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그래서 이윤원 씨와 교제 중인 분이 있다면 그분과 함께 넷이서 노는 건 어떻습니까?”
“네?”
윤원이 눈을 깜빡이자, 도유가 잠시 망설이는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머뭇거리는 듯 살며시 떨리는 입술, 점점 붉어지는 뺨,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는 손을 윤원은 그가 지금 부끄러워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 더블데이트라고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걸 제안하는 겁니다.”
더블데이트, 라는 단어를 말할 때 도유의 목소리가 굉장히 작았지만 모두가 귀를 기울이고 있던 까닭에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윤원은 입을 떡 벌렸다. ‘그’ 특수부 제1팀 서도유가 더블데이트를 제안하다니! 윤원은 입을 떡 벌릴 뻔하다가, 청신의 표정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청신은 도유의 옆얼굴을 빤히 보고 있었다. 꿀이 흐르다 못해 꿀벌이 꼬이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그윽하고 애정이 담뿍 담긴 눈으로 말이다.
못 볼 걸 본 윤원은 대답을 기다리는 도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도유는 은근히 기대를 품고 있는지 푸른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나 윤원은 그의 시선에 부응해 줄 수가 없었다.
이윤원은 사귀는 사람이 없었다. 아카데미에 잠입 임무 중에 사귀자 한 사람이 많았으나 사귀지 못했다.
“선배님, 죄송하지만 제-.”
애인이 없어요, 라고 하려는 순간 청신이 윤원을 스윽 보았다. 그가 소리도 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만들어. 죽기 싫으면’.
“애인이 있기야 하겠죠. 네, 있어요. 있으니까 좋아요! 더블데이트 하죠! 대신 시일은 나중에 도유 선배님이 다 나으시고, 안정되시고, 여유 되실 때 정해요!”
“알겠습니다.”
아카데미에 잠입하라는 임무보다 더 고난도의 임무를 제 스스로 짊어지게 된 윤원은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안도하는 듯 웃는 도유에게 마주 웃어 보였다.
*
윤원이 병문안을 다녀간 뒤, 2주 후에 도유는 퇴원을 했다. 그마저도 청신이 한 달만 더 있자고 졸랐지만 단칼에 거절했다.
후유증이 거의 사라진 데다, 의식이 깨어 있을 때 하는 일이라고는 청신과 대화를 나누거나 책을 읽는 것뿐이기에 심심했다.
그나마 집으로 돌아가면 마법 공부나 바깥소식을 자유롭게 접할 수 있었기에 퇴원을 고집했다.
청신은 도유를 간병해 주는 것이 나름 마음에 들었었는지 노골적으로 아쉬워하면서도 도유의 뜻을 들어주었다.
“…이건 왜.”
차에 오르자마자 청신이 손목에 채운 걸 본 도유는 눈살을 찌푸렸다.
손목에 채워진 건 입원했을 당시에 청신이 채워 놨었던 수갑이었다.
그때의 청신은 감금 운운했지만, 실상은 도유의 상태가 제일로 심각했을 때 경련을 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에 다치는 걸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걸 알았다.
실제로 청신은 도유의 몸 상태가 호전되고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오자 수갑과 족쇄를 풀어 주었다.
그때 보고 영영 보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 제 손목에 버젓이 채워지니 기가 찼다.
“이런 걸 차고 다니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으음. 저라면 ‘아, 저 커플은 정말 열렬한 관계구나.’ 하고 생각할 거 같네요. 봐요.”
남들이 보기에는 얇은 가죽 팔찌같이 보이는 수갑과 연결된 쇠사슬이 운전대를 잡은 청신의 손목과 이어져 있다. 청신이 손을 흔들자 얇은 쇠사슬이 잘그락거렸다.
“난 싫어.”
그렇게 말하면서 도유가 수갑을 풀어내기 위해 다른 손으로 수갑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와중에 아티팩트로 만들었는지 쉽게 풀릴 것같이 생겼음에도 꼼짝도 않는다. 차를 막 출발시키고, 도로에 들어선 터라 청신은 차마 도유를 말리지 못하고 흘끗흘끗 애절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도유 형, 제가 싫어요?”
눈빛 공격이 통하지 않자 청신이 패턴을 바꿨다. 도유는 여전히 수갑을 풀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네가 싫은 게 아니라 이게 싫은 거야.”
어떻게 청신을 싫어할 수 있는가. 이제 도유에게 남은 사람은, 도유가 사랑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청신이 유일무이하다.
지금도 도유는 성희유에게 배신당한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실종된 그가 걱정되면서도 미웠다. 동시에 안타까웠다. 정령의 불을 끌어내기 위해 혀를 깨물었을 때, 성희유는 곧바로 도유를 선택했다.
절박한 얼굴로 도유를 불렀다. 그대로 도유가 죽어 버리면 죽을 듯한 창백한 낯빛으로 지혈을 하고 아티팩트를 써 줬다.
혹시라도 불길이 도유마저 해칠까, 그가 최대한 제 몸으로 도유를 끌어안고 불길로부터 가린 것이 보였기에 괴롭기도 했다.
