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수상한 관계
오늘은 얌전히 자나 했더니, 규영이 자꾸만 허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래서 오늘 희영 씨랑 엘리베이터 안에서 단둘이 뭘 했길래, 우리 우겸이가 나한테 하트까지 보냈을까?”
“어…. 연차에 뭐 하냐고 그런 이야기였어요.”
“끝? 그런데 왜 안 하던 행동을 해?”
어쩐지 회사 내에서 조용하다 싶었다. 이렇게 자기 전에 허를 찌를 줄은 몰랐다. 그래도 우리 우겸이라고 하는 걸 보니 기분은 무척 좋은 것 같았다.
우겸이 눈을 도르륵 굴리며, 아까 규영이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씩 웃었다. 그리고 규영의 양 볼을 뽀얀 손으로 살짝 잡아,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뭐야? 정말 오늘 왜 그러지?”
규영의 반응을 보니 이것도 종종 해줘야 할 것 같았다. 평소보다 얼굴이 더 붉게 상기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자꾸 규영을 건들다가 역으로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황급히 몸을 돌아누웠다.
“안녕히 주무세요.”
옆에서 아쉽다는 듯 제 몸을 만지는 규영의 손길을 애써 무시한 채 눈을 감았다. 요즘 규영 덕에 잠을 깊이 잔 지 꽤 되었다. 그리고 규영 덕에 잘 먹어서 볼살이 더 통통하게 올라왔다. 거기에 몸에 살도 붙은 것 같고….
규영과 종종 같이 씻을 때마다 예전에는 너무 말라서 보기 안 좋았는데, 드디어 보기 좋게 변했다고 칭찬을 늘어지도록 했다. 그렇게 눈에 보일 정도로 살이 찐 건가? 그럴 때마다 괜히 신경이 쓰였다.
“….”
차마 대놓고 살이 많이 쪘냐고 물어볼 수는 없어, 규영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제 몸을 더 빤히 쳐다봤다. 평소보다 배도 많이 안 나온 것 같은데….
자꾸만 만지는 손길이 꽤 거슬렸다. 오늘따라 배를 더 만져댔다. 미간에 점점 골이 파였다. 오늘 점심도 원래 먹던 양에 절반밖에 안 먹었는데….
저도 모르게 작게 한숨이 나왔다. 연애란 무엇이길래, 이렇게까지 외모에 신경을 써야 하는 걸까. 눈을 꾹 감고 규영의 손길을 애써 피했다.
“왜 갑자기 한숨 쉬어. 그만 만질까?”
우겸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규영은 참 좋겠다. 가만 보면 자신보다 많이 먹는 것 같은데 살이 찌기는커녕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맨날 같이 먹고, 자고…. 종일 붙어있는데 처음 만났을 때와 몸 상태가 비슷했다. 혹시 저 모르게 새벽에 운동이라도 몰래 하고 오는 건가?
우겸이 규영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 …팀장님.”
“왜, 배고파?”
지금이 몇 신데, 배고프냐고 또 묻는지. 가만 보면 살이 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밤에도 틈만 나면 우겸의 입에 먹을 걸 물려줬다. 주로 야식이 과일이긴 했지만, 금요일만 되면 그렇게 치킨에… 온갖 배달 음식을 시켜줬다.
“아니, 누가 보면 맨날 배고픈 사람인 줄 알겠네.”
“그러면 왜, 뭐가 또 불만이야.”
“저 이제 야식 안 먹어요.”
우겸이 규영의 죄 없는 가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살이 붙기는커녕 더 몸이 좋아진 것 같기도 하고. 괘씸죄가 추가되었다. 입을 삐쭉 내밀고 손으로 꼬집었다.
그 모습에 규영이 우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어제 먹은 오렌지가 별로였어?”
“아뇨, 맛있었는데….”
“지금 또 까줄까?”
우겸이 또 고개만 흔들었다.
지금 오렌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렇게 매일 제 입에 음식을 넣어주는 규영 덕에 살이 찌는 게 맞았다. 아, 차라리 며칠 규영과 떨어져 지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그 혹시, 내일 집에 가도 돼요?”
“왜? 아직 주말 아니잖아.”
요즘 평일에는 규영의 집에서 살았고, 주말에는 우겸의 집에서 지냈다. 떨어질 법도 했지만, 규영이 사귀는 사이는 떨어져서 지내면 안 된다고 매일 같이 귀에 박히도록 이야기했다.
“그냥, 음…. 같이 말고 저 혼자 며칠만 있어도 돼요?”
규영이 당황한 듯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상함을 느낀 우겸이 규영의 가슴에서 손을 떼고 턱을 들었다.
규영의 눈이 초점이 맞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당황했다. 규영의 볼을 잡고 팀장님, 하고 불렀다.
“어, 팀장님.”
“아… 미안. 그… 음, 왜요? 나랑 같이 있기 싫어서?”
규영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우겸이 자리에서 번쩍 일어나 앉았다. 너무 조심스럽게 말해서 규영이 오해한 것 같았다. 이러려고 그런 소리를 한 게 아니었는데….
