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불편한 관계
저녁을 대충 먹고 책상 앞에 앉았다. 규영이 아까 집 앞에 데려다줘서 마트에 들리는 걸 깜빡했기 때문이다. 노트북을 켜서 쇼핑 사이트로 들어갔다. 화면을 둘러보며 일단 팥을 검색했다. 내일 도착하는 상품으로 골라 장바구니에 넣었다.
그리고 아까 지민이 녹음기를 산다는 말이 번뜩 떠올랐다. 오늘 하루 지켜보니 규영이 괴롭히기는커녕 너무 잘해줘서 녹음기를 사서 들고 다니는 건 과하지만, 혹시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녹음기 종류가 생각보다 많네.”
하나만 사볼까. 지민도 산다는데 자신이라도 못 살 건 없었다. 크기가 큰 건 대놓고 녹음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마우스를 움직이며 최대한 작은 모양을 찾았다. 펜 모양으로 된 것도 괜찮아 보이기는 하는데…. 혹시나 규영이 펜을 빌려 쓰기라도 하면,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눈앞이 순간 아찔했다.
“와, 별 모양이 다 있구나.”
USB 모양으로 된 녹음기가 있었다. 크기도 괜찮았다. 사무실 열쇠에 연결해서 가지고 다니면 녹음기처럼 보이지도 않을 것 같았다. 설명서를 읽어보니 녹음할 때 조작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사용할 일이 없을 수도 있지만…. 마음 한편에 찜찜함이 남아있었다. 혹시나 모르는 마음이 들어 미리 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겉모습도 USB이기도 하고, 실제로 USB처럼 사용도 가능하다고 사용설명서에 나와 있다.
주문을 마치고, 검색창에 구인 사이트를 쳤다. 당장 이직해야 할 사람은 자신보다 지민으로 보이지만, 또 혹시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역이 문제였다. 이곳에서도 꿈을 꾸는 거라면 지역을 옮기는 게 맞긴 하는데….
“다시 서울로 가야 하나….”
턱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구인 광고를 훑었다. 하, 꿈 때문에 살던 집과 직장을 내버려 두고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솔직히 겪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남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고통인 건 확실했다. 사람의 욕구 중 3대 욕구로 성욕, 식욕, 수면욕이 있다고 하는데, 우겸은 그중 수면욕이 가장 강했다.
지금도 성욕과 식욕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곳에 자리를 잡고 나서 삶의 활기를 띠고 정말 행복하게 지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참 행복하고 좋았다. 갑자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욕구가 조절되지 않으니 종일 우울할 뿐이었다.
그런데 또 잠을 못 자는 건 아니니, 수면유도제를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차라리 규영 대신 다른 사람이 나오면, 어떻게 버틸 수나 있겠는데, 그게 아니었기에 더 문제였다.
사람인지라 규영의 얼굴을 볼 때마다 꿈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혼자만 아는 꿈…. 얼굴이 낯 뜨거워 티 나지 않게 눈을 피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오늘은 오전에 짐 정리하고, 오후에 미팅하러 가서 그나마 괜찮았다.
앞으로 이 말도 안 되는 꿈을 계속 꾸면 규영의 얼굴은 어떻게 봐야 할까. 당장 내일부터가 문제였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내내 옆에서 붙어 지내야 하는데, 자꾸만 얼굴이 붉어진다면, 그것도 꽤 난감할 노릇이다.
여기까지 사람을 찾으러 왔다는 규영을 상대로 몽정이라니…. 꿈을 떠올리자 멀쩡하던 하체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피곤한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만약 계속 꿈에 규영이 나온다면, 차라리 평범한 꿈을 꾸고 싶어졌다. 뭐 같이 밥을 먹거나, 산책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아니면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맨날 남자 둘이 나체로 물고 빨고…. 그것만 아니면 된다.
“하….”
요 며칠 계속 의도치 않게 한숨이 풀풀 튀어나왔다. 우겸이 노트북을 끄고 의자에서 신경질적으로 일어난다.
***
우겸이 숨을 참다가 몰아쉬며 눈을 번쩍 떴다. 또 꿈에서 시달렸다. 고개를 돌려 시계를 확인하니 새벽 네 시였다. 아까 열두 시쯤 침대에 누워있었으니까, 네 시간은 잤구나. 눈을 감고 방금까지 꾼 꿈을 떠올렸다.
분명 자기 전에 차에서 잠깐 잤을 때처럼 꿈을 꾸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혹시나 꿈을 꾸게 된다면 얌전한 꿈을 꾸고 싶다고 애원하다시피 두 손을 모아 빌었는데, 얌전은 개뿔.
며칠 꿈을 꾸었던 것보다 더 수위가 높았다. 어찌나 꿈에서 규영의 성기를 열심히 빨았는지, 지금도 턱이 아픈 것 같았다. 입을 크게 벌리며 턱이 괜찮은지 딱딱 소리를 내며 확인했다.
“…하, 하하.”
맥없이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았다. 새벽이라 방 안에 어둠만 드리웠다.
하, 꿈속에서 도대체 규영을 상대로 뭐를 하고 싶은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막혔다. 규영이 남자라는 사실을 잊은 건가?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정말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규영의 앞에서 성기를 흔들고, 오늘은 성기까지 빨았다. 이러다가 조만간 꿈에서 끝까지 갈 것 같았다. 눈이 절로 질끈 감겼다. 이렇게까지 규영을 떠올릴 줄이야….
주위를 손으로 천천히 훑었다. 어찌나, 꿈이 현실 같은지 지금 자신의 옆에 규영이 없는 게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제 무의식이 규영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기도 했다. 역시 꿈은 꿈인 게, 꿈 안에서 그의 성기는 꽤, 많이 컸다. 남들의 성기를 주의 깊게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실제로 본 것 중에서는 단연 으뜸일 정도였다. 꿈이라서 제 상상에 더해진 걸 수도 있었다.
“실제로도 정말 크려나….”
말도 안 되는 호기심이 버썩 일어났다. 지금은 궁금만 해야겠다. 나중에 혹시나 화장실에 같이 가게 되면 주위를 둘러보는 척 한 번 봐야지. 꿈과 현실이 다른 걸 눈으로 직접 깨달을 필요가 있었다.
우겸은 기운 없는 표정을 지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축축해진 팬티 덕에 어기적거리며 화장실로 향했다.
제 나이 스물여덟 살에 매일 같이 팬티를 손으로 빨고 있다. 남들이 혈기 왕성하다고 하는 대학교 때도 이 짓은 안 했다. 한숨을 푹푹 쉬며 팬티를 열심히 빨아댔다.
