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수상한 만남
우겸이 제 옆에서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다. 침대까지 데려다 달라고 해서 내심 기대했지만, 폭신한 침대에 내려주자마자 손 하나 까딱하지도 못하게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이불을 살짝 들추어보니 무방비한 모습으로 잠이 든 상태였다. 아까 밥을 먹고 나서 바지를 입겠다고 성화였는데, 차라리 입힐 걸 그랬다. 제 옷을 입고 지내는 게 너무 귀여워서 겨우 말렸는데, 지금 보니 꽤 아찔한 모습이었다. 가만히 옆에 누워 우겸의 자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잘 때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우겸을 처음 만났을 때가 언제였더라.
규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우겸의 볼록 튀어나온 배를 쓰다듬었다. 이 배가 뭐라고, 볼 때마다 자꾸 웃음이 나는지 모르겠다. 가슴 위에 귀를 바짝 대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심장이 콩닥거리면서 잘 뛰고 있었다. 우겸의 배에, 아니, 흉터 근처를 매만지다가 입으로 잘근잘근 깨물기 시작했다. 그 입맞춤이 간지러운지 우겸이 뒤척였다.
우겸이 제 옆에 있는 게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우겸의 말랑거리는 배를 또 쓰다듬었다. 우겸이 옆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매일 같이… 확인하고 있었다. 서둘러 이불을 턱 끝까지 올려준 다음 나지막하게 말했다.
“잘 자, 우겸아.”
아까 전 우겸이 언제 처음 만났냐고 묻는 말에, 차마 솔직하게 대답해 줄 수 없었다. 우겸에게 있어, 몇 주 전에 저를 만난 것이 처음이겠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사실 규영은 지금 세 번째, 우겸을 만나고 있다. 스무 살의 우겸도 만나보고, 스물세 살의 우겸도 만나보고, 또 지금처럼 스물여덟의 우겸을 만나는 중이다.
뭐, 우겸은 다 기억을 못 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아무튼. 우겸이 스물세 살, 군대를 제대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처음 만났다. 지금과 다르게 밤톨 머리였다.
그 머리가 얼마나 잘 어울렸는지, 그 머리를 제가 얼마나 귀여워했는지, 지금의 우겸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 머리를 해달라고 조르고 싶은데, 그러다가는 지금의 우겸이 난리를 칠 것 같았다.
가만 보면 두 번째 살아나서 만난, 현재 제 눈앞에 있는 우겸이 가장 툴툴거리고, 잘 삐지는 것 같다.
처음 우겸의 얼굴을 봤던 건 약국이었다. 지금 우겸의 누나가 운영하는 약국. 군대를 갓 제대한 밤톨 머리의 우겸이 종종 그 약국에서 아르바이트했었다.
평소 두통이 잦은 편이라 집 근처인 그 약국에 종종 들렀었다. 그때마다 우겸을 마주했다. 어찌나 귀엽고, 밤톨 같은지….
***
‘어서 오세요. 저번에 드렸던 약으로 드리면 될까요?’
규영의 얼굴을 보고 우겸이 아는 체를 했다. 규영도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네. 혼자 있는 걸 보니 누나가 식사하러 갔나 보네요.’
며칠 전 집 앞에 있던 약국인 이곳에 잠깐 들렸다. 평소에 있던 여자가 아닌 제 눈에 쏙 들어오는 얼굴을 가진 남자애가 있었다.
어찌나 귀엽게 생긴 밤톨 머리인지, 이 얼굴을 보겠다고 일주일 내내 같은 약만 사고 있었다. 그 덕에 우겸과 통성명도 하고, 아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
‘아, 네. 저도 누나 오면 얼른 집에 가려고요.’
‘그렇구나, 가서 저녁 먹으려고요?’
‘아뇨, 오늘은 친구 좀 만나려고요.’
‘아… 친구.’
맨날 일과 집을 반복하며 무료한 일상을 보내고 있던 차였다. 딱 봐도 갓 군대에서 제대한 남자애였다. 자신과 나이 차이가 꽤 있을 법한 남자아이라 섣불리 다가갈 수도 없었다. 그냥 이렇게 매일 같이 얼굴만 보는 게 전부였다.
‘그럼 수고하세요.’
우겸과 뻔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살짝 미소 지으며 약국을 나왔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 나이 먹고 어린애한테 이러는 게 죄스럽기는 하나 어쩔 수 없었다. 그냥, 퇴근하고 매일같이 저 생긋 웃는 얼굴을 보면 기분이 좋았다. 그게 다였다. 사소한 말을 해도 자꾸만 웃음이 났다.
처음에는 일을 너무 많이 해서 머리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냥 첫눈에 우겸에게 반한 것, 그게 다였다.
그렇게 우겸이 홀로 있는 시간에 맞춰 약국에 방문했다. 어느 날 우겸이 우물쭈물 한 태도로 무슨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무슨 일 있어요?’
‘아, 별 건 아니고, 제가 이제 학교 복학이라. 앞으로는 못 나올 것 같아서, 그동안 단골이셨으니까….’
아, 그 생각은 못 했었다. 제가 뭐라고 저렇게 말까지 더듬으면서 말을 하는지…. 그 모습조차 귀여웠다. 저 모습을 혼자만 보고 싶은 정도였다.
‘아, 그렇구나….’
