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2권) (5/11)

1

“따라오지 마십시오.”

걸음을 내딛는 것을 멈추지 않은 채 설형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뒤따라오는 발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제가 말린다고 말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아. 낮게 한숨을 내쉰 설형이 포기한 듯 걸음을 내딛었다. 뒤따라오는 발소리가 아예 등 뒤로 바싹 따라붙었다.

“여기 묻을 겁니까?”

건물 뒤편, 공터에 박스를 내려놓은 설형이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삽을 집어들었다. 그런 설형을 향해 강우가 묻자 설형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왜요. 법 위반이라 안 된다고 할 겁니까?”

날이 선 설형에도 강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무심히 대답했다.

“확인차 물은 것뿐입니다.”

그리고는 설형의 손에 들린 삽을 가져간다. 뒤늦게 자신이 괜히 과민하게 굴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런 것을 순순히 인정할 만큼 솔직한 성격도 못되는 설형은 그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강우를 바라볼 뿐이다.

푹푹, 강우가 무심한 얼굴로 삽으로 땅에 구덩이를 팠다. 삽질은커녕 무거운 것을 들어 본 적도 없을 것 같은 얼굴로 단숨에 뚝딱하고 작은 구덩이를 만들어냈다.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

“더 팔까요?”

“그 정도면, 됐습니다.”

아무 대답이 없는 설형에 강우가 멈췄던 삽질을 다시 하려고 하자 설형도 그런 강우를 만류했다. 푹, 하고 강우가 들고 있던 삽을 바닥에 깊이 박았다.

툭.

설형이 박스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리고 한 번 망설이지도 않고 맨손으로 죽은 고양이를 안아들었다. 순간적으로 그것을 목격한 강우가 눈살을 살풋 찌푸렸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섬뜩한 장미꽃은 손도 대지 않고 고양이만 조심스럽게 구덩이 안에 눕혔다. 손으로 흙을 덮고 꾹꾹 눌러 밟았다. 봉분은 따로 만들지 않고 주먹만 한 돌로 위치만 표시했다.

“이제 가죠.”

설형이 흙투성이가 된 손을 털어내며 말했다. 하지만 그대로 돌아서는 설형의 앞을 그때까지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던 강우가 가로막았다.

“아직 우리끼리 할 얘기가 좀 남지 않았습니까?”

“무슨 얘기요? 전 검사님과 더 할 얘기 없는데요.”

설형이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옆으로 한걸음 옮기자 강우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정 그렇다면 그냥 한 형사에게 물어보죠, 뭐.”

“그래서 뭐가 궁금하신데요.”

단숨에 원래 자리로 원위치한 설형이 되물었다.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강우는 태연했다. 씨익, 하고 협박범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매력적인 미소를 머금은 채 내내 묻고 싶었던 질문을 물었다.

“스토커가 있었습니까?”

“스토커는 무슨. 그냥 할일 없는 미친놈이 잠깐 유흥으로 그런 것뿐입니다.”

“있긴 있었나 보네요.”

“…….”

설형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래서 그 미친놈이 누굽니까?”

“이미 이 년이나 지난 일입니다. 흥미를 잃었는지 갑자기 사라졌고요.”

“누군지도 모른다는 거네요.”

“갑자기 사라졌다니까요.”

“그러면 이번엔 사라지지 못하게 해야겠네요. CCTV부터 확인하러 가죠.”

어깨를 으쓱인 강우가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전과 반대로 설형이 그의 앞을 가로 막았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검사님이 신경쓰실 일이―.”

“이게 왜 백 형사 일입니까?”

오히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강우에 설형은 기가 막혔다.

“그럼 이게 검사님 일입니까?”

“내 눈 도려낸 거 못 봤습니까?”

“그건 그냥 장난―.”

“백 형사 눈 도려낸 거 아니라고 그렇게 쉽게 말하는 겁니까? 괜히 그냥 뒀다가 나한테 직접적인 피해가 오면 어떻게 할 겁니까? 사건 나고 후회해 봤자 늦는 거 모릅니까?”

“…….”

설형이 얼굴을 확 찌푸렸다. 도강우가 그냥 해 본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저를 생각해서 범인을 찾아야겠다고 하지 않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대체 잡아서 뭐 어쩌시려구요. 어차피 사진에 눈 도려낸 것 정도로는 처벌도 안 될 텐데요.”

