 테니까. 그 사람은 네 몸에 손 하나 까딱 안 댈 거야. 너도 잘 생각해봐. 가기 싫은 유학 안 가도 되고 부모님 손에서 벗어나 자유도 얻고! 조금만 버티면 돼. 엄마 아빠가 나중에 아셔 봤자 너랑 그 사람이랑은 이혼하고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가면 되는 거야. 이혼은 너만이 할 수 있다고. 나 같아 봐, 절대 이혼 못 하지. 그래 안 그래?”

묘하게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했다. 혜원은 형 혜준과 같이 미국에서 사는 건 좋았지만 유학은 정말이지 가고 싶지 않았다. 한국에서 한국말로 공부하는 것도 머리가 터질 지경인데 영어로 수업을 하라니! 그것만은 정말로 사양하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혜윤의 말대로 어른들에게 걸려봤자 자신은 이혼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시간…. 어른들의 어이없는 약속의 피해자인 혜윤에게 잠시 시간을 벌어준다 생각한 혜원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그들은 말도 안 되는 둘만의 계약을 하고야 말았다.

그 결과가 앞으로 혜원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그들의 첫 만남]

한윤결 11살

강혜원 1살

강 회장의 집은 뒤 늦게 태어난 쌍둥이 손자 손녀로 인해 경사가 났다.

첫째 손주를 보고 10년 만에 보는 손주들인 만큼 그의 웃음은 끊이질 않았다. 그것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손녀가 태어났으니 말이다. 강 회장과 한 회장은 연신 쌍둥이들을 바라보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둘은 어렸을 때부터 죽마고우처럼 지내온 사이였다. 맨손으로 시작한 사업이 성공해 어엿한 대기업 회장까지 되었고, 내친김에 사돈까지 맺자며 손주들이 태어나면 무조건 결혼시키자고 약속까지 했었다.

두 회장의 간절한 바람으로 아들들이 같은 해에 아이를 낳았으나 애석하게도 둘 다 아들을 낳은 바람에 약속이 무산될 뻔하던 차에 강 회장의 아들이 올해 떡 하니 쌍둥이를 낳은 것이다. 그것도 딸 하나 아들 하나. 그렇게 혜윤은 태어나자마자 한 회장의 귀한 손자며느리가 되었다.

“강 회장, 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닐 수 있는가? 이 아이들은 정말 우리 집안의 복덩이들일세!”

“누가 아니래? 허허허. 내 아들이 이렇게 뒤늦게 쌍둥이를 덜컥 낳을 줄 누가 알았겠어? 하늘도 우리 두 집안을 묶어주고 싶었던 게지!”

“윤결아, 이리 와봐. 네 동생이야. 예쁘지? 이 아인 혜원이, 저 아인 혜윤이. 혜윤이는 나중에 크면 네 신부가 될 거란다.”

“신부? 내가 나중에 저런 대머리 못난이 아기랑 결혼한다고요? 말도 안 돼요. 정말!”

윤결은 응애응애 울기만 하는 똑같이 생긴 쌍둥이들을 힐끔 내려다보더니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누가 지금 당장 결혼하라는 거니? 나중에 우리 윤결이랑 혜윤이가 엄마 아빠만큼 크면 한다는 거지. 얼마나 예쁘니.”

‘예쁘긴 쳇!’

대머리에 빽빽 울기만 하는 아기가 어디가 예쁘다는 건지. 윤결은 미래 자신의 신부라는 아기를 바라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둘은 정말이지 똑같이 생겼고, 똑같이 못생겼다.

물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기들이었지만, 아직 어린 윤결의 눈엔 아기의 존재가 그렇게 보였다. 그러다 윤결이 궁금한 마음에 혜원의 손가락을 살짝 쥐어 잡자, 혜원이 방긋 웃으며 윤결을 향해 마구 손을 저어댔다.

-쿵쿵쿵!!

윤결은 갑자기 자신의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뭐지? 내가 왜 이런 못난이 아기를 보면서 가슴이 뛰는 거지?’

귀여운 혜원의 미소에 저도 모르게 자상한 형아 미소를 짓던 윤결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다시 고개를 마구 휘저으며 생각했다.

할아버지들의 이 말도 안 되는 결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그들의 두 번째 만남]

한윤결 16살

강혜원 6살

“윤결아, 오늘 강 회장님네 쌍둥이 손주들 생일 파티 갈 거니까 어서 준비해!”

“할아버지! 아 정말, 내가 그딴 코찔찔이 꼬맹이들 생일 파티를 왜 가야 하냐고요! 혜준이도 유학 가서 없는데 제가 거기 가서 뭘 해요? 심심하기만 하지! 아, 그러지 말고 나도 유학 보내줘요!”

이미 사춘기에 들어선 윤결은 매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는 결혼 이야기에 진절머리가 났다. 정말이지 요즘이 무슨 조선 시대도 아니고 정략결혼이라니! 땅을 치고 곡을 할 노릇이었다.

이미 일찌감치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달은 윤결은 사실 여자가 아닌 남자에게 끌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이실직고했다가는 당장 호적이 파일 듯해서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해야겠다 마음먹었다. 아무도 모르게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 다짐했는데 그놈의 정략결혼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너 같은 놈을 뭘 믿고 유학을 보내? 네가 혜준이 반만 따라갔어도 보냈지! 너 같이 정신 못 차린 놈은 내가 옆에 끼고 가르쳐야 사람 되지! 카드 뺏기기 싫으면 좋은 말로 할 때 따라와!”

“아 정말. 유치해!! 정말 협박할 게 그것밖에 없으세요?!”

“그래 이놈아! 싫으면 옷 다 벗고 카드 내놓고 나가든가!”

“아, 가요. 간다고요!”

윤결은 할아버지의 말도 안 되는 협박에 어이없이 끌려가며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그쪽은 아직 여섯 살 어린아이들이었다.

결혼을 이야기하기엔 아직 먼 훗날의 일이니 당분간은 대충 할아버지의 비위를 맞추며 따라 주기로 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바뀐다는데, 뭐 막말로 결혼이야 아직 십 년도 더 뒤에 있을 일이니, 윤결은 굳이 지금부터 열 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쌍둥이들의 생일 파티 장소로 향했다.

할아버지와 함께 도착한 생일 파티장. 예상했던 것처럼 쌍둥이의 생일은 정말 무슨 유치원 학예회 수준이었다. 알록달록한 오색 풍선에 캐릭터 모양의 케이크 장난감들과 과자들로 가득한, 그야말로 윤결에게는 가장 피하고 싶은 곳이었다.

“혜원아, 혜윤아, 생일 축하한다!”

“할아부지, 헤헷…. 감사합니다!”

똘망똘망 여섯 살 귀여운 혜원과 혜윤은 정말이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생긴 똑같이 생겼다. 커다란 사슴 같은 눈망울로 한 명은 바지를, 한 명은 치마를 입은 것을 제외하고는 도저히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너무도 똑같았고 또 굉장히 귀여웠다.

“혜원아, 혜윤아, 여기는 윤결이 형이랑 오빠야.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강혜원입니다!”

“안녕? 난 혜윤이.”

어째 혜윤이보다 혜원이 더 숫기가 없고 여성스러운 것이 아무리 쌍둥이라도 성격은 서로 많이 달라 보였다.

“그래. 만나서 반갑다 꼬마들. 생일 축하한다.”

