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이불 밖은 위험해
Trrrrrrrrrrrrrr. Trrrrrrrrrrrrrrr.
미동 없던 이불 속에서 불쑥 손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삐죽 나온 손이 바닥을 더듬는다. 한참만에 손가락에 그때까지도 요란하게 울리고 있던 핸드폰이 드디어 잡혔다.
“여보세요.”
꾸물꾸물 전화기를 이불 안으로 끌어당긴 설형이 전화 건 상대는 확인하지 않고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잠이 덕지덕지 묻은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여보세요.”
뭐야. 장난 전화야? 뒤늦게 위화감을 느낀 설형이 살풋 미간을 찌푸렸다. 감히 현직 형사 핸드폰으로 장난 전화를 했다 이거지. 하지만 설형이 짜증을 퍼붓기 전 수화기 너머에서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고 있었습니까?”
잠이 확 깼다. 잠결에도 귀에 콱 들어와 박히는 낯익은 목소리, 도강우였다.
“네, 뭐. 비번이니까요.”
어쩐지 비난하는 듯한 질문에 설형이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성질 같아서는 남이야 늦잠을 자든, 지랄 생쑈를 하든 무슨 상관이냐고, 쏘아 주고 싶었지만 직급이 깡패라고, 그런 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더 잘 겁니까?”
“……잠 다 깼습니다.”
누구 덕분에요. 물론 뒷말은 속으로만 되뇌었지만.
“그럼 좀 봅시다.”
“네? 무슨 일로―”
“위치는 문자로 보낼 테니 한 시간 뒤에 거기서 보는 걸로 알겠습니다.”
설형의 질문에도 제 할 말만 하던 도강우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저기, 여보세요? 여보세요. 도 검사님?”
헐. 설마 정말로 끊었나 싶어 핸드폰 액정을 확인했던 설형이 기가 막히다는 듯, 너털웃음을 흘렸다.
게다가 뒤늦게 확인한 시간은 10시.
아직도 자고 있냐고 핀잔을 들을 만큼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니었다. 뭐야 진짜. 깜깜해진 핸드폰 화면을 멍하게 내려다보며 머리를 긁적이고 있으려니 마치 그런 설형을 재촉하듯 액정이 다시 밝아졌다.
[한 시간 뒤.]
이렇게 시작된 메시지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전대리 이하 주소가 덧붙여져 있었다. 용건만 간단히, 공중전화도 아니고 문자도 꼭 지같이 재수 없다. 얼굴을 확 찌푸린 설형이 도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아 몰라. 내가 뭐 지 부하도 아니고, 물론 직장 상사인 것은 맞지만, 비번일 때까지 상사의 지시를 들을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정확히 10초 뒤, 설형이 벌떡 일어났다.
아 씨발. 대체 무슨 일인데?!
딴 건 다 제쳐 두고라도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 라는 말이 문득 뇌리를 스쳤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기.”
걸음을 내딛던 설형이 멈칫했다.
이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아니, 더 많은 인파 속에서도 단연 눈에 띌 얼굴이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순간,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상황도 잊고 웃으면서 마주 손을 흔들 뻔했다. 정신 차려, 백설형. 고개를 휘휘, 내저은 설형이 얼굴을 굳힌 채 가까이 다가갔다.
“좀 늦었네요.”
손목시계를 확인한 도강우의 중얼거림에 설형이 얼굴을 확 찌푸렸다.
“갑자기 연락해서 나오라고 해 놓고 지금 늦었다고 뭐라고 하려는 겁니까?”
따지듯 묻는 설형에 도강우가 평소 태평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리고 중얼거린다.
“난 그냥 차가 막혔냐고 물으려던 건데요.”
“…….”
아씨. 설형이 뒤늦게 자신이 또 괜한 설레발을 부렸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는 다소 익숙한 일이기도 했다. 정작 본인은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기분이 안 좋아 보입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묻는 도강우에 설형이 기가 막히다는 듯 되물었다.
“그럼 좋겠습니까?”
지난 두 달 동안 비상 걸려서 내내 숙직실과 찜질방을 전전하다가 그나마 겨우 하루 쉬는 날 이렇게 상사 호출을 받았는데. 하지만 물론 그런 말은 입안으로 삼켰다. 말마따나 상사인데,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하지만 역시나 늘 마이 페이스인 도강우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중얼거린다.
“뭐, 지금은 그래도 곧 기분 좋아질 겁니다. 꿈과 희망을 주는 곳이니까.”
하.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물론 너무 기가 막혀서!!!
꿈과 희망을 주는 곳, 이라고 칭한 그러니까 지금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경기도에 위치한 유명 놀이공원 입구였다.
“설마 지금, 여기를 가겠다고 하시는 건, 아니죠?”
설형이 손가락으로 바로 옆까지 쭉 늘어선 행렬을 가리키며 물었다. 평일임에도 놀이공원은 인산인해였다. 의외로 한가한 사람들이 많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당연히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라 지금의 상황이 기가 막혀서 물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설형을 도강우가 오히려 어이없어한다.
“그럼 뭐 하러 왔겠습니까. 놀이공원 입구만 찍고 돌아가려고 오라고 했겠습니까?”
하하. 설형이 웃었다. 물론 이번에도 기가 막혀서.
오는 내내 놀이공원 안내판을 보긴 했지만 설마, 아니겠지,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늘 불길한 예감은 어긋나는 법이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백설형의 인생에서는.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압니까.”
물론 당연히 보통의 사람은 놀이공원에 놀러 오겠지. 하지만 도강우와 놀이동산은 전혀 매치가 되지 않잖은가. 아니, 너무 매치가 되지 않는 수준을 넘어서서 너무 안 어울린다. 그러니 그런 질문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사람을 바보 취급하고 있다. 버럭 화를 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최대한 좋게 이야기를 했다.
물론 그래 봐야 그런 설형의 노력 같은 건 개무시해 주시는 도강우였지만.
“바보 아닙니까?”
헐. 기가 막혀하고 있는 설형에게 쐐기를 박는다.
“그래 가지고 대체 수사는 어떻게 합니까?”
심지어 수사 능력까지 의심받았다. 연거푸 받은 공격에 기가 막히다 못해 멍해 있는 사이 도강우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럼 가죠.”
그리고는 휙, 하고 몸을 돌려 가 버린다.
“저기요. 저기요, 도 검사님?”
설형의 부름에도 도강우는 이미 저만치 멀어진 뒤였다. 이 인간이 진짜. 크게 한숨을 내쉰 설형이 도강우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막 그 뒤를 쫓았을 때였다.
