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이상한 사람
우겸이 눈을 떴다. 그리고 다시 감았다. 이 행동을 몇 번 반복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걸 확인했다. 이불을 살짝 들추고 그 안에 얼굴을 넣어 앞섶을 확인했다.
계속 봐도 멀쩡했다. 살짝 툭 튀어나온 게 전부일뿐, 평소처럼 젖지 않고 말라 있었다.
…허. 꿈을 꾸지 않았다. 오랜만에 허리가 아플 정도로 깊게 잤다. 그토록 고생했던 꿈의 원인이 규영이 맞았다. 우겸이 신난 나머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와!”
미쳤다. 미쳤어.
굳게 닫혀있던 문이 덜컥 열렸다. 놀란 얼굴을 한 규영이 뛰다시피 들어왔다.
“갑자기 왜 그래? 어디 아파?”
“아, 죄송해요.”
우겸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규영의 얼굴을 보고 더 크게 미소를 지었다. 오래된 숙원사업이 이렇게 해결될 거라고는….
역시, 원인은 규영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규영이지? 아, 그런데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규영인 것도 문제인데 앞으로 같이 자는 것도 크나큰 문제다. 여기 계속 눌러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병원 갈까?”
규영이 침대까지 걸어와서 우겸의 이마에 손을 데었다. 우겸은 고개를 좌우로 흔든 다음 규영의 손을 내리 끌어 침대 위에 앉혔다.
일단 책임지고 봐야겠다.
“그, 혹시….”
“응?”
“어제 하셨던 말 아직 유효해요?”
“무슨 말이요? 내가 무슨 말을 했지?”
우겸이 말하는 도중 규영이 자꾸 이마, 목에 손을 올렸다. 간지러운 우겸이 규영의 손을 피하고 또 푸스스 웃었다.
“진짜 어디 아픈가 본데?”
우겸이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아뇨, 그… 제가 책임져드릴게요.”
“병원 갈까?”
“…아니. 제 이야기 좀 들어주시면 안 돼요?”
우겸이 자꾸만 움직이며 자신을 만져대는 규영의 양손을 잡아끌었다.
“그러니까, 듣고 있는데.”
“싫으세요?”
“싫은 게 아니고….”
“그럼 됐어요. 제가 앞으로 다 책임져드릴게요.”
규영이 어이없다는 듯 우겸을 한 번 바라봤다. 우겸은 질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자꾸만 웃음이 나오는 탓에 참을 수 없는 지경이 이르렀다. 제가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계속해서 웃음이 나오는데.
대충 씻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역시 욕구 중에서 수면욕이 어마어마했던 건 맞았다. 오랜만에 잠을 깊게 자니 가만히 있어도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붕 뜬 기분, 얼마 만에 느껴보는 행복함인가.
규영이 인상을 쓰던,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던, 어제와 다르게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잘 생겨 보이기까지 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어찌나 많이 웃었는지, 입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였다. 입 주위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소파로 걸어오는 규영을 쳐다봤다.
“그래서, 오늘도 여기서 자고 간다고?”
우겸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밀린 잠을 더 자고 싶었다. 평일에는 자기 집에 가서 최대한 버티고, 버티기 힘들 때는 종종 규영의 집에 올 생각이었다. 물론 순전히 우겸 혼자 결정한 일이었다.
“갑자기 왜 그래요? 어제는 그렇게 간다고 하더니?”
“뭐… 제가 새벽에 아플 수도 있고….”
“잘만 자던데? 코까지 골고.”
거짓말은. 우겸이 규영을 티 나지 않게 슬쩍 째려보았다.
“그 대신, 음… 제가 저녁 살게요.”
규영이 아까와 다르게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저녁은 안 사도 되는데, 갑자기 왜 그래요? 뭐가 떠올랐나?”
정말 예전에 규영을 만난 적이 있나…. 하긴, 꿈에 규영이 나오는 것도 이상하긴 했다. 원래는 알던 사이인데 기억을 못 하는 걸 수도 있었다.
“기억이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우겸이 되묻자, 규영이 아, 며칠 전에 우겸 씨네 집에서 자던…, 까지만 말했다. 그 뒤로는 우겸의 손이 규영의 입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규영이 우겸의 손바닥에 혀를 내밀고 핥으려고 하자 우겸이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넘어졌다. 가만히 앉아있다가 넘어지는 꼴이라니, 꽤 우스운 모양새였다. 아무래도 손바닥 핥는 건 습관인 듯했다. 틈을 보이면 안 되겠다.
“…왜, 왜 그러세요?”
규영이 우겸의 손을 잡아, 다시 일으켜 앉혔다. 그리고 평소처럼 뚫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우겸 씨가 입 막았잖아요. 그래서 책임져주는 건 알겠는데, 어디까지 책임져주는 거예요?”
“…음.”
그냥 규영과 정말 단순하게 잠만 잘 생각만 했지. 책임의 범위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규영이 하는 행동을 봐서 그 ‘책임’에 꿈속에서 했던 행동, 아니 얼마 전에 몸을 섞은 행동까지 속하는 것 같았다.
아직도 구멍이 화끈거리는데…. 그 짓은 꿈에서나 즐거웠지, 현실에서는 영 아니었다.