“아, 아뇨, 아뇨. 왜 싫어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럼, 왜?”
“아니….”
규영의 눈을 보니 솔직하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툭 치면 울 것처럼 얼굴에 힘이 없어 보였다. 조금 전까지 자신에게 장난치던 사람 같지 않았다.
하긴, 요즘 규영이 자주 악몽을 꾸었다. 아무래도 제 악몽이 규영에게 넘어간 것 같았다. 어떤 꿈을 꾸는지 자세하게는 모르겠으나, 지난주부터 자꾸만 자다가 울었다.
그럴 때마다 붕어눈이라고 놀리면서 달래주었지만, 마음이 좋지 않았다. 부쩍 규영의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힘도 없고, 가끔 멍하니 허공을 쳐다볼 때도 있었다.
도대체 무슨 꿈일까.
마음의 짐을 조금 덜어주고 싶었으나, 도통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매번 처연한 표정으로 교통사고가 나는 꿈이라고만 했다.
혹시나 해서 인터넷에 교통사고 나는 꿈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길몽이라고 풀이한 블로그도 있었고, 흉몽이라고 하는 곳도 있었다. 도대체 뭐가 맞는 건지.
그런 와중에 갑자기 제집을 가겠다고 했으니, 규영이 놀랄 법도 했다.
“뭔데? 내가 뭘 잘못했어? 갑자기 왜 그래?”
“아니! 요즘 자꾸만 팀장님이 야식으로 뭘 먹여서, 저만 살쪄서 해본 말이에요.”
규영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뭐?”
“자기 전에 자꾸 제 뱃살 만지고, 씻을 때마다 살이 쪄서 보기 좋다고 하고….”
우겸이 점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규영의 눈치를 다시금 살피고 다시 이불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 점심도 원래 먹던 거 절반밖에 안 먹었는데, 방금까지 계속 배며 허리 쓰다듬고….”
툴툴거리는 우겸의 말에 규영이 숨넘어가듯 웃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죽을 상을 했던 얼굴은 금세 사라졌다.
“아, 그건 나랑 다르게 말랑거리니까, 미안.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어. 미안해. 응?”
평소에 하는 사과처럼 우겸의 얼굴에 연신 입을 맞추기 시작한다. 간지러운 우겸이 몸을 움찔거리며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저한테 우겸아, 형이 미안해, 이렇게 말해주세요.”
“뭐?”
“팀장님도 틈만 나면 형이라고 부르라고 하니까, 한 번 해보세요. 그럼 제가 집에 가는 거 고려해 볼게요.”
“푸흡.”
규영이 대답하지 않고 자꾸만 웃어대자 우겸이 손을 이불 속에서 뺐다. 보기 좋게 살이 오른 통통한 손으로 규영의 얼굴을 꽉 잡았다.
“빨리, 우겸아, 형이 미안해, 앞으로 형이 안 놀릴게.”
“이거 하면 앞으로 집 간다는 소리 안 하는 거야?”
“음, 그건 또 모르죠.”
우겸이 새침하게 굴자 규영의 눈에서 눈물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우겸의 모습이 몹시 웃음이 나는 모양이었다. 겨우 진정시키며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우, 겸아…, 후…, 형이 미안…, 흐, 해.”
“그리고?”
“앞으로 …하, 안 놀릴게.”
그 말을 끝으로 규영이 얼굴을 베개에 묻고 어깨를 들썩거렸다. 끝마무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럼 곤란한데.”
규영이 겨우 얼굴을 들어 우겸에게 말했다.
“응?”
“…웃었으니까, 지금 껀 무효. 한 번 더 해주세요.”
그 말에 규영이 어찌나 더 격하게 어깨를 들썩거리는지. 입을 삐쭉이며 흘겨봤다.
그래도 규영의 입으로 형, 형 거리는 걸 들으니 의외로 귀여웠다. 몇 번이나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계속 시켜댔다.
그렇게 집에 돌아가겠다는 소소한 반항이 일단락되었다.
사무실에서 자신에게 집착한다는 걸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떨어지기 싫어할 줄은 몰랐다. 이러다가 나중에 헤어지면 큰일 나겠는데.
아직까지 규영과 만나면서 헤어질 생각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정도로 규영이 좋았고, 매일 매일 더 좋아져서 큰일이었다. 그런데 조금 전에 반응을 보니 자신이 규영을 좋아하는 것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규영이 저를 좋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기대하고 기대하던 연차 날이었다. 예전 같으면 한 달에 한 번 꼬박 쉬었는데, 누구 때문에 정말 오랜만에 쉬는 휴가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간단하게 짐을 싼 다음, 우리에게 전화했다.
“여보세요?”
-응. 몇 시쯤 도착인데?
“뭐 점심시간 맞춰서 도착할 것 같은데?”
-그래? 점심 같이 먹으면 좋은데, 누나가 요즘 바빠서 시간이 날까 모르겠네. 어, 잠깐만.
