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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의문스러운 관계 (12/13)

12. 의문스러운 관계

우겸은 가방을 멘 채로 정처 없이 걸었다. 모텔을 나오기 전에 주인에게 혹시 근처에 바다가 있냐고 물었다. 다행히 모텔에서 차로 삼십 분 정도 가면 바다가 나온다고 했다.

어차피 할 것도 없는 마당에 잘 되었다는 생각으로 표지판을 보며 꿋꿋하게 걷기만 했다.

“아직 멀었나….”

걷는 내내 별생각이 다 들었다. 규영의 생각도 물론 났지만, 집이 최고라는 생각이 우선이었다. 차라리 잠이라도 편하게 잘 걸, 불편하게 자서 몸이 물먹은 스펀지처럼 무거웠다. 걸으면 걸을수록 몸이 축축 처졌다.

얼마나 걸었을까. 점점 코끝에 짠 냄새가 닿기 시작했다. 킁킁거리며, 고개를 들고 주위를 보자 저 멀리 파란색 파다가 펼쳐져 있었다.

생각했던 것처럼 진한 파란색은 아니지만, 그래도 바다는 바다였다. 바싹 마른 목을 애써 침으로 해결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 목말라.”

그저 차가운 바람만이 제 얼굴을 스쳤다. 시원하지도 않은 차가운 바람, 걸어오면서 얼굴에 열이 띈 상태였는데 그게 사그라들 정도의 바람. 찝찝했던 땀이 사라질 정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허탈한 마음에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여기서 쓰러지면 그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도 지나가지 않는 도로에,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관광객이라도 있으면 어떻게 병원에라도 가겠는데, 주위에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눈가를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멀리 가게처럼 보이는 작은 건물이 있었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조금 더 앉아있다가 가도 되는데, 시원한 물이 너무나도 간절했다.

가게 앞까지 힘겹게 걸어왔다. 그냥 걷기만 했을 뿐인데도, 몸 상태가 좋지 않은지 숨소리가 꽤 거칠었다. 겉에서 보기에는 장사를 하는지, 안 하는지 알 턱이 없었다. 언뜻 보면 더는 영업을 안 하는 것처럼 보였다. 주위를 서성거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문을 똑똑, 노크하고 잡아당겼다. 다행히도 닫혀있을 줄 알았던 문이 천천히 열리었다. 안에 사람만 없을 뿐, 컵라면이며, 물이며… 필요한 것들은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작은 웃음이 났다. 그래도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아침에 씩씩거리며 호기롭게 여기까지 걸어왔지만, 제대로 잠도 못 잔 상태였고, 음식도 먹지 않아 체력이 바닥이었다. 걷는 내내 이게 무슨 고생인가 싶었다. 규영이고 뭐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거기에 핸드폰은 왜 충전하지 않고 그대로 나왔는지, 걷는 내내 후회했다. 평소였더라면 끔찍이도 아끼는 보조배터리가 항상 손에 있었을 텐데, 이상하게도 짐을 챙길 때 챙기지 않았다. 그걸 왜 잊었을까. 일이 풀리지 않으려면 이렇게도 꼬이는구나 싶었다.

“계세요?”

혹시 몰라, 가게 안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지만, 가게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우겸은 진열대에 있는 생수 한 병을 들고, 가게 안에 있는 낡은 의자에 앉았다. 차가운 냉수였더라면 더 좋았을 테지만, 지금 찬밥과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뚜껑을 빠르게 열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금세 물 반병을 다 마셨다.

“하, 이제야 살 것 같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분명 그때 화가 많이 난 건 맞았지만, 규영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도 있었다. 뭐에 홀린 듯, 같이 있고 싶지 않았고, 집을 떠나고 싶었다.

뒤늦은 사춘기가 분명했다.

지금 후회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규영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어제 이후로 분명 정이 떨어진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 지금까지 이럴 수가 있나. 아니면, 정말 제가 스스로 생각했던 것처럼…. 그냥 그 여자 대용일 수도 있다.

“하….”

깊은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끝을 이렇게 마무리 지으면 안 되었는데, 결국 규영과 대화를 했든, 안 했든 후회는 자신의 몫이었다. 일단 오늘 집에 돌아가면 규영에게 먼저 연락을 해봐야겠다.

그런데 규영이 만나주기는 할까.

눈을 잠시 감고, 몸을 축 늘어트렸다. 급한 불은 꺼서 몸이 긴장이 풀린 듯했다. 자꾸만 감기는 눈을 손으로 꾹 눌렀다.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에, 아니면 운 탓인지, 눈 위에 무거운 솜이 올려져 있는 기분이었다.

느릿하게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화기라도 보이면 좋을 텐데. 택시를 불러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비행은 하루면 충분했다.

그다음은 더 느릿하게, 그러다가 눈을 감고 말았다.

우겸의 앞에 한 아이가 가만히 서 있다. 가게 안에서 자는 게 마음이 들지 않는 눈치였다. 꽤 심기가 불편한 표정이었다.

“저기, 형.”

우겸의 어깨를 손으로 톡톡 치며, 형이라고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꽤 고된 하루였는지, 잠에 깊게 든 모양이었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형.”

자꾸 툭툭 치는 손길에 우겸이 눈을 천천히 떴다. 앞에 한 아이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나머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몸이 순간 기울었다.

“어, 어,”

아이가 우겸의 팔을 잡아, 겨우 몸을 지탱했다. 놀란 마음을 쓸어내리고, 아이에게 말했다.

