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도유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성희유 쪽으로 이 안의 생명을 모두 태워야 사라질 것 같았던 불 벽의 일부가 열렸다.
딱 성희유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통로다. 성희유는 도유가 제게 이 순간조차 동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어요. 기다릴게요.”
성희유는 품에 안은 무원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불 벽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외부와 내부를 차단했다.
“청신아.”
말을 하는 순간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은 혀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도유는 눈살을 찌푸렸다. 청신은 도유의 부름에 조금 정신을 차렸는지 눈을 깜빡였다.
“네, 형.”
“나는 너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를 피해 다니는 한 달 동안 고민이 깊었고, 성희유에게 그가 준 마법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소름이 끼쳤던 것이다.
다만 이해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도유는 이대로 제가 청신의 심장에 총을 쏴 맞춘다고 해도 청신이 피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이 순간에도 도유를 갈망하는 청신이라면 성희유의 말대로 그러한 죽음조차 ‘사랑’의 형태의 하나로만 받아들여질 뿐 이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증명하듯 청신이 유리알 같은 눈으로 도유를 보며 말했다.
“저는 도유 형만을 원해요. 형이 저를 이해하지 않아도 사랑해 주기만 하면 이해받지 않아도 돼요.”
달래고 어르는 듯한, 동시에 호소하는 목소리에 도유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도유는 빨리 눈이 회복되길 바랐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녹색 눈이 어떤 빛을 품었을지 궁금해서.
“제가 도유 형을 이해하면 되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요.”
청신이 도유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는 걸음이었지만 도유는 곧바로 정령의 힘으로 청신의 발을 묶었다. 성희유가 실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사용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기세의 넝쿨이 그의 발목을 단단하게 움켜쥐었다.
“저는 도유 형을 잊지 않았어요. 약속을 잊지 않았고 도유 형이 바라는 사람이 되기 위해 살아왔어요. 도유 형이 바랐던 대로, 형을 끊임없이 사랑할 수 있어요. 형이 제게 이렇게 총을 쏴도 사랑해 줄 수 있어요. 하지만.”
청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슬퍼서 견디기 힘들어요. 저를 사랑해 줘요. 제게 이렇게 총구를 겨누지 마세요, 형. 형이 날 사랑해 주길 바라면서 20년을 넘도록 기다렸는데. 한 달 가까이 나를 피하고, 도유 형을 납치하고 죽이려고 한 성희유를 감싸는 건, 받아들이기에 너무 아파요.”
이제야 완전히 회복된 눈이 제대로 청신의 모습을 비췄다. 그를 겨눴던 도유의 총구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청신은 눈물 없이 울고 있었다. 너무 많이 울어서 더는 흘릴 눈물조차 없다는 듯이.
툭. 손에 들고 있던 총이 바닥에 떨어졌다. 주워 들 생각을 못 했다. 주저앉은 채 저를 올려다보는 청신의 눈빛이 너무나 익숙해서 움직이지 못했다.
버림받을 거라는 두려움에 삼켜졌으면서도 사랑을 갈구하는 애절한 눈빛. 사랑을 하면서도 사랑하는 이가 언젠가 떠나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녹색 눈은 너무나 슬프게 빛나고 있었다. 12살의 서도유와 똑같은 눈빛으로, 이청신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내가… 뭐라고 했었어?”
가까스로 내뱉은 목소리가 잔뜩 갈라졌지만, 도유는 말을 이었다.
“너와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네게 뭐라고 했길래 날 이렇게 사랑하는 거야? 나와 무슨 약속을 했다는 거야? 내가 바라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20년간 계속, 날 떠올리면서 살아왔단 뜻이야?”
“…….”
마음을 거울에 비춘 것처럼 완벽한, 도유가 바랐던 감정을 품고 고스란히 드러낸 녹색 눈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릴 적부터 도유는 바라고, 바랐다. 자신을 사랑해 줄 사람을. 어떤 일이 있어도, 어떤 일을 함께하더라도 죽을 때까지, 아니 죽은 후에도 사랑해 줄 사람을 바랐다.
“청신아. 사람의 감정은 생각처럼 느닷없이 떠오르는 게 아니잖아. 네가 나를 사랑하게 된 순간이 있을 거 아냐? 난 그걸 알고 싶어.”
“괜찮겠어요?”
내내 슬픔에 잠겨 있던 청신의 표정이 달라졌다. 도유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바로 전까지 짙은 감정을 호소하던 청신의 눈빛이,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청신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유 형, 제가 그 질문에 대답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시잖아요.”
“……!”
도유는 소스라쳤다. 청신의 입가에 떠오른 미묘한 웃음, 오로지 도유를 담은 눈을 통해 알아차렸다. 목덜미를 잡힌 스산한 감각에 도유는 설마, 하는 생각에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내가, 너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걸 알아?”
