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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란 새벽빛이 차갑게 내리깔리는 새벽 거리.
“김 씨! 저쪽 골목은 왜 빼먹었어?”
정체모를 검은 물이 줄줄 흐르는 쓰레기봉투를 쓰레기 차안으로 던져 넣던 김문수가 순간 얼굴로 튀는 물기에 얼굴을 찌푸렸다. 급히 소매로 얼굴을 문지르며 반장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가 가리키는 좁은 골목을 확인한 남자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번졌다.
“네? 아닌데요.”
분명 입구에 있는 쓰레기봉투를 수거했다.
“저기 저거 쓰레기 아니야?”
“……아.”
반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을 때에야 김문수도 커다란 쓰레기통 뒤편에 놓인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절로 짜증이 일었다. 골목 입구에 쓰레기를 모아 두어야 함에도 꼭 저렇게 멋대로 구는 인간들이 있다. 그럴 거면 차라리 잘 보이는 곳에라도 두든가. 저렇게 잘 보이지도 않는 곳에 두어 사람을 두 번 걸음 하게 한단 말인가.
“에이, 씨발.”
짜증 섞인 욕을 내뱉은 김문수가 터덜터덜 걸음을 내딛었다. 흘끔, 고개를 돌려 김문수가 골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반장이 막 반대편으로 걸음을 내딛었을 때였다.
으아아악----!!!
얼어있는 새벽 공기를 쩡—하고 깨부수는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머리털이 쭈뼛 하고 칼날처럼 일어섰다. 사실 차가운 겨울 쓰레기를 수거하다 보면 언 바닥을 보지 못하고 넘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지금 들려온 비명소리는 사람이 넘어지거나 어딜 다쳤을 때 내는 수준의 비명소리가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오른발을 내딛은 자세 그대로 굳었던 반장이 황급히 몸을 돌렸다. 운전석에 있던 강 씨도 차문을 박차고 뛰어내리는 것이 보였다. 등 뒤로 따라붙는 발소리를 들으며 반장은 골목 안으로 튀어 들어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김문수였다. 주저앉은 곳이 하필이면 시커먼 물웅덩이의 한복판이었다. 평소라면 오물이 튀는 것도 짜증을 냈을 사람이 옷이며 바닥을 짚은 손이며 더러운 물을 잔뜩 뒤집어쓰고서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아랑곳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아예 그런 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이었다.
반장이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도 김문수는 반쯤 혼이 나가서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고개를 돌리는 것도 잊은 것처럼. 하지만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던 반장도 이내 그런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 어억-!!!”
순간 자신이 내지른 비명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비명을 내지른 사람은 반장을 뒤따라온 강 씨였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머리를 커다란 해머로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했다. 그나마 반장이 그대로 주저앉지 않은 것은 바로 뒤에서 들려온 비명소리 때문이었다.
“시, 시체, 시체……, 겨, 경찰, 119, 경찰—!”
말을 할 줄 모르는 아이처럼 산발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들만 겨우 입 밖으로 내뱉던 강 씨가 이내 몸을 돌려 큰길로 달려 나갔다. 다리에 힘이 풀려 몇 번이고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지만 강 씨는 멈추지 않았다. 걸음을 멈추는 순간 이 골목을 빠져나가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온몸을 휩쌌기 때문이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반장은 투박한 손을 들어 얼굴을 문질렀다. 얼어 있던 얼굴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시커먼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몇 십 년 동안 쓰레기차를 타면서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온갖 더럽고 희한한 꼴들은 다 봤다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단언컨대 눈앞에 있는 성기가 절단된 남자의 나신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희한한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
“도 검사님.”
경찰서 입구에 서서 대기하고 있던 최재명 서기관이 차에서 내리는 강우를 발견하고 계단을 내려왔다. 사실 차가 들어올 때부터 이미 그 차가 도강우의 차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사실 이런 고급 외제차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늦었습니까?”
뒷좌석에 던져두었던 코트를 꺼내던 강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목을 들어 롤렉스 시계를 확인했다. 처음 봤을 때는 나이에 맞지 않게 올드한 취향이다 싶었지만 대학 입학 선물로 할아버지가 자신이 쓰시던 것을 물려줬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납득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쓰던 것이라고 하더라도 대학 입학 선물로 롤렉스를 선물로 준다는 것부터가 평범한 서민의 사고방식으로는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다른 분들은 모두 도착을 하셨거든요.”
“아아.”
이미 자신의 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강우도 대충 어떤 상황인지 파악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두르는 기색은 없었다. 카멜색 캐시미어 코트를 입고 옷매무새도 가다듬고 나서야 경찰서를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느긋하게 보이는 걸음이었지만 그렇다고 속도가 느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따라가는 최 서기관은 잰걸음을 놀려야 했다.
“혹시 오는 길에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
막 경찰서 안으로 들어서던 강우가 순간 걸음을 멈췄다. 가만히 저를 보는 시선에 최 서기관이 변명하듯 덧붙였다.
“표정이 언짢아 보이셔서요.”
순간 강우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번졌다. 그런 강우의 솔직한 반응에 당황한 쪽은 최 서기관이었다.
“그렇게 티가 났습니까?”
“……네, 뭐.”
별일이다 싶긴 했다. 평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속을 읽을 수 없었던 도강우가 아닌가. 그런 도강우가 겉으로 심기를 드러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심지어 자신의 기분이 겉으로 드러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니. 사실 그게 더 놀라웠다.
“그렇군요.”
강우가 허공을 응시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곳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싶어 흘끔 시선을 주던 그때, 다시 혼잣말 같은 강우의 말이 이어졌다.
“말로만 듣던 먹튀라는 걸 직접 당했거든요.”
