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 불편한 만남 (1/13)

1. 불편한 만남

“아!”

우겸이 소리 지르며 눈을 번뜩 떴다. 침대 위로 손을 더듬거리며 무언가를 찾았다. 핸드폰을 잡은 다음 서둘러 화면을 켰다.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세 시였다. 신경질적으로 눈을 다시 감고, 한 손으로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이렇게 꿈을 꾸었던 것이 언제가 마지막이었더라.

빠르게 뛰는 심장 위에 손을 올리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꿈에서 너무 놀란 나머지 두근거림이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자취를 감추었다. 진정될 때까지 이러고 있는 게 좋겠다.

헐떡이던 숨이 잔잔해지자 그제야 이불을 내리고 흐트러진 머리를 손으로 매만졌다. 양 뺨을 찰싹 소리 나게 때렸다. 눈이 찡그려질 정도로 따가운 걸 보니 현실이 맞았다. 다시금 꿈인지 현실인지 확인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길래 꿈에 규영이 나온 걸까.

부엌으로 향하는 내내 팔과 다리가 후들거렸다. 냉장고 안에서 물을 꺼내 마시려고 하는데 손까지 달달 떨렸다. 숨 쉬는 것만 진정되었지, 몸의 떨림은 아직이었다.

“하….”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냉장고를 버팀목 삼아 등을 기대었다. 아무리 진정하려고 해도 쉽게 괜찮아지지 않았다. 얼굴빛이 점점 하얗게 질려간다.

체념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어제의 기억을 천천히, 다시 떠올렸다.

  

***

  

행복하지 못한 월요일. 주말 내내 침대 위에서 빈둥거리다가 출근을 하려니 몸이 좀 쑤셨다. 일하기 전에 아무 생각 없이 회사 사내 사이트를 훑어보았다. 공지사항에서 인사 발령에 대한 글이 눈에 띄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현재 우겸의 부서 내에 팀장 자리가 공석이었다.

내용을 읽어보니 본사에서 근무 중인 사람이 현재 부서 팀장으로 발령받아서 온다는 글이었다. 올 것이 왔구나. 우겸은 사내 메신저를 켜서 인사팀에 있는 동기인 지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번에 온다는 우리 팀장님에 대해서 아는 것 있어?]

[회장 조카라는데?]

다행히 바로 답장이 왔다. 생각지도 못한 존재에 멀쩡하던 머리가 지끈거렸다.

[정말?]

[어. 그리고 나이는 서른네 살.]

팀장의 나이를 듣자마자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서른네 살에 팀장으로 발령받은 걸 보면 회장 조카는 사실인 게 확실하다. 오히려 선임으로 있는 서 과장이 새로 발령받은 팀장보다 나이가 더 많았다. 이거 족보가 생각보다 많이 꼬이겠는데…. 꽤 난감한 상황이다. 왜 서울에서 이곳까지, 그리고 이 부서로 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겸은 서울 본사가 아닌 지방에 있는 지사, 영업부에서 근무 중이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회사 내 핵심 부서라고 하기에는…. 맨날 기안문을 쓰고, 틈만 나면 외부 업체에 미팅하러 가고. 퇴근을 제때 한 적이 없었다.

정말 의아했다. 영업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부서는 다 정시에 퇴근했다. 보통 회장 조카라면 편한 부서에 가서 쉬엄쉬엄 일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TV에서는 다들 그랬다. 뭐, 이곳으로 오는 건 다 이유가 있겠지.

조용했던 사무실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사무실 사람들도 이 내용을 본 모양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희영이 의자를 슬쩍 빼고 쳐다봤다.

희영은 우겸의 상사이다. 나이는 우겸 보다 한 살 위나, 직급은 두 개나 위인 대리였다.

‘다음 주부터 온다고 하는 팀장님, 우겸 씨는 어떨 것 같아?’

희영의 말에 우겸이 고개를 살짝 뒤로 빼고 말한다.

‘아, 제가 혹시 몰라서 인사팀 지민 씨한테 물어봤는데.’

다른 팀원들에게 들리지 않게, 희영에게 몸을 돌린 다음 조용히 속삭인다.

‘회장님 조카래요.’

‘진짜?’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희영 또한 제 행동에 놀랐는지, 가뜩이나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그 덕에 팀원 모두 희영을 바라봤다.

우겸 또한 놀라기 마찬가지였다. 희영에게 얼른 앉으라고 빠르게 손짓하자 희영이 고개를 숙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선 우겸에게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확실한 거야? 조카가 왜 여기를 와?’

‘그건 저도 몰라요. 아무튼 인사팀에서 그렇게 알고 있는 거면 조카는 확실하지 않을까요?’

희영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건너편에 있는 서 과장에게 걸어갔다.

우겸은 자세를 고쳐서 올바르게 앉았다. 희영 또한 저와 같은 눈치 같았다. 수많은 부서 중에 잡일이 가장 많은 영업부로 오는 걸 보면 분명 끈 떨어진 낙하산일 게 분명했다. 희영을 주축으로 팀원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영업부가 핵심이라며, 강조까지 하는 게 얼핏 들리는 걸 보니 새로운 팀장을 여간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나이가 젊으면 한 팀장님보다는 업무 속도는 빠르겠지?’

서 과장의 말에 지난주까지 근무하셨던 한 팀장이 얼핏 떠올랐다. 한 팀장은 이번에 정년 퇴임을 한 사람으로 타 부서의 팀장보다 나이가 지긋했다. 대기업에서 정년까지 있기 꽤 힘든데, 그걸 해낸 사람이었다.

‘글쎄요, 저는 더 느슨하게 할 것 같은데.’

희영이 살짝 비웃으며 우겸을 쳐다보았다. 마음이 통한 것 같았다. 낙하산이니까, 희영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였다. 짧은 회사 생활로 느낀 게 있다면, 팀장이 일을 너무 잘하면 아랫사람이 몹시 힘들다는 것이었다.

우겸이 남들에게 들리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인사팀 팀장님보다는 쉬엄쉬엄 일하시는 분이었으면 좋겠어요.’

인사팀 팀장은 서 과장 또래로 꽤 젊은 축에 속했다. 그 아래에서 지민이 부하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지민의 말에 의하면 업무를 할 때 일의 속도가 무척 빠른 편인데도 불구하고 확인을 정말 꼼꼼히 한다고 했다. 어찌나 맞춤법까지 정확하게 확인하는지, 그럴 때마다 치가 떨린다며 이를 갈았다.