물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설형도 아니라 한마디 덧붙이자 강우가 곧바로 반박하고 나섰다.

“왜 안 됩니까? 내가 이래봬도 대한민국 검삽니다.”

“……사적인 복수를 공권력으로 하겠다는 겁니까?”

기가 막히다는 듯 되묻는 설형에게 오히려 강우가 되물었다.

“그럼 안 됩니까?”

“당연히 안 되죠. 늘 이런 식이셨습니까, 지위를 이용해서 마음대로 죄없는 사람도 가두고?”

정색하는 설형과 달리 강우는 태연히 어깨를 으쓱였다.

“죄가 왜 없습니까? 동물학대죄면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천만 원 이하의 벌금인데?”

“…….”

그제야 설형도 잊고 있었던 녀석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설형이 아니었다.

“주인도 없는 길고양이 한 마리 죽였다고 그런 처벌이 가능할 것 같습니까?”

“그럼 공무집해방해죄로 걸죠.”

“고작 며칠 잡아 놓자고 이 고생을 하겠다는 겁니까?”

“일단 잡아 놓고 신상 좀 털면 다른 죄도 줄줄이 나오겠죠.”

“표적수사는 불법인 거 모르십니까?”

이젠 더 반박할 말이 없지? 하고 턱을 치켜 올린 설형에게 돌아온 대답은 고작 이것이었다.

“알 게 뭡니까.”

“……하.”

대한민국 검사라는 사람의 입에서 이런 대답이 나올 거라고는 예상도 못했다. 하지만 강우는 마치 아주 납득할 만한 법적인 근거를 들어 대답한 것 마냥 당당했다.

“동물한테 그딴 짓 하는 새끼들은 잠재적 강력범죄자라는 거 누구보다 백 형사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

“그리고 난 내 얼굴에 해코지한 놈을 그냥 봐줄 만큼 좋은 성격이 아니라.”

“물론 후자가 더 큰 이유인 거구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

이건 뭐 핀잔을 줘도 모르니 할 말이 없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설형이 걸음을 내딛었다. 성큼성큼 몇 걸음 앞서가던 설형이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는 강우를 향해 한마디 한다.

“CCTV 확인하러 가신다면서요.”

강우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 할 말만 끝낸 설형이 그대로 다시 뒤돌아섰다. 성큼성큼, 걷는 속도를 높였지만 뒤따라오는 발소리는 단숨에 등 뒤로 바싹 따라붙었다.

“역시, 도난 오토바이네요.”

두 사람이 확인한 CCTV 속에 퀵서비스 배달기사는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하지만 들어올 때부터 나갈 때까지 시종일관 헬멧을 쓰고 있어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나마 외부 CCTV에 찍힌 오토바이 번호판을 알아냈지만 그마저도 도난 오토바이였다.

“괜히 시간낭비만 했네요.”

불퉁거리는 설형과 반대로 강우는 전혀 실망한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이 뭔가 불길한 예감마저 들었다. 설형이 슬그머니 물었다.

“설마 이번에도 할아버지께 부탁할 생각은 아니죠?”

“설마요.”

휴우. 강우의 즉답에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잠시.

“그 정도 일로 김 비서님을 소환하는 건 아깝죠. 안 그래도 바쁘신 분인데. 이 정도는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어요.”

“아, 네.”

씨익. 하고 웃는 강우에게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 설형은 더 질문하지 않았다. 어차피 말린다고 말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쪽이 속편할 것 같았다. 안 그래 보이는데 은근 뒤끝이 긴 남자였다.

“그런데 그 고양이 이름이 뭡니까?”

복도를 나란히 걷던 강우가 불쑥, 지나가듯 물었다. 덕분에 설형도 무심코 대답하고 말았다.

“이름 없―.”

아차, 했을 땐 이미 늦었다. 어차피 상대는 확신을 하고 물은 것이라 확인을 한 것에 불과했으니까. 아마도 조금 전 대화에서 설형이 길고양이라고 확신한 걸 듣고 추리한 모양이었다. 누가 검사 아니랄까 봐 사실 관계를 알아차리는 게 확실히 예리했다.

