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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 연쇄 살인 사건의 기자회견을 마치겠습니다. 질문은 받지 않습니다.”
브리핑을 끝낸 강우가 막 단상을 내려가려고 할 때였다. 질문을 받지 않는다고 말했음에도 기자 중 하나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분명! 얼마 전까지 공범에 대한 의혹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백설형 형사가 바로 그 공범일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원래라면 무시하고 내려갔을 강우지만 이번엔 그러지 못했다. 질문 안에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이름이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도로 방향을 틀어 정면을 보는 강우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살짝 가늘게 뜬 시선 끝에 질문을 던진 기자가 있다는 것은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앞서 발표한 바와 같이 백설형 형사는 범인 강봉수에게 5년 동안 스토킹을 당했던 피해자입니다. 그로 인해 피해자들과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이유로 범인으로 몰려 누명을 뒤집어쓰기까지 했구요. 이 부분에 있어서 수사 책임자로서의 책임을 통감하고, 백설형 형사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표합니다.”
“…….”
회견장이 쥐죽은 듯 조용했다.
“백설형 형사는 뛰어난 실력을 가진 대한민국 경찰로서 공무를 수행하던 중에 범죄자에게 노출되었고 그로 인해 스토킹당하고 오랫동안 고통받아 왔습니다. 어떤 피해자가 자신을 괴롭히는 범죄자의 공범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검경 합동 수사팀은 이미 공범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범인 강봉수의 휴대전화 및 개인 물품들을 모두 조사하였으나 강봉수가 특정한 사람과 정기적으로 연락한 어떤 기록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하여 공범은 없는 것으로 잠정 결론 내린 상태이구요.”
“…….”
“공범에 대한 어떤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단순히 그럴 수도 있지 않냐, 라는 의심은 오랫동안 고통받았던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부분에 대한 추측성 기사는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답변을 드렸음에도 이후 게재되는 추측성 기사에 대해서는 검경 모두 절대 좌시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경고해 드립니다.”
말투는 굉장히 예의발랐지만 결국 쓸데없는 소리 나불대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 검찰과 경찰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으면 입 닥치고 있어라, 라는 의미였다. 그 말을 하는 내내 강우의 날카로운 시선은 질문을 했던 기자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어쩐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기분. 기자는 목을 쑥 집어넣고 사람들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승리했지만 짖는 개 한 마리를 쫓아낸 승리가 기쁠 리 없었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살풋 주름이 잡혔다. 탁탁. 단상에 올려져 있던 자료를 챙겨 돌아서던 강우가 일순 멈칫, 했다. 회견장 입구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찌푸린 얼굴에서 찌푸림이 날아가고, 입꼬리가 삐죽, 위로 향했다.
“나 마중 나온 겁니까?”
단상에서 단숨에 내려온 강우가 설형의 앞에 섰다.
‘도 검사님께도 꼭 고맙다는 인사, 잊지 마시구요.’
재민의 당부가 머릿속을 스쳤다.
‘도 검사님이 이번에 백 형사님 누명 벗겨내는 데 가장 애 많이 쓰셨어요. 호텔 CCTV도 CCTV지만, 뭣보다 영장 절대 안 나오는 상황에서 모든 책임은 본인이 질 테니까 방해하지 말라고, 상명하복에 항명하시면서까지 나서 주셨거든요. 때마침 확실한 증거가 나와서 그냥 넘어가니 했지만 아마 그 일로 선배들한테 단단히 찍히셨을 거예요. 검찰 조직이 어떤지, 백 형사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아무리 도강우라도 위에 찍히면 좋을 게 없을 것은 분명했다. 오히려 도강우처럼 고속 승진의 길을 밟고 있는 경우엔 한 번의 실수가 잘못하면 승진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었다.
물론 강우의 배경에 대해서 아직도 뭘 잘 모르고 하는 생각이지만 어쨌든 설형은 죄책감마저 들었다.
“기자들이 하는 말은 신경쓸 것 없습니다. 어차피 자극적인 제목으로 기사를 뽑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인종들이니까.”
“…….”
아마도 대답도 없이 빤히 보고 있는 설형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설형이 변명하려고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고맙다, 하다못해 신세졌다, 정도의 간단한 한마디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달싹이던 입술은 그 간단한 말을 내뱉지 못하고 몇 번 달싹이다 그대로 한일자로 다물어졌다.
제가 생각해도 참, 귀엽지 않은 성격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붙잡힌 팔이 휙, 하고 당겨졌다.
“도 검사님, 저기 한 말씀만 더―.”
막 뒷문을 열고 튀어나온 사회부 기자가 강우를 향해 다급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곧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어라? 분명 목소리를 들었는데…….”
물론 그런다고 텅 빈 복도에 이미 사라진 강우의 모습이 다시 나타날 리는 없었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
는 말처럼 지금 기자가 찾고 있는 강우는 아니, 정확히는 강우와 설형은 기자가 서 있는 문에서 몇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바로 맞은편, 취조실 안에 있었다.
“대체 뭐하는―.”
“쉿.”
나름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곧바로 강우에게 조용히 하라는 주의를 받았다. 얼굴을 찌푸리긴 했지만 설형이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럼 이 자세라도, 좀.
조금 전 경험을 되살려 이번엔 손가락으로 뒤로 물러서 달라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강우는 전혀 미동도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설형은 뒤로는 단단한 철문이, 앞으로는 강우의 몸에 가로막혀 말 그대로 오도 가도 못하고 끼인 신세였다.
―!
밖의 동태를 살피느라 제가 보낸 신호를 못 본 건 줄 알았던 설형은 제가 알아서 빠져나가기 위해 무릎을 굽혀 철문을 딛고 있는 강우의 팔 아래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어느 정도 공간을 마련해 주고 있던 강우가 팔을 구부리고 몸을 바싹 붙여 오지 않았다면.
그제야 설형은 깨달았다. 강우가 몰라서 뒤로 물러서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를 엿 먹이려고 일부러 이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는 걸.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강우가 솜씨 좋게 설형의 무릎과 무릎 사이에 자신의 다리를 끼워 넣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 무릎이 그대로 어디를 눌러 버릴지는 굳이 확인해 볼 필요도 없었다.
입술과 입술이 거의 닿을 만큼 가까웠다. 설형은 숨도 크게 쉴 수 없었고 몸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었지만 강우는 아주 태연했다. 오히려 지금의 상황이 재밌다는 듯 강우의 매력적인 입술이 위를 향해 있었다.
“그만하시죠.”
입술이 닿지 않도록 최대한 머리를 딱딱한 문에 바싹 붙이며 설형이 말했다. 이번에는 조용히 하라는 주의는 없었다. 다행히도 밖은 더 이상 이곳에서 나는 소리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을 만큼 충분히 소란스러웠기 때문이다.
“뭘 말입니까?”
시치미를 떼고 태연히 되묻는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었지만 설형은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해 조용히 항의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뭐든 말입니다.”
“…….”
이건 예상치 못했는지, 잠시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미세한 변화를 감지할 만큼 두 사람은 가까웠다.
피식. 바람소리가 일었다. 하지만 곧바로 강우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미소는 단숨에 사라졌다. 다른 사람들처럼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며 화를 내지 않아도, 단순히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는 것만으로도 강우는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설형은 점점 숨이 차는 것을 느꼈다. 강우는 아슬아슬한 공간을 두고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가슴이 눌리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눈앞의 남자의 존재가 설형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긴장해서 숨을 쉬는 것조차 잊게 만들 만큼. 다리 사이에 들어와 있는 단단한 허벅지 근육이 생생했다. 왠지 엉덩이 안쪽이 묵직해지는 이 감각은 그냥 기분 탓만은 아닌 듯했다.
“그건 곤란한데요.”
전혀 곤란하지 않은 표정으로 강우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곤란한 쪽은 오히려 설형이었다.
곤란했다. 정말로.
“우리 아직 할 얘기들이 좀 많이 남았잖습니까.”
“…….”
“구체적으로 알려주면 무려 세 번의 먹튀라든가. 아니면 그래 놓고도 뻔뻔하게 그 안에 있는데 뭘 어쩔 거냐고 도발했던 일이나. 그때 분명히 난 경고했습니다.”
뒤늦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린 설형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뭐 어쩌시려구요. 전 이미 여기 이렇게 용의자로 잡혀 들어와 있는데요.’
‘그렇게 뭘 어떻게 하고 싶으시면, 절 빼내 주시든가요.’
그렇게 겁도 없이 도발해 댄 자신에게 강우는 뭐라고 했더라.
“나가서 봅시다, 라고.”
그래. 그렇게 말했었다. 지금처럼 이렇게 무시무시한 눈동자로.
괜히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는 게 아니라는 말이 생긴 게 아니었다. 언젠가 니놈이 그렇게 천둥벌거숭이처럼 굴다가 큰코다칠 줄 알았다고, 빈정거리는 홍 반장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여기가, 언제든 누구라도 이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는 경찰서라는 거, 설마 잊어버리신 건 아니시겠죠.”
“물론이죠.”
그나마 이성이 몽땅 날아가 버린 건 아닌 모양이라고 안심한 것도 잠시. 그렇게 말한 강우의 무릎이 설형의 사타구니를 꾹, 꾹, 눌러 왔다.
읏, 으. 읏.
항의를 하려고 벌어진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달뜬 신음이 고작이다. 제대로 된 말이 만들어질 리가 없었다. 새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최대한 목소리를 죽이고 있는 설형의 노력 따위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오히려 꾹꾹, 누르던 허벅지를 이번엔 아예 노골적으로 슥슥, 부볐다.
“으, 으.”
거친 문지름에 통증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쾌감이 이는 것을 설형은 부인할 수 없었다. 설형의 것이 분명 발기하고 있었다. 그것을 직접적으로 문지르고 있는 강우가 모를 리 없었다.
“섰네요.”
놀리는 말투가 아닌 사실을 나열하는 것뿐인 무심한 중얼거림이 훨씬 더 사람을 수치스럽게 한다는 걸 설형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벌을 주려고 일부러 아프게 한 건데, 이렇게 좋다고 자지를 세우면 어떻게 합니까.”
“제발!”
참지 못해 버럭, 소리친 설형이 이내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이성적으로 부탁했다.
“그 입 좀, 닥치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기 싫다면?”
얄미운 얼굴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되물었다. 얄밉게도 잘생긴 얼굴이.
“그럼 뭐 입이라도 틀어막을 겁니까?”
어느새 설형의 두 손은 강우에게 붙잡힌 채였고, 중심을 잡힌 두 다리는 제 힘으로 버티고 서 있기도 힘이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할 거냐, 그런 눈빛이 설형을 향해 묻고 있었다.
사실 강우가 그렇게 묻기 전까지는 설형도 무슨 방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묻는 강우의 물음에 설형은 강우의 입을 틀어막을 유일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네.”
짧고 간결하게 대답한 설형이 강우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게 그리 바람직한 생각이 아니라는 건 설형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잠깐이라도 이 입을 막을 수 있다면, 그래서 전혀 도강우가 예상치도 못한 방법으로 엿을 먹일 수만 있다면 상관없을 것 같았다.
물론 그 결정을 후회하는 데는 몇 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지만.
추읍, 츱, 츠읍.