‘하긴, 내가 지민 씨 복도에서 볼 때마다 매번 넋이 나가 있더라.’

‘그러니까요. 결재 올리면 하도 다시 확인하라고 해서, 이번에 안경까지 맞췄대요.’

우겸의 말이 서 과장이 입을 떡하고 벌린다. 하긴, 저도 그 말을 듣고 나서 같은 반응이었다. 오죽하면…. 인사팀 팀장을 상사로 만나지 않은 게 인생에서 가장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우리도 이제 다 안경 맞추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사무실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지민에게 들은 것이 있어서 그런가. 우겸이 생각하기에 팀장이 젊어도 문제였다. 일을 잘하는 건 좋긴 하지만, 그게 앞으로의 인생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스트레스만 얻는 것 같았다.

차라리 한 팀장처럼 능력 없는 게 아랫사람에게는 좋은 것 같다. 비록 배우는 건 많지 않지만, 그래도 회사 생활에 스트레스받지 않고 걱정 없이 일할 수 있는 점이 참 좋았다.

덕분에 지민뿐만 아니라, 다른 팀에 있는 입사 동기와 달리 업무적으로 크게 혼난 적이 없고, 오히려 칭찬만 받았다. 워낙 성격이 소심한 탓에 혼이 나면서 일했었더라면, 연고 없는 이곳에서 이렇게 회사 생활을 오래 하지 못했을 것이다.

새로 발령받아서 오는 팀장이 제발 일만 열심히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겸이 속으로 간절하게 기도했다.

우겸은 시끌벅적한 팀원들을 뒤로하고, 사무실 밖으로 조용히 나왔다.

  

***

  

우겸은 화장실을 향해 느릿하게 걸었다. 저 멀리서 지민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반갑게 웃으며 손을 세차게 흔들었다. 요즘 사내 교육이니 뭐니 하는 바람에 통 얼굴을 보지 못했다. 아까처럼 사내 메신저로 잠깐 연락을 주고받은 게 전부였다. 그것마저도 길게는 못하고 짧게만.

‘이렇게 얼굴 보는 거 정말 오랜만이다.’

‘그러게, 그래서 팀 분위기는 어때?’

‘내가 슬쩍 말하니까 다들 놀란 것 같아.’

지민과 이야기하는 도중 단단한 구둣발이 대리석 바닥을 걷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들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거리를 좁혔다. 몸을 최대한 붙이고 말을 이어서 하려고 하자, 지민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웠다.

‘아, 그.’

지민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우겸이 한발 빨랐다. 지민의 귀에 가까이 대고 사무실에서부터 궁금했던 것을 말했다.

‘그런데 정말 조카가 맞아? 아무리 생각해도 서울도 아니고 지방으로 오는 것도 그렇고 우리 부서로 오는 것도 이상한데.’

‘어, 그게.’

지민이 대답을 제대로 하지 않고 말을 하다가 말았다. 심지어 가뜩이나 하얀 얼굴이 점점 질리다 못해 파리해졌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가까이 붙였던 몸을 떼었다. 어깨를 손으로 툭툭, 가볍게 치며 인사를 건네었다.

‘아, 미안. 이따가 사내 메신저로 다시 이야기하자.’

화장실이 급한 건가. 눈치 없이 지나가는 지민을 붙잡은 것 같았다. 뒤를 돌아 사무실로 가려고 할 때 앞에 키 큰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놀라,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남자가 저를 너무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어찌나 무섭게 느껴지는지, 전신에 소름이 쫙 돋을 정도였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심장이 요동친다는 말이 더 맞겠다. 최근에 이렇게 빨리 뛴 적이 있었을까 싶은 정도로 요란하기 짝이 없었다. 이 정도면 앞에 있는 남자에게 쿵쿵거리는 소리가 다 들릴 것만 같았다. 조용히 가슴 위에 손을 올리고 남자의 얼굴을 다시 쳐다봤다.

저 얼굴을 어디서 봤었더라. 자주 본 사람의 얼굴처럼 낯이 익었다. 생긴 게 호감형에 가까워서 그런 건가. 아니, 잘생기긴 했다. 지금 입고 있는 양복도 무척 잘 어울렸다. 지나가면서 한 번쯤 흘끔거리게 하는 외모였다.

그러나 눈빛은…. 간이 서늘할 정도로 무척 차가웠다. 눈이 마주칠 때 느낀 감정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처음에 마주한 인상으로 따졌을 때 좋은 편은 아니었다.

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관찰하는 동안 그 또한 우겸을 매섭게 쳐다보았다. 어쩜 저렇게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쳐다보는 걸까. 의아한 생각도 잠시 옆에서 지민이 팔을 툭툭 치는 탓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당황한 우겸이 서둘러 남자의 눈을 피하고 지민을 쳐다봤다. 지민의 얼굴을 보아하니 남자를 아는 듯했다. 의아한 표정을 지어 쳐다보자, 제 등 뒤에서 저만 들리게 조용히 속삭였다.

‘너희 팀 새로운 팀장님.’

‘뭐?’

아까 사무실에서 희영이 놀라 소리를 빽 지른 것처럼 우겸 또한 복도에 목소리가 크게 울릴 정도로 소리를 내었다. 서둘러 입을 막고 남자를 쳐다보았으나, 이미 복도에 크게 제 목소리가 울린 이후였다.

이래서 지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구나. 혹시나 지민에게 했던 말을 남자가 들었을까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손을 여러 번 쥐었다 폈다.

작게 말하긴 했는데, 설마…. 별것도 아닌 거로 찍히게 생긴 것 같은 기분에 눈시울이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초조한 마음에 지민의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본 다음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인상을 찌푸리지 않는 걸 보면 못 들은 것 같기도 하다. 단순히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게 다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입을 꾹 다문 채로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안녕하세요. 인사팀 김지민입니다.’

‘네, 아까도 인사했잖아요. 옆은 우리 팀 고우겸 씨?’

저를 아는 척하며,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왔다. 거리가 점점 좁아질수록 손에 진땀이 났다.

그래도 남자의 목소리는 생각했던 것보다 좋았다. 생김새에 어울리는 낮은 목소리였다. 자신이 여자였더라면, 지나가다가 남자의 얼굴을 혹해서 쳐다보고, 목소리를 듣자마자 뒤를 졸졸 따라다닐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아, 네. 안녕하세요.’

우겸은 가까워지는 남자에게 허리를 숙이며 깍듯하게 인사했다. 업무용 미소를 장착한 채 그를 쳐다보았다.