“역시 백 형사가 돌보는 고양이였군요.”

“……돌보긴요. 가끔 보이면 캔 하나 챙겨 준 게 고작인데.”

이 건물 뒷마당이 바로 녀석이 종종 출몰하던 장소였다. 이름도 없었다. 그저 못생긴 고양이라고 생각한 것이 다였다. 언젠간 못난이라고 불러봤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이래도 이게 단순한 장난에 불과하다는 겁니까?”

“…….”

설형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래서 말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저와 관련이 있는 고양이라는 걸 알게 되면 분명 시끄러워질 테니까. 그나마 팀원들에게는 들키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물론 어떤 의미로는 가장 몰랐으면 하는 사람에게 떡하니 들키고 말았지만. 하아,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쉰 설형이 대답했다.

“장난입니다.”

“하.”

강우가 기가 막히다는 듯 입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물론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지만. 하지만 설형도 전혀 물러서지 않고 제 할 말을 이었다.

“생명이 셋이나 빼앗긴 이번 사건에 비하면 이건 아직 장난에 불과하죠.”

“…….”

“그래서, 이번 사건부터 마무리하고 조용히 조사할 생각이었습니다. 저도 그런 장난친 놈을 그냥 둘 생각은 없거든요.”

“…….”

그제야 조금이지만 강우의 굳었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휴우. 설형이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바로 설형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지금 제가 도강우의 표정이 누그러진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는 걸 깨달았던 것. 사실 평소 설형이라면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그쪽은 상관 말라고,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피해 버렸을 터였다.

“왜 그럽니까?”

갑작스레 표정이 일그러지는 설형을 본 강우가 물었다. 물론 사실대로 말할 수 없는 설형의 얼굴이 난감함으로 더 일그러졌다.

“백 형사?”

강우의 얼굴이 좀 더 바싹 다가왔다. 눈동자가 가까워졌다. 안 그래도 거짓말에 재주 없는 설형이 눈을 마주한 채 대충 둘러댈 수 있을 리는 더더욱 없었다. 게다가 사람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재주가 있는 강우가 아닌가. 설형이 급히 몸을 뒤로 물렸다. 하지만 물러선 곳은 벽으로 막혀 있었다.

“백설형―.”

바싹 다가선 강우가 다시 한 번 설형의 이름을 되뇐 그때.

“백 형사님!”

벌컥, 문이 열리고 안에서 튀어나온 재민이 두 사람, 정확히는 설형을 향해 손을 마구 흔들었다. 강우의 고개가 돌아갔고 설형은 그 틈에 황급히 강우에게서 벗어났다.

“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지만 재민을 향해 묻는 설형의 얼굴 표정은 태연했다.

“두 분 그새 또 싸우셨어요?”

혹 저와 강우가 바싹 붙어 있던 모습을 재민이 오해하지 않을까 잠시 걱정했지만 그건 재민을 과대평가한 것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한테 할 말 있었던 거 아니야?”

“아.”

설형의 말에 재민이 깜빡했다는 듯 한 번 더 손을 흔들었다. 그제야 그 손에 들린 서류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설형은 단숨에 그 서류의 내용을 알아차렸다.

“나왔어?”

“네!”

설형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번졌다. 설형이 한발 내딛는 사이 재민은 벌써 제 앞에 와 있었다. 서류를 받아 확인한 설형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재민이 칭찬받기를 기다리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였다. 앞에 선 재민의 등 뒤로 보이지 않는 꼬리가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하마터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을 뻔했다. 고개를 돌린 설형이 옆에 서 있는 강우에게 상황보고를 했다.

“한지석이 드나들었던 가게 리스트가 나왔다네요.”

“아.”

그제야 강우도 재민의 손에 들린 것이 뭔지 알아차렸다.

“다른 피해자들과 접점은?”

“아무래도 잘못 짚었나 봐요. 전혀, 없어요.”

뒤이은 설형의 질문에 재민이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풀이 죽은 재민과 달리 정작 설형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일단 리스트에 있는 가게들부터 확인해 보자고. 분명 우리가 모르는 접점이 있을 거야.”

“네.”

