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6/11)

2

“아, 백 형사.”

설형을 알아본 강 형사가 아는 척을 해 왔다. 설형을 위해 옆으로 한 발 물러서며 자리도 마련했다. 흘끔, 곁눈질한 시선에 검찰 측 수사관과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강우의 모습이 들어왔다.

“대체 이유가 뭘까. 이전 살인은 누가 봐도 소름끼칠 정도로 깔끔하게 시체를 처리해 놓더니, 이번엔 무슨 부모 죽인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양 아주 난자를 해 놨잖아.”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지는 강 형사에 설형도 강우에게 두었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 시선은 자연스럽게 바닥에 누워 있는 피해자에게로 움직였다. 빠른 속도로 사체를 스캔하며 설형이 물었다.

“피해자 신분은 확인―.”

피투성이인 사타구니도 아무렇지 않게 넘겼던 설형이 상대적으로 멀쩡한 피해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그대로 굳었다.

“아직. 감식반에서 지문 가져갔으니 곧 나오겠지.”

팔짱을 낀 채 사체를 보며 무심코 대답하던 강 형사도 문득 설형의 말이 끊겼다는 것을 깨닫는다.

“왜 그래?”

흘끔, 고개를 들어 설형을 본 강 형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사체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설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설마 범행 수법이 너무 잔인해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아닐 테고.

“왜. 아는 사람이야?”

남은 이유는 한 가지뿐이라 강 형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나름 강 형사는 주변을 의식해서 목소리를 낮췄지만 그런 강 형사의 배려는 물거품이 되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재민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꽥 소리를 내질렀기 때문이다.

“에?! 백 형사님 아시는 분이에요?!”

“…….”

순간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한순간에 호기심 가득한 수십 개의 시선을 마주한 설형이 난감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제게 던져진 질문에 대한 답을 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였다.

“그―.”

“백 형사.” 

그런 설형의 말을 가로막듯 불쑥 끼어든 낮은 목소리.

설형을 향해 쏟아지던 시선이 단숨에 끼어든 목소리의 주인공에게로 옮겨갔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강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제 할 말만 잇는다.

“잠깐 나 좀 보죠.”

아무렇지 않은 얼굴은 아닌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은 누가 봐도 나 기분이 좋지 않다, 라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침묵이 흘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 할 말만 한 강우는 뒤돌아서서 성큼성큼 가버린다.

왜 저래. 점점 멀어지는 강우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으려니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강 형사가 툭, 하고 설형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뭐해. 검사님 부르시잖아.”

“네?”

“그래. 얼른 가 봐. 심기가 불편하신 거 같은데.”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치만 보고 있던 다른 형사들까지 설형을 향해 빨리 가 보라고, 떠미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행여나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걱정하느라, 조금 전 설형의 답변을 궁금해했던 그 일은 모두의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왜 그러십니까.”

시키는 대로 강우를 뒤따라 온 설형이 물었다.

조금 전 빨리 쫓아오지 않았던 것이 기분이 나빴나. 물론 놀면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밖에는 짐작되는 것이 없었다. 그때까지 설형에게서 등 돌리고 서 있던 강우가 휙, 하고 몸을 돌렸다. 순간 놀란 것은 사실이나 설형은 태연을 가장했다.

“제가 뭐 실수한 거라도.”

“몰라서 묻습니까?”

모르니 묻지, 알면 왜 묻겠습니까. 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입을 다물고 있으려니 강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누워 있는 피해자와 아는 사이라고 말해서 뭘 어쩌겠다는 겁니까.”

“…….”

설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걸 어떻게―.”

설형의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우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한 번 본 건 절대 잊는 법이 없다고 했던 것, 잊었습니까?”

“…….”

그랬지. 설형이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강우가 했던 말을 기억해서는 아니었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바로 그날의, 그 장소에, 제 눈앞의 남자 역시 등장인물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

‘백 형사, 뭐해.’

드륵.

미닫이문을 열고 나온 강력 1팀의 한 형사가 문득 문 옆에 서 있던 설형을 발견하고 물었다. 설형이 말없이 손에 들린 담배를 들어 보이자 그제야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담배 생각이 나서 밖으로 나온 참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1팀도 아닌데.’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이면서 한마디 덧붙인다.

오늘은 거의 두 달간 속을 썩이던 화곡동 자매 살인 사건의 범인을 체포한 날이었다. 뒤에서 뭐라고 하든 그 공의 90프로는 백설형 형사에게 있다는 걸 부정할 형사는 없었다.

저 성격만 좀 어떻게 하면 훨씬 더 그 공을 인정받을 텐데. 칭찬해 주는 말에조차 대꾸가 없는 설형을 보며 한 형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나저나 백 형사가 원래 이렇게 야한 얼굴이었나. 설형의 미모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오늘따라 유독 더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뭔가가 있었다. 가끔 그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동료들이 쓸데없이 색기를 줄줄 흘리고 다닌다는 말을 한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새하얀 담배연기를 뿜으며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설형을 곁눈질로 흘끔거리다, 문득 고개를 돌린 설형과 떡하니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힉. 순간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에 한 형사가 황급히 시선을 정면에 고정시켰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죄지은 사람마냥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칼을 든 범인과 1대1로 마주쳤을 때도 이렇게 빠르게 뛴 적이 없는 강심장이었는데 말이다.

‘한 형사님.’

‘네?! 아니, 어, 왜.’

불쑥 바로 옆에서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한 형사가 펄쩍 뛰었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존댓말까지 튀어나왔다.

의아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보고 있는 설형에게 급히 말을 정정했지만 얼굴로 열이 쏠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다행히 설형은 그것에 대한 언급 대신 하려고 했던 말을 꺼내놓았다.

‘제가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런데, 먼저 가 봐도 될까요?’

‘어, 어?’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묘하게 나른해 보이고 평소 풍기던 분위기와 좀 다르다 했더니 몸이 안 좋았던 모양이었다. 열이라도 나는 걸까. 볼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물론 한 형사도 설형이 그렇게 말해서 겨우 눈치챈 것이지만.

‘아, 그래. 피곤할 만도 하지. 가 봐, 가 봐. 안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내가 말할 테니까, 걱정 말고.’

‘고맙습니다. 그럼.’

‘어, 어, 그래. 가.’

꾸벅― 고개를 숙인 설형이 자리를 떠나는 모습을 한 형사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바라본다. 사람들 사이로 설형이 섞여들었다. 한 형사의 상체가 점점 앞으로 기울어졌다.

‘앗 뜨거!’

그러다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뜨끈한 통증에 한 형사가 파드득, 손을 털며 담배를 내던졌다.

튀듯 날아가는 담배꽁초에서 붉은 불꽃이 마구 튀었다.

후우후우, 담뱃불이 닿아 붉게 달아오른 손가락에다 대고 호들갑스럽게 바람을 불어대던 한 형사가 문득 고개를 들어 조금 전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어간 설형을 쫓는다. 물론 설형의 모습은 이미 사라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것을 눈으로 쫓는 것은 인간의, 아니 수컷의 본능인 것이니까.

‘바람 맞았어요?’

진토닉에 담겨 있던 얼음 하나가 달가닥,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투명한 액체에 똑같이 투명한 얼음이 녹아들어가는 것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던 설형이 한 박자 늦게 천천히 고개를 틀었다.

의자 하나를 두고 나란히 앉아 있던 남자였다. 물론 조금 전부터 흘끔거리며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시선을 모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런 거 같네요?’

소매를 젖혀 손목시계를 확인한 설형이 남자를 향해 한쪽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리며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정면이 훨씬 낫네. 휘익, 하고 속으로 휘파람을 분 남자가 대외적인 활동을 할 때 짓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잔을 들어 보인다.

‘나도 그런데. 바람맞은 남자들끼리 위로주 한 잔 할까요?’

가운데 손가락으로 잔의 입구를 빙글빙글 돌리며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설형이 턱을 치켜 올리며 대답했다.

‘뭐, 그쪽이 산다면.’

꿀꺽, 하고 남자의 침 삼키는 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듯했다.

‘분명 개시도 안 한 처녀라니까. 게다가 생긴 건 웬만한 기집애들은 개바르는 특 SS급. 어찌나 꼴리는 얼굴인지 그 얼굴만으로도 몇 번은 뺄 수 있겠더라고.’

벌컥. 화장실 문을 젖히고 들어서는 남자는 통화중이었다.

음담패설에 가까운 질 낮은 대화를 듣게 된 강우의 얼굴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물론 그런 대화에 익숙하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고급 호텔 바를 드나드는 인간이라고 해서 속까지 고상하지는 않다는 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까. 다만 썩 유쾌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강제로 듣게 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

강우는 씻은 손을 털어내며 페이퍼타월을 낚아챘다. 무심히 손에 물기를 닦아내며 거울 너머로 상대의 얼굴을 확인했다. 제가 벌어서 입을 수 있는 수준의 차림새는 아닌 걸로 봐서 꽤나 사는 집안 자식이라는 것은 추측할 수 있었지만 또 이름 있는 집안 출신은 아닌 모양이었다. 전혀 안면이 없는 것을 보면.

‘야. 내가 누구냐. 딱 보면 알지. 못 믿겠으면 같이 확인해 보든가.’

화장실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낄낄거리며 통화를 하던 남자가 옆 세면대 앞으로 걸어왔다.

‘조금 전에 아주 효과 좋은 걸로 먹여 놨으니까, 한 시간 내로 와. 룸은 저번이랑 같은 1209호.’

효과 좋은 것이 뭔지는 궁금해할 필요도 없었다. 공공연히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무용담마냥 자랑해 대면서도 남자는 거리낌이 없었다. 짧은 통화를 끝낸 남자가 거울 속의 자신을 점검했다. 흐트러지지 않은 머리를 한 번 더 정성스럽게 쓸어넘긴 남자가 그대로 돌아섰다.

‘민재 씨?’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사람의 어깨를 남자가 흔들었다.

‘정신 좀 차려 봐요, 민재 씨. 일어날 수 있겠어요?’

하지만 상대는 미동이 없었다.

‘강우 씨. 왜 그래요?’

