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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수상한 사람 (8/13)

8. 수상한 사람

규영의 집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우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모습을 보는 규영도 마찬가지였다. 우겸의 행동 하나하나 지켜보는 눈동자가 쉴새 없이 움직였다.

‘근데 혼자 사세요?’

‘응.’

‘가구가 생각보다 많이 없네요. 하긴, 매일같이 약국에 오실 때 양복이 매일 바뀌는 거 보고 성격이 엄청 깔끔하시다고, 생각했는데.’

우겸에게 최대한 잘 보이고 싶어 혼자 멋을 부렸던 건데, 그걸 알아주니 괜스레 마음이 두근거렸다. 마른 입술을 괜히 혀로 축이며, 포장해온 음식을 식탁 위에 올렸다.

자주 가는 참치 집에 가서 회와 초밥을 포장해 왔다. 우겸이 혹시나 회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바삭한 튀김까지 포장을 해왔다. 아까 치킨을 말한 탓에 튀김도 좋아할 것 같았다.

맛있는 것을 먹이고 싶어 최대한 좋은 부위로만 포장해오긴 했는데, 우겸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어쩌나, 속으로 전전긍긍하며 포장을 뜯었다.

‘와, 회도 포장하셨어요? 이 귀한 참치를.’

‘회도 좋아해요? 혹시 몰라서 포장할 수 있는 건 다 포장해달라고 했는데.’

우겸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가만히 있질 못하는 성격인지, 제 옆에 딱 붙어서 포장을 뜯는 걸 같이 도와서 했다. 그리고 움직일 때마다 바짝 붙어 따라다녔다. 규영은 그럴 때마다 숨을 참으며 멈칫했다. 우겸의 성격이 생각했던 것보다 몹시 살가웠다.

‘앞접시도 꺼낼까요?’

남과 부딪히며 살아오질 않아서, 이렇게 상대방이 몸을 바짝 붙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낯설었다. 자꾸만 손에서 땀이 났다. 최근 들어 가장 당황했던 것 같았다.

규영은 혼자 지내는 것이 가장 편했다. 다른 사람을 만날 때도 사실 집에까지 데려온 적은 없었다. 성욕이라 하면 호텔에서도 풀어도 되는 거니, 굳이 제 생활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 더 컸다.

그 선이 존재했던 것 같았다. 자신의 것을 침범당하고 싶지 않은 그런 선. 우겸을 집에 데려온 것은 우발적이었다. 그냥, 시간도 늦었고…. 일단은 그게 다였다.

‘아, 네.’

우겸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간단한 대답만 할 뿐, 더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대충 상을 차리고 식탁에 앉아 포장해 온 음식을 하나씩 맛보았다. 우겸의 입맛에 맞는 듯 먹을 때마다 탄성을 질렀다.

‘와.’

‘그렇게 맛있어요?’

그 모습에 자꾸만 웃음이 났다. 아무래도 평생 웃을 걸 오늘 다 웃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실없이 웃기만 했다. 그 정도로 우겸의 행동 하나, 하나에 내성이 없었다.

‘비싼 참치라서 그런지, 입에 넣자마자 사르륵 녹네요. 와.’

‘아, 느끼하면 마실 거라도 줄까요? 술?’

평소에 술을 즐기지 않는 듯 우겸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자신은 우겸과 같은 나이 때 술을 좋아했다. 심지어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시기에는… 황금기가 다름없었다.

‘아, 술 못 마시면 물이라도 줄까요?’

‘아뇨, 아뇨. 형 드시고 싶으시면 저희 딱 한 잔만 할까요?’

그 말에 규영이 입꼬리를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이라는 소리를 처음 들은 것도 아닌데, 들을 때마다 좋다. 이렇게 듣기 좋은 소리인지 비로소 오늘에서야 깨달은 게 아쉬울 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진작 우겸과 형, 동생 사이로 지낼 걸 그랬다.

규영이 찬장을 찬찬히 훑었다. 어떤 걸 우겸에게 맛을 보여주는 것이 좋을지 고민이 되었다. 갈색 양주를 집으려다가 살짝 멈칫하고, 그 옆에 있는 투명색 병을 택했다.

아직 나이도 어리니까, 도수가 낮은 술이 나을 것이다. 잔과 술을 식탁 위에 올려놓자 우겸이 눈만 동그랗게 뜰 뿐 어색하게 굴었다.

아무래도 소주를 생각하고 술을 먹겠다고 흔쾌히 대답한 것 같았다.

‘술 잘 못하면 먹지 말까요?’

‘아뇨, 제가 이런 술을 언제 먹어보겠어요.’

곰살맞게 실실 웃으며 대답하는 우겸의 모습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마냥 좋았다.

저렇게 순진한 얼굴을 한 우겸을 상대로 하체가 자꾸만 눈치 없이 굴었다. 집에 같이 들어온 순간부터 성기에 피가 몰렸다. 마주하고 앉아 형 소리를 들을 때마다 움찔거리기까지 했다. 뭐, 집에 같이 들어온 순간부터, 상상 속에서는… 우겸을….

그러나 상상과 현실은 꽤 차이가 났다. 가까이서 보니 애는 애였다. 얼굴에 솜털이 빽빽했다. 거기에 어찌나 생글생글 웃는지, 마음 한편으로는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규영이 쓴웃음을 지으며 우겸에게 술을 조금 따라줬다. 그리고 제 술잔에는 술을 콸콸 따르며 잔에 최대한 가득 채웠다. 방금까지 몹쓸 생각을, 죄의식을 씻겨 내리고 싶었다.

그 모습에 우겸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을 쭉 내밀었다.

‘왜요?’

‘저도 형만큼 따라주세요.’

‘진짜? 이거 도수가 높아서. 처음 먹을 때 이 정도도 힘들 수 있는데?’

규영의 걱정 어린 말에 우겸이 심통 난 표정을 지었다. 식탁 위에 놓인 유리병을 잡았다. 규영의 잔을 한 번 쳐다보고 똑같은 양을 졸졸 따랐다.

뭐가 문제지? 규영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저희 누나가 항상 형처럼 그래요. 이제 군대까지 다녀와서 다 컸는데, 아직 어린애 취급을 하거든요.’