윤결은 번뜩이는 눈빛으로 어서 축하를 해주라는 한 회장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쌍둥이에게 다가가 축하를 건넸다. 하지만 그것으로 부족했는지 여전히 이 회장이 노려보고 서 있자 윤결은 슬쩍 그들의 머리를 건성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할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얼굴도장까지 찍었으니 슬슬 자리를 피해도 될 것 같았다. 윤결은 시끄러운 파티장을 벗어나 사람들이 뜸한 정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조용하고 한적하니 딱 쉬기 좋은 곳이라 윤결은 잔디에 대자로 뻗으며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아. 집에 가고 싶다….’

**

같은 시각, 어른들만 북적거리는 생일 파티가 지겨워진 혜윤은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혜원아, 우리 숨바꼭질하자!”

“안 돼 혜윤아. 엄마가 오늘은 얌전히 있으라고 했잖아. 너랑 숨바꼭질하면 맨날 옷 더러워져서 엄마한테 혼나잖아.”

“야, 넌 무슨 남자가 그렇게 겁이 많아! 확! 그 고추 떼버려!”

“흐앙…. 너 엄마한테 이를 거야!”

무서운 혜윤의 호통에 겁많은 혜원이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너 이르기만 해! 앞으로 유치원에서 경석이가 또 때려도 난 몰라!”

“혜윤아, 그러지 마. 경석이 정말 무섭단 말이야.”

경석이라는 녀석의 이름만 들어도 겁에 질린 듯 발을 동동 굴리던 혜원은 자신의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혜윤의 옷자락을 꽉 잡으며 울먹였다.

“하아…. 알았어. 뚝! 경석이가 너 괴롭히면 내가 또 혼내 줄 테니까 우리 오늘은 숨바꼭질하자. 알았지?”

“응…. 아, 알았어.”

혜원은 무척이나 억울해 보이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찾을 테니까 네가 숨어. 잘 숨어야 해! 알았지?”

“응! 알았어! 나 숨는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이제 나 찾는다!”

혜윤은 눈을 감고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빛의 속도로 열까지 다 세고 난 뒤, 잔뜩 기대에 부푼 얼굴로 혜원을 찾으러 나섰다.

그사이 혜원은 재빨리 정원으로 기어들어가 좁은 장미 수풀 속에 몸을 웅크리고 숨었다. 이곳은 다른 사람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혜원만의 비밀 장소였다.

혜원은 숨소리도 내지 말아야지 생각하며 눈을 꼭 감고 귀를 두 손을 막으며 조용히 혜윤이 자신을 찾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혜윤은 자신을 찾으러 오지 않았고, 슬슬 졸리기 시작한 혜원은 어느덧 수풀 속에서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한편, 혜윤은 아무리 돌아다녀도 혜원이 보이지 않자 얼굴이 어둡게 굳어갔다. 대체 어디에 숨은 것인지,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던 혜원의 감쪽같이 사라져버리자 혜윤은 덜컥 겁이 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멀쩡했던 하늘까지 어둑어둑해지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혜윤은 더욱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야, 강혜원! 나와! 못 찾겠으니까 나오라고! 비 와! 빨리 나와!”

혜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혜원을 찾아다녔으나 혜원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혜윤은 부모님께 알렸고 갑자기 사라져버린 혜원 때문에 파티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순식간에 사람들은 모두 혜원 찾기에 돌입하였다.

그 시각 정원에서 늘어지게 잠을 자던 윤결은 갑자기 하늘에서 굵은 빗방울이 우두둑 떨어지자 집 안으로 뛰어가려 몸을 벌떡 일으켰다. 순간 어디선가 쌕쌕거리며 흐느끼는 듯한 소리에 그 울음소리의 주인을 찾아 정원을 뒤지기 시작했다.

“엄마…. 혜윤아…. 무서워. 흑흑. 아빠…. 어딨어.”

잠에서 깨도 혜윤이 자신을 찾으러 오지 않자 무서워진 혜원이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비까지 내려 젖은 몸은 차게 식어갔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파르르 몸을 떨던 혜원은 어느덧 의식마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선천적으로 혜윤보다 몸이 약한 혜원은 계속 내리친 비로 인해 어느덧 지독한 열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윤결은 수풀 속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울음소리와 앓는 소리를 따라가던 중 장미 수풀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떨고 있는 혜원을 발견했다. 그는 재빨리 혜원을 끄집어내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야! 너 뭐야! 꼬마야! 너 왜 이래! 정신 차려봐!”

“으, 응? 하아…. 왕자님이다. 혜윤이랑 동화책에서 봤던 왕자님이다. 혜원이 구해주고 나중에 혜원이랑 결혼하는 왕자님이다. 헤헷….”

혜원은 비를 맞아 열이 오르고 아픈 와중에도 자신을 안아 들고 달려가는 윤결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정말로 혜원의 눈에 윤결은 자신을 구해주는 멋있는 왕자님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혜원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혜원을 애타게 찾던 사람들은 윤결이 혜원을 안아 들고 사색이 되어 달려오자 재빨리 그를 받아 들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혜원은 그날 이후 심한 감기몸살로 앓아누워 정원에서 윤결과의 짧은 만남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14년이란 세월이 흘러 윤결의 나이 서른, 혜원 나이 스무 살에 그들의 운명 같은 세 번째 만남이 이루어졌다.

회사를 물려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위장 정략결혼을 감행해야 하는 진성 게이 한윤결, 그리고 도망간 쌍둥이 누나를 대신에 얼떨결에 신혼여행까지 가게 된 눈물 많은 철부지 소년 강혜원. 이 둘의 위험천만한 동거가 이제 막 시작되려 했다.

**

반협박 같은 혜윤의 부탁에 어쩔 수 없이 알았다고 승낙을 했으나 여전히 혜원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한윤결.

상견례 때 한번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만큼 차가운 남자였다. 자신의 결혼인데도 관심 없는 듯한 무심한 말투로 시종일관 고개만 끄덕이던 남자.

사실 불같은 성격의 혜윤이 과연 저렇게 냉정한 남자와 잘 지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얼음장같이 차갑던 남자다. 그리고 내일, 자신이 그 무섭고 까칠한 남자와 같이 신혼여행을 가야 한다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최악이었다. 세종대왕님께는 죄송했지만, 지금의 기분은 ‘최악’으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어 이보다 더 끔찍한 말을 새로 개발해야 할 정도로 혜원은 절망적이었다.

“아유! 정말 착한 내 동생. 이러니 내가 예뻐할 수밖에!”

혜원의 절박한 심정은 안중에도 없는지 혜윤은 자신의 요구에 반항 한번 하지 못하고 절절매는 혜원을 끌어안고 뽀뽀를 해주며 야단법석을 피워댔다.

그저 잠시 자리만 바꿨다가 다시 돌려놓으면 된다고 단순히 생각하는 혜원과는 다르게 사실 혜윤은 전혀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순진한 혜원에게는 미안했지만, 자유를 갈망하는 혜윤에겐 처음이자 마지막 탈출의 기회라 생각했다.

깊은 한숨과 어두운 얼굴로 불안해하는 혜원의 모습에 조금 미안함이 들었으나 이내 고개를 저으며 혜윤은 마음을 굳혔다.

‘미안하다 강혜원. 하지만 어쩌겠어. 우선 나부터 살고 봐야지.’

[결혼식 당일]

“자 여기 보세요! 가족분들 사진 찍습니다!”

-찰칵!

양가 가족들과 마지막으로 단체 사진을 찍고 나서야 길고도 정신없던 결혼식이 드디어 끝이 났다.

