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청신은 그들이 바라는 힘을 주었다. 청현이 그랬던 것처럼 작은 나무 상자에 흉성의 기운을 덜어 파편으로 만들어 넣고 건네주었다.
그들은 소중한 보물이라도 쥔 듯 고개를 숙이며 떠났다. 그들은 소원을 이뤘다. 나무 상자가 항상 청신에게 되돌아왔으니까. 이것을 만들어 낸 청현은 처음 청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를 증오하는 염원이 이 안에 담긴 흉성의 힘을 자극해서 실제로 이뤄지도록 하는 거지. 다만 흉성의 힘이 형태를 이루고, 죽음을 일으키기 위해선 생명력이 필요하단다.”
상자에 대고 타인의 죽음을 바란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조금씩 빼앗겼다. 그렇기에 눈치채지 못한 채로 죽었다. 그러나 결국에 자신들이 죽이고 싶은 인간은 죽이고 죽었으니, 그 또한 재밌지 않냐며 청현은 웃었다.
“모르겠어.”
청신은 그렇게 대답하고 청현이 만들어 둔 나무 상자에 흉성의 기운으로 만든 파편을 나눠 담을 뿐이었다.
그렇게 해가 지나고, 또 해가 지났다. 청신이 4살이 되었다. 그의 일상은 똑같았다. 나날이 미쳐 가는 듯한 적성교의 신도들의 기도를 들어주고,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흉성의 힘을 베풀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잠들었던 청신은 불현듯 새벽에 눈을 떴다.
-“내 동생. 여기 있었구나. 많이 컸네.”
피투성이의 유현이 누워 있는 청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짜 아이였다면 비명을 질렀을 끔찍한 몰골이었지만 청신은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뿐이었다.
청신은 묵묵히 몸을 일으켜서 2년 만에 보는 제 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유현의 발치에는 흉성처럼 검은색을 품은 빛이 물결치고 있었다. 홀로 검은 파도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청신은 저게 온전한 흉성이 힘이 아니란 걸 알았다. 저건 증오와 원망의 감정이 주를 이루는 흉성에 티끌만큼 존재하는 다정하고 상냥한, 깊디깊은 슬픔의 흐름이었다.
청신은 길게 눈을 깜빡인 뒤에, 유현이 어떤 상태인지 파악하고 입을 열었다.
“형, 죽었구나.”
-“으응. 엄마가 내 몸을 살렸는데, 들어갈 수가 없어.”
슬프게 웃는 유현의 얼굴을 보면서도 청신은 그냥 별생각 없었다. 제 형제가 죽었다는 걸 알아도 슬프지 않았다. 그냥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다.
인간이 죽는 건 당연한 이치고, 청신이 죽는 것도 당연한 이치니까. 당연한 흐름을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건 태어났을 때 이미 깨달았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내 동생은 나뿐만 아니라 딴 사람과도 너무 다르다고 생각했어. 근데 이제는 그게 뭔지 알겠다.”
유현이 청신의 앞에 다가왔다. 아이가 손을 뻗었다. 유현의 손이 보듬듯 조심스럽게 제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실체가 아닌 영체기에. 마지막 인사를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이기에 닿는 느낌은 없었다.
-“외롭겠다. 내 동생.”
인형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청신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외로움을 알지 못했다. 슬픔도 알지 못했다.
슬픔뿐일까. 인간이라면 응당 느낄 희로애락을 전혀 알지 못했다.
청신의 앞에 무릎 꿇고 구구절절한 사연을 읊으며 힘을 빌려 달라는 사람들의 이야길 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이상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힘을 빌려줬을 뿐이었다.
-“청신아, 부탁이 있어서 왔어. 엄마가 많이 슬퍼해. 매일매일 울어. 엄마는 아빠를 미워하지만, 너를 많이 보고 싶어 해. 네가 엄마에게 돌아가 주면 안 될까?”
“안 돼.”
아버지인 이청현이 청신을 놓을 리가 없는 것 이전에, 청신은 알았다.
작은 마을을 이루어 자급자족을 하며 살아가는 이곳, 적성교의 신도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주변에 넘실거리는 검은 그림자를 봤기에 알았다. 흉성에 퇴적된 오래된 증오와 절망이 그들의 그림자에 스미는 것도 봤다.
흉성에게 감정이 있다면, 그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축배를 들듯 그림자에 넘실거리듯 스미며 기뻐하고 있었다.
어린 흉성의 인도자는 알았다. 이곳에서 제일 먼저 적성교의 신도들을 삼킨 재앙은 순식간에 바깥으로 퍼져 나가 이 나라를, 나아가 세계를 천천히 죽음의 늪에 가라앉힐 것이라는 걸.
청신이 수고스럽게 흉성의 힘을 나누지 않아도 이곳에 있으면 흉성의 힘이 알아서 신도들에게 끈적하게 달라붙은 검은 그림자에 나뉘어 스며들었다.
만약 이 자리를 떠난다면 갈 곳 잃은 힘은 청신을 괴롭힐 것이며, 끝끝내 그가 머무는 곳에 있는 인간들을, 송유원을 삼키려 들 것이 분명했기에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그렇구나….”
