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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되풀이되는이야기 (13/13)

13. 되풀이되는이야기

사람은 정말 이기적인 동물이었다. 마음속으로는 안 된다고 외치고 있지만, 몸은 어쩔 수 없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욕구에 충실했다.

우겸이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한데도, 사심을 채우려고 꾸역꾸역 몸을 섞었다. 다음 날 우겸이 이 행동을 잊는 것이 싫어 일부러 피까지 내었다. 심지어 안에 얼마나 사정했는지, 가만히 있는데도 하얀 액체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몇 년 동안 우겸의 주위를 참고, 배회하던 것을 하루 만에 풀어냈던 것 같았다.

축 늘어진 우겸의 몸을 보고 넋을 놨다. 제가 생각해도 미친놈이 분명했고,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른 것 같았다. 또다시 우겸이 저로 인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짐승보다 못한 짓을 한 것 같았다.

‘미안, 미안해. 우겸아.’

우겸을 닦아줄 여유도 없었다. 옆에 더 있으면, 또 건드렸을 것이다. 침대 주위를 두리번거려 옷을 챙겨 거실로 나갔다. 우겸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옷을 입고 집 밖을 나왔다.

신이 있다면 구원은커녕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

정처 없이 길을 걸으며,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고민했다. 모른 척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갈까.

아니다, 가만히 있던 고개가 절로 양옆으로 저어졌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매일같이 억누른 것을 드디어 맛보았는데, 어떻게 모른 척하고 넘어가겠는가. 원래 처음이 어렵고, 그 뒤는 쉬운 법이었다. 다시금 제 마음속에 있는 욕심이 넘실거렸다.

이번에는 예전과 상황이 달랐다. 항상 들이대고 꼬셨던 것은 자신이었는데, 어떻게 보면 이번에는 우겸이 먼저 손을 내민 거였다. 애초에 첫 단추가 다르니, 결말도 다르지 않을까. 그리고 꿈에서까지 제 모습이 나온 걸 보면, 다시 만나라는 신의 계시일 수도 있었다.

규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까지 합리화하면서 우겸을 만나고 싶어 하는 제 모습이…. 깊은 한숨을 쉬고, 계속해서 길을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우겸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

  

고개를 숙였던 우겸이 천천히 머리를 들고 규영을 쳐다보았다.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며칠도 아닌 고작 하루를 떨어져 있었는데, 피부가 퍼석퍼석하고, 말이 아니었다. 눈가도 퀭한 것이 저처럼 잠을 못 잔 것 같았다.

“그런데, 저 혹시 사직서 수리되었어요?”

그 말에 무표정을 짓고 있던 규영이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하긴, 지금 이 상황에서 이걸 물어볼 거라고 누가 생각이라고 했겠는가.

“예전에 팀장님이 말한 것처럼, 팀장님이 저 먹여 살려야겠다. 맞죠.”

꺼이꺼이 웃던 규영이 웃는 것을 진정하고 말했다.

“사무실 사람들한테는 아프다고 해놨어. 그런데 그냥 그만두고 내가 쭉 먹여 살릴까? 그것도 괜찮은 것 같은데.”

우겸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러자 규영이 우겸의 양 볼을 손으로 잡고 말했다.

“원래 모든 처음이 어렵고, 그 뒤는 쉽다던데.”

“어…. 저 앞으로 정말 그만둘 생각 없는데. 정말이에요. 그리고 앞으로 집 나갈 생각도 없어요. 팀장님 옆에만 꼭 붙어있을 건데.”

“응?”

“그, 팀장님이 저번에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냥 같이 살까요?”

우겸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슬슬 피하면서 말하자, 규영이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손에 힘을 풀었다.

“너무 갑자기인가?”

규영이 또 대답하지 않고 쳐다보기만 했다. 입이 꾹 다물린 채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아무래도 꽤 고심하는 듯했다. 우겸은 가만히 앉아 규영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 싫으시면 다음에 같이 살고….”

규영이 볼에 살짝 입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슨 할 말이 있는 듯 뚫어져라 쳐다봤다. 항상 입을 맞추기 전에 이렇게 노골적으로 쳐다봤었는데, 오늘은 뭔가 부끄러웠다. 고개를 돌려 괜히 집 안을 두리번거렸다.

“일단 씻을까?”

“…어.”

규영이 보기에도 꼬질꼬질했나…. 다른 걸 할 줄 알고 괜히 기대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말에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네.”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자리에서 서둘러 일어났다.

  

***

  

평소와 다를 것 없이 규영이 욕조에 물을 받아놨다.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고작 하루 집을 떠난 건데, 그 하루가 너무 다사다난했다. 따뜻한 물 덕에 몸이 점점 나른해졌다. 규영에게 몸을 최대한 기대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점점 눈이 무거워질 만했다. 머리를 뒤로 쓰다듬으면서 아이처럼 장난치는 규영의 손길이 한몫했기 때문이다.

“졸리면 그만 씻을까?”

몸이 축 늘어진 걸 느껴졌는지, 규영이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만지는 게 오늘따라 왜 이렇게 좋은 걸까. 평소 같으면 싫다고 했을 법도 한데, 괜히 어리광을 부렸다.

“더 만져주세요.”

“응?”

규영이 작게 웃었다. 우겸의 머리에 샴푸를 뿌린 다음, 미용실에서 감겨주는 것보다 더 꼼꼼하게 머리를 문질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목 언저리로 손이 내려왔다. 피로가 풀리라고 주물러주는 것 같은데, 시원함보다는 간지러움에 어깨가 절로 올라갔다.

“…으.”

“간지러워?”

우겸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앞으로 피했다.

“내가 머리 만지면서 생각해 봤는데, 머리 짧게 깎아도 귀엽겠다. 어때?”

“갑자기요?”

“응. 밤톨 같고 귀여울 것 같은데. 한 번만 잘라보면 안 돼?”

우겸이 몸을 뒤로 돌려 규영을 쳐다봤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너무 정성스럽게 했다. 제 나이 스물아홉에 무슨…. 눈을 살짝 흘기며, 말을 돌리려고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생각해 보니까, 저 오늘 밥 한 끼도 안 먹었어요.”

규영이 놀란 눈을 하며, 홀쭉한 우겸의 배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아, 그 생각은 못 했네. 뭐 먹을래? 죽이라도 시킬까?”

“…음.”

“그리고 오늘은 푹 자고, 내일까지 쉬었으면 좋겠는데. 어때?”

우겸이 거품을 한 머리를 쓸어 올리며, 규영의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매만졌다.

“저도 그러면 좋겠지만, 그래도 저 없으면 팀장님이 혼자 일 다 하시잖아요.”

“나는 괜찮은데….”

규영이 평소보다 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우겸의 어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왜 저런 미소를 짓는지 알겠다.

방금 마주친 규영의 눈에 욕망이 일렁이는 게 보였다.

“얼른 씻고 나가요.”

또 말을 돌렸다.

  

***

  

화장실에서 나온 다음, 거실에 앉아 핸드폰을 쥐고 애플리케이션을 켰다. 평소라면 한 가지만 시켰을 법도 했는데, 종일 못 먹어서 그런가, 눈이 뱅뱅 돌아가기 시작했다. 먹고 싶은 걸 싹 다 주문했다. 일종의 보상심리일 수도 있겠다.

우겸이 주문을 다 하고, 규영을 보며 멋쩍게 웃었다.

“남으면 내일 또 먹어요.”

규영이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우겸의 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털었다.

“그런데, 저한테 화 많이 나셨어요? 문자랑 전화도 안 하고.”

“응. 그래서 혼자 서울로 갈까 했는데.”