“아, 네……, 네?”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최 서기관이 한 박자 늦게 단어를 제대로 인식했다.
“먹튀요?”
“네.”
물론 중년의 최 서기관도 그 뜻은 알고 있는 단어이니 당연히 저보다 젊은 도강우가 그 단어를 알고 있다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것은 없었다. 도강우가 그런 단어를 내뱉으리라는 걸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것만 빼면. 물론 이 외모로 여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볍게 여자를 만나고 다닐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으니까.
“한 번 잤다고 귀찮게 구는 것보다는 그쪽이 훨씬 편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당하고 보니 기분이 아주 더럽더라구요.”
적어도 오늘까지는.
“아, 네……그렇, 습니까.”
“네.”
원나잇은커녕 남들 다하는 연애도 못해 보고 선 봐서 결혼한 그로서는 도강우의 기분을 일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귀는 사람은 없다는 그 말이 여자가 없다는 뜻은 아니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꽤 마음에 드신 여자 분이었던 모양입니다.”
“글쎄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사이 도강우가 뒷말을 이었다.
“마음에 들었다기보다 몸이 잘 맞았다는 말이 맞겠네요.”
“아…….”
맞아도 너무 잘 맞아서 문제였다. 섹스에 굶주린 고딩도 아니고—물론 고등학생 때라고 굶주린 것은 아니었지만— 빼지도 않고 몇 번이나 사정해 댔는지. 새벽녘엔 더 이상 못하겠다고 밀어내는 상대를 힘으로 누르고 해 댔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제 잘못만은 아니었다. 입으로는 싫다면서 아래쪽은 더 넣어 달라고 조르듯 제 것을 빨아 당겼으니까. 그 말을 해주자 저를 노려보던 젖은 눈동자를 떠올린 도강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아래가 설 것 같았기 때문이다.
미친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마치 그 장면을 머릿속에서 떨쳐내기라도 하듯. 그때였다.
“도 검사.”
무거운 침묵을 깨는 부름과 함께 발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틀었다.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들어오고 있는 사람은 바로 박도찬 차장 검사였다.
휴우.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했던 최 서기관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셨습니까.”
강우가 고개를 숙였다. 어느 새 바로 앞까지 온 박도찬이 걸음을 멈췄다
“왜 안 들어가고?”
그렇게 묻는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번져있었다. 물론 질책하려고 물은 것은 아니었고 굳이 따지자면 혹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 걱정스러워하는 쪽에 더 가까웠다. 이것만 보면 박도찬 차장이 아주 온화하고 인자한 사람인 줄 알겠지만 사실은 전혀 달랐다. 오히려 평소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이렇게 온화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에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도강우는 별다른 감흥 없이 대답했을 뿐이다.
“지금 들어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도강우에게 박도찬은 늘 그렇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 왔기 때문이다. 도강우는 늘 특별대우를 받아왔고 그것을 받는 것에 아주 익숙했다.
“그래? 그럼 같이 들어가지.”
“네.”
별다른 지적 없이 다시 걸음을 내딛는 박도찬의 옆으로 도강우가 나란히 서서 걸었다.
“아버님은 잘 지내시지?”
“네, 뉴스에서 본 바로는 잘 계신 것 같더군요.”
“하하. 새끼 검사 때가 제일 바쁘긴 하지.”
검사가 되기 전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지만 강우는 굳이 그것을 정정하지는 않았다.
철컥.
한발 먼저 앞서 간 수행원이 문을 열었다. 시끌벅적하던 안이 단숨에 조용해졌다. 박도찬이 안으로 걸음을 내딛었고 도강우가 그 뒤를 따라 들어섰다. 제 배경을 굳이 자랑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 혜택을 마다할 이유 역시 없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도강우에게 닿았다. 시기와 부러움이 적절하게 뒤섞인 수십 개의 시선들, 그 역시 도강우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사건 피해자의 이름은 한도혁, 나이 32세, 한성물산 둘째 아들로 현재 아버지 회사에 상무직을 맡고 있습니다.”
커다란 스크린에 피해자의 신분증 사진이 투사되었다. 푸른빛이 많이 섞인 영상임에도 피해자의 얼굴이 아주 준수한 외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내 영상은 다른 영상으로 교체되었다.
“사체는 오늘 새벽 4시 20분경 쓰레기를 수거하던 환경미화원들에게 처음 발견되었습니다. 보시다시피 발가벗겨진 채 버려진 사체는 총 다섯 군데의 자상을 입었으며 성기는 잘린 상태였습니다.”
쓰레기를 버리는 곳에 말 그대로 쓰레기처럼 버려진 나신의 사체. 조금 전 사진의 인물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사진이었다. 성기가 잘린 사타구니를 클로즈업한 사진으로 바뀌자 경찰관들의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슬그머니 고개를 내려 제 것을 확인하는 이도 있었다. 계속해서 발표자의 설명이 이어졌다.
“야.”
팔짱을 끼고 의자에 앉아 있던 홍성주 반장이 시선은 앞으로 둔 채 슬쩍 상체를 뒤로 젖혔다. 자리가 없어 벽에 기대 서 있던 김욱 형사가 신호를 알아듣고 급히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가까워진 머리통에 대고 속삭였다. 시선은 막 새로운 사진으로 바뀐 앞쪽 스크린을 향해 있었다.
“분명 통화했다고 하지 않았어?”
누구에 대한 질문이냐는 바보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강력3팀 형사 중에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으니까.
“네? 아 네. 분명 통화했습니다.”
“그런데 대체 왜 코빼기도 보이질 않아.”
“글쎄요.”
홍 반장의 짜증 섞인 추궁에 머리를 긁적이는 김 형사를 보고 있던 팀의 막내 한재민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저기, 백 형사님께서 현장부터 먼저 가신다고 문자 보내셨는데요.”
