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의문스러운 만남
‘형, 일어나. 형.’
앳된 얼굴을 한 우겸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규영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응?’
규영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앞에 있는 우겸을 바라보았다.
‘요즘 왜 이렇게 졸아.’
‘그러게. 학교는?’
‘잘 다녀왔지. 나 오늘 저녁에 동기 만나기로 했는데, 만나러 가도 돼?’
‘응.’
사람 좋은 척 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겸은 모를 것이다. 매번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할 때마다 제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앞에 있는 우겸의 얼굴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자 배시시 웃으며 규영의 허벅지 위에 올라타서 앉았다.
스무 살의 우겸은 스물세 살의 우겸보다 애교가 많았다. 그리고 호기심이 왕성한 탓에 모든 거에 궁금증이 많았다. 특히 성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제 딴에는 오히려 그런 우겸이 더 반가웠다.
자연스럽게 입을 맞추며, 우겸이 제 상의와 하의를 벗기기 시작했다. 서로의 혀가 쉴 새 없이 얽히고설켰다. 저 또한 물 흐르듯 우겸의 옷을 순조롭게 벗겨나갔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위에 앉아서 얕은 신음을 내뱉는 우겸의 가슴팍을 핥으며, 혀끝으로 온기를 느꼈다.
‘형, 간지, 러워. 읏.’
‘응.’
등을 살짝 움켜잡으며 앞에 있는 가슴을 핥았다. 그리고 젖꼭지를 혀로 훑으며, 고개를 올려다봤다. 우겸이 눈을 질끈 감고, 몸을 파르르 떠는 것이 보기 좋았다.
‘읏.’
아무리 봐도 혼자만 보고 싶은 광경이었다. 우겸을 더 기분 좋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엉덩이 골에 손을 넣으며, 쓰다듬듯 어루만졌다.
어제도 해서, 아니. 오늘 새벽에도 해서 풀어주지 않아도 쉽게 들어갈 것 같은데.
‘읏, 흐, 천천히, 나, 이따가 친구 만나러 갈 거니까.’
‘오늘은 그냥 해볼까?’
톡 튀어나온 젖꼭지를 게걸스럽게 빨았다. 우겸이 정신이 없는지, 정확하게 대답하지 않고, 자꾸만 응, 아니, 하고 말했다.
답답했다. 살짝 인상을 쓰고, 제 손에 침을 듬뿍 묻힌 다음, 움푹 들어간 엉덩이 사이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으, 응.’
우겸의 반응을 한 번 살핀 다음 성기를 천천히 밀어 넣었다. 젤도 없이 갑작스럽게 들어오는 성기에 놀란 우겸이 눈을 크게 뜨고 규영에게 벗어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규영의 힘에 이길 수 없었다. 몸을 파르르 떨며 우겸이 애타게 규영을 불렀다.
‘형. 읏. 잠, 깐만.’
‘응. 다 들어갔어.’
자꾸 입에서 새어 나오는 신음을 입으로 틀어막으며, 서서히 허리를 움직였다. 어깨를 잡은 우겸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점점 빨개지는 어깨는 아무렇지 않은 듯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응, 응.’
그 속도에 맞춰 우겸의 소리도 더 커졌다. 붉어진 얼굴을 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모습이 더 흥분되게 하는 걸 알까.
우겸이 사정할 듯 점점 구멍을 조여오자, 규영이 인상을 쓰고 움직임을 멈췄다.
‘조금만 더 할까?’
그 상태로 성기를 뺀 다음 천천히 소파에 눕혔다. 갑작스럽게 멈춘 규영의 행동에 우겸이 애타는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눈을 마주치며, 종아리부터 허벅지까지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아까보다 더 깊게 성기를 찔러 넣었다.
예고도 없이 푹 넣은 성기에 우겸의 몸이 미약하게 떨렸다.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애타게 규영을 불렀다.
‘형, 잠, 깐만. 읏, 멈춰, 봐. 응?’
‘응.’
무슨 말을 하든 규영은 할 일만 했다. 붉게 물든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우겸의 성기에서 하얀 액체가 픽하고 나오기 시작했다. 아까 사정하려고 했다가 참아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길게 정액을 뿜어댔다.
그걸 본 규영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움직임에 박차를 더 했다. 사정하는 와중에 자꾸만 성기로 찔러대자 우겸이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이 모습을 보려고 이렇게까지 우겸을 몰아붙였기 때문이다. 규영 또한 사정이 임박했는지, 몸을 숙여서 더 가깝게 붙였다.
그렇게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움직이자, 규영의 성기에 하얀 액체가 딸려 나왔다. 성기를 빼지 않고, 서서히 움직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만, 그만해. 형.’
우겸의 말에도 멈출 수가 없었다. 제 눈앞에 살아 있는 우겸이라니. 심지어 방금까지 자신과 몸을 섞고 나서 제 아래에서 헐떡이기까지 했다.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니고, 상상이 아니고, 현실이었다.
스무 살의 우겸이 제 눈앞에 살아 있었다.
우겸을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힘이 빠질 때까지 몰아붙였는데, 스무 살의 체력은 쉽게 꺾을 수 없었다. 결국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집을 나갔다.
혼자 덩그러니 남아, 우겸과 대화를 나눈 문자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아직 스물세 살의 우겸과 다른 점은 없었다. 오늘 만나러 간다는 친구도 예전에, 아니 스물세 살에서도 친구였던 영재였다. 그리고 우리라는 누나와도 살고 있고, 정말 다 똑같았다.
달라진 거라고는, 우겸의 나이였다. 스물세 살이 아닌, 스무 살의 우겸을 만나고 있는 것. 그거 하나가 달랐다.
스물세 살에 우겸을 눈앞에서 보내고, 그 뒤를 따라나섰다. 꽤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을 뜨니 제 침대였다. 이게 말이 되나? 처음에는 꿈인 줄 알고 몸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아니, 꿈이라고 하기도 그렇지. 자신은 죽었기에, 신이 장난이라도 치는 줄 알았다.
침대에서 일어나서 미친 사람처럼 집 안 곳곳을 돌아다녔다. 거울을 봐도 제 얼굴이었고, 창문을 열어 밖을 보면, 사람이 지나다녔다. 믿을 수 없었다.
죽지 않고 살아난 건가?