툴툴거리며 누나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거기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저러는 걸 보면 아직 애는 애였다. 저런 애를 상대로 무슨 상상을 한 건지. 다시 한번 제 상상 속에서 했던 행동에 대해 짧은 반성을 했다.

잔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우겸도 저를 따라서 잔을 들었다. 입으로 짠 소리를 내며 한입에 술을 털어 마셨다. 눈을 살짝 감았다가 뜨자, 술잔을 들고 멈칫한 우겸이 보였다. 아무래도 한 번에 마시기에는 무리가 있었나 보다. 잔을 뺏으려고 손을 뻗었다.

우겸이 고개를 돌리고 잔에 입술을 살짝 적셨다. 마시지 않고 닿았을 뿐인데도 인상을 마구 찌푸렸다. 그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차라리 물을 줄 걸 그랬다. 그냥 먹지 말라고 해야 하나.

규영이 자리에서 살짝 일어나, 잔을 뺏으려 했다. 우겸이 이내 무슨 오기가 생겼는지 눈을 꾹 감고 잔을 단숨에 비웠다.

속으로 걱정이 되어야 하는 게 맞는데, 자꾸 웃음이 나는 이유를 모르겠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나는 우겸 씨보다 나이가 많아서 이 정도는 괜찮은데, 천천히 마셔요.’

일부러 약 올리듯 웃으며 우겸의 신경을 살살 긁었다. 그 말에 우겸은 또 뾰로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한껏 어깨를 올리며, 잔에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규영의 잔에 절반만 따르고, 자신의 잔에는 가득 따랐다.

‘진짜 괜찮겠어요?’

우겸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눈 깜짝할 사이 우겸이 혼자 술을 마신 다음 몸을 부르르 떨었다. 행동과 다르게 평소 술이 워낙 약한 편인 것 같았다. 고작 한 잔밖에 마시지 않았는데 우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슬슬 취기가 오르는 듯 얼굴에 손부채질하며 몸을 옴짝달싹 못 했다.

규영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고, 앞에 있는 회를 우겸의 입에 넣어줬다. 어미 새가 새끼 새에게 해주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입에 넣어주면, 우겸은 그걸 꿀떡꿀떡 잘 받아먹었다.

빠르게 취한 것이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우겸의 반응에 한층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술에 취하면 다른 사람 앞에서도 이렇게 행동하지 않을까. 우겸의 주위 사람들은 이 모습을 적어도 한 번씩은 봤을 것이다. 기분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형.’

‘네?’

‘그래서 언제 반말할 거예요?’

‘아, 이제부터 할까?’

규영이 말을 놓자 우겸이 세상을 다 얻은 듯 미소를 지었다. 온몸이 빨갛게 변한 채로 저렇게 실없이 웃자, 규영의 아랫도리가 죽을 생각을 안 한다.

사실 집에서부터 이랬으면 여차여차 참겠는데, 차 안에서도 힘든 적이 한두 번이 아녔다. 무슨 남자애가 저렇게 곰살맞게 구는 건지. 자꾸만 주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형.’

‘응?’

‘왜 맨날 약국에 오셨어요?’

정곡을 찌르는 말에 규영이 입을 다물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단단해진 성기가 차츰 죽어가기 시작했다. 정처 없이 눈을 굴리다가 식탁 위에서 가장 눈에 띄는 와사비를 집어 간장에 풀었다. 그 짓을 계속 반복했다. 어쩔 수 없었다.

최대한 말을 아꼈다.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한들 우겸이 받아줄 리가 없었다.

‘나 보러 왔어요?’

‘….’

저돌적인 말에 규영은 빤히 우겸을 쳐다보았다.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걸까. 온몸이 빨개진 모습을 한 상태로 무슨 말을 듣고 싶어 저렇게 질문을 할까. 맥박이 점점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건데?’

‘그냥, 솔직한 말?’

우겸이 잔에 있는 술을 또 급하게 마셨다. 술에 취해 눈이 반쯤 풀려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술을 그만 마시라고 걱정해야 하는데, 규영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무척 유혹적인 모습이었다. 서로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지금 누가 먼저 입을 맞춰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처럼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냥.’

‘그게 끝?’

우겸이 또 병을 들어 잔에 술을 따르려고 하자, 규영이 이를 저지했다. 여기까지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거짓말.’

‘뭐가? 일단 술은 그만 마시자. 내일 학교도 가야 하지 않아?’

‘내일 토요일인데.’

우겸이 입을 삐쭉 내밀고 서운하다는 눈빛으로 규영을 쳐다봤다. 씩씩거리며 앞에 있는 초밥을 젓가락이 아닌 맨손으로 집어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하필 사도 왜 붉디붉은 참치로 포장했을까. 정말 아찔했다. 규영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우겸에게 술을 권한 게 잘못된 것 같았다.

아니다. 처음부터 우겸을 집에 데려오지 말걸….

‘그래서.’

‘응?’

‘나 보러 온 거 아니에요? 매일 같이 약국에 오는 게 이상하잖아요. 솔직히 이건 눈치 없는 사람들도 다 알아차릴걸.’

규영은 더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해서 우겸과 대화를 나누면 제 모든 마음을 들킬 것 같았다. 물론 지금도 절반 이상은 알아차린 듯했다.

괜히 냉동고 문을 열어 얼음을 왕창 꺼냈다. 냉장고 안에서 물을 꺼낸 다음 식탁 위로 가져갔다.

‘그, 형. 오늘 시간도 늦었는데, 여기서 자고 가도 돼요?’

규영은 눈만 끔뻑거리고,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멀쩡한 제 볼 안쪽을 살짝 씹었다. 아픈 걸 보면 꿈은 아니었다.

자리에 앉지 못하고 몸이 굳어 있는 상태로 몇 분을 서 있었는지 모르겠다.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컵에 물을 따랐다. 아무렇지 않은 척 자연스러운 표정을 짓고 우겸에게 얼음 물을 건네주었다.

‘누나가 걱정하지 않을까?’

‘어차피 오늘 누나한테 친구네 집에서 자고 간다고 말했어요.’