“도 검― 힉.”
갑자기 예고도 없이 휙, 돌아서는 도강우에 설형이 숨을 삼켰다. 돌아보는 도강우의 표정이 살풋 찌푸려져 있었다.
“검사와 형사라고 광고할 일 있습니까?”
“아.”
사실 생각해 보면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무작정 사람을 불러낸 도강우의 잘못이 컸지만 순간적으로 설형의 눈빛도 달라졌다. 혹시 무슨 제보라도 있었던 건가? 순간 그런 생각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쳤던 것.
그냥 좀 평범하게 알려 주면 안 되겠습니까? 기가 막혔지만 일단은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이래서 더러우면 출세하라고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순순히 사과를 하는 설형에도 도강우의 시선은 설형을 위아래로 훑고 있었다. 그러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안 그래도 충분히 수상쩍은 옷차림인데.”
그러는 검사님은요?! 라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도강우는 평소와 달리 가벼운 면바지와 니트 상의에 남색 블루종을 걸친 다소 캐주얼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치사하게.
정장 외에 다른 옷을 입은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사실 이런 가벼운 차림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는데. 잘생긴 얼굴은 뭘 입어도 잘 어울리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잘 봐주면 상큼해 보이기까지……, 아나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거기까지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가던 설형이 곧바로 고개를 마구 붕붕 내저었다.
그리고 황급히 자신의 옷차림을 확인한다.
사시사철 교복처럼 입고 다니는 검은색 저지 점퍼. 확실히 상큼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나마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이라는 것이 다행이기는 했지만 눈앞에 패션 화보라도 찍을 기세로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있으려니 괜스레 몸이 움츠러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사실 설형은 옷차림에 그닥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아예 관심이 없다는 쪽에 가까웠다. 옷이라는 게 깨끗하고, 움직이기 불편하지만 않으면 되지, 라고 생각하는 편이었는데 늘 제대로 갖춰 입는 남자는 눈앞에 두고 있으려니 저런 것도 꼭 쓸데없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설형이었다.
“그러게 미리 말해 줬으면 좋았잖습니까.”
설형이 칙칙한 점퍼를 벗으며 투덜거렸다. 물론 말해 줬다고 해서 놀이동산에 어울릴 만한 복장을 하고 오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어쨌든 모든 일의 원흉은 도강우인데 자신만 비난받는 건 억울했다.
“주소 보면 모릅니까?”
“주소로 알려 주는데 어떻게 압니까?! 보통 그럴 땐 놀이공원 이름으로 알려 주거든요?”
이름도 아니고, 주소로 알려 줘 놓고, 이것도 어쩌면 일부러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발끈해서 받아치는 설형에도 도강우는 태연했다.
“그렇습니까?”
“네!”
“그 편이 찾아오기 편할 것 같아서 그런 건데, 미안합니다.”
“…….”
또다. 또 발끈해 버렸다. 상대는 별다른 생각도 없는데 괜히 혼자 흥분하고 발끈하고. 원래 나 이런 성격 아닌데, 이 인간과 있으면 꼭 이렇게 된다.
하아. 진정하자. 진정해. 심호흡을 한 설형이 이번엔 먼저 걸음을 옮겼다.
“가죠.”
매표소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설형을 가만히 보고 있던 도강우가 말했다.
“표라면 미리 사 뒀습니다.”
“그런 건 미리미리 좀 말하란 말입니다!”
진정이 그리 오래가지 못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거 보니까, 사이좋게 수갑 찼던 날이 생각나네요.”
직원이 채워 주는 종이 팔찌를 무심하게 내려다보며 도강우가 툭, 하고 감상을 내뱉는다.
“저기, 그런 태연한 얼굴로 무서운 농담하지 말아 주실래요?”
제 팔찌를 채워 주던 직원의 얼굴이 살짝 굳는 것을 본 설형이 한마디했다. 농담이라뇨? 라고 물을 기세인 잘생긴 얼굴을 향해 설형이 필사적으로 눈빛을 보냈다.
“아.”
그제야 직원의 시선이 묘하게 굳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 정도 농담 가지고 뭘 그럽니까.”
별다른 말 없이도 알아차리고 되받아치는 도강우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설형이 겉으로는 투덜거린다.
“그렇게 무표정으로 농담하면 듣는 사람은 쫄거든요?”
“그렇습니까.”
피식, 하고 웃음을 흘린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원의 표정은 확연히 가벼워졌다. 아마도 도강우의 지나치게 잘난 얼굴 덕분이 크겠지만. 누가 세상은 공평하다고 했던가. 절대 불공평한 것이 세상이었다. 특히 요런 잘난 얼굴에 금수저를 문 분들께는.
“저한테 형사 티 내지 말라고 말한 사람 어디 놀러 가셨습니까?”
다행히 이상한 의심은 피했으나 불만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물론 빠르게 입구를 통과해 직원과의 거리를 멀찍이 떨어트린 뒤에야 투덜거린 것이지만. 형사가 아니라 범죄자로 여겨질 뻔했는데도 정작 도강우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둘이 같은 팔찌를 하고 있는 걸 보니까 감회가 새로워서.”
헐. 누가 들으면 엄청 아름다운 추억인 줄 알겠다.
“이 팔찌 우리만 하고 있는 거 아니거든요?”
기가 막혀서 한마디했지만 도강우는 별로 귀담아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왜 이런 거 굳이 같이 하나 했는데 조금은 알 거 같군요.”
“저기요. 도 검―.”
도강우를 부르려던 설형이 멈칫했다. 검사는 안 되고, 뭐라고 불러야 하나 고민하고 있으려니 도강우가 얄밉게 말했다.
“이름으로 불러도 됩니다.”
“소름끼치는 소리 하지 말아 주실래요?”
“왜요. 내가 백설형 씨보다 어리잖아요.”
“그게 소름끼친다는 건데요.”
피식. 바람 소리가 났다. 대체 이게 어디가 나보다 나이 어린 사람의 반응이란 말인가.
“영감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딱 도강우에게 어울리는 호칭이다 싶었지만.
“애칭입니까?”
“컥.”
설형의 얼굴이 확 찌푸려졌다. 하지만 마주한 도강우는 태연했다.
“아니거든요?!”
“좋네요. 애칭 같고.”
“저기요. 제 말 좀 들어 주실래요? 아니라니까요?”
“됐고, 이거나 입어요.”
