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너드가 수사하는 법 외전 (19)화 (147/159)

#1

외전 4. 동거

병원에서 퇴원한 뒤, 도유는 곧바로 청신과 동거를 시작했다. 아니, 동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본사에서 도유에게 제공해 줬던 숙소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청신의 집에 와 한눈에 봐도 이삿짐으로 보이는 상자들이 한편에 쌓여 있는 걸 처음 봤을 때, 도유는 저것들이 자기 짐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도유 형 짐이에요.’

‘뭐? 내 짐이 왜 여기 있어?’

‘그야 제 집이 도유 형 집이니까요?’

헛소리라는 생각이 들어 종이 박스 하나를 까 본 도유는 그때까지만 해도 청신의 말을 믿지 못했다. 그러나 까는 족족 모두 제 짐이 맞았고, 반쯤 경악하며 카단에 연락해 확인해 본 결과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청신이 직접 카단에 신청해서 도유의 거주지를 그의 집으로 옮겼단다.

아무리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고는 해도 멋대로 정한 청신에게 화가 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도유는 청신에게 화를 내려고 했다. 그러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하다가, 제가 화낼 것 같은 기색을 보이자 슬픈 듯 울상을 지으며 시무룩해하는 얼굴을 보고 순식간에 분노가 사라지고 말았다.

오히려 청신이 아무리 저를 사랑한다고 해도 욕심만으로 멋대로 행동할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며 ‘뭔가 오해가 있었겠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도유는 청신을 달래고 입을 맞춰 주며 왜 그랬냐고 부드럽게 물었었다.

와중에 청신이 낑낑거리는 강아지처럼 도유의 입맞춤을 받으며 그에게 몸을 비비적거리는 것도 기꺼이 받아 주었다.

다행히 이러한 행동이 효과가 있었는지 청신은 꾸물거리며 도유에게 핸드폰에 녹음된 음성을 들려줬다.

[“도유 형, 퇴원하면 같이 살까요?”]

[“같이…? 좋아. 너랑 같이 살래….”]

[“정말요? 무르기 없기예요.”]

[“너 좋아…. 같이 있는 거 좋고, 너 예뻐서 좋으니까…. 같이 살 거야….”]

[“그럼 도유 형 숙소 짐, 전부 제 집에 옮겨 놔도 돼요?”]

[“응, 너무 좋아.”]

녹음된 제 목소리가 그렇게 낯설 수 없었다. 언제 녹음한 거냐고 따지니, 한창 약과 마법에 의해 잠과 현실을 오락가락할 때 녹음한 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맹세컨대 도유는 청신에게 저런 질문을 받은 기억도, 대답을 한 기억도 전혀 없었다. 즉 이청신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인간을 상대로 자기에게 유리한 대답을 받아 내 이렇게 제멋대로 일을 꾸민 거였다!

도유는 녹음본을 듣자마자 화를 내려고 했다. 하지만.

‘원치 않는다면 바로 원상 복구 해 놓을게요…. 죄송해요, 도유 형.’

우울해하는 걸 겨우 달래 놓으니, 음성 녹음을 들으며 그때의 기억을 되살렸는지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던 청신이었다. 그러나 도유의 싸늘하게 굳은 표정을 보고 또다시 울상을 지으며 축 처진 토끼처럼 구는 그를 보며, 도유는 결국 이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냐, 너무 좋아.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허락하자마자 청신이 언제 울상을 지었냐는 듯 화사하게 웃는 걸 본 순간 당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이런 요망함을 한두 번 겪은 것도 아니고, 이마저도 사랑스러웠기에 결국 도유는 웃음을 터트렸었다.

그리고 모처럼 동거를 시작한 것, 열심히 청신을 챙겨 주고 청신의 생활에 맞춰 봐야겠다고 다짐하기까지 했다.

과거 자신의 안일함을 떠올린 도유는 쓴웃음을 지었다. 바보 같은 서도유. 청신의 생활에 맞추긴 뭘 맞춘단 말인가? 이러다 복하사로 죽게 생겼는데.