그런데 문득 어제 규영과 같이 차 안에 있을 때가 아슴푸레 떠올랐다. 앉아있을 때 얼핏 보기로는 꿈보다는 아니지만, 꽤 묵직했던 것 같기도 하고…. 꿈에서 봤던 크기가 자꾸만 머릿속에 떠돌아다녔다.
우겸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빨래에 집중했다.
“그런데 차 안에서는 꿈을 안 꾸긴 했는데.”
설마…. 우겸이 혼잣말을 곱씹으며, 급하게 빨래를 마무리하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혹시나 자신이 놓치고 있는 게 있는지 규영과 단둘이 있을 때를 천천히 떠올렸다. 평소와 다를 게 크게 없었던 것 같은데…. 분명 잘 때 규영이 옆에 있었던 게 전부였다.
어쩌면 꿈의 주체가 규영이라서… 그런 건가? 에이, 이렇게 간단하게 해결되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동안 겪은 게 있는데, 설마….
내일부터 사무실에서 틈만 나면 졸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무모하긴 하지만 한 번쯤 도전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면 규영이 먼저 손을 내밀어 주고 도와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정말 잠시, 잠시만 했다.
“어휴….”
고개가 절로 양옆으로 움직여졌다. 현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정말 만약에 졸았다가는 근무 태만으로 욕이란 욕을 다 들을 것 같았다. 그리고 경위서나 사직서까지 제출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규영이라면…. 충분히 그럴만한 사람이었다. 비록 며칠 겪은 건 아니지만, 그러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할 정도였다.
아니면 일단 친해져 봐야 하나? 현재로서 제일 나은 방법이긴 했다. 규영이 어제처럼 살갑게만 굴면 친해지는데 수월하겠지만, 평소 까칠한 행동으로는….
우겸이 무릎 위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푹푹 쉬었다.
해결은 개뿔. 갈수록 더 첩첩산중이었다.
아! 아니면….
엎드려 있는 우겸이 등을 들썩거릴 정도로 음흉하게 웃기 시작했다. 혼자 무슨 작당 모의를 하는 듯 보일 정도다. 눈썹 뼈를 만지작거리며, 또다시 미소를 짓는다.
“애초에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말도 안 되는 상상이긴 하지만,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한참을 혼자 웃다가 현관문으로 걸어갔다. 문을 살짝 열고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어제 주문했던 택배 상품들이 문 앞에 놓여있었다. 조용히 밖으로 나가 택배 상품들을 집 안으로 들고 왔다.
가장 궁금했던 택배인 USB 녹음기를 먼저 뜯었다. 한눈에 봐도 USB와 똑같았다. 정말 신기하단 말이지. 이따가 작동되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그리고 팥이 있는 택배 상자를 뜯었다. 팥 봉투를 들고 부엌으로 가서 널찍한 국그릇을 꺼냈다. 효과는 없겠지만, 그래도 미약하나마 꿈에서 규영과 하는 행동의 수위가 낮아지길 간절히 빌며 그릇에 팥을 부었다.
***
우겸은 현재 규영의 눈치를 핼끔핼끔 보고 있다. 어제의 다정한 규영은 사라졌다. 분명 집 앞에서 헤어질 때까지 아주 해맑게 웃고 있었다. 출근해서 인사했을 때도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있었다. 그 정도로 기분이 꽤 괜찮아 보였다. 그러나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이후부터 규영의 주위에 먹구름이 가득 끼었다.
“어제 수정하라고 했던 기안문이 내용도 이상한 것 같은데, 전체적으로 수정해서 다시 주세요.”
어제는 분명 기안문에 오타가 있다고만 했는데…. 규영이 지시하는 말투가 딱딱하다 못해 화가 나 보였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봐도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내려간 입꼬리가 올라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우겸은 이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별일 아닐 수도 있지만, 분명 뭔가 있었던 것 같았다. 화장실에 가 봤자 한 20분도 안 걸렸었는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네, 알겠습니다.”
규영이 바로 옆에 있는 탓에 사내 메신저를 대놓고 할 수 없었다. 목이 뻐근한 사람처럼 목덜미를 잡으며, 규영의 동태를 힐끔거리며 살폈다. 씩씩거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어깨가 크게 올라갔다 내려갔다.
핸드폰을 꺼내 희영에게 물어보려고 하다가, 그것도 그거 나름대로 고충이 있을 것 같아 서둘러 사내 메신저에 로그인했다. 모니터를 손으로 한 번 더 매만진 다음, 옆을 흘겨보며 규영을 살폈다. 다행히 골똘히 집중한 듯, 자세의 변화가 없었다.
메신저를 키자 읽지 않은 메시지 알람이 주룩 떴다. 어제 지민이 꽤 걱정한 모양이었다. 메시지를 엄청나게, 쉴 새 없이 보내놓았었다. 어쩐지, 어제 전화를 받자마자 콧김까지 내뱉으며 꽤 씩씩거리더니…. 어제 미처 읽지 못한 메시지에도 그녀의 화가 녹아있었다.
대화창을 서둘러 껐다. 더 읽다가는… 희영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힘들 정도로 꽤 많은 양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어제 전화로 다 들었던 내용일 것이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조용하게 키보드를 쳤다.
[혹시 저 사무실에 없는 동안 무슨 일 있었을까요? 갑자기 팀장님 기분이 안 좋아 보이셔서요.]
[딱히? 아, 맞다. 지민 씨가 우겸 씨 찾더라. 사무실에 잠깐 들렀다가 갔어.]
[네. 그럼 저의 괜한 걱정이었나 봐요.]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이따 점심시간에 봐.]
희영과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곁눈질로 규영을 쳐다봤다. 다행히 저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다시 고개를 돌리고 지민에게 받은 메시지를 천천히 읽으며, 답장을 보냈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자리 바뀐 거 어떻게 되었나 보러 갔지.]
[난, 또.]
[파티션 때문에 너 사무실에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더라. 밖에서 하나도 안 보여. 그런데 너희 팀장님 엄청 인상 좋으시던데?]
그런가? 우겸은 동의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을 보냈다.
[갑자기?]
[우리 팀장님과 달리 나에게 엄청 반갑게 인사해 줬어.]
[그래?]
이상하다. 지민을 대할 때도 기분이 괜찮았더라면, 희영의 말대로 아무 일도 없었는데 저 혼자 과민반응을 한 게 맞는 것 같았다.