정신을 차리고 핸드폰을 찾았다. 날짜를 보니, 우겸을 만나기도 훨씬 전이었다. 제일 먼저 핸드폰에 저장된 사람들에게 한 명씩 전화를 걸었다. 항간에 마약을 해서 미쳤다고 소문이 날 정도로, 제 이름과 나이를 집요하게 물어봤다.
‘하….’
소파에 앉아 얼굴을 쓸어내렸다. 깊게 숨을 내뱉고 들이마셨다. 심장이 미친 듯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하, 하하.’
넋이 나간 얼굴로 허공을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금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우겸을 만나기 전에 스물여섯 살로 돌아왔다.
일단 이게 현실이든 꿈이든, 뭐가 어찌 됐든. 다시금 우겸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집이 무너지라 뛰어다녔다.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 며칠을 집 안에서만 있었다. 눈을 뜨면 하루, 하루씩 날짜가 지나가 있었다. 정말 죽지 않고 살아났다.
제일 먼저 몸을 깨끗이 씻고, 근처 미용실에 가서 우겸이 좋아했던 스타일대로 이발했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어 우겸의 학교와, 매일 타령하던 카페, 즐겨 갔다고 했던 식당 주위를 맴돌았다.
아직 얼굴을 직접 볼 자신이 없었다. 멀리서 우겸과 비슷한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그리고 정말 살아 있는 우겸을 스칠 때마다 심장이 빠르게 뛰어댔다. 발작이라도 일으키는 듯 바닥에 주저하지 않고, 서럽게 울었다. 몸이 왜 그렇게 반응하는지 정작 본인은 몰랐다. 눈물샘이 고장이라도 난 듯,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 모습으로 우겸을 만날 수는 없었다. 적잖이 정신이 나간 사람으로 생각할 테고, 이대로라면 우겸을 다시 만나기는커녕 손가락 하나도 스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며칠을 우겸의 주위를 맴돌았다. 스물세 살의 우겸이 아닌 스무 살의 우겸. 스물세 살보다 젖살이 더 통통하게 차오른 얼굴에, 군대에서 키가 더 자랐던 거였는지, 원래 알던 키보다 더 작았다.
정말 꿈이 아니고, 상상이 아니고, 현실이 맞을까.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들었다. 제가 죽기 전에 혼수상태일 수도 있다는…. 그런데 환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생생했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눈치가 없는걸 봐서는 현실 같았다. 며칠 동안 뒤에 졸졸 따라다니는 데도 저렇게 눈치를 못 채는 걸 보면, 상상이라고 하기에는 말이 안 되는 설정이었다.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우겸이 좋아할 만한 옷을 입고, 더 거리를 좁히며 주위를 얼쩡거렸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면 처음 말을 어떻게 걸지 매일 같이 연습했다.
‘학생.’
너무 나이 들어 보이나.
‘저기요.’
이상한데.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스무 살의 우겸도 남자를 좋아하긴 하나? 설마 하는 생각에 집 안을 계속 왔다 갔다 걸어 다녔다. 옆에 누가 있으면 정신이 사납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계속해서 움직였다.
가만 보면 친구들과 있을 때 남자, 여자 골고루 어울려 다녔다. 우겸이 과연 남자를 좋아할까. 여자를 좋아할 수도 있었다.
그 생각에 우겸에게 말을 걸기는커녕, 근처만 맴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겸의 주위를 또 서성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우겸이 저와 눈을 마주치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당황한 탓에,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가까워지는 우겸의 모습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래도 스토커로 낙인이 찍힌 게 분명했다. 한쪽 눈을 살짝 뜨고 앞을 바라봤다. 우겸이 제 앞에 서서 이상한 눈빛으로 몸 전체를 훑어보고 있었다.
‘저, 왜 따라다니세요?’
‘…네?’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눈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주만 해도 세 번은 마주쳤던 것 같은데. 저, 아세요?’
‘아, 그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답을 찾지 못했다. 우겸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졸졸 따라다니지 말고 다짜고짜 고백할 걸 그랬다. 아니면, 우겸의 친구를 돈으로 매수하든가. 아니면….
‘혹시, 저희 누나 남자친구세요?’
‘네?’
규영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오해를 시작으로 우겸과 다시 만났다.
***
규영의 목소리에 겨우 잠에서 깼다. 무슨 꿈을 꾸려고 했던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제 꿈이 문제가 아니었다.
“…팀장님.”
“응?”
“괜찮으세요?”
“응, 아, 미안…. 병원에 오랜만이라.”
규영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아까보다 더 안색이 어두워졌다. 표정 또한 경직되어 있는 것이, 계속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일어나려고 몸을 뒤척였다. 고개를 돌려 수액의 양을 확인하니, 팽팽했던 것이 홀쭉하게 변해있었다. 잠깐 눈을 붙인 게 아니고 꽤 오래 잠이 든 모양이다.
“…저희, 이제 돌아갈까요? 병원만 오면 답답한 것 같아요.”
간헐적으로 메스꺼웠던 것이 아주 괜찮아졌다. 다행히도 잠깐 눈을 붙인 게 도움이 된 것 같았다. 아, 수액의 영향도 무시하지 못하겠다.
“응, 아까 의사가 잠깐 왔다 갔는데, 피검사 결과는 괜찮대. 며칠 지켜보고 속이 계속 안 좋으면 그때 병원에 와서 입원하자. 알겠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말을 덧붙이지 않고 규영의 손을 가볍게 토닥여줬다. 자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뭐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단 몇 시간 만에 규영의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심지어 제가 잠깐 눈을 붙인 사이에 울기라도 한 듯, 눈가가 촉촉했다. 살짝 부어있는 눈을 못 본 척 또 눈을 감았다.
“잠깐만, 얼른 간호사 불러올게.”
규영이 자리를 비우자, 눈을 뜨고 하얀 천장을 올려다봤다. 익숙해서는 안 되는 병원 천장이 참 익숙했다. 괜스레 예전에 병원에 입원했던 기억이 났다. 그때는 어떻게 긴 시간을 침대에만 누워 지냈는지, 지금은 돈을 준다고 해도 못 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규영과 같은 보호자가 종종 있었다. 병원 자체에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 아무래도 규영에게도 뭔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규영의 행동이 무척 낯설었다. 보통 같으면 절대 이렇게 놀라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했을 법도 한데, 오늘은 모든 게 정신이 없어 보였다.
