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불편한 사람 (2/13)

2. 불편한 사람 

오전 내내 기다리던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평소보다 더 서둘러 밥을 먹고 사무실에 먼저 올라왔다. 자리에 앉아 가만히 지민의 연락만 기다리고 있었다. 지민에게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에서 찬찬히 정리했다.

솔직한 심정으로 꿈에 규영이 나온다고까지 터놓고 싶었다. 상사가 매일같이 꿈에 나온다니…. 이건 다른 누가 생각해도 이상해 보이니 지민에게는 악몽을 꾼다고 둘러대야겠다.

띠링-.

“여보세요?”

-어디야? 3층 회의실로 올 수 있어?

“어. 바로 갈게.”

우겸이 사무실 밖으로 조용히 나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고 싶었지만, 마음이 급했기에 비상구 계단 쪽을 향해 뛰다시피 했다. 보폭을 좁히며 3층 회의실로 빠르게 걸어갔다. 회의실이 가까워지자, 우겸의 마음 또한 급해졌다. 지민의 얼굴을 보고 속을 터놓고 싶은 마음에 회의실에 도착하자마자 노크도 없이 문을 불쑥 열었다.

“깜짝이야, 왔어?”

“미안. 나도 모르게 급해서.”

우겸은 그간 있었던 일을 지민에게 토로했다. 말하는 내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말했다. 이야기를 다 끝내고 지민을 쳐다보았다.

잠시 고민하던 지민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냥 네가 막내라서 그런 것 같기는 한데. 아니면 너랑 친해지고 싶은 거일 수도 있잖아. 괜히 팀장이 막내한테 말을 걸까?”

“그런가? 한 팀장님은 나한테 이렇게까지 안 했던 것 같은데…. 오히려 과장님을 찾았지. 나랑은 출퇴근할 때 인사한 게 전부야.”

“그래? 일단 하루 이틀 겪은 거로는 잘 모르겠는데…. 일단 출근은 10분 전에 하자. 생각보다 젊은 꼰대네. 당분간은 지켜보는 게 낫지 않을까?”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굴리며 지민의 반응을 살핀 다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부서 바꾸는 건 어렵지?”

“그렇게까지 새로운 팀장이 싫어? 네가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꽤 불편하긴 한가 보다. 괴롭힘당하지 않는 이상 쉽게 바꾸기는 어렵지.”

“그런가, 그리고… 아니다.”

“왜, 또 뭐 있어?”

지민의 궁금한 표정을 애써 무시하고, 말을 아꼈다. 악몽을 꿨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었다.

“일단 알겠어. 고마워.”

지민의 반응처럼 규영이 자신에게 직접 해를 입힌 것 없었다. 단순히 같이 있기 싫었다. 그런 사람이 있지 않은가. 가만히 있어도 피하고 싶고, 싫은 사람이….

우겸은 지민에게 얼른 점심을 먹으러 가라고 등을 떠밀며 회의실을 같이 나왔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 한 사람이 앞에 있었다. 문 앞에 떡하니 규영이 서 있었다.

“깜짝이야.”

눈을 마주치자마자 저절로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조금 전까지 규영의 이야기를 한 탓에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규영의 눈치를 살폈다.

규영은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우겸과 지민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가뜩이나 무서운 얼굴인데 저러고 있으니 더 겁이 났다.

옆에 있는 지민도 꽤 당황해 보였다. 규영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다음, 우겸에게 이따 연락한다며 혼자만 앞질러 갔다.

우겸과 규영, 둘만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복도에 지나가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왜 하필 구석에 있는 회의실일까.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침을 꿀꺽 삼키고,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식사는 하셨어요?”

“네. 근데 이 시간에 회의실에서 인사팀 김지민 씨랑 뭐 했어요?”

“어… 잠깐 마주쳐서요.”

“회의실 안에서요?”

규영의 물음에 우겸이 우물쭈물했다. 규영이 불편하다고 지민에게 말을 했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발끝만 쳐다보며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머리를 굴렸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규영이 다소 낮은 톤으로 말에 힘을 주며 우겸에게 다시 물었다.

“회의실 안에서, 단둘이 마주쳤어요?”

“아, 그게 아니고… 어….”

고개를 들고 규영의 눈과 마주쳤다. 아까부터 찌푸린 표정은 더 험상궂게 변해있었다. 심지어 지금 이 상황이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까지 쳤다. 그리고 작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얼추 눈치로는 둘이 사귀는 걸 몰랐다는 내용 같은데, 자신과 지민을 놓고 하는 말 같았다.

“둘이 사귀어요? 뭐, 내가 사내 연애를 지양하지는 않는 편이긴 한데, 혹시나 해서요.”

역시 맞았다. 우겸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손사래를 쳤다.

“아뇨, 저희 그런 사이 정말 아니에요.”

규영이 팔짱을 끼고 느릿하게 물었다.

“그런데 왜 얼굴이 빨개졌어요? 회의실 안에서 둘이 뭐 했어요? 나 보자마자 엄청 당황하는 게 눈에 훤히 보이는데?”

회의실 안에서 뭘 했냐고 자꾸 묻는 탓에 우겸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팀장님 이야기를 했다고 어떻게 대놓고 말을 해요….

우겸의 얼굴빛이 점점 안 좋아지자 규영이 잇새를 악물었다.

“알겠어요. 더는 안 물어볼게요.”

규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왜 자꾸만 지민과 그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만나는 걸까. 이 정도면 작정하고 규영이 제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고서 이렇게까지 운이 안 좋을 수가 없었다.

  

***

  

우겸은 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만히 있어도 피곤함에 눈이 절로 감겼다. 주말까지 꿈에 시달리니 미칠 노릇이었다. 거기에 점점 꿈에서의 내용이 실제처럼 또렷하게,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차라리 며칠 전에 흐리게 떠올랐던 것이 나았다.

