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멈칫.
자판기 커피를 빼서 돌아서던 설형이 멈칫했다. 복도 끝에서 자신의 서기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강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호주머니에 넣어 둔―강우에게 돌려주라며 강제로 제게 떠맡긴 거였지만―usb가 손가락에 걸렸다. 내내 안 보인다 싶더니 이걸 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참 태평한 검사님이네. 고개를 내저으면서 설형은 손에 쥔 usb를 만지작거렸다.
―!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린 강우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저도 모르게 움찔했던 설형이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을 가장한 얼굴로 종이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시선을 거두고 서기관과 짧은 말 몇 마디 주고받던 강우가 방향을 틀어 다가왔다. 잘근잘근.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보고 있었지만 물고 있던 종이컵의 끝부분에 잇자국이 났다.
“뭐, 무슨 할 말이라도―.”
평소와 달리 심각한 표정으로 제게 다가온 강우에 괜스레 따지듯 묻던, 아니 물으려는 설형에게 뭔가가 날아왔다. 상처난 데 바르는 연고였다.
“이게 뭡니까?”
눈만 깜빡이던 설형이 고개를 들고 묻자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빈정거리는 혼잣말이었다. 물론 면전에다 대고 하는 중얼거림을 혼잣말이라고 해도 되는가, 하는 의문은 있었지만.
“실력 좋은 형사라더니, 줘 터지고나 다니고.”
“줘터―!”
설형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줘 터진 적 없습니다. 한 대 그냥 맞아 드린 거지.”
“그러니까 왜 맞고 다니느냔 말입니다.”
“제가 맞고 다니든 말든 무슨 상관이십니까.”
“왜 상관이 없습니까.”
“무슨 상관인데요.”
“잊었습니까? 백 형사는 내 거라는 거?”
―!
누가 들을까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강우에 설형이 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다행히 복도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얼굴 전체를 찌푸린 설형이 곧바로 따져 물었다.
“제가 왜 도 검사님 겁니까?!”
물론 목소리는 죽이고서. 물론 강우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태연히 대꾸했지만.
“스토커 잡히기 전까지는 내 전용이잖습니까.”
“소름끼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전용이라는 말 뒤에 경호원은 왜 뺍니까?”
“…….”
설형이 무슨 말을 해도 얄밉게 받아치던 강우가 이번에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묘한 표정으로 설형을 응시한다.
소름끼친다는 말은 좀 심했나. 그런 생각으로 쫄아 있던 그때 마주한 강우가 씨익, 하고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내 전용인 건 인정하는 거네요?”
“…….”
강우의 그 말을 듣고서야 설형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 위화감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그런 거―.”
“도검!”
뒤늦게 변명을 하려고 입을 열어 보지만 하필 그때 강우를 찾는 이가 있었으니. 특검팀의 또 다른 검사, 최창학 검사였다.
어떤 의미로는 이렇게 대화가 끊긴 것이 다행이다 싶기도 한 설형이었다. 하지만 강우는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죠.”
아니. 영영 안 해도 됩니다. 설형이 대답했다. 물론 속으로.
아쉬운 표정으로 뒤돌아서던 강우가 아, 하고 한마디 덧붙인다.
“그리고 그건 놔뒀다가 두고두고 발라요. 비싼 거니까.”
그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기껏 연고 하나 가지고 생색은. 벌써 저만치 멀어진 강우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투덜거리던 설형이 이내 기묘한 표정을 짓는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비싼 스위트룸에서 재워 주고도, 심지어 저를 위해서 CCTV 영상을 찾아 와 놓고도 하지 않던 생색을 고작 오천 원짜리 연고 하나에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여간 이상한 인간이라니까. 얼굴을 찌푸린 설형이 손에 들린 연고를 제 호주머니 속 깊이 집어넣었다.
도와줘서 고마웠다는 인사는 나중에 멈춰둔 이야기를 다시 하게 되면 그때 하기로 하고서. 물론 그 이야기를 다시 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았지만 어쨌든 설형은 그러기로 했다.
“여기 계셨네요.”
희뿌연 담배 연기를 내뿜던 설형이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재민이었다.
“길고양이, 밥도 주세요?”
“뭐. 몇 개 남은 캔이 있어서.”
좀 더 가까이 다가온 재민이 설형의 발치에 놓인 고양이용 참치캔을 발견하고 물었다. 사실 그곳은 어제 고양이를 묻어 준 곳이었지만 그걸 모르는 재민은 설형이 지나가는 길고양이를 위해서 캔을 놓아둔 것이라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굳이 그 생각을 정정할 필요는 없어 보여, 설형은 곧바로 화제를 전환했다.
“그래서, 할 말이 뭔데?”
“네?”
“나한테 할 말 있어서 나 찾았던 거 아니야?”
“아.”
그제야 자신이 온 목적을 떠올린 모양이다.
쯧. 속으로 혀를 찬 설형이 들고 있던 담배를 빨아들였다가 후, 하고 연기를 뿜어냈다. 그 모습을 멍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재민이 설형의 눈빛이 사나워지는 것을 눈치채고 급히 입을 열었다.
“첫 번째 피해자 한지석 씨 말이에요.”
까딱. 설형이 고개를 까딱였다. 멈추지 말고 계속 말해 보라는 의미였다.
“혹시, 백 형사님과 알던 사이, 일 수도 있나요?”
“무슨 헛소리야.”
“그렇죠?! 그럴 거 같긴 했어요.”
원래도 좀 모자란 녀석 같을 때가 있긴 했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그런 재민의 태도에 설형은 혀를 차는 대신 얼굴을 굳혔다.
“뭔데.”
“…….”
“뭐냐고, 한 형사.”
설형의 추궁에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재민이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그게, 그러니까 제가 조금 전에 네 번째 피해자 휴대폰 통화 목록을 보고 혹시나 싶어서 첫 번째 피해자 한지석 씨 휴대폰을 좀 확인해 봤거든요.”
두 번째와 세 번째 살인, 그러니까 완벽하게 세팅된 사체가 유기된 사건에서는 피해자의 휴대폰은 발견되지 않았다. 피해자들이 납치될 당시, 모두 휴대폰을 소지하고 있었음에도 사체에는 휴대폰이 없었다. 설형이 현장 주변에서 피해자의 소지품을 발견했을 때도 그곳에 휴대폰은 없었던 것으로 보면 범인이 의도적으로 감춘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증거물로 휴대폰이 존재하는 경우는 네 번째만이 아니었다. 바로 첫 번째 살인 사건. 첫 번째 살인에서 범인은 피해자의 물건 중 어떤 것도 손을 대지 않았고, 덕분에 피해자의 휴대폰은 사라지지 않고 증거물로 남아 있었다.
“왜, 통신사 통화 기록상으로는 통화가 된 경우만 나오고, 상대방이 전화를 걸었는데 못 받았거나 제가 걸었지만 상대가 받지 않은 기록 같은 건 확인되지 않잖아요. 단말기 통화 목록을 보기 전에는.”
아마도 조금 전 네 번째 피해자 휴대폰 단말기를 보고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단말기에서 뭐가 나왔는데.”
평소라면 대단한 것을 발견했으니 칭찬해 달라고 꼬리를 마구 흔들었을 재민이 이렇게 풀죽은 것을 보니 뭔가 심상치 않은 것이 나온 것이 분명했다. 괜찮으니 사실대로 말해 보라고 다음 말을 재촉하자 재민이 머뭇머뭇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사건 당일 통화 내역에, 백 형사님 번호가…….”
“…….”
순간 제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설형이라도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다.
“처음엔 한지석 쪽에서 건 줄 알았는데, 걸려온 거였어요. 부재중 통화 한 통.”
“…….”
즉, 설형이 전화를 걸었다는 말이다. 순간 머리를 망치로 세게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충격 받은 설형의 얼굴을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보고 있던 재민이 확인하듯 물었다.
“전혀, 아무것도 생각 안 나세요?”
“……안 나. 전혀.”
고개를 내젓자 재민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물어온다.
“어떡해요, 백 형사님?”
하지만 설형은 태연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새로운 증거가 나왔으면 보고를 해야지.”
“하지만―.”
낮에 강우가 찾아온 CCTV로 일단락되기는 했지만 설형에 대한 의심이 모두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조그만 꼬투리만 잡혀도 물어뜯을 기회만 노리고 있는 사람들인데, 또 한 번 이렇게 설형이 첫 번째 피해자와도 접촉한 적 있다는 증거가 나오게 되면 그땐 정말 설형이 범인으로 몰릴 것이 분명했다.
발만 동동 구르며 걱정하던 재민이 갑자기 뭔가 결심한 듯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이거, 아직 아무도 몰라요. 애초에 첫 번째 피해자 휴대폰에 관심을 두는 사람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거예요.”
“아무도 모르긴 왜 몰라. 너 알잖아. 나도 알고.”
“백 형사님.”
“임마. 형사가 사건 증거에 손댈 생각하는 순간부터 형사 인생 꼬이는 거야.”
“그렇지만―.”
“너 정년퇴직할 때까지 안 잘리고 붙어 있다가 경찰연금 받으며 편하게 사는 게 네 어머니 소원이셨다며. 어머니 유언 어기는 아들이 어딨어. 정신 차려.”
