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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이 어떻게 되십니까?”
현장을 통제하고 있던 순경이 설형의 앞을 막아섰다. 보통은 풍기는 이미지로 그 사람이 경찰인지 아닌지 대충 파악이 되기 때문에 이렇게 막아서는 일은 없었지만 지역 파출소에서 차출되어 나온 인력이라 그런지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다.
“서부경찰서 강력3팀.”
대답과 동시에 입구를 막아 놓은 노란테이프를 들어 그 안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숙이던 순간, 그런 설형의 앞을 순경이 다시 한 번 가로막았다.
“죄송합니다만 신분증 확인 좀 부탁드립니다.”
“아, 거참.”
젊은 사람이 되게 빡빡하네. 늙은이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며 설형이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곧 그 안에 자신의 지갑이 없다는 걸 깨달은 설형이 미간을 살풋 찌푸리며 도로 손을 빼냈다. 그런 설형의 표정을 읽은 순경이 곧바로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잠깐 있어 봐.”
진정하라는 듯 노란 테이프를 놓고 한발 뒤로 물러선 설형이 먼저 현장 안으로 들어가 있던 도강우를 불렀다.
“검사님. 잠깐만 이리 좀.”
다른 수사관에게 보고를 듣고 있던 도강우가 설형의 부름에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수사관의 시선이 설형에게 향했다. 언뜻 놀란 표정 같았지만 어느 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도강우에 가려 더는 볼 수가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도강우가 물었다. 하지만 의아해하는 강우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설형은 불쑥 강우의 코트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좀처럼 당황하지 않는 강우도 순간 그대로 굳었다. 물론 설형은 태연하게 코트 안주머니에서 자신의 지갑을 꺼냈다.
“여기.”
그리고 그것을 열어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처음엔 남의 신분증을 대신 쓰는 것인 줄 알고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신분증을 들여다보았던 순경이 뒤늦게 얼굴을 확인하고 곧바로 표정이 바뀌었다.
“죄송합니다. 들어가십시오.”
경례를 한 순경이 설형이 들어가기 편하도록 노란테이프까지 들어올렸다. 설형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도강우가 서 있는 노란 테이프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마치 백설형 자신의 공간에서 도강우의 공간으로 들어서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저 분명 다시 반환했습니다.”
강우의 앞으로 바싹 다가선 설형이 지갑을 원래 있던 위치로 원상복귀 시키고 한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강우를 스치고 현장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안 오십니까?”
하지만 그렇게 몇 걸음 내딛던 설형이 뒤돌아섰다. 뒤따라오는 기척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도 도강우은 조금 전 자세 그대로 멀뚱히 서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도 검사님?”
얼굴에 물음포를 띄운 설형이 강우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제야 도강우가 방향을 틀었다. 도강우의 표정이 심각했다.
혹시 멋대로 제 몸에 손댄 것이 기분 나빴나? 뒤늦게 자각한 설형이 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도강우를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하지만 그렇게 쫄았던 것이 무색하게도 도강우는 그대로 설형을 스치고 현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여료 추가할 겁니다.”
물론 설형과 바로 스치는 순간 나직이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에?!”
긴장해 있던 탓에 인식하는 것이 조금 늦었다. 한 박자 늦게 설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앞서가는 도강우의 뒤를 따르며 설형이 따져 물었다.
“그런 게 어딨, 아니 그런데 겨우 일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는데 대여료를 받는 건 너무 야박한 거 아닙니까?”
“그거야 주인 맘이죠.”
“저기 그거 제 지갑이거든요?”
“담보물에 대한 권리는 담보권자에게 있습니다만.”
“헐.”
기가 막히기는 했지만 틀린 소리는 아니라 설형도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뭔가 억울한 마음에 따져 물을 말을 찾아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더 따지는 말이 들려오지 않자 앞서 걷던 도강우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그 순간이었다.
찰칵. 찰칵.
불쑥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백설형과 도강우가 동시에 소리가 난 쪽으로 휙, 하고 고개를 틀었다. 날카로운 두 개의 시선에 순간 움찔했던 남자가 이내 능구렁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아, 두 분 분위기가 아주 좋아 보이셔서.”
목에 걸린 출입증으로 남자의 정체를 확인한 설형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다. 사회부 기자였다. 하지만 상대가 낯선 것은 설형 한정인 모양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정형진 기자님.”
“아.”
아는 척을 하는 도강우에 정 기자가 반색하며 성큼 한발 다가섰다. 메이저 신문사 기자도 아닌 저를 강우가 기억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안 그래도 중앙지검으로 발령났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의원님이 좋아하시죠?”
“아버지는 검사보다는 판사 쪽으로 가길 원하셨어서요.”
“하긴 검사가 고생스럽긴 하죠. 이번 사건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네, 뭐.”
“그런데 이번 사건 용의자가―.”
“제가 지금 막 현장에 와서요. 사건에 대한 질문은 나중에 나눠도 될까요?”
“아, 물론 가 보셔야죠.”
“그럼.”
도강우의 몇 마디에 순순히 물러서는 기자를 보며 설형이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사람 다루는 재주 하나는 타고난 남자였다. 물론 그 능력은 어디서 배워서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나는 것이었다.
“아, 그런데 그 사진 정말 쓰실 건 아니죠?”
그렇게 대화를 끝내고 돌아서던 강우가 이내 문득 생각났다는 듯 툭, 하고 무심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물론 그 지나가듯 한 말이 도강우가 기자를 아는 척해 준 진짜 이유였음을 설형은 단숨에 알아차렸지만.
“어? 안 됩니까?”
예상과 달리 오히려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기자에 강우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씽긋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지금 윗선에서 이 사건으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이렇게 검경이 사이가 좋지 않아 보이는 사진이 나가면―.”
“사이가 좋아 보이지 않긴요. 오히려 너무 좋아 보여서 문제라면 모를까.”
“…….”
그제야 강우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분이 너무 사이가 좋아 보이셔서 찍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빈정거리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
“그런데 같은 검찰 쪽인 줄 알았는데 경찰이셨던 모양입니다?”
흘끔 정 기자의 시선이 설형에게 닿았다. 어쩔까 잠시 고민하는 사이 강우가 대신 대답했다.
“서부서에 백설형 형삽니다.”
“……아 이분이 바로 그 백설형 형사.”
“절 아십니까?”
설형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번졌다.
“경찰서 들락거리는 기자 중에, 그 이름 한 번 못 들어 본 기자가 있겠습니까.”
“제가 그렇게 유명인사인 줄은 몰랐는데요.”