우겸의 표정이 시간을 거듭할수록 어둡게 변했다.
“응? 그러면서 뭘 책임져준다고.”
“저는 그냥 잠만 같이 잔다고… 그런 뜻이었는데.”
“그 잠이 어떤 잠이요? 단순하게 자는 거 아니면, 섹….”
또 규영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아까처럼 규영이 허튼짓할까 봐 서둘러 손을 제 무릎 위에 올렸다.
“생각보다 습득력은 빠르네요. 그래서 내가 원하는 책임은….”
규영이 또 섹스 타령을 하려고 하자, 우겸이 알겠어요, 알겠어, 하고 대답했다. 그 말에 규영의 굳어있는 얼굴이 순식간에 사르르 녹아,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당한 것 같은 기분은 뭐지….
“그런데, 지금 당장은 못 하고, 그 나중에… 천천히….”
“응, 그건 우겸 씨가 하고 싶을 때 해요. 그러면 맨날 여기 와서 같이 잘 거예요?”
당장 지금 하자고 옷을 벗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순순히 물러섰다.
“아, 그건 아니고, 일단 주말만…?”
“왜, 평일에는 안 오고?”
“그, 일도 해야 하고… 괜히 또 불편하실까 봐.”
“응, 그것도 우겸 씨가 오고 싶을 때 와요. 집 비밀번호는 우겸 씨 핸드폰 뒷자리로 바꿔놓을게요.”
순식간에 우겸이 원하는 대로 모든 일이 해결되자 괜히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지난번과 같이 일을 덜 한 기분이랄까.
그래도 앞으로 편하게 잘 수만 있다면, 이건 충분히 감수할 만했다.
***
우겸이 평소보다 이른 시각으로 알람을 맞췄다. 옆에 누워있는 규영을 슬쩍 곁눈질해서 봤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왜요. 그냥 잠만 자자며.”
“안녕히 주무세요.”
우겸이 극존칭을 쓰면서 인사를 하자 규영이 코웃음을 친다. 누가 보면 내가 우겸 씨보다 나이가 엄청 많은 줄 알겠는데, 하고 말하며 몸을 우겸 쪽으로 돌렸다.
인기척을 느낀 우겸이 눈을 질끈 감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많은 건… 사실….”
“나랑 하루 이틀, 같이 자니까, 내가 친구처럼 편해졌나 봐요. 맞죠. 고우겸 씨.”
“….”
“이제 대답도 안 해요?”
우겸이 눈을 꼭 감고 자는 척을 했다. 회사가 아닌 밖이라 그런지, 규영이 동네 형까지는 아니고, 음…. 편해진 건 사실이었다. 매일같이 꿈에 나온 것도 나름 한몫하는 것 같다.
뭐, 가끔 빈정상하게 말해서 쥐어박고 싶긴 했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주는 모습에 마음이 동했다. 어제 속옷과 옷을 챙겨준 건 오늘까지 이어졌고, 심지어 잠옷까지 챙겨줄 정도였다. 솔직히 어제는 그럴 수도 있지, 라는 생각만 들었지만, 오늘까지 붙어있으니 규영의 섬세한 행동에 마음이 일렁였다.
이성도 아닌 동성을 상대로, 이렇게까지 금방 사랑에 빠질 수 있나 싶은 정도였다. 그런데 솔직히 규영의 얼굴을 종일 보고 있자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남들이 제 입장이어도 똑같을 것이다. 어떻게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에게 딱 맞게 행동할까. 이 정도면 자신과 꽤 오랫동안 같이 지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그건 아니지만….
아니면 스토커인가 싶기는 한데, ‘사람’을 찾으러 왔다고 한 게 있어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찾는 사람과 자신이 비슷한 체격을 가진 것 같았다. 분명 지금 입고 있는 속옷이며 잠옷도 그 사람의 옷이겠지….
남의 옷을 입는 것 같아 이름 모를 상대에게 조금 미안하긴 했다. 그리고… 또 뭐가 있었더라.
갑자기 입술에 물컹한 뭔가가 닿았다.
어….
“잘 자, 우겸아.”
평소보다 더 다정한 목소리로 규영이 말했다. 아니, 너무 아무렇지 않게, 당연하다는 듯이 굴었다.
우겸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타이밍을 놓치자, 규영은 자신이 잔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뒤이어 우겸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었다. 당황한 우겸이 어떻게 할 수 없어 가만히 몸을 굳히고 있었다.
뭐지?
심장 박동 수가 두근거리다 못해 요동쳤다. 너무 크게 뛰는 것 같았다. 규영에게도 들릴까 걱정이 될 정도로 쿵쿵거렸다. 안 자는 것을 들킬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더 조마조마했다.
크게 숨을 쉴 수도, 눈을 뜰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규영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옆에서 보는 게 느껴졌다.
어떡하지.
너무 겁 없이 덜컥 책임진다고 했나? 단순하게 잠을 편하게 잘 생각으로 규영에게 책임을 지겠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것 같았다. 아직까지도 끈적하게 느껴지는 시선에 어색하게 쭉 뻗고 있는 손과 발은 식은땀으로 젖어들기 시작했다.