젖은 살이 마찰하는 소리가 조용한 취조실 안을 가득 채웠다. 혀가 들어왔다가 나가고, 다시 들어와 목구멍 깊숙한 곳을 찔렀다. 뜨거운 살덩이로 입안이 가득 찼다.
숨이 찼다.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거칠게 밀어붙이는 강우에 설형이 도망치듯 머리를 뒤로 물렸지만 강우가 한발 더 빨랐다. 머리칼을 콱 움켜쥐어 머리를 고정시킨 강우가 각도를 달리해 다시 입술을 겹쳤다. 늘 여유롭던 강우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몇 번이고 입술을 겹치고 또 겹쳤다. 강우가 설형의 혀를 쪽쪽 빨았다. 입안에 고이는 침까지도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빨아 댔다. 마치 내장을 빨리는 것 같았다. 아니, 제 몸을 통째로 삼켜 버릴 것만 같았다. 말 그대로 한입에 꿀꺽 삼켜져 버릴 것 같은 키스. 키스라는 단어로 표현하면 안 될 것 같았지만 그 말 말고는 표현할 단어가 없으니 그렇게 부르는 수밖에 없었다.
흣, 읏. 으. 읏.
설형이 목울음을 울었다. 혀가 들어올 때마다 단단한 허벅지가 앞섶을 꾹꾹, 눌러 댔기 때문이다.
미쳤구나. 설형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꽉, 눌러올 때는 통증으로 몸을 굳히면서도 무릎이 살짝 물러서면 또 아쉬운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성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분명 엉덩이를 들썩이며 재촉했을 것이다.
정말 여자라도 된 건가. 문질러지는 것은 앞섶인데 엉덩이 안쪽이 묵직했다. 박히길 바라는 것처럼 구멍이 근질근질했다.
“씨발.”
강우가 낮게 욕설을 내뱉기 전까지는 입술이 떨어진 것도 몰랐다. 아니, 제가 내뱉은 말인 줄 알았다. 하마터면 이대로 박아 달라고, 박고 거칠게 문질러 달라고 애원할 뻔했다. 심지어 이성을 놓기 전에 강우가 물러선 것이 아쉬워 미칠 것 같았다.
진짜 씨발이었다.
“기집애한테 홀려서, 돈이며, 명품이며, 다 갖다 바치는 새끼들 보면서 오죽 못났으면 구멍에 값을 치르는 호구 짓을 하냐고 혀를 찼었는데.”
“…….”
“내가 그 호구 짓을 하게 될 줄이야.”
“…….”
기가 막힌다는 듯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는 강우의 얼굴 표정이 너무나 험악해서 설형은 여자 취급하지 말라고 따져 묻지도 못했다. 물론 부족한 숨을 들이쉬느라 그런 험악한 분위기가 아니더라도 제대로 된 말은 하지 못했겠지만.
강우가 설형의 부드러운 볼을 손등으로 쓸어내리며 중얼거린다.
“게다가 단 한 번도 개인적인 일에 공과 사 구분 못하고 검사 배지를 써먹은 적은 없었는데 말이지.”
“…….”
물론 그건 설형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음담패설을 태연히 내뱉고, 사람 속을 뒤집는 아주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지만, 검사 도강우는 전혀 빈틈이라고는 없는 남자였다. 저에 대한 공개 수배가 곧바로 내려진 것이라거나, 제가 찾아간 그날 숨겨 주겠다는 제안을 하기는 했지만 결국 그것도 개인적인 능력으로 도망치게 해 주겠다는 것이지 검사로서 제 편에 서서 돕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런데, 네가 나를 자꾸 그런 미친놈으로 만들어.”
“…….”
그쪽은 원래부터 미친놈이었습니다만? 억울했다. 하지만 진짜 미친놈에게 그런 항의를 할 만큼 멍청하지도 않았다.
눈으로 사람을 잡아먹을 수 있는 괴물이 있다면 아마 이런 눈이겠지, 싶을 정도로 새파랗게 일렁이는 눈동자가 설형을 찬찬히 응시했다. 설형은 가만히 그 눈을 마주했다.
피하거나, 도망치면 죽는다.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괜히 육식동물을 도발하지 않기 위해 설형은 숨마저 죽였다. 천천히 턱을 지나 목덜미로 내려온 손이 설형의 목을 감싸쥐었다. 긴장으로 온몸의 솜털이 바짝 섰다. 하지만 그대로 콱, 힘을 주어 목을 부러트려 버릴 것 같던 예상과는 달리 목을 감싸쥔 강우의 손은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마치 소중한 것이라도 다루듯.
설형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자꾸만 간질거렸던 것. 차라리 조금 전 강우가 목을 부러트릴까 봐 겁에 질렸을 때가 더 나았다.
어떻게 지금의 곤란한 상황을 벗어날 것인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Trrrrrrrrrrr. Trrrrrrrrrrrrr.
마치 설형의 구조 신호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설형의 전화가 울렸다. 두 사람 다 그대로 일시 정지. 숨죽이며 눈앞의 맹수와 눈을 마주하고 있던 설형이 최대한 그를 도발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가만히 입을 열었다.
“전화 좀, 받아도 될까요.”
설형에게 개인적으로 전화가 올 일은 없었다. 고로 이 전화는 급한 전화일 가능성이 아주, 아주, 높다는 것을 눈빛으로 호소하자, 강우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뒤로 물렸다. 설형이 마치 범인과 대치한 형사처럼 고개는 정면에 둔 채 오른손만 상의 주머니 안에 넣었다가 뺐다. 엄지와 검지로만 집은 핸드폰은 다행히 끊기지 않고 여전히 울리고 있었다.
“여보세요.”
휴대폰을 받으며 설형이 강우의 품에서 벗어났다. 예상치 못한 것인지 그냥 놔주기로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별 무리 없이 샌드위치 신세를 면했다.
“어, 어?”
하지만 막 강우의 뒤―이제는 강우가 문과 설형의 사이에 낀 형국이 되었다. 물론 조금 전 설형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지만―로 위치를 옮긴 설형이 멈칫했다. 그런 설형의 모습이 의아했던지 강우가 왜 그러냐는 듯 눈으로 묻는다. 설형이 그런 강우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곤 통화에 집중했다.
“어, 지금 잠깐, 나와 있는데. 왜?”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걸려온 전화가 거의 백만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바로 개인적인 전화였기 때문이다.
전화를 건 사람은 이석진이었다.
“아, 어. 걱정 마. 약속한 거 안 잊었으니까.”
안 잊었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미안하면 술 한 잔 사든지, 라는 말은 그냥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게 보통 아닌가.
하지만 어쨌든 그러기로 제 입으로 약속을 한 것이니 설형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어, 거기 알아.”
철컥.
한 손은 전화를 받으며 다른 한 손으로 설형이 문고리를 붙잡았다. 하지만 살짝 열렸던 문은 강우의 손에 의해 도로 닫혔다. 쿵, 하고 철문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손으로 밀어 문을 닫은 강우가 이번엔 아예 체중을 실어 철문에 몸을 기댔다. 학교 다닐 때 문 앞에 서서 지나가는 학우들 삥 좀 뜯어 본 일진 포스였다.
쳇. 자연스럽게 나갈 수 있었는데. 물론 속으로 혀를 찬 설형이 태연히 휴대폰 너머에 있는 상대에게 마지막 대답을 되돌렸다.
“그래. 알았어. 거기서 봐.”
그 대답을 끝으로 휴대폰을 끊은 설형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정중하게 요청했다.
“들으셨으면, 문에서 좀 비켜 주시죠. 나가 봐야 합니다.”
강우가 티꺼운 얼굴로 물었다.
“누굽니까?”
“석진이요.”
설형은 반항 없이 순순히 대답했다.
“이석진?”
“네.”
“그 사람이 왜 전화한 겁니까?”
“신세 갚을 게 있어서요.”
“…….”
의외로 무슨 신세를 갚을 일이 있냐는 물음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납득은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역력한 표정이다.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려니 강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문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했다.
“걱정 마시죠. 못 다한 이야기는 경찰서를 나.가.서. 밤새 해 드릴 테니까.”
“…….”
여전히 찌푸린 얼굴을 향해 설형이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물론 그 말을 들은 강우의 얼굴이 더 확 구겨졌지만, 설형은 재빨리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벌컥, 하고 문이 활짝 열리고 불도 켜지 않아 어두컴컴한 조사실 안으로 환한 빛이 확, 퍼져들었다. 순간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설형은 빠르게 걸음을 내딛었고, 그 뒤로 못마땅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강우도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그 뒤를 따라붙었다.
그러면서 막, 밖으로 나오던 강우가 잠시 잊고 있었다는 듯, 문득 생각났다는 듯 가벼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대체, 누가 수갑 풀어 줬습니까. 분명 내가 풀어 줄 거라고 건드리지 말랬는데.”
“…….”
아마도 재민은 강우의 말을 농담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건 100프로 진심이었다는 데 설형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걸 수 있었다.
“여기!”
막 문을 열고 들어서는 설형을 향해 석진이 손을 번쩍 들었다. 순간 멈칫했던 설형이 이내 석진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초저녁부터 너무 과한 거 아니야?”
테이블에 세팅된 스카치 위스키 발렌타인―그것도 이미 반쯤 비워져 있었다―을 보고 자리에 앉던 설형이 한마디 했다.
“얻어먹는 건데, 평소에 못 먹는 걸로 먹어야지.”
“누가 들으면 네 월급이 박봉 형사 월급보다 훨씬 작은 줄 알겠다?”
“왜. 아깝냐?”
피식. 토라진 듯 입술을 삐죽이는 석진에게 설형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럼 한 병에 몇십 만 원인데 안 아깝냐?”
그러면서도 설형이 병을 기울여 제 잔을 채운다.
“박봉인 거 고려해서 30년산 시키려다 17년산으로 낮춘 거야.”
“생각해 줘서 고맙네, 아주.”
사실 돈이 아까워서라기보다는 가볍게 맥주나 한 잔 하고 헤어질 거라고 생각하고 왔던 터라 과하다고 했던 것이지만 또 그런 것을 구구절절 설명할 성격도 아니라 설형은 대충 석진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물론 순간적으로 잔뜩 험악해진 도강우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이건 저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냐고, 변명을 속으로 되뇌며 설형은 조용히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왜.”
술을 머금자마자 살풋 미간을 찌푸리는 설형에게 석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입맛에 안 맞아?”
“뭐…….”
애매하게 어깨를 으쓱이는 설형에 석진이 알만하다는 듯 핀잔했다.
“그러니까 사람이 이런 비싼 술도 좀 먹고 그래야―.”
“좀 싱겁네. 원래 이렇게 싱거운 거야?”
하지만 설형이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은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석진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럴 리가. 소주보다 도수가 얼마나 높은데.”
“도 검사가 먹던 술은 훨씬 독했는데. 맛은 있었지만.”
“……도 검사?”
잔에 든 투명한 갈색 액체를 들여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설형의 말을 듣고 있던 석진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름을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도 검사와 둘이 술을 마실 만큼 친해진 거야?”
“뭐, 어쩌다 보니.”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난감한 표정을 숨기기 위해 설형이 괜히 들고 있던 잔을 들이켰다.
“뭐야. 그렇게 아니라고 발뺌하더니 꽤나 잘 맞나 봐?”
