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상관없죠. 전 당신에게 큰 고통을 주는 게 목적이거든요. 내가 그랬듯, 당신이 당신 손으로 도유 씨를 죽이도록 시키려고 했는데… 역시 그것보단 당신이 자살하는 게 낫겠더라고요.”
지금 청신의 언행을 보고 성희유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걸 더더욱 확신했다.
“당신에게는 도유 씨를 자기 손으로 죽이는 것마저도 사랑의 행위로 느껴질 테니, 그건 제 목적과 부합하지 않으니까요.”
성희유가 관찰한 이청신의 시선은 언제나 서도유를 향해 있다. 종종 사무실이든 현장이든, 짧게 나누는 대화에서조차도 청신은 도유를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청신이 도유에게 하는 행위를 그 어떤 것이든 스스로 ‘사랑’의 형태로 받아들일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난폭하고 폭력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행위든, 애정과 호감에서 비롯된 행위든, 슬픔과 좌절, 그리고 절망에서 비롯된 행위조차 단순히 ‘서도유’가 대상이라는 이유로 그는 모두 사랑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참으로 끔찍한 사랑이다. 성희유는 생각했다. 그 덕분에 이용할 수 있어서 좋았지만.
성희유는 곁에 선 도유를 보았다. 계속 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시선이 가고 말았다. 도유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그게 억지로 떠진 눈이 시려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약물에 손상된 눈의 통증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방금 전과 다른 것은 그가 손끝을 움직였다는 거였다. 성희유의 마법이 자아낸 실에 연결되어 무엇 하나 제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주제에 손끝을 움직였다.
“도유 씨. 신경이 손상되니 가만히 있는 게 좋아요. 재수 없으면 불구가 될 수 있거든요.”
도유는 대답하지 못했다. 청신이 온 뒤로 그나마 허락했던 움직임을 모두 제한시켰으니까. 그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청신 씨?”
“내가 자살하는 걸로 만족해?”
당장이라도 실행할 것처럼 청신이 물었다. 성희유는 잠시 생각하는 듯 고개를 기울이다가 대답했다.
“아니요. 그럴 리가요.”
고작 그런 걸로 만족할 거였으면 이런 유치한 인질극 따윈 할 필요가 없었다.
“당신의 육신을 오체분시한다 해도 만족하지 못할 걸 알아요. 하지만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숨을 쉴 수가 없어서. 아. 혹시 죽는 게 무섭나요?”
그럼 곤란한데. 하고 성희유가 전혀 곤란하지 않은 어조로 중얼거린 성희유는 곧 말을 이었다.
“스스로 죽고 싶어지도록 만들어 드릴게요.”
성희유의 목소리 뒤로 도유는 제 등 뒤로 날이 스치는 소리를 들었다.
동시에 목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후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숙일 수 없었지만 도유는 목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코에 스미는 냄새를 통해 알았다. 피였다.
“도유 형!”
청신이 도유를 향해 가려다 정령의 힘에 붙들렸다. 그의 주변에서 당장 폭주할 것처럼 흉성의 힘이 넘실거렸으나 정령의 힘에 막히기를 반복하며 불꽃 같은 빛이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사람은 무력감에 크게 흔들리는 생물이잖아요. 특히,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 가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도유의 귀에는 그의 말이 경험담으로 들렸다. 아니, 실제로도 그러리라.
“자기 목숨을 바쳐서라도 살리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죠. 청신 씨는 어떨지 모르겠네요. 청신 씨, 선택하세요. 이대로 도유 씨가 죽게 내버려 둘지, 그 전에 당신이 자살할지. 참고로 전 도유 씨가 죽어도 이 정령의 힘으로 만든 감옥을 유지할 자신이 있어요.”
눈을 매개로 하기에 도유가 죽는다 한들 정령은 그 눈이 썩어 세상을 보지 못하게 될 때까지 힘을 빌려줄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도유의 의지가 아닌 성희유의 실에 이끌려 힘을 빌려주고 있는 정령이다. 피아를 구분하지 못한다.
딱 한 번, 그 수상쩍은 상자를 발견했을 때를 제외하면 자신의 의지를 밝히지도 않는다. 마치 단절되어 버린 것처럼.
청신이 움직였다. 그가 주머니에서 꺼낸 건 권총이었다. 훈련소에서 도유가 청신에게 주었던 아티팩트 총의 총구를 제 턱 아래에 가져간 청신은 똑바로 성희유를 노려보았다.
“네가 바라는 게 이런 거겠지.”
“권총 자살은 너무 간단하지 않나요? 이왕이면 고통스럽게 죽으면 좋겠는데요.”
그렇게 말하며 성희유가 청신에게 뭔가를 던졌다. 청신은 그것을 어렵지 않게 낚아챘다. 작은 유리병 라벨에 붙은 글을 읽은 청신이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고전적이네.”
“고전적인 게 나을 것 같아서. 가장 확실하기도 하고요.”