“고마워.”

초등학생쯤 되었을까. 이 동네 사는 아이처럼 보였다. 키는 자기 허리까지 오고, 얼굴도 동글동글하니 꽤 귀여웠다. 특히 예전에 군대에 갔을 때 했던 머리처럼 귀여운 밤톨 머리였다.

“응. 형, 집 없어? 왜 여기서 자?”

아이답게 궁금증이 역력했다.

“어, 아니. 걷다가 보니까, 여기 슈퍼가 있어서 들어왔는데. 아무도 없어서, 잠깐 기다린다는 게 그만.”

갑자기 나타난 아이로 정신이 없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두서없이 대답했다. 다행히도 주절주절 말한 걸 이해라도 한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아, 그렇구나. 여기 원래 아무도 없어. 그냥 저기 보이지. 돈 넣고 가면 돼.”

아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작은 글씨로 자가 계산대라고 쓰여 있었다.

“어, 그러네. 저건 못 봤네.”

“응. 형, 돈은 있어? 아니면 없어?”

외부인이라 거리를 둘 법도 했는데, 옆에 딱 붙어서 종알종알 말을 걸었다. 그 모습에 미소가 지어졌다. 특히 꼬치꼬치 캐묻는 말에 웃음이 터졌다. 뭐가 그리 있고, 없는지. 귀여움에 저도 모르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형이 뭐 사줄까?”

“아니야. 그런데 정말 집 있어?”

딱 봐도 꼬질꼬질한 모습에 큰 가방까지 옆에 있으니, 아이 딴에는 집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 듯했다. 아까부터 연신 집이 있냐는 타령이었다.

“응. 잠깐 놀러 왔어.”

“정말?”

“응.”

아이와 잠시나마 말하니 규영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꾸만 하는 질문에 짜증이 나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여기를 왜 놀러 왔어?”

“어? 그냥.”

아이가 수상하다는 듯 눈을 얇게 뜨고 쳐다봤다. 또 집이 있냐고 물어볼 것 같은 얼굴이었다.

“친구랑 싸워서 혼자 놀러 온 거야.”

“와, 형도 친구가 있어?”

“당연하지.”

“그렇구나. 형은 없는 게 없네.”

그렇지만 이제 없다. 아이의 말에 규영이 다시 떠올라 눈시울이 붉어지려고 한다.

“그런데 왜 싸웠어? 화해는 안 했어?”

“그냥. 친구가 거짓말해서.”

“왜?”

“어?”

아이에게 처음으로 답해주지 못했다. 규영이 거짓말한 이유는 정말 모른다. 들을 생각도 안 했고, 듣고 싶지도 않았기에.

“몰라?”

“그러게, 그건 안 물어봤는데.”

“에이, 물어보지.”

처음으로 아이답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왜?”

물어보는 게 맞긴 하지만, 끝내 상처받는 건 자신이니 더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친구잖아. 친구. 나도 며칠 전에 동현이랑 싸웠는데, 어제 화해해서 방금까지 동현이랑 놀다 왔어.”

“그렇구나.”

자랑인 것처럼 말하는 아이의 모습에 차마 크게 웃을 수는 없었다. 자신도 아이처럼 단순했으면 좋았을 텐데, 왜 자꾸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까.

“얼른 물어봐.”

“글쎄.”

“별로 어려운 것도 없는데.”

우겸은 더 이상 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아이의 말대로 어려울 건 없는데, 어제는 너무 감정적으로 규영을 대했다. 너무 참고 참아서 그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후회만 남았다. 평소답지 않게 감정적이긴 했다.

살면서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격앙된 적이 있나?

“아니면, 내가 물어봐 줘?”

“어?”

“형, 핸드폰 있어? 없으면 내 것 빌려줄게.”

“핸드폰은 없어.”

아이가 배시시 웃으며 작은 손에 꼭 쥐고 있던 핸드폰을 우겸에게 건네어 주었다. 자신이 친구와 먼저 화해를 한 선배처럼 구는 모습에 몹시 웃음이 났다.

“어, 어. 고마워.”

기대의 찬 눈을 차마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핸드폰을 받아서 들고 규영의 번호를 눌렀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했다. 전화를 받으면 뭐라 해야 할까. 아침에 퇴사하느니 마느니 혼자 난리를 쳤는데, 규영에게서 과연 좋은 소리를 들을까.

사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혼자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면, 오늘은 그 화가 약간 누그러들었다. 걷는 내내 어제 했던 행동을 후회했다. 심지어 오늘 아침의 그렇게 문자를 보낸 것도 후회했다.

지나치게 이성적이지 못한 행동이었고, 무척 충동적이었다. 충분히 규영의 처지에서 화가 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말대로 규영과 대화를 나눴더라면, 지금 여기 이곳에서 혼자 처량하게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만약에, 제가 생각했던 게 모두 오해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고개를 양옆으로 저으며 우리의 번호를 둘렀다. 지금 규영에게 전화했다가는 이성보다 감정이 앞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집에 돌아가서 생각 정리를 한 다음, 그때 연락을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여보세요?

“어, 누나. 나 우겸이. 지금 통화할 수 있어?”

-어? 이 핸드폰은 누구 거야? 지금 점심시간이라 전화 가능한데, 몸은 괜찮아?

“어, 친구 거야.”