아니면, 가족 중에 누가 아프기라도 할 걸까.
사실 일리가 있는 생각이었다. 최근 들어 규영이 악몽을 많이 꾸었다. 지난번에 한 번 소리를 지르며 깬 이후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눈이 퀭할 때가 다반사였다. 그것도 걱정이었는데, 지금 행동으로 봐서 요즘 안 좋은 일이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규영에게 맨날 물어봐야지, 물어봐야지, 하고 지금까지 물어보지 못했다. 이 정도 기다리면 규영이 먼저 제 마음을 속 시원하게 말해줄 법도 한데, 아직 아무 말을 하지 않는 것 보면… 물어봐도 대답을 해줄 것 같지 않았다. 때로는 모른 척하는 것이 약일 수도 있었다. 구태여 힘들어하고 있는 규영에게 더 불편함을 얹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 행동을 보면 아는 척을 해야 하는 게 맞았다는 생각도 들고…. 만약 진작 규영에게 요즘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봐서, 혹 병원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응급실은커녕, 낮에 혼자 병원에 다녀왔을 것이다. 그 정도로 지금 규영의 모습이 꽤 안쓰러웠다.
***
응급실에서 퇴원하고 나서도 규영의 극진한 병간호가 이어졌다. 바로 집으로 내려갈 줄 알았는데, 며칠 더 호텔에 있다가 완전히 나으면 집에 가자고 했다.
처음에는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안 그러면 입원시킨다는 규영의 단호한 말에 순순히 따랐다.
“죽 그만 먹을래요.”
규영의 팔을 잡고 질색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호텔에서 룸서비스로 죽을 시키는 사람은 규영밖에 없을 것이다. 솔직히 퇴원하고 다음 날 아침까지 속이 울렁거렸지, 그 이후에는 멀쩡했다. 평소와 같은 상태였다. 그러나 규영은 아직 일반식이 용납이 안 되는지, 죽을 먹기 싫다고 하면 쫓아다니면서까지 죽을 먹여줬다.
“서울에 와서 어디 구경도 못 가고, 호텔에만 있는 것도 서러운데….”
“아, 해. 그래야 약 먹지.”
“저 진짜 괜찮은데….”
“아-.”
우겸이 오만상 찌푸리며 입을 벌렸다. 이렇게 억지로 먹다가 더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이틀 내내 죽을 먹으니 입에서 풀냄새가 나는 것 같았고, 너무 물렸다. 이제는 정말 맛있는 밥을 먹고 싶었다.
죽을 소여물 씹듯 최대한 천천히 씹었다. 먹기 싫다는 시위였다. 그런데도, 규영은 그걸 아무 소리 하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우겸이 눈을 질끈 감고 작게 말했다.
“…형.”
“응?”
갑작스러운 형 타령에 규영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오늘 저녁에 집으로 다시 내려가야 하는데, 점심까지 죽을 먹을 수는 없었다.
“나 점심에는 맛있는 거 먹고 싶은데. 응?”
말도 안 되는 애교에 규영의 얼굴이 서서히 풀어졌다. 이번에 체를 한 것이 규영의 탓이 조금 있긴 했지만, 그게 마음에 꽤 걸린 모양이었다. 종일 멍하니 있는 게 다반사였다.
며칠 만에 이렇게 환하게 웃는지 모르겠다.
“응? 형….”
규영이 미소 지으며 알겠어,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마저 우겸의 입에 죽을 넣어줬다. 조금 전과 다르게 빨리 속도를 내어 씹고, 꿀떡 삼켰다. 갑자기 죽이 고소하게 느껴졌다.
***
당분간 소고기는 금지라는 규영 덕에 어쩔 수 없이 한정식집을 택했다. 따지고 보면, 한식집이 반찬 가짓수도 많고, 요리도 다양해서 더 안 좋을 수도 있지 않나. 그래도 죽보다는 나을 것이다.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며칠 아파보니 한 가지 결심이 섰다. 다음에 또 아프게 되면 절대 규영의 앞에서 아프지 말아야겠다는 것이다. 당분간 죽을 먹으라는 의사에 말을 이렇게까지 잘 들을 줄은 몰랐다. 생긴 건 의사의 말을 전혀 듣지 않게 생겨놓고, 정말 의외였다.
“잠시만.”
규영이 서울에서 살 때 자주 갔던 한정식이라며, 능숙하게 전화를 걸었다. 몇 마디 뱉고 어려운 예약에 성공했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 모습을 사무실 사람들에게 한 번쯤 보여주고 싶었다. 혼자 보기가 아까운 광경이었다. 한 허세 하는 허규영. 저 얼굴을 가지고 저렇게 우습게 행동하는 걸 혼자 보는 것도 꽤 재미있었다. 규영과 지내면 지금처럼 의외의 모습이 많았다. 나이가 여섯 살이나 많아서 무조건 어른스러울 것 같다는 건 편견이었다. 이럴 때는 저보다 더 어려 보이고, 애 같았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는 여벌의 옷과 물건을 챙기고 방을 나왔다. 며칠 동안 호텔에서 극진한 간호를 받았더니, 밖에 공기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밖으로 식사하러 가길 잘했네.”
“그러게요. 그러면 여기서 식사하고 바로 우리 집으로 가요?”
“응, 아니면 더 있다가 갈래? 어차피 내일이 일요일이니까, 더 있다가도 상관은 없는데.”
“아니에요. 이래서 다들 집이 최고라고 하나 봐요.”
우겸의 푸념에 규영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따라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고, 별것도 없는데 행복한 하루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능숙하게 주차하고, 차에서 내렸다. 입구부터 고급스러움이 절로 묻어 나왔다. 밖보다 안이 더 화려해서 의도치 않게 눈이 바삐 움직였다. 분위기도 정말 아늑했다.
“괜찮지? 오늘 급하게 연락하느라 안쪽 자리는 없대. 오늘 먹어보고 괜찮으면, 다음에는 안쪽에 가서 편하게 먹자. 그때는 누나도 같이 올까?”
“와, 그럼 좋죠. 그런데 팀장님은 여기 자주 오셨어요? 엄청 비싸 보이는데.”
“그냥, 가끔?”
“누구랑 왔는지는 안 물어볼게요. 특별히.”
우겸이 너스레를 떨며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식당 종업원이 규영을 알아봤는지, 멀리서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걸어왔다.