살짝 실망한 듯 풀죽어 있던 것도 잠시 설형의 신속한 지시에 재민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이서 움직이실 거죠? 전 그럼 김 형사님과 함께 움직일게요.”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할 말을 마친 재민이 다시 열고나왔던 문 안으로 사라졌다. 잠시 멀뚱히 서 있던 설형이 종이를 호주머니에 대충 구겨넣으며 뒤돌아섰다. 그리고 강우를 향해 말했다.

“가죠.”

“…….”

“피곤하시면 저 혼자 가도―.”

“가죠.”

혹시나 했던 기대는 역시나로 끝났다. 쳇, 하고 혀를 찬 설형이 벌써 저만치 앞서서 걸어가고 있는 강우의 뒤를 따라 걸음을 내딛었다.

물론 그런 설형의 기분과는 별개로 이제는 일견 친근해 보이기까지 하는 두 개의 그림자가 복도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글쎄요. 어제 온 손님도 아니고 일 년 전 손님 얼굴을 기억하는 건 좀 무리죠. 형사님 같은 손님이라면 또 모를까.”

고개를 내저으며 바텐더가 들여다보던 사진을 다시 돌려주었다. 그나마 가게 입구에 CCTV가 설치되어 있지만 저장 기간이 하루밖에 되지 않아 그마저도 무용지물이었다.

“오늘은 그만 철수하죠.”

가게 밖으로 나오며 시계를 확인한 설형이 말했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 벌써 시간이 새벽 4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가게 마감시간도 다 되었고 오늘은 이쯤에서 철수했다가 가게들이 문을 여는 저녁때 다시 수사를 재개하는 게 낫겠다 싶었던 것.

“호텔로 바로 가실 거죠?”

운전석에 탄 설형이 확인하듯 묻자 옆자리에 앉은 강우가 그런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대꾸도 없이 눈을 감았다. 물론 안전벨트는 하지 않은 채였다.

“주차장으로 들어가죠.”

막 호텔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눈도 뜨지 않고 도착한 건 어떻게 알았대. 그렇게 말하면서도 강우는 눈을 감은 채였다. 뭐라 불만을 토로할 기운도 없어 설형은 조용히 호텔 1층으로 향하던 차를 돌려 지하주차장 입구로 들어섰다. VIP 전용 엘리베이터 바로 앞에 차를 세운 설형이 고개를 돌렸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설형의 인사에 강우가 차문을 열어 내리는 대신 설형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는 손을 내뻗는다.

“뭐하는―.”

당연히 저를 향해 손을 내뻗는 것이라고 오해한 설형이 반사적으로 몸을 문 쪽으로 바싹 붙이며 항의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정작 손이 향한 곳은 설형이 아니라 핸들 아래쪽 자동차 키가 꽂혀 있는 곳이었다.

“내려요.”

“……네?”

설형이 말릴 새도 없이 꽂혀 있는 차키를 뽑은 강우가 차문을 열고 나갔다. 잠시 멍하게 있던 설형도 이내 얼굴을 찌푸리며 차문을 박차고 나갔다.

“뭐하시는 겁니까.”

따져 묻는 설형을 향해 강우가 태연히 대답했다.

“내가 원하는 거 하나, 뭐든 하겠다고 했죠? 그거 지금 쓰죠.”

“…….”

“혹시 잊었습니까?”

“아뇨. 안 잊었습니다.”

잠시 말이 없는 설형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설형이 고개를 내저었다. 뜬금없이 이 얘기는 왜 꺼낸 건가 싶어 반응이 조금 늦었을 뿐이다.

“안 잊었으니까 말씀하세요. 올 때 갈 때 전용 운전기사라도 시키시게요?”

“아니. 고작 그런 일에 써먹기는 아깝죠. 뭐든, 시킬 수 있는 건데.”

그렇게 말한 강우가 씨익, 하고 웃었다. 설마.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불길한 예감에 설형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런 설형을 비웃기라도 하듯 강우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내 개인 경호원.”

“……네?”

“물론 24시간 밀착 경호를 원합니다. 기한은 그 스토커 신원을 밝혀낼 때까지.”

“…….”

“왜요. 싫습니까?”

“선택권이 있는 겁니까?”

“물론 없죠.”