규영의 인기척이 사라지길 기다리며 혼자 끙끙 앓기 시작했다. 그렇게 긴장한 채로 잠이 들었다.
‘나가지 마.’
‘왜?’
‘말…. 뭘 잘했다고…. ….’
눈이 번쩍 뜨였다. 온갖 서러운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눈물이 눈 안에서 비집고 나오려고 애쓰고 있었다.
“흐….”
우겸의 흐느끼는 소리에 옆에서 자고 있던 규영이 느릿하게 눈을 떴다.
“괜찮아?”
터져 나오는 눈물을 꾹 참으려고 했으나, 옆에서 규영이 걱정스럽게 묻는 말에 참았던 눈물이 뚝 떨어졌다.
“형….”
자신도 모르게 규영에게 형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넓은 품에 파고들어 안겼다. 당황한 규영은 몸을 굳힌 채로 가만히 있었다.
우겸이 서럽게 울면서 계속 형, 형, 하고 웅얼거렸다. 처음엔 당황한 듯한 규영은 움찔거리기만 하다가, 우겸의 울음이 점점 커지자 이윽고 등을 토닥이며 달래기 시작했다.
얼마나 울었을까. 서럽게 울고 나니 점점 정신이 또렷해졌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자 지금의 상황이 몹시 민망해졌다. 자다가 안겨서 우는 꼴이라니…. 거기에 무슨 생각으로 규영에게 자꾸 형이라고 부른 걸까.
꿈속에서 규영과 싸운 것 같았는데, 자세히 왜 싸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드문드문 기억이 나는 말이 ‘나가지 마’ 였는데…. 아무래도 어제 규영이 자기 집에만 있으라고 했던 것 때문에 그런 꿈을 꾼 것 같았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정말.
“저, 죄송해요. 꿈을 꿔서…. 제가 꿈이랑 착각을.”
우겸이 우물쭈물한 상태로 말을 하자 규영이 빤히 바라만 봤다.
민망한 우겸이 규영에게 벗어나려고 몸을 뒤로 뺐다. 그러자 규영도 순순히 안고 있던 우겸을 놔주었다.
“꿈?”
“그… 요즘 자꾸만 꿈을 꿔서….”
규영이 옆에 있을 때 꿈을 꾸지 않았던 건 우연의 일치였나…. 규영은 별로 놀라지도 않았는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우겸의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졌다.
“무슨 꿈?”
“아…. 그게.”
규영의 물음에 뭐라고 답을 할지 고민이 되었다. 솔직하게 꿈에 나온다고 해야 하나? 그러나 규영이 믿어주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이 되는 건 저였다.
“일단 형이 누구예요?”
머리를 정리하던 규영의 손길에 힘이 느껴졌다. 말하는 내내 말에 날이 서 있는 기분이었다. 화를 억누르고 말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
규영이라고 솔직하게 말하기에는…. 다른 사람을 누구라고 둘러대야 할지 그것 또한 고민이었다.
“누군데? 내가 모르는 형도 있나?”
종종 규영은 지금처럼 다 아는 것처럼 굴었다. 그래 봤자 같이 얼굴 보고 지낸 지 아직 한 달도 되지 않았으면서.
“왜 대답이 없어요?”
자꾸만 대답을 재촉했다. 답을 피할 방도가 없었다. 대답하기 어려웠다. 우겸이 몸을 일으켜서, 화장실 좀…. 하고 자리를 잽싸게 피했다.
화장실에서 거울을 통해 얼굴을 보니 가관이었다. 눈은 또 퉁퉁 부어있고, 어제도 이런 자국이 있었나 싶은 정도로 잠옷 사이로 붉은 자국이 살짝씩 보였다.
세수하고, 이를 닦고… 화장실 안에서 일부러 느릿하게 행동하며 시간을 벌었다.
욕조에 살짝 걸터앉아 곰곰이 생각했다. 규영에게 말하면 어디까지 믿어줄까. 솔직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말하면 정신 나간 사람 취급할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그렇다고….
똑똑-.
“어디 아파요? 병원 갈까?”
조급해 보이는 규영의 물음에 우겸이 화장실 문을 살짝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아뇨, 아프진 않고….”
“일단 나와봐요. 왜 화장실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해.”
불안한 듯 자신을 보는 규영의 눈동자가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그냥 잠깐 화장실에 있던 건데, 뭐가 그리 초조한 것인지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하다.
규영이 화장실 문을 활짝 열고, 안에 있는 우겸에 손을 붙잡아 밖으로 잡아끌었다. 우겸이 힘없이 규영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와 침대에 앉았다.
“어….”
가까이서 규영의 얼굴을 보니 입술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저 때문에 많이 놀라셨어요?”
규영이 아무런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바늘로 찔렀을 때 피도 안 나올 것처럼 생겼는데, 갑자기 왜 그러지…. 아까 자신을 안아 토닥여준 것처럼, 이번에는 우겸이 그렇게 행동했다.
비록 규영에 비해 작고 보잘것없는 몸집이었으나, 그래도… 이렇게라도 달래주고 싶었다.
“…많이 놀라셨구나…. 죄송해요.”
우겸의 토닥임에 규영의 떨림이 점점 잦아들었다.
