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1)

3

“사천팔백 원입니다.”

제기랄.

약사의 말에 무심코 안주머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던 설형이 속으로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지갑이 자신에게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

“무슨 문제라도…….”

찌푸린 얼굴로 굳어 있는 설형이 이상했던지 약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안주머니에서 손을 뺀 설형이 다소 난감한 표정으로 테이블에 놓인 약봉지를 도로 밀었다.

“죄송한데 나중에 다시―.”

그리고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불쑥 나타난 손이 약봉지를 낚아챘다.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낯익은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얼맙니까?”

“사천, 팔백 원이요.”

말을 하던 약사가 허락을 구하듯 설형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던 터라 설형이 말없이 동의했다. 만 원짜리 지폐를 받은 약사가 잠시 사라졌다.

여긴 대체 어떻게 알고 나타난 건가. 미간을 찌푸린 설형이 강우의 손에 들린 약봉지를 낚아채려고 손을 내뻗었다.

“무슨 약입니까?”

하지만 간단히 오른손을 휙, 하고 들어 올리는 것으로 그 손을 저지한 도강우가 나직이 물었다. 미간을 살풋 찌푸린 설형이 다시 빠르게 손을 내뻗었다.

“주시죠.”

하지만 이번에도 헛손질을 했다.

“어디 아픕니까?”

“네, 아픕니다.”

순순히 대답할 거라고는 예상 못했는지 도강우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그 틈에 설형이 탁, 하고 약봉지를 낚아챘다. 그리고는 그대로 약국 문을 나섰다. 그런 설형의 뒤를 바싹 따라붙으며 강우가 물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 겁니까.”

저기요! 그 사이로 뒤따라 나온 약사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도강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오히려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선 쪽은 백설형이었다.

“뒤에서 부르는데요.”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거냐고 물었는데요.”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쉰 설형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 거스름돈을 받아왔다.

“여기요.”

“백설형 씨.”

“나중에 괜히 저한테 이것까지 청구하지 말고 받으시죠.”

“그럴 일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대답―.”

“어디가 아픈지 그걸 꼭 말로 해야 압니까?”

끈질기게 구는 강우에게 얼굴을 찌푸린 설형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백설형 씨가 말을 안 하는데 내가 어떻게 압니까.”

“…….”

“혹시.”

침묵한 채 서로 얼굴만 바라보던 강우가 다음 순간 뭔가를 깨달았다. 뒤늦게 설형이 민망해하는 기색을 읽었던 것이다. 마주한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으로 강우도 눈치챘다는 것을 확인한 설형이 휙, 하고 뒤돌아섰다.

“미안합니다. 전혀 티가 안 나서 몰랐습니다.”

모르는 게 당연했다. 티가 안 나게 행동했으니까. 하룻밤 잠자리했다고 드러누울 만큼 약한 몸은 아니었다. 워낙 어제 정사가 격렬해서 그렇……. 속으로 중얼거리던 설형이 생각을 멈췄다. 지금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도강우가 알아차렸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설형은 얼굴로 열이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시선을 피한 설형이 휙, 하고 뒤돌아섰다. 돌아선 귀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성큼성큼, 평소보다 빠르게 걸음을 내딛었지만 보폭 자체가 다른 도강우를 따돌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곧바로 횡단보도였다. 괜스레 원망스러운 눈으로 빨간불을 노려보고 있으려니 바싹 옆으로 따라붙은 도강우가 태연히 물었다.

“거기가 아픈 겁니까?”

“아, 쫌―!”

설형이 급히 도강우의 입을 막았다. 그나마 이번엔 거기, 라고 지칭해 준 것이 천만다행이지만 그래도 길가에서 공공연히 나눌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귀까지 벌게진 설형과 달리 도강우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였다.

“여기 길가거든요.”

얼굴을 찌푸린 채 낮게 속삭인 설형이 괜히 한 번 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전혀 남의 눈 같은 건 신경도 안 쓸 것 같은 사람이 저렇게 작은 햄스터마냥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었다. 그래서 그런가. 자꾸만 백설형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일부러 싫어하는 행동을 하게 되었다.

사실 도강우는 누군가 싫다고 하는 행동을 일부러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누굴 놀리면서 희열을 느낀 적은 더더욱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백설형에게는 달랐다. 눈에 안 보이면 무의식적으로 찾게 되고 보이면 건들고 싶어진다. 부들거리면서 참는 것도, 발끈해서 달려드는 모습도 그렇게 깜찍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듣는 사람도 없는데 무슨 상관입니까.”

“언제 나타날지 모르잖아요.”

“시속 50킬로로 달리는 사람이 있지 않은 이상 갑자기 나타나는 사람이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

뒤늦게 전방 50미터 내에 사람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설형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말을 말자는 듯 고개를 내저은 설형이 방향을 틀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타이밍 좋게 파란불이 들어와 있었다. 설형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당연히 도강우가 다시 바싹 따라붙었다.

“얼마나 심한 겁니까? 그런 진통제를 먹을 게 아니라 병원을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

“내가 확인했을 때 부어 있긴 했어도 찢어지진 않았던데 혹시 안쪽은 찢어졌던 겁니까? 그런 거면 더더욱 병원을 가야―.”

“안 찢어졌습니다.”

이제는 대꾸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이 무색하게도 고작 두 번 만에 설형의 입은 다시 열렸다.

“그럼 왜.”

“왜긴 왭니까. 그 큰 걸 그렇게 마구 박아 댔는데 멀쩡한 게 더 이상한 거 아닙니까?”

“…….”

발끈해서 쏘아붙이자 도강우의 걸음이 멈췄다. 설형도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왠지 불길한 예감. 그리고 그런 불길한 예감은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다.

“거기까지는 생각 못했네요. 미안합니다.”

도강우의 사과에 설형의 얼굴이 조금 전 어느 때보다 일그러졌다.

저는 전혀 책임 없다고 뻔뻔하게 구는 것은 싫겠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사과를 받는 것도 그렇게 썩 기분이 좋은 일은 아니다.

“사과받으려고 한 말 아닙니다. 굳이 따지자면 그렇다는 거지.”

사실 이런 일로 사과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애초에 싫다는 사람 억지로 끌고 가서 한 것도 아니고 서로 동의하에 일어난 일이니 도강우가 사과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저렇게 순순히 사과를 하는 것은 저를 지금까지 자신과 잤던 여자들과 동일선상에 두고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특별히 어떤 의도를 두고 한 행동이라기보다는 기본적으로 여자와 잠자리를 하는 것이 당연한 남자의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어쨌든 내 책임이니 병원부터 가죠.”

“…….”

이래서 알리고 싶지 않았던 건데. 상대에게 특별히 어떤 의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분이 가라앉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설형이 눈을 내리깐 설형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느새 파란불이 빨간불로 바뀌어 있었다. 고립된 두 사람을 사이에 두고 차들이 빠른 속력으로 스쳐지나갔다.

“백설형 씨.”

“…….”

“백―.”

“백 형사요.”

“…….”

고개를 든 설형이 냉랭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앞으로는 백 형사라고 제대로 된 호칭으로 불러 주시죠.”

“…….”

잠시 침묵하던 도강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습니까?”

설형이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그런 거 없습니다.”

“…….”

뭔가 이상했다. 선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도강우는 마주선 설형에게서 거리가 느껴졌다. 그대로 설형이 멀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초조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강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탁.

순간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쳐진 손이 그대로 허공에서 머물렀다. 고개를 돌려 확인한 뒤에야 강우는 설형이 자신의 손을 쳐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주한 설형의 눈동자에 잠시 당황한 기색이 번졌다. 하지만 그건 아주 찰나와도 같은 순간이었고 이내 설형의 눈동자는 차갑게 변했다.

“검사님이 책임지지 않아도 제 몸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멋대로 여자 취급하지 마시죠.”

“…….”

차갑게 일갈한 설형이 뒤돌아섰다. 그리고 아직 빨간불인 횡단보도를 건넌다.

“백 형사―!”

달려오는 차를 본 도강우가 급히 손을 내뻗었다. 하지만 설형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다행히 충돌하기 직전 설형을 본 차가 먼저 속도를 줄였다.

빵―!!!

식겁한 표정의 운전자가 뒤늦게 클랙슨을 요란하게 울렸지만 설형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히 걸음을 내딛었다.

“하.”

무사히 건너편에 도달한 설형을 보며 강우가 입으로 웃었다. 잠시 멈췄던 숨을 내쉰 것이기도 했다.

저벅저벅. 멈춰서 있던 도강우도 설형이 간 방향으로 느긋하게 걸음을 내딛었다. 어느새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어 있었다.

“백 형사님!”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던 재민이 설형을 발견하고 후다닥 달려왔다. 그리고 뭔가를 찾듯 뒤편을 두리번거리더니 물었다.

“어? 도 검사님은요?”

“도검 행방을 왜 나한테 물어.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사실 큰 의미를 두고 물은 것은 아니겠지만 괜스레 찔려서 다소 민감하게 반응하고 말았다. 상대가 한 형사라 다행이었다.

“아니, 좀 전에 백 형사님 약국 가셨다는 말 듣더니 도 검사님이 뒤따라나가셨거든요. 약국가실 일이 있으셨나 봐요.”

대체 거긴 어떻게 알고 나타났나 했더니 원흉이 바로 여기 있었다. 설형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다. 물론 본인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꿈에도 모르는 한 형사는 천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길이 어긋났나 보네요. 약은 사셨어요?”

“…….”

대답 대신 약봉지를 들어 보인 설형이 멈췄던 걸음을 다시 내딛었다. 그런 설형의 뒤를 재민이 후다닥 따라붙었다.

“감기에는 쉬는 게 최곤데. 비상이라 쉬지도 못하시고 어떻게 해요.”

안타까워하는 재민의 말은 무시한 채 몇 걸음 걸어가던 설형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넌 왜 따라와. 나가던 길 아니었어?”

“아, 참.”

설형의 지적에 자신이 나가던 길이었다는 것을 떠올린 재민이 헤헤, 하고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설형의 얼굴 위로 한심하다는 표정이 떠오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디 가던 길인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물었다.

“약물 테스트 결과 나왔다고 해서 그거 받으러 가던 길이었어요.”

기껏해야 담배 피우러 나가는 길인 줄 알았더니. 설형의 얼굴이 한 번 더 확 찌푸려졌다.

“용케도 이름이랑 나이는 안 잊어버리고 기억한다?”

“헤헤.”

“빨랑 안 텨가?”

“다녀오겠습니다.”

후다닥 달려가는 재민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던 설형이 걸음을 내딛었다.

설형의 걸음은 상황실 앞에서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지나쳤다. 걸음이 멈춘 것은 복도 끝에 있는 정수기 앞이었다. 부시럭거리며 약을 꺼내 입안으로 털어 넣은 설형이 정수기 물을 받았다. 그러느라 설형은 복도를 등지고 선 상태였다.

덜컥.

뒤편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발소리가 났다.

“이번에도 그전까지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피해자 옷과 소지품이 백설공주가 등장하기 무섭게 짠하고 나타났다며?”

꿀꺽. 약을 삼킨 설형이 뒤돌아서려다 그대로 멈췄다.

“진짜 신기하단 말이야. 저번에도 최 형사가 한 달 내내 좆뺑이치면서 수사해도 안 나오던 증거가 백 형사 투입된 지 하루 만에 결정적인 증거가 나타났잖아.”

“그러니 그런 소문이 나도는 게지.”

“소문?”

“사실은 그 증거들이 바로 백설공주가 심어 놓은 것이라는 소문 말야.”

“에이, 설마.”

“물론 그냥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겠지만 그런 게 한두 번이라야지. 오죽하면 그런 소문이 다 돌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수사를 하다 보면 별의별 우연들이 겹쳐서 결과가 나는 경우가 있지. 그런데 하필이면 그 우연이 꼭 백 형사한테만 일어나냐는 거야. 꼭 누가 옆에서 도와주기라도 하는 것 마냥.”

피식.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대화가 이어졌다.

“뭐, 귀신이라도 도와준다는 거야?”

“혹시 알아? 진짜 살인자 아버지 귀신이라도 붙어 있을지.”

“…….”

이번에는 곧바로 반박의 말이 돌아오지 않았다. 상대가 자신의 말에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린 형사가 신이 나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꼭 그런 게 아니라도 피는 못 속이는 거라고 하잖아. DNA 자체에 살인범의 DNA를 자기고 있으니 범죄자 심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겠어? 그러니까 범죄자가 어디에 증거를 숨겼는지, 어떤 경로로 움직였는지를 쉽게 추측할 수 있는 거고.”

“그러고 보니 전에 백 형사랑 공조할 때 백 형사가 사건에 대해서 추측하면서 막 씨익, 하고 웃고 있는 거 본 적 있는데.”

“거봐. 사건 얘기하면서 웃는 게 말이 돼? 완전 소름끼치지.”

“글쎄. 보통 잘 안 웃는 사람이 웃으니까 소름끼친다기보다는 예쁘다는 생각만 들던데.”

“하긴 사내치고는 색기가 줄줄 흐르는 얼굴이긴 하지.”