“혜윤아, 정말 잘 살아야 해.”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어린 여동생이 벌써 결혼이라니. 강씨 집안의 장남 혜준은 걱정스러운 마음과 행복하게 잘 살길 바라는 마음으로 동생 혜윤을 안아주며 말했다.

“걱정 마 오빠. 나 잘할 거야. 그렇지 혜원아?”

“어? 어. 그, 그래. 넌 잘할 거야, 혜윤아.”

혜원은 자신을 향해 악마 같은 눈웃음을 짓는 혜윤을 쳐다보며 앞으로 다가올 끔찍한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부여잡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아무리 곱씹어 생각해도 이 계획은 성공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왠지 불길했다.

“그리고 한윤결 씨? 물론 나이는 이제 스무 살이 됐지만, 사정상 학교를 일 년 늦게 들어가는 바람에 저 아직 신분은 고등학생이라고요. 아시죠? 우리 약속?”

“걱정 마. 나도 너 같은 꼬맹이 잡아먹을 만큼 아쉬운 사람 아니니까.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꼭 같이 가야 하는 자리를 제외하고는 사생활 터치 안 하기. 됐지?”

“좋아요.”

‘들었지 강혜원?’

혜윤은 아직도 걱정되는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혜원을 향해 그가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녀의 계획에 포함된 또 한 명의 피해자. 아니, 어쩌면 최대 수혜자일지도 모를 한윤결. 자신이 누구와 비행기에 오를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얼음같이 차가운 남자 윤결과 누나의 꼬임에 빠져 험난한 결혼생활을 시작하려는 귀여운 소년 혜원. 그리고 자신의 말을 절대로 거역하지 못하는 혜원의 약점을 너무도 잘 이용하는 조련의 여왕 혜윤.

셋은 그렇게 엇갈린 운명이 가리키는 곳으로 천천히 한걸음 내딛고 있었다.

**

[Airport! 공항]

“빨리 들어와! 이걸로 갈아입어. 그리고 가발!! 여기 가발 빨리 써.”

혜윤은 재빨리 혜원을 장애인용 화장실로 밀어 넣으며 옷을 갈아입히기 시작했다. 신혼여행에 어울리는 꽃무늬 원피스에 긴 생머리 가발 그리고 샌들에 화장까지! 혜윤은 조금이라도 들키지 않기 위해 혜원을 꼼꼼히 챙겨주며 밋밋한 가슴에 빵빵한 뽕을 넣어주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아악! 야, 강혜윤! 이거 뭐야! 빨리 빼. 느낌이 이상하잖아!”

“아 정말. 강혜원 가만히 좀 있어! 내가 너같이 밋밋한 일자 가슴인 줄 알아? 너 이거 빼는 순간 우린 끝이야! 얌전히 좋은 말로 할 때 넣고 있어라. 엉? 확! 그냥.”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려고 손을 번쩍 올리는 혜윤에게 기가 눌린 혜원은 울상을 지으며 자신의 가슴에 말캉말캉한 뽕을 집어넣는 그녀를 쳐다봤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정말이지 너무도 억울하고 서러워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자신이 너무 쉽게 이 계획에 동의한 것 같았다. 이런 수치스러운 짓까지 해야 하는 걸 진작 알았다면 결코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자, 다 끝났어. 거울 봐봐!”

다 됐다는 기세등등한 혜윤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돌려 거울을 본 혜원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눈을 깜빡여도 보고 볼을 꼬집어도 봤다. 하지만 아무리 다른 곳을 찾아 뜯어보려 해도 거울에 비친 모습은 영락없는 혜윤이었다.

‘와…. 우리가 쌍둥이는 쌍둥이구나.’

어쩜 이리도 똑같을 수 있는지! 혜원은 스스로도 구분을 못 할 정도로 닮은 서로의 모습에 혀를 찼다.

“자. 잘 들어. 지금부터가 중요해. 난 이제 비행기 타고 혜준 오빠랑 미국으로 갈 거니까 넌 이대로 윤결 씨한테 가서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옆에 앉아만 있다가 가자고 하면 그냥 따라가. 알았지? 너, 나 출발하기도 전에 들키면 그땐 둘 다 죽는 거야. 잘 알아들었지 사랑하는 내 동생님아? 우리 꼭 성공하자. 연락할게. 사랑해 혜원아!”

그렇게 혜윤과 혜원은 각자 다른 게이트를 향해 헤어졌고 아직도 이 모든 것이 어색하기만 한 혜원은 최대한 느린 발걸음으로 윤결에게 갔다. 정말이지 이건 미친 짓이었다.

의자에 앉아 혜윤을 기다리던 윤결은 멀리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엉기적엉기적 걸어오는 혜윤을 보고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정말…. 저런 어린애를 데리고 뭘 하라는 건지. 옷은 또 왜 갈아입었데? 무슨 패션쇼 하러 가나…. 쯧.”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조차 알 리 없는 혜원은 속으로 숫자를 세 가며 최대한 천천히 윤결에게 다가갔다. 입은 옷도 머리도 화장도 모든 것이 어색하기만 한 혜원이 살짝 고개를 들어 앞을 보는 순간 뚫어지게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윤결과 눈이 마주쳤다. 깜짝 놀란 혜원은 그만 스텝이 꼬이면서 꼴사납게 그의 앞에서 철퍼덕 널브러져 버리고 말았다.

“으아악!!”

세게 넘어졌는지 일어날 생각도 못 하고 허우적거리는 혜원의 모습에 윤결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다가갔다. 윤결은 귀찮은 표정으로 혜원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제발 어른답게 행동할 수 없어? 아무리 아직 어린애라지만 보는 눈도 있는데 조심 좀 하지?”

“죄, 죄송해요. 아야야….”

혜원은 슬쩍 윤결의 눈치를 보며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접질려진 발목이 아픈지 혜원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일어났다. 이딴 치마 때문에 이게 무슨 낭패인지. 혜원은 갑자기 아픈 발목과 함께 서러움이 밀려왔다.

어느덧 눈물까지 글썽이는 혜원. 정말이지 약속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집에 가고만 싶었다.

윤결은 혜원이 제대로 따라오지 않자 가던 길을 멈추고 뒤돌아봤다. 혜원은 눈물을 닦으며 절뚝거리는 다리로 나름 열심히 따라오고 있었다. 윤결은 귀찮은 일을 떠안은 듯한 곤란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정말 어린애 맞네. 겨우 그거 넘어졌다고 우는 거야?”

“이씨. 우, 우는 거 아니거든요? 누, 눈에 뭐가 들어가서 그런 건데.”

코를 훌쩍이며 입을 삐쭉 내민 혜원이 자신을 비꼬는 듯한 말투로 묻는 윤결을 노려보며 말했다.

‘누구 때문에 자신이 넘어졌는데! 왜 하필 그때 눈이 마주쳐서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 혜원은 윤결도 혜윤도 모두 다 얄미워 죽을 지경이었다.

“뭐. 그렇다고 해줄게. 내 목에 팔이나 똑바로 둘러. 또 떨어지지 말고.”

“…네.”

느려터진 혜원을 기다리지 못한 윤결이 그를 번쩍 안아 들었다. 여자치고는 나름 큰 키임에도 종잇장처럼 가볍단 생각이 들었다. 윤결은 이러다 애 굶긴다는 소리라도 들을까 봐 같이 살면 제일 먼저 살부터 찌우게 해야겠다 생각했다.