“그럴 리가요. 얼마 전 신월동 부녀자 강간살인도 그렇고, 전혀 실마리가 안 보이던 사건도 백 형사님 손에만 들어가면 그냥 해결돼 버린다는 소문이 파다한데요. 없던 단서도 갑자기 거짓말처럼 나타난다고.”
“소문만큼 못 믿을 것도 없죠.”
“다른 건 몰라도 굉장한 미인이라는 소문은 믿을 만했는데요.”
“…….”
“그런 소문이 있습니까?”
그렇게 되묻는 강우의 시선은 흘끔, 설형에게 닿았다.
발끈해서 뭐라고 한마디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 이야기를 듣고도 설형은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이미 그런 일에는 이골이 난 듯 담담한 얼굴이었다. 물론 이런 주제가 민망한 듯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기는 했지만.
“오죽하면 서부서 백설공주라는 별명까지 있겠습니까.”
“백설공주요?”
이번만큼은 담담하던 얼굴도 조금 찌푸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 찌푸린 얼굴마저 화보 속 한 장면처럼 느껴지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왜 그런 별명을 붙였는지 알 것도 같았다.
“단순히 놀리는 게 재밌는 것뿐입니다.”
“왜요. 아주 잘 어울리는데요.”
눈처럼 새하얀 피부에 투명한 붉은 입술, 그리고 검은 머리칼. 거기다 백설형이라는 이름까지. 그 별명에 아주 최적화된 사람이었다. 물론 그 대상이 남자라는 것만 빼면.
진심으로 한 말이었지만 설형은 놀리는 거라고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설형의 표정이 확 찌푸려졌다.
“전 현장을 둘러봐야 해서 이만. 두 분 말씀 나누다 오시죠.”
강우가 채 말리기도 전에 뒤돌아선 설형이 그대로 걸음을 내딛었다. 성큼성큼 화난 걸음으로 걸어가는 설형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강우가 이내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정 기자와의 대화를 마무리 짓는다.
“어쨌든 그 사진은 안 쓰는 걸로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쓸 만한 것이 나오면 소스 좀 주시는 겁니다?”
이미 뒤돌아선 강우의 등에다 대고 정 기자가 외쳤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정 기자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져 있었다.
“이미 오전에 현장 둘러보고 온 것 아니었습니까?”
단숨에 거리를 좁힌 강우가 물었다. 아차. 뒤늦게 깨달은 설형이 변명하듯 불퉁하게 말했다.
“……그때 놓친 것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물론 그러면서도 전투적으로 걷던 걸음은 조금 늦춰졌다.
“신데렐란 줄 알았는데 백설공주였군요.”
“…….”
“일곱 난쟁이랑 놀아나는 걸 생각하면 그쪽이 더 맞는 듯도 하지만.”
“지금 이거 성희롱인 거 알고 계시죠?”
“이게 왜 성희롱입니까? 우리 동화 얘기한 거 아닙니까?”
“헐.”
기가 막혀하는 설형에도 강우는 태연했다. 오히려 설형에게 뒤집어씌우기까지 시전했다.
“그렇게 음란마귀가 씌어서 일상생활은 가능합니까?”
“음란―!”
정말로 기가 막히는 소리를 들으면 말문이 턱 막히는구나. 설형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지금 누가 누구더러 음란하다고―.”
억울한 마음에 따져 묻던 설형이 이내 말을 멈췄다. 순간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읽은 강우의 눈빛도 심각해졌다.
“왜 그럽니까?”
그렇게 물음과 동시에 강우의 고개도 설형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뭔가를 발견했다.
“저거.”
얼굴을 찌푸린 강우가 나직이 중얼거리는 사이 이미 설형은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처음엔 천천히 움직이던 발이 곧 속도를 높였고 쓰레기더미에 가까워졌을 때는 거의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설형은 한 번 망설임도 없이 쌓여 있는 쓰레기더미 속으로 뛰어들었다. 휙휙, 위에 쌓인 쓰레기봉투를 헤치던 손이 멈춘 것은 맨 밑에 깔려 있던 푸른색 비닐봉투가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을 때였다.
“피해자의 옷 아닙니까?”
누군가 소리쳤다. 처음 맨손으로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설형을 볼 때만 해도 미친놈 보듯 하던 사람들도 뒤늦게 눈이 휘둥그레져서 몰려들었다.
가지런히 접혀서 푸른 비닐봉투 안에 담긴 정장은 그냥 누가 입다 버린 헌옷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없던 단서도 갑자기 거짓말처럼 나타난다고.」
별로 기쁜 기색이나 흥분한 기색도 없이 무덤덤한 얼굴로 증거 봉투를 내려다보고 있는 설형을 보고 있으려니 조금 전 정 기자가 지나가듯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치는 도강우였다.
“봉투와 옷가지에서는 아무것도 나온 게 없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재민이 전한 소식에 팀원들의 얼굴 위로 실망의 빛이 어렸다. 설형만 유일하게 어느 정도 그럴 것을 예상했다는 듯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사인은?”
곧바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는 설형에게 재민이 조금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백 형사님 추측대로 사인은 과다출혈이라네요.”
“이거 완전 미친놈 아냐.”
옆에서 듣고 있던 김 형사가 못 참겠다는 듯 한마디 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 대부분 그 말에 동의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과다출혈이라는 말은 살아 있는 상태로 성기가 절단되었다는 말이었으니까.
“주변 CCTV 조사는 어떻게 됐어.”
홍 반장의 질문에 김 형사가 고개를 내저었다.
“양옆으로 CCTV가 설치되어 있는데 하필 딱 그 골목 입구까지만 찍히고 그 안은 사각지대랍니다.”
“주변에 주차되어 있던 차 블랙박스는.”
“하필 블랙박스가 없는 차랍니다.”
“씨발. 뭐가 이렇게 운이 좋아.”
“단순히 운으로 이 모든 걸 비켜나갈 순 없겠죠. 범인은 모든 걸 다 치밀하게 계획하고 움직인 겁니다.”
“…….”
도강우의 말에 다시 한 번 침묵이 찾아왔다.
부스럭부스럭.
하지만 그렇게 다들 도강우의 눈치만 보고 있던 상황에도 태연히 책상 위에 놓아둔 소지품이며 옷가지를 챙기는 사람이 있었으니. 백설형이었다.
“넌 또 어디 가게?”
눈치가 보였던지 홍 반장이 도강우를 흘끔이며 물었다.
“첫 번째 피해자 부검의 좀 만나 보러요.”
당시 첫 번째 사건 피해자는 자신의 원룸 방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고 그렇다 보니 경찰은 단순치정에 의한 살인으로 수사를 진행했던 모양. 하지만 용의선상에 두었던 사람들은 모두 혐의가 없거나 알리바이가 확실해 수사는 지금까지 계속 답보 상태로 머물러 있던 사건이었다.