이러한 생각과 그에 따른 감정이 지속될 때마다 도유는 성희유에 대한 것과 별개로 청신에게 더 집착하려는 자신을 자각했다. 이유는 잘 알았다.
성희유와 달리 청신은 절대로 도유를 배신하지 않을 존재기에 계속 곁에 두고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서. 서로 마음을 터놓고도 이런 불안증을 안고 있는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상념에 빠져 있는 도유의 귀에, 청신의 시무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요…?”
“커플 링도 안 맞췄잖아.”
예상하지 못했던 도유의 말에 청신이 저도 모르게 도유를 보았다.
“앞.”
“바, 방금 뭐라고 했어요, 도유 형?”
도유의 말에 얼결에 앞을 보긴 했지만 청신의 녹색 눈은 기대감으로 부풀어 반짝이고 있었다. 도유는 수갑을 풀어내는 걸 포기하고 앞을 보며 대답했다.
“커플 링 말야. 그… 사귀면 커플 링 맞춘다고 들었는데 넌 그런 것도 안 주고 이런 수갑부터 줬잖아. 그러니 내가 기쁘게 받을 수가 없지.”
말하고 보니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서 도유는 허심탄회하게 다 털어놓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너, 나랑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있으면서 혼자 결혼식 준비하려고 했잖아. 정말 그래도 되겠어? 프러포즈도 안 하고, 약혼식도 안 하고?”
연애는 물론 사랑도 해 보지 못한 도유였지만, 남들이 어떤 과정을 밟아 결혼하는지는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어이가 없어졌다.
“너 이런 거 챙기고 좋아하는 성격인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라면 미안하다. 혹시 네가 다 건너뛰고 결혼식부터 올리고 싶다면 반대하지는 않을게.”
도유의 말에 반성하고 자책하며 후회를 곱씹던 청신이 황급하게 부정하려고 입을 벌린 순간, 도유가 먼저 말을 가로챘다.
“그런데 난 그런 절차를 밟았으면 하니까 내가 네게 할게. 그러니 그때까지 결혼은 보류하자.”
끼이익!
청신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갑작스럽게 멈춰 섰지만 골목이었기에 뒤따라오는 차가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도유는,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풍경을 눈에 담고 쯧 하고 혀를 찼다.
이 길은 청신의 집으로 향하는 골목 중 하나다. 분명 제집에 데려다 달라 했는데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청신의 능청에 헛웃음을 짓다가, 청신의 열렬한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도, 도유 형. 지금 뭐라고 말한 거예요?”
얼마나 당황했는지 입술을 벙긋거리는 것이 새 같다. 도유는 그에게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곧 생각을 접었다. 키스하는 순간 청신이 덮쳐 올 게 뻔했기에 대신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커플 링도 주고, 약혼식 하면서 약혼반지도 줄 거고, 프러포즈도 할 거라고. 그러니 그때까지 결혼식은 좀 미루자. 대신 신혼여행지는 네가 바라는 대로 하게 해 줄게.”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어질수록 점점 발갛게 물들며 환희에 차는 청신의 표정을 음미하듯 바라보던 도유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손을 뻗었다.
연인의 뺨을 손으로 감싸고 검지로 입술을 꾹 눌러 주었다. 키스를 할 수 없으니 손으로 대신한 것이었지만, 그 순간 청신이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이렇게 보면 청신은 정말 그 나이 또래답고, 앳된 면이 있는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하지만 도유는 이제는 알고 있었다.
이런 모습이 자신에게만 향하는 것이며, 청신이 사람다운 ‘감정’을 느끼고, 사고하는 것 또한 자신에게만 해당된다는 걸.
그걸 받아들이니 처음에는 타인을 향한 청신의 몰이해가 두려웠던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지금의 그가 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빠아앙!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정신을 차렸는지 청신이 다시 차를 운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발긋하게 물든 눈으로 앞을 노려보고 있었다. 감격한 나머지 또 멋대로 떨어지려는 눈물을 자제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저도 도유 형에게 해 주고 싶어요.”
“네가 해 줘도 기쁠 거야. 다 네가 할래?”
“아니에요. 같이 준비해서 같이 해요.”
“…그럼 놀랄 게 없을 텐데. 보통 프러포즈는 놀라게 해 줘야 하잖아.”
“아…. 그럼 프러포즈만 도유 형이 해 줘요. 딴거 준비는 같이 할게요. 응?”
“알았어. 네가 바라는 대로 하게 해 줄게.”
“고마워요. 사랑해요. 정말 많이 사랑해요, 도유 형.”
운전대만 잡지 않았으면 펑펑 울지 않았을까 싶은, 감정을 참고 억누르느라 힘이 잔뜩 들어간 얼굴로 청신은 꿋꿋하게 자신의 집을 향해 운전했다. 도유는 그런 청신을 애정을 담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뒤, 집에 도착해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마자 도유를 덮친 청신이 ‘내가 널 사랑하지만 차에서 하는 건 싫어’라며 뺨을 꼬집히고 버림받은 건, 어찌 보면 사소한 일이었다.
그 너드가 수사하는 법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