“잘 맞기는. 말단 형사가 일방적으로 높으신 검사 양반 비위 맞추는 거지.”
“너 원래 비위 맞추고 그런 거 안 하잖아.”
“…….”
정곡을 찔렸다. 하지만 잠시 멈칫했던 설형이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대답했다.
“그래서 이번엔 좀 해 볼려고.”
“철들었네.”
다행히 석진도 납득한 모양이었다. 평소 싸가지 없다는 평가를 듣던 표정도 도움이 될 때가 있다.
“임마. 진작 좀 그러지. 그랬으면 지금쯤 팀장 배지 정도는 달고도 남았을 거 아니야.”
“…….”
홀짝, 홀짝. 석진의 핀잔에 설형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술잔만 홀짝인다.
“하긴. 내가 지금 누구 걱정을 해 주고 있어. 내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
술잔을 홀짝이던 설형이 순간 멈칫했다.
“안 그래도 들었는데,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징계위원회 소집될 거 같다면서.”
“일단 징계위원회 열릴 때까지 정직 처분. 그래서 난 내일부터 출근 안 하지롱.”
“…….”
“그렇게 죽상할 것 없어. 어차피 각오하고 한 건데 뭐.”
“…….”
“그렇게 미안하면 이거 한 병 더 사든지.”
손가락으로 앞에 놓인 병을 가리키는 석진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설형이 곧바로 선언했다.
“12년산.”
“에이, 12년산을 무슨 맛으로 먹어. 그건 이것보다 더 물 같아.”
“싫으면 관두―.”
“여기. 12년산 한 병 더.”
설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석진이 마침 옆을 지나가는 점원을 향해 주문을 완료했다. 잽싸긴. 속으로 투덜거리며 설형이 잔을 채웠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석진이 설형보다 한 발 빠르게 병을 낚아채지 않았으면.
“넌 그래서 안 되는 거야. 사람 앞에 두고 왜 혼자 자작을 하고 있어.”
“아.”
석진의 핀잔에 설형이 뒤늦게 멋쩍은 표정을 짓는다. 석진이 병을 기울이자 설형도 들고 있던 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혼자 마셔 버릇해서.”
쪼르륵. 잔을 채우던 석진이 피식, 하고 웃는다.
“고등학교 때도 그러더니.”
“내가, 그랬나?”
“그래. 그때도 넌 늘 혼자 있어 버릇했지.”
사실 설형은 자신의 학창 시절이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냥 조용하게 학교생활을 했던 것 같은데 석진이 자신을 기억하는 것이 신기했다. 그래서 그런가. 석진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면 꼭 남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런데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어. 하찮은 까마귀 무리 따위 전혀 안중에도 없는 고고한 백로처럼.”
“…….”
바로 지금처럼.
“강봉수 말야.”
민망해진 설형이 바로 화제를 바꿨다. 꿈꾸듯 아련한 기억을 더듬고 있던 석진의 표정이 단숨에 찬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차갑게 변했다.
“그 새끼 이름은 갑자기 왜 꺼내?”
하지만 설형은 석진의 날카로운 반응을 단순히 자신의 직위를 위태롭게 만든 대상에 대한 원망으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과연 정말로 자살한 게 맞나 싶어서 말이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술이 들어가서인지 석진의 반응이 조금 늦다.
“자신밖에 모르는 사이코패스가 자기 때문에 내가 감옥에 갈까 봐 자살을 택한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애초에 집착하는 대상을 두고 자살을 선택한다는 게, 뭔가 이상하잖아.”
“자살이 아니면?”
하지만 내용이 내용인지라 곧 정신이 번쩍 든 표정으로 물어온다.
“누군가 강봉수를 살해하고, 자살로 위장했을 가능성도 있지.”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한다는 건데.”
“강봉수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이번 사건의 전말을 모두 다 알고 있는 사람. 그리고 강봉수만 죽으면, 자신이 범죄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비밀에 붙일 수 있는 사람. 누구겠어.”
“그거 언론에서는 너라고 하던데.”
“…….”
강우의 협박으로 대놓고 설형의 이름이 나오는 기사는 쓰지 못했지만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을 한도 내에서 교묘하게 추측성 기사들을 잔뜩 내놓았다. 그리고 그 기사로만 보면 설형은 죽은 범인의 공범이라, 석진은 그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던 설형이 씨익, 하고 웃고 있는 석진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응시하자 석진이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무 복잡하게 꼬아서 생각하는 거 아니야? 실제 우리 사는 세상은 영화처럼 반전에 반전 따윈 없을 때가 더 많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네 가정에는 한 가지 중대한 오류가 있어.”
“뭔데.”
남은 갈색 액체를 입안으로 툭, 털어 넣기 전 설형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사체 검사가 완전히 엉터리였다는 건데. 분명 강봉수를 부검한 부검의는 강봉수가 타살인 증거는 전혀 없고 명백한 자살이라고 판단했거든.”
“…….”
“뭐, 나 때문에 국과수의 신뢰가 떨어진 건 이해하는데. 괜히 나 때문에 다른 선생님들까지 싸잡아서 도매급으로 넘기진 말아주라.”
“그런 말이 아니잖아.”
예상치 못한 전개에 미간을 찌푸린 설형이 변명했다. 그러자 석진이 다시 물었다.
“그럼, 무슨 말인데?”
“…….”
설형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제가 한 말은 그런 뜻의 무례한 말이었으니까.
“미안하다.”
설형이 순순히 사과했다. 그러자 석진이 의외라는 듯 눈을 조금 키웠다.
“천하의 백설형이 미안하다는 소리를 다 하고.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실수했을 때 곧바로 실수를 인정하는 게 좀 멋있어 보이더라고.”
설형의 잔을 채우던 석진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
“누가?”
“어?”
“누가 그렇게 멋있어 보였는데?”
“그냥, ……영화에서 보니까, 그렇더라고.”
대충 둘러댄 설형이 잔을 들이켰다. 가게 안이 어두컴컴해서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표정은 어떻게 숨길 수 있었을지 몰라도 벌게진 귀까지는 숨길 수 없었을 테니까.
“왜.”
묘한 눈으로 빤히 저를 응시하는 석진에게 설형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혹시 귀가 벌게진 걸 들킨 건가. 불안한 마음을 감추느라 절로 말투가 불퉁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런 설형을 비웃기라도 하듯 석진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은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네가 영화도 본다고?”
“…….”
설형의 얼굴이 확 찌푸려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석진. 정신차려 봐. 이석진.”
설형이 축 늘어진 석진의 몸을 흔들었지만 석진은 미동도 없었다. 난감한 표정으로 보고 있으려니 운전석에 앉은 택시 기사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일단 친구 분도 같이 타죠.”
“네? 아뇨. 전―.”
“저렇게 인사불성인 취객만 태우고는 못 갑니다. 출발해야 하니까 같이 내리든지 같이 타든지, 빨리 결정해요.”
고개를 내젓던 설형이 택시 기사의 단호한 태도에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뒤에서 들려오는 클랙슨 소리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석진을 좀 더 안으로 밀어넣고 뒷좌석에 올라탔다. 올라타기 무섭게 택시가 출발했다.
“기사님, 성북동이요.”
타이밍 좋게 사거리 신호등에 걸린 사이 석진의 지갑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 주소지를 확인한 설형이 동 이름을 댔다. 지갑을 꺼냈다가 다시 넣어 주는 동안에도 석진은 여전히 인사불성. 약간이나마 들썩이는 가슴께가 아니면 시체라고 해도 믿을 모양새였다.
술도 약한 놈이 양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지갑을 도로 안주머니에 넣어 주고 자세를 바로 했을 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자신의 안주머니에서였다. 무심코 휴대폰을 꺼낸 설형이 화면에 뜬 번호를 보고 멈칫했다. 그리고 그대로 일시 정지.
“전화 안 받습니까??”
계속 울리는 요란한 벨소리가 신경이 쓰였던지 운전하던 택시 기사가 흘끔 백미러로 뒤를 보며 물어 왔다. 말은 질문이었지만 결국 빨리 좀 받으라는 의미임을 아는 설형이 떠밀리듯 휴대폰을 받았다.
“여보―.”
―어딥니까.
여보세요, 라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말을 자르고 들어온 음산한 목소리.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한 도강우였다.
“……성북동이요.”
아직 도착하려면 멀었지만 결국 거기로 갈 테니까. 설형의 대답에 침묵이 이어졌다. 무거운 침묵을 견디지 못한 설형이 변명하듯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쩌다 보니, 일이 그렇게 됐어요.”
―무슨 일이 어떻게 되면, 서울 시내를 횡단해서 가 있게 됩니까?
“지금 얘기하긴 그렇고, 좀 있다가 전화, 아니, 최대한 빨리 호텔로 돌아갈 테니까.”
―…….
말을 하던 설형이 잠시 말을 멈췄다.
―돌아갈 테니까?
아닌 척 해도 설형의 말을 기다리고 있던 강우가 참지 못하고 뒷말을 재촉해 왔다. 머뭇거리던 설형이 툭, 하고 뒷말을 이었다.
“기다리시라구요.”
별말도 아닌 것을,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으려니 괜히 민망해져서 순간적으로 머뭇거렸던 것.
수화기 너머로 바람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빙글거리는 목소리로 물어온다.
―오긴 오는 겁니까?
순간 설형의 입꼬리도 살짝 올라갔지만 이번엔 설형이 태연을 가장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가지 말까요?”
―다시 말해 봐요.
뜬금없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했다.
“가지 말까요?”
―누가 그거 말입니까.
“그럼―.”
―기다리라는 말, 말입니다.
“…….”
―그 말 다시 한 번만 더 해 봐요. 그럼 시키는 대로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지만 그게 순전히 놀리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왠지 심장 한구석이 간질간질했다.
“끊습니다.”
그리고 그 기분을 견디지 못한 설형이 그대로 딱딱하게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은 뒤에도 얼굴로 열이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린 설형이 창문을 내렸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로 확, 끼얹어졌다.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한동안 설형은 창문을 닫지 못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택시가 멈춘 곳은 큰길에서 골목으로 한참을 들어오고, 다시 오르막길을 올라 그 오르막길의 맨 꼭대기에 위치한 이층 양옥집 앞이었다.
택시를 잡으려면 한참 걸리는 데다 택시를 부른다고 여기까지 쉽게 들어오려고 할 것 같지 않아 거스름돈은 됐다는 제스처와 함께 기다려 달라고 부탁하자 택시 기사도 빈차로 나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나오슈.”
고개를 끄덕인 설형이 석진을 부축해 대문 앞에 섰다. 유난히 담이 높은 이층 양옥집은 관리를 잘해 깔끔해 보여도 제법 세월의 흐름이 느껴졌다.
“이석진. 어이. 정신 좀 차려 봐. 너희 집 대문 비밀번호 뭐야?”
“으응. 응. 한 병, 더. 한 잔 더~.”
의식은 조금 든 듯하지만 여전히 석진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 이 술주정뱅이가. 눈살을 잔뜩 찌푸린 설형이 휙, 하고 석진을 바닥에 내던졌다. 물론 내던지던 몸을 도로 붙잡아 결국엔 툭, 하고 바닥에 앉힌 것이 되었지만. 그 앞에 쭈그리고 앉은 설형이 석진의 호주머니를 뒤졌다. 이내 설형의 얼굴에 화색이 번졌다. 핸드폰에 매달린 동그란 마그네틱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띠딕.