서로 간단한 안부 인사를 했다. 이런 대외적인 모습을 볼 때마다 괜스레 뿌듯한 미소가 지어졌다. 종업원이 규영과 대화를 나누며 저와도 눈이 몇 번 마주쳤다. 그럴 때마다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메뉴판에 집중했다.
그런데 정말 자신과 같이 서울이 아닌 다른 곳에서 지내도 되는 건가. 따지고 보면 규영의 모든 삶은 서울에 있을 텐데…. 뭐랄까, 이곳에서의 삶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호텔도 그렇고, 지금 이 식당에서도 그렇고. 더 걸맞은 옷 같았다.
저는 솔직히 어디에서 지내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다시 한번 규영에게 말을 꺼냈다가 며칠 전에 사태가 발생할 것 같아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규영과 같이 서울에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사무실 사람들은 가끔 봐도 되고, 또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그만이었다.
드디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분위기에 걸맞게 하나같이 고급스러웠다. 아까워서 어떻게 먹냐고 하는 말이 떠오를 정도였다. 이렇게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음식을 앞에 두고 조금 전까지 했던 생각이 계속 꼬리의 꼬리를 물었다.
아무래도 이번에 규영과 같이 서울에 온 것이 잘못된 것 같았다. 차라리 오지 말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 저와 다른 삶을 살아왔다는 걸 몸소 깨달으니 기분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또 체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음식을 최대한 꼭꼭 씹었다.
“왜, 별로야? 속 안 좋으면 나갈까?”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졌는지, 규영이 또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동자를 굴리며, 괜한 핑계를 떠올렸다.
“아뇨, 음식은 맛있는데…. 누나랑 오지 않은 게 약간 아쉬워서….”
괜히 누나 핑계를 대었다. 하긴, 오늘이 서울에서의 마지막이었는데, 끝내 우리와 식사를 하지 못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저녁에라도 얼굴을 살짝 보고 가려고 했는데, 저 못지않게 바쁜 사람이었기에 전화로 안부 인사를 대신했다.
“다음에 같이 오면 되지, 어, 잠깐만. 전화 좀 받고 올게.”
갑작스러운 전화에 규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규영도 없는데 혼자 먹기 뭐 해서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쳐다봤다. 인터넷을 열어 평소에 잘 보지도 않는 뉴스를 넘겼다.
“저기 앉아 있던 사람, 지난번에 현지가 결혼하니 뭐니 했던 사람 아니야?”
의도치 않게 옆 테이블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가 귀에 들렸다.
“그런가? 그런데 결혼은 무슨, 남자가 서울에 올 생각이 없다고 했다며.”
“아, 맞다. 그래서 현지가 그 남자 만나러 회사까지 찾아갔다고 했지? 지방 어디였더라.”
어? 자꾸만 듣다 보니 저 사람들이 말한 남자가 규영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핸드폰을 쥔 채, 옆 테이블에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지난번에 회사로 찾아왔다던 그 여자를 말하는 건가?
그런데 그 여자는 그때, 분명 업무적으로 소개받은 사람이라고 했었다. 설마 그 업무가 결혼을 뜻하는 건 아니겠지. 우겸의 얼굴이 의도치 않게 점점 일그러졌다.
일단 저 둘이 말하는 상대가 규영이 아닐 수도 있다. 침착하게, 침착하게 행동하자.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무릎 위에 손을 올려 주먹을 꽉 쥐었다. 뭐라도 꾹 누르고 있어야 이 널뛰는 마음이 진정될 것 같았다.
규영이 아닐 것이다.
“아, 그런데 그 회사 조카라며. 현지가 포기 안 할 것 같은데?”
“조카? 그냥 회사 팀장 아니었어? 난 또 요즘 조용하길래 끝난 줄 알았는데.”
우겸이 바싹바싹 마르는 입술을 제 침으로 축였다.
“무슨, 매일 같이 연락한다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저었다. 물이라도 마시려고 컵을 드는 순간, 손안에서 컵이 미끄러졌다.
쨍그랑-.
조용했던 식당 안에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순식간에 이목이 우겸에게로 집중되었다.
우겸이 다급하게 의자에서 일어났다. 깨진 컵을 주우려고 몸을 구부리자, 통화하고 있을 줄 알았던 규영이 어느새 옆에 와 있었다.
“괜찮아?”
“아, 네…. 괜찮, 아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날 수 없었다. 식탁을 잡고 일어서려고 할 때, 규영이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손쉽게 일으켜 세웠다. 그 뒤로 종업원이 다가와 바닥에 흐트러진 유리 조각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남의 시선은 신경도 쓰이지 않는지, 집에서 하는 것처럼 제 몸을 샅샅이 만지며 확인했다.
“안 다쳤어?”
“…네.”
규영이 무얼 하든, 남이 지금 저희 모습을 어떻게 보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했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는 척하며, 옆 테이블에 여성들을 쳐다봤다. 남자인 저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예뻤고, 명품에 대해 잘 모르는 자신이 봐도 걸치고 있는 액세서리나 옷이 고급스러워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며 서둘러 눈을 피했다. 자신과 사는 환경이 다른 사람이었다. 경쟁하지도 않았는데, 시작도 전에 진 느낌이었다.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떨구었다.
아무래도, 아무래도….
규영의 따뜻한 손길을 뿌리치며, 의자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많이 놀랐구나, 마저 먹을래? 아니면 집으로 갈까?”
“집으로 가요. 어차피 거의 다 먹었잖아요.”
서둘러 식당 밖으로 나와, 차에 올라탔다. 차에 타자마자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먹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집을 향해 가는 길, 차 안 공기가 꽤 답답했다. 창문을 살짝 열고, 밖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차에 타자마자 규영이 몇 번 말을 걸긴 하였으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더 말을 걸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 여자들이 규영에 대해 말한 게 아닐 수도 있지만, 자신이 엿듣기로 정황상 규영이 맞았다. 그리고 식당 안에 곧 결혼을 앞둔 남자로 보이는 사람도 규영뿐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손톱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옆에서 자신을 힐긋거리며 보는 규영이 손을 다잡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나 전화받으러 갈 때 무슨 일 있었어?”
“아뇨.”
“그런데 왜 그래, 우겸아.”
규영이 걱정하는 듯한 목소리로 재차 물었지만, 우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멍하니 창문 밖을 쳐다보기만 했다. 가만히 그간 규영이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일단 사람을 찾으러 왔다고 한 건 사실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이 결혼을 준비했을 리가 없었다.