반면 윤결에게 얼떨결에 안겨버린 혜원은 모든 것이 너무도 불편하기만 했다. 혹시라도 무거워 남자라는 것이 들킬까 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혜원은 아무래도 자신이 가려고 하는 이 신혼여행이 굉장히 험난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첫 단추부터 어긋난 기분. 쿵쾅거리는 그의 심장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대체 신혼여행지는 왜 이렇게도 먼 프랑스로 잡았는지. 자기가 갈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강혜윤. 진짜 아휴!’

정말이지 그녀가 너무너무 미워지기 시작했다.

혜원은 차라리 빨리 호텔로 들어가 문을 잠가버리고 한 발짝도 나오지 말자 다짐했다. 그 길만이 자신이 온전히 살아남을 길이라 생각되었다.

‘이 남자…. 정말로 약속은 지켜주는 거겠지?’

믿고 있는 건 오직 혜윤이 말해준 혼전 계약서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혜원은 밀려드는 불안한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못했다.

**

윤결에게 안겨 탑승 게이트까지 오는 내내 혜원은 모든 이의 부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이런 낯부끄러운 장면이 생중계되는 줄도 모르고 잔머리만 열심히 굴리고 있는 혜원은 자신을 향한 그들의 뜨거운 눈빛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수군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윤결을 향해 다급히 다가왔다.

“어디가 불편하신 건가요?”

“제 와이프가 다리를 좀 삔 것 같아서요. 심각한 건 아니니 괜찮습니다.”

“탑승 수속 빨리해드릴게요. VIP셔서 연락을 받았는데 이런 일이 생겨서 정말 뭐라고 사죄의….”

직원은 마치 자신이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미안해하며 안절부절못해 했다.

“됐습니다. 이 녀석이 뛰다 다친 걸 그쪽에 책임을 물게 할 생각 없으니까요.”

‘뭐? 이 녀석?’

그제야 혜원은 고개를 들고 눈을 부릅뜨며 윤결을 노려봤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뭘 잘못했냐는 듯 혜원을 힐끔 내려다보며 피식 비웃을 뿐이었다. 윤결은 다시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에서 연신 사죄를 하며 절절매는 직원을 따라 먼저 탑승을 했다.

순간 모든 이의 시선이 집중됨과 동시에 그제야 자신이 윤결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혜원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어떻게 저렇게 많은 사람의 시선을 무시한 채 이렇게 당당하게 자신을 안고 다닐 수 있는지 혜원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모든 것이 어색하고 부끄럽기만 한 혜원은 다시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비행기에 오른 혜원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윤결의 옆자리에 앉았다. 같은 남자지만 언젠가는 꼭 그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남자로서의 윤결은 완벽했다.

힐끔힐끔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조각 같은 윤결의 얼굴을 감상하는 사이 비행기가 곧 이륙한다는 방송이 나오자 혜원은 순간 잔뜩 긴장하기 시작했다.

공항에서 정신없이 혜윤에게 휘둘리는 동안 그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바로 신경 안정제. 비행기가 이륙하고 착륙할 때마다 극심한 공포를 느끼는 혜원은 꼭 미리 약을 먹고 비행기를 탔어야 했다. 너무도 중요한 약을 깜빡했다는 사실에 혜원은 공포가 밀려왔다.

한 번도 약 없이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어 벌써부터 몸이 떨리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기절해 버릴 것만 같은 극심한 고통이 가슴을 찌를 듯 조여왔다. 새어 나오는 신음을 참으려 입술을 강하게 짓씹으며 몸을 반으로 접어 바들거리자,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윤결이 그를 불렀다.

“강혜윤. 너 왜 그래?”

하지만 혜원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걱정된 윤결은 혜원의 몸을 살며시 일으켜 세워 그를 살폈다.

맙소사!

혜원의 얼굴은 너무도 창백했고 얼마나 세게 입술을 깨물고 있었는지 어느새 그의 여린 입술에는 피까지 맺혀있었다. 윤결은 허겁지겁 그의 얼굴에 맺힌 땀방울과 입술의 피를 닦아주며 물었다.

“너, 너 왜 이래? 어? 어디가 아픈 거야?”

“하아…. 약, 약을…. 안 먹어서….”

혜원은 자꾸만 멀어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으며 힘겹게 말했다.

그사이 비행기는 이미 이륙을 끝내고 안정 궤도에 올라 안전벨트를 풀어도 된다는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윤결은 바들바들 떠는 혜원을 그냥 둘 수가 없어 우선은 그의 안전벨트를 풀고 자신의 품으로 데리고 왔다.

다행히 일등석이라 넉넉한 좌석 덕에 몸집이 작은 혜원을 데리고 있기에 불편함은 없었다. 하지만 첫날부터 비실비실하게 아픈 것이 신혼여행 내내 꽤나 신경이 쓰일 것 같아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이래서 윤결에게 여자들은 귀찮은 존재였다. 아프다고 빌빌대는 것도 울고불고 눈물 콧물 다 짜내는 것도 모두 다 그에겐 짜증을 유발하는 모습들일 뿐이었다.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말이다.

그러니 그동안 그를 좋아했던 수많은 여자들은 윤결에게서 자상함이라고는 정말로 눈 씻고 찾아보려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랬던 윤결이 처음으로 혜원을 신경 쓰며 그를 자신의 품에 안았다는 건, 정말이지 그의 게이 인생 30년 만에 처음 있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혜윤아, 이제 괜찮아. 비행기 안 흔들린다고. 몸에 힘 좀 풀어봐. 응?”

윤결이 혜원의 등을 살살 쓸어내려 주며 그를 진정시켰다.

“미, 미안해요. 하아…. 정말… 미안해요. 저 이제 괜찮아요. 제, 제자리로 갈게요.”

윤결의 품에서 어느 정도 진정이 된 혜원이 그의 가슴을 슬며시 밀어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너 진짜. 사람 좀 놀라게 하지 마. 우선 알았으니까 네 자리에 가서 누워있어. 아직도 몸 안 좋아 보여. 좀 더 자. 도착하려면 멀었으니까.”

“네….”

혜원은 혹시라도 그가 바뀐 것을 알아차릴까 봐 재빨리 자신의 좌석으로 돌아와 몸을 돌려 누웠다. 하지만 자꾸만 자신의 뒤통수가 찌릿찌릿한 것이 신경이 쓰이던 혜원은 아예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써 버리고는 눈을 감았다. 제발, 제발 이 위험한 신혼여행이 별 탈 없이 무사히 끝나기를 간절히 빌면서 말이다.

윤결은 잠이 든 것 같은 혜원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아까 그를 안았을 때의 부드러운 촉감이 아직도 생생해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뭐지?’

자꾸만 가슴이 간질간질한 게 이상하게 눈에 밟혔다. 하지만 이런 감정을 여자에게서 받다니? 강혜윤. 그녀가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윤결은 혼란스러운 마음에 혜원의 이불을 살며시 내려보았다.

평범해 보이는 뒤통수, 아담한 키와 몸매. 뭐지? 대체 뭐가 다른 거지? 아무래도 무언가 이유가 더 있을 거란 생각에 윤결은 미동도 없이 잠만 자는 그의 얼굴을 돌려 자신을 보도록 고정시켰다.

“으응…. 호응…. 혜윤아. 진짜 잘 때는 좀 건드리지 마.”