전화기 너머로 우리의 바쁨이 느껴졌다. 약국에 손님이 들어온 듯했다. 최근 대학병원 근처로 약국을 이전해서, 예전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손님이 많아졌다고 했다. 이러다가 오늘 저녁을 같이 먹기는커녕, 우리의 얼굴을 보기도 힘들 것 같았다.
우겸이 전화를 끊고 우리에게 문자를 남겼다.
[차라리 저녁 먹을까?]
[이따가 안 바쁠 때 연락해.]
[회사 팀장님 차 얻어타고 서울 갈 예정임.]
전화하는 내내 옆에서 빤히 쳐다보는 탓에 어쩔 수 없이 규영과 같이 간다고 말했다. 저렇게 집요하게 쳐다보는 걸 보면 원하는 게 있는 눈치였다.
“저, 혹시… 이따가 누나 약국 같이 가실 거예요?”
“그럼? 나 혼자 뭐해요?”
“어….”
하긴, 규영과 같이 쓴 연차이니 종일 붙어있는 게 어떻게 보면 맞았다. 그런데 규영은 원래 서울에서 쭉 살아왔기에, 서울에 가면 자신보다 더 바쁠 줄 알았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하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나 혼자 두고 어디 가려고?”
“그건 아닌데…. 서울 가셔서 계속 저랑 같이 있으실 거예요? 가족이나 친구나 누구 안 만나셔도 돼요?”
“뭐, 나만 우겸 씨를 좋아하나 보네, 그렇죠?”
또 극존칭을 쓰는 걸 보면….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에이, 무슨…. 저도 당연히, 음.”
“당연히, 뭐? 보면 뒷말은 꼭 안 하더라.”
그저 부끄러움에 항상 뒷말을 꿀꺽 삼켰다. 규영은 맨날 좋아한다, 사랑한다를 입에 달고 살았지만, 아직 자신은 그 말에 면역이 없었다.
방금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분명 얼굴이 상기되었을 것이다. 규영에게 들을 때마다 항상 말도 더듬고, 행동도 뚝딱거리게 된다. 언젠가, 눈 딱 감고 말할 날이 오리라,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
“그래서 누나한테 같이 인사드릴까?”
“정말 팀장님도 같이 가시게요?”
“어차피 나랑 왔다고 말했고, 그럼 나 혼자 서울에서 뭐해요? 가만히 차 안에서 우겸 씨만 기다릴까?”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럼 오늘 점심에 누나 만나고 저녁에 다시 나 만날 거예요?”
규영의 말에 우겸이 잠시 고민했다. 규영과 같이 누나를 만나러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우리와 같이 점심도 못 먹을 확률이 높았다. 연차에 혼자 처량하게 밥을 먹는 건 너무 슬프지 않은가.
사실 규영을 데리고 가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규영의 외모였다. 운전하는 규영의 모습을 옆에서 물끄러미 쳐다봤다. 저 정도의 외모면, 누나가 엄청나게 좋아할 게 분명했다. 오히려 규영을 소개해달라고 할 수도….
“그럼 선글라스 쓰고 같이 가실래요?”
“아니, 갑자기, 왜?”
“그냥… 제가 지금 잠깐 든 생각인데, 생각보다 팀장님 외모가 저희 누나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에요. 팀장님 얼굴 보고 저한테 소개라도 시켜달라고 하면 어떡해요.”
“어이고?”
규영이 어이없다는 듯 얼굴을 쓸어내리며,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정말이었다. 그러면 족보가 꼬여도 너무 꼬이니, 애초에 그런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규영의 손을 괜히 쓰다듬었다. 이렇게 크고 두꺼운 손을 남자친구 손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사귄 지 얼마 안 되어 콩깍지가 쓰인 걸 수도 있지만, 주관적인 것을 제외하고 객관적으로만 봤을 때 규영이 잘생긴 건 사실이었다. 오늘따라 운전대를 잡은 손조차 잘생겨 보였다.
“왜, 또, 너무 잘 생겼어?”
“그러게요. 제 남자친구인 게 티가 났으면 좋겠는데.”
규영이 운전하다 말고 또 크게 웃기 시작했다. 요즘 허파에 바람이라도 들었는지, 자신이 무슨 말만 하면 저렇게 자지러지게 웃었다. 저렇게 무슨 말만 하면 웃어주는 것도 제 버릇이 나빠지게 하기 딱 좋은 행동이었다. 이렇게 오냐, 오냐 해주면 사회생활할 때 어찌나 우쭐하는지 규영은 모르는 눈치다.
“뭐 반지라도 맞출까?”
“어….”
생각도 못 했다. 그런데 반지는 자신도 그랬지만, 규영이 더 그럴 것 같았다. 자신은 한낱 사원이지만, 규영은 부서 내 팀장이기도 하고, 또…. 자신과 다르게 유명 인사이기에 이런 거로 꼬투리 잡혀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을 것이다.
