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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 이청신에 대하여
산은하는 이청신이 8살이었을 때부터 그를 모셨다. 상식적으로 어엿한 성인 남성이 비슷한 연배도 아니고 20살 이상 차이가 나는 어린아이를 모시는 일은 흔치 않았지만 은하는 거부감 없이 진심으로 청신을 모셨다.
청신은 그의 구원자였다. 하반신이 불구가 되었던 은하의 다리를 다시 움직일 수 있게 해 주었고, 죽어서도 이루지 못할 가족의 복수를 성공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매일 산지옥 같았던 세상에서 은하를 꺼내 준 것도 모자라 복수까지 이루어 준 청신의 존재는 어린아이의 형태를 한 신과 동일했다.
그렇기에 산은하는 자처하여 청신의 부하가 되었다. 청신은 처음엔 달가워하지 않았다. 성인인 남자가 은혜를 운운하며 자신을 따르는 것에 대한 어색함과 불쾌함 따위가 아니라, 단순히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은하는 그걸 무릎 꿇은 제 모습을 내려다보는 청신의 녹색 눈을 통해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
은하는 자신이 마냥 귀찮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청신의 시중을 들면서 그를 꼼꼼하게 관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은하는 청신을 파악했다. 완전히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겉보기에는 8살 아이에 지나지 않은 이 작은 신이 바라는 것, 필요로 하는 것이 뭔지 기민하게 눈치채고 그것을 충족시켜 주는 형태로 자신의 능력을 드러낸 것이다.
“청신 님, 일전에 ‘사랑의 정의’라는 도서를 읽고 계셨던 걸 봤습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라는 불손한 눈빛으로 일부러 쓰게 우린 차를 마시던 청신은 은하가 기다렸다는 듯이 꺼내 놓은 책을 보고 녹색 눈을 반짝였다. 흡사 새로운 장난감을 손에 쥔 아이 같은 반짝임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그 남자를 꼬시는 방법 100가지>
<사랑받는 남자, 그 비법 1000가지>
남들은 도저히 맨정신으로 볼 것 같지 않은 책들이었지만 산은하는 그것을 꼼꼼하게 정독한 후 청신에게 바치며 이렇게 말했다.
“청신 님께서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을 목표로 하신 듯하여, 제가 직접 읽어 보고 엄선한 책들만 골라 왔습니다.”
“…! 쓸모없는 내용이면, 은하 형도 태워 버릴 거야.”
“걱정 마십시오. 자신 있습니다.”
은하의 목소리에는 한 점 망설임조차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은하가 고른 책들은 어렸던 청신의 마음에 쏙 들었다.
이렇게 은하가 빠르게 청신을 파악하고, 열심히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청신도 점차 생각을 바꾸기 시작한 듯했다. 그는 은하가 추천해 주는 책들을 내팽개치지 않고 꾸준히 읽었다.
‘이상일까, 아니면 누군가를 기다리는 걸까.’
청신은 은하와 처음 만났을 때도 꾸준히 누군가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보였다.
청신을 처음 관찰하기 시작했을 때는, 사랑 운운하는 책 따위를 읽는 게 아니라 뛰어난 마법 실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마법 공부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청신이 다 읽고 책상에 던져둔 책들을 보았을 때 은하는 청신이 읽는 책들이 죄다 은하가 선물한 책처럼 사랑받는 방법들에 대한 내용임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의아하기도 하고, 호기심이 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제게 손을 내밀어 준 이 작은 신이 많이 외로운 환경에 처해 있는 건가 싶어서 마음이 쓰였다.
때문에 더더욱, 은하는 청신에게 자신의 능력과 필요성을 어필한다는 핑계를 대며 청신을 곁에서 챙겨 주었다.
처음 청신의 어머니 송유원은 아들을 요양차 보낸 곳에서 이상한 남자가, 심지어 카단의 심문도 받았던 남자가 자처하여 청신을 보살피기 시작하니 경계했다.
하지만 청신이 은근히 은하를 따르는 모습을 보고 의심을 품되 밀어 내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은하는 눈치가 빠르고 일을 잘했고, 청신의 하루 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송유원에게 보고했기에 곧 그녀도 은하를 조금이나마 믿게 되었다.
“청신 님.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뭔데요.”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책으로 습득하는 지식에 이골이 나기 시작한 청신이 슬슬 짜증을 내기 시작할 무렵, 은하는 전략을 바꾸었다.
“머리를 감은 뒤 이걸 머리카락에 발라 보십시오, 청신 님. 청신 님의 머릿결은 비단처럼 곱지만 이런 머릿결이니 어릴 때부터 꾸준히 관리해야 좋습니다.”
“머릿결을 왜 관리할 필요가 있어요? 책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는데요.”
청신의 나이 열다섯. 일전에 은하가 사다 준 <사랑받는 남자, 말투부터 다르다!>라는 기괴한 책을 읽은 뒤, 꼬박꼬박 존댓말로 말투를 뜯어고치고 있는 청신의 질문에 은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사랑받는 사람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줄 때, 머릿결이 억새 같으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
“또한, 머리카락은 생각보다 많은 역할을 합니다. 청신 님께서는 아름다우시지만, 머리카락도 관리하신다면 분명 자연스러운 스킨십도 이끌어 내실 수 있으실 겁니다.”