“진짜요?”

우겸이 규영의 손을 잡고 눈을 마주쳤다. 눈동자의 흔들림이 없는걸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당황함에 눈만 동그랗게 뜨고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아이가 아니었으면, 영영 규영을 놓칠 뻔했다. 아니다. 따지고 보면 규영이 터미널까지 찾아온 거였다.

“거짓말은.”

“정말인데?”

“정말로 서울 가려고 했어요?”

규영이 대답은 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우겸은 밥을 먹는 내내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먹고 싶다고 온갖 음식을 주문했는데, 막상 시키니 음식이 하나같이 맛이 없었다. 정말 자신과 헤어질 생각을 했다니.

하긴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왜 이렇게 못 먹어.”

“그냥요, 맞다. 그 터미널에서 조금만 걸으면 바다가 나오는데, 거기서 어떤 아이를 만났거든요?”

“바다?”

규영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먹던 젓가락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저 어렸을 때랑 완전 비슷하게 생겼어요. 엄청 귀엽고, 어찌나 똑똑한지.”

“그래? 다음에 한 번 놀러 가자.”

우겸은 몇 번 더 젓가락질한 다음, 톡 튀어나온 배를 손으로 두들겼다. 더 이상 못 먹겠다는 신호였다. 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규영에게 말했다.

“제가 욕심이 과했죠.”

“아니, 욕심은 내가 더 많지.”

“에이, 팀장님이 무슨. 전 살면서 팀장님처럼 욕심 없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그래? 우겸이, 네가 그렇게 느껴서 정말 다행이다.”

규영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겸에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식탁에 있는 배달 음식들을 치웠다. 같이 산 지 몇 개월이 지나서, 손발이 꽤 착착 맞았다. 규영이 그릇을 가져오면, 우겸이 거기에 음식을 붓고 뚜껑을 닫았다. 그 행동을 여러 번 반복하자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왜?”

“그냥요. 그래서 같이 사실 거예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지금 저희 둘이 하는 행동을 보면, 부부 생활한 지 한 10년은 된 사람들 같아요.”

“집은 생각 좀 해보자.”

뚜껑을 닫던 우겸의 손이 멈칫했다. 규영의 표정을 보면 괜찮아 보였는데, 말을 저렇게 하는 걸 보면 아직 마음속에 화가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아직도 저한테 화가 안 풀리셨어요?”

“아니,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아예 여기 생활 정리하고 서울로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그러면 누나도 자주 보고, 괜찮지 않을까?”

눈을 마주치고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하니, 뭔가 홀리는 기분이었다. 예전 같으면 단번에 싫다고 했을 법도 한데, 오늘은 그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최근에 우리가 맹장이 터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수술도 잘 받고 지금은 무탈했다. 그렇다고 한들 아예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다. 그리고 장애물인 규영의 약혼자는 뭐, 규영의 말대로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라 서울에 가서 같이 살아도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서울 가서는 같이 살 거예요?”

“음….”

우겸이 살짝 뒤꿈치를 들어 규영에게 입을 맞췄다.

“이래도 싫어요?”

“응. 한 번 더 해줘. 그럼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우겸이 코웃음을 치며, 규영에게 또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양 볼을 꾹 눌러, 장난스럽게 쪽쪽 거리였다. 그러다 둘 다 중심을 잃고 의자에 넘어지듯 않았다.

그 모습에 서로 놀란 눈을 하고 집이 떠나가도록 웃었다.

  

***

  

규영과 나란히 누워 어제 하루 잤던 모텔에 대해 무용담처럼 이야기를 늘어트렸다.

“그러니까, 집을 갑자기 왜 나가서.”

규영이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며, 우겸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그런 의미로, 머리 한 번만 짧게 잘라주면 안 돼? 오랜만에 한번 보고 싶다.”

“아니…. …형. 잘자.”

우겸이 등을 돌린 다음 눈을 감았다. 조만간 한 번 규영에 손에 이끌려 미용실에 갈 것 같았다. 자기 전까지 머리를 짧게 잘라달라고 타령할 줄은 몰랐다.

어?

“그런데, 왜 오랜만이에요? 저희가 예전에 본 적이 있어요?”

“어? 아….”

등을 돌려, 규영의 눈을 지나치게 뚫어지라 바라봤다. 뭔가 찔리는 게 있는지 눈을 뜨지도 않고 꾹 감은 상태였다.

“뭔가, 수상한대.”

“…아. 아냐. 그냥 말이 잘못 나온 거야.”

“거짓말 같은데.”

“진짜, 정말이에요. 응? 얼른 자자. 내일 출근도 해야 하니까.”

규영이 제 몸을 팔과 다리로 감싸 안았다. 꼼짝없이 안겨서 계속 규영에게 말을 걸었다.

“막, 저 어렸을 때부터 따라다니시고 그런 건 아니죠?”

“에이, 설마.”

한술 더 떠서 뒤통수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항상 잠이 안 오면 알아서 규영이 했던 행동이었다. 신기하게 머리를 만지면 수면제를 먹은 것처럼 눈이 스륵 감겼다.

뭔가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뭔지는 모르겠고. 강아지라도 된 듯 규영의 목덜미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바디워시 향만 날뿐, 좋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밤톨 머리였던 걸 알아요.”

“우겸아, 이력서에 군대 갔다 왔다고 썼잖아. 그래서 그런 거지. 얼른 자자. 형, 졸려. 어제 누가 속 썩이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어.”

“정말 수상해. 눈도 못 마주치고.”

“….”

그 이후로 규영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졸린 건 거짓말이 아니었는지, 금세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색색거리며 자는 모습을 차마 깨울 수는 없었다. 규영의 말대로 자신 때문에 밤새 잠도 못 잤을 테니, 깨우면 그게 사람인가. 양심은 있었다.

우겸은 숨소리를 죽이고 제 앞에 있는 규영의 얼굴을 요목조목 뜯어봤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인상도 좋아진 것 같고. 하긴, 처음에는…. 다시 떠올리기는 싫은 정도였다.

어떻게 지금 같은 침대에 누워있는 건지, 세상일은 정말 모를 일이었다. 자는 규영의 반들반들한 얼굴을 손으로 콕 찔렀다. 정말 자는지 미동도 없었다.

규영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수줍은 표정을 짓고 작게 속삭였다.

“잘자, 형.”

우겸이 몸을 돌려 눈을 감았다. 오늘 터미널에 규영이 오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침대에 나란히 누웠을까 싶고. 어떻게 보면 제 뒤를 감시한 게 다 쓰임새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드라마 주인공도 아니고…. 내일은….

조금 시간이 지나자, 규영이 눈을 천천히 떴다. 입을 살짝 벌리고 자는 우겸의 모습을 보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너무나도 행복한 사람처럼 보였다.

규영이 침대에서 일어나 옆에 서랍장으로 걸어갔다. 넓은 어깨를 움츠리면서 조용히 서랍 안에서 사부작거리며 꺼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작은 물체가 반짝거리며 빛이 났다.

  

***

  

고작 하루 쉰 거였는데, 일이 꽤 밀려있었다. 결국 오전 내내 일에 빠져 살았다. 사무실 사람들은 얼굴을 보자마자 얼마나 심한 감기에 걸렸으면 얼굴이 퉁퉁 부었냐고 말했다.

“병원은 갔어? 우겸 씨 정말 실연당한 거 아니지?”

장난스럽게 묻는 말에 우겸이 웃기만 했다. 혼자만의 실연이 맞긴 했다. 희영의 말이 다 틀린 건 아니었기에, 살짝 미소만 지었다.

“내가 우리 동네에 용한 한의원 아는 곳 있는데 소개라도 시켜줄까?”