더 이상 대화는 없다는 듯 설형은 거의 끝까지 다 타들어간 담배꽁초를 바닥에 던지고, 발로 비벼껐다. 그리고 말했다.
“대신 한 가지만 부탁하자.”
“말씀만 하세요!”
다 죽어 가던 재민의 눈에 불이 들어왔다. 뭐든, 상관없었다. 휴대폰을 없애 달라고 하면 없애 줄 각오도 되어 있었다. 하지만 설형의 부탁은 참으로 소박했다.
“한 삼십 분만 있다가, 보고해 줘.”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말한 설형이 뒤늦게 뭔가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아, 한 가지만 더.”
“뭔데요?”
부탁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부탁에 기가 막혀서 입을 딱 벌리고 있던 재민이 다시 한 번 기대를 하고 물었다.
“김 형사가 두 번째 세 번째 피해자 이동경로 파악한 자료, 너한테도 있지? 그거 나한테 좀 보내 줘.”
물론 아직도 설형을 모르는 한재민 순경이었다.
“전화기 꺼 놓으셨는데요.”
수화기를 내려놓은 재민이 난처한 표정으로 보고했다. 홍 반장과 김 형사의 표정 역시 재민과 다르지 않았지만, 최 형사의 표정은 아주 득의양양했다.
“거봐, 내 뭐랬어. 내 촉이 틀린 적이 없다니까.”
“놀구 있네. 얼마 전 마포 절도범 사건 때 두 번이나 헛다리 짚으신 분이 누구시더라.”
“이 새끼가.”
곧바로 딴지를 거는 김 형사에게 최 형사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한 대 쳐 보라는 듯, 김 형사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턱을 치켜 올렸다. 금방이라도 주먹다짐을 할 듯한 분위기였지만 두 사람을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쓸 수 없을 만큼 합동 본부 안 분위기는 심각했다. 설마설마 했던 사람들도 상황이 이쯤 되니 최 형사가 했던 말들이 정말이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면 당장 수배 때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슬그머니 들어올렸던 주먹을 내린 최 형사가 방향을 바꿔 자신의 팀원들을 향해 동의를 구하듯 물었다. 대놓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지만 대부분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직 아무것도 확인된 게 없는데, 수배라뇨.”
재민이 말도 안 된다며 항의했지만 최 형사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또 다른 증거 나타나자마자 내빼 버린 거 보면 몰라? 이젠 더 이상은 단순히 우연이라고만 변명할 수 없겠다 싶으니까 그냥 도망쳐 버린 거지. 만약 정말 본인이 결백하다면 왜 갑자기 사라져서 연락이 안 되는 건데?”
“…….”
거기에 대해 물으면 재민도 답할 말이 없었다.
“전화기도 꺼 놨다며. 그럼 빼박이지. 수사 하루이틀 해?”
“…….”
평소 설형을 편애하던 홍 반장조차 아무런 말이 없자, 최 형사는 더 기고만장해져서 목소리를 높였다.
“당장 긴급 수배 때리고, 도주로부터 차단해야 합니다. 분명 서울을 벗어나려고 할 테니까요.”
“저도 최 형사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 형사가 진짜 범인이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든 지금 밝혀진 부분에 대해서 백 형사의 해명이 필요한 상황 아닙니까.”
“백 형사는 무슨. 도주한 용의자한테 무슨 계급장까지 챙기고 앉았어.”
“지가 범인 좀 잘 잡는다고 위아래 없이 뻣뻣하게 굴 때부터 재수없다 했어. 저러다 언젠간 큰 사고 한 번 치겠다 싶더니, 어휴.”
“그래서 피는 못 속인다는 거지.”
한 사람이 두둔하고 나서자 여기저기서 한마디씩 하고 나선다. 말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보던 재민이 홍 반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두둔이라도 해 주시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과 달리 홍 반장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다.
“안 그래도 경찰이 범인에 대해 쉬쉬하고 있다, 그 이유가 경찰 쪽 관계자가 공범이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파다한데, 혹시라도 이게 공식 발표 전에 새어나가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최 형사의 언급에 형사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연일 자극적인 살인 사건에 대해 떠들어 대던 언론은 거기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지자 정부에 대한 무능력으로 방향을 틀었다. 세 번째 살인이 발생할 때까지 연쇄살인이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던 경찰의 무지와 특검까지 조직한 이후에도 범인의 윤곽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 무능력함, 그리고 또다시 발생한 네 번째 살인 사건까지. 언론에서는 연일 정부와 검찰, 경찰을 안주삼아 마구 씹어대고 있었다.
안 그래도 경찰에 대한 신뢰가 거의 바닥으로 떨어진 상황에서 최 형사 말대로 이 일이 새어나가기라도 하게 되면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물론 현역 경찰이, 그것도 사건 수사팀 소속이었던 형사가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도 큰 문제지만, 그래도 경찰이 먼저 이런 사실을 밝히는 쪽이 그나마 나았다. 정보가 새어나가 범인이 경찰이라서 조직적으로 은폐하려다 딱 걸린 것이라고 하는 오해를 받는 것보다는 훨씬.
“언론에서 냄새를 맡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용의자 발표하고, 수배 내려야 합니다. 검사님.”
그렇게 말하는 최 형사의 시선이 강우에게 향해 있었다. 형사들의 시선도 도강우를 향한다.
슥.
그때까지 한 발 물러서서 팔짱을 낀 자세로 책상 가장자리에 살짝 기대앉아 있던 강우가 몸을 바로 했다. 그리고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하죠, 수배.”
―!
강우의 선언에 재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강우가 이렇게 바로 허락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않았다. 당연히 이번에도 설형의 편에 서 줄 거라고 생각했던 터라 배신감마저 드는 재민이었다. 벙찐 얼굴로 있던 재민이 뒤늦게 이의를 제기한다.
“잠시만―.”
“그만둬라, 한 형사.”
하지만 그런 재민을 저지하고 나온 사람은 최 형사가 아닌 홍 반장이었다. 그런 홍 반장의 태도에 당황한 것은 자신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김 형사도 얼떨떨한 얼굴로 홍 반장을 보고 있었다. 재민이 포기하지 않고 한 번 더 반발했다.
“하지만, 반장님!”
“검사님이 하라면 하는 거야. 군소리 말고.”
물론 소용은 없었지만.
좀처럼 볼 수 없는 홍 반장의 심각한 표정에 재민도 더는 반항하지 못한다.
“지금 바로 하실 겁니까?”
가타부타 다른 말없이 묻는 홍 반장에게 강우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대답했다.
“영장 준비되는 대로 하죠. 늦어도 한 시간 안에는 준비될 겁니다. 공식 기자회견은, 선배님께서 하실 거죠?”
“어? 어. 뭐, 그러지.”
매스컴에 얼굴 비추는 걸 좋아하는 최 검사가 마다할 리 없었다.
“수배 들어가면 곧바로 도주로 차단도 해야 하니까, 준비는 최 형사님 팀에서 진행하시죠.”
“네, 알겠습니다.”
걱정 말라는 듯 의기양양하게 대답하는 최 형사를 흘끔 무심한 눈으로 본 강우가 코트를 집어 들었다.
“그럼, 전 검찰청에 들어갔다 오죠.”
그리고 곧바로 밖으로 걸어 나갔다.
“뭐해. 메시지 안 남기고.”
단숨에 사라지는 강우를 잔뜩 아쉬운 얼굴로 보고 있던 그때였다. 언제 왔는지 바로 옆으로 다가온 홍 반장이 재민의 귀에 나직이 속삭였다.
“네?”
멍청하게 되묻는 재민에게 홍 반장이 얼굴을 확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했다.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9시가 마지노선이라고. 그 시간 지나면 어차피 발 묶이니까 괜한 헛수고하지 말고 그냥 자수하라고 해.”
“…….”
그제야 홍 반장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약간의 시간을 벌어 주었다는 걸 깨달았다.
“반장니임~!”
난 그것도 모르고 반장님이 백 형사님 버린 줄 알았잖아요. 금방이라도 저를 확 끌어안아 버릴 것 같은 얼굴로 이름을 부르는 재민에게 홍 반장이 얼굴을 찌푸리며 뒷걸음질쳤다. 그리고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덧붙였다.
“징그러운 짓 하지 말고 메시지나 남기라고.”
시계 바늘이 가리키고 있는 현재 시간, 9시 8분.
하지만 여전히 설형은 연락 두절, 행방불명 상태.
음소거를 해 둔 TV 화면에 풍채 좋은 최창학 검사의 모습이 보였다. 잠시 후 최창학 검사 얼굴 옆으로 설형의 얼굴 사진이 놓였다.
안 그래도 눈에 확 들어오는 얼굴이 화면발, 조명발까지 받으니 집중이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보니 더 확실해졌다. 확실히 형사하기에는 아까운 얼굴이었다. 덕분에 괜히 옆에 서 있던 최 검사는 의문의 1패를 당했다.
아무 말 없이 화면을 보던 김 형사가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실내 금연이라는 지적을 하는 대신 재민이 창문을 열었다.
“어?”
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제법 빗줄기가 굵었다. 불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문 채 창문 밖을 내다보던 김 형사가 나직이 중얼거린다.
“씨발, 좆같구만.”
