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의문스러운 사람 (11/13)

11. 의문스러운 사람

“그런데 희영 씨랑 언제 식당 이야기를 했어요? 나 몰래 따로 문자를 하는 것 같지는 않고.”

우겸이 표정을 굳히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아뇨. 지난번에 팀장님 잠깐 회의 가셨을 때, 이야기 나온 거예요.”

“아. 난, 또.”

아무런 뜻이 없는 규영의 말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혹시, 혹시나 해서 그러는데.”

“응?”

우겸이 초조한 듯 규영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천천히 한마디, 한마디 내뱉었다.

“혹시, 저, 자고 있을 때, 제 핸드폰 보세요?”

“어?”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규영도 당황했는지, 젓가락을 식탁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방금까지 화기애애했던 집 안에 정적이 흘렀다. 서로의 눈만 쳐다볼 뿐이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방금과 상황이 달라졌다. 규영이 안절부절못한 채 우겸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아니, 그게.”

“설마 했었는데”

하긴, 예전부터 이상하게 핸드폰이 맨날 두었던 곳에 없었다. 신기하게 규영이 저를 두고 혼자 어디를 갈 때면 핸드폰이 아예 없어지거나, 생각지도 못한 곳에 놓여 있었다.

그냥 그러려니 했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따지고 보면 저는 정말 떳떳하고, 규영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고 돌아다니는 규영이, 그런 규영이 핸드폰을, 제 핸드폰을 확인했다니….

갑자기 이성의 끈이 뚝 하고 끊긴 기분이었다.

“아니, 우겸아. 그게 아니고.”

“어쩐지, 가끔 자고 일어날 때마다 핸드폰이 이상한 데 있더라.”

“아냐, 그냥 몇 번 핸드폰으로 시계 보고.”

“거짓말.”

규영의 말을 끊고 할 말을 했다.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식탁 위에 있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래도 이 불편한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정말 몇 번 안 봤어. 정말이야. 미안. 미안해.”

우겸이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 규영의 핸드폰을 노려봤다.

“그러면 저도 지금 팀장님 핸드폰 봐도 돼요?”

“어? 아니, 우겸아.”

규영이 서둘러 식탁 위에 있는 핸드폰에 손을 올렸다. 보지 말라고 하는 무언의 행동이었다. 우겸이 작게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제 핸드폰은 지금까지 마음대로 봐 놓고, 제가 팀장님 핸드폰 보는 건 안 돼요?”

“무슨 말이 그래. 그냥 걱정돼서.”

이를 악물고 규영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뭐가 걱정된다는 거고, 왜 지금 당장 핸드폰은 못 보여주는 걸까. 곪을 대로 곪은 속이 기어이 터졌다.

“제가 지금까지 모른 척하고 계속 참고 참았는데.”

규영이 우겸의 손을 잡아 쥐었다. 힘을 세게 주고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우겸아.”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혹시 저 말고 다른 사람 만나세요?”

“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지난번에 사무실에 찾아온, 업무상 만났다는 여자가 혹시 약혼자예요?”

규영이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앞에 있는 젓가락을 괜히 만지작거리며, 손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그건.”

“변명은 필요 없고, 맞아요? 지금 약혼자가….”

우겸이 의자를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마, 설마 했던 일이…. 쌓이고 쌓였던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규영과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서둘러 현관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짐을 챙길 여유도 없었다. 일단 나가고 싶었다. 문고리를 잡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규영이 뒤에서 제 팔을 붙잡았다.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현실로 마주하게 되니 미칠 지경이었다.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계속 흘러나왔다.

“우겸아, 일단 나가지 말고 내 이야기부터 들어.”

“여기서 무슨 이야기를 더 들어요. 속으로 조마조마하면서, 꾹 참고 아무 말 안 하고 참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그동안 저 가지고 노는 게 그렇게 재미있으셨어요?”

“무슨 말이 그래. 내가 널 왜 가지고 놀아. 응? 잠깐만, 일단 안에 들어와서 이야기해.”

규영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우겸과 달리 담담해 보였다.

보통은 잘못한 사람이 빌어야 하지 않나? 뭐가 그리 당당해서 저런 자세로 나오는 걸까. 정말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눈에 빤히 보였다. 우겸 답지 않게 언성을 높여 말했다.

“팀장님이 나가실래요? 그러면 제가 안으로 들어갈게요.”

“너, 정말 이렇게까지 할래? 일단 대화부터 먼저 하고 화내도 늦지 않잖아.”

규영 또한 잔뜩 굳은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우겸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이 점점 들어갔다. 우겸의 하얗던 팔뚝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안 들을래요. 그냥 여기까지만 해요.”

“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또.”

규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우겸의 팔을 천천히 놓았다. 그리고 팔짱을 끼며 다시 천천히 말했다.

“일단 신발 벗고 안으로 들어와.”

이 상황이 왜 이렇게 낯이 익나 했다. 지난번에 꾸었던 꿈 내용과 거의 흡사했다. 이렇게 현관문 앞에서 대치하고 있으면 규영이 저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겠지.

규영이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꿈이랑 똑같이 상황이 흘러갔다. 우겸이 하는 수없이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왔다.

“그러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핸드폰 보여주세요. 안 그러면 저 대화 안 해요.”

“핸드폰은 지금 못 보여줘.”

“그러면 여기 제집이니까 팀장님이 나가세요.”

“너 진짜, 이렇게까지 할래?”

최근 들어 마른 우겸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제 가슴을 손으로 꽉 부여잡고 울음을 겨우 진정시켰다.

“그럼 팀장님은 왜 핸드폰 안 보여주세요? 솔직하게 말하세요, 저 몰래 맨날 그 여자랑 연락하고 있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무슨 소리야, 정말. 내가 왜 너를 내버려 두고 다른 사람이랑 연락해.”

“진짜, 끝까지 거짓말은.”

