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도유 형, 그 뒤에 숨긴 건 뭐예요?”
“이건, 이따가 말할게. 그런데 왜 벗고 있는 거야?”
“바지 입었잖아요.”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던 청신이 곧 깨달았다는 듯 음흉하게 웃었다. 미인이 저리 웃는 것도 아름답긴 했지만 저런 웃음을 보였을 때 높은 확률로 헛소리를 한다는 걸 아는 도유는 연인의 얼굴을 감상할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제가 눈치가 없었네요. 도유 형은 다 벗으라는 뜻에서 말해 줬는데 미안해요. 지금이라도 당장 벗-.”
“벗지 마. 상의 제대로 입어. 집 안이 따듯하다지만 너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허리춤을 잡고 단번에 바지를 벗어 내리려는 청신의 손목을 잡아 막은 도유는 코트를 벗어 걸쳐 주려다가 멈칫했다.
“…….”
팔을 내리면 청신에게 꽃다발이 보일 게 뻔하다. 그렇다고 청신이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는 상황을 방치할 수 없다. 도유의 고민은 짧았다.
“자.”
도유가 꽃다발을 내밀었다. 색색의 꽃이 풍성하고 조화롭게 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청신은 얼결에 꽃다발을 받고 고개를 갸웃하다가 도유를 보았다.
“…웬 꽃이에요?”
“네 거. 다른 사람한테 선물받은 거 아니니까 그렇게 흉흉한 표정 짓지 마. 내가 너 주려고 산 거야.”
도유는 그사이에 코트를 벗은 뒤 청신의 어깨에 걸쳐 줬다. 체구의 차이가 있어서 여며 주지 못했지만 그래도 훤히 드러났던 어깨가 가려지니 만족스러웠다.
“가운데에 가장 큰 꽃 말야. 네 눈처럼 예쁜 연두색이 섞여 있어서 그걸 메인으로 해 달라고 했어. 꽃말은 모르지만, 딱 보니까 바로 네가 생각나더라.”
현관 근처에 있던 소독제로 손을 닦은 도유는 문득 떠오른 사실에 아, 하며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그린 계열 향을 좋아하게 된 이유도 너 때문인 것 같아.”
“…네?”
되묻는 목소리가 지나칠 정도로 낮았지만, 도유는 제 생각에 정신이 팔려 청신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네 눈을 처음 봤을 때 잎사귀를 생각했거든. 신록… 이라고 해야 할까. 파릇파릇한 새싹. 여름의 색이라고 생각했더니 그때부터 무심코 연상되는 향을 샀던 것 같네.”
원래 향이고 뭐고 관심 없던 도유다. 사용하던 제품들도 그냥 그때그때 눈에 띄는 걸 썼다.
그랬던 것이 청신과 만난 뒤부터 하나둘 바뀌더니, 이윽고 완전히 바뀌었다. 도유는 이런 자신의 행동을 지금에서야 자각하고 탄성을 흘렸다.
“내가 그때부터 널 좋아했구나.”
옷을 갈아입기 위해 안쪽으로 들어가려던 도유는, 뒤따라오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저를 보는 청신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가 눈을 깜빡였다.
“청신아? 꽃 마음에 안 들어? 당장 치울, 청신아!”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하는 청신에 도유가 놀라 그를 품에 안았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투명한 눈물이 이보다 더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도유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뺨을 톡톡 두드려 닦아 주며 청신을 달랬다.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어? 미안해. 꽃 말고 다른 걸 선물해 줄게. 네가 종종 내게 선물해 줘서 너도 좋아하는 줄, 흐읍-!”
전조도 없이 청신이 도유에게 입을 맞췄다. 다급한 입맞춤에 당황하기도 잠시, 도유는 그의 등을 토닥여 주고 제 입술 사이로 파고드는 혀를 받아들였다.
거칠게 탐하려는 움직임을 진정시키듯, 먼저 부드럽게 청신의 혀를 핥고 섞으며 유도했다. 다행히 청신은 도유의 움직임에 감화된 것처럼 평정을 되찾고 움직임을 조심스럽게 바꾸었다.