낄낄거리는 두 사람 대화 사이로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든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이거 혹시 신종 괴롭힘입니까?”

뒤돌아선 채로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아차린 설형의 눈이 조금 커졌다.

“어? 검사님!”

뒤에 누군가 왔는지도 모르고 둘만의 대화에 심취해 있던 두 형사가 황급히 뒤돌아섰다. 하지만 곧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번진다.

“그런데 그게 무슨.”

“괴롭힘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묻는 형사들의 얼굴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마주선 도강우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본인을 뒤에 두고 뒷담화를 까고 있지 않습니까.”

무표정한 얼굴로 두 사람을 향해 말한 도강우가 이번엔 고개를 틀어 동의를 구하듯 묻는다.

“안 그렇습니까. 백 형사.”

아씨.

뒤돌아선 채 숨죽이고 있던 설형이 얼굴을 확 일그러트렸다. 하지만 곧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한 얼굴로 뒤돌아섰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는 뒷담화를 깐 사람도 민망하지만 들은 사람도 민망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배, 백 형사.”

“백 형사. 우리는 그런 의도는 아니고.”

반사적으로 도강우를 따라 고개를 튼 두 형사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곳에 설형이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괜―.”

“요즘 직장 내 왕따가 심각한 문제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제 눈으로 목격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괜찮다고, 신경쓸 것 없다고 말하려던 설형의 말을 도강우가 가로챘다. 나직한 그 말에 두 형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왕따라뇨!”

형사들이 펄쩍 뛰었지만 도강우는 두 사람의 항의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다시 한 번 설형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정식으로 문제 삼겠다고 하면 내가 진행하도록 하죠.”

“호의는 감사하지만, 됐습니다.”

설형이 딱 잘라 고개를 내저었다. 옆에 선 두 형사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물론 곧 강우의 눈치를 살피는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정말 됐습니까? 잘 생각해서 대답해요.”

“됐습니다.”

딱 잘라 말한 설형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두 형사에게 씽긋, 하고 웃으며 물었다.

“두 분 담배는 밖에서 피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

“아. 어, 그래야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자리를 피할 수 있는 핑계를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것을 모르지 않는 두 사람이 손에 들린 담배를 황급히 뒤로 숨긴 채 후다닥 자리를 피했다.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도강우가 성큼성큼 설형에게로 다가왔다.

“아주 눈물 나는 동료애네요.”

“…….”

분명 비꼬는 말인데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화가 나지 않았다. 평소 설형이라면 발끈해서 한마디 했을 타이밍인데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도강우의 얼굴 위로 의아한 기색이 번졌다.

“이건 정확히 하죠. 이건 다른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상사로서 직장 내 괴롭힘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나선 겁니다.”

괜스레 변명하는 도강우에 설형이 불퉁하게 대답했다.

“누가 뭐랬습니까?”

사실 도강우 입장에서는 그냥 모른 척해도 되는 일인데 일부러 나서서 제 편을 들어 준 것이니 설형으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설형은 그런 것을 순순히 고맙다고, 인정할 만큼 귀여운 성격이 아니었다.

고맙기도 하고, 그래서 조금 전 밖에서 퍼부었던 것이 민망하기도 한 복합적인 감정을 들킬까 봐 표정을 굳히다 보니 설형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딱딱한 무표정이 되었다.

물론 설형의 그런 기분을 알 리 없는 도강우는 난감한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 불쑥― 뭔가를 내밀었다.

“받아요.”

반사적으로 몸을 한 발 뒤로 물렸던 설형이 되물었다.

“뭡니까?”

도강우가 내민 것은 평범한 종이 봉투였지만 그것을 보는 설형의 눈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마치 그것이 당장이라도 자신에게 달려들기라도 할 듯이 상체를 뒤로 젖혔다. 하지만 그런 설형에게 강우가 바싹 다가섰다.

“빈속에 약 먹으면 안 되는 거 모릅니까?”

그리고는 아예 설형의 손에 봉투를 쥐어 주고 뒤돌아섰다.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그제야 설형은 그것이 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뒤따라오지 않았던 이유가 이거였나 보다.

“도 검사―.”

아차 싶어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도강우는 상황실로 들어가 버린 뒤였다.

“두 피해자 모두 혈액에서 숙시닐콜린(succinylcholine)이 발견됐다고 합니다.”

한 형사가 서류를 내밀며 보고했다.

“숙시닐콜린이면 마취제 아닙니까?”

“정확히 말하면 근이완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김 형사의 말을 설형이 정정했다. 김 형사의 얼굴이 굳었다.

“그럼.”

“맞아. 신경과 감각은 살아 있었겠지.”

즉 피해자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에서 성기를 잘렸고 그 고통을 고스란히 느꼈다는 말이었다. 상황실 내에 정적이 흘렀다.

“와, 씨발. 진짜 제대로 미친놈이네.”

누군가 욕설을 내뱉었지만 그건 거기 있는 모두의 생각을 대변한 것이었다.

끽―, 끼―익.

가벽에 붙여진 사진 위로 succinylcholine(숙시닐콜린)이라는 단어가 적혔다. 그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설형이 자신의 책상 위를 뒤적거렸다. 단 몇 시간 사이에 엉망으로 변한 책상 위에서 용케도 자신이 찾던 서류를 찾아냈다.

“뭡니까?”

설형의 주변으로 팀원들이 모여들었다. 설형이 펼친 서류는 첫 번째 피해자의 부검서였다.

“도 검사님 예상이 틀리지 않았네요.”

설형의 어깨 너머로 서류를 본 재민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첫 번째 피해자 부검서에는 약물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흘끔, 유리문으로 분리되어 있는 도강우 자리로 시선이 향했다. 도강우 검사는 보고를 위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숙시닐콜린을 썼다는 건 의학적인 전문 지식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겠네요.”

“그냥 마취제도 아니고 근이완제를 쓴 걸 보면 아무래도 그렇다고 봐야겠지.”

“의사일까요?”

“마취약을 마음대로 유용하려면 의사인 쪽이 용이한 건 사실이니까.”

“다행이네요. 경찰 쪽은 아니라.”

“그래.”

그렇다고 해도 경찰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설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도 나왔으니 밥이나 먹으러 가죠.”

역시나 홀가분한 얼굴의 김 형사가 제안했다. 시간이 어느 새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홍 반장이 겉옷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나가자.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밥은 먹어야지.”

이예~, 손을 번쩍 든 한 형사와 김 형사가 신이 나서 그 뒤를 따랐다.

“백 형사야. 뭐하냐. 얼른 안 오고.”

뒤늦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설형을 발견한 홍 반장이 설형을 향해 손짓했다. 밍기적거리던 설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에.”

솔직히 밥보다 어디 가서 한숨 자고 일어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설형은 조용히 점퍼 지퍼를 목 끝까지 끌어올렸다.

“오실 때가 됐는데.”

입구 쪽으로 고개를 쭉 뺀 홍 반장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누구 오기로 했어요?”

비운 소주잔을 내려놓은 설형이 물었다. 타이밍을 맞춰 재민이 잘 구운 갈비 한 점을 설형의 앞에 놓았다. 부담스러운 눈빛에 결국 설형이 갈비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헤헤, 하고 해맑게 웃는 재민의 등 뒤로 마구 흔들리는 꼬리가 보이는 것 같았다.

“여기 못 찾으시는 거 아니야? 막내야. 한번 나가 봐라.”

“아, 넵!”

고기를 뒤집던 재민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야. 진짜 누가 오기로 했어요? 누구?”

설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아니,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어졌다는 말이 맞았다.

“어? 오셨네요.”

자리에서 일어난 재민이 먼저 손님을 발견했고 그 다음으로 홍 반장도 손을 들어 보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여기, 여깁니다!”

입구에 서서 두리번거리던 이가 팀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좁고 허름한 돼지갈비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외모와 차림새를 한 인물의 등장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하지만 이미 그런 시선엔 익숙한 듯 도강우는 태연히 그들의 자리로 걸어왔다.

“가게 찾기 힘들지 않았습니까?”

“바로 보이던데요.”

“그러셨군요.”

“아, 검사님, 이리로 앉으세요.”

홍 반장과 도강우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재민이 얼른 옆자리에 있는 플라스틱 의자를 가져왔다. 그 의자는 설형의 옆자리에 놓였다.

“어떻게, 검찰 들어가셔서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뇨. 저도 아직입니다.”

마치 때를 놓친 것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함께 식사를 하자는 청장의 제의도 거절하고 온 참이었다.

“잘됐네요. 이거 좀 드세요. 여기 고기가 아주 맛있습니다.”

“네. 그럼.”

테이블 한쪽에 놓인 통에서 꺼낸 젓가락을 건네받아 고기를 하나 집었다. 그리고는 입안으로 가져갔다. 몇 개의 시선이 도강우의 얼굴로 집중되었다. 고기를 씹어 삼킨 도강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맛있네요.”

이렇다 할 미사여구도 없는 짧은 그 말 한마디에 긴장하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와르르 무너지며 단숨에 밝아졌다.

“그렇죠? 여기가 좀 허름한 것만 빼면 고급 한우전문점과 견주어도 뒤지질 않는다니까요.”

“이건 돼지갈빈데요.”

보다 못한 설형이 한마디 했지만 홍 반장의 사나운 눈총만 받았다.

“술은 됐습니다. 차를 가져와서요.”

소주잔을 가져온 가게 주인에게 도강우가 정중히 거절했다.

“저희도 반주로 한 잔씩만 하던 겁니다.”

“아, 네.”

그런 변명은 테이블에 놓인 소주병이나 몇 병 치우고 말씀하시죠. 설형이 속으로 이죽거렸지만 정작 도강우는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았다.

치익. 설형이 젓가락으로 집은 고기를 불판에 꾹꾹 눌렀다. 그런 설형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홍 반장이 결국 한소리 한다.

“임마. 먹을 걸로 장난치지 마.”

“장난치는 거 아닌데요. 골고루 익히는 건데요.”

“그러다 또 새카맣게 태워 먹으려고? 그냥 막내가 구워 주는 거 먹어.”

홍 반장의 핀잔에 설형이 쳇, 하고 속으로 혀를 차며 젓가락을 치웠다. 기다렸다는 듯 재민이 시커먼 그것을 불판에서 없애고 다른 조각을 냉큼 설형의 그릇에 올려놓았다.

“드실래요?”

그것을 젓가락으로 집어 올리던 설형이 불쑥 강우를 향해 물었다.

“임마. 뭐하는 짓이야.”

“아니, 너무 빤히 보시길래 먹고 싶어서 그런 줄 알았죠.”

하지만 펄쩍 뛰는 홍 반장과 달리 정작 도강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반응이었다.

“그럼 감사히.” 

아니 아무렇지도 않은 것을 넘어서 그것을 거리낌 없이 받아먹기까지 했다. 사실 설형이 젓가락으로 들고 있는 것을 멋대로 먹어 버린 것이지만, 설형의 젓가락에서 바로 입으로 옮겨갔으니 엄밀히 말하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맛있네요.”

“…….”

우물우물 고기를 씹은 도강우가 그대로 굳어 버린 사람들을 향해 태연한 얼굴로 감상을 내뱉었다. 설형 역시 젓가락을 든 채로 그대로 굳었다.

“의외로, 털털하시네요.”

다소 얼떨떨한 표정으로 홍 반장이 중얼거렸고, 그러자 비슷한 얼굴을 한 김 형사가 신기하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한 냄비에 숟가락도 안 담글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는.”

“한 냄비에 숟가락은 안 담급니다.”

“아, 네. 아무래도 그건 좀 그렇죠.”

물론 딱 잘라 말하는 도강우에 곧바로 말을 바꿨지만.

“남자가 그래 가지고 어디 사회생활 하겠습니까?”

권력에 굽신거리는 팀원들을 보며 쯧쯧, 하고 혀를 찬 설형이 거침없이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다. 곧바로 홍 반장의 사나운 눈초리가 느껴졌지만 설형은 모르는 척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잘만 했습니다만.”

“아마 뒤에서 엄청 욕먹었을 걸요.”

“그럴까요?”

“검사님 학교 다닐 때 도시락 반찬도 안 나눠 먹었죠?”

“저희는 급식이었습니다만.”

“…….”

입을 딱 다문 설형의 얼굴 위로 못마땅한 기색이 번졌다. 물론 도강우는 태연한 얼굴로 설형과 시선을 마주했다. 아 열받아. 재수는 없는데 딱히 반박할 말이 없다는 게 열받았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홍 반장이 불쑥 뜬금없는 소리를 꺼냈다. 찌푸린 설형의 얼굴과 담담한 도강우의 얼굴이 홍 반장에게 향했다. 무슨 소리냐고 눈으로 묻는 두 사람을 보니 더더욱 안심이 되는 홍 반장이었다.

“두 사람이 사이가 좋아 보여서요.”

“…….”

설형이 그대로 굳었다. 사실 홍 반장이 말한 사이가 좋아 보인다는 말은 진짜 말 그대로 사이가 좋아 보인다는 의미일 뿐이겠지만 찔리는 것이 있는 설형으로서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물론 도강우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특별히 나쁠 게 뭐가 있습니까.”