“아니 됐다는 게 무슨, 그리고 이건 왜 주십니까.”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으실래요? 따질 것이 많았지만 갑자기 입고 있던 블루종을 벗어 주는 도강우에 결국 그것부터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춥잖아요.”
“안 추운데요?”
“금방 팔뚝 문지르는 거 봤거든요.”
“그건 순간 오한이 들어서―”
“그게 추운 겁니다.”
사실 최대한 튀지 않으려고 점퍼를 벗어 놓긴 했지만 안은 얇은 면 티셔츠가 고작이라 사실 몸이 좀 써늘하긴 했다.
“이걸 저 주시면 도 검, 아니 영감님은요.”
나름 고맙기도 하고, 걱정되어서 한 말이었지만.
“전 젊으니까요. 노인 공경해야죠.”
괜한 짓이었다.
“그렇군요. 노인 공경 감사합니다.”
얼굴을 확 찌푸린 설형이 더 이상 마다하지 않고 그대로 옷을 입었다. 크긴 했지만 흉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비싼 옷이라 그런지 보기엔 엄청 얇아 보이는데 입는 순간 찬 기운이 단숨에 막아졌다.
“이것도 비싼 거 아닙니까?”
“별로요.”
어깨를 으쓱이며 도강우의 대답이 돌아왔지만 어쩐지 믿기진 않았다. 아니, 사실 도강우의 입장에서는 이 정도가 보통이겠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 보통이 진짜 보통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세탁비 물라고 안 할 테니까. 그냥 좀 입으시죠.”
“누가, 그거 때문에 그럽니까?”
미안하니까 그렇죠. 물론 뒷말은 속으로 삼켰지만. 코끝에 좋은 냄새가 느껴졌다. 도강우에게서 늘 맡는 향이었다. 코끝이 간질간질했다. 그러다가 이내 머리를 내저었다.
“그럼 어디로 가면 되는 겁니까?”
설형이 생각을 지우기 위해 빠르게 걸음을 내딛으며 물었다. 도강우가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아직 시간이 얼마 안 됐으니까.”
아. 접선시간까지 좀 남은 모양이다, 그렇게 추측하고 얌전히 있는 설형에게 도강우가 문득 물어 왔다.
“탈래요?”
“이걸요?”
도강우가 가리킨 것은 마침 두 사람 옆에 위치한 롤러코스터. 그 와중에도 공중에서는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을 올려다보며 되묻는 설형에게 도강우가 물어 왔다.
“왜요. 무서운 거 못 탑니까?”
“아니거든요?!”
발끈한 설형의 반응에 도강우가 이미 예상했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그럼 갈까요?”
그제야 설형은 제가 또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그래 봐야 이미 늦은 일이었지만.
“괜찮습니까?”
부드러운 음성과 함께 이마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벤치에 드러누워 있던 설형이 실눈을 뜨자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잘난 얼굴이 보였다. 분명 같이 탔는데 꼴사납게 벤치를 차지하고 누운 자신과는 달리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아니 오히려 더 싱그러운 얼굴을 보니 배알이 꼬였다.
물론 배알이 꼬여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과 달리 몸은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다시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나마 이마에 차가운 것이 닿으니 살 것 같았다. 게다가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도강우가 머리 위에 선 덕분에 얼굴로 쏟아지던 햇볕도 가려졌다.
“따 줄까요?”
설형의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됐다는 거절의 말이 없으니 허락의 뜻이라는 걸 알아차린 도강우가 이마에 대고 있던 캔을 도로 가져가 캔을 땄다. 푸슉. 하는 경쾌한 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리는 것을 본 설형이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워 있으라고 할 땐 필요 없다고 하긴 했지만 확실히 울렁거리는 것이 단숨에 줄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주 어지러워 죽겠더니.
“못 타면 그냥 못 탄다고 하지 그랬어요.”
“……못 타는 거 아니거든요.”
캔을 건네받던 설형이 곧 죽어도 도강우의 말에 반박하고 나섰다.
“그냥 좀, 어지러운 것뿐입니다.”
“그게 못 타는 건데요.”
“……빙글빙글 도는 구간이 너무 많잖습니까.”
구차한 변명이지만 그래도 지는 게 싫어서 반박하고 있으려니 도강우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저 왔다 갔다 하는 거 탈래요? 저건 안 어지러울 텐데.”
“…….”
도강우의 손가락이 가리킨 것을 본 설형이 바로 입을 닫았다. 후르륵, 캔을 들이켰다. 일부러 딴청을 하려고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정말 목이 탔다.
“너무 부끄러워 할 것 없습니다. 원래 나이 들면 달팽이관도 노쇠해서 균형 감각이 많이 떨어진다고 하니까요.”
“아직 그럴 나이는 아닙니다만?!”
“확실히 괜찮아진 모양이군요.”
따박따박 반박하고 나서는 걸 보니. 살 만해졌다는 증거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얼굴에 핏기 하나 없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있어서 걱정했는데. 그래도 차라리 아무 말도 못하고 누워 있는 것보다야 이쪽이 더 나았다.
피식, 하고 웃으며 도강우가 설형이 일어나 앉은 자리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빈속에 타서 그래요.”
이번엔 반박하는 말도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푸슉, 하고 캔을 따는 경쾌한 소리만 들려왔을 뿐이다. 음료를 들이키는 도강우의 옆모습을 흘깃 보며 한 모금 남은 음료를 마저 털어 넣은 설형이 슬그머니 다시 입을 열었다.
“도검, 아니 영감님은 의외로 이런 거 좋아하나 봐요?”
“별로요.”
엥? 하지만 또 생각해 보면 그렇게 막 즐거워 보이지 않기는 했다.
“……그럼 대체 왜 타신 겁니까?”
“백설형 씨랑 함께 타려고.”
도강우의 대답에 순간 설형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상사가 부하 직원 이렇게 대놓고 괴롭히기 있습니까?”
“괴롭힘이라뇨.”
“그럼 괴롭힘도 아니면 뭐 때문에 저랑 이걸 타려고 한 건데요?”
“…….”
“네?”
말없이 가만히 저를 보고 있는 도강우에 설형이 거보라며, 대체 그게 아니면 뭐가 있냐고 따지듯 한 번 더 대답을 종용했다. 그런 설형을 뭐 이런 멍청이가 다 있나, 하는 눈빛으로 보고 있던 도강우는 하, 하고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뭐 그런 사람이라는 거 몰랐던 것도 아니니. 수사 외에는 어떻게 멀쩡히 살아온 건가 싶을 정도로 눈치라고는 없는 사람이 아니던가. 각오는 했지만 기가 막힌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아. 작게 한숨을 내쉰 도강우가 막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그거야―”
“어?”