당시 사건을 수사했던 해당 서에서 사건 기록을 파일 통째로 보내줬지만 부검기록이 빠져 있었다. 그것 역시 요청하면 받을 수 있지만 부검의를 만나서 물어볼 것도 있고 해서 설형은 직접 가지러 가는 쪽을 택했다.
“같이 가죠.”
무심코 내뱉는 한마디에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설형이 걸음을 멈췄다. 싫다고, 그럴 필요 없다고 거절하려고 했지만 도강우의 뒤편에서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는 홍 반장과 눈이 마주쳤다. 얼굴을 확 찌푸리기는 했지만 입은 도로 닫혔다.
“안 갑니까?”
그 사이 코트를 챙겨온 도강우가 물었다.
“그럴 리가요.”
쳇, 하고 속으로 혀를 찬 설형이 씽긋, 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가시죠.”
문을 잡고 선 설형이 여자를 에스코트하듯 손까지 내뻗었다. 비꼬듯 한 행동이었지만 도강우는 대수롭지 않게, 아니 오히려 이런 대우에 익숙한 사람 특유의 몸짓으로 문을 통과했다. 설형의 미간이 확 찌푸려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코트는 벌써 맡기셨습니까?”
강우의 손에 들린 것은 오전에 입었던 코트와는 또 다른 코트였다. 물론 이것도 더럽게 비싸 보이는 건 비슷했지만.
“아직이요.”
뒤늦게 설형의 시선이 코트에 닿아 있는 것을 본 강우가 아, 하고 작은 소리를 내며 덧붙였다.
“이건 비상용으로 차에 두었던 겁니다.”
헐. 이렇게 비싼 코트를 비상용으로 차에 두다니. 서민인 설형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자의 사고방식이었다.
“이번엔 코트는 벗고 타세요.”
삑.
차 잠금장치를 풀며 설형이 말했다.
“괜히 이번 것까지 세탁비 물라고 하지 마시고요.”
“그렇게 세탁비 무는 게 겁나면 세차부터 좀 하는 게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이 차에 그렇게 비싼 옷 입은 분 태운 일이 없어서요.”
“그렇다면 더더욱 해야겠네요. 앞으로는 계속 저를 태워야 할 것 같으니까요.”
“…….”
결국 이번에도 도강우의 승리였다. 입을 꾹 다문 채 차에 올라타는 설형에 강우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위로 향했다. 보는 사람이 없는 것이 안타까울 만큼 매력적인 미소였다.
“빡공주~.”
두 사람이 건물 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출입구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픽, 하고 옆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형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죽고 싶냐.”
바싹 다가선 설형이 음산하게 중얼거리자 상대가 순간적으로 움찔해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곧 자신의 손에 들린 서류를 발견하고 당당하게 턱을 치켜 올렸다.
“이거 필요 없나 보지?”
손에 들고 흔드는 서류를 본 설형의 표정이 더 사나워졌다. 그래도 함부로 덤벼들거나 하지는 못한다.
“그러길래 형님한테 까불지―.”
서류를 흔들며 약을 올리던 석진이 뒤늦게 설형의 옆을 지키고 있던 도강우를 발견했다.
“누구…….”
흘끔 고갯짓을 하며 묻자 설형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번 사건 담당검사인 도강우 검사님.”
“아이쿠,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이석진입니다.”
석진이 손을 내밀었다. 한발 물러서 있던 강우가 손을 내밀어 마주잡았다.
“두 분이 친한 사이신가 봅니다?”
“전혀 아닙니다만.”
“네, 아주 절친이죠.”
씽긋 웃으며 가볍게 묻는 질문에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설형은 정색을 하고 아니라고 고개를 내저었지만 강우는 설형의 말은 가볍게 무시했다.
“그런데 친구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불리나 보죠? 빡공주라고?”
“아, 그게 이 녀석 고등학교 때 별명이 백설공주였거든요. 그런데 백설 공주라고 부르면 아주 지랄―, 아니 난리가 나서 그냥 빡공주라고 불러요. 빡돌면 눈에 보이는 게 없다고 해서.”
지랄이라는 부분에서 설형의 표정이 험악해지는 것을 본 석진이 냉큼 말을 바꿨다. 그렇다고 그 표정이 풀어지지도 않았지만.
“고등학교 때 별명도 백설공주였군요.”
“아, 경찰서 내에서도 그렇게 불리나 보죠?”
“실제 대놓고 부르는 사람은 못 봤지만 암암리에 그렇게 지칭된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성격이 좀 지랄맞아야죠.”
두 사람의 화기애애한 대화를 듣고 있던 설형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저기요. 그 성격 지랄맞은 인간, 바로 옆에 있습니다만.”
“아참, 그랬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주먹으로 다른 손바닥을 탁, 하고 치는 석진을 한 번 더 사납게 노려본 설형이 그의 손에 들린 서류를 거칠게 낚아챘다.
“백 형사, 뭐 물어볼 거 있다던 거 아니었어?”
그대로 뒤돌아서는 설형의 뒤통수에 대고 석진이 외치듯 물었다. 순간 멈칫했던 설형이 이내 되돌아왔다. 그리곤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한 얼굴로 묻는다.
“당시 현장 사진에는 이불이 덮어져 있던데 범인이 그런 거야?”
“아, 그게 처음 시체를 발견하고 신고한 사람이 어머니였나 봐. 아무래도 아들이 그렇게 누워 있는 모습을 그냥 두기가 힘들었겠지.”
하지만 그 아들을 생각해서 한 사소한 행동이 범인을 1년 동안 숨겨 준 꼴이 되었다. 설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강우가 다음 질문을 이었다.
“역시 과다출혈로 인한 사망입니까?”
“네, 하지만 다른 사건 피해자와 달리 직접적인 사인은 목에 난 자상으로 인한 과다출혈입니다.”
설형의 눈이 조금 커졌다.
“성기가 잘린 게 아니라?”
“성기도 절단된 것은 맞는데 치명상은 그쪽이라는 거지.”
“그럼 목을 찌른 후에 그 뒤에 성기를 잘랐다는 거야?”
“어. 그래서 당연히 치정에 의한 살인으로 수사가 진행되었던 거고.”
“…….”
“그런데 대체 이 사건과 다른 두 사건을 어떻게 연결시킨 거야?”
아무리 봐도 전혀 연결점이 없는 사건이었다.
“그건 여기 이 도 검사님께서. 당시 담당검사였다고.”
“와. 벌써 일 년이 넘은 사건인데, 그걸 기억하신 겁니까?”