오늘 꿈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꿈속에서 규영과 나란히 침대에 누워있었다. 거기까지였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둘 다 옷을 홀딱 벗고 누워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제가 알몸으로 올라타 있었다.

일단 이것부터 말이 안 된다.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꿈을 꾼 건지.

규영은 흐뭇하게 웃으며 제가 자위하는 걸 보며 즐기고 있었다. 성기를 흔들면서 몸을 들썩일 때마다 규영의 몸도 같이 움직였다. 그리고 자신은 그게 뭐가 좋았던 건지, 입술을 꾹 깨물고 손을 빠르게 더 움직였다. 꿈에서 너무 흥분한 나머지 일어나서 이불을 들치었을 때 팬티에 사정한 상태였다.

“하…. 나 정말 미쳤나.”

살면서 몽정을 해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평소 성에 대한 욕구가 많지 않았다. 성욕이 없는 편이기에 따로 시간을 내서. 아니, 자위가 하고 싶은 적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무성욕자일 수도 있겠다. 그렇기에 이성에게 관심이 없었다. 지금까지 연애를 제대로 한 것도… 없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랬던 자신이었는데 갑자기 꿈에서 말도 안 되는 행위를 하고 있었다. 어찌나 자연스러웠는지 모른다. 경험이 많은 사람처럼 그 상황을 엄청나게 즐겼다. 소리도 어찌나 질렀는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목이 쩍 하니 갈라져 있었다.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정말 단단히 미쳤다. 이 정도면 확실히 미친 게 분명했다. 상사를 대상으로 몽정을 할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아씨….”

우겸이 인상을 쓰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발걸음을 질질 끌고 화장실로 들어가서 잠옷과 질척한 팬티를 벗고 세면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 나이를 먹고, 여자도 아닌 남자인 규영을 상대로 몽정이라니.

세면대에 물을 틀고 팬티를 대충 손으로 세탁한 다음 손으로 물기를 꾹 짰다. 옆에 있는 샤워기 물을 미지근하게 틀었다. 찬물을 틀고 정신 차려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아침부터 추위에 떨고 싶지는 않았다.

샤워를 마친 우겸이 새로운 잠옷으로 갈아입고 냉장고를 뒤적였다. 아침부터 의도치 않게 체력을 소모한 탓에 고기를 먹어줘야 할 것 같았다. 냉동고에 있는 소고기를 꺼낸 다음, 프라이팬에 살짝 구웠다. 프라이팬과 싱크대 안에 있는 소금 통을 통째로 들고 식탁 위에 놓았다.

입맛이 없어 고기를 질겅질겅 씹고 있다. 먹는 중에도 꿈이 자꾸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남자를 좋아했었나. 하필 좋아해도 상대가 규영이라는 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그보다는 지민의 팀장이 더 나을 것 같았다. 깐깐하다고 소문은 났지만, 규영처럼 사나운 생김새는 아니었다.

당장 규영을 어떻게 볼지 걱정스러움에 얼굴을 손으로 감싼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사무실에서 얼굴을 볼 때마다 꿈이 생각날 것이고…. 지금처럼 얼굴이 뜨거워질 것 같았다.

“하…. 내가 미쳤지”

혼자 있는 집에서도 이렇게 크게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내일부터 규영을 최대한 피해 다녀야겠다. 눈도 마주치지 말아야지. 같이 있는 상황을 멀리해야 꿈에 더는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주말 내내 꿈속에서 규영에게 시달리니 쉬는 것 같지 않았다. 뭐랄까. 종일 같이 지내는 기분이었다. 회사에서는 사무실에 같이 있고, 또 퇴근하고 집에 와서는 꿈에서 만나고….

우겸이 식탁에 턱을 괴었다. 오늘은 자는 위치를 바꾸어서 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급한 대로 침대 주변에 소금이라도 뿌리고 자야겠다. 규영의 모습을 한 귀신일 수도 있지 않은가.

차라리 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가 나았던 것 같았다. 규영을 상대로 몽정을 계속해서 한다면….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내일 퇴근길에 마트에 들려 팥이나 사 와야겠다.”

목소리에 힘이 다 빠진 상태로, 식탁에서 일어났다.

  

***

  

세상에는 정말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다. 일단 어제 소금을 뿌리고 잔 건 효과가 없었다. 예전에도 이 짓을 안 해본 건 아니었지만….

오늘 꿈도 어제와 같았다. 일어나자마자 화장실에 가서 팬티를 빨았다.

아침부터 험난했다. 험난한 월요일, 오늘은 규영의 첫 공식 출근이기도 했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일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출근한 지 한 시간도 안 되었을 때 규영이 갑자기 사무실 구조를 바꾸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첫 출근날부터 뭘 바꾸려고 하는 걸 보니…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고우겸 씨, 의견은 어때요?”

지금까지 규영이 무슨 말을 하면 고개를 숙이고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최대한 규영과 맞닥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뭐 하는가. 저렇게 이름까지 부르고 수시로 말을 걸어댔다.

보통은 막내한테는 의견을 잘 묻지 않는데, 콕 짚어 물어오는 걸 보니 지민의 말대로 친해지고 싶은 것보다 마음에 안 든 게 더 맞아 보였다. 옆자리에 앉아있는 희영을 쳐다보며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희영은 애처롭게 쳐다보는 눈길에 대답 대신 서 과장 쪽으로 눈짓했다.

“어…. 저는 잘….”

서 과장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심하게 떨렸다. 희영과 반대로 서 과장은 저를 도와줄 생각이 있어 보였다. 손을 들고 우겸 대신 대답했다.

“혹시 원하시는 구조가 있으신가요? 책상이나 파티션 위치는 다른 팀이랑 비슷한 구조여서요.”

“딱히 원하는 구조는 없고, 책상 하나만 내 옆에 더 두었으면 좋겠어요.”

“아….”

서 과장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우겸을 쳐다보았다.