규영은 잠시 고민했다. 우겸이 약국에 더 나오지 않으면, 앞으로 우겸을 어디서 만나야 할까. 아니, 만날 수나 있을까.
‘그… 혹시, 실례가 안 되면 제가 밥 한 번 사줘도 돼요?’
‘밥이요?’
‘그냥, 단골이니까요, 앞으로 못 본다니까 아쉬워서….’
‘아….’
우겸의 눈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우겸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데, 오로지 제 생각만 했다. 그래도 우겸과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밥을 안 먹는다고 거부하면 어쩌지. 입술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그냥, 형 동생 사이로 사주고 싶어서요.’
형, 동생 사이. 그 정도면 부담이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뭐, 지금 당장 연인이 될 수는 없으니 일단은 형 동생 사이로도 지내고 싶었다. 그렇게 차근차근 친해지면 되지 않을까.
***
기어코 우겸에 입에서 알겠다는 말을 들었다. 우겸과 식사하는 당일이 되자, 종일 신이 났다. 겉으로 보기에도 티가 난 모양이다. 사무실 사람들이 하나, 둘, 어색한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심지어 매일 같이 받던 결재 서류를 받으러 오지 않았다. 뭐, 아무렴, 하루쯤은 그러려니 해줄 의향이 있었다.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우겸과의 만남을 위해 퇴근 후 부리나케 약속 장소로 갔다. 시계를 확인하니 약속 시간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자리를 미리 잡아 앉은 다음 아무렇지 않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겸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찼다. 만나기로 한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초조해졌다. 평소 긴장을 안 하는 성격인데도 불구하고 기다리는 내내 물을 몇 컵이나 마셨는지 모른다.
시계에 시침이 몇 바퀴나 돌았을까. 기다리고, 기다리던 우겸이 오지 않았다. 규영의 낯이 밖과 비슷하게 점점 어둡게 변했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기다린 지 몇 시간째. 식당이 문 닫을 시간이라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왔다.
규영이 목덜미를 문지르며, 멀쩡한 넥타이를 매만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번호라도 물어볼 걸 그랬다. 왜 그 생각은 못 했는지 지금 와서 후회되었다.
갑작스러운 일이 생긴 건가, 아니면 혹시 저와 한 약속을 깜빡했을까. 아니면, 그냥 처음부터 같이 밥을 먹기 싫었을 수도 있었다.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혹시나… 우겸이 뒤늦게 식당으로 올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떡해야 할지 식당 앞을 서성이며 걷고 있을 때, 저 멀리 헉헉거리며 한 남자가 뛰어오고 있었다.
우겸인가?
점점 가까워지니, 밤톨 머리를 한 우겸이 맞았다. 반가워해야 하나?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다고 화를 낼 순 없었다. 그러다가 우겸이 놀라서 도망가기라도 한다면…. 다시는 우겸을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애써 사람 좋은 척 표정을 갈무리하며 뛰어오는 우겸을 가만히 응시했다. 머리가 밤톨 같아서 그런가, 뛰는 모양새도 영 엉성했다. 무슨 남자애가 저렇게 하는 짓마다 귀여운지.
고개를 숙이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삼켰다.
‘하,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
우겸의 얼굴이 꽤 상기되어 있었다. 붉다 못해 빨간 얼굴, 곧 터지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였다. 얼마나 뛰어온 거지. 숨을 가쁘게 쉴 때마다 살짝 벌리고 있는 입에 눈길이 자꾸 갔다.
아무 말 하지 않고, 우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땀에 젖은 앞머리에 발그레한 양 뺨, 거기에 가쁜 호흡까지. 속으로 별생각을 다 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괜한 허공을 응시했다. 둘만의 공간에서 저 모습을 보고 싶으면 욕심일까. 자꾸만 불순한 생각이 떠올랐다.
‘화 많이 나셨죠. 혹시 지금까지 기다리셨어요?’
우겸이 울상 지으며 안절부절못했다.
‘네.’
규영이 팔목을 들어 걸쳐있는 시계를 쳐다봤다. 시계에 분침이 지나가는 걸 빤히 지켜보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우겸을 차 안에 태워…. 눈을 질끈 감았다.
***
“아…. 팀장님, 뭐… 하세요.”
우겸이 눈을 반만 뜬 채 말했다.
옛 생각을 떠올리다가 그만, 우겸의 배에 너무 많은 자국을 남겼다. 자꾸만 움찔거리더니 결국 우겸이 잠에서 깬 듯했다.
너무 빨았나, 누가 보면 우겸의 배에 피멍이 든 줄 알 것 같았다. 규영이 제가 남긴 흔적을 뿌듯하게 바라보고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우겸을 품에 안았다.
“그냥, 얼른 자자, 깨워서 미안.”
규영의 토닥이는 행동에 우겸의 눈꺼풀이 다시 느릿하게 움직였다.
***
아침에 옷을 갈아입으려다가 거울을 보고 깜짝 놀라 소리를 빽 질렀다. 어제 잠결에 잠깐 깬 것 같았는데, 역시나…. 배에 무슨 이렇게 자국을…. 딱 보니, 규영이 범인이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몸에 흔적을 남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왜 그래?”
“이게 뭐예요?”
우겸이 울상을 지으며, 규영에게 제 배를 내밀었다. 그걸 보고 규영이 푸스스 웃어댔다.
지금 튀어나온 배가 중요한 게 아닌데….