“정확히는 일 년 반이죠.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 한 번 본 건 잘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도강우의 시선이 설형에게 닿았지만 설형은 모르는 척 시선을 피했다.
“누구랑은 다르네요.”
강우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이 녀석은 사건으로 다시 만났을 때 저를 전혀 기억 못했거든요. 무려 삼 년이나 같은 반이었는데요.”
“미안하다고 했잖아.”
설형이 난감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 흐음, 묘한 소리를 낸 도강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긴 하루 전날 본 저도 기억 못한 걸 보면 썩 좋은 머리는 아닌 듯하네요.”
발끈한 설형이 곧바로 반박했다.
“검사님은 기억 못한 게 아니라 모르는 척한 거거든요.”
다만 그 반박이 안 하느니만 못한 반박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그런 거였습니까?”
“…….”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이상하게 이 사람과 이야기를 하면 꼭 이렇게 되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넘겨 버렸을 말도 도강우가 하면 괜히 발끈해서 반박하게 되고 결국엔 이렇게 제 무덤을 파게 된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뭐야, 그럼 결국 나만 기억 못했다는 거네?”
게다가 그 말은 도강우뿐만 아니라 석진에게까지 실례되는 말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설형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더 짙어졌다.
“미안.”
“그렇게 진지하게 사과하면 내가 더 민망하잖아.”
“…….”
이럴 땐 그냥 그런 게 아니라고 변명이라도 하면 될 것을 곧 죽어도 거짓말은 하지 못하는 백설형은 진지하게 사과를 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렇게 미안하면 술 한 잔 사든지.”
“그래.”
그나마 석진이 너스레를 떨어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풀어졌다. 성격 좋은 친구의 배려가 고마웠지만 이번에도 설형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럼 간다.”
서류를 들어 인사를 대신한 설형이 뒤돌아섰다.
“그럼 다음에 뵙죠.”
“네, 그러죠.”
인사를 마친 도강우가 그런 설형의 뒤를 따라 걸음을 내딛었다.
“이 선생님~.”
막 로비로 나오던 동료 선생이 석진을 발견하고 그를 불렀다. 이미 저만치 멀어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석진이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친구분은―.”
말을 하던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순간적으로 돌아보는 석진이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럽니까?”
“…….”
하지만 그렇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석진에게서 조금 전 그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얼굴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 뇨. 친구 분은 벌써 가셨나 봐요?”
아무래도 제가 뭘 잘못 본 모양이라고 고개를 내저은 동료가 하려던 질문을 이었다.
“네, 사건 때문에 많이 바쁜가 보더라구요.”
“그럼 식사는 저희랑 하러 가시죠.”
“아뇨, 전 검토할 게 좀 있어서.”
빙그레 웃으며 거절하는 석진에 그녀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럼 뭐라도 사다드릴까요?”
그녀가 자신을 스쳐지나가는 석진을 향해 물었다. 멈칫했던 석진이 이내 고개를 틀었다.
“그럼 오실 때 샌드위치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요?”
“네 물론이죠!”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석진의 부탁을 들은 그녀가 가벼운 걸음으로 로비를 가로질렀다. 석진도 가벼운 걸음을 내딛었다. 마치 몸에 달라붙은 벌레라도 떼어낸 듯 홀가분한 얼굴이었다.
“저런 얼굴이라면 기억 못할래야 못할 수도 없을 것 같은데, 정말 기억 못한 겁니까?”
“…….”
차 시동을 걸던 설형이 순간 멈칫했다.
“혹시.”
고개를 튼 설형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져 있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강우는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뒷말을 기다렸다. 머릿속으로 주름이 잡힌 미간을 혀로 눌러 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단정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단정한 얼굴이 확 찌푸려지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도 필요하지 않았다.
“검사님 취향입니까?”
“…….”
좀처럼 당황하지 않는 강우도 이번만큼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건지. 저 작은 머리를 쪼개서 안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제 친구라고 해서 저 녀석도 혹시 그런 성향이라고 생각하시나 본데―.”
“내 취향 아닙니다.”
“…….”
딱 잘라서 말했지만 설형의 의심의 눈초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애초에 남자는 내 취향의 범주에 들지 않습니다만.”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설형에 강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백설형씨가 제 첫 남잡니다.”
“첫―!”
어떻게 저런 태연한 얼굴로 저런 소리를 내뱉는 건지 모르겠다. 당황해서 잠시 할 말을 잃었던 설형이 이내 뭔가를 떠올리고 따져 물었다.
“그걸 지금 나더러 믿으라는 겁니까?”
“그럼 내가 거짓말이라도 하고 있다는 겁니까?”
“하지만 처음이라기에는 너무―.”
말도 안 된다는 듯 반박을 하려던 설형이 이내 입을 다물었다. 또 스스로 제 무덤을 팠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눈이 마주친 상대의 입꼬리가 씨익-하고 말려 올라가는 것을 본 설형이 급히 고개를 틀었다.
“그만 가죠.”
시선이 느껴졌지만 고집스럽게 앞만 보며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마치 그런 설형을 비웃기라도 하듯 갑자기 차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끼익, 끼익, 뭔가 끼어서 억지로 비틀리는 소리가 차안을 가득 채웠다.
“아, 이놈의 똥차.”
퍽, 하고 핸들을 후려친 설형이 상체를 등받이에 기댔다. 차안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실제로는 몇 초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설형에게는 그 시간이 마치 억겁의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한 설형이 다시 고개를 틀었다.
“비웃지 마시죠.”
“비웃은 적 없습니다.”
“웃는 거 봤거든요.”
“비웃지 않았다고 했지 웃지 않았다고는 안 했습니다.”
“…….”
어떻게 저렇게 얄미울 수가 있지. 진짜 검사만 아니면 한 대 후려쳤을 거라고 입술을 삐죽이고 있을 때였다.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잘했단 말이군요?”
불쑥, 예고도 없이 툭, 하고 던진 물음에 설형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처음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런 말은 안 했습니다만.”
“처음이라기에는, 다음에 올 수 있는 말이 그것밖에 더 있습니까?”
“아닌데요.”
“그럼 뭐라고 하려고 했습니까?”
“처음이라기에는, 너무 늦게 싼 거 아니냐고 하려고 했던 겁니다.”
“그게 그 말 아닙니까?”
“그게 어떻게 그 말입니까? 오래 하기만 하면 잘하는 줄 아나 본데 테크닉도 없이 무작정 오래 한다고 해서 상대가 만족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
순순히 수긍해 주고 싶지 않아 생각나는 대로 내뱉은 것이었는데 의외로 제대로 한 방 먹인 모양이었다. 도강우의 충격 받은 표정을 보자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것 같았다. 물론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시선을 마주했다.