“아, 아뇨. 괜찮아요. 원래 밥이 보약이라고 하잖아요.”

희영이 알려준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규영과 대판 싸웠다. 이번에 한의원까지 간다면 그때는 정말 헤어질 수도 있겠다는 상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눈을 질끈 감고, 서둘러 사무실로 걸었다.

“아니면 내가 여자 소개해 줄까?”

“네? 아뇨, 아뇨.”

손사래를 치며 질색했다. 이 이야기를 규영이 있을 때 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사무실이 또 한 번 뒤집힐 뻔했다.

“뭐가 아니에요?”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에 우겸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뒤를 돌았다. 순간 팔에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가만 보면, 이럴 때마다 규영이 항상 제 앞에 나타나는 게 이상하다 했었다. 그런데 어제 제 뒤에 사람을 붙였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회사에서도 그랬을 수도 있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지금도 갑자기 뒤에서 튀어나온 게 수상했다.

“아니, 우겸 씨가 많이 외로운 것 같아서, 여자라도 소개해 줄까 했죠.”

규영이 사람 좋은 척 입꼬리만 올리고 또박, 또박 말을 하나씩 내뱉었다.

“아, 우겸 씨가 외롭대요? 그렇구나, 난 그건 또 몰랐네.”

“내 후배 중에….”

그때 우겸이 희영의 말을 끊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사실 여자친구 있어요.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어머, 정말? 거짓말 아니고?”

우겸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렇다고 남자친구라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규영과 눈을 몇 번 마주치며 동태를 살폈다.

“하긴, 우겸 씨 여자친구, 저도 몇 번 보긴 했는데, 되게 사람이 좋아 보이더라고요.”

규영이 희영을 향해 미소를 띠며 아는 척을 했다. 침 하나 바르지 않고 저렇게 말할 수도 있구나….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여자친구라고 하면서 말하는 걸 보니 괜히 웃음이 났다.

“정말요? 우겸 씨. 언제 한 번 사무실에 데리고 와 봐. 응?”

“하, 하하. 여자친구가 좋아할지 모르겠네요.”

우겸이 멋쩍게 웃으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규영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가? 그래도 한번 말은 해봐요. 여자친구가 또 좋아할지 어떻게 알아요.”

  

***

  

둘이서 차를 타고 미팅하러 가는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동안 규영 혼자 바삐 일하느라, 저는 사무실에서 서류 작업만 했다.

“그런데 아까 왜 자꾸 그러셨어요? 그러다가 희영 대리님이 데리고 오라 하면 어떡해요.”

“그런가?”

규영이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얼른 잡으라는 듯 손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쥐었다, 폈다가, 계속 움직였다. 우겸은 기분 좋게 웃으며,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런데 누나가 약간 눈치챈 것 같아요.”

“뭘? 가출한걸?”

우겸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며칠 동안 이걸로 놀릴 셈이 분명하다. 눈을 얄팍하게 뜨고 규영을 노려봤다.

“그게 아니고, 저희같이 사는 걸 눈치챈 것 같아요.”

“아…. 그거 혹시나 누나가 오해하실 것 같아서, 보일러가 고장이 나서 너희 집에서 며칠 신세 지고 있다고는 했는데.”

“…어쩐지.”

“왜?”

규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우겸이 손을 꼬집고 크게 한마디 했다.

“누가 요즘, 이 날씨에 보일러를 틀어요.”

“어? 아니….”

“다 이유가 있었네. 그냥 일하다가 같이 잤다고 하면 될걸.”

“…내 딴에는, 그… 제일 만만한 게….”

무엇을 근거로 우리가 확신 있게 말했나 했다. 다 이유가 있었다. 가만히만 있으면 중간이라도 갈 텐데, 말도 안 되는 말을 해놓고 저렇게 당당하게 말할 줄이야.

“됐어요. 주말에 누나 얼굴 잠깐 보고 와도 돼요?”

“응. 당연하지, 같이 가자.”

“맞다. 원래 팀장님도 본가에 가신다고 했죠.”

“…응.”

우겸이 의심스러운 눈을 하고, 규영에게 재차 물었다.

“혹시 그것도 다른 이유가 있었어요? 생각해 보니까, 갑자기 본가에 간다고 해서, 그 약혼자를 만나러 가냐 싶었는데.”

“그건, 그냥 네가 살이 빠지는 것 같아서, 누나 얼굴 보고 오면 나아질까 해서 그런 거지.”

다잡고 있는 손을 툭 건들며,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규영의 말대로 처음이 어렵지, 그 뒤는 쉬웠다. 궁금한 거나 의심스러운 게 있으면 툭툭 내뱉었다. 그럴 때마다 싫다는 내색 없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해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진작 이렇게 할걸, 괜히 혼자 끙끙 앓았던 것 같았다.

오랜만에 미팅을 끝내고, 집에 가는 길에도 규영이 자꾸만 손을 만지작거렸다. 뭐, 평소에 하는 스킨십이라 그러려니 했는데, 아침부터 연신 손가락 하나하나 만져대는 탓에 점점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장님, 이러다가 저 손가락 멍들겠어요. 혹시 제 손이 통통하다고 일부러 그러시는 거예요?”

“…아, 아니. 뭘 또 통통해.”

규영이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사래를 쳤다. 저렇게 나오니 제 말이 사실이 된 것 같았다. 멀쩡한 손을 폈다가, 구부렸다가 했다.

“근데 다 이 정도 살은 있지 않나?”

“…응. 누나한테 연락해 봤어? 주말에 괜찮으시대?”

말 돌리는 걸 보니…. 뱃살은 그렇다고 해도, 손가락 살은 또 어찌 빼야 할지…. 우겸이 고개를 숙이며, 핸드폰에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 우겸아.”

“응?”

규영이 갓길에 차를 세웠다. 비상 깜빡이를 켜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사실, 어제 몰래 끼워주려고 했는데.”

“….”

“네가 주먹 쥐고 자는 바람에.”

“뭘요?”

우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 표정을 지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규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규영이 주머니 안에 손을 넣고 뭔가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가만히 손만 쳐다봤다. 달달 떨리는 손을 천천히 펼쳐서, 쥐고 있는 것을 보여주었다.

“어? 어.”

“…미안. 잘 때 몰래 끼워주려고 했는데. 너무 멋이 없지.”

규영의 얼굴을 봤다가, 반지를 봤다가, 계속 위아래로 고개를 움직였다. 지난번에 그냥 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언제 또 준비했는지 모르겠다. 분명 어제 산 건 아닐 텐데, 이것도 모르고 속을 썩이다니.

우겸의 얼굴이 울상이 되자, 규영이 서둘러 손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울지 말고. 네가 또 손가락 통통하니 뭐니, 오해할까 봐. 오늘 사무실에 여자친구도 있다고 했으니까, 끼고 다녀도 괜찮지 않을까?”

반지를 끼운 손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어… 그런데 팀장님은요?”

“회사에서 같이 끼자니 우겸이, 네가 난처해질 것 같아서.”

“조금 그렇긴 하겠죠?”

규영이 주머니 안에서 방금 저에게 끼워줬던 반지랑 색과 디자인이 다른 반지를 하나 더 꺼냈다.

“이 정도면 티 안 나겠지?”

“반지를 따로따로 사셨어요?”

“아니, 두 개 다 샀지. 우리 둘이 있을 때만 같은 거로 끼우고, 회사 갈 때는 이렇게 하자. 어때?”