“도유 형, 안 자요?”

기다렸다는 듯 곁에서 청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유가 스윽 몸을 돌려 보니 방금 씻고 나온 청신의 검은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졌다.

“너무 지쳐서 오히려 잠이 안 와. 그보다 이리 와.”

청신이 아무런 의심도 없이 침대 위에 올라 축 늘어져 있던 도유에게로 상체를 숙이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상체를 들어 청신의 목을 양팔로 끌어안았다. 청신은 익숙하게 도유의 허리에 팔을 감은 뒤 그가 침대에 앉는 걸 도와줬다. 나신을 가리고 있던 이불자락이 내려가며 몸이 드러났지만 도유는 부끄러워하는 대신 청신을 걱정스레 보며 애정 어린 잔소리를 했다.

“감기 걸릴 수 있으니까 머리 다 말리고 나오라고 했지?”

“도유 형이 머리 말려 주는 거 좋아요. 그리고 저 아프면 형이 간병해 줄 거 아니에요? 그럼 더 좋죠.”

헤헤 웃는 얼굴을 보니 이 이상 잔소리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도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혀를 차며 청신이 목에 두르고 온 타월로 그의 머리카락을 말려 주기 시작했다.

말 잘 듣는 얌전한 고양이처럼 눈을 지그시 감고 도유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청신에게서는 도유가 좋아하는 향, 싱그러운 풀을 연상케 하는 향이 은은하게 나고 있었다.

도유는 청신이 자기 때문에 선호하는 향을 바꿨다는 걸 알았다. 그는 본래 우디 계열의 향을 사용했다.

그러나 동거를 시작한 뒤, 도유가 옅은 그린 계열의 향을 더 좋아한다는 걸 기민하게 눈치챈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욕실에 있던 모든 것들을 그린 계열의 것들로 바꿔 버렸다.

심지어 이따금 뿌리는 향수마저도 전부 그린 계열로 바뀌었다.

청신이야 어떤 향이 나든 그냥 존재 자체가 싱그럽고 향기로운 사람이니 딱히 부자연스러움은 느끼지 못했지만, 도유는 이렇게 청신이 자기 자신의 취향도 버리고 제게 맞춰 주니 부담스러운 것보다 미안할 따름이었다.

콕.

청신의 검지가 도유의 뺨을 누르고 떨어졌다.

“무슨 생각 해요? 내 생각?”

“응.”

“역시. 어쩐지 절 보는 눈이 뜨겁더라고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도유가 순순히 긍정하니 내심 기뻤는지 청신이 녹색 눈을 반짝이며 만면에 웃음을 떠올렸다.

“무슨 생각 했는지 말해 줄 수 있어요?”

“네가 머리카락 좀 제대로 말리고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

“숨길 것 없어요, 도유 형. 제가 예쁘고 섹시해서 덮치고 싶다고 생각했잖아요.”

“동거한 뒤에, 네가 집 안에 향 나는 건 전부 다 바꿨잖아. 방향제나 바디 워시나 코롱이나 향수 같은 거.”

여전히 헛소리는 무시하는 도유의 냉정함에 잠시 상처받았는지 미간을 좁히던 청신은, 이어진 말에 눈을 깜빡였다. 마치 ‘그게 왜요?’라고 묻는 눈빛이었다.

“네가 선호하는 향이 따로 있는데 나 때문에 바꾼 거라고 생각하니 미안해져서…. 그냥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 말 나온 김에 말하는데 너 좋아하는 향 써도 돼.”

방이 한두 개인 것도 아니고, 이 집에 욕실도 네 개나 있다. 한 곳은 마법 연구실로 사용하는 방에 딸려 있긴 하지만 어쨌든 청신의 방과 도유의 침실에 욕실이 하나씩은 다 딸려 있었다. 그리고 도유가 지금 있는 방은 청신의 방이었다.

자기 방만 특별히 맞춰 준 줄 알았더니 청신의 방에 구비된 것까지 통일했을 줄은. 괜스레 청신에게 미안했다.