갑자기 규영이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우겸이 몸을 흠칫거리며 옆을 바라보았다. 죄지은 사람처럼 보이기 딱 좋았다. 지은 죄라고는 지금 지민과 메시지를 주고받은 게 다였다.
“오늘 오후에 미팅 가려고 하는데, 오전 내로 결재 올릴 수 있죠?”
“네.”
“업체 자료 여기 있고, 아마 한 팀장님 계셨을 때 몇 번 가봤을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정말 이상했다. 희영도 별일 없었다고 하고, 지민 또한 규영이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했다. 그런데 왜 옆에서 느끼기에 화가 나 보일까.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규영이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서류를 건네주었다. 아니다. 어제는 사무실 밖이었고, 오늘은 사무실 안이니 당연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겸이 규영에게 건네받은 자료를 바탕으로 결재 서류를 작성하는 중이다. 지난번에 작성했던 결재 서류를 바탕으로 업체명과 날짜만 바꾸면 된다. 글만 읽을 줄 알면 할 수 있는 정말 단순한 업무였다.
우겸은 다시 작성한 내용을 꼼꼼하게 업체명과 날짜를 확인했다. 결재자를 규영의 이름으로 클릭한 다음 전송 버튼을 눌렀다.
옆에서 일하는 규영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팀장님….”
“네.”
“결재 올렸습니다.”
규영이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사무실 안에서와 밖에서의 차이가 상당히 컸다. 우겸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의 바로 옆에 앉아있으니 평소보다 많은 부분에서 신경이 쓰였다. 앞으로 이렇게 쭉 지내야 할 생각에 답답함이 몰려왔다.
우겸은 컴퓨터 화면을 바라봤다. 일단 일부터 해야겠다. 보통 미팅하러 다녀오면 보고서를 작성했다. 내부용 보고서와 외부용 보고서, 두 개를 만들었다. 한 팀장님 같으면 보통 언제까지 보고서를 작성해서 달라고 했다.
규영이 저에게 보고서에 대해 언급을 따로 안 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제 고객사에 방문했을 때 미팅한 내용을 적은 수첩을 찾기 위해 서랍장을 열었다. 가방 안에서 수첩을 찾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수첩을 찾아 고개를 드는데 규영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가슴을 부여잡고 헉하는 심정으로 규영에게 말했다.
“뭐,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세요?”
“아뇨.”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굉장히 불만이 있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우겸은 고개를 살짝 숙인 다음 책상 위에 수첩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수첩에 적힌 내용을 바탕으로 내부 보고서를 먼저 작성하기 시작했다. 고객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쓰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걸 토대로 내부 결재를 받을 때 수정 없이 한 번에 결재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고객사뿐만 아니라 내부 구성원들을 설득해야 한다는 것이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에 실제 운영 손익을 바탕으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실수하면 안 된다. 입을 쭉 내밀고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며 내용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고우겸 씨.”
규영이 낮은 목소리로 우겸을 불렀다.
“네?”
“지금 뭐 해요?”
규영이 의자를 우겸 쪽으로 돌리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쳐다보는 눈빛이 꽤 매서워 보였다. 말실수라도 하면 당장 사납게 물어뜯을 기세였다.
“아, 어제 저희 미팅 갔다 왔던 거 보고서 작성 중입니다.”
“내가 하라고 했었나?”
의자의 등을 기댄 채 팔짱까지 꼈다. 거기에 규영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아니요. 한 팀장님 계셨을 때 다녀오면 보고서를 작성해서요. 이번에도 그럴 거로 생각하고 작성 중이었어요. 작성하지 말까요?”
규영의 위압감 있는 태도에 우겸의 없던 기까지 눌렸다. 가뜩이나 좁은 어깨가 더 위축되었고, 대답하는 내내 목소리도 떨렸다.
“네. 일단 내가 하라는 것만 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뭘 하려거든 나한테 물어보고 하세요. 그게 순서가 맞지 않나요?”
“아, 죄송합니다.”
“일단은 어제 미팅할 때 작성한 거 먼저 정리해서 주세요. 제가 생각하기에 보고서 통으로 수정하느니, 처음부터 어떻게 작성할지 초안 잡고 작성하는 게 나은 것 같아서요. 고우겸 씨 생각은 어때요?”
“네. 그럼 얼른 작성해서 드릴게요.”
어제 미팅에서 친절하고 다정했던 규영은 어디 갔을까. 가만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원래 성격이 예민하고 까칠한 것 같았다.
갑자기 말을 다다닥, 몰아붙이는 탓에 심장이 몹시 두근거렸다. 어찌나 많이 놀랐는지, 눈물도 찔끔 나올 뻔했다. 겨우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휴….”
규영에게 들리지 않게 작게 한숨을 쉬었다. 우겸이 어금니를 꽉 물고 조금 전에 내부 보고서 작성하던 것을 바탕으로 다시 정리를 시작했다. 보고서에 쓰려고 했던 것처럼 간략하게 쓰자니, 그가 이것밖에 작성하지 못했냐고 성질을 낼 것 같았다. 최대한 살을 붙이고 붙여서 양을 늘렸다.
아무래도 규영의 옆에서 일을 배우기는커녕 스트레스만 늘 것 같았다. 마저 작성하고 화장실에 다녀와야겠다. 원래 자리에 있을 때는 그래도 한두 시간에 한 번씩은 화장실에 다녀왔었다. 평소 담배를 피우지 않는 탓에, 나름대로 일탈이었다.
우겸이 규영의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규영의 의자 뒤로 최대한 조용히 지나쳤다. 지금처럼 안쪽 자리가 아닌 바깥 자리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화장실 가는 것까지 눈치를 보면서 회사 생활을 할 줄 몰랐다.
우겸이 화장실에 들르고 사무실을 지나쳐 휴게실로 들어갔다. 동기들이 매일같이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을 때 왜 그럴까 싶었는데….
이제야 그게 어떤 심정인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이런 상황이 매일같이 반복된다면 앞으로 회사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지….
우겸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래도 자신이 잘못한 게 없지는 않으니까, 일단 최선을 다해서 규영의 비유를 맞춰야겠다. 그런데 앞으로 규영과 친해지기는커녕, 더 거리가 생길 것 같았다. 큰일이다.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 밖으로 나갔다. 저 멀리 지민이 성큼성큼 걸어오는 게 보였다. 뜻하지 않은 만남에 반가운 나머지, 우겸이 조용히 소리 내어 지민을 불렀다.
“어디 가?”