그냥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런 강우의 반응에 홍 반장은 안심했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낮의 일 때문에 혹시라도 검사님 기분이 상하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그런 건 아닌 것 같아 한시름 놨습니다.”

“아…….”

그제야 낮의 일을 떠올린 도강우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의식적으로 설형에게 시선이 향했다. 설형은 아무렇지 않은 척 제 앞에 놓인 술잔을 홀짝이고 있었지만 미간에 잡힌 주름이 강우의 눈에 확연히 들어왔다. 억울하긴 한데 그렇다고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수도 없으니 꾹꾹 참고 있는 것이 강우의 눈에는 너무나 고스란히 보였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이상하게 기분은 좋아졌다. 아무래도 설형이 말한 대로 자신의 내면에 S 기질이 숨어 있었던 모양이다.

“뭐, 사람이 흥분하면 그럴 수도 있죠.”

“헐.”

휙, 하고 설형의 고개가 다시 도강우에게 향했다. 웃음이 날 것 같았지만 강우는 태연히 말을 이어간다.

“오히려 저보다 백 형사가 기분이 상한 것 같은데요. 처음부터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만요.”

“아이구, 지 놈이 뭘 잘했다고 기분이 상합니까?!”

강우의 씁쓸해 보이는 미소에 홍 반장이 펄쩍 뛰었다. 설형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리고 이놈이 이렇게 툴툴거리는 게 나름의 애정 표현입니다. 정말 싫은 사람한테는 아예 말도 안 붙여요. 저한테도 맨날 바락바락 대드는 거 보세요.”

“그건 진짜 싫어서 그러는 거거든요?!”

결국 참지 못한 설형이 소주잔을 탕, 하고 내려놓으며 항의했지만 눈 하나 깜짝할 홍 반장이 아니다.

“저거 보세요. 저런 놈이라니까요.”

설형을 빤히 응시하던 강우가 흐음, 하고 묘한 소리를 내며 되물었다.

“그런 겁니까?”

“그렇다니까요.”

기가 막힌다는 듯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고 있던 설형이 이내 마음대로 하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마음대로 가지고 노시다가 제자리에만 갖다놔 주세요.”

그리고 앞에 놓인 소주병을 가져와 빈 잔을 채웠다. 아니 채우려고 했다. 강우가 그 병을 가로채서 가져가지 않았다면.

“제가 따라 드리죠.”

“됐―, 아.주. 고맙습니다.”

딱 잘라 거절하려던 설형이 사납게 노려보는 홍 반장의 눈초리에 곧바로 말을 바꿨다. 비꼬는 어투인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도강우는 씽긋, 하고 웃으며 잔을 채웠다. 진심으로 재밌어하는 것이 분명했다. 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설형도 가식적인 미소를 되돌렸다.

꼴꼴꼴.

맑은 소주가 잔을 채우는 소리가 퍼지고 그것을 감격스러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홍 반장이 말했다.

“이렇게 사이좋게 지내니 얼마나 좋아. 안 그렇습니까?”

“그러네요.”

도강우가 태연히 맞장구를 쳤다. 반면 씽긋, 입꼬리만 올려 웃은 설형은 곧 무표정한 얼굴로 소주잔을 들어 단번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달달하던 소주 맛이 갑자기 아주 썼다.

“검사님, 이차 갑시다! 이차는 제가 쏠 테니!”

계산을 마치고 막 밖으로 나오는 도강우를 향해 홍 반장이 한쪽 손을 높이 들어 올리며 외쳤다.

“그럴까요.”

도강우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인간이 진짜. 설형의 얼굴이 확 찌푸려졌다.

“아이구. 우리 검사님이 뭘 좀 아신다니까. 뭐 드시고 싶으십니까. 제가 뭐든 다 쏘겠습니다!”

가슴팍에서 지갑을 꺼내 흔들던 홍 반장이 순간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고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김 형사와 한 형사가 달려들어 홍 반장을 붙들었다.

“아, 저기 택시 오네요!”

설형이 손을 들어 골목을 빠져나가던 택시를 세웠다. 설형의 눈짓에 김 형사와 한 형사가 재빨리 홍 반장을 택시에 태웠다.

“이차, 이차 가야―.”

“네네, 택시 타고 움직이자구요.”

익숙한 듯 맞장구를 친 설형이 탁, 하고 뒷문을 닫았다.

“백 형사님은요?”

앞좌석에 올라탄 한 형사가 창문을 내리고 물었다.

“난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홍 반장님이나 잘 챙겨.”

“또 서로 들어가시려구요? 그러지 마시고 오늘은 집에 들어가서 주무세요. 내일부터 비상이라 언제 집에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는데.”

“뒤에 차 온다. 기사님 출발하세요.”

마침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차가 빵빵―하고 클랙슨을 울렸다. 신경질적인 소리에 이크, 하고 어깨를 움츠린 한 형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넣었다. 그래도 도강우를 향해 인사를 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검사님, 내일 뵙겠습니다.”

택시와 뒤에 서 있던 차가 차례로 골목을 빠져나가자 어두운 거리에 적막만이 맴돌았다.

“우리도 이만 가죠.”

술이 깨는지 한기가 도는 몸을 움츠린 설형이 그렇게 툭, 하고 내뱉으며 걸음을 내딛었다. 하지만 채 한걸음 내딛기도 전에 설형은 옷자락이 당겨지는 느낌에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이쪽입니다.”

아. 뒤늦게 강우가 차를 가져왔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저쪽에 세워 두셨습니까?”

“네.”

“전 이쪽이라. 그럼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그럼 이쯤에서 헤어지자고 고개를 숙인 설형에도 강우는 붙잡고 있던 옷자락을 놓지 않았다.

“걸어갈 생각이 아니라면 타고 가죠?”

“걸어가긴 누가 걸어갑니까. 택시 탈 겁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어이없어하는 설형에게 강우가 간단히 한마디 했다.

“택시비는 있습니까?”

“…….”

제기랄. 뒤늦게 자신의 지갑이 눈앞의 남자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은 설형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 날 밝는 대로, 꼭 그것부터 갚고 만다. 그렇게 결심한 설형이 방향을 틀어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오히려 가만히 서 있는 강우를 재촉했다.

“안 갑니까?”

포기가 아주 LTE급인 설형에 피식, 하고 웃은 강우가 이내 긴 다리를 움직였다. 빠른 걸음이었다.

“집이 어딥니까?”

차에 올라탄 강우의 물음에 설형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경찰서에 세워 주시면 됩니다.”

그러자 멈칫했던 강우가 진지하게 물었다.

“혹시 집이 없습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설형이 기가 막힌다는 듯 반박했지만 강우는 태연했다.

“그런데 왜 집이 어디냐고 물었는데 경찰서라고 대답합니까?”

“그거야 경찰서까지만 태워 주면 된다는 의미죠.”

“집이 어디냐고 물었지 집까지 태워다 준다고는 안 했는데요.”

“보통 그런 의미로 묻거든요?”

“…….”

그렇게 반박을 하긴 했지만 사실 집까지 태워다 준다고 할 줄 알고 설레발을 친 것이 맞았다. 민망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설형이 대답했다.

“성북동이요. 됐습니까? 뭐 주소라도 불러 드릴까요?”

“거기까지 알고 싶지는 않구요.”

“……아, 네.”

진짜 사람 민망하게 하는 재주는 타고난 사람이었다. 멋쩍게 대답한 설형이 조용히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곧 설형이 펄쩍 뛰며 고개를 바로 했다.

“뭐하는 겁니까?!”

도강우가 갑자기 설형을 덮치듯 상체를 기울여 왔기 때문이다. 동그래진 눈동자에 잔뜩 경계심이 번져 있었다. 하지만 도강우는 대답 대신 잡았던 벨트를 쭉 잡아당겼다.

찰칵.

경쾌한 소리를 내며 벨트가 잠기는 소리를 듣고서야 설형은 도강우의 행동이 단순히 안전벨트를 해 주려고 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별것도 아닌 일에 또 과민반응을 보였다는 것을 깨달은 설형은 얼굴로 열이 확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흠흠, 그, 그런 건 말로 하란 말입니다.”

“습관이 들어서. 앞으론 그렇게 하죠.”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사실 강우는 지금까지 어떤 여자에게도 자신의 손으로 벨트를 해 준 적이 없었다. 물론 지금도 설형이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 예상해서 일부러 한 행동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러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백설형이 유일무이했다.

“춥습니까?”

몸을 부르르 떠는 설형에게 강우가 물었다. 설형이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술이 좀 깨서 한기가 드는 겁니다.”

“그게 추운 거 아닙니까?”

“…….”

듣고 보니 그랬다. 민망한 마음에 시선을 창문 쪽으로 돌렸던 설형이 이내 부시럭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뇨. 됐―.”

코트를 벗는 강우를 보고 거절하려던 설형이 이내 말을 멈췄다. 이번 역시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김칫국을 사발로 마시는 꼴이 될까 봐, 였지만 다행히 이번엔 김칫국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툭, 하고 몸을 덮는 코트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분명 조금 전까지 자신과 함께 좁고 허름한 고깃집에 있었던 사람의 옷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냄새 납니까?”

도강우가 물었을 때에야 설형은 자신이 변태처럼 코트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뇨.”

설형이 황급히 코를 떼고 고개를 내저었지만 도강우는 이미 뒷좌석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이건 안 날 겁니다.”

종이봉투에 넣어 놓은 코트를 꺼내려는 것임을 깨달은 설형이 급히 손을 붙잡았다.

“괜찮다구요.”

“…….”

“사람 말 좀 믿어요.”

“알았습니다.”

“…….”

“손 좀 놔주시죠. 계속 이렇게 있고 싶으신 게 아니면.”

“힉.”

뒤늦게 자신이 강우의 손을 꽉 붙잡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설형이 기겁하고 손을 내던졌다. 뒤늦게 기겁하고 내던진 건 너무 무례했나, 싶었지만 정작 도강우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온도를 최고로 올려 놨으니까 곧 따뜻해질 겁니다.”

“네에.”

비싼 차라 그런가 도강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엉덩이가 뜨끈해지고 있었다. 긴 손가락이 바람이 나오는 송풍구 방향을 모두 설형을 향하게 했다.

차가 천천히 미끄러졌다. 좋은 차는 확실히 달랐다. 옆의 풍경이 달라지지 않았으면 움직이는 것도 모를 정도로 승차감이 좋았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후끈한 바람이 얼굴을 감싸자 자꾸만 눈이 감겼다. 뜨끈한 좌석에 등과 엉덩이, 다리가 말 그대로 녹진녹진하게 녹아드는 것 같았다.

운전하는 사람을 그것도 상사를 옆에 두고 잠드는 몰상식한 행동을 할 수는 없다고 설형은 마음을 다잡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차가 골목을 빠져나갈 땐 이미 설형은 깊은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색색거리는 소리를 내며 잠든 설형을 흘끔, 하고 확인한 강우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번져 있었다.

물론 도강우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미소였다.

“으음.”

뽀송뽀송한 침대 시트에 몸을 뒤척이던 설형이 이내 눈을 번쩍 떴다. 뽀송뽀송한, 이라는 부분에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집 침대 시트가 이렇게 뽀송뽀송할 리 없으니까.

―!

눈을 뜨자마자 흰 눈처럼 새하얀 시트를 발견한 설형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곳이 호텔방이라는 것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에 왜 이곳에 있는 건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또 스위치가 나가 버렸나. 하지만 불과 엊그제 이미 한 번 겪지 않았던가. 갑자기 텀이 짧아져 버린 건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로 혼란에 빠져 있을 때였다.

찰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일어났습니까?”

“…….”

자신의 물음에도 멍하니 저를 바라보고만 있는 설형에 강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왔다.

“무슨 안 좋은 꿈이라도 꿨습니까?”

걱정스러운 기색이 묻어나는 눈동자에 설형이 겨우 입을 뗐다.

“여기가.”

“호텔입니다.”

그제야 도강우의 차에서 잠이 들었던 마지막 기억을 떠올린 설형이 사납게 따져 물었다.

“누가 모릅니까? 내가 왜 여기 있냐는 말이죠.”

“기억 안 납니까?”

“……설마.” 

순간 설형의 눈동자에 번지는 의심을 읽은 강우가 눈살을 살풋 찌푸렸다.

“술 취해서 정신을 잃은 사람을 어찌할 만큼 쓰레기로 보입니까?”

“…….”

“오해할까 봐 말하는 건데 저 겉옷은 덥다고 본인이 벗은 겁니다.”

그제야 설형도 자신이 제대로 옷을 다 입은 채라는 것을 확인했다. 제가 벗어던졌다는 점퍼는 벽 쪽 옷걸이에―세탁까지 마쳤는지 투명한 비닐에 덮여 있었다.―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겁니까?”

미안한 마음과는 달리 나가는 목소리는 날이 서 있었다.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질 않길래 일단 내 숙소로 데려온 것뿐입니다.”

“여기 호텔 아닙니까?”