규영을 미친 듯이 째려봤다. 정말 규영이 나이만 어렸으면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정도였다. 은근 화를 부르는 사람이었다.
출근길, 규영과 같이 집을 나서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익숙해져서 탈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규영이 주는 옷을 입고, 또 아무렇지 않게 규영이 머리를 매만져주면 가만히 있었다.
이러다가 혼자 출근하면 규영에 손길이 그리워질 것 같았다.
“오늘도 쉴래?”
엘리베이터 안에서 거울을 보니 절대 아픈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하루 동안 규영의 극진한 대접을 받아 볼이 더 통통하게 차오른 것 같았다.
“아뇨, 괜찮아요.”
“그래도.”
규영이 뒤에서 우겸을 살짝 껴안으며 정수리에 턱을 대었다. 어쩜 이렇게 규영이 저를 괴롭히기 좋게 키까지 딱 알맞게 차이가 날까.
우겸이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싫은 티를 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규영이 더 세게 안는 탓에 제풀에 제가 꺾였다.
왜 하필 규영의 집이 고층일까….
오늘따라 하나같이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3층. 2층. 띵.
1층에 도착하자마자 그제야 잡혀있는 몸을 풀어줬다. 우겸이 뒤를 돌며 규영을 노려보자 규영이 자연스럽게 웃으며, 우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이러다가 회사 사람 만나면 오해하지 않을까요?”
“왜요?”
우겸이 어깨를 내리고 규영의 팔을 피했다.
“그래도 뭔가….”
규영은 괜찮은지 몰라도 우겸은 아니었다. 가만히 있어도 시선을 받는 규영인데, 그 옆에 떡하니 자신이 있으면 얼마나 더 쳐다보겠는가. 집에서는 아무도 안 보니 물고 빨아도 아무 말은 안 했지만, 밖에서는 조금 곤란했다.
“응. 싫으면 안 해야지. 그래서 오늘 저녁은 뭐 먹을까?”
“음…. 맨날 제가 먹고 싶은 것만 먹었으니까, 오늘은 팀장님이 드시고 싶은 거로 먹으러 갈까요? 오늘은 제가 살게요.”
우겸이 우물쭈물하며 하고자 하는 말을 다 뱉었다. 말하는 도중 규영의 눈을 힐끔힐끔 바라봤다. 사실 규영이 뭘 좋아하는지,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 하나도 몰랐다. 차근차근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싶었다.
원래 연애란 서로에 대해 맞춰가고… 그렇게 하는 거라고 주위에서 귀에 딱지 앉도록 듣기만 했다. 가만 보면 규영은 항상 모든 것을 맞춰줬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던 게 이제는 자신도 모르게 너무 당연하게 규영의 호의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호의가 과해지면 권리로 여긴다던데, 조만간 그렇게 될 것 같았다.
“나는 우겸 씨가 좋아하는 거면 다 좋은데?”
항상 저런 식이었다. 뭘 물어보면 항상, 자신이 좋다고 하면 다 좋다는 대답만 했다.
아침부터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한 우겸이 입을 툭 내밀고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금방 따라잡힐 것을 아는데도 규영을 앞질러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왜, 또 뭐가 문제야….”
“아니에요.”
역시나, 다섯 걸음 정도 걸었을까. 바로 규영에게 붙잡혔다. 규영보다 키가 작아서 다리까지 짧은 게 너무 억울했다.
“응?”
규영이 우겸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다정한 눈빛으로 우겸을 어루만지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 저도….”
우겸이 규영의 눈을 피하고 손을 쭈물거렸다.
“응.”
“제가 먹고 싶은 거 말고 팀장님이 좋아하는 음식도 같이 먹고 싶고….”
“응?”
우겸의 말에 규영이 또 웃기 시작한다. 누가 보면 규영의 맞춤 개그맨인 줄 알 정도로 평소에 무슨 말만 하면 저렇게 웃어댔다. 제 속마음도 모르면서 저렇게 웃기는.
“내가 그건 미처 몰랐네. 미안, 미안해요.”
“뭐, 미안할 건 아닌데… 아무튼… 퇴근 전까지 드시고 싶은 거 생각해 주세요.”
우겸 딴에 단호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 모습조차 귀여운 듯 규영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
복도에서 마주친 희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괜찮아?”
하필 복도라니…. 우겸이 겉으로 티를 내지 않고, 살짝 웃으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얼굴이 조금 부은 것 같기도 한데?”
희영이 우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혹시나 주변에서 규영이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우겸이 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제 많이 자서 그런가 봐요.”
“다행이네. 이렇게 아프다고 당일 연차 쓴 건 처음이잖아.”
우겸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실 쪽으로 걸었다. 희영도 볼일을 다 봤는지, 우겸과 같이 걸었다.
“아, 맞다. 나 어제 팀장님이 그렇게 웃는 건 처음 봤는데.”
“왜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아니….”
희영이 비밀 이야기라는 듯 우겸을 복도 끝으로 데리고 갔다. 평소보다 한 톤 낮은 목소리로 우겸에게 말했다.
“어제 어떤 여자가 찾아왔거든? 그런데 웃으면서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더라고.”
“그래요?”
희영의 말에 우겸의 얼굴이 점점 찌푸려졌다. 어제 집에 와서 그런 말 하나도 없었으면서.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 찾으러 왔다는 사람인가?
“우리도 다 놀랐잖아.”