***
새벽 내내 둘이 부둥켜안다가 잠이 든 모양이다. 시끄럽게 우는 알람 소리를 듣고 겨우 정신 차렸다. 눈을 뜨고 자신을 꼭 껴안고 자는 규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제 불안한 모습에 우겸도 꽤 놀랐다. 다행히 어디가 아픈 건 아니었는지, 새근새근 편안하게 자는 규영의 얼굴을 보자 마음이 놓였다.
다행이었다.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집에 들렀다가 출근할 생각에 방을 나가려고 했는데, 갑작스럽게 일어난 규영 덕에 방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걸음을 멈췄다.
“어디 가요?”
방금 잠에서 깬 듯 목소리가 꽤 잠겨있었다.
“저…. 집에 갔다가.”
“같이 가.”
그 말에 우겸은 걸음을 멈추고, 규영이 침대에서 일어날 때까지 침대 주위를 서성거리며 기다렸다.
***
규영의 집에서 대충 준비하고 나왔다. 집 앞에 도착하니 현관문 앞에 큰 택배가 놓여 있었다.
뭐지? 따로 시킨 것이 없었는데. 주위를 둘러보고 자신이 집으로 제대로 온 게 맞는지 확인했다.
“어? 우리 집 맞는데.”
“응. 내가 주문했어요. 얼른 들어가게 문 열어봐요.”
우겸이 서둘러 문을 열자, 규영이 자연스럽게 짐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뭐 사셨어요?”
“이불이랑 침대 커버?”
“아….”
우겸의 동공이 갈 곳을 잃은 듯 계속 허공에 맴돌았다.
“세탁도 다 해 온 거라 깔기만 하면 돼요. 우겸 씨 옷 갈아입는 동안 할 테니까 천천히 옷 갈아입고 나와요.”
“…네.”
출근 시간까지 얼마 안 남아 차마 규영을 말릴 겨를이 없었다. 서둘러 옷 방으로 들어갔다. 옷걸이에 걸려있는 옷으로 대충 갈아입고, 거울을 쳐다보았다. 어제는 제대로 못 잤지만, 그제는 오래 잔 탓에, 낯빛이 평소보다 괜찮아 보였다.
아니, 규영을 만나기 전의 얼굴로 돌아왔다.
똑똑-.
“다 입었어요?”
“아, 네.”
우겸의 대답에 규영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우겸이 입은 옷을 위아래로 훑은 다음, 규영과 어울리지 않게 바보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규영과 같이 지내면서 한 가지 느낀 건, 쉴 새 없이, 아무 때나 웃는다는 거였다. 사무실에서는 맨날 뚱한 표정을 지으며 딱딱하게 말해서, 웃는 것과 거리가 먼 사람인 줄 알았다. 저렇게 맥없이 웃을 때마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
회사에 가는 동안 둘은 말이 없었다. 조용히 걷기만 했다. 그 공백을 규영이 먼저 깼다.
“그런데, 꿈을 자주 꿔요?”
“아…. 최근에 또 꾸기 시작해서….”
“최근에?”
“…네.”
규영이 그렇구나, 하고 작게 말했다.
“그런데 혹시 저희 미팅 갔을 때, 제가 차에서 잠깐 잤었잖아요. 그때 뭐 별다른 일이 있었나요?”
우겸은 밤새 고민한 끝에 조심스럽게 규영에게 물어봤다. 그리고 규영을 힐끔거리며 반응을 살폈다.
“그때 딱히…. 아, 그때는 꿈을 안 꾸었어요?”
규영의 대답에 우겸이 놀란 듯 걸음을 멈추었다. 제 생각을 읽은 것 같았다.
“놀란 거 보니 맞나 보네. 그리고 꿈에 나오는 상대방이 나고?”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규영이 이렇게까지 눈치가 빠른 줄은 미처 몰랐다.
“…어.”
“그 형이 나였구나?”
우겸이 뭐라 말하려고 할 때 저 멀리 희영이 손을 흔들며 우겸의 이름을 불렀다. 가까이 다가오며 손까지 흔들었는데 제 옆에 있는 것이 규영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황급히 손을 내리고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네.”
규영이 희영의 인사를 고개만 까딱이며 건성이게 받고, 우겸과 희영을 앞질러 걸어갔다.
“아침부터 팀장님을 만났어?”
“네….”
희영이 고생이었다는 표정으로 우겸의 팔을 손으로 살살 쓸었다. 우겸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
우겸은 종일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꿈을 눈치챈 규영도 그렇고, 규영과 같이 잤는데도 불구하고 꿈을 꾼 것도…. 일이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쉽게 풀리지 않았다.
거기에 규영은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종일 우겸을 들들 볶았다. 어제의 규영은 도대체 누구인지…. 무슨 사람이 맨날 이랬다가 저랬다가 난리를 피우는지, 골치가 아팠다.
“고우겸 씨.”
어제는 다정하게 우겸 씨, 우겸아 했으면서. 우겸이 입을 삐쭉이며 네, 하고 대답했다.
“뭐가 불만이야.”
“네?”
규영의 반말에 화들짝 놀란 우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티션 너머로 사무실 사람들이 없는걸 확인하고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미쳤나 봐, 진짜.