“뭐?! 그걸 왜 이제―.”
조용히 속삭이던 것도 잊고 홍 반장이 큰소리를 냈다. 순간 제게 모이는 시선에 입술을 닫고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시선이 흩어졌고 눈치를 보던 홍 반장이 휙, 하고 상체를 틀었다.
“일단 서부터 들어오라고 말 안 했어?!”
“아니, 저는 분명 그렇게 말했는데요.”
사납게 노려보는 눈빛에 김 형사가 억울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변명했지만 홍 반장의 눈빛은 달라지지 않았다. 잘못도 없이 괜스레 불똥이 튄 김 형사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조폭과 견주어도 절대 지지 않는 험악한 얼굴 탓에 울상이라기보다는 잔뜩 불만 어린 표정처럼 보이긴 했지만. 그렇게 형사인지 조폭인지 모를 두 사람이 목소리를 한껏 줄인 채 속삭이고 있던 그때였다.
삐걱.
슬그머니 뒷문이 열리고 그 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문틈으로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 안쪽은 어두컴컴했고 상대적으로 들어오던 사람의 얼굴이 핀 조명이라도 받은 배우처럼 확 도드라졌다. 조명을 받지 않아도 눈에 띌 만한 외모였지만.
“백 형사님. 여기요.”
들어서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막내 한재민 형사가 손을 들어올렸다. 목소리는 한껏 줄였지만 조금 전 소란을 피웠던 전적이 있는 터라 이번에는 힐난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따가운 시선에 자신의 팀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백설형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스크린 쪽으로 돌렸다. 하지만 그건 아주 짧은 순간으로 곧바로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바로 했다. 백설형이 걸어오는 것을 본 재민이 냉큼 옆으로 비켜 자리를 만들었다.
“백 형사님, 말씀 좀 해 주십시오. 저는 분명 반장님이 서로 바로 오시라고 했다고 전했지 말입니다?”
조용히 재민의 옆에 서기 무섭게 김 형사가 험악한 얼굴로 물었다. 사납다 못해 한 대 후려칠 기세였지만 그저 억울해하는 표정이라는 걸 백설형은 알고 있었다. 미안하다는 듯 어깨를 툭툭, 치자 김 형사의 얼굴의 찌푸린 얼굴이 풀어졌다. 물론 본 얼굴의 험악한 기세는 변함이 없었지만.
그리고는 이번엔 여전히 험악한 기세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홍 반장을 향해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마침 오는 길이길래 잠깐 들렀어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너희 집이랑 현장은 정반댄데 어떻게 오는 길이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홍 반장이 믿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지만 이번엔 정말 거짓말이 아니었다. 물론 집에서 온 게 아니었다는 말을 하면 되긴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당연히 어디서 오는 길이었냐는 질문이 이어질 것이 분명했다.
“있다가 얘기하자.”
입을 꾹 다물고 버티는 백설형을 사나운 기세로 노려보던 홍 반장이 결국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한발 뒤로 물러섰다.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한마디 덧붙였지만 언제나처럼 결국 그냥 넘어갈 거라는 걸 그곳에 있는 팀원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디까지 했어?”
“오늘 발견된 피해자와 동일한 모습으로 발견된 다른 피해자들에 대한 보고를 하는 중이에요. 지금 나오는 화면은 첫 번째 살인사건 현장사진이고요.”
스크린 화면에 시선을 둔 설형이 툭, 하고 묻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줄줄줄 설명이 이어졌다. 홍 반장과 김 형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와중에도 발표자의 설명을 전혀 놓치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피해자들? 한 명이 아니고?”
“그게 첫 번째 피해자는 쓰레기장에서 발견된 것이 아니라 동일한 사건이라고 생각 못 했나 봐요.”
성기를 자르고 그 시체를 숨기지도 않고 쓰레기장에 버린 살인 사건. 그 내용 자체는 아주 자극적이고 엽기적인 사건이지만 사실 그 자체만 보면 그렇게 대단한 사건은 아니다. 남자의 성기가 잘린 경우 대부분 치정에 의한 살인 사건으로 해결되는 것이 보통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별것 아닐 수 있는 사건이 제대로 수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렇게 검경합동본부까지 꾸려진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오늘 새벽 발견된 시체와 똑같은 시체가 바로 육 개월 전에도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연쇄살인인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그것이 첫 번째도 아니었단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야?”
아직 제대로 된 현장검증도 되지 않은 상황. 그런데 비슷한 사건을 찾아냈다니. 대체 어떤 미친놈이야. 다행이라기보다는 거부감부터 들었다. 화면에서 시선을 뗀 설형이 고개를 돌려 묻자 아예 설형 쪽으로 몸을 틀고 있던 재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러니까요. 제대로 미친놈이 분명해요.”
물론 설형이 말하는 미친놈과 재민이 생각하는 미친놈은 전혀 다른 대상이었지만.
“왜 그러십니까?”
뒤늦게 한심해하는 설형의 시선을 알아차린 재민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물론 그런 오해를 친절하게 풀어 줄 설형이 아니었지만. 말하기도 입 아프다는 듯 고개를 바로 하는 설형을 풀죽은 강아지 같은 눈으로 보던 재민이 아, 하고 작은 소리를 냈다. 뒤늦게 설형의 질문의 의미를 깨달았던 것.
“이번 합동수사팀에 들어오신 검사님 중에 한 분이 알아내셨대요. 자신이 맡았던 사건 중에 있었던 걸 기억하신 모양이더라구요.”
“흐음.”
검사가 한 해에 맡는 사건이 몇 갠데. 그중에 별로 특별하지도 않은 사건―당시에 조용히 넘어간 것을 보면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을 기억하고 있단 말인가. 여전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묘한 소리를 내는 설형에게 재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는 기억력을 가진 엄청난 수재래요.”
