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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우우웅. 우우우웅. 우우우웅.
“여보세요.”
끈질기게 울리는 진동소리에 잠에서 깬 설형이 더듬더듬 호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내 귀로 가져갔다.
「임마, 넌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
아직 잠이 덜 깬 상태로 전화를 받았던 설형이었으나 곧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온 고함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홍 반장이었다.
“사건 터졌어요?”
벌떡 몸을 일으킨 설형이 물었다. 아직 7시도 되지 않은 시간. 늦잠을 잔 것도 아닌데 새벽부터 전화가 온 것을 보면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너 오늘 아침 신문 확인했어?」
“신문이요?”
뜬금없이 신문은 갑자기 왜. 하지만 설형이 채 되묻기도 전에 그에 대한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검찰에서는 이번 사건에 제3의 공범이 있다고 보고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그런데 그 공범이 수사 관계자일 수 있기 때문에 검찰과 경찰이 서로 공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지지부진한 거라는 기사가 신문 1면에 떡하니 실렸어.」
“헐.”
단숨에 설형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보이진 않지만 수화기 너머 홍 반장의 표정도 비슷하리라. 아주 골치 아프게 되었다.
“대체 누가 흘린 거래요.”
「기사에는 수사팀의 익명의 형사가 제공한 정보라고만 해 놨어. 기사 내용 봐서는 검찰 쪽에 불만 있는 경찰이 흘린 게 맞긴 한데. 문제는 그때 도 검사가 했던 공범이 수사 관계자일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은 건 우리 팀 팀원들밖에 없다는 거야.」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죠. 흩어지긴 했어도 그래도 사무실 안에 귀가 몇 개였는데. 누구든 용의자가 될 수 있는 상황 아닙니까.”
설형이 곧바로 반박했지만 홍 반장 역시 몰라서 한 소리는 아니었다.
「누가 그걸 몰라? 하지만 도 검사님 입장에서는 충분히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거지.」
“아·…….”
「됐고, 일단 너부터 도 검사 출근하기 전에 빨리 들어와.」
“…….”
이 양반이 진짜. 그제야 설형은 홍 반장이 득달같이 자신에게 전화를 건 이유를 알아차렸다. 이번에도 자신을 도강우 전담반으로 이용할 생각이었던 거다.
막 입을 열어 항의하려던 설형의 눈에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잠들어 있는 강우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니, 이 양반은 왜 대궐 같은 자기 방 놔두고 여기서 잠들었대.
「뭐야. 왜 대답이 없어. 백 형사, 잠들었냐?」
눈앞에 잠들어 있는 강우에게 정신이 팔려 잠시 홍 반장을 잊었다. 득달같이 이어진 홍 반장의 재촉에 설형이 항의하려던 것도 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바로 들어갈게요. 삼십 분, 아니 이십 분이면 들어가요.”
「아, 그리고 정문은 기자들 깔렸으니까 후문으로 들어오고.」
뚝. 설형이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전화기에서 떨어진 시선이 자연스럽게 잠든 강우에게 닿아 있었다. 옆에서 이렇게 난리가 났는데도 깨지 않는 것을 보니 겉으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던 도강우도 피곤하긴 했던 모양이었다. 물론 테이블 위에 수북이 쌓인 맥주 캔 탓이 크겠지만. 설형도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이 없었다. 넷째 캔까지는 기억이 있는데. 슥슥, 뒷머리를 쓸어내리며 설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 자식인지 진짜 더럽게 잘생겼네.
깨워야겠다 싶어 강우에게로 가까이 다가가던 설형이 걸음을 멈추고 잠시 잠든 강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잘생겼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바로 앞에서 찬찬히 뜯어보니 더더욱 감탄이 나왔다.
짙은 눈썹과 긴 속눈썹, 외국 배우처럼 높은 콧대와 한일자로 닫힌 입술. 어디 하나 모자라거나 아쉬운 곳이 없었다. 눈앞의 남자를 한참을 응시하던 설형이 뭐에 홀린 듯 손을 내뻗었다. 뭘 어쩌겠다는 의식을 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냥, 진짜 살아 있는 사람이 맞나 싶어 손으로 만져보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Trrrrrrrrr.
고요한 침묵을 단숨에 깨부수는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 벨소리에 강우가 번쩍 눈을 떴다. 손을 내민 채 강우의 앞에 서 있던 설형은 눈을 뜬 강우와 떡하니 눈이 마주쳤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나마 끈질기게 울리는 벨소리가 적막을 조금 누그러뜨려 주었다. 눈을 마주한 채 굳어 있던 강우가 물었다.
“혹시, 목이라도 조르려던 참이었습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설형이 펄쩍 뛰자 강우가 태연히 대꾸했다.
“그런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굳어 있습니까. 나쁜 짓이라도 하려다 걸린 사람마냥.”
“…….”
아마도 강우는 정황상 설형이 자신을 깨우려고 한 것이라고 짐작한 듯했지만 찔리는 것이 있는 설형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잠시만.”
“아, 네.”
뒤늦게 자신이 강우의 앞을 막고 서 있다는 것을 깨달은 설형이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자리에서 일어난 강우가 테이블에 놓인,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리고 있는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네, 최 서기관님.”
아. 전화를 받는 강우의 뒷모습을 보는 설형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물론 뒤돌아서서 전화를 받고 있던 강우는 알지 못했지만.
“기사요. 아뇨, 아직. 알겠습니다. 확인하고 연락하죠.”
강우가 빠른 걸음으로 테이블에 놓인 전화기를 들었다. 짧게 신문과 커피를 부탁한 강우가 일단 자신의 휴대폰으로 포털사이트를 접속했다. 커다란 화면을 들여다보던 강우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지는 것을 설형은 숨죽인 채 지켜보았다.
“이거 봤습니까?”
“아뇨.”
설형이 고개를 내젓자―거짓말은 아니었다.― 강우가 휴대폰을 넘겨주었다. 설형도 궁금했던 터라 빠르게 기사를 읽어 내렸다. 점점 아래로 내려갈수록 설형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직접 확인한 기사는 생각보다 훨씬 악의적이었다. 기자는 새파랗게 어린 신입 검사가 경찰 길들이기를 하는 거냐고 대놓고 도강우 검사를 저격해서 기사를 써 내렸다.
“아. 저기.”
기사 화면이 갑자기 까맣게 변하더니 곧바로 한 부장님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강우가 휴대폰을 다시 건네받았다. 그 사이 문 밖에서 차임벨이 울렸다. 문을 열어 줘야 하나 싶어 문 쪽으로 향했지만 띠딕, 하고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직원이 직접 문을 열고 들어섰다.
“부탁하신 신문과 커피입니다.”
“거기 둬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물거리고 있는 설형을 대신해 강우가 턱짓을 했다. 카트를 밀고 들어온 직원이 신문과 커피를 따른 커피잔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아침식사는 밥과 빵 중에 어떤 걸로 준비할까요?”
“아, 전―.”
“밥으로 준비해 줘요.”
그 사이 통화를 끝냈는지 휴대폰을 내려놓은 강우가 대답했다. 덕분에 제 것은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타이밍을 놓쳤다.