하지만 그 순간 작은 소리를 낸 백설형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튀어나갔다. 도강우의 시선도 튀어 나가는 설형의 뒤를 쫓았다.
“악.”
비호처럼 달려 나간 설형은 누군가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는데. 허공에 높이 치켜 올려진 그 남자의 손엔 한눈에 봐도 여자 것이 분명한 핑크색 지갑이 들려 있었다.
“이거 아가씨 지갑 맞죠?”
“어머!”
남자의 앞에 서 있던 아가씨에게 묻자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해 있던 여성이 자신의 가방을 확인한 후에야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는 걸 깨닫고 깜짝 놀랐다. 놀이 기구를 타려고 서 있던 사람들 사이에 슬쩍 끼어 있던 소매치기였다.
“경비 사무실에 연락해요.”
“네, 네!”
설형이 진행 요원을 향해 지시하자 눈이 휘둥그레져 있던 진행 요원도 급히 무전을 쳤다.
“너, 너 뭐야!”
당황해서 잠시 굳어 있던 남자가 뒤늦게 상황 파악을 끝냈는지 반항을 시도했다. 이쁘장하게 생긴 얼굴만 보고 쉽게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붙잡힌 팔을 빼낼 수가 없었다. 오히려 빠져나가려는 움직임에 설형이 급소를 누르고 있던 손가락을 좀 더 콱 눌렀다.
“으아아.”
사실 설형이 힘으로는 좀 딸려도 굳이 힘을 들이지 않고도 자신의 두 배는 되는 덩치를 때려눕히는 방법을 수백 가지는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대부분 나중에 증거가 남지 않는 방법들이었는데 경찰서 내 형사들이 설형이라면 혀를 내두르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지금도 남들이 보기엔 설형은 그저 남자의 손목을 붙잡고 있을 뿐으로 오히려 괴로운 소리를 내지르며 어쩔 줄 몰라하는 남자 쪽이 훨씬 기괴하게 보일 뿐이다. 팔뿐만 아니라 등줄기가 찌릿찌릿할 정도의 통증에 더 이상 반항하는 것을 포기한 남자가 이번엔 다른 방법을 강구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씨발 니가 형사라도 돼?!”
아차. 순간적으로 설형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번졌다. 물론 그 이유는 자신이 형사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형사이기 때문이었지만 설형의 그런 기색을 알아차린 남자의 얼굴에 화색이 번졌다.
“씨발 형사도 아니면서 왜 남의 일에 끼어들고 지랄이야, 지랄이.”
억지였다. 하지만 일단 어떻게든 이 자리를 빠져나가야 살길이 생기는 터라 일단 이 자리를 모면하려는 의도였다. 당황해하는 설형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고. 하지만 그 순간 불쑥 끼어든 목소리.
“현행범 체포는 꼭 경찰이 아니라도 할 수 있습니다만.”
오늘 무슨 마가 꼈나. 불쑥불쑥 등장하는 인물들마다 눈이 튀어나올 법한 얼굴들이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이 사람들의 관심인데, 엎친 데 덮친다고 조금 전보다 훨씬 더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다.
“빼박, 현행범이잖습니까.”
흘끔, 도강우의 시선이 여자가 건네받아 쥐고 있던 지갑에 닿아 있었다. 덕분에 살았다 싶었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은 것은 단순히 느낌만은 아니리라. 분명 범인을 볼 때보다 자신을 보는 도강우의 시선이 훨씬 더 사나웠으므로.
“그건 또 언제 봤습니까?”
달려온 경비원에게 범인을 인도한 뒤 차에 실려 가는 것까지 보고 난 뒤에야 도강우가 툭, 하고 한마디한다.
생각이 있냐 없냐, 형사 티 내지 말라고 한 게 얼마나 됐다고 그새 잊고 광고를 하냐, 머리가 나쁜 거 아니냐, 온갖 잔소리가 쏟아질 줄 예상했던 터라 의외로 순순한 질문에 오히려 당황한 쪽은 설형이었다.
“네, 뭐, 그냥, 보니까 보여서.”
머뭇거리며 대답하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지만
“다행이네요.”
“네? 뭐가…….”
“몸이 다 회복된 거 같아서요.”
“아, 네. 뭐, 그렇죠.”
비꼬는 말이 아닐까 의심한 것이 무색하게도 다행이라고 중얼거리는 도강우의 표정은 진지했다. 나름 걱정해 줬던 건가. 뒤늦게 조금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물론 그런 감동의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지만.
“그럼 이번엔 이거 탈래요?”
조금 전 범인이 서 있었던 놀이 기구를 가리킨다.
“음, 배 안 고프십니까? 전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더니, 뭐라도 먹으러 가죠.”
설형이 슬그머니 걸음을 내딛으며 말했다. 질문을 해 놓고 정작 대답은 들을 생각이 없었다.
“아, 빈속이라 그랬다 그랬지. 그럼 배 좀 채우고 타면 되겠네요.”
“…….”
다 알면서 얄미운 소리를 하는 입을 콱 쥐어박고 싶었지만 설형은 조용히 걸음 속도를 높일 뿐이다. 피식, 바람이 이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지만 역시나 뒤따르는 발소리가 바싹 등 뒤에서 들려왔다.
“축하드립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패밀리 레스토랑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였다. 문을 열기 무섭게 펑 소리와 함께 반짝이는 종이를 뒤집어써야했다.
“저희 레스토랑 만 번째 손님이십니다~.”
하필이면. 운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하더니. 아니, 이건 너무 운이 좋은 건가. 아 모르겠다. 암튼 달갑지 않은 행운이었다. 특히 이렇게 도강우와 함께 있을 때는 더더욱.
“두 분이신가요?”
“네.”
“그럼 먼저 자리부터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제발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입안으로 삼켰다. 안내받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젠 다 끝났겠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 무섭게 그런 설형의 생각을 비웃듯 서버가 앞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리고 참 이거.”
“이게, 뭡니까?”
“커플 머리띠인데, 하고 계셔야 서비스가 나오거든요.”
서버 역시도 난감한 표정을 짓고는 있었다. 남자 둘이 온 커플에게 이걸 쓰라고 하는 것이 본인도 다소 무리라는 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어린 남자아이들이나 이런 걸 즐길 법한 분위기라면 모르겠지만 두 사람 모두 이런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그런 분위기를 읽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체 놀이동산은 왜 온 거지? 근본적인 의문을 떠올리기 직전, 설형이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서비스 필요 없―”
“주세요.”