대꾸는 하지 않았지만 재민도 김 형사와 거의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할 말이 많았지만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쏴아아아아.
강력 3팀의 기분을 대변하듯 밤하늘에서 굵은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알겠습니다. 새로운 소식이 들어오면 바로 연락주세요.”
통화를 끝낸 강우가 탁, 하고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간이 바bar에서 얼음도 없이 헤네시hennessy만 가득 따라 창가로 걸음을 옮긴다. 커튼을 걷자 시커먼 바다가 펼쳐졌다.
빗줄기는 조금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내리는 비가 창밖 풍경을 흐릿하게 만들어 서울 시내가 꼭 검은 바다처럼 보였다.
멍청이처럼 비를 맞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무심코 그런 생각을 했다가 곧 멈칫했다. 전국적으로 수배자가 된 사람을 비 맞고 다닐까 봐 걱정하고 있는 스스로가 기가 막혀서. 들고 있던 잔을 단숨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40도가 넘는 독한 술이 물같이 넘어간다. 톡톡, 빈 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다 아무래도 한 잔 더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돌렸을 때였다.
딩동.
차임벨이 울렸다.
최 서기관인가. 서류를 부탁해 놓은 터라 무심코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긴 강우가 확인 없이 문을 열었다. 어차피 보안이 철저한 VIP층이라 미리 말해 둔 방문객 말고는 이곳에 올라올 수는 없었다.
―!
하지만 그런 강우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곳에 서 있는 이는 최 서기관이 아니었다.
“돌려드린다는 걸 깜빡해서요.”
설형이 usb를 내밀며 말했다. 하지만 강우에게는 그것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강우의 눈에 보이는 건 핏기를 잃은 창백한 얼굴과 물속에 빠졌다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홀딱 젖은 검은 머리칼뿐이었다. 얼마나 비를 맞았는지 usb를 내밀고 있는 소매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탁.
얼굴을 확 찌푸린 강우가 설형이 내밀고 있던 팔을 붙잡아 그대로 문안으로 당겼다. 허무할 정도로 설형의 몸이 쉽게 끌려왔다. 설형을 끌어안듯 안으로 밀어넣고 문을 닫기 전 주변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정신입니까?!”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선 강우가 참았던 고함을 내질렀다. 강우가 소리치는 건 처음 보았다. 그래서 그런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누가 보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온 겁니까. 혹시 마주친 사람은 없습니까?”
“…….”
질문이 쏟아졌지만 설형은 대답이 없었다.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가만히 강우를 응시할 뿐이다.
“백 형―.”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는 듯 설형의 이름을 부르던 강우가 순간 뭔가를 발견했다.
뚝뚝뚝, 소리도 없이 떨어지는 물방울.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설형이 서 있는 카페트 주위가 벌써 짙은 색으로 변해 있었다. 게다가 쫄딱 젖은 몸으로 차가운 밖에 서 있다가 갑자기 따뜻한 곳으로 들어온 탓에 몸에 오한이 드는지 턱까지 덜덜 떨고 있었다.
“하, 씨발.”
낮게 중얼거린 강우가 설형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뭐하는―.”
순순히 끌려오던 설형이 뒤늦게 항의했지만 이미 늦었다.
쏴아아――.
곧바로 뜨거운 물이 설형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언 몸을 녹이는 데는 이게 가장 빠른 방법입니다.”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서던 설형이 그대로 멈췄다. 강우의 말대로 감각이 느껴지지 않던 몸에 급속도로 피가 도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제야 설형은 자신의 몸이 얼어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하얗게 김이 올라오는 뜨거운 물줄기를 맞으면서도 전혀 뜨겁지가 않은 것을 보니 확실했다. 아예 고개를 들어 물을 맞던 설형이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몇 번을 반복한다. 정신이 좀 돌아오자 그제야 강우의 옷도 다 젖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에 젖은 셔츠 아래로 근사한 근육이 드러났다.
“검사님, 옷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설형에 강우가 기가 찬다는 듯 한쪽 입꼬리만 살짝 올려 말했다.
“정신이 좀 듭니까?”
“원래도 정신은 멀쩡했습니다만.”
“제정신인 사람이 수배 받고 서울 시내 한복판을 이렇게 돌아다닙니까?”
“…….”
그렇게 물으면 할 말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침묵을 지키고 있자 강우가 샤워기를 놓고 일어섰다.
“얘기는 나가서 하죠. 갈아입을 옷 갖다줄 테니까 마저 씻고 나와요.”
“…….”
대답도 없이 머뭇거리고 있는 설형에게 강우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묻는다.
“왜요. 혼자 못 씻겠으면 마저 씻겨 줄까요?”
“혼자 씻을 수 있습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설형이 딱 잘라 말하자 피식, 하고 웃은 강우가 수건으로 젖은 손을 닦으며 밖으로 나갔다.
탁.
욕실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설형이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다행히 지금 당장 수사팀을 부르지는 않을 모양이다. 처음 문을 열고 나온 도강우가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보고만 있길래 그대로 잡혀가는 게 아닐까 걱정했었다.
사실 씻고 나가면 문 앞에 형사들이 대기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자신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은 편안해졌다. 잔뜩 젖은 셔츠와 바지를 벗고 샤워기 아래에 선 설형이 꼭지를 틀었다. 뜨거운 물이 쏟아져 내렸다.
끼익.
설형이 문을 열고 나왔다. 다행히 문 앞엔 아무도 없었다.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간이 바bar에 서 있는 강우가 보였다. 강우를 찾은 것과 거의 동시에 강우가 뒤돌아섰다. 돌아선 강우의 손에는 갈색 액체를 담은 술잔이 들려 있었다.
“보기 좋네요.”
잔을 든 채 잠시 설형을 지긋이 응시하던 강우가 솔직한 감상을 털어놓았다. 설형의 얼굴이 확, 찌푸려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일부러 그런 거죠?”
험악한 얼굴로 설형이 물었다. 하지만 강우는 태연했다.
“그래야 도망을 못 갈 테니까.”
그런 의도였다면 성공이었다. 천하의 설형이라도 셔츠만 입은 채로 나가 돌아다니지는 못할 테니까. 강우가 갈아입으라고 가져다준 것은 본인의 것으로 보이는 흰 와이셔츠. 제가 강우보다 키는 좀 작지만 그래도 같은 남자의 옷이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그나마 그 덕분에 엉덩이와 중요 부위를 가릴 수 있었지만. 형사들을 밖에 세워 두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강우가 가져다놓은 것을 보고 기가 막혔지만 설형은 당당하게 셔츠만 입고 밖으로 나왔다. 제가 쭈뼛거리며 부끄러워하면 강우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인데 설형은 그렇게 해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괜한 패기였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물론 겉으로는 전혀 그런 내색하지 않고 반나체로도 당당하게 서 있었지만.
“약간의 즐거움은 덤이지만.”
나직이 중얼거리는 강우의 시선은 설형의 아랫도리를 향해 있었다. 하지만 곧 설형의 사나운 눈빛에 시선을 거두고 다가와 들고 있던 잔을 내민다.
“마셔둬요. 몸이 뜨끈해질 테니까.”
그 잔이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목덜미를 물어뜯기라도 하듯―아마도 그것을 들고 있는 맹수에 대한 경계심이었겠지만―경계의 눈빛을 하고 있는 설형에게 강우가 안심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설형이 천천히 잔을 받았다. 마치 털과 꼬리를 잔뜩 부풀려 저보다 몇 배는 큰 적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위협하는 조그만 고양이를 보는 것 같았다.
“이걸 누구 코에 붙입니까.”
다소 건방진 고양이였지만. 잔뜩 경계할 때는 언제고 또 그걸 따지고 앉았다.
“그것만 마셔요. 술에 취하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이거 가지고는 안 취합니다만.”
투덜대기는 했지만 결국 설형도 조용히―표정은 불만스러웠지만―갈색 액체를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래서. 대체 뭘 하러 갔던 겁니까. 전화기까지 다 꺼 놓고.”
곧바로 본격적인 질문이 들어왔다. 손등으로 입술을 닦은 설형이 잔을 내려놓았다. 탁, 하고 고급 테이블에 유리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이미 범인이라고 확신해서 수배까지 내리신 거 아닙니까?”
“물론 그랬죠.”
“…….”
“그래도 그 수배를 받은 용의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이렇게 나한테 온 건 뭔가 억울한 게 있어서 도와달라고 부탁하러 온 거 아닙니까?”
“아니면 진짜 연쇄살인범이라 도 검사님을 죽이러 온 걸 수도 있죠.”
피식. 도발하듯 반박하는 설형에 강우가 낮게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자신 있으면, 한 번 해 보든지.”
“…….”
오히려 기대된다는 듯 입가에 옅은 미소까지 띠고 있는 강우를 말없이 응시하고 있던 설형이 하아, 하고 참았던 숨을 내쉰다.
만약 강우가 절대 범인일 리 없다고 무조건 저를 믿는다고 했다면 오히려 설형은 그걸 더 믿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렇게 나오는 쪽이 더 나았다. 그래야 자신도 부담 없이 진실을 털어놓을 수 있을 테니까. 아마도 모든 사실을 알았을 때 몇 년간 함께 했던 팀 동료보다 빌어먹을 도강우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던 건 바로 도강우가 이런 사람이란 걸 알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더 이상 의미 없는 말장난은 관두죠.”