아! 순간 번쩍하고 떠오른 생각에 우겸의 입가가 천천히 올라갔다.
그리고 잡고 있던 규영의 손을 제 입 근처로 가져왔다. 손등에 소리가 날 정도로 물고 빨았다. 처음에 규영이 뭘 하느냐고 물으려다가, 우겸이 하는 행동을 보고 또 꺼이꺼이 웃어댔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을까.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규영의 손등을 쳐다봤다. 언뜻 보면 피멍이 든 것처럼, 손등에 키스 마크가 빽빽하게 남겨져 있었다.
“아, 정말 이거면 돼? 내가 손을 주머니에 넣으면 말짱 도루묵 아냐?”
“어…. 그 생각까지는….”
아직 자신이 사원이고 규영이 팀장인 이유가 다 있었다. 어찌나 저렇게 부족한 부분을 잘 찾아내는지, 정말 그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손뼉을 쳐 줬다.
“이따가 갓길에 차 세워줄 테니까, 목이라도 물래? 보이는 데 자국이 있어야 누나가 소개해달라는 말을 안 하지.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도 임자 있는 줄 알고.”
“정말요?”
규영이 지나가는 말로 한 걸 수도 있지만, 자신은 그 어떤 때보다 진심이었다. 올라갔던 눈꼬리가 초롱초롱하게 변했다. 지금은 다른 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누나뿐만 아니라 다른 그 누구도 규영을 쳐다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가득 찼다.
***
“정말 하게?”
갓길에 차를 세우고 규영과 우겸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규영이 농담 삼아 한 말에 우겸이 죽자 살자 덤볐다. 어디에 표시를 남길지 다 머릿속에 구상까지 해놨는데…. 지금와서 무를 수는 없다.
“아까는 그러라고 하셨잖아요.”
“아니, 그게…. 그런데, 우겸 씨 누나는 내가 취향이 아닐걸?”
우겸이 작정하고 규영의 목에 자국을 내려고 할 때마다 규영이 살살 회유하기 시작했다.
“그걸 팀장님이 어떻게 아세요? 누나 만나보셨어요?”
“아니, 그건 아닌데…. 정말 나는 취향이 아닐 텐데….”
누나 취향은 자신이 더 잘 알았다. 규영의 얼굴을 보자마자, 반할 확률이 높았다. 우리의 취향은 정말 잘생긴 사람이었다. 따지고 보면 규영도 제 취향인데….
말과 행동이 다른 규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입을 쭉 내밀며, 규영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살짝만 자국 낼게요. 어차피 며칠 뒤면 다 사라질걸요?”
“알겠어. 그럼 한 개만?”
규영에게 조르고 졸라 겨우 타협했다.
눈을 부릅뜨고 몸을 규영 쪽으로 기울였다. 한 손으로 목을 잡고, 위치를 선정했다. 살짝 보이는 것보다 아예 티가 나는 자리가 좋을 것 같은데…. 목으로 얼굴이 가까이 다가갔다. 규영의 연약한 살을 천천히 물고 빨았다.
“으….”
시간이 지나고 규영의 목에서 얼굴을 떼었다. 고개를 뒤로 빼서, 제가 낸 자국을 쳐다봤다. 꽤 마음에 들었다. 흡족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데 하나는 살짝 부족한 것 같기도 하고….
어쩔 수 없었다. 조금 전과 같이 규영의 목을 잡고 반대쪽에도 자국을 내기 시작했다.
규영의 목에 작은 울혈이 생겨났다. 이 정도면 충분히 애인이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점점 규영의 얼굴이 붉어지자, 우겸이 황급하게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규영이 백미러로 제 목을 훑어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겸의 행동이 웃기는지 허탈한 웃음만 지었다.
***
우리의 약국으로 가는 내내 우겸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도로에 차가 많아서 막히는 데도, 답답한 게 없었다. 옆에 규영의 목을 힐긋거리며 볼 때마다 실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누나 만나는 게 그렇게 좋아?”
“그렇기도 하고.”
누나를 만나는 것도 좋았고, 규영의 목에 표시를 남긴 게 꽤 마음에 들었다. 회사 때문에 평일에는 자국을 내기 어렵겠지만, 주말에는 종종 저렇게 티를 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면 규영의 말대로 반지라도 맞춰야 하나….
가만 보면 규영 못지않게 질투심이 상당했다. 처음 하는 연애라서 그럴 수도 있다. 요즘 드는 생각은 규영도 회사에서 다른 여직원들과 이야기하면 저한테 쪼르르 와서 뽀뽀해 줬으면 했다. 가만 보면 희영과 단둘이 있을 때가 꽤 많았다.
아무리 팀장이라지만, 곰곰이 하나하나 다 따져보면 불공평한 게 꽤 있었다.
“팀장님.”
“응?”
“갑자기 든 생각인데, 저 모르게 다른 여자 직원 만나면 저한테도 뽀뽀해 주세요.”
“어?”