오늘 여기서 안 자면 결국 다른 친구네 집에 가서 잔다는 소리로 들렸다. 규영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겸이 원하는 대답을 들었는지, 해맑게 웃으며 앞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

  

갑작스럽게 우겸과 동침하게 된 규영은 이 상황이 얼떨떨하기만 하다. 오늘은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밥만 먹으려고 했다. 딱 형과 동생 사이, 그 이상, 그 이하도 바라지 않았다. 그렇게 차근차근 알아가면서 지내면 언젠가는 연인으로는 발전할 수 있을 거라고, 마음속으로 작은 욕심을 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제 옆에 우겸이 누워있었다. 술에 취한 건 확실했다. 누구한테 업혀 가도 모를 정도로 새근새근 잠에 취해있었다. 자는 모습조차 귀여웠다. 우겸이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누웠다. 혹여 저 때문에 깰 수도 있어, 입까지 가렸다. 작은 숨소리도 새어나가지 않게 꼭꼭 싸맨 다음 앞에서 천진난만하게 잠이 든 우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귀여운 밤톨 머리가 처음보다 많이 자라있었다. 이제 군인 티가 나지 않았다. 딱 대학생처럼 보였다. 술이 약하기라도 한 듯, 아직도 양 볼이 발그레해 있었고, 심지어 목도…. 아직 어려서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아무리 동성이래도, 세상에 얼마나 무서운 사람이 많은데.

혀를 차며 어깨까지 흐른 옷을 매만졌다. 갑자기 자고 간다는 탓에 집에서 제일 작은 옷을 빌려줬다. 체격 차이가 나서 이렇게 옆으로 돌아누우니 목이 휑하게 다 보였다. 제 딴에는 옷을 정돈해 준다고 한 건데, 너무 세게 잡아당겼는지, 가슴이 훤히 다 보였다. 얼굴, 목뿐만 아니라, 속살 자체가 다 붉게 물들었다.

규영이 굳은 표정으로 잇새를 악물었다. 이 나이에 남자애가 자는 모습을 보고 성기를 세우고 있는 꼴이라니. 우겸이 숨이 막히지 않을 정도로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주었다.

오늘 밤이 꽤 길 것 같았다. 천장을 보고 회사에서 있던 일을 떠올렸다. 오늘 누가 일을 제대로 못 했더라. 일단 내일 가서 결재 서류를 달라고 닦달하고…. 그 생각도 잠시, 우겸이 회사에서 일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 보니 몸은 다 큰 것 같고, 대학교를 졸업해도 저 체구일 것이다. 자신과 한 뼘 넘게 차이가 나는 작은 키로 양복을 입으면 어떨까. 무척이나 귀여울 것이다. 자신은 상사로, 우겸은…. 갓 입사한 사원. 하루하루 우겸의 얼굴 보는 재미에 일은 뒷전일 것 같았다.

나중에 정말 같이 일하는 날이 온다면, 우겸의 책상을 제 책상 옆에 놓을 것이다. 거기에 파티션은 다른 팀원들이 보지 못하게 높게 올리고, 사무실 사람들 모르게 우겸과….

우겸과 같이 일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니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광대가 한껏 올라갔다. 규영의 볼 또한 우겸의 얼굴처럼 점점 분홍빛으로 변했다. 헛된 망상도 잠시였다. 옆에서 자꾸만 이불을 발로 차는 우겸 덕에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집이 그리 덥지도 않은데, 혼자 이불이란 이불을 발로 차고, 심지어 옷을 벗으려고 낑낑거리고 있었다.

당황한 규영이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눈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옷을 벗겨줘야 하나?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왜 옷이 다 벗겨있냐고 하면 그때는 뭐라 해야 하지. 더워 보여서 벗겨줬다고 해야 하나? 답이 없었다.

규영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자꾸만 옷을 벗으려는 우겸의 팔을 잡고, 벗지 못하게 막았다. 그러자 우겸이 얼굴에 인상을 쓰며 눈을 찬찬히 떴다.

‘나 더운데.’

‘응. 그래도 벗고 자면 감기 걸려.’

‘나 정말 더운데.’

아무래도 우겸은 술 주정으로 옷을 벗는 게 확실했다. 혼자 덥다는 말을 연신 하며, 옷을 벗으려고 애썼다. 자꾸만 원하는 대로 되지 않자 한숨을 폭폭 쉬었다.

‘벗겨줘. 응?’

그 말에 규영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렇지 않게 하는 저 말이 자신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 우겸은 모를 것이다.

규영이 몸을 굳힌 채 가만히 있자, 우겸이 얼굴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바지는 언제 벗었는지, 팬티 차림으로 윗옷을 신경질적으로 벗어던졌다. 그리고 팬티까지 내린 다음 다시 이불 속으로 쏙 들어왔다.

그 모습에 규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눈만 크게 뜰 뿐. 모든 사고가 멈췄다.

눈을 뜬 채로 날을 샜다. 학창 시절 이후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새벽에 벗은 몸으로 자꾸만 옆에 붙어오는 우겸 덕에 화장실을 셀 수 없이 갔다. 결국 버티고, 버티다가 거실로 나왔다. 거실에 나와서도 한참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방 안에서 옷을 벗고 꾸물거리는 게 눈에 자꾸만 어른거렸다. 이럴 거면 차라리 몸이라도 편한 침대 위가 나았다. 살면서 소파에서 가장 오래도록 누워있었다. 허리가 어찌나 쑤시는지, 오늘이 토요일이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피곤한 몸을 일으켜 소파에 앉았다. 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우겸은 제 속도 모르고 잘 자고 있겠지. 어제, 오늘 가장 큰 변수였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어려운 상대였다. 크게 심호흡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규영이 방문 앞을 조용히 서성거린다. 침을 꿀꺽 삼키고 문고리를 잡았다가 손을 뗐다. 문을 열지 말지 고민이 되는 듯 같은 동작만 계속 반복하고 있다. 굳은 결심이라도 선 듯, 문을 살짝 열었다.

“…하.”

침대 위에 있어야 할 이불이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눈이 질끈 감겼다. 이불이 없으니 자는 내내 쌀쌀했는지, 몸을 새끼 강아지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서 이불을 덮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차마 행할 수 없었다.

방 밖에서조차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난감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일부러 저러는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게 아니고서….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화장실로 걸어갔다. 어제 그렇게 화장실을 왔다 갔다 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체에 힘이 들어갔다.