항복이라는 듯 설형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강우도 말없이 팔짱을 끼는 것으로 동의의 의사를 표시했다.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던 건 꼭 확인할 게 있어서였습니다. 그리고 확인해 본 결과 한 가지가 확실해졌습니다.”
잠시 숨을 삼킨 설형이 뒤를 이었다.
“제가 범인인 것 같습니다.”
“…….”
설형이 고백을 들은 남자는 놀라지도 않았다. 그저 난감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찌푸렸을 뿐이다. 강우와 마주한 눈동자는 당당했지만 설형의 손끝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다행히 침묵은 길지 않았다. 낮은 한숨과 함께 강우가 입을 열었다.
“왜 그런 결론이 났는지 말해 봐요. 어디 들어나 보죠.”
심호흡을 한 설형이 설명을 시작했다.
“두 번째 세 번째 피해자 모두 저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첫 번째 피해자의 휴대폰에 제 번호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혹시나 싶어서 두 사람이 출입했던 가게를 확인해 봤습니다. 그 중에 낯익은 가게가 하나씩 있더군요.”
“그것만으로는―.”
“바텐더도 제 얼굴을 알아보더군요. 분명 제가 가 본 적 있는 장소였습니다.”
“…….”
설형의 말을 듣고 있던 강우는 내내 느끼던 이상한 기시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래서 본인이 범인인 것. 같다?”
범인이다. 가 아니라 분명 인 것 같다. 라는 추측성 어미를 썼다. 게다가 다른 피해자와의 접점 여부도 확인을 해야만 알 수 있는 거라니. 아무리 무작위로 살인을 저지르는 사이코패스라고 해도 이건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하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네.”
그럼에도 아무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설형에 강우는 이 그림에 퍼즐 하나가, 그것도 가장 중요한 조각이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뭔가 빼먹은 것이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백 형사가 사람을 넷이나 죽이고도 그걸 전혀 기억 못하는 이유, 같은 거?”
“…….”
설형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번졌다. 아마도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잠시 뭔가를 고민하던 설형도 어쩔 수 없음을 깨달은 듯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기억을 못하니까요.”
까딱. 계속 말하라는 듯 강우가 턱짓을 했다.
“몇 년 전 큰 사건 하나를 해결하고 난 날이었는데, 술을 너무 마셨는지 머리가 이상해졌어요. 이상하게 온몸에 열이 오르고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고. 미친놈처럼 누구든 나를 엉망으로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떤 남자가 접근했어요. 그게 처음으로 남자와 섹스한 날입니다.”
“그게 한지석이었습니까?”
“상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어요. 그냥 누군가 필요했고, 엉망으로 박히고 신음했다는 것만 기억날 뿐.”
“그럼 어떻게 확신하는 겁니까.”
“사건이 일어난 날짜요. 그때 사건을 해결했던 날짜를 확인해 봤는데, 그날이 바로 피해자가 살해당한 날이었어요.”
“그래서 본인이 잠자리를 했던 남자들을 죽였다?”
“늘 생각했어요. 그날의 일들을 지워 버리고 싶다. 같은 남자에게 깔려서 신음하는 게 싫고 혐오스러우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으니까. 어쩌면 그 무의식이 밖으로 나타난 걸 수도 있죠. 더러운 피는 못 속이는 거니까.”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마구 쏟아붓는 설형은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사실 제정신이라면 스스로 자신이 범인일 거라고 생각할 리가 없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범죄 수사를 해 온, 그것도 누구보다 실력이 좋은 백설형이 이렇게 막무가내식으로 사건을 바라볼 리가 없었다.
“지금도 어쩌면 그래서 도 검사님을 찾아온 건지도 모르죠. 무의식이 도 검사님도 죽여 증거를 없애 버려야 한다고 속삭여서, 그래서―.”
성큼 다가선 강우가 설형의 어깨를 붙잡았다. 버둥거리는 몸을 꽉 붙들고 소리쳤다.
“정신 차려. 백설형!”
“…….”
흠칫. 붙잡은 어깨가 떨렸다. 힘을 주고 버티던 팔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첫 피해자는 그랬다고 치죠. 그럼 두 번째 세 번째는요. 두 피해자의 사체가 지능적으로 유기되었다는 거 기억 안 납니까? 기억에도 없는 공범이 있을 수가 없다고 보는데, 난.”
“……하지만.”
“그리고 네 번째 피해자는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그날 나와 자지도 않았는데 기억을 잃었다는 겁니까?”
“…….”
주르륵. 순간 팔 안에 있던 몸이 무너지는 것을 느낀 강우가 급히 설형의 몸을 붙잡았다. 멍하니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를 향해 강우가 기가 막힌다는 듯 말을 이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말도 안 되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까? 실력 좋다더니, 다 사기였나 보네요.”
“…….”
“그리고 방금 말한 그건 술 때문에 머리가 이상해진 게 아니라, 발정이 난 겁니다.”
“발-!”
내내 멍한 표정으로 있던 설형의 얼굴에 단숨에 표정이 떠올랐다. 물론 기가 막혀서 얼굴을 잔뜩 찌푸린 표정이었지만 조금 전 세상을 다 포기한 듯한 표정보다는 지금의 표정이 훨씬 나았다.
“너무 참으니까 그런 것 아닙니까. 원래 남자는 욕구 불만이 너무 심하면 머리가 어떻게 되는 동물입니다. 그것도 몰랐습니까?”
“대체, 누가 욕구 불만이라는 겁니까?”
기가 막혀 입을 딱 벌리고 있던 설형이 참지 못하고 반박했다. 물론 돌아온 것은 강우의 코웃음이었다.
“사건이 해결되고 나니 뇌에서 뿜어내던 아드레날린을 더 이상 풀 곳이 없어진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몸이 달아오르고 뇌는 녹는 것 같죠. 운동선수들이 시합 후에 거친 섹스를 찾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보면 됩니다. 잔뜩 흥분한 몸을 진정시켜 줄 수 있는 건 질펀한 섹스밖에는 없으니까.”
“…….”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반박할 줄 알았던 설형이 이번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어느 정도 강우의 말이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제 안에 흐르는 범죄자의 피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아드레날린 탓이란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니 설형은 가지고 있던 두려움이 조금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다 눈앞의 남자 덕분이었다.
“이제 좀 제정신이 돌아옵니까?”
설형의 눈빛이 확연히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강우가 설형의 어깨를 놓아주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안 그러면 지금 이런 상황이고 뭐고 다 상관없이 그대로 덮쳐 버리게 될 것 같아서.
“그럼 이제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강우가 물었다.
“뭐, 제게 이미 다른 선택권은 없는 것 같은데요.”
어깨를 으쓱인 설형이 다소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실 설형이 사라졌던 것도 제 눈으로 확인을 해야 했기 때문이지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이대로 범인으로 몰릴 가능성은 높지만 그래도 지금은 제가 범인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으니 상관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설형과 달리 강우는 상관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선택권을 내가 주면요.”
“…….”
설형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내가 숨겨 주죠. 자랑 같지만 내가 사람 하나 숨겨 줄 능력 정도는 되거든.”
“…….”
그냥 사람 하나가 아니지 않느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걸 모르고 하는 말은 아닐 테니까.
“못 믿겠습니까?”
“아뇨.”
아무 말이 없는 설형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곧바로 고개를 내저은 설형이 덧붙였다.
“그냥 해 준다는 건 아닐 테니, 그 대가로 뭘 바랄지 가늠해 보는 중입니다.”
“별건 아닙니다.”
“검사님 입장에서는 별거 아닌 것도 저같이 보통 사람들 입장에서는 별거일 수 있어서요. 전 모아 놓은 돈도 없습니다.”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돈이 없으면 다른 걸로 갚으시든지요.”
“…….”
뭐냐고 물을 만큼 순진하지는 않았다. 설형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다른 것을 물었다.
“고작 그걸로 되시겠습니까?”
“그거야 백 형사 하기 나름이겠죠.”
강우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입술에 보드랍고 따뜻한 것이 닿았다. 설형이 호텔방 앞에 서 있었을 때도 놀라지 않았던 강우가 가벼운 키스에 눈이 커졌다. 그런 강우를 보며 피식, 하고 웃은 설형이 물었다.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장난합니까?”
험악한 표정으로 나직이 중얼거리는 강우에 설형이 당황했다. 혹시 이런 뜻이 아니었던 건가. 뒤늦게 깨달은 설형이 반사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서려던 순간 턱, 하고 단단한 손이 팔목을 붙잡아 왔다. 고개를 들자 새파랗게 일렁이는 눈이 으르렁거렸다.
“할 거면 제대로 해.”
휙, 하고 몸이 앞으로 당겨진다고 생각한 순간 입술이 삼켜졌다.
거친 키스였다. 이대로 통째로 삼켜지는 게 아닐까 싶은 키스. 설형은 눈을 질끈 감았다.
혀가 거침없이 들어왔다. 뜨거운 살덩이로 입안이 가득 차 올랐다. 남의 살덩이로 입안이 가득 차는 기분은 설명하기 힘든 기분을 느끼게 했다. 굳이 설명하자면 몸 안 전체가 뜨거운 액체로 가득 채워지는 기분이랄까. 그러는 사이에 강우의 혀는 설형의 온 입안을 헤집었다.