사무실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웃었구나.
우겸의 안색이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규영에게 이 이야기를 먼저 들었더라면, 분명 오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다른 사람을 통해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속에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사실 규영과 지내면서 겉으로 내색은 안 했지만, 규영이 찾으러 온 사람에 대해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지금은 마냥 자신에게 잘해주고, 맨날 좋다고 하지만….
찾으러 온 사람이랑 잘 되면 저를 순식간에 버릴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했다. 너무 일사천리로 자신과 사귀었기 때문에, 헤어지는 것도 그리 빠른 게 아닐까 싶은 불안감이 들었다.
그리고 평소에 규영이 너무 잘해주기도 했다. 그렇기에 항상 마음 한편에 찜찜함이 있었다. 친누나인 우리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겪었던 사람들, 그 누구보다 잘해줬다. 너무 잘해줘서 가끔은 잃어버린 친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뭐, 친구겠죠.”
우겸이 애써 웃으며 희영에게 대답했다.
“그런가? 친구는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사귀는 것 같지는 않고. 뭔가 그사이의 단계?”
희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마지막 말에 우겸은 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규영과 같은 집에서 나오고, 저녁에 뭘 먹을지, 사소한 일로 다투며 행복하기만 했다.
앞에서는 사랑꾼인 척, 간이며 쓸개며 다 빼줄 것처럼 굴더니, 정작 뒤에서는…. 자리로 돌아온 우겸의 얼굴에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희영과 같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 걸 본 규영이 옆에서 자꾸만 우겸을 쳐다봤다. 애써 그 눈빛을 무시하고 가만히 컴퓨터만 응시한다.
먼저 규영에게 물어봐야 하나? 그러다가 찾던 사람이라고 하면 어떡하지? 우겸의 속이 말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든 결론은 규영이 찾는 사람일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제 찾으러 온 사람 여자라면…. 규영은 남자가 아닌 여자를 좋아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규영의 집 안에 여자 물건은 단 하나도 없었다. 하나같이 제 체격에 맞는 옷이며, 속옷이며….
“무슨 일 있어요?”
규영이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우겸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컴퓨터 화면만 쳐다보았다.
따지고 보면 바람이었다. 규영에게 사실 확인을 하지 않았지만, 일단 속인 건 확실했다. 남들이 보기에 보수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버젓이 남자친구가 있는데 외간 여자한테 눈웃음을 살살 치고…. 결론적으로 어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게 상당히 괘씸했다.
그런데 또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구는 걸 보면…. 희영이 오해를 한 걸 수도 있었다. 아니면. 설마 일부러 연차를 쓰게 한 건 아니겠지. 우겸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질투심에 옆에 있는 규영을 티 나지 않게 흘겨봤다.
꿈이라는 하나의 고비를 넘자, 이제는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고비가 찾아왔다. 하긴, 꿈도 자신의 힘으로 노력한 건 딱히 없었다. 그래서 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
종일 우울한 우겸 덕에 규영 또한 저기압이었다. 사무실 사람들에게 또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걸고 있었다.
그래도 자신의 기분을 알아챈 것 같았다. 옆에서 눈치만 볼 뿐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사무실 사람들이 하나, 둘 미팅을 하러 나갔다. 규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문이 닫힌 걸 확인하고 그제야 우겸에게 말했다.
“왜, 무슨 일 있어? 갑자기 왜 그래.”
“아뇨, 그냥….”
“몸이 안 좋으면 병원에 갈까?”
우겸이 또 고개만 저었다. 그런 우겸의 모습이 답답한 듯 규영이 넥타이와 와이셔츠 소매를 푸르고 팔을 걷었다. 우겸은 그 모습만 가만히 지켜만 봤다.
“말을 해야 내가 알지, 그렇게 말 안 하고 뚱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내가 모르잖아. 응?”
“그냥… 어제 쉬어서 그런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겸이 제 볼을 살짝 씹었다. 정말 괜찮다는 듯 규영의 손을 꽉 잡았다가 놓았다.
“거짓말.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말해주면 안 돼요? 응?”
규영의 말에 우겸이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매사에 이런 식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자신이 다 잘못했다고 하는 것도, 그리고 자신이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말해달라고 하는 것도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번에는 말 안 할래요.”
“응? 정말 내가 잘못한 게 있어요?”
규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겸을 쳐다봤다.
“몰라요. 저도.”
우겸이 자리에서 일어나 규영을 지나쳤다. 제 딴에는 화를 낸 건데, 그걸 규영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다. 화난 것을 강조하고자 발걸음을 더 쿵쿵거리며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사무실 안에 있는 규영이 못 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이가 많아져서 그런가, 예전보다 더 귀여워진 것 같네.”
작게 혼잣말을 한 다음, 미소를 지우며 우겸의 뒤를 따라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
규영이 종일 화를 풀어준답시고 화장실까지 따라다녔다. 이런 식이면 화가 풀리기는커녕 화가 더 나야 하는 게 정상인데, 어찌나 어이가 없는지 웃음만 계속 나왔다. 지금도 그랬다.
“그래서 기분은 아까보다 나아졌어요?”