“부장님이 왜 전화하신 겁니까?”
밖으로 사라지는 직원과 강우를 번갈아보던 설형이 일단 더 급한 것부터 물었다.
“지검으로 들어오라네요. 기사 보셨나 봐요.”
“…….”
누가 들으면 다른 사람 이야긴 줄 알겠다. 어깨를 으쓱이며 태평하게 말하는 강우에 설형이 미간을 좁혔다. 잠시 고민하던 설형이 입을 열었다.
“혹시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 건데, 전 아닙니다.”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웃기려고 한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반응을 보고 안심한 것도 사실이다.
“물론 저희 팀도 아니구요.”
“정말 확신할 수 있습니까?”
순간 자신만큼이나 도강우를 탐탁지 않아하는 김 형사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설형은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다.
“적어도 이렇게 뒤에서 남의 험담을 하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알았어요.”
더 이상 따지지도 않고 곧바로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강우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설형이었다.
“정말, 이대로 된 겁니까?”
“백 형사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겠죠. 적어도 나보다는 더 오래 알았을 테니까요.”
“…….”
“왜요. 믿지 말까요?”
“아뇨. 믿으십시오. 믿으셔도 됩니다.”
“그럼 난 지검에 들어갔다가 갈 테니, 백 형사는 천천히 아침 먹고 출근해요. 백 형사가 좋아하는 밥으로 준비해 달라고 했으니까.”
그제야 강우가 굳이 밥으로 준비하라고 한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설형이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저도 지금 바로 서로 돌아가 봐야―.”
“왜요?”
고개를 내젓는 설형에 강우가 되물었다.
“아직 7시 반밖에 되지 않았는데요. 이렇게 일찍 서에 들어가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물론―.”
무심코 대답하려던 설형이 이내 입을 다물었다. 하마터면 홍 반장님이 검사님 들어오기 전에 들어와서 대책을 마련하라고 해서 그렇다는 말을 해 버릴 뻔했다.
“물론?”
기다리던 강우가 되물었다.
“물론 그럴 이유가 없죠.”
잠시 말을 멈췄던 설형이 언제 그랬냐는 듯 강우의 말에 동의했다. 생각해 보면 홍 반장이 빨리 들어오라고 한 건 도강우를 맡게 하려고 한 것인데 그가 검찰로 불려 들어가면 굳이 자신이 일찍 갈 이유가 없긴 하니까 자신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지검 갔다가 들어가려면 좀 걸릴 겁니다. 그래도 늦어도 점심 전까지는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빠른 속도로 옷을 갈아입고 나온 강우가 그대로 거실을 가로질렀다. 설형이 그 뒤를 뒤따랐다.
“그런데 괜찮으신 겁니까? 들어가서 부장님께 엄청 깨지시는 거 아닙니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되묻는 설형에 막 문고리를 잡았던 강우가 뒤돌아섰다.
“설마 나 걱정해 주는 겁니까?”
“아뇨. 전혀요.”
재밌어하는 것이 분명한 강우의 표정에 설형이 딱 잘라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그런 설형의 부정은 이미 강우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했지만.
“백 형사가 걱정을 다 해 주고, 앞으로도 종종 부장님께 호출 받아야겠는데요?”
“지금 농담이 나오십니까?”
“농담 아닌데요.”
“……관두죠. 제가 괜한 걱정을 했군요.”
얼굴을 굳힌 설형이 뒤돌아섰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강우에게 손목을 붙잡히지 않았다면.
“개인적으로는 백 형사가 걱정해 주는 게 좋지만, 지금 괜한 걱정을 하는 것은 맞습니다.”
설형의 얼굴이 확 찌푸려졌다. 하지만 강우는 태연히 뒷말을 덧붙였다.
“부장님이 우리 아버지 대학 동기라고 내가 말 안 했습니까?”
설형의 얼굴이 조금 전보다 더 확 일그러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안 했거든요?!”
이 남자가 금 수저를, 아니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태어난 인간이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러니까 백 형사가 걱정할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하고 싶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지만요.”
“내가 미쳤습니까?”
빙글거리는 강우를 향해 쏘아붙이며 설형은 휙, 하고 손을 뿌리쳤다. 이번에는 강우도 버티지 않고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그럼 천천히 아침 먹고 조금 있다 보죠.”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강우가 문을 열었다. 문 밖에 서 있던, 막 초인종을 누르려고 했던 직원이 불쑥 열리는 문에 깜짝 놀라 그대로 굳었지만 강우는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마냥 태연했다.
“아.”
막 문밖으로 나가서 방향을 틀던 강우가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 작은 소리를 냈다. 왜 그러냐고, 눈으로 묻는 설형에게 눈을 마주한 강우가 가볍게 물었다.
“이 기사, 수습했으면 좋겠습니까?”
다소 황당하기까지 한 질문이었지만 일단 질문에 대한 대답은 했다.
“수습하면야, 좋겠죠.”
당연한 것 아닌가. 물론 수습할 수 있을 때 말이겠지만. 설형의 대답에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알았습니다.”
“네? 뭘―.”
“조금 있다 보죠.”
영문을 알 수 없는 강우의 말에 설형이 되물었지만 강우는 제 할 말만 하고는 그대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단 몇 걸음 만에 벌써 저만치 멀어지는 강우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설형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설마.”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설형은 에이,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미 한 번 신문에 나온 기사를 무슨 수로 수습한단 말인가. 세상에 나온 신문을 몽땅 회수한다고 해 봐야 사람들 머릿속에 한 번 입력된 정보까지 지울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아무리 도강우라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설형의 얼굴에 드리워진 불길한 예감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럼 이제 들어가서 세팅을 해 드려도 될까요?”
띵. 경쾌한 벨소리와 함께 강우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지기 무섭게 한발 물러서 있던 직원이 물었다.
“아, 미안합니다.”
그제야 잠시 잊고 있었던 직원의 존재를 자각한 설형이 황급히 벽에 몸을 바싹 붙였다. 직원이 카트를 밀었다. 앞을 지나가는 카트에서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 나왔다. 앞서가는 카트를 뒤따라가는 설형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주인도 없는 방에서 저 혼자 밥을 먹고, 출근 준비를 해서 나가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라고 주저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탁탁.
경찰 월급으로는 꿈도 못 꿀 비싼 고급 차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던 설형이 검찰청을 나와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강우를 발견하고 담배를 손끝으로 털어 껐다. 한 박자 늦게 설형을 발견한 강우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나 마중 나온 겁니까?”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묻는 강우에 설형이 얼굴을 확 일그러트렸다. 하여간 사람 속 뒤집는 재주는 타고 났다.
“마중 오게 하려고 일부러 놓고 가신 거 아닙니까.”
휙, 하고 말과 거의 동시에 빠르게 얼굴을 향해―노린 것이라고 봐도 전혀 무리가 없었다.― 날아오는 정체불명의 것을 강우가 탁, 하고 낚아챘다. 이게 뭐냐고 묻지도 않아도 강우는 그것이 뭔지 알고 있었다. 어제 설형이 운전하고 온 뒤에 돌려받지 않았던 강우의 차키였다.
“그럴 리가요.”
“…….”