설형의 갈라진 몸 안을 헤집듯 한 곳도 빠지지 않고 문지르고 긁어내렸다. 입안이 젖어들고 축축해졌다. 물론 입안은 원래 젖고, 축축한 곳이지만 강우의 혀가 지나갈 때마다 그곳이 더 축축해지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응, 응. 강우를 밀어내려던 손이 어느 새 강우의 팔에 매달리고 있었다. 설형의 턱을 붙잡은 채 강우가 계속 키스했다. 몇 번이고 각도를 바꿔서. 몇 번이나.
읏, 으읏.
맞닿은 채로 설형의 혀를 자신의 입안으로 쭉 빨아 당겼다. 혀뿌리가 뽑혀나갈 것처럼 강하게 빨아 당겨졌다. 반사적으로 잡아 빼려고 하자 콱, 하고 이로 물었다. 으으읏. 설형이 목으로 울었다.
거친 키스가 계속되었다. 혀가 들어오는 것은 입안인데 마치 온몸의 구멍을 다 유린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벌리고, 문지르고, 그리고 빠르게 들락인다.
모든 감각이 곤두섰다.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허벅지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래도 주저앉지 않게 다리에 힘을 꽉 주고 버텼다.
숨이 찼다. 삼킬 새도 없어 입안에 침이 잔뜩 고였다. 각도를 틀 때마다, 혀를 집어넣었다 뺄 때마다 벌어진 입가로 고인 침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런 것은 느껴지지도 않을 만큼 설형은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철컥.
반쯤 나갔던 정신을 단숨에 끌어올리는 경쾌한 파열음이 들려온 것은. 눈을 뜬 설형이 강우를 밀치자 강우도 순순히 입술을 떼고 물러섰다.
“이게, 뭐하는―.”
이미 짐작은 했지만 눈으로 직접 제 손목을 감고 있는 은색 팔찌를 확인하니 더 기가 막혔다. 하지만 정작 남의 팔목에 수갑을 채운 남자는 태연했다.
“또 도망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씽긋 웃는 남자를 노려보며 설형이 물었다.
“숨겨 주는 게 아니라 감금이었습니까?”
“어차피 그게 그거 아닙니까?”
“전혀 아닌데요.”
“그럼 숨겨 주는 대신 받을 대가, 에 포함된다고 치죠. 또 먹튀당하는 건 사양이라.”
마지막은 강우의 진심이었다. 눈앞의 남자가 잠시 눈을 뗀 사이에 사라지는 건 두 번이면 족했다. 그런 강우를 노려보던 설형이 빛의 속도로 손을 움직였다.
철컥.
다시 한 번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저도 저 혼자만 당하는 건 질색이라.”
“하.”
낮게 소리 내어 웃은 강우가 수갑이 채워진 팔을 들어올렸다. 당연히 설형의 팔도 함께 딸려 올라간다. 기가 막혀하는 강우에게 설형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불편하면 열쇠 가져오시죠.”
“열쇠를 왜 나한테 찾습니까?”
순간 드는 불길한 예감. 미간을 살풋 찌푸린 설형이 급히 물었다.
“왜 찾다니―. 설마 이거 내 겁니까?”
“그럼 이 수갑이 어디서 났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리고 언제나 그 예감은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다.
“워낙 취향이 특이하시니 하나쯤 구비해 놓으신 줄 알았죠!”
“그런 취향 같은 건 없습니다만, 그리 나쁘진 않네요.”
설형의 얼굴이 확 찌푸려졌다.
“지금 농담이 나오십니까?! 열쇠는 제 책상 서랍에 있단 말입니다!”
“농담 아닌데.”
웃고 있던 강우가 단숨에 웃음기를 지웠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설형이 주춤주춤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둘은 손목으로 묶인 사이였다. 도로 끌려온 설형의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강우가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그런데 백 형사야말로 이런 취향이었는지 몰랐네요. 아프고 괴로워야 흥분되는 취향인 줄만 알았는데.”
“누가 그런 취향이라는―.”
항의하는 설형의 입을 꾹 눌렀다 뗀 강우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대체 그런 짓은 왜 하는 건가 싶었는데, 확실히 평소보다 훨씬 흥분되긴 하네요.”
괜한 짓을 했구나. 그런 후회는 이미 늦은 일이었다.
키스가 쏟아졌다.
눈꺼풀, 코, 그리고 입술. 마치 연인에게 하는 듯한 키스의 비가 쏟아졌다. 눈을 감은 채 쏟아지는 비를 맞고 있던 설형이 헐떡이며 말했다.
“그런, 건, 됐으니까.”
그 짧은 단어를 말하는 데도 숨이 턱턱 끊어졌다. 겨우 단어를 내뱉은 설형에게 강우가 무심히 물었다.
“뭐가 됐다는 겁니까? 위? 아니면 아래?”
설형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입술로는 다정하게 키스를 퍼부으면서도 강우의 손가락은 거칠게 아랫구멍을 쑤시고 있었다. 미칠 것 같은데, 그게 키스 때문인지 아래를 쑤시는 손가락 때문인지 설형도 알 수가 없었다.
“아랫입?”
“읏……!”
그렇게 물으면서도 강우가 손톱으로 내벽을 긁었다. 그랬다가 뭉퉁한 손가락 끝으로 빙글빙글 돌린다.
아. 아. 아. 아래를 빙글빙글 돌리는 것뿐인데 마치 그 손가락이 뇌까지 올라와 제 머릿속도 마구 휘젓는 것만 같았다. 눈을 꾹 감고 허리만 떨고 있으려니 의외로 이번엔 강우가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원한다면―.”
놀리는 것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로 그만두겠다는 듯 손가락을 물리는 강우에 설형은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조였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차라리 다른 거면 발뺌이라도 해 보겠는데 손가락을 넣고 있는 강우가 자신보다 더 잘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설형의 예상을 확인해 주듯 씨익, 하고 말려올라간 강우의 입꼬리가 가늘게 뜬 눈동자 안으로 박혀 들어왔다.
미치게 매력적인 얼굴. 순간적으로 그렇게 생각해 놓고 기가 막혀서 허탈하게 웃었다.
미친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상황에, 저를 감금까지 한 상대가 짓는 미소 한 번에 이렇게 될 대로 되라는 기분이 돼 버릴 리는 없을 테니까. 그래. 미친 게 틀림없었다.
“조르는 겁니까?”
“누, 누가, 졸랐다는 겁니까?”
일단은 발뺌해 보는 설형이었다. 물론 곧바로 후회했지만.
“졸랐잖습니까. 이 아랫입으로. 귀엽게. 꽉.”
“귀―!”
설형의 얼굴이 말 그대로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서른 넘은 사내에게 귀엽다니.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다는 말이면 또 몰라도. 어떻게 술도 안 먹고 저런 말을 태연히 내뱉을 수가 있나 싶었다.
“그런 수작은 여자들한테나 하시죠. 저한텐 안 먹힙니다.”
“그렇습니까?”
단 한 번도 여자를 보고 귀엽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강우였지만 강우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역시나 여자들에게 하던 습관이 무의식중에 나온 거였다. 여자 취급을 당한 것이라는 걸 확인한 설형의 얼굴이 더 일그러진다.
귀엽긴. 일그러지는 설형의 표정을 보며 강우는 생각했다. 물론 이번엔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설형이 저런 화난 표정을 짓게 만드는 게 재밌긴 하지만 너무 지나쳐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던 것. 물론 설형이 강우의 머릿속을 읽을 수 있었다면 애당초 지금 분위기 같은 게 있기나 하냐고 기가 막혀 했겠지만 어쨌든.
“……읏.”
강우가 쑥 손가락을 잡아뺐다. 달라붙어 있던 내장이 딸려나가는 느낌에 설형이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엉덩이가 한 번 더 조였다. 반사적인 움직임이었다. 다행히 이번엔 조금 전처럼 낯부끄러운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걱정 말아요. 다른 걸 넣어 줄 테니까. 이것만으로는 만족 못하는 구멍이잖습니까.”
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래도 차라리 귀엽다는 말보다는 수치플이 더 낫다 싶었다. 물론 낫다는 것일 뿐 그게 좋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설형이 제 손을 당겼다. 수갑이 팽팽하게 당겨지는가 싶더니 이내 강우의 몸이 기울어졌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강우가 기울여 준 것이라고 해야겠지만.
가까워진 잘생긴 얼굴을 향해 설형이 명령했다.
“알면, 제발 그 입 좀 닥치고, 할 일이나 하시죠.”
피식. 강우가 웃었다.
그래. 이게 백설형이지. 곧 죽어도, 심지어 제 아래 깔려 있으면서도 절대 겁먹는 법이 없는 얼음공주님. 다만 겁이 없다 못해 간이 배 밖으로 나와 함부로 도발까지 하는 깜찍한 공주님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랄까.
본인이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고나 그러는 것인지. 강우가 쯧쯧, 혀를 찼다. 그러더니 이내 설형의 손을 잡아당겨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속삭인다.
“명령하신 대로.”