체내에 들어가면 내장을 녹이며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고통 중 가장 끔찍한 고통을 느끼게 한다는 독이었다. 청신은 권총을 바닥에 던졌다.
도유는 청신이 성희유에게서 무엇을 받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성희유가 복수를 다짐한 상황에서 청신에게 주는 물건이라면 결코 좋은 것이 아닐 것이다.
필시 그의 숨을 끊기 위한 도구일 것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럽게 죽을 수 있도록 하는 무언가임을 짐작한 도유는 있는 힘을 다해 성희유의 실을 끊어 내기 위해 힘을 주었다.
손끝은 이제 더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조금씩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곳이 생겼다.
얼굴. 턱 부분에 힘을 주었더니 작게 떨렸다. 입 안에서 혀를 움직여 보았다. 느릿하지만 움직일 수 있었다. 목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고통이 심화될수록 그 인근의 근육이 슬슬 제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성희유는 흘끗 도유를 보았다가 시선을 거뒀다. 손도 발도 움직이지 못하는 주제에 입만 살아나도 상관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도유는 이 순간 성희유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분노와 원망보다 그를 이해하기에 밀려오는 슬픔이 더 컸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대로 청신이 죽게 만들어선 안 된다는 걸 알았다.
“도유 형.”
청신의 목소리가 홀로 고군분투 중인 도유의 귀에 또렷하게 닿았다. 시력이 망가진 눈으로는 청신의 녹색 눈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목소리를 통해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았다.
“도유 형도 이제는 제가 싫어졌어요?”
질문을 들은 순간 그의 말을 부정하고 싶었다. 싫어하지 않는다. 청신의 죄를 외면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기에 이해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구나.”
침묵을 무엇으로 오인한 걸까. 한숨처럼 중얼거린 청신은 성희유로부터 받은 약병을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도유는 제 얼굴에 연결된 실을 끊어 내는데 성공했다.
“도유 씨?”
성희유의 의문 어린 목소리에 약병을 들어 올리려던 청신의 손이 멎었다. 성희유의 주홍색 눈이 크게 떠졌다. 도유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니, 청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제가 할 일을 했다.
도유는 있는 힘을 다해서 혀를 깨물었다. 콰득, 살이 씹히는 섬뜩한 감각과 함께 순식간에 입 안이 피로 가득 찼다.
핏물을 토해 낸 것처럼 빠르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됐다.’
제대로 깨물었는지 입 안에 차오르고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피에 숨이 막혔다. 도유는 생각했다. 제발 이번에도 정령이 반응하길.
정령의 힘이 어떤 상황에서 오로지 도유를 ‘위해서’ 반응하는지 잘 알기에 저지른 일이었다. 그는 흐릿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시야에 일렁이는 빛의 물결을 보았다. 자연에 깃든 주변 마력들이 폭풍우에 휘말린 것처럼 요동친다.
도유가 바랐던 이상이었다. 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한편 성희유도, 청신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듯 멍하니 도유를 보았다. 그러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성희유였다. 아니. 충격에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큿!”
도유의 몸에 연결되어 있던 실이 순식간에 끊겼다.
‘끊긴 게 아니야.’
성희유는 눈을 크게 떴다. 마력으로 자아낸 실은 끊긴 게 아니라 타 버린 거다. 그것을 인지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불꽃이 튀었다.
성희유가 강제로 유도한 정령의 힘으로 형성됐던 감옥은 그 성질을 달리했다. 청신의 힘을 차단하기 위해 이 주변에 돔형으로 덧씌웠던 반투명한 정령의 감옥은 눈을 깜빡이는 것보다 더 빠르게 순식간에 불꽃에 휩싸였다.
매캐한 연기와 뜨거운 열기. 호흡마저 마비시키는 불꽃이 주변을 태워 버리기 시작했다.
“도유 씨…!”
성희유는 반사적으로 도유를 향해 손을 뻗었다. 스스로의 행동을 인지하지도 못했다.
자신의 동생의 몸에 연결된 실마저 끊겨 바닥에 인형처럼 축 늘어진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보다 눈앞의 도유에게 온 신경이 쏠렸다.
저 불꽃이 도유의 것임을 인지하기도 전에, 그저 저렇게 피를 흘리는 몸으로 불에 화상이라도 입으면 가망이 없을 걸 알기에 도유를 지키고자 그의 몸을 감싸 안고 마법을 사용했다.
“…!”
마법이 통하지 않았다. 그도 이제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성희유는 숨을 쉴 때마다 폐를 태우는 열기를 느끼며 주머니에서 아티팩트를 꺼내며 생각했다.
‘완전히 실패했어.’
청신이 죽지 않았다. 그는 어느덧 성희유와 도유가 있는 쪽으로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청신은 한 손에 권총을 들고 성희유의 이마를 겨누고 있었다.
평소라면 대검으로 쳐 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성희유에게는 그를 제압하거나 떨쳐 내는 것보다 도유를 살리는 게 더 먼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