“사건 해결 전까지는 집에 들어가기 힘들 것 같아서 여기서 지내기로 했습니다.”

“…….”

“이제 더 궁금한 거 없습니까?”

“정말 아무리 깨워도 깨지 않았던 것 맞습니까?”

“어깨에 들쳐메고 올라왔는데도 한 번도 안 깨고 잘만 자던데요.”

“…….”

“만약 중간에 깼으면 얌전히 호텔방에 들어왔겠습니까?”

영 믿기질 않는다는 듯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도강우를 노려보던 설형도 뒤늦게 그건 그렇겠다 싶었는지 의심의 눈길을 조금 누그러트렸다.

“됐습니까?”

“…….”

“그럼 나가죠.”

강우의 명령에 가까운 제안에 멋쩍어서 아무 말도 못하던 설형이 순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삐죽, 솟아 있는 뒷머리는 전혀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도강우를 따라 걸음을 내딛던 설형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다시 물었다.

“그런데 제가 여기 침대를 차지했으면 도 검사님은 어디서 주무신 겁니까?”

“난 다른 방에서 잤으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저 때문에 지난밤 불편하게 한 것이 미안해서 꺼낸 말이었지만 도강우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의심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설명을 해야 했지만 다시 입을 연 설형이 가장 먼저 물은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다른 방이요?”

다른 방을 하나 더 잡았다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설형에 막 문을 열고 거실로 나온 강우가 손가락으로 오른쪽을 가리키며 무심히 대답했다.

“저 방이요.”

무의식적으로 강우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주었던 설형이 이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이 아는 보통의 호텔방이 아니었다.

“아침 간단히 먹고 출발하죠.”

그렇게 말한 강우가 음식이 준비된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의자를 빼서 앉을 때까지도 설형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백 형사님.”

“…….”

도강우의 부름에 그제야 설형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그리고는 오히려 도강우를 향해 왜 그러냐고 눈으로 묻는다. 피식, 하고 웃은 도강우가 자신의 앞쪽 테이블을 손으로 탁탁, 쳤다.

“식사요.”

“아, 네.”

그제야 설형도 이쪽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조용히 와서 앞자리에 앉은 설형이 수저를 들기도 전에 입매를 일그러트렸다.

“죽이네요.”

“속이 좋지 않을 것 같아 준비했습니다.”

“검사님은 밥이구요.”

물끄러미 제 것을 보며 말하는 목소리에서 묘하게 불퉁한 기색을 느낀 강우가 되물었다.

“바꿔 먹을까요?”

“네.”

한 번 망설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설형에 강우가 말없이 제 앞에 놓인 트레이와 설형의 트레이를 바꿨다.

“여기요.”

“고맙습니다.”

설형이 이렇게 순순히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것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후르륵. 눈을 반짝이며 수저를 든 설형이 재빨리 복지리를 한 입 떠먹었다.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러더니 아예 수저를 놓고 그릇째로 들어 쭉 들이켰다.

아으~, 좋다. 그릇을 내려놓으며 사십 대 아저씨나 낼 법한 소리를 내는데도 그 모습이 전혀 눈살 찌푸려지거나 불쾌하게 느껴지기는커녕 오히려 귀엽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제 눈이 어떻게 된 게 분명했다.

“식욕이 돌아온 걸 보니 다 낫긴 나은 모양입니다.”

“그 정도는 소주 한 병 먹고 한숨 자고 일어나면 괜찮습니다.”

“…….”

강우의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설형은 몰랐지만 지난밤 자신의 집안 의사까지 왕진을 왔었다.

“검사님은 안 드십니까?”

“먹습니다.”

강우의 수저도 앞에 놓인 잣죽을 떴다.

“그 몸에 그거 먹고 힘이나 나겠습니까?”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미간을 찌푸린 설형이 한마디 한다.

“잣죽은 고열량 음식입니다.”

“그래도 음식이 씹히는 맛이 있어야죠.”

“……죽 싫어합니까?”

“싫어한다기보다 금방 꺼지잖아요.”

“그러라고 죽을 먹는 겁니다만.”

“그러니까 아파도 움직이려면 힘이 나는 걸 먹어야죠.”

“…….”

그제야 강우는 자신과 설형의 전제조건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프면 약을 먹고 쉬기 위해서 소화가 잘 되는 죽을 챙겨먹는 것이 보통이지만 설형은 아파도 누워서 쉬지 못하기 때문에 아파도 죽을 먹지 않는 거였다.

대체 이 남자는 어떻게 살아온 것인가. 강우는 조금 기분이 묘했다.

“그래도 어제 죽은 잘 먹었습니다.”

빤히 보는 강우의 시선을 오해했는지 설형이 급히 한마디 덧붙였다. 무표정하게 있던 강우가 입꼬리를 씨익 끌어올렸다.

“그래도 내버리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먹을 거 버리면 벌 받아요.”

멋쩍은 마음에 퉁명하게 대답한 설형이 다시 숟가락을 놀렸다.

“비싼 호텔은 나오는 음식도 다르네요.”

잣죽에, 복지리에, 누가 봐도 술 먹은 다음날 해장용 음식이 아닌가. 이게 말로만 듣던 고객맞춤 서비스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중얼거리는 데 강우가 물잔을 들어 마시며 무심히 말했다.

“이건 따로 부탁한 겁니다.”

“부탁한다고 이런 것도 들어주고, 굉장히 좋은 호텔이네요.”

“꼭 이 호텔이 아니라도 대부분은 스위트룸 고객한테 그 정도 서비스는 해 줄 겁니다.”

“아 스위트룸이라―.”

그런 거였구나,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던 설형이 이내 굳었다.

“여기.”

“…….”

수저를 들던 강우가 말하라는 듯 움직임을 멈췄다. 재촉하는 시선에 설형이 미간을 살풋 찌푸리며 되물었다.

“스위트룸이었습니까?”

심하게 좋아 보인다 싶긴 했지만 그래도 설마, 싶었다. 하지만 그런 설형의 기대를 깨부수듯 도강우가 태연히 대답했다.

“네. 좁은 건 딱 질색이라서요.”

잘난 척하는 것도 아닌 그저 사실을 말하듯 무심한 말투라는 게 더 빈정이 상했다.

“모르셨어요? 도 검사님 재벌3세잖아요. 아버님은 국회의원이시고.”

“…….”

오히려 어떻게 그걸 몰랐을 수 있냐 놀라는 재민의 반응에 설형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물론 대충 잘 사는 집 자식일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그 정도일 줄 알았나.

조금 멍하게 서 있는 설형에게 효자손으로 등을 긁던 홍 반장이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이렇게 뭘 몰라서야, 그래서 잘도 출세하겠다.”

물론 그런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을 설형은 아니었다.

“그런 분이 어제 그런 가게에 도검을 부르셨습니까?”

“아.”

뒤늦게 홍 반장도 아차, 싶었던 모양이다.

“거긴 좀 그랬나?”

조금 불안해진 얼굴로 되묻는 홍 반장에 김 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야 맛좋고 양 많으면 맛집이지만 재벌 3세한테야 어디 그렇겠습니까? 아마 그런 허름한 가게도 처음 와 봤을 걸요.”

“그래도 표정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잖아.”

“원래도 항상 그런 표정이잖습니까. 그래서 그런가 난 그 인간이 진짜 좋은 건지 싫은 건지 도통 속을 모르겠던데.”

홍 반장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심지어 불러 놓고 계산도 도검에게 떠넘겼죠, 아마?”

“누가 떠넘겨?! 내가 하려고 했는데 도검이 해 버린 걸 어쩌라고?!”

“반장님도 출세하시긴 글렀네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약을 올리는 설형에 홍 반장이 발끈해서 외쳤을 때였다.

“그거 몇 푼이나 한다고 재벌 3세나 되는 사람이 그거 가지고 꽁해 있으면 그게 더―.”

“네, 안 꽁해 있습니다.”

“힉―!”

거짓말처럼 불쑥 대화에 끼어든 낯선 목소리에 다들 그대로 굳었다. 천천히 뒤로 고개를 돌리는 홍 반장의 목에서 끼기긱, 소리가 나는 착각마저 일었다.

“거, 검사님. 언제 오셨습니까?”

“금방이요.”

“아.”

그래도 다행히 마지막 얘기만 들은 것인가 싶어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잠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려던 도강우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그리고 앞으로도 꼭 불러 주세요. 제가 재벌 3세라도 맛있고 싼 거 좋아하거든요. 원하시는 출세는 못 시켜 드려도 그 정도는 푼돈이기도 하고요.”

씽긋, 하고 웃은 도강우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씨발, 좆됐네.”

유리문이 닫히고 책상에 앉은 도강우가 서류를 펼쳐드는 장면을 조용히 숨죽인 채 지켜보고 있던 팀원들 중 가장 참을성이 없는 김 형사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물론 입을 열지 않았을 뿐 다들 김 형사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팀원들 역시 조용히 맞장구를 쳤다.

“그래도 표정은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요.”

안쪽을 살피던 재민이 속삭였다. 하지만 김 형사의 투덜거림이 이어졌다.

“맨날 저런 표정이니 속을 알 수가 있나.”

보다 못한 홍 반장이 설형을 향해 지시했다.

“백 형사야. 니가 가서 좀 살피고 와라.”

“제가 왜요?!”

설형이 펄쩍 뛰었다.

“너랑 제일 친하잖아.”

“친하긴 누가 친해요? 어제 화해하라고 자리까지 마련한 거 잊으셨어요?”

“그래서 내 덕분에 화해했잖아. 보니까 아침에도 같이 출근하고.”

“같이 출근하긴 누가 출근했다고 그래요. 요 앞에서 만났다니까요.”

홍 반장 입장에서는 그냥 아무 근거나 다 갖다 붙이는 것이겠지만 괜스레 찔리는 것이 있는 설형으로서는 반박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귀신같이 눈치챈 홍 반장이 뻔뻔스럽게 책임을 전가했다.

“그리고 사실 따지고 보면 이게 다 너 때문에 일어난 사단이잖아.”

“맞아요. 백 형사님이 괜히 그런 말 꺼내셔서.”

심지어 막내 재민까지 거들고 나섰다. 기가 막힌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던 설형이 이내 관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냥 신경쓰지 마요. 형사가 사건만 잘 해결하면 되는 거죠, 뭐. 언제는 실력으로 승부하라면서요.”

“누가 출세나 그런 것 때문에 그래? 우리가 한 얘기 때문에 상처 입었으면 어쩔 거야.”

헐. 지금까지 중에 가장 기가 막힌 말이었다.

“저 인간이 그런 말 때문에 상처 입을 인간으로 보입니까?”

음흉하게 뒤에서 다 듣고 있다가 따박따박 들은 말을 하나도 빼먹지 않고 반박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기가 막혀하는 설형에 김 형사가 반박하고 나섰다.

“그건 모르는 일이죠.”

“어?”

“백 형사님은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렇게 생겼지만 저도 상처입어요.”

“아니, 저, 그건, 미안.”

험악한 얼굴이 풀이 죽으니 오히려 더 상대하기가 힘이 들었다. 더듬거리던 설형이 머뭇거리다가 사과하자 김 형사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미안하면 얼른 들어가 보세요.”

“어?” 

그리고는 그대로 설형의 등을 떠밀었다. 거기에 재민도 재빨리 합세했고 어어, 하고 어물거리는 사이에 설형은 검사실 문 앞에 서 있었다.

똑똑. 

심지어 친절하게 설형을 대신해 노크까지. 항의를 하기도 전에 서류에서 시선을 뗀 도강우가 이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설형이 고개를 틀었을 때는 두 사람은 빛을 본 바퀴벌레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원망스러운 눈으로 저만치 떨어져 있는 팀원들을 바라봤지만 이미 늦었다.

“들어와요.”

설형이 밍기적거리는 사이 어느 새 자리에서 일어난 강우가 손수 문까지 열어젖혔다. 결국 설형이 무거운 발걸음을 앞으로 내딛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아, 네. 할 말, 있으니까 여기 왔겠죠.”

“…….”

말해 보라는 듯 책상에 걸터앉은 강우가 팔짱을 꼈다.

“그러니까, 내가 여기 온 이유는.”

“이유는요.”

“그러니까, 탐문 수사를 나가 보려고 하는데 혹시 함께 가실 생각 있으신가 해서요.”

“……탐문 수사요?”

“첫 번째 피해자 주변 탐문 수색을 나가 볼까 해서요.”

“그건 다른 팀에서 담당하고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

“가만히 앉아서 CCTV만 들여다보고 있는 건 영 체질에 안 맞거든요.”

이번엔 좀 편하게 일하나 싶었더니. 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다른 팀원들은요?”

흘끔, 시선이 밖을 향했다. 샤사삭, 시선이 흩어지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츳, 하고 혀를 찬 설형이 대답했다.

“다른 형사들은 할당량들이 있어서요.”

“나랑 같이 가는 거 싫어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아닌데요?”

“…….”

“오해하신 모양이네요.”

고개까지 절레절레 내젓는 설형에 피식, 하고 웃은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죠.”

코트를 챙긴 강우가 먼저 문을 열고 나섰고 그 뒤를 설형이 바싹 따라붙었다.