“그놈의 회의. 회의하다 죽은 귀신이 붙었나, 허구한 날 회의야.”
지민이 우겸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발소리를 크게 낸 이유가 다 있었다. 어제 전화로 들었던 목소리보다 화가 더 많이 나 보였다.
“진정하자, 지민아. 나보다 네가 더 먼저 그만둘 것 같아.”
“너 그만두게?”
지민이 갑자기 큰소리를 내며 대답하는 탓에 우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변을 둘러보며 서둘러 지민의 입을 막고 구석으로 들어왔다. 하필 소리를 내도 자신의 사무실 앞이었다. 사무실 안에 들리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혹시 몰랐다. 규영이 귀가 밝은 편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왜 뜬금없이 소리 질러.”
“미안, 너무 놀라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지민이 우겸에게 몸을 바짝 붙여 말했다. 남들에게 오해받기 딱 좋게 둘의 사이가 너무 가까웠다. 혹여 누가 볼 새라 다급하게 몸을 뒤로 뺐다.
“그냥 해본 소리야. 얼른 회의실 가. 이따가 내가 연락할게.”
목소리에 힘이 빠진 우겸이 애써 웃으며 지민을 배웅했다.
우겸은 씩씩거리면서 걷는 지민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웃음이 날 수밖에 없었다. 항상, 아니. 매일 같이 팀장을 욕하면서 막상 인사팀에 가면 지민의 모습은 딴판이었다. 처세술이 좋다고 해야 하나. 인사팀 사무실 분위기를 띄우는 데 꽤 재주가 좋았다. 인사팀 팀장이 사무실에 들를 때마다 항상 지민의 칭찬을 늘어트릴 정도였다.
우겸이 싱글거리며 몸을 돌려 사무실 쪽으로 걸어가려고 했을 때 저 멀리 규영과 비슷한 사람이 문 앞에 서 있는 걸 발견했다.
설마 지민이 그만두냐고 물어본 걸 듣지는 않았겠지…. 분명 지민이 큰 소리를 내었을 때는 복도에 아무도 없었다.
우겸이 사무실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고개가 바닥에 붙었다. 차마 규영을 쳐다볼 수 없었다. 사무실에 들어가려고 할 때 매서운 눈빛을 한 그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속으로 어찌나 놀랐는지, 동공이 지진 난 것처럼 이리저리 움직였다.
다행히 규영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있었다. 전화하러 사무실 밖으로 나온 듯, 서둘러 복도로 걸어갔다. 짧게나마 스치는 순간 규영이 자신을 째려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뒤통수가 한여름에 해가 내리쬐는 듯 몹시 따가운 건, 그냥 착각이겠지. 뒤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얼른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
규영은 딱 하루만 천사였었다. 내부 보고서를 작성하는 내내 초안이 이상하다, 그때 들었던 거와 다르다 등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걸었다. 결국 우겸은 이번 주 내내 악마 같은 그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규영 혼자 미팅에 다녀와서, 보고서를 쓰고…. 정말 혼자만 바쁜 상황이었다. 그 덕에 우겸은 홀로 사무실 안에서 보고서만 작성하고 있다. 이럴 거면 왜 옆에 앉혔을까. 이 상황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거기에 이번 주 내로 내부 보고서는 끝낼 수 있을지 의문일 정도로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있었다.
“고우겸 씨.”
규영이 부르는 소리에 우겸이 움찔했다.
“네.”
어찌나 유심히 쳐다보는지,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우겸이 눈을 잦게 깜빡거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오후에 미팅이 있어서, 거기서 바로 퇴근할 거예요. 퇴근 전까지 마저 보고서 수정해서 메일로 보내주세요. 제가 정신이 없어서 확인 못 할 수도 있으니 문자도 남겨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우겸이 겉으로 풀 죽은 얼굴을 지으며 대답했으나, 속으로는 쾌재를 외쳤다.
오늘은 행복한 불타는 금요일이 맞았다. 규영이 공식적으로 출근한 이후 줄곧 오전에 미팅을 다녀오고, 오후에는 사무실에 남아있었다. 미팅을 제외하고는 줄기차게 사무실에만 있었다. 무슨 생각까지 들 정도냐면, 사무실을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 같았다.
아니면 사무실 사람들이 일을 정말 잘하나 감시하는 것 같기도 했다. 처음에는 저만 감시하나 싶었는데, 이 상황이 며칠이 이어지니 사무실 사람 모두 지켜보는 게 확실했다.
규영이 사무실에 있는 내내 모두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보였다. 퇴근할 때도 그의 눈치를 보며, 연차 순서대로 퇴근했다. 오죽하면 요즘은 사무실보다 외근 나가는 게 행복하다고 할까.
우겸은 연차도 낮았고, 항상 규영과 같이 사무실에 남아있어 하는 수없이 같이 퇴근했다. 남들은 퇴근하는 게 정말 행복하다고 하는데, 요 며칠은 죽을 맛이었다.
규영이 결재받으러 간다며 사무실을 나갔다. 우겸은 자리에서 빠져나와 희영의 옆으로 갔다.
“혼자 안쪽에 있으려니까 답답하지?”
“네….”
우겸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희영은 조금만 힘을 내보자고 말했다.
“오늘 팀장님 오후에 미팅 가신대요. 저희 칼퇴근할 수 있어요.”
“정말?”
희영이 자리에 앉은 상태로 손을 번쩍 들었다.
“오늘 팀장님 오후에 자리에 안 계신다는데, 이 불타는 금요일을 같이 즐길 분 있으신가요. 과장님 오후에 미팅 없으시죠?”
“오, 진짜? 좋지, 좋지. 내가 요즘 우겸 씨 얼굴을 통 못 봐서 얼마나 슬펐는데.”
“그럼 다들 괜찮은 거죠? 오랜만에 퇴근하고 맥주 한잔해요. 우겸 씨는 당연히 괜찮지?”
우겸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퇴근 후 시원한 맥주 한 잔, 이번 주 내내 이런 사소한 것을 간절하게 원했다.
짧은 일탈을 즐기고 얼굴의 미소를 띤 채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이제야 숨통이 트였다. 이 소소한 행복에 이렇게까지 행복해하는 건 자신밖에 없을 것이다.
현실에서 규영에게 하도 시달려서 그런지 꿈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건 이제 그러려니 할 정도였다. 매일같이 몽정하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다.
요즘 꿈 내용은 평소보다 수위가 더 높았다. 규영과 직접 관계를 하는 내용이었다. 내면의 변태가 있는 건지 항상 꿈속에서 규영보다 제가 더 원했다. 무의식은 정말 무서운 것이었다.