아, 아니면…. 결혼하지 않으려고 도피하려고 온 건가?
호흡이 점점 가빠지기 시작했다. 관자놀이를 세게 문지르며, 다시금 이 상황을 정리했다.
***
며칠 만에 온 집, 집안 공기가 제 마음이라도 대변하듯 꿉꿉했다. 어제만 하더라도 이곳에 얼른 오고 싶었는데, 오늘 말도 안 되는 일을 겪으니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집에 들어와서도 서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멀뚱멀뚱하게 서 있는 규영을 마음속으로 흘겨보고, 화장실로 얼른 들어가 샤워하기 시작했다. 혼자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치느라, 아니. 사실일 수도 있는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며 씻었더니 평소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화장실 밖으로 나오니, 규영도 씻고 나온 듯했다. 머리카락이 살짝 젖어있고, 옷도 평소 입던 잠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뚱한 표정을 지으며 부엌으로 걸어갔다. 냉수를 마시고 속이라도 차리고 싶은 마음에 차가운 물을 컵에 따랐다. 거기의 냉동고에 있는 얼음을 가득 넣어 더 차갑게 만들었다. 컵을 들고 다시 규영을 노려보며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화가 누그러질 기미가 안 보였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안 좋은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규영이 자신과 헤어지고 결혼을 할 수도 있다는 걸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제 모습을 본 규영이 소파에서 일어나 인상을 쓰며 부엌으로 걸어왔다. 일부러 규영에게 보란 듯 얼음을 신경질적으로 아작 소리가 나게 씹었다.
“이러다 또 체할라.”
규영이 잽싸게 우겸의 손에 있던 컵을 뺏었다. 그리고 다정한 손길로 얼굴을 어루만졌다.
“피곤하면 일찍 잘래?”
우겸이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우겸을 안아 들고 방으로 걸어갔다. 우겸은 물끄러미 규영만 쳐다보았다.
그 여자한테도 이렇게 해줬을까.
그런데 매일같이 그 여자와 연락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항상 자신과 붙어있는데, 언제 연락한단 말인가. 저를 만나면서 다른 여자를 만났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왜, 무슨 할 말 있어요? 누나 때문에 서운한 거면 이번 주 주말에 또 서울 갈래?”
우겸이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냥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 규영과 말을 섞으면 그 여자에 대해 또 물어볼 것이고, 그러면 규영이 화를 낼 거고, 그러면…. 결국 그 여자와 결혼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지난번에 분명 아니라고 했는데, 왜 자꾸 의심이 드는지 모르겠다. 아직 그 정도로 규영에게 믿음이 없나 싶기도 하고….
설마 며칠 묵었던 호텔도 그 여자와 온 적이 있을까. 따지고 보면 정략결혼도 업무적이라고 생각하면 업무적인 게 될 수도 있었다. 갑자기 오만가지 서러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규영에게 더는 묻지 않고, 아무 말 없이 등을 매만져줬다.
“얼른 자자, 잘 자, 우겸아.”
침대에 내려주고, 이불까지 덮어주고…. 그런데 왜 아무것도 묻지 않는 걸까.
아까 옆에 있는 여자를 보긴 봤을 텐데…. 혹시 눈치라도 챘나 싶기도 하고, 아니면 아까 이야기를 다 들어놓고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걸 수도 있었다.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저 갑자기 궁금한 게 있는데.”
“응?”
규영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혹시 저한테 거짓말하시는 거 있어요?”
“갑자기?”
“그냥….”
우겸의 목소리가 사뭇 떨렸다. 괜히 죄 없는 규영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나는 너한테 거짓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갑자기, 왜? 식당에서 무슨 소리라도 들었어?”
우겸이 고개를 위로 올려 규영을 쳐다보았다. 순 거짓말이었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식당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냐니. 아무래도 규영 또한 그 여자들을 아는 눈치였다. 맨날 자신과 딱 붙어있으니, 연차를 핑계 삼아 그 여자를 만나려고 온 게 맞는 듯했다.
“왜 못 믿는 얼굴을 하고 그래.”
“이번에 서울에는 갑자기 왜 간 거예요? 다른 곳에 놀러 갈 수도 있고….”
“우겸이 네가 지난번에 지나가는 말로 누나 보고 싶다고 했잖아. 그래서 겸사겸사?”
그 겸사겸사에 그 여자도 포함되는 건가….
우겸이 입술을 꾹 물고, 규영의 품에서 벗어났다. 등을 돌려 눕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규영이 당황이라도 한 듯 아무런 말도,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있었다. 방 안에 서로의 숨소리만 들릴 뿐, 적막함만 맴돌았다.
이렇게 등을 돌리면 규영이 뒤에서 안아줄 줄 알았는데, 그건 순전히 제 생각이었나 보다. 당황함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멀쩡한 이불을 끌어당겼다. 시간이 지나고, 지날수록 규영은 가만히만 있을 뿐, 더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몇 시간 뒤. 침대 위에 혼자 있는 우겸이 악몽이라도 꾸는 듯, 끙끙 앓으며 침대 위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
우겸은 현재 꿈속에서 지금보다 어려 보이는 규영과 몸싸움을 하는 중이다. 마지막으로 꾸었던 꿈과 거의 비슷한 내용이었다. 현관문에서 규영과 밖에 나가는 문제로 대치 상황을 펼쳤다.
‘나가지 말라니까?’
자신이 이렇게까지 감정적이었나 싶은 정도로 꿈속에서는 소리란 소리를 다 지르며 규영에게 악을 썼다.
‘왜 거짓말했어?’
나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자신과 그를 막는 규영….
결국 규영이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우겸을 안아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안긴 상태에서 발버둥을 쳤지만, 쉽게 저지당하고 말았다. 꿈에서나 현실에서나 힘이 없는 건 여전했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다가 눈을 번쩍 떴다. 어찌나 꿈에서 씩씩거렸는지, 일어나서도 두근거림이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정말 오랜만에 꾸는 꿈이었다. 평소였다면 자기 전에 꼭 입을 맞춰줬는데, 어제는 그러지 않았다. 결국 제 옆에 규영이 없으면 안 되는 거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왜 옆에서 규영이 괜찮냐고 물어 봐주지 않지. 우겸이 서둘러 등을 돌렸다. 침대 위에 있어야 할 규영이 없었다. 항상 옆에 있던 규영이 사라졌다.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당황한 탓에 몸이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딱딱하게 굳었다.