전혀 믿지 않는 설형의 눈빛에 강우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나도 열쇠가 백 형사에게 있다는 건 주차장에서 알았습니다.”
“그럼 그때 가지고 내려오라고 하시죠.”
“고작 차키 때문에 부하 직원을 오라가라하는 상사는 되고 싶지 않아서요.”
“그런 분이 피곤에 쩐 부하 직원을 운전수로 써먹으셨습니까?”
“아.”
설형이 따져 묻자 강우도 그제야 어제의 기억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그건 그러네요.”
의외로 이렇게 순순히 인정해 버리니 할 말이 없어진 설형이다. 사실 따지려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설형이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예상대로 부장님은 별말 없으셨습니까?”
“뭐 앞으로는 조심하라는 주의 정도?”
“다행이네요.”
이건 진심이었다. 개념 없는 경찰 때문에 괜히 도강우에게 불똥이 튄 것은 사실이니까. 이렇게 순순히 대답하는 설형이 의외였는지 강우의 한쪽 눈썹이 슬쩍 위로 치켜 올라갔다.
“그렇습니까?”
“괜히 도 검사님이 이 일로 왕창 깨지면 불똥이 튀는 건 우리니까요. 홍 반장님도 지금 엄청 쪼셔서 제가 검사님 모시러 간다니까 엄청 좋아하시더라구요.”
그냥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면 될 것을 설형은 그러지 못하고 괜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 만다. 그리고 그건 매번 후회로 이어졌다.
“억지로 왔든 어쨌든 예상치 못한 곳에서 얼굴 보니까 좋네요.”
“…….”
특히나 이런 솔직한 이야기를 듣고 나면 더더욱.
“그만 가죠.”
괜히 민망해진 탓에 말투가 더 무뚝뚝해져 있었다. 하지만 강우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늘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인간들만 상대하다 보니 이런 설형이 훨씬 흥미롭고 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래서 매번 일부러 더 설형을 도발하는 건지도.
“백 형사.”
바로 이렇게. 입꼬리를 씨익, 하고 밀어올린 강우가 앞서가는 설형의 이름을 불렀다. 물론 설형이 뒤돌아보았을 때는 얼굴에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네?”
강우의 부름에 막 문을 열던 설형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휙, 하고 뭔가가 날아왔다. 반사적으로 받은 그것은 조금 전 자신이 강우에게 넘겼던 차키였다.
이걸 왜 또. 눈으로 묻는 설형에게 강우가 씽긋, 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난 부하 직원 부려먹는 악덕 상사니까요.”
“…….”
확― 종이처럼 단숨에 구겨지는 예쁜 얼굴을 보며 아무래도 자신에게 S적 기질이 숨겨져 있던 것이 맞았다고 확신하는 강우였다.
Trrrrrrrrrr.
막 특검 본부로 들어가는 큰길에 들어선 참이었다. 울리는 진동 소리에 설형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홍 반장이었다.
“네.”
―백 형사야. 너 지금 어디야? 검사님은 만났고? 잘 모시고 오고 있는 거야? 왜 대답이 없어.
“답을 할 틈을 주셔야 대답하죠. 검사님 만나서, 아주 잘.모.시.고. 복귀하고 있습니다. 지금 들어가는 입구예요.”
잘. 모. 시. 고. 부분에서 유난히 힘을 주어 말했지만 차에 타자마자 눈을 감고 잠이 든 강우는 미동도 없었다. 그 사이 홍 반장의 목소리가 휴대폰을 타고 들려왔다.
―아, 그래?
“…….”
한 박자 늦게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설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전 설형이 도 검사 데리러 검찰청 갔다 가겠다고 보고했을 때도 다 죽어 가던 목소리가 지금은 과도하게 업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마지막까지 안전 운전하는 거 잊지 말고. 귀빈 모시듯 조심조심 알지?
“네, 분부대로 합죠.”
빈정거리는 설형의 대답에도 홍 반장은 발끈하지 않았다. 사실 뉘 집 개가 짓냐, 하고 무시한 것이겠지만 어쨌든 홍 반장은 별다른 지적 없이 제 할 말만 덧붙였다.
―아, 기자들 없으니까 정문으로 들어와도 돼.
“기자들이 없어요?”
설형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별다른 진척이 없는 연쇄살인 사건에 검찰과 경찰의 불화, 그리고 수사기관의 비리까지. 심심한 기자들이 물고 뜯기 딱 좋은 소재였다. 그런데 그런 것을 두고 벌써 기자들이 철수했다니.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왜요?”
―어, 그게―.
말을 하려던 홍 반장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수화기 너머로 누군가 홍 반장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조금 작아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화 내용은 식별이 불가능했지만 홍 반장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톡톡, 톡톡.
설형이 붙잡고 있던 운전대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홍 반장이 대화를 끝내기를 기다렸다. 물론 설형의 인내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반장님!”
설형이 빽― 소리를 내지르자 그제야 홍 반장도 자신이 통화중이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홍 반장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다시 들려왔다.
―아, 미안미안. 그런데 나 지금 청장실 올라가 봐야 하니까 일단 들어와. 어차피 다 왔다며. 들어와서 얘기해.
하지만 다시 전화를 받은 홍 반장은 자기 할 말만 하고는 설형이 뭐라 항의하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헐.”
이미 끊어져 버린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황당해하고 있을 때였다. 잠들어 있는 줄 알았던 강우가 불쑥 입을 열었다.
“무슨 일입니까?”
“저도 잘 모르겠네요.”
“…….”
강우가 미간을 살풋 좁혔지만 아무 설명도 듣지 못한 건 설형도 마찬가지라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설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자들이 모두 철수했다네요. 어디 연예인 열애 기사라도 났나.”
“아.”
“뭐, 아시는 거라도 있습니까?”
뭔가 알고 있는 듯한 반응에 막 건물로 들어가려고 핸들을 꺾던 설형이 뒤늦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사실 설형은 진짜 톱연예인의 열애 기사라도 났나, 싶어 가볍게 물은 것이지만 돌아온 답변은 전혀 예상과는 다른 것이었다.
손목시계를 확인한 강우가 대답했다.
“생각보다도 빨리 수습된 모양이네요.”
“……수습이요? 무슨 수습 말입니까?”
“무슨 수습이라니요? 그 기사가 빨리 수습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끼익. 순간 설형이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다행히 뒤따라 들어오는 차는 없어 별다른 일은 없었지만 입구에 서 있던 정복 경찰이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를 돌린 채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설마, 그럼 정말 검사님이 열애 기사라도 터뜨리셨다는 말입니까?”
“…….”
물론 이어진 것은 침묵이었다. 기가 막힌다는 듯 저를 보고 있는 강우의 표정에 설형도 뒤늦게 자신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설형이 급히 사과했다. 하지만 정작 뭔가를 생각하던 강우가 설형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굳이 따지자면 열애 기사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
이건 또 무슨 헛소린가. 이번엔 설형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런 설형의 앞으로 태블릿 화면이 들이밀어졌다.
“이건 왜―.”
무심코 화면으로 시선을 주던 설형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물론 그런 설형의 반응쯤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강우가 씽긋 하고 웃으며 되물었다.
“제법 잘 어울리는 커플 아닙니까?”