우겸이 규영을 죽기 살기로 노려봤다. 이렇게까지 말이 안 통할 줄은 몰랐다. 그냥 미안하다, 그 한마디를 하는 게 저렇게 싫은 걸까. 자신이 잘못을 저질러놓고, 물어보는 질문에 하나같이 대답도 제대로 못 하면서…. 왜 자꾸만 당당하게 구는 걸까.

“지금 핸드폰이 문제가 아니잖아. 안 그래? 그리고 약혼 이야기는 집안끼리 이야기가 잠깐 나온 거고, 그때 불쑥 그 여자가 찾아온 거야. 나는 그 사람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고, 정말 아무것도 몰라. 그때 얼굴 본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만난 시간도 30분도 안 돼. 정말이야.”

끝까지…. 고개를 뒤로 젖히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지난 새벽에 어디 다녀오셨어요? 서울 갔다가 집에 온 날이요.”

“….”

방금까지 제 할 말을 잘하던 규영이 입에 풀이라도 바른 듯 꾹 다물고만 있었다.

“팀장님이 말한 대화가 이런 거예요? 제가 물어보는 거에 하나도 대답 못 하고, 도대체 제가 뭘 믿고 팀장님이랑 계속 만나요?”

“그건 나중에, 나중에 다 설명할게. 일단은 진정하고, 우겸아.”

“지금도 대답 못 하는데, 나중이 있긴 해요?”

“말 계속 그렇게 할래? 그러는 너는 이렇게 혼자 끙끙 앓으면서 나랑 계속 만날 거였어?”

갑자기 규영이 화가 난 듯 행동했다. 지금까지 말짱하던 얼굴색이 시뻘겋게 변하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뭐에 욱하였는지 모르겠으나,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말했다.

“제가 팀장님한테 말하면 뭐가 달라져요? 지금 봐봐요, 싸우기밖에 더 하지. 해결되는 게 하나도 없잖아요. 지금도 저만 상처받고, 팀장님은 아무렇지도 않잖아요.”

“내가 왜 아무렇지 않아. 일단 진정하고, 우겸아. 자리에 앉아서.”

팔을 억지로 잡아끌어 소파에 앉히려고 했지만, 우겸이 단칼에 규영의 손을 쳤다.

“같이 있기 싫어요.”

“지금 네가 우는데 내가 어떻게 나가. 일단 너 진정되고.”

“그럼 제가 나갈게요.”

“…하.”

규영이 거실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씩씩거렸다. 그 모습에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는 수없이 규영을 가로질러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문을 열 수도 있다는 생각에 문을 잠갔다. 더는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침대 위에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크게 쾅, 하고 들렸다. 화들짝 놀란 우겸이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제가 예상했던 게 다 맞았다.

이렇게 울다가는 쓰러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마음처럼 몸도 지쳤는지, 걸을 때마다 현기증이 났다. 벽을 짚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잡고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눈을 계속해서 깜빡였다. 이렇게 집이 넓었나 싶은 정도로 휑했다. 당연하게도 규영은 거실에 없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길 바랐는데, 역시…. 규영과는 여기까지인가.

목울대가 가볍게 떨렸다. 이를 무시하고, 이 방, 저 방을 왔다 갔다 하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먼저 옷방에서 큰 가방을 꺼냈다. 옷이며, 속옷이며 구분하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마구잡이로 넣었다. 일단 이 집을 나가고 싶었다.

“너무 충동적인가….”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내일 회사에 가서 규영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아까 절실히 느꼈다. 규영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다 제멋대로 하려고 굴었다. 둘 다 어느 하나 지지 않으려고 하는 걸 보고 깨달았다. 결국 규영과의 끝은 헤어짐이라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규영에게서 단 한 통의 문자나 전화도 오지 않았다. 솔직히 미안하다는 문자 한 통이라고 와 있을 줄 알았는데, 괜한 기대였던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이미 헤어진 거나 다름없었다.

“하….”

회사에 출근해서 매일같이 규영과 같이 일할 수도 없었다. 그때마다 지금 이 격한 감정이 올라올 게 분명했다. 그냥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고 하는 게 더 맞겠다. 아까도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아 소리를 지르고 울고불고…. 회사에서 얼마 안 남아있는 이성의 끈을 잡는다고 해도, 과연 얼마나 버틸까 싶었다.

“일단, 일단….”

어디든, 택시를 타든, 버스를 타든, 발이 가는 대로 떠나고 싶었다. 일단 규영과 같이 지냈던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어디를 가는 게 좋을까. 일단 서울로 가는 게 나을까 싶다가도, 지금 이 늦은 시간에 우리의 집에 가면 화들짝 놀랄 게 분명했다. 괜히 죄 없는 우리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가게 되면 갑자기 무슨 일이냐, 회사는 어떻게 된 거냐, 등등….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건 차차 말해도 늦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서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았다고 둘러댈 예정이다.

얼마나 집을 비울지 몰라, 최대한 집을 정리했다. 하긴, 딱히 정리할 것도 없었다. 아까 규영과 먹으려고 했던 음식만 해결하면 됐다.

“그냥 먹지 말걸.”

먹고 싶다고 하지 않았으면, 이걸 사 오지도 않았을 테고, 그러면 희영이…. 아니다. 지금 후회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언젠가는 규영과 이야기를 해야 할 문제는 맞았다.

  

***

  

집 밖을 나오긴 했지만, 정말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이 나이 먹도록 운전도 제대로 할 줄 몰라 그 흔한 차 한 대가 없었다. 차가 쌩쌩, 빠르게 달리고 있는 도로를 옆에 끼고 힘없이 길을 걸었다.

저 멀리 택시가 보였다.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었다. 차가 멈추고, 서둘러 차에 올라탔다. 자리에 앉자마자 택시 운전사에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근처 버스터미널로 가주시겠어요?”

“가는 건 어렵지 않은데 지금 시각이 늦어서…. 버스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괜찮아요. 뭐… 하나쯤은 있겠죠.”