그것을 대문 옆 비밀번호 누르는 곳에 대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대문이 텅, 하는 묵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휴우.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물론 바닥에 대자로 누워 있는 석진을 보는 순간 설형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더 일그러져 버렸지만.
“한 잔만, 더, 하고, 가자. 응?”
낑낑대고 석진을 부축해 집안으로 들어오는데 성공한 설형이 주정뱅이를 향해 물었다.
“네 방, 어디야.”
“딱! 한 잔만 더―.”
“닥치고. 침실 어디냐고.”
정색을 하고 말하는 설형에게 석진이 꼬부라진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아, 씨발.”
제발 그것만 아니길 바랐건만 석진이 가리킨 곳은 이층과 이어진 계단이었다. 후우. 깊게 심호흡한 설형이 약간의 감정을 섞어 석진의 몸을 콱, 움켜쥐었다. 그래봐야 주정뱅이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지만.
“으응.”
침대 위에 내던져진 석진이 그대로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서 있던 설형이 할 수 없다는 듯 엎드려 있는 석진의 몸을 뒤집어 주었다.
푸우, 푸우, 거친 숨을 몰아쉬고는 있었지만 비교적 편안한 얼굴색을 확인한 설형이 한마디 했다.
“간다. 쉬어.”
물론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설형은 그대로 뒤돌아서서 밖으로 나왔다.
삐걱삐걱삐걱.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나무 계단이었다. 계단을 내려와 그대로 현관으로 향하던 설형의 걸음이 이내 멈칫했다. 더 꾸물거리면 밖에 택시가 그냥 가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설형은 결국 뒤돌아섰다.
설형이 향한 곳은 바로 현관 오른편에 위치한 주방이었다.
옛날 집 대부분이 그렇듯 오픈된 아치형의 패방문을 통과한 설형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남자 혼자 사는 집 냉장고가 늘 그렇듯 냉장고 안에는 생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설형이 찾으려던 것이 생수라 상관은 없었지만.
생수 한 통을 꺼낸 설형이 그것을 들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이층으로 다시 올라가려던 설형의 걸음이 첫 계단을 딛기 바로 직전 문득 멈췄다. 계단 오른쪽 작은 방문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집 방문은 왜 다 밖에서 잠그게 되어 있지?
그리고 그 순간 설형은 이 집에 들어온 이후 이상하게 거슬리던 묘한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보통 방문은 안에서 잠그게 되어 있는 것이 정상인데 조금 전 석진을 눕혀 놓았던 이층 방도 분명 밖에서 잠그도록 되어 있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문득 호기심이 인 설형이 첫 계단을 딛었던 발길을 돌려 작은 방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끼익.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시커먼 어둠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몇 십 년 묵은 먼지 냄새도. 아무래도 잡동사니들을 모아두는 창고로 쓰이는 방인 모양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도로 문을 닫으려던 그때. 설형은 분명 그 퀴퀴한 먼지 냄새 사이에 살짝 섞인 포르말린 냄새를 맡았다.
의사 면허를 가지고 있는 석진의 집에 포르말린 냄새가 나는 물건이 있는 게 이상할 건 없었으나 설형은 닫으려던 문을 도로 밀어 열었다.
딸칵. 딸칵.
왼쪽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켰다 껐다를 반복했지만 고장이 났는지 불은 켜지지 않았다. 휴대폰 화면을 켜 안을 비추자 방 크기에 맞춰 짠 선반들과 그 위에 놓인 물건들이 보였다. 대충 옷가지나 옛날 물건들이었다. 문 앞에 서서 살피던 설형이 좀 더 안으로 들어섰다. 앞쪽은 쾨쾨하고 묵은 냄새가 났지만 점점 걸음을 내딛을수록 병원 소독약 냄새가 짙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바깥쪽과 달리 안쪽 선반은 아주 정리 정돈이 잘돼 있었다. 수십 개의 유리병을 아주 질서정연하게 세워 놓았는데 간격이며 폭이 자로 잰 듯 모두 일정했다.
대체 뭘 넣어둔 거지?
휴대폰을 들어 비추었지만 유리병 안은 잘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유리병에 빛이 반사되어 푸르스름한 검은 안개가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설형이 손을 뻗어 유리병을 하나 집었다. 그리고 병을 가까이에 두고 핸드폰은 뒤쪽으로 비췄다.
―!
하마터면 유리병을 그대로 놓칠 뻔했다. 유리병 안에 든 것은 껍질이 모두 벗겨진 채 해부된 개구리의 사체였다. 물론 석진의 직업상 이런 기분 나쁜 것들이 있는 이유는 납득되지만 납득되는 것과 기분 나쁜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이라 생리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설형이 유리병이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놓았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바로 그 유리병 뒤에 놓인 다른 유리병을 보지 않았다면.
그것 역시 손에 든 유리병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은 모양의 밀폐된 유리병이었지만, 손에 들린 유리병과 달리 겉면에 먼지가 전혀 없었다. 먼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마치 새것처럼 겉면이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먼지가 자욱한 물건들 속에 끼어 있는 새 물건. 그 부분이 설형의 관심을 끌었다. 설형이 들고 있던 휴대폰을 앞으로 내밀었다. 확실히 주변의 유리병에 비해 세월의 흐름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깨끗한 유리병이었다. 설형이 휴대폰을 좀 더 가까이 가져갔다. 투명한 유리병 속에 길쭉한 형태의 뭔가가 보였다.
이게 뭐지?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얼굴을 좀 더 가까이 가져갔던 설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믿을 수 없게도 그 유리병 속에 담긴 길죽한 형태의 그것은 바로 남자의 성기였다.
“이게, 왜…….”
당황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설형의 머릿속을 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어떤 기억.
‘공범이 수사와 관련된 사람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군요.’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사람들은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그땐 당연히 수사와 관련된 사람이라면 수사팀이나 경찰 관계자라고만 생각했지, 그 관계자에 부검의나 검시관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잠시 간과했다. 어떻게 보면 형사보다도 더 사건에 대해서 잘 알고, 증거에 가까운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첫 번째 살인 사건은 당시 언론에서 시끄럽게 떠들어 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공범은 접근을 했을까요?’
재민의 의문에 도강우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기억을 더듬었다.
‘이런 경우에는 오히려 첫 번째 사건을 보고 다른 누군가가 접근했을 가능성이 더 높죠.’
강우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번 사건의 결정적인 증거였던 DNA 검사지를 누락시켰다가 다시 들고 나타난 사람은 분명 첫 번째 피해자의 부검의, 이석진이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산소가 부족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찼다. 하지만 설형은 뒤돌아나가지 않았다. 아직 확인할 것이 남아 있었다. 들고 있던 핸드폰을 들고 선반 위를 훑었다. 나란히 줄을 맞춰 세워둔 병 중에 겉면이 맨질맨질한 유리병은 총 4개.
그것을 확인한 설형이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핸드폰을 뒤집어 가장 최근 통화 목록에 있는 번호를 눌렀다. 핸드폰을 귀에 대고 뒤돌아서려다 자신의 오른손에 아직 개구리 사체가 든 유리병이 들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형이 손을 뻗어 유리병을 도로 돌려놓았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온 서늘한 목소리가 아니었으면.
“여기서 뭐해?”
등줄기가 서늘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인사불성이었던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멀쩡한 목소리였다.
대체 언제부터 제 뒤에 서 있었던 걸까. 전혀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아니 그 이전에 나무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전혀 나지 않았다는 것부터 이상했다.
“뭐하냐니까?”
재촉하듯 묻는 석진의 물음에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가며 어떻게 하면 석진을 자극하지 않고 지금의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던 그때였다. 하필 그 타이밍에 귀에 대고 있던 수화기에서 딸칵, 하고 통화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하지만 그 목소리가 들린 그 순간, 선득한 감각이 목덜미에서 느껴졌다. 주사구나. 곧바로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묘한 기운에 설형은 목덜미를 찌른 것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손과 발의 감각이 둔해졌다. 느낌만이 아니라는 듯 들고 있던 유리병이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반사적으로 손을 내뻗었지만 마치 물속에서 손을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팔은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자신의 몸인데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다리는 아예 움직일 수 없고, 몸은 물을 잔뜩 집어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유리병처럼 설형의 몸도 앞으로 고꾸라졌다.
파삭.
바닥으로 떨어진 유리병은 산산조각이 났지만 설형의 몸이 바닥을 나뒹구는 일은 없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뒤편에 서 있던 석진이 축 늘어지는 설형의 몸을 꽉 붙들었기 때문이다.
이번 약속까지 어기면 정말 뒷감당이 어려울 것 같은데.
흐릿해지는 정신에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그 걱정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곧바로 눈앞이 암전되었다.
“아, 깼어?”
정신을 놓고 있던 설형이 번쩍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바로 그린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석진이었다. 눈앞의 얼굴만 봐서는 조금 전 있었던 일은 마치 꿈인가 싶을 정도로 석진은 평소와 다름없는 말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론 제 몸이 의자에 묶인 것을 보기 전까지는.
“아, 아마 몸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을 거야. 알겠지만 숙시닐콜린이 그렇잖아.”
찡긋, 석진이 코끝에 주름을 만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마치 설형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이. 까딱. 까딱. 설형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눈치챈 거야? 나름 완벽하게 연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석진의 연기는 완벽했다. 답지 않게 괜한 오지랖을 부리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냥 그대로 나가 버렸다면 아마도 이런 상황은 되지 않았겠지. 아니, 애초에 술 취한 녀석을 데려다주겠다고 여기까지 온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이래서 사람이 평소 하지 않는 짓을 하면 안 되는 건데. 이게 다 도강우 때문이다.
“아, 입을 막아 놨지.”
석진이 잠시 잊고 있었다는 듯 손을 뻗어 설형의 입을 막아 놓은 테이프를 뗐다.
“미안.”
찍, 하고 입에 붙여 놓은 테이프를 떼다 입술이 찢어진 모양이다. 피가 배어나는 입술을 본 석진이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새끼는 의사가 아니라 연극배우를 했어야 했다. 그랬으면 못해도 국민배우가 됐을 텐데. 적성을 잘못 찾은 대표적인 예다 싶었다.
“처음부터, 네가, 범인이었던 거지. 그래 놓고, 강봉수한테, 뒤집어, 씌운, 거고.”
감각이 없는 입술과 혀를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그래도 발음이 뭉개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럴 리가.”
석진이 펄쩍 뛰었다.
“사람을 뭘로 보고 그런 모함을 하는 거야.”
뻔뻔한 상대를 사납게 노려보고 싶었지만 사실 눈을 제대로 뜨고 있는 것도 힘이 들었다.
“첫 번째 살인현장에 갔을 때 내가 뭘 발견했는 줄 알아?”
“알 게, 뭐야.”
“정말? 들으면 깜짝 놀랄 텐데.”
“…….”
고집스럽게 입을 다무는 설형에게 석진이 못 말린다는 듯 피식, 하고 웃었다. 설형의 고집을 아는 터라 그냥 할 말을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는지 서랍에서 뭔가를 꺼냈다.
“바로 이거.”
―!
석진의 손에 들린 것을 본 설형의 눈이 순간 휘둥그레졌다. 믿을 수 없게도 석진의 손에 들린 그것은 바로 자신의 오래된 손목 시계였던 것.