“어디 가십니까?”

홍 반장이 무심한 얼굴로 물었다. 물론 그 안에 초조한 기색이 고스란히 드러났지만. 쯧쯧, 연기자의 꿈은 애시당초 버리길 잘했다고 속으로 혀를 차며 설형이 대답했다.

“어디 가긴요. 반장님이 검사님 모시고 현장 좀 둘러보고 오라고 하셨잖아요.”

“내가?”

금시초문이라는 얼굴로 되묻던 홍 반장이 뒤늦게 눈치를 채고 곧바로 말을 바꿨다.

“아, 그랬지. 내가.”

“설마 제 CCTV는 반장님이 보시겠다고 한 것까지 잊으신 건 아니죠?”

“내가?”

“…….”

“그랬지. 안 잊었어. 그걸 잊었을 리가 있나.”

설형의 꼼수라는 걸 알면서도 홍 반장은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승리자의 미소를 띤 설형이 막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홍 반장이 설형의 팔을 붙잡았다.

“적당히 해라. 괜히 혼자 미친년처럼 현장 다 헤집어서 다른 팀한테 밉보이지 말고.”

“네.”

설형이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거라는 건 설형도, 그렇게 말한 홍 반장조차도 다 알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재민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기분 상하시진 않은 거 같아서 다행이네요.”

그나마 한 가지는 해결되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김민지 씨?”

막 친구들과 건물을 나오던 여학생이 순간 멈칫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누구세요?”

순간적으로 눈동자에 떠올랐던 경계의 빛은 서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보자 누그러졌다.

“서부서 백설형 형삽니다.”

오히려 신분증을 보여 주자 경계의 빛이 다시 짙어졌다.

“한지석 씨 일로 몇 가지 질문할 게 있어서 그런데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지석이요?”

다행히 한지석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경계의 빛이 다시 누그러졌다.

“민지야.”

한발 뒤에 서 있던 친구들이 부르자 김민지는 고개를 돌려 괜찮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미안, 먼저들 가 있어. 곧 따라갈게.”

무슨 일인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들이었지만 민지의 표정이 단호해서 그런지 더 이상 묻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

“혹시 범인이 잡혔나요?”

친구들이 사라지기 무섭게 민지가 다급히 물었다. 설형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젓자 실망으로 어깨가 축 늘어졌다.

“당시에 한지석 씨와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고 하던데요.”

“사귀거나 그런 건 아니고 같은 과 동기라 수업을 많이 들었어요.”

“경찰 조사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긴 했는데 뭔가 이상한 것이 있어서요.”

“네?”

“한지석 씨 부모님 진술을 보면 두 분이 사귀는 사이라고 알고 계셨다고 진술하셨던데요. 초기에 민지 씨도 그렇게 진술했고요.”

“……그건.”

“잘잘못을 따지려는 게 아닙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알고 싶은 거죠.”

“그게, 혹시 중요한 단서라도 되나요?”

“별게 아닐 수도 있고, 결정적인 단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진술을 할 때는 아무리 사소한 부분이라도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 거구요. 아주 작은 퍼즐 하나가 잘못 끼워져 있으면 다음 퍼즐까지 안 맞아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요.”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던 민지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사실은 지석이가 부탁했어요.”

“뭘 말입니까?”

“사귀는 사이인 걸로 해 달라고.”

“그래야 할 이유라도 있었습니까?”

“그게, 지석이 부모님께서 지석이 휴대폰을 봤는데 사귀는 사이에서나 할 법한 대화들을 나눈 걸 보셨나 봐요. 벗은 사진 같은 걸 찍어 보낸 것도 있고.”

“그럼 그 사람을 보여 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상대가 남자였거든요.”

“…….”

“지석이 부모님은 평범한 분들이라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개념 자체를 모르세요. 그래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은 있으셨는지 계속 사귀는 사람을 한 번 보자고 지석이를 닦달하셨나 봐요. 안 그럼 원룸도 처분하고 집으로 들어오게 하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도 하시고. 전 지석이가 그런 성향이라는 아는 유일한 동기여서 딱 한번 그런 척 연기를 한 거예요. 그날 이후로는 그런 적 없구요.”

“한지석 씨가 게이였다는 겁니까?”

“……네.”

“경찰 조사에서 왜 그 얘기를 하지 않은 겁니까?”

다그치는 듯한 설형의 물음에 민지가 한발 뒤로 물러섰다.

“백 형사님.”

그때까지 아무 말 없이 한발 뒤로 물러서 있던 도강우가 설형의 어깨를 붙잡아 말렸다.

“하지만―.”

“민지 씨도 무슨 사정이 있었겠죠. 그렇죠?”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는 강우에 민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실은 그게.”

머뭇거리며 말을 꺼내는 민지의 몸은 아예 강우 쪽으로 확 틀어져 있었다.

“그때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을 때 제 옆에 지석이 어머님이 함께 계셨어요. 물론 나중에라도 얘기를 했어야 했는데 지석이가 살해당한 곳은 집이었고, 아, 그 당시에 지석이가 만나는 사람은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사건과 별 상관도 없는데 지석이가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걸 굳이 밝힐 필요가 있나 싶었어요. 괜히 게이라고 그러면 사람들 인식이 문란하고 막 산다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특히 형사들은 더, 아니 뭐, 형사님들이 그렇다는 건 아니구요.”

민지가 크게 손을 흔들며 부인했다.

“그때 사건 수사했던 형사들은 좀 그랬어요. 그렇게 살해를 당했으니 여자관계 문란했을 거라고 전제를 두고 사건을 수사를 하더라구요. 그런 데다 대고 사실은 게이였다고 말하면 더 수사가 제대로 안 될 거 같아서.”

“…….”

“제가 아주 큰 실수를 한 거죠?”

“아뇨.”

당연히 큰 실수였다. 수사방향 자체가 아예 달라질 만큼 결정적인 내용인데 그걸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다니. 그럼에도 도강우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도강우가 여자를 대하는 방식은 저렇구나. 왠지 제가 아는 도강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보는 느낌이었다. 저한테는 웃지도 않고 얄미운 소리만 해대더니. 그렇게 투덜거리다 이내 설형이 무슨 생각을 한 건가 하고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아, 여기 벌레가…….”

그러다 미친놈이라도 보는 듯한 두 개의 시선을 느끼고 급히 변명했다. 뭐하는 짓이냐고, 한심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눈빛에 울컥한 기분이 들었지만 제가 잘못한 것은 사실이라 조용히 입을 꾹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 만나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 있죠. 친구의 명예가 달린 부분이니까.”

“마, 맞아요.”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민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를 올려다보는 민지의 눈은 사랑에 빠진 여자의 것이었다. 본디 여자는 위험에서 자신을 구해준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법이니까.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매력적인 남자였지만.

“혹시 뭔가 더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연락 주시겠습니까?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민지의 시선은 강우에게서 떨어지지 못했다.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설형이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이 번호로―.”

“아, 이 형사님 번호 알려주시면 안 되나요?”

명함을 내민 손이 민망해졌다.

“이분은 형사가 아니라 검사님이라 명함이 없으세요. 제 쪽으로―.”

“괜찮습니다. 제 번호는.”

설명을 하는 설형을 말린 강우가 자신의 연락처를 알려주었고 여자가 휴대폰에 저장하는 것까지 함께 지켜봐 주었다. 화기애애한 두 사람을 멍하니 보고 있던 설형이 슬그머니 내밀었던 명함을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럼 전, 친구들이 기다려서…….”

“다음에 뵙죠.”

고개를 꾸벅인 민지가 돌아섰다.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강우가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설형은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 뒤였다.

“같이 가죠.”

강우가 몇 걸음 만에 사이를 좁혔다. 얼굴을 찌푸린 설형이 툭, 하고 한마디 내뱉었다.

“여자 꼬시는 재주까지 탁월하신 줄은 몰랐습니다.”

“…….”

물론 그 말을 내뱉은 순간, 아니 의아한 표정의 도강우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후회하고 말았지만.

“혹시.”

처음엔 의아한 표정으로 시선만 마주하고 있던 도강우의 눈동자에 일순 웃음기가 번졌을 때는 더더욱.

“질투하는 겁니까?”

“…….”

평소처럼 기가 막힌다는 듯 넘기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설형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자기도 모르던 자신의 본심을 쿡, 하고 찔린 탓이었다.

굳은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는 설형을 향해 도강우가 피식, 하고 웃으며 덧붙였다.

“속상해할 것 없습니다. 여자는 얼굴보다는 다정한 남자에게 끌리게 되어 있는 법이니까요.”

“…….” 

그게 무슨.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살풋 미간을 찌푸리던 설형은 이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도강우는, 조금 전 여학생이 저보다도 도강우에게 마음을 연 것에 질투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보통의 남자라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테니까. 설형 역시도 자신이 그 여학생을 상대로 질투를 하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그나마 다행한 일은 도강우에게 이런 본심을 들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솔직히 그 얼굴로 얼굴보다는 성격이라고 말하는 건 좀 양심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긴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따지고 드는 설형이었다. 덕분에 표정 관리도 쉬웠다. 하지만 정작 말을 한 강우는 태연했다.

“백 형사에 비하면 난 평범한 편이죠.”

“…….”

헐. 설형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제가 진짜 검사님 생각해서 드리는 충곤데요. 행여나 어디 가서 그런 얘기는 하지 마십시오. 진짜 평범한 사람들한테 돌 맞습니다.”

“왜요. 요즘은 나 같은 타입보다는 백 형사처럼 예쁜 남자가 더 인기라던데요.”

“방금 전 상황을 보시고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그렇게 찬바람 쌩쌩 부는 얼굴로 취조하듯 묻는데 어떤 여자가 겁을 안 집어먹습니까? 물론 난 그렇게 싸늘한 얼굴이 더 취향이긴 하지만.”

“……그럼 뭐, 수사하는데 살살거리면서 해야 한다는 겁니까?”

설형이 불퉁한 목소리로 반박하자 강우가 오히려 되물었다.

“그게 뭐 어려운 일입니까?”

강우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닐지 몰라도 설형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설형의 콤플렉스기도 했다.

“검사님은 아무한테나 살살거리는 게 아무렇지 않을지 몰라도 전 생겨먹기를 그렇게 생겨먹어서요.”

“…….”

그렇다 보니 괜히 울컥한 마음에 불툭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물론 내뱉는 순간 곧바로 아차, 싶었지만.

“나도 아무한테나 그런 건 아닙니다만.”

다소 과민한 설형의 반응에 의아한 기색이 번졌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하는 강우는 조금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담담한 어조로 반박했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그게 어렵다고 생각한 적은 없으니, 쉽게 말한 건 맞네요.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죠.”

“…….”

제기랄. 설형이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물론 그건 상대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솔직히 상사로서 그 정도 충고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범주의 것이고 게다가 그런 말은 이미 홍 반장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 왔던 말이었다. 이 새끼, 저 새끼 욕지거리까지 섞어서 말하는 홍 반장에 비하면 이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 별것도 아닌 말에 이렇게 발끈해 버린 것은 그 말을 한 이가 도강우이기 때문이라는 걸 설형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맥이 탁 풀렸다. 공격에 대비해 잔뜩 가드를 올리고 있었는데 상대는 애초에 저와 싸울 생각 자체가 없었던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설형도 조금 솔직해질 수 있었다.

“부럽네요.”

저도 모르게 툭, 하고 흘러나온 진심. 하지만 이번에는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검사님 같은 성격, 부럽다구요.”

“…….”

“비꼬는 거 아니고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압니다.”

아무 말 없이 저를 빤히 응시하고만 있기에 혹시 오해한 것인가 싶어 급히 변명했던 것인데 그런 건 아니었던 모양.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딱 잘라 말하는 강우에 안심하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굳어 있는 표정에 괜스레 설형은 주절주절 말이 많아진다.

“홍 반장님도 제발 융통성 좀 기르라고, 안 해도 될 고생을 왜 사서하고 다니냐고 매번 잔소리하시거든요. 뭐, 저도 가끔 제가 답답한데 남들은 오죽하겠어요.”

침묵하고 있던 강우가 툭, 하고 가볍게 입을 열었다.

“난 백 형사의 그런 성격, 좋은데요?”

“…….” 

설형의 표정이 살풋 일그러졌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이라 순간적으로 당황한 나머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은 것이었는데 그걸 기분이 상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강우가 곧바로 변명하듯 뒷말을 잇는다.

“조금 전 그게 뭐가 어려운 일이냐고 질문했던 건 정말로 그게 왜 어려운지 모르겠어서 물은 것이지 고치라고 하거나, 비난을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

“뭐, 맹세라도 할까요?”

“아뇨. 믿어요.”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인 설형에게 강우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그제야 설형도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그래도, 조금은, 일말의 답답함은 있지 않습니까?”

“전혀요.”

“…….”

“만약 백 형사가 나 같은 성격이었다면 난 아마 백 형사를 이렇게 믿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아니, 믿을 수 없다는 게 더 맞는 말이겠네요.”

“…….”