급하게 화장실 안으로 들어온 규영은 샤워기 앞에 섰다. 찬물을 틀고 이를 악물었다. 차가운 물줄기를 맞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쩔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제 성기가 죽지 않을 것 같았다.

거센 물줄기에 몸을 맡겼다. 힘이 들어갔던 하체가 점점 누그러들었다. 가뜩이나 잠을 못 자서 피곤했는데, 찬물 덕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샤워기를 끄고 수건으로 몸에 묻은 물기를 대충 닦았다. 급하게 들어오느라 옷을 가져오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화장실 안에 있는 두툼한 샤워 가운을 둘렀다.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거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화장실 문을 조금 열고 고개만 살짝 내밀었다. 조금 전과 달리 우겸이 옷을 다 입은 상태로 거실에 앉아있었다. 몇 분 사이에 상황이 이렇게 바뀔 줄은 몰랐는데.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우겸도 저를 봤는지, 어색하게 웃고 눈을 피할 뿐이다.

우겸과 가까워질수록 퉁퉁하게 부은 얼굴만 보였다.

‘잘 잤어?’

우겸도 이 상황이 어색한지 멋쩍게 웃으며 규영에게 말했다.

‘저 때문에 어제 제대로 못 주무셨죠.’

어제는 반말을 줄기차게 해놓고, 갑자기 극존칭을 하는 우겸의 얼굴을 보니 너무 어색해 보였다.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눈에 뻔히 보였다. 규영이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아무렇지 않게 굴었다.

‘원래 술을 잘 못해요?’

‘네. 그런데 어제 주신 술이 정말 도수가 높은 거였나 봐요. 어쩜 이리 어제 일이 생각이 하나도 안 나는지.’

퍽이나. 우겸이 누가 먼저 물은 것도 없는데 혼자 먼 산을 바라보고 말했다. 혼자 뭐가 그리 초조한지, 연신 목을 벅벅 긁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누가 벗긴 것도 아니고 혼자 옷을 홀딱 벗었는데….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니 어제 일이 다 기억이 나는 듯했다.

규영이 입술을 말아 올리고 소파 쪽으로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우겸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 진짜? 새벽에 화장실에서 토하고 난리이던데, 정말 술을 못하나 보다.’

‘제가 언제요?’

우겸이 반색하며 큰 소리로 규영에게 되물었다. 자기가 말해 놓고 아차 싶은지, 입을 꾹 다물었다. 우겸의 얼굴색이 어제보다 더 붉게 물들었다. 아직 어려서 이렇게 때 묻지 않은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아니면 심각한 콩깍지이거나.

  

***

  

그 뒤로 우겸과 빠르게 친해졌다. 우겸은 종종 누나와 단둘이 지내는 게 불편하다는 핑계를 대며 학교가 끝나고 제집으로 드나들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식사도 같이하고. 또 다음 날 등교를 일찍 해야 한다며 자고 갈 때도 있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출근할 때는 항상 잠에 허우적거렸다. 학교에 가야 한다는 건 순 거짓말이었다. 그럴 때마다 잠든 모습을 보며 출근하는 것이 어찌나 슬픈지, 우겸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솔직히 이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가끔은 일부러 그걸 즐겼다. 우겸이 학교가 일찍 끝나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집에서 오로지 저를 기다리는 것이 좋아서 퇴근을 늦게 한 적도 있었다. 그럼 현관문 앞에서 입을 쭉 내밀고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저를 퉁명스럽게 맞이해줬다. 그 얼굴은 언제 봐도 좋았다. 또 보고 싶었다. 뭔가 같이 사는 것 같고, 형과 동생 사이보다 더 친근한 사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우겸이 좋아하는 음식을 가져다 바쳤다. 그러면 또 우겸이 헤벌쭉 웃는데, 그 모습이 정말…. 이 정도면 중증으로 우겸에게 빠진 것 같았다.

‘가끔 보면 일부러 늦게 오는 것 같아.’

‘왜?’

‘그냥, 형이 맨날 들어올 때마다 음흉하게 웃거든.’

자신이 그렇게까지 웃었나. 멋쩍은 미소를 띠며 이마를 만졌다.

‘그리고 왜 맨날 늦게 와 놓고, 손에는 먹을 걸 가득 들고 와?’

‘내가 그랬나?’

규영이 머리를 긁적이며, 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당분간은 정시에 퇴근해서 바로 집으로 와야겠다. 그래도, 저렇게 새초롬하게 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

  

그러던 어느 날.

쾅쾅-.

현관문을 세게 두들기는 소리에 규영이 화들짝 놀랐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라고는 우겸 밖에 없었다. 버선발로 방에서 현관문까지 뛰어가 문을 열었다.

우겸이 맞았다. 그러나 술을 꽤 진탕 마신 것 같았다. 얼굴이며, 온몸이 빨개진 상태였고, 가까이 가지도 않았는데 술 냄새가 폴폴 풍겼다. 생각해 보니 이 모습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때 그 난리를 피운 이후로 우겸은 제 앞에서 술을 마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규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벽에 몸을 기댔다. 아무 말 없이 우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집에서 바로 온 건가 싶은 정도로 가벼운 옷차림새였다. 평소 꽤 단정하게 옷을 입고 다닌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위아래로 운동복을 입은 상태였다.

혹시 다른 곳에 있다가 옷을 갈아입고 온 건가? 이름 모를 사람들 앞에서 또 옷을 벗고 난리를 피웠을 모습이 머릿속에서 허우적거린다. 생각하면 할수록 아찔했다. 규영의 얼굴이 점점 더 찡그려졌다.

‘형.’

우겸 또한 잘못한 건 아는지, 입을 삐쭉이며 규영에게 안겼다. 하는 수없이 현관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딱 붙어서 술 냄새를 어찌나 폴폴 풍기는지. 굳은 표정이 펴지기는커녕 더 일그러졌다. 몸에 달싹 붙은 우겸을 밀어내고 입술을 꾹 물었다.

‘화났어?’

‘아니.’

단호한 대답에 우겸이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울음을 참기라도 하는 듯, 갑자기 어깨가 들썩였다. 다시금 우겸이 규영에게 안기려고 했다. 그러나 뒤로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빤히 쳐다만 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우겸을 안아 들고 침대에 데리고 가서 재우고 싶었지만, 그건 제 욕심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술에 취한 우겸을 쉽게 받아주고 싶지도 않았다.