맞은편에 앉아 있던 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상체까지 살짝 숙이는 움직임에 풍만한 가슴이 출렁였다. 딱 강우가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강우가 고개를 내저으며 앞에 놓인 잔을 들어올렸다. 사회정의를 구현하겠다고 검사가 된 열혈검사도 아니고 굳이 귀찮은 일에 휘말릴 필요가 뭐가 있나 싶었던 것. 하지만 그때였다.

‘혼자 일어날 수 있습니다.’

강우의 귀를 송곳처럼 파고드는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선 목소리였지만 강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몸도 못 가누면서 고집은. 내가 부축할 테니까, 나한테 기대요.’

‘괜찮습니다.’

잡아 주려고 하는 남자의 손을 거절하고 혼자 자리에서 일어난 이가 때마침 뒤돌아섰고, 강우의 눈에 그의 얼굴이 들어왔다.

세상에 차고 넘치는 게 여잔데 굳이 사내새끼를 상대로 계집질을 하려고 하나. 궁금했던 것이 한순간에 풀리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런 생각과는 달리 그 곳으로 시선을 두고 있는 강우의 표정은 조용한 라운지에서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는 사람에게 시선을 주고 있는 무심한 사람의 표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쯧, 적당히 좀 마시지. 몸도 가누지 못할 술을 왜 저렇게 마신담?’

그런 강우의 시선을 쫓아 시선을 주었던 여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한마디 한다. 물론 그 목소리는 전혀 강우의 귀에 와 닿지 않았지만.

강우의 시선은 기세 좋게 밀어낸 것과 달리 곧바로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지는 이와 그가 고꾸라지기 전에 솜씨 좋게 붙잡아내는 남자의 모습을 향해 있었다.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달려와 부축을 도왔다. 그들의 모습은 곧 바깥으로 사라졌다.

‘우리도 그만 올라갈래요? 어차피 술은 이 정도면 된 거 같은데. 술에 취해 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하잖아요?’

‘그럴까 그럼.’

술에 취할 일도, 취한다고 해서 곤란할 일도 없었지만 여자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강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엘리베이터에 탄 강우가 맨 위층 버튼을 누르자 여자의 얼굴에 화색이 번졌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자신 때문이라고 오해하는 듯했지만 단순히 다른 사람이 잤던 침대에서 자는 것이 내키지 않아 그런 것뿐이었다. 물론 덕분에 섹스를 할 때 좀 더 즐거움이 배가되는 것은 사실이라 굳이 그런 사실을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1, 2, 3.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점점 커졌다. 여자가 재촉하듯 강우의 팔에 자신의 가슴을 문질렀다. 따뜻하고 물컹한 감촉이 기분 좋았다. 강우의 시선이 다시 위쪽을 향한다.

8.

아직 10층도 가지 못했다. 오늘따라 유독 엘리베이터가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강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9. 10.

느림보 거북이처럼 올라가는 숫자를 보는 강우의 얼굴에 짜증이 번졌다. 어찌 보면 초조한 기색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11. 

숫자가 하나 더 바뀌는 순간 얼굴을 확 찌푸린 강우가 손을 뻗었다.

‘아 씨발, 귀찮게.’

낮은 욕설과 동시에 12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강우 씨?’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눈만 깜빡이고 있던 여자가 한 박자 늦게 강우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강우의 시선은 엘리베이터 밖을 향해 있었다.

‘금방 따라갈 테니까, 먼저 올라가 있어.’

주머니에 넣어 뒀던 키 카드를 여자에게 넘겨준 강우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강우 씨?!’

긴 인조 속눈썹을 팔락거리던 여자가 강우를 뒤따르려고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이미 문이 닫힌 엘리베이터가 위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정신 좀 들어요? 물 좀 줄까요?’

‘……응.’

눈을 뜬 설형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씨익, 하고 웃어 보인 남자가 걸터앉아 있던 침대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설형이 약에 취해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사실 설형은 남자가 술에 약을 탈 때부터 그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약이 든 술은 남자가 안 보는 사이 물컵에 쏟아부어 버리고 굳이 이렇게 약에 취한 사람처럼 굴고 있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상대의 술에 약을 타는 남자라면 오늘 이후 다시 연락하거나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상대가 이런 쓰레기라 오히려 잘되었다 싶은 설형이었다.

‘여기. 물.’

냉장고에서 꺼낸 생수를 가지고 돌아온 남자가 침대에 걸어앉았다. 반쯤 몸을 일으킨 설형이 건네주는 생수를 받아 입으로 가져갔다. 기울인 각도가 너무 높았던지 물이 흘러넘쳤다. 쏟아진 물이 흥건하게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꿀꺽. 그 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남자가 설형을 향해 물었다.

‘덥지 않아?’

대답은 없었지만 남자는 이미 손을 내뻗고 있었다. 설형도 상관없었기에 남자가 하는 대로 그냥 가만히 두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설형이 바라는 것은 섹스였다. 섹스만 할 수 있으면. 상대가 쓰레기든 범죄자든 상관없었다.

처음 시작은 한때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상수동 모자 살인 사건이었다. 근 세 달을 모자를 죽인 범인을 찾아 형사들이 백방으로 뛰고 있을 때 설형은 그 집안의 둘째 아들 부부에게 주목했다. 사건 초기에 알리바이가 증명되어 용의선상에서 제외된 두 사람을 범인일 거라고는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의 알리바이는 깨졌고 설형은 곧바로 부인을 공략해서 남편의 범행을 자백하게 만들었다. 본인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남편의 범행을 목격한 것뿐이라고 증언했지만 그마저도 설형에 의해 깨부숴졌다. 하마터면 미제 사건으로 남을 뻔한 사건은 그렇게 해결되었고, 설형은 그날 처음으로 남자와 섹스했다.

그리고 그건 그 후로도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아마도 수사 내내 솟구친 아드레날린 때문에 몸과 뇌가 이상해지는 거라고 추측만 할 뿐이었다. 그 때문인지 그날의 기억은 늘 흐릿했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그렇게 스위치가 나가 버리는 일이 사건마다는 아니라는 거였다. 어느 정도 주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조금씩 간격이 줄어들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집단인 경찰에서, 그것도 강력계 형사가 남자와 섹스를 하고 다닌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어떤 눈으로 자신을 볼지는 굳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굳이 다른 사람을 생각할 필요도 없이 살아오면서 저를 성적인 대상으로 보는 시선들을 제가 얼마나 혐오했었던가를 떠올리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제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설형은 그게 마치 계속해서 살인을 저지르는 연쇄 살인범의 패턴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의지로는 그만둘 수 없는 저주였다. 설형이 잠시 그렇게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던 그때였다.

딩동.

차임벨이 울렸다. 설형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번졌지만 남자는 아, 하고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벌써 왔나 보네.’

아마도 설형이 약에 취해 있으니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사실 알아들어도 상관없다는 쪽에 가까웠다.

‘잠깐만. 오빠가 금방 홍콩 가게 해 줄게.’

씨익, 하고 웃으며 중얼거린 남자가 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다.

‘미친 새끼. 얼마나 밟고 온―.’

당연히 통화했던 자신의 친구일 거라고 생각하고 벌컥 문을 열었던 남자가 그대로 멈칫했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혹 녀석이 또 다른 친구라도 데려온 건가 싶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보이는 것은 눈앞에 선 남자뿐이다.

‘누구.’

남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씨익, 하고 웃은 강우가 대답했다.

‘호텔 경호를 담당하고 있는 담당잡니다.’

눈도 깜짝하지 않고 태연히 거짓말을 늘어놓는 강우를 남자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살핀다. 호텔 오너라면 모를까 아무리 봐도 호텔 직원으로는 보이지 않는 강우의 외형 때문이었다. 경계하고 있는 상대의 눈을 돌리려면 강수를 두는 것이 가장 현명했다.

‘손님께서 다른 손님을 약을 먹여서 데려갔다는 갔다는 제보가 들어와서요.’

씨익,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하자 예상대로 남자가 펄쩍 뛰어올랐다.

‘누가?! 대체 누가 사람을 뭘로 보고 그딴 개소릴 해?!’

이런 반응 또한 예상 못한 것이 아니라 강우는 자연스럽게 대응했다.

‘당연히 손님을 못 믿는 건 아닙니다만, 저희는 제보가 들어오면 일단 확인을 해야 하는 입장이라. 잠시 들어가서 일행 분을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그런데 일행은 맞으신 거죠?’

‘…….’

마지막 부분에서 내내 입가에 띠고 있던 미소를 단숨에 지우며 덧붙이자 상대가 아랫입술을 꽉 깨문다.

씨발. 좆됐다. 남자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다 보였다. 이쯤하고 도망칠 구멍을 내 줄까. 소란이 일어서 좋을 게 없는 것은 강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별것 아닌 일로 검사 신분까지 밝혀지는 일은 사양이다.

‘아. 혹시 몸이 안 좋은 손님을 방까지 데려다주려고 하셨던 겁니까?’

‘그게 무슨.’

보는 것만큼이나 머리도 나쁜 타입인 모양이다. 짜증스러운 기색을 애써 참으며 강우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그런 것으로 하는 게 손님 입장에서나 제 입장에서나 가장 무난하지 않겠습니까? 저희는 나중에 호텔 측에 괜한 책임이 넘어오는 것만 아니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거든요.’

‘아.’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아차린 남자가 얼굴에 화색을 띠며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안 그래도 상태가 괜찮아 보이길래 그만 가 보려고 했어. 내가 남자랑 무슨 볼일이 더 있겠어.’

‘그렇죠. 그럼.’

그렇게 말하면서 한 손으로 문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 밖을 가리킨다. 말이나 표정은 아주 정중했지만 결국 당장 옷 챙겨서 꺼져. 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런 것에 불만을 토로할 때는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후다닥 안으로 뛰어 들어갔던 남자가 대충 소파 등받이에 걸쳐 놓았던 옷만 챙겨 다시 밖으로 나왔다.

‘이걸로 나는 이 일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그럼요.’

후다닥, 달려가 마침 열리는 엘리베이터에 남자가 올라타자마자 강우는 짓고 있던 웃음기를 지웠다.

