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너드가 수사하는 법 (126)화 (126/159)

#126

입 안에 말이 맴돌았으나 뱉지 않았다. 지금의 도유는 정신이 없었다. 정신을 잃기 전까지의 모든 상황과 그가 했던 말들이, 제가 내뱉은 사랑한다는 말이 기다렸다는 듯 떠올라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인고의 시간을 거쳐 기억을 정리하고 상황 파악을 끝낸 도유는 길고 가늘게 심호흡을 한 뒤, 청신에게 말했다.

“아직 네 여보 아니야.”

“그렇긴 하네요. 결혼식 올릴 때까진 도유 형… 아니지, 자기라고 불러도 될까요?”

이런 호칭, 해 보고 싶었어요. 하면서 수줍게 웃는 청신은 굉장히 행복해 보였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는 곧 잠이 싹 달아난 듯 맑은 푸른 눈으로 제 얼굴을 살피는 도유와 시선이 마주치자 울상을 지었다.

“호칭은 네 마음대로 해도 되는데, 왜 그런 눈으로 봐?”

“그런 눈이요?”

“걱정하는 것 다 티나.”

처음에는 청신이 통증 운운하기에 무슨 소린가 했는데 정신이 조금 맑아지니 그가 말하는 게 뭔지 알았다.

도유는 정령의 힘을 너무 많이 쓰고 말았다. 청신을 제압하기 위해 성희유가 멋대로 끌어 썼던 정령의 힘뿐만이 아니다.

도유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 정도로 자해하면서 정령이 사용한 힘이 고스란히 도유의 육신에 후유증으로 남았을 것이다.

이번처럼 힘을 사용해 본 적이 없고, 지금은 청신의 말대로 그가 마법을 써 준 덕에 그냥 평상시보다 몸이 무겁다는 감각밖에 없어 얼마나 아플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는 청신을 향해 손을 뻗으려다가, 족쇄 때문에 얼마 들어 올리지도 못하고 손을 멈춰야 했다.

“족쇄 좀 풀어 줘.”

“싫어요.”

“널 만지고 싶어.”

“알았어요.”

칼같이 대답한 청신이 손가락을 튕기자, 도유의 손목을 휘감고 있던 가죽 벨트에서 잘각하는 소리와 함께 손목의 족쇄가 풀렸다. 도유는 잠시 기가 찬 표정으로 청신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이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도유는 웃으며 손으로 청신의 뺨을 감싸 보기도 하고, 제게 몸을 기울이는 그의 귀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쓰다듬으며 연인을 만끽했다.

청신을 받아들이니 이토록 마음이 충만하고, 그가 사랑스럽다. 한 달간 피해 다닌 까닭에 손가락에 감기는 그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마저 마음에 들었다.

청신은 그런 도유의 얼굴을 빤히 보며 뺨을 붉혔다. 그러면서도 사랑에 푹 빠진 눈으로 도유의 표정 변화를, 눈길을, 기쁨으로 작게 흔들리는 숨결을 관찰했다.

그는 도유가 아프지만 않았다면 당장 도유를 덮쳐 버렸을 텐데, 하고 속으로 아쉬워하며 제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을 느꼈다.

한참 동안 청신을 만지던 도유의 손은 마지막으로 무릎 위에 떨어진 그의 손을 꼭 잡아 보는 것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도유는 제가 쏜 총에 맞아 다쳤던 청신의 상처가 모두 나았음을 확인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짧은 침묵이 맴돌았다. 도유가 물었다.

“팀장님은?”

“…….”

청신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부루퉁한 얼굴이 되었다. 그런 연인의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으며 도유가 말했다.

“청신아, 대답해 줘.”

“…몰라요.”

“청신아….”

설마 죽였니? 하는 질문이 담긴 도유의 눈빛에 조금 장난쳐 볼까 하고 생각했던 청신은 말을 이었다.

“정말 몰라요. 그날 실종됐으니까요.”

“실종?”

푸른색 눈이 크게 흔들리는 걸 보고 성희유를 질투했지만, 결국 도유의 마음이 머무르고, 그가 선택한 이가 자신이라는 걸 알기에 청신은 순순히 대답했다.

“네. 그날 도유 형이 기절하고 나서 성희유를 죽여 두려고… 그렇게 보지 마요, 도유 형. 다신 허튼짓을 할 수 없도록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 놓을 생각일 뿐이었, 아야야…!”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손길은 솔직히 아프지 않았지만 도유의 반응을 보고 싶어서 엄살을 부리자 도유가 곧바로 손에서 힘을 풀고 걱정스레 청신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 손길을 충분히 만끽한 뒤, 청신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날부터 성희유는 본부에도, 지금도 돌아오지 않았어요. 핏자국이 남아 있길래 자살이라도 한 건가 싶었지만, 자살했다면 시신이 있어야 하잖아요.”

“…도망간 거야?”

도망갔다면 카단에서 움직일 터였다. 도유는 문득 떠오른 기억에 청신을 붙들었다.

“휘는 어떻게 됐어?! 팀장님이 도주했다고 한 것도 거짓말일까? 응?”

성희유가 도유를 이용하기 위해 백휘를 미끼로 삼은 것뿐이라고, 실제로 백휘의 추격 명령 따윈 내려진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도유가 밝은 얼굴을 했다. 그러나 청신은 도유의 희망을 깨고 고개를 저었다.