우겸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살면서 처음 끼우는 커플링이었다. 반지를 보니 자꾸만 웃음이 났다. 실없이 자꾸만 미소가 지어지자, 규영 또한 제 모습을 보고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혹여 반지가 닳을까 봐 만지지도 않고 손가락만 계속 쳐다봤다. 어쩜 이렇게 예쁠까. 생각지도 못한 규영의 선물에 집에 가는 내내 마음이 붕 뜬 기분이었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더 일찍 해줄 걸 그랬네.”

“전 생각도 못 했는데.”

규영을 쳐다도 보지 않고, 반지만 보고 말했다. 아무래도 종일 반지에서 눈이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너무 좋았다.

“아니면 회사에서 일 끝나고 바로 서울로 올라갈까?”

“그래도 되죠. 아니면, 누나한테 말해서 집에서 주무실래요? 어차피 제 방도 있는데.”

“어? 그건 조금, 누나가 불편하실걸.”

“그런가.”

우겸이 핸드폰을 꺼내 아무렇지 않게 우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가자 단번에 전화를 받았다. 스피커폰 버튼을 누르고, 말했다.

“누나, 지금 전화 괜찮아?”

-응, 잠깐만.

주변에 분주한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바쁜 모양인데, 괜히 전화를 걸었나 싶었다. 옆에서 규영이 자꾸 힐끗거리며, 운전에 집중하지 못했다.

-어, 왜?

“이번 주에 누나 보러 간다고 했잖아, 내일 퇴근 후에 바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혹시 팀장님이랑 집에 같이 가도 돼?”

-어, 뭐, 상관은 없는데. 둘이 자고 가게?

“응. 누나 불편하면 따로.”

-아냐, 아냐. 누나가 불편할 게 뭐 있어.

우겸이 규영을 향해 가슴을 들이밀었다. 제 말이 맞는다는 의기양양한 표정까지 지었다.

“어, 그럼.”

-그런데 누나한테 아예 인사시키는 거야? 둘이 사귄다고?

“어? 그게 아니고? 어.”

당황한 우겸이 어쩔 줄 몰라 했다. 규영과 핸드폰을 번갈아 쳐다봤다.

전화를 대충 마무리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차 안에 공기가 무척이나 답답했다. 에어컨을 틀었는데도 얼굴에 열이 올랐다. 손으로 부채질하며, 창문을 열고 밖을 쳐다봤다.

의도치 않게 커밍아웃했다, 아니 당했다가 맞나. 거기에 너무 아무렇지 않아 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더 당황했다. 이렇게까지 깨어있는 사람이었던가?

“우겸아. 괜찮아?”

규영의 부름에 창문을 닫고, 옆을 쳐다봤다.

“…네. 팀장님은 괜찮으세요? 저는 누나가 이렇게까지 눈치가 빠른 사람인 줄 몰랐거든요.”

“내가 잘못했지, 뭐. 그런데 말 나온 김에 앞으로 평생 비밀로 할 거야? 아니면 예를 들면, 음… 사무실 사람이나, 아니면 지민 씨? 같이 회사 다녀서 그러면 내가 모르는 친구? 누구한테까지 말할 수 있어?”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을 안 해봐서…. 팀장님은요?”

“나는 저번에 집에서 약혼자니, 뭐니 해서, 너랑 사귀고 있다고 말씀드렸지?”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운전하는 규영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저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질렀다.

“미안.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지?”

우겸이 이마에 손을 올리고 올라오는 열을 식혔다.

  

***

  

평화로운 주말, 규영의 허벅다리에 누워 TV를 보고 있다. 주말에 가려고 했던 서울 나들이는 잠시 보류했다. 우리에게 갑자기 소개팅이 들어왔다나, 뭐라나. 사실 걱정이 되긴 했다. 우리의 얼굴을 마주하고 규영과 잘 지낸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겁이 났다.

“우겸아, 어제 잘 잤어?”

“네, 제가 어제 자다가 잠꼬대했어요?”

“아니….”

규영이 시선은 TV에 고정한 채, 정성스레 우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왜요?”

“이제 꿈을 안 꾸는 건가? 어제 우리 정신없이 일하느라 집에 오자마자 그냥 잤잖아. 그제도 그렇고.”

“어?”

규영의 다리에서 서둘러 얼굴을 떼고, 소파에 자리 잡고 앉았다.

“어? 그랬나?”

우겸이 미간을 찌푸리며, 곰곰이 떠올렸지만, 요 며칠 자기 전에 잠에 이기지 못해 가벼운 입맞춤만 했던 것 같았다.

규영이 마주 보고 있는 우겸의 입술에 살포시 입을 맞추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금, 품에 가두고 입을 맞춰왔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만히 있었다.

입을 벌리지 않고 꼿꼿하게 버티는데, 규영이 자신의 볼을 잡고 벌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혀를 받아들였다.

“하….”

“이제 이렇게 안 해줘도 되겠다. 맞지.”

규영이 아쉽다는 듯, 우겸의 입술을 손으로 훑었다. 저 또한 침을 꿀꺽 삼켰다. 앞으로 안 해준다는 말에 아쉬움이 역력했다. 따지고 보면 꿈 때문에 해준 것도 아니면서, 생색은.

“거짓말.”

“무슨, 내가 거짓말만 하는 사람인 줄 알겠어. 우겸아.”

우겸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전에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똑같이 따라 했다. 비록 규영처럼 아직 능숙하게는 하지 못하지만, 예전보다 서투름이 많이 나아졌다.

그 모습에 규영이 음흉하게 웃으면서, 제 몸 위로 우겸을 올렸다.

“지금 꼬시는 거야?”

“…지금도 안 해준다고 하면서, 이렇게 했잖아요. 틈만 나면 거짓말은.”

규영을 살짝 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자 제 골반을 손으로 꾹 누르며 일어서지 못하게 꽉 잡았다. 당황한 얼굴을 한 것도 잠시, 우겸이 장난이라도 치려는지, 몸을 점점 아래로 내려가서 규영의 바지 속에 손을 넣었다.

“꼬시면 넘어와 주시는 거예요?”

“…응.”

눈을 천천히 감으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바지를 벗기고, 속옷을 천천히 내렸다. 기다렸다는 듯 성기가 툭 튀어나왔다. 손으로 성기를 쥐었다가, 놓았다가, 마치 장난감처럼 주물럭거렸다. 처음부터 크기가 커 있었던 성기가 점점 딱딱하게 변했다.

이렇게 하는 게 맞나.

규영의 얼굴을 슬 보니 터질 것처럼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거기에 소리를 참기라도 하는 듯 잇새를 악문 모습이었다. 꽤 흥분되는지, 가슴이 아까보다 빠르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귀두 끝에 투명한 액체가 조금씩 흘러나왔다. 혀로 살짝씩 핥자, 규영이 큰 몸을 움찔거렸다. 허벅지의 손을 올린 다음, 꿈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그냥 입에 한 번에 다 넣었던가.

자리를 다시 잡고, 침을 꿀꺽 삼켰다. 꿈에서도 버거웠던 규영의 성기였다. 역시나 현실에서도 크기가 꽤 남다른 탓에 입안에 넣기도 전에 목이 바싹바싹 타들었다.

눈을 질끈 감고, 조심스럽게 입안에 넣었다. 그러자, 규영의 몸이 크게 움직이며 일어나려고 했다. 우겸이 손으로 규영의 허벅지를 찰싹, 소리가 나게 때렸다.

“어, 어. 하지 마, 우겸아.”

대답 대신 또 허벅지를 때린 다음, 다시 누우라는 손짓을 취했다. 규영이 안절부절못하며 어쩔 줄 몰라 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가만히, 있, 어, 봐요.”