설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 온전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해 준 사람은 도강우가 처음이었던 것.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홍 반장과 팀원들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들이라는 걸 설형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한다는 말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건 그들이 설형을, 진짜 설형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도 설형은 상관없었다. 어찌 보면 사람이 타인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 거니까.

하지만 도강우의 말을 듣는 순간 설형은 자신이 그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상관없어서가 아니라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던 거다. 그래야 상처입지 않으니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받는 기분. 그건 단순히 기쁘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따스하고 다정한 온기에 차가운 몸이 한 치의 틈도 없이 감싸여 있는 기분.

게다가 위로를 한다거나 기분을 좋게 해 주려고 하는 의도가 아니라 아닌 그저 담담하게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말하는 것뿐이라는 듯한 도강우의 모습이 더더욱 어떤 미사여구보다도 더 마음에 와 닿았다.

“그렇게 절 믿고 계셨는지 몰랐네요.”

하지만 설형의 입에서 툭, 하고 튀어나온 말은 그런 속마음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심지어 조금 전보다 훨씬 더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스스로도 귀엽지 않은 성격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백설형이었다. 하지만 그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적어도 내 뒤통수를 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

헐. 설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 말은 그럼, 검사님은 제 뒤통수를 치시겠다는 말입니까?”

당연히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다. 설사 거짓말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설형의 예상과 완전히 빗나갔다.

“가능하냐 아니냐를 묻는 거라면, 그렇다고 해야겠죠.”

“…….”

태연히 말하는 강우에 설형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물론 실제로 그럴 거냐고 물으면 대답은 노, 지만요.”

“가능하다는 말과 뭐가 다릅니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했지만 말투가 점점 불퉁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전혀 다르죠.”

“…….”

강우가 딱 잘라 말했지만 설형의 눈동자에 어린 불신의 눈빛은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다. 억울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 강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 전 내가 김민지 씨한테 친절하게 군 거, 기억하고 있습니까?”

“…….”

모를 리가 있나. 애초에 뭐 때문에 이런 상황이 된 건데. 하지만 친절하게 대답할 기분은 아니라 설형은 대답 대신 뚱한 얼굴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강우도 꼭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은 아니었던 터라 그대로 뒷말을 이었다.

“내가 왜 그런 거라고 생각합니까?”

“……뭐, 민지 씨가 마음에 들었거나―.”

“내 눈이 그렇게 형편없어 보입니까?”

“…….”

헐. 누가 들으면 엄청 못생긴 여자라도 되는 줄 알겠네. 화려하고 눈에 띄는 전형적인 미인은 아니라도 충분히 예쁘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의 아가씨였다. 하지만 그렇게 말했다가는 그땐 정말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은 분위기라 설형은 조용히 다른 대답으로 넘어갔다.

“그럼, 제가 너무 겁을 준 게 안돼 보여서 그러신 겁니까?”

하. 강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순진한 겁니까, 순진한 척하는 겁니까. 내가 정말 고작 그런 별것도 아닌 이유로 딱히 관심도 없고, 이용 가치도 없는 여자에게 그런 친절을 베풀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

미간을 살풋 찌푸린 설형이 되물었다.

“그럼, 대체 왜.”

“내가 본인에게 호감이 있다고 착각하게 하면 할수록, 나한테 연락하기 위해서 뭐든 사소한 것이라도 더 잘 생각해낼 것 아닙니까.”

“…….”

설형의 얼굴이 더 찌푸려졌다.

“그건 너무한 것 아닙니까?”

“뭐가 너무하다는 겁니까?”

“그렇게 마음대로 사람 마음을 이용해도 됩니까?”

“강력계 형사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어려운 순진한 소리네요. 굳이 범죄자까지 가지 않아도, 하다못해 경찰서 내에서도 기회만 있으면 어떻게든 남을 끌어내리고 자신은 위로 올라가려는 인간들이 그렇게 많은데, 수사를 위해서 상대의 호감을 이용하는 정도는 애교 수준 아닙니까?”

“…….”

“내 말이 틀렸습니까?”

“……아뇨.”

반박하고 싶으면 해 보라는 듯 기회를 주는 강우에도 설형은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하나 틀린 말이 없었다. 심지어 스스로도 조금이나마 편해지고 싶어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하지 않았던가.

“다 맞는 말씀입니다.”

“…….”

그럼에도 설형은 화가 났다. 대체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그냥 속이 뒤집어졌다.

“언제든 웃으면서 제 뒤통수를 칠 수 있는 분이라는 걸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는 더더욱 검사님을 믿지 않도록 명심하죠.”

차갑게 일갈한 설형이 더 이상 대답 같은 건 듣기 싫다는 듯 멈췄던 걸음을 내딛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저를 스치는 설형의 손목을 강우가 붙잡지 않았다면.

설형이 손을 뿌리쳤지만 강우는 설형을 놓아주지 않았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느껴졌다. 그리고 설형은 강우가 지금까지 자신을 봐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거 좀 놔주시죠.”

물론 차갑게 내뱉는 설형에게서 기가 죽은 기색은 전혀 찾을 수 없었지만.

“얘기 아직 안 끝났습니다.”

“전 끝났는데요.”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설형이 다시 한 번 강우의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강우는 아직 설형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손목을 쥐고 있던 손에 무지막지한 힘을 주어 설형을 더 강하게 옭아맸다.

손목의 통증도 통증이지만 피가 통하지 않아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하지만 설형 역시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시선을 맞받아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읽을 수가 없는 눈동자. 하지만 설형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단순히 지고 싶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지면 안 된다는 본능이었다.

왜 야생에서 맹수를 만나면 절대 등을 보이면 안 된다고 하지 않는가. 사실 지금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었지만 어쨌든 그 순간 본능이 그렇게 경고하고 있었다.

다행히 대치는 길지 않았다. 강우가 먼저 긴 침묵을 깼다.

“말했잖습니까. 가능성은 있지만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그걸 나더러 믿으라는 겁니까? 바로 눈앞에서 김민지 씨의 호의를 이용하는 걸 다 봤는데?!"

따져 묻는 설형에 강우가 간단히 대답했다.

"그건 백 형사가 아니잖습니까."

"……."

그게 무슨. 이런 대답은 전혀 예상치 못한 탓에 잠시 멍하게 서 있는 설형을 향해 강우가 뒷말을 이었다.

"나한테 누굴 이용한다는 건 아주 손쉬운 일입니다. 별다른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상대가 뭘 원하는지 어떤 것에 흔들릴지가 너무도 쉽게 보이기 때문에 그게 나한테 얼마나 이용 가치가 있느냐에 따라서 어떤 걸, 얼마만큼 줄지만 가늠하면 되니까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은요. 그런 사람도 있잖습니까."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

딱 잘라 말하는 강우에 뭐라 반박하려고 입을 열었던 설형이지만 이내 도로 입을 다물었다. 뒤늦게 도강우의 집안이 대단한 집안이라는 것이 떠올랐기 때문.

대대로 이어진 재벌가 집안에 국회의원 아버지.

설형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대단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 왔다면 도강우가 저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과 권력의 주변에는 으레 하이에나들이 우글거리는 법이니까.

이게 바로 평범한 소시민은 모르는 재벌의 고충이라는 건가. 그제야 지금까지 도강우에게서 느껴지던 묘한 위화감이 납득이 되었다. 아주 조금이지만 안되었다는 생각도 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가 막히고 배신감마저 들었던 기분까지 모두 풀리는 것은 아니라 설형의 표정은 여전히 험악했다.

험악한 얼굴로 저를 노려보는 설형을 강우도 가만히 응시했다. 물론 설형처럼 험악한 표정은 아니고 마치 기묘한 것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시선이라는 것이 조금 달랐지만.

그렇게 응시하던 강우가 툭, 하고 말을 내뱉었다.

"그런데 그 쉬운 게, 당신한테만 되질 않는단 말이지."

―!

설형의 눈이 조금 커졌다. 하지만 말을 한 도강우의 표정은 무표정했다. 마치 본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처럼.

"원하는 게 뭔지, 그 머리통으로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는 사람을 이용할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

"내가 말한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건 그런 뜻입니다."

"……."

그때까지 강우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설형이 이내 얼굴을 찌푸렸다. 기분이 나빠서는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난처하다는 쪽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지금 이 말은 즉, 다른 사람과 넌 다르다, 라는 말인 거지?

심지어 본인은 자각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찌 보면 설형이 처음에 오해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의도하고 한 말이라면 적어도 이렇게 사람 기분을 상하게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이것보다는 훨씬 제대로 된 연기를 할 수 있는 남자라는 걸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것을 자각하고 나니 기가 막히고 맥이 탁 풀렸다.

하지만 더 기가 막힌 건 그 말에 기뻐하고 있는 자신이었다. 넌 특별해. 라는 그 흔한 사탕발림에 넘어가는 여자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 뻔한 말에 넘어가는 게 말이 되냐고, 비웃었던 것이 무색하게도 그 말 한마디에 서운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다 사그라졌다. 미친 건가 싶었지만 그게 진심이었다.

설형이 얼굴을 확 일그러트렸다. 그렇지 않으면 입꼬리가 위로 올라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설형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도강우는 다르게 판단한 모양이었다.

“아직도 못 믿겠다는 겁니까?”

“누가, 못 믿겠다고 했습니까.”

설형이 고개를 내저었지만 고개를 돌린 채 그렇게 말해 봐야 설득력은 없었다.

“그럼 뭡니까.”

“…….”

묻는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번엔 대놓고 고개를 돌려 버렸으니 기분이 상한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설형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고개를 바로 할 수가 없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도강우에게 이런 제 속마음을 다 읽힐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본인은 잘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설형은 분명 몇 번이나 도강우에게 생각을 읽힌 적이 있었다. 생각해보니 억울했다. 저야말로 도강우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가 없어 답답한 사람이었다.

“이제 나랑은 눈도 마주치기 싫다는 겁니까.”

“…….”

조금 전보다 확연히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

정말 기분이 상한 것 같은 강우에 설형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 번도 누구와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한 적도 없었고 굳이 상대가 화를 내든 말든 아무 상관없었으니까. 오히려 화를 내고 알아서 멀어져 주는 쪽이 편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스스로도 믿을 수 없었지만 강우가 제 손을 놓아 버릴까 봐 불안했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그럼에도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입술이 딱 붙어 버린 것 같았다.

“백 형사.”

“…….”

한 번도 눈을 피한 적 없던 설형이었다. 그런데 고개를 돌린 채 제 쪽으로 한 번 시선도 주고 있지 않는 설형에 강우는 처음으로 초조한 기분을 느꼈다. 물론 본인은 그게 초조한 기분이라는 것도 자각하지 못했지만.

“백설형―!”

참지 못한 도강우가 설형의 이름을 불렀을 때였다.

Trrrrrrrr. 

하필 그 순간, 마치 일부러 그러기라도 하듯 요란한 전화벨이 울려 퍼졌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된 공기를 단숨에 짓찢으며.

Trrrrrrrrrrrr. Trrrrrrrrrrrr. Trrrrrrrrrrrr.

요란한 벨소리가 계속 울려 퍼졌지만 강우는 미동도 없었다. 자신을 노려보는 따가운 시선 역시 미동이 없었다. 보다 못한 설형이 툭, 하고 입을 열었다.

“검사님, 전환데요.”

“…….”

하지만 이번엔 도강우가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설형이 고개를 바로 했다. 그리곤 불쑥 강우의 코트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다시 밖으로 나온 설형의 손에 들린 것은 여전히 맹렬한 기세로 울리고 있는 휴대폰이었다.

“일단 전화부터 받으시죠.”

“대답 아직 안 했습니다.”

휴대폰을 내미는 설형과 눈이 마주친 강우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물론 손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은 채였다.

“김민지 씨 전화에요.”

다시 한 번 강우의 앞으로 휴대폰을 내미는 설형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번져 있었다. 하지만 강우는 마치 남의 일인 양 무심한 표정이었다.

“도 검사님!”

“대답.”

이제 거의 전화가 자동응답으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결국 설형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 선언을 했다.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도 검사님이 하는 말, 뭐든 다 믿을 테니까, 이제 전화 좀 받. 으. 시. 죠?”

결국 이번엔 설형이 항복 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엔 거의 이를 악문 채였지만 그런 것에 눈 하나 깜짝할 강우도 아니었다.

“약속했습니다.”

씨익, 하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얄미운 소리도 잊지 않은 강우가 설형이 내민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여보세요.”

다행히 전화가 끊기기 전에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설형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걸로 협박을 하는 도강우가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지만 내심 안도한 것도 사실이다. 도강우가 이렇게 몰아붙이지 않았으면 이렇게 순순히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지 못했을 테니까. 억지로, 어쩔 수 없이 인정한 것처럼 하기는 했지만 그게 진짜 설형의 속마음이기도 했다.

“어디 안 가니까, 이건 좀 놓죠.”

설형이 입모양으로 속삭이며 손을 빼보려고 했지만 강우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붙잡고 있던 손에 악력만 더 높이는 결과만 초래했다. 설형도 마음대로 하라는 듯 손에서 힘을 뺐다. 포기하면 편하다고 하지 않던가. 그나마 통증은 조금 줄었다.