혜원은 잠결에 자신을 만지는 손길이 불편한지 칭얼거리며 인상을 썼다. 입을 벌리고 침을 질질 흘리며 자는 모습은 정말이지 사진을 찍어서 나중에 보여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윤결은 그런 혜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귀엽다. 귀엽다라니….’

자신이 과연 여자에게서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곱씹어 봐도 이런 감정을 남자가 아닌 여자에게서 느낀 적은 없었다.

윤결은 아무래도 자신이 결혼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머리가 이상해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 이야기가 오가면서 남자를 제대로 만나지 못해 윤결도 이미 욕구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상태였다.

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잡생각을 날려버렸다. 그리고는 이내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 빨리 단골 술집을 찾아가야겠다 생각했다. 사실 신혼여행지를 해외로 잡은 것도 자유롭게 남자를 만나기 위한 윤결의 숨겨진 의도였다. 아마도 지금 혜원이 귀엽게 보이는 건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결혼 부작용’이란 생각을 하며 자신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정당화시켰다.

“쌍둥이라 이름도 헷갈리냐? 강혜윤. 네가 여기 있는데 왜 또 혜윤이를 찾냐? 참 엉뚱하다 너도.”

윤결은 잠결에 혜윤을 찾는 혜원의 입술을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그리고 어느새 그의 입가엔 작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사랑스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잠든 혜원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

곧 기내식이 준비된다는 방송에 윤결은 보던 신문을 접고 혜원을 쳐다봤다. 아직도 꿈나라 여행 중인 이 꼬마 숙녀를 깨워야 할지 계속 재워야 할지 고민을 하던 윤결은 그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야, 강혜윤. 일어나. 밥 먹어야지.”

“흐응. 저리 가라니까.”

윤결의 손길이 귀찮았는지 혜원은 칭얼거리며 몸을 반대로 휙 돌려 누웠다.

‘어쭈? 몸을 돌려?’

오랜만에 장난기가 발동한 윤결은 혜원을 꼭 깨워야겠다는 오기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물론 평상시 그였다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야. 강혜윤. 너 지금 안 일어나면 확! 덮쳐버린다? 빨리 일어나!”

“아, 정말 내가 잘 때는 제발 건들지 말라고 몇 번을 말…!!”

순간 혜원이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자신의 코앞에서 눈을 사납게 치켜뜨며 팔을 잡아 흔들고 있는 윤결을 발견했다. 혜원은 말을 하다 말고 허겁지겁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동그란 눈만 깜빡거렸다.

“계속해봐….”

“헙! 아, 아니 그러니까 왜, 왜 갑자기 팔을 잡고 그래요. 노, 놀랬잖아요.”

의외의 반응이었다. 자신이 아는 혜윤은 항상 당당했고 자신이 원하는 걸 뻔뻔하게 요구했었다. 이렇게 말을 더듬는다는지, 미안해한다든지,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단 한 번도 제게 보인 적이 없었다.

‘결혼하면 사람이 바뀌나?’

지금의 혜윤은 마치 꼭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했다.

“남편이 자신의 와이프 좀 만졌다고 이렇게 격하게 반응을 할 건 없잖아? 이제 우린 엄연히 부부인데?”

윤결은 일부러 부부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이 말은 평소에 혜윤이 가장 싫어했던 말이고 앞으로 자신 앞에서 절대 사용하지 말라고 했던 말이었다.

“아, 아니 이건 계, 계약이 틀리잖아요!! 아, 안 건든다고 했잖아요!!”

순간 겁을 먹은 혜원이 담요를 꽉 쥐어 잡고는 바들거리는 눈으로 윤결을 향해 소리 질렀다.

“결혼 전에는 무슨 말인들 못 하겠어. 우리 귀여운 꼬마 신부한테….”

윤결이 능글맞게 웃으며 얼빠진 얼굴로 입을 벌린 채, 점점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는 혜원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으아악!!! 취소! 무, 무효야 이 결혼!! 안 해!! 안 할 거야! 이, 이혼해! 당장 이혼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오늘이 우리 결혼 첫날인데, 첫날부터 이혼 소리는 좀 너무하지 않나? 장난이야 장난. 그렇게 떨지 말라고. 정말로 잡아먹고 싶어지니까. 그리고 제발 그 시끄러운 입 좀 닫지 그래?”

혜원은 눈가가 빨개지며 급기야 눈물까지 맺히려고 하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겁먹은 다람쥐처럼 억울하고 애처로워 보이는 혜원의 모습에 윤결이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끄덕끄덕

윤결의 협박 아닌 협박에 입을 꽉 다문 혜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 앉아 기내식을 기다렸다.

윤결은 자신의 말을 너무도 잘 듣는 모습에 정말 자신이 알던 그 강혜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오늘따라 그녀가 귀여워 보였다.

사납게 노려보며 혼전 계약서를 작성하자며 바득바득 들이대던 혜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렇게 고분고분 말 잘 듣고 겁이 많아진 혜윤의 모습이 윤결은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기내식이 나왔지만, 혜원은 깨작거리기만 할 뿐 별로 먹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고기보다는 샐러드와 과일을 좋아하는 혜원이기에 그의 앞에 놓여있는 기름진 고깃덩어리는 그의 식욕을 떨어뜨리기 딱 좋은 음식이었다.

“제대로 좀 먹지?”

윤결은 고기는 건들지도 않고 곁에 있는 샐러드만 조금씩 집어 먹는 혜원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먹고 있는 건데요. 전 고기는 별로 안 좋아해요.”

혜원이 건성으로 고깃덩어리를 포크로 툭툭 건들며 말했다.

“설마. 네가 고기를 안 좋아한다고? 나랑 만날 때면 매번 최고급 스테이크 아니면 안 먹겠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왜 갑자기 결혼하니까 내숭? 마음대로 먹어. 하던 대로.”

“내, 내가 언제…!!”

혜원은 얼굴이 빨개져서 그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그는 곧 혜윤이 정말 고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하아….’

정말이지 혜원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계속 안 먹었다간 윤결이 의심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혜원은 눈을 꾹 감고 고기를 한 입 먹었다. 하지만 말캉말캉한 고기의 니글거리는 느낌에 무슨 맛인지도 모른 채 그냥 삼켜 버렸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세 번을 먹고 나자 혜원은 도저히 못 먹겠는지 포크를 내려놨다. 그래도 접시에는 아직 반 이상의 고기가 남아 있었다.

“참. 변덕도 심하다. 좋아한다고 할 땐 언제고 이제는 무슨 사약 먹는 것처럼 죽을상을 하고 먹어? 적당히 해 강혜윤, 적당히. 나 너 비위 맞춰주고 그런 거 못 하니까.”

인상을 쓰며 자신을 나무라는 윤결의 말에 혜원은 속상했다.

자신이 왜 이런 대우를 받으며 먹기 싫은 고기까지 억지로 먹으면서까지 그와 함께 비행기를 타야 하는지 그저 모든 게 서러워졌다. 그리고 그 순간 혜원은 갑자기 억지로 삼킨 고기가 목에 꽉 막혀버렸는지 역한 토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우, 우읍!!”

깜짝 놀란 혜원이 재빨리 화장실로 뛰어들어 갔다. 그는 들어가자마자 모든 걸 토해내기 시작했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되고 머리가 깨질 정도로 아파져 왔다. 그렇게 한동안 속을 전부 게워낸 혜원은 화장실에 앉아 펑펑 울고 말았다. 정말이지 집에 돌아가고만 싶었다. 엄마도 아빠도 너무 그립고 보고 싶었다.