옆에 딱 붙어있는 아이를 보고 눈웃음을 지었다. 나이가 문제인가, 말만 통하면 친구가 맞지. 아이가 그 말에 기분이 좋은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데 갑자기 몸이 아프냐고 왜 묻는 거지?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우리가 답답하다는 듯 빠르게 말했다.

-너 아프다며. 오늘 아파서 회사도 출근 못 했다고 하던데?

“…어. 누가?”

-너희 팀장님. 집으로 택배 보내려고 했는데, 네 핸드폰이 꺼져있어서 팀장님한테 바로 전화했거든.

“…어?”

어? 우리와 규영이 핸드폰 번호를 주고받은 적이 있나. 이상하다. 분명 그때 잠깐 본 게 다일 텐데.

-아, 저번에, 일이 있어서.

“언제? 둘이서 그때 약국에서 스친 게 전부잖아.”

그냥 안부만 간단하게 묻고 전화를 끊으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통화가 길어질 것 같았다. 제 핸드폰이 아닌 남의 것이라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눈을 마주치고 입 모양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 별건 아니고, 너 서울에 왔을 때 있지? 너 돌아가고 밤에 갑자기 맹장이 터져서, 응급실에 갔는데.

“뭐?”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우리에게 양해를 구하고 5분만 있다가 다시 전화를 걸어달라고 했다. 이마를 긁적이며, 아이와 눈을 마주치고 말했다.

“미안. 형, 전화 10분만 더 써도 돼? 미안해. 형 때문에.”

“괜찮아. 그러면 나 저기서 과자 먹으면서 기다리고 있을게. 친구랑 화해하고 와. 알겠지?”

우겸은 아이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다음, 주머니를 뒤적였다. 다행히 어제 거스름돈으로 받은 만 원이 손에 잡혔다. 아이의 손에 만 원 한 장을 억지로 쥐여주었다. 괜찮다는 아이를 뒤로하고, 잠깐 슈퍼 밖으로 나왔다.

타이밍 좋게 우리에게 전화가 다시 왔다.

“아니, 무슨 소리야?”

-아니, 그때 응급으로 수술을 들어가서, 병원에서 너한테 연락했나 봐. 그런데 수술 끝나고 나와서 보니까 팀장님이 계시더라. 그때 누나가 얼마나 놀랐는데.

“아니, 왜 이걸 지금 말해? 팀장님도 나한테 아무 말 안 했는데?”

-말만 응급이지. 수술은 한 시간밖에 안 걸렸어. 그만큼 간단하고, 퇴원도 3일이면 하는 거라. 따지고 보면 수술보다는 시술이지.

“하…. 그게 무슨 소리야. 그래도 나한테는 말해야지.”

-그때 너도 속 안 좋아서 응급실 가고 그랬다며, 나 때문에 스트레스받아서 속 더 안 좋아지면 어떡해. 아기 때도 한 번 체하면 오래갔잖아. 그리고 지금은 완전 괜찮아. 나중에 너 서울 오면 그때 지나가는 말로 하려고 했지. 그래서 이 날씨에 감기는 왜 걸렸어? 목소리는 괜찮은 것 같은데.

우겸이 무슨 말을 하지 못하게 우리가 빠른 속도로 계속 말한다. 그 말을 듣는 내내 우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럼 그때 팀장님이 병원에…. 하….”

혼잣말로 읊조리며, 멍하니 앞에 있는 바다를 바라봤다. 제 속도 모르고 파도가 일렁였다. 보통 바다를 보면 마음이 뻥 뚫려야 하는데 더 답답해졌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앞으로 규영의 얼굴은 어떻게 봐야 할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한 거였다니…. 고개가 절로 바닥으로 향했다.

-팀장님한테 뭐라 할 건 아니지? 누나가 너 걱정한다고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거든. 뭐라 할 거면 누나한테 해. 너희 팀장님은 죄 없다.

“그런데 팀장님 번호는 또 어떻게 알았어?”

-아, 혹시나 앞으로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네가 연락 안 되면 자기한테 바로 연락하라고 명함 주고 가셨거든.

“뭐? 하….”

-그리고 그때도 그 새벽에 너랑 같이 있는 걸 보면…. 응, 아무튼, 더는 누나가 안 물어볼게? 누나 이제 들어가야 하거든? 이따 저녁에 전화할게. 아프지 말고, 우겸아.

전화를 끊고 우겸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릎에 고개를 묻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큰 잘못을 한 것 같았다. 죄 없는 규영에게 성질이란 성질은 다 부려놓고, 거기에 회사를 그만둔다고 문자까지 보냈다. 설마 했던 일이 정말 눈앞에서 일어날 줄은 몰랐다. 오히려 상황이….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면 과연 규영이 용서해 줄까. 제 누나까지 챙겼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 미쳤지, 내가.”

가게 문틈 사이로 아이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형, 화해 못 했어?”

우겸이 눈물을 참으며, 아이에게 핸드폰을 돌려줬다.

“응. 아무래도 형이 잘못한 것 같은데. 어떡하지.”

아이가 작은 손으로 우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 다독임에 갑자기 눈물이 똑 떨어졌다.

“형, 괜찮아. 다 괜찮아.”

고사리 손으로 위로받으니 눈물이 왈칵 나오기 시작했다. 어제 펑펑 운 탓에 눈물샘이 막힌 줄 알았는데, 또 뭐가 이리 슬픈 걸까.

눈물을 그치고 나니, 이 상황이 꽤 창피했다. 어린아이한테 위로받는 꼴이라니. 고개를 들어 아이를 쳐다보니, 씩 웃기만 했다.