‘네, 허규영이라고 합니다.’

규영이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했다. 우겸은 자신의 소매에 축축이 젖은 손바닥을 한번 쓸어내렸다. 땀이 다 닦였는지 한 번 더 확인했다. 그리고 마저 바지춤에 손바닥을 한 번 더 닦은 다음, 남자의 손을 잡고 아까처럼 고개를 또 숙였다.

마주 잡은 손이 첫인상처럼 꽤 차가웠다. 고개를 들어 올리고 서둘러 손을 놓으려고 했으나, 규영이 손을 꽉 움켜쥐고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황한 나머지 우물쭈물한 채로 그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아, 저, 손….’

‘아, 미안해요. 내가 긴장했나 봐요.’

긴장이라는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긴장과는 거리가 먼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표정은 아까와 같이 변화가 없었고, 목소리조차 떨림이 묻어 나오지 않았다.

규영이 꽉 잡은 손을 천천히 놓아주었다. 잠깐 악수했는데도 불구하고 잡혀있던 손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이렇게 힘 조절을 하지 못하고 세게 잡은 걸 보면, 보이는 것과 다르게 정말 속으로는 꽤 긴장한 것 같기도 했다.

우겸이 규영의 얼굴을 다시 찬찬히 살폈다. 혹시나 아까 지민과의 대화 내용을 들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규영은 눈을 자주 깜박이는 것을 제외하고는 특이할 건 없었다. 괜한 걱정인 건가. 아무렇지 않은 모습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다행히 아무 이야기도 못 들은 눈치였다.

작게 안도에 한숨을 쉬었다. 마음속으로 가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출근하지도 않은 상사에게 출근 전부터 찍힌다면, 앞으로 회사 생활은 끔찍할 것이다. 지금까지 지민이 겪은 건 아무것도 아니지 않았을까. 저렇게 무서운 얼굴을 하는 규영에게 괴롭힘당할 걸 생각하니 눈이 질끈 감겼다. 아찔했다. 이건 머릿속에서 떠올리기만 해야겠다.

‘그럼 다음 주에 봅시다. 고우겸 씨.’

규영이 인사를 하고 뒤를 돌았다. 다행히도 타이밍 좋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마치 규영을 기다린 것처럼 보였다. 우겸과 지민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엘리베이터만 쳐다봤다. 규영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 문이 닫혔다. 그제야 참았던 숨을 크게 내뱉었다.

우겸은 고개를 길게 빼서 주위를 한 번 더 둘러보았다.

‘내가 한 이야기는 못 들었겠지?’

‘아마? 그런데 네가 나한테 다가와서 말할 때 나를 째려보긴 했어.’

지민의 말에 우겸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씨, 진짜? 설마 들은 거 아냐?’

‘그래서 내가 눈치 줬잖아. 이 눈치 없는 사람아.’

‘그런데 내 이름은 어떻게 알지?’

우겸이 턱을 긁적이며, 짧게나마 생각에 잠겼다.

‘글쎄, 뭐 인사 기록을 훑었을 수도 있고.’

‘그런가?’

우겸의 내려간 입꼬리가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어 쓸어내렸지만, 진정이 되기는커녕 찝찝한 마음만 계속 차올랐다. 꽉 막힌 것처럼 가슴이 답답한 게 아무래도 앞으로 회사 생활이 그리 순탄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규영을 잠깐 만났는데도 불구하고 기운이 쪽 빠졌다. 누가 보면 몇 시간을 규영에게 시달린 줄 알 것이다. 오전 내내 도통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냥, 멍하니 자리에 앉아만 있었다.

혼자만 이 상황을 알고 있을 수 없었다. 짧은 속앓이를 마치고 모니터를 빤히 보고 있는 희영에게 새로운 팀장을 봤다고 이야기하니, 눈을 반짝이며 관심을 보였다.

‘생김새는 어때 보여. 좋아? 나빠?’

‘음….’

우겸은 고민이 되었다. 좋게 말할 수도, 나쁘게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이 평소 다른 사람의 관상을 잘 보는 편은 아니어서 딱 부러지게 정의해서 말하기가 어려웠다. 괜한 입술만 이로 꾹 물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정리가 필요했다.

규영의 첫인상이 저 혼자만 안 좋을 수도 있었다. 생긴 건 꽤 호감 상이었기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는 그렇게 보일 것 같지 않았다. 별로라고 이야기했다가, 규영에 대해 좋지 않은 선입견이 생기면 어쩌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골똘히 생각한 우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젊으세요.’

‘응? 그게 끝이야?’

희영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반응으로 반문했다.

‘저도 자세히 본 게 아니라, 복도에서 지나친 거라서요. 제대로는 못 봤어요.’

‘그래? 근데 출근 전에 회사에 들를 정도면 한 팀장님이랑은 완전 다를 것 같은데?’

희영의 말에 우겸이 동조하듯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공식적으로 출근하기 전에 회사에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목덜미가 서늘했다.

가뜩이나 종종 칼퇴근하지 못했는데, 앞으로의 힘겨운 여정이 눈앞에 좌르륵 펼쳐졌다. 아무래도 칼퇴근은커녕 집에 가기만 하는 것도 다행일 것 같았다. 이번 주가 칼퇴근을 할 수 있는 마지막이…. 손으로 눈꺼풀을 비비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매만졌다.

  

***

  

회사에서 딱히 한 것도 없었는데, 항상 퇴근 후 집에만 오면 격한 피곤함이 몰려왔다. 우겸은 현관문부터 옷을 허물 벗듯 벗으면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에 오자마자 침대에 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평소 씻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옷을 다 벗고 화장실로 가야 바로 씻을 정도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 전에나 씻을 게 분명했다. 제가 생각해도 부지런한 것과 거리가 멀었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온 우겸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샤워기를 틀었다. 씻으면서 저녁 메뉴로 어떤 걸 먹을지 고민했다. 오전에 별것도 아닌 일로 신경을 써서 얼큰한 음식이 당겼다.

‘닭발이나 시켜 먹을까.’

샤워하는 내내 우겸의 표정이 시무룩했다. 다음 주부터 어떻게 일해야 할지, 출근하기 전부터 걱정이 되었다. 사서 고민하는 성격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종일 찝찝한 적은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규영의 첫인상은… 꿈에 나오면 잠이 다 깰 정도로 서늘하고, 차갑고… 한 마디로 좋지 않았다.