책상 하나를 굳이 더 두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책상 하나를 추가 주문하면 될 일인데, 왜 사무실 사람들의 의견을 물어보는 걸까.

“그리고 일단 제가 업무에 적응할 동안 한 명이 붙어서 일을 같이했으면 좋겠는데.”

“제가 보조할까요?”

서 과장이 재차 손을 들고 말했다. 그러나 규영은 고개를 저으며 파티션 너머에 있는 우겸을 쳐다봤다.

“제가 적응할 때까지 사무실에 계셔서 밀린 일을 도와주셨으면 해요. 지난주에 업무 분장을 쭉 훑어보니 고우겸 씨가 제일 적당한 것 같은데, 본인 의견은 어때요?”

“….”

우겸은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지민의 말대로 친해지고 싶은 게 정말 맞을까…. 아니면… 제가 가장 어려서 다루기 쉬운 사람처럼 만만해 보이는 건가? 아니면… 그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한 걸 다 듣고 일부러 괴롭히려고 그러나?

우겸의 표정이 꽤 다채롭게 변해간다.

왜 자신을 옆에 두려고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일하는 내내 옆에 두고 감시하려고 하는 거라면… 정말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해야겠다.

하, 이 정도면 꿈이 예지몽 수준이었다. 규영이 꿈에 나올 때마다 점점 규영과 의도치 않게 가까워졌다.

“대답이 없는걸 보면 싫은가? 본데, 싫어요?”

규영이 답을 재촉했다. 하는 수없이 우겸이 대답했다.

“아, 아니요. 저야 일 배우고 좋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규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뜩이나 큰 팔을 휘저으며 너른 보폭으로 걸으며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숨통이 트인 우겸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사무실 사람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제 자리로 모였다.

가장 가까이 있는 희영이 우겸에게 가장 먼저 물었다.

“괜찮겠어?”

우겸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요…. 그런데 팀장님께 제가 뭘 잘못했을까요?”

“아냐, 아냐. 내가 보기에는… 우겸 씨가 막내이기도 하고….”

우겸의 물음에 서 과장이 서둘러 대답했다.

“앞으로 눈치 보여서 화장실도 잘 못 갈 것 같은데….”

지난주 연차를 썼던 이 주임이 어깨를 툭 쳤다.

“에이, 괜찮아. 한 며칠만 옆에 두고 다시 자리 옮기라고 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말고, 우겸 씨.”

차라리 지난주에 쉬고 올 걸 그랬다. 그럼 규영을 지난주부터 마주치지 않았을 거고, 꿈에도 안 나왔을 수도 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불과 며칠 만에 일상이 뒤바뀌었다.

우겸의 자리는 사무실 입구 쪽이었다. 쉽게 말해서 문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 사무실에는 출입문이 두 개가 있다. 한 개는 인사팀과 재무팀으로 갈 수 있는 문이었다. 인사팀과 재무팀은 자신의 팀과 달리 벽이 구분되어 있지 않고, 파티션으로만 팀이 구분되어 있다.

영업팀은 외근이 많아 수시로 사무실을 비워야 하고, 밖으로 나갈 일이 잦아서 복도로 나갈 수 있는 문이 따로 있었다. 이제 규영의 옆으로 가면 다른 팀이나 복도로 나갈 수 있는 문이 멀어지게 된다. 완전히 고립되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규영의 자리와 다른 팀원들에 자리 사이의 간격이 꽤 있었다. 특히 파티션 또한 다른 팀원들에 비해 높았다. 꼼짝없이 그의 옆에 붙어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정말 큰일이었다.

우겸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해봤자 별것 없었다. 필기도구부터… 업무 파일이며…. 짐을 정리하면서 마음속으로 한 가지 결심했다. 오늘 집에 가서 당장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보는 게 좋겠다고. 얼마 없는 짐을 최대한 느릿하게 쌌다. 그 정도로 규영의 옆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

  

규영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혼자 들어오지 않고 책상과 함께 들어왔다. 거기에 파티션도 같이 딸려왔다. 참 행동이 빠른 편이었다. 출근 전부터 저를 옆에 둘 생각을 했는지, 인부 여럿이 짐을 나르고 있었다. 직접 나서서 책상을 옮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우겸은 가만히 규영을 바라보았다.

당황스럽다. 이 정도면 예상이 맞았다. 설마 서울에서 누구를 괴롭히다가 징계 받고 여기에 온 건가? 갑자기 눈이 번뜩거렸다. 그럴 수도 있겠다. 원래 사람은 쉽게 성격이 변하지 않는다.

이번에 희생양이 자신이라니….

우겸이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지민에게 이따가 또 메시지를 보내봐야겠다. 사무실이 대강 정리가 되자 규영이 우겸을 불렀다.

“한 시간 내로 짐 다 옮길 수 있죠?”

“네.”

우겸이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다들 각자 일하시고, 이따가 오후에 미팅이 있어서요. 우겸 씨랑 제가 갔다가 바로 거기서 퇴근하도록 할게요.”

“네.”

사무실 사람들이 작게 대답했다. 평소와 같이 각자 일에 집중했다. 여느 때처럼 사무실 안에는 키보드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

  

우겸은 규영의 눈치를 보며 서둘러 짐을 정리했다. 입사 이후로 퇴사 욕구가 든 적은 처음이었다. 지금 당장 그만두고 싶어졌다. 이렇게 직장 상사 바로 옆에서 딱 붙어서 일하는 직원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이건 괴롭힘이 확실했다.

솔직히 10분이면 정리가 끝나는 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속도가 나지 않았다. 거기에 가뜩이나 좁은 어깨가 축 늘어지기까지 했다. 누가 봐도 기운이 없어 보일 정도로, 힘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힘들면 도와줄까요?”

“아뇨, 다 했어요. 얼른 할게요.”