우겸이 겨우 대답했다. 아까 울어서 목소리가 살짝 갈라져 있었다. 퉁퉁 부은 눈가를 들키고 싶지 않아 고개를 숙였다.

“어디 갈 곳은 정하고 가는 거예요?”

“…아뇨.”

“학생은 아니죠?”

택시 기사의 목소리에 의심스러움이 묻어나왔다.

“네, 제가 어제부터 밤새워 일하느라 잠을 못 자서요.”

그 말을 끝으로 기사는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멍하니 창문 밖을 쳐다봤다. 밖에 사람이 하나도 안 보일 정도로 깜깜했다.

하긴, 이곳은 서울과 달리 유독 밤이 어두웠다. 혼자 지낼 때는 저녁 이후로 밖을 잘 나가지 않았다. 겁이 많기도 했고, 혼자 지내는 데 굳이 밤에 나갈 일도 없었다.

칠흑 같은 밖처럼 제 마음도 끝없이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혼자 후회만 했다. 차라리 규영과 사귀지 말걸, 꿈에 나왔을 때부터, 그냥 서울로 올라갈 걸 그랬다. 그 말도 안 되는 꿈을 안 꾸겠다고….

오히려 현실보다 꿈이 더 나았다. 꿈은 깨면 꿈속에 있었던 일들이 공중분해되지만, 현실은 오로지 제가 다 감당해야 했다. 규영과 헤어지는 것도, 회사를 그만두는 것도…. 당분간 제일 힘든 건 제 옆에 규영이 없는 게 아닐까….

“손님, 다 도착했어요.”

터미널에 도착했다는 말에 창문 밖을 살폈다. 사람들이 아직 있는 걸 보니 아직 버스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짐을 챙기고 요금을 냈다.

“조심히 다녀와요, 아마 우리 동네가 가장 좋다고 느낄걸요.”

“아, 감사합니다.”

지금은 이곳만 아니면 된다.

버스터미널에 들어가서 지금 바로 탈 수 있는 버스를 예매했다. 다행이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못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갈 뻔했다.

평일이라서 그런가, 버스 안에도 사람이 많이 없었다. 구매한 좌석을 찾아 앉았다. 가는 내내 눈이라도 붙이지 않으면, 규영에게 먼저 연락할 것 같았다. 핸드폰을 주머니 안에서 꼭 쥔 채 눈을 감았다. 도착할 때까지 눈을 감고 최대한 아무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이 스물아홉에 별짓을 다 하는 것 같다. 살면서 이렇게 충동적인 행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모든 건 다 규영 때문이다.

멀쩡한 집을 놔두고, 떠난 것도 처음이었다. 이 나이에 무슨 반항인지, 모르겠다. 그냥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가는 곳에 바다가 있으면 좋겠다. 시야가 탁 뚫린 곳에 가면 이 답답한 마음도 괜찮아질 것 같았다.

뻥 뚫린 고속도로를 몇 시간 달리니, 목적지에 도착했다. 정확히 어딘지도 모르는 곳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지역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충동적이었다면, 지금은 현실적으로 정신이 돌아왔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터미널 근처를 벗어나자 주위가 더 어둑어둑해졌다. 불빛 한 점 없었다. 불안감에 이를 꾹 물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시간을 보니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규영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먼저 문자나 전화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정처 없이 걷다가 길 한가운데 우뚝 섰다. 계속해서 걷다가는 밤새 걸을 것 같았다. 현재 상황에 아무런 답이 없었다. 일단 차근차근 정리해 보면, 규영에게는 연락할 수 없었다. 규영의 얼굴에 대고 집을 나가라고 소리까지 바락바락 질렀는데, 지금 와서 연락하면 너무 우스운 꼴이었다.

그래도 회사는 규영과 별개의 문제였다. 이렇게 갑자기 그만두는 게 맞나 싶었다. 따지고 보면 규영은 자신보다 돈도 많고 경력도 많았다. 둘 중 한 명이 그만둬야 한다면, 규영이 그만두는 게 맞지 않나?

아니지, 규영은 이 회사 회장의 조카였다. 굳이 먼저 그만둘 이유가 없었다. 제가 생각하는 규영이라면 아까 같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과 행동을 하며 일할 것 같았다.

규영은 아무렇지 않았다.

그럼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할 것 같은 사람인 제가 그만두는 게 맞았다. 입술을 꾹 물고 멍하니 어두운 하늘만 올려다봤다.

결심이 섰다. 그만둔다고 보내면 규영에게서 무슨 연락이 올 것이다. 알겠어요, 하고 답이 오면 정말, 정말 이용당한 게 맞고. 아침에 부리나케 연락이 오면 아직 희망을 품어도 되지 않을까.

고민의, 고민을 더 해서 핸드폰 화면에 글을 지우다가 쓰기를 반복했다.

[죄송합니다. 개인 사정으로 퇴사해야 할 것]

아니다.

[문자로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개인 사정으로 퇴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게 맞나.

[팀장님. 문자로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개인 사정으로 갑작스럽게 퇴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 연락이 어려워, 추후 상황이 진정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보내기 전까지 수백 번의 고민을 했다. 지금 버스터미널을, 아니.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 내일 제시간에 출근할 수 있다.

아니다. 아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내일 아침으로 예약 문자를 보내놓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큰일이라도 한 듯 크게 숨을 쉬었다. 일단 하나는 내일의 저에게 미뤘다.

“어떻게든 되겠지.”

주변을 두리번거려 숙박업소를 찾았다. 보통 역이나 터미널 근처에 모텔이 있으니, 오늘 하루 잘 곳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건너편에 깜빡거리는 불빛이 보였다. 다행히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곳을 쳐다보며 빠르게 걸었다. 반짝이는 빛을 지도 삼아 가까이 걸어가자 숙박시설이 보였다. 어디를 들어갈지 고민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솔직히 외형이 다 거기서 거기였다. 우겸은 그나마 제일 깔끔해 보이는 곳으로 골라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숙박이요?”

“네.”