그리고 다시 입안에 머금은 다음,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꿈에서 이러면 규영이 엄청나게 좋아했었는데, 현실에서는 움찔거리는 게 다였다. 분명 좋아했었는데….

이번에는 귀두 부분만 입에 머금은 다음, 사탕을 굴리듯 혀로 핥았다. 그러자, 아까와 다르게 몸을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흣, 잠깐, 만, 우겸… 아.”

거기에 신음까지 흘러 나왔다. 예상외의 모습에 규영의 정액을 직접 입으로 받아내고 싶었다. 우겸은 뿌리 부분을 손으로 꽉 쥔 다음, 처음 했던 거처럼 성기를 물었다. 끝까지 삼키고 싶었지만, 그건 아직 무리였고, …앞으로도 어려울 것 같았다. 최대한, 이가 닿지 않게 조심, 조심하며 천천히 빨았다.

갑자기 규영이 손으로 우겸의 머리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 잠깐, 잠깐만.”

우겸이 이를 무시하고, 더 세게 성기를 빨아댔다. 그 순간, 규영의 성기에서 정액이 울컥 나오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규영이 몸을 바들바들 떨었고, 우겸은 자신이 해냈다는 것에 기분이 좋은지 하던 행동을 계속했다.

“…읏, 이제 빼, 빼, 봐, 우겸아. 응?”

애원하는 듯 같은 말을 반복하자, 우겸이 머금고 있던 성기를 천천히 뺐다. 그리고 입안에 있는 정액을 손바닥 위에 뱉으며, 규영을 향해 씨익 웃었다.

“하? 네가 아주 미쳤지.”

반쯤 풀려있던 규영의 눈빛이 아까와 달라졌다. 우겸을 그대로 눕힌 다음, 손바닥에 있던 정액을 제 성기에 묻혔다.

“어, 어.”

규영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대로 우겸의 구멍에 천천히 밀어 넣었다. 아무리 정액을 윤활제로 쓴다고 한들 이렇게 풀지 않고 갑작스럽게 넣은 건 처음이었다. 처음 겪은 느낌에 몸이 벌벌 떨리었다. 이러다가 다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규영의 허벅지를 손으로 꽉 잡았다. 더 들어오면 큰일 날 것 같았다.

“아프기만 해? 아닐 텐데”

어찌나 규영의 힘이 센지, 허벅지를 아무리 밀어도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성기를 더 깊숙하게 밀어 넣었다.

“읏, 잠시, 잠시만요.”

규영은 우겸이 이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보였다. 이를 꽉 물고 우겸의 양손을 거칠게 잡아 머리 위로 올렸다. 그리고 몸을 숙여 허리를 단번에 쳐올렸다.

“아! 아파….”

아까보다 더 들어온 성기 덕에, 우겸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걸 본 규영이 우겸의 눈가를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우겸에게 입을 맞추며, 속도를 올렸다. 아프다는 소리 대신 잇새로 신음만 흘러나왔다.

그렇게 몇 분을 움직였을까. 서서히 규영의 움직임에 적응한 우겸이 크게 신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아까와 다르게 이상한 느낌이 자꾸 자신을 콕콕 건드렸다.

“아… 흣….”

“하….”

“그만. 응?”

“왜?”

그만 움직여달라고 울면서 애원했다. 그러나 규영은 그 말이 들리지 않는 듯, 빠르게 움직이기만 했다.

“읏…형, 형. 잠깐만.”

이렇게 정신없이 하는 게 맞을까 싶은 정도로 머릿속에 흥분만 가득했다.

“아!….”

“좋은가 보네. 안이 엄청나게 움찔거려.”

“그런 소리… 흣… 하지, 마….”

규영이 빠르게 움직이는 탓에 우겸의 신음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자기 입에서 이런 소리가 크게 나올 줄은 몰랐다. 너무 부끄러웠다. 고개를 돌려 쿠션에 얼굴을 묻고 끙끙거렸다. 아까와 다른 느낌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규영이 살짝 인상을 쓰며, 쿠션을 소파 밖으로 던졌다.

“아!”

“왜, 얼굴 가려.”

우겸은 움직임이 둔해지면서 자신에게 말을 거는 규영을 괘씸한 표정으로 올려봤다. 아무래도 변태를 잘못 건드린 것 같았다.

“….”

“부끄러워서 그래?”

눈을 마주치며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규영이었다. 우겸은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었다.

“읏….”

우겸이 대답을 안 하자 규영이 허리를 쳐올렸다. 갑작스럽게 깊게 들어온 자극 때문에 우겸은 규영의 팔을 잡고 떨기 시작했다.

“아… 잠깐… 잠… 깐만…. 형….”

“왜. 응?”

이 정도면 규영이 일부러 그러는 게 틀림없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우겸의 사정액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아!… 읏….”

분명 사정하는 걸 봤을 텐데, 규영이 빠르게 더 속도를 내었다. 말도 안 되는 자극에 미칠 지경이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우겸은 규영의 팔을 세게 잡고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우겸아. 너무 조인다. 힘 좀 풀어봐.”

규영이 움직이는 속도를 점점 줄이며, 우겸에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하….”

규영도 이내 안에 사정하는지, 움직임이 점점 둔해졌다. 그렇게 천천히 움직이다가, 우겸의 안에서 천천히 빠져나왔다.

규영은 우겸의 위에 쓰러지다시피 누우며 거친 숨을 진정시켰다. 어느 정도 진정되자, 얼굴에 쪽쪽 거리는 소리까지 내며 뽀뽀하기 시작했다.

“괜찮아?”

뭐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렇게 그만하자, 천천히 해라, 라고 할 때는 듣지도 않더니, 지금 와서 괜찮냐고 묻는 규영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표정을 굳히고 규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왜. 많이 아파? 괜찮은지 내가 한 번 볼까?”

우겸은 규영의 말에 질색하며 등을 돌렸다. 몸을 움직이자 제 구멍에서 뭔가가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 느낌에 몸을 한껏 움츠렸다.

그러자 제 뒤에 있던 규영이 갑자기 구멍에 손을 다시 넣기 시작했다.

“아! 하지 마!”

“구멍에서 자꾸….”

하다 하다 저 말을 직접 들어야 한다니…. 우겸의 얼굴색이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아직 규영의 저런 변태 같은 말이 적응되지 않았다. 항상 관계하고 나면, 꼭 저런 식으로 굴었다. 주먹을 세게 쥐고, 속으로 참을 인을 여러 번 외쳤다.

그때, 규영의 손가락보다 큰 물체가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려고 했다. 우겸이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소파 앞으로 엉금엉금 기었다.

“왜 자꾸 도망가요? 응?”

“….”

규영의 다정스러운 물음이 섬뜩하게 들렸다. 우겸이 안간힘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그대로 붙잡히고 말았다.

벽을 손으로 짚은 채 규영의 성기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관계한 탓에, 크게 무리가 없었다. 얕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내일 회사 가야 하니까, 응?”

그 말을 끝으로 규영에게 얼마나 잡아먹히었는지 모른다.

  

***

  

밤새 괴롭힌 규영 덕에 우겸은 사무실에서 빌빌대고 있다. 후회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다음부터는, 아니. 앞으로는 절대 시도도 하지 않을 것이다.

휴게실에 앉아 밖을 보고 있을 때 누가 어깨를 손으로 쳤다. 인기척이 없던 탓에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지민이 씩씩거리는 얼굴로 서 있었다.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은 있지. 너 여자친구 생겼다며?”

“어?”

아, 지민에게 말한다고 한 걸 깜빡했다. 저 못지않게 지민과 친한 희영이 진작 말했을 게 분명했는데,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인가 보네?”