그리고 꿈에서도 그걸 다 느낄 수 있는 건가? 잠이 깨면 뭐 사정은 항상 기본이었지만, 그 짜릿한 느낌이 꽤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이 꿈이 언제까지 지속이 될지 모르겠다. 꿈에서 서로가 연인처럼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는 게 너무나 당연시되었다. 가끔은 꿈을 더 오래 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행위가 좋았다.
그리고 꿈에서 규영은 항상 우겸아, 우겸아, 하고 다정하게 불렀다. 그 부름이 어찌나 듣기 좋은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현실에서 한 번쯤 그렇게 불리고 싶은 정도로, 무척이나 미소가 지어지는 행위였다.
그러나 막상 현실에서는 회사에 출근하면 시시각각 변하는 규영의 얼굴을 보며 눈치 보기 바빴다. 거기에 꿈과는 딴판으로 우겸 씨, 고우겸 씨, 하고 무섭게 노려보며 말하는 탓에, 요즘은 아무 말을 안 하고 앞에만 서 있어도 절로 주눅이 들었다. 뭐, 몰아세우는 건 꿈에서나 현실에서나 똑같았다.
***
우겸이 고개를 꼿꼿이 들고 시계를 쳐다봤다. 오늘은 기필코 정시에 퇴근하리라.
규영이 점심시간 이후로 사무실에서 사라졌다. 덕분에 퇴근 시간까지 편안한 마음으로 수정을 마치고 규영에게 메일까지 보냈다. 완벽한 금요일이었다. 규영이 주위에 없어야 일에 집중이 잘 되는 스타일인 걸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사무실 사람들 모두 실실 웃으며 서둘러 짐을 챙겼다. 정말 오랜만에 다 같이 퇴근하는 것 같았다. 규영이 오기 전에는 이렇게 다 같이 정시 퇴근도 하고, 밥도 같이 먹고 그랬었다. 이 행복함을 다시 누릴 수 있어 너무 좋았다. 가만히 있어도 웃음이 절로 나왔다.
저뿐만 이런 게 아니었다. 입사 이후 처음으로 먼저 퇴근한 규영 덕에 사무실 사람들 모두 하하 호호 웃으며 사무실을 나왔다.
“그럼 오늘 뭐 사줄까? 말만 해.”
“회사 앞에 있는 시원한 얼음 맥주나 마시러 갈까요?”
“좋지, 좋지. 우리 거기 안 간 지 꽤 되지 않았어?”
평소 애주가인 서 과장은 술 마실 때 보면 저보다 배로 먹는데 얼굴색에 변화가 없었다. 그와 반면에… 우겸은 맥주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새빨개진다. 누가 보면 혼자 술을 다 마신 줄 알 것이다. 대표적인 알콜 쓰…. 술을 많이 못 마시는 편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찝찝한 기분이 들지….
아래턱을 문지르며 빠트린 게 없는지 떠올릴 때, 옆에 있던 희영이 우겸에게 말했다.
“왜, 우겸 씨, 일 다 못 했어?”
“아뇨, 아뇨. 오랜만에 이렇게 다 같이 나와서 어색해서 그런가 봐요.”
아니겠지, 뭐. 입사 초기에는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퇴근 후에 사무실에 다시 와서 했던 일을 확인했었다. 누가 보면 병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밤새 제대로 일했는지 안 했는지 끙끙 앓는 것보다는 확인하는 게 속이 편했다. 왜 갑자기 입사 초기처럼 그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설마 뭐가 있겠어.
***
팀원들끼리 술을 거나하게 마시는 도중 갑자기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이 시간에 전화할 사람이라고는 지민밖에 없었다. 또 팀장 욕을 하려고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흐린 눈으로 핸드폰을 겨우 붙잡고 느릿하게 전화를 받았다. 고작 맥주 한 병도 마시지 않았는데 불구하고 자꾸만 자세가 비스듬해졌다.
“왜?”
-왜?
지민의 목소리가 아닌 남자 목소리였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눈을 최대한 또렷하게 뜨고 핸드폰 화면을 쳐다봤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다.
누구지….
“누구세요?”
-하, 제 번호 저장을 안 했어요?
“어….”
당황한 우겸이 대답을 제대로 하지 않고, 옆에 있는 희영에게 핸드폰을 내밀어 번호를 보여줬다.
“혹시 아는 번호세요? 전화가 왔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라, 혹시나 고객사인가 해서요.”
희영은 자신의 핸드폰에 우겸이 보여준 번호를 입력했다. 헉, 소리와 함께 눈이 커진 상태로 입 모양으로 말했다.
‘팀장님.’
“허.”
우겸의 눈빛이 쉴 새 없이 좌우로 흔들렸다. 마치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가지처럼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시금 목소리를 가다듬고 작게 말을 내뱉었다.
“여보세요? 제가 핸드폰이….”
그래도 목소리에 술에 취해 보이는 게 느껴졌다. 몹시 웅얼거리는 목소리였다.
-메일 보내고 문자 왜 안 했어요?
“아….”
어쩐지, 아까 뭔가 까먹은 게 있는 것 같더라니.
-아? 그런데 지금 어디예요? 집이 아닌 것 같은데.
규영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낮게 울렸다. 이제는 목소리만 들어도 화가 났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 그게… 사무실 사람들이랑 회사 앞에… 있어서요.”
“하, 지금 있는 위치 문자로 보내요. 데리러 갈 테니까.”
“저를요? 어… 왜….”
아무런 대답 없이 뚝 끊긴 전화에 우겸이 당황한 나머지 앞에 있는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우겸 씨, 괜찮아? 팀장님이 이 시간에 왜?”
맥주를 마시는 우겸을 보고 화들짝 놀란 희영이 차디찬 얼음 물을 전해준다.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아요…. 저를 데리러 오신다고 하는데….”
차가운 물을 허겁지겁 마시며, 겨우 말을 이어 했다.
“아까 메일로 보고서 보낸 것 아니었어?”
“그게… 메일 보내고 문자 보내라고 했는데, 제가 메일만 보냈거든요.”
희영은 안절부절못하는 자신을 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우겸의 짐과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게 제출이 오늘까지였나? 일단 사무실 사람들 화장실에서 돌아오면 우겸 씨 일 있어서 먼저 갔다고 말해 놓을게. 얼른 가봐. 팀장님 여기 안까지 들어오시면 우리 모두 다음 주부터 ‘죽습니다’ 하고 있어야 해. 알겠지, 우겸 씨?”