누가 봐도 운 사람처럼 부은 우겸의 얼굴을 한번 쓱 보고, 선심 쓰듯 말했다.

“잠시만요, 금액은 사만 원이에요. 일회용품 가격은 원래 따로 받는데, 시간도 늦었으니 그냥 안 받을게요.”

우겸은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지갑에서 현금을 꺼냈다. 오만 원을 내고 만 원과 함께 키와 일회용품을 건네받았다.

“퇴실은 11시까지고, 605호예요.”

“네, 감사합니다.”

데스크를 지나쳐서,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버튼을 누르고 가만히 기다렸다. 혼자 이런 곳을 온 적도 없거니와, 규영과도 온 적이 없었다. 긴장한 탓에 손에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괜한 헛기침을 하며, 쿵쿵거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서둘러 안에 탔다. 점점 층수가 올라갈 때마다 침을 꿀꺽꿀꺽 삼켰다. 죄를 짓는 것도 아닌데, 뭐라 그리 떨리는지. 바들바들 떨리는 양손으로 가방끈을 꾹 잡았다.

6층이 되자 서둘러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605호를 찾았다. 복도 맨 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주위에 누가 볼까, 아니면 누가 쫓아올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서둘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까지 무서운 줄 알았으면 그냥 집에 가만히 있을 걸 그랬다. 안으로 들어와서 문을 잠그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주위를 훑어보고 다시 무거운 한숨을…. 과연 여기서 혼자 잘 수나 있을까.

  

***

  

서울에 다녀온 이후 우겸의 행동이 점점 이상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식당에서부터였던 것 같다. 자신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평소 알던 사람을 마주치기라도 한 건가.

그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려고 해도 우겸이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결국 식당에 사정해서 CCTV를 받아봤다.

전화를 받으러 사라진 직후 우겸은 그냥 가만히 의자에 앉아있기만 했다. 우겸의 주위 CCTV를 둘러봐도 이상할 게 없었다. 아는 얼굴이라도 있을까 싶어 여러 번, 매일 같이 돌려봤지만, 하나같이 모르는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그 이후로 우겸은 멍하니 있을 때가 많았다. 무슨 일이냐고 닦달할 수도 없었다. 재촉하면 제 품에서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 가만히 우겸의 행동을 지켜만 봤다.

어릴 때 우겸은, 그러니까 스무 살의 우겸은 무슨 일이 있으면 입을 꾹 다물었다. 항상 곪고, 곪아서 진물이 날 때까지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참아댔다.

과거의 우겸, 아니 스무 살에 우겸이 했던 행동이 반복될 것 같아 갑자기 두려움이 솟구쳤다. 요즘 가뜩이나 꿈에서 스무 살, 스물세 살의 우겸이 자꾸만 나왔다. 꿈을 통해 또 우겸과 멀어질 수도 있다는 걸 예언이라도 해주는 것 같았다.

“팀장님, …팀장님.”

꿈에서 매일같이 우겸의 마지막을 본다. 그럴 때마다 자기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는 건 스물여덞의 우겸이었다.

“…응.”

얼마 전 우겸이 병원에 다녀온 이후로 더 심각해지는 것 같았다.

아마도 또 우겸을 눈앞에서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한동안 멀쩡했었는데, 어떤 것이 시발점이 되었길래 이렇게 조바심이 나는 걸까.

거기에 최근 들어 점점 살이 빠지는 우겸의 얼굴을 보니 더 마음이 쓰였다. 저 또한, 초조한 마음에 덩달아 식욕이 없었다.

과거를 잊고, 아니, 지난날의 우겸을 잊고 다시 시작하는 게 맞았다. 그러나 자꾸만 예전에 있었던 일이 현재에도 되풀이될 것만 같았다. 아무리 붙잡고, 붙잡아서 제 옆에 우겸을 둔다 한들, 자꾸만 제 곁을 벗어나려고 했다.

  

***

  

어린 우겸은 저와 말이 통하지 않을 때 짜증을 많이 냈다. 대부분 싸우는 건 우겸이 친구들과 술을 먹으러 밖에 나가고 늦게 들어올 때였다.

그날은 스물세 살 우겸의 사고 날이었다. 가뜩이나 신경이 예민한데, 어제까지 술을 진탕 먹고 들어와 놓고, 오늘 또 나간다고 난리를 부렸다.

그놈의 영재는 왜 자꾸만 여자친구랑 헤어지는 건지.

‘오늘은 안 가면 안 돼?’

‘나도 그러고 싶은데, 영재가 술집에서 울고 있대. 잠깐 얼굴만 비추고 올게.’

우겸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정말 안 가면 안 돼?’

‘나 딱 한 시간만 있다가 올게. 딱 한 시간. 미안해, 형.’

가볍게 입을 맞추고 신발을 신는 우겸의 팔목을 잡았다. 아무래도 이렇게 밖을 내보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또 같은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사고 났을 때와 시간대가 비슷했다.

‘나 정말 한 시간만 있다가 올게. 응?’

‘오늘 정말 꿈이 안 좋아서 그래, 우겸아. 응? 형 말 들어주라.’

우겸이 신발을 신다가 규영을 노려봤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항상 웃기만 했는데, 왜 갑자기 저렇게 무서운 표정을 짓는 건지 모르겠다.

‘거짓말.’

‘뭐? 형이 너한테 무슨 거짓말을 해.’

‘나 솔직히 다 알아.’

‘뭘?’

우겸이 더 말을 잇지 않고 현관문을 손으로 잡았다. 규영은 이 상황이 싫었다. 일단 우겸이 제멋대로 집을 나가려고 하는 행동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 한두 번은 스무 살이니, 아직 친구들이 좋을 때니까,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겼다. 그러나 요즘 들어 우겸이 자꾸 밖으로 나가려고만 했다.

우겸이 턱을 악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거짓말했어?’

‘내가 너한테 무슨 거짓말을 해.’