“그런데 왜 묻습니까.”

“일단 기분 정도는 알아 둘까 싶어서요.”

“하.”

설형이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손목시계를 확인한 강우가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그럼 그만 올라갈까요, 백 경호원?”

하여간 사람 괴롭히는 것도 창의적으로 하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 원인은 다 제가 제공한 것이니 어쩔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체념한 설형이 무릎을 굽혀 몸을 숙이며 대답했다.

“네, 그러시죠, 고용주님.”

물론 멀뚱히 서 있는 경호원을 대신해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것은 고용주였지만.

지――잉.

지―――잉.

지――――잉.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던 설형이 손을 뻗었다. 바닥을 더듬어 그때까지도 진동하고 있는 핸드폰을 집어 누군지 확인도 하지 않고 곧바로 귀로 가져갔다.

“여보세요.”

사실 설형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 사람은 손에 꼽히고 그마저도 대부분 팀원들로 집중되어 있으니 굳이 확인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그것은 틀리지 않았다.

―백 형사님. 빨리 오셔야겠어요.

재민이었다. 그것도 평소와 달리 목소리가 확연히 낮아진 재민. 잠이 단숨에 달아났다.

“무슨 일이야.”

그렇게 묻는 그 순간에도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스쳐지나갔다. 대부분 그렇게 예상한 것 중에 하나는 해당되었지만 이번엔 그렇지 못했다.

―네 번째 사체가 발견됐어요.

“두 분이 같이 계셨어요?”

사건 현장 주변에 둘러놓은 노란색 테이프를 들어 올리며 재민이 물었다. 상체를 숙여 안으로 들어서던 설형이 멈칫했지만 이내 고개를 들고 대꾸했다.

“앞에서―.”

아니, 그러려고 했다. 냉큼 끼어든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어제 제 숙소에서 함께 잤습니다.”

설형의 고개가 휙, 하고 꺾였다.

뭐하는 짓입니까. 눈으로 항의하는 설형에도 강우는 어깨를 으쓱였을 뿐이다. 설형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 말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설형뿐이었다.

“아, 그러셨군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인 재민이 들고 있던 노란 접근금지 테이프를 놓으며 앞서서 걸었다. 사실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정상이긴 했다. 좁은 숙직실에 땀 냄새 나는 사내들끼리 마구 엉켜 자는 일이 일상인 형사들이 아닌가. 딱히 그런 것이 아니라도 평범한 사고를 가진 대한민국 남자라면 그것으로 이상한 상상을 하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긴 했다.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잠시 거 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강우에 설형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물론 그런 것에 눈 하나 깜짝할 도강우가 아니지만. 

“네, 최 서기관님.”

마침 울리는 핸드폰을 태연히 받는 강우를 노려봐 봐야 별 소용은 없었다.

“네, 지금 현장입니다.”

전화에 대고 말하면서 강우가 대기하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먼저 가 보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강우를 노려보던 설형은 휙, 하니 뒤돌아섰고 그런 설형과 강우를 번갈아보던 재민 역시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설형의 뒤를 따랐다.

“같은 방에서 잔 건 아니야.”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던 설형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네?”

“난 거실에서 잤다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재민이 뒤늦게 설형이 강우가 했던 말에 대한 변명이라는 것을 깨닫고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별일이시네. 변명을 다 하시고.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이내 재민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호텔에 거실이 있어요?”

“거실만 있게? 손님방에, 회의실에, 주방도 있어.”

몇 번 잤다고 그새 익숙해진 설형은 시큰둥했지만 재민은 놀란 토끼눈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니까 스위트룸, 뭐 그런 거예요?”

“그렇다더라.”

“진짜 재벌은 다르네요.”

비상이 걸려도 좁은 숙직실 아니면 찜질방, 그나마 짬되는 팀장급도 기껏해야 모텔 방이 고작이다. 호텔 방이라는 것도 놀라울 판에, 무려 스위트룸이라니. 이 정도 되면 딴 세상 이야기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진짜 대단한 분이었구나, 감탄하듯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재민이 설형을 향해 한마디 한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잉? 설형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다.

“뭐가 다행이라는 거야?”

“도 검사님이 옆에 계셔서요. 귀찮다고 혼자 차에서 주무시거나 하면 어쩌나 좀 걱정했는데.”