“다 울었어?”

“…응. 형 때문에 미안.”

“괜찮아. 그럼 이제 집 갈 거야?”

“응. 과자 더 사줄까?”

우겸이 자리에서 일어나 휘청거리며 벽을 짚었다. 그 모습에 아이는 울상을 지으며 우겸의 다리를 꽉 잡았다.

“아까 사준 거로도 충분해. 값은 충분히 치렀어. 그럼 나 이제 집에 갈게. 형도 조심히 가고, 친구랑 화해하고 다음에 또 놀러 와.”

우겸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가 잽싸게 가게를 빠져나갔다. 이름을 물어볼 틈도 없었다. 이렇게 순식간에 헤어질 줄 알았으면 이름이나, 나이라도 물어볼걸. 짧은 후회를 마치고, 서둘러 짐을 챙겨 가게를 나왔다.

종일 걸어서 걷는 내내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힘겹게 한 발, 한 발을 내디뎠다. 겨우 터미널에 도착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사정, 사정한 다음 핸드폰을 빌렸다.

떨리는 손으로 규영의 번호를 눌렀다. 수화음이 길어질수록 초조했다. 침을 꿀꺽 삼켰다. 제발, 규영이 전화받길,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기도했다.

모르는 사람의 번호라서 받지 않는 건가.

“어떡하지.”

핸드폰을 빌려준 남자의 눈치를 보며 다시 규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

“죄송해요. 전화를 안 받아서, 혹시나 연락 오면 잘못 걸었다고 해주세요. 감사합니다.”

무슨 객기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행동을 저지르고 만 걸까. 축 처진 어깨가 올라올 생각을 안 했다. 매표소에서 집으로 가는 가장 빠른 표를 예매한 다음, 대기실에 앉았다.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바닥만 내려다봤다. 규영에게 사과하면 과연 받아줄까. 아니면….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고 나니 뒷일이 감당되지 않았다.

그때 제 귀에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거기에 제 앞에 딱 서 있는 구두를 보고 가슴이 철렁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드니 앞에 규영이 있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했다. 규영이었다.

“어, 어.”

규영이 아무 말 없이 우겸을 쳐다본다. 수많은 인파 중에 둘만 있는 것처럼, 서로만 바라보고 있다.

“팀장님.”

우겸이 자리에서 번뜩 일어나 규영에게 안겼다. 남들이 뭐라 하든 다 필요 없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향이었다. 거기에 따듯하고 익숙하기까지 한 품이다.

혹, 규영이 내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꽉 안았다.

“…우겸아, 사람들이 다 쳐다봐. 일단 손 좀 놓고.”

규영의 목소리도 저 못지않게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싫어요.”

“….”

규영의 어깨가 들썩였다. 벗어나려고 애쓰는 게 몸으로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을 줬다.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응?”

우겸의 납작한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으며, 어르고 달랬다. 겨우 떨어트리고, 얼굴을 찬찬히 바라봤다. 고작 하루밖에 떨어지지 않았는데, 얼굴은 또 왜 이렇게 꾀죄죄한지.

가만히 두면 돌아오기는커녕, 이러다가 더 멀어질까 봐, 급하게 우겸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어제의 소리 지르던 우겸은 어디 갔는지 얼굴을 보자마자 안기는 탓에 많이 놀랐다. 그 사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나. 고작 하루였는데, 얼굴이 꽤 핼쑥해졌다.

제가 잘못한 게 맞기에, 무릎이라도 꿇을 생각으로 찾아온 건데….

“집에 갈까?”

우겸이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의자에 있는 큰 가방을 어깨에 멨다. 생각보다 무게가 꽤 나갔다.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도대체 얼마나 밖에 있으려고 짐을 이렇게 한가득 쌌을까. 괘씸하긴 했지만, 뭐라 할 수 없었다. 잘못한 건 저였다. 우겸이 무슨 죄가 있으랴.

차로 걸어가는 내내 둘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순순히 따라오지 않으면 억지로 데려와야 하나 고민까지 했다. 다행히 제 옷소매를 잡고 놓을 생각을 안 했다. 몸이 축 늘어진 우겸을 차에 먼저 태우고, 짐을 뒷좌석에 실었다.

차에 올라타서 우겸의 눈치를 슬슬 살폈다. 아무 말이 없는걸 보면 집에 가도 괜찮다는 무언의 대답 같았다. 시동을 켜고 천천히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집에 가는 동안에 둘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짧은 일탈에 많이 지친 듯, 우겸이 차에 타자마자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잘 자, 우겸아.”

옆에서 그 모습을 보며, 안도감이 들었다. 옆에서 새근새근 잘 자는 모습을 보니 종일 걱정했던 게 한순간에 사라졌다. 꿈도 꾸지 않는 듯, 숨소리도 꽤 일정하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도, 우겸은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가만히 옆에서 자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젯밤에 우겸이 집을 나갔다는 연락을 받고,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처음 몇 분간은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며,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따라가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우겸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었다. 억지로 해서 될 게 아니라는 걸 이번에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거기의 아침에 그만둔다는 문자를 받아보고,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자신에게 얼마나 정이 떨어졌으면 일까지 그만둘까. 사무실 사람들에게는 우겸이 병가를 쓴다고 말했다. 저로 인해서 우겸이 그만둘 필요는 없었다.