“…….”
평소라면 발끈해서 반박했을 설형이지만 이번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화면만 뚫어져라 보고 있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제 눈으로 화면을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강우가 설형에게 보여 준 것은 포털사이트에 올라온 기사였다.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검경의 아름다운 동행】
이라는 제목으로 시작된 기사는 검찰과 경찰이 얼마나 이번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실제 현장에서 본 검사와 형사의 호흡이 얼마나 좋은지에 대해 써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기사를 뒷받침하듯 현장에서 찍은 사진이 하나 올라가 있었는데 그 사진은 백설형과 도강우, 두 사람이 처음 현장에 갔던 날 아침 정형진 기자에게 찍혔던 바로 그 사진이었다.
하지만 설형이 이렇게 굳어 버린 것은 단순히 자신의 얼굴이 신문에 공개되어서만은 아니었다. 누가 봐도, 심지어 설형의 눈에도 사진 속 두 사람의 모습이 몇 년 동안 함께 한 파트너를 보는 것처럼 친근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때 너무 사이가 좋아 보여서 저도 모르게 셔터를 눌렀다고 한 정형진 기자의 말이 그냥 둘러대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단 말인가. 마치 자신의 얼굴을 한 다른 사람이 찍어 놓은 사진을 보는 것만 같았다. 묘하게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기사 사진만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던 그때였다.
똑똑똑.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설형이 고개를 들어 창밖을 확인했다. 정복 경찰 이 순경이었다. 지―잉, 창문을 내리자 거수경례를 한 이 순경이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백 형사님, 여기 차 계속 세워 두시면 안 되는데요.”
“아, 미안.”
그제야 자신이 입구에 차를 세워 놓았다는 것을 깨달은 설형이 급히 사과했다.
“아닙니다. 저만치 앞으로만 좀 빼 주시면, 아, 역시 그 기사에 나온 분 백 형사님 맞으시죠?”
고개를 내젓던 이 순경이 설형이 들고 있던 태블릿 화면에 떠 있는 기사를 발견하고 아는 척을 해 왔다.
“사진발 진짜 잘 받으시던데요. 연예인이라도 해도 믿겠습니다.”
“……아부는.”
설형의 핀잔에 이 순경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부 아니에요. 거기 댓글들 보시면 아시겠지만 지금 인터넷이랑 SNS에 아주 난리가 났어요. 경찰에 이렇게 잘생긴 경찰이 다 있었냐고.”
“…….”
“아, 물론 검사님두요.”
뒤늦게 옆에 앉아 있던 강우를 발견한 이 순경이 급히 덧붙였다. 강우가 고개를 까딱이며 고맙다는 인사를 대신했다. 그 사이 댓글창을 확인한 설형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심각한 표정의 설형이 도로 창문을 올리자 이 순경도 거수경례를 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정말 이거 검사님이 하신 겁니까?”
주차 구역에 거칠게 차를 세우기 무섭게 설형이 따지듯 되물었다. 심각한 설형과는 달리 강우의 표정은 아주 재밌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렇다고 하고 싶지만, 전 힘없는 신입 검사라 정확히는 할아버지 신세 좀 졌죠.”
진짜 힘없는 신입 검사는 그런 할아버지가 없거든요. 설형이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강우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김 비서님 실력 좋은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네요.”
“지금 사람들 댓글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검사님이나 내 얼굴 얘기만 하고 있는데, 이게 좋다는 말입니까?”
“왜요. 덕분에 경찰과 검찰의 사이가 나쁘다는 이야기는 쏙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
설형이 미간을 찌푸렸다. 강우의 말이 다 맞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고 기가 막히게도 덕분에 검경에 대한 이미지가 호의적으로 변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단지 오히려 열심히 수사를 해서 범인을 잡는 것보다도 그럴 듯한 외모 하나로 그런 성과를 손쉽게 얻을 수 있다는 게 좀 허무했을 뿐이다.
“백 형사, 사진 잘 나왔던데?”
밖으로 나오던 2팀 형사들이 막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설형을 발견하고 한마디씩 했다.
“그런 사진은 또 언제 찍었던 거야? 사전 인터뷰한 거야?”
“그럴 리가 있어? 딱 봐도 현장 사진이던데.”
“하. 이래서 세상은 불공평하다니까, 잘난 놈들은 아무 준비 없이 아무렇게나 찍어도 그렇게 잘 나오는데, 우리처럼 평범한 놈들은 아무리 때 빼고 광내고 찍어도 오징어처럼 나온단 말이지.”
“솔직히 그 얼굴이 평범한 건 아니지.”
“뭐라고?!”
나중에는 자기들끼리 투닥거리는 사람들을 무표정한 얼굴로 보고 있던 설형이 슬그머니 다시 걸음을 떼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그럼 전 이만―.”
“누군 좋겠구만. 잘나신 얼굴 하나로 경찰을 위기에서 구한 영웅이 되셨으니.”
불쑥 들려온 누군가의 날선 한마디가 아니었다면.
“최 형사,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뭐든 큰 소란 없이 지나갔으면 잘 된 거지.”
옆에 있던 형사가 슬그머니 최 형사의 소매를 당기며 말렸지만 오히려 그것이 최 형사의 기분만 더 자극한 것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런 잘난 얼굴 하나면 다 해결되는 걸 우리는 왜 이렇게 범인을 잡겠다고 이 좆뺑이를 치고 있냐고.”
“씨발, 뚫린 입이라고 지껄이며 다 말인 줄 아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얼굴을 일그러트린 최 형사가 휙, 하고 뒤돌아섰다.
“뭐? 누구야!”
“씨발, 나다 개새끼야.”
하지만 상대가 누군지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가장 먼저 목격한 것은 제게 날아드는 어린애 머리통만 한 주먹이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최 형사가 맥없이 쓰러졌다.
“기, 김 형사?”
“그래 씨발, 김 형사다.”
바닥에 누운 채 김욱을 발견한 최 형사의 얼굴에 순간 당황한 기색이 번졌다. 바닥에 누워서 올려다보려니 안 그래도 곰 같은 김 형사가 태산처럼 거대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쫄아붙었던 최 형사도 뒤늦게 주변에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떠올렸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안 그래도 못생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까지 하자 한 마리의 못생긴 원숭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 새끼가!”
욕을 내뱉은 최 형사가 벌떡 일어나 김 형사에게 달려들었다. 물론 최악의 경우 말려 줄 주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한 행동이었다. 제게 달려드는 최 형사를 보고도 김 형사는 잘되었다는 듯 자리에서 선 채 손에 침을 탁, 뱉고 공격 태세를 갖췄다. 순식간에 두 사람이 엉켜 붙었다.
“범인도 좆도 못 잡는 게 좆뺑이를 치기는 뭘 좆뺑이쳐, 씨발 새끼야.”
“적어도 난 범죄자 아버지 도움은 안 받는다, 씨발아.”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그 입 오늘 내가 찢어 버리고 만다.”
퍽퍽, 나중에는 어린애들처럼 엉켜 붙어 주먹질을 해 대는 두 사람―물론 누가 봐도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있었지만―을 보다 못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말리기 시작했다.
“아, 최 형사! 그만해.”