취미에도 없는 정의의 사도 노릇은 여기까지 하고 나도 그만 가 볼까. 강우가 문고리를 놓고 돌아섰다.

탁.

그러려고 했다, 분명. 그런데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아니 머리와 몸이 따로 놀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러는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문고리를 잡고 있는 자신의 손을 보는 강우의 얼굴이 찌푸려져 있었다.

어차피 도와주기로 한 거 별일 없이 잘 쓰러져 있는지만 확인하고 가자.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그렇게 결심한 강우가 잡고 있던 문고리를 확, 잡아당겼다.

‘잠시 실례합니다.’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말을 내뱉은 강우가 성큼성큼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해 발이 멈췄다. 뭔가를 발견한 강우의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다. 조용한 방안에 문이 닫히고 찰칵, 하고 자동으로 잠금장치가 잠기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다행히 못 볼 꼴을 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쪽이 덜 놀라웠을 것이다. 그건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범주였으니까. 하지만 강우가 본 것은 전혀 예상 못한 장면이었다. 당연히 약기운에 침대에 시체처럼 드러누워 있어야 할 남자가 멀쩡하게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던 것이다.

‘괜찮습니까?’

아니, 아래는 벗은 채 셔츠만―그마저도 반쯤 풀어헤쳐져 있었다―입고 있는 상태를 멀쩡하다고 하기는 어렵겠다. 일단 상태를 확인하자 싶어 묻자 침대에 앉아 멀뚱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설형이 고개를 들었다. 한 번에 위아래로 강우를 스캔한 설형이 말했다.

‘잘도 호텔 직원이라는 말을 믿었네요.’

‘…….’

‘찔리는 게 있어서 그랬겠지만.’

강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알고 먹은 거였어?’

‘…….’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대답을 들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머리가 지나치게 좋은 강우는 설명 없이도 상황 파악이 어렵지 않았다.

‘괜한 짓을 했네.’

미간을 찌푸린 채 중얼거린 강우가 뒤돌아섰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곧장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멋대로 남의 일에 끼어들었으면, 책임을 져야죠.’

‘…….’

강우가 천천히 고개를 바로 했다. 제가 뭘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기껏 찾은 상대를 그쪽이 멋대로 쫓아내 버렸잖습니까.’

‘…….’

‘그렇다고 지금 이 상황에 다시 내려가서 다시 상대를 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본인도 난감하다는 듯 콧잔등을 찌푸린다. 풀어헤쳐진 셔츠 사이로 남자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새하얀 목덜미와 쇄골이 선명했다.

‘그래서. 어떤 책임을 원하는데?’

한 번 지껄여 보라는 듯 팔짱을 낀 강우가 턱을 까딱였다.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 설형이 강우의 앞으로 바싹 다가섰다.

‘알다시피 난 약기운을 뺄 상대가 필요하고, 상대가 그쪽이라도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그쪽이라도?

생전 처음 들어본 말이었다. 심지어 그 비교 대상이 겨우 조금 전 그 양아치 새끼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기가 막혔다. 어찌 보면 그냥 무시하면 되는 말이었다. 평소의 강우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그건 조금 전 닫히는 문을 도로 붙잡았을 때부터, 아니 그보다 더 먼저, 엘리베이터 12층 버튼을 눌렀을 때부터 예정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그런 강우의 모습을 망설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설형이 관두라는 듯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자신 없으면 다른 사람이라도 구해다 주고 가든지.’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던 그때처럼 강우가 손을 내뻗었다. 새하얀 목덜미가 손안으로 들어왔다. 퍼드득, 도망치려는 목덜미를 꽉 붙들었다. 가는 목덜미를 부러뜨리지 않게 주의하며 당긴 강우가 나직이 속삭였다.

‘좋아. 그 책임, 내가 지지.’

그리고 곧바로 입술을 눌렀다. 혹 이 건방진 입이 거절의 단어를 내뱉기 전에. 아니, 자신이 이 건방진 남자의 목덜미를 부러뜨려 버리기 전에, 라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이었겠지만.

‘생각보다 부드럽네.’

낮은 목소리가 중얼거린다. 일부러 수치를 주려고 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덤덤한 중얼거림이 사람을 더 민망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설형은 처음 깨달았다.

‘약 때문인가?’

‘…….’

그나마 도망칠 구멍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설형은 아무 말 없이 눈을 감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차피 대답을 구하려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는 듯 구멍 주변의 주름을 더듬던 강우의 손가락이 가운데 부분을 꾹, 하고 눌렀다. 주름이 확 오므라들었다. 하지만 강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꾹, 꾹, 집요하게 힘을 주어 누르자 푹, 하고 손가락 한 마디가 안으로 빨려들어가듯 들어갔다. 그 뒤로는 쉬웠다.

‘읏―.’

반사적으로 움츠러드는 다리를 붙잡아 벌리며 좀 더 힘을 주어 밀어넣자 손가락 하나가 전부 삼켜졌다. 입구가 벌렁이며 손가락을 잘라내기라도 할 기세로 꽉꽉 물어 댔다.

‘조르지 마.’

놀리듯 중얼거린 강우가 손가락을 들쑤셨다. 달라붙어 있던 살덩이들이 떨어져 나갔다가 달라붙는 것을 반복했다. 빙글빙글 돌리던 강우가 손가락 하나를 더 집어넣었다. 이번엔 조금 전만큼 뻑뻑하지는 않았다.

슥슥슥.

손가락 두 개가 들어갔다 나갔다를 반복한다. 속도를 높이자 달라붙던 내벽이 금방 단단하게 길이 났다.

‘처녀는 무슨.’

강우가 무심히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들쑤셨다.

찌꺽찌꺽, 손가락이 들락일 때마다 젖은 소리가 났다. 남자를 안는 걸 더 좋아하는 녀석한테서 너무 느끼면 남자도 뒤에서 물이, 정확히는 기름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안을 크게 휘저은 손가락을 잡아 빼며 강우가 말했다.

‘넓히는 건 이만하면 된 것 같은데.’

‘흣-!’

내벽을 긁어내리는 감각에 허리를 바르르 떨며 신음한 설형이 천천히 눈을 떴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눈을 뜨자 내려다보고 있던 강우가 씽긋, 웃으며 말했다.

‘손가락만으로 가는 건 아깝잖아.’

‘…….’

뭐가 아깝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설형도 순순히 동의했다.

애초에 이런 낯부끄러운 전위 같은 것은 필요 없었다. 다소 아프더라도 빨리 삽입해서 싸고 끝내 버리는 쪽이 좋았다. 설형이 지금까지 했던 여느 섹스처럼.

‘빨아.’

무릎으로 선 강우가 명령했다. 강우의 사타구니를 확인한 설형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인간적으로 너무 크잖아.

‘적시는 게 좋을 텐데.’

얼굴을 찌푸린 채 굳어 있는 설형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경고하듯 중얼거리는 강우에 설형이 머뭇거리다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제가 생각해도 이건 절대 적시는 게 좋았다.

‘이 세우지 마.’

고개를 숙인 설형이 잠시 망설이다 눈을 질끈 감고 그것을 삼키기 무섭게 머리 위에서 낮은 경고가 내려왔다. 입안은 이미 꽉 찬 상태라 대답 대신 최대한 이가 닿지 않도록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러자 기둥이 좀 더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뭉툭한 귀두가 쿡, 목구멍을 찔렀다. 숨을 쉴 수가 없어 설형이 고개를 뒤로 빼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강우의 손이 설형의 머리를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항의할 새도 없이 슥슥, 거칠게 앞뒤로 움직인다.

‘읍, 으읍.’

숨이 막혔다. 살덩이가 들어왔다가 조금 빠지는 타이밍에 겨우 겨우 숨을 내쉬는 게 고작이었다. 입안에 침이 고였다. 질척질척, 마치 아래를 들쑤시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기둥이 들락일 때마다 질척한 소리가 짙어졌다. 잔뜩 벌어진 턱에서 경련마저 일었다.

이러다 진짜 죽겠다 싶던 그 순간. 거짓말처럼 입안을 가득 채우던 살덩이가 쑥- 빠져나갔다. 살덩이에 딸려나간 침이 주륵, 쏟아졌다.

‘컥, 커억―!’

입안이 비자 참았던 기침이 터졌다.

뭐하는 짓입니까. 기침과 참았던 숨을 내쉬느라 말은 못하고 대신 눈으로 항의하는 설형에게 상대는 태연히 대꾸했다.

‘그러게 왜 도망을 치려고 해.’

‘…….’

이번엔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설형에게 강우가 씽긋, 하고 웃으며 충고까지 아끼지 않는다.

‘충고하는데 진짜 도망칠 생각 아니면 함부로 도망치려고 하지 마. 목덜미에 이가 박힐지도 모르니까.’

‘…….’

그 말을 들은 설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농담처럼 웃으며 하는 말이지만 백 퍼센트 진심이라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멀끔한 외모에 가려 눈치채지 못했지만 사실 눈앞의 남자는 세상 그 어떤 동물보다도 흉포한 육식동물이었다는 걸.

‘이쯤하면 적시는 건 충분히 한 것 같은데.’

침이 잔뜩 발려 번들거리는 기둥을 바짝 세운 강우가 물었다.

‘이대로 앞으로 할까. 아니면 뒤로 박아 줄까.’

‘…….’

마음 같아서는 돌아서서 상대의 얼굴을 보지 않고 하고 싶었지만 설형은 다른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이대로 하죠.’

등을 보이고 도망치면 안 된다.

맹수를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할 대처법이었다.

‘흐윽, 윽―!’

삽입은 느렸다. 힘으로 입구를 연 귀두가 천천히 안으로 벌리고 들어왔다. 입술을 꽉 다물고 있던 설형이 참지 못하고 신음했다.

‘하아.’

하지만 괴로운 것은 설형만이 아니었다. 반쯤 박혀 있는 기둥을 내벽이 꽉꽉 조였다. 빡빡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좁았다. 물론 강우의 것이 크기도 했고.

‘한 번에 넣을게.’