“그럼 백설형 씨는 전혀 좋지 않았단 말입니까?”
“전혀요.”
한번 망설이지도 않고 돌아오는 대답에 이번엔 조금 전보다 훨씬 심각해진 얼굴로 강우가 다시 물었다.
“혹시 취향이 그쪽입니까? 아프거나 괴로워야 더 흥분되는?”
“그게 무슨―, 사람을 대체 뭘로 보는 겁니까.”
설형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기가 막혀 따져 묻는 설형에도 강우는 태연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좋지도 않았다면서 그렇게 몇 번이고 사정했을 리가 없잖습니까. 여자처럼 거기서 부글부글 거품까지 났는데.”
“누가 거품이 났다는 겁니까?!”
“아, 백설형 씨 쪽에선 보이지 않았겠네요. 안타깝네요. 아주 절경이었는데.”
누가 보면 아름다운 추억이라도 떠올리고 있는 줄 알겠다. 아련한 눈빛으로 기억을 더듬듯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도강우의 얼굴만 봐서는 절대로 저런 음담패설을 내뱉고 있는 상황이라고 짐작조차 못할 것이다.
“그건 나한테서 난 게 아니라 검사님 정액이―, 아니, 애초에 저 그런 취향 아니거든요?”
“괜찮습니다. 나 그런 데 편견 있는 사람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어느새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그래서 엉덩이를 두들길 때마다 그렇게 좋아했던 거군요.”
“좋아―! 그런 적 없거든요?! 없는 얘기 지어내지 마시죠?!”
“없는 얘기라니. 두들길 때마다 확 조여들었다가 흐물흐물해져서 더 두들겨 달라고 애원했던 거 기억 안 납니까?”
“그거야 순간적으로 놀라면 조여드는 게 당연―, 아니 애초에 엉덩이는 왜 때립니까?! 도 검사님이야말로 그쪽 취향이신 거 아닙니까?”
“그거야.”
때리고 싶었으니까. 무심코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열었던 강우가 이내 말을 멈췄다.
사실 설형이 들으면 코웃음을 치겠지만 강우는 섹스에 있어 다소 담백한 편이었다. 물론 신체 건강한 성인 남자이니 성욕은 일었고 그때마다 섹스는 했지만 그건 그냥 강우에게 스포츠의 일종이었다. 가볍게 머리도 식히고 땀과 노폐물을 빼는 운동 같은 것. 잠자리 매너도 기술도 좋아 만족하지 않는 상대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설형에게는 전혀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다정하게 대해 주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난폭하게 굴고 싶었다. 웃는 얼굴이 이쁘다고 생각하면서도 저 예쁜 얼굴이 일그러지고 눈물로 엉망이 되는 것이 보고 싶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성의 끈이 끊어졌던 것 같다. 그 뒤로는 거의 미친놈처럼 박고 싸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강우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의아한 표정으로 저를 빤히 응시하고 있던 설형과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색소가 조금 옅은 눈동자. 이 눈동자가 문제였다. 그 눈동자를 마주하면 이상하게 몸에서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왔다. 이성은 날아가고 본능만 남아 꿈틀대는 느낌. 그런데 그게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마주한 얼굴에 좀 더 의아한 기색이 번지는 것이 느껴졌다. 순진해 보이기까지 하는 눈동자를 보며 도강우가 속으로 혀를 찼다.
이 남자는 알기나 할까. 자신이 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지금 당장이라도 저를 아래에 깔고 제 것을 마구 박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그는 암컷이었다. 수컷을 미치게 하는 암컷. 지금까지 미친놈 눈에 띄지 않고 이렇게 멀쩡하게 나다니고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당장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본능을 애써 눌러 참으며 강우가 씽긋 웃었다.
“그런 성향인 백설형 씨 덕분에 저도 제 안에 숨어 있던 그런 성향이 자연스럽게 나온 거죠.”
설형이 얼굴을 확 일그러트렸다.
“저 그런 취향 아니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빽― 소리를 내지르면서도 내심 안심한 설형이었다.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반박해 댈 때는 그렇게 저 입을 틀어막고 싶더니 정작 도강우가 심각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느껴지는 압박갑이 엄청났다. 괜히 눈치가 보이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기분이었다. 오죽하면 차라리 음담패설을 내뱉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을까.
휴우. 속으로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허공을 응시한 채 뭔가를 생각하던 도강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상하긴 하네요.”
하아. 크게 한숨을 내쉰 설형이 한 번 더 반박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전―.”
“범인 말입니다.”
“……아.”
주제가 바뀌면 바뀐다고 말이나 좀 해 주고 바꾸든가. 뒤늦게 그것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깨달은 설형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내 진지해진 얼굴로 되물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겁니까?”
“첫 번째 피해자와 그 뒤 피해자 패턴이 너무 다르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거야 범죄를 저지르면 저지를수록 수법은 진화하는 거니까.”
“두 번째와 세 번째 범죄는 이렇게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했는데 아무리 첫 살인이라고 해도 너무 허술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
도강우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진화를 한다고 해도 말 그대로 진화일 뿐 기본 성향은 달라질 수 없었다. 강간범이 살인범으로 진화할 수는 있어도 절도범이 살인을 저지를 가능성은 거의 희박한 것처럼. 잠시 굳어 있던 설형이 뒷좌석으로 던져 두었던 봉투를 집어들었다. 봉투 안에 든 서류를 꺼내 빠르게 읽어 내렸다.
그의 말처럼 첫 번째 사건은 이상하리만치 허술했다. 게다가 똑같이 성기를 잘라내긴 했지만 그전에 이미 목을 베어 죽였다. 이후 사건 피해자들을 살아 있는 상태로 성기를 잘라내 가학적으로 죽인 것과는 전혀 다른 패턴이었다.
“이후 사건과 다른 범인이라고 보십니까?”
고개를 돌린 설형이 물었다.
“그러기엔 범인의 시그널이 너무 확실하죠.”
“…….”
도강우의 말대로 성기를 절단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사람이 흔히 생각해낼 수 있는 방법은 아니었다.
“하긴 만약 전혀 연관관계 없는 두 사람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각각 범죄를 저지른 거라면 그건 거의 소울메이트―.”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설형이 순간 뭔가를 깨달았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마주한 강우의 눈에서 그 역시 자신이 깨달은 것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공범이 생긴 거군요.”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던 눈앞이 단숨에 환해진 느낌. 설형이 낸 결론에 강우가 살을 붙였다.
“아마도 이 사건을 계기로 서로 같은 성향이라는 걸 알아차렸겠죠.”
“전혀 모르는 사이였을까요?”