말투는 마치 공주님의 명령을 받잡는 기사처럼 정중했지만 안타깝게도 강우는 그런 신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성을 침략해서 공주를 약탈하는 악당에 가까웠다.
강우가 무릎으로 설형의 다리 사이를 벌렸다. 무의식적으로 설형의 무릎이 오므라들었지만 강우가 한 발 더 빨랐다. 허벅지 안으로 허리를 끼워넣었다.
“응―.”
강우가 허리를 바싹 위로 올려붙였다. 꾹꾹, 데일 듯이 뜨겁고 딱딱한 것이 사타구니를 짓이기듯 눌러 왔다.
응응. 그때마다 설형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났다. 아직 삽입은커녕 그저 앞을 문지르는 것뿐인데도 눈앞이 아득해졌다. 꽉 감긴 눈꺼풀이 파르르, 경련했다.
슥슥. 허리를 움직여 앞섶을 문지르던 강우가 허리를 조금 뒤로 물리더니 그 사이로 다시 한 손을 쑥, 집어넣는다. 깊숙한 아래로 들어온 손이 푹, 하고 구멍에 엄지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짧지만 굵은 엄지가 끝까지 들어오는데도 뻑뻑한 느낌만 조금 들었을 뿐 아프지도 않았다.
빙글빙글 돌려 뺐다가 다시 끝까지 쑤시기를 반복했다. 찌꺽찌꺽, 몇 번 쑤시지 않았는데도 젖은 소리가 났다. 이번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지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만두라거나, 싫다거나,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마치 자신의 눈만 가리면 아무도 자신을 못 볼 거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초식동물처럼.
하여간 귀엽다니까. 무심하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손은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으응….”
설형이 저도 모르게 허리를 들썩였다. 더 들어올 듯 들어올 듯하면서도 더 안쪽으로는 들어오지 않는 손가락에 감질맛이 났다. 설형이 눈을 떴다. 애원하듯 올려다보는 눈밑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강우는 설형이 원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더 깊이, 비벼 줬으면 좋겠습니까?”
“…….”
쌕쌕, 대답을 하려고 벌어진 입에서 밭은 숨이 흩어졌다. 제대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물기로 맨질맨질한 눈동자가 말하는 것은 분명했다. 이번에는 강우도 설형이 대답을 할 때까지 애태우지 않고 엄지손가락을 거칠게 쑥, 뺐다.
“힉―.”
사실 강우 역시 대답을 기다릴 여유가 없다는 말이 맞았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손가락을 뺀 강우가 터질 것 같은 제 것을 잡았다. 슥슥, 마른 손바닥으로 몇 번 문지르자 핏줄이 도드라졌다. 강우의 시선은 눈밑을 발갛게 물들인 채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설형에게 향해 있었다.
씨발. 강우가 속으로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다.
욕이 나올 만큼 야해빠진 얼굴. 정작 설형은 자신이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전혀 자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특별한 자극제 같은 게 필요가 없었다. 이 얼굴만으로도 정말 백 번은 뺄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자 벗은 것만 봐도 발딱발딱 세우는 고딩도 아니고. 스스로 생각해도 기가 막혔다.
“왜……."
갑자기 움직임이 없는 강우가 이상했던 설형이 가늘게 뜨고 있던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안을 쑤시던 자극이 없어져 숨통이 좀 트였던 거지만 숨은 여전히 헐떡이고 있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잠시였다.
강우의 초점이 돌아왔다. 아니, 이걸 돌아왔다고 해야 하나. 초점은 돌아왔는데 핀트는 나간 것 같은 눈동자. 그것을 알아차린 설형이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렸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강우가 설형의 배를 꾹 눌렀다. 마치 육식동물이 붙잡은 먹잇감을 발로 누르듯.
철컹. 동시에 강우의 손에 감겨 있던 수갑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정말 철창에 갇혀 있는 육식동물이 움직일 때 나는 소리처럼 위협적이었다.
출구가 없는 좁은 공간에 야생동물과 갇힌 기분이 이런 걸까.
설형이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숨도 크게 쉴 수가 없었다. 이럴 때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된다는 걸 설형 역시 본능적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얼굴을 멀쩡해 보여도 도강우는 지금 분명 핀트가 나가 있었다.
슥.
설형이 제게서 도망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강우가 천천히 붙잡고 있던 기둥을 아래로 내려 그 끝을 구멍에 맞췄다. 살덩이가 아니라 마치 딱딱한 쇠몽둥이가 닿는 것 같았다. 뜨겁게 달궈진 쇠몽둥이. 연약하고 예민한 살갗이 데일 것처럼 뜨끈했다.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조였던 모양이다. 조금 헐렁해져 있던 곳이 도로 꽉 조여들었다. 하지만 강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뿌리를 꽉 붙잡은 채 허리를 앞으로 밀었다.
“아, 아—!”
좁은 구멍이 벌어지며 푹, 하고 끄트머리가 안으로 박혀 들어왔다. 벌어진 허벅지 안쪽 근육이 부들부들 경련했다. 강우가 허리를 더 밀었다.
“자, 잠깐―.”
눈을 꽉 감고 있던 설형이 손으로 강우의 팔을 밀었다. 하지만 그런 설형의 태도를 거절이라고 여겼는지 강우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넣으라며.”
으르렁. 말 그대로 그건 육식동물이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가까웠다. 기가 막혔다. 누가 넣지 말랬습니까?! 라고 항의하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기에 설형은 일단 용건만 간단히 하기로 했다.
“천천히, 좀…….”
설형이 헐떡이며 겨우 말을 내뱉었다. 들어찬 건 뱃속인데, 왜 숨이 찬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 강우의 험악하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참, 요구사항도 많은 공주님이시지.”
귀찮다는 듯 투덜거린 강우가 잡고 있던 기둥을 놓고 설형의 허벅지 아래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무릎을 가슴까지 밀었다.
“히익―.”
설마 이대로 한번에 들어오는 건가 싶어 기겁했던 설형이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오히려 자세를 바꾼 탓에 박혀 있던 끄트머리마저 도로 빠졌다. 싫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꽉 물고 있었는지 퐁, 하는 마개 빠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났다.
피식. 바람소리가 났다. 설형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고개를 외로 꼬며 손등으로 얼굴을 가렸다. 빤히 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설형은 고집스럽게 시선을 외면했다. 그 사이 귀와 목덜미까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팔 치워 보시죠.”
강우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그런다고 순순히 말을 들을 설형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던지 손을 뻗어 팔을 내렸다. 얼굴 위로 그림자가 짙어졌다. 뭐하는―, 이라고 묻기도 전에 입술 끝에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살짝 고개를 돌린 순간을 놓치지 않고 강우의 입술이 설형의 입술을 삼켰다.
숨결만큼이나 뜨거운 살덩이가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확실히 키스는 야한 행위임에 틀림없었다. 입술을 가르고 들어오고, 젖은 살덩이끼리 빨고 문지르는 이 행위는 아래 삽입과 닮아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더 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혀를 집어넣으면서 설형의 엉덩이를 움켜쥔 커다란 손이 복숭아를 가르듯 엉덩이를 갈랐다. 그러더니 보지 않고도 잘도 구멍에 제 것을 맞췄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설형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하지만 강우는 두 번은 봐주지 않았다. 설형의 혀를 쭉, 빨아 당긴 강우가 벌을 주듯 그것을 콱 깨물었다.
“읏…….”
그리고 거기에 정신이 팔린 사이, 맞춰 놓은 것을 쑤―욱 집어넣었다. 신음을 밭아내느라 숨을 내쉬는 타이밍이었던 터라 입구가 단숨에 뚫렸다. 몸안으로 불길이 쏟아져 들어왔다.
“히―익!”
숨을 들이켰다. 반사적인 것이었지만 오히려 덕분에 들어온 기둥을 더 안으로 끌어당기는 꼴이 되었다.
“으…….”
쑤컹, 들어오는 감각에 조였던 입구를 다시 풀었다.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강우가 한 번 더 허리를 밀었다. 쿠욱,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감각에 설형이 허리를 떨었다. 버텨 보려고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오히려 밀어내려고 한 것 때문에 처음엔 버티는가 싶던 내벽이 단숨에 툭, 하고 벌어졌고, 마치 꼬챙이가 꽂히듯 불기둥이 몸을 꿰뚫었다.
쓰―윽―!!!!
뜨겁게 달궈진 끄트머리가 내벽을 확 그어올리는 감각. 설형이 그대로 눈을 질끈 감았다.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내장이 홧홧한 것이 더 견디기가 힘들었다. 엉덩이 안쪽으로 불덩이가 들어차 있는 것 같았다. 끝까지 다 들어왔는지 입구 위쪽과 회음부에 꺼끌꺼끌한 음모가 느껴졌다.
하아.
한숨 같은 숨을 내쉰 강우가 설형의 다리를 더 벌렸다. 그리고 허리를 뒤로 잡아뺐다. 쯔윽, 하고 달라붙어 있던 내벽이 떨어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꽉 감은 눈 안으로 물기가 확 차올랐다.
“아으…….”
곧바로 끝까지 잡아뺐던 기둥을 다시 집어넣는다. 들어오는 속도가 느릿했다. 오므라져 있던 내벽이 벌어지는 것이, 그리고 강우의 페니스 모양대로 다시 자리를 잡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으, 아으.”