할 수 없다 싶었던 강우가 그렇게 말하며 엉덩이를 갈랐다. 그리고 허리를 콱, 쳐넣었다. 투둑, 투둑, 막혀 있던 안이 갈라지며 단숨에 깊은 곳까지 박혀 들어갔다.

―!

설형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신음도 나오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도망치는 엉덩이를 꽉 움켜쥐고 강우는 난폭하게 사타구니를 짓눌렀다. 안 그래도 깊던 것이 더 깊은 곳까지 벌리고 들어왔다. 설형이 진저리를 쳤다.

‘자지 터지겠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 한숨처럼 나직이 중얼거린 강우가 꽉 움켜쥐고 있던 엉덩이를 벌리며 제 것을 잡아 뺐다. 쫀득하게 달라붙어 있던 내벽이 쯔윽, 쯔윽 소리를 내며 떨어져나갔다. 귀두가 보일 때까지 잡아 뺐다가 다시 끝까지 박아 넣었다.

‘힉-!’

입구부터 내장까지 단숨에 뚫린 곳이 뜨끈했다. 불로 지진 것 같았다. 부르르, 설형이 허리를 떨자 강우가 허리를 뒤로 물렸다. 몸을 떨고 있던 설형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직―.’

‘어차피 아픈 거면 빨리 지나가 버리는 게 낫잖아.’

퍽―.

대답과 동시에 강우가 다시 허리를 쳐올렸다. 닫혔던 내벽이 단숨에 벌어졌다. 그리고 다시 한 치의 틈도 없이 달라붙는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제 것이 어떤 모양인지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직이라면서 아래는 엄청 달라붙고 있네.’

‘흣―!’

설형이 다시 손으로 눈을 가렸다. 한계까지 벌어진 입구의 주름이 조였다 풀어졌다를 반복한다. 마치 더. 깊이. 넣어 달라고 조르는 것처럼. 빨리. 지금도 그렇게 졸라대고 있었다.

씨익, 하고 웃은 강우가 무릎 아래쪽으로 손을 넣어 그대로 가슴까지 밀었다. 엉덩이가 들리고 반사적으로 기둥이 삐죽― 밖으로 삐져나왔다. 곧장 무릎으로 선 강우가 이번엔 체중을 실어 박아 넣었다.

‘힉―!’

설형의 몸이 튀어 올랐다. 하지만 반쯤 접힌 몸은 오히려 기둥을 더 삼킨 꼴이 되었다. 그리고 거칠게 쑤셔졌다.

‘아, 앗―, 아. 아―.’

신음이 쏟아졌다. 굵고 긴 기둥이 푹, 푹, 푹, 박혀 들어왔다. 몽둥이 같은 살덩이가 들어왔다가 나갈 때마다 내장이 그대로 함께 딸려나갈 것 같았다.

‘힉, 힉, 아, 으.’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조금 전 손가락이 빠르게 들락였을 때처럼 달라붙던 내벽이 단단해지고 길이 났다. 설형도 확연히 느껴지는 그것을 넣고 있는 강우가 모를 리 없었다.

것보라는 듯 자신을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설형이 고개를 꺾었다. 그래 봐야 붉게 달아오른 목덜미는 숨길 수 없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슥, 슥, 슥.

강우가 빠르게 움직였다. 굵은 기둥을 한계까지 뺐다가 끝까지 넣기를 반복했다. 안을 마구잡이로 벌리고 쑤셨다. 엉덩이 안쪽이 점점 뜨거워졌다. 단단한 끄트머리가 안을 벌리고 들어오면 그 뒤로 거대한 것이 내벽을 빡빡하게 벌리며 길을 만든다. 거대한 것에 내벽이 쓸릴 때마다 아래가 뜨끈거렸다. 아파, 아파. 저도 모르게 설형이 중얼거렸다.

‘아프긴. 안이 젖었는데.’

물론 강우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들락이는 것이 훨씬 수월해져 있었다. 정말 기름이라도 나오는 것처럼 들락일 때마다 젖은 소리까지 났다. 하지만 곧 설형의 다리 사이로 시선을 주었던 강우가 말했다.

‘그래도 서지는 않았네.’

대체 뭐가. 라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뜨거운 손이 축 늘어져 있던 설형이 것을 감싸쥐어 왔기 때문이다.

‘하, 하지―, 힉―.’

놀라 몸을 일으키던 설형이 그대로 다시 쓰러졌다. 거친 손길이 제 것을 꽉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씨발. 별걸 다 해 보네.’

자조적인 중얼거림과 함께 강우가 슥슥슥, 설형의 것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말한 것과는 달리 손놀림은 아주 적극적이었다.

‘하지, 읏. 흣. 응―!’

단단한 손바닥이 연약한 살덩이를 거칠게 문질렀다. 설형이 진저리를 쳤다. 슥슥, 위아래로 움직이다 손가락으로 뭉툭한 끝을 문지른다.

‘그, 냥, 뒤, 뒤로만- 앗, 읏―.’

‘왜?’

그렇게 물으면서도 강우는 움직이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문질문질 손가락 살로 꾹꾹 누르던 강우가 손톱을 세워 긁어내리자 손안의 것이 파드득, 튀어 올랐다. 설형이 허리를 뒤틀었다.

‘앞만 만졌을 뿐인데 뒤가 벌렁거리는 게 창피해?’

‘읏, 아읏, 아으…….’

‘아니면 안이 흐물흐물해지는 것 때문인가?’

‘안, 아―!’

말라 있던 끝이 어느새 젖어들었다. 손가락에 물기가 묻어나자 더 자극적이었다. 질척질척, 젖은 소리를 내며 손가락이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강우의 말대로 남자의 것을 물고 있는 구멍이 벌렁거리고, 흐물흐물해졌다.

‘차라리, 아픈, 게―.’

설형이 강우의 손등을 긁으며 애원했다. 차라리 아픈 쪽이 더 나을 것 같다. 진심이었다. 하지만 강우는 코웃음을 칠 뿐이다.

‘뒤로만 한다고 또 그렇게 아프기만 한 것도 아니면서.’

그것을 확인시켜 주기라도 하듯 강우가 허리를 들썩였다. 그때마다 안에서 찌꺽찌꺽, 젖은 소리가 났다. 이상하게도 분명 질질 싸고 있는 건 앞인데, 뒤가 흥건하게 젖어들었다.

‘뒤로 느끼는 건 안 부끄럽고 앞으로 느끼는 건 부끄러워?’

‘읏, 으―.’

스윽, 하고 허리를 뺀 강우가 푹, 하고 기둥을 집어넣으며 물었다. 설형이 진저리를 쳤다. 대답은 없었지만 어차피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암컷이라 그런가?’

‘아윽―.’

퍽, 하고 안이 들이쳤다. 강우의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떨어져 나갔던 내벽이 달라붙어 굵고 뜨거운 기둥을 오물오물 씹었다. 심지어 안으로 쭉쭉, 빨아들인다.

‘뭐, 그게 소원이라면 그렇게 해 주지.’

쥐고 있던 설형의 것을 놓은 강우가 한쪽 다리를 놓고 다른 한쪽 다리만 제 어깨에 걸쳤다. 자세를 바꾸느라 조금 빠져나왔던 기둥을 다시 쑥 밀어넣었다. 단단한 끄트머리가 각도를 전혀 달리해서 주욱, 하고 긁어 올리자 설형이 날카롭게 울었다.

‘아파?’

확 조여든 엉덩이를 가르고 허리를 뺐다. 안이 다 뽑혀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 달라붙어 있던 내벽은 제 힘으로 떨어져 나왔다. 곧바로 다시 허리를 쳐올렸다. 뽑히고 쓸려올라간 내벽이 홧홧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입구와 엉덩이 안쪽이 근질근질해졌다.

‘아프라고 하는 건데 느끼면 어떻게 해.’

‘아, 아니―.’

설형이 도리질쳤다. 하지만 스스로도 아무 소용없는 변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아니라고 도리질치는 순간에도 내벽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안을 조이고 있었다.

더, 더, 더, 하고 조르듯 기둥을 쭉쭉 빨았다.

‘음란한 구멍이네.’

벌을 주듯 단단한 페니스로 안을 크게 휘젓자 설형이 날카롭게 울었다. 안을 마구잡이로 벌리고 쑤셨다.

‘아. 아―. 아―으.’

퍽퍽퍽, 사타구니가 엉덩이를 칠 때마다 안이 울렸다. 그리고 점점 엉덩이 안쪽이 묵직해졌다. 안에서 부글부글 거품이 이는 것 같았다. 그 기분을 참을 수 없어 설형이 손으로 강우의 배를 밀었다. 하지만 아래를 뚫린 채 신음하는 상황에서 손에 힘이 들어갈 리 없었다. 물론 정상적인 상황이라고 이 남자를 힘으로 이길 자신은 없었지만.

허릿짓을 하던 강우가 자신의 배를 밀고 있는 설형의 손을 붙잡았다. 양손으로 잡아 붙든 뒤 거칠게 앞뒤로 움직였다.

‘아, 읏, 으―.’

퍽, 퍽, 퍽, 몸이 위아래로 마구 흔들렸다. 허리를 쳐올리며 붙잡은 손을 제 쪽으로 당기자 기둥이 더 깊은 곳까지 치고 들어왔다. 배가 아팠다. 토할 것 같았다. 눈에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설형의 몸은 분명 느끼고 있었다. 흐물흐물해진 안이 들락일 때마다 거품이 부글부글 끓었다.

빨리. 어떻게, 좀.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던지고 애원하고 싶었다. 매달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설형이 눈을 감았다. 고여 있던 눈물이 주르륵, 눈꼬리를 타고 흘렀다. 그리고 그 순간.

말도 안 돼.

깜짝 놀란 설형이 속으로 외치며 눈을 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순간 갑자기 제 안에 들어 있던 것이 부피를 더 키웠던 것.

대체 왜? 라는 의문보다 이게 더 커질 수도 있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흐릿하던 시야가 선명해지고 바로 눈앞에 있던 검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빨리 끝내고 싶어?’