‘형, 맨날 나 나갈 때마다 괜찮아, 조심히 다녀와, 해놓고 뒤에서는 내가 뭐 하는지 사람 붙였잖아.’

‘뭐?’

뭐라 변명을 할 수 없었다. 우겸이 한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눈치를 못 챈 줄 알았는데, 어디서, 어떻게 들킨 거지. 인상이 저절로 구겨졌다.

‘일단 갔다 와서 이야기해. 지금 이야기 해봤자 서로 목소리만 높일 것 같으니까.’

우겸이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규영이 잽싸게 손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나가지 못하게 힘을 주어 집 안으로 끌어당겼다.

‘왜, 애초에 이럴 거였으면 사람 좋은 척 다녀오라고 하지를 말지. 왜 나한테 거짓말했어? 그래 놓고 뭘 잘했다고 이제는 꿈이 안 좋니, 무슨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

‘잠깐만, 나 지금 네가 하는 소리 하나도 이해 못 하겠거든? 일단 진정하고 차근차근 말해 봐.’

‘됐어.’

우겸이 규영의 어깨를 밀치고 다시 나가려고 하자, 규영이 목소리를 높였다.

‘나가지 말라고 했어.’

자꾸만 벗어나려는 우겸을 안아 들었다. 발버둥 쳐봤자, 제 힘에 이길 수 없었다. 방 안으로 들어와 침대에 앉혔다.

‘형, 미쳤어?’

우겸이 표정을 굳히고 매섭게 노려봤다. 그 눈빛이 무서워야 하는데, 그 모습조차 귀여웠다. 자꾸만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뒤를 밟아달라고 했는데, 도대체 언제 들킨 건지 감이 안 왔다. 차라리 모른 척 발뺌할 걸 그랬나.

‘말하다 말고 나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 우겸아.’

머리를 헝클이며 답답한 사람처럼 굴었다. 규영은 가만히 우겸의 손을 잡고 눈을 마주쳤다.

‘그래서 무슨 소리인데.’

‘며칠 전에 갑자기 형 핸드폰에 알람이 떠서, 나도 모르게 봤거든. 그런데 거기 내 뒷모습 사진이 있잖아. 뭐지 싶어서 위를 올려보는데 내 사진밖에 없고. 그래서 내가 일부러 요즘 맨날 밤에 나갔는데, 그때마다 내 사진이 찍혀서 형 핸드폰으로 오더라.’

‘아….’

우겸이 제 핸드폰을 볼 줄은 몰랐다. 그럴 줄 알았으면 잠금이라도 해놓을걸. 우겸의 사진이 찍혀올 때마다 어찌나 귀엽던지, 차마 지울 수 없었다. 학교에 갈 때, 친구들이랑 있을 때. 시간, 장소에 따라 우겸의 표정이 제각각이었다. 평소에 본 적도 없는 얼굴을 하고 있을 때도 있어 그대로 쭉 내버려 뒀는데… 미처 우겸이 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아?’

우겸이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팔을 세게 잡아, 다시 앉혔다. 규영의 힘을 쉽게 이길 수는 없는지, 우겸이 인상을 찌푸리고 규영을 노려보았다.

‘그야, 네가 걱정돼서 그랬지.’

‘아니, 걱정된다고 사람 붙이는 게 말이 돼? 이게 형이 말하는 연애야? 나한테 솔직하게 친구들 적당히 만나면 좋겠다, 하고 말했으면 해결되는 문제잖아. 이렇게까지 해야 해?’

솔직히 우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싸움을 더 길게 늘어트려서 밤새 싸울까. 그렇게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 같았다.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트렸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친구들 안 만날 거였어?’

‘당연한 거 아니야?’

‘거짓말은 네가 하는 것 같은데.’

규영이 먼저 선수를 쳤다. 우겸의 화를 천천히 돋울 생각이었다. 스물세 살의 우겸과는 싸운 적이 없었다. 신기하게도, 스무 살의 우겸과 성격이 정반대였다.

스무 살의 우겸은 제멋대로였고, 한 번 화가 나면 그 싸움을 끝을 보는 편이었다. 항상 그 끝이 몸으로 하는 대화였는데, 오늘은 모르겠다.

평소보다 몹시 화가 나 보였다. 앳된 얼굴로 씩씩거리면서 얼굴이 새빨개져 있는 걸 보니 꽤 흥분한 것 같았다. 저 모습도 왜 이렇게 귀여운 건지.

진정 우겸에게 미친 건가 싶은 정도였다.

‘왜 웃어?’

‘내가 언제?’

저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온 것 같았다.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고, 무표정을 지었다.

‘아, 진짜.’

우겸이 제 화를 이기지 못하고, 한숨을 크게 쉬었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생각보다 감정 표현이 솔직했다.

일단 잠깐 자리를 비운 다음 다시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 계속 씩씩거리는 걸 보니, 욱하는 심정으로 밖에 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오랜 침묵 끝에 규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하자.’

규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우겸이 다급하게 손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눈에 눈물이 고인 채로 말했다.

‘뭐야, 이렇게 끝낸다고?’

일부러 엄포를 놓은 건데, 갑자기 우겸이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큰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뭔가 잘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제 등에 안겼다.

설마 헤어지자고 받아들인 건가. 그런 생각은 추호도 없는데.

‘앞으로 친구들 안 만날게. 아니, 술 안 마실게. 그러니까, 형. 응?’

우겸에게 등을 돌리고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자꾸만 어깨가 들썩였다. 애써 들뜬 마음을 누르며,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형, 화 많이 났어? 내가 맨날 술 먹고 그래서, 걱정돼서 그런 거지? 응?’

‘….’

우겸의 호흡이 색색거리며 가빠지는 게 느껴졌다. 킁킁거리며, 코를 들이마시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이걸 모른 척하기에는, 하는 짓이 너무 귀여웠다. 이를 악물고 웃음을 참았다. 천천히 뒤를 돌았다. 우겸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규영이 사람 좋은 척 등을 느릿하게 토닥였다.