그제야 조금 납득이 되었다.
“완전 찐따겠구만.”
안 봐도 뻔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설형에 좀처럼 설형의 말에 반박하지 않는 재민이 슬그머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지는 않은 것 같던데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보면 알죠.”
“그런 놈이 눈앞의 범인을 놓치냐.”
범인과 떡하니 마주쳐 놓고도 목격자인 줄 알고 놓아준 사람이 바로 재민이었다.
설형의 핀잔에 재민이 풀이 죽었다. 하지만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재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아무리 감이 떨어져도 이건 진짜 확신할 수 있어요.”
설형의 얼굴에도 의아한 기색이 번졌다.
“대체 어떤 놈이길래―.”
“아, 지금 올라오시네요. 지금 발표하러 올라오시는 저분이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으려던 그 순간, 뭔가를 발견한 재민이 손가락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자연스럽게 설형의 시선이 앞으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 사건 브리핑을 하던 발표자는 내려가고 다음 발표자가 올라오고 있었다. 저벅저벅, 모델이 런웨이를 걷는 것마냥 아름답고 여유로운 걸음으로 단상 앞으로 걸어간 남자가 정면을 보고 섰다. 수많은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었지만 그의 얼굴에서 긴장한 기색은 단 한 톨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죠? 제가 잘못 본 거 아니죠?”
꼭 귀신이라도 본 듯 눈이 휘둥그레진 채 굳어 있는 설형의 반응에 재민이 것 보라는 듯 가슴을 쭉 폈다.
“저 새끼가, 검사라고?”
“검사 하기엔 아까운 얼굴이긴 하죠.”
“씨발.”
“네?”
이번에도 상황 파악을 못하고 맞장구를 치던 재민이 낮게 욕설을 내뱉는 설형의 반응을 보고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물론 이미 늦었지만.
“나 나가 있을 테니까 끝나면 전화로 보고해.”
“네, 네?!”
재민이 그 말뜻을 제대로 이해했을 때는 이미 할 말을 마친 설형이 뒤돌아선 뒤였다.
마치 누군가에게 자신의 얼굴을 숨기기라도 하듯 고개를 푹 숙인 설형이 문 쪽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앞을 막아선 김 형사가 아니었다면.
“또 어딜 가시려구요. 백 형사님 또 사라지신 거 알면 저희 완전 반장님한테 죽어요.”
밝은 데서 마주쳐도 깜짝깜짝 놀라는 그 얼굴을 어둠 속에서―심지어 얼굴의 반은 푸른 스크린 조명을 받고 반은 시커멓게 그늘진 얼굴이었다.―마주하는 것은 순간적으로 오줌을 지릴 만큼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설형은 짜증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것이 고작이지만.
“어디 안 가고 여기 근처에 있는다니까?”
설형이 최대한 소리를 죽여 속삭였다. 평소라면 말리든 말든 가 버렸겠지만 지금은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다. 목소리를 죽인 대신 비키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정으로 전달했다. 하지만 김 형사도 이번에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는지 두 다리로 버티고 선 채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안 속습니다.”
설형의 얼굴이 확 찌푸려졌다. 하지만 소란을 피우지 않고 김 형사를 통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미 이렇게 마주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주변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설형이 작은 키는 아니지만 눈에 띄지 않으려고 몸까지 구부정하게 구부린 채라 두 사람의 덩치 차이는 더 커 보였다. 그러니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곰 같은 덩치의 김 형사가 설형을 괴롭히고 있는 장면처럼 보이기도 했다.
“거짓말 아니라니―.”
성질을 죽이고 어금니를 꽉 깨문 설형이 한마디 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였다.
“거기 두 분.”
―!
순간 마이크를 타고 울려 퍼진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김 형사와 달리 설형은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무슨 문제라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로 쏟아졌다.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김 형사에게 곧바로 얼음장 같은 지적이 날아들었다.
“네, 지금 두리번거리시는 분 말입니다.”
김 형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죄송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김 형사에 대충 상황을 알아차린 사람들은 이내 흥미를 잃고 자세를 바로 했다. 하지만 지적을 한 검사는 그 정도로 끝낼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소속이?”
오히려 더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는 듯 두 사람에게 고정된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서부경찰서 강력 3팀 김욱 형삽니다.”
“다른 분은?”
“…….”
이번엔 바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벽 쪽으로 돌리고 있는 설형을 의아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김 형사가 대신해서 입을 열었다.
“저와 같은―.”
“본인은 입이 없습니까?”
“…….”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지였다. 흥미를 잃었던 사람들도 다시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설형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바로 했다. 하지만 그렇게 각오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자신을 보는 상대의 눈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어라?
돌덩이라도 보고 있는 것 같은 무심한 그 눈동자에 오히려 당황한 쪽은 설형이었다.
설마 못 알아보는 건가?
뒤늦게 깨달은 설형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서 있는 곳은 어두워서 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설형의 굳어 있던 표정이 조금 가벼워졌다. 아무래도 잘나신 검사님이 자신이 발표를 하는데 떠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니 지금 해야 할 일은 최대한 납작 엎드려 그가 시키는 대로 해 주고 자신에게서 흥미를 잃게 하는 것이었다.
“서부경찰서 강력3팀 백설형 형삽니다.”
설형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다. 하지만 관등성명을 대며 정면에 선 이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 설형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좆됐다.
마치 먹잇감이 제 옆에 올 때까지 죽은 척하고 있던 독사가 한입에 먹잇감을 삼키듯 제 이름이 나오는 순간 거짓말처럼 남자의 눈동자가 변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아주 찰나와도 같은 순간이었지만 설형은 분명히 보았다.