“어… 어.”
우겸은 희영의 손에 이끌려 술집 밖으로 쫓겨났다. 아무리 규영이 무섭다고 해도, 이렇게 가차 없이 보낼 줄은 몰랐다. 황망한 표정으로 술집 앞에 몸을 움츠리고 앉아있는데 또 벨소리가 울렸다.
“지금 어디예요?”
“아, 여기가… 그 할머니 맥주…. 음….”
처음 규영의 전화를 받았을 때보다 우겸의 말꼬리가 축 늘어졌다. 눈에 애써 힘을 주고 크게 뜨려고 했지만, 자꾸만 눈이 스르륵 감겨왔다.
“우겸아.”
아까보다 평안한 얼굴로 당연하다는 듯 응? 하고 바로 대답했다. 그리고 눈을 몇 번 더 깜빡였을까. 몸을 축 늘어뜨리며, 정신을 잃었다.
***
우겸이 몸을 뒤척이기 시작했다. 뭔가 불편한지, 인상을 찡그리며 눈을 반쯤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옆에 규영이 누워있었다. 눈을 다시 감았다가 떴다.
얌전한 꿈을 꾸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던 게 드디어 이루어진 건가? 평소처럼 옷을 벗은 상태도 아니고, 정말 나란히 규영과 자는 꿈인듯했다.
몸을 옆으로 돌려 눈을 감고 있는 규영을 빤히 바라봤다. 오늘따라 뭔가 그가 잘 생겨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우겸이 갑자기 씩 웃으며 규영의 코를 콩하고 때렸다. 오늘 회사에서 구박했던 것에 대한 소심한 복수다.
규영이 인상을 쓰고 눈을 느릿하게 떴다.
“안녕.”
“안녕? 고우겸 씨.”
“응. 어제는 우겸아, 하더니, 오늘은 고우겸 씨야?”
규영의 표정이 이상했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처음 보는 얼굴을 한 채로 저를 바라봤다. 눈동자가 정신없이 떨려댔다. 하는 수없이 규영의 얼굴을 손으로 덥석 잡았다. 그러자 눈을 더 빠르게 깜빡거렸다. 얼굴을 손으로 주무르며 입꼬리를 올려 웃는 모습으로 만들었다.
“어, 갑자기 웃는다. 왜 웃어?”
“네가 손으로 잡고 있잖아.”
규영이 우겸의 손에 제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왜, 웃으면 안 돼?”
“그냥. 한 번도 이렇게 웃어준 적은 없어서.”
웃는 게 이렇게 이상할 수가 있나. 오늘 꿈은 이상함 천지였다.
“우겸아, 우리 씻을까?”
“왜? 씻기 싫은데”
이제는 규영의 얼굴이 아닌 이불을 확 잡아끌었다. 이불 속에 얼굴을 숨긴 채 얕은 숨을 내뱉었다. 이불이 오르락내리락, 우겸의 호흡에 맞춰 움직였다.
“내가 예전처럼 씻겨줄게. 응?”
예전처럼? 이상하다. 언제 또 씻겨 준 거지. 그동안 꿈속에서 씻겨 준 적은 없었다.
우겸이 이불 속에서 얼굴만 빼꼼히 내놓았다. 동그랗게 눈을 뜬 채 규영을 쳐다봤다.
“싫은데.”
“씻으면 네가 좋아하는 거 해줄게.”
“내가 좋아하는 거?”
어떤 걸 해주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좋은 걸 준다고 하니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응. 씻자.”
이불을 천천히 내려 숨겨진 얼굴을 보였다. 그러자 규영이 서둘러 일어나 우겸을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앉은 상태에서 재킷, 와이셔츠 순서대로 입고 있는 옷을 빠르게 벗겼다. 손길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뽀얀 속살이 보이기 시작했다.
곱씹을수록 오늘 꿈은 정말 이상했다.
“왜?”
“이렇게 양복 입은 적은 한 번도 없어서.”
무의식이란 정말…. 이제 하다 하다 양복을 입은 게 취향일 줄이야…. 일단 현실이라고 하기에는 말이 안 되었다. 양복을 입은 채로 침대에 누워있을 일이 없었다. 현실이었으면 들어오자마자 샤워하고 침대 안으로 들어왔을 테니 홀딱 벗고 있는 게 맞았다.
바지에, 속옷까지 다 벗겨졌다. 혼자만 홀딱 벗은 상황이었다. 꿈속이어도 부끄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양 뺨에 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안아 줘.”
우겸이 규영을 향해 팔을 벌렸다. 평소 어리광과 거리가 먼 편이었으나, 오늘은 이상했다. 왜 이렇게 규영의 품에 안기고 싶은 걸까. 항상 꿈에서 이름만 부르고 별다른 말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더 떼를 쓰고 싶었다.
“응.”
아니면 현실에서 너무 구박받아서, 보상이라도 받으려고 이런 꿈을 꾸는 건가. 이 다정스러움을 더 가깝게 느끼고 싶었다.
규영이 끈적이는 눈빛으로 우겸을 바라봤다. 입고 있던 옷을 느릿하게 매만졌다. 눈을 마주한 채 옷을 벗으니 목이 너무 탔다. 입안에 고여있는 침을 삼키며, 속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속살을 향해 눈이 자꾸만 따라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동안 꿈에 나왔던 모습보다 근육이 더 선명했다. 가슴도 더 두툼한 것 같고…. 목 안이 자꾸만 타들어 가는 게 물이 마시고 싶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발가벗은 규영의 앞에 섰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많이 놀랐는지, 뒷걸음을 치며 올려다봤다.
“왜?”
“목말라서.”
가까이서 보니까, 몸이 더 좋았다. 평소 잔상으로 남아있던 모습보다 더 또렷했다. 우겸이 마주친 눈을 피하고, 손을 올려 조심스럽게 규영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꽤 단단했다. 가슴을 만지던 손이 점점 아래로, 느릿하게 내려갔다. 복근을 손으로 훑으며 메마른 입술을 침으로 축였다.
“일부러 이러는 거야?”
“응, 나랑 같이 씻게?”
“그래야지. 바지도 벗어줄까?”
“응.”
규영이 또 느릿하게 벨트 위에 손을 가져다 댔다. 천천히 벨트를 풀고 바지를 내렸다. 그 모습에 고개가 절로 바닥으로 향했다. 계속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봤던 규영의 모습 중에서 가장 야했다.