“김 형사, 김 형사가 참아.”
물론 악만 남은 두 사람을 말리는 것은 쉽지 않았고 덩치가 산만 한 김 형사까지 있으니 두 사람을 떨어뜨리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었다. 떨어뜨리려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떨치고 서로에게 주먹질을 하려는 두 사람이 마구 뒤섞이면서 그곳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소란은 사무실 안에 있던 사람들까지 하나둘씩 고개를 내밀 정도로 컸으니 마침 계단을 내려오던 경찰청장과 홍 반장의 귀에 그 소리가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지금 뭣들 하는 거야!”
벼락같은 호통에 소란스럽던 복도에 정적이 흘렀다. 싸움 구경을 하려고 주변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먼저 홍 반장과 경찰청장을 발견하고 행여나 불똥이 튈까 봐 후다닥, 사방으로 흩어졌다.
타닥타닥.
험악한 표정의 홍 반장이 먼저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왔고 무표정한 얼굴의 청장도 천천히 그 뒤를 따라 내려왔다.
“당장 못 떨어져?!”
그때까지도 서로의 멱살을 붙잡고 있던 김 형사와 최 형사가 겨우 떨어졌다.
“아주 잘들 하는 짓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자들이 뭐 하나 꼬투리 잡을 거 없나 눈이 벌게 가지고 돌아다니고 있던 곳에서 애새끼들처럼 쌈질을 하고 있어?! 왜. 이젠 아주 경찰 내부적으로도 엉망이라는 기사까지 나게 하려고?”
“……죄송합니다.”
두 사람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호랑이 같은 매서운 눈빛을 쏘아대던 홍 반장이 뒤늦게 김 형사의 뒤에 서 있던 설형을 발견하고 기가 막힌다는 듯 한마디 한다.
“얼씨구? 너는 또 여기 왜 껴있어.”
설형이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잘하는 짓이다. 밑에 녀석들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면 나서서 말리지는 못할망정 같이 어울려서 소란을 일으키고 앉았어?!”
“죄송합니다.”
김 형사를 말리느라 삐죽 뻗친 머리칼이 눈에 들어왔지만 홍 반장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물론 지금의 상황에 화가 난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 청장에게 밉보인 설형이 괜히 이 일로 한소리 들을까 봐 자신이 더 과하게 야단을 치는 이유도 있었다. 그것을 모르지 않는 설형이기에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고.
“보아하니 백 형사는 말리려고 애쓴 것 같은데 뭘 그렇게 쥐 잡듯이 잡아. 홍 반장도 참.”
“……정말이야?”
“아닙니다.”
설형이 고개를 내저었지만 홍 반장도 이쯤 하면 됐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설형을 추궁하지 않았다. 홍 반장의 시선은 싸움의 당사자에게로 향했다.
“대체 뭐 때문에 그렇게 미친 갱이들처럼 주먹질까지 한 거야.”
“…….”
“…….”
홍 반장이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물론 김 형사는 억울하다는 듯 입을 열려고 했지만 하지 말라고 눈짓을 하는 설형에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뭐야. 대놓고 말도 못할 일로 그 소란을 피워 댔던 거야?”
“…….”
“아무래도 이번 일의 원인제공자는 저인 거 같네요.”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다들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때 뒤편에서 누군가 불쑥 끼어들었다. 청장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공에게로 향했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청장이 반색을 하며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도 검사!”
저벅저벅 걸어 들어오는 강우를 발견한 설형이 미간을 살풋 찌푸렸다. 전화 통화를 할 곳이 있다고 해서 강우를 차에 두고 자신 먼저 들어왔던 것을 기억해 낸 것이다.
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조용히 지나가면 되는 일을 괜한 소리로 일을 크게 만드는 게 아닐까. 불안했다. 강우가 설형과 눈을 마주쳤다. 마주친 눈동자에서 본 것은 웃음이었다.
제기랄. 설형이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도강우가 저런 눈을 하는 것은 절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오히려 불길한 징조였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강우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최 형사는 일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 버린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좀 더 이 일이 오래 시끄럽길 바랐는데 말이죠.”
“이게 무슨 소리지? 최 형사?”
살풋 미간을 찌푸린 청장의 시선이 최 형사에게로 옮겨갔다. 이 말이 맞냐고, 묻는 시선에 최 형사가 당황해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전 단지―.”
변명하려던 최 형사가 일순 말을 멈췄다. 도강우의 말에 반박을 하려면 자신이 설형이 마음에 들지 않아 괜한 시비를 건 사실까지 밝혀야 했기 때문이다.
“단지?”
말을 하다 멈춘 최 형사에 청장이 재촉하듯 되물었다. 최 형사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보다 못한 설형이 불쑥 끼어들었다.
“제 얼굴이 신문에 난 것이 싫었답니다.”
고자질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최 형사가 설형을 험악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설형은 태연했다.
“수사를 해야 할 형사 얼굴이 알려지면, 수사에 방해가 되는 건 사실이니까요.”
설형의 말에 청장도 어느 정도 수긍한 모양이었다.
“정말이야?”
최 형사에게 묻는 청장의 표정이 조금 전보다는 확실히 누그러져 있었다.
“네? 네.”
설형이 제 변명을 해 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지 잠시 당황하던 최 형사도 곧 정신을 차리고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수사에 다소 방해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건 검경의 이미지 쇄신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잖나.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래그래.”
한발 물러서서 상황이 수습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설형이 흘끔, 하고 강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혹 도강우가 끼어들어 겨우 수습한 상황을 다시 나쁘게 돌려 놓지 않을까 싶었던 것. 도강우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맞은편에 선 도강우는 흥미를 잃어버린 듯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설형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나저나 매일 칙칙한 얼굴들만 보다가 이렇게 젊고 잘난 얼굴을 그것도 이렇게 둘이 붙여 놓고 보니까 눈이 다 환해지긴 하더구만. 아주 두 사람 덕분에 검경의 이미지가 확 올라갔고, 거기, SM?”
“SNS요.”
홍 반장이 재빨리 끼어들어 대답했다.
“그래 SNS에서도 아주 난리가 났다던데, 알고 있나?”
“그렇습니까?”
전혀 몰랐던 사람처럼 강우가 되물었다. 설형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다.
“아주 난리가 났다는구만. 그럴 만도 하지. 도 검사가 사진발이 아주 잘 받더구만. 아주 배우 저리 가라야.”
“그렇습니까? 전 오히려 실물보다는 못 나온 거 같던데요.”
“하하하. 이사람. 할아버님을 닮아서 유머 감각도 제법이구만.”
절대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설형은 알아차렸지만 다행히 청장은 농담이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호탕하게 웃으며 강우의 어깨를 두드린 청장이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청장의 뒤를 홍 반장이 뒤따랐다.
두 사람이 사라진 복도엔 폭풍이 지나간 듯 적막이 흘렀다.
강우의 눈치를 보던 최 형사와 동료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치다 황급히 모습을 감췄다. 그런 사람들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강우가 물었다.
“굳이 왜 도와준 겁니까? 그대로 뒀으면 자기 입으로 다 자백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요.”