‘왜, 울어. 뭘 잘했다고.’

‘흐…,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 그러니까 무섭잖아.’

자꾸만 우는 우겸을 겨우 침대에 앉힌 다음 눈물을 닦아줬다. 아직 애는 애였다.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이러다가 자신도 따라 울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을까. 우겸의 숨이 점점 고르게 변했다. 더 이상 나올 눈물도, 콧물도 없는지, 가만히 제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술을 자주 마시러 가는 걸 한 번쯤은 뭐라고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상황이 커질 줄은 몰랐다. 오히려 사람 붙인 걸 들키게 된 걸 감사히 여겨야 하나 싶은 정도였다.

‘앞으로 밤늦게까지 술 안 마실 거지?’

우겸이 대답 없이 입만 삐쭉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해야지, 우겸아.’

‘…응.’

‘형이 사람 붙여서 미안해. 너무 걱정돼서 그랬어. 내 눈에만 예뻐 보이면 그만인데, 다른 사람 눈에도 그렇게 보일 것 같아서. 형이 미안해.’

‘…그건 아닐걸.’

규영이 퉁퉁 부은 우겸의 눈에 입을 맞추었다. 붕어가 따로 없었다. 빨개진 코를 괜히 손으로 톡 건드리고, 빤히 쳐다보았다.

‘형이 너를 너무 많이 좋아해서, 아니, 사랑해서 그랬어. 미안해.’

‘응, 나도 많이 사랑해. …그런데 계속 내 뒤에 사람 붙이고 그럴 건 아니지?’

우겸이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 대신 우겸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방금까지 울었던 탓에 아직 호흡이 벅찬 듯, 혀를 섞는 내내 꽤 힘들어 보였다.

그래도, 그래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겸이 또 나갈 수도 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밤새 괴롭혀서라도 제 옆에 붙들어 놓고 싶었다. 오늘은 정말 침대 밖으로, 아니 집 밖으로 우겸을 내보낼 수 없었다. 나이가 달라졌어도, 날짜는 계속 반복된다. 혹여 같은 날짜에 사고를 당하는 거라면 더욱 우겸을 밖에 나가게 할 수 없었다.

우겸의 옷 안으로 손을 넣어 허리를 쓸어내렸다. 밖을 나간다고 방금 씻은 탓에 몸이 부드러워 만지기 딱 좋았다. 눈을 질끈 감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오늘은 몹시 부끄러운 듯했다.

우겸의 반응이 너무 귀여워 놀리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허리를 쓰다듬던 손이 점점 앞으로 갔다. 판판한 가슴을 한 번 쓸어내리자, 우겸이 어깨를 움츠렸다. 옷 안으로 얼굴을 넣어 젖꼭지를 게걸스럽게 빨았다.

‘아….’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천천히 상의를 벗기고 제 아래에 깔린 우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별것도 아닌 일로 괜히 우겸을 울렸다. 빨개진 눈가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많이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그 말에 우겸의 귀가 터질 듯이 빨개졌다. 규영이 귀를 살짝 깨물며, 천천히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 작은 혀가 너무 좋았다. 턱을 손으로 잡아, 입을 더 벌렸다. 우겸의 여린 볼 안쪽을 혀로 훑었다.

‘으, 응.’

앓는 소리를 내며 제 옷 안으로 손을 넣었다. 옷을 벗기려고 하는 듯 손을 서성거렸다. 점점 마음이 조급해졌다. 급할 필요도 없는데, 매일같이 할 수 있는 행위인데…. 천천히 하려던 것을 포기하고 급하게 굴었다.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벗기려고 손을 넣고 우겸의 반응을 살폈다. 아직 그놈의 영재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거부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다행히 그건 아니었는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쳐다봤다. 색색거리면서 숨을 쉬는 꼴이 정말 사람을 미치게 했다. 우겸을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힌 다음, 정성스럽게 몸을 훑었다. 보들보들하고, 만질 때마다 자국이 남는 여린 몸.

우겸의 입안에 손가락을 넣었다. 처음에는 이 손가락조차 빠는 게 무척 어색하고 서툴렀는데, 이제는 곧잘 빨았다. 성기라고 생각하며 빠는지,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우겸과 입을 맞출 때부터 곧게 섰던 성기가 더 빠듯해졌다. 빨리 넣고 싶어졌다.

입안을 휘젓던 손가락을 빼서, 우겸의 회음부 주변을 꾹 눌렀다. 우겸도 싫지 않은지, 넣기 편하게 다리를 벌리고 자세를 잡았다. 규영은 아무 말 없이, 우겸의 구멍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아!’

며칠 안 해서 그런가, 손가락 하나도 버거웠다.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장 안에 있는 젤을 꺼냈다. 급한 마음에 우겸의 성기에 젤을 들이부었다. 성기며, 회음부며…. 이불까지 젤 범벅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이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는 건 말이 안 되었다. 온몸이 벌건 상태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꼴이 사람을 정말 미치게 했다.

다시금 손가락을 넣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젤을 너무 많이 뿌린 탓에 소리가 너무 질척였다.

‘읏, 아… 파, 형, 형.’

우겸이 인상을 쓰고 끙끙거리자, 규영이 하던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다급하게 입구에 제 성기를 맞대어, 천천히 넣기 시작했다.

‘벌써 넣게?’

규영은 아무 말 없이, 성기의 앞부분을 넣었다가 빼는 행동을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벗어나려고 바지락 거리며 움직였다. 하는 수 없이 앞에 있는 우겸의 성기를 가볍게 쥐고 흔들었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는 우겸이었다.

뭐가 그리 심술이 났는지, 평소라면 그냥 넣었을 법도 한데, 오늘은 그냥 넣고 싶지 않았다. 저 작은 입으로 넣어달라는 말이 듣고 싶어졌다.

‘형.’

‘뭐?’

우겸이 갑자기 눈을 깜빡이며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형, 넣어주세요, 해봐. 응?’