우겸의 입 앞에 숟가락을 가져다 대며 원하는 답을 유도했다. 솔직히 눈앞에 고기가 왔다 갔다 하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우겸이 못 이기는 척 입을 벌렸다. 어찌나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은 잘 아는지, 오늘도 퇴근하고 집에 오니 규영이 미리 주문한 소꼬리찜이 현관문 앞에 놓여 있었다. 어제 먹어서 살짝 물리긴 했는데, 그래도 규영의 성의를 봐서 눈 감고 먹어주는 중이었다.
“어이구, 잘 먹는다. 우리 우겸이.”
규영의 반응에 무장해제가 되었다. 사무실 내내 찡그렸던 표정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물오물 씹던 것을 얼른 삼키고 규영에게 말했다.
“그래서 어떤 거 잘못하셨는지 생각해 보셨어요?”
“음….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는데, 우리가 맨날 붙어 지내잖아요.”
우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코앞에 다가온 수저에 자연스럽게 입을 벌렸다. 사람은 죄가 있어도 고기는 죄가 없었다.
“그냥 말해주면 안 돼요? 응?”
“이제 안 먹을래요.”
우겸이 투정 부리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맨날 이런 식으로 넘어가려고 하는 규영에게 아무래도 본때를 보여줘야 할 것 같았다.
규영이 놀란 눈을 하며 우겸을 쳐다봤다. 테이블 위에 수저와 젓가락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그가 팔짱을 끼고 가만히 우겸을 응시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무서운지, 눈치를 슬슬 보며 조용히 자리에 다시 앉았다.
제가 생각해도 조금 선을 넘은 것 같긴 했다.
“네가 생각해도 과한 것 같긴 하지?”
평소 우겸아, 라고만 불렀던 규영이 호칭을 다르게 불렀다. 표정을 살피니 화가 난 듯 이를 악물고 매섭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우겸의 팔에 소름이 삐쭉 돋아났다.
1절만 할걸….
“그래서 언제까지 이러게.”
“아니…. 그게 아니고….”
“뭐, 그래서 종일 왜 이러는데.”
종일 우겸을 달래던 천사 같던 규영이 사라졌다. 회사에서처럼 갑질을 했던 규영의 모습이었다. 저 얼굴을 평소에 여러 번 봤으나, 적응되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두 얼굴의 사나이도 아니고, 다정할 때와 화를 낼 때의 모습이 너무 상반되었다.
침을 꿀꺽 삼키고, 조심스럽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 제가 그냥 들은 건데….”
“….”
규영이 말을 이어서 하라는 듯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건성으로 끄덕였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올리는 걸 보니 몹시 화가 난 것 같았다.
“어제 팀장님이 어떤 여자를 보고 웃었다고 해서….”
“여자?”
규영이 처음 듣는 듯 한쪽 눈썹을 올리며,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내가? 내가 어제 누구를 만났지?”
정말 기억을 못 하는 건가? 희영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다. 규영과 제가 만나는 것도 모를뿐더러, 왜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겠는가.
“잘 생각해 보세요. 사무실에 찾아왔다는데.”
“사무실? 아….”
그제야 기억이 났는지 규영이 아는 척을 했다. 저렇게 말해야 알아들을 정도면 별로 중요한 사람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규영의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을 보며 조마조마했다. 아무것도 아니면 괜한 일로 종일 규영을 괴롭힌 꼴이었다.
“난 또, 뭐라고.”
“아니, 그래서 누구신데요?”
“일단 잘못했죠?”
“제가요?”
규영이 고개를 끄덕이고, 제 허벅지를 손으로 톡톡 쳤다. 상황이 역전되고야 말았다. 규영의 눈을 피하며 어쩔 수 없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을 한 번 바라봤다. 아무 말 없이 쳐다만 보는데도 무서웠다. 하는 수 없이 입을 꾹 말고 허벅지 위에 앉았다.
분명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는 게 확실한데도 규영의 단호한 얼굴을 보자 주눅이 들고야 말았다. 어깨에 얼굴을 묻고 가만히, 규영의 말을 기다렸다. 어찌나 조마조마하고 떨리는 순간인지, 심장이 남아날 것 같지 않았다.
“일부러 이러는 거야?”
“…아뇨.”
규영이 우겸의 양 볼을 살짝 잡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덕에 규영의 눈과 마주쳤다. 아까와 다르게 장난기가 서려 있는 눈빛이었다.
“형. 잘못했어요.”
“네?”
우겸이 다시금 규영에게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확인했다. 형이라니?
“빨리, 형. 잘못했어요.”
우겸의 머릿속에 수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걸 정말 하라고 하는 말인가?
계속 재촉하는 규영 덕에 하는 수없이 우겸이 작게 말을 뱉기 시작했다.
“…형. 잘, 못…했어요….”
우겸의 힘없는 말에 규영이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제 얼굴은 풀이 죽었는데, 혼자만 얼굴빛이 화사했다.
그런데 자신보다 여자랑 같이 있던 규영이 잘못한 게 맞지 않나? 솔직한 심정으로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일단 하라고 해서 하기 했는데….
“다신 안 그럴게요, 형.”
“네? 아니… 근데.”
규영이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통통한 우겸의 입술이 한곳으로 모였다. 그 모습에 규영이 미간에 힘을 주고 우겸이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입을 맞춰댔다.
“다신 안 그럴게요. 형.”
“…다신, 안 그럴게요. 혀엉.”
“아이고, 예쁘다.”
우겸의 말에 보답이라도 하는 듯 규영이 쪽 소리가 크게 날 정도로 뽀뽀를 해댔다.