샤워를 마친 우겸은 수건으로 몸에 있는 물기를 털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몸에 있는 흉터를 살짝 만졌다. 군대 제대하고 나서였나? 아마, 그때쯤 교통사고가 크게 났었다.

입원을 꽤 오래 할 정도로 크게 다쳤었다. 그때 충격으로 어떻게 사고가 났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차가 살짝 나가서 겨우 목숨은 건졌다고 누나에게 전해 들었다. 단순 사고가 아닌 이중 추돌 사고였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에휴….’

배와 무릎에 흉터를 보니 괜히 한숨만 나왔다. 씻을 때마다 흉터를 보면서 옅어지라고 열심히 흉터 연고를 발랐지만, 눈에 띄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때는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살아남아 운이 좋은 줄만 알았는데, 씻을 때마다 없어지지 않는 자국을 보니 마음이 꽤 씁쓸했다.

  

***

  

그렇게 별일 없는 하루였다. 수많은 사람 중에서 왜 규영이 꿈에 나왔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비단 첫인상이 강렬하다고 해서 꿈에 나오는 게…. 그렇다고 규영의 생김새가 이상형도 아니었다.

“으…. 흑….”

조용한 방 안에 우겸이 흐느끼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꾸만 눈물이 흐르는 탓에 소매로 눈가를 벅벅 닦았다.

무얼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꿈이었다. 그냥 규영이 꿈에 나온 것만 또렷하게 잔상이 남아있었다. 꿈에서 저는 뭐가 그리 서글펐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러고 있는 게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처럼 계속해서 규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를 꽉 물고 후들거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흐윽….”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물에 자꾸만 예전 생각이 떠올랐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꿈이 다시 시작된다면 이제 여기에서도 더는 지내지 못할 것이다.

아무래도 당분간 규영과 최대한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래야겠다.

  

***

  

새벽에 그 난리를 겪고 아침에 출근하니 사무실 사람 모두의 눈이 우겸의 얼굴로 쏠렸다. 퉁퉁 부은 얼굴을 보자마자 다들 무슨 일이 있었냐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잠을 자다가 꿈 때문에 울었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기에, 어제 닭발을 먹고 자서 얼굴이 퉁퉁 부었다고 둘러댔다. 뭐, 반은 맞는 말이었다.

일에 집중한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사무실 안으로 불청객이 들어왔다. 어제 복도에서 봤던 규영이었다.

“어?”

우겸은 규영의 모습을 보고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 아는 척을 했다. 아무래도 오늘 규영을 회사에서 다시 보려고 새벽에 험난한 꿈을 꾼 듯했다.

규영이 제 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성큼성큼 걸어왔다. 규영이 가까이 걸어올수록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초조함을 느꼈다. 마주친 눈을 서둘러 피한 다음 희영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새로운 팀장님이세요.]

메신저 옆에 숫자 1이 사라졌다. 희영이 큼큼거리며 목소리를 가다듬고, 티 나게 몸을 움찔거렸다.

우겸도 희영을 따라서 자세를 고쳐 앉고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일단 일이라도 열심히 하는 척을 해야겠다. 다급한 마음에 한글 창을 열어 말도 안 되는 기안문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걸어오던 규영의 발걸음이 뚝 끊겼다.

슬쩍 고개를 돌려 옆을 쳐다봤다. 규영이 아까와 같이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우겸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 앉은 채 고개를 숙이고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했다.

아,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부하직원이어서 그렇기도 하고, 뭔가 규영의 앞에서는 압도적으로 기가 눌렸다. 사람에게서 이렇게까지 위압감이 느껴질 수 있구나 싶을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티 나지 않게 고개만 숙였는데, 규영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은 눈치였다. 어제와 다르게 낮은 목소리였다. 거기에 표정 또한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앉아 눈동자만 굴렸다.

일어나서 큰 목소리로 다시 인사를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아니면 새로운 팀장님이라고 소개라도 해야 할지…. 짧은 순간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감하게 있었다.

규영의 눈을 피하고 혼자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파티션 너머로 사무실 사람들 모두 당황한 게 훤히 보였다. 희영을 제외하고는 새로운 팀장이라고 생각도 못 할 것이다. 팀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젊은 모습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팀원들에게 규영의 생김새를 자세하게 설명해 줄 걸 그랬다.

“누구?”

팀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서 과장이 자리에서 서둘러 일어났다. 우겸에게 아는 사이냐고 눈짓했다. 하, 희영에게만 메신저를 보낼 게 아니었다. 단톡방에 보냈더라면 이렇게 서로 눈치 게임을 하지 않았을 텐데.

“다음 주부터 같이 근무할 허규영이라고 합니다.”

규영이 아까보다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아.”

사무실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한 명, 한 명 훑어보았다. 그 행동에 일어나있는 서 과장이 규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 팀장님. 안녕하세요. 서현수입니다.”

“네.”

규영이 서 과장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했다. 팀원들 이목이 규영에게 집중되었다. 규영은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듯 차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사내 공지사항 보셔서 잘 아시겠지만, 다음 주부터 팀장으로 출근하게 되었습니다. 지난주에 여기 계셨던 한 팀장님께서 정년 퇴임하셨는데, 제가 아직 본사 일을 마무리하지 못해서요. 최대한 빨리 본사 일을 정리하고 내려온다는 게 조금 늦어졌네요. 발령일은 다음 주 월요일이나, 오늘은 인사만 간단히 하고 한 팀장님께서 작성하신 인수인계서 보려고 들렸어요. 그러니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편하게 할 일 하시면 됩니다.”

새로 발령받은 팀장이 떡하니 자신의 자리를 지키겠다는데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눈을 열심히 굴려 팀원 얼굴을 슬쩍 보니 다들 하나같이 억지로 웃고 있을 뿐이었다.

우겸 또한 마찬가지였다. 눈은 가만히 있고, 입에 경련이 날 정도로 입꼬리만 올리고 있었다.

규영은 분명 서울에 있었을 때도 양반은 못 되었을 사람이다. 아무리 회장 조카라고 하지만, 이렇게 눈치가 없기도 힘들 것이다. 아, 회장 조카라서 이럴 수도 있겠다.

“네. 혹시나 보시고 물어보고 싶으신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서 과장의 말을 끝으로 다들 힘없는 얼굴을 했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오늘 저녁에 맥주 한잔하러 가자고 희희낙락거렸었던 팀원들이 각자 모니터만 바라보며 일에 집중했다. 불시에 출근한 규영 덕에 사무실 내 분위기가 한층 무거워졌다.