규영이 고개를 끄덕이고, 책상 위에 있는 결재 서류들을 확인했다. 대부분 전산으로 서류를 결재하나, 가끔 서면으로 할 때가 있었다. 옆을 흘깃하고 쳐다보니 쌓여있던 결재 서류를 거의 다 확인한 것 같았다. 일하는 데 굳이 옆에 누가 필요할까. 누가 봐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짐을 정리하다 말고 가만히 상자 안에 짐을 쳐다봤다. 이대로 짐을 싸서 조만간 나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얼핏 스쳤다. 굳이 이걸 다 풀 필요가 없었다. 빠르면 이번 달 안에도 그만둘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책상 위에 빼놓은 짐을 제외하고, 그대로 서랍 아래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한결 무거웠던 마음이 덜어진 기분이었다.

물티슈를 꺼내서 책상을 닦자, 옆에 있던 규영이 서류를 건네었다.

“짐 다 정리했으면, 우겸 씨가 작성한 결재 서류 다시 확인해서 줄래요?”

“네?”

“오타가 있는 것 같아서.”

“아, 죄송합니다.”

우겸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자리에 빠르게 앉았다. 분명 지난번에 서류를 확인했을 때는 오타가 없었다. 다시 한번 꼼꼼하게 읽었다. 인사팀 팀장님과 비슷한 계열인 듯했다. 맞춤법 검사기가 따로 없었다. 눈을 크게 뜨고 보니 딱 하나 잘못된 것을 발견했다. 서류에 ‘.’으로 작성해야 할 것이 ‘,’으로 되어있었다.

하…. 곧 지민처럼 안경을 사야 하는 운명에 놓인 건가…. 물론 제 실수라서 잘못한 건 맞긴 했지만… 규영의 옆에서 일하다가는 가뜩이나 좁은 어깨가 사라질 것 같았다.

우겸은 컴퓨터를 서둘러 켰다. 오늘따라 부팅이 느렸다. 책상을 손가락으로 통통 튕겼다. 화면이 켜지는 동안 다시 한번 결재 서류를 훑었다. 이걸 제외하고는 별다른 특이점은 없는 듯했다.

컴퓨터를 켠 우겸이 자동 로그인이 된 사내 메신저에 들어갔다. 지민에게 메시지를 보내려고 하는 순간, 옆에 있는 규영이 신경 쓰였다. 고개만 돌리면 제 모니터가 보일 정도로 거리가 가까웠다.

작게 헛기침을 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자리를 힐끔거리며, 모니터를 최대한 구석으로 틀었다. 마음 같아서는 규영의 자리에 앉아서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일단 이걸로 만족해야겠다는 생각에 조용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모니터를 틀어서 화면이 거의 안 보이겠지만, 걱정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 지민과의 연락은 사내 메신저 대신 문자로 해야겠다. 급한 대로 지민에게 팀장님 옆자리로 자리를 옮겼다고 메시지를 보내고, 메신저를 로그아웃했다.

바탕화면 내 결재 올렸던 파일을 열었다. 오타가 있었던 부분을 고친 다음 다시 꼼꼼하게 읽었다. 눈을 크게 뜨고 몇 번을 봤을까. 더 이상 수정할 게 없어 보였다. 인쇄 버튼을 누르고 프린터기 앞으로 걸어갔다. 출력물이 나왔다. 제대로 출력이 되었는지 다시 한번 서류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지민이 안경을 맞춘 이유가 다 있었다. 뻑뻑한 눈을 연신 깜빡거렸다.

자리로 돌아와 결재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옆에서 규영의 눈치를 슬금슬금 봤다. 분명 옆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알 텐데, 묵묵히 자기 일에 집중했다. 우겸은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그를 조용히 불렀다.

“저, 팀장님.”

“네.”

쳐다도 보지 않고 대답만 했다. 우겸은 규영의 눈치를 다시 본 다음 말했다.

“결재 서류 수정했습니다.”

“네.”

역시나 규영은 고개를 들지 않고 현재 보고 있는 서류에만 집중했다. 규영의 심기에 거슬리지 않게 책상 위에 출력물을 살짝 올려두었다. 옆에 있는 저를 신경 쓰지 않고 자기 할 일만 묵묵히 했다. 딱히 급한 서류가 아니었구나. 우겸은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자리로 돌아갔다.

오늘 출근하자마자 한 것이라고 짐을 챙긴 게 다인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평소 별것도 아닌 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탓에 두통이 잦았다. 방금 일로 꽤 긴장한 모양이었다. 서랍 안에 있는 가방을 꺼냈다. 손을 넣어 평소 먹던 두통약을 찾았다.

지난번에 다 먹었었나.

두통약인 줄 알고 꺼내면 소화제가 나왔다. 약을 먹지 않고 버티자니 이따가 머리가 더 아플 것 같았다.

편의점에 들를 생각으로 가방 안에서 검은색 가죽 지갑을 챙겼다. 최대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금슬금 규영을 지나치자, 규영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어디 가요?”

“네? 아, 머리가 아픈 것 같아서.”

“약 사러 가게요?”

“네. 얼른 다녀와도 될까요?”

규영이 멈추라는 손짓을 하며 서랍을 열었다. 그러더니 각종 진통제를 꺼내어 보여준다. 평소 자신이 자주 먹는 진통제와 소화제였다. 의아한 눈초리로 서랍 안쪽을 훑어봤다. 서랍 안에 각종 약이 가득 차 있었다.

우겸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긴, 저렇게 예민하게 굴면 안 아픈 곳이 없는 게 더 이상했다. 그리고 뭐, 약은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었다.

우겸이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자 규영이 진통제를 손에 손수 쥐여주었다.

“이거면 되죠?”

“네, 감사합니다. 제가 이따가 사다 드릴게요.”

또 의도치 않게 맞닿은 손에 움찔거렸다.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한 다음,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괜찮아요. 잠깐 밖에 걷고 올래요?”

“아….”

