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너드가 수사하는 법 외전 (16)화 (144/159)

#3

성희유는 심호흡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던 이를 발견하고 흐트러진 표정을 숨겼다.

“깨어나셨습니까. 큰 소리를 내서 죄송합니다. 옮기던 도중에 떨어트려서요.”

백휘가 손에 든 것은 책들이었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성희유는 저것들이 보나 마나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신간이거나 제가 좋아할 법한 종류의 책이라는 걸 알았다.

이곳에 성희유를 감금한 뒤로 줄곧 저런 식으로 그를 챙겨 주었으니까.

“팀장님, 출출하시면 식사를 바로 준비해 드리겠,”

“내가….”

백휘는 놀란 얼굴을 했다. 이곳에 감금한 뒤로 성희유는 죽게 내버려 두란 말 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원을 보낼 때도 울지 않았고, 그저 마지막에 동생의 시신을 태울 때 ‘미안해.’라는 말만 하고 완전히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렇기에 백휘는 표정을 금방 갈무리하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희유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백휘는 그 말의 의미가 어떤 의미든, 근래에 큰 충격을 받은 성희유의 기억에 문제가 생긴 건가 하고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성희유는 고개를 숙여 제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내려다봤다. 머릿속이 멍했다. 당장 겪은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던 과거의 편린에, 마치 지금 이곳에 있는 현실이 모조리 가짜 같았다.

제 손목에 채워진 이 서늘한 수갑의 감촉도, 다리를 꽉 움켜쥔 족쇄의 감촉도, 잠들 때마다 악몽만 꾸는 그를 위해 백휘가 피운 수면 향의 은은한 향도 모두 거짓이며, 자신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성희유의 이성은 단호하게 말하고 있었다. 이곳이 현실이라고.

“성희유 씨.”

갑작스러운 호명에 놀란 건지, 아니면 지나치게 가까워진 목소리에 놀란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상념에서 빠져나온 성희유가 본 것은 침대 위에 무릎을 대고 올라와 제 어깨를 움켜쥔 백휘의 걱정 어린 눈이었다.

“성희유 씨, 제가 누군지 알아보십니까?”

백휘는 성희유가 드디어 미쳐 버렸다고 생각한 게 틀림없다. 성희유는 하마터면 헛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백휘가 갓난아기였을 때부터 봐 왔다. 아무리 미친다 한들 백휘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제가 미친 것 같나요?”

“그럼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해도 당신은 대답해 줄 수 없는 문제예요, 백휘 씨.”

대답해 줄 수 있는 건 오로지 도유뿐이다. 하지만 앞으로 성희유가 도유와 만날 수 있는 날이 올까?

‘도유 씨가 싫다고 해도 만나는 건 되겠지.’

성희유나 서도유나 카단에 붙잡혀 있는 몸이다. 청신이 최근에 도유를 카단에서 빼내기 위해 임원들의 약점을 더 깊이 파헤치고 압박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관행이란 것이 있어 지금 당장 빼내기는 힘들 터였다.

“그래도 알고 싶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수갑을 풀어 준다면 대답해 드릴게요.”

“자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풀어 드리겠습니다.”

“그럼 됐어요.”

망설임 없는 빠른 포기에 백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성희유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

미안한 마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스스로도 장담을 할 수 없었다. 지금의 성희유는 자신의 행동을 제어할 수 없었다.

생각에 몰두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저도 모르게 날붙이나 날카로운 것을 찾고 있었고, 머리를 박는 등 자해를 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있다면 혀를 깨무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희유는 그 이유를 알았다.

도유가 자신에게서 벗어나 정령의 힘을 끌어내기 위해 혀를 깨물어 자해했던 순간의 공포가, 그 애가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그때의 감정이 아직도 내면에 깊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도유를 아끼고, 동생처럼 또는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일찍 깨우쳤다면, 결코 인질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이용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게 뻔했다.

지금까지 도유를 상처 입히지 않으려고 그렇게 노력했던 스스로의 행동을 조금만 이성적으로 돌이켜 봤어도 금방 깨달을 수 있었을 정도로 도유를 아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하지만 지금 와서 깨달아 봤자 뭘 한단 말인가? 돌이킬 수 없다.

“백휘 씨. 화났어요?”

“네.”

“미안해요. 지금의 저는 죽을 생각이 없어요. 그런데 계속 생각을 하다 보면 제어가 되지 않아서 그래요.”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이런저런 생각이요.”

“그럼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제일 어려운 말이네요.”

성희유가 옅게 웃자, 백휘는 침대에서 내려가 카디건을 가져왔다. 뭘 하려나 싶어서 봤더니 백휘가 곧 성희유의 어깨에 카디건을 걸쳐 주었다.

성희유는 멀뚱히 그의 손길을 받았다. 백휘는 이불을 끌어 내리고 성희유의 발목을 감싼 족쇄를 풀어 주었다. 이쯤 되자 성희유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뭐 해요? 제가 갑자기 백휘 씨를 걷어차고 벽에 머리를 박으면 어쩌려고요.”

“제 목숨을 걸고 막겠습니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러고는 백휘는 양말까지 손수 신겨 주었다. 이제 성희유는 더는 동생의 몸이 아니다. 어엿한 성인의 모습을 한 제 원래 몸이었다. 누군가가 이렇게 양말을 신겨 줄 나이는 진즉 지났기에 당혹스러웠다.

“백휘 씨.”

성희유는 저를 애처럼 안아 들려는 백휘를 결국 걷어차 버렸다. 백휘가 예상했다는 듯이 발목을 잡아챘지만 곧 놓아주었다.

“신발 신으십시오.”

“어디 가게요?”