규영이 미친 듯이 웃었다. 이렇게까지 큰소리를 내는 사람이 아닌데, 차가 떠나갈 정도로 웃어댔다. 심지어 차 안에서 들리는 노랫소리가 묻힐 정도였다.
“나는 아주 좋은데? 그런데 꼭 그럴 때만 뽀뽀해야 해요? 나 하고 싶을 때 하면 안 돼요?”
“어…, 어.”
“빨리 다음 주가 왔으면 좋겠다. 출근해서 시도 때도 없이 하게.”
“어, 그게 아닌데. 그러다가 들킬 수도 있어요. 취소할게요.”
규영이 잡고 있던 우겸의 손을 꽉 눌렀다.
“내가 왜 옆으로 오라고 한 지 아직도 몰라요? 파티션까지 높은 걸로 설치했으면 눈치챌 법도 한데.”
“뭐, 뭐가요?”
우겸이 놀란 눈을 떴다.
“예전부터 약간 그런 상상을 했거든.”
“저 안 들을래요. 없던 일로 할게요.”
“사람들 다 있는데 몰래몰래 뽀뽀하고.”
“악.”
규영에게 잡혀있던 손을 서둘러 빼고 귀를 막았다. 변태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변태일 줄이야. 그러다가 들키면 남은 회사 생활을 어떻게 하라는 건지.
우리의 약국까지 가는 내내 규영이 옆에서 손으로 콕콕 찌르고, 말을 걸어도 못 들은 척하며 창문 밖만 바라봤다.
우리의 약국 앞, 맞은편에는 대학병원이 크게 있었다. 예전에 자신이 교통사고가 났을 때 수술했던 병원이었다. 몇 년 사이에 건물을 또 지은 모양이었다. 볼 때마다 크기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우리는 원래 다른 곳에서 약국을 했었다. 그러다가 학교 선배 좋은 자리가 생겼다며, 결국 이곳에서 같이 동업하게 되었다. 마음 한편으로 우리가 혼자 약국을 운영하는 게 걱정될 때가 많았다. 어렸을 적에 우리의 약국에서 아르바이트했을 때, 약국 일이 쉬운 게 아니라는 걸 몸으로 직접 깨달은 적이 있었다. 멀리 있어서 잘 챙겨주지도 못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규영의 차를 약국 근처에 주차하고 약국 주위를 둘러봤다. 그동안 사진으로만 받아봤는데, 직접 눈으로 보니 약국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지난번에 약국과 크기가 비교되지 않았다. 아, 동생이 돼서 이러면 안 되는데, 사실 이사하고 처음 온 거였다.
우리가 약국을 옮긴 시기가 규영을 처음 마주했을 때라,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 꿈도 그렇고 규영 때문에 모든 신경이 곤두서있었을 때였다.
“저, 사실 여기로 누나가 약국 옮기고 처음 와요. 이렇게 클 줄은 몰랐는데…. 잠깐 근처 꽃집이나 마트 들려서 뭐라도 사갈까 봐요.”
“아, 진짜? 잠깐만. 내가 혹시 몰라서.”
규영이 트렁크를 열어 케이크 상자와 꽃다발을 꺼냈다. 저런 건 언제 준비한 거지. 동생인 자신보다 백배, 천 배는, 더 나았다.
“어? 이거 뭐예요?”
“빈손으로 올 수는 없으니까, 형이 준비 좀 했지.”
“언제요? 이상하다. 우리 둘이 떨어진 적이 없었는데.”
“우겸아, 형이야.”
지난번에 형 타령을 하며 사과하라고 한 이후로 종종 이렇게 거들먹거렸다. 유치하기 짝이 없었지만, 자신도 미처 생각지도 못한 세심한 행동에 환하게 미소가 지어졌다. 이렇게까지 준비해 줘서 정말 고마웠다.
규영의 선물 덕에 꽤 든든한 마음을 하고 약국 안으로 들어갔다. 주위를 둘러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전에 혼자 약국을 운영했을 때와 차원이 달랐다. 가운 입은 사람 수 하며, 약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즐비해 있었다. 이렇게까지 사람이 많을 수가 있나. 아무래도 우리와 점심을 먹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우겸은 어안이 벙벙한 채 약국 안을 둘러보았다. 우리에게 사진으로만 전달받았을 때는 이 정도로 클 줄도 몰랐고, 또 사람으로 약국 내부가 꽉 차 있을 줄은 몰랐다.
많은 인파에 살짝 위축되어 의도치 않게 쭈뼛거렸다. 주위를 둘러보고 애타게 우리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안에 있는 건가?
우겸이 당황한 표정을 짓고 규영을 올려봤다.
“누나한테 연락하고 차라리 저녁에 올까요? 이렇게 사람이 많을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온 김에 얼굴은 비추고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아, 그런가.”
우겸은 약국 입구에 서서 계속 눈동자만 굴렸다. 그러자 규영이 우겸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말한 다음 계산대에 있는 사람에게 걸어갔다.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우리를 찾는 듯했다.