“네, 도유 형이 제가 범법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숨조차 멈춘 도유를 향해 청신이 뺨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계속 제게 사랑받고 싶고, 저를 사랑하고 싶어서 외면하기를 선택했다는 것도 알아요.”
*
자신은 청신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적성교에서 처음 만났던 것이 맞았다는 말만으로는 청신이 도유에게 마법을 준 장본인이라는 걸 알아낼 수 없었다.
도유는 처음, 청신이 사라진 그날의 기억을 ‘기억하지 않길 바란다’고 했을 때도 그가 범법자란 의심은 하지 않았다.
그날의 기억이 도유에게 너무나 괴로운 기억이 될 것이기에 청신이 도유를 생각해서 배려해 준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지금 청신의 말이 굉장히 당혹스럽다. 또한 이해할 수 없었다.
도유가 범법자의 마법을 청신으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성화의 마도서를 가지러 갔을 때 혼자 끌려간 방에서였다.
그 자리에 있던 것은 도유와 청신의 아버지, 그리고 성화의 마도서밖에 없었다.
거듭되는 생각과 혼란에 파묻혀 도유가 얼어붙은 사이에도, 청신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요. 도유 형과 나 외에 다른 건 다 필요 없는데 왜 다른 이들 때문에 도유 형이 흔들려야 하죠?”
언제 슬픔에 젖었냐는 듯 형형하게 반짝이는 녹색 눈은, 도유를 뒤흔들고 죽이려 한 성희유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뜻이 숨김없이 떠올라 있었다.
뚜둑, 청신의 발목을 붙든 넝쿨이 끊어지는 소리에 도유는 정신을 차렸다.
“내가 네가 범법자라는 걸 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내게 정신계 마법이라도 썼던 거야?”
기억을 되짚어 보지만 짐작 가는 건 전혀 없었다.
세뇌나 최면 마법이라도 걸렸던 것인가 의심했지만 도유는 그게 불가능하단 걸 알았다. 정령의 보호로 도유는 그런 유의 마법이 온전히 듣지 않았다.
거부 반응이 굉장히 심해, 과거 조사를 받을 때도 정신이 망가지기 직전에서야 멈추지 않았던가.
청신은 혼란으로 일그러진 도유의 얼굴마저 사랑스럽다는 듯, 빤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비슷해요. 성화의 마도서의 힘을 축으로 도유 형이 제 ‘아버지’라는 작자와 만나게 했거든요. 그 인간이라면 분명 형에게 관심을 보이고, 흉성에 대해서…. 저에 대해서 말할 테니까요. 그리고 성화의 마도서가 가진 고유의 힘을 이용해, 제 기억을 도유 형에게 전해 줬던 거예요.”
“고유의 힘이라고?”
“네. 전도와 재생의 힘으로 제가 가진 기억을 도유 형에게 전해 줬어요.”
청신을 붙들었던 넝쿨이 완전히 끊겼다. 여전히 사방이 불타오르는 불 벽에 휘감겨 있는데도 두려움도 공포도 없이 올곧게 오로지 도유만을 바라보며 청신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도유는 그날 자신이 떠올린 기억을 머릿속에서 반복해 보고 있었다.
이상한 점이 없는지. 그리고 이질감을 느꼈다.
그때는 정신이 없었기에 알지 못했던 것. 청신과 계속 함께 있고 싶었기에 외면해 왔던 터라 지금에서야 알게 된 것.
“다만 제 관점의 기억이라서. 키워드를 떠올리게 하고, 대신 목소리를 전해 줬어요. 제가 도유 형에게 마법을 주었던 때의 기억을 제외하고서.”
청신의 말을 들은 순간, 도유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때 느꼈던 묘한 이질감은 분명한 형태를 갖췄다. 그의 말대로였다.
퍼즐 조각과 같은 단편적인 단어의 나열로 이루어진 기억. 형상을 떠올리려고 하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걸 바로 의심하지 못했던 건, 머릿속에 새겨지듯 남은 음성 때문이었다.
“이상하지 않았어요? 제가 마법을 줬을 때의 기억이요.”
나긋한 목소리가 바로 코앞에서 들렸다. 도유는 멍하니 청신을 보았다.
그가 자신을 꽉 끌어안는데도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힌 채, 계속 같은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기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청신의 말대로 그에게서 마법을 받는 ‘장면’은 이상했다. 손바닥에 겹쳐진 마법진이 그려진 흰 종이를 도유는 ‘받았다’고 인식했었다. 동시에 기억을 떠올리며 느꼈던 감각들을 문장을 읽는 것처럼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때 떠올랐던 기억들과 청신의 손의 크기가 이상했다.
“흡…!”
자신의 시점에서 내민 손은 작았다. 저보다 커다란 손에 작은 손이 종이를 겹쳐 얹었다.
마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는’ 장면이었다.
“우욱….”
밀려오는 구역감에 황급히 입을 가렸다. 왜 이걸 이제야 알았을까. 도유가 흔들리자 그들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불 벽이 크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