지민이 왼손을 무섭도록 노려봤다.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오른손으로 왼손을 가렸다. 주변을 살피며 입을 천천히 열었다.

“그게, 내가 말하려고….”

“그니까, 언제? 내가 처음에 여자친구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에이, 설마 했는데. 그리고 다음 날 반지를 끼고 왔다고 하네? 그래서 에이, 설마. 그랬는데 며칠이 지나도 너한테 아무 말도 없고, 심지어 전화도 안 받아. 나 너무 서운하다?”

지민의 전화를 일부러 받지 않으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었다. 항상 규영과 붙어있을 시간에만 전화하니, 받을 수가 없었다. 일부러 안 받은 게 아니고 못 받은 거였다. 맨날 다음 날 왜 전화했냐고 물어봐야지, 하고 생각만 하고 정작 연락은 하지 않았다. 오늘처럼 몸이 천근만근이기에 다른 게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민이 씩씩거리며, 화를 내는 걸 보니 아무래도 조용히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우겸은 머리를 싸매고 어떻게 이걸 헤쳐 나가야 할지 생각했다.

“있지, 내가 말하려고 했는데.”

“뭐.”

“내가 요즘 정신이 없어서.”

“아, 여자친구 때문에?”

우겸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지민의 주위를 정신없이 걷고 있을 때 앞에 규영이 나타났다.

제 얼굴을 보자마자 반가운 듯 손을 흔들었지만, 그 모습을 본 우겸은 눈만 질끈 감을 뿐이었다. 첩첩산중이라는 게 이런 것인가. 한동안 안 아프던 머리가 지끈거린다.

“왜, 무슨 일 있어요?”

이쪽으로 오지 말라고 양손을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나 규영은 살짝 웃으며, 더 가까이 다가왔다.

“아, 아뇨. 별일이 아니고.”

우겸이 지민과 규영을 번갈아 보며 안절부절못한다.

“안녕하세요. 요즘 우겸 씨가 연락이 잘 안돼서요.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아…. 그거….”

규영이 아는 척하며, 지나쳐가는 지민을 붙잡아 세웠다.

“우겸 씨가 말한다, 말한다고 했는데, 아직 말을 못 했나 봐요. 저랑 같이 있을 때 지민 씨가 전화해서, 안 그래도 내가 언제 한번 말할까 했거든요.”

맙소사였다. 지민과 자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쳐다봤다. 생각지도 못한 충격 발언에 말을 덧붙이지도 못한 채 머뭇거렸다. 며칠 전에 차 안에서 누구한테까지 말할 수 있냐고 왜 물어보나 했다.

“어, 어. 그게.”

지민의 표정이 순간 달라졌다. 위로 올라갔던 눈꼬리가 아래로 내려왔고, 광대가 살짝 올라갔다. 그리고 비밀 대화라도 하는 것처럼 규영에게 몸을 가까이 붙여 말했다.

“죄송해요.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어쩐지 우겸이가 팀장님 처음 오셨을 때부터 저한테 맨날 팀장님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아, 진짜요? 무슨 이야기요? 궁금하다.”

“그건 나중에 우겸이한테 물어보세요. 그동안 제가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거 저만 아는 이야기죠? 회사에서는 절대 비밀?”

“당연하죠. 소문나면 큰일 나요.”

규영이 비밀이라고 한 번 더 신신당부하며 말했다. 그러자 지민이 입꼬리를 올리며, 어깨를 툭 쳤다.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해달라고 말을 한 다음 자리에서 떠났다. 너무 아무렇지 않아 한동안 말문이 막혔다.

“…아니.”

“응. 그런데 어차피 말해도 된다고 한 건 우겸 씨잖아요. 그때 내가 세 번이나 다시 물어봤잖아요. 정말 괜찮냐고, 혹시나 내가 나중에 말할 수도 있는데, 그것도 괜찮냐고.”

“….”

규영의 말이 다 맞았다. 어쩐지 그때 이상하리만큼 집요하게 물어본다고 했다. 아무래도 제가 걱정돼서 먼저 말을 한 게 아니고, 지민이 밤마다 전화가 오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이렇게 행동한 것 같았다. 비밀이라고 해놓고, 목소리가 진중하기는커녕, 너무 가벼웠다. 입꼬리도 슬슬 올리며 말하는 모습이 이 상황을 꽤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 눌렀다. 오랜만에 진통제를 먹어야겠다.

  

***

  

그날 밤 지민에게서 전화가 아닌 문자가 먼저 왔다.

[전화 언제 돼? 나 일하는 내내 궁금해서 일이 손에 안 잡히더라. 팀장님한테 허락받고 전화 좀 해주라. 우겸아.]

규영이 말한 게 과연 옳은 일이었을까. 아무래도 혹을 떼려다가 혹을 더 붙인 격이었다. 설거지하는 규영의 뒤에 조용히 다가갔다.

“팀장님….”

“응? 뭐 줄까?”

“아니, 지민이가 문자 왔는데, 팀장님 허락받고 전화 좀 해달라고 해서요…. 하, 아까 그렇게 말했으면 안 되는 건데.”

우겸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다.

“지금 해. 설거지할 동안 하면 되겠네.”

“그럴까요?”

“응. 여기서 스피커폰으로 켠 다음 하면 되잖아. 그건 괜찮지?”

“그냥 안 할래요….”

선뜻 규영이 하라고 할 때는 다 이유가 있었다. 스피커폰이라니, 분명 아까 지민의 말이 궁금해서 저러는 게 틀림없었다.

“저번에 누나랑은 스피커폰으로 잘만 전화해놓고. 왜, 내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라도 있어요?”

설거지하던 것을 멈추고, 몸을 돌려 저를 쳐다봤다. 아무래도 오늘은 제 명에 못 살 하루인 것 같았다.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절로 고개를 숙였다. 초조한 마음에 자꾸 움직여대는 제 발가락을 쳐다봤다.

“진짜 뭐가 있나 보네?”

“아뇨, 잠시만요. 지민이 번호가 어디 있더라.”

번호를 찾는 척 시간을 벌며, 지민에게 문자 보냈다.

[옆에 팀장님]

그리고 규영의 눈치를 보며 서둘러 전화를 거는 척했다. 스피커폰을 누르고 당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겉과 달리 속은 바싹바싹 타들어 갔다. 마른 입술을 침으로 축이며, 지민이 제발 전화를 받지 않길 기도했다.

-여보세요?

“응. 뭐 했어?”

-나 잠깐, 문자 좀. 옆에 팀장님? 어?

눈치 없는 지민의 행동에 우겸의 눈에 영혼이 점점 사라졌다. 다소곳하게 두 손을 모았다.

-아, 안녕하세요. 팀장님.

천천히 고개를 들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규영이 크게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네, 안녕하세요. 우겸이가 옆에 팀장님이 있다고 문자 보냈어요?”

-아. 네. 전 또 같이 전화하자는 걸로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그럼 저 전화 끊을까요?

“아뇨, 아뇨. 우리 둘 사이가 궁금한 거 같은데, 만난 지 얼마 안 되었고, 우겸이가 지민 씨한테는 만나고 있는 거 말해도 괜찮다고 해서.”

-아, 정말요?

전화기 너머로도 지민의 웃음기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에게 정말 비밀을 말해서 기분이 좋은 듯했다.

“그래서 말인데, 우겸이가 처음에 나 보고 무슨 이야기를 한 거예요? 우겸이한테 물어보니까 통 말을 안 해서.”

-별건 아니고, 입덕부정기 같은 거였나 봐요.

“네?”

-제가 지금 보니까, 팀장님을 처음에 보자마자 반한 것 같거든요. 저는 여기까지만 할게요. 그럼 두 분 즐겁게 지내시고, 내일 회사에서 뵐게요.