회사 내의 편의점에 들렀다가 잠깐 밖에 나가서 바람을 쐬고 올 생각을 하긴 했었다. 평소에 신기하게도 머리가 아플 때 밖에 나가 조금이라도 걸으면 통증이 나아졌다. 규영도 자신과 비슷한 면이 있는 듯했다.

그러나 혼자 걷고 오라는 건지, 아니면 같이 걷고 오자는 건지… 주어를 빼고 말하는 탓에 혼란스러웠다. 설마, 같이 나가자는 건 아니겠지. 방금까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신경을 쓰지 않았던 규영이었다.

“싫어요?”

또 무섭게 물었다.

“아뇨, 그럼 다녀올까요?”

우겸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규영이 자리에서 당연하다는 듯 일어났다.

“어, 어.”

당황한 우겸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규영을 올려다보았다.

“왜요?”

“저랑 같이 나가시게요?”

규영은 당연한 걸 왜 묻냐는 표정으로 우겸을 쳐다봤다. 얼른 약을 먹고 나오라고 말하고 파티션 너머로 홀로 나갔다. 자리에 몇 초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순간 무슨 일이 생겼는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자리로 돌아가 서둘러 약을 꿀컥 삼킨 다음, 규영의 뒤를 바짝 쫓아갔다.

사무실 문밖에 규영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반갑기는커녕, 오히려 불안했다. 복도를 걷는 내내 손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여기 옥상에 공원 있죠?”

“네….”

옥상에 공원이 있는 것도 알고 있었으면서…. 어제 아무것도 모르는 척 회사 안내를 왜 해달라고 했었던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규영의 키는 컸다. 자신보다 한 뼘, 아니 그것보다 조금 더 컸다. 그렇기에 걷는 보폭이 남달랐다. 규영이 한 발짝 걸으면 저는 두 걸음을 걸어야 겨우 걷는 속도가 맞을 정도였다. 이제는 키가 큰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머리도 식힐 겸 잠깐만 다녀오죠.”

우겸은 종종걸음으로 규영을 앞질러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다. 위로 올라가는 버튼을 누른 다음 엘리베이터가 빨리 오길 기도했다. 규영과 같이 있는 이 순간이 이렇게 숨이 턱턱 막힐 줄 알았더라면, 그냥 약을 먹지 않고 참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늦은 후회를 하며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그러자 규영이 제 어깨에 손을 살짝 올렸다. 화들짝 놀라, 또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러자 그가 진정이라도 하라는 듯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차라리 병원 갈래요?”

“…아뇨, 그 정도는 아니에요. 약 먹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그럼 다행인데.”

누구 때문에 머리가 아픈 건데, 저렇게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 걸까. 규영의 표정 하나, 행동 하나, 모든 것이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마, 꿈에 나온 것 때문에 더 그런 듯했다.

어색한 공기 덕에 머리가 더 지끈거리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규영이 먼저 타는 것을 보고 뒤따라 올라탔다. 항상 엘리베이터 안에 사람이 붐볐는데, 오늘은 유독 사람이 없었다. 거기에 무슨 일인지 층마다 멈추지도 않았다. 결국 옥상으로 올라가는 내내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우겸은 손을 만지작거리며, 층수가 올라가는 걸 가만히 쳐다만 봤다.

따지고 보면 오늘 규영의 출근 첫날이었다. 보통 새로운 팀장이 회사에 오면 앞으로의 회사 생활이 기대될 만도 한데, 아무것도 눈에 그려지지 않았다. 어두운 화면만 자꾸 스쳐 지나갔다.

그 정적을 규영이 먼저 깼다.

“이따가 점심에 맛있는 거 먹을까요?”

“회사 식당에서 안 드시게요?”

우겸 딴에 돌려 말한 것이다. 사무실 사람들과 다 같이 회사 식당에서 식사하고 싶었다. 규영과 단둘이 식사하면 체할 게 당연했다. 지금도 같이 밥을 먹지도 않았는데, 마주 보고 밥을 먹을 생각을 하니 멀쩡하던 속이 울렁거렸다. 이 정도면 규영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피하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신기하게도 규영은 처음부터 이상했다. 첫 만남도 범상치 않았고, 지금까지 자꾸만 같이 있는 게 불편했다. 과거에 척이라도 진 건가? 몸이 이렇게 반응하는 것이 정말 신기했다.

평소라면 무난하고, 무탈했던 성격이었는데도 규영이 주위에만 있으면 예민하게 변했다. 바깥공기를 쐬면 머리 아픈 게 괜찮아질 만도 한데, 지금 사무실보다 머리가 콕콕 쑤시는 걸 보면 말은 다 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규영이 앞서 나갔다. 뒤를 살짝 돌아본 다음 우겸에게 어서 내리라고 손짓했다.

“우겸 씨 뭐 좋아해요? 초밥이라도 먹을까요?”

우겸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초밥이었다. 너무 신나게 행동했다. 물론 자신이 초밥을 좋아하는 걸 알아서 저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거다. 딱 보니 가장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 고른 것으로 보였다.

“처음 웃네요.”

“아….”

그 뒤로 또 정적이 흘렀다. 옥상에 도착하자마자 우겸은 서성거리며 규영의 눈치를 봤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얼른 의자에 앉으라고 눈짓을 했다.

정말 앉아도 될지 몰라 멀뚱히 규영만 바라보았다. 그러자 거리를 좁혀 걸어왔다. 또, 아무렇지 않게 제 손을 잡고 의자에 앉혔다. 짧은 순간이었다. 스스럼없이 하는 스킨십에 멍하니 규영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규영이 하얀 치아가 드러날 정도로 씩 웃었다.

“나는 옥상 한 번만 둘러보고 내려갈게요. 편하게 쉬다가 내려와요. 팀원들한테는 모른 척할게요.”