우겸의 큰 눈에 눈물이 한 방울씩 맺히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규영이 안절부절못하며 우겸을 뒤늦게 안아주려고 했다.

‘됐어. 나 집에 갈래.’

우겸이 규영의 손을 뿌리치고 신발을 고쳐 신었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자, 규영이 서둘러 우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우겸이 소리를 내 크게 울기 시작했다. 당황한 규영이 우겸을 안아 들었다. 갑자기 뭐가 그리 서운한 건지, 등을 쓰다듬을 때마다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왜, 왜 그래. 밖에 우는소리 다 들리겠다.’

‘흑….’

‘왜,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우겸이 대답하지 않고, 규영의 품을 더 파고들었다. 까들거리는 머리를 한 손으로 가볍게 쓸어내렸다.

지난번에 무슨 말끝에 처음에 봤던 밤톨 머리가 너무 귀엽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였나, 우겸이 예전처럼 짧은 머리를 하고 나타났었다. 그때 어찌나 귀엽던지, 우겸의 머리를 며칠 동안 계속 쓰다듬었던 것 같았다.

어제보다 머리가 짧은 것 같기도 하고. 혹시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우는 건가. 뭐가 그리 우겸을 서운하게 했을지 종잡을 수 없었다.

우겸의 속은 정말 알다가도 몰랐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맨날 툭하면 삐지고, 툭하면 째려보고. 생각보다, 아니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존재였다.

우겸을 제외하고, 모든 것에는 답이 있었다. 특히 회사 일은 항상 답이 있었다. 거기에 끝맺음까지. 과정과 결과가 명확했다.

그러나 우겸과 저의 관계는 결과가 불확실했다. 종잡을 수 없는 우겸을 제 옆에 붙잡고 있자니, 순간마다 갈림길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아직 어린 나이이고, 친구를 좋아했고, 또 이성이 아닌 동성과 사귀는 게 과연 우겸에게 좋은 일일까.

솔직히 규영은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냥 우겸이 종종 집에 놀러 오는 게 좋았고, 말도 안 되는 음식을 먹고 싶다고 하면 같이 배달시켜 먹는 것도 좋았다.

그냥 이 상황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 혹시나 제 욕심으로 우겸과 거리가 멀어진다면, 제 탓밖에 할 수 없으니까, 섣불리 행동해서 모든 것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 흑, 혹시, 혹시.’

‘응?’

우겸이 눈동자가 꽤 흔들렸다.

‘우리 누나 좋아해?’

‘갑자기?’

우겸의 또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규영이 달래던 것을 멈추었다. 우겸이 눈물과 콧물 범벅인 얼굴을 들고 규영을 쳐다봤다. 제 의지와 다르게 자꾸만 콧물이 흐르는지, 규영의 옷소매를 잡아, 코를 닦았다.

이에 규영이 당황한 표정을 짓고 우겸을 쳐다봤다.

‘누나 좋아하냐니까?’

규영이 아무 말을 안 하자, 우겸이 무서우리만큼 눈을 부릅떴다. 아랫입술을 잘게 깨물며, 규영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규영은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갑자기 집에 들어와서 울다가, 또 갑자기 제 누나를 좋아하냐고 묻고. 거기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자, 냅다 째려보는 우겸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벗어나려는 우겸을 붙잡아 다시 제 품에 안았다. 아무래도 우겸이 단단히 오해한 것 같았다. 어쩐지, 평소에 누나 이야기만 하면 맨날 눈을 흘겨 뜨더라.

우겸의 말도 안 되는 행동에 규영이 작게 웃었다. 힘도 없으면 자꾸 발버둥 치는 우겸의 등을 살짝 내리쳤다. 그러자 우겸이 잠잠해졌다. 몸이 떨리는 걸 보니, 또 우는 것 같은데.

규영이 우겸의 어깨를 잡아, 얼굴을 바라봤다. 우겸이 씩씩거리면서 매섭게 노려봤다.

아까 우겸 덕에 더럽혀진 소매로 눈가와 콧물을 닦아줬다. 어느 정도 닦인 얼굴을 큰 손으로 감쌌다. 그러자 우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봤다. 귀여워 죽겠다.

‘형이 오해하게 만들어서 미안.’

규영의 진지한 목소리에 우겸이 눈을 깜빡였다. 규영이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우겸의 입에 제 입을 가져다 대었다.

우겸이 벙찐 표정을 지으며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규영이 우겸의 반응을 살폈다.

‘화났어?’

우겸이 시선을 내리깔고 저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이런 적이 없던 우겸이라 더 조바심이 났다. 침을 꿀꺽 삼키며, 뭐라 말을 하려고 하자, 우겸이 말했다.

‘우리 누나 안 좋아하는 거 맞지? 나 좋아하는 거지?’

‘어?’

재차 확인하는 질문에 규영이 어이없다는 듯 작게 웃었다.

우겸이 눈을 질끈 감고, 다리를 살짝 들어 규영의 입에 제 입을 맞췄다. 규영이 당황한 나머지 딱딱하게 굳은 상태로 있자, 우겸이 규영의 턱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리고 규영의 입술을 핥으며, 입을 벌리려고 애썼다.

우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규영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너무 놀라 입을 떡하고 벌렸다. 그 순간, 우겸이 틈을 파고들어 혀를 넣어댔다.

‘읏….’

모든 감각이 입술로 향했다. 그렇게 몇 분 정도 혀를 섞었을까. 우겸이 규영의 입술을 마저 핥으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눈에 초점이 사라진 채 멍한 표정으로 우겸을 바라보았다. 양 볼이 상기된 상태로 입술이 침이 번지르르했다.

규영이 제 입술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조금 전까지 입을 맞춘 덕에 아직 우겸의 온기가 느껴졌다.

우겸과 키스하다니….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한 번 더 해볼래?’

‘어?’

규영이 우겸의 입술을 다시 머금었다. 조금 전까지 입을 수줍게 맞췄다면 지금은 꽤 공격적이었다. 타액이 섞이는 소리가 귓가에 크게 들렸다. 당황한 우겸이 눈을 크게 뜨고 규영을 쳐다봤다.

규영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눈을 뜰 때마다 우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았다. 그렇게 몇 번을 마주침을 피하다가 우겸이 규영의 어깨를 밀쳤다.