눈이 마주친 강우가 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를 놀리듯 빙글거리고 있던 얼굴이 아니었다. 그 표정에 정신이 팔려 질문을 한 박자 늦게 이해한 설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바람에 고여 있던 눈물이 다시 주륵, 흘러내렸다. 고개를 끄덕이는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강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그건 관두는 게 좋을 거야.’

그게 무슨.

하지만 그 수수께끼 같은 말의 의미를 되묻기도 전에 설형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달뜬 신음소리였다.

‘히익―!’

두 다리를 모두 제 어깨에 얹은 강우가 뒤로 뺐던 페니스를 단숨에 질러넣었다. 부피를 부풀린 것이 각도를 달리해 들어오자 설형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강우는 더 이상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아니 그럴 만한 여유가 없다는 쪽이 더 맞았다.

‘아, 아―읏, 흣, 읏!’

푹, 하고 안이 들쑤셔졌다. 뒤로 빠졌다가 빠르게 들어온다. 내벽을 벌리고, 누르고, 짓이겼다. 그때마다 눈앞이 까맣게 하얗게 불이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했다. 내벽이 꽉꽉 강우의 기둥을 조였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게 싫다고 하는 것인지 더 해 달라고 조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졌다. 하지만 강우는 전혀 헷갈리지 않는다는 듯 망설임 없이 거칠게 몸을 박아 넣었다.

퍽. 퍽. 퍽. 퍽. 

젖다 못해 안에서 부글부글 거품이 일었다. 머리가 흐릿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오로지 느껴지는 것은 강우의 것이 들락이는 구멍밖에 없었다. 죽, 긁어 올리는 감각에 아랫배가 단단하게 올라붙었다. 그리고 눈앞이 까라앉았다.

―!

사정이었다. 설형이 안을 확 조였다.

‘흣.’

강우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하마터면 그대로 갈 뻔했다.

‘아직이야.’

낮게 중얼거린 강우가 설형이 꽉 물고 있는 제 것을 잡아 뺐다. 밑이 빠지는 느낌에 설형이 진저리를 쳤다. 고개를 숙인 강우가 입술로 설형의 이마를 눌렀다. 그리고 다정하게 속삭인다.

‘쉬. 금방 쌀 테니까.’

하지만 허리 아래쪽은 전혀 다정하지 않았다.

사정으로 오그라들어 있는 주름을 손가락으로 잡아 벌리며 제 것을 집어넣는다. 안이 쫀득하게 달라붙어 왔다. 허공에 떠 있는 발가락이 오그라들어 있었다.

꽉 감은 눈에서 물기가 새어나왔다. 긴 속눈썹이 젖어드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 아래가 더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설형도 알아차렸는지 허리를 뒤틀었지만 별 소용없는 반항이었다.

그러니까 그건, 그만두는 게 좋다니까. 츳, 하고 혀를 찬 강우가 다시 움직였다. 사정으로 잔뜩 예민해진 몸을 마구 벌리고 짓이겼다. 설형이 잠깐만 쉬게 해 달라고 흐느끼며 애원했지만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흣, 흐흣, 으, 으으…….”

이미 사정으로 예민할 대로 예민한 곳을 마구잡이로 벌리고 쑤셨다. 설형이 진저리를 치며 흐느꼈다. 밀어내려고 내뻗었던 설형의 손이 어느새 강우의 팔을 꽉 붙들고 매달렸다. 강우가 스퍼트를 올렸다.

‘으, 응―. 아응.’

설형이 헐떡였다. 눈앞에서 폭죽이 팡팡 터졌다. 허공에 뜬 발가락이 쫙 펴졌다 오므라들었다를 반복했다.

‘혀 내밀어.’

강우가 으르렁거렸다. 반쯤 정신이 나간 설형이 강우가 시키는 대로 혀를 내밀자 그대로 강우가 그것을 삼켰다. 물고, 빨고, 마구 문질렀다.

달았다. 사람의 혀가 이렇게 달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약을 먹은 것은 설형이 아니라 자신인 것 같았다. 입을 맞댄 채로 뒤로 뺐던 허리를 콱, 박아 넣었다.

―!

맞닿은 입안에서 신음이 터졌다. 강우의 것인지 설형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설형이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엉엉 우는 설형을 꽉 끌어안으며 강우가 한 번 더 허리를 깊이 박았다.

뜨거운 쇠기둥이 뱃속 깊숙한 곳을 가르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깊숙한 곳에 더 뜨거운 불덩이를 토해냈다. 퍽, 하고 안이 젖어들었다.

그릉.

강우가 육식동물의 울음소리를 내며 안에 고인 뜨거운 정액을 뒤섞었다. 그 순간 설형의 눈앞에 불꽃이 터졌다. 발가락 열 개가 쫙 오그라들었다.

설형의 두 번째 사정이었다.

▶▷▶

물론 그게 그날 밤 설형의 마지막 사정은 아니었지만.

“나한테 뭐 할 말 있습니까?”

빤히 저를 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강우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아뇨. 없습니다.”

설형이 딱 잘라 고개를 내젓는다. 그럴 거면 그날 대체 뭐하러 앞으로 할 건지 뒤로 할 건지 물었던 거냐고,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저를 빤히 보는 시선은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설형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했고, 잠시 눈싸움이 이어졌다.

“저기, 바쁘신데 죄송하지만 저한테 뭐 시키실 일 있다고 부르신 거 아닌가요?”

잠시 둘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보던 재민이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흠흠, 이거.”

먼저 정신을 차린 설형이 호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뭔데요?”

그렇게 물으면서도 손은 이미 그것을 받고 있었다. 설형이 건네준 것은 반으로 접힌 작은 메모지였다.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재민이 그것을 펼쳤다.

“아직 피해자 신상 정보, 안 나왔지.”

“네.”

메모지에는 호텔 이름과 날짜, 그리고 룸 호수로 보이는 1209호가 적혀 있었다. 이게 뭐냐고 묻기도 전에 설형의 대답이 먼저 돌아왔다.

“거기 적힌 호텔에 가서 그날 밤에 그 방을 결제했던 손님 정보 좀 조사해 줘.”

“이 손님이 누군데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재민에 설형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보지 않아도 옆에 선 도강우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다 알 것 같았다. 하여간 경찰 망신은 혼자 다 시키고 앉았다.

“에?”

그래도 아예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닌지 눈이 휘둥그레져서 되묻는다.

“그럼 정말로 피해자랑 아시는 사이신 거예요?”

“아는 사이는 무슨.”

재민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강우였다. 설형이 끼어들지 말라는 경고의 눈빛을 보내자 강우가 마음대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그 말에 재민도 뭔가 깨달은 모양이었다.

“하긴 아시는 사이면 신상을 알아볼 필요가 없긴 하겠네요.”

그래도 아예 잘릴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다.

“그럼 이건 어떻게 아신 거예요?”

메모지를 들고 묻는 재민에 설형이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해 줄 테니까 지금은 일단 그것부터 알아봐 줘.”

“네, 알겠어요.”

묻고 싶은 것이 잔뜩이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이는 재민이다. 설형이 시키는 것이니 다 이유가 있겠지, 싶었던 것. 어차피 내용은 머릿속으로 암기한 터라 대충 메모지는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일단 이거 결과 나오면 감식반 DNA 검사 결과가 나온 걸로 하죠.”

설형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다.

“그게 무슨.”

“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설형이 무슨 소리냐고, 되묻는 사이 재민은 단번에 무슨 소린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눈치라고는 없던 녀석이 이건 또 엄청 빨리 알아들었다.

“혹 나중에 문제가 되면 한 형사에게는 아무 피해가 가지 않게 할 테니까 걱정할 것 없습니다.”

“네.”

애초에 재민은 처음부터 아무런 생각도 없었던 것 같지만. 태평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재민이 설형을 향해 묻는다.

“그런데 이거 홍 반장님께도 비밀이에요?”

“어. 김 형사한테도.”

헤헤, 재민이 해맑게 웃었다. 설형이 홍 반장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제게만 공유한다는 것이 뿌듯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표정만으로도 지금 재민이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아차린 설형이 얼굴을 찌푸렸지만 이미 재민에게는 그런 설형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비밀 절대 지키겠습니다. 제가 또 한 번 한다면 하는 놈 입니다. 지퍼 쫙.”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한 것도 모자라 주먹까지 불끈 쥐며 다짐하는 재민에 설형이 주먹을 쥐고 날리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말했다.

“빨리 튀어가기나 해라.”

“넵!”

크게 대답한 재민이 휙, 하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곧 멈칫한다. 왜. 다시 돌아서는 재민에게 설형이 눈으로 물었다.

“그런데 이거 왜 백 형사님이 직접 안 가시구.”

왜 일을 나한테 시키는 거냐고 항의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것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재민에게 이번 대답도 강우가 대신했다.

“나 때문입니다.”

“도 검사님 때문이요?”

“도 검사님.”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냐고 설형이 끼어들었지만 강우는 태연히 뒷말을 잇는다.

“내가 이 일은 한 형사에게 맡기자고 했거든요.”

“검사님이요?”

“내가 어디 갈 데가 있는데 백 형사가 그 일을 핑계로 안 가려고 해서요. 어디든 의뢰자와 함께 한다. 경호의 기본 아닙니까?”

“아…….”

홍 반장님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스러운 일을 웬일로 직접 하지 않고 자신에게 맡기나 했더니. 그제야 조금 납득이 되었다. 물론 그것이 전혀 싫지 않은 재민이었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이런 솔직한 제 감상을 말하면 일하는 게 그렇게 좋으면 앞으로는 특별히 더 챙겨 주겠다고 괜히 으름장을 놓겠지만. 그마저도 괜히 민망해서 그런 것이라는 걸 재민은 다 파악하고 있었다.

“이건 제가 맡을 테니까 백 형사님은 아무 걱정 마시고 도 검사님과 다녀오세요.”

“…….”

재민이 걱정 말라는 듯 호언장담을 했지만 설형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아무래도 아침에 도 검사님께 뭔가 안 좋은 소리를 들은 일―대화 내용은 듣지 못했으나 분위기로 봐서는 꽤나 심하게 깨진 것이 분명했다―으로 아직 기분이 상해 계시는 모양이다. 아마도 지금 이렇게 설형을 데려가려고 하는 것도 나름 설형의 냉랭해진 마음을 좀 풀어 보겠다는 도 검사님의 제스처일 테고. 그렇다면 그걸 돕는 것이 후배의 당연한 소임이 아니겠는가.