설형의 얼굴이 더 일그러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내가 옆을 지키고 있는 거거든? 자기 사진 눈 도려낸 그 새끼 잡힐 때까지 24시간 개인경호 하래서.”

“에이. 설마 도 검사님이 정말로 본인 경호 때문에 그러신 거겠어요?”

“헐.”

그 일 이후로 도강우에 대한 평가가 과도하게 좋아진 재민이었다. 그냥 사실대로 다 말해 버려?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으려니 재민이 답답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당연히 백 형사님이 걱정되니까 그러신 거죠. 말도 안 되는 핑계까지 대시면서.”

“너 도검이 그렇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그렇잖아요. 그런 게 아니면 굳이 왜 백 형사님을 경호원으로 써요. 상사라고 고분고분하길 하나 성격이 좋길 하나.”

“……내가 요즘 좀 편하게 해 줬지?”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설형에 재민이 냉큼 말을 돌렸다.

“설마 그 좋은 호텔에 보안이 불안해서요? 아니면 경호원 고용할 돈이 없어서?”

“…….”

“걱정되셔서 그런 핑계라도 대고 못 가게 하신 게 제 눈에도 딱 보이는구만, 어떻게 천하의 백 형사님이 그걸 모르세요 그래?”

“……넌 저 인간을 너무 좋게 보고 있다니까.”

불퉁하게 중얼거리는 설형에게 재민이 고개를 내젓는다.

“좋게 보는 거든 뭐든 전 도 검사님 말에 무조건 찬성이에요. 기억 안 나세요? 전에 그 미친 스토커가 백 형사님 집까지 침입했던 거?”

“그냥 들어왔다 간 것뿐이잖아.”

“그러니까 더 소름끼치죠. 차라리 뭘 훔쳐가거나 그런 게 낫지.”

부르르 어깨까지 떠는 재민을 향해 설형이 그 얘긴 그만하자고 말을 하려던 찰나였다.

“뭘 훔쳐가는 게 낫다는 겁니까?”

불쑥, 등 뒤에서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에 설형이 얼굴을 찌푸렸다. 마주보고 있던 재민이 설형의 뒤쪽을 향해 물었다.

“도 검사님 숙소가 그렇게 좋다면서요?”

“한 형사!”

설형이 급히 재민의 이름을 불렀지만 이미 강우의 시선은 저를 향해 있었다.

그렇게 질색을 하더니 정작 본인 입으로 다 얘기했나 보네요? 물론 입으로 소리 내어 묻는 것은 아니었지만 강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설형의 사나운 시선이 재민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재민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나마 스토커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저도 언제든 경호원으로 쓰셔도 됩니다.”

금방 다행이라고 했던 것 취소.

“스위트룸이 어떻게 생긴 곳인지 구경이나 해 보게요.”

“글쎄요. 전 누가 제 사적인 영역에 들어오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이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당연히 그러라고 할 줄 알았던 강우가 딱 잘라 거절하자 설형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하지만 정작 말을 꺼낸 재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까지 쳤다.

“아, 그러시구나. 그렇죠. 누가 자기 사적인 영역에 들어오는 건 싫죠.”

저 같으면 무안해서 잔뜩 굳어 있을 텐데―사실 애초에 그런 질문 자체를 하지 않았겠지만―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넘기는 재민을 보니 저와는 인종 자체가 다른 녀석이란 걸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대신 다른 스위트룸으로 잡아 주죠. 내 방보다 조금 작긴 하지만 구조는 거의 비슷할 겁니다.”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그냥 농담 한번 해 본 거예요.”

“…….”

“어, 감식반 현장 감식이 끝난 모양이네요.”

재민이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틀자 흰색 옷을 입은 감식팀이 짐을 챙겨 현장에서 물러서고 있었다. 동시에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형사들이 교대하듯 현장으로 몰려들었다.

“도 검사님.”

그중에 몇이 강우를 의식한 듯 이쪽을 보고 있었다. 시체 쪽으로 향해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하던 일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네. 가죠.”

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에 강우도 천천히 몸을 돌렸다.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말해요.”

그래도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들으셨죠?”