“오히려 아는 사이였을 수도 있죠. 다만 그 전에는 거의 모르는 사이나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을 테니까요.”
대화를 주고받는 설형의 눈이 반짝이고 얼굴에 생기가 일었다.
수백 수천 개의 퍼즐 조각들 사이에서 딱 맞는 퍼즐을 찾아낸 그 느낌. 그건 경험해 본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그런데 그걸 완전히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택시 타죠.”
입가에 미소를 띤 설형이 급히 차문을 열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손목을 꽉 붙잡아 오는 손길이 아니었다면. 차문을 반쯤 열어 놓은 채 설형이 고개를 틀었다.
“불편하시면 저 혼자 가서 택시를 잡아―.”
“이미 시동이 걸려 있는데 시동을 거니까 안 걸리죠.”
“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영문을 몰라 되묻는 설형에 강우가 대답 대신 흘끔 차키가 꽂힌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 시선을 쫓아 움직였던 설형이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시동이 안 걸리고 열쇠를 돌릴 때마다 돼지 멱따는 소리가 울렸던 것은 차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미 시동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도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저질렀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탁.
잠시 그 자세 그대로 굳어 있던 설형이 황급히 차 문을 닫고 자세를 바로 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얼굴이었지만 귀 끝이 조금 달아올라 있었다. 피식,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설형은 정면으로 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차가 빠르게 진입로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
“여기 세 사건, 정확히는 첫 번째 범행과 이후 범행들은 확연히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뒤에 세워진 가벽에 순서대로 현장 사진을 붙이고 뒤돌아선 도강우가 수사팀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어떤 차이인지 아시겠습니까?”
한 형사가 손을 들어올렸다. 끄덕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시체를 폐기하지 않고 현장에 그대로 두었습니다.”
“피가, 많이 튀어 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또 다른 형사가, 이번에는 손을 들지 않고 덧붙였다.
“네, 같은 살인사건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이쪽은 사체에 피가 낭자하죠.”
오오~, 하고 주변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처음엔 장난스럽게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던 형사가 이내 도강우의 눈치가 보였는지 슬그머니 자세를 바로 했다.
흘끔, 설형도 고개를 틀어 옆에 선 도강우의 표정을 살폈다. 정작 도강우는 그런 것은 상관없다는 덤덤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설형은 그 형사의 기분을 알 것도 같았다. 도강우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도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었다. 나이와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또 다른 사진이 가벽에 붙었다. 첫 번째 피해자의 부검 사진이었다.
“여기 보시면 목에 난 깊은 자상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검시관 역시 이 상처가 치명상이었을 거라고 증언했고요.”
조금 전에 손을 들어 대답했던 형사가 다시 손을 한 번 더 들었다. 이번에도 말해 보라는 신호를 주었고 형사가 손을 든 채로 이의를 제의했다.
“그걸 꼭 차이라고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까? 첫 살인 이후에 살해 수법이 좀 더 치밀해지는 건 별로 이상할 게 없어 보이는데요. 이전 살인에서 터득했을 테니까요.”
“맞습니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후 살인에서는 이렇게 확연하게 냉정한 사이코패스적인 성향이 두드러지는 살인범이 유독 첫 번째 살인에서는 그런 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
그건 질문한 이도 이상하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혹시 범인이 다르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설형과 같은 추측이었다. 이번에도 강우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성기를 잘라냈다는 시그널은 동일하니까요.”
“그럼 대체…….”
하지만 설형처럼 다음 가설을 내놓지는 못한다. 빨리 정답을 알려달라며 매달리는 시선들을 빙 둘러보던 도강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생각한 가설은 이렇습니다. 아마도 범인은 계획적으로 첫 번째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닌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찔렀을 때 피가 많이 뿜어져 나오는 곳을 공격해서 살해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
목의 동맥이라면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을 테고 피를 뒤집어쓴 채로 사람들의 눈을 피해 도망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테니까. 다들 말은 없었지만 수긍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니까 첫 번째 피해자에게는 범인이 이성을 잃고 달려들 정도로 그를 자극한 뭔가가 분명히 있었다는 겁니다.”
곧바로 누군가 그 의견에 대한 의문을 드러냈다.
“그런데 사이코패스는 감정이 없는 것 아니었습니까? 격정적으로 폭발하는 것이 가능한 겁니까?”
“아뇨. 흔히들 사이코패스라고 하면 단순히 감정이 없는 인간 유형으로 오해를 많이 하시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사이코패스는 남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할 뿐입니다. 오히려 아주 극단적인 자기중심적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보통 사람보다 행동에 대한 통제력이 낮은 편입니다. 그렇다 보니 보통 사람들은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가 나야 살해욕구가 생기는데 반해서 오히려 사이코패스는 단순히 어깨를 부딪친 일로도 상대를 살해할 수 있는 거죠.”
“…….”
“경찰이 이 사건을 두 번째 살인사건과 전혀 연관 짓지 못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두 번째는 누가 봐도 엽기적인 살인이지만 첫 번째 사건은 단순 치정에 의한 살인 사건으로 보이니까요.”
“…….”
“아마도 범인은 태어날 때부터 사이코패스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다 첫 번째 살인으로 결국 눈을 뜬 거죠. 우발적인 첫 번째 살인에서조차 피해자의 성기를 절단해서 자신의 시그널을 남긴 일이나,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살인이 일어나고 있는 사태들을 봐도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순간 고개를 돌린 강우의 시선이 설형에게 닿았다. 물론 전혀 이상할 것 없는 행동이었고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는 없었겠지만 괜스레 찔리는 것이 있는 설형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너무 티나게 시선을 피했나.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다행히 강우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리고 저는 이 범행 이후의 범행 수법이 갑자기 이렇게 확연한 차이를 두게 된 이유는 또 다른 누군가가 합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지금 범인이 둘이라는 말씀입니까?!”
재민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되물었다. 평소라면 분위기 파악하지 못하고 호들갑을 떤다며 눈총을 받았겠지만 지금은 그런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재민이 묻지 않았으면 본인들이 물었을 터였다.
“네. 이후에 갑자기 본인의 패턴에 전혀 다른 성향이 더해진 것을 설명하려면 그것밖에는 없습니다.”
도강우의 말에 김 형사가 얼굴을 확 일그러트리며 따져 물었다.
“그럼 뭐 미친 사이코패스가 자기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이코패스를 모집이라도 했다는 겁니까?”
하지만 도강우는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태연히 대답했다.
“이런 경우에는 오히려 첫 번째 사건을 보고 다른 누군가가 접근했을 가능성이 더 높죠.”
“…….”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형사들은 서로 말없이 시선만 주고받고 있었다.