그 감각에 설형이 진저리를 쳤다. 시트를 움켜쥔 두 손이, 공중에 떠 있는 엉덩이가, 허벅지 안쪽이 벌벌벌 떨렸다. 천천히 하라고 말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차라리 아픈 쪽이 더 나을 것 같았다.
“빠, 빨리. 차라리, 아, 으, 응―!”
참지 못한 설형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끄트머리가 안쪽 깊은 곳을 쑤셨다. 벌어진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신음이 튀어나왔다.
“천천히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전 공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고 있습니다만.”
쓱, 뺐다가, 다시 천천히 밀어넣는다.
“아니, 읏, 아응, 응―.”
설형이 진저리를 쳤다. 뒤트는 설형의 엉덩이를 꽉 움켜쥐고 안을 휘젓는다.
“왜, 너무 느끼는 것 같아 무섭습니까?”
“앗, 아―, 히익.”
“아니면, 부끄러운 겁니까?”
“으으으―!”
기둥을 확 잡아뺐다. 기둥에 붙어 있던 내장이 딸려나갔다. 그대로 밑이 빠질 것 같은 감각에 설형이 엉덩이를 꽉 조였다.
“빨리 하라는 건 맞습니까? 제걸 꽉 물고 놔주질 않고 있는데요.”
“그런 적, 읏, 으으!”
설형이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강우는 집요했다. 손가락으로 제 것을 물고 있는 입구를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렸다. 주름 하나 없이 한계까지 벌어져 있던 입구가 새로운 자극에 움츠러들었고, 그건 영락없이 강우의 것을 쭉쭉, 빨아먹는 형국이었다.
“아……!”
손가락이 한 치의 틈도 없는 그곳을 파고들었다. 손가락으로 억지로 잡아벌리자 터트릴 듯 조이던 것이 느슨해졌다. 공간이 생기자 강우가 귀두만 박아 두었던 것을 쑤욱, 집어넣었다.
-!!!
설형의 목이 확 꺾였다. 벌어진 입에서는 신음소리도 나지 않았다. 부들부들, 온몸이 경련했다. 허공에 뜬 발가락이 부채처럼 쫙 펴졌다. 무릎을 오므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예 강우는 설형의 무릎을 모으게 한 뒤 그대로 상체를 기울였다. 설형의 몸이 반으로 접혀 무릎은 가슴팍까지 바싹 올려졌다. 엉덩이가 허공에 떴다. 설형의 겨드랑이 사이를 손으로 짚은 강우가 무릎을 펴고 그대로 허리를 내렸다.
“읏, 아, 아―.”
푹푹푹, 안이 꿰뚫렸다. 설형이 원한 대로 빠르게. 너무 빨라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숨이 얽혔다. 박자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힉. 익―.”
설형이 강우의 어깨를 밀었다. 하지만 몸이 반쯤 접혀 있는 자세에서는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콱. 강우가 벌을 주듯 설형의 목덜미를 물었다. 놀란 설형이 반사적으로 엉덩이를 조였다. 어찌 보면 이건 강우의 탓이었다. 하지만 그 죗값은 고스란히 설형의 것으로 되돌아왔다. 억울했지만 변명할 틈은 없었다.
콱, 이번엔 말랑말랑한 귓불을 깨문 강우가 끝까지 잡아뺀 것을 퍽, 하고 박아넣었다. 크고 길쭉한 기둥이 한번에 쑥, 들어왔다.
“아―으으!!!”
설형이 앓는 소리를 냈다. 숨돌릴 틈도 없이 스윽, 하고 한 번 더 음경이 빠졌다. 곧바로 들어오겠다 싶어 숨을 삼켰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나간 기둥은 들어오지 않았다.
어? 하고 눈을 뜨는 순간, 퍽, 하고 굵은 기둥이 퍽, 하고 치고 들어왔다.
“으아아―.”
벌어진 입에서 신음이 쏟아져 나왔다. 비명 같은 신음이었다. 설형이 입을 다물기도 전에 다시 한 번 기둥이 퍽, 하고 치고 들어왔다.
뭉툭한 귀두가 내벽을 주욱, 긁어 올렸다.
쑤욱, 쑤욱, 같은 곳을 몇 번 긁어 올리자 엉덩이 안쪽이 젖어드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실제로도 젖고 있었다. 안이 부글부글 거품이 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걸 넣고 있는 강우가 모를 리 없었다. 마주한 강우가 씨익, 하고 웃었다. 설형이 뭐라 변명하기도 전에―뭐라 변명할 말도 없었지만― 강우가 그 각도를 유지한 채 허리를 움직였다.
“아, 아아, 아―.”
부들부들, 손바닥 아래 허벅지 진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여기, 좋습니까?”
“읏, 아니, 읏……아으!”
“아랫입은 거짓말이라는데요.”
아래는 흐물흐물해져서 입으로 아무리 아니라고 해 봐야, 설득력이 없었다. 하지만 그걸 다 알면서, 오히려 저보다 더 잘 알면서 굳이 묻는 도강우도 악취미다. 뭐, 그런 인간이라는 걸 몰랐던 건 아니지만.
“게다가 아래를 세우고 그런 말 해 봐야.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만.”
“거짓말―.”
설형이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하지만 곧 눈이 휘둥그레졌다. 믿을 수 없게도 설형의 것이 반쯤 서 있었다. 만지지도 않고, 뒤로 박힌 것뿐인데, 앞을 세우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설형에 오히려 강우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뒤로만 가고 싶다고 애원했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런 적 없습니다.”
“백설형씨는 약 때문에 기억 못할지 몰라도 난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
강우의 말을 듣고 있던 설형이 순간 미간을 살풋 찌푸렸다. 그냥 부끄러워서 짓는 표정이 아니라, 분명 뭔가를 숨기고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그것을 강우가 모를 리 없었다. 강우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뭡니까.”
“…….”
“백설형.”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
이쯤 되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설형도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미간을 확 찌푸린 설형이 버럭, 화를 내듯 진실을 털어놓았다.
“대체 누가 뒤로 가고 싶다고 했단 겁니까. 뒤로 간 적이 없는데.”
“그게 말이 된다고…….”
따지려던 강우가 이내 말을 멈췄다. 그때 제가 설형의 것을 직접 손으로 쥐고 흔들어 세웠을 때 당황하던 설형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설마.
“정말입니까?”
“…….”
대답은 없었지만 설형의 얼굴이 확 찌푸려진 것으로 대답은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말했잖습니까. 차라리 아픈 쪽이 좋다고. 그때 말고는 뒤로 느껴본 적 한 번도 없습니다.”
“…….”
말하는 설형의 목소리가 민망함에 불퉁해져 있었다. 씨발. 진짜 별소리를 다하네. 속으로 중얼거린 설형이 그때까지도 아무 말 없이 내려다보고 있는 강우를 향해 물었다.
“안 할 겁니까? 사람 이렇게 세워 놓고?”
“…….”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강우는 반응이 없었다. 불퉁한 마음에 설형이 허리를 살짝 뒤로 물렸다.
“안 할 거면, 이건 좀 빼고―흣―!”
진짜로 빼려고 한 건 아니고, 민망한 마음에 시늉만 한 것이지만 나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강우의 몸이 설형의 몸을 콱 눌렀다. 덕분에 박혀 있던 것이 더 깊이 박혀 들어왔다.
“정말입니까?”
“…….”
묻는 도강우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사실 강우는 처음에 집착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처녀는 귀찮다는 쪽이었다. 가볍고 즐거운 섹스라이프를 즐기기에는 차라리 경험이 많은 여자가 훨씬 편하고 뒤끝도 없는데, 쓸데없이 처녀에 집착하는 녀석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았다. 저도 자신이 이렇게 처음에 집착하는 남자인 줄은 전혀 몰랐다. 그런데 백설형이 진짜 제대로 된 섹스를 한 건 제가 처음이었다는 말을 듣고 나니, 그제야 제가 처음에 얼마나 집착하는 남자인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제가 백설형과 잠자리를 가졌던 남자들에게 얼마나 질투를 하고 있었는지도.
살면서 질투 같은 건 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 쓸데없는 감정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걸 제가 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미칠 것 같이 격렬하게. 심지어 설형과 잔 남자들을 죽인 그 미친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한 번도 제 감정을 제대로 컨트롤할 수 없었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 백설형만 엮이면 그게 되질 않았다. 뇌가 망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게 다 엉망진창이 되었다.
“도강우 검사님. 지금 자지 박아 놓고 고사 지냅니까?”
지금처럼.
기가 막혔다. 본인 말대로 제게 깔려 있는 주제에 무슨 자신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더 기가 막힌 건 저런 백설형의 태도에 화가 난다기보다는 미친 듯이 꼴리는 제 자신이었지만.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
피식. 강우가 진짜 미친놈처럼 웃었다. 진동이 느껴졌는지 설형이 읏, 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안을 조였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날름거리는 혀가 잘 익은 과육 같았다. 베어 물면 다디단 과즙이 터질 것 같은. 선과가 있다면 저런 것일까.
“자지 물고 있을 때 그러면 안 된다고, 아무도 안 가르쳐 줬습니까?”
강우가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설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발하듯 말했다.
