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말을 이어 나갈수록 도유의 푸른 눈이 깊은 색을 띠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청신은 어째선지 짜증이 났다. 그는 침착하게 제 기분을 곱씹어 보았다.
결론은 금방 나왔다. 맑은 빛으로 반짝이던 푸른 눈이 음침한 색으로 바뀐 것이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면 다시 되돌릴 수 있을까.
“돌아갈 곳이 있으면 좋겠어?”
“응….”
“어째서?”
도유는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청신은 답답해졌다. 표정까지 침울해지는 도유에 청신은 입술을 오므렸다 펴고, 손을 꼬물거렸다.
“전에 놀이터에 앉아 있는데, 거기서 놀던 애들을 데리러 그 애들의 가족들이 오는 걸 봤어. 가족이 오지 않은 어떤 애는 친구들이 떠나니까 자기 집으로 가는데, 난 그게 부러웠어. 너무, 부러웠어.”
“왜 부러워?”
“내가 있을 곳이 있어서가 아닐까 싶어. 나를 필요로 하는 곳 말이야. 그런 곳이 그 애들에겐 있으니까 부러웠던 것 같아.”
도유에게는 그런 곳이 없었다. 그래서 거의 하루 종일 앉아 있는 공공 도서관에서 만난 청현을 따라오는 데 오랜 고민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네가 필요하단다. 그 말 한마디. 처음으로 자신을 필요로 해 주는 사람을 만났기에 도유는 이곳으로 왔다. 그리고 청신을 만났다.
청신은 이제야 도유가 바라는 걸 알고, 깊고 깊게 가라앉은 푸른 눈에 빛을 찾아 줄 방법을 깨달았다.
“내가 네게 돌아갈 곳을 만들어 주면 그런 표정 짓지 않을 거야?”
“어, 뭐…?”
“네가 돌아갈 곳을 내가 만들어 줄 테니까 그런 표정 하지 마. 네 눈이 새까매져서 보기 싫어. 난 저 색을 보고 싶어.”
아이의 손끝이 하늘을 가리켰다. 구름 한 점 없이 펼쳐진 창공에 도유의 시선이 닿았다. 도유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것을 보다가 다시 청신을 보았다.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인다.
“내가 돌아갈 곳을 네가 만들어 준다고?”
“그래. 그러니까 다시 반짝거리라고.”
“반, 짝?”
“아. 만들어 줄 것도 없구나. 네가 돌아갈 곳은 내가 있는 곳이야.”
말하다 보니 깨달았다. 청신은 자신이 똑똑하단 걸 알았지만 이렇게 똑똑할 줄은 몰랐다. 스스로에게 감탄한 그는 도유의 손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네가 말한 돌아갈 곳은 너를 필요로 해 주는 곳 맞지?”
“어, 으응, 응?”
“나는 네가 필요해. 다른 인간은 널 대체할 수 없어.”
흉성과의 연결을 끊기 위해서는 대정령의 분노를 사야 한다. 현재 이 세계에서 대정령과 계약한 건 서도유뿐이다.
청신은 대정령의 계약자인 도유를 죽여야 했다. 도유는 유일무이한 존재다. 청신의 말에 푸른 눈이 크게 흔들렸다.
“왜 울어.”
겨우 눈물을 멈추게 만들었는데 또다시 운다. 도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겨를이 없었다.
청신은 도유의 얼굴을 넋 놓고 보았다. 발그레한 뺨, 눈물을 흘리는 푸른 눈, 그리고 청신이 좋아하는, 환희하는 웃음이 만면에 가득하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반짝반짝하는 푸른 눈이 개울물에 비친 햇빛보다 더 눈부셔 보였다.
아름답다. 청신은 난생처음으로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느끼며 손을 뻗었다. 도유가 순종하듯 고개를 숙였다.
청신은 도유의 눈가를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저 빛을 가지고 싶은데 어떻게 가져야 할지 모르겠다. 무언가를 가지고 싶다 생각해 본 적 없는 아이는 결국 그 방법을 떠올리지 못하고 애꿎은 얼굴만 붙들고 있었다.
“고마워, 청신아.”
“뭐가.”
“날 필요로 해 줘서 고마워. 정말 고마워….”
도유는 하염없이 고맙다고 말했다. 청신은 묵묵히 그 말을 들었다. 그렇게 둘은 함께 적성교 본부로 돌아갔다. 다시 일상이 반복되던 어느 날, 도유가 청신에게 이상한 것을 주었다.
“보답이야, 청신아.”
“이게 뭐야?”
청신은 도유가 건넨 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갈색의 천 조각, 아니 천 조각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부피가 있는 기이한 형상이다. 안에 뭔가를 뭉쳐서 넣은 듯, 울퉁불퉁한 표면이 이상해 보였다. 뭘 넣었는지 궁금해서 손으로 주물럭거리던 청신은, 검은색 실을 꿰어 동그란 모양을 만든 콩알만 한 두 눈을 발견했다.
“인형이야. 곰 인형…. 제대로 된, 좋은 인형을 선물해 주고 싶었는데 이곳에서는 구할 수가 없어서 직접 만들어 봤어.”
수줍은 듯 웃는 도유의 뺨이 발그레했다. 자신이 주면서도 민망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곰 인형이라지만, 손재주가 그리 좋지 않아 곰인 줄도 몰랐다. 손과 발도 크기가 제각각 달라서 오히려 아이가 스케치북에 그린 그림을 천으로 만든 기분이었다.