“아까 다들 미팅 간다고 나갔는데, 종일 무슨 생각 하느라 정신이 없어요?”
“아니, 그게….”
규영이 의자 위에 상체를 길게 늘어트리고 우겸을 마주 봤다. 제 속을 꿰뚫을 것 같은 눈빛에 우겸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뭐.”
“그, 꿈에서 나오는 상대가 팀장님인 것 어떻게 아셨어요?”
규영이 미소를 지으며 의자를 끌고, 우겸에게 가깝게 다가갔다.
“그냥 뭐…. 지금도 봐봐, 내 눈도 제대로 못 쳐다보는 사람이 갑자기 술에 취했다고 달려들 일이 없잖아요. 거기에 익숙하다는 듯 반말에, 칭얼거리기까지 하고. 그리고 오늘 새벽에 자다가 깨서….”
규영의 길어지는 말에 우겸이 발을 동동 굴렀다. 손가락을 규영의 입에 손을 대고 쉿, 하고 말했다.
아무리 사무실에 사람이 없다고 한들 회사는 회사였다. 사무실 사람들이 밖에 나가긴 했지만, 혹여, 혹시나 정말 사람 일은 몰랐다.
“그래서 뭐가 문제인데요? 말해봐요. 내가 들어줄게.”
규영이 자꾸만 몸을 가까이 다가오자, 우겸은 반대로 의자를 뒤로 움직였다. 집요한 눈빛에 곧 잡아먹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회사에서 설마, 무슨 짓을 할까. 하지만 규영이라면 설마가 가능한 사람이었다.
규영이 인상을 쓰기 시작했다. 결국 자꾸만 뒤로 가는 우겸의 의자를 잡아챘다. 더 이상 뒤로 도망가지 못하는 우겸이 이제는 옆으로 이동하려고 했다. 그 모습에 규영이 어이없다는 듯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만하고, 그래서 꿈을 안 꾼 게 언제예요?”
규영의 낮은 목소리에 움찔한 우겸이 하던 행동을 멈추었다. 얼굴을 마주하니 꽤 진지한 표정으로 보였다.
“음…. 근데 제 말을 믿으세요? 꿈에 팀장님이 자꾸만 나온다는걸?”
“안 믿을 이유가 없으니까. 일단 토요일에는 잘 잔 것 같고, 아, 그래서 일어나자마자 소리 지르고 책임지느니 마느니 한 거였어요?”
규영이 팔짱을 끼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아….”
“생각보다 우겸 씨가 불순한 의도가 있었네. 나는 순수한 얼굴로 책임진다고 해서, 그 말을 믿었는데.”
“딱히 그런 건 아니었는데….”
“아, 그리고 그때 미팅 갔을 때?”
자신이 대답하기 전에 알아서 대답하는 규영 덕에 우겸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규영이 고민하는 얼굴을 하다가 뭔가라고 알아차린 표정을 했다.
“아, 그리고 팀장님 집에서 소파에 누워 잠깐 졸았을 때도 잠만 잤어요.”
“그냥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미팅 갔을 때는 잘 모르겠고…. 만약 내 예상이 맞는다면, 우리가 몸을…. 뒤는 뭐라고 말 안 해도 알겠죠?”
“어? 어….”
규영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꽤 그럴듯했다.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히 몸만 가까워지는 것이 아닌…. 그럼 그 짓을 매일같이 해야 하나? 그런데 그다음 날은, 아…. 우겸의 얼굴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졌다.
“맞는 것 같긴 한데. 낮잠 잔 날은 우리가 직접 하지 않고, 화장실에서….”
“아….”
우겸이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매일같이 규영과 몸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섞어야 한다는 건데…. 그게 말이 쉽지, 매일 그러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생각지도 못한 해결 방안에 우겸이 좁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어차피 나을 때까지는 약 발라야 하니까, 우겸 씨만 괜찮으면 내가 해줄까요? 혼자 하기 힘들잖아요. 약 바르려고 화장실에 들어가면 꽤 오래 있다 나오던데.”
“….”
그런데 그 몸을 섞는다는 게 꼭 그렇게만 해야 하나, 따지고 보면 키스도….
우겸의 눈을 크게 뜨고 규영 쪽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한 번 더 둘러보고 규영의 귀에 속삭였다.
“저, 키스 한 번만 해주시면 안 돼요?”
“갑자기?”
“따지고 보면 그것도 혀를 섞는 거니까….”
우겸의 말에 규영이 사무실이 떠나가도록 웃었다. 그리고 입술을 축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 손은 책상 위에 올리고, 다른 손은 우겸의 턱을 잡은 채 입을 가져다 대었다. 우겸이 움찔거리며 규영을 밀어내려고 애썼다. 그러다 규영의 단단한 몸을 밀어내는 게 쉽지는 않았다.
“하….”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혀를 넣어댔다.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여기서 다른 것도 할 것처럼 규영의 입맞춤이 몹시 노골적이었다.
“읏…. 잠…. 시.”
우겸이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자, 그제야 규영이 입을 떼고 우겸을 내려다보았다.
아, 이 눈빛.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눈빛이었다.