크게 깨우친 청신은 이후 머릿결을 세심하게 관리하기 시작했다. 이다음 은하는 청신을 위해 헬스 트레이너를 고르고 골라 채용한 뒤, 청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청신 님, 일전에 읽으셨던 <마음만이 전부는 아니다>라는 책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해요.”
이때 청신의 나이는 열여섯. 청신은 이미 완전히 은하를 자신의 부하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이전과 달리 아무런 불쾌감도 없었고, 친밀하기까지 했다. 은하는 그런 호의적인 반응에 힘을 얻어서 밤 동안 꾸준히 작성한 리포트를 담은 태블릿을 청신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죠?”
“청신 님의 운동을 도와줄 트레이너들의 리스트입니다. 엄선한 자들만 있으니 누구를 골라도 만족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갑자기 운동이라뇨?”
“이제 몸을 만드실 차례입니다. 단, 아직 성장기이시니 적당한 선을 지키며 운동을 해야 합니다.”
“운동은 충분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물론입니다. 다만 근래에 기업의 의뢰를 많이 받고, 흉성과 관련된 일도 하고 계시기 때문에 실내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이 늘어나지 않았습니까. 몸 상태에 따른 최적화된 운동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운동을 하고, 성장기이신 청신 님을 위해 삼시 세끼 필요한 영양소를 공급할 맛있는 식사를 만들어 줄 요리사 리스트도 준비했습니다.”
은하는 청신이 흔쾌히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고민을 한 뒤에 운동을 시작하겠다고 대답할 줄 알았다. 그러나 청신은 어린 얼굴로 미간을 좁히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오므렸다.
“으음.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은 불편해요. 은하 형이 해 줄 수는 없어요?”
청신으로부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대답이 돌아오자 그는 자신의 멍청함에 통탄하며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조언을 해 드릴 수 있도록 공부할 테니, 시간을 주십시오.”
“좋아요. 믿어요, 은하 형.”
그 이후 은하는 청신만을 위한, 그에게 최적화된 완벽한 운동 트레이너가 되기 위해 자격증을 취득하고, 관련된 분야의 전문 지식을 틈틈이 머릿속에 때려 박았다.
혹시라도 청신에게 잘못된 것을 가르쳐 줄까 걱정되어 강박적인 수준까지 자신이 청신을 위해 세운 플랜을 검토하고 수정하고 뜯어고쳤다.
솔직히 어려울 것도 없었다. 한번 집중해서 공부를 시작했더니 지루하기는커녕 즐거워서 기분 좋게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은하는 청신의 비서 일을 자처하며 운동과 종내에는 피부 관리까지 해 주는 수준에 이르렀다. 요리까지 해 주고 싶었지만 그건 그냥 사람을 고용했다. 청신이 마법사로서 더더욱 출중해지면서 늘어난 업무에 요리까지 할 시간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형, 미친 거야? 뭐야, 대체? 청신이를 사랑하는 거야?”
청신의 친구를 자처하는 주영연이 은하의 이런 노력을 알게 됐을 때 그렇게 중얼거린 게 살짝 마음에 걸렸지만, 은하는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청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가 제게 내려 준 구원의 보답을 조금이라도 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은하는 이후로도 청신의 도움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노력을 청신도 기꺼이 인정하여 그를 자신의 개인 비서로 삼았다.
청신은 은하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그를 신뢰했는지, 그의 특이한 힘으로 흉성의 인도자의 일을 해야 할 때 기꺼이 은하의 조언과 도움을 받아 행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런 은하가 할 수 없는 일이 존재했다. 흉성과 관련된 일이었다.
“으윽….”
고통에 신음하면서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는 청신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은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조금이라도 고통을 줄여 주기 위해서 약을 썼지만 효과가 그리 크지 않았다.
흉성의 힘을 억누르는 데 실패해서 청신은 일주일째 꼬박 앓아누웠다. 은하는 청신을 위해 마법과 약학까지 공부하고, 카단에 근무하는 약제사와 교류하며 청신만을 위한 약을 만들어 냈다.
다행히 약이 잘 맞는지, 이후 흉성의 힘을 억누르는 데 실패해 청신이 쓰러져도 그 약을 주사로 놓으면 청신은 고통 없이 푹 자고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올해 청신의 나이는 18살이었다. 이 나이대 애들은 대부분 한창 건강하게 학교를 다닌다. 그러나 청신은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 그가 밖에 나가서 만나는 이들은 모두 마법사 아니면 기업인들뿐이다.
그의 어머니인 송유원도 청신에게 학교에 가라고 강요를 하지 않는다. 어느 날 호기심을 참지 못한 은하는 어째서 학교에 다니지 않는 거냐고 청신에게 물어보았다.
그에, 청신은 진지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일편단심이거든요. 생각해 봐요, 은하 형. 전 예쁘고 잘생겼잖아요. 게다가 똑똑하고 천재 마법사에 어린데도 돈도 잘 벌어요. 이런 제가 학교에 다니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어요. 다들 저를 가지겠다고 치고 박고 싸우겠죠. 그리고 전 가급적이면 제 목소리를, 제 웃음을, 제 눈길을 그 사람 외엔 누구에게도 나눠 주고 싶지 않거든요.’
진중한 얼굴로 말하는 청신의 표정에 은하는 그가 자기애가 지나쳐서 오만한 발언을 한 것이라기보다 생각을 거듭하여 내린 결론을 말했음을 알아차렸다.
또한 궁극적인 이유가, 청신이 어릴 때부터 그토록 사랑받고자 노력했던 누군가를 위해서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