그냥 자신이 다시 서울로 돌아가면 된다. 그리고 잠깐 꿈이라도 꾼 거로 생각하고, 서로를 만나기 전으로 생활하면 되지 않을까. 그러면 누구 하나 피해 보지 않고,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오전에 급한 일을 처리하는 와중에 우겸의 누나에게서 연락이 안 된다며 전화까지 오자, 눈앞이 깜깜했다. 작정한 사람처럼 핸드폰 전원까지 끈 것 같았다. 순간 이전의 우겸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아니겠지, 아니겠지, 하면서 손이 벌벌 떨렸다.

우리와의 전화를 끊고, 우겸에게 전화했지만, 전원이 꺼져있다는 말만 들릴 뿐이었다.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았다. 대충 급한 일은 해결했다. 오후에 반차를 내고 부리나케 사무실을 나갔다. 정신이 없었다.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생각보다 거리가 있는 곳에 우겸이 있었다. 실시간으로 우겸의 위치를 받아보긴 했지만, 이 조급함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차를 타고 우겸이 있는 곳으로 속도를 높여 달렸다.

일단 집에는 데려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제 이기심 때문에 우겸이 더 이상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거 하나였다. 그런데 또 이렇게 자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욕심이 났다. 마지막으로 한 번쯤은 용서를 구하고, 다시 만나봐도 되지 않을까.

아까까지만 해도 우겸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마음이 달라졌다. 이렇게 헤어지기에는 너무 억울했다. 따지고 보면 별것도 아닌 일인데….

그렇게 차 안에서 몇 분이 흘렀을까. 우겸이 꿈이라도 꾸는 듯 또 끙끙 앓기 시작했다. 저번에 꿈이 싸웠다고 했나. 그러면 그 나중은 굳이 우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일이 나올 게 분명했다.

우겸의 어깨를 손으로 가볍게 잡아, 살살 흔들었다.

“우겸아.”

“….”

“고, 우겸.”

우겸이 눈을 뜨자마자 제 목을 끌어안았다. 심장이 널뛰듯 뛰는 걸 보면 좋지 않은 꿈을 꾼 것 같았다. 어찌나 힘이 센지,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우겸아, 계속 이렇게 안고 있을 거야? 이제 집에 들어가야지.”

“같이 가실 거예요? 혼자는 안 갈래요.”

  

***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가는 내내 우겸은 제 옷깃을 꼭 잡았다. 누가 보면 멀리 떠나기라도 하는 줄 알겠다. 따지고 보면 가출은 자기가 했으면서.

현관문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붙잡혀 있는 손을 떼려고 우겸에게 말했다.

“오늘은 일단 쉬고, 내일 이야기하자.”

“…싫은데.”

우겸이 울 듯한 표정을 하며, 규영의 소매를 놓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에 장단을 맞춰 줘야 할까. 어제는 나가라고 소리 지를 땐 언제고, 지금은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안달이었다.

규영이 머리를 쓸어올리며,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어떻게 하고 싶은데.”

우겸의 눈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소매를 꾹 잡은 채, 천천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제가 오해해서, 죄송해요. 어제 소리 지르고, 혼자 문 잠그고.”

“응.”

“집도 나가고, 회사도 마음대로 안 나가고.”

“응.”

따지고 보면 원인 제공자는 저였는데, 뭐가 그렇게 죄송한 게 많은지….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안 돼요? 앞으로는 절대 이럴 일 없을 텐데.”

우겸이 눈물을 글썽이며 팔을 뻗어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자 규영이 한걸음 뒤로 물러나 가만히 쳐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우겸을 안아서 달래주고 싶었다. 어찌나 애처로운지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 뻔했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다시 지내도 되는 걸까…. 아까까지만 해도 우겸과 같이 지내고 싶다는 마음이었는데, 막상 우겸이 저 때문에 울먹이는 모습을 보자 또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지금 헤어지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서로 정이 더 들기 전에 헤어진다면…. 나중에 우겸이 덜 힘들 것 같았다.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요?”

“어? 어. 정말인데.”

“그니까, 어떻게 믿어요? 또 혼자 오해하고, 그러면?”

우겸이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제 품에 빠르게 안겼다. 진드기보다 더할 정도로 꼭 붙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규영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던 입가가 점점 씰룩거리며 움직였다.

“정말, 그럴 일은 없을 텐데, 정말인데.”

자꾸만 다 들리게 혼잣말로 계속 중얼거렸다. 규영이 그제야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안겨있는 우겸의 등을 토닥였다.

몇 분이 지났을까. 규영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할까? 나도 할 말 있는데.”

우겸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실 소파에 걸어가는 동안에도, 우겸은 제 소매를 놓지 않았다. 얼마나 꾹 잡았으면, 손가락이 하얗게 질려있는 정도였다.

자리에 앉아 규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일단은 내가 먼저 사과할게요. 마음대로 핸드폰 봐서 미안. 정말 의심하고 이래서 본 게 아니고, 그냥, 내가 나를 못 믿어서 그랬어요. 미안해요.”

우겸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그때 약혼자라고 솔직하게 말하지 않아서 미안. 정말 얼굴 본 적도 그때 회사에 찾아온 게 전부였고, 따로 연락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오해하게 해서 미안해요.”

“….”

“또 그때 새벽에 나갔던 건.”

“그건 누나한테 들었어요.”

아, 그랬구나.

“그때 응급실도 가고 그래서, 그것도 미안해요. 갔다 와서 솔직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우겸 씨 누나가 비밀로 해달라고 해서.”