바닥에 속옷이 떨어졌다. 규영의 몸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가 되자 우겸이 슬쩍 성기를 훔쳐보았다. 몰래 화장실에서 몰래 봤을 때보다 더 큰 것 같았다. 지난번에 꿈에서 나왔던 모습과 거의 흡사한 것 같기도 하고….
“됐어?”
“응. 그런데 화장실에서는 이렇게까지 안 컸던 것 같은데.”
규영이 언제 또 화장실에서 본 거야, 하고 중얼거렸다.
“만지고 싶으면 만져봐.”
규영의 눈을 한 번 쳐다보고, 성기를 손으로 톡 건들었다. 뜨거웠다.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빤히 들여보고 있으니 성기 앞부분에서 투명한 액이 흐르기 시작했다. 우겸은 지난 꿈에서 했던 것처럼 손가락으로 귀두 부분을 천천히 문질렀다.
“…읏. 마음, 에 들어?”
규영이 잇새를 꾹 물었다. 그걸 모르는 우겸은 계속 어루만졌다.
“그건 아닌데, 그냥.”
“일단 씻자.”
규영이 목덜미를 문지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성기를 장난감처럼 계속 만지는 우겸을 저지하고, 가볍게 안아 들었다. 갑작스레 안겨진 탓에 눈이 저절로 커졌다.
“어, 어.”
“떨어지면 큰일 나. 가만히 있자, 우겸아.”
“나 목마른데….”
“응.”
가볍게 입을 맞추고, 부엌이 아닌 화장실로 걸어갔다. 잠깐이나마 규영의 입술이 붙었다가 떨어진 게 뭐라고, 타들어 갔던 목이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규영의 체온을 느끼며 가만히 있었다. 안겨있는 것이 편한 탓에 몸을 축 늘어트렸다. 의외였다. 걸어가는 내내 규영의 빨갛게 달아오른 귓불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간지러움을 잘 타는 편인지, 얼굴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움찔거렸다.
규영은 화장실로 들어가자마자 우겸을 욕조 위에 앉혔다. 아까와 다르게 밝은 조명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고개를 들고 위를 올려다봤다.
규영이 우겸의 벗은 몸을 빤히 쳐다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왜?”
“아니야, 그냥….”
규영이 고개를 떨구며 힘없이 주저앉았다. 마주 앉은 상태로 우겸의 흉터를 쓰다듬어댔다. 그러한 모습에 의아한 우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냐고 더 물어보고 싶었으나 규영의 표정이 물어봐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입을 꾹 다물고 안쓰러운 표정을 지은 체 빤히 쳐다만 봤다.
너무 노골적으로 쳐다봤는지, 규영이 시선을 피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기를 틀고 정성스럽게, 몸을 구석구석 씻겨줬다.
“나 혼자만 씻어? 나도 해줄까?”
“해줄 수 있어? 못할 것 같은데.”
우겸은 자신만만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려운 건 없었다. 눈에 힘을 주고 규영이 하던 것과 똑같이 행동했다. 규영이 저를 씻겨주었을 때는 금방 했던 것 같은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럴 만도 했다. 씻는 내내 자꾸만 흘끔거리며 쳐다보는 규영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거기에 자꾸만 서 있는 성기를 볼 때마다 얼굴에 열이 달아올랐다. 눈을 질끈 감았다. 평소보다 성기가 커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닌 것 같았다.
결국 규영의 손에 이끌려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아무렇지 않게 수건으로 몸에 물기를 꼼꼼하게 닦았다. 닦는 내내 우겸의 몸을 아주 찐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어찌나 민망한지,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 눈을 꼭 감은 채 가만히 있었다.
“이제 방으로 갈까?”
“응. 아까처럼 안아 줘.”
우겸이 규영에게 손을 뻗었다. 규영은 싫다는 내색 없이 당연하게 안아 들었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방안으로 걸어오면서 자연스럽게 우겸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우겸 또한 규영의 행동이 싫지 않았다. 품에 더 파고들며 목 언저리를 손가락으로 지분거렸다.
규영이 침대 위에 천천히 우겸을 내려놓았다. 침대 근처에 있는 화장품을 챙겨 우겸의 앞으로 왔다. 뚜껑을 열고 손에 듬뿍 올린 다음 방금 씻고 나와 뽀얀 얼굴에 찬찬히 발라주었다.
“오늘 되게 이상하다.”
“왜?”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로션을 다 발라주고, 우겸의 얼굴에 연신 입을 맞췄다. 고개를 뒤로 빼고 일어서려고 하는데 규영의 목을 잡고 놓지 않았다.
규영이 놀란 눈으로 우겸을 쳐다봤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조금 전까지 저에게 살포시 입을 맞춘 것과 똑같이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평소처럼 혀를 넣으려고 하자, 규영이 몸을 뒤로 빼고 어정쩡한 태도로 있었다.
우겸이 인상을 확 썼다. 얄팍한 힘으로 규영의 몸을 침대에 앉혔다.
“아… 잠깐만, 우겸아. 응?”
순식간에 우겸이 규영의 몸 위로 올라탔다. 입안에 자신의 혀를 넣으며 허리를 들썩거렸다. 항상 하던 것처럼 제 구멍에 규영의 성기를 넣으려고 했지만, 오늘은 이상했다. 쉽게 들어가지 않고 엇나가기만 했다.
규영이 양손으로 자꾸만 제 성기에 엉덩이를 비비는 우겸의 허리를 잡았다. 그리고 멈출 기미가 없이 입을 맞춰오는 것을 피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가 무서운 표정으로 말했다.
“잠깐만. 나 말고 또 누구랑 이런 적 있어? 설마 내가 모르는 사람이 있나?”
우겸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맨날 너랑 이렇게 하잖아. 오늘은 싫어?”
항상 하던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규영이 오늘따라 이상하기만 하다.
“어제도 하고, 또, 이렇게 맨날 했으면서 오늘은 안 할 거야? 그러면 말고.”
우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와 다른 반응에 위에서 내려오려고 자세를 고쳤다. 그러자 규영이 조금 전과 다른 표정으로 붙잡았다. 오늘따라 알 수 없는 행동을 계속해서 하는 규영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규영이 갑자기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나랑 매일 하면 좋았어?”
“응…. 처음에는 이상했는데….”
우겸이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다음 대답했다.
“그랬구나. 그래서 뭐가 제일 좋았는데?”
“음….”
다 좋았다. 규영과 맨날 꿈에서 몸을 섞을 때마다 안 좋았던 적은 없다. 그럴 만도 한 게 항상 일어나면 팬티에 정액이 넘쳐있었다.