“못 배우고 자란 새끼라.”
할짝. 마른 아랫입술을 혀로 축이며 덧붙였다.
“도검사님이 어디 한 번 가르쳐 줘 보시죠.”
미친놈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아니, 이미 미쳤으니, 미친놈이 맞았다.
“씨발, 그딴 얼굴 누가 하라고―.”
낮게 짓이기듯 말한 강우가 그대로 설형의 입을 막았다. 한 번 더 설형의 입에서 저딴 유혹이 들리면 그땐 저도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맞닿은 입안으로 웃음이 느껴졌다. 씨발. 낮게 욕을 내뱉으면서도 강우는 선과를 콱, 베어 물었다. 과즙이 입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읏, 아아.”
강우가 쉬지도 않고 내장을 벌리고 쑤셨다. 뜨거운 것이 안을 휘저었다. 찌꺽찌꺽, 하는 소리와 질척질척거리는 소리가 뒤섞였다.
“왜 자꾸 도망가.”
“읏. 읏. 하읏. ……으응, 응.”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쳐올리는 힘에 몸이 자꾸만 위로 딸려 올라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설명을 할 여력은 없었다. 벌어진 입으로는 달뜬 신음과 밭은 숨을 내쉬는 것이 고작이었으므로.
“읏, 아―.”
자꾸만 쓸려 올라가는 설형에 강우가 설형의 허리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철컹, 수갑에 딸려온 설형의 손이 허공에서 이리저리 흔들렸다. 허리 아래로 손을 집어넣은 강우가 허리를 꽉 붙잡고 자세를 바꾸느라 조금 흘러나온 기둥을 다시 쑥 밀어넣었다.
설형이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단단히 틀어쥔 손아귀에 허리는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페니스가 안을 쑤셨다. 달궈진 쇠몽둥이가 조금 전과 각도를 달리해 주욱, 하고 긁어 올리자 설형이 날카롭게 울었다. 하지만 안은 흐물흐물한 내벽들이 마구 조였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했다. 부글부글 거품이 일자 안이 근질근질했다.
“잠깐, 잠까―앗, 으.”
“가르치는 보람이 없네. 잠깐, 안 돼. 그런 건 오히려 사내를 부추기는 것밖에는 안 된다고 알려줬잖아. 처음이라, 잘 모르는 건가?”
쪽, 하고 설형의 입술에 잔 키스를 한 강우가 다시 허리를 놀렸다. 벌을 주듯 끝까지 박아넣은 페니스로 안을 휘저었다. 안이 벌어지고, 입구가 마구 짓이겨졌다. 설형이 날카롭게 울었다.
“아읏, 읏, 으, 으.”
퍽퍽퍽, 단단한 귀두가 뱃속을 마구 때렸다. 달라붙었다가 떨어지고 하던 내벽이 들락거리는 속력을 따라가지 못하고 오히려 단단하게 길을 냈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엉덩이 안쪽이 묵직해졌다. 엉덩이 안쪽에서 부글부글 거품이 일었다. 눈앞으로 물기가 차올랐다. 꽉 감은 속눈썹이 잔뜩 젖어 있었다.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릴 때마다 물기가 튀어올랐다.
강우가 허리를 붙잡고 있던 손을 뺐다. 수갑이 채워진 왼손이었다. 설형의 손이 딸려왔다. 그 손을 겹쳐 잡고 반쯤 서서 쿠퍼액을 질질 흘리고 있는 설형의 것을 붙잡았다.
“하지―, 읏―!”
놀란 설형이 튀어올랐지만 강우가 한 발 빨랐다. 뒤를 꿰뚫린 데다 앞섶까지 붙잡혔으니, 몸에 힘이 들어갈 리가 없었다. 속수무책, 강우가 이끄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보니까, 여기, 싸기 직전일 때 아주 좋더라고,”
단단한 음경으로 안을 들락거리면서 손으로는 연신 앞을 문지른다. 사실 강우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고는 있지만 닿는 것은 설형, 제 손이었다. 그건 마치 자신이 자위를 하고 있는 걸 남에게 보여지고 있는 형국이라 설형은 더 미칠 것 같았다.
주인이 미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 있는 것과는 별개로 몸은 아주 착실하게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앞은 아플 정도로 바짝 섰고, 뒤는 꽉꽉 조여들었다.
“씨발, 터지겠네.”
낮게 중얼거린 강우의 허릿짓이 빨라졌다.
“아……읏, 읏, 으읏.”
배가 아팠다. 강우의 손에 거칠게 주물러지는 페니스도 아팠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프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눈앞에서 자꾸만 새하얗고 새까만 불꽃이 마구 터졌다. 발끝이 저릿저릿했다.
‘히-익.’
콱, 하고 박아 넣었던 성기를 귀두까지 뺐다가 다시 한 번 뱃속을 채워 넣었다. 뒤로 빠졌다가 안을 들쑤신다. 내벽을 벌리고, 짓이기고, 찔러넣었다.
철컹철컹, 겹쳐 놓은 손이 빠르게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수갑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고 그 소리는 점점 빠르고 커졌다. 사슬에 묶인 육식동물이 바로 옆까지 와서 공격할 틈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강우의 손가락이 설형의 귀두를 문질렀다. 처음엔 손가락 동그란 살부분으로 문지르다 이내 손톱을 세워 확, 긁어내렸다.
“히이익―!”
설형이 날카롭게 울었다. 안은 미친 듯이 요동쳤고 그 혼란한 안을 기둥이 마구 휘저었다.
퍽. 퍽. 퍽. 퍽.
강우가 거칠게 허리를 박아넣었다. 젖다 못해 부글부글 인 거품으로 안이 꽉 차는 것이 느껴졌다. 사실 이미 강우의 것으로 안은 가득 차 있었지만.
눈앞이 흐릿했다. 흐릿한 눈으로 강우를 올려다보았다. 슥슥슥, 제 것을 문지르던 강우가 그것을 콱 움켜쥐며 말했다.
“가도 좋아.”
그러자 거짓말처럼 설형의 것이 파르르 떨며 토정했다. 그와 동시에 뒤가 확 오그라들었다.
흣.
강우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곧 오그라든 엉덩이를 벌리며 허리를 콱, 박아넣었다. 아직 사정을 끝내지 못한 설형의 것이 한 번 더 울컥, 하고 정액을 쏟아냈다.
눈앞이 확 꺼졌다. 물기에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강우는 사정없이 다시 제 것을 잡아뺐다. 한 치의 틈도 없이 꽉 달라붙어 있던 내벽이 딸려나가는 것 같았다.
설형이 진저리를 쳤지만 강우는 몇 번 더 잔뜩 예민해진 안을 마구 벌리고 짓이겼다.
“흣, 으읏, 흣, 으.”
강우가 고개를 숙였다. 벌어진 입안으로 뜨거운 살덩이가 쑥, 들어왔다. 침입자가 입안을 마구 휘저었다. 동시에 아래쪽도, 함께 휘저어졌다. 위와 아래가 동시에 휘저어지자 괴로운데, 또 한편으로는 좋았다. 뇌가 녹아 버릴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녹아 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아아아.
입술을 맞닿은 채 강우가 설형의 몸 안 더 깊이 성기를 파묻었다. 이미 더 들어올 곳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더 들어가겠다는 듯 달궈진 쇠기둥이 뱃속 깊은 곳을 가르고 들어왔다. 맞닿은 입안에서 신음이 터졌다.
퍽, 하고 뱃속이 흠뻑 젖는 느낌에 설형이 눈을 질끈 감았다. 발가락이 확, 오그라들었다. 그 와중에도 강우는 울컥, 울컥, 끝도 없이 불덩이를 안쪽에 잔뜩 쏟아 부었다.
마치, 육식동물이 자신의 영역표시를 해 놓듯.
쑥.
긴 음경이 빠졌다. 주륵, 음경에 막혀 있던 정액들이 줄줄 흘렀다. 구멍을 조여도 소용이 없었다. 아예 구멍이 조여지질 않았다. 설형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냥 가만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내 감은 눈을 번쩍 떴다. 한쪽 다리가 뒤로 들렸기 때문이다. 다리는커녕 손가락 하나 들 힘도 없는 제가 든 것은 아니니 범인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뭐, 하는.”
헐떡이는 목소리로 설형이 물었다. 물론 몰라서 물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강우는 진짜 궁금해서 물은 것인 줄 안 모양이었다.
“뭐긴, 2차지.”
“앗, 아……, 아―.”
아직 다 안 다물어진 구멍에 엄지를 푹, 집어넣은 강우가 안에 고인 정액을 뒤섞었다. 항의를 하려고 벌어진 입에서는 달뜬 신음이 터졌다. 그런 설형을 향해 씨익, 하고 웃은 강우가 친절하게 덧붙였다.
“일단 한 번 뺐으니, 이번엔 좀 느긋하게 해 보자고.”
마구 욕구를 푼 덕분에 얼굴에 생기가 도는 강우와 달리 설형의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물론 원래도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얼굴이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밤은 아직 길었다. 게다가 수갑에 묶인 설형은 도망칠 수도 없는 신세. 그러니 육식동물의 목에 함부로 사슬에 묶는 것이 아니라는 걸, 설형은 이제야 조금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