우겸이 눈을 질끈 감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형, 빨리 넣어줘. 응?’

규영이 작게 웃었다. 우겸의 구멍에 귀두를 살살 넣기 시작했다. 많이 푼다고 풀었는데도 아직 길이 좁았다. 또 장난이라도 치고 싶은 듯 성기를 쭉 뺐다.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야? 나 안 할래.’

우겸이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규영이 다시금 힘을 줘서 단번에 넣었다.

‘아…, 으!’

‘괜찮아, 괜찮아.’

갑자기 넣은 탓에 우겸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하던 행위를 멈추고 제 아래에 있는 우겸의 몸을 바라봤다. 온몸이 빨개진 채로, 옆에 있는 베개에 얼굴을 꼭꼭 숨겼다.

고개를 숙이고 우겸의 얼굴부터 입을 맞출 수 있는 모든 곳에 작게 흔적을 남겼다. 이 작은 몸에 무수히 남겨진 울혈을 보면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제 것이라는 표식을 이렇게라도 내고 싶었다.

움찔거리던 떨림이 많이 나아졌다. 우겸의 다리를 잡고 서서히 허리를 움직이자, 이번에는 안이 자꾸 움찔거리며 성기를 옭아맸다.

‘형, 나 쌀 것 같… 은데.’

‘벌써? 나 아직 하지도 않았는데?’

규영이 하던 것을 멈추었다. 그러자 우겸이 스스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혼자 하는 것과 달리 자극이 약한지 울려는 표정을 지었다.

‘형, 빨리해줘, 응?’

허리에 힘을 준 다음, 단번에 우겸의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 읏….’

갑작스러운 자극으로 사정이라도 하는 듯 제 팔을 잡고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규영이 허리를 퍽퍽 쳐올리자 우겸이 우는 목소리로 허벅지를 세게 잡았다.

‘하…, 형, 잠깐, 만.’

규영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속도를 늦추기는커녕, 더 빠르게 쳐올렸다.

우겸이 뭐라고 애원하며 웅얼거렸지만, 제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몸을 숙인 다음, 가볍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저, 그저. 이 떨림이 좋았다.

‘형, 이제, 그만….’

지친 우겸의 목소리에도 멈출 수가 없었다. 턱을 잡고 입을 벌렸다. 입술을 빨며, 살짝 벌린 틈을 놓치지 않고 혀를 넣었다. 평소보다 더 깊게 넣으며, 제 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막았다.

뜻밖에 행동에 우겸이 놀란 눈을 뜨고 어깨를 손으로 밀었다. 그러나 작은 반동만 있을 뿐, 규영의 아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번이고 우겸을 울렸다. 벗어나려고 하는 우겸의 허리를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자세를 고쳐 잡았다.

‘아, 이제, 그만해. 하지 마.’

‘왜.’

엉덩이를 잡아, 양쪽으로 벌렸다. 이제야 구멍이 훤히 보였다. 구멍에서 방금까지 쌌던 정액이 뚝 떨어지는 모습에 다시금 성기가 딱딱해졌다. 떨어지는 정액이 아깝게 느껴질 정도였다. 떨어지려고 할 때마다 손가락으로 구멍을 막아, 더 흐르지 못하게 막았다. 그 행위에 우겸이 놀란 듯 허리를 들자, 구멍에서 정액이 울컥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에 또 눈이 뒤집혀서 우겸을….

  

***

  

그때의 우겸을 떠올리자, 하체의 힘이 들어갔다. 그때는 손만 건드려도 반응이 남달랐다. 예전처럼 몰아붙이면서 관계하면, 지금의 우겸은 펑펑 울 게 뻔했다. 어린, 스무 살과는 달리 조심성이 꽤 많아졌다. 그런데 한 번쯤은 울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니다.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뭔가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한데, 우겸이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뭔가가 있는데, 도통 모르겠다.

그렇게 혼자 조바심을 내며 우겸을 대했다. 그리고 기어코 곪아있던 것이 터지고 말았다. 이상하다 싶었는데, 역시나였다.

도대체 약혼자는 무엇이고, 왜 그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랑 자신이 연락한다고 생각했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거기에 혼자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걸 보니, 오히려 스무 살의 우겸이 더 얌전한 것 같았다.

“같이 있기 싫어요.”

“지금 네가 우는데 내가 어떻게 나가. 일단 너 진정되고.”

최대한 달래고, 달래려고 했는데, 이제는 같이 있는 것조차 싫다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핸드폰을 보여줄 수는 있었지만 우겸의 일거수일투족 찍은 사진과…. 저도 사람인지라 예전 버릇을 쉽게 버리지는 못했다. 이번에도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다시 살아났을 때, 제일 먼저 우겸의 뒤에 사람을 붙였다. 그리고 지난번보다는 더한 것 같기도 한데…. 예전의 일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 우겸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인, 우겸의 누나에게도 감시를 붙였다.

이번에는 정말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예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평소 핸드폰에 잠금을 걸어놨었다. 그런데 오늘처럼 대놓고 핸드폰을 보여달라고 할 줄은 몰랐다.

그냥 마음 편하게 핸드폰을 두 개씩 들고 다닐 걸 그랬다. 어찌나 찍혀오는 사진마다 다 귀여운지, 차마 지울 수가 없었다. 우겸을 만나기 전에 그 사진들을 매일같이 보고, 또 보고, 반복하며 그리움을 달랬다.

“그럼 제가 나갈게요.”

“…하.”

그렇게 거실을 서성이며, 어떻게 말을 하는 게 좋을지 생각했다. 핸드폰을 몰래 본 건 잘못한 게 맞긴 했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살살 달래는 게 맞긴 하는데, 자꾸만 무슨 이야기를 하든 끝에는 핸드폰을 보여달라고 할 것 같았다.

차라리 핸드폰을 보여주고 사실대로 말하는 게 맞나 싶기도 하고, 꽤 고민스러웠다. 거기에 지난 새벽 일은, 이것도 문제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우겸이 자다가 중간에 깰 줄은 몰랐다.