“오늘도 하고 싶어?”
우겸은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규영이 입술을 씰룩거렸다. 우겸은 움직이는 입꼬리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아까와는 다르게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입술을 달싹이며, 거친 호흡을 서로 주고받았다. 어찌나 입안이 뜨거운지, 몸 전체가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잠깐만, 오늘은 천천히 해도 돼?”
“천천히?”
규영은 자기 위에 있던 우겸을 뒤로 밀어 트렸다. 당황스러웠다. 눈을 크게 뜨고 올려다봤다. 몸을 움직이게 고정한 다음, 무엇을 찾기라도 하는지 주위를 계속 두리번거렸다.
“뭐 찾아?”
“바로 하면 네가 아플 것 같은데.”
“아냐. 아팠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그래?”
규영이 실성한 사람처럼 웃으며 우겸의 얼굴에 연신 입을 맞추었다. 그런 규영의 모습이 싫지 않은 우겸이 가만히 그 행동을 받아줬다. 규영은 우겸의 목, 가슴, 복부를 핥으며, 옅은 자국을 내기 시작한다. 특히 흉터가 있는 곳을 더 집중적으로 물었다.
규영의 행동에 간지러운 우겸이 몸을 피하려고 하자 규영이 말했다.
“조금만 참아봐. 응?”
우겸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규영의 모습을 바라봤다. 규영이 입술이 점점 몸 아래로 내려갈수록 우겸의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제 성기를 입에 문 규영과 눈이 마주쳤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몸이 움찔거렸다. 서둘러 규영의 머리를 손으로 밀쳤으나, 규영은 태연하게 우겸의 손을 잡고 축 늘어진 우겸의 성기를 정성스럽게 빨기 시작했다.
우겸이 허리를 비틀며 작게 신음을 뱉는다.
“…아, 잠깐만.”
“좋아?”
“읏, 응….”
바싹 마른 입술을 침으로 축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성기에 아까보다 힘이 들어갔다. 갑자기 규영이 머금고 있던 성기를 입에서 뺐다. 그리고 우겸의 두 다리를 활짝 벌렸다.
놀란 우겸이 다리를 모으려고 힘을 주었으나, 규영의 힘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규영이 아까보다 더 질척이게 우겸의 구멍에 얼굴을 파묻고 혀로 탐닉하기 시작했다.
“읏….”
방 안에 침이 얽히는 소리만 들렸다. 규영이 혀끝을 우겸의 구멍에 넣었다 뺐다. 구멍이 좁은 상태라 혀를 넣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규영이 인상을 쓰고 우겸의 구멍에 손가락 하나를 밀어 넣었다.
“아, 아파…. 으….”
갑작스러운 행동에 우겸이 더듬거리며 말했지만, 규영은 그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그리고 구멍에 넣은 손가락 개수를 점점 늘렸다. 손가락을 세 개쯤 넣었을까. 우겸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규영이 고개를 들고 올려다봤다.
“왜 울어.”
“아파…. 흐윽… 내가 아프다고… 흐.”
규영이 자세를 고쳐 우겸의 몸 위로 올라탔다. 우는 우겸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며, 우겸의 얼굴에 입술을 맞추며 달래기 시작했다.
우겸의 울음이 어느 정도 줄어들자, 갑자기 우겸의 구멍에 성기를 거칠게 밀어 넣기 시작했다.
“아!”
우겸의 상체가 뒤로 젖혀지며,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거기에 몸이 많이 놀랐는지, 전신이 달달 떨렸다.
생각지도 못한 고통에 속이 뒤틀렸다. 심장도 터질 듯이 쿵쿵거렸다. 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아픈 적은 없었다. 규영에게서 벗어나려고 소리를 지르고 발버둥을 쳤다.
눈물로 젖은 눈가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몇 분을 안간힘을 썼을까.
축축한 타액의 흔적과 제 몸을 어루만지는 규영의 손에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올려다봤다. 자신 못지않게 규영 또한 고통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눈이 마주치자, 규영이 몸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 안에 서로의 가빠지는 숨결만 느껴질 뿐,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
“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 같은 고통에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우겸이 힘겹게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어제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목소리조차 갈라진 걸 보니 술을 꽤 많이 마신 듯했다.
집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꿈은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어찌나 괴로운 꿈이었는지, 생각도 하기도 싫었다.
우겸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침대에서 겨우 일어나 앉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집이 난장판이었다. 그리고….
“어, 에이…. 아니겠지.”
누워있을 때보다 구멍이 쓰라리다 못해 너무 아팠다. 그리고 뭔가 나오는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우겸의 안색이 점점 창백하게 질리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위에 손을 올렸다. 마음의 준비를 한 다음 천천히 이불을 들어 올렸다.
“허?”
허벅지 안쪽에 하얗고 빨간 것이 말라붙어 있었다. 거기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불을 잡은 손이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이불을 다 끌어내리자 침대 커버가 가관이었다. 차마 눈 뜨고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침대에서 황급히 일어나 화장실로 가려고 하자 갑자기 다리 사이로 뭔가가 주륵 흘렀다.
뚝-.
고개를 숙여 바닥을 내려다보고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
거울 속에 비추어진 몸에는 붉은 흔적이 다채롭게 있었다. 누가 보면 작정하고 남긴 줄 알 정도로 심각했다.
“하, 이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우겸이 아무런 자국도 남지 않은 목을 매만졌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꼼꼼하게 훑어보았다. 흉터 위에 집요하리만큼 빨간 자국이 촘촘하게 남겨있었다.
떨어진 고개가 올라올 줄 몰랐다. 자신의 아래에서 뚝뚝 떨어지는 하얀 액체에 이를 악물었다.
“일단 씻자.”
우겸이 마음을 다잡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평소 씻는 시간보다 더 오래, 꼼꼼하게 구석구석 몸을 씻었다. 자국들도 씻겨 내려가면 좋으련만, 씻으면 씻을수록 더 색이 진해지는 것 같았다.
몸을 다 씻고 가만히 서 있었다. 아래도 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물만 닿았는데도 쓰라림에 인상이 절로 쓰였다.
“어떡하지….”
자신의 손을 넣어서 흘러나오는 걸 다 빼내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침을 연신 꿀꺽 삼켰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손가락을 근처에 가져다 대자 제 손에 놀란 듯 몸이 휘청이기 시작했다. 겨우 벽을 붙잡고 거친 호흡을 진정시켰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