하지만 그런 설형의 말을 자르고 끼어든 목소리가 있었으니.
“네?!”
놀라 버럭 소리를 내지른 쪽은 설형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눈짓을 했지만 도강우는 태연했다.
“하죠, 뭐.”
오히려 서버 손에 들린 것을 가져가 설형의 머리에 씌우고, 자신의 머리에도 썼다.
“주문 안 받습니까?”
그리고는 그때까지 멍하게, 굳어 있는 서버를 향해 고개를 갸웃, 하며 묻는다. 미니마우스 귀가 살짝 흔들리는 것을 보며 설형이 질끈 눈을 감았다. 도저히 맨 정신으로 볼 수가 없었다. 왜냐고? 너무 잘 어울려서!!!!
이래서 얼굴은 잘나고 볼 일인가 보다.
차라리 너무 안 어울렸다면 웃기기라도 할 텐데. 이건 뭐, 마치 처음부터 커다란 귀가 달려 있었던 사람처럼 위화감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그 모습을 보고 귀엽다는 생각마저 드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미친 게 분명했다.
“뭐 더 먹고 싶은 것 없습니까?”
설형이 혼자 멘붕에 빠져 있는 사이 태연히 이것저것 메뉴판에 있는 것들을 시킨 도강우가 설형의 의견을 물어 온다.
“없습니다.”
설형이 반쯤 포기한 얼굴로 말했다. 일하는 중만 아니면 맥주라도 원샷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니 얌전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다네요. 이렇게만 주세요.”
“네, 그럼, 음식은 이렇게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반쯤 정신이 나간 얼굴로 주문을 받은 서버가 비틀거리며 사라졌다.
“잘 어울리네요. 귀여워요.”
아, 그제야 저도 머리에 도강우와 비슷한 것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워낙 눈앞의 장면이 컬쳐 쇼크라 잠시 잊고 있었다. 그나마 저에게 미니가 아닌 미키마우스를 준 것을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설형이 되물었다.
“신종 괴롭힘입니까?”
기가 막히다는 듯 묻는 설형에 도강우가 어깨를 으쓱인다.
“그럴 리가요.”
사실 빼려고 마음먹으면 그냥 뺄 수도 있는 건데. 또 하고는 있으면서 투덜거리는 백설형이 귀엽기 짝이 없었다.
“영감님이, 그렇게 공짜 좋아하시는 줄 몰랐네요.”
있는 사람이 더하다더니. 중얼중얼거리는 설형에 도강우가 기가 막히다는 듯 하, 하고 웃었다.
“누가 공짜 서비스 받자고 그럽니까?”
“그럼요.”
그거야 당연히 당신이랑 커플 머리띠 하려고 한 거잖아.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왜냐고, 도대체 이유가 뭐냐고 물어오는 설형에 도강우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다.
“당연히.”
말을 하던 도강우가 멈칫했다. 다음 말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설형이 한참을 기다리다 결국 되물었다.
“당연히, 요?”
“이런 거라도 하고 있어야 눈에 덜 튈 거 아닙니까.”
솔직히 말해 주려다가 불툭, 심술이 돋아 말을 바꿨다. 유독 백설형이 놀리는 재미가 있기도 하고.
“오히려 더 튈 거 같은데요?”
“튀더라도 여기에 어울리게 튀는 편이 낫잖습니까?”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싶었지만 듣고 보니 그건 또 그렇다 싶었다. 이상하긴 해도 적어도 즐기러 온 사람들로는 보일 테니까. 오히려 여기 놀러온 것도 아니고 그런 분위기 풀풀 풍기면서 멀뚱히 서 있는 게 더 의심스럽게 보이긴 하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정도 납득한 표정을 본 도강우가 피식, 하고 웃었다. 물론 고민하던 백설형이 고개를 들었을 때는 도강우의 얼굴에서 웃음기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리고 때마침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거 다 시키신 거예요?”
“네.”
끝도 없이 나오는 음식에 설형이 얼굴을 찌푸리며 되물었지만 정작 당사자는 태연했다.
“뭐 메뉴판에 있는 거 다 시키셨습니까?”
“그 정도는 아닙니다만.”
“이걸 누가 다 먹는다구요?”
“배고프다면서요.”
“대체 누가―”
무슨 소리냐고, 되물으려던 설형이 뒤늦게 배가 고프다고, 이곳으로 끌고 왔던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음을 깨달았다.
“배고프다고 했을까요? 저죠. 네, 저.”
“…….”
원맨쇼를 보는 어이없어하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르는 척 포크를 집어 들었다.
사실 정말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속이 좋지 않아서 식욕이 없었는데 음식 냄새를 맡으니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생각해 보니 어젯밤 집에 먹을 것도 없기도 했지만 사실 잠이 더 고파서 일단 잠부터 자고 보자, 하고 잠들었던 터라 꽤 오랫동안 뱃속이 비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거, 영감님이 사시는 거죠?”
큼직한 스테이크 조각을 찍어 입으로 가져가면서도 확인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살풋 미간을 찌푸리긴 했지만 도강우가 말했다.
“네, 걱정 말고 드세요.”
빵 접시를 설형의 앞으로 밀어 주며.
“확실히 체질은 체질인가 보군요.”
도강우가 살짝 질린다는 어투로 중얼거렸다.
“범죄를 몰고 다니는 체질.”
“헐. 말은 바로 해야죠. 제가 몰고 다니는 게 아니라 하필이면 제가 지나가는 곳에 범죄가 일어나는 거거든요?”
설형이 억울해했지만 그런 설형의 주장을 도강우는 시큰둥한 얼굴로 일축해 버렸다.
“그게 몰고 다니는 건데요.”
“…….”
꾹―, 설형이 입을 다물었다.
“누가 보면 이 공원 경비업체 직원인 줄 알겠습니다.”
도강우의 놀리는 말에도 사실 변명할 말이 없었다. 오늘 하루 설형이 이곳에서 잡은 범죄자만 해도, 소매치기, 여자 친구에게 손찌검하려는 남자, 심지어 길을 잃고 울고 있는 미아까지. 미아 정도는 누가 보호소로 데려가겠지, 싶어서 외면하려고 했지만 누가 봐도 수상쩍은 남자가 어린아이를 데려가려고 하는 것을 보고 그냥 둘 수는 없었다. 그런 사정을 본인도 함께 다 봐 놓고 자신만 탓하는 건 너무한 것 아닌가.