아무리 스타 검사라고 해도 일을 너무 크게 벌이는 것 아닌가. 다들 그런 표정이었다. 믿고 싶지 않아하는 심정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강우의 말이 옳다면 이제 자신들은 한 명이 아니라 무려 두 명의 사이코패스를 상대해야 한다는 말이니까. 그곳에 있는 대부분이 십 년 이상의 경력에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어 봤던 베테랑 형사들이었지만 이런 기분 나쁜 사건은 처음이었다. 어떻게든 빨리 범인을 잡아 끝내 버리고 싶은데 임관 서류에 잉크도 안 마른 초짜 검사가 사건을 더 복잡하게 만들려고 하니 그게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이렇게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는 사건이라면 더더욱.
“이런 미친 사이코패스한테 공범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해서 그렇지, 사실 성인 남자 시체를 사람들이 다니는 길가에 버린 것을 생각해 보면 단독범일 가능성보다는 공범이 있을 가능성이 더 높은 건 맞잖아요.”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설형이 툭, 하고 입을 열었다. 말을 한 것이 설형이라는 것을 확인한 형사들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백 형사도 그렇게 생각해?”
설형과 몇 번 공조수사를 해 본 적 있는 다른 지부 강 형사였다. 설형이 어깨를 으쓱였다.
“가능성이 희박하기는 하지만 굳이 가능성을 닫아 둘 필요는 없다는 거죠.”
“그렇긴 하지.”
“그리고 공범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더 잘된 일이구요.”
“그게 어떻게 좋은 일이야. 더 골치 아픈 일이지.”
투덜거리는 강 형사에게 설형이 가볍게 대꾸했다.
“둘 중 하나만 잡으면 다른 한 명은 저절로 잡히는 거잖아요.”
피식. 마치 좀도둑하나 잡는 것 마냥 가볍게 말하는 설형에 강 형사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이내 그 말이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세상 모든 일이 그랬다. 아주 무겁게만 여겨지던 것들도 누군가 별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넘겨 버리는 것을 보면 제가 느끼던 무게가 확 덜어지는 법이다. 특히 그 말을 한 사람이 제가 신뢰할 만한 동료라면 더더욱.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가 단숨에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 도 검사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말의 핵심은 바로 이 첫 번째 사건이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혹시 잘못 알아들었습니까?”
설형의 물음에 잠시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강우가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네, 그러니까 범인이 공범을 만나 완벽한 살인을 저지르기 전 단계인, 첫 살인을 좀 더 자세하게 수사해야 한다는 겁니다. 분명 사건의 실마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
어느새 설형은 한 발 뒤로 물러서고 강우가 다시 중심에 서 있었다. 불신의 눈빛을 보내던 조금 전과 달리 형사들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렵기는 해도 아예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그래도 쫓아갈 뭔가가 있는 쪽이 훨씬 나았다.
수사팀 전체에 활기가 이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도강우가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덧붙였다.
“지금부터는 첫 번째 사건을 중심으로 수사를 진행합니다. 일 년 전 사건이라 수사가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다들 애써 주십시오. 대신 수사가 원활히 진행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도강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란이 일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빠른 속도로 흩어지는 형사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재민이 문득 한 발 물러서 있던 설형에게 고개를 틀었다.
“왜. 뭐.”
“첫 번째 살인 사건은 당시 언론에서 시끄럽게 떠들어 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공범은 접근을 했을까요?”
혹 제가 도검 편들어 준 걸 눈치라도 챘나 싶어 굳어 있던 설형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눈치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는 녀석이 그런 것을 눈치챘을 리가 없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던 설형이 입을 열기 직전 불쑥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
“그건 그러네요.”
굳이 뒤돌아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바로 뒤에 도강우가 서 있다는 것을 자각하자 뒤늦게 목덜미의 솜털이 오소소, 솟아올랐다. 물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도강우는 전혀 그런 것을 의식하지 않는 아주 평온한 목소리였지만.
“공범이 수사와 관련된 사람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군요.”
“수사와 관련된 사람이요?”
눈이 휘둥그레진 재민이 되물었다.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사람들은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도 검사님.”
불쑥 이름을 부르며 뒤돌아선 설형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잠깐 저 좀 보시죠.”
순간 도강우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지만 그래도 순순히 설형을 따라 걸음을 내딛었다.
“백 형사님 완전 열받으신 거 같은데 따라가 봐야 하는 거 아닐까요?”
문을 통과해서 밖으로 나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재민이 난감한 얼굴로 물었다. 뒤에 서 있던 김 형사가 고개를 내저었다.
“말리긴 왜 말려. 백 형사님이 안 했으면 내가 가만 안 있었을 거야.”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그래도. 그럼 넌 경찰을 용의자 취급하는 게 말이 된다는 거냐?!”
거대한 흑곰이 덤벼드는 것 같은 기분에 재민이 목을 움츠렸다.
“꼭 경찰만 얘기한 건 아니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럼 수사와 관련된 사람이 경찰 말고 누가 있는데.”
“검찰도 있고…….”
“지랄. 검찰이 자신들이 실수했다는 생각 자체를 할 것 같아? 만만한 게 우리 경찰이지. 이래서 검찰은 안 된다는 거야. 지들이 우리 아니면 수사가 좆도 진행될 거 같아? 그런데 먹물 좀 먹었다고 우리를 아주 지들 개호구쯤으로 안단 말이야.”
“…….”
험악한 기세로 눈을 부라리는 김 형사에 재민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김 형사가 너무 분노해서 변명을 해 주기는 했지만 저도 그 말을 듣는 순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니까.
“기차 화통을 삶아먹었나. 시끄러 죽겠다, 이놈아. 목소리 좀 죽여.”
그때까지 두 사람의 대화를 말없이 듣고 있던 홍 반장이 안 되겠다 싶었던지 한마디 하고 나섰다. 김 형사가 서럽다는 듯 따져 물었다.
“뭐 제 말이 틀렸습니까?”
“누가 틀렸대? 검찰한테 무시당하는 게 하루이틀도 아닌데 매번 그렇게 흥분하니까 신기해서 그렇지. 그렇게 억울하면 너도 사법고시 봐서 붙어서 검찰 하든지.”
“누군 공부 안 하고 싶어서 안 했습니까?! 글자만 보면 잠이 오는 걸 어떻게 합니까.”
“어이구. 자랑이다.”
피식. 퉁퉁 부은 얼굴로 변명을 늘어놓는 김 형사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던 재민이지만 이내 저를 죽일 듯한 기세로 쏘아보는 험악한 시선을 느끼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홍 반장이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설마 유혈 사태가 나거나 하지는 않겠죠?”