다들 불편하기 매한가지일 것이다. 팀장 자리가 공석이라 이번 주는 업체 미팅도 없었고, 정말 자유였다. 오죽하면 이번 주에 연차 금지라는 말까지 나왔다. 아, 연차 금지인데 이 주임은 오늘부터 연차를 썼다. 규영이 공식 출근 전에 사무실에 방문할 줄 알았으면 차라리 연차를 따라 쓸 걸 그랬다.

화장실을 핑계로 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규영 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낙하산치고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서류를 보고 있다. 지나가다가 규영을 본 사람이라면, 저뿐만 아니라 사무실 사람들 모두 열심히 일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표정도 한몫했고, 자세 또한 몇 시간 동안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공식 출근 전부터 저러는 걸 보면…. 평화롭고 좋은 시절은 다 끝이 났다.

우겸은 딱히 할 일이 없어 가만히 모니터만 쳐다봤다. 지민에게 메시지를 보내봤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역시 지민은 쉴 새 없이 바빴다. 곧 지민처럼 바빠질 생각에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다음 주에 일단 안경부터 맞추고…. 아니다. 일단 아직 일어난 일은 아니니, 이 한량 다운 시간을 잠깐이나마 즐겨야겠다.

모니터에 몸을 바짝 붙이고 인터넷 창을 열어 평소에 읽지도 않던 연예 뉴스를 읽었다. 아무 생각 없이 시간 보내는 데는 남 이야기가 최고였다.

와, 언제 이렇게 많은 열애설이 난 거지. 그렇게 몇 분을 집중해서 읽었을까. 연예 뉴스가 아닌 다른 헤드라인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딱 누구 이야기 같다고 생각하며 감정이입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

화들짝 놀란 나머지, 분주하게 몸을 움직이며 뒤를 쳐다봤다.

“미안해요. 너무 집중해서 모니터를 보길래.”

“아, 네.”

규영의 목소리에 서둘러 인터넷 창을 끄긴 했지만, 아마 다 봤을 것이다. 어제오늘, 여러모로 망했다. 하필 집중한 내용이 은행 채용 비리에 대한 것이었다.

그냥 계속 연예인 이야기나 볼걸, 왜 갑자기 부정 입사에 대한 내용이 눈에 들어왔을까.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규영을 조심스레 올려다보았다.

“오늘 업무 다 했으면, 회사 간략하게 안내해 줄 수 있어요? 혼자 둘러보는 것보다는 아는 사람이 알려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아, 네.”

우겸은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학교 때 했던 조별 과제 발표보다 더 떨렸다. 분명 둘이서 회사 내를 돌아다니면 어색할 게 분명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기에는 더 민망할 것 같았다.

괜히 죄 없는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희영을 바라보았다. 자신보다는 그녀가 백배, 아니 천배 더 나을 것이다. 희영은 사무실 내에 분위기를 띄우는 사람이었다. 타 부서와 달리 사무실 분위기가 화기애애한 편이었는데, 그게 다 그녀 때문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우겸은 희영의 뒤통수를 애잔하게 쳐다보며 규영과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밖에 복도를 걸으면서도 침묵만 이어졌다. 똑바로 걸으려고 해도, 옆에 있는 그가 의식이 되어 자꾸 나무 인형처럼 삐걱거리며 걷고 있었다. 눈치 없는 사람도 이 상황이 어색하다는 건 모를 리가 없었다.

“저….”

“저기….”

속으로 괜히 나서서 말했다고 자책했다. 차라리 가만히 있었으면 중간이라도 갔을 텐데, 어떻게 딱 규영과 말이 겹쳤을까. 걸음을 멈추고 규영이 입을 열기만 기다렸다.

“아, 먼저 말해요.”

“아뇨, 먼저 말씀하세요. 저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제와 다르게 규영이 우겸의 얼굴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냥 잘 지냈나 해서요.”

규영의 목소리에 사뭇 떨림이 묻어 나왔다.

“저요?”

당황한 우겸이 규영의 말에 반문했다.

어제 처음 본 사이였는데, 잘 지내고 말 게 따로 있나? 우겸이 입술을 매만지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살면서 이런 질문은 처음이라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잘 지냈다고 대답해야 옳은 대답인가? 하긴, 못 지낼 것도 없었다. 눈물 흘리면서 매운 닭발도 먹고, 주먹밥도 먹고…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풀었기에 좋지 않을 게 없었다. 뭐, 어제 꿈을 제외하고는 무난한 하루였다.

대답이 길어지자, 규영은 재촉하지 않고 차분하게 기다렸다. 가만히 우겸의 입술만 쳐다봤다. 그 또한 이 상황이 긴장되는 모양인지, 손이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 움직여댔다.

“아, 네.”

우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끝?”

“어… 어제 맛있는 거 배달시켜서 먹고, 잘 잤어요.”

물론 잘 잤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규영에게 대놓고 당신이 꿈에 나와서 새벽에 잠도 못 자고 울다가 출근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규영의 얼굴은 아까와 다르게 큰 변화가 없었다. 어떤 대답을 원했는지 알 턱이 없었기에, 그저 눈치만 볼 뿐이었다.

규영 또한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는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우겸에게 매운 거라도 시켜 먹었나 봐요, 하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어?”

갑자기 규영이 미소를 짓는 탓에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크게 목소리를 내었다. 왜 자꾸 목소리를 높이면서 놀라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우겸이 하얀 손으로 입을 가리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니, 얼굴이 퉁퉁 부어있길래요.”

“아, 네….”

자꾸만 웃으면서 대놓고 부었다고 말하는 규영 덕에 점점 감정이 상하고 있었다. 부은 사람한테 대놓고 퉁퉁이라고 강조까지 하면서 부었다고 말을 하는 걸 보니 눈치 없는 쪽에 속하는 것이 맞았다. 당분간은 매운 음식은 쳐다도 보지 말아야겠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누구 때문에 자다가 깨서 울어서인데…. 입술을 샐쭉거리며, 규영의 걸음에 맞춰 보폭을 빠르게 걸었다.

“그런데 안내는 고우겸 씨가 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까부터 내가 가는 방향으로 졸졸 따라오던데.”

“아, 죄송해요.”

우겸이 고개를 숙이면서까지 대답하자, 규영이 자연스럽게 우겸의 어깨에 손을 가볍게 올렸다가 떼었다.

“그렇게 죄송할 건 아니고요. 그래서 회의실은 어디에 있어요?”