“도유 형…. 저 정말 행복해서 미칠 것 같아요.”
입술을 떼자마자 예쁜 말을 골라서 하는 청신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도유는 청신의 입술에 입을 맞춰 준 뒤, 키스하는 사이에 바닥으로 떨어진 코트를 집어 들었다.
“나도 똑같아. 그러니 일단 옷 좀 입….”
말을 멈춘 도유의 시선이 청신의 바지를 향했다.
“당장 도유 형 안에 들어가고 싶은데, 그럼 안 될까요?”
청신은 제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이런 당당함이 청신다웠지만, 도유는 망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직 꽃에 대한 감상 평을 듣지 못한 것 이전에 저를 기다리느라 밥도 안 먹고 굶고 있었을 청신이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도유의 생각을 청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전 밥보다 도유 형을 원해요. 응? 도유 혀엉….”
청신이 이렇게 매달리며 조를 때마다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알아내지 못한 도유는,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그럼 나 씻고.”
“같이 씻어요.”
눈물은 멈췄지만 눈물을 글썽거리는 녹색 눈이 반짝이고 있어 도저히 거절의 말을 할 수가 없다. 도유가 고개를 끄덕이니 청신이 환히 웃었다.
*
도유는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새벽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기절하듯 잠들기 직전에 보았던 시계가 11시였으니 중간에 깬 것이다.
두 시간 뒤면 출근 때문에 일어나야 했지만 조금이라도 더 잘 생각으로 청신의 품을 파고들던 도유는 머리 위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청신이 나른한 고양이처럼 눈을 가늘게 뜬 채 도유를 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야릇한 얼굴로 봐. 더 자.”
“도유 형 보니까 너무 좋고 설레서 잠이 안 와요.”
“평소에는 어떻게 잔대.”
투덜거리면서도 손을 들어 청신의 뺨을 어루만져 주니, 방긋 웃는 것이 정말 고양이 같다. 어떤 때는 개 같더니 또 이럴 때는 고양이 같고, 침대에서는 하반신이 짐승 같은 이 인간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더 자요.”
도유의 손을 잡아 내리며 청신이 부드럽게 속삭이자, 도유는 눈을 치떴다.
“너나 자.”
청신을 만지작거리다 보니 잠이 깼다. 이렇게 된 거, 억지로 잤다간 출근이 더 힘들어진다는 걸 알기에 도유는 자는 걸 포기하고 기상 시간까지 운동이나 할 생각이었다.
“그럼 제 얼굴 계속 봐요. 만져 줘도 돼요.”
예전의 도유 같았다면 헛소리나 말라며 청신의 제안을 매몰차게 거절했을 터였다. 지금은 달랐다. 배시시 웃으며 나른하게 웃는 청신의 얼굴에 도유가 기존에 계획했던 아침 운동은 저만치 멀리 날아갔다.
“말 안 해도 그럴 거야.”
손장난을 치듯 청신의 얼굴과 머리카락, 그리고 이불 밖으로 드러난 그의 맨살을 만지작거리며 체온을 느끼던 도유는 문득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새벽 5시는 여명이라 불리는 시간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푸르스름한 빛, 그러나 더없이 맑고 아름다운 푸른빛을 홀린 듯 바라보자 도유의 시선이 어딜 향했는지 눈치챈 청신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예쁘죠?”
도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이 예뻐.”
당연히 청신도 예뻤지만 청신의 귀여운 반응을 보고 싶은 마음에 괜히 능청을 떨었다. 그러나 도유의 예상과 달리 청신은 자신이 바라던 대답이 나오지 않았는데도 토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휘며 웃었다.
“지금 도유 형이 예쁘다 한 하늘이, 제 이름의 뜻이에요.”
“응?”
“‘청신’이요. 해맑은 새벽(淸晨)이라는 뜻이거든요. 그러니 지금 도유 형의 말은, 제게 예쁘다 한 거랑 똑같은 거죠.”