핸드폰을 찾으려고 제 주위로 손을 뻗었다. 분명 자기 전에 베개 옆에 두었는데. 그러고 보면 항상 핸드폰이 제자리에 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캄캄한 방을 손으로 더듬거리며, 방에 불을 켰다. 그제야 핸드폰이 보였다. 탁자 위에 있었다. 이상하다. 규영이 여기에 둔 건가.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세 시였다. 이 시간에 규영이 없다는 게 이상했다. 아니지, 최근 들어 새벽에 깬 적이 없으니, 규영이 새벽에 매번 없었다고 한들 몰랐을 것이다.
“설마….”
서둘러 방을 나갔다. 혹시나, 방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잘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규영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거실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제일 먼저 굳게 닫혀있는 옷 방 앞을 서성거렸다.
크게 심호흡하고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았다. 살짝 열고 그 안을 눈으로만 훑었다. 규영은 없었다. 그렇게 집 안 곳곳을 누볐지만, 그 어디에도 규영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현관문을 살펴보았다. 규영의 신발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그것도, 슬리퍼도 아닌 광이 반짝 나는 구두. 밖에 나간 건 확실했다.
“전화라도 해볼까.”
마음속으로는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행동이 따라주지 않았다. 핸드폰을 꼭 쥔 채 멍하니 소파에 앉았다. 침을 삼키며, 가만히 화면만 쳐다보았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데 규영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오질 않았다.
어둑어둑해졌던 밖에 해가 떠오른다. 고개를 들어 거실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니 아침이 훌쩍 지난 시간이었다. 분명 어디를 가는 거면 간다고 말을 했을 법도 했는데…. 규영이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혼자만 집에 덩그러니 남겨졌다는 사실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서러웠다. 아직 자신은 규영이 필요했다. 헤어질 생각은 추호도 없는데, 이런 식으로 규영이 제 곁을 떠날 줄은 몰랐다.
끅끅거리며, 침대로 빠르게 걸어갔다. 조급하게 이불을 뒤집어쓰고 몸을 웅크렸다. 아무래도, 아무래도 꿈이 다 맞는 것 같았다.
우겸이 흐르는 눈물을 닦고 다시 잠자리에 들려고 노력했다. 아직 규영과 헤어지지도 않았는데, 자꾸만 눈물이 줄줄 새어 나왔다.
“흑….”
호흡이 가빠질 정도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몇 분을 울었을까.
“우겸아.”
“….”
“우겸아, 왜 그래?”
언제 집에 들어왔는지 모르는 규영이, 놀란 목소리를 했다. 이불이 들춰지고 제 몸을 샅샅이 만졌다. 저 다정한 손길이 이제는 끔찍하게 느껴졌다. 제 얼굴을 보자마자 애달픈 표정을 지으며, 눈가에 눌어붙은 눈물을 천천히 닦아주었다.
“악몽 꿨어?”
우겸이 악몽을 꾸는 줄 아는 눈치였다. 눈을 설핏 뜨고 앞에 있는 규영을 훑었다. 꽤 단정하게 차려입은 모양새였다. 그 모습에 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
규영이 제 품에 우겸을 안아 들었다. 우겸이 눈물을 그치자, 또 악몽을 꿨냐고 물어봤다.
“그냥… 꿈에서 팀장님이랑 싸워서.”
그 말에 규영이 미간을 찌푸리고, 우겸의 여린 입술에 숨을 불어넣었다. 어제 입맞춤을 하지 않았던 걸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평소보다 더 짙었다.
“읏….”
“어제 내가 미안. 우겸이 네가 기분이 안 좋아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해.”
“….”
이번에는 우겸이 규영의 목을 꽉 껴안고 입을 맞췄다. 그 모습에 규영이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럴 법도 했다. 지금까지 우겸이 먼저 규영을 탐한 적은 없었다.
우겸이 규영의 겉옷을 벗기려고 손을 대자 규영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뒤로 뺐다. 갑작스러운 반응에 저 또한 놀랐다. 다시 한번 옷에 손을 대자 규영이 이를 저지했다. 그리고 몸에 붙어오는 우겸을 살짝 떼어 놓았다.
“어?”
평소와 다른 규영의 태도에 우겸의 눈에 서러움이 일렁였다.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지금까지 울어놓고, 이따 하자, 이따. 응?”
규영의 단호한 거절에 우겸이 할 말을 잃었다. 입술을 꾹 다물었다. 물꼬 터져 나오는 눈물을 애써 삼켰다.
“그런데, 어디 다녀오셨어요?”
“어? 아, 그게.”
“혹시 누구 만나셨어요…?”
규영이 대답할 틈도 없이 계속 질문을 했다.
“응? 잠깐 일이 있어서. 아까 내가 깨우려고 하다가 너무 곤히 자는 것 같아서, 그냥 다녀왔는데, 내가 미안해. 나 없어서 많이 놀랐어?”
우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이라니….
이 새벽에, 회사에 출근하는 것처럼 정장을 쫙 빼입고, 도대체 어디를 다녀온 걸까. 심지어,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고, 몸에서 평소에 즐겨 쓰지 않는 향수 냄새가 났다.
일부러 규영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어디서 많이 맡아본 익숙한 냄새였으나 어디서 맡은 지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새벽에 누군가를 만나고 온 건 확실했다.
그날 이후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회사에서 일하고, 규영의 집에서 대부분 시간을 같이 보냈다.
아, 달라진 게 하나 있었다. 규영이 틈만 나면 입을 맞춰댔다. 악몽을 꾸었던 것을 오로지 제 탓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 덕에 꿈은커녕 잠을 너무 잘 잤다.
오히려 꿈에서 뒷이야기가 궁금해 규영의 입맞춤을 피할 때도 있었다.
“어디 가, 우겸아.”
“아니….”
도망가려고 할 때마다 규영이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실없이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면 어찌나 웃음이 나는지 모르겠다.
“배 안 고파? 아까 밥도 적게 먹었잖아.”
우겸은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처럼 대했다.
“그냥, 음. 아, 냉장고에 오렌지 있던데.”
“잠깐만.”