“연백휘가 임무 복귀 중 이탈한 건 사실이고, 카단에서 추격 명령을 내린 것도 사실이에요, 도유 형.”

“아….”

“하지만 그는 스스로 본부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직접 어머니를 찾아갔죠.”

“살, 살았어?”

“음, 모르겠네요. 어머니께서 제게도 말씀해 주시진 않아서요. 다만 목숨이 위험한 특수 임무에 단독 투입했다고만 하셨어요.”

“…….”

도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협회장인 송유원이 직접 명령한, ‘목숨이 위험한 특수 임무’라면 생존 가능성이 없단 말과 동일하지 않을까. 심지어 단독 투입이다. 희망에 반짝였던 푸른 눈이 깊게 가라앉아 갔다.

성희유에게 배신당하고 이용당했다는 사실도 아직 완전히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무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20년을 넘게 함께하던 이들을 순식간에 잃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욱신거려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도유는 청신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안아 줘.”

“안 돼요. 도유 형 몸 상태가-.”

목소리가 멈췄다. 도유는 힘이 없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상체를 세워 앉고는 그대로 침대 위에 걸터앉은 청신의 몸에 쓰러지듯이 안겼다.

도유에게 남은 사람은 청신뿐이다. 도유는 있는 힘을 다해 청신을 꽉 끌어안았다. 제게 영원을 약속하고, 사랑을 약속한 유일무이한 사람마저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그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었다.

얼결에 도유를 끌어안은 청신은 잠시 눈을 깜빡이며 도유를 보다가 아예 몸을 돌려 앉으며 그의 몸을 더욱 단단히 안았다.

“끅….”

청신은 제 가슴팍이 젖어 가는 걸 느꼈다.

얼굴을 파묻은 채, 분노와 배신감에 치를 떨며 증오를 택하는 대신 슬픔을 택한 도유를 가만히 보았다.

솔직히 청신은 성희유와 연백휘 때문에 연인이 운다는 걸 깨닫자마자 속이 뒤집혀 그들을 잡아 죽이고 싶었다.

자신 때문에 우는 게 아니라 타인 때문에 우는 것이 질투가 나서 속에 천불이 났다.

차라리 슬픔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증오하고, 분에 못 이겨서 우는 거라면 나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곧 그 생각은 싹 지워졌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면 눈물을 금방 그칠 줄 알았는데, 도유의 눈물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괴롭게 잇새 사이로 내뱉는 숨소리. 슬픔으로 인한 고통에 끅끅거리며 도유가 괴로워하고 더더욱 슬퍼하는 모습을 보니 청신도 슬프고 아팠다.

연인이 품은 슬픔을 제게 나누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그는 도유의 머리 위에 하염없이 입을 맞추며 사랑스러운 연인을 달래 주었다.

*

병원에서 처음 눈을 뜬 뒤부터 도유는 깨어 있는 날보다 잠든 날이 많아졌다.

이제까지 겪었던 후유증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통증에 울며 신음하는 도유의 모습을 보다 못한 청신이 계속 마법으로 재우거나, 약으로 재우는 날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가끔씩 도유가 눈을 뜨면 청신은 너무 울어서 붉어진 눈을 예쁘게 휘며 웃어 주었다. 마치 울지 않았다는 것처럼 사랑한다, 보고 싶었다, 하면서 현재 결혼 준비를 어디까지 진행했는지를 말해 주었다.

솔직히 도유는 눈을 뜰 때마다 전신을 두드리는 통증보다 점점 성대하게 - 나쁜 말로는 돈지랄 - 바뀌는 결혼식이 더 무서웠다.

오죽했으면 ‘버진로드에 마석을 빼곡하게 깔아서 환상 마법과 조명을 이용한 각 테마 결혼을 준비 중이에요.’라는 말을 들은 뒤 다시 잠들었다가 다음에 깨어나자마자 청신의 주둥이부터 틀어막고 이렇게 말했겠는가.

‘결혼식 준비 일단 멈춰. 뭐든 확정하지 마. 결혼 너 혼자 하냐? 나랑 하고, 나랑 같이 정해.’

혼자 폭주하는 청신을 그냥 뒀다간 365일 내내 결혼식을 올리자고 할 것 같아서 말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날들이 반복되고 시일이 좀 지나자 도유를 괴롭혔던 통증은 더는 약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완화되었다.

병원에 입원한 지 한 달 만에 맑은 정신으로 있게 된 도유는, 마치 죽었다 되살아난 연인을 대하듯 저를 껴안고 우는 청신을 달래 준 다음 날 뜻밖의 병문안을 받았다.

“도유 선배님…!”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정보부 제2팀 이윤원이 과일 바구니를 들고 병실로 들어왔다.

아카데미에 잠입 입무를 했을 때, 도유에게 정보를 줬던 윤원은 그 임무가 끝나자 본부에서도 훈련소에서도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반갑게 느껴지기는커녕 의문만 들었다. 시일이 꽤 지난 데다 윤원의 행색을 보니 카단 본부로 복귀한 것 같은데 왜 병문안을 온 걸까? 심지어 반가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윤원은 도유와 눈이 마주치자 활짝 웃다가 청신의 서릿발 같은 시선을 느끼고 쪼그라들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쯧 하고 혀를 차던 도유는 청신을 보았다. 윤원이 찾아온 것도 놀라웠지만, 대놓고 도유를 독점하고 싶어 하는 청신이 둘만 있던 공간에 타인을 들인 게 의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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