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그동안 도유의 안에 쌓여 왔던 의문들이 울음소리와 섞여 흘러나왔다. 청신은 묵묵히 도유의 말을 들었다. 동시에 그의 말을 곱씹었다. 결론을 내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흉성의 인도자야. 그러니 그들의 기도를 들어줘야 한다고 했어.”
“아니야. 네가 바라서 된 게 아니잖아. 너는 고작 다섯 살인데. 이런 곳에 있어 봤자, 너는 행복해질 수 없는데….”
다 너에게만 의지하고, 너만을 이용하려고 한다고. 네가 또래 애들처럼 웃는 걸 본 적 없다며 청신의 앞에서 도유는 울었다.
청신은 처음으로 ‘당혹스럽다’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울다가 힘이 풀렸는지 흙바닥에 앉아 우는 도유를 보고 있으려니 꼴 보기가 싫었다.
그렇다고 혼자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도유의 얼굴을 계속 보고 싶었다. 그래,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청신은 그동안 도유가 가르쳐 준 걸 떠올렸다. 좋아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보면 된다고 했다.
딱.
청신이 손가락을 튕기자 도유의 앞에 청신의 방에 있던 책 한 권이 나타났다. 최근에 도유가 빌려갔다가 재미있고 좋았다고 말했던 책이다.
“네가 좋아하는 책이야. 이거 너 줄게. 울지 마.”
그럼에도 도유는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오히려 더 울었다. 청신은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주방에 놓여 있었을 사탕 바구니가 둘 사이에 나타났다.
“네가 좋아하는 단거야. 다 줄게. 그러니 울지 마.”
“너는, 이렇게, 상냥한데… 왜, 왜…!”
이것도 아닌가 보다. 청신은 사탕 바구니와 책을 원래 있던 자리에 되돌리며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개울물이 보였다. 도유는 예쁜 걸 좋아한다고 했다. 청신이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첨벙!
뒤에서 들려온 물소리에 도유가 울면서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푸른 눈이 크게 떠졌다. 아래로 흘러가야 할 물이 허공에 동그랗게 뭉치고 있었다.
도유의 시선을 확인한 청신이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물이 퍼져 나가듯 허공에 물결치며 언젠가 청신이 책에서 본 눈 결정의 모양으로 바뀌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따악!
한 번 더 손을 튕기자 깨지는 소리와 함께 눈 결정이 부서지며 빛을 흩뿌렸다. 도유는 눈을 크게 뜬 채, 우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것을 넋 놓고 보았다.
청신은 저게 예쁜 것인지는 몰랐다. 읽었던 책들에서 예쁘다고 했던 걸 다 때려 넣어 흉내 낸 것뿐이니까.
그렇지만 바랐던 대로 도유가 울음을 그치니 자신이 만든 형상이 예쁜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또 보여 줄까?”
도유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청신은 한 번 더 보여 줬다. 이번에는 하나 말고 여러 개로. 도유는 입을 떡 벌렸다.
이윽고 상기되며 푸른 눈을 반짝이는 모습을 보고 청신은 깨달았다.
나는 저 눈을 좋아한다, 라고.
“청신아.”
“응.”
“여기 사람들은 정말 이상한 거야. 너는 모를 수 있겠지만, 정말 아니야. 이건 아니야. 내가 있던 밖에서는 사람들이 너와 같은 아이들에게 무서운 말을 하지 않았어. 남을 죽여 달라는 부탁도, 이상한 기도도 안 했어. 내가 읽었던 책에서도 너와 같은 애들은 사랑받아야 한다고 했단 말이야.”
“그럼 내가 이상한 거야?”
“너는 이상하지 않아. 이상한 건 여기 있는 사람들이야.”
단호한 목소리가 어쩐지 듣기 ‘좋았다’. 청신은 눈을 깜빡였다. 목소리도 ‘좋아할 수 있는’ 것임을 알게 된 그는 자신이 모르는 걸 항상 가르쳐 주는 도유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네가 사람들에게 줬던 상자에 담긴 힘이 흉성의 힘이지?”
“응.”
“그게 정말 그 사람들의 소원을 이뤄 줘?”
“응. 절실하게 기도하면 이뤄 준다고 했어. 아빠가 그랬어.”
“아빠라면, 그 아저씨….”
“맞아. 널 데리고 온 남자.”
“…….”
도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생각에 잠긴 눈으로 청신의 발치를 볼 뿐이다.
자연히 청신의 시선도 도유의 발로 향했다. 전에 봤던 낡은 신발을 아직도 신고 있다.
청현이 돌아오면 도유가 신을 신발을 마련해 달라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청현은 흉성과의 연결을 끊기 위한 막바지 작업에 몰두하고 있어서 정말 가끔씩만 얼굴을 비칠 뿐이었다.
청현에게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이나, 모르는 곳에 있는 물건을 가져오는 마법을 가르쳐 달라고 해 뒀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럼 저 거슬리는 신발을 보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데 사랑이 뭐야?”
“어, 뭐?”
청신이 질문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질문의 내용 때문인지 알 수 없었으나 도유가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청신은 눈을 깜빡이며 반복했다.