규영이 새벽에 사라진 이후로 최대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직 제 옆에 규영이 없는걸 상상은커녕 생각도 하기 싫었다. 그냥 이렇게 모른 척 지내는 게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규영에게 따지고 물어봤자, 결국 손해 보는 건 자신이었다.
헤어지든, 그냥 이 상황을 유지하든, 끝에 혼자 남는 건 저였다. 지금까지 자취한 탓에 홀로 있는 것이 익숙하긴 했으나, 규영과 같이 지내다가 혼자 지내는 건 차이가 있을 것이다. 쭉 혼자 지내는 것과는 다를 게 분명했다.
혼자 남겨지면….
아마도 규영과 헤어지면, 회사고 뭐고, 바로 짐을 싸서 서울로 돌아가지 않을까. 서울에는 우리라도 있으니, 여기서 혼자 처연하게 있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른다. 아직 헤어진 것도 아닌데, 요즘 들어 혼자 남겨질 생각을 종종 했다.
“형이 얼른 까줄게?”
규영이 부엌에서 오렌지를 한 개도 아닌 두 개를 가져왔다. 큰손으로 투박하게 오렌지 껍질을 툭 까기 시작했다. 요즘은 이런 사소한 것조차 감사히 여겼다. 규영과 헤어진다면 이런 것들이 다 그리울 것이다.
둘이 같이 있을 때 틈만 나면 규영에게 뭘 해달라고 졸라댔다. 지금처럼 오렌지 껍질을 까달라고 하는 건 사소한 측에 속했다. 규영은 그게 싫지 않은지, 웃으면서 제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줬다.
서툴게 까는 걸 보며 괜스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왜, 먹여줄까?”
빤히 바라보는 게 먹여달라고 하는 줄 안 모양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살짝 벌렸다. 규영은 그 모습도 좋은지, 우겸에게 살짝 입을 맞추고 입안에 오렌지를 넣어주었다.
“요즘 왜 이렇게 애교가 많아졌어?”
“그냥, 그냥요.”
우물우물 씹으며 겨우 대답했다. 규영은 계속 피식거리며, 우겸의 입안에 과일이 떨어지지 않게 연신 오렌지를 넣어줬다.
왜 지난번보다 덜 단 것 같지. 규영의 앞에서는 맛있다고 웃었지만, 씹는 내내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그냥, 요즘 저 자신과 비슷해 보였다. 단맛이 쪽 빠진 오렌지처럼 규영과 같이 지내면서 차올랐던 행복이 점점 사라졌다.
언제까지 제 마음을 숨긴 채 규영을 대할 수 있을지, 요즘 들어 가장 큰 고민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규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
이렇게 혼자 마음속에 우울함을 숨긴 상태로 지낸 지 얼마나 되었을까. 속이 점점 까맣게 썩어나갔다.
“더 안 먹어?”
우겸이 규영의 눈치를 보며 고개만 끄덕였다. 자리에서 슬쩍 일어나 거실로 걸어 나갔다. 그 뒤로 규영의 한숨 소리가 살포시 들렸다. 최근 들어 입맛이 영 없었다. 억지로 먹으면 체를 할 것 같아, 요즘은 몇 수저 뜨고 내려놓는 것이 다반사였다.
“우겸아, 밥 말고 다른 거라도 먹을래?”
“배불러요.”
규영이 우겸의 뒤를 바짝 쫓아왔다. 예전과 다르게 홀쭉해진 우겸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살이 자꾸 빠지잖아. 응? 먹고 싶은 것 있으면 얼른 사 올게.”
“정말, 괜찮은데.”
“아니면 보약이라도 지어줄까?”
“음, 날이 더워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규영이 안쓰러운 얼굴을 하고 쳐다봤다. 뭐가 그리 걱정되는 건지, 아침마다 현관문에 간식이며 음식들을 배송시켰다. 그 덕에 냉장고와 냉동고가 터질 것 같았다.
겨우 규영에게서 벗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괜히 거울을 보며, 홉 들어간 볼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지는 않은데. 출근하는 내내 규영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살이 빠져서 큰일이다, 주말에 한의원에 가야겠다, 등등.
아무래도 최후의 방법을 써야겠다. 우겸은 입을 꾹 말고 규영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형, 오늘 저녁에 소꼬리찜이나 먹을까? 희영 대리님이 회사 근처에 맛있는 곳 생겼다던데.”
그제야 인상을 찡그려진 규영의 표정이 점점 풀리었다. 요즘은 다른 것도 다 필요 없었다. 먹고 싶다는 음식만 이야기하면, 환하게 웃었다. 거기에 형이라고까지 부르면, 뭐.
“그러면 이따가 포장해서 집에 가서 먹자.”
“왜요? 식당 가서 먹어야 더 맛있는데.”
“그러다 회사 사람들 만날까 봐, 그래서 그래.”
생각해 보니, 지난날 서울에 다녀온 이후 식당은커녕 밖을 돌아다닌 적이 극히 드물었다. 아침마다 음식들을 현관문 앞으로 배달시키는 것만 봐도 그렇다.
너무 딱 붙어서 지낸다고 해야 하나, 어떻게 보면 좋은 일이긴 하지만… 규영의 속을 정말 모르겠다.
사무실에 도착하고 몇 시간을 일했을까. 오늘도 역시나 규영이 카드를 내밀었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카드 찬스에 사무실 사람들의 얼굴이 제각각이었다. 좋아하는 표정과 알 수 없는 표정, 둘로 나뉘었다.
희영은 후자에 속했다. 갑작스럽게 잡힌 회의 덕에, 오늘은 규영이 아닌 희영과 카페로 향했다. 복도를 거닐며 희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팀장님 결혼이라도 하나?”
“갑자기요?”
“아니, 이상하잖아. 매일 간식 사주시는 것도 그렇고. 그리고 최근 들어 체중 관리를 하시는지 살도 빠지신 것 같고.”
그런가? 규영도 살이 빠졌나? 매일같이 지내다 보니, 항상 같은 모습 같았다.
“에이, 그냥, 저희가 요즘 바쁘니까 그러신 거 아닐까요?”
자신 때문에 매일같이 규영이 사무실 사람들에게 간식을 사는 거였는데, 이렇게 생각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가.”
우겸이 멋쩍은 듯 목을 쓰다듬으며, 대화 주제를 돌리려고 애썼다. 앞으로는 밥을 잘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 때문에 괜한 오해를 규영이 샀다.