“어? 지민아.”

전화가 끊기자마자 둘만의 상황이 어색하기만 했다. 지민아….

우겸이 핸드폰을 고이 들고, 자리를 슬슬 떠나려고 규영의 눈치를 봤다.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뒤에서 목덜미가 잡히고 말았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해봐요.”

“형….”

“꼭 불리할 때만 형이라고 그러더라.”

  

***

  

결국 첫인상이 너무 강렬했다고만 말했다. 대충 이야기를 둘러대었다. 그 이상에 말을 했다가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았다. 아무래도 내일 지민을 따로 만나 입단속을 시켜야 할 것 같았다.

“수상하다?”

“형. 잘까? 오늘 일을 많이 했더니 졸리네.”

눈을 감으며 자는 척을 했다. 실눈을 뜨고 규영을 슬쩍 바라봤는데 눈이 떡하니 마주쳤다. 모른 척 등까지 돌리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렸다.

“그래도 관심은 있었나 봐, 지민 씨한테 매일같이 내 이야기를 한 걸 보면?”

“어, 그렇죠.”

규영이 생각하는 관심과 제가 생각하는 게 달라서 문제이긴 하지만. 뭐, 큰 뜻은, 같았다.

그런데 꿈은 정말 이제 안 꾸는 건가. 아니면, 요즘 몸이 피곤해서 꿈을 꾸는 데도 모르는 걸까. 갑자기 무슨 계기로 꿈을 안 꾸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동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서로의 사랑을 확인해서인가.

“풉.”

“갑자기 왜 웃어? 지민 씨한테 내 험담했지.”

“에이, 무슨. 잘자, …형.”

자꾸만 뒤에서 허리를 콕콕 찔러대는 탓에 하는 수없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규영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추고 넓은 가슴팍에 꼭 안겼다.

그럼 자신이 공주님이고, 규영이 왕자님인가…. 자꾸만 어깨가 들썩거렸다. 웃음이 멈출 생각을 안 했다.

“흐.”

“형 화낸다?”

“아니, 그게 아니고, 갑자기, 꿈, 을.”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의도치 않게 말을 헐떡이며, 겨우, 겨우 내뱉었다. 규영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예전 같으면 저 얼굴을 보고 흠칫 놀랐겠지만, 이제는 귀엽기만 했다.

쪽-.

“미안, 미안.”

쪽, 쪽-.

입맞춤으로 이 상황을 모면하려고 했지만, 규영의 표정이 풀릴 생각을 안 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 꿈을 안 꾸는 게, 동화에서, 흡, 왕자님이 공주님을.”

계속해서 웃는 탓에 눈물까지 나오려고 했다.

“참나, 공주님이라고 불러줘?”

규영이 어이가 없다는 듯 우겸의 콧잔등을 손으로 톡 쳤다. 그래 놓고 자신도 웃기는지, 끅끅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꿈을 안 꾸는 게 이렇게 웃음이 날 일인가. 평생의 숙원 사업이 너무 허무하리만큼 갑자기 해결되었다. 앞으로 또 꿈을 꾼다고 한들, 예전과는 다르게 규영이 옆에서 든든하게 있어 줄 것 같았다.

그리고 규영의 부모님, 누나…. 그리고 지민까지 사귀는 걸 알게 되어서 그런지, 예전보다 더 진지한 사이가 된 것 같았다. 안정된 관계라고 하는 게 맞겠다. 남들에게 알리는 행위가 이렇게 마음에 평화를 줄 줄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떠벌리고 다닐걸, 그러면 애초에 약혼자니, 바람이니 잡생각은 안 들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때 싸운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이후에 둘의 사이는 너무 좋았다. 그때 말다툼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까지 혼자서 끙끙 앓았을 게 분명했다.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그때는 왜 그런 마음이 자꾸 들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쪽-.

매일 지금처럼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는 게 당연했으면 좋겠다.

“잘 자, 형.”

규영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쿵쿵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

  

***

  

하루하루가 순조로웠다. 이렇게 아무 탈 없이 지내도 되나 싶은 정도로, 무탈한 하루였다. 지민에게 타의로 털어놓은 이후로, 복도에서 만날 때마다 눈을 찡긋거렸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지만, 일주일째 저러고 있다. 마음 한편으로는 지민이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게 아쉬울 정도였다. 오죽하면 차라리 저를 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까.

“도대체 왜 그래?”

“그냥, 나 아까 너의 팀장님께서 음료 사주셨다?”

“왜?”

“나도 모르지.”

부쩍 규영에게 친한 척을 하는 지민 덕에 잠잠하던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 괜히 말했다는 생각을 하루에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희영이 나았으려나? 아니다. 그냥 단둘이서만 알고 지냈을 때가 제일 속이 편했다.

뭐, 그때는 다른 거로 속이 시끄럽긴 했지만, 결과론적으로는 지금도 만만치 않게 골치 아팠다.

우겸이 인상을 쓰며, 지민의 손에 있는 음료는 빤히 쳐다봤다. 카페에서 가장 비싼 음료였다. 아무래도 규영에게 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저렇게까지 챙길 이유가 없었다.

“나, 간다. 앞으로 그만 찡긋거려. 요즘 너 때문에 노이로제 걸릴 것 같아.”

“내가 몇 번이나 그랬다고. 아무튼 너의 팀장님께 잘 마시겠다고 인사 또 전해줘.”

우겸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이 없는걸 확인한 다음, 문을 꽉 닫았다. 그리고 규영에게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쿵쿵거리며 자리로 걸어갔다.

“왔어?”

규영의 자리 앞에 딱 서서 눈에 힘을 줬다. 노려본다고 하는 게 맞겠다.

“갑자기, 왜?”

“지민이한테 왜 음료수 사주셨어요? 저한테 말도 안 하고?”

“허?”

규영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의자에 등을 기대고 올려다봤다.

“아, 허락 맡고 사줘야 하는지 몰랐어요. 앞으로 물어보고 사줄게요.”

규영의 목소리의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제 속도 모르고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눈웃음까지 살살 쳤다. 그리고 의자의 등을 기댄 다음, 팔짱을 꼈다. 꽤 거만하게 보였다.

“장난 아니고, 진지해요. 혹시 저 모르게 지민이한테 뭐 물어보려고 그러시죠.”

“뭐를요? 아, 내 첫인상?”

우겸이 천천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살짝 벌렸다. 뭔가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저렇게 유치할 줄은 몰랐다. 아직 저걸 마음에 꽁하니 가지고 있다니. 나이만 많았지, 순 하는 행동은 저보다 더 어렸다.

“아, 그건.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아니긴, 아까 음료 사줄 때 지민 씨한테 다 들었어요. 나를 그렇게 생각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는데…. 솔직히 서운해요.”

“…진짜요?”

어쩐지…. 아까 계속 음흉하게 웃더라. 지민이 그동안 눈을 찡긋거리는 게 다 이유가 있었다. 다 티를 낸 거였는데, 왜 그러나 씩씩거리기만 하고, 왜 그러는지 이유를 물어보지 않았다. 아차 싶은 마음에 규영의 눈치를 슬슬 보며 턱을 긁적였다.

“응.”

“…아니, 그건, 처음에 팀장님이 엄청 무섭게 쳐다보셔서.”

규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허벅지를 손으로 가볍게 쳤다. 하는 수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다리 위에 조심스레 앉았다.

“그래서?”

“그리고 막 꿈에도 나오니까.”

“응.”

규영이 자연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저는 그때 그만둘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말만, 말만 했어요. 팀장님이 괴롭히는 것 같다고.”