연애는 서로에게 맞춰 주고 존중하면서 하는 것임을 책을 통해 배웠던 도유다. 그는 최대한 청신을 존중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정신 차리고 보면 항상 도유에게 스스로를 맞추고 존중하는 사람은 청신뿐인 것 같았다. 자신은 청신에게 뭔가를 맞춰 준 적이 없는 듯했다.

생각해 보면 식습관도 그랬다. 청신은 언제나 도유가 좋아하는 것만 차려 줬다. 삼시 세끼는 물론이고 간식부터 마실 것까지. 냉장고 안에는 도유가 좋아하는 것들로 언제나 가득 채워 놓았다.

“저는 도유 형이 좋아하는 향도 좋은걸요. 그리고 이건 원대한 계획의 일부예요.”

“원대한 계획?”

청신의 머리를 열심히 말려 주던 도유가 손을 멈췄다. 타월을 거두니 평소엔 단정하게 빗어 넘기는 머리카락이 까치집이 되어 있었다.

그것만 해도 재밌는데, 청신의 표정이 진지해서 웃음까지 나왔다. 도유는 피식 웃으면서 청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주기 시작했다.

“그게 뭔데? 어디 한번 말해 봐.”

“연상 작용을 노리고 있어요. 도유 형이 앞으로 저 향을 맡을 때마다 저를 떠올리도록 만드는 거죠. 도유 형이 ‘좋아하는 향’에서, ‘도유 형의 사랑스럽고 예쁘고 잘생긴 남편 청신의 향’으로 인지하도록 말이에요.”

“…후자 쪽은 쓸데없는 말이 많이 붙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쓸데없다뇨, 저 사랑스럽지 않아요? 이제 안 예뻐요? 못생겨졌어요?”

청신이 눈물을 글썽이며 여전히 제 머리카락을 빗어 주는 도유의 손을 양손으로 꼬옥 잡았다. 도유는 턱에 힘을 줬다.

다 큰 성인이고 저보다 키가 큰 놈이건만, 이럴 때는 꼭 햄스터가 해바라기씨를 든 것처럼 앙증맞고 귀엽게 보여서 당장 눕히고 키스하고 싶었다. 하지만 충동에 따라 행동했다가 죽는 건 자신의 몸뚱이였기에 도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럼 감금해도 되죠?”

“청신아, 왜 갑자기 감금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걸까?”

“형이 절 다시 예쁘게 봐 줄 때까지 붙잡아 두고 애교 부리려고요.”

자기를 버리고 도망칠까 봐, 라는 이유가 아니다. 도유는 자신의 사랑을 믿어 주는 청신의 믿음에 내심 뿌듯해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헛기침을 했다.

“넌 여전히 예, 예쁘고 사랑스러워….”

머릿속으로는 청신에게 이런저런 형용사와 부사를 붙였지만 막상 입 밖으로 꺼내면 항상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청신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감정을 도통 말로 표현하지 않았던 도유였기에 더더욱, 어렵게 느껴졌다.

게다가 도유가 이렇게 말할 때마다 글자를 익힌 아이가 더듬더듬 글을 읽어 나가는 것을 보듯, 따스하고 안온한 온기를 품은 눈길을 보내는 청신에 도유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다행이에요. 그럼 도유 형, 키스해도 될까요?”

“아니. 잠이나 자자.”

단호한 거절이었다. 질색하는 도유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청신은 제가 꼭 쥐고 있던 도유의 손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손가락과 손가락 마디에 틈틈이 입을 맞추는 감촉이 무척이나 간지럽다.

“청신아….”

손가락을 살며시 깨물던 그는 천천히 도유의 손가락을 핥고 빨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유독 끈적하게 달라붙는 시선으로 도유를 보는 청신의 모습이 여느 때보다 색정적으로 느껴졌다. 예전에는 잘생긴 변태가 아닐까, 하고 무시했던 시선이 이렇게 느껴지다니. 도유의 손끝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