그 해맑은 미소에 우겸의 얼굴에 열꽃이 피었다. 하는 수없이 고개를 숙였다. 규영의 발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다시금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봤다. 같이 왜 옥상에 올라왔는지 모를 정도로, 규영은 난관만 뚫어져라 쳐다만 봤다. 그리고 뒷모습이 순간 사라졌다. 아무래도 저쪽에도 문이 있는 걸 아는 눈치였다.

규영이 사라지자 방금까지 참았던 숨을 몰아쉬기라도 하는 듯, 크게 숨을 내뱉었다. 열이 오르는 얼굴을 손으로 매만졌다. 지민의 말대로 정말 친해지고 싶은 건가. 잠시나마 웃는 모습에 넋이 나간 자신도 이상했다. 어찌나 해맑은지, 순간 아차, 했으면 덩달아 따라 웃을 뻔했다.

우겸은 의자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따라 하늘이 무척이나 맑았다. 어찌나 해가 쨍쨍거리는지, 손으로 얼굴을 긁적거렸다. 규영의 웃는 모습이 아니라 날이 더워서 얼굴에 뜨거웠던 것 같았다.

뭐, 초밥도 사준다고 하고…. 따지고 보면 먹을 걸 사주는 사람치고는 나쁜 사람은 없었다. 어쩌면, 꿈 때문에 예민해서 규영을 안 좋게 생각한 것 같았다. 만약 꿈에 규영이 나오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사소한 것 하나하나 과민반응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만히 의자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찌나 푸르디푸르고, 쨍한지 눈부심에 눈이 저절로 감길 정도였다. 하늘처럼 꿈도 맑기만 하면 좋을 텐데, 또 규영과 자는 꿈을 꾸면 그것도 그거 나름대로 문제였다.

나이 스물여덟에 직장 상사를 상대로 몽정을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성도 아닌 동성을 상대로 몽정이라니…. 아까도 규영이 아무 뜻 없이 웃기만 했는데도 순간 반하기라도 한 듯 얼굴이 붉어지는 게 느껴졌다. 꿈이 다 문제였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우겸의 얼굴에 점점 먹구름이 드리웠다. 그렇게 몇 분을 의자에 누워있었을까. 핸드폰을 확인하니, 생각보다 시간이 꽤 흐른 상태였다. 수심에 잠긴 표정을 짓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겸의 예상과 다르게 점심시간에 규영과 단둘이 초밥을 먹지 않았다. 언제 주문했지? 분명 옆에서 일만 했었는데, 점심시간 전에 사무실로 팀원 수에 맞춰 초밥이 배달 왔다. 돈 많은 팀장이라 이럴 때는 좋았다. 규영이 아까와 같이 미소를 머금으며, 팀원들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뇌물이에요.”

이렇게 보면 참 좋은 사람 같았다. 초밥을 사줘서 좋게 생각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사무실 사람들이 기분 좋게 웃으며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자리에 앉아 다들 먹으려고 하자, 규영은 급한 일을 처리할 것이 있으니 먼저 식사하라고 했다.

“그럼 다들 맛있게 드시고, 이따 봐요. 우겸 씨.”

융통성이 아예 없는 편은 아니었다. 우겸은 규영의 옆자리가 아닌, 원래 자리로 돌아가서 편하게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초밥 도시락 뚜껑을 열어보니 우겸이 좋아하는 참치 초밥이었다. 부위도 고급스러운 뱃살에 맛있는 부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먹기도 전에 침이 고였다. 사무실 사람들도 도시락을 확인하고 난리였다.

옆에 희영이 제일 신나 보였다.

“와, 정말 팀장님이 돈이 많으니까 우리가 이런 것도 점심시간에 먹어보네요.”

희영의 말에 서 과장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초밥을 크게 베어 물고 걱정 어린 목소리로 우겸을 향해 물었다.

“그러게. 그래도 우겸 씨가 좋아하는 초밥이라 다행이다. 팀장님이 우겸 씨가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알고. 그래서 괜찮아? 지낼만해?”

“네. 초밥도 사주시고…. 뭐 살짝 눈치가 보이기는 하는데 아직 하루도 같이 안 있었으니까… 일단 지내봐야죠, 뭐.”

아까는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했던 메뉴였는데, 희영의 말을 듣고 나니 입안에 있는 회와 밥알이 겉돌기 시작했다.

“그니까, 콕 집어 우겸 씨를 옆에 두고 싶다는 말에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이 주임도 서 과장과 같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우겸은 자신을 걱정해 주는 팀원들 모습에 살포시 웃는다. 이렇게 좋은 팀원들을 만날지 누가 알았을까. 문득 이곳에 오기 전이 떠올랐다.

여기까지 내려온 이유는 별것 없었다. 우연히 대학교를 졸업하고 이곳에 여행을 왔을 때 꿈을 꾸지 않았다. 그게 다였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우리가 말했다.

‘그래서 거기에서 살겠다고?’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잠을 편하게 자는 게 중요했다. 우리의 반응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어렸을 적 부모님을 여의고 누나인 우리와 단둘이 지냈다.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탓에 누나가 저를 키웠다고 봐도 무방했다.

‘몇 개월 지내보고, 괜찮아지면 다시 올라올게. 응?’

처음에 꿈을 꾸기 시작했을 때 우리의 반응은 꽤 심드렁했다. 그러나 우겸이 점점 피폐하게 변하자 그때 비로소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군대에 갔을 때 괜찮아졌던 꿈이 다시금 시작되자 저 못지않게 걱정해 주었다.

우리가 대답 대신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느리게 내뱉었다. 우겸의 말에 쉽게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듯했다.

‘응? 누나…’

‘일단 알겠어, 일단 거기서 지내보고 혼자 있기 그러면 누나한테 말해. 누나도 내려가든가 할게.’

우리의 허락에 간단한 짐만 싸서 급하게 이곳에 내려오게 되었다. 월세방을 구하고, 집 안에서만 일주일을 보냈던 것 같았다. 하루, 이틀… 일주일을 지새울 동안 단 한 번도 꿈을 꾸지 않았다.