“누군 뭐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압니까.”
설형이 투덜거렸다. 내가 이래서 밖에 잘 안 돌아다니는 건데. 휴일에 잘 자고 있던 사람 굳이 이런 곳에 불러낸 사람이 누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억울해진 설형이 막 따져 물으려고 할 때였다.
“그래서 제가―윽.”
“아바!”
다다다다. 묘하게 앙증맞은 발소리와 함께 뒤편에서 달려온 무언가가 허벅지에 매달렸던 것. 사실 말이 매달린 것이지 온몸으로 박치기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라 순간적으로 설형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그런 설형의 어깨를 잡아 준 것은 도강우였다.
“아바!”
갑자기 자신을 습격한 것이 무엇인지 확인을 하기도 전에 다시금 들려온 단어. 마주한 도강우의 눈매가 살풋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다.
“아니야.”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도강우가 무슨 생각을 한 것이지 알아차린 설형이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냥 순순히 넘어갈 도강우도 아니지만.
“진짭니까? 이것도 기억 못하는 걸 수도 있잖습니까?”
“진짜 아니라고.”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내젓던 설형이 황급히 고개를 틀어 제 다리에 매달린 아들(?)을 확인했다. 노란 티에 아이보리색 멜빵바지를 입은 사내아이는 어림잡아 서너 살 정도 되어 보였다.
“꼬마야, 너―”
“아니야.”
하지만 지금의 상황이 당황스러운 것은 설형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뒤늦게 설형의 얼굴을 확인한 아이가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제야 자신이 매달려 있던 사람이 아빠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아바, 아니야.”
휘둥그레졌던 눈이 울상이 된 것은 순식간이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아이를 확인한 설형의 눈매도 일그러졌다. 그 순간 아이를 휙, 하고 안아 올린 것은 도강우였다.
“아빠 아니야?”
“아니야.”
여전히 울상이긴 했지만 질문에 답은 해야겠는지 아이가 고개를 내젓는다. 아이가 조금 전 상황을 기억하기 전에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아빤 어딨는데?”
“아바, 아바.”
화제가 바뀐 질문에 아이도 그제야 낯익은 얼굴들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하지만 정작 질문을 한 도강우는 아이와는 전혀 다른 방향을 살피고 있었다. 아이가 확인해 주지 않아도 부모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니까. 멀지 않은 곳에 헐레벌떡 뛰어오는 젊은 부부가 보였다.
“선우야!”
도강우에게 안겨 있는 아이를 발견한 아버지가 한달음에 거리를 좁혔다. 그제야 아이도 자신의 부모를 발견하고 바둥거린다. 도강우가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다다다다, 불안한 걸음으로 달려오는 아이를 아버지가 단숨에 안아 들었다. 아이가 코알라인 양 아버지의 목에 답싹 안겼다.
“대체 언제 여기까지 왔어.”
“엄마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눈을 뗀 것은 아주 잠시였을 것이다. 아장아장 걷는 아이가 뭐 얼마나 멀리 가겠는가, 조금은 방심해서. 하지만 아이는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였다. 실종된 아이들 대부분이 그러했다. 허나 혼이 다 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 부부를 보니 그런 주의를 주는 것이 내키진 않았다. 조금 전 억울해했던 상황도 잊고 설형이 한발 뒤로 물러서려고 할 때였다.
“아이가 눈이 안 좋은 모양입니다.”
뜬금없는 소리를 잘하는 남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예?”
영문을 몰라 되묻는 아이의 아버지와 달리 도강우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아차린 설형은 미간을 찌푸린다.
“전혀 비슷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아빠라고 하는 걸 보면 말입니다.”
그걸 또 따지고 앉았다.
“아…….”
그제야 남자도 무슨 상황인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사내의 얼굴이 구겨졌다.
사실 아이의 아버지의 외모가 어디 가서 빠지는 수준의 외모는 아니었다. 냉정하게 평가한다고 해도 평균 이상은 되었다. 그럼에도 눈앞의 사내를 보니, 아이 눈에는 성인 남자가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게 당연하지 않냐는 반박은 할 수 없었다. 남자인 제 눈에도 눈앞의 사내는 비슷비슷한 성인 남자의 카테고리 밖에 있는 외모였기 때문이다. 물론 비교해야 할 쪽은 도강우가 아니라 설형이었지만.
“다음부터는 조심 좀 하는 게 좋겠습니다. 멀쩡한 사람 아이 아빠로 만들지 않으려면요.”
아이를 잃어버릴 뻔한 것은 남자의 잘못이었다. 그럼에도 아이를 데리고 있던 두 사람을 경계하느라 감사인사가 늦었다는 걸 깨달았다. 더불어, 자신의 아이가 눈앞의 사내에게 폐를 끼친 것까지.
“죄송합니다.”
“그쯤하고 가시죠.”
보다 못한 설형이 끼어들었다. 정작 억울해야 할 쪽은 자신인데 왜 도강우가 이리 열이 받은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다행히 도강우도 더는 할 말 없다는 듯 설형이 당기는 대로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아이 보는 것이 능숙하시던데.”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설형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정작 아이라도 있는 건 그쪽 아니냐는 말은 하지도 못했다.
“조카가 있으니까요.”
그것보다 먼저 물을 것이 생겼으므로.
“형님이 있으십니까?”
“네. 둘이나 있습니다만.”
“…….”
당연히 외동인 줄 알았다. 그런데 위로 둘이나 있는 화목한 집안의 막내라니. 제 귀로 듣고서도 뭔가 믿기질 않았다.
“무슨 문제라도?”
“아뇨. 뭐, 문제가, 뭐가 있겠습니까.”
“얼굴은 문제가 있어 보이는데요.”
님이 막내라니 당췌 적응이 되질 않는다고, 할 수는 없으니 설형은 슬그머니 걸음의 속도를 높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다행히 도강우도 더 이상 거기에 대해 문제 삼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대신, 다른 것을 걸고 넘어졌다.
“그런데 왜 갑자기 말을 높입니까?”
“갑자기 말을 높이다뇨? 전 원래 말을 높였습니다만.”
“조금 전엔 말 놨잖습니까.”
“…….”
무슨. 설형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제가 언제―아.”
하지만 반박하려던 설형의 입술이 도로 닫힌 것은 다음순간이었다.
‘아니야.’
‘절대 아니라고.’