“….”

“그리고, 또 핸드폰 안 보여준 건.”

우겸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침을 꿀꺽 삼키고, 대답을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정말, 정말, 다른 사람이랑 연락해서 그런 게 아니고. 어떻게 보면 핸드폰 몰래 본 그것의 연장선인데….”

“혹시 저 모르게 위치 추적 애플리케이션 깔고 그러셨어요? 설마.”

우겸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런데 들으면 화 많이 날 수도 있는데.”

“뭔데요? 설마 제 사진 몰래 찍고 그러셨어요?”

“어, 어떻게 보면 맞는데.”

우겸이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이건 생각을 못 해서, 막 벗고 있는 거 그런 걸 찍으신 거예요? 그럼 안 되는데.”

우겸의 팔을 잡고 다시 자리에 앉혔다.

“아니, 그게 아니고. 그냥 걱정돼서, 사람을 붙여서….”

사람이요? 우겸이 또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잡은 팔에 힘을 주어 옴짝달싹하지 못한 상태가 되었다.

“어, 어…. 제가 혹시 팀장님 걱정시켜드릴 행동을 한 적이 있나요? 저는 없는 것 같은데.”

“응. 내가 문제라서 그래요. 그냥 내가 걱정돼서…. 우겸 씨는 잘못한 게 없는데, 내가 못나서 그래요. 미안해요.”

“근데 저희가 떨어져 있는 시간이 없는데, 걱정할 일이 뭐가 있지.”

우겸이 고민하듯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움직였다.

“아. 그래서 터미널에 계셨던 거예요?”

“미안….”

“그럼 저 지금 핸드폰 한 번만 보여주세요.”

규영은 핸드폰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최근 우겸의 사진만 내버려 두고, 다른 건 다른 핸드폰으로 다 옮겼다. 우겸의 누나와…. 그 외 주변 인물들까지 왜 뒷조사했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었다. 죽었다가 살아난 것도 믿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오히려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 게 분명했다.

핸드폰을 보는 우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찌푸린 것 같기도 하고. 차마 뭐라 물어보지 못하고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그런데 왜 사진을 다 안 지우셨어요?”

“그냥, 별 뜻은, 없어요. 내가 안 보고 있을 때는 이런 표정을 짓는구나, 싶을 때도 있고. 그냥….”

우겸이 묘한 표정으로 규영에게 물었다.

“이게 끝이에요?”

“응?”

“저 몰래 뭐 하거나, 막 그런 건 없으세요?”

팔짱을 낀 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규영은 머리를 긁적이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내가 왜 그 여자랑 연락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새벽에 잠깐 사라져서?”

“아니, 그때 식당 갔을 때, 옆에 있던 여자들이 팀장님에 대해서 수군거리는 걸 들어서요. 그래서, 그냥 속으로….”

“아, 그냥 나한테 물어보지.”

옆에 누가 있었더라. CCTV를 돌려볼 때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래도 우겸이 단단히 오해한 것 같았다. 이따가 한 번 더 영상을 돌려봐야겠다.

“그러면 막 제가 의심한다고 팀장님이 헤어지자고 할 수도 있고, 막….”

우겸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팔을 세게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저랑 안 헤어지실 거죠?”

“…응. 미안해, 우겸아.”

“저도, 죄송해요….”

이렇게 쉽게 화해할 거였는데, 뭘 그렇게 빙빙 돌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모르겠다. 다시금 우겸이 제 품에 들어와서, 작게 숨을 뱉는 소리에 귀가 점점 빨개졌다. 이 숨결을 다시 느낄 수 있어 다행이다.

그런데 앞으로도 잘 지낼 수 있을까. 가만 보면 다시 살아나기 전에 있었던 일이 되풀이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번에 싸움은 예전과 다르긴 했다. 이전에는 투덕거리는 정도의 말다툼 정도였다.

우겸이 집을 나간 건 정말 놀랄만한 일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었다. 이번 만남을 실에 비유한다면, 잠깐 꼬였다가 풀린 기분이었다. 앞으로 또 꼬일지, 아니면 끊길지, 아니면…. 예전과 같은 일이 또 반복될지….

항상 제 욕심으로 우겸과의 인연을 다시 이었다. 이번에는 단단하게 매듭만 지으면 더 이상 끊어지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만 했다. 미처 꼬이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규영은 눈을 천천히 감으며, 옛일을 떠올렸다.

  

***

  

한 번 크게 싸운 이후, 우겸과 나날이 행복하기만 했다. 하루가 다르게 깨가 쏟아졌다. 그걸 의심해야 했는데, 왜 사람은 좋은 일이 생기면 안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갑자기 우겸의 핸드폰 벨소리가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계속해서 울려댔다. 잠결에 겨우 눈을 뜨고 화면을 확인했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다. 심지어 스팸 번호처럼 지역 번호였다. 곤히 자는 우겸을 깨우고 싶지 않아,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대학교 병원 응급실입니다. 혹시 고우리 씨 가족이신가요? 핸드폰에 동생이라고 되어있어서 전화했어요.

고우리? 우겸의 누나였다.

‘응급실이요?’

시간을 보니, 밤 열두 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놀란 눈을 하고, 우겸의 몸을 흔들었다. 깊게 잤는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만요. 우겸아, 우겸아.’

‘…응?’

눈을 반만 뜬 채 우겸이 대답했다. 잠이 제대로 깨지 않아 다시 눈을 감으려고 했다.

