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마침 도유 씨가 좋아하는 핫초코를 들여와서 내어 줄까 했는데, 표정을 보니 마실 시간은 없을 것 같군요. 무슨 일이시죠?”
“오늘 오후에 반차를, 내일은 연차를 사용하고 싶습니다.”
“오늘은 상관없지만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사건 브리핑에 참여하셔야 한다는 것 알고 있죠?”
성희유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도유를 바라보는 주홍색 눈은 날카로웠다. 임무가 코앞인데 준비하지 못할망정 휴가가 웬 말이냐, 라는 힐난보다는 도유가 어떤 말 못 할 일에 휘말린 건 아닐까 살피는 기색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집에… 일이 생겨서요.”
“청신 씨에게요?”
도유는 일부러 돌려 말했지만 성희유는 곧바로 청신이 원흉임을 알아차렸다. 간단했다. 도유가 ‘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한 건, 청신과의 관계가 탄탄해져 동거를 시작한 뒤였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좋지 않은 일인가 보군요.”
성희유는 도유가 단순히 청신과의 단란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임무에 소홀해질 성격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역시 연차 사용은 안 되겠습니까?”
“안 되는 게 맞겠죠. 임무를 앞두고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도유 씨 한 명이 빠진다고 문제가 생긴다면, 제가 팀장 자리에 앉아 있을 자격은 없는 거겠죠.”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인 말에 도유의 눈이 반짝였다.
“연차, 사용해도 돼요. 오늘은…. 도유 씨, 제게 받은 자료 말고 다른 자료를 추가로 받은 게 있나요?”
“아뇨, 없습니다.”
“좋아요. 그럼 오늘은 이만 들어가 봐요.”
흔쾌히 내뱉어진 허락에 도유는 벌떡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성희유는 옅게 웃었다.
“어떤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해결되길 바랄게요.”
“감사합니다.”
인사를 남긴 도유는 곧바로 팀장실을 떠났다. 홀로 남은 성희유는 잠시 생각하다가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이거 가지고 있죠? 하나 팔아 주시죠.]
일주일 전에 청신으로부터 왔던 메시지였다. 첨부된 사진에 있는 마법 재료를 보는 성희유의 주홍색 눈이 진지해졌다.
자원 고갈로 현재는 인맥이 있어야만 겨우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청신이 한 달 전쯤부터 수소문해서 구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카단에 오래 있었던 성희유는 운 좋게 손에 넣었던 그 재료를 일주일 전, 청신의 반협박, 아니 요구대로 그에게 팔아 주었다.
어디에 사용할 건지 묻지 않았지만, 그가 성희유에게 직접 재료를 요청한 것이니 도유를 위해서 사용할 거라고만 짐작하고 있었다.
이 재료는 최소 일주일 이상 까다로운 정제를 해야 하는 것이고, 구매한 날 바로 정제 작업을 시작했다고 가정한다면 오늘 오전 중에 그 결과물이 나올 확률이 높았다.
“혹시 이것 때문인가.”
도유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잔뜩 굳어 있었다. 당장 카단에서 뛰쳐나갈 기세였음에도 허락을 구하는 푸른 눈이 그렇게 간절해 보일 수 없었다. 그 표정을 보고 성희유는 내일부터 임무가 시작이니, 빠져선 안 된다고 강하게 그를 몰아붙일 수 없었다.
애초에 몰아붙일 생각도 없었지만.
성희유는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도 몰랐던 까닭에 아끼던 도유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힌 뒤부터, 도유가 어떤 부탁을 한들 절대 거절하지 않겠다고 이미 각오해 두고 있었다.
‘이번에도 떨었지.’
다시 카단에서 얼굴을 보고 함께 일하게 됐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도유는 성희유를 볼 때마다 몸을 굳히거나 움찔하며 떨었다.
성희유가 조금이라도 큰 움직임을 보이면 바로 경계하며 날을 세우는 모습이 꼭 상처 입은 고양이처럼 보일 정도였다. 도유의 그런 모습들이 모두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는 걸 알았기에, 성희유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에 박힌 가시처럼 계속해서 도유가 신경이 쓰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전의 관계로 돌아갈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성희유는 당장 할 수 있는 것만 했다.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요.]
그는 청신에게 메시지를 보내 놓고, 도유를 대신해서 임무에 투입할 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
한편, 팀장실을 빠져나오자마자 쫓기듯 카단을 나선 도유는 입술을 짓씹으며 퇴근하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그의 손끝이 톡톡 운전대를 두드렸다.
“하… 왜 하필 지금 차가 밀리는 거야.”
마음 같아서는 차를 버리고 지하철을 타고서라도 집에 가고 싶었다. 도로 위에서 보내는 일분일초가 도유에게는 한 시간 단위로 느껴졌다.
초조함으로 숨마저 짓눌리는 지경에 이르자 도유는 청신이 선물해 준 작은 인형을 손에 쥐었다.