아직 이 모든 것이 너무도 낯설고 무섭기만 한 혜원은 애써 눈물을 훔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쨌든 지금 자신은 혜윤의 역할을 완벽히 해내야만 했고, 밖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윤결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자리로 돌아온 혜원을 바라보는 윤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관심 두지 말자, 깊게 생각하지 말자 하면서도 자꾸만 시선이 가고 신경이 쓰이는 아이.

“저 속이 안 좋아서 그냥 잘래요.”

“약은?”

“됐어요. 그냥 잘래요. 어차피 약 먹어도 낫지 않아요.”

더는 말하는 것조차 힘들다는 듯 그대로 눈을 꾹 눌러 감은 혜원을 바라보며 윤결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저 귀찮은 존재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새 윤결은 진심으로 이 꼬마 녀석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작은 심경의 변화만으로도 윤결은 혼란스러웠다.

강혜윤, 알면 알수록 신기한 아이였다.

**

윤결과 혜윤의 결혼을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비행기에 오른 혜준은 작고 귀엽기만 하던 꼬맹이들이 언제 이렇게 커 한 명은 결혼을, 또 한 명은 자신과 함께 이렇게 유학까지 오게 됐는지 그저 기특할 따름이었다. 드르렁드르렁 코까지 골며 잠든 동생에게 이불을 덮어 주며 혜준은 앞으로 귀여운 혜원과의 미국 생활을 기대하며 눈을 감았다.

공항에 도착해 대기하고 있던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혜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밖을 내다보며 연신 감탄사를 난발하는 혜원을 보니 웃음이 났다.

이렇게 좋을까? 사실 혜윤이라면 모를까 소심하고 겁이 많은 혜원이 이토록 유학을 반길 줄은 몰랐다. 어렸을 때부터 유독 유약하고 내성적인 혜원의 성격을 바꿔주기 위해 억지로 오게 된 유학이었기에 사실 유학이 결정된 후로도 혜원은 많이 우울해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신이 난 혜원의 모습을 보니 괜한 걱정인 것 같기도 했다.

집에 도착해 방을 안내해 주며 씻고 나와서 저녁을 먹으러 가자는 혜준의 말에 알았다며 잽싸게 방으로 들어간 혜원의 행동은 날렵했다. 혜준에겐 여태까지는 볼 수 없었던 막내 혜원의 새로운 모습이기도 했다.

문득 혜원에게 주지 못한 집 열쇠를 전달해 주러 잠시 방문을 연 혜준은, 지금 자신이 무엇을 본 것인지 두 눈을 의심하며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으아악!!!”

“혜, 혜원아? 너 그게 뭐야? 왜 붕대를…. 너 어디 아파?? 이리 와봐 좀! 가슴에 그 붕대 뭐냐니까!!”

“혀, 형!! 아니. 오, 오빠! 스톱!! 스톱!! 멈춰!! 거기 얼음!! 자, 잠깐만 오지 마!!!”

“뭐?? 오, 오빠??”

혜준은 오빠라는 말에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당황한 얼굴로 멍하니 혜윤을 바라봤다. 그사이 혜윤은 재빨리 반팔 티를 잡아채 입고는 혜준을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오, 오빠. 사, 사실은 나, 혜, 혜윤이야.”

“뭐, 뭐라고? 누구라고??”

혜윤이 더 이상 속이는 걸 포기한 듯 가발을 벗어 던지자, 긴 생머리가 찰랑하고 그녀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맙소사!

혜준은 그만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아니 믿었던 자신의 동생들이 어떻게 이런 엄청난 일을 꾸밀 수가 있는지 너무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오빠. 미, 미안. 정말 미안!”

혜윤은 넋이 나간 채 허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혜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싹싹 빌기 시작했다.

“너 이게 무슨 짓이야! 너희들이 지금 무슨 사고를 친 건지 알아? 얼마나 큰일을 저질렀는지 아느냐고!!”

“알아. 그래서 이렇게 사과하잖아. 오빠. 응? 미안.”

“야! 강혜윤! 이게 지금 나한테 사과하는 거로 끝날 일이야?”

“그럼 나보고 이제 어쩌라고!! 애초에 그딴 말도 안 되는 결혼을 시키려고 한 사람들이 잘못이지!”

“뭐, 뭐라고? 너 진짜! 그걸 왜 지금, 이제 와서 말하는 건데!”

혜준은 너무도 당당한 혜윤의 행동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대책 없는 녀석들의 생각 없는 행동에 혜준은 심장이 다 벌렁거렸다. 이를 어찌해야 하는지…. 분명 어른들이 알면 까무러치실 것이기에 그 전에 모든 것을 돌려놔야 했다.

물론 정략결혼이 억울한 혜윤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아직 스무 살 파릇파릇한 앳된 나이에 결혼이라니. 어른들의 성화에 못 이겨 결정된 결혼이었고, 혜윤이 원할 때까지 될 때까지 각방을 쓰며 앞으로 그녀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 준다는 초강수 조건을 내걸어 겨우 달래 성사시킨 결혼이었다. 그러니 그땐 혹해서 한다 했어도 또 생각해보면 억울하기도 했을 것이다. 강씨 집안의 딸로 태어난 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혜준은 이 엄청난 사실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나 절대 안 돌아가! 혹시라도 한국 보내려고 하면 콱!! 죽어 버릴 거야!!”

“강혜윤 너 진짜 무슨 그런 끔찍한 말을! 잠깐. 그럼 신혼여행은? 윤결인 그럼 누구랑…. 야! 강혜윤! 혜원이 어딨어? 지금 혜원이 어딨냐고!”

“아마도…. 파리?”

혜윤은 사악한 웃음을 씩 지으며 혜준에게 혀를 날름 내밀고는 재빨리 집 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쌍둥이들의 발칙한 반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혜준은 서둘러 윤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만 나올 뿐 연결이 되지 않자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혜원아 너 지금 어디서 뭐 하고 있는 거야….”

혜준은 분명 혜윤의 강압적인 협박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고 확신했다.

늘 혜윤에게 휘둘리며 당하기만 하던 울보 혜원. 지금쯤 낯선 곳에서 혼자 겁을 먹고 두려움에 떨고 있을지 모를 혜원을 생각하니 혜준은 마음이 급해졌다.

어른들 모르게 하루빨리 이 둘을 다시 바꿔 놓아야 할 텐데…. 왠지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을 것 같은 예감에 그의 등줄기에서는 한 줄기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총체적 난국. 혜준은 바로 지금 같은 상황을 위해 생겨난 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혜윤이 뛰쳐나간 현관문을 바라볼 뿐이었다.

**

한편 파리에 도착한 윤결과 혜원은 호텔에 대충 짐을 풀고 정리를 하며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다.

“강혜윤, 난 지금부터 밖에 나가서 술을 마실 생각인데, 넌 술은 못 마실 테고 그렇다고 나를 따라다니는 것도 재미없을 것 같은데, 어떡할래?”

“이제 곧 어두워질 것 같기도 하고 해서, 음…. 저는 그냥 호텔 주위 구경할게요. 마침 저 앞에 에펠탑도 보이고. 걸어서 갈 수 있을 것 같던데요?”

“그래 그럼. 돈은 여기 두고 갈 테니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사 먹고. 너무 늦게 않게 호텔로 돌아오도록 해. 참, 나는 늦을 거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알았지?”

“네.”