“여기까지 할까?”
규영이 우겸의 입술 주위를 손으로 지분거리며,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고 떼었다.
조금 전에 질척이게 입을 맞춘 것보다 이러한 사소한 행동이 생각보다 제 심장을 더 두근거리게 했다. 우겸은 상기된 얼굴을 하고 사무실 밖으로 급하게 나갔다.
계속 같이 있으면 심장뿐만 아니라 얼굴까지 터질 것 같았다.
***
우겸이 평소보다 생생해진 얼굴로 사무실에 들어갔다. 오늘 아침에 알람 시간을 듣지 못할 정도로 늘어졌다. 그 정도로 깊게 잠이 들었다. 자고 일어나서 정말 잠에서 깬 게 맞는지, 꿈이 아닌지 열 번은 더 확인했을 정도였다.
사무실 사람들에게 기분 좋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규영의 말이 다 맞았다. 오죽하면 출근하는 내내 규영이 애타게 보고 싶었을까. 얼굴에 홍조를 띠며 규영이 빨리 출근하기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이렇게 해결이 될 문제였다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마냥 행복했다. 당분간 꿈이 잦아질 때 동안 규영에게 조심스럽게 부탁하려고 한다.
“안녕하세요.”
애타게 기다렸던 규영이었다. 규영의 얼굴을 보자마자 웃음이 주체가 안 되었다. 누가 보면 왜 저러냐고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피식거리며 웃어댔다.
“네.”
그와 반면에 규영은 어제보다 얼굴이 푸석했다. 도리어 제 꿈을 규영이 가져갔나 싶은 정도였다. 한편으로 걱정이 될 정도로 눈가가 퀭했다.
“어디 몸 안 좋으세요?”
“아뇨, 그냥 잠을 설쳐서…. 우겸 씨는 얼굴색이 좋아 보이는 게 잘 잤나 본데요?”
우겸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규영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따가 사무실에 사람이 없을 때 규영에게 진지하게 부탁할 예정이다. 키스 몇 번 한다고 입술이 닳는 것도 아니고….
***
오전 내내 사무실 사람들이 밖을 나가지 않았다. 하필 오늘따라 미팅이 없을 게 뭐람…. 이러면 규영에게 부탁은커녕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을 것 같은데…. 우겸이 심각한 얼굴로 책상에 턱을 괴고 있었다.
갑자기 규영이 우겸의 책상을 톡치며, 시선을 끌어당겼다.
“….”
지금이 기회인가?
우겸이 규영 쪽으로 가까이 붙었다. 오늘따라 파티션이 높은 게 고마울 정도였다. 최대한 목소리를 가다듬고 규영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그… 잠시, 면담 요청해도… 될까요?”
“….”
생각에 잠긴 듯 규영이 아무 말 없이 책상을 두어 번 두들긴 다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겸 씨랑 카페에 다녀올 건데, 각자 마시고 싶은 음료 있으면 사내 메신저로 보내주세요.”
갑자기 규영의 카드 찬스로 사무실 분위기가 술렁였다. 생각지도 못한 찬스. 우겸은 어벙한 표정을 지으며 규영의 손에 이끌려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아닌 빈 회의실을 찾아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안으로 우겸을 밀어 넣고, 규영이 문을 잠근 다음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어….”
비밀리에 할 이야기인 건 어떻게 알고….
“말해봐요. 혹시 그만두거나 그러려고?”
규영이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 그리고 그 뒤에 어쩐지 오늘 꿈이 안 좋더라, 하고 작게 말을 덧붙였다.
“아, 아뇨. 절대 안 그만둬요.”
우겸이 손을 허공에 저으며 규영의 손을 다잡았다. 상체를 규영 쪽으로 쏠리게 앉았다.
규영 덕에 이 꿈에 굴레에서 벗어날 수도 있는데, 왜 자신이 그만두겠는가.
“그럼 아침부터 뭔데?”
“아, 그게….”
규영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 어제 꿈을 안 꿔서….”
뒷이야기가 들리지도 않았는데 규영이 설핏 웃으며 다리를 꼬고 거만하게 앉는 자세로 바꿨다. 거기에 우겸에게 잡혀있는 손을 빼고 팔짱을 끼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초조한 모양새였다면, 지금은 꽤 여유가 있어 보였다.
“아…. 난 또 아침부터 괜히 걱정했네.”
“그래서…. 음….”
규영이 우겸의 말을 끊고 눈썹을 올리며 말했다.
“그런데 나는 원래 사람이랑 침 섞는 행위를 안 좋아해요.”
“네?”
와, 눈치는 진짜 알아줘야 한다.
그런데 무슨 거짓말을 저렇게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하는지 모르겠다. 평소 입을 맞출 때마다, 자기 입술을 쪽쪽 빨다 못해 떼지 않으려고 했었다.
“아… 그러시구나.”
영혼 없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정말 싫어해요.”
말 꺼내기 무섭게 싫다고 하는 사람에게 뭐라고 말하겠는가. 우겸의 안색이 점점 파리하게 질렸다. 회의실 안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온 세상을 다 얻은 표정이었다면, 지금은 정반대였다.
어쩐지 아침부터 기분이 너무 좋다 했다.