“못생겼어.”
“그치…? 역시….”
도유는 서먹하게 웃으며 청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시 만들어 볼게. 그거 돌려줄래?”
“싫어.”
“어?”
“내 거야.”
“못생겼다면서….”
도유가 어리둥절해하며 중얼거렸지만, 청신은 무시하고 품에 인형을 안았다. 그날 이후 청신은 꾸준히 인형을 품에 안고 다녔다.
못생기고 못 만든 인형이었지만, 청신은 이 인형이 마음에 들었다.
이 인형을 만든 것도, 만드는 데 사용된 옷도 도유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교주가 인형을 안고 다니고 그 인형이 도유가 준 것이 밝혀지자 도유를 보는 신도들의 눈은 이전과 비교할 바가 되지 않을 정도로 날카로워졌다. 그들은 도유의 존재가 흉성의 인도자인 청신에게서 힘을 앗아 가고, 그를 더럽힌다 생각했다.
그들은 적성교의 이인자인 전대 교주, 이청현의 명으로 도유에게 손을 대지 못했다. 속에 쌓이는 분노를 꾹꾹 눌러 담았을 뿐이다.
그러나 곧, 그 선이 무너지는 일이 일어났다.
“준비가 끝났단다.”
청현이 돌아왔다. 적성교 내에서 흉성의 힘을 가장 집약시켜 놓은 곳, 지하에 계속 틀어박혀 길고 긴 준비를 마치고 나타난 청현은 도유를 은근히 따르는 청신을 보고 빙그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청신은 청현의 웃음이 불쾌했지만 따지지 않았다. 그저 이제는 청현이 적성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아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된 도유가 겁에 질린 걸 보고, 도유의 손등을 토닥여 주었다.
이따금 청신이 잠이 안 온다고 하면, 도유가 이렇게 가슴 위를 토닥여 주었기에 따라 한 것뿐이었다.
‘왜 이런 손짓을 하는 거야?’
‘책에서 읽었는데, 이렇게 하면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고 했어.’
서툰 손길임에도 다행히 도유는 진정한 듯했다. 청현이 잠시 아들의 손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 전에 제물을 한 번 바친다고 하더구나.”
“제물이 있어?”
“올가미에 걸려 있던 걸 가져왔다고 들었다.”
산 제물을 잡기 위해 적성교의 신도들이 산 곳곳에 둔 덫과 올가미를 말하는 것이다. 올가미에 걸려 있었으니 사람은 아니리라. 청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또 시끄러워지겠네.”
청신의 중얼거림을 들은 청현은 웃었고, 도유는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였다. 그날 잠자리에 들기 전 청신의 수발을 들고 이부자리까지 펴 준 도유는 그제야 질문을 했다.
“제물을 바친다는 게 뭐야?”
“말 그대로야. 산 짐승 같은 걸 잡아서 제단에 올리고, 거기서 죽이는 행위를 제물을 바친다고 해.”
“산 짐승… 이면 살아 있는 동물이지?”
“맞아.”
가끔 바치는 인간도 분류하자면 동물에 해당되니 청신은 별생각 없이 수긍했다. 도유는 살아 있는 생물을 바치는 것 자체가 거북했는지 청신의 가슴을 토닥여 주던 손을 잠시 멈췄다.
그런 도유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청신이 물었다.
“무서워?”
“…응.”
“보지 않아도 돼.”
“너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하지?”
“응.”
“그럼 나도 네 곁에 있을래.”
청신은 눈을 깜빡였다. 이상한 감각이다. 하지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마음대로 해.”
도유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 날, 청신은 오랜만에 청현과 단둘이 하는 식사 시간을 맞이했다. 평소 이 자리에서 부자간의 대화가 아닌 흉성에 대한 이야기를 했겠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도유를 많이 따르더구나.”
“따른다고?”
“그래. 네게 필요 이상으로 접촉하는 걸 허락하고, 네가 짜증을 내지 않았다 들었거든. 그리고 네 마법도 보여 줬다던데…. 넌 평소에 그런 일을 하지 않았으니 알 수밖에 없지.”
“맞아. 우는 게 짜증 나서 그랬어. 나는 걔가 웃는 걸 좋아해.”
입가심으로 나온 차를 마시려던 청현의 손이 움직임을 멈췄다.
“걘 아는 게 많은 것 같아. 항상 내가 모르는 걸 가르쳐 줘.”
“…뭘 가르쳐 줬지?”
“좋아하는 거, 싫어하는 거 구분하는 방법이랑 기쁨, 행복, 사랑이랑, 별 보는 방법, 책 고르는 법, 시 몇 편이랑 또….”
청신은 그동안 도유에게 배운 것들을 계속 말했다. 청현의 표정이 완전히 굳는 게 보였지만 무시했다.
그의 표정 변화 따위 청신이 알 바 아니었으니까. 도유에게 배웠던 것들을 나열하던 청신이 아, 하고 짧은 신음을 흘렸다.
“걔가 신을 신발 가져와. 아니면 물건의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을 알려 줘.”
“…신발은 왜?”
“낡고 더러워. 다 떨어진 걸 신고 있는데 보기 거슬려. 걔가 이 인형도 줬으니까, 나도 줄 거야. 이런 걸 답례라고 하지?”
고개를 갸웃하며 청신이 이 순간에도 품에 안고 있던 인형을 보여 주었다. 청현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