왜 끼어들었냐고 따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정말 궁금해서 묻는 듯한 말투였다. 설형도 무심히 대답했다.
“저런 얼굴로 평생을 살아가는 것도 불쌍한데, 내 얼굴이 너무 부러워서 괜한 시비를 걸었다고 자기 입으로 말하게 하는 건 너무 가혹하잖습니까.”
“흠. 그건 그러네요.”
다행히 이번엔 강우도 납득한 모양이었다. 물론 그때까지 그들의 옆에 서 있던―두 사람에게 잊혀지긴 했지만―김 형사의 안 그래도 험악한 얼굴이 더 험악해진 것 역시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멈칫. 자판기 커피를 뽑으러 나왔던 설형은 자판기 옆 비상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재민을 발견했다.
“한 형사.”
“힉―!”
“대체 정신을 어디다 두고 있길래 형사란 놈이 사람 인기척도 못 느끼고 그렇게 놀라.”
쯧쯧, 혀를 차며 핀잔하자 재민의 어깨가 더 축 처졌다.
“기지국 위치 추적 결과 어떻게 됐어. 동선 파악됐어?”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요.”
“그것도 다 안 해 놓고 여기서 이러고 있었단 말이야?”
설형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하지만 평소 같으면 헤헤헤, 하고 웃으며 후다닥 일어나서 달려갔을 재민이 설형의 사나운 눈초리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웅크리고 있던 몸을 쥐며느리처럼 더 동그랗게 말아 웅크렸을 뿐이다. 그제야 설형도 뭔가 재민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 마셔.”
자판기에서 커피를 두 잔 뺀 설형이 재민의 옆에 가서 앉았다. 무심하게 하나를 내밀자 재민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두 손으로 공손히 그것을 받았다.
홀짝. 재민이 달달한 자판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것을 흘끔 확인한 설형이 입을 뗐다.
“왜. 무슨 일인데.”
“…….”
“알았어. 안 물어볼게, 마셔마셔.”
손이 멈춘 재민에 설형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홀짝거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왜. 또 여자친구가 헤어지재?”
“…….”
얼마 전 소개팅으로 만나 사귀게 된 여자친구는 시시때때로 헤어지자는 말로 재민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재민은 절레절레 내저었다.
“홍 반장님한테 한소리 들었냐?”
절레절레.
“그럼 김 형사한테?”
절레절레.
설형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사실 설형은 그리 인내심이 긴 편이 아니었다. 누굴 달래는 재주 같은 건 더더욱 없었고. 이래서 사람은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된다고 반성하며 설형이 깔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얘기하기 싫으면, 나 먼저 들어간다.”
“백 형사님!”
엉덩이를 털고 일어서는 설형의 다리에 재민이 답삭 매달렸다.
“저 좀 살려 주세요! 제발요!”
“이 새끼가 징그럽게 왜 이래. 이거 안 놔?!”
펄쩍 뛴 설형이 재민을 떼어내려고 얼굴을 밀어냈지만 껌딱지마냥 찰싹 달라붙은 재민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은근 끈질긴 녀석이라는 걸 떠올린 설형이 나직이 경고했다.
“삼 초 안에 안 떨어지면 이대로 저 계단 아래로 굴려 버릴 줄 알아. 하나, 둘.”
다행히 설형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재민이 둘에서 후다닥, 떨어져나갔다. 툭툭, 마치 더러운 것이 달라붙어 있었다는 듯 바지를 털어내는 설형에 재민이 너무한 것 아니냐고 항의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설형은 태연했다. 몇 번 더 바지를 털어낸 설형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재민을 향해 다시 물었다.
“그래서 대체 무슨 대형 사고를 친 건데.”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설형의 물음에 재민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가 사고 친 거 어떻게 아셨어요?!”
설형의 얼굴이 한 번 더 확 찌푸려졌다. 그 정도 추측은 굳이 형사가 아니라도 조금만 생각하면 알아차릴 수 있는 건 아닌가. 다시금 녀석의 미래를 위해 직업을 바꾸게 해야 하나 진지한 고민을 하는 설형이었다.
“그래서 뭐냐고. 네가 친 사고가.”
“그러니까요.”
한심해하는 눈빛에 헤헤, 하고 빙구 같은 웃음을 지어 보인 재민이 이내 천천히 고해성사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 인터뷰를 한 익명의 형사가 바로 너였다고?”
“……네.”
설형의 물음에 눈치를 보던 재민이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형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재민이 한 대 맞을 각오로 어깨를 움츠렸지만 주먹이 날아오는 일은 없었다. 물론 차라리 몇 대 두들겨 맞고 혼이 나는 쪽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죄송해요. 백 형사님.”
재민이 허리까지 푹 접었다.
“그런데 거기 기사에 써 놓은 것처럼 도 검사님께 불만이 있어서 그런 얘기 한 거 아니에요. 기자가 공범이 경찰이라고 의심받는 상황을 어떻게 참고 있냐고 묻는 바람에 당황해서 그런 거 아니라고 관계자라고 해서 꼭 경찰만 있는 건 아니라고 변명을 하게 됐는데―.”
“멍청하긴.”
“……죄송해요.”
기자들의 전형적인 찔러보기에 보기 좋게 넘어간 것이었다.
“언제 있었던 일인데.”
“도 검사님이 말씀하셨던 그날, 요.”
그럼 벌써 며칠 전 일이었다.
“왜. 끝까지 입 다물고 있지.”
“제가 진짜 몇 번이고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도저히 입이 안 떨어져서…….”
“하아.”
설형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재민이 그럴 주제가 못 된다는 건 누구보다 설형이 잘 알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재민이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들어올렸다.
“가서 홍 반장님께도 보고 드릴게요.”
“관둬.”
“아니에요. 차라리 다 털어놓고 나니까 살 것 같아요. 이렇게 된 거 다 밝히고 징계를 받든 쫓겨나든 할래요.”
“관두라고.”
“…….”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기세인 재민의 앞을 설형이 가로막았다. 왜 그러시는 거냐고, 순둥한 눈으로 묻는 재민을 응시하던 설형이 하아, 하고 다시 한 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조용히 수습된 일인데 일 크게 만들지 말라고.”
“……그래도.”
“그리고 진짜 네가 사과할 사람은 따로 있잖아.”
“…….”
누굴 이야기하는 건지 뒤늦게 알아차린 재민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차라리 홍 반장님께 보고드리면 안 될까요? 도 검사님 무서운데…….”
“무서운 놈이 그런 사고를 치냐?”
“…….”
입을 꾹 다문 재민에게 작게 한숨을 내쉰 설형이 간단히 말했다.
“따라와.”
“같이 가 주실 거예요?!”
휙, 하고 고개를 든 재민이 눈을 반짝이며 되물었으나 아무 대꾸가 없었다. 게다가 이미 설형은 방향을 틀어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제가 착각했구나, 싶어 어깨가 축 처진 채 점점 멀어지는 설형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몇 걸음 앞서가던 설형이 멈칫, 하고 걸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고개도 돌리지 않고 툭, 하고 한마디 내뱉는다.
“맘 바뀌기 전에 빨리 오지?”
화악, 재민의 얼굴에 화색이 번졌다.
“넵!!! 갑니다!!!”