“그런데 또 우겸 씨가 부탁하면 들어줄 용의는 있기는 한데, 그럼 내 부탁도 들어줄 거예요?”
우겸의 눈빛에 다시 생기가 생겼다. 뭐든지 다 들어줄 수 있다는 표정으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난이 아니고 진심으로 나를 책임져 줬으면 좋겠어요.”
“네?”
혹시나 회의실 밖으로 목소리가 샜을까 봐 염려스러울 정도로 큰 소리였다. 우겸은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규영을 내려봤다. 규영은 위에서 우겸이 내려보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손을 잡고 다시 자리에 앉혔다.
“아니…. 그게, 그, 누구 찾으신다면서요. 그런데 저랑 지금 어…, 파트너를 하시겠다는 거예요?”
규영이 놀란 눈으로 파트너요? 하고 말한 다음 킥킥거리며 웃어댔다. 방금 제 목소리보다 규영의 웃음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건 착각일까.
“난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우겸 씨가 그러자면 그럴게요. 그런데 책임진다고 했던 건 우겸 씨 아니에요? 변덕이 무슨….”
규영의 말도 안 되는 제안에 우겸이 말을 잃었다. 그때 책임진다고 하면서 알겠다고 한 건 그 상황을 모면하려고, 대충 대답했던 거였다.
남자랑…, 그것도 회사 상사랑 파트너라니…. 며칠 전 규영과 지새웠던 밤을 떠올렸다.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꾹 물었다.
“그때는 우겸 씨가 빨리해달라고 애원해서 그랬던 거고…. 일단 오늘 하루 동안 좋은 쪽으로 생각해 보고 내일 답 줘요.”
그리고 규영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우겸의 볼에 입을 살짝 마주쳤다. 우겸이 눈을 크게 별다른 저항이 없자, 우겸의 턱을 가볍게 쥐고 어제와 같이 잡아먹을 듯하게 입술을 빨아들였다. 숨쉬기가 곤란할 정도로 공격적인 자세였다.
“읏….”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규영이 얼굴을 떼고 싱긋 웃었다. 엄지손가락으로 우겸의 입가에 묻은 타액을 정리해 주었다.
“오늘까지는 음…. 내가 선심 쓴다고 생각하고 해줄게요.”
우겸이 멍한 표정을 하며 아무 말을 하지 않자, 규영이 볼을 톡톡 치며 회의실을 나갔다.
하, 침 섞는 거 싫어한다면서… 거짓말은. 우겸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규영의 뒤를 쫓았다.
***
방금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는데, 순식간에 마음이 뒤숭숭했다. 역시 세상은 쉬운 일만 있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참으로 공평한 세상이었다. 제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조금 전 생각지도 못한 키스에 자꾸만 입술을 매만졌다. 어제보다 더 격하게 해서 괜히 부은 것 같기도 하고….
혹여 사무실 사람 중 눈치를 채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종일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휴….”
자꾸만 한숨이 나왔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누구에게 물어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물끄러미 옆을 바라보았다. 규영의 자리가 비어있었다. 오후까지 미팅이 있다고 사무실에 커피만 배달하고 밖으로 나갔다.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그런 제안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그 찾는 사람이랑은 잘 안돼서 그러는 것 같기도 하고…. 하….
파티션 너머로 희영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우겸 씨, 무슨 일 있어? 오늘 종일 밖에 나올 생각도 안 하고, 아까 팀장님한테 혼났어?”
“아뇨, 아뇨.”
뭐, 말로 혼난 게 아니고…. 그것도 뭐, 혼난 거라고 해야 하나.
우겸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자, 희영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파티션 너머로 나오라고 손짓하자, 우겸이 힘없이 일어섰다.
“오늘 팀장님 자리에 안 계신 데, 퇴근하고 한잔할까?”
“아….”
우겸은 차마 동조하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술을 진탕 먹고 싶었다. 그 생각도 잠시, 지난번에도 사무실 사람들과 술을 먹다가 규영과 실수를 저지른 거라…. 고개를 힘없이 떨구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우겸 씨 몸이 안 좋긴 한가 보다.”
희영이 괜찮다며 우겸의 어깨를 토닥였다. 우겸은 어깨를 잔뜩 구부린 채 죄송해요, 하고 말한 다음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
침대에 누워 오전부터 했던 고민을 뒤 이어 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기분을 좌우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다가 한 번 숙면을 맛본 경험 탓에 규영이 간절해졌다.
따지고 보면 이직하거나, 다른 곳으로 이사 갔을 때 규영이 꿈에 안 나온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때 가서도 규영이 꿈에 자주 나타나면, 그것도 골치였다.
답은 정해져 있는데, 그 답을 정말 선택하는 게 맞나 싶기도 하고….
띠링-.
호랑이가 따로 없는 규영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어디에요?
“집이요.”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밥은?
“아, 아직 안 먹었어요.”
홀쭉하게 들어간 배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그럼 뭐라도 사서 집으로 갈까?
“아, 괜찮은데….”
-내가 아직 밥을 안 먹었는데, 혼자 먹기가 싫어서, 그럼 알겠어요. 푹 쉬고 내일 봐요.