한 박자 늦게, 강우를 따라 걸음을 내딛으려는 설형에게 재민이 것보라는 듯 턱을 치켜 올리며 속삭였다.

“뭘.”

무표정하게 되묻는 설형에게 재민이 답답하다는 듯 다시 속삭인다.

“사적인 영역엔 누구도 절대 안 들인다잖아요.”

“그렇겐 말 안 했던 것 같은데.”

“그게 그 말이죠.”

세상에 소문이 어떻게 부풀려지나 했더니 다 이렇게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런 영역에 백 형사님은 들이신 거잖아요.”

“…….”

순간 설형이 긴장했다. 도강우가 자신만 특별 취급하는 거라고 오해하는 거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괜히 특별 취급한다고 오해받는 것도, 이유를 고민하게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재민을 너무 과대평가했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 얼마나 부하 직원에 대한 사랑이 넘치시는 상삽니까?”

“…….”

저기요. 부하 직원인 너 금방 까였거든? 양손을 부여잡고 기도라도 하는 포즈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재민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보고 있던 설형이 그대로 뒤돌아섰다.

“어? 같이 가요. 백 형사님.”

다급하게 자신을 향해 외치는 소리에도 설형은 속도를 더 높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 걸음은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멈춰야 했다.

“백 형사.”

설형의 앞을 가로막은 낯익은 얼굴은 이석진이었다. 예상치 못한 그의 등장에 놀란 것도 잠시 이내 석진이 입고 있는 하얀 옷을 보고 그가 현장 감식을 위해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너희 담당 구역이었어?”

“원래는 후배 담당인데 연락이 안 된다고 야근 중이던 나한테로 떠넘겨졌지.”

“아.”

알 만했다.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시간이니. 열심히 일하는 직원일수록 자기가 해야 할 몫보다 더 많은 일을 떠맡게 되는 건 어디든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동일범이 맞아?”

흘끔, 시체가 유기된 곳―지금은 주변을 둘러싼 형사들 뒤통수밖에 안 보였지만―에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고개를 돌린 설형이 무심하게 묻는다.

“좀 있다가 사체 인계받아서 부검을 해 봐야겠지만, 거의 동일범이 확실해. 사체 유기한 방식이나, 피해자 성기만 잘라낸 범죄 방식이 정확히 일치하니까.”

“그래?”

“왜. 네가 보기엔 아닌 거 같아?”

“글쎄. 꼭 그런 건 아닌데, 이번엔 너무 빠르잖아.”

“…….”

“두 번째 살인과 세 번째 살인, 모두 이전 살인과 6개월 텀을 두고 일어났어. 세 번째 살인이 얼마 전에 일어났으니 적어도 네 번째는 몇 달 뒤에나 일어나야 말이 된단 말이지.”

“연쇄 살인의 텀은 점점 짧아지기 마련이잖아.”

“그러니까 더 이상하다는 거지.”

“뭐가 이상한데요?”

옆에 서서 두 사람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듣고 있던 재민이 불쑥 끼어들었다. 전혀 짐작도 되지 않아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불쑥 끼어든 재민에게 석진의 시선이 잠시 닿았지만 역시나 궁금한 것은 석진도 마찬가지였던 모양. 다시 설형을 향해 시선을 둔다.

두 사람의 시선을 한몸에 받은 설형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을 내놓았다.

“점점 짧아지기 마련인 텀이 이전에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었잖아. 그 말은 어떤 이유 때문에 일부러 그 텀을 맞추고 있었다는 건데.”

“어떤 이유요?”

“그거야 나도 모르지. 뭔가를 은폐하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고, 단순히 병적인 강박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

“아.”

자신은 전혀 생각도 못 해 본 추측이었다. 재민이 존경스럽다는 눈으로 설형을 우러러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설형은 할 말을 이어갔지만.

“그래서 혹시나 카피캣일 수도 있지 않나 싶었는데, 네가 아니라면 아니겠지. 어쩌면 그 텀은 우연이었던 모양이네.”

“혹은 범인을 자극하는 어떤, 일이 있었거나.”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석진이 처음으로 의견을 내놓았다.

“어떤 일?”

그만 직접 사체를 확인하러 가 볼까, 하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던 설형이 되물으며 시선을 도로 물렸다.