이게, 어떻게. 머릿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 설형에게 석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네 손목시계. 네가 고등학교 때부터 하고 다니던 거잖아. 그땐 네 얇은 손목에 좀 크다 싶었는데.”
“…….”
사실 자신의 손목시계는 특별할 것도 없는 그저 평범한 시계였다. 그 흔한 브랜드 제품도, 금이나 보석이 박힌 귀금속도 아니었다. 딱 봐도 싸구려에 가죽 줄도 다 낡아서 아무데나 벗어 두어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을 그런 시계였다.
그런데 그런 시계를 보고 어떻게 자신의 것인 줄 알았나 했더니. 그때부터 차고 다니던 걸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등줄기에 소름이 쭉― 끼쳤다.
“현장 테이블에서 이거 봤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
“사실 난 네가 범인인 줄 알았거든. 첫 번째 피해자 사체에서 나온 손톱도 그래서 숨겼던 거고.”
“…….”
역시 실수로 누락된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자신이 범인이라고 하더라도, 심지어 그걸 제가 부탁했다 하더라도 검시관으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해 놓고 석진은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칭찬이라도 받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이거 진짜 미친 새끼 아냐. 기가 막혔다. 기가 막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으려니 이번엔 아예 대놓고 본인이 어필해 온다.
“모르겠어? 난 널 구해 주려고 그런 거야.”
“……지랄, 마.”
기가 막혔다. 마음껏 욕설을 해 주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그딴, 거 부탁, 한 적―.”
“맞아. 우리 고고한 백 형사님은 그딴 거 부탁 안 하지. 그렇지만 난 알고 있었거든. 언젠가 너도 참지 못하고 폭발할 거라는 걸.”
“…….”
“하지만 괜찮아. 그건 우리 잘못이 아니니까. 그냥 우리 핏속에 섞여 있는 업보, 아니 운명 같은 거야.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평범하게 생활하다가도 문득문득 치밀어 오르는 그 시커먼 감정의 덩어리 같은 거. 그걸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을 걸?”
“…….”
어째선지 이 개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거의 희미해진 기억 속에서 고등학교 때 자신을 찾아온 어떤 녀석이 이 비슷한 얘기를 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때는 같은 종족 어쩌고 기분 더러운 소리를 지껄였던 것 같은데 이제는 운명으로 진화된 모양이었다.
“이, 얘기…….”
얼굴을 찌푸린 설형이 중얼거렸다. 다소 의미를 바로 파악하기 힘든 단어만 중얼거린 것이었는데도 석진은 단번에 설형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아, 기억났어?”
“…….”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도 석진은 반색을 한 채 혼자 대화를 이어갔다.
“그래. 그때 그 녀석이 나야. 내가 얼마나 서운했는 줄 알아? 난 늘 널 생각하면서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는데. 넌 어떻게 날 기억 못 할 수가 있어?”
“…….”
“물론, 내 외모가 그때와는 좀 바뀌긴 했지.”
……조금?
사실 설형은 그때 그 녀석의 얼굴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앞머리로 눈을 다 가려서 아예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던 것과 그래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음침하고 기분 나쁘게 생긴 녀석이라는 인상을 받았던 것은 기억이 났다. 지금의 이런 화사한 모습의 남자와는 절대 매치할 수 없는 외형이었다.
“내가 너랑 같은 반이 되었을 때 얼마나 기뻤다고. 드디어 너와 친해질 수 있겠다고, 우리만 아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뭐, 그때는 아직 네가 자각을 다 못한 상태긴 했지만.”
“…….”
“하지만 다시 만났을 때 알았지. 너도 이제 자각했다는 걸.”
“자각이니, 뭐지,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그래서 너도 형사가 된 거잖아. 가장 범죄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려고. 이건 어쩔 수 없는 운명의 끌림 같은 거라니까.”
“이 미친, 새끼…….”
설형의 욕설에도 내내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던 석진이 히죽, 하고 웃었다. 하지만 이내 다음 말을 할 때는 단숨에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차라리 그냥 살인을 저지르지 그랬어. 더럽게 사내새끼들이랑 붙어먹지 말고.”
“…….”
흰자위를 점점 잡아먹으며 크기를 키우는 새까만 동공. 음영이 없이 검은 돌을 박아놓은 듯한 검은자위가 마치 인형의 눈을 보는 것처럼 이질적이었다.
“그랬으면 그 새끼들은 살아 있었을 거 아니야. 너 하나 때문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
말도 안 되는 논리에 설형은 더 이상 반박할 의욕을 잃었다. 욕도 나오지 않았다.
“강봉수도, 네가, 죽였지?”
내내 가면을 쓴 것처럼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던 석진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이게 석진의 진짜 얼굴이라는 걸 설형은 알 수 있었다.
“멍청한 새끼. 내가 그렇게 아마추어처럼 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도와준 보람도 없이. 역시 머리 나쁜 새끼는 어쩔 수 없더라고.”
역시, 공범이 있을 거라던 강우의 추리는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첫 살인 이후에 합류했을 거라던, 그래서 사건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경찰 쪽 사람일 거라는 아주 디테일한 부분까지도.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
이번엔 설형도 개소리하지 말라고 바로 받아치지 못했다. 어느 정도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는 걸 설형도 통감했기 때문이다.
“네가 그딴 표정으로 사진이나 찍히고 그러니까, 스토커 새끼가 이성을 잃고 달려들어서 일이 이렇게 꼬인 거 아니야.”
물론 이 개소리에 동감한 것은 아니고.
분명 단서들은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는데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기회들을 모두 그냥 날려 버린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한 설형의 머릿속에 계속 집중하지 못하게 자신의 주의를 흩트려 놓은 누군가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결국 이번에도 널 구한 건 나였는데. 넌 그 새끼한테만 고마워했지.”
“…….”
타이밍 한번 기가 막혔다.
하필 설형이 도강우를 떠올린 순간 석진의 입에서 도강우가 튀어나올 줄이야. 덕분에 설형은 당황하고 말았다.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을 석진이 알아차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그래 봐야 표정으로는 나타나지도 않았고 미묘하게 동공이 흔들린 게 고작이지만 혹시나 석진이 그것을 알아차릴까 봐 간이 쪼그라들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마주 웃어 주고.”
다행히 석진은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설형이 반박했다.
“그런 적, 없어.”
하지만 석진은 설형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오늘 만나기로 했던 거지? 나랑 헤어진 뒤에.”
“그쪽이, 선약이었어.”
그걸 또 따지고 있다. 강우가 봤다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겠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설형의 성격인 것을. 역시나 그렇게 받아치는 설형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석진의 얼굴이 확 찌푸려졌다.
“너 설마, 도 검사, 그 새끼랑도 잤어?”
“내가 그걸, 왜, 니 새끼한테, 말해 줘야, 하는데?”
“……너 지금 네가 어떤 입장인지 알고나 있는 거야?”
“죽기밖에, 더하겠어?”
“하.”
이렇게 묶여 있으면서도 설형은 전혀 겁을 집어먹지 않았다. 뭐 그런 녀석이라는 건 석진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대책 없는 정도일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석진이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지만 그 미소 너머로 당황한 기색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내가, 네 비위를 맞춘다고, 죽이려던 걸, 마음 바꿔서, 살려 주진, 않을 거 아냐.”
“…….”
“적어도, 네가, 궁금해 미치게, 하고 죽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
“네가 아니라도 도 검사를 통해 알아내는 수도 있어.”
“그럼, 그쪽에, 물어보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듯 설형이 시선을 돌려 버렸다. 정말 죽어도 상관없어서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판을 흔들려면 상대가 예상한 대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돌발 행동으로 범인을 당황시켜야 틈이 생기고, 기회가 생기는 법이니까.
혹 기분이 상해서 그냥 죽여 버리겠다고 나오는 건 아닐까,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다행히 아직 죽을 때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아. 석진이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아무 사이 아니야?”
“…….”
약간의 틈이 생겼다. 설형은 속으로 빙고를 외쳤지만 바로 미끼를 무는 실수를 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시선을 돌리고 있는 설형을 보고 일단 강우에 대한 의심은 모두 거둔 모양이었다.
“하여간 날파리 꼬이는 재주는 타고 났다니까.”
석진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서야 설형은 조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이미 늦었다 쳐도 도강우마저 미친놈에게 노려지게 할 수는 없었다. 도강우가 들으면 지금 상황에서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냐고 잔뜩 으르렁거렸겠지만.
“무슨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봐? 이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오는 걸 보면.”
“…….”
설형은 석진의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자신이 웃었다는 걸 전혀 자각하지 못했다. 입꼬리를 바로 내렸지만 이미 석진의 표정은 싸늘했다.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좀 있으면 좋겠네. 지금 상황이라면 이대로 살해당해 버려져도 아무도 모를 가능성이 높았다.
무죄로 풀려났다고는 해도 자신이 연쇄살인범의 공범일지도 모른다는 기사가 잔뜩 쏟아져 나온 상황에서 제가 사라져 버리면 어떤 추측이 난무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정말은 자신이 연쇄살인범의 공범이었고, 그게 밝혀질까 봐 두려워 도주한 것으로 언론에서 찍고 떠들어 댈 것이고 팀원들도 처음에야 자신을 찾으려 하겠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포기하게 될 것이다.
그나마 열받은 도강우가 좀 더 끈질기게 찾으러 다닐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설형이 가장 믿을 만한 구석이었다.
“그렇겠지?”
“…….”
살짝 걱정이 된다는 듯 표정을 굳혔던 석진이 이내 씨익, 하고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얼마 가지 못했다.
삐이이이익―.
저 멀리 아래층에서 날카로운 벨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석진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 소리가 무슨 소린지 모르는 설형은 영문을 모르고 눈만 깜빡였지만 석진의 표정은 점점 딱딱하게 굳었다.
석진이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인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듯 삐이이이익, 하고 길고 날카로운 벨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렸다. 게다가 이제는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고 있었다. 석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뒤늦게 설형도 그것이 초인종 벨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설마…….”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네. 자신을 보는 석진의 눈동자에서 의심의 눈초리를 읽은 설형이 고개를 내저었다.
“네 손님, 아냐?”
“올 사람 없어.”
“…….”
알 만했다. 겉모습은 그럴듯하게 달라졌을지 몰라도 안에 담긴 내용물은 결코 달라질 수 없는 거니까.
“나도, 아냐. 나 때문에 온 손님이라면, 예의바르게, 초인종을 누를 리 없잖아.”
설형이 논리적으로 설명하자 석진도 납득했는지 날카로운 눈빛은 조금 누그러졌다. 하지만 뭔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한 듯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조용히 하고 있어.”
끈질기게 울리는 벨소리가 아무래도 그냥 돌아갈 분위기는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석진이 설형의 입을 다시 테이프로 봉하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메스를 집어들었다.
멈칫.
그대로 나가려던 걸음이 이내 멈칫했다. 그리고 다시 되돌아온다. 갑자기 불안해져서 아예 처리하고 가려는 건 아니겠지. 안쪽을 바라보고 묶여 있는 설형으로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온 석진이 날이 새파란 메스를 들이밀었다. 흠칫, 하고 놀란 설형이 어깨를 떠는 사이, 툭, 하고 설형의 몸을 묶고 있던 끈이 끊어졌다.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친 석진이 말했다.