‘우겸아, 잠깐만, 일어나 봐. 병원이래. 응?’

‘병원? 누가….’

‘누나가 병원이래, 우겸아. 전화받아보자.’

핸드폰 화면에서 스피커폰 버튼을 눌렀다. 비몽사몽인 우겸의 앞에 가져다 대었다. 그제야 잠이 확 깼는지, 우겸이 눈을 번쩍 뜨고 말했다.

‘여보세요?’

-고우리 씨 동생분이세요?

‘네. 누나한테 무슨 일 생겼어요?’

우겸이 이불 속에서 빠져나와 자세를 곧게 한 다음 전화에 집중했다. 많이 놀란 듯 목소리가 벌벌 떨렸다.

-고우리 씨가 교통사고가 나서 응급실로 실려 왔거든요. 상태가 좋지 않아서 지금 수술해야 하는데, 보호자 동의가 필요해서요. 최대한 빨리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바로 오실 수 있나요?

응급실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우겸의 눈에서 봇물 터지듯 눈물이 줄줄 흘렀다. 이런 상황은 처음 겪는 우겸이었다. 옆에서 보기에도 정신없어 보였다.

‘어, 어.’

대답도 제대로 못 하고 규영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네, 바로 갈게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우겸만 교통사고가 나지 않으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우겸의 누나가 교통사고라니. 생각지도 못한 일에 저 또한 손이 덜덜 떨렸다. 애써 괜찮은 척하며, 놀란 우겸을 진정시켰다.

‘얼른 옷 입고 가자. 그만 울고. 응?’

서둘러 옷을 입혔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저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우겸아, 괜찮을 거야. 응? 일단 얼른 가자. 지금 새벽이라 금방 갈 거야.’

‘어떡해…. 무슨 갑자기 교통사고야.’

옷만 걸치고 서둘러 집을 나왔다. 우겸을 조수석에 태운 다음 내비게이션에 병원을 목적지로 찍었다. 새벽이어도 거리가 꽤 있던 터라 삼십 분이 조금 넘는 시간이 안내되었다. 굳은 표정을 하며 차에 속도를 점점 올렸다. 새벽이니, 이 시간보다 더 빠르게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가는 내내 우겸이 어찌나 우는지, 차에 있는 휴지가 부족할 정도였다. 저 또한 안절부절못하였다. 아무래도 우리의 사고가 자신이 우겸을 만나지 말아야 하는데, 만나서 그런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병원 앞에 차를 세우고, 우겸을 먼저 병원 안으로 들여보냈다. 주차장에 주차를 아무렇게나 한 다음, 서둘러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응급실 안으로 들어가 우겸을 찾았다. 그때 한 남자가 침대 앞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응급실 안이 떠나가도록 서럽게 우는 중이었다.

‘우겸아.’

규영이 옆에서 가만히 모든 상황을 지켜보았다.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한 곳으로 바쁘게 움직였다. 거기의 귓가에 코드블루, 코드블루, 응급 중환자실, 코드블루, 코드블루, 응급 중환자실이 맴돌았다.

규영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모든 게 다 자신 때문이었다. 누나와 잘살고 있는 우겸에게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다시 살아나서 좋아할 게 아니었다.

우겸과는… 만나서는 안 되는 거였다.

우리의 장례를 치르고 우겸은 곧바로 학교를 휴학했다. 그리고 규영의 집을 떠나 우리와 같이 살았던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를 갑작스럽게 떠나보낸 탓에,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루, 하루 우겸은 불안정하게 변했다. 점점 얼굴과 몸이 야위어갔다.

‘우겸아.’

‘응?’

‘오늘도 밥 안 먹었어? 냉장고에 사둔 음식이 그대로인데.’

‘그냥. 입맛이 없어서.’

규영이 냉장고에 우겸이 좋아할 만한 음식을 다시 채워 넣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뭘 하는가. 사 온 만큼 버리는 양도 똑같았다.

우겸은 모든 게 제 탓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자신이 규영과 같이 지내지 않고, 우리와 같이 지냈더라면, 병원에 더 일찍 도착했을 거고, 그러면 살아났을 거라고. 매일 같이 이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잠도 제대로 자지 않는 우겸을 보자, 매일 같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저 또한 피가 마르기 시작했다. 혹여 우리를 따라갈까 걱정되어 같이 있고 싶었으나, 그때마다 혼자 있고 싶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어쩔 수 없었다. 이 모든 게 제 탓이었다.

‘저녁에 밥 먹는 것만 보고 가도 돼? 형이 걱정돼서 그래.’

‘나 이제 정말 괜찮아졌어. 아니면 오늘 우리 밖에 나가서 뭐라도 먹을까?’

그날 유독 우겸이 먹고 싶은 음식이 많았다. 고기도 먹고 싶다고 했다가, 생선을 먹고 싶다고 했다가. 계속해서 먹고 싶은 음식을 말했다.

‘괜찮겠어?’

‘응.’

최근에 살이 쭉쭉 빠져서 걱정이었는데, 갑자기 먹고 싶다는 음식을 말하는 걸 보고 이상하기보다는 마냥 좋았다. 우겸이 우리에게 진 짐을 살짝 던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활짝 웃으며, 우겸이 원하는 참치 집에 예약했다. 예전에 자주 갔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발길을 뚝 끊어, 평소에 자신이 노래를 부르던 식당이었다.