그것은 분명 먹잇감을 삼킨 맹수의 만족스러운 미소였다.
♖
“아주 자알 하는 짓이다.”
홍 반장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두 손을 등 뒤로 모은 채 벌을 서듯 서 있던 김 형사가 고개를 푹 떨궜다. 물론 김 형사와 나란히 선 설형은 반성은커녕 오히려 이런 잔소리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상사말을 개똥으로 알고 지각을 하지 않나. 지들끼리 싸우다가 검사한테 걸려서 팀 망신을 시키질 않나. 니들이 무슨 국민 학생이냐?!”
그러다 한마디 한 것이 바로 이것.
“국민학교가 아니라 초등학굔데요.”
“이걸 콱마.”
결국 화를 참지 못한 홍 반장이 손을 치켜 올렸다. 사실 지금까지 참은 것도 많이 참았다. 뒤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재민이 치켜 올라가는 손에 황급히 매달렸다.
“바, 반장님, 참으세요. 여긴 우리 서도 아닌데 폭력을 휘두르시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뭐라고 하긴. 아주 저 팀 잘 굴러간다고 하겠지. 내가 진짜, 더 팔릴 쪽도 없다.”
더 팔릴 쪽이 없다고 하면서도 그래도 보는 눈이 신경쓰이기는 했는지 치켜 올렸던 손을 못이기는 척 내렸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빨리―.”
“넵, 그럼.”
더 말하는 것도 짜증난다는 듯 휘휘, 손을 내젓는 홍 반장에 설형의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 냉큼 걸음을 내딛었다. 하지만 그 걸음은 한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 섰다.
꿱―.
하는 꼴사나운 소리와 함께.
“어디 가.”
홍 반장의 험악한 목소리에 졸린 목을 문지르던 설형이 되물었다.
“빨리 꺼지라고 하시려던 거 아니에요?”
“그거야 그렇지.”
“그래서 빨리 현장으로 꺼져 드리려고 그랬죠.”
그러니까 이제 이것 좀. 붙잡고 있는 옷을 그만 놓아달라는 제스처를 보냈지만 홍 반장은 여전히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오히려 손아귀에 힘을 주어 설형의 몸을 뒤돌아서게 만들었다.
“빨리 꺼지는 건 맞는데, 저쪽이 아니라 이쪽이야.”
“이쪽은 합동 본부 사무실인데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고 계시냐는 듯 홍 반장이 가리킨 곳의 정식 명칭을 댔지만 홍 반장은 태연했다.
“알아.”
“저 조금 전에 저기서 쫓겨났는데요.”
브리핑 따위 듣고 싶지 않은 것 같으니까 그만 나가 보시라고, 아주 정중한 말투였지만 결론은 분위기 망치지 말고 꺼지라는 말이었다. 바라던 대로 됐지만 내 발로 나오는 것과 남에게 쫓겨나는 것은 완전 달랐다. 이미 들킨 마당에 나가는 것이 큰 의미도 없고.
아무튼 그렇게 공개적으로 쫓겨난 사람에게 다시 저길 들어가라니. 직접 혼을 못 내시니 새로 개발한 갈굼 방법이신가. 영문을 몰라 눈만 껌뻑이고 있으려니 홍 반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누가 몰라?”
“모르시는 것 같으니까 하는 말이죠.”
송충이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걸 그냥 확. 입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마주한 눈에서 음성이 지원되었다. 설형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러니까 들어가서 정식으로 사과드리고 검사님 모시고 나오라고.”
“왜요?!”
시선을 피하고 있던 설형이 펄쩍 뛰었다.
“그럼 그 난리를 피워놓고 사과도 안 하려고 했냐?”
“아니 사과를 안 한다는 게 아니라, 검사를 왜 데리고 나와야 하냐고요.”
“왜긴 왜야. 현장에 함께 가셔야 하니까지. 아까 못 들었어?”
“못 들었는데요?!”
“쫓겨나셔서 못 들으셨잖아요.”
“아.”
재민의 속삭이는 말을 듣고서야 홍 반장도 조금 전까지 설형이 그곳에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오늘부터 검경 합동 수사팀이 꾸려질 거고 우리 팀도 합류할 거야. 너 쫓아낸 검사님 알지?”
모를 리가 있나. 어쩐지 엄습하는 불길한 예감에 설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홍 반장도 대답을 바라고 물은 질문은 아니었던 터라 그대로 뒷말을 이었다.
“앞으로 우리 팀이 보좌할 검사님이 바로 그 검사님이고.”
불길한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고 했던가. 설형의 표정은 구겨진 종이처럼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것을 본 홍 반장이 츳, 하고 혀를 찼다.
“그러니까 네가 들어가서 모시고 나오라고. 앞으로 계속 찍힌 채로 있을 거 아니면.”
말투는 퉁명스러워도 결국 설형을 생각해서 시킨 일이었다. 다른 때라면 분명 그런 홍 반장의 배려가 고마웠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아니었다. 설형이 불퉁하게 입을 열었다.
“전 찍힌 채로 있어도 상관없는데요.”
진심이었다. 무엇보다 상대가 그 미친놈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홍 반장에게는 그런 설형의 태도가 자신에게 반항하려는 태도로 보였다.
“콱마!”
홍 반장의 손이 다시 한 번 위로 치켜 올라갔다. 물론 그 손이 정말 설형을 향해 내려오는 일은 없었다. 매번 홍 반장을 말리는 팀원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주먹을 치켜 올린 홍 반장의 모습은 지나치게 험악해 보였고 그 앞에선 백설형은 유난히 청초해서,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꼭 불량배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아가씨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보인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어휴. 이걸 그냥.”