“그래서 오늘 종일 질투하느라 그렇게 새침하게 군 거예요?”
“….”
질투라니, 질투라기보다는…. 배신감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했다. 아니지, 그게 질투인가? 우겸이 눈썹을 찡그리며 고민하자, 규영이 우겸의 얼굴을 고무찰흙처럼 멋대로 만졌다.
“그래서… 누구예요? 집에 와서 아무 말도 안 하셨잖아요.”
“그건, 딱히 말할 필요를 못 느껴서 그런 거고. 업무적으로 소개받은 사람이라 어쩔 수 없이 웃은 게 전부예요. 희영 씨한테 물어봐요. 그러고 금방 사무실로 돌아왔을걸?”
“정말?”
쪽-.
규영이 우겸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자세를 고쳤다. 규영의 허벅지 위에 앉은 상태로 조금 전까지 했던 식사를 이어갔다. 이번에도 규영은 우겸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기 바빴다.
달라진 거라고는 제 마음뿐 이었다. 질문했을 때 규영이 흠칫 놀라거나, 말하기 꺼렸다면 믿지 못했겠지만, 너무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괜한 의심이었다. 규영의 말대로 업무적으로 만난 사이라면 사무용 미소를 남발했을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규영은 아니라고 했고, 지금 앞에 있는 게 규영이니 더 의심해 봤자, 자신만 손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출근해서 그 여자의 얼굴을 봤어야 했는데, 아쉬움만 남았다.
***
이 일이 있고 난 이후로 규영은 틈만 나면 형이라고 부르라고 시켰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지만, 항상 도를 지나치는 규영답게 집 안에서는 형이라고 불렀으면 좋겠다고 따라다니며 말했다.
“응?”
“아니….”
우겸이 고개를 숙이고 우물쭈물하기 시작했다. 형이라고 부르는 건 어렵진 않으나, 그럴 때마다 지난날의 꿈이 생각나는 건 착각일까.
“형이라고 부른다고 뭐 닳는 것도 아니고….”
규영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일부러 저러는 게 분명한데… 규영이 등 뒤에서 제 머리를 수건으로 털고 있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우겸이 어깨를 움츠리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저도 집에서 반말해도 돼요?”
“응, 지금 해봐요.”
규영이 우겸의 머리를 터는 것을 멈추고 한껏 움츠려있는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가뜩이나 좁은 어깨를 큰 손으로 움켜잡으니 절로 신음이 터졌다.
“…으.”
아무런 의도가 없는 만짐에도 우겸이 간지러워하자, 규영이 뒤에서 웃기 시작한다.
“요즘 아무것도 안 해도 이렇게 만지기만 하면 움츠리더라.”
“아니…. 제가 원래 간지럼을 많이 타서….”
“거짓말은.”
규영이 우겸의 목뒤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흔적을 남기려고 애썼다. 우겸은 소스라치는 느낌에 몸을 더 움츠렸다. 규영의 행동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게 쉬운 일인가. 이미 규영에게 잡혀있는 상태라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으…. 목에는 안 하기로 하셨잖아요.”
“응. 그런데 요즘 목티 입으니까 괜찮지 않나.”
규영이 집요하리만큼 우겸의 목을 할짝거리며 빨기 시작했다. 고개 숙인 우겸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양반다리였던 다리를 가슴 쪽으로 모아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만, 읏.”
“형, 하지 마, 라고 해봐요. 그럼 그만할게.”
“…흣, 무, 슨.”
우겸이 몸을 배배 꼬며 끙끙 앓았다. 몸을 비틀며 계속되는 입맞춤을 피하려고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힘이 없는 게 이렇게 억울할 수가 없다. 보면 매번 이런 식으로 원하는 대답을 들으려고 자신을 괴롭혔다.
“형….”
“응? 뭐해줄까.”
규영이 세상 다정한 척 우겸을 재촉했다. 뜸을 들이고 말을 하지 않자, 이번에는 규영이 한술 더 떠서 우겸의 티 안으로 손을 넣으려고 했다.
“…하지…마, 응? 형….”
“응.”
“빨리, 빼.”
우겸이 목소리를 높이며 규영에게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지난번 질투 사건 이후로 집에 오기만 하면 규영이 제 몸을 마구 물어대었다.
처음에 하지 말라고 피했지만, 그럴수록 더 집요하게 깨무는 탓에 보이지 않는 곳만 해달라고 나름 타협을 했던 거였다.
“응….”
규영이 아쉽다는 듯 굴자, 우겸이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오늘도 이렇게 규영의 수에 말려 잡아먹힐 뻔했다. 틈만 나면 하려고 하고, 결국 끝까지…. 규영의 안색은 날이 가면 갈수록 좋아졌는데, 우겸은 기운이 없었다. 호시탐탐 먹이를 노리는 짐승도 저것보다는 덜 할 것이다.
“우겸아.”
“응?”
이불 속에서 눈만 빼꼼 내밀고 대답했다. 규영의 얼굴이 꽤 상기되어 있는 걸 봐서…. 우겸이 규영의 하체를 쳐다보고 못 볼 걸 봤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이불을 제 얼굴까지 슬 올렸다.
규영이 침대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우겸아. 갑자기 왜 숨었어.”
“내 마음… 인데…요.”
우겸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반말을 사용하기에는 어색한 감이 있는지, 반말하다가 결국 존댓말로 말을 끝맺었다.