혜원은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좀 쉬고 싶어 침실로 들어와 누워 버렸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윤결은 바로 나간 듯했다. 다행이었다. 그가 나가자마자 혜원은 드디어 이 갑갑한 가발과 치렁치렁한 치마를 벗어 버릴 수 있다는 생각에 재빨리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다 벗어 던져 버렸다.

따로 챙겨온 시원한 반바지와 널널한 티를 챙겨 입은 혜원은 그래도 파리까지 왔는데 호텔에만 처박혀 있을 수 없어 공항에서 집어온 여행 책자와 지도를 펼쳐 들었다.

“가만있어 보자. 여기서 에펠탑이 여기면, 오! 그럼 여기까진 충분히 걸어가겠는데? 헤헷! 레츠 고!”

혜원은 윤결이 준 돈을 주머니에 잘 집어넣고는 사진기와 핸드폰을 챙겨 조심스럽게 호텔을 나섰다. 사실 혜원에게는 이번이 혼자 하는 첫 여행이었다.

늘 부모님이나 형, 아니면 꼭 혜윤과 붙어있는 걸 선호하는 혜원은 혼자서 다니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윤결을 따라다니는 것은 더욱 끔찍했다.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그렇게 어느덧 혜원의 위험한 나 홀로 파리 여행이 시작되고야 말았다.

**

그 시간 윤결은 출장이나 여행 시 자주 들렀던 단골 바에 들어가 오늘은 누굴 꼬셔볼까? 라는 눈빛으로 구석구석 꼼꼼히 스캔하기 시작했다.

“헤이, 윤! 여기까지 어쩐 일이야? 여행? 출장?”

너무도 오랜만에 방문한 윤결을 반갑게 맞아 준 남자는 이 바의 주인인 줄리앙이었다.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 머리에 연한 올리브색 눈을 가진 매력적인 줄리앙은 윤결의 전 연인이기도 했었다.

“오랜만이야 줄리앙. 점점 더 예뻐지는데? 이거 괜히 헤어져 준 것 같은데?”

윤결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줄리앙의 목을 살며시 끌어안아 그의 입술에 베이비 키스로 인사를 하며 말했다.

“와…. 누가 보면 내가 먼저 헤어져 달라고 한 줄 알겠어. 날 버린 게 누군데!”

줄리앙도 그런 윤결의 키스가 싫지 않은지 그의 입술을 살짝 깨물며 아쉬운 듯 말했다.

“알잖아. 나 장거리는 싫어하는 거.”

윤결이 심술 맞은 표정으로 툴툴거리는 줄리앙의 어깨를 다독여 주며 말했다.

“하아…. 우리 윤은 언제쯤 정착을 하려나? 그 운 좋은 자식은 또 누굴까! 아. 질투 나! 나도 한국에서 태어날걸.”

입이 반쯤 나온 줄리앙이 서운한 듯 투덜거리며 다시 바 안으로 들어가 윤결이 자주 마시던 술을 준비했다.

순간 윤결은 혼자 온 듯한 곱상하게 생긴 남자가 창가에 앉아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고는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얼굴도 저만하면 나쁘지 않고 몸도 호리호리한 듯하면서도 약해 보이지는 않는 것이 오늘 밤을 즐기기에 나쁘지 않아 보였다.

윤결이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남자를 훑어보고 있자 줄리앙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그의 앞에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뭐야, 오늘은 저 남자야? 역시 윤은 보는 눈이 있어. 저 남자 나름 인기 많은데. 그런데 한 번도 넘어가는 걸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도도해. 한번 도전해봐. 그럼 아마 윤이 최초로 저 녀석을 가지는 남자가 될걸?”

“내가 왜? 저 녀석이 나한테 와야지.”

자신감 넘치는 윤결의 얼굴엔 그가 스스로 자신에게 넘어올 것을 이미 예견한 듯했다.

**

그사이 혜원은 정각이면 반짝인다는 에펠탑 앞에까지 걸어와 얼마 남지 않은 정각이 되기만을 기다리며 황홀한 눈으로 에펠탑을 바라봤다. 주위의 사람들도 역으로 카운트다운을 하며 숫자를 세기 시작했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0’을 외치는 순간! 화려하고 예쁜 불빛을 반짝이며 에펠탑은 어느새 별똥별이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와아!! 예쁘다. 헤헷!! 찍어서 혜윤이랑 혜준이 형한테도 보여줘야지!”

혜원은 카메라를 들고 동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찍으려던 찰라, 혜원은 자신의 앞을 지나던 남자를 미처 보지 못하고 그와 세게 부딪히며 그만 카메라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아얏! 으악! 내 카메라!!”

엉덩방아를 찧으며 강하게 뒤로 넘어지고 만 혜원. 그는 동시에 땅바닥에 떨어져 무자비하게 내동댕이쳐진 카메라를 보며 울상을 지었다.

카메라는 카메라고 그래도 부딪힌 남자에게 사과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혜원은 고개를 들어 남자를 찾았으나 그는 이미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 뒤였다.

그때였다.

“그 비싼 카메라까지 도둑맞고 싶은 거 아니면 일어나서 빨리 줍지 그래?”

어느덧 동양인인 듯한 남자가 혜원에게 다가오며 말을 건넸다. 타국에서 들려오는 한국말. 너무 반갑고 신기한 나머지 잠시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혜원이 재빨리 떨어진 카메라를 집어 들며 물었다.

“가, 감사해요. 그런데 혹시 하, 한국인이세요?”

동시에 겁많은 혜원은 자신의 카메라를 소중히 품에 안아 들고는 이내 긴장한 듯 주위를 살짝 둘러봤다.

“한국말을 하니까 아마도 한국인이겠지? 그러는 넌 여행 온 거니?”

“네.”

“혼자?”

“아, 아니 그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오늘은 혼자네요. 아, 아니다. 앞으로도 혼자 다닐 거 같긴 하네요. 하하….”

생각해보니 앞으로도 윤결과 같이 다닐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혜원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너같이 어리바리한 꼬맹이는 탈탈 털리기 딱 좋은데. 조심해야 할걸? 여긴 소매치기 천국이거든. 뭐 없어진 건 없는지 한번 잘 찾아봐. 꼬마야.”

“네, 네??”

순간 놀란 혜원이 자신의 주머니를 살폈다. 그리고 그제야 호텔에서 나올 때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은 현금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엇! 내 돈! 안 되는데!? 어, 어떡하지? 진짜 안 되는데! 윤결 씨가 준 돈인데. 잃어버리면 안 되는데.”

혜원은 울상을 지으며 없어진 돈을 찾아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한번 잃어버리면 찾을 길이 없는 파리였다.

“하아…. 정말 손 많이 가는 꼬마네. 너 숙소는 어디야?”

“흑흑…. 저, 저쪽이요. 어떡해.”

혜원은 자신이 걸어왔던 길에 위치한 호텔을 향해 손짓하며 훌쩍였다.

“그만 울어. 어차피 한번 잃어버리면 못 찾아. 그냥 깔끔하게 포기해. 너 근데 밥은 먹었어?”

“아, 아니요….”

“그럼 우리 밥이나 먹으러 가자. 내가 사줄게. 따라와. 밥 먹고 호텔까지 데려다줄게.”

“정말요??”

“그래. 그러니까 그만 좀 울고 따라와. 나도 배고프니까.”

눈 깜짝할 사이에 소매치기도 당하고 혼자 돌아다니는 것이 갑자기 무서워진 혜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따라나섰다.