“사랑이 뭐야? 나도 책에서 사랑한다, 사랑받는다는 말은 읽어 봤어. 그런데 그건 어떤 거야? ‘좋아해’랑 같은 거야?”
“아….”
도유는 더더욱 당황한 듯싶었다. 뺨이 점점 붉어진다. 한참 동안 울었던 탓에 발갛던 얼굴이 더더욱 새빨갛게 변하자 청신은 고개를 기울였다.
“또 울 거야?”
“아니, 아니야. 그게, 나도 사랑은 정의만 알아서….”
“정의가 뭔데?”
“그, 그게…. 상대방을 아껴 주고, 이쁘다고 해 주고, 사랑스럽다고 해 주고….”
청신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에 도유는 필사적으로 책에서 읽었던 것과 자신이 바랐던 ‘사랑’을 곱씹어 본 뒤에 어렵게 말을 이어 나갔다.
“사랑한다고 해 주고, 존중해 주고, 이름을 불러 주고, 언제나 곁에 있어 주는 거라고 생각해. 막… 대화도 나누는 거야. 귀찮아하지 않고, 웃어 주고, 기뻐해 주고. 무서워하지 않고….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거랬어. 으으음…. 사랑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고 해서 자세히는 모르겠어.”
“너는 사랑해 본 적 있어? 사랑받아 본 적 있어?”
아이다운 순수한 질문이 때때로 잔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도유에게는 바로 지금이 그런 순간이었다. 도유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지만 청신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것들이 많았기에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없어…. 사랑해 본 적도 없는 것 같아.”
사랑받아 본 적 없는 아이는 사랑을 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청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은 도유가 말하는 사랑에 부합하는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청신이 말했다.
“너는 날 사랑해?”
“어, 어?”
“너는 날 존중해 주잖아. 매일 챙겨 줘. 이름을 불러 주고 하루 종일 곁에 있잖아. 대화도 나누고, 날 귀찮아하지 않아. 맨날 웃어 주잖아. 내가 뭔가 하거나 네게 주면 기뻐해. 넌 날 무서워하지 않고.”
사랑이란 거, 생각보다 쉬운 거구나. 청신이 그리 생각하며 손가락으로 도유를 가리켰다.
“그리고 난 네가 귀찮지 않아. 대화를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하루 종일 곁에 있어도 요즘엔 안 거슬려. 웃는 건…. 귀찮아. 그렇지만 네가 웃는 모습이나, 기뻐하는 걸 보면 ‘좋아’. 응, 분명 좋아해. 나는 너를 사랑해?”
도유는 놀란 얼굴이었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도유가 손을 뻗어 청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매일 아침마다 빗어 줄 때와는 사뭇 다른 손길이었다.
“아니야, 청신아. 그건 사랑한다는 게 아니라 네가 좋은 사람이라서 그런 거야.”
“좋은 사람….”
처음 듣는 말을 곱씹으며 청신은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도유의 말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청신은 포기하고 호기심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럼 넌 어떤 사랑을 하고, 받고 싶은 거야?”
도유는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기나긴 침묵이 흘렀다. 청신은 가만히 도유를 들여다봤다.
그동안 청신은 침묵이 지루하다는 걸 느껴 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만큼은 이 침묵이 너무나 지루했다. 그는 처음으로 그 나이 또래 애들이 할 만한 행동을 했다. 발치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개울 쪽으로 걷어찼다.
토도독톡. 굴러간 돌멩이가 물에 닿지도 못한 채 멈추자, 청신은 마법을 일으켜 그걸 개울물에 쏙 집어넣었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나를 끊임없이 사랑해 줄 사람을 원해. 나도, 날 사랑해 줄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어떤 일을 했든 끊임없이 사랑할 테니까…. 그러니 나도, 그런 사랑을 받고, 하고 싶어.”
문득 돌아본 도유의 얼굴은 평소와 같았다. 그러나 청신을 바라보는 그 눈빛은, 결코 제가 평생 이룰 수 없는 걸 꿈꾸는 이들이 가지는 체념과 닮았다.
말을 하면서도 도유는 그런 사랑이 제게 찾아오지도, 손을 뻗지도 않을 것임을 확신하는 얼굴을 했다.
청신은 어쩐지 그게 눈에 거슬렸다.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내면의 무엇인가를 자극하는 표정을 잠시 물끄러미 보았다. 녹색 눈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도유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설프게 웃었다.
“미안해, 내가 괜한 이야길 했어. 돌아가자….”
돌아가자고 하면서도 돌아가고 싶지 않아 하는 표정이란 건 금방 알아보았다. 청신에게 당장 돌아갈 곳은 적성교다. 그것을 인지하자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 있었다.
“너는 돌아갈 곳이 있어?”
“……없어. 전에는 고아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곳에 돌아가도 날 반기지 않을 거야.”
“왜?”
“내가 기분이 나쁘대. 전에는 애들만 그랬는데, 이제는 선생님들까지 그래. 얼마 전에 파양당한 뒤로는 다들 나 보고 귀신 들렸다고 무섭다고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