“어? 다시 존댓말 하는 거야?”
규영이 이불 위로 우겸을 껴안았다. 이불을 살짝씩 내리며,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아니?”
“정말?”
“응. 정말.”
규영이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우겸을 더 꼭 껴안았다. 우겸에게 들릴 듯 말 듯 …보다 더 귀여워서 어떡해, 정말, 이라고 규영이 말했다.
규영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우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에 저를 귀여워하는 걸 알았지만, 앞에 무슨 보다, 라고 한 것 같았다. 자신을 만나기 전에 더 귀엽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나.
급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입을 삐쭉였다. 우겸도 규영 못지않게 질투심 꽤 있었다. 자신이 회사에 없을 때 지난번 의문의 여성이 회사에 또 찾아올까 봐, 최근에 연차도 쓰지 않았다.
제 속도 모르고 규영이 왜 자꾸만 연차를 쓰지 않고 출근하냐며, 들들 볶았다. 그럴 때마다 꿋꿋한 표정으로 일에 더 집중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우리 어디 놀러 갈까?”
“음….”
규영과 같이 연차를 쓰는 거면 괜찮을 것 같았다. 맨날 회사에 출근하는 게 꽤 피곤하다 싶었는데, 잘된 일이었다. 규영에게 같이 연차를 쓰자고 하고 싶었지만, 평소에 일이 워낙 많은 탓에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있었다.
“아니면 서울이나 다녀올까? 콧바람도 쐬고, 맛있는 것도 먹고. 오랜만에 누나도 보고 오고?”
“누나요?”
이불을 황급히 내리고 침대에 벌떡 앉았다. 생각해 보니 요즘 우리가 연락도 통 없었다. 약국을 운영하는 탓에 요즘 정신없이 바쁜가 보다, 생각만 하고 먼저 연락은커녕 문자도 하지 않았다. 보통 같으면 자신이 먼저 했을 법도 했는데, 규영과 종일 붙어 지내느라 우리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말이 나온 김에 오랜만에 서울에 가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응, 누나 보고 싶은 것 아냐.”
“그러게요, 요즘 전화도 잘 안 했었는데….”
어? 그런데 규영에게 누나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나?
우겸이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기자, 규영이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평소와 다를 것 없이 굴었다.
***
최근의 우겸은 굉장히 귀엽게 군다. 지난번에 자기 몰래 여자를 만났다고 난리를 피울 때,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말도 안 되는 질투에, 그걸로 종일 저를 괴롭히기까지 하고. 예전보다 나이가 많아져서 그런지, 날이 갈수록 하는 짓이 더 앙증맞았다.
그동안, 그니까 스무 살, 스물세 살에 우겸은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지금보다 어린 탓인지 직설적으로 말을 하는 편이었다. 그 툭툭 내뱉는 말에 섬짓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녔다.
이번에 만난 여자는 가족끼리 얽히고설킨, 정말 귀찮은 만남이었다. 그 여자의 이름이 뭔지, 나이가 몇 살인지도 모를 정도였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튼, 그날 이후로 연차를 쓰라고 해도 안 쓰는 우겸을 보고 속으로 어떻게 하면 같이 휴가를 보낼지 고민했다. 며칠을 우겸의 눈치만 봤다. 연차를 같이 쓰자고 말하고, 거기에 다른 핑계를 엮으면 냉큼 알겠다고 할 것 같았다. 그러다가 우겸의 누나가 생각났다. 이야기를 꺼내면 바로 알겠다고 할 게 눈에 선했다.
다행히 우겸이 흔쾌히 같이 연차를 쓰겠다고 대답했다. 아무래도 지난번 일이 마음에 꽤 걸린 듯했다. 분명 한 달에 한 번쯤은 연차를 쓸 법도 했는데, 이상하리만큼 쓰지 않았다. 며칠 전 희영이 우겸에게 언제 쉴 거냐고 물어봐도 조용히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지금 행동을 보아하니 쓰고 싶은 눈치가 분명했다. 역시, 소심한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아니지, 예전이 더 소심했나?
***
‘정말 죄송해요, 제가 깜빡한 게 아니고.’
‘네.’
규영이 우겸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우겸의 눈에 한 치의 거짓말은 없는 것 같았다. 눈동자가 이리저리, 혼자 바삐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보고 더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가만히 하는 행동을 지켜만 볼 뿐이었다.
‘그 친구가 여자친구랑 헤어졌다고 해서, 달래주다가, 계속 붙잡혀서, 정말 죄송해요.’
우겸은 당황하면 두서없이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지난번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사실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규영이 목을 길게 빼고 긁적였다. 큰 잘못이라도 진 듯 우겸이 손을 다잡고 우물쭈물하며 말하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결국은 자신을 만나러 왔으니까, 그거면 됐다.
‘저도 오늘 일이 늦게 끝나서, 조금 전에 왔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정말요?’
‘응. 그래서 밥은 먹었어요?’
‘아, 아뇨, 지금 시간이 늦긴 했는데, 제가 뭐라도 사드릴까요? 술집 빼고 밥집이 열었으려나, 어쩌지.’
우겸의 혼잣말에 자꾸만 미소가 지어졌다. 저 작은 입에서 말이 계속 튀어나오는 게 신기했다. 원래 이렇게 말이 많은 성격이었나?