생각보다 쉽게 물러난 규영은 침이 범벅인 자기 입술을 한 번 훑고 우겸을 쳐다봤다.

‘이제 형이 너 좋아하는 거 믿겠지?’

‘어? 어….’

  

***

  

‘나는 처음에 형이 날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응. 맞지.’

‘그런데 맨날 사귀자는 말은 안 하고, 먹을 것만 사주고.’

‘응.’

규영이 제 품속에 있는 우겸의 이마를 살살 매만졌다.

‘그래서 혹시 내가 아니고 누나를 좋아하나? 나한테 잘해주는 게 내가 누나 동생이니까 잘 보이려고 했나? 싶었어.’

‘그럴 수도 있겠다.’

‘뭘 또 그럴 수도 있겠어라고 해.’

우겸이 규영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쳤다. 그 행동에 규영이 앓는 소리를 내며 작게 웃었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얼굴을 한 규영이 우겸에게 물었다.

‘그래서 오늘 속상해서 술 마셨어?’

‘응. 누나가 갑자기 형 이야기하면서 웃잖아.’

‘나를?’

‘그래서 나 모르게 둘이서 연락하나 싶었지.’

우겸의 말도 안 되는 오해에 규영이 연신 웃어댔다. 아무렴 좋았다. 용기가 없는 저 자신에게 먼저 손을 내어주었으니 평생토록 이 손을 놓지 않을 예정이다.

말랑한 우겸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우겸도 싫지 않은지, 똑같이 따라서 제 얼굴에 쪽 소리가 나도록 뽀뽀했다.

***

규영은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우겸과 TV를 보고 있었다. 맨날 둘이 붙어 있으니 할 게 딱히 없었다. 대부분 다 봤던 프로그램이었다. 하도 볼 게 없어서 멍한 표정으로 리모컨을 만졌다.

규영은 자신의 허벅다리에 누워있는 우겸의 볼을 톡톡 쳤다. 요즘 어찌나 얼굴에 살이 통통하게 차오르는지. 볼 때마다 만질 맛이 났다. 살을 더 포동포동하게 찌우고 싶은데, 생각보다 우겸의 입이 짧았다. 오늘은 또 어떤 음식을 먹여야 할까.

‘다리 저리면 일어날까?’

‘아니, 그런데 여기 맨날 와 있으면 누나가 뭐라고 안 해?’

우겸이 규영의 다리에서 얼굴을 떼고 번쩍 일어났다. 소파에 자리를 잡고 거들먹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거기에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다리까지 꼬았다.

‘그럼 오지 말까? 형이 싫으면 뭐, 안 올게.’

우겸의 귀여운 허세에 규영이 숨넘어가듯 웃었다.

‘그럴래, 그럼?’

‘아씨.’

‘누나가 뭐라 하면 어떡해. 틈만 나면 외박한다고.’

‘그런데 요즘 누나 남자친구 생겨서 바빠. 나 신경 쓸 겨를도 없어. 그래서 말인데….’

우겸이 규영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 있지.’

‘응?’

‘아니면, 누나한테 물어보고 음….’

무슨 고민이 있나? 우겸은 고민이 있으면 항상 볼을 씹었다. 요즘 따라 통통한 볼 덕에 볼을 씹을 때마다 더 움푹하게 들어갔다.

‘…자취한다고 하고 여기에 들어와서 살까? 어차피 거의 맨날 와서 살다시피.’

그 뒤로 우겸의 목소리는 규영의 입에 잡아먹혔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끙끙 앓는 소리만 들릴 뿐, 다른 소리는….

***

그날 하루는 유독 기분이 좋았다. 갑자기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아침부터 웃음이 나는 날. 우겸과 같이 살게 된 지 몇 달이 되었을까. 아침부터 우겸에게 전화가 여러 번이 왔었다. 오전 내내 미팅하느라 확인을 제때 하지 못했다. 부재중 전화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보통 일할 때는 전화보다는 문자를 했었기에, 우겸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로만 알았다. 초조한 마음으로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무슨 일 있어?’

-일하는 데 전화해서 미안. 퇴근 후에 그때 처음 만났던 식당 있지? 거기로 올 수 있어? 혹시 오늘 일 많아서 늦게 끝나나?

‘갑자기?’

전화 내용은 별것 없었다. 뜬금없이 처음을 다시 장식하고 싶다나, 뭐라나. 그 말도 안 되는 연락에 규영은 회사 내에서 종일 싱글벙글하였다. 사실, 우겸을 만난 이후로 사무실 내에서도 아주 부드러워졌다는 소리를 들었다. 사무실 내에서 실수해도 예전처럼 화를 내지 않았다. 딱딱하게 굴기는커녕 그저 웃기만 했다. 화가 나지 않았다. 그냥, 사람이라면 실수를 할 수도 있고, 뭐 그렇지 않은가.

우겸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일을 급하게 하나, 둘씩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자꾸 생겼다. 평소와 다르게 무슨 일인지, 퇴근을 제때 못할 정도로 이상하게 일이 계속 꼬였다. 초조하게 시계를 봤다. 오늘 하루만 몇 번을 보는지 모를 정도다. 우겸과 만나기로 한 시간에 맞춰 겨우 일을 끝내긴 했는데,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급한 일은 다 한 것 같은데….’

턱을 매만지며, 서둘러 짐을 챙겼다. 이상하리만큼 꺼림칙한 기분에 책상 위를 한 번 더 훑었다.

사무실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회사 밖을 나왔다. 평소 같으면 차를 타고 약속 장소로 갔을 텐데, 그날은 유독 우겸이 고집을 부렸다. 자기 친구들처럼 걸으면서 데이트하고 싶다나. 뭐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항상 그런 식이었다. 한 번은 제 친한 친구인 영재가 여자친구랑 단둘이 놀이공원에 다녀왔다고 몇 날 며칠을 가자고 졸라댔다. 아직 어려서 남들이 하는 걸 다 따라 하고 싶어 했다. 그럴 때마다 어찌나 귀여운지. 맨날 우겸의 고집에 못 이기는 척 다 들어주었다. 어쩌겠는가. 나이 어린 남자친구를 두었으니 이런 거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급하게 길을 걷는데, 벨소리가 울렸다. 안 봐도 우겸의 전화일 게 분명했다.