“그럼 후딱 가서 알아보고, 확인되는 대로 보고할게요.”

손을 들어 경례까지 하는 재민에게 강우가 한마디 덧붙인다.

“다녀오겠습니다!”

말릴 새도 없었다. 말을 할 때부터 이미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던 재민은 이미 벌써 돌아서서 뛰고 있었다. 벌써 계단을 내려가 자신의 차 쪽으로 달려가고 있는 재민의 뒷모습을 무표정한 표정으로 보고 있으려니 그 옆으로 다가선다.

“혹, 문제가 되면 내가 책임질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 거짓말은 하십니까.”

여전히 시선은 정면을 향한 채였다. 강우 역시 정면을 향한 채 태연히 대답했다.

“왜요. 나 때문에 못 가는 거 맞잖습니까.” 

알긴 아십니까? 설형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설형은 애당초 그 남자에 대해 비밀로 할 생각이 없었다. 심지어 모든 사람이 있는 곳에서 털어놓으려고 했었고. 그랬던 설형이 이렇게 비밀리에 그것도 가장 못미더운 재민의 손을 빌린 데에는 피치 못한 사정이 존재했다.

바로 도강우의 협박 아닌 협박 때문이었다.

진실이니 숨기면 안 된다는 설형에게 그럼 저와의 일도 그날 밤의 일부이니 깔 거면 거기까지 모두 까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논리였지만 도강우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호텔에 가서 알아보는 일을 재민에게 시키자고 한 것도 강우였다. 설형이 가는 것은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한번 그러기로 한 일에 대해서 뒤에서 투덜거릴 설형은 아니었다.

“누가 그거 말입니까? 대체 어딜 제가 안 간다고 했습니까. 애당초 어디 간다는 말 같은 거 한 적 없잖습니까.”

아. 따져 묻는 설형에게 작은 소리를 낸 강우가 태연히 대답했다.

“금방 했잖습니까.”

“…….”

말을 말아야지. 속으로 한숨을 내쉰 설형이 그냥 말없이 걸음을 내딛는다. 강우도 태연히 그 옆으로 따라 붙었다.

“그래서 우리 어디 가는데요.”

점퍼 호주머니에서 차키를 꺼내며 설형이 물었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운전석 옆자리 쪽으로 가서 선 강우가 차문을 열며 태평하게 대꾸했다.

“아침 먹으러요.”

설형의 미간이 확, 일그러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물론 이미 차에 올라탄 강우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이름 서지철. 나이 31세, 직업은 KSK 컨설턴트 상무이사. 아버지 회사라고 합니다.”

네 번째 피해자에 대한 브리핑이 한창 진행되는 중이었다. 가벽에 붙은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설형의 표정이 복잡했다.

“피해자의 카드 내역을 조사한 결과 피해자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날 밤에 H호텔에서 묵었던 것으로 나옵니다.”

“H호텔이요?!”

조사한 내용을 듣고 있던 재민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되물었다. 뒤쪽에 서 있던 설형의 눈도 조금 커져 있었다.

“H호텔이면, 어제 백 형사님이 묵었던 호텔 아니에요?”

휙, 하고 고개를 돌린 재민이 설형을 향해 물었다. 순간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설형에게 향한다. 갑자기 몰린 시선에 멈칫했던 설형이 곧 태연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맞아.”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의아해하는 시선들이 설형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그때 불쑥 끼어든 목소리.

“말은 똑바로 해야죠. 한 형사.”

강우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이번엔 반대편에 서 있던 강우에게로 향했다.

“H호텔에 묵고 있는 것은 접니다. 한동안 백 형사가 제 신변 보호를 하게 돼서 어쩔 수 없이 묵게 해 준 것이구요. 그런 게 아니면 형사 월급으로 그런 호텔에 드나드는 게 가능이나 하겠습니까?”

“신변 보호, 요?”

한쪽 눈을 찌푸리며 묻는 홍 반장의 질문에 강우가 덧붙였다.

“아무래도 어제 스토커가 보낸 눈이 도려내진 사진을 보니 좀 불안해져서 말이죠.”

“아. 그러셨군요. 잘하셨습니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죠. 하하하.”

밝게 웃고 있는 홍 반장과 달리 다른 형사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아무리 검사라고 해도 형사를 자신의 개인 비서쯤으로 여기는 강우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검찰 측이 경찰을 개인적인 용무로 부려먹는 그런 일은 아주 흔한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다들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상대가 설형이기 때문도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백설형 형사는 서부경찰서의 아이돌이었으니까.

“진짜 신기하긴 하네요. 검사와 형사 그리고 피해자까지 다 같은 호텔에 존재했었다니. 범인만 그곳에 있었으면 진짜 완벽한 우연, 아니 운명이었을 텐데요.”

“정말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르겠는데요.”

평소라면 분위기 파악 못하고 헛소리를 한다고 한소리 들었을 타이밍에 때마침 문을 열고 들어서던 김 형사가 불쑥 끼어들었다.

“호텔 측에서 제공한 정보에 따르면 그날 피해자와 그 방에 함께 묵은 동행이 있었답니다. 그 남자에 대한 신상은 파악 중에 있구요. 다행히 방 청소하기 전에 연락을 받아 지문이나 머리카락으로 DNA 채취가 가능할 것 같다네요.”

그게 다 신상 정보를 빨리 알아낼 수 있게 한 설형의 공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그건 비밀이었다.

“동행이 남자, 였다는 겁니까?”

“네.”

형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단순히 용의자가 나타났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범인이 어떤 기준으로 피해자를 고르는지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나이, 외모, 그리고 생활 수준까지. 그런데 처음으로 피해자간에 공통분모가 드러난 것이다.

물론 아직 두 번째와 세 번째 피해자도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건 밝혀지지 않았지만 분명 둘도 다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이거.”

김 형사가 노란색 봉투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뭔데요?”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아든 재민이 안에 있는 것을 확인한다.

“핸드폰이네요?”

“맞아. 서지철 개인 핸드폰이래.”

“핸드폰이 있었어?”

설형이 놀라 물었다. 이전 두 번째, 세 번째 피해자 모두 휴대폰은 찾지 못했다. 두 사람 다 사라지기 전에 휴대폰을 가지고 있었으니 범인이 가져가 버린 것으로 추측하고 있었는데.

“호텔방 서랍장 아래로 떨어져 있었나 보더라구요. 호텔 측에서 찾아서 퀵으로 보내왔어요. 한 형사가 비밀번호 풀어서 안에 내용 좀 살펴봐.”

“네, 알겠습니다.”

후다닥, 재민이 제 자리로 달려갔다. 자신의 컴퓨터와 연결시켜 연신 뭔가를 두들겨 대던 재민이 곧 입꼬리를 씨익, 하고 밀어 올렸다.

“저거, 뭐 어떻게 하는 겁니까?”

비밀번호를 푸는 데 몇 초도 걸리지 않는 재민을 보고 있던 강우가 약간 불안한 표정으로 묻는다. 설형이 딱 잘라 대답했다.

“너무 많은 걸 알려고 하지 마세요. 다칩니다.”

물론 자신도 그래서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비밀이었다.

“어때?”

취조실에서 얼마 있지도 않고 곧장 밖으로 나오는 설형에게 홍 반장이 물었다. 설형이 고개를 내젓는다.

“범인이라기엔 너무 어려요. 체격 조건도 안 맞고. 저 손목으로는 살인은커녕 풀뿌리 하나도 못 뽑겠구만.”

“요즘은 마르고 모델 같은 몸매가 유행이래요.”

재민의 설명에 설형이 미간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저건 마른 수준이 아니라 거의 뼈에 가죽만 남은 거 아니야?”

“그래도 저런 체형이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아요. 물론, 남자한테도인 것 같지만.”

“그래도 좀 더 캐 봐야 하는 거 아냐?”

아쉬워하는 홍 반장에 설형은 딱 잘라 말했다.

“더 볼 것도 없어요. 그냥 알리바이만 확인해서 보내라고 해요.”

쩝. 홍 반장이 아쉽다는 듯 취조실 문을 흘끔거린다. 하지만 그런 홍 반장도 설형이 범인이 아니라고 하면 절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휙휙. 실망해서 말도 하기 귀찮아진 홍 반장이 재민을 향해 손을 까딱인다. 설형이 말한 대로 가서 전하라는 의미였다. 재민이 후다닥, 취조실 안으로 사라졌다.

“목격자는 어떻게 됐어.”

홍 반장의 질문에 김 형사가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쯤이면 도착할 때가 됐는데……. 아마 곧 도착할 겁니다.”

“태평하게 기다리고만 있지 말고, 전화라도 해 봐.”

“네.”

“목격자?”

전혀 금시초문인 소식에 설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홍 반장의 재촉에 못 이겨 휴대폰 통화 버튼을 누르던 김 형사가 통화 대기음이 울리는 틈에 급히 설명을 했다.

“피해자가 자주 드나드는 바가 있는데 며칠 전에도 거기서 어떤 남자를 만났었대요. 다행히 거기 일하는 바텐더가 얼굴이며 인상착의를 기억하고 있다고 해서 지금 강 형사가 데리러―, 어? 최 형사. 어디야. 왜 이렇게 안 와.”

무심한 얼굴의 김 형사와 달리 설형의 표정은 점점 딱딱하게 굳었다. 때마침 연결된 통화에 김 형사는 그런 설형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아, 저기 오네요.”

휴대폰을 든 채로 고개를 쭉 빼서 입구 쪽을 살피던 김 형사가 크게 외쳤다. 그곳에 서 있던 형사들의 시선이 김 형사가 바라보고 있는 쪽으로 향했다. 약간의 텀은 있었지만 설형의 시선도 같은 곳을 향한다.

“수사에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 형사.”

“이쪽 방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최 형사를 따라 걸어 들어오고 있던 남자를 향해 인사를 건넨 홍 반장이 곧바로 안내를 지시했고 최 형사가 다시 앞장섰다.