“지금 학교에서 얼마 벗어나지 않았으니까, 제가 그쪽으로 가죠.”

상대의 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강우의 대답만으로도 대충 어떤 대화가 이루어지는지 추측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뭐, 생각난 게 있답니까? 쓸 만한 겁니까?”

휴대폰을 끊기 무섭게 설형이 물었다. 대답 대신 눈을 마주한 강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 마음 가지고 놀면 안 된다고 말하던 분, 어디 갔습니까?”

“……그래서 어디로 가면 된다구요?”

민망한 마음에 곧바로 말을 돌리자, 피식,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으로 가면 되겠네요.”

표지판을 확인한 강우가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걸음을 내딛으려던 설형이 턱으로 제 손을 가리키며 물었다.

“계속 이러고 가실 겁니까?”

“난 상관없습니다만.”

“전 상관있거든요?!”

빙글거리는 강우에 설형이 펄쩍 뛰었다. 이 남자가 하는 말은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피식, 하고 다시 한 번 바람 빠지는 소리가 일었다. 농담이었음을 깨달은 설형이 휙, 하고 손을 뿌리쳤다. 이번엔 강우도 더 이상 버티지 않고 그대로 손을 놓아주었다.

예상과 달리 허무할 정도로 쉽게 벗어난 설형이 조금 얼떨떨한 표정으로 얼얼한 손목을 문질렀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강우의 시선이 설형의 손목에 닿아 있었다. 남자치고는 얇은 손목에 난 시뻘건 손자국이 도드라졌다. 하얀 피부라 더 티가 잘 나는 것 같았다. 자국이 잘 남는 피부였다는 것이 뒤늦게 생각났다. 그런 생각을 하던 강우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잠시만.”

불쑥 앞을 막는 강우에 설형이 반사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이번엔 또―.”

미간을 찌푸린 설형이 채 항의를 끝내기도 전에 강우가 그 자리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조금 커진 설형의 눈이 그런 강우를 따라 아래로 움직였다.

“아.”

설형도 그제야 자신의 운동화 끈이 풀려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강우가 자신의 풀린 운동화 끈을 묶어 주려고 바닥에 주저앉았다는 것까지.

잠시 멍한 표정으로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설형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제가, 하면 됩니다.”

“다 됐습니다.”

하지만 이미 모든 상황은 종료된 뒤였다. 어느새 풀린 운동화 끈을 예쁘게 나비매듭까지 지어 묶은 강우가 툭툭, 손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죠.”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히 걸음을 내딛는다. 하지만 뒤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몸을 돌렸다.

“안 갑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강우에 표정 없는 얼굴로 가만히 제 발을 내려다보고 있던 설형이 이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말없이 걸음을 내딛었다.

타박타박.

설형이 옆으로 올 때까지 걸음을 멈추고 있던 강우가 타이밍을 맞춰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바람이 일었다.

가슴 한구석을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늦가을의 따스한 바람이었다.

“게이요?”

설형이 내미는 서류를 받아들던 재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럼 김민지는요? 몇 년이나 사귄 여자 친구라고―.”

“당시 한지석이의 부탁으로 연기를 해 준 모양이더라고.”

“아니 대체, 왜―.”

왜 그런 짓을 한 거냐고 물으려던 재민이 이내 말을 멈췄다. 사실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경찰에 진실을 숨기는 것이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특히 죽은 사람의 치부를 까발리는 데에 큰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덕분에 사건이 완전히 다른 사건이 되어 버렸네요.”

이해가 되는 것과는 별개로 입안이 씁쓸한 것도 사실. 하지만 김 형사는 이해조차 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해가 되긴 개뿔이 되냐.”

험악하게 중얼거리는 김 형사에 재민이 헤헤, 하고 멋쩍게 웃었다.

“이 정도면 진짜 수사 방해 아닙니까?”

불끈 움켜쥔 주먹까지 흔들며 흥분하는 김 형사에 홍 반장이 시큰둥하게 한마디 했다.

“그래서 뭐. 잡아넣기라도 하게?”

“잡아넣어야 하면 넣어야죠.”

“시간이 아주 남아도나 보네. 그럼 그 시간에 내가 볼 몫까지 네가 보면 되겠네.”

“반장님!”

“사소한 건 그냥 좀 넘어가자. 벌써 몇날 며칠을 집에도 못 들어가고 이러고 있는데, 그러고 싶냐?”

“…….”

순간 욱해서 분통을 터트렸던 김 형사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홍 반장 말대로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다. 쯧쯧, 혀를 차던 홍 반장이 설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이건 뭔데.”

홍 반장이 턱으로 가리킨 것은 재민의 손에 들린 서류였다. 잠시 물러나 있던 설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사건 한 달 전부터 죽기 전까지의 한지석 휴대폰 통화 내역과 기지국 내역이요. 김민지 씨 말에 의하면 당시 한지석이 주말마다 게이 바와 클럽을 드나들었다고 하더군요. 특정 상대는 없었고 그곳에서 매주 원나잇 상대를 구했다고요.”

“…….”

“일단 이걸로 한지석이 드나들었던 클럽이 어딘지 알아내고, 그다음엔 다른 피해자들과 접점이 있는지 동선을 확인해 보려구요.”

“그럼 백 형사님은 다른 피해자들도 게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때까지 가만히 듣고 있던 재민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불쑥 끼어들었다.

“쉿.”

곧바로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 홍 반장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부분 자리는 비어 있었고 그나마 남아 있는 사람들 역시 자신의 일을 보느라 이쪽에 큰 관심은 없어 보였다.

“확실해질 때까지는 입 함부로 놀리지 마. 괜히 유가족들 귀에 들어가서 사자(死者)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고 싶지 않으면.”

“죄송합니다.”

홍 반장의 경고에 재민도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던지 어깨를 움츠린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우선 기지국 내역으로 한지석이 동선 파악부터 해 줘. 김 형사는 다른 피해자들 맡고.”

“넵!”

설형의 지시에 입을 모아 대답한 한 형사와 김 형사가 후다닥 자신의 자리로 달려갔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홍 반장이 문득 설형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도 검사는?”

“위에 보고하러 가셨으니까, 올 때 다 됐네요.”

“……으흠?”

시계를 확인한 설형이 무심코 대답하자 홍 반장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뒤늦게 그것을 확인한 설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요.”

“…….”

평소라면 도 검사 행방을 왜 제게 묻는 거냐고 따지고 들었을 설형이 처음으로 순순히 대답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설형은 자각도 하지 못한 듯했다. 홍 반장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 다들 싸우면서 정드는 법이지, 암.”

늙은이처럼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는 홍 반장에 얼굴을 찌푸린 설형이 막 되물으려고 할 때였다.

“대체 무슨―.”

“저 양반도 양반은 못 되시겠구만.”

제 어깨 너머를 보며 중얼거리는 홍 반장에 반사적으로 설형의 고개도 뒤를 향했다. 정말로 강우가 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었다.

“다녀오셨습니까.”

홍 반장이 강우를 향해 고개를 꾸벅이자 막 들어서던 강우도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에 답했다. 홍 반장에게 향했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 옆에 선 설형에게로 움직였다. 강우가 천천히 걸어왔다. 시선은 여전히 설형에게 닿아 있었다.

“팀 보고는 다 끝났습니까?”

두 사람 앞으로 걸어온 강우가 설형을 향해 물었다.

“지금 한 형사가 동선을 파악 중이고, 결과 나오는 대로 나가 볼 생각입니다.”

“그럼 결과 나올 때까지는 아직 시간 있는 거네요.”

“네, 뭐.”

설형이 고개를 끄덕이자 강우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그럼 그때까지 저녁이나 먹으러 갔다 오죠.”

“아뇨, 전 결과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 형사랑―.”

“저기, 백 형사님. 저흰 두 분이 드셨을 줄 알고 벌써 먹었는데요.”

손을 쉴 새 없이 키보드를 두드리면서도 언제 이쪽 이야기는 듣고 있었는지 재민이 불쑥 끼어들었다.

이 배신자. 사납게 노려보는 설형의 시선을 피해 재민이 냉큼 모니터 너머로 얼굴을 숨겼다. 갈 곳 없는 시선이 강우와 마주쳤다.

“그렇다는데요.”

까딱. 눈이 마주친 강우가 옆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말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확, 일그러트리긴 했지만 설형은 조용히 벗어 두었던 점퍼를 집어 들었다.

“식사 맛있게 하고 오십쇼.”

“…….”

“그럼.”

성큼성큼 대꾸도 없이 앞서 나가 버리는 설형을 따라 강우도 곧바로 문밖으로 사라졌다.

“이젠 좀 친해지실 만도 한데, 어지간히도 싫으신가 봐요. 좀 친하게 지내시면 좋을 텐데.”

쏙, 모니터 옆으로 얼굴을 내민 재민이 두 사람이 사라진 문 쪽을 바라보며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리자 맞은편에 있던 김 형사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백 형사님이 검사랑? 차라리 진돌이랑 친하게 지내길 바라지.”

진돌이는 서부경찰서에서 기르고 있는 마약견이었다.

“왜요. 그래도 도 검사님 정도면 괜찮잖아요. 일도 잘하시고, 권위적이지 않고.”

“그래봤자 검산데, 백 형사님이 검사랑 잘도 친하게 지내려고 하겠다. 홍 반장님 명령이라 저 정도라도 지내는 거지 아니었으면 서로 얼굴 마주보는 일도 없었을 걸.”

“……하긴.”

검찰이라면 아주 질색하는 백 형사를 떠올린 재민이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자 재민을 향해 김 형사가 것보라는 듯 턱을 치며 올렸다. 사실 검찰 좋아하는 경찰은 없겠지만 그래도 대부분 먹고살아야 하니까, 더럽고 치사해도 그 앞에서는 살살거리며 비위를 맞추는 게 보통이었다. 비위는 맞추지 않아도 좋으니까 막말은 하지 말라는 게 홍 반장이 매번 설형에게 하는 충고였다.

“그나마 저 정도라도 지내는 걸 다행이라고 해야겠네요.”

“암. 둘이 치고 박고 싸우지 않는 것만도 감사해야지.”

“…….”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재민과 고개까지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는 김 형사를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홍 반장이었다.

“쓸데없는 잡담들 하는 걸 보니까 시간이 남아도나 보지? 좀 전에 2팀에서 일손 부족하다고 떠넘긴 서류가 여기 있었는데―.”

“그럴 리가요.”

“아, 이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샤샤삭, 홍 반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의 시선은 각자의 모니터와 서류로 흩어졌다.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던 홍 반장의 시선이 문득 문 쪽에 닿았던 것 같지만 그건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본인도 자각하지 못할 만큼.

“여기 갈 겁니까?”

막 가게로 들어가는 문고리를 붙잡았을 때였다. 뒤에서 들려온 강우의 물음에 설형이 문고리를 붙잡은 채 고개만 틀었다.

“왜요. 이런 덴 싫으십니까?”

“…….”

설형이 막 들어가려고 가게는 바로 경찰서 뒤쪽 골목에 위치한 허름한 국밥집. 대답은 없었지만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설형이 기다렸다는 듯 덧붙였다.

“싫으시면 검사님은 다른 데서―.”

“들어가죠.”

하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우가 앞장서라는 듯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쳇, 하고 속으로 혀를 찬 설형이 문을 열었다.

“이모, 선짓국 두 개요.”

주문까지 마친 설형이 자리로 가서 앉았다. 잠시 멈칫했던 강우도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맞은편으로 가서 앉았다.

“아이구, 이 잘생긴 총각은 누구래?”

탕탕, 물컵을 내려놓던 주인아주머니가 강우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새로 들어온 막낸가 벼?”

“풉.”

앞에 놓인 물컵을 들어 물을 마시던 설형이 그대로 물을 뿜어냈다. 그리고 그 물은 맞은편에 앉은 강우에게 쏟아졌다. 설형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번졌다.

“어휴. 이걸 어쩐디야. 휴지 여기―.”

“됐습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아주머니가 휴지 몇 장을 뽑아 내밀었지만 강우는 됐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았다.

“더럽게 뭐하는 짓이여.” 

“이게 누구 때문인데요.”

타박하는 아주머니에게 설형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입으로 물 뿜은 게 내 탓이라는 거여?”

“이모가 막내냐고 하니까 그랬죠. 저희 검사님이라구요.”

아주머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이구, 정말이여? 어쩐지 형사치고는 귀티가 줄줄 난다 했더니 검사님이셨구만요.”

“저기, 듣는 형사 기분 상하는데요.”

물론 그런 설형의 투덜거림에도 아주머니의 시선은 강우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언제는 저보고 어쩜 그렇게 잘생겼냐고 하시더니.”

“백 형사야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거고. 남자는 이래 검사님맨치로 훤칠한 게 최고지.”

“헐.”

“좋게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얼씨구?”

심지어 강우까지 합세. 얼굴을 확 찌푸린 설형이 들고 있던 물컵을 탕, 하고 내던지며 말했다.

“나 이제 여기 안 와.”

그러다 곧바로 퍽, 하고 등짝을 두들겨 맞았지만.