‘응.’

-형, 어디야?

‘이제 거의 다 왔어. 앞에 신호등도 보인다.’

-그럼 내가 마중 갈게?

그래 봤자 식당이 코앞인데, 무슨 마중을 나온다고 하는지.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한 손으로 목에 있는 목도리를 풀었다. 분명 폴라는커녕 살을 보이고 얇게 입고 왔을 게 분명하다. 얼굴 보자마자 해줘야지.

‘무슨 마중, 식당에 먼저 들어가 있어, 춥겠다.’

-그러니까 얼른 와, 형.

전화를 끊고 자꾸만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누가 보면 정신 나간 사람인 줄 알 정도로 길을 걷는 내내 입꼬리가 내려가질 않았다. 방방 뜨는 기분에 목도리를 손에 들고 빙빙 돌렸다.

우겸과 사귀고 초창기에는 매일 같이 만나고, 만났다. 회사가 바쁘면 우겸의 집 앞으로 가서 얼굴만 보고 왔었다. 남들이 보면 이 나이에 무슨 주책인가 싶은 정도였다. 가끔은 제 이기심에 잠든 우겸을 깨워 창문 너머로도 얼굴을 보고 집에 돌아간 적도 있었다.

아, 밖에서 이렇게 만난 게 정말 오랜만이네. 사귀고 나서 초반의 기분이 났다. 예전의 설렘이 다시 샘솟았다. 뭔가 밖에서 만나니 사귀었을 때 초반 기분이 나는 것 같았다.

‘어, 우겸이다.’

신호등 건너 저를 알아본 우겸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규영도 그 모습에 손을 흔들며.

쾅-.

순간이었다. 정말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로 눈앞에서 우겸이 사라졌다. 몇 분 전만, 아니 몇 초 전만 해도 우겸이 자리에 가만히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규영의 입에서 아무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눈이 자꾸 깜빡여졌다. 아무 일이 아닐 수도 있는데 눈에서 눈물이 계속 새어 나왔다. 멍하니 한곳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왜 이러지.

꼭 무슨 일이 생긴 사람처럼 호흡이 가빠졌다.

아니다. 아닐 것이다.

우겸이 있던 자리로 달려갔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주위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어떤 사람은 119에 신고하고, 또 어떤 사람은 112에 신고하고. 또 어떤 사람은….

방금 제 앞에서 손을 흔든 게 우겸이 맞나? 혹시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바닥에 쓰러진 우겸을 보고 쓰러지다시피 바닥에 주저앉았다. 붉은 액체가 우겸의 주위를 흠뻑 적셨다. 사람 몸에서 나온 거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는 손으로 우겸의 얼굴을 매만졌다. 아직 따듯한 걸 보면 살아있는 것 같았다. 규영이 서둘러 우겸의 가슴에 제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이상했다. 방금까지 통화를 했었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가슴이 쿵쿵 뛰었었는데. 지금 제 앞에 있는 우겸은 몸을 축 늘어트린 채,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

“팀장님, 팀장님.”

우겸의 부름에 규영이 눈을 크게 떴다. 침을 크게 꿀꺽 삼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까지 꿈을 꾼 거였나.

서둘러 우겸의 가슴에 귀를 대었다.

쿵, 쿵, 쿵-.

“무슨 꿈을 꾸셨길래…. 꿈에 귀신이라도 나오셨어요?”

규영이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가만히, 우겸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아니면 악몽 꾸셨어요? 갑자기 팀장님이 소리 지르면서 우셔서, 깜짝 놀라서 깨우긴 했는데.”

과거의 차디찬 우겸과 다르게, 따듯한 손길이 느껴졌다. 작은 손으로 제 머리를 하염없이 쓰다듬어줬다.

“응….”

“팀장님까지 악몽 꾸면 큰일인데.”

규영은 침대 위에 손을 뻗어 핸드폰을 찾았다. 핸드폰 화면을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스물세 살의 우겸이 사고로 죽은 날이었다. 매년 규영은 이맘때쯤 악몽에 시달렸다. 분명 지금의 우겸은 괜찮은데, 분명 사고가 나고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초조했다.

“오늘이 토요일이라 다행이죠, 안 그랬으면 팀장님 눈 퉁퉁 부은 거 사무실 사람들이 다 봤겠어요.”

우겸이 저를 놀리는 말에 규영이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종일 우겸과 집 안에서만 있어야겠다. 그게 좋을 것 같았다.

“오늘은 집 안에만 있을까?”

“어, 오늘 지난번에 못 갔던 식당 예약했잖아요.”

“아, 그랬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우겸이 일주일 내내 노래를 부르고, 애타게 기다렸었다. 매일같이 블로그를 보며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하고, 어떤 디저트를 먹어야 하고, 쉴 새 없이 떠들어댄 식당이었다.

“그런데 식당은 다음에 또 가도 되니까, 제가 한 번만 봐 드릴게요. 그 대신 오늘은 제가 먹고 싶은 햄버거랑 치킨이랑 이런 거 왕창 시켜 먹어도 돼요?”

규영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우겸을 껴안았다. 몸집이 작아서 그런지, 심장 소리도 꼭 저 같았다. 가슴에 귀를 바짝 대야 겨우 또렷하게 들릴 정도였다.

“그런데 무슨 꿈 꾸셨는지 여쭤봐도 돼요?”

“그냥…. 교통사고 나는 꿈. 기억하고 싶지 않은 꿈.”

“아, 교통사고. 맞다. 제가 이맘때쯤 교통사고 크게 났었는데.”

지금까지 우겸을 만나면서 단 한 번도 흉터에 관하여 물어보지 않았다. 어차피 다 아는 거였기도 했고, 자신 때문에 또 교통사고가 난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에는 자신을 만나다가 사고를 당한 게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다시 태어난 것 때문에 사고가 났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죄스러운 마음뿐이었다.

“제 배랑 허벅지에 있는 흉터 있잖아요.”

“…응.”

“그때 난 교통사고 때문이에요. 갑자기 차가 저를 들이받았거든요.”

“응.”