설형이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데도 손까지 번쩍 들어 외친 재민이 후다닥 달려왔다. 바로 뒤를 따라붙는 대형견의 부산스러운 기척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다시 멈췄던 걸음을 내딛는 설형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허리를 90도로 숙인 재민의 옆에 서 있던 설형도 함께 고개를 숙였다.
그때까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재민의 고해성사를 듣고 있던 강우가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툭, 하고 가볍게 말했다.
“알았어요. 무슨 말인지 알았으니 나가 봐요.”
“……이걸로, 끝인 겁니까? 징계 같은 거, 없이요?”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는 듯 더듬거리며 묻는 재민에게 강우가 오히려 되물었다.
“왜요. 그러고 싶습니까?”
“그럴 리가요!”
재민이 펄쩍 뛰었다. 강우는 농담으로 한 말이겠지만 마냥 농담으로만 들리지는 않는 재민이었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행여 도강우의 마음이 바뀌기라도 할까 봐 재민이 황급히 뒤돌아섰다.
“그럼 저도, 이만.”
그런 재민을 따라 설형도 슬그머니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물론 채 한 발도 내딛기 전에 강우에게 저지당했지만.
“아, 백 형사는 나가지 말고 잠시 있죠.”
“……네.”
후다닥, 도망치듯 뒤돌아서서 나가는 재민을 부러운 눈으로 보던 설형이지만 곧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도 검사님, 다시 한 번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막 문을 열고 나서던 재민이 다시 한 번 뒤돌아서서 감사의 인사를 했다. 당황해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잊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고맙다는 인사는 백 형사에게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네? 아, 물론 백 형사님께도 감사드리구요.”
재민은 설형이 이렇게 같이 와 준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여긴 것이겠지만 강우가 말하는 진짜 이유를 알고 있는 설형으로서는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런 것을 말할 수는 없으니 설형은 그저 조용히 재민을 향해 나가 보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젓는 것으로 대신했다.
쿵.
재민이 잽싸게 문을 닫고 사라지자 사무실 안은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빠르게 서류를 훑던 강우가 펜을 들었다.
슥슥슥, 사인을 하느라 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손이 큰 편인데도 손가락이 길어 그런가 움직임이 섬세했다. 고생 한번 안 해 본 사람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혀 있다는 것을 설형은 알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자신의 민감한 곳을 쓸어내리던 거친 움직임을 기억해 낸 설형이 급히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하필 그 타이밍에 사인을 끝낸 강우가 고개를 들었고 떡하니 눈이 마주쳤다.
“흠흠.”
설형이 시선을 위로 들며 자세를 바로 했다.
“미안합니다. 급한 서류라.”
탁. 펜을 놓고 서류를 덮은 강우가 책상에서 일어났다. 설형 쪽으로 걸어 나와 책상에 살짝 기대앉았다. 강우의 시선이 살짝 아래쪽에 있었다. 강우의 시선과 묘한 침묵을 견디지 못한 설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나보다는 백 형사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
“아닙니까?”
“…….”
빙글거리는 얼굴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지은 죄가 있으니 설형은 허리를 굽혀 다시 한 번 정식으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강우는 그 정도로 넘어가 줄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다. 사실 그럴 거였으면 애초에 설형을 남으라고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설마 그걸로 그냥 넘어갈 생각은 아니죠? 미안하다는 말로 다 될 것 같으면 세상에 경찰이 왜 있겠습니까.”
씽긋, 하고 상큼하게 웃는 강우의 얼굴을 마주한 설형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물론 강우의 웃음이 더 짙어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한 형사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습니까.”
설형이 억울하다는 듯 따져 물었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이며,
“그거야 나한테 믿어도 좋다고 한 건 한 형사가 아니라 백 형사니까요.”
“…….”
그건 그랬다. 전혀 반박할 말이 없었다. 이래서 함부로 장담을 하거나 하면 안 되는 건데. 뒤늦게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도 없었다.
“정 억울하면 한 형사도 다시 들어오라고 할까요?”
정말 불러오기라도 할 기세로 몸을 일으키는 강우에 설형이 급히 그 앞을 막아섰다.
“암요. 제가 약속한 거니까 제가 책임지는 게 맞죠.”
“…….”
“뭐 어떻게, 무릎이라도 꿇고 빌까요?”
나름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릴 각오로 한 말이었지만 강우는 단박에 무시해 버렸다.
“백 형사가 무릎 꿇고 빈다고 그게 나한테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듣고 보니 또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럼 뭘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검사님이 원하시는 걸 말씀해 보시죠.”
“내가 원하는 걸 말하면 그대로 뭐든 할 겁니까?”
“네.”
“내가 뭘 원할 줄 알고 함부로 그런 약속을 합니까?”
얼굴을 확 찌푸린 설형이 되물었다.
“저한테 선택권이 있습니까?”
“물론 없죠.”
“…….”
설형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강우는 태연했다. 마주하고 있던 설형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되물었다.
“그래서 뭘 시키시고 싶으신데요.”
“흠.”
대체 저한테 뭘 시키려고 이렇게 집요하게 따지고 들었나, 들어나 보자 싶었다. 하지만 정작 단단히 각오한 설형과 달리 강우가 내놓은 답변은 다소 허무하기까지 한 대답이었다.
“그건 아직 생각 안 해봤 는데, 생각나면 그때 말하죠.”
“……네?”
“이걸로 나한테 빚 하나 진 겁니다.”
설형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그런 게 어딨습니까.”
설형의 항의에도 강우는 오히려 뻔뻔하게 되물었다.
“그럼 당장 생각나는 게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거야 도 검사님 사정이죠.”
“이거 나한테 미안해서 사과의 뜻으로 뭐든 들어주겠다고 한 것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만…….”
강우가 그렇게 나오니 설형도 조금 주춤했다. 강우가 쐐기를 박듯 되물었다.
“그럼 아무거나 급하게 대충 생각해내는 걸 들어주는 게 맞습니까, 조금 시간이 걸려도 내가 정말 원하는 걸 들어주는 게 맞습니까?”
“원하는 걸 들어주는 게, 맞네요.”
결국 설형도 강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설형의 대답을 들은 강우가 더 이상의 대화는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쌓여 있는 서류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더 할 얘기 없으면, 그만 나가 봐도 됩니다.”
“…….”
“뭐 더 할 말 있습니까?”
“아니요.”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더 할 말이 있는 것은 아닌 터라 설형은 조용히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나온 설형이 멈칫, 하고 걸음을 멈춘 것은 한 걸음도 내딛기 전이었다. 뭔가 단단히 결심한 설형이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고개를 든 강우를 향해 설형이 선언했다.
“기한은 이번 달까집니다. 빚진 채로 오래 있는 거 딱 질색이니까요.”
“…….”
“만약 그때가 지나면 그냥 내 멋대로 갚아 버릴 테니까 그런 줄 아십시오.”
제 할 말만 하고는 도로 문을 닫고 자리로 돌아가는 설형을 유리벽을 통해 지켜보던 강우가 이내 피식,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중얼거린다.
“기간이 지나면 안 갚는다는 게 보통 아닌가.”
물론 저런 요령 없고 고지식한 면이 바로 공주님의 매력이었지만.