그렇게 물으면서도 성희유는 순순히 백휘의 뜻에 따라 주었다. 백휘는 성희유가 신발을 신자, 직접 끈까지 매어 주고는 그를 부축하려 들었다. 이번에도 그는 단호히 쳐 냈다.

“제가 환자는 아니라서요. 대답해 줬으면 좋겠는데요.”

“걷다 보면 아무런 생각도 안 납니다.”

“네?”

“성희유 씨를 해치는 생각들을 떨쳐 낼 때까지 저도 함께 걷겠습니다.”

성희유는 백휘가 제게 조심스럽게 내민 손을 보았다. 백휘는 어울리지 않게 긴장한 얼굴이었다. 그는 주홍색 눈을 깜빡이며 손을 멀거니 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아.”

기억났다.

‘만약에요, 제가 마음을 주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요. 제가 무너질 것 같아도 계속 믿고 싶은, 곁에 있거나 두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그럴 때는 어떡해요?’

도유의 질문에 제가 뭐라고 답했는지.

“도망가지 못하게….”

“예?”

“도망가지 못하게 붙잡아 두라고, 했었네요, 제가.”

순식간에 과거의 기억에 매몰된 성희유가 잠시 현실을 잊어버리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도망가지 못하게 붙잡아 둬라.

이 대답에 어린 도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이더니 진지하게 웃으며 ‘알았어요!’ 하고 대답했던 것도 기다렸다는 듯이 떠올랐다.

“성희유 씨….”

바로 전까지 또렷한 이지가 깃든 눈으로 백휘를 보았던 성희유가 갑자기 넋을 놓은 채 중얼거리자, 겨우 평정을 되찾았던 백휘의 표정이 무너졌다.

그는 지금 성희유가 정신을 놓았다고 생각한 듯했다. 지금까지 성희유가 자해를 하기 전에 영문 모를 말을 중얼거렸던 탓이었다.

백휘가 성희유를 제압하자고 판단을 내린 순간, 흐려져 있던 주홍색 눈에 옅은 빛이 돌아왔다. 성희유는 눈을 깜빡이며 백휘의 표정을 보고는 살짝 웃었다. 미안해하는 기색에, 당장 성희유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려고 했던 백휘는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도유 씨가요, 어렸을 때 제게 이런 질문을 했던 적이 있어요. 나를 무너트릴 사람인 걸 알면서도 그 사람을 믿고 싶고, 곁에 있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어떡하냐고요.”

“…그래서 도망가지 못하게 붙잡아 두라고 말씀하신 겁니까?”

“네. 하지만 도유 씨에게는 쓸모없는 조언이었어요.”

이청신이 도유를 사랑한다는 건 이제 카단 내 인간이면 누구나 알 듯싶었다. 특히 카단의 높은 자리에 앉은 이들일수록, 청신이 사랑 앞에서 얼마나 손속이 잔혹해지고 야비하고 졸렬해질 수 있는지 절감했을 터였다.

성희유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어렸다. 안개가 낀 듯 희뿌옜던 머리가 순식간에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이 짧은 순간 깨달았다.

도유는 자신의 배신으로 무너질 사람이 아니다. 성희유는 죽으면 안 된다.

도유에게 상처 입힌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이제 혼자가 아니게 된 도유가 더 행복해질 수 있도록 자신의 자리에서 굳건히 서서 그를 지키는 게 속죄였다.

여기서 이렇게 넋을 놓고 있을 시간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오히려 제 자신에게 한 대답이었던 것 같네요, 그건.”

그렇게 중얼거리듯 말한 성희유는 내밀어진 백휘의 손을 잡았다. 백휘는 자연스럽게 성희유를 부축했다.

“백휘 씨, 산책을 한 뒤에 협회장님과 통화를 하고 싶어요.”

백휘는 자신이 송유원의 명령을 받았다고 밝히지 않았지만, 성희유는 백휘를 알고 송유원을 알았기에 지금 제게 주어진 이 시간들이 저를 걱정한 그들의 배려임을 잘 알았다.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쉬는 건 질렸어요. 복귀하죠.”

“…!”

“걱정 마세요, 이제 자해는 하지 않아요.”

성희유는 부드럽게 웃었다. 정신이 명료해지니 그동안의 기억이 빠르게 떠올랐다. 이렇게 계속 얼굴을 마주하기 민망한 것도 있었지만, 모두 백휘가 성희유를 살리기 위해 했던 일이므로 그는 그냥 묻어 두기로 했다.

“백휘 씨에겐 진심으로 고맙고 미안해요. 당신이 바란다면 다른 팀으로 갈 수 있도록 제가 손써 볼게요. 다른 팀원들은 어렵지만, 당신의 재판은 재심할 경우 충분히 여지가 있어요. 당시에 없었던 증거도, 증인도 제가 꾸준히 확보해 놨으니-.”

“저는 성희유 씨의 곁에 있을 겁니다.”

붙잡았던 손이 반대로 손을 꽉 잡아 온다.

“죽을 때까지 곁에 있을 겁니다.”

“제가 놓아준다고 할 때 가시는 게 좋을 텐데요.”

특수부 제1팀에 있는 게 뭐가 좋다고 굳이 남으려는 걸까 싶었지만 성희유는 침착하게 경고만 건넸다.

백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제가 살아 있을 수 있는 건, 성희유 씨가 저를 살렸기 때문입니다. 한 번이 아니라 수차례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니 저는 죽어도 당신의 곁에서 당신을 위해 죽겠습니다.”

여지없는 단호한 어조다. 사랑 고백도 이보다 열렬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며, 성희유는 한숨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얼음처럼 굳어 있던 백휘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그 너드가 수사하는 법 외전 2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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