역시 한 팀장과는 다른 부류가 확실했다. 한 팀장님이라면 제일 먼저 식당부터 찾았을 것이다. 평소 어찌나 점심시간에 애정이 많으셨는지, 외부 출장에 나가서 같이 식사를 못 하는 경우 친히 메시지로 연락을 해주셨다.

정말 그리운 한 팀장….

우겸이 잠깐 넋 놓고 있자, 규영이 다시 한번 어깨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물었다.

자꾸만 몸을 만지는 탓에 미간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누가 보면 오래 알고 지낸, 그 정도로 친한 사이처럼 제 몸을 아무렇지 않게 만졌다. 고작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친하게 구는 것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대놓고 표정을 찡그리며 티를 낼 수 없어, 거리를 둬서 걸으려고 걸음을 늦췄다.

“회의실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건 아니죠?”

생각했던 것보다 성질이 꽤 급한 것처럼 보이는 규영이 재차 회의실이 어디냐고 물었다.

“아, 이쪽으로 오시면 돼요.”

규영과 잠깐 대화했으나,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앞으로 회사 생활이 편하기는커녕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생긴 건 멀쩡한데 하는 행동이며 말하는 것까지. 즉,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그중에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건 꿈에 나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왜 자꾸만 자신을 잘 아는 사람처럼 구는지, 그것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최대한 싫은 티를 내지 않으려고 업무용 미소를 지으며 규영을 안내했다.

“여기가 회의실이고….”

그렇게 규영이 좋아할 만한 회의실과 다른 회의실과…. 알려주는 김에 회사 내에 있는 회의실을 다 알려주었다. 거기에 타 부서 중 가장 마주치는 부서까지 데려갔다. 이 정도면 얼추 다 알려준 것 같은데.

“식당도 알려드릴까요?”

“음… 식당 갈 시간이 있나 모르겠네요.”

“네?”

우겸은 또 당황했다. 밥도 먹지 않고 일하겠다고 선전포고한 거나 다름없었다. 앞으로 점심시간도 없이 일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한 팀장이 있을 때 순전히 외부 미팅 때문에 정시 퇴근을 못 하는 거였지, 일의 양이 많아서 퇴근을 못 했던 것이 아니었다.

“왜요?”

규영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우겸을 쳐다보았다.

“아니에요. 혹시 더 궁금한 곳 있으세요?”

“이 정도면 된 것 같아요. 그런데 내가 많이 불편해요?”

“…네?”

네…. 그것도 아주 많이요.

그래도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살살 웃으면서 규영을 대했는데, 도대체 어디가 티가 난 거지. 뭔가 자신의 속마음을 읽히는 기분이 들었다.

우겸은 규영의 말에 동조하지 않는 척 업무용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너무 과한 액션에 속마음을 들켰을까 걱정이 되긴 하였으나, 일단 아니라고 잡아뗄 생각이었다. 이게 뭐라고 규영을 처음 봤을 때처럼 심장이 널뛰기 시작했다.

“정말?”

“네. 정말 불편하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편하다고 하기도 그렇고… 음, 제가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규영이 비밀이라도 말하는 듯 작게 속삭였다.

“낯가리는 성격이 아닐 텐데, 어제 인사팀 김지민 씨랑은 바짝 붙어서 이야기했잖아요.”

어제 처음 본 사이인데, 제 성격을 아는 듯이 말하는 규영 덕에 또 흠칫 놀랐다. 생각보다 예리한 부분이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성격이 소심해 보이기는 하나, 크게 낯을 가리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래서 회사에서 우겸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타 부서 사람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그걸 규영이 어떻게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얼굴에 티가 많이 났나 싶어 괜히 얼굴을 찬찬히 만지며 규영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저희는 입사 동기라서….”

“동기가 끝이에요?”

규영이 재차 같은 것을 묻자, 우겸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당연히….”

규영이 슬쩍 미소를 띤 채 알겠다고 대답하며, 사무실로 앞질러 걸어갔다.

규영의 미소가 반갑게 느껴지지 않는 건 단순히 기우겠지.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방금 아무것도 아닌 대화였는데, 혼자만 조마조마했던 것 같았다.

빠른 걸음으로 걷는 규영의 뒤를 우겸이 거리를 두며 뒤쫓아갔다.

  

***

  

오늘도 역시나 꿈을 꾸었다. 또 규영이 나왔다. 정확히 어떤 내용인지 기억은 나지 않았다. 어렴풋이 잔상만 남았다. 그래도 어제와 다르게 베개가 보송한 걸 보니 그리 슬픈 꿈은 아닌 듯했다.

“하….”

아침부터 한숨이 버럭 나왔다. 왜 자꾸 꿈에 규영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오늘 일진도 좋지 않을 것 같다. 회사와 지금 사는 집의 거리는 걸어서 10분도 안 될 정도로 무척 가까웠다. 알람을 끄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 눈을 감았다. 평소에 피우지 않던 늦장을 부리며 꿈 내용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내용은커녕 흐릿하게 남아있던 잔상도 흐트러졌다.

“도대체 뭐지.”

차라리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당일 연차라도 쓸까. 이렇게까지 출근하고 싶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정말 하고 싶지 않았다. 꿈 때문에 아침부터 기분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사실 이곳에서 일하기 전까지 꿈에 시달리다시피 했었다. 아, 어렸을 적부터 꿈을 꾸었던 건 아니고, 스무 살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되었던 것 같다. 평생 꿈 한 번 꾸지 않고 깊게 잘 잤었는데, 갑자기 몸의 변화라도 생긴 듯 매일같이 꿈을 꾸었다.

처음에는 꿈을 꿀 수도 있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꿈이 반복될수록, 꿈에서 깨어나기 힘들었다. 가끔은 꿈과 현실이 헷갈릴 때도 있었다.

‘또 못 일어났어?’

대학교 친구인 영재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우겸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에 꿈과 현실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꿈에 시달렸다.

‘그러니까, 요즘은 알람 소리도 못 듣네.’

어제도 영재의 문 두들기는 소리에 잠에서 겨우 일어났다. 영재가 아니었다면 제대로 학교 수업에 출석도 못 할 정도였다.

‘도대체 무슨 꿈인데 그래?’

‘나도 몰라….’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에 가만히 있는데도 눈이 저절로 감겼다. 우겸이 영재에게 교수님이 뭐라고 하시면 아프다고 해줘, 하고 힘없이 말을 한 다음 책상 위에 몸을 숙이고 엎드렸다. 거의 쓰러지다시피 했다.