우겸은 가만히 빈자리에 앉아 규영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났을까. 카운터 안에서 우겸과 비슷하게 생긴 여자가 빠른 걸음으로 나왔다.
우겸의 누나, 우리였다.
“우겸아!”
큰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는 탓에 약국에 있는 사람들의 이목이 우겸에게로 집중되었다. 평소 같으면 부끄러워할 법도 한데,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우리의 얼굴이라 그럴 겨를이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에게 냅다 안겼다.
우리 또한 부둥켜안으며 반겨주었다. 얼마 만에 느끼는 우리의 품인지 모르겠다. 역시나 따듯하고, 익숙했다. 어린아이처럼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 품이 그동안 너무나 그리웠다.
그렇게 몇 분을 안고 있었을까. 우리가 주위를 의식하는 듯 우겸의 뒤에 있는 규영을 여러 번 바라보았다. 재차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겸을 품에서 떼어 놓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 누구? 혹시 아는 사이야, 우겸아?”
“아까, 같이 온다고 말했던 우리 팀장님.”
그제야 굳어있던 우리의 얼굴이 풀렸다.
“아, 안녕하세요. 우겸이 누나, 고우리라고 합니다.”
우리가 먼저 규영에게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했다.
“네, 안녕하세요. 허규영이라고 합니다.”
둘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다잡고 인사했다. 그 옆에서 우겸이 둘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막상 우리에게 규영을 소개해 주니 살짝 긴장되었다. 목이 바짝 타들어 가는 기분에 괜히 마른침만 삼켰다.
“우겸이한테 종종 전화로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저희 어디서 뵌 적이 있나요? 생각보다 낯이 익네요.”
“글쎄요? ”
“아니면 우겸이한테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처음 뵙는 것 같지 않나 봐요.”
“아, 제 이야기를요?”
규영이 그럴 줄 몰랐다는 듯 우겸을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 가끔, 회사 이야기를 하며 규영에 대해 잠깐씩 말한 게 전부였는데, 우리가 저렇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그런데 낯이 익다고 한 걸 보면 뭔가 마음에 든 눈치 같기도 하고.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규영의 목에 더 흔적을 남길 걸 그랬다.
입술을 삐쭉이며, 우리에게 말했다.
“누나, 바빠서 점심은커녕 저녁도 못 먹는 거 아니야?”
“아냐, 점심은 바쁘긴 한데, 병원이 5시까지 해서 저녁에는 한가해. 이따가 누나가 전화할게. 뭐 먹을지 생각해놔. 알겠지?”
우겸이 다시금 우리에게 살짝 안겼다. 누가 뭐래도 가족은 가족이었다. 그리고 아직 누나의 품이 그립기도 했다.
“내가 너무 늦게 와서 미안.”
“얘는, 무슨. 너무 우리끼리 이야기해서 팀장님 멋쩍으시겠다.”
우리가 우겸을 떼어놓고, 규영을 빤히 쳐다보며 행색을 살폈다.
“여기까지 같이 와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우겸이 편에 드시면 좋을 만한 비타민제들 몇 개 챙겨 보낼게요.”
규영이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어색함도 잠시 규영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과 케이크를 우리에게 전해줬다.
“어머, 정말 괜찮은데.”
“그래도 빈손으로 올 수 없어서요. 우겸 씨랑 같이 골랐어요.”
우리의 입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소리 내며 웃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규영에게 건네어 받은 꽃에 가깝게 얼굴을 대며 향을 맡았다.
규영의 센스 있는 선물 덕에 우리가 무척 좋아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
식당에서 음식을 먹는 내내 우겸은 힘이 없었다. 아무래도 우리와 짧게 만나서 더 그런 듯했다. 규영을 만나기 전에는 보통 한 달에 한 번은 서울에 올라와서 우리의 얼굴을 봤었다. 최근 들어, 규영과 붙어있는 시간이 많아 서울에 올라올 시간이 없었다. 아니, 생각하지도 않았다.
연애하면 친구들과 연락을 안 하는 사람이 꼭 주위에 한 명씩은 있지 않나? 평소 주위에서 그런 사람을 욕할 때마다 왜 그러나 했는데, 막상 규영과 만나고 보니 그 사람이 자신이었다. 졸지에 오랫동안 제 얼굴에 침을 뱉은 사람이 되었다.
“누나 얼굴 보고 왔는데, 왜 이렇게 우울해.”
눈치가 빠른 규영답게, 제 심정을 바로 알아차렸다.
몇 개월 만에 봐서 그런가, 너무나 애틋했다. 어릴 적에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의지할 만한 사람은 우리밖에 없었다. 특히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탓에 누나보다는 때로는 엄마이자, 아빠이자, 든든한 울타리라고 생각되었다.
갑자기 약국을 대학병원 근처로 옮겨서는, 몇 개월 사이에 얼굴이 홀쭉해진 것 같았다. 우리가 걱정되는 마음을 차마 겉으로 대놓고 티를 낼 수 없어 죄 없는 소고기만 젓가락으로 집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그냥, 오랜만에 만나서요.”