“안 되겠어. 눈에 보이는 데 둬야지. 일어나.”
하아.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게 사람을 물건 취급하고 있어. 뒤늦게 그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사실 처음엔 진짜 쫄았다.
석진이 설형의 몸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혼자 남겨지게 되면 조금은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터라 아쉽긴 했다. 그래도 묶인 신세는 면했으니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 봐야 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조용히 해.”
계단을 내려온 석진이 설형의 목에 메스를 가까이 댔다. 그리고 버튼을 눌러 대문 밖을 확인했다.
동그란 화면에 뜬 얼굴은 자신들이 타고 왔던 택시 기사였다.
“뭡니까?”
밖으로 연결되는 버튼을 누른 석진이 차갑게 물었다. 얼굴을 찌푸린 기사가 입을 카메라 앞으로 바싹 가져다 대며―아마도 거기가 마이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따져 물었다.
“대체, 사람을 언제까지 기다리게 하는 겁니까.”
“…….”
뒤늦게 기사에게 설형이 기다려 달라고 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보통은 기다리다 안 나오면 그냥 가 버리는 법인데 이 기사는 아직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석진이 난감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버튼을 열고 말했다.
“미안합니다. 친구가 몸이 안 좋아서, 같이 있다 가야 할 것 같네요.”
“장난합니까?”
기사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미안합니다.”
“미안하다면 답니까? 됐고, 지금까지 기다린 택시비나 줘요.”
“…….”
“뭐합니까. 설마 택시비 떼어먹을 생각은 아니겠죠? 아님, 경찰 불러서 얘기해 볼까요?”
경찰이라는 단어에 석진의 표정이 급격히 차가워졌다. 순간적으로 굳혔던 얼굴 표정을 풀며 석진이 인터폰에 대고 말했다.
“그럼 돈 드릴 테니까 잠깐 현관 앞까지만 좀 와 주시겠어요? 제가 지금 나가기가 좀 곤란해서요.”
“……흠흠, 그 정도야 뭐.”
조금 전에 비해 확 바뀐 태도에도 기사는 경계를 하지 않았다. 사실 경계를 하지 않는 게 당연한 일이었지만.
삑.
텅―.
인터폰을 타고 대문이 열리는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신이 나서 집안으로 들어오는 기사의 발소리까지 들었을 때 석진이 설형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금방 처리하고 올 테니까, 얌전히 있어.”
바닥에 눕혀진 설형이 읍, 읍, 하고 소리를 냈다. 그만두라는 의미였다. 물론 그런다고 석진이 제 말을 들을 리 없었지만 그래도 손놓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쉿. 조용히 해.”
곧바로 메스가 설형의 볼 가까이에 대어졌다. 설형이 숨을 삼켰다. 하지만 곧 스스로 메스를 향해 얼굴을 앞으로 내밀었다.
“미쳤어?!”
오히려 기겁하며 손을 뒤로 물린 것은 석진이었다. 날이 아주 잘 선 메스는 살짝 닿은 것뿐인데도 주욱, 하고 볼에 붉은 선을 그렸다. 투명한 하얀 피부 위로 붉은 선이 유난히 도드라졌다.
“으, 아까워라.”
기가 막히게도 코끝을 찡그리며 중얼거리는 석진은 진심으로 설형의 얼굴에 상처가 난 것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이 얼굴 그대로 박제해 놓을 건데. 평생 상처가 남게 생겼네.”
“…….”
물론 평범한 보통의 이유로 아까워한 것은 아니지만.
쿵쿵쿵.
설형 때문에 지체한 사이 어느새 택시 기사는 현관문까지 도착해 있었다.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설형이 읍, 읍, 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제발, 이 소리를 듣고 기사가 도망치기를 바랐지만 늘 세상은 설형의 바람대로 되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설형이 낸 소리가 기사의 호기심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문 앞에 서 있던 검은 그림자가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들어올 때 잠그지 않았던 현관문은 걸림 없이 그대로 돌아갔다.
설형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석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석진이 뒤돌아서는 것과 거의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
들어선 사람을 확인한 설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석진의 표정도 설형과 다르지 않았다. 정작 문을 열고 들어선 이만 눈앞에 펼쳐진 놀라운 광경에도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초, 총 내려놔.”
뭐, 믿을 만한 구석이 있기도 했고.
중얼거리는 강우의 손에 들린 권총을 본 석진이 재빨리 바닥에 누운 설형을 일으켜 제 방패막이로 세웠다. 그리고 설형의 목에 날카로운 메스를 바싹 가져다 대고 위협하자 강우가 천천히 손을 들어 총구를 천정 쪽으로 향하게 했다.
“내려놔.”
하지만 석진의 요구는 좀 더 확실한 단계까지였다. 메스를 좀 더 가까이 가져다대며 명령하자 강우가 급히 두 팔을 양옆으로 벌렸다. 그리고 바닥 쪽에 몸을 구부리며 말했다. 시선은 여전히 정면을 응시한 채였다.
“좋아. 원하는 대로 내려놓을 테니까, 그 전에, 확인부터. 아니면 나도 못 내려놔.”
“……뭔데.”
고민하던 석진이 일단 뭔지 들어나 보자는 듯 까딱 고갯짓을 했다.
“백 형사가 괜찮은지, 그것만 확인시켜 주면 원하는 대로 해 줄게.”
설형의 미간을 찌푸려졌다. 지금 이 상황에서 총을 내주겠다니. 제정신인가 싶었다. 물론 제정신이 아닌 인간이긴 하지만.
“마취제 때문에 못 움직이는 것뿐이야.”
“본인한테 직접 듣고 싶은데.”
하는 태도로만 봐서는 누가 누굴 협박하고 있는 입장인지 모르겠다. 석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지만 그 정도 요구라면 들어주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했는지 설형의 입에 붙여 놓은 테이프를 떼어 주었다.
“괜찮습니까?”
강우가 설형을 향해 물었다. 하지만 설형도 강우만큼이나 제정신이 아니긴 마찬가지였다.
“내가 여기, 있는 건, 대체, 어떻게, 안 겁니까?”
“…….”
“설마, 나한테, 미행 붙였습니까?”
이 상황에서 그걸 따져 묻고 있다. 하지만 평소라면 그런 설형의 반응에 기막혀했을 강우가 순간적으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리고 그걸 설형은 놓치지 않았다.
“정말입니까?!”
“미행 아닙니다.”
즉답. 하지만 거기서 물러선 설형은 아니다.
“미행이 아니면, 뭡니까. 설마, 위치추적기라도 달아 뒀습니까?”
“…….”
강우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정말은 복사폰이었지만 굳이 거기까지 다 이실직고할 필요는 없다 싶었다. 설형의 얼굴이 확 찌푸려졌다.
“정말 나한테 위치추적기를 달아 뒀단 말입니까?!”
“…….”
“미친 거 아닙니까?!”
불을 뿜는 설형에도 강우는 뻔뻔하게 받아친다.
“그러게 귀엽게 기다리라고 말했으면 좋았잖습니까. 왜 얌전히 있는 사람 성질을 건드려요.”
“건드리기 전에 이미 달아 놨던 거잖습니까!”
“…….”
“둘이 지금 뭐하자는 수작이야?”
타이밍도 좋지. 하필 딱 강우가 대답해야 할 타이밍에 그때까지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석진이 얼굴을 확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눈앞으로 바짝 다가온 메스를 보고서야 설형도 지금의 상황을 자각했다. 강우도 순간 긴장한 듯 얼굴을 굳혔다.
“지금 이게 장난 같아?!”
“총! 내려놓죠.”
메스 끝이 설형의 눈동자 바로 앞까지 바싹 다가가 있는 것을 본 강우가 급히 외쳤다.
“보아하니, 아주 멀쩡한 것 같으니.”
오히려 너무 멀쩡해서 문제였다.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 강우가 천천히 들고 있던 팔을 아래로 내려 총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제, 이리로 밀어.”
“안 돼!”
석진의 명령에 설형이 말리고 나섰지만 강우는 한 번 망설임도 없이 바닥에 놓은 총을 발로 밀었다. 주욱, 마룻바닥을 미끄러져 오는 총을 석진이 발로 탁, 하고 밟았다.
시선은 여전히 강우에게 둔 채 팔만 내려 바닥에 놓인 총을 집어들었다.
“이리로.”
총을 손에 쥐자 여유가 생긴 모양이다. 위험천만하게 설형을 겨누고 있던 메스를 조금 내린 석진이 이번엔 강우를 향해 총부리로 까딱, 거리며 방향을 지시했다.
“손은 내게 보이게 하고.”
순순히 손바닥이 보이게 양손을 든 상태로 강우가 천천히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말했다.
“도망치려면 지금이 기횝니다. 좀 있으면 경찰이 들이닥칠 테니.”
“하.”
석진이 소리 내어 웃었다. 물론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누굴 속이려고. 만약 경찰이 올 거였으면 같이 왔겠지. 공주님이 나랑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봐 달려와 놓고선 뒤늦게 잔머리 굴린다고 내가 속아 넘어갈 것 같아?”
“…….”
순간적으로 안심했던 설형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지원은 요청했겠지. 설마 아무 대책도 없이 정말로 혼자 왔을 리가.
그런 위안을 하며 시선을 돌렸지만 곧바로 얼굴이 굳는다. 석진의 말에 정곡을 찔린 듯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있는 강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제정신입니까?!”
“백 형사가 할 말입니까? 경계심 없이 아무나 쫄래쫄래 따라가서 제 발로 인질이 된 주제에?”
설형이 기가 막힌다는 듯 따지자 강우가 곧바로 받아쳤다.
“누가, 쫄래쫄래 따라갔다는 말입니까.”
“제 발로 따라왔지, 그럼 뭐 억지로 끌려왔습니까?”
“이―!”
얄미운데, 받아칠 말이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경계심 없이 행동하다 이 꼴이 된 건 맞으니까. 덕분에 도강우까지 이렇게 위험에 빠뜨렸으니 할 말이 없긴 했다.
“아무나?!”
똑같이 들었음에도 석진이 강우의 말 중에 거슬린 부분은 또 달랐던 모양이다.
“내가 왜 아무나야? 우리가 얼마나 특별한 사인데.”
“…….”
“너야말로 헛물켜지 마. 공주님은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정말입니까?”
강우가 설형을 향해 물었다. 설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지금 그거 확인하고 있을 땝니까. 눈으로 항의해 보지만 평소에는 잘만 제 머릿속을 읽어 내던 강우가 갑자기 눈새처럼 굴기 시작했다.
“아무 관심도 없는데 나랑 잠은 왜 잤습니까?”
“……뭐?”
휙, 하고 석진의 시선이 설형에게 향했다.
“아무 사이가 아니야?”
“…….”
곧바로 아니라고 잡아뗐어야 했는데, 설형도 강우의 돌발 행동에 당황한 나머지 잠깐 멈칫하고 만 것이 석진의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어 주는 결과를 만들었다.
“거짓말을 했겠다?”
말 안 한다고 했지, 아니라고는 안 했다. 물론 그걸 입 밖으로 내서 반박할 만큼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 설형은 조용히 침묵했다. 제발 입을 다물고 있었으면 싶은 강우가 다시 눈치 없이 불쑥 끼어들었다.