“진짜….”
귀엽다. 도유는 가까스로 말을 삼키며 괜스레 청신의 뺨을 꼬집었다. 물론 아파할까 봐 조물조물 만지는 수준이었지만, 청신은 엄살을 떨며 낑낑거렸다.
“사람 마음은 참 신기한 것 같아요.”
“왜?”
“어렸을 때는 제 이름 싫었거든요. 그런데 도유 형이 제 이름을 예쁘다고 해 준 뒤부터는 제 이름이 좋아졌어요.”
청신의 이름을 예쁘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그걸 직접적으로 입 밖으로 말한 적은 없는 도유는 기억을 더듬었다. 지금 하늘을 보고 한 말 때문은 아닐 거다. 그렇다면 혹시 섹스하다가 정신없을 때 말했나? 고뇌하는 도유의 표정을 본 청신이 연갈색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주며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도유 형이랑 처음 만났을 때, 형이 해 줬던 말이에요.”
“아….”
어렸을 때, 적성교에서 만났던 때를 말하는 것이다.
“도유 형은 제게 많은 걸 알려 줬어요. 제게 사랑과 행복을 가르쳐 줬고, 슬픔과 분노도, 질투도 알게 해 줬죠. 도유 형을 볼 때마다 경이로워요. 사랑스러워서 미칠 것 같아요. 동시에 너무 행복해서 이 감정을 곱씹다 보면 눈물이 자꾸 나요.”
“청신아….”
여전히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자신은, 대체 청신에게 어떤 말을 했기에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알고 싶었다. 기억해 내고 싶었다.
“내 기억, 되찾을 수는 없을까?”
“잊은 게 아니라 사라진 거니 되찾을 수 없죠.”
“네가 어떻게 알아?”
“헤어지기 전에 도유 형이 직접 말했어요. 그러니 내가 형을 찾아와 달라고. 약속했어요.”
장난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도유는 한동안 청신을 물끄러미 보았다. 청신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고, 거짓말이라 한들 상관없었다.
도유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청신뿐이었고, 도유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 또한 청신뿐이라는 걸 이제는 잘 알기에.
도유는 결국 언어로 내뱉는 것보다 행동을 했다. 청신의 뺨을 감싸 쥐고, 고개를 살짝 들어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앞으로 그가 계속 범법자의 일을 한다 하더라도, 도유는 그를 사랑할 것이다. 그걸 알기에 과거는 더는 중요하지 않다고 이미 제 안에서 결론을 내렸다.
“…청신아.”
“네, 도유 형.”
“저기. 왜. 갑자기….”
네 아래가 꿋꿋하게 존재감을 떨치고 있는 걸까.
도유는 말을 삼켰다. 서로 바라본 채, 몸을 밀착하고 있던 터라 청신의 뜨거운 열을 품은 묵직한 살덩이가 제 하반신에 닿아 자기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왜요?”
“아니야. 난 이만 출근 준비 좀 할, 흐읏!”
도망치려는 걸 기민하게 눈치챈 청신이 도유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도유는 피어나는 꽃처럼 화사하게 웃는 청신의 얼굴에 잠시 넋을 놓았다가, 슬쩍 앞으로 옮겨 온 손이 제 것을 잡는 것을 느끼고 화드득 떨었다.
“안 돼! 나 2시간 후에 출근해야 한, 하으, 읏….”
“2시간이면 충분하네요.”
“이 나쁜, 흡…!”
2시간이면 뭐가 충분하냐고. 너도 오늘은 아카데미 말고 나랑 카단에 출근해야 하는 거 잊었냐고 따지려던 도유는 말할 틈도 없이 입을 맞춰 오는 청신을 막아 내지 못했다.
약 3시간 후, 아침부터 체력이 넘치는 연인 때문에 1시간이나 지각을 하게 된 도유는 처음으로 청신의 등짝을 두 대나 때리고 일주일간 관계 금지를 선언했다.
그 너드가 수사하는 법 외전 4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