“아, 그래?”

규영의 목소리가 뭔가 이상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니 눈빛이 뭔가 이상했다. 사무실 공기도 싸한 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설마.

“지민이가 말한 거 거짓말이죠.”

“뭐 다른 말을 했을 수도 있죠? 그런데 우겸 씨, 나를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는데, 정말 서운하다.”

규영이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한숨을 픽픽 쉬었다.

“아니, 아니.”

지금 한숨을 쉴 사람이 누군데. 이렇게 낚을 줄은 몰랐다. 정말 틈만 나면 거짓말에, 거짓말을…. 정말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규영이었다. 조심스레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일부러 소리가 나게 쪽, 쪽 거리기까지 했는데, 얼굴을 가리고 있는 손은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형.”

“….”

“형.”

“….”

골탕 먹인 규영을 째려보며 말했다.

“자꾸 이러면 나도 서운할 것 같은데. ”

작게 웅얼거리며, 규영의 허벅지에서 일어나려고 움직였다. 그제야 얼굴을 가린 손을 떼고, 다급하게 허리를 잡았다. 놀란 눈을 하고 얼굴을 살펴보니, 아까보다 표정이 더 밝아 보였다.

“이런 장난은 별로 재미없어요.”

“응. 그래서 이제는 안 무섭고?”

“그건 당연하죠.”

우겸이 살짝 입을 맞추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규영이 뒤통수를 잡고 끈적이게 입을 맞추었다.

“하.”

서로의 타액이 끈적이게 이어졌다. 자꾸만 노골적으로 입을 맞춰오는 규영의 어깨를 손으로 밀쳤다. 지난번처럼 지민이 갑자기 사무실에 들어오면…. 으, 생각도 하기 싫었다.

웬일로 규영이 순순히 몸에 힘을 빼고 놓아줬다.

“이러다가 들켜요.”

“글쎄? 지민 씨, 오늘 반차라고 바쁘다던데?”

“허? 저도 모르는 걸 팀장님이….”

규영을 노려보며, 자리에서 빠르게 일어났다. 파티션 너머를 한 번 쳐다본 다음 의자에 앉아 작게 말했다.

“다음부터 지민이한테 뭐 사줄 때 꼭 저한테 말 하셔야 해요? 알겠죠? 자꾸만 팀장님이랑 지민이가 속닥거리니까, 뭔가 기분이 그래요.”

“응. 아니면, 나도 사무실 밖에서 다른 사람들 만나면 뽀뽀해 줄까?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우겸이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건, 팀장님만 좋은 거잖아요. 아무튼, 단둘이 자꾸 카페 가는 거 안 돼요. 금지.”

“그런데 갑자기 둘이 가야 하는 상황이면 어떡해요? 그러면 그냥 문자 보내면 끝이에요?”

아무래도 규영의 덫에 단단히 걸린 것 같았다. 자꾸 걸어오는 말을 애써 무시하며 컴퓨터 화면을 초점 없이 쳐다봤다. 급하게 작성하지 않아도 되는 보고서를 열심히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옆에서 작게 웃는 소리만 들렸다.

  

***

  

지난번에 같이 살자고 했던 말에 규영이 답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 말만 꺼내면, 항상 결론이 흐지부지했다. 지금도 맨날 같이 지내면서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일단 알겠다고는 하는데 이게 정말 괜찮은지는 모를 노릇이었다. 분명 좋아해야 하는 게 당연한데, 얼굴빛이 환하기는커녕 걱정이 있는 사람처럼 칙칙했다.

“그럼 저 정말 짐 싸서 들어가요?”

“응, 그런데 정말 괜찮겠어?”

“안 괜찮을 건 뭐예요.”

사실, 규영은 여기가 아닌 서울에 올라가서 같이 살자고 했다. 몇 번이나 설득했지만, 지금 당장은 올라가고 싶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우리의 집 근처에 방을 얻어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회사도 근무지 변경 신청하면 된다, 등. 꽤 달콤하게 들리는 말로 꾀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 생활을 만족하는데 굳이, 서울로 올라가야만 할까. 물론 규영이 자꾸만 서울에 가자고 하는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다. 지난번 일로 인해 혼자 지내는 우리의 건강을 걱정하는 눈치였다.

사실 친누나이기에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최근에 규영이 지인을 소개해 준 덕에 저 못지않게 연애 사업이 활발했다. 그 덕에 걱정을 조금 덜은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굳이, 급하게 우리의 집 근처로 이사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어차피 누나도 요즘 남자친구 생겼고.”

“…그래도.”

“또, 누나 약국 앞에 있는 대학병원에 팀장님 친구도 있다면서요. 만약에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만, 무슨 사고라도 나면 지난번처럼 누나 보호자 해주신다면서요. 그리고 누나가 얼마 전에 점을 봤는데, 앞으로 건강 운이 엄청 좋대요. 아플 일이 없다고 했대요.”

규영이 풀 죽은 얼굴을 하며, 또 대화를 회피했다.

“그런데, 팀장님. 아니, 허규영 씨, 누구 남자친구예요?”

“응?”

“누구 남자친구예요?”

똑같은 질문을 하자, 규영이 눈만 깜빡거리며, 대답하지 않았다.

“왜 자꾸 우리 누나를 걱정하지. 누나 남자친구는 따로 있는데?”

“…아니.”

“아무튼 누나 이야기는 이제 그만해요. 이번 주 주말에 짐 싸서 옮길게요. 알겠죠? 그리고 이따 부동산도 들리고.”

규영이 또 아무런 말을 안 하고 가만히 있자, 우겸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리고는 엄포를 놓았다.

“그럼, 각자 살아요. 각자. 누가 보면 나만 같이 살고 싶은 줄 알겠네. 됐어요, 됐어. 그냥 혼자 살고 말지.”

우겸이 툴툴거리며, 규영의 앞을 앞서갔다.

“지난번에 가출했다고 저러는 건가. 아휴. 그러니까 누가 의심스럽게 행동하랬나.”

일부러 규영에게 들리라고 큰 목소리로 계속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같이 살기는 글러 먹은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살자고 할 때 알겠다고 할 걸 그랬다. 뒤늦은 후회는 오로지 제 몫이었다.

우겸의 뒤에서 규영이 표정을 굳힌 채 뒤따라갔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자리에서 우뚝 서서 가만히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순간 규영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뒤를 돌아봤다. 거리가 꽤 벌어져 있었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는 게, 마치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당황한 우겸이 규영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아니 뛰어갔다. 숨을 헉헉거리며 앞에 서자, 그제야 자신을 보고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 팔을 벌려, 꽉 껴안았다.

길 한복판에서, 남자 둘이…. 우겸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사람이 없는 골목이라 천만다행이었다.

“이러다 동네에도 소문나겠어요.”

“말 나온 김에 오늘 짐 옮길까?”

“갑자기요?”

“응. 그래도 될 것 같아서.”

변덕이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이랬다가 저랬다였다.

“갑자기 뭐지?”

“그냥, 네가 날 향해서 뛰어오니까 좋아서. 이런 적이 처음이라, 이제는 다 괜찮을 것 같아서. 너 말대로 같이 살자.”

규영이 또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앞으로 자주 뛰어오라는 이야기인가? 뭐가 괜찮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살자는 말에 수줍은 미소가 지어졌다.

“네. 누구 남자친구인지는 아직 말 안 해서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 잘 살아 봐요.”

제 말에 규영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여느 때처럼 행복하고, 더 행복한 하루로 마무리가 될 것 같은 날이다.

꿈속에 그만 나와주세요 fin

공금.갠소.본문수정有.AngKemTo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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