“아래로 내 자지를 물고 좋다고 앙앙거릴 때는 언제고 이제 볼일 없다는 겁니까?”
“…….”
설형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 인간이 돌았나. 석진의 비위를 맞춰도 모자랄 판에 총 들고 있는 사람을 도발해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기가 막혀 멍하게 강우를 보고 있는 사이, 충격으로 굳어 있던 석진은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감히 누구한테, 뭘 넣어?”
쓰고 있던 가면이 벗겨지듯,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 음산하게 중얼거린 석진이 붙잡고 있던 설형을 바닥으로 내던지듯 내려놓고 총부리를 강우에게 겨눴다. 총구가 정면으로 자신을 향하고 있는데도 강우는 태연했다.
“못 들었어? 내 자지를 백설형 아랫입에 넣었다고.”
씽긋, 하고 웃으며 덧붙이는 도강우를 보며 설형은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머리가 좀 어떻게 된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도강우는 그냥 미친놈이었다. 겉모습이 너무 멀쩡해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뿐. 아주 위험한 짐승이었다.
“이 새끼, 죽여 버릴 거야.”
“그거 알아? 한 방에 사람 죽이는 건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라는 거.”
“…….”
“정말 쏠 거면 신중하게 쏴. 한 번에 제대로 맞추지 않으면, 기회는 나한테로 넘어올 거니까. 그리고 난 한 번 온 기회는 절대 놓치지 않는다고 장담하지.”
그냥 부리는 허세는 아니었다.
강우의 말대로 석진이 실수하면 도강우에게 기회가 생기는 건 맞으니까. 물론 제대로 쏘지 않으면, 이라는 전제가 아주 낮은 확률이라는 게 문제지만. 제대로 맞지 않아도 총에 맞으면 위험하다. 오히려 초보자일수록 어딜 어떻게 조준할지 모르기 때문에 더 위험했다. 그럼에도 강우는 그 아주 낮은 확률이 당연히 일어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로 자신에게 기회가 올 거라고 전혀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런 자신만만한 강우의 태도에 총구를 든 손이 망설이기 시작했다는 거다. 왠지 세상이 이 남자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 얄미운 기분마저 들었다. 하지만 얄미운 것과 잘못되기를 바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럼, 가까이에서 쏘면 되지.”
성큼 다가간 석진이 강우의 이마 바로 앞으로 총구를 들이밀었다. 설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 돼! 설형이 속으로 외쳤다. 하지만 석진은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틱.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던 설형의 귓가에 들려온 것은 달팽이관을 뒤흔드는 굉음이 아니라 비루하기 짝이 없는 이 소리였다.
“쏘리. 이거 사실 빈 총이야.”
씨익, 하고 입꼬리를 올리며 자백한 강우가 곧바로 주먹을 내질렀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정통으로 주먹을 맞은 석진이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쿠당탕, 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무 바닥을 나뒹구는 석진에게 강우의 발길질이 쏟아졌다.
퍽, 퍽, 퍽, 퍽, 집중적으로 배와 얼굴로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컥컥, 숨을 헐떡이는 소리와 피가 튀는 소리가 섞였다. 한 번에 제대로 들어간 주먹질이며 상대가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하도록 잔인하고 집요하게 발길질을 퍼붓는 모양새가 아무리 봐도 한두 번 해 본 솜씨는 아니었다. 누가 범인이고, 누가 범인을 잡는 검사인지 모를 광경이었다.
“도 검사님! 범인을 죽일 작정입니까?”
저러다 진짜 죽겠다 싶어 결국 설형이 말리고 나섰다. 심정적으로야 그냥 두고 싶었지만 대한민국 검사를 살인자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힉.
순간적으로 발길질을 하다 고개만 돌린 강우의 표정은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마냥 무시무시했다.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살짝 쫄아서 굳어 있는 설형을 본 강우가 쳇, 하고 혀를 찼다. 다행히 표정도 본래의 여유로운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그 표정을 보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 정도 했으면, 그만 와서 저 좀, 일으켜 주면 안 되겠습니까?”
사실 이제 그만하라는 뜻이었지만 그렇게 말하면 듣지 않을 것 같아 일부러 돌려 말한 것이었다. 다행히 강우도 더 이상은 석진이 위협적이지 않다는 걸 확인했는지 순순히 몸을 돌렸다. 물론 아직 분이 다 풀리지 않았는지 돌아서며 한 번 더 퍽, 하고 배를 차 주는 것은 잊지 않았다. 컥, 하는 외마디 비명과 뒤이은 기침 소리가 들려왔지만 누구도 거기에 신경쓰는 이는 없었다.
“몸에 감각 있습니까?”
다가와 설형을 일으키는 손길이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강우의 질문에 설형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
“손가락 끝에 조금?”
확실히 말하는 것도 조금 편해져 있었다. 그것을 강우도 알아차렸는지 검은 눈동자에 어려 있던 긴장감이 조금 누그러졌다.
“핸드폰 있죠.”
“……핸드폰은 왜, 말입니까.”
순간 복제폰을 만든 걸 들켰나 싶어 살짝 긴장했으나 다행히 설형이 핸드폰을 찾은 것은 아주 정상적인 이유에서였다.
“신고해야죠.”
아. 곧바로 알아들은 강우가 설형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안 해도 됩니다.”
“안 해도 되다뇨. 그게―.”
얼굴을 찌푸린 설형이 한마디 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였다.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분명 경찰 사이렌 소리였다.
“내가 말했잖습니까. 곧 경찰이 올 거라고.”
태연히 어깨를 으쓱이는 강우에 설형의 얼굴이 더 일그러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혹시 몰라서, 택시 기사에게 내가 들어가고 바로 나오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해 달라고 부탁해 놨습니다.”
강우의 설명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설형이 이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뭔가 눈치채고 온 게 아니었던 겁니까?”
“…….”
“그럼 정말로 그냥 나 잡으러 온 거였습니까?!”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는 설형에게 강우는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온다.
“발정기인 백 형사를 믿을 수가 있어야죠.”
“발―, 내가 무슨 짐승입니까?”
기겁한 설형이 곧바로 따져 물었다. 하지만 강우는 태연했다.
“맞잖습니까. 큰 사건도 해결했겠다, 술도 먹었겠다, 발정이 올지 어떻게 압니까.”
“…….”
기가 막혔지만 반박할 말이 없는 것도 사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인정할 수 있는 성격도 아니라 입은 꾹 다물었지만 쏘아보는 눈빛은 사납다. 그런 설형의 눈빛을 강우도 피하지 않는다.
그게 다 누구 때문인데. 속으로 되뇌며.
‘최대한 빨리 돌아갈 테니까. 기다리시라구요.’
그런 앙큼한 소리를 해 놓고서 남자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거라고 생각하다니. 사실 의식하고 한 말이 아니라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얌전히 기다리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라는 핑계를 굳이 만들어 위치를 확인하고 달려오던 도중에, 설형에게서 걸려온 전화가 받자마자 끊기고, 그 뒤로는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을 때, 강우는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 다음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미친 듯이 차를 몰았고, 정신을 차려 보니 여기 이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는 것 말고는.
출발하는 택시 앞으로 차를 세우고 기사를 반강제적으로 문 앞에 세운 것도 강우였다.
지원 요청도 하지 않고 무턱대고 혼자 들어온 거냐고, 설형이 기막혀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사실 스스로도 기가 막힌 행동이었으니까. 평소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해서 논리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도강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백설형에게는 그게 되지 않았다. 의심스러운 상황이면, 지원 요청을 하고 기다렸다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강우는 오늘 처음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다는 게 어떤 건지를 경험했다. 하얗게 빈 머리는 백설형이 무사하다는 걸 제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아니, 솔직히 무사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냥 이 얼굴이 제 눈앞에 있기만 하면. 그리고 이 얼굴을 보고서야 강우는 제가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거 뭐야.
강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너 대체 뭔데.”
“…….”
헐. 순간 쫄았던 설형도 이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갑자기 표정이 험악해지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 기분을 살피고 있던 설형으로서는 가만히 있다 뺨을 맞은 격이 아닐 수 없었다.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일단 상황을 파악하자 싶어 나름 성질을 죽여 물었지만 강우는 여전히 험악해진 표정으로 설형을 응시할 뿐이다. 설형도 지지 않고 시선을 마주했다. 두 사람이 그렇게 눈싸움에 열중하고 있는 사이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아주 선명해졌다.
“일단 범인 인계부터 하죠.”
일단 이 상황부터 해결하고 보자. 설형이 어금니를 꽉 문 채 되뇌었다. 강우의 귀에도 사이렌 소리가 들리긴 했는지 설형을 앉혀 두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곧 멈칫한다.
왜. 멈칫한 강우에 설형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석진 쪽으로 옮겨갔다. 설형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괜한 반항은 그만두는 게 좋을 텐데. 네 상대가 아니야.”
메스를 꺼내 든 석진을 향해 설형이 충고했다. 조금 전 도강우를 괜히 말렸구나, 그런 후회를 하며.
하지만 설형의 예상과 달리 석진이 메스를 꺼내든 것은 반항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메스는 곧 석진의 목을 겨누었다.
―!
석진이 뭘 하려는 것인지 알아차린 설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엉망으로 부어오른 얼굴로 석진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저주처럼 되뇌었다.
“이젠, 날 절대 잊을 수 없겠지?”
“이석진!”
설형이 손을 내뻗으며 소리쳤다. 하지만 석진은 악귀처럼 웃으며 망설임 없이 손을 그었다. 분수처럼 뿜어져 나올 피를 상상하며 설형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탕―!
“으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석진이 비명을 내지르며 손을 움켜쥐었다. 움켜쥔 손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반사적으로 설형의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강우의 손에 들린 총구에서 하얀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감히 누구 마음대로, 이 머리통에 박히겠다는 건데?”
“으아아악―. 내, 손. 악.”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경고는 석진에게는 닿지 않았다. 그제야 설형도 강우가 총으로 석진의 손을 쏘아 맞췄다는 것을 인식했다. 설형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빈 총이라면서요.”
따지듯 묻는 설형에게 강우는 태연히 대꾸했다.
“거짓말이었습니다.”
하. 따질 마음도 들지 않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설형이다. 하지만 곧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런데 그렇게 사격 실력이 좋으면서 아깐 왜 바로 안 쏜 겁니까?”
그 긴박한 순간에 총을 쏘면서도 강우는 한 번의 망설임도 없었다. 마치 손이 아닌 다른 곳을 맞출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단 1프로도 없다는 듯. 그리고 총알은 정확히 손을 맞췄다. 우연일 리 없었다.
이 정도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면 처음 들어왔을 때 쏘았어도 됐던 거 아닌가. 사실 총을 넘겨줬다가 다시 빼앗는다는 계획은 너무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첫 번째 탄창이 비어 있었다고 해도 두 번째 방아쇠가 곧바로 당겨졌을 수도 있고.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자신을 위험에 빠트리는 행동을 할 리는 없으니 당연히 사격에 자신이 없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니 뒤늦게 의아해진 것.
“그걸 정말 몰라서 묻습니까?”
하지만 되돌아온 것은 오히려 기가 막힌다는 반응이다.
“모르니까 묻죠. 아는데 왜 묻습니까.”