늘 그렇듯 홍 반장이 차마 치지는 못하고 치켜 올린 손을 조금 흔들었을 때였다.
“그만하시죠.”
그 순간 누군가가 턱, 하고 홍 반장의 손목을 붙잡았다.
“기강 잡는 걸 제가 뭐랄 일은 아닙니다만, 여기서 이러시면 제가 시켜서 이러시는 것 같지 않겠습니까.”
뒤돌아보기도 전에 머리 뒤편에서 들려온 나직한 목소리. 높낮이가 없는 담담한 말투였지만 홍 반장은 이상하게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뒤편에 서 있던 상대가 손목을 놓고 물러섰다. 천천히 홍 반장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곧바로 뒤에 서 있던 이와 눈이 마주쳤다. 놀랍게도 홍 반장의 손목을 붙잡은 이는 바로 도강우 검사였다.
이것 봐라.
사실 현역에서 물러났다고 해도 아직 팔 힘만큼은 젊은 형사들과 견주어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고 장담하고 있던 홍 반장이었다. 그런데 조금 전 그의 손에서 전혀 벗어날 수가 없었다. 다소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때까지도 욱신거리는 팔목을 물끄러미 보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아직도 경찰에서는 기강 잡는데 폭력을 씁니까?”
“네? 그럴 리가요!”
담담하게 중얼거리는 도강우에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든 홍 반장이 두 손을 내저으며 부인했다. 하지만 곧 손을 내뻗은 자세 그대로 굳었다.
조금 전 도강우에게 치켜 올렸던 팔을 붙잡혔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 아차, 싶어진 홍 반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이건, 정말 때리려고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시늉만―.”
“제가 좀 맞을 짓을 해서요.”
그때까지 도강우와는 시선도 맞추지 않고 있던 설형이 불쑥 끼어들었다. 홍 반장을 향하고 있던 시선이 그 어깨 너머로 움직였다. 허공에서 시선이 맞부딪혔다.
“그렇습니까?”
“네.”
흥미롭다는 듯 되묻는 도강우에 설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뒷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괜히 남의 일에 끼어―, 악!”
하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홍 반장의 주먹이 설형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결국 도강우가 기껏 끼어들어 말린 의미가 전혀 없어져 버렸다.
“임마! 너 도와주신 분한테 고맙다는 말은 못할망정 무슨 말버릇이야!”
“저 지금 반장님 편들어 드린 거거든요?”
얼얼한 뒤통수를 문지르며 어이없어하는 설형에도 홍 반장은 태연했다.
“누가 너더러 편들어 달래?! 얼른 검사님께 사과부터 드려.”
반항할 틈도 없이 홍 반장은 설형의 목덜미를 붙잡은 채 꾸벅 자신도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놈이 좀 이상한 짓을 하기는 해도 개념이 없는 놈은 아닌데 아무래도 어제 뭘 잘못 먹은 모양입니다. 다 팀원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한 제 책임입니다. 아무쪼록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반장님!”
설형이 반항하듯 홍 반장을 크게 불렀지만 홍 반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너도 얼른 사과드리지 않고 뭐하고 있어.”
“…….”
오히려 너도 빨리 사과하라고 눈을 부라린다. 설형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결국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물론 홍 반장의 협박이 무서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괜히 저 때문에 홍 반장이 다시 고개를 숙이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물론 예의상으로라도 괜찮다거나, 신경쓸 것 없다는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범인 잡는 실력만큼은 저희 팀, 아니 저희 서를 통틀어 이놈 따라올 놈이 없답니다.”
“그렇습니까?”
전혀 의외라는 반응. 흘끔, 검은 눈동자가 설형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사실입니다.”
하. 사람을 앞에 두고 대놓고 뒷담을 까는 두 사람에 설형이 기가 막힌다는 듯 입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물론 그런 설형의 반응에 눈 하나 깜짝할 홍 반장이 아니었지만.
“현장으로 바로 가 보실 거죠?”
그렇게 묻는 홍 반장에 도강우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예정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있었다.
“그러죠.”
“여기 백 형사가 잘 모실 겁니다.”
“네?!”
그냥 두 사람의 대화를 무시하려고 한 발 뒤로 물러서 있던 설형이지만 지금의 말은 그럴 수가 없었다. 설형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제가요?!”
“그럼 이 나이에 내가 하리?”
“김 형사도 있는데요.”
흘끔, 홍 반장의 시선이 잠시 잊혀졌던 김 형사에게 닿았다. 반색을 한 김 형사가 한 발 앞으로 나섰지만 홍 반장은 영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곧바로 시선을 거뒀다.
“너 현장도 미리 갔다 왔다며.”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한 번 갔다 온 곳이니까 네가 더 잘 보여드릴 수 있을 거 아니야.”
“하.”
말도 안 되는 논리에 설형이 기가 막힌다는 듯 입으로 웃었다.
“현장이 무슨 꽃놀이 장솝니까? 잘 보여드리고 말고 하게?”
“콱마. 그냥 하라면 하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반장 말이 아주 우습지?”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범인 좀 잘 잡는다고 오냐오냐 해 줬더니 이젠 아주 눈에 보이는 게 없지? 그렇게 상명하복 다 무시하고 건방지게 굴 거면 차라리 네가 반장 해. 아이구 백 반장님―.”
“알았어요. 하면 되잖아요. 하면.”
“……정말이지?”
“…….”
점퍼 호주머니에 손을 푹 집어넣은 설형이 대꾸도 하지 않고 걸음을 내딛었다. 무시한 걸로 치면 지금이 더 무시당한 꼴이 되었지만 홍 반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걸어가는 설형의 뒷모습을 보는 홍 반장의 입꼬리는 위를 향해 있었다.