“어이구. 아니면 서울로 올라와서 살까?”
놀란 얼굴을 하고 규영을 올려다보았다.
“뭐, 어차피 굳이 거기에 있을 필요는 없잖아. 서울로 전근 신청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어, 그래도… 음.”
“그건 아니야?”
뭐라 대답하려고 하자, 입가에 묻은 소스를 규영이 천천히 손으로 닦아주었다. 순간 말문이 막힐 정도로 흠칫 놀랐다.
규영이 응? 하고 재차 묻자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그냥, 사무실 사람들도 제 가족 같아서, 있을 수 있는 만큼 거기서 살고 싶어요. 혹시 팀장님은 나중에 서울로 다시 올라오실 거예요?”
“아니, 네가 싫다는데 혼자 올라와서 뭐해.”
“그래도 서울로 가셔야 하면, 저는 괜찮아요. 주말마다 만나면 되니까.”
“됐어요, 얼른 먹기나 해.”
규영이 아무렇지 않게 음식을 먹여주었다. 조금 전도 그렇고…. 집 안에서 이러는 건 그러려니 했지만, 식당에서까지 이러니 꽤 눈치가 보였다. 다 큰 성인, 그것도 남자 둘이서 음식을 먹여주는 것이 얼마나 얼굴이 낯 뜨거운 일인가.
입을 벌리지 않고 모른척하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끈질기게 규영의 젓가락이 입 앞에서 떠날 줄은 몰랐다.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음식 먹기 바쁜지, 여기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입에 있는 음식을 천천히 씹으며, 규영에게 말했다.
“전, 정말 괜찮아요. 평일에는 각자 일하느라 바쁘니까, 주말마다 제가 서울로 오면 누나도 보고, 팀장님도 보고.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규영이 상 위에 수저와 젓가락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오히려 그 소음에 주위에서 다 저희를 쳐다봤다.
“내가 됐다고 했잖아, 우겸아.”
한술 더 떠서 인상까지 쓰면서 정색했다. 단둘이 있을 때는 저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는데, 괜스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
그렇게 몇 분 정적이 흘렀을까. 무서운 얼굴과 다르게 행동은 다정했다. 표정을 갈무리한 후 우겸의 앞접시에 음식을 올려주었다. 기분이 나쁘긴 했는지, 조금 전과 다르게 직접 먹여주지는 않았다.
순간 예전 우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처음 봤을 때, 그 잊을 수 없었던 규영의 얼굴이었다. 장거리 연애가 그렇게까지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방금까지 입안에서 침이 고이도록 달게 느껴졌던 고기가, 갑자기 까끌까끌하게 느껴졌다. 죄 없는 고기를 느릿느릿하게 씹었다.
***
기어코 체를 했다. 초반에는 정말 맛있게 먹은 소갈비였는데, 규영의 정색에 속이 꽤 놀란 것 같았다. 미리 잡아둔 호텔에 들어오자마자, 지금까지 계속 속을 게워냈다.
“괜찮아?”
우겸이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말할 힘도 없었다. 오랜만에 체를 해서 속이 말이 아니었다. 우리와 저녁은 결국 불발되었다. 잘하면 아까 낮에 본 게 전부가 될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속이 뒤집히다 못해 정신 차리기 힘들었다.
우리가 집에 와서 자고 갈 게 아니냐고 묻는 말에, 회사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규영의 집에서 지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전화기 너머로 아쉬움이 가득 찼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 몰골을 하고 만나면 걱정할 사람은 우리였다. 차라리 몸이 괜찮아지고, 보면 된다. 아직 연차도 남았고….
“병원 갈까?”
또 고개만 저었다. 아까와 정반대인 규영의 목소리에 울컥했다. 지금 누구 때문에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눈을 보니 걱정스러움이 뚝뚝 묻어 나왔다.
괘씸한 규영을 씩씩거리며 노려봤다.
“왜 그렇게 무섭게 쳐다봐, 우겸아. 내가 미안해. 응? 아까 화내서 미안해. 갑자기 장거리니, 뭐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까, 갑자기 화가 나서 그랬어. 미안, 미안.”
규영이 연신 사과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큰 손으로 제 엄지와 검지 사이에 움푹 팬 곳을 꾹꾹 눌렀다. 이런 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어렸을 적 누나가 저에게 해줬던 행동이었다.
작은 체구답게, 어렸을 적 잔병치레가 많았다. 배탈도 많이 나고, 감기도 자주 걸리고. 꼭 속이 좋지 않아 체를 하면 우리가 손을 이렇게 주물러주곤 했다.
예전에는 이렇게 해주면 금방 나았는데…. 오늘은 꽤 단단히 체를 했는지, 손이 계속 차디찬 상태였다.
또 속이 비틀리기 시작했다. 규영의 손을 뿌리치고, 허겁지겁 화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나올 것도 없는데 자꾸 헛구역질이 나왔다.