항상 일어날 때마다 땀을 뻘뻘 흘린 탓에 악몽이려니 가볍게 생각했다. 그러나 꿈을 꾸고 나서 몸 상태가 날이 갈수록 안 좋아졌다.

어떤 날은 일어나면 눈물이 베개를 흠뻑 적셨다. 또 어떤 날은 종일 기분이 우울하고, 또…. 그렇게 꿈에 시달린 지 한 달째. 우겸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며, 얼굴도 핼쑥해지고 있었다. 체중 또한 점점 줄어드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몇 개월을 시달렸을까. 점점 꿈속에 내용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꿈에 나오는 장소는 항상 비슷했다. 그러나 상대가 누군지는….

사람인 건 확실했으나 항상 희미하게 나타났다. 항상 그 검은 형체와 대화도 나누고, 어떤 행동을 했다. 꿈에서는 행복하기만 했는데 잠에서 일어나면 무언가 비어있는 것처럼 가슴이 먹먹했다.

‘하… 뭐지, 진짜.’

뭔가 잊은 기분이었다. 뭘 잊은 걸까. 항상 꿈에서 깨고 나면 멍하니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아무리 기억하려고 해도… 기억을….

‘이 정도면 점집이라도 다녀와야 하는 거 아니야?’

점점 체중이 빠지는 탓에 영재의 걱정도 늘었다. 영재가 소개해 준 점집에 다녀왔지만, 그럴 때마다 점쟁이는 기가 약해서 그렇다고만 했다.

‘그럼 다른 방법이 없나요?’

‘뭐, 부적이나 굿을 하는 방법도 있지만… 아직 학생이기도 하고.’

여러 점집에 들렀지만 갈 때마다 터무니없는 금액만 요구할 뿐이었다. 학생이 돈이 많아 봤자, 얼마나 많겠는가.

일 년을 꿈에 시달리다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귀신 잡는 해병대에 입대했다. 신기하게도 군 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꿈을 꾼 적이 없었다. 꿈에서 괴롭히던 검은 형체가, 아니 귀신이 잡혔다.

기쁜 마음으로 제대하고 다시 학교에 복학했다. 그렇게 평화로운 나날이 얼마나 흘렀을까. 군대에 가기 전과 똑같은 꿈들이 반복되었다.

대학교를 어떻게 졸업했는지도 모르겠다. 하루하루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무튼 그놈의 꿈에 시달리다가 우연히 이곳으로 여행을 왔을 때 꿈은커녕 정말 잠만 잤었다. 하루, 이틀, 일주일…. 그렇게 지내다가 여기에 자리를 잡고 일하게 된 거였다.

만약 예전처럼 매일같이 꿈에 시달린다면, 대학교 때와 다르게 제정신으로 지내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때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하루, 하루가 꿈에 잠식되어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왜 이제는 규영의 모습으로 나오는 걸까.

우겸은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왜 규영을 처음 만난 이후로 악몽이 다시 시작되는 걸까. 살면서 규영과 만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마주친 적도 없었다. 나이 차이도 꽤 나는 편이고…. 같은 학교도 아니었고…. 살던 동네도 분명 달랐을 텐데….

“하…. 짜증 나.”

우겸이 눈가에 얕게 고여있는 눈물을 닦고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감고 과거를 잠깐 떠올렸을 뿐인데, 기분이 바닥을 뚫고 지하로 내려가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보니 시간이 꽤 지나있었다. 지금 대충 준비하고 나가면 회사에 겨우 도착할 시간이었다. 서둘러 움직여야 하는데, 몸이 딱딱히 굳어 말을 듣지 않았다.

겨우 몸을 일으켰다. 아무 생각 없이 옷을 입다가 정신을 차리니 어제 벗어 둔 옷을 입고 있었다.

“큰일이네.”

지금 다시 갈아입자니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았다.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하는 수없이 어제와 같은 옷을 입고 서둘러 집을 나왔다.

  

***

  

사무실에 딱 출근 시간 1분 전에 도착했다. 옷을 다시 갈아입고 나왔으면 늦을 뻔했다. 사무실에 들어가면서 자리에 앉아있는 팀원에게 힘없이 인사했다. 규영의 자리를 슬쩍 보니 비어있었다. 다행히 오늘은 출근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리에 앉아 헉헉거리던 숨을 골랐다. 엘리베이터가 제 마음과 다르게 고층에서 꽤 머물러있어, 급하게 계단으로 올라왔다. 아침부터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로 진땀을 뺐다.

옆에 있는 희영이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늦잠 잤어?”

“네. 잠을 설쳐서….”

“얼른 물이라도 마시고 와. 그리고….”

희영이 무슨 말을 하려다가 못 볼 것이라고 본 사람처럼 재빠르게 얼굴을 획 돌렸다. 무슨 일이지. 우겸이 의아한 표정으로 옆을 둘러봤다. 출근을 안 한 줄로만 알았던 규영이 차가운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 역시, 오늘도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게 분명했다.

“안녕하세요.”

규영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우겸을 위아래로 훑은 다음 자신의 자리로 걸어갔다. 아침부터 인사를 받아주지 않고 고개만 까딱이는 걸 보니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어 보였다. 아니면 아슬아슬하게 사무실에 도착한 걸 아는 것 같기도 했다. 울상을 지으며, 자리에서 힘없이 일어섰다.

  

***

  

화장실 세면대 앞에 있는 거울을 보니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눈에 눈곱까지 붙어 있었다. 생각해 보니 세수도 하지 않고 나왔다.

이 모습 때문에 규영이 그렇게 심술 맞게 행동했나….

침대 위에서 괜히 늦장을 부렸다. 거울을 보며 겉모습을 단정히 정돈한 다음 손을 씻었다. 물로 대충 세수를 하려고 물을 틀고 눈 주위를 꼼꼼하게 닦았다.

누가 화장실에 또 들어오는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씻던 것을 멈추고 손으로 물기를 쓸어내렸다. 아침부터 회사에서 세수하는 모습이 동네방네 소문나서 좋은 것이 없었다.

“집에서 출근하는 거 아니에요?”

규영의 목소리였다.

우겸이 눈 주위에 있는 물기를 옷소매로 훔친 다음 빠르게 눈을 떴다. 규영이 아까와 같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게….”

규영이 갑자기 훅 다가왔다. 너무 놀란 나머지 눈을 질끈 감고, 세면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너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눈을 파르르 떨며, 그가 무슨 말을 하길 기다렸다.