그때 결심했다. 서울에 돌아가면 꿈을 다시 꿀 수도 있으니, 여기에서 눌러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그 길로 나중 일을 생각해서 서울에도 지사가 있는 곳인 이곳에 지원하게 되었고, 의도치 않게 일이 술술 풀리었다.

공채에 덜컥 붙었다. 그렇게 앞으로 행복한 일만 생길 줄 알았는데, 정말 그럴 줄만은 알았는데… 다시 이 악몽이 시작되리라 생각도 못 했다.

  

***

  

현재 규영과 어색하게 차 안에 앉아있다. 마음이 편치 못한 듯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우겸은 당연히 운전자석에 앉아서 운전하려고 했다. 그러나 규영이 이를 강하게 말렸다. 어찌나 심하게 반대하는지, 결국 이 상태가 되었다. 어찌나 불편한지 모르겠다.

아까까지만 해도 규영이 참 좋다고 생각했는데, 또 이렇게 좌불안석이 되었다. 목욕탕에서 냉탕과 온탕을 번갈아 들어갔다 나오는 느낌이다. 규영은 정말…. 아무래도 자신이 어쩔 줄 몰라하는 걸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옆에서 힐끔거리며 얼굴을 보았을 때, 꽤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입사 서류를 보니까 원래 서울에서 살았던데, 왜 여기까지 온 거예요?”

“음….”

사무실 사람들 모두 하나같이 물어봤던 질문이었다. 그럴 때마다 이곳에 친척이 있다고 둘러대었다. 그게 지금까지 통했는데, 과연 규영에게도 먹힐까.

하긴, 규영에게 꿈 때문에 여기까지 내려왔다고 말하는 게 더 이상했다. 처음에 우리에게 말했을 때도, 아무런 말 없이 제 손만 꼭 붙잡고 쳐다만 보았다. 평소처럼 근처에 친척이 있다고 말하려고 하는 순간, 옆에서 규영이 자신을 슬쩍 보는 게 느껴졌다.

“말하기 곤란해요? 만나고 있는 사람 때문에 여기까지 오고 그랬나?”

“아뇨. 그냥… 딱히 이유는 없어요.”

“그렇구나. 그럼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은 있어요?”

“아뇨. 딱히….”

시시콜콜 남의 연애사까지 물어보는 걸 보니 별다른 할 말이 없어 보였다. 이 정도면 팀원들이 저에게 물어봤던 거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이걸로 괴롭힌다고 하기에는… 그냥 이 상황이 어색해서 아무 생각 없이 묻는 말일 것이다.

“그럼 고우겸 씨는 저한테 뭐 궁금한 건 없어요?”

“음….”

뭐를 물어봐야 잘 물어봤다고 소문이 날까. 규영의 심기가 거슬리지 않는 질문이 뭐가 있을지 되뇌었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물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고민을 끝내고 물어보려고 하자, 규영이 먼저 말했다.

“내가 왜 서울에 있다가 여기 왔는지 안 궁금해요?”

꽤 다정한 목소리였다.

“아, 여쭤봐도 돼요?”

규영이 우겸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까와 같은 미소였으나, 뭔가 차이가 있었다.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미묘하게…. 고개가 절로 갸우뚱거렸다.

“찾을 사람이 있어서 왔어요.”

“네? 사람이요?”

너무 큰 목소리로 반문한 탓에 차 안에 정적이 흘렀다.

“…네.”

규영이 얕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사람을 찾으러 여기까지 찾아왔다니, 생긴 거 답지 않은 대답이었다. 정말 의외였다. 뭐 워낙 부자이니 돈 떼인 것은 아닐 테고….

뭐 짝사랑이라도 하는 건가?

“왜 빤히 봐요. 사람 찾으러 여기까지 왔다니까 안 믿겨요?”

“아뇨, 그건 아니고….”

우겸이 말꼬리를 흐렸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우겸 씨.”

“네,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규영답지 않게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운전에 집중했다.

사람을 찾으러 여기까지 왔다는 규영의 말이 거짓 같지는 않았다. 행동을 보니 짝사랑보다는 헤어진 연인 같았다. 옛 연인을 떠올리듯 잠깐이나마 규영의 표정이 꽤 씁쓸해 보였다. 상대방이 궁금해질 정도로 무척이나 애달파 보였다. 저 얼굴에, 저 재력에 뭐가 아쉬워서 그러는 걸까. 의외의 모습에 없던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연애해 본 적이 없었기에, 저런 감정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다. 속히 사랑 앞에서 장사 없다는 말이 규영에게 딱 어울리는 말 같았다.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규영이 무척 좋아하고, 사랑했다는 건 사랑을 모르는 저도 느낄 수 있었다.

  

***

  

미팅하는 내내 규영의 모습은 정말 이 분야의 전문가다웠다. 한 팀장이 몇 개월 동안 재계약 건으로 공을 들였던 업체였다. 규영이 만난 지 한 시간도 채 안 되어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 생각지도 못한 수확에 우겸은 규영을 옆에서 물끄러미 쳐다만 보았다.

“그럼 제안서는 다음에 올 때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낙하산은 오해였다. 보기보다 일을 잘했다. 끝마무리가 깔끔했다. 한 팀장과 같이 미팅에 나오면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는 탓에 옆에서 하품할 때가 많았다. 물론 몰래 했었다.

규영은 한 팀장과 달랐다. 필요한 말을 적재적소에 했다. 아직 계약하지 않은 업체였어도 충분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오늘 미팅에 같이 참석하길 잘했다. 의외인 모습이 많이 보였다. 그 덕에 불편한 마음이 점점 사그라들었다. 사람을 괴롭힌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내일 회사에 가서 미처 풀지 못한 짐을 다 풀어야겠다.

“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났는데, 집에 데려다줄게요. 주소가 어떻게 돼요?”