아마 혜윤이나 혜준이 알았다면 엉덩이에 불이 나도록 맞을 일이었지만, 배도 고프고 돈도 없고 말도 안 통하는 이국땅에서 한국말을 하는 그를 만난 건 혜원에게는 생명수와도 같았다.

**

한편 창가에 앉은 남자는 자신을 노골적으로 쳐다보며 관심을 보이는 윤결이 자꾸 신경이 쓰였다. 반듯하고 잘생긴 얼굴과 깔끔한 옷차림. 윤결은 사실 남자의 이상형이기도 했다. 이쯤 되면 자신에게 올 법도 한데 쳐다보기만 할 뿐 움직일 생각을 않는 윤결을 기다리다 보다 못한 남자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먹고 싶으면 먹고 싶다고 말을 하든가. 그딴 눈으로 자꾸 기분 나쁘게 쳐다보지 말고….”

그는 망설임 없이 윤결의 앞자리에 앉더니 테이블에 놓인 술을 마시며 말했다.

“이렇게 알아서 올 건데 내가 왜 굳이?”

이미 그가 자진해서 자신에게 올 거라고 예상하였기에 윤결은 자신의 긴 다리로 남자의 발목을 슬며시 훑어 올라가며 말했다.

“당신…. 짜증 나.”

남자는 당당하면서도 매력적인 윤결을 매혹적인 시선으로 노려보며 조금 더 자신의 다리를 벌려 앉으며 말했다.

윤결은 남자의 허벅지를 쓸어 올라가던 자신의 발끝을 그의 중심을 향해 방향을 바꾸며 천천히 그의 성기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흐읏…. 살살해. 아파.”

“글쎄. 겨우 이 정도도 못 버틸 거면 잡아먹으라고 하질 말든가.”

짓궂게 발로 장난질을 하던 윤결은 조금 더 강하게 그의 성기를 자극하며 말했다.

“하아…. 당신. 이 바가 왜 인기가 많은 줄 알아?”

남자가 야한 신음을 흘리며 다리를 오므려 자신의 허벅지 사이에 윤결의 발을 휘어 감으며 물었다.

“글쎄. 네가 말해봐. 왜인지.”

윤결은 대범해진 남자의 도발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발끝에 힘을 주어 그의 다리를 다시 양옆으로 벌리며 말했다.

“우리… 올라갈까?”

“원하던 바야.”

윤결은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이 층으로 향했다.

이 바가 인기가 많은 이유.

그건 바로 언제든 원나잇을 할 수 있는 프라이빗 룸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윤결은, 그동안의 원치 않은 금욕으로 이미 뜨겁게 몸이 달아올라 있었다.

**

“나는 재희. 프랑스에서 살아. 형이랑 부모님이 프랑스 사람이거든.”

“아, 어? 정말요? 나, 나는 강혜원.”

하지만 혜원은 분명 그는 한국 사람인듯한데 왜 다른 가족들은 모두 프랑스 사람이라고 말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봤다. 그리고 곧 혜원의 혼란스러운 얼굴이 귀여운 듯 재희가 웃으며 말했다.

“궁금하지? 나는 딱 봐도 한국인인데, 왜 내 가족들은 다 프랑스 사람이라는 건지. 별거 아니야. 나 입양됐거든 어렸을 때….”

“아…. 미, 미안해요.”

혜원은 괜히 아픈 곳을 건든 것 같은 미안한 마음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를 했다.

“네가 왜 사과를 해? 네가 날 버린 것도 아닌데. 너도 참 엉뚱하다. 난 괜찮은데? 부모님도, 형도 나 엄청 아껴 주고 사랑해 주시거든. 그래서 난 지금 너무 행복해. 그러니까 그런 불쌍한 눈으로 보지 않아도 돼.”

재희는 혼자 놀라 민망함에 어쩔 줄 몰라 허둥대는 혜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이런 소심한 녀석이 어떻게 이 위험한 파리에 혼자 여행을 왔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 그래도요.”

“그보다 넌 몇 살이야? 꽤 귀엽네?”

“스무 살! 조금 늦었지만, 내년에 저도 대학생 돼요!”

“진짜? 귀여운 꼬마인 줄 알았더니 나보다 겨우 한 살 어리네? 난 스물한 살. 대학생이야. 앞으로 재희 형이라고 불러.”

“네. 재희 형!! 헤헷….”

천진난만하기 짝이 없는 혜원은 처음 만난 재희에게 바로 형이라 부르며 그를 따랐다. 재희는 순진한 혜원의 이런 엉뚱하면서도 순수한 면이 재밌고도 귀여웠다.

이 낯선 외국 땅에서 조심성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보려 해도 없는 혜원을 보며 앞으로 가르쳐야 할 게 많겠다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자신이 그를 먼저 발견한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많이 먹어. 배고프겠다.”

재희는 혜원이 잘 먹는 음식들을 그의 앞으로 밀어주며 말했다.

“형! 이거 정말 맛있어요. 형은 맨날 이런 맛있는 거 먹어서 좋겠다. 정말 부러워요!”

“부럽긴. 요즘 프랑스에도 한국 음식이 얼마나 인기가 많은데. 난 한국 음식이 훨씬 맛있고 좋더라.”

“아! 그럼 형 언제 한번 한국 놀러 오면 나랑 같이 한국 음식 먹으러 다녀요!! 제가 가이드 해드릴게요!”

혜원은 마치 대답을 기다리는 귀여운 강아지 같은 얼굴로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렇게 크나큰 신세를 졌는데 그에 대한 고마움은 꼭 보답하고 싶었다.

“그래 알았어. 그 약속 꼭 지켜라? 빨리 먹어 식겠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깜깜해지니까 호텔로 데려다줄게. 보아하니 프랑스가 어떤 곳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온 것 같은데, 여긴 관광객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소매치기들이 사방에 널렸거든.”

“전 정말 몰랐어요. 형 너무 고마워요. 아, 맞다! 그리고 연락처 좀 알려 주세요! 내일은 꼭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내일? 너 내일도 혼자 돌아다니는 거야? 일행이 있다며? 누구랑 같이 왔다고 하지 않았어?”

“아, 그분은 바빠요. 맨날 바쁠 예정이라….”

어느새 시무룩해진 얼굴로 식욕이 다 달아나 버린 듯 혜원이 조용히 포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래. 알았어. 내일도 내가 관광시켜줄게. 그러니까 얼굴 좀 펴.”

재희는 순식간에 또 주인 잃은 강아지상이 되어 버린 혜원의 눈을 옆으로 길게 잡아 늘어트려 장난을 치며 말했다. 그러자 그제야 안심이 된 듯 다시 웃음을 되찾은 혜원이 파스타를 마저 먹기 시작했다.

단순할 정도로 자신의 감정을 얼굴에 거짓 없이 드러내는 귀여운 혜원. 재희는 그런 순진한 혜원에게 점점 더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둘은 이야기도 잘 통했고 관심사도 비슷해 어색하지 않은 식사를 이어갔다. 즐겁게 식사를 끝내고 재희가 아쉬워하는 혜원을 호텔까지 바래다주었다.

“형, 내일 연락할게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그래. 나도 오랜만에 정말 즐거웠어. 얼른 들어가서 쉬어. 피곤하겠다. 아직 시차 적응도 다 못했을 텐데. 잘 자고, 내일 보자!”

혜원은 멀어지는 재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이 머나먼 타국에서 저렇게 다정하고 착한 형을 만났다는 사실에 너무 뿌듯하고 기분이 좋아진 혜원은 그와 함께할 내일도 너무 기대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