유현은 그 말을 끝으로 말을 하지 않았다. 물끄러미 제 발치를 보았을 뿐이었다. 그런 유현의 모습을 보며 청신은 생각했다.
이제 그만 자면 안 되나? 하고. 내일은 또다시 길고 지루한 인간들의 기도를 들어줘야 한다.
그들은 나날이 미쳐 가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힘을 빌리기 위해 외부에서 온 인간이 청신을 껴안았다는 이유로 구타해서 죽이고 밭의 거름으로 만들었다.
그 시끄러운 자리에서는 졸고 싶어도 졸 수가 없어서 짜증이 났었던 것이 떠올랐다.
-“엄마에게 희망을 줄 수 있어?”
“희망?”
청신에게는 너무나 낯선 단어다. 적성교에 들어온 뒤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단어. 소리를 내어 곱씹어 보고, 입 안으로 더듬거려 봐도 생소했다.
-“내 몸이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는 게 느껴져. 그러니까 엄마가 다시 웃을 수 있게 될 때까지 내 몸이 버텼으면 좋겠어. 내가 깨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싶어서….”
말이 이어질수록 유현의 얼굴은 점점 시무룩해졌다.
아직 어렸지만 유현은 청신이 청현에게 납치당한 뒤,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된 뒤로 무너지기 직전이었던 송유원의 곁을 지킨 아이였다.
너무나 일찍 철이 들어 버린 아이는 자신의 말이 허황된 소망이라는 것을 알았다.
영체인데도 훌쩍이며 울기 시작하는 유현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청신이 입을 열었다.
“그거라면 가능해.”
적성교에 온 뒤 본격적으로 청현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이어받은 청신은, 흉성에 쌓인 역대 인도자들의 기억 또한 읽어 낼 수 있었다.
유현이 말하는 조건에 부합하는 마법을 만들어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만약 청신에게 타인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능력이 있었다면 그는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청신은 타인을, 특히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사라지는 유현의 모습을 보고 마법식을 짜내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엄마에게 전해 줘.”
새벽 동안 종이에 적은 마법식을 청현에게 내밀자, 청현은 그것을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이건 갑자기 왜?”
“형이 죽었어. 몸만 살아 있어. 흐름에 섞이기 전에 날 찾아와서 부탁한 거야.”
“…….”
“엄마 줘.”
청현은 청신이 건넨 종이를 받아 들고 사라졌다. 그가 몸을 돌리기 전, 청신과 똑같은 녹색 눈에 물기가 어리고 눈물이 흐르는 걸 보았지만 청신은 그의 눈물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간은 또다시 흘렀다. 청신의 일상도 반복되었다. 달라진 거라면 귀찮은 게 늘었다는 걸까?
“교주님, 안녕하세요~!”
주영연. 신도의 아들 중 하나로 가끔 오는 녀석은 청신에게 귀찮게 말을 걸었다.
적성교에서도 간부에 속하는 이의 아들이라 평소 일반 신도가 청신에게 말을 걸면 구타를 했던 것과 다르게, 녀석은 눈총만 받고 끝났다.
그래서 귀찮았다. 차라리 맞고 쫓겨났다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고, 그럼 귀찮은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교주님, 교주님 이것 보세요. 교주님이 전에 보고 계셨던 책과 관련된 거예요.”
청신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주영연을 보았다. 영연은 냉큼 가져온 책을 내밀었다. 금서로 지정된 마법 책이었다.
이게 뇌물임을 알았지만 그건 청신과는 관계없었다. 그는 그저 제 호기심을 충족하는 것에 관심이 있을 뿐이기에, 옆에서 조잘조잘 말을 거는 영연을 무시하며 책을 펼쳐 들었다.
영연은 주말마다 적성교에 찾아왔다. 그리고 꾸준히 청신에게 말을 걸었다. 신도들은 점점 그런 영연을 질투했다.
평소라면 내치라 명령했을 교주가 책에 정신이 팔려 침묵을 택했던 까닭이다. 그렇게 영연의 존재에 사람들의 불만이 쌓여 가던 무렵, 영연은 공부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며 전보다 드물게 놀러 왔다.
그러던 어느 날,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던 날에 한 남자가 찾아왔다.
남자는 지금까지 청신을 찾아왔던 사람들 중에 가장 특이한 사람이었다.
바깥에 내리는 새하얀 눈처럼 불순한 색이 전혀 섞이지 않은 완벽한 백발, 흐릿하게 느껴지는 인상을 단번에 선명하게 만드는 주홍색의 눈을 가진 남자였다.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성희유라고 합니다.”
성희유의 품에는 그와 닮은 작은 어린아이가 잠든 듯 안겨 있었다. 단순히 그뿐이었다면 청신은 그에게 신경을 껐을 것이다.
하지만 성희유는 그 어떤 신도도, 힘을 빌려 달라며 찾아왔던 인간들도 보여 준 적 없던 것을 청신에게 보여 주었다. 아니, 보여 줬다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본인은 모르는 듯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