자취를 오래 한 탓에 밥을 혼자 먹기 싫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았다. 서울에서 살다가 내려와서 여기에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꽤 외로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오죽하면 저한테 연락해서 밥을 같이 먹자고 할까….
“아, 그럼 제가 팀장님 댁으로 갈까요?”
“억지로 안 그래도 돼요, 그러다 체할라.”
“아뇨, 아뇨. 그럼 도착하시는 시간에 맞게 제가 뭐라도 사갈까요? 아님, 밖에서 먹어도 되고.”
수화기 너머로 규영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럼 한 시간만 있다가 와요.”
전화를 끊고, 살짝 발그레한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뭐가 그리 열이 오르는 걸까.
옷을 몇 번이나 고쳐 입었는지 모른다. 거울을 볼 때마다 갈아입은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신경 쓰일 게 없는 상황인데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시계를 한 번 더 확인하고 급하게 집에서 나왔다. 규영의 집이 근처라 정말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했을 정도로 옷을 갈아입는 데 시간이 많이 소요됐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세수라도 한 번 더 하고 오는 건데….
규영의 집 앞에 도착해서 초인종을 여러 번 눌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아직 집에 도착하지 않았나? 규영에게 전화하려고 핸드폰을 꺼내는 순간, 지난번에 자기 번호로 비밀번호를 변경하겠다고 한 것이 떠올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침을 꿀꺽 삼키고, 조심스럽게 번호를 눌렀다.
띠리릭-.
정말이었구나.
우겸이 살짝 문을 연 틈에 얼굴을 넣고 집 안을 살폈다. 얼핏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팀장님.”
규영을 애타게 부르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 안 왔나? 가만히 소파에 앉아서 규영을 기다리려고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난번에 종일 잠만 자느라 집 구경도 제대로 하지 못했었다.
먼저 거실에서 가장 가까운 방에 들어갔다. 가만 보니 안방만 문이 잠겨있고, 다른 방은 다 열려있었다. 주인도 없는 집을 몰래 구경하는 게 살짝 죄스럽긴 했다. 거기에 뭔가 몰래 하는 행동 같아 가슴이 콩콩 뛰었다.
아, 여기가 옷 방이었구나.
집 안에 단둘이 있을 때 규영은 항상 제 옆에 붙어있었다. 방 구경을 하고 싶었는데, 어찌나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지. 심지어 옷도 자꾸만 꺼내주는 탓에 제대로 둘러볼 수가 없었다.
지금이 기회였다. 안을 쭉 둘러봤다. 행거에 규영의 성격처럼 깔끔하게 옷이 구분되어 있었다. 역시, 사람은 성격대로 사는 것 같았다.
“어?”
괜히 옷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쪽은 규영의 몸에 맞는 옷이었다면, 다른 한쪽은 그보다 약간 작은 크기의 옷이 걸려있었다. 마치 제 옷을 옮겨 놓은 것 같았다.
지난번에도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정리되어 있는 걸 보니 더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정말 찾는 사람과 제가 비슷해서 규영이 책임지라고 한 건가….
그렇게 옷을 빤히 보고 있을 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왔어요?”
“깜짝이야!”
화들짝 놀란 우겸이 소리 지르며 몸을 움찔거렸다. 집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규영이 있었던 모양이다.
“뭐 훔쳤어요? 왜 이렇게 놀라지?”
움츠린 어깨를 펴고 우겸이 뒤를 돌아봤다. 규영이 방금 씻었는지 바지만 입은 상태로 머리를 털고 있었다.
“아, 아뇨. 안 계신 줄 알았는데, 갑자기 나타나셔서….”
규영과 눈이 마주친 우겸의 얼굴이 또 불그스름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자꾸만 벗은 상체에 눈이 돌아갔다.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어색하게 걸으며, 규영을 지나쳤다.
또 왜 이렇게 열이 오르지. 감기라도 걸렸나.
규영과 자고 난 이후로 쉴 새 없이 몸에 열이 올랐다. 분명 그때 이후로 감기에 걸리려고 몸이 전조증상을 보내고 있는 듯했다.
작은 손으로 부채질하며, 부엌을 둘러보았다. 싱크대 위에 포장 용기들이 놓여 있었다. 저녁이라고 규영이 사 온 것 같은데, 멀리서만 봐도 양이 꽤 많았다.
“왜 갑자기 얼굴이 빨개져서 나가요? 수상하다, 우겸 씨. 지금도 불순한 생각했어요?”
“아뇨, 아뇨. 감기 기운이 있어서 그래요.”
“진짜?”
규영이 우겸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재차 올려 확인하다가, 우겸의 목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읏….”
갑작스러운 접촉에 우겸이 이상한 소리를 내뱉었다. 제가 낸 소리에 놀란 우겸의 얼굴이 더 새빨갛게 변했다.
“거짓말.”
“아니…. 일단 식사부터 할까요? 저 지금까지 팀장님 기다리느라 배가 너무 고파서….”
우겸이 말을 돌리고 잽싸게 규영의 근처에서 벗어났다. 싱크대에 있는 포장 용기들을 식탁으로 옮기며 가만히 아무 말 하지 않는 규영의 눈치를 슬금슬금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