규영은 눈을 감고 우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때 사실 저도 왜 사고가 났는지, 그리고 사고가 났을 때 기억이 없긴 한데, 누나가 누가 차로 제 앞을 막지 않았더라면 죽었을 수도 있었대요. 그랬으면 정말 큰일 났을 텐데, 맞죠. 그럼 팀장님도 못 만났을 테고.”

“그러게.”

“근데 그 차 주인이 누구지. 감사하다고 말 한마디를 못 했네요.”

“응. 우겸아. 형, 더 세게 안아 줘.”

우겸의 조잘거리는 말을 자장가 삼아, 규영이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날의 사고 현장에서 우겸을 살렸던 차는 규영이었다. 매년, 사고가 났던 날 무렵 악몽을 꾸었던 탓에 불안감이 극에 치달았다. 어쩔 수 없이 우겸의 주위를 맴돌았다. 미행이라고 하기는 너무 거창하고, 뒤에서 졸졸 따라다녔다고 하는 게 맞겠다.

다행히 우겸이 워낙 눈치가 없고 둔한 탓에, 뒤에 차가 따라다니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눈치 없는 건 한결같았다. 그렇게 며칠을 따라다니다가 한 차가 우겸이 있는 쪽으로 급발진했고, 규영도 순간 그 차를 냅다 박았다. 차로 충격을 일부 흡수한 덕에 우겸이 예전과 다르게 덜 다쳤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았다. 정말 다행이었다.

자신이 우겸에게 말하지 않는 이상, 우겸은 평생 모를 것이다.

  

***

  

사무실에 출근하자마자 규영이 사무실 사람들에게 연차 계획을 말했다. 그 뒤에 우겸이 조용히 손을 들고 규영과 같은 날 연차를 쓰겠다고 했다. 제 딴에는 조심스럽게 말했는데, 사무실 사람들은 고개만 끄덕일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아무래도 저 혼자만 찔린 것 같았다. 몇 달 만에 쓰는 연차라 그런지, 평소보다 신이 났다. 오랜만에 서울에 가서 누나도 만나고, 규영과 나름대로 여행 아닌 여행이 될 것 같아 종일 기분이 붕 떴다. 아침부터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규영의 심부름으로 타 부서에 갔다가 사무실로 돌아가려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빨리 사무실로 가서 규영과 어디를 놀러 갈지, 맛집은 어디로 갈지 찾아볼 생각에 괜스레 마음이 두근거렸다.

바닥을 보며 혼자 배시시 웃었다. 따지고 보면 규영과 단둘이 가는 여행이었다. 이렇게 좋을 줄 알았으면 진작 같이 연차를 쓰자고 꼬실 걸 그랬다.

띵-.

문이 열리자마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고개를 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희영이 먼저 타 있었다. 화들짝 놀라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그 모습에 희영도 꽤 당황한 듯했다. 엘리베이터 안에 어색한 기운이 맴돌았다.

“그동안 연차 쓰기도 눈치 보였지?”

남들이 보기에 규영이 꽤 못되게 구는 상사로 보이는 듯했다.

“네?”

“그냥…. 매달 연차를 꼬박 쓰던 우겸 씨가 최근에 안 쓰길래….”

“아….”

우겸이 머리를 긁적이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아직도 규영의 눈 밖에서 희영이나 지민을 만나면 뽀뽀를 하는 건 유효했기 때문이다. 한술 더 떠서 오래 있으면 그만큼 뽀뽀를 하라고 했다.

어떨 때는 규영이 자신보다 순전히 몸을 더 좋아하는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 아니지. 입술만 좋아하는 건가.

우겸이 갑자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희영이 빤히 쳐다보며 웃었다.

“왜, 사무실 가기가 그렇게 싫어? 그래도 요즘은 덜 혼 내시는 것 같던데.”

“아뇨, 그냥 다른 생각을 하느라…. 네, 요즘 엄청나게 잘해주세요.”

“다행이다. 그래서 휴가 내고 어디 가려고?”

띵-.

기다리고 기다리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오랜만에 누나네….”

우겸은 희영에게 먼저 내리라고 손짓하고, 뒤이어 내리는데, 마침 앞에 규영이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죄를 지은 것처럼 규영의 눈을 피하고 말았다.

“어?”

이게 아닌데….

다시금 규영을 쳐다보니, 규영의 얼굴이 조금 전과 달리 상기되어 있었다. 턱을 쓰다듬으며 우겸을 매섭게 쳐다보는 게 방금 자신이 눈을 피해서 짜증이 난 듯 보였다. 큰일 났다.

애써 눈을 내리깔고, 규영의 눈초리를 피했다. 그 잠깐 얼마나 살 떨렸는지 옆에서 웃고 있는 희영은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희영과 사무실에 걸어오며 대화를 나누는 내내 어떤 내용인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또 집에 가서 어떻게 시달릴지 걱정만 될 뿐이었다.

“누나가 좋아하시겠다. 그럼 일요일에 다시 내려오는 거야?”

“네? 아… 네.”

우겸은 사무실 안에 들어오자마자 서둘러 자리로 가서 앉았다. 아까 규영의 표정으로 짐작하면, 오랜만에 사무실에서 난리를 피울 것 같았다. 초조함에 발을 달달 떨었다. 저에게만 뭐라 하면 그나마 다행인데, 희영에게 불똥이 튈 게 눈에 빤히 보여 그것도 걱정이었다.

우겸이 곰곰이 고민하다가 뭔가 결심이 선 듯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형…]

보내려고 하다가 잠깐 멈칫했다. 형만 보내기는 너무 없어 보였다. 어떻게 해야 규영이 난리를 안 피울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형♥]

이게 최선이었다.

문자를 보내자마자 규영이 바로 읽었는지 옆에 있던 1이 사라졌다. 이렇게까지 자신의 문자를 빨리 읽을 줄은 몰랐는데…. 갑자기 초조함이 몰려왔다. 자리에 앉아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규영이 언제 왔는지 모르게 옆에 앉아있었다.

놀란 눈으로 규영을 바라보자, 심장이 쿵 떨어질 정도로 눈웃음을 지었다. 규영의 예상외 반응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항상 잘생겼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갑자기 씨익 웃으니 꽤 위험했다. 자기가 잘생긴 건 잘 아는 모양이었다.

일단 오늘의 일로 깨달은 건, 종종 불리하다 싶을 때 하트를 남발하는 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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