약국에서 짧게나마 봐서, 말이 없는 편인 줄 알았다. 자꾸만 혼자 어쩌지, 하고 재잘대는 모습도 너무 귀여웠다. 이렇게 갈수록 더 귀여우면 어쩌지.
‘괜찮으면, 우리 집에 가서 뭐라도 시켜 먹을까요? 시간이 늦어서 마땅히 뭐 먹을 만한 식당이 없을 것 같아서요.’
우겸의 잠깐 고민이라도 하는 듯했다. 그러다 결단이 섰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규영의 집에 가는 내내, 우겸은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그 여자친구랑 헤어졌다던 친구의 이야기였다. 그 말을 듣는 규영은 가끔 맞장구를 쳐주었다. 신호가 멈추면 그제야 우겸의 얼굴을 힐긋 쳐다보고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차에 타기 전보다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친구에 대해 말하는 게 꽤 신이 난 듯했다.
사실 규영은 남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굳이? 라는 생각이 가장 컸다. 아마도 남에게 관심이 없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거다. 평소 주변에서 무슨 말을 하든 귀담아듣는 법이 없었다. 왜 자신이 남의 이야기를 들어줘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걸 들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것도 없었다.
그냥 시간 낭비 같았다. 차라리 그 시간에 운동하든, 잠을 자든… 더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래서 알고 보니까, 그 여자친구가 다른 후배랑도 만나고 있었거든요?’
그러나 우겸은 달랐다. 말할 때마다 더 듣고 싶어졌다. 목소리가 엄청나게 좋은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귀가 기울어지는 톤이었다. 매일같이 지금처럼 조곤조곤 말해주면 없던 스트레스도 다 풀릴 것 같았다.
사실 지금도 우겸이 말하는 내용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의 연애사가 다 뻔하지 않은가. 그냥 우겸이 말하는 그 목소리가 좋았다. 뭐가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쉴 틈 없이 조잘거리는 것이 좋았다. 약국에서는 짧게만 들었던 목소리를 이렇게 오래 들을 수 있는 날이 오다니, 오늘 긴 시간 동안 우겸을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규영이 귓불을 매만지며, 운전대를 톡톡거리며 만졌다.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제 할 말만 했죠.’
우겸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했다.
‘아뇨. 그래서 뒷이야기는요? 친구는 그냥 그렇게 헤어진대요?’
‘일단 헤어지자고는 했는데, 아까 저를 붙잡고 우는 걸 보니 여자애가 다시 찾아오면 만날 것 같기도 해요.’
‘그렇구나.’
별 영양가 없는 우겸 친구의 이야기에 규영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지금 이걸 듣는 내내 우겸에게 여자친구가 있는지, 없는지 그것이 가장 궁금했다. 여자친구가 있냐고 물으면 너무 뜬금없는 건가?
‘그, 음, 손님? 손님은 조금 그렇죠? 뭐라고 불러야 하지,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형?’
우겸의 형이라는 소리에 아무런 표정이 없던 규영의 얼굴에 화사하게 웃음꽃이 피었다. 가만히 있었던 입꼬리라 씰룩씰룩하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형은 조금 그런가? 근데 나이가 몇 살이신지 물어봐도 돼요?’
이렇게 형 소리에 웃음이 터질 줄은 몰랐다. 흔한 명칭인데도 불구하고, 우겸에게 직접 들으니 자꾸만 어깨가 들썩거렸다. 뭔가 더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르바이트생과 손님에서 형과 동생 사이로, 그 변화가 몹시 마음에 들었다.
‘나이는 스물아홉이에요,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말도 편하게 놓아도 되고.’
‘진짜요?’
우겸의 목소리 톤이 한층 올라가 있었다.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를 끌고 오지 말 걸 그랬다. 운전하면서 우겸의 얼굴을 힐끗힐끗 바라보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제가 누나만 있어서 그런가, 형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매일 했는데.’
‘응. 그래서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아니면 집에 가는 길에 포장해서 가져가도 되고.’
‘음…, 시간이 열 시라, 치킨 시켜 먹기에는 너무 늦을 것 같고.’
아직 나이가 어려서 치킨이나 피자 같은 음식을 좋아하는구나. 규영은 골똘히 생각했다. 지금 시간에 우겸에게 뭘 먹여야 할까.
규영이 옆에서 핸드폰을 쥐고 혼자만의 고민에 빠진 우겸을 슬쩍 바라보고 물었다.
‘그 초밥 같은 건 어때요? 그런 것도 먹나?’
‘엄청 좋아해요. 그럼 집 주소만 알려주시면 제가 배달시킬게요. 저 때문에 식사 늦게 드시는 거니까.’
가뜩이나 큰 눈을 초롱초롱하게까지 뜨면서 빤히 쳐다보자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왜 이렇게 목이 타지. 침을 꿀꺽 삼키며 괜히 백미러를 바라보았다.
‘아니에요, 제가 자주 가는 곳에 잠깐 들러서 포장할까 봐요. 제가 원래 밥 먹자고 한 거였으니까.’
‘아, 네. 그러면 다음에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어? 아….’
‘그런데 형은 저한테 계속 존댓말 하실 거예요?’
연거푸 쏘아붙이는 우겸에 말에 방어할 겨를이 없었다. 말을 잇지 못하고 가만히 있을 뿐이다. 규영의 얼굴색이 점점 붉게 물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