너무 당황한 나머지 반말로 고개를 내저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완전한 반말이라기에는 애매한 감이 있었지만 괜히 그런 변명을 하는 것도 구차해 보여 나름 당당하게 반박했다.
“반말해도 된다면서, 요.”
물론 도강우를 설형이 당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누가 뭐랬습니까? 낮추는 줄 알았는데, 높이니 하는 말이죠.”
“보통은 반대 아닙니까?”
“전 보통이랑은 거리가 좀 멀어서요.”
그건 그렇지. 게다가 좀이 아니라 많이, 라고 정정해 주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았다.
“그렇게 저한테 막말 듣는 게 소원이시라면 해 드리죠.”
“해 보세요.”
“…….”
웃자고 해 본 말에 이리 진지하게 반응하면 곤란합니다만. 팔짱까지 끼고 한발 물러서는 도강우에 설형이 곧장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왜요. 한번 들어 봅시다.”
“잘못했다잖아요.”
“…….”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집요해. 곤란을 넘어서 짜증스러운 기분에 설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런 설형을 물끄러미 보던 도강우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 잘난 얼굴에서 피곤하다는 기색을 읽은 설형도 조금 쫄아붙었다.
“말도 놓고, 이제 좀 편해졌나 싶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
“괴롭히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아……. 설형의 눈매가 다시 찌푸려진다.
“그런, 이유였던 겁니까?”
“그럼 다른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난감한 기색으로 묻는 설형에 도강우가 오히려 되묻는다. 당연히 저 괴롭히려는 건 줄 알았죠! 라고 대답할 수는 없으니, 방향을 조금 틀었다.
“편해도 전 말 잘 안 놓습니다.”
“…….”
전혀 못 믿겠다는 눈빛에 작게 한숨을 내쉰 설형이 덧붙인다.
“홍 반장님한테 꼬박꼬박 존대하는 거 못 보셨어요?”
“…….”
그제야, 조금 납득한 듯 누그러진 검은 눈동자가 되묻는다.
“나와도 편해졌다는 말로 이해해도 됩니까?”
“…….”
굳이 꼭 말로 해야 합니까. 이정도 말했으면 찰떡같이 알아들어야지. 다른 때는 거짓말을 해도 제 속마음을 귀신같이 알아차리던 인간이 꼭 이럴 때만 눈치 없는 척이다. 그렇다고 순순히 인정할 설형도 아니다.
“그런데 시간 아직 안됐습니까?”
슬그머니 설형이 말을 돌렸다. 하루 종일 경비직원 노릇하느라 잊고 있었는데. 맨 처음 여기 왔을 때 도강우가 시간을 확인했던 걸 떠올렸다. 도강우도 그제야 생각났는지 소매를 걷어 시계를 확인했다.
“음, 빠듯하긴 해도 얼추 시간 맞출 수 있겠군요.”
다행히 늦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한 건 맞는지 더 이상의 말장난은 없이 걸음을 내딛는다. 시선이 물러가자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느새 새파랗던 하늘은 어둠이 내려앉아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간까지 있었어야 하는 거면 대체 왜 그렇게 일찍 나오라고 한 거지? 뒤늦게 의문이 들었지만 이미 벌써 저만치 멀어진 도강우에 설형도 황급히 걸음을 내딛을 수밖에 없었다.
“저기.”
그렇게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회전관람차 앞.
“설마 이거 타시려구요?”
하지만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고 묻는 설형에게 오히려 도강우가 되묻는다.
“네. 뭐 문제 있습니까?”
“아뇨. 문제는 없죠.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설형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좀 들어가겠습니까?”
“아, 네.”
버티고 선 설형을 어느새 뒤에 와 있던 연인으로 보이는 한 커플이 노려보고 있었다. 시선을 알아차린 설형이 황급히 걸음을 옮겼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두 사람은 관람차에 올라 있었다.
“그럼 좋은 시간 되십시오.”
단순한 매뉴얼에 있는 인사겠지만 듣는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민망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밖에서 다 보이는 통이긴 해도 어쨌든 밀폐된 공간에 이렇게 단둘이 앉아 있으려니 묘하게 긴장이 되었다.
“아, 풍경 좋네요.”
괜스레 시선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아무 소리나 해 놓고 아차 싶었다. 관람차는 아직 밑에서 얼마 올라가지도 않았고 보이는 것은 삭막한 바닥 풍경이었던 것. 비웃는 소리는 나지 않지만 분명 비웃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 이건 대체 왜 이렇게 느리게 움직이는 거야?
애초에 관람차라는 것 자체가 그렇게 빠른 놀이기구는 아니고, 사실 출발한 지 몇 분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괜스레 설형은 관람차 탓을 하고 있었다. 체감상 억겁의 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 이제는 침을 삼키는 것도 숨을 내쉬는 것도 어색할 지경이었다.
“대체 정보원은 언제 만나기로 하셨습니까?”
결국 참지 못한 설형이 대화라도 해야겠다 싶어 물었다. 하지만 설형과 달리 아주 태평하게 있던 상대는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네?”
답답하다는 듯 설형이 얼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여기서 정보원 만나기로 하신 거 아닙니까?”
하지만 곧 되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아닌데요?”
“아니라구요?”
“네. 무슨 정보원이요?”
“무슨 정보원이긴요. 도 검사님 정보원이죠.”
“제 정보원을 왜 여기서 만납니까?”
별 희한한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오히려 설형을 이상한 사람 보듯 하는 눈빛에 설형은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럼 대체 여기 왜 온 겁니까? 아니, 분명 좀 전에 검사님께서 얼추 시간 맞출 수 있을 것 같다고―.”
더듬더듬 되묻는 설형에게 도강우가 그제야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거요.”
네, 그거요. 그거 말입니다. 설형이 따지듯 고개를 끄덕이자 도강우가 한 번 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킨다. 설형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어느새 관람차는 위쪽으로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그 관람차 밖으로 보이는 새까만 어둠 속에서 조그맣게 선을 그리며 위로 올라가는 불빛.
펑.
그리고 단숨에 터진 불꽃이 새까만 밤하늘을 확 밝혔다. 반짝이는 불꽃이 밤하늘에 수를 놓듯, 마치 별가루처럼 쏟아져 내렸다.
“여기서 보면 이쁘다고 해서요.”
어깨를 으쓱이는 도강우에, 설형은 생각했다.
이거 좀 돌아이 아니야?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고작, 이거 보자고, 여기까지 불러들인 거란 말입니까?”