하지만 이번엔 반대로 석진의 시선이 설형이 보고 있던 곳을 향해 있었다.

“참, 사진 잘 나왔더라?”

“…….”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평소, 설형을 놀리는 것을 재밌어하는 석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고개를 꺾고 뭔가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석진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체 뭘 보고. 석진의 시선을 쫓아 고개를 돌렸던 설형이 멈칫했다. 거기엔 이쪽을 향해 돌아서 있는 도강우가 있었다. 아무래도 잡담이 길어진 모양이다. 자신을 보는 도강우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설형이 일단 석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미 시선을 거둔 석진은 설형을 응시하고 있었다. 물론 조금 전 보았던 낯선 얼굴이 아니라 평소의 성격 좋아 보이는 이석진으로 돌아와 있었다.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야?”

빙글거리며 사람 속을 뒤집어놓는 것을 보니 더욱 확실했다.

“친해지긴 개뿔.”

잠시 잊고 있었던 기사를 떠올린 설형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그 사진 속 상사가 농땡이 부린다고 눈치 준다. 가라.”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주제이기도 하고, 표정이 좋지 않았던 강우가 아주 조금, 신경 쓰이기도 했던 터라 설형은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곤 그대로 방향을 틀었다. 그 뒤로 바싹 붙어 걷던 재민이 혼자 고개를 갸웃갸웃거리며 중얼거린다.

“그런데 확실히 이번 사체 상태를 보면 범인의 심경에 뭔가 변화가 있긴 한 것 같아요.”

“…….”

그래서 석진이 그런 말을 했던 건가. 조금 전 대화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고 끊어져 버렸다는 것이 기억났지만 더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걸으며 물었다.

“상태가 어떻길래?”

“거기가 아주 너덜너덜해요. 아무래도 날이 제대로 안 선 칼로 잘라낸 것 같다고.”

두 번째 세 번째 피해자의 상처는 아주 예리한 칼, 예를 들면 의료용 메스 같은 도구로 자른 것처럼 아주 깔끔하게 되어 있었다. 상처 부위가 재민이 말한 것처럼 너덜너덜하게 되어있었던 것은 오직 한 번뿐이다.

“첫 번째 피해자처럼, 말이지.”

“……네.”

고개를 끄덕이던 재민이 뭔가를 떠올린 듯 진저리를 쳤다. 그럴 만도 했다. 하마터면 놓칠 뻔했던 첫 번째 살인의 범행 도구가 현장에 있던 식칼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재민의 이런 반응은 당연했다.

“잘됐네.”

“네?”

제가 뭘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허공을 응시한 채 중얼거리는 설형의 얼굴에 살풋 미소마저 떠올라 있는 것을 발견한 재민이 멈칫, 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범인을 자극한 그게 뭐든 흥분하면 실수는 하게 되는 거고, 덕분에 꼬리가 밟힐 테니까.”

“아…….”

그제야 재민도 설형이 왜 잘되었다고 한 건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왜 설형을 오해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설형을 좋아하는 저조차도 설형이 가끔 이럴 때마다 섬뜩한 기분이 드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왜.”

그 사이 벌써 저만치 앞서가고 있던 설형이 뒤돌아서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뒤따라오는 기척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모양.

“아뇨. 신발 안에 뭐가 들어가서요.”

그렇게 말한 재민이 후다닥 뛰어 간격을 좁혔다. 기다리고 있던 설형이 무뚝뚝한 말투로 한 마디 한다.

“신발에 뭐 들어갔다며, 안 빼?”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요.”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는 재민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보던 설형이 다시 뒤돌아섰다.

씨익. 그런 설형을 뒤따르는 재민의 입꼬리가 위를 향한다. 무뚝뚝한 말투긴 해도 사실 재민이 제 재촉 때문에 발에 들어간 걸 못 뺐을까 봐 한 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격은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쳐도 조금 전 그런 것만 좀 자제하시면 지금보다 적이 반은 줄어들 텐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사실 그런 것이 가능했다면 반장님이 왜 그렇게 속이 터져 죽으려고 하시겠는가. 눈치는 없어도 자신의 깜냥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재민은 조용히 설형의 뒤를 따라 걸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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