“백설형 형사님, 자리가 어딥니까?”
검은 헬멧을 쓴 퀵서비스 기사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백 형사님이요?”
밖으로 나가려고 문 앞에 서 있던 형사가 고개를 돌려 자리를 확인했다. 설형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한 형사가 손가락으로 유난히 잔뜩 흐트러져 있는 책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지금 자리에 없으시네요. 저기, 저 책상 위에 놓고 가시면 돼요.”
“고맙습니다.”
빠른 걸음으로 책상 쪽으로 다가간 기사가 박스를 내려놓았다.
“이거 누가 가져다 놓은 거야?”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의문의 박스를 발견한 설형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조금 전 설형의 자리를 알려주었던 형사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틀었다.
“아, 그거 좀 전에 퀵이 갖다놨어요. 백 형사님 팬이 보낸 거라던데요.”
“헤에, 팬이요?!”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던 재민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설형의 책상으로 다가왔다.
“역시 사람은 잘나고 봐야 하나 봐. 기사 난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팬이 선물까지 다 보내고.”
“괜히 부러우니까 그러시는 거예요. 신경쓰지 마세요.”
재민이 속삭이듯 말했지만 사실 설형에게 최 형사의 빈정거리는 말은 전혀 들리지 않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설형은 박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자신에게 금방이라도 달려들기라도 할 것처럼.
이상하게 설형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백 형사, 뭐해. 그거 앞에 놓고 고사 지내?”
“그래, 무려 소녀팬이 보낸 선물이 뭔지 구경이나 하자.”
무려 팬이 보내준 선물이라니―어느새 그냥 팬도 아니고 소녀팬이 보낸 선물이 되어 있었다―각자 자리에서 귀만 쫑긋거리고 있던 사람들까지 하나둘씩 설형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박스를 응시하던 설형이 박스를 열었다. 물론 사람들의 재촉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무리 불길한 예감이 들어도 일단 열어 확인을 해야만 했다.
늘 그렇듯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어긋난 적이 없었다. 박스 안을 확인한 설형이 그대로 굳었다.
“왜요? 뭐가 들었는― 힉―!”
설형의 반응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재민이 좀 더 바싹 다가왔다. 설형의 어깨 너머로 박스 안을 확인한 재민이 숨을 들이켰다.
“왜. 뭔데.”
뒤늦게 박스 안을 확인한 사람들의 표정 역시 다들 재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체, 이게.”
곱게 박스에 담아 배달된 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불에 탄 채 죽어 있는 검은 고양이 사체였다. 게다가 더 기괴하게도 그 검은 고양이 사체 주변을 시뻘건 붉은 장미로 정성들여 장식해 놓았다는 것이다. 고양이 사체만 담겨 있는 것보다도 더 소름이 끼치는 광경이었다.
“이거, 편지 아니에요?”
찌푸린 얼굴로 박스 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재민이 뭔가를 발견하고 박스 안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마침 설형도 그것을 발견한 참이었지만 이미 늦었다. 이미 손을 뻗은 재민이 종이를 낚아채듯 꺼냈다.
부스럭부스럭.
빠르게 종이를 펼치는 재민의 손으로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건.”
펼쳐진 종이에는 신문 기사가 스크랩되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신문 기사에 첨부되었던 도강우와 백설형, 두 사람이 사이좋게 마주보고 있던 바로 그 사진이었다.
물론 그들이 보았던 것과 달리 스크랩 속 사진에서 도강우는 눈이 도려내진 채 섬뜩한 얼굴로 바뀌어 있었지만.
잠시 정적이 흘렀다.
“백 형사 팬이 맞긴 맞나 보네.”
서로 시선만 마주하고 있던 사람들 중 누군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거기에 대놓고 맞장구를 치는 사람은 없었지만 사실 대부분 말을 한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팬은 무슨. 그냥 미친놈이지.”
심지어 그렇게 반박하는 김 형사조차도. 그때 누군가 불쑥 김 형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무슨 미친놈 말입니까?”
“무슨 미친놈이긴, 이거 보낸, 힉―! 도, 검사님?!”
지금 상황에서 무슨 분위기 파악 못하는 질문이냐고 핀잔을 하려던 김 형사가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고 기겁했다. 그 질문을 던진 이가 다름 아닌 도강우 검사였던 것.
“어, 언제부터 거기 계셨습니까?!”
“최 형사가 백 형사 팬이 맞는 모양이라고 하는 부분쯤에서?”
좀처럼 당황하는 법이 없는 베테랑 형사들의 얼굴 위로 당황한 기색이 번졌다. 물론 새파란 초짜 검사의 얼굴은 시종일관 태연했지만.
“그건 뭡니까?”
어찌할 바를 몰라 서로 눈빛만 주고받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강우의 무심한 시선은 재민의 손에 들린 종이를 향해 있었다.
“아, 이거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대답을 하려는 재민을 설형이 가로막았다. 동시에 재민의 손에 들린 종이를 낚아챘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강우가 한발 빨랐다. 사실 강우 쪽으로 손을 좀 더 뻗은 재민의 덕분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종이는 강우의 손에 들려 있었다. 설형의 사나운 시선이 재민을 향했지만 재민은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내 사진, 이네요.”
그 사이 눈이 도려내진 제 사진을 확인한 강우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한 번 더 재민을 노려본 설형이 급히 변명했다.
“그냥 질 나쁜 장난이니 신경쓰실 것 없습니다.”
“그냥 질 나쁜 장난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준은 이미 넘은 것 같은데요.”
흘끔, 그렇게 말하며 강우의 시선이 설형의 앞에 놓인 박스를 향했다. 이미 박스 안의 내용물까지 다 확인을 한 모양이었다. 이건 또 언제 봤대. 설형이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맞아요.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라구요. 전에도 그렇게 우습게 봤다가 큰일날 뻔하셨잖아요.”
“한 형사.”
게다가 설상가상 재민까지 대놓고 강우의 편을 들고 나섰다. 아무래도 조금 전 강우가 자신의 잘못을 문제 삼지 않고 그냥 넘어가 준 일로 완전히 도강우에게 넘어간 모양이었다. 그게 다 누구 때문인데. 답답하고 억울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런 사정을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설형의 부름에 순간적으로 재민의 어깨가 움츠러들었지만 말 그대로 잠시였다.
“이런 일이 자주 있습니까?”
강우의 질문 하나에 재민의 입이 다시 줄줄 열렸다.
“전에도 미친 스토커 새끼가 붙어서 얼마나 고생하셨다구요. 그게 벌써 한 이 년―.”
“한 형사!”
“…….”
결국 설형이 언성을 높였다. 재민이 이크, 하고 목을 움츠렸다. 여기까지가 진짜 설형의 마지노선이라는 걸 재민도 알아차렸다.
“스토커요?”
“백 형사님께 직접 물어보세요.”
더 이상 했다가는 설형에게 진짜 미운털이 박힐 것을 알아차린 재민이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강우의 시선이 설형에게 향했다. 하지만 설형은 대답 대신 책상에 놓인 박스를 안아 들었다.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는 설형에 그때까지도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물론 단 한 사람만 빼고.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