잘못한 것도 없이 괜히 잘못한 기분이 들어 움츠러들었던 설형이 발끈해서 반박하자 강우가 얼굴을 더 찌푸린다. 그리고 말했다.
“왜겠습니까. 당신 때문이지.”
“…….”
그러니까 지금 이 말은.
“내가, 위험할까 봐, 그랬다는 겁니까?”
“…….”
그럼 대체 뭐 때문이겠냐. 대답은 없었지만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미친 건가. 기가 막히고 억울한데, 자꾸만 입꼬리가 풀어진다. 헤실헤실 풀어지려는 입매를 딱딱하게 굳히려고 애쓰며 설형이 한 번 더 따져 물었다.
“그 실력이라면 내가 위험할 일은 애초에 없었던 것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만.”
제가 한 말이긴 하지만 대놓고 잘난 척을 하는 것을 보니 절로 얼굴이 찌푸려진다.
“예기치 못한 돌발 상황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니까.”
“…….”
“그런 위험을 감수하기엔.”
말을 하던 강우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던 설형이 고개를 조금 앞으로 내밀었다. 감수하기엔?
하지만 하필 그때. 현관문이 벌컥 열리고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아마도 집안에서 울린 총소리를 들은 것이리라.
“난 검사고, 여긴 형삽니다.”
강우가 총을 든 손을 들어올리며 신원을 밝히자 잔뜩 긴장해서 들어온 순경의 얼굴에 안도감이 번진다.
“여기 응급 환자가 있으니 빨리 병원으로 후송 부탁합니다.”
무전기를 통해 구급차가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도착하자 강우가 말했다.
“이 분, 말입니까?”
당황한 표정으로 순경이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강우의 손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을 나뒹구는 석진이 아니라 아직 마취제 때문에 자유롭게 움직이지는 못한다 뿐이지 겉보기엔 지나치게 멀쩡한 설형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네. 여기가 더 급한 환잡니다.”
강우가 고개를 내젓는―의식하지 못했지만 조금 전부터 몸의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설형의 말을 딱 자르며 태연히 말했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응급요원이 그때 딱 들것을 들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강우가 이쪽이라는 듯 손을 들었다.
“여기요.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데, 아무래도 약물 주사를 맞은 것 같습니다.”
어어, 하는 사이 설형은 들것에 태워졌다.
“아니, 전 괜찮―.”
“여긴 내가 책임지고 처리할 테니까, 백 형사는 마음 놓고 치료부터 받아요. 저 대신 잘 부탁합니다.”
뒤늦게 항의를 하려고 다시 입을 열었지만 이번에도 강우에 의해 가로막혔다.
“아, 형사님이셨구나……. 제가 잘 보살필 테니 걱정 마세요.”
설상가상 무슨 착각을 한 건지, 안쓰러운 눈빛으로 설형을 본 응급 요원이 걱정 말라는 듯 손까지 불끈 쥐어 보인다. 들것이 공중으로 들리고 빠르게 문을 통과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들것에 실려 나가던 설형이 입구 쪽에 서 있는 순경을 향해 당부했다.
“범인, 잘 좀 부탁합니다.”
“네. 걱정 마세요, 형사님.”
물론 설형이 부탁한 이유와 순경이 받아들인 의미는 전혀 다른 의미였지만. 최소한 범인을 죽이는 건 막을 수 있겠지. 다소 그런 무책임한 생각을 하며 설형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야 마취가 풀리는지, 온몸이 잔뜩 물먹은 솜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아. 아까 그 뒤의 말이 뭐였는지 물어봤어야 했는데.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시원한 공기가 볼에 닿았다. 덜컹, 소리를 내며 간이침대가 앰뷸런스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뭐 조금 있다 다시 만날 텐데, 그때 묻지 뭐. 그렇게 가볍게 넘긴 설형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탁, 하고 차문이 닫히는 소리를 신호로 설형 역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하지만 그 조금이 이렇게 긴 시간이 될 것이라고는 설형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연쇄 살인 사건의 공범이 사실은 국과수 소속의 검시관이었다는 사실은 큰 충격과 파장을 가져왔다. 지금까지 그가 맡았던 사건의 범인들은 대거 재심을 신청했고 국과수의 원장이 모든 사태의 책임을 지고 옷을 벗었다.
그럼에도 국과수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고 신문에서는 연신 시끄럽게 떠들어 댔지만 대부분은 알고 있었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고 더 크고,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면 이 일은 소리 소문 없이 잊혀질 거라고. 그리고 그 예상대로 며칠 후 터진 정계의 거물급 인사들이 대거 뇌물을 받은 사건으로 이 사건은 단숨에 잊혀졌다.
물론 그렇게 잊혀진 뒤에도 설형은 석진과의 친분을 이유로 수사에서 배제된 채 감사원의 조사를 받아야 했지만.
“백 형사님!”
막 감사원 건물을 나오던 설형이 잠시 멈칫, 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으려니, 그 새를 못 참고 재민이 후다닥, 달려왔다. 그 뒤로 김 형사도 보였다.
“이딴 거 하지 말라고 했냐, 안 했냐. 참고인 진술한 것뿐인데 두부는 무슨.”
설형이 핀잔했지만 그런 것에 아랑곳할 재민이 아니다. 오히려 두 손으로 든 두부를 더 바싹 들이밀며 말했다.
“반장님이 아무래도 백 형사님 올해 운세에 마가 낀 거 같다고 할 수 있는 건 다 하래요.”
“…….”
쳇, 하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차긴 했지만 결국 설형도 두부를 한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그때 불쑥, 호주머니 안으로 재민의 손이 쑥, 들어왔다 나갔다.
“이것도 꼭 넣고 다니시구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그것이 뭔지 알아차린 설형이 얼굴을 확, 일그러트렸다.
“팬티 속에 넣으면 더 효력이 좋대요.”
설형의 얼굴이 더 일그러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그럴 것을 미리 짐작한 재민은 한 발 뒤로 물러선 뒤였다. 못마땅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설형도 그것을 꺼내 패대기치지는 않는다.
“범인 조사는 어떻게 되고 있어.”
재민이 세워둔 차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설형이 물었다. 재민과 김 형사도 그 뒤를 따르며 대답했다.
“저희 선에서 하는 수사는 끝나고, 지금은 검찰로 송치되어서 마지막 조사받고 있는 중이에요.”
“그 집 마당에서 백골 사체도 나왔다며.”
“DNA 검사 결과 친부로 밝혀졌어요. 본인도 고등학교 1학년 때 우발적으로 살해해서 집 마당에 묻었다고 자백했구요.”
“…….”
“그 친부라는 인간 강간 전과만 9범이에요. 그러니 자식한테는 어땠겠어요.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폭력과 감금 같은 학대를 받았던 모양이더라구요. 별것도 아닌 이유로 두들겨 패고 방에 가둬 놓고 며칠 동안 안 열어 줬대요. 그 집 문고리란 문고리가 죄다 밖으로 나 있는 이유가 그런 거였더라구요. 아버지 죽고 나서도 안 바꾼 이유가 어렸을 때부터 거기서 살아서 그게 이상한 줄 몰랐대요.”
“그렇다고 이석진이 범죄자가 된 걸 정당화할 순 없지. 모든 학대 아이들이 범죄자가 되는 것도 아닌데.”
“그건 그렇죠.”
은근 슬쩍 배어 있는 동정심에 설형이 일침을 가하자, 재민도 찔끔했다. 설형 앞에서 할 말이 아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딸칵. 설형이 차 뒷문을 열었다. 재민도 재빨리 차를 돌아 앞좌석 문고리를 잡으며 말했다.
“오늘 오실 줄 알았는데, 안 오셨네요.”
나름 가벼운 주제로 화제를 바꾸려는 의도였지만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막 차에 올라타려던 설형이 순간 멈칫했다.
“……누가?”
하지만 곧 태연을 가장해 되묻는다. 곧장 재민의 대답이 돌아왔다.
“도 검사님이요.”
그리고 설명도 덧붙인다.
“아, 특검도 이제 완전히 해산해서, 도 검사님 복귀하셨잖아요.”
“…….”
“연락 못 받으셨어요?”
설형의 표정이 묘하게 굳은 것을 눈치챈 재민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물론 이번에도 설형의 대답은 없었고, 재민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번졌다.
“요 며칠, 워낙 일이 많아서, 정신없으신 거 같더라구요.”
“나한테 연락할 이유가 뭐가 있어. 네 말대로 특검도 해산했고, 사건도 모두 종결됐는데.”
재민이 대신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설형은 자신이 언제 굳었냐는 듯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바로 차에 올라탔다. 어떡해요? 차문을 열기 전 재민이 건너편에 있는 김 형사를 향해 눈으로 물었다. 하지만 김 형사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어깨를 으쓱이는 김 형사에게 울상을 지어 보인 재민이 운전석에 올라탔다. 울상을 짓고 있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쌩글거리고 있었다.
“일단 서로 들어가실 거죠?”
“어.”
창문으로 시선을 둔 채 설형이 짧게 대답했다. 흘끔, 백미러로 설형을 확인한 재민이 조용히 차를 출발시켰다.
“니들은 대체 뭘 하다 이제 와!”
서에 들어서기 무섭게 홍 반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백 형사님 나오시자마자 온 건데요.”
순간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던 재민이, 이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중얼거린다. 하지만 홍 반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들 인사드려. 오늘부로 새로 우리 서로 발령받으신 검사님이시다.”
설형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홍 반장이 이렇게 괜한 불호령을 내린 이유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자신이 발령을 받아 온 첫날, 느지막이 나타난 형사들을 검사가 얼마나 못마땅하게 생각할지 잘 아는 터라 홍 반장이 일부러 더 저렇게 벼락같이 화를 낸 것이라는 걸.
하아. 작게 한숨을 내쉰 설형이 고개를 들었다. 이번엔 또 얼마나 대단한 놈이 왔길래 홍 반장이 이렇게 호들갑인가. 한 번 확인해 보자 하는 심정으로.
저벅.
누군가 앞으로 나섰다.
앞에 선 재민과 김 형사에 시야가 가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사실, 제대로 확인할 의욕이 없기도 했고.
“바쁘면 그럴 수도 있죠. 괜히 저 보라고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재수 없는 그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예의상으로라도 괜찮다, 신경쓸 것 없다 라는 말을 해 주는 법이 없는 말본새도 여전했다.
“도 검사님!”
눈이 휘둥그레진 재민이 크게 외쳤다. 김 형사도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 사이 나름 정들이 들었던 모양이다. 물론 그 정이 들게 한 원인의 9할은 설형의 활약 덕분이었지만.
“어떻게 되신 거예요?! 중앙지검에 계셔야 분이.”
“좌천됐습니다.”
“아…….”
사람 난감하게 하는 화법도 여전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서 있는데, 갑자기 재민과 김 형사가 옆으로 비켜섰다.
“잘됐네요. 백 형사님도 오늘부터 복귀신데, 오늘 두 분 환영회 하면 되겠네요.”
민망한 상황을 모면하려고 자신을 이용하는 팀원들을 보며 다소 회의가 드는 설형이었다.
저벅.
뚱하게 서 있는 설형을 향해 강우가 한 발 다가왔다. 재수 없을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 빙그레 웃는다.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신입끼리 잘해 보죠. 백 형사.”
설형의 얼굴이 확 일그러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기형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