“사내놈이 뭐 그런 걸로 삐지고 그래.”

호탕하게 말한 아주머니가 설형이 뭐라 항의하기도 전에 그대로 주방으로 사라졌다. 얼굴을 찌푸린 채 두들겨 맞은 등을 문지르던 설형이 고개를 들다 강우와 눈이 마주쳤다.

“왜요.”

불퉁하게 묻는 설형에게 강우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냥 신기해서요.”

“사람 등짝 두들겨 맞는 거 처음 봅니까?”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백 형사가 이렇게 스스럼없이 구는 건 처음 봅니다.”

“…….”

“자주 오는 집인가 봅니다.”

“……맛이 제법 좋거든요.”

“나 괴롭히려고 온 줄 알았는데, 맛있는 거 먹여 주러 온 거였습니까?”

“제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아십니까.”

물론 어느 정도 그런 의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무에게나 알려주는 맛집은 아니었다.

“특별히 선지 듬뿍 넣었어.”

구박한 것이 미안했던지 선짓국은 설형의 앞에 먼저 내려놓았다.

“검사님도 모자라면 말씀하시소.”

“네, 그러죠.”

친절하게 반응을 보이는 강우를 이번에는 설형이 지그시 응시했다. 아무리 봐도 잘 보이려고 연기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런 허름한 국밥집 주인아주머니에게 잘 보일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설형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든 강우가 물었다.

“왜요?”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황급히 고개를 내저은 설형이 수저통에서 수저를 꺼냈다.

“맛있게 드세요.”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국을 수저로 휘휘 저은 설형이 선지를 찾아냈다. 검붉은 색의 선지를 반으로 갈라 입으로 가져갔다. 매콤하고 뜨끈한 국물도 후르륵, 마셨다.

“안 드십니까.”

문득 강우의 손이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설형이 물었다.

“보기엔 좀 그래 보여도 맛은 좋아요. 순대에 나오는 간이랑 비슷한 맛이에요.”

나름 친절한 예시까지 들어 가며 설명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순대를 안 먹어 봐서.”

“헐.”

순대도 한 번 안 먹어 본 부르주아를 보게 될 줄이야. 기가 막힌다는 듯 쳐다보는 설형에 강우가 멋쩍은 듯 수저로 국을 휘저었다. 강우가 뭔가를 민망해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야한 농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내뱉던 남자가 아닌가.

“재벌이라는 말 들었을 때는 전혀 실감이 안 났는데 순대도 한 번 안 먹었다고 하니까 확 와 닿네요.”

“……굳이 그걸 먹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뿐입니다.”

“누가 필요성을 느껴서 음식을 먹습니까. 그냥 가장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걸 먹는 거죠.”

“…….”

“그럼 떡볶이는 먹어 봤습니까.”

“궁중 떡볶이는 먹어 봤습니다.”

헐. 설형의 얼굴에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이 번졌다.

“쯧쯧, 떡볶이는 시뻘건 고추장 맛에 먹는 건데. 궁중 떡볶이는 뭐랍니까.”

“…….”

고개까지 절레절레 내젓는 설형에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강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맛있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궁중 떡볶이는 댈 것도 아니죠.”

“그럼 사 주시죠.”

“네?”

“그렇게 맛있다고 하니 확인해 보자고요.”

“…….”

어라? 하고 당황해하는 설형을 향해 강우가 되물었다.

“왜요. 자신 없습니까?”

“누가 자신 없댔습니까?”

강우의 가벼운 도발에 발끈한 설형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강우에게 설형이 턱으로 앞에 놓인 그릇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전에, 이거나 먹고 말씀하시죠. 전 음식 남기는 사람에게는 뭐 안 사 줍니다.”

“…….”

강우가 제 앞에 놓인 선짓국을 내려다보았다. 에헴. 턱을 살짝 들어올리며 먹을 테면 먹어 보라는 듯 도발하던 설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안 될 것 같으면 무리하지 않으셔도―.”

하지만 설형의 너그러운 제안에도, 아니 그 제안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우가 조금 전 설형이 했던 대로 수저로 선지 한 덩이를 건져 입 안으로 삼켰다.

“괜찮으십니까?”

당황한 쪽은 오히려 설형이었다. 오히려 강우보다 입안에 든 선지를 천천히 씹는 강우를 보는 설형의 얼굴이 더 일그러지고 있었다.

“맛있는데요.”

입안에 것을 모두 삼킨 강우가 씽긋, 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움직이는 손을 설형이 붙잡았다.

“떡볶이 사 드릴 테니까, 억지로 드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그런 설형의 제안에도 강우는 태연히 고개를 내저었다.

“억지로 먹는 거 아닙니다만?”

“억지로 먹는 게 아니면, 뭐, 맛있기라도 하다는 말씀입니까?”

“네. 제법 맛있는데요?”

“……엥?”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마주친 강우의 눈동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눈은 아니었다. 설형이 진의를 확인하듯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정말, 입맛에 맞으세요?”

“네.”

강우는 특별할 것 없는 평소와 같은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만 깜빡이던 설형이 그제야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거……다행이네요.”

이건 정말 비꼬려고 한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좋아하든 말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음에도 강우의 입맛에 맞는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입꼬리가 자꾸만 말려 올라갔다. 그런 설형을 향해 강우가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 덧붙였다.

“어쩐지 익숙한 맛이라고 생각했는데, 푸아그라랑 비슷한 맛이네요.”

단숨에 설형의 표정이 확 찌푸려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직 안 가셨습니까?”

하도 모니터를 들여다봤더니 눈이 뻑뻑해서 잠시 고개를 든 그때, 때마침 자신의 사무실에서 밖으로 나오던 강우와 눈이 마주쳤다.

시간은 벌써 새벽 3시를 넘어 4시를 향해 가고 있는 시간. 대부분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러 근처 사우나나 숙직실을 찾아 사라진 뒤라 커다란 사무실에 설형만 남았다.

“그럼 내일 뵙죠.”

고개를 꾸벅이는 설형에도 강우는 인사에 답하는 대신 물었다.

“백 형사는요.”

“저도 이제 눈 좀 붙여야죠.”

설형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숙직실은 만실일 텐데요.”

“뭐, 여기 의자 몇 개 붙여서 자든지 아니면 차에 가서 자면 됩니다.”

“…….”

오히려 쾨쾨한 홀아비 냄새가 나는 숙직실보다 설형은 차라리 그쪽이 나았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설형과 달리 강우의 미간은 살풋 찌푸려져 있었다. 좀 더 정확히는 차에서, 라고 말한 부분에서였지만.

휙, 하고 뭔가가 설형을 향해 날아왔다.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고 나서야 그것이 차키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걸 왜.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든 설형이 눈으로 묻자 강우가 태연히 대꾸했다.

“나 피곤해서 운전 못 하겠으니까, 운전 좀 해요.”

“…….”

그리고 설형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멍하니 서 있는 사이 문을 열던 강우가 고개를 틀었다.

“안 옵니까?”

피곤한데 왜 자꾸 말을 시키냐는 듯 짜증이 살짝 섞인 목소리에 설형도 얼굴을 찌푸리긴 했지만 말없이 걸음을 내딛을 수밖에 없었다.

계급이 깡패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었다. 억울하면 출세해야 한다는 말도 덤으로.

“그럼 쉬십시오.”

차에서 내린 설형이 차키를 내밀었다. 하지만 강우는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채 차키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올라가서 씻고 눈 좀 붙이고 가죠.”

“괜찮습니다.”

설형이 단칼에 거절했지만 강우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지금 올라가도 씻고 하면 한두 시간밖에 눈 못 붙일 텐데. 괜한 시간 낭비 하지 말죠.”

“…….”

“설마 내가 잠든 백 형사한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그럽니까?”

“……아침엔 정말 죄송했습니다.”

얼굴을 살풋 찌푸린 설형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다시 한 번 사과했다.

“그런 걱정 때문이 아니라면, 올라가죠.”

“…….”

그렇게 말한 강우가 더 이상의 거부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전용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씻어요. 방은 저 방 쓰면 됩니다.”

방으로 들어선 강우가 손으로 방문을 가리켰다.

“아뇨. 전 소파에서 잠깐 눈 붙이면 됩니다.”

“……뭐, 그러든지요. 욕실은 저기.”

설형의 말에 잠시 멈칫하기는 했지만 더 이상 논쟁하고 싶지 않다는 듯 강우가 손가락으로 다른 문을 가리켰다.

“아, 검사님 먼저 씻으십시오.”

“난 내 방에 딸린 욕실 쓸 거니까 신경쓰지 말고 편하게 씻어요.”

“아, 네…….”

하긴 방도 이렇게 많은데 욕실이라고 하나밖에 없겠는가. 당연한 일인데 서민인 설형으로서는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민망한 표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설형이 곧바로 욕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설형의 뒷모습을 흘끔하고 본 강우도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털썩.

머리를 털며 걸어온 설형이 그대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강우가 가져다놓았는지 일인용 소파에 담요와 베개가 놓여 있었다.

슥슥슥, 수건으로 머리를 문지르며 안을 둘러보던 설형의 시선이 문득 강우의 방문 앞에서 멈췄다. 저 안에 강우가 잠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뭐야.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휙휙, 머리를 내저은 설형이 대충 수건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소파면 된다고 말한 것이 무색하게도 웬만한 침대보다 편안했다. 사실 숙직실 간이침대에 비하면야 뭐든 좋겠지만.

뒤척뒤척.

하지만 불편한 것에 익숙해진 저질 몸이라 그런가, 온몸이 피곤에 절어 물먹은 스펀지 같은 상황에서도 설형은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뒤척거리고 있던 그때였다.

달칵, 하는 문소리와 함께 인기척을 느낀 설형이 그대로 눈을 감고 잠든 척을 하고 말았다. 다행히 밖으로 나온 강우는 잠들어 있는 설형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그대로 거실을 가로질렀다.

질끈 감은 눈 위로 빛이 느껴졌다. 대충 들려온 소리와 빛으로 강우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딸칵. 푸슉.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들려온 맥주 캔 따는 소리. 설형은 자는 척하던 것도 잊고 침을 꼴깍, 하고 삼켰다.

꿀꺽꿀꺽.

맥주가 목구멍을 넘어가는 경쾌한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갈증이 일었다. 이렇게 피곤해서 잠이 오지 않을 땐 시원한 맥주만 한 것이 또 없었다. 괜히 자는 척을 했다고 뒤늦게 후회하고 있을 때였다.

“백 형사도 한 캔 하겠습니까?”

―!

그야말로 예고도 없이 불쑥 물어오는 강우의 목소리에 설형은 그대로 일시정지. 깨어 있냐고 확인하지도 않고 바로 본론부터 묻는 것으로 처음부터 이미 자신이 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자는 척을 했으니. 아, 쪽팔려. 설형이 얼굴을 찌푸렸다.

“네, 뭐. 주시면…….”

어차피 들킨 것 맥주나 얻어먹자 싶어진 설형이 슬그머니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실내등이 그리 밝지 않아서 쪽팔린 표정을 감출 수 있다는 점이었다.

푸슉. 건네주는 캔을 딴 설형이 손이 시릴 정도로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맥주가 입안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자신이 목이 말랐다는 것을 자각했다. 꿀꺽꿀꺽, 한번 쉬지도 않고 단숨에 한 캔을 다 비웠다.

아쉬운 듯 빈 캔을 탈탈 털어 먹고 있던 설형이 안돼 보였던지 다시 냉장고를 다녀온 강우가 맥주 캔을 건네주었다.

“아, 고맙습니다.”

이번엔 조금 속도가 줄었다. 물론 이제 그 정도로 갈증이 느껴지지 않아서라기보다는 단숨에 먹어 버리기 아까워서.

“소파보다는 침대가 편할 텐데요.”

“그래서 일부러 소파에서 자려던 건데요.”

맥주를 홀짝이던 설형의 대답에 강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부러 불편하게 잔단 말입니까?”

“너무 편하면 못 일어날 것 같아서요.”

피식. 작은 바람소리가 일었다. 가만 보면 은근 웃음이 헤픈 남자였다.

“그게 걱정이면 내가 깨워 줄게요.”

강우가 제안했지만 설형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도 그거지만 전 너무 편한 건 좀 불안하다고 해야 하나. 비상 들어가면 늘 사무실 의자 붙여서 쪼그리고 자 버릇했더니 이젠 그쪽이 익숙해져서요. 차라리 차에서 불편하게 쪽잠을 자는 쪽이 더 편합니다. 물론 이 소파가 좁다는 건 아니구요.”

오히려 너무 넓어서 문제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무표정으로 설형의 말을 듣고 있던 강우가 가만히 되물었다.

“그렇습니까.”

“네.”

물론 편안한 것에 너무 익숙해질까 봐 그런 것도 있었지만 설형은 그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거기가 편할지는 몰라도 건강에는 아주 안 좋을 것 같네요.”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리는 강우에 설형이 곧바로 반박했다.

“물론 저도 아주 부득이한 경우 아니고서는 차에선 잘 안 잡니다.”

아주 단호하기까지 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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