하지만 곧 뒤로 물러서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도강우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입꼬리는 단숨에 아래로 끌어내려졌다.
“저래 보여도 일 하나는 잘합니다.”
괜스레 민망해진 홍 반장이 변명하듯 말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벌써 저만치 멀어진, 설형의 뒷모습에 흘끔 시선을 주었던 도강우가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두고 보면 알겠죠.”
그렇게 홍 반장의 말을 일축한 도강우가 발길을 돌렸다. 느릿해 보이는 걸음이었지만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반장님. 우리도 현장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두 사람이 복도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재민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렇지.”
긍정적인 대답을 들었지만 오히려 의문은 늘었다.
“그런데 굳이 왜…….”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홍 반장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현장에 기자들이 쫙 깔렸을 것 아니야.”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입니까?”
“이왕 찍히는 거 그림이 예쁘면 좋잖아.”
“그림이요? 무슨―, 아.”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던 재민도 뭔가를 알아차린 듯 작은 소리를 냈다.
“설마.”
“그래. 가뜩이나 경찰 이미지가 안 좋으니 이렇게라도 포장 좀 하라는 서장님 지시다.”
그러니까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있던 무능한 검경의 이미지를 훈남 검사와 미모의 형사를 내세워 세탁해 보겠다는 꼼수였다.
“에이, 그게 무슨―.”
그게 무슨 포장이 되겠냐고, 반박하려던 재민도 조금 전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던 장면을 떠올리고 이내 입을 다물었다. 괜히 경찰 홍보대사에 잘생긴 연예인을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게 된 재민이었다.
“내 차로 가죠.”
삑. 말과 동시에 강우가 차키로 잠금장치를 풀었다. 별 생각 없이 자신의 차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설형이 방향을 틀었다. 할 말은 많았지만 이런 일로 부딪히고 싶지 않아 그냥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라이트가 들어온 차를 보는 순간 설형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췄지만 앞서서 걷던 강우는 알지 못했다.
“왜 그럽니까.”
막 차문을 열고 차에 올라타려던 그때서야 강우는 설형이 걸음을 멈추고 서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안 그래도 사람들 눈이란 눈은 다 몰릴 텐데 그걸로 부족해서 더 모으시려구요?”
“……아.”
처음엔 영문을 몰라 하던 강우도 뒤늦게 설형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포르쉐 정도면 모를까 이 정도는 관심 축에도 못 낍니다만.”
“검사님 사는 동네에서는 그 정도가 별거 아닌지 몰라도, 사건현장에 그 정도 되는 고급 외제차가 등장하는 건 나 높으신 양반입네, 광고하는 거나 마찬가지라서요. 기자가 몰리는 건 사양입니다만.”
“…….”
탁.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침묵하던 강우가 이내 열었던 문을 도로 닫았다.
“생각이 짧았군요.”
“…….”
“차 어딨습니까?”
“…….”
쳇.
내심 그럼 따로 움직이자는 말을 기대했던 설형이 속으로 혀를 찼다. 물론 겉으로는 태연한 얼굴로 방향을 틀었다. 그런 설형을 따라 이번엔 강우가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곧 그 걸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춰 섰다.
“시선을 끄는 걸로 치면 이쪽이 오히려 더 끌지 않겠습니까?”
“…….”
막 차문을 열던 설형이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굴러가긴 하는 겁니까?”
“잘만 굴러갑니다.”
차문이 떨어져나간 적은 있어도 길에서 퍼진 적은 없으니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설형이 운전석에 올랐다.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지만 강우도 반쯤 포기한 얼굴로 차문을 열었다. 그리고 곧 난관에 봉착했다.
“아, 잠시만요.”
강우의 시선을 느낀 설형이 급히 옆좌석을 치웠다. 정리라고는 해도 사실 앞좌석에 있던 서류나 잡동사니들을 뒷좌석으로 옮기는 것뿐이었지만. 먹다 남은 빵 봉지까지 그대로 뒷좌석으로 내던져 버리는 설형의 행동에 강우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다. 하지만 설형은 태연했다.
“이제 타세요.”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이번에도 강우는 말없이 차에 올랐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안전벨트를 하려고 벨트를 잡아당겼을 때였다.
“그거!”
눈이 휘둥그레진 설형이 급히 손을 내뻗었지만 이미 늦었다. 벨트를 당기는 순간 팍 하고 쏟아져 나온 먼지가 뿌옇게 시야를 가렸다.
지―잉―.
도강우가 붙잡고 있던 벨트를 놓고 조용히 창문을 내렸다. 당황해서 굳어 있던 설형도 제 쪽 창문을 내렸다. 차가운 공기가 확 끼쳐 들어왔다.
“그러게 왜 물어보지도 않고 함부로 벨트를 하고 그러십니까.”
민망한 마음에 괜히 투덜거리자 도강우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
“벨트 하는 것도 물어보고 해야 하는 건지 미처 몰라서요.”
“…….”
대꾸할 말이 없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던 설형의 눈에 뭔가가 포착되었다.
“거기, 어깨.”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강우도 흘끔 자신의 어깨를 확인했다. 그리고 자신의 어깨에 묻은 얼룩을 발견하고 손으로 툭툭 털어 보지만 검은 자국은 고스란히 남았다. 하필 입은 코트 색도 밝은 카멜색이라 검은 얼룩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그거 좀 비싼 코트 같은데.”
“아니요.”
“…….”
“좀이 아니라 많이 비쌉니다.”
아, 네.
웬일로 정상인처럼 배려도 해 주나 했더니 그럼 그렇지. 속으로 투덜거린 설형이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세탁비 드릴게요.”
“이거 캐시미어 100프로 코트라 세탁비도 비쌉니다만.”