어떻게 우겸에게 사과하는 게 좋을지,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할지 저 스스로 정리하고 있을 때.

쿵-.

우겸이 씩씩거리며 방문을 큰소리 나게 닫고 문을 걸어 잠갔다. 그 뒷모습을 보고, 심장이 쿵 떨어지는 줄 알았다. 의외의 행동에 규영이 가만히 서서 굳게 닫혀있는 문을 쳐다봤다.

규영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거기에 아까 우겸의 앞에서 멀쩡하던 얼굴색이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올리고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문을 열어달라고 할까, 아니면 문을 직접 열쇠로 열고 들어갈까, 아니면 거실 소파에서 기다릴까, 수많은 생각이 들었다.

아니다. 예전과 같은 방법으로 우겸을 달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우겸의 집을 나왔다. 어차피 내일 회사에 출근해야 하니, 지금부터 진을 뺄 필요가 없었다. 일단 내일, 내일 날이 밝으면 다시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

  

***

  

짐을 차마 바닥에 내려놓지 못하고, 멀뚱거리며 방 안에 서 있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가쁜 호흡을 진정시켰다. 겉과 달리 안은 허름하다 못해 쾌쾌했다. 은은하게 풍기는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하는 수없이 창문을 열었다.

“….”

그래도 꿉꿉한 냄새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급한 대로 리모컨을 찾아 TV를 틀었다. 평소 보지도 않던 예능 프로그램을 틀었다.

그리고 침대 위에 주저앉다시피 앉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이불도 그렇게 깨끗하지 않았다. 색만 하얬지, 영문도 모르는 사람의 머리카락이며…. 절로 고개가 흔들어졌다.

“그냥 집에 있을걸….”

눈가가 촉촉해졌다. 콧물이며, 눈물이며, 급한 대로 옷소매에 쓱 닦았다. 그때, 삐걱거리는 침대 소리와 함께 야한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창문을 열어서인지, 아니면 옆방에서 나는 소리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에 몸이 점점 움츠러들었다. 제 몸을 스스로 감싸 안으며 몸을 웅크렸다.

비록 시간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먼저 연락하면 규영이 여기로 바로 데리러 올 것 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들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하지만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어떡하지….”

규영과 이런 끝맺음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냥 막연하게, 막연하게… 이대로 계속 만날 것으로 생각만 했지, 헤어질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손을 모았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아까 받은 일회용품 꾸러미를 열어봤다. 지금 가장 필요한 비누를 꺼내 화장실로 들어갔다. 뭔가 마음에 정화가 필요했다. 세면대에 물을 틀고 손을 씻었다. 몇 번이고 손에서 뽀득거리는 소리가 날 때까지 씻어댔다.

방뿐만 아니라 화장실도 많이 낙후되었다. 이곳 저것 물 때에, 곰팡이까지. 가뜩이나 울적한 마음이 주변 환경 덕에 더 우울해졌다.

“여기서 잠이나 제대로 잘 수 있을까.”

이렇게까지 깔끔한 체를 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규영 덕에 예민해서 그런지 하나같이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집을 나왔던 게 아니었다. 그저, 더 집보다 나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가슴이 더 답답해졌다.

  

***

  

언제 잠들었는지, 눈을 떠보니 침대에 누운 상태였다. 다급하게 침대 위를 매만지며 핸드폰을 찾았다. 화면을 켜서 확인해 보니, 전원이 꺼져있었다.

“충전기, 충전기.”

가방 안에 있는 짐에서 충전기를 찾았다. 왜 아무것도 잡히지 않지. 어쩔 수없이 침대 위에 짐을 다 꺼냈다. 왜 제일 중요한 충전기를 챙겨오지 않았을까.

하는 수 없이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침대 옆에 충전 선들이 있었다. 급하게 핸드폰에 선을 연결하고 화면을 쳐다봤다. 접촉이 제대로 되지 않는지, 번개 모양만 뜰 뿐, 퍼센트가 나타나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핸드폰을 가만히 쳐다봤다. 정말 규영과 헤어질 운명이었나. 이런 사소한 것조차 제 뜻대로 되는 게 없었다. 아니지, 따지고 보면 집 밖으로 나온 건 저였다.

“하, 짜증 나.”

지금이 몇 시인지도, 어제 예약을 한 문자가 제대로 전송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초조한 마음에 손톱을 물어뜯으며 핸드폰 화면만 바라봤다. 화면에 1%가 뜨자마자 조급한 마음으로 전원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 시간이 떴다. 오전 10시였다. 문자를 먼저 확인했다. 규영에게 문자가 보내져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데, 왜….

꽤 심각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화면을 본 우겸의 몸이 미동도 없었다. 시간이라도 멈춘 듯,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제대로 본 게 맞나 싶어, 핸드폰을 껐다가 다시 켰다. 규영에게 아무런 답이 오지 않았다. 심지어 전화도 한 통 오지 않은 상태였다.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눈을 비비고, 다시금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회사 사람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하, 하하.”

억지웃음이 슬 나왔다. 규영에게 정말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그러지 않고서…. 우겸은 핸드폰 전원을 꾹 눌러 끈 다음, 고개를 떨어트렸다. 잠깐만 이러고 있고 싶었다.

깊은 한숨을 내뱉고, 천천히 짐을 챙겼다. 쓸데없이 사원증이며, 사무실 키는 왜 챙겨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어제 짐을 챙기며 출근을 다시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건가. 사무실 키에 덩그러니 예전에 샀던 USB로 되어있는 녹음기도 같이 있었다.

그때는 그렇게 필요할 줄 알고 급하게 샀었는데, 결국 사용도 하지 못했다. USB가 꼭 제 신세와 같았다. 결국은 규영에게 아무것도 아닌, 그런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오히려 그만두길 잘한 것 같다고 스스로 자위했다. 회사에 갔으면…. 지금처럼 투명 인간 취급을 당했을 게 분명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