“네.”
“……저 두 달 만에 얻은 휴일이었거든요?”
“그건 나도 마찬가집니다만. 일부러 휴일 맞추려고 계속 못 써먹고 있었거든요.”
“대체 왜요?!”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뭉크의 절규와도 같은 표정으로 되묻는 설형과 달리 도강우는 태연했다.
“그렇지 않으면 같이 이런 곳에 올 수 없지 않습니까.”
“아니, 그러니까 왜 굳이 같이 이런 곳에 와야 하냐구요!”
“보고 싶으니까.”
“네?”
“같이 보고 싶었습니다. 둘이 관람차에서 불꽃놀이 보는 것만큼 로맨틱한 일이 없다길래.”
“…….”
관람차 안에 무거운 침묵이 일었다. 그 와중에도 밖에서는 펑펑, 불꽃놀이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로맨틱, 이요?”
겨우 입을 연 설형이 물은 것은 고작 이것.
“네.”
자신이 뭐 잘못들은 건가 싶었던 것이 와장창 무너졌다.
“대체, 우리가, 로맨틱, 해져서 뭘 하겠다고.”
“뭘 하겠습니까?”
“…….”
오히려 그걸 몰라서 묻냐는 눈빛에 순간 발끈할 뻔했지만 설형은 꾹꾹 눌러 참았다.
“관람차가 가장 높은 위치로 올라갔을 때가 키스 타임이라고 하더군요.”
“키스, 타임이요.”
그러고 보니 내리막으로 내려가는 이전 관람차에 연인이 떡하니 입술을 붙이고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 그리고 하필 타이밍도 좋게 두 사람이 탄 관람차는 가장 높은 위치로 옮겨 가고 있었다.
“그냥 담부터는 그냥 키스 하고 싶다고 하실래요? 원래 하시던 대로?”
“키스만 할 거 아닌데요.”
“그러니까! 뭐든 그냥 말로 하시라구요.”
힉. 이렇게 남부끄러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주제에, 무슨 로맨틱인가. 로맨틱이. 기가 막혔다.
“말로 하면 들어줍니까?”
“언제는 물어보고 했습니까?”
“아. 그렇군요.”
하. 기가 막혀서 웃음을 짓던 설형이 이내 몸을 뒤로 붙였다. 도강우가 맞은편 자리에서 일어나 바싹 다가오고 있었다.
“왜, 왜 일어나십니까?”
“키스하려구요.”
“미쳤습니까?”
“왜요. 물어볼 필요 없다고 했잖습니까.”
“그런 소리 한 적 없거든요?!”
“그 말이 그 말이잖습니까.”
설형이 다급하게 손으로 버텼지만 도강우의 얼굴은 어느새 바로 앞에 바싹 다가와 있었다. 달큰한 숨결이 느껴졌다.
“여기 다 뚫려 있거든요?! 저기 바로 앞에서 마약 거래 하는 것도 다 보일 정도로?!”
두 사람의 체중이 실려 한쪽으로 기울어진 탓에 관람차까지 불안하게 흔들렸다. 덜컥 겁이 난 설형이 마구 소리쳤다. 그러다 둘 다 동시에 굳었다.
설형이 곧바로 비상벨을 눌렀다. 도강우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덜컹, 소리를 내며 관람차가 멈췄다.
“이래도 체질이 아니라고 할 겁니까?”
빈정거리는 소리에도 설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백 형사님!”
반가운 얼굴로 달려오는 이는 한재민 순경이었다.
“대체 어떻게 정보를 얻으신 거예요?”
“어? 어, 뭐 그렇지.”
당연히 두 사람이 정보를 듣고 온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 어차피 우연히 놀러 왔다가 마약 거래를 발견했다고 할 수는 없으니. 설형은 대충 얼버무렸다.
“제가 얻었습니다. 확실하지 않아서 백 형사만 데려온 거구요.”
“아, 그러셨구나.”
곤란해하는 설형을 대신해 도강우가 변명을 해 주었다. 그제야 재민도 비번인 설형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납득한 모양이었다.
“일단 서로 연행해서 조서 꾸밀게요. 같이 가실래요?”
“아니, 난 비번이니까, 부탁 좀 할게. 한 형사.”
“넵. 알겠습니다. 걱정 말고 이제 가서 좀 쉬세요.”
일중독인 설형이 웬일인가 싶었지만 재민도 더는 거기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았다.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경찰차가 출발하고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도강우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어쩐 일입니까. 직접 범인 조사하겠다고 따라갈 줄 알았는데.”
“비번이니까요.”
설형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도강우가 피식, 하고 웃었다.
“하루 종일 범인 잡느라 바빴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이제라도 쉬어야죠.”
집에 가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도강우가 어깨를 으쓱이며 한발 뒤로 물러섰다. 둘 다 차를 가져왔으니 태워다 줄 수도 없고, 오늘은 글렀다 싶었던 것. 하지만 그런 도강우의 예상과 달리 이번엔 설형이 먼저 제안했다.
“그럼 어디 가서 저녁이나 먹죠. 이번엔 양식 말고 맵고 짠 한식으로. 이건 제가 살게요.”
“…….”
“왜요. 한식 싫으세요?”
“아니. 안 싫습니다.”
싫을 리가 없잖은가. 도강우가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못한 키스는 밥 먹고 하든지요. 단, 밖에서는 안 됩니다.”
순간 귀를 의심할 만한 말을 내뱉은 설형이 휙, 하고 몸을 돌려 가 버린다. 멍하게 서 있던 도강우가 뒤늦게 입꼬리를 씨익, 밀어 올렸다. 타닥타닥, 속도를 높혀 거리를 단숨에 좁혔다.
“뭡니까. 지금 유혹하는 겁니까?”
“아닌데요.”
“그럼 뭡니까.”
“또 괜히 이렇게 사람 진 빼는 짓 하실까 봐 그런 건데요.”
하루 종일 기가 막히긴 했지만, 어쨌든 데이트라잖는가. 그 말 하나에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해지는 것이 스스로도 기가 막혔지만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그게 유혹입니다만.”
“마음대로 생각하시든가요.”
이쯤 되니 될 대로 돼라, 싶은 것이 솔직한 심경. 어깨를 으쓱인 설형이 걸음을 내딛었다. 피식, 하고 웃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느긋한 걸음이 뒤따른다.
이제는 포근한 밤바람이 살랑살랑 설형과 도강우의 머리칼을 흩트리고 지나갔다.
봄이었다.
[기형도 외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