대놓고 무시하는 발언에 막 시동을 걸던 설형이 차 핸들을 놓았다. 그리고 점퍼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며 물었다.
“얼만데요. 뭐, 돈 십 만원합니까?”
“네.”
호기롭게 꺼낸 지갑 안에서 돈을 꺼내려던 설형이 순간 멈칫했다.
“뭐가 그렇게 비쌉니까?”
“그래서 비싸다고 말했잖아요.”
“…….”
“안 줍니까?”
지갑을 벌린 채 미동이 없는 설형에게 강우가 재촉하듯 물었다. 물론 강우는 재촉할 의도가 없었지만 설형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하지만 호기롭게 지갑을 꺼내든 것이 무색하게도 지갑에 현금이 하나도 없었다. 어제 찾아 둔 현금을 다 써 버린 것이 뒤늦게 생각났다.
“나중에 드릴게요.”
설형이 지갑을 닫으며 말했다. 그리고 지갑을 도로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휙, 하고 지갑을 낚아챈 손이 아니었다면.
“뭐하는 겁니까?”
뒤늦게 자신의 지갑이 도강우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확인한 설형이 미간을 팍 찌푸렸다. 하지만 되돌아온 대답은 더 기가 막힌 것이었다.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헐.
“그럼 뭐, 제가 설마 그 돈 떼먹고 도망이라도 칠까 봐 그러십니까?”
“그거야 모르죠.”
설형이 기가 막힌다는 듯 따져 물었지만 이번에도 도강우는 태연했다.
“저기요. 사람을 대체 뭘로 보고―.”
“도강웁니다.”
“네?”
“저기요가 아니고 도강우라고요.”
“…….”
검사만 아니면 진짜 한 대 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참은 설형이 다시 호칭을 정정해서 따져물었다.
“네, 도.검.사.님. 대체 사람을 뭘로 보고 그런 말씀 하시는 겁니까?”
“그거야 이미 한번 먹튀한 전적이 있으니 믿기 어려울 수밖에요.”
“전적이라뇨. 제가 언제―.”
순간 도강우의 말에 곧바로 반박을 하고 나섰던 설형이 그대로 하던 말을 멈추고 굳었다. 한 박자 늦게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이제 기억났습니까?”
“…….”
대답은 없었지만 사실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주한 눈이 빙그레 웃었다. 쫓겨나기 직전 보았던 바로 그 눈이었다.
역시 자신의 착각이 아니었다. 사실 그 눈빛을 본 직후 곧바로 밖으로 쫓겨났고, 그 뒤에도 대면한 도강우는 전혀 그런 기색이 느껴지지 않기에 제가 잘못 본 것이라고 그렇게 결론지었다. 그러니 도강우가 그 말을 꺼냈을 때도 바로 그 일과 연결시키지 못한 것이었고.
하지만 그렇게 의문이 풀린 것도 잠시, 다음 순간 설형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그런데 먹튀라뇨?”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많지만 일단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어보기로 했다.
“대체 누가 먹튀를 했다는 겁니까?”
“그거야 제가 샤워하는 사이에 쪽지 한 장 남기지 않고 사라진 분이 잘 아시겠죠.”
“그건 그때 전화가―, 아니 이게 문제가 아니라 먹튀라는 단어가 왜 나오냐는 말입니다. 싫다는 사람 붙들고 맘껏 욕구를 채운 쪽은 검사님 아니었습니까?”
“엄밀히 따지면 제 걸 먹은 쪽은 백설형 씨니까요.”
“먹-!”
기겁한 설형이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주변을 돌아다니는 이는 없었지만 설형은 급히 열어 두었던 창문을 올렸다.
“그리고 싫은 사람치고는 너무 많이 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중엔 엉엉 울기까지―.”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그 얘긴 그만하죠.”
마치 사건 브리핑을 하듯 담담한 어투로 음담패설을 줄줄 쏟아내는 도강우에 결국 설형이 먼저 항복을 선언했다.
오른손은 내뻗은 채 왼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한손에 쏙 들어가는 작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정작 음담패설을 줄줄 내뱉었던 도강우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한 얼굴이었지만.
“그럼 먹튀였다는 걸 인정하는 겁니까?”
“하지만 이건 확실히 하죠. 튄 게 아니라 그때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연락을 받아서 급히 나가느라 그런 겁니다.”
“만약 그 연락을 받지 않았으면 그냥 그렇게 가 버리지 않았을 거라는 겁니까?”
“…….”
그냥 둘러대면 될 것을 또 거짓말은 못하는 설형이다.
“원래 원나잇이 그런 것 아닙니까.”
억울한 기분에 휩싸인 설형이 따지고 들었다. 물론 본전도 못 찾았지만.
“그러니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아주 상습범이었군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근데 대체 제가 왜 이런 변명을 하고 있는 겁니까?”
“누가 변명하라고 했습니까?”
“그거야! ……아니죠.”
그의 말대로 그런 적은 없었다. 그냥 그런 뉘앙스만 조금 풍겼을 뿐. 거기에 정신없이 휘둘린 건 자신이었다. 얼굴로 검사가 된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백설형 형사를 믿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는 말이죠.”
“…….”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왜 이 이야기가 나온 것인지도 잊고 있었다. 이상하게 이 사람과 대화를 하다 보면 그렇게 되었다.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고, 그러다 보니 자꾸만 자신의 페이스를 잃고 흥분하게 된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때까지 이건 담보로 맡아 두죠.”
들고 있던 지갑을 흔들어 보인 강우가 그것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할 말이 많았지만 설형은 입술을 꾹 닫았다. 또 페이스를 잃는 건 사양이다. 그냥 빨리 돈을 찾아서 주고 지갑을 돌려받으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설형이 가볍게 액셀을 밟았다. 생각보다 부드럽게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