멈칫. 홍 반장의 인사에 아니라는 듯 마주 고개를 숙였던 남자가 방향을 틀다 말고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다.

“이 사람이 왜 여기 있습니까?”

“네? 그게 무슨.”

그가 가리키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뒤늦게 확인한 김 형사가 아, 하고 작은 소리를 냈다. 그리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형사치고는 쓸데없이 잘생긴 얼굴이긴 하죠.”

낄낄낄. 주변에서 웃음소리가 흘러왔지만 남자의 표정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형사요? 이 사람이 형사라는 겁니까? 범인이 아니구요?”

“…….”

단숨에 웃음소리는 사라졌다. 홍 반장이 무거운 침묵을 깨고 다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범인이라뇨?”

그러자 남자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그날 손님과 함께 있었던 의문의 그 남자가 범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바로 이 사람이요.”

그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분명 설형이었다.

“죄송합니다.”

설형이 고개를 푹 숙이자 홍 반장의 표정이 더 험악해졌다.

“임마, 넌, 그런 일이 있으면 미리 미리 보고를 했어야지!”

“……미리 아신다고 뭐 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가만히 듣고 있으면 중간이라도 갈 텐데 꼭 한소리를 해서 홍 반장의 화를 돋우는 설형이다.

“이게, 아주 뭘 잘했다고―!”

결국 화를 참지 못한 홍 반장이 손을 치켜 올렸다. 그리고 휘둘렀다.

퍽―!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백 형사님!”

놀라서 다가서려는 재민에게 괜찮으니 관두라는 의미로 손을 들어 보인 설형이 돌아갔던 고개를 바로 했다.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자 피가 배어나왔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수긍하는 설형의 표정은 담담했다. 오히려 당황한 것은 손을 휘두른 홍 반장 쪽이었다. 당황한 표정으로 굳어 있던 홍 반장이 뒤늦게 버럭 외쳤다.

“임마! 너 왜 안 피해!”

적반하장이 따로 없었지만 설형은 얌전히 대답했다.

“혈압으로 쓰러지실까 봐 한 대 정도는 얌전히 맞아 드릴까 했죠.”

“니가 언제부터 그렇게 날 생각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놈이 일을 이렇게 만들어?!”

설형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불똥은 한 형사와 김 형사에게까지 튀었다.

“그리고 니들은 왜 안 말리고 멍하니 서 있어! 이것들이 빠져가지고 선배가 맞고 있는데 그걸 가만히 보고 있어?!”

“…….”

억울한 표정들이었지만 그래도 변명은 하지 않는다. 괜한 화풀이였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 홍 반장이 흠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된 건데. 거긴 대체 왜 간 건데.”

뚱한 표정으로 묻는 홍 반장에게 입을 다물고 있던 설형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약속이 있었어요.”

“누구랑. 설마 서지철이랑?”

“아뇨. 다른 사람이요.”

고개를 내젓자 잔뜩 찌푸리고 있던 홍 반장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런데 저 목격자가 한 말은 뭐야. 잘못 본 거야?”

“약속이 펑크나서 혼자 술이나 한 잔 하고 가려던 차에 서지철이 옆자리에 있었습니다.”

“…….”

“잠깐 말을 걸어와서 이야기를 했는데 갑자기 제가 몸이 안 좋아져서 서지철이 호텔방을 잡아줬습니다. 그리고 본인은 바로 돌아갔구요.”

“그게, 다야?”

“네.”

뭔가 석연치 않은 눈빛이 설형을 빤히 응시했다. 설형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했다. 물론 조금, 아니 상당 부분 생략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알았어. 그만 나가 봐.”

얼굴을 잔뜩 찌푸린 홍 반장이 더는 꼴도 보기 싫다는 듯 휙휙,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고개를 꾸벅인 설형이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니들도!”

눈치를 보던 두 사람도 후다닥 발길을 돌리려던 그때였다.

벌컥.

노크도 없이 문을 열어젖힌 강 형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홍 반장님, 이것 좀 보셔야겠는데요.”

불길한 예감이 일었다. 그리고 그런 설형의 예감은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다.

[속보] 연쇄 살인범, 드디어 꼬리를 잡히나. 유력한 용의자 긴급 체포

이용자 수가 가장 많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 맨 위쪽에 뜬 메인 기사였다. 그 밑으로 비슷한 맥락의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들이 쭉 이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속보 경쟁을 하느라 기사를 쓰긴 했지만 제대로 된 내용은 없는 기사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 경찰에서 밝히지 않은 수사 내용이 새어나갔다는 거다.

“어떤 새끼야. 어떤 새끼가 자꾸 기자들한테 아직 제대로 사실 확인도 안 된 내용을 흘리고 있는 거야?!”

모니터를 확인한 홍 반장이 분통을 터트렸다. 다들 조용히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던 그때.

“전 아니에요.”

설형과 눈이 마주친 재민이 황급히 고개를 내젓는다. 설형이 뭐라 눈치를 주기도 전에 홍 반장의 시선이 재민을 향했다.

“이건 또 왜 이래.”

“죄송합니다.”

눈살을 잔뜩 찌푸린 홍 반장과 눈이 마주친 재민이 찔끔해서 목을 쑥, 집어넣었다. 설형은 조용히 속으로 혀를 찼다.

“이거 올린 언론사 기자들한테 오보라고 나중에 허위 사실 유포로 고소당하고 싶지 않으면 빨리 이 기사들 내리라고 해. 나중에 진짜 범인에 대한 정보가 들어오면 제대로 기자회견 해 줄 거라고 하고.”

“……네.”

언론사 쪽 홍보 관리를 맡고 있는 강 형사가 수화기를 집어드는 것을 확인한 홍 반장이 고개를 돌렸다.

“다들 입조심들 해. 괜한 이야기가 새어나가서 문제 생긴 지 며칠이나 됐다고 그새.”

“…….”

“뭣들 하고 있어? 내 얼굴만 보고 있으면 범인이 잡혀? 빨리 나가서 뭐라도 찾아봐.”

이렇게 모여 있지 말고 그만 흩어지라며 참새라도 쫓듯 손을 휘휘, 내젓는 홍 반장에도 다들 발을 떼지 않는다. 홍 반장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뭐야. 왜들 안 나가고 꾸물거려.”

내내 표정이 좋지 않던 최 형사가 결국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저희에게도 알려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최 형사의 시선은 설형을 향하고 있었다.

“같이 일하는 동료가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가진 채로 일할 수는 없잖습니까.”

“최 형사, 말이 심하다?”

참지 못한 김 형사가 결국 나섰다.

“내가? 그럼 피해자랑 같이 술 마시고 호텔방까지 들어가 놓고 입 싹 닫고 있던 인간은 안심하고?”

“이 새끼가! 호칭 똑바로 안 할래?!”

“지금 경찰 얼굴에 똥칠할지도 모르는 판에 호칭 챙기게 생겼냐?! 그래도 꼴에 선배라 새끼라고 칭하고 싶은 거 참고 있는 줄이나 알아.”

“이 새끼가 진짜!”

눈이 확 돌아간 김 형사가 손을 뻗어 최 형사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최 형사도 참지 않고 마주 멱살을 잡았다. 난투극이 벌어지기 직전, 홍 반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둘 다 그만 안 둬?!”

불만 가득한 얼굴이긴 했지만 쳇, 하고 혀를 찬 김 형사가 붙잡고 있던 멱살을 확, 하고 내쳤다.

“아주 잘하는 짓이다. 서로 믿고 도와도 범인을 잡을까 말깐데. 꺼떡하면 지들끼리 치고 박고 싸워대니 수사가 이렇게 개판이지.”

“…….”

“최 형사. 니 눈엔 내가 믿을 만한 상사가 아니냐?”

“저는 홍 반장님이 아니라 백 형사, 님을 말한 건데요.”

최 형사가 곧바로 반박해 왔지만 홍 반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말이 그 말이지.”

“그 말이 어떻게―.”

“백 형사 때문에 불안해서 수사 못하겠다며. 그러니까 넌 내가 믿을 만하지도 않은 부하 직원을 수사에 투입시킬 좆같은 상사로 보인단 말이잖아.”

“…….”

“정 궁금하다면, 알려주지. 백 형사는 우연히 그날 그 자리에 있던 피해자와 마주쳤고,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진 백 형사를 피해자가 호텔방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갔다고 했어. 그러니까 백 형사는 피해자가 우연히 만나고 마주쳤던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을 뿐이지.”

“그것 참, 편리한 우연이네요.”

최 형사가 비꼬듯 중얼거렸지만 홍 반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물론 그런 사실을 미리 말하지 않은 것은 백 형사의 명백한 실수라고 생각하지만, 말 그대로 실수인 거지, 그게 지금까지 함께 일했던 동료를 범인으로까지 의심할 만한 근거는 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내가 생각에 반박할 증거나 논리가 있나?”

“…….”

홍 반장의 말에 일부는 납득하는 듯했지만 여전히 불신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래도 대놓고 홍 반장에게 반박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단 한 사람만 빼놓고는.

“그거 전제부터가 좀 잘못된 거 아닙니까? 애초에 어떤 사실 관계 증명 없이 백 형사가 그렇게 말했으니 그 말만 무조건 믿으라는 건 아무래도 무리죠.”

불쑥 끼어들어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다름 아닌 도강우 검사.

홍 반장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번졌다. 도강우가 그렇게 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내내 한 발 물러서서 돌아가는 상황을 방관하고 있던 설형도 순간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편은 못 들더라도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자신을 의심할 줄은 몰랐다.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나 하지 말든가. 괜스레 서운한 기분에 미간을 살풋 찌푸리고 있을 때였다.

―!

갑자기 강우가 설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설형이 그대로 굳었다. 설마, 내가 서운해하는 걸 눈치챈 건 아니겠지. 물론 그럴 리 없겠지만 그래도 상대가 도강우이니 혹시나 싶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런 설형을 비웃기라도 하듯 강우는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대체 입술은 왜 그럽니까?”

“…….”