우겸의 화들짝 놀라는 모습에 규영이 작게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가만히 쳐다보며 눈까지 휘어지게 웃었다. 그리고 큼큼, 거리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얼굴에 물기가 아직 있어서요.”

벽에 부착된 핸드타월을 우겸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러자 분홍색이었던 귓불이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규영이 입꼬리를 올렸다.

“아,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우겸은 핸드타월로 얼굴에 있는 물기를 빠르게 훔쳤다. 천천히 닦다가는, 이렇게 단둘이 화장실에 서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조급했다.

규영이 가만히 서서 우겸의 행동을 지켜만 보았다. 얼굴을 다 닦고 고개를 들자, 규영이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하실… 말씀 있으세요?”

우겸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말하자, 규영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 험상궂게 굳어졌다. 옷깃을 손으로 매만지며,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래서 집에서 출근했어요, 안 했어요? 말을 하다가 말았잖아요.”

규영의 질문에 우겸은 난처했다. 어제도 그렇고, 자꾸만 예상외의 질문을 했다. 볼 안쪽을 잘근잘근 씹었다. 집에서 출근하는 게 당연한데, 집에서 출근했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1분 전에 사무실에 도착한 걸 눈치라도 챈 모양이었다.

“내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한 거예요? 이렇게 답이 늦어질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그리고 볼은 그만 씹고.”

규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우겸의 통통한 볼을 톡 건드렸다. 그 손길에 놀라 어깨를 움츠리며, 한 발짝 더 뒤로 물러섰다. 눈을 크게 뜨고 규영을 바라보았다.

“아, 아니요. 그게 아니고… 집에서 출근하는 게 당연한데 어디서 출근했냐고 물으셔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말을 버벅대며, 겨우 대답했다.

“난 또….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규영이 손을 뻗어 자연스럽게 우겸의 옷을 매만졌다. 의외로 익숙해 보이는 손길이었다. 또 심장이 심각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헐떡이는 숨소리를 들킬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까와 같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생각도 못 했던 그의 향수 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눈을 뜨면 규영이 앞에 있고, 감으면 규영의 향이 진동했다. 눈이 파르르 떨렸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몹시 당황스러웠다.

“누가 보면 내가 괴롭히는 줄 알겠어요.”

규영의 낮은 목소리에 우겸이 눈을 살짝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다가오셔서…. 그, 놀라서….”

“옷에 뭐가 묻어있어서요. 그러면 마저 정돈하고 천천히 들어와요. 먼저 갈게요.”

규영이 화장실 밖으로 나가자 우겸이 제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무릎에 고개를 숙인 다음 가만히 있을 뿐이다. 귀뿐만 아니라 얼굴 전체가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

  

사무실에 돌아오니 규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우겸을 한 번 쳐다보고 다시 일에 집중했다. 우겸이 자리에 앉아 멍하니 컴퓨터 화면을 쳐다봤다. 조금 전에 화장실에서 있던 일을 되새기는 중이다.

규영에게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찍힌 건 분명했다. 자꾸 말을 거는 것 또한 일부러 트집을 잡으려고 그러는 것 같았다.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었다. 굳은 표정이 좋아질 생각을 안 했다. 오히려 점점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그때 지민과 대화한 내용을 들은 건 확실했다. 새로운 팀장, 그것도 회장 조카에게 단단히 찍힌 것 같은데…. 앞으로의 회사 생활이 순탄치 않아 보였다.

꿈에 나오는 이유도 이것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무의식이 생각보다 며칠 전에 일을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았다. 꽤 일리가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꾹꾹 눌렀다. 그리고 아직 규영의 온기가 남은 듯 열이 오른 볼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옆에 앉아있는 희영이 우겸을 슬쩍 쳐다보고 팔을 툭툭 쳤다.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어디 아파? 아까 밖에 나갔다가 들어온 이후로 얼굴에 열 오르는 것 같은데? 오늘 급한 일 없잖아. 우겸 씨만 괜찮으면 오후에 반차 쓸래?”

“아니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살짝 두통이 있는 정도라,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겸이 가방 안에서 진통제를 꺼냈다. 입에 물을 가득 머금고 약 한 알을 털어 넣었다. 그리고 관자놀이를 양손으로 꾹 눌렀다.

최대한 규영과 거리를 두고 싶었다. 그러면 꿈에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자꾸만 마주치는 상황도, 아무 뜻 없이 자꾸만 말을 거는 것도, 거기에 자연스럽게 제 몸을 만지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부서를 옮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부서 이동이 가능하려나…. 힘없이 앉아있는 우겸의 안색이 조금 전과 다르게 점점 창백해졌다.

오전 내내 우겸의 머릿속에는 부서 이동밖에 없었다. 이직하는 것도 고려해 봤으나, 아직 경력이 마땅치 않아 쉽지는 않을 것 같았다. 꿈에 규영이 나온 이후로 최대한 같이 있는 상황을 피하고 싶다. 규영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조차 달갑지 않았다.

[나 물어볼 것 있는데, 바빠?]

[지금은 괜찮아. 뭐? 너희 새로운 팀장님 어제부터 출근했다며.]

어제와 다르게 지민에게서 바로 메시지 답이 왔다.

[그것 때문에 심란해. 아무래도 어제 내가 너한테 했던 말을 들은 것 같아.]

[왜???]

[자꾸 나한테 말을 거는데, 이게 뭔가 말에 뼈가 있는 것 같아.]

조금 전 상황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키보드를 누르는 우겸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 보였다.

[말로 괴롭혀?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당해봐야 정신 차리지. 회장 조카든 뭐든 증거 모아놔.]

[이걸 괴롭힘이라고 하기에는…. 혹시 개인 사유로 부서 간에 이동할 수 있어? 정말 괴롭힘을 당해야 옮길 수 있는 건가?]

[도대체 뭘 어쨌길래 그래? 일단 이따가 점심시간에 잠깐 보자. 내가 전화할게.]

[알겠어.]

지민과의 대화를 통해서 얻은 수확은 없었다. 차라리 규영이 티 나게 괴롭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참 이상했다. 얼굴을 알게 된 게 고작 하루인데, 마주칠 때마다 왜 심장이 가만히 있지 않을까. 규영과 같이 있을 때마다 두려운 건지, 아니면 무슨 감정인지는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자꾸만 손과 발이 덜덜 떨릴 정도로 초조한 건 확실했다.

소심한 성격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사소한 행동이나 말에 위축되지는 않았다. 규영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크게 개의치 않았을 텐데. 아무래도 꿈에 나왔던 탓에 몸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고 더 과민반응하는 것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