“그리고 팀장님이 돈이 많으시니까, 쓰시는 걸 좋아하시나 봐요. 가만 보면 저랑 외근 갈 때도 맛있는 거 많이 사주세요.”
“그래? 그럼 원래 성격인가. 맞다. 그런데 요즘 무슨 일 있어?”
“네?”
“그냥, 통 기운 없어 보여서, 어, 엘리베이터 왔다.”
텅 빈 엘리베이터를 서둘러 타고 1층을 눌렀다. 서둘러 말을 이어갔다.
“아뇨, 그냥. 요즘 입맛이 없어서요.”
“그래? 난 또 무슨 실연이라도 당한 줄 알았어.”
“에이, 여자친구도 없는데, 무슨 실연이에요.”
우겸이 우스갯소리로 말하며, 희영에게 미소를 지었다.
“정말? 없어? 우리는 우리 모르게 여자친구 만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우리가 맨날 술 마시러 가자고 하면 안 먹고 집으로 바로 갔잖아. 그래서 살짝 의심하고 있었거든.”
“에이, 아니에요.”
괜히 과장되게 손사래를 치며, 아닌 척했다.
여자친구는 아니고 남자친구였다. 그게 규영이었고. 우겸은 미소 지을 뿐 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카페에 들러 음료를 사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러자 저 멀리서 규영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회의가 있다고 해놓고, 취소가 된 건가.
우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규영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점점 가까워지자 희영이 우겸의 귀에 입을 대고 작게 속삭였다.
“그래도, 저 정도면 잘 생기긴 했지?”
그 말에 우겸이 풋 하고 해맑게 웃었다. 제 눈에만 잘생겨 보이는 게 아닌 듯했다. 그 모습에 규영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며, 더 빨리 걸어왔다.
아무래도 실수를 한 모양이었다.
***
아무도 없는 사무실 안, 규영이 우겸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희영 씨랑 귓속말로 무슨 이야기했어요? 나는 간식만 사 오라고 했지, 둘이서 귓속말하라고는 안 했는데?”
“별 이야기 안 했어요.”
우겸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리 사무실에 사람이 없다고 한들, 사적인 이야기를 하기에는 아직 간이 콩알만 했다.
“거짓말.”
자리에서 번쩍 일어나 사무실에 사람이 없는걸 확인했다. 규영의 어깨를 잡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자 규영이 눈꼬리를 휘게 웃으며 제 무릎 위에 우겸을 앉혔다.
“조금만 더 해주면 화 풀릴 것 같은데.”
꽤 음흉한 표정을 한 채 말하는 걸 보니 벌써 화가 풀린 것 같았다. 우겸이 선심 쓰듯, 규영의 입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었다. 할 걸 다 했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규영이 허리를 잡고 놓을 생각을 안 했다.
“더 해드려요?”
“응. 내가 생각해 봤는데, 이번 주에 누나 만나고 올래?”
“갑자기요?”
“그냥, 요즘 살도 빠지는 것 같고. 누나 얼굴 보고 오면 괜찮아질까 해서.”
우겸의 표정이 꽤 진지하게 변했다. 서울에 같이 가자는 것도 아니고, 다녀오라고 하는 게 이상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떨리는 목소리로 규영에게 물었다.
“…팀장님은요? 같이 안 가고 저 혼자 가요?”
“아니, 너 데려다주고, 본가에 잠깐 들리려고. 그러고 우리는 저녁에 만날까? 아니면, 누나네 집에서 지내고 싶으면…. 음, 내가 맞춰서 데리러 갈게.”
규영과 사귀고 나서 주말에 떨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갑자기 떨어져서 지내려고 하니 대답이 쉬이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마비된 기분이었다. 뜬금없이 서울에 가자는 것도 이상하고, 우리와 며칠을 지내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고….
눈동자가 점점 떨렸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입을 꾹 닫고 있자, 규영이 물끄러미 바라보며 재차 입을 맞췄다. 애정을 갈구하듯,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혀를 넣으며 조금 전보다 더 진하게 서로의 온기를 나눴다.
똑똑-.
누군가 사무실 문을 똑똑 두들기는 탓에 우겸이 화들짝 놀랐다. 어깨를 들썩이며, 황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몸이 바닥으로 기울었다. 규영이 넘어지지 않게 손으로 받치다가 같이 넘어지고야 말았다.
우당탕 소리에 둘이 눈을 마주친 째 입을 떡 벌렸다.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렇지 않은 척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사무실에 들어온 지민도 꽤 놀랐는지, 규영을 부르지도 않고 파티션 안으로 얼른 들어왔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뇨, 잠깐 넘어져서. 서류 책상 위에 두고 가요.”
지민이 손에 있는 서류를 규영의 책상에 올려놓으며, 우겸에게 입 모양으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차마 뭐라 할 수 없었기에, 고개만 천천히 저었다.
그렇게 사무실 안에서 애정행각은 짧게 막을 내렸다.
***
퇴근길, 규영의 고집에 어쩔 수 없이 식당에서 음식을 포장하기로 했다.
“팀장님, 저 잠깐만 집에 들렀다가 가도 돼요?”
“왜? 이따가 같이 가면 되잖아, 아니면 오늘 거기서 잘까?”
잠깐 집에 가서 환기만 시키고 나오려고 했다. 거의 규영의 집에서 살다시피 하느라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겨우 집에 들렀다. 규영의 집에서 지내는 게 자연스러워 어떨 때는, 더 제집같이 느껴졌다.
“그런데 갑자기 집은, 왜?”
“그냥, 이번 주는 한 번도 안 갔으니까, 혹시나 해서.”
“그 생각은 못 했네, 아니면 아예 집을 합칠까?”
길을 걷다 말고 우겸이 걸음을 멈췄다. 방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뭐를 합치자고 한 거지? 규영이 너무 자연스럽게 말해서 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네?”
“아니, 어차피 맨날 같이 지내는데, 굳이 서로 집에 왔다 갔다 할 필요가 있나 싶어서.”
어, 어….
눈만 깜빡이고 넋 놓고 있자, 우겸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너무 갑자기인가? 천천히 생각만 해 봐, 우겸아. 응?”
입술을 꾹 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러면 그때 식당에서 오해한 건가? 그러나 아직 그날 새벽에 어디를 다녀왔는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뭔가가 있는 건 분명한데,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