마치 도저히 신경이 쓰여서 안 되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 묻는 강우의 질문에 그제야 설형도 자신의 입술이 찢어졌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설형의 얼굴이 살풋 찌푸려졌다. 만약 조금 전 일이 아니었다면 도강우가 저를 걱정해서 그러는 거라고 착각할 뻔했다.

“맞았습니까?”

“별거 아닙니다.”

설형이 상관 말라는 듯 딱 잘라 대답하자 강우의 시선이 옆에 있던 재민에게 향했다. 눈치를 보던 재민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그게, 조금 전에 홍 반장님께서…….”

“아, 아니…….”

조금 전보다 홍 반장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짙어졌다.

“아무리 부하 직원이라도 폭력을 쓰시면 됩니까.”

“제가 타이밍이 늦어서 못 피한 것뿐입니다.”

결국 설형이 앞으로 나섰다. 손으로 뒤편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그리고 지금 다들 검사님 말씀만 기다리고 있는데요.”

“…….”

못마땅한 표정이긴 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강우가 다시 고개를 틀었다. 모든 시선이 이쪽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물론 그런 시선 같은 건 강우에게 별것도 아니었다.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뻔뻔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증거도 없이, 믿기는 어렵겠죠?”

물론 그런 것에 불만을 가질 사람은 그곳에 없었다.

“그러니까요. 아닌 말로 백 형사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을지 어찌 압니까?”

기고만장해진 최 형사가 앞으로 나섰다. 저 새끼가. 김 형사가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기세로 얼굴을 일그러트렸지만 강우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하지만 강우가 덧붙인 말은 전혀 예상 밖의 내용이었다.

“그래서 제가 그 증거를 가져왔습니다.”

“아, 증거를 가져―, 네?!”

한 박자 늦게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최 형사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되묻는다.

“증거요?!”

물론 강우는 태평한 얼굴로 들고 있던 봉투를 들어올렸다.

“여기. 삼 일전 서지철이 묵었던 호텔 주차장 입구 CCTV영상입니다. 바텐더가 진술한 서지철이 호텔방으로 올라간 시간에서 불과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차를 몰고 호텔을 빠져나가는 장면이 찍혀 있습니다.”

휙, 최 형사가 강우가 내미는 봉투를 거칠게 낚아챘다. 그 안에 얌전히 들어 있는 것은 CCTV가 담긴 usb였다.

“이만하면 백 형사의 말을 뒷받침할 객관적 증거로 충분하겠죠?”

“CCTV면 틀림없는 증거죠.”

어깨를 으쓱이며 묻는 강우에게 재민이 냉큼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호텔에서 순순히 이걸 내줬습니까? 영장이 있어도 쉽게는 내주지 않는 건데.”

궁금해하는 재민에게 강우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친구 녀석이 오너로 있는 곳이라 개인적인 부탁 좀 했습니다.”

“아……. 친구, 분이요.”

다시 한 번 도강우 검사가 굉장한 집안의 자식이었다는 걸 자각하는 순간이었다.

“그럼 이제 오해는 다 풀린 겁니까?”

씽긋, 하고 웃은 강우가 사람들을 향해 물었다. 강우의 시선을 받은 사람들이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오, 오해는 무슨.”

“그러니까. 그냥 어떻게 된 건지 들어보고 싶었던 것뿐인데.”

“그냥 말로 했어도 됐는데, 우리 사이에 뭘 이런 증거까지, 안 그래?”

“아무렴. 암만.”

방금까지만 해도 새파랗게 의심의 눈빛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말은 잘한다. 재민과 김 형사의 얼굴에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 떠올랐지만 설형은 남의 일인 양 표정 변화가 없이 덤덤했다.

“그럼 어제는요?”

하지만 최 형사는 아직 포기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두 사람 어제도 같은 호텔에서 묵었죠. 우연치고는 너무 절묘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최 형사. 그쯤 하지?”

“그러게. 백 형사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정도 했으면 됐잖아.”

적당히 하라고 말리고 든 것은 오히려 3팀이 아니라 다른 팀 형사들이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풀이 죽을 최 형사가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이 괜한 트집을 잡아 설형을 모함한다는 오해까지 받았으니, 억울해서라도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어제 호텔에 간 시간이 몇 십니까, 백 형사님?”

그건 왜 묻는 건지 의아했지만 설형은 친절하게 대답했다.

“확인을 하지 않아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4시에서 5시 사이었을 겁니다.”

최 형사가 옆에 있던 같은 팀의 이 형사에게 확인을 하듯 묻는다.

“마지막 목격자가 서지철이 새벽에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진술한 시간도 4시 반에서 5시 사이였지?”

“뭐……, 그렇지.”

갑작스럽게 질문을 받은 이 형사가 난감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인내심이 떨어진 김 형사가 확 얼굴을 찌푸리며 따져 물었다.

“그 말은 뭐야. 그럼 백 형사님이 서지철한테 전화라도 해서 불러내기라도 했다는 거야?”

“아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잖아?”

“하?!”

이 정도까지 가면 아주 막가자는 거였다. 이번에는 재민도 가만있지 않고 나섰다.

“최 형사님, 그건 말도 안 돼요. 어제 백 형사님은 계속 도 검사님과 함께 계셨는데요.”

하지만 최 형사는 그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오히려 반박했다.

“도 검사님이 잠든 뒤에 혼자 몰래 빠져나갔을 수도 있지. 아, 혹시 두 분이 같은 침대에서 주무셨습니까?”

“이 새끼가 진짜. 말이면 단 줄 아나.”

“그런 게 아니라면 백 프로 결백하다고 할 수 없지.”

깐족거리는 최 형사에 김 형사가 치미를 화를 참느라 얼굴이 붉어졌다 검어졌다 한다. 금방이라도 주먹을 날릴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을 가라앉힌 것은 재민이었다.

“CCTV! 이것도 CCTV로 백 형사님이 밖으로 나갔는지 아닌지를 확인해 보면 되잖아요.”

그렇죠? 하고 묻는 재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도강우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재민의 생각과 달리 마주한 강우의 얼굴엔 난처한 기색이 번져 있었다.

“아. 이쪽은, 아는 분이 없으시구나.”

하긴, 아무리 도강우라도, 서울 시내 모든 호텔에 다 인맥이 닿아 있는 것은 아니겠지. 제가 생각해도 너무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했다며 멋쩍게 뒷머리를 긁고 한발 뒤로 물러서려는 재민에게 강우가 고개를 내저으며 이유를 설명했다.

“이 호텔은 제가 지분이 있으니 구하는 건 더 쉬운데, 안타깝게도 VIP층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서요.”

“……아, 네.”

다시 한 번 눈앞의 남자가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인종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휴대폰.”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강우가 다른 방법을 떠올렸다.

“휴대폰이요? 무슨 휴대폰이요?”

“피해자 휴대폰 말입니다. 최 형사 말대로 피해자가 누군가의 전화를 받았다면, 그 시간에 통화한 내역이 있을 테니까요. 그럼 전화를 한 사람의 번호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

그제야 재민의 얼굴에 화색이 번졌다. 후다닥, 제 책상 쪽으로 달려간 재민이 피해자의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 시간에 통화를 한 기록은 없는데요?”

“그, 그럴 리가!”

당황한 최 형사가 후다닥 달려가 휴대폰을 빼앗듯 낚아챘다. 순순히 휴대폰을 넘겨준 재민이 것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인다.

“보세요. 아무것도 없잖아요.”

“이 번호는 뭐야. 4시 23분에 걸려온 전화.”

“네?”

재민이 다시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아, 부재중 통화가 하나 있었네요.”

“다시 걸지도 않고 몇 초 만에 끊어진 걸 보면 그냥 잘못 걸린 전화 같은데. 잠시만요.”

화면을 누르고―아마도 통화버튼을 누른 듯했다―휴대폰을 잠시 귀에다 대고 있던 재민이 이내 그것을 떼고 종료 버튼을 눌렀다.

“잘못 걸린 전화 맞네요. 대리운전 광고로 넘어가는 거 보니.”

휴대폰을 가볍게 흔들며 선언하기 무섭게 강우가 최 형사를 향해 씽긋하고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목격자 진술에 착오가 있었던 것 같은데.”

“……호텔 전화, 호텔 방 내에 전화가 있잖습니까. 분명 그걸로―.”

“최 형사님.”

강우가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의문을 제기하는 최 형사의 말을 자르고 나직이 그 이름을 불렀다. 웃음기를 띠고 있던 조금 전과는 달리 강우의 표정은 무표정했다. 웃고 있을 때는 그저 잘난 외모라고만 생각했던 얼굴이, 표정을 지우자 전혀 다른 얼굴이 되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편하게 말을 걸고, 그랬던 것이 거짓말처럼 갑자기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

“제가 목격자 진술에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한 것 같은데요. 못 들으셨습니까?”

“……아, 아뇨. 들었습니다.”

제가 백설형을 물어뜯는 데 정신이 팔려 눈앞의 남자가 허용해 준 선을 넘어 버렸다는 걸, 최 형사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럼 어떻게 하셔야 합니까?”

“진술을, 목격자 진술을 다시 확인해야죠.”

“그런데 왜 계속 이러고 계십니까? 저한테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아뇨. 확인하러 가 보겠습니다.”

괜히 강우에게 밉보여서 좋을 것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 더 설형을 물고 늘어지기엔 증거가 너무 빈약했다. 이래 봐야 괜히 동료를 의심해서 꼬투리 잡으려는 사람으로 여겨질 뿐이다. 괜찮아. 꼭 지금이 아니라도 언제든 기회는 온다. 흘끔, 곁눈질로 설형을 보며 생각한 최 형사가 순순히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최 형사와 그 팀들이 문밖으로 사라지자 이번엔 주변에 멀뚱하게 서 있는 형사들을 향해 물었다.

“뭐, 더 확인하고 싶은 것들이라도, 있습니까?”

“…….”

친절하게 묻는 것 같지만 사실 그 질문의 진짜 의도는 더 할 말 없으면 그만 꺼져라, 였다. 그것을 모르지 않는 사람들이 일부는 자신의 자리로, 또 일부는 합동 본부 밖으로 조용히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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