“설마.”
아무리 그래도 상대가 검사인데 그런 짓이야 하겠냐고 고개를 내저으려던 홍 반장이 순간 말을 하다 말고 멈칫했다. 문득 당사자가 백설형이라는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막내야. 슬쩍 나가 봐라. 여차하면 몸을 던져서라도 막고. 그놈이 주먹은 매워도 체력은 딸리니까.”
“넵!”
다급한 홍 반장의 명령에 재민이 후다닥 두 사람이 사라진 밖으로 달려 나갔다.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기는 했지만 김 형사도 그런 재민을 저지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누가 뭐래도 백설형은 강력 3팀의 아이돌 같은 존재였으니까.
우뚝.
설형이 걸음을 멈춘 것은 건물을 나와 계단 아래쪽으로 내려온 뒤였다. 험악한 표정으로 뒤돌아선 설형에 강우가 물었다.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습니까?”
하아. 설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전혀 짐작도 못한 표정이었다.
“정말 검사님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모르십니까?”
“모르겠습니다만.”
기가 막혔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공범이 수사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는 게 무슨 의밉니까? 즉 경찰이 범인일 수도 있다는 말 아닙니까?”
“네. 그게 뭐가 잘못됐습니까?”
하. 설형이 입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물론 눈은 웃고 있지 않았지만.
“거기 있는 사람들이 다들 경찰이라는 건 알고 계십니까?”
“꼭 경찰을 지칭해서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렇지만 경찰이 포함된 것도 사실이었지 않습니까.”
“추측이 틀렸다는 겁니까?”
“누가 틀렸다고 했습니까? 기분 문제라는 거죠. 검사님한테 누가 대놓고 검사님이 의심스럽다고 하면 기분 좋겠습니까?”
“전 제가 결백하면 상관없습니다만.”
“…….”
아. 네. 설형이 알 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검사님은 그럴지 몰라도 보통 사람은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 나쁩니다. 아니 상처입어요. 겉모습은 저렇게 손으로 소도 때려잡을 것 같이 보여도 다들 속은 여리고 순수한 사람들이라구요.”
“…….”
“저들이 쥐꼬리만 한 월급에, 무심한 아버지, 남편이라고 취급당하면서도, 힘들어 죽겠다고 매일 앓는 소리를 하면서도 이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건 알량한 사명감, 그거 하나 때문입니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개똥철학이지만 그래도 옆에 있는 동료는 알고 있다고,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목숨을 거는 겁니다. 그 동료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뒤를 지켜 줄 거라고 믿으니까.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동료를 의심하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건 수사 자체를 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나 마찬가지죠.”
“…….”
“저들 없이 검사님 혼자 수사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내가 생각이 짧았군요.”
단박에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강우에 설형이 쩝, 하고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뭐, 검사님 의견이 틀렸다는 말은 아닙니다. 검사님 말대로 사건과 관련된 사람이라는 건 맞고, 가장 가능성 높은 게 경찰이라는 건 저도 동의하니까요. 하지만―.”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백설형 씨하고만 이야기했어야 한다. 그 말인 거죠?”
“……네?”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사건에 관한 논의는 백설형 씨하고만 하죠.”
“아, 아뇨. 저는 단순히 확실해질 때까지는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말을 하려고 했을 뿐인데요.”
어어, 하는 사이에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뒤늦게 고개를 내저으며 반박하자 도강우가 심각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럼 백설형 씨한테도 하지 말라는 말입니까?”
“아니,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구요.”
“…….”
“말하세요.”
뭔가 이게 아닌데 싶었지만 저를 빤히 응시하고 있는 도강우의 시선을 이기지 못한 설형은 결국 마음대로 하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자 심각한 표정을 푼 도강우가 핀잔했다.
“결국 백설형 씨하고만 논의를 하라는 말 맞잖습니까.”
“그 말이 어떻게―.”
그 말이냐고, 반박하려던 설형이 입을 벌린 그대로 멈췄다. 도강우의 어깨 너머로 뭔가를 발견한 탓이었다.
설형의 표정이 굳는 것을 본 강우가 설형의 시선을 쫓아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설형이 돌아보지 말라는 신호를 주지 않았다면.
“돌아보지 말고 아주 기분 나쁜 표정 좀 지어 봐요. 아주 분위기 험악한 것처럼.”
복화술이라도 하듯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로 설형이 속삭였다.
“왜 그래야―.”
“돌아보지 말라니까.”
저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던 모양이다. 어깨를 으쓱한 강우가 고개를 바로 했다.
“뒤쪽에 한 형사가 우리 동태를 살피고 있거든요.”
이미 설형은 연기에 몰입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행여나 내가 검사님에게 주먹이라도 날리지 않을까 안절부절못하면서.”
강우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번졌다.
“그럼 오히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보여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뭘 모르는 소리 하지 마세요. 내가 검사님에게 험악하게 굴어야 다른 팀원들이 더는 거기에 대해 문제 삼지 않는 겁니다.”
“……그런 겁니까.”
“네. 그런 겁니다.”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머리가 아무리 좋으면 뭐하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설형에게 물끄러미 뭔가를 생각하던 도강우가 툭, 하고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나를 생각해서 일부러 화를 내 준 거였군요.”
“그렇다니―.”
맞장구를 치려던 설형이 이내 멈칫했다.
설형도 그때서야 자신의 행동을 자각했던 것이다. 사실 도강우가 말하기 전까지는 설형은 자신이 도강우를 도우려고 했다는 자각 자체가 없었다. 만약 돕는다는 자각이 있었다면 이렇게 대놓고 말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아니. 뭐 또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한 건 아니구요.”
뒤늦게 발뺌해보지만 이미 늦었다. 마주한 도강우의 입꼬리가 위쪽을 향하고 있었다.
“잘 모르시겠지만 제가 그렇게 깊이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때그때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놈이에요.”
나름 사태를 수습해 보겠다고 한 말이었다. 하지만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말은 생각도 하기 전에 백설형 씨의 몸이 먼저 나를 위해 움직였다는 말이네요?”
“…….”
그제야 제가 한 말이 좀 전보다 더 큰 실수였다는 것을 깨달은 설형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일그러진 얼굴로 설형이 손을 내뻗었다. 아니라고, 그건 오해라고 부정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백 형사님!”
번개처럼 달려온 재민이 설형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아무리 화가 나셔도 폭력은 안 돼요.”
답지 않게 단호한 어조로 선언한 재민이 설형을 끌어안은 채 곧장 건물 안으로 향했다.
“아니, 잠깐만.”
연행되듯 질질 끌려가던 설형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항의해 보지만 힘으로 재민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