한 손으로도 쥘 수 있는 작은 곰 인형. 도유가 청신과 처음 만났을 때 만들어 줬다는 인형의 답례로 받기에는 너무나 과분한, 인형 형태의 방어 아티팩트였다.
바느질까지 모두 청신의 손을 거친 인형을 조몰락거린 덕분에 조금 숨통이 트였지만, 여전히 도유의 신경은 저를 기다리고 있을 청신에게로 향했다.
성희유를 찾아가기 약 10분 전, 도유는 청신과 함께 일하는 산은하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청신 님께서 마법 연구를 하던 도중에 부상을… 아니, 부상과 비슷한 피해를 입으셨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지금 바로 귀가하실 수 있으십니까?’
라고 말이다. 도유의 머릿속에는 마법 연구 중에 청신이 부상을 당했다는 말밖에 들리지 않았다. 병원이나 카단 내 마법사 전용 병원에 가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을 때, 산은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도 그것을 권했으나, 청신 님께서 서도유 씨와 함께 있는 것이 치유라며…. 흔치 않은 기회일 테니 단둘이 있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말이 미묘하게 이상했으나, 이미 청신의 부상 소식에 패닉 상태였던 도유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금 이렇게 귀가하는 중이었다.
한낮의 도로에서 겨우 벗어나 가까스로 집에 귀가한 도유는, 주차를 하자마자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그러곤 흡사 쫓기는 사람처럼 부부 침실로 마련한 3층으로 쿵쿵거리며 바로 뛰어 올라갔다.
“청신아-!”
침실 문을 열자, 넓은 침대 한가운데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쓴 청신의 검은 머리카락이 빼꼼 나와 있는 게 보였다. 마치 시신에 흰색 천을 씌워 놓은 듯한 모습에 심장이 내려앉은 도유가 비틀거리며 침대를 향해 다가갔다.
“청신아…?”
청신이 죽지 않았다는 건, 그의 주변을 맴도는 마력의 빛들을 통해 알았다. 사람이 죽으면 그 빛은 시신 쪽에는 결코 머물지 않는다. 더러운 것을 피하듯이 떨어지니까.
게다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이불에서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그런데도 이토록 가슴이 떨리는 건, 제 연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상태인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리라.
도유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부상을 입고 고통스러웠는지 푹 잠이 든 듯한 연인을 깨우지 않고자,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어 내리려고 손을 뻗었다.
턱!
이불에서 나온 손이 도유의 손목을 잡았다.
“청신아? 깨어 있… 어?”
도유는 푸른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제 손목을 잡은 청신의 손을 보았다.
이질감이 느껴졌다.
도유가 아는 청신은 의외로 손이 커서, 이렇게 도유의 손목을 한 손으로도 다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청신의 손은 도유의 손목을 다 잡지 못했다. 심지어 더 작았다!
“어, 어?”
“도유 형.”
스윽. 청신이 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이불을 끌어 내렸다. 도유의 눈이 더더욱 커졌다. 사정없이 떨리는 연인의 눈동자에, 슬쩍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청신이 다소곳이 앉아 수줍은 듯 웃었다.
사람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면 꿈으로 착각한다는 말이 있다. 도유는 지금까지 그런 상황을 수없이 겪었기에 어지간해서는 넋을 놓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도유가 그동안 보아 왔던 청신은 앳된 티를 벗은 건장하고 예쁘고 잘생긴 어엿한 청년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청신은 고작 15, 16살로만 보이는 인형같이 아름다운 얼굴의 미소년이었다. 또래보다 체구가 작은 건 아니었지만 일단 한눈에 보기에도 도유보다 작았다.
도유는 제가 현실에 있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 청신의 손목을 잡고 만지작거렸다. 진짜 사람의 피부를 만지는 느낌이었다.
손목을 만지작거리던 손은 팔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청신의 얼굴로 옮겨 갔다. 도유는 청신의 볼살을 주무르며 입을 떡 벌렸다.
“진짜네?”
“진짜죠. 그보다 간지러워요, 도유 형.”
“너 진짜, 이청신이야? 숨겨 둔 동생이거나 나한테 환상 마법 건 것 아니지? 솔직하게 말해. 용서해 줄 테니까.”
“그럴 리가요. 제가 왜 도유 형을 속이겠어요. 마법 연구를 하다가 실수를 해서, 부작용을 겪고 있는 것뿐이에요.”
“아…! 아픈 곳은?! 부상을 입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다친 곳이 어디야?”
“진정해요, 도유 형.”
의심과 호기심을 동시에 품은 푸른 눈이 오롯이 자신을 향한 걱정으로 가라앉자, 청신은 배시시 웃으며 도유를 달랬다.
“저 다친 곳은 없어요. 몸만 일시적으로 어려졌을 뿐이죠. 한 하루 이틀 정도면 금방 원래대로 되돌아갈 거예요.”
“정말이야?”
“네. 그러니 걱정 마세요, 도유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