규영이 뒤에 따라왔는지, 옆에서 우겸의 등을 토닥이며 안절부절못했다.
***
결국 우겸은 낮에 봤던, 우리의 약국 앞에 있는 대학병원 응급실에 왔다. 이 시간에도 아픈 사람이 꽤 많았다. 다들 얼굴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사람들에 비해 중증도 아닌 경증, 아니 정말 가벼운 환자인 것 같았다. 괜히 병원에 왔다.
약간의 후회를 하며, 몸을 축 늘어트린 채 대기실에 앉았다. 아까는 속이 거북하다 못해 뒤틀렸는데, 막상 병원에 오니 속이 멀쩡한 것 같기도 했다.
“나 잠깐만, 전화 좀.”
아픈 것도 서러운데, 규영까지 제 주위에서 사라지니 멀쩡하던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분을 혼자 외롭게 앉아 있었을까. 규영이 돌아오자 갑자기 간호사가 제 이름을 불러 간이침대로 데리고 갔다.
“일단 피검사를 해야 해서요. 편안하게 누우시면 돼요.”
침대에 천천히 눕고 천장을 쳐다봤다. 교통사고 이후로 얼마 만에 다시 보는 하얀색 천장인지 모르겠다. 간호사가 팔을 살살 치며 혈관을 찾았다. 무서움에 옆으로 고개를 돌려 규영을 바라보았다.
많이 놀라 보였다. 병원 입구에서부터 규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는데, 지금은 손을 달달 떨며 불안해 보였다.
가만히, 규영의 손을 살짝 잡았다. 괜찮다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규영이 제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애처롭게 쳐다보았다.
그때, 차가운 바늘이 피부에 닿았다.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잡고 있던 손가락을 세게 잡았다.
“으….”
규영이 옆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혼자 있을 때 아팠더라면, 더 서러웠을 것이다.
“검사 결과가 나오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려서요. 일단 수액 먼저 맞고 기다리고 계시면 될 것 같아요.”
알겠다고 대답하고, 또 눈을 감았다. 차라리 날이 밝을 때 대학병원이 아닌 동네 내과에 가서 진료받을 걸 그랬다. 규영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지는 걸 보니 마음이 쓰였다.
“그냥 다시 호텔로 돌아갈까요? 이제 속도 많이 괜찮아졌는데….”
“아냐, 아냐. 일단 검사 결과 보고 가자. 응?”
“…정말 멀쩡한데, 오랜만에 병원에 와서 그런가. 빨리 나가고 싶어요.”
연신 볼멘소리 하며 징징거리자, 규영이 큰 손으로 얼굴을 살살 어루만졌다. 수액을 맞지 않은 팔 쪽으로 걸어왔다. 침대에 살짝 걸터앉아, 아까와 같이 손을 꾹꾹 눌렀다. 규영의 손길 덕인가, 아까와 다르게 차디찼던 손이 점점 따듯해졌다. 점점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커튼을 열고 가운을 입은 의사가 들어왔다. 규영과 안면이 있는 듯 둘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는 체를 했다.
“안녕하세요. 피검사 방금 보고 왔는데, 수치들은 다 괜찮아서요. 입원하셔도 괜찮고, 아니면 수액만 맞고 퇴원하셔도 돼요.”
“아, 오늘은 일단 퇴원할게요. 환자가 병원에 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네, 그럼 집에 가서도 속이 불편하시면 외래로 다시 오세요. 그때 진료 보고 입원하든, 내시경을 하든 하면 될 것 같아요. 일단 먹는 약도 처방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의사가 떠나자 규영이 가만히 누워있는 우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까와 다르게 하얗게 질렸던 얼굴이 점점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
작게 한숨이 튀어나왔다. 모든 게 다 제 탓 같았다. 우겸의 누나를 만나고 모든 게 다 순조로웠다. 그런데 밥을 먹다 말고 갑자기 장거리 연애니, 주말마다 만나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순간적으로 욱한 마음에 우겸에게 성질을 부렸다.
어떻게 다시 만난 건데, 다시 만나려고 몇 번이고 무슨 행동을 한 지도 모른 채 속 편하게 장거리 연애 타령을 할 때 우겸이 정말 미웠다.
매번 무슨 선택을 한 건지도, 우겸은 하나도 모르면서 그렇게 속 편하게 떨어져 지내도 괜찮다고 말할 때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지는 줄 알았다.
“우겸아.”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렀다. 자꾸 예전 우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의 우겸과 지금의 우겸은 정말 다른데, 왜 자꾸 겹쳐 보이는 걸까.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왈칵 나왔다. 또다시 습관처럼 우겸의 가슴에 귀를 대었다. 온몸을 샅샅이 만지며 체온을 확인했다.
그때와는 달랐다. 이 짓도 이제 그만해야 하는데, 자꾸만 제 앞에서 눈을 감고 있는 우겸을 보면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우겸아.”
볼을 살짝씩 건드리며 우겸을 깨웠다. 계속에서 이 모습을 볼 자신이 없었다. 견딜 수 없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