“저는 괜찮아요. 회사에 내려주시면 걸어가면 돼요.”

“집 주소가 어떻게 돼요? 혹시 말해주기 곤란해요?”

아까처럼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뭔가 이질감이 섞여 들었다. 조금 전까지 미팅해서 예민해진 상태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서둘러 대답했다.

“아뇨, 회사 앞의 아파트여서요.”

“네. 퇴근 시간보다 일찍 도착할 것 같은데, 팀원들이 보면 말 나올 수도 있잖아요. 고우겸 씨 집으로 바로 갈게요.”

규영이 어르고 달래는 목소리로 말하자 우겸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아, 네. 그 생각은 못 했는데, 감사합니다. 회사 앞에 있는 ○○아파트예요.”

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로 차 안이 조용하다 못해 고요했다. 요즘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에 눈에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졸지 않으려고 애써 눈을 크게 떴다. 손가락 끝을 꾹 누르며 잠을 쫓았다. 운전자 옆에서 잤다가 나중에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랐다.

“….”

소리가 나지 않게 작게 하품했다. 어쩜 이리 계속 졸음이 몰려올까. 규영의 눈치를 보며 티 나지 않게 허벅지를 살짝씩 꼬집었다.

규영이 앞을 바라보며 우겸에게 물었다.

“졸리면 잘래요?”

어, 티 안 나게 졸았는데….

“아뇨, 아뇨. 제가 어제 잠을 설쳐서요.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어차피 차로 한 시간은 더 가야 하니까, 눈 좀 붙여요. 집 근처 도착하면 깨울게요.”

괜찮다고 말한 우겸이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규영이 어깨를 흔들며 깨우는 탓에 화들짝 놀라면서 눈을 떴다.

세상에나, 정말 잔 거야? 직장 상사를 옆에 두고 잠이 들 줄이야…. 미쳤다.

우겸은 우물쭈물하며 규영의 눈치를 봤다. 다행히 인상을 찌푸리거나 화가 나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안색이 더 좋아졌다고 느껴지는 건 제 착각일까. 얼굴에 생기가 돋고 입술도 아까보다 촉촉해 보였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너무 달게 자서 조금 늦게 깨웠어요.”

“죄송합니다.”

어? 근데 죄송한 건 둘째 치고 잠시 잔 사이에 꿈을 꾸지 않았다. 아, 설마 지금이 꿈인가? 우겸은 자신의 볼을 손으로 꼬집었다. 놀란 표정으로 앞섬을 살펴봤지만, 튀어나오지도 않았고 젖지도 않았다. 매우 멀쩡했다.

“왜요. 무슨 꿈이라도 꾸었어요?”

규영의 얼굴에 궁금증이 묻어 나왔다.

“아뇨, 아뇨.”

“그럼 얼른 들어가요.”

“네. 그럼 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겸은 차에서 내린 다음 떠나는 규영의 차를 뒤에서 지켜보았다. 회사 앞 아파트라고 했는데, 차에서 내리고 보니 딱 단지 앞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내려줬는지….

우겸은 집에 들어와서 평소와 같이 옷을 허물 벗듯 벗으며 화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는 데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있다니…. 난생처음이었다. 아까 차 안에서 잠깐 졸았던 게 너무 달고, 달았던 것 같다. 오늘 저녁에도 그렇게만 잤으면 소원이 없겠다.

“내가 피곤하긴 했나 보네.”

샤워를 마치고 입었던 옷은 대충 발로 치웠다. 소파에 앉아 몸을 늘어트리고 누웠다. 기분만 좋지, 몸이 피곤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직 월요일인데 몸이 축축 처지는 것이, 마치 금요일 저녁 같았다.

어찌나 피곤하고 피곤한지… 저녁은 하는 수없이 배달 음식으로 때울 심산이었다. 발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이며 배달 애플리케이션을 대충 훑었다. 점심에 규영 덕에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 딱히 먹고 싶은 것도 없었다. 만만한 김밥이랑 우동을 주문했다.

할 일 없이 핸드폰을 보면서 배달을 기다리고 있는데 지민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집이야? 사내 메신저가 꺼져있어서.

“응. 오늘 외근 갔다가 바로 집으로 왔어.”

-근데 아까 무슨 말이야? 팀장님 옆자리라니?

지민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 나왔다. 우겸은 오늘 있었던 일을 그녀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말했다. 아, 사람을 찾으러 여기까지 왔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거까지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모든 걸 지민에게 일러바치는 것 같았다.

“아까 미팅 때 사람은 좋아 보이기는 했는데, 굳이 나를 왜 옆에 둘까?”

-음…. 내가 보기에는 괴롭힘보다는 너를 키우려고 하는 것 같은데?

“나를? 입사한 지 몇 년 되지도 않은 나를?”

우겸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지민의 말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굳이?

-뭐, 그럴 수도 있지. 여기서 오래 일할 생각이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오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작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규영이 찾던 사람을 만나게 되면 다시 서울로 돌아가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솔직히 그게 아니고서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어 보였다.

-왜? 여기 잠깐만 있다가 다시 서울로 간대?

“아니, 그건 아닌데….”

-일단 잘해봐. 첫 출근에 막내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사무실에 싹 돌리는 상사 드물다. 아니지, 없다고 봐도 무방해. 우리 팀장님 봐라.

그렇게 배달이 오기 전까지 지민의 열 분이 섞인 이야기를 들었다. 어찌나 씩씩거리는지, 전화기 너머로 분노가 다 느껴졌다.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말 속도가 무슨…. 가만히 지민의 말을 듣고 있자니, 정작 그만둬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다. 아직 겪은 게 많이 없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지민처럼 이를 박박 갈면서 규영을 욕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좋은 게 좋다고,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지민을 떠올리며 위안 삼는 것이…. 지민의 팀장보다는… 규영이 열 배, 아니 백배는 더 나은 것 같았다. 매사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규영과 잘 지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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