평상시보다 더 웃는 얼굴로 식사했다. 그때는 왜 그게 우겸이 징조를 보낸 거라고 생각을 못 했을까.

‘형, 그동안 미안. 오늘은 내가 살게. 그래도 되지?’

‘응. 내일도 먹고 싶은 거 생각해놔. 내일은 형이 사줄게.’

우겸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게, 우겸과의 마지막 식사였다.

이번에는 모든 게 얼떨떨했다. 지난번처럼 우겸을 따라가자니 겁이 났다. 만약, 만약에 죽으면 그만인데, 또 이번처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평소처럼 밥을 먹고, 출근하고, 일하고.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다. 눈물이 날 겨를도 없었다. 그냥, 이 모든 게 제 탓이었기에, 우는 것도 사치라고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운전하다가, 갑자기 시야가 흐려졌다. 혹 사고라도 날까, 비상등을 키고 갓길에 차를 세웠다.

‘….’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핸들에 머리를 박고 넋 놓고 울기 시작했다. 살면서 이렇게 운 적이 있나 싶은 정도로, 계속해서 울었다. 어찌나 마음이 곪고, 곪았는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안전벨트를 푸르고,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을 쓸어내리고, 백미러에 비친 제 얼굴을 쳐다봤다. 참 속도 없었다.

크게 심호흡해도 쉽게 진정되지 않을 정도로 호흡이 가빠졌다. 눈을 지그시 감고, 충동적으로 도로 난간을 향해 핸들을 돌렸다.

이 모든 건 제 이기심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모든 걸 되돌리고 싶었다.

  

***

  

눈을 뜨니 지난번과 같이 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규영은 다급하게 일어나 핸드폰을 확인했다. 다시 돌아왔다. 우겸이 스물세 살이고, 자신이 스물아홉일 때로.

또 반복되는 상황이었다.

‘하.’

이걸 기뻐해야 할까, 슬퍼해야 할까. 넋 놓고 눈만 느릿하게 깜빡였다. 이번에는 우겸의 주위에서 몰래 지켜만 볼 생각이다.

우겸이 사고가 났던 날, 우리가 사고가 났던 날…. 그리고…. 그날 그런 일이 나지 않게 자신이 막아주면, 우겸은 이번에 행복한 삶을 살 것이다.

절대 욕심을 부리지 않으려고 했다. 제 이기심으로 눈앞에서 우겸을 또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더는 소중한 것을 빼앗고 싶지 않았다.

이번엔 우겸이 제발 행복하길….

우겸의 일거수일투족을 혼자서 지켜보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또한 우겸에게 들킬까 봐, 매번 가슴을 졸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우겸과 우겸의 누나인 우리, 그리고 우겸의 주위에 사람을 붙였다.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고, 다행히 우겸은 고비를 무사하게 넘겼다. 옆에서 지켜준 보람이 있었다.

그리고 가끔, 술에 취해 자신도 모르게 우겸의 집 앞을 서성거렸다. 그건 어쩔 수 없었다. 스스로에 대한 보상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만 보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가.

세월이 흐르면서 매일같이 사진으로 우겸을 마주했다. 지금까지 아프지 않고, 잘 자라준 우겸이 너무 대견하고, 고마웠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지방 지사에 자리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겸이 있는 곳이었다. 지금까지 괜찮았으니, 이번에는 잠시만, 정말 잠시만 직장동료로 지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더 욕심을 낸다면 형, 동생 사이까지. 그 이상은 사치였다. 예전과 다르게 제 분수를 알았다.

지난번처럼 앞에서 우겸이 사라진다면 그때는 살지도, 죽지도 못할 것 같았다. 우겸이 없는 삶을 살아간다면 하루, 하루가 지옥일 것이다. 어깨 위에 가득 올려진 죄책감을 누구에게 떠넘길 수도 없고, 훌훌 털 수도 없었다. 그리고 만약 죽는다면, 아니. 이번에는 죽을 용기도 없었다.

이번 생은 정말 우겸과 직장동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무미건조한 관계로 지내려고 한다. 그게 자신에게 있어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사람인지라, 무조건 생각한 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스물아홉에 우겸을 처음 본 순간, 숨이 턱하고 막혔다. 거기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아마 가까운 거리에서 본 게 너무 오랜만이라 더 그럴 것이다.

‘네, 허규영이라고 합니다.’

예전의 앳된 얼굴이 얼핏 남아있을 뿐, 많이 달라졌다. 사진에서보다 더 잘생겼고, 아니, 귀여웠다. 키도 꽤 컸고, 더 보기 좋았다. 매일, 매일 애타게 그리워했던 얼굴이었다. 눈물을 참기 위해 입을 꾹 닫고 인상을 썼다. 우겸의 눈에 어떻게 비추어질지 모르겠으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손을 건네어 악수하는데도 자꾸만 눈물이 비집고 나오려고 했다. 얼마 만에 잡아보는 손인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며 우겸을 꼿꼿하게 쳐다보았다. 놓고 싶지 않았다.

그 이후 우겸은 자꾸만 제 속도 모르고 피해 다니기 바빴다. 그럴 때마다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그리고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다. 평소 질투가 많았던 터라, 동료 사이로 지내는 것이 생각보다 고된 일이었다. 우겸이 여직원과 이야기하면 그게 그렇게 질투가 났고, 남직원과 이야기해도 그렇게 화가 났다.

연인이 아닌 직장동료로만 남고 싶다는 다짐을 불과 며칠 전에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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