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이번에 들려온 성희유의 목소리는 어린 육신의 목소리였다. 바로 전까지 본래 몸으로 말했던 그가 어린 육신으로 말하자 더욱 밝은 어조와 말의 괴리감에 도유는 소스라쳤다.
청신이 성희유에게 무슨 짓을 했기에 성희유가 이런단 말인가. 지금까지 의지해 왔던 이가 가차 없이 자신을 버리는 것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또 버림받고 말았다는 생각에 목이 메었다. 동시에 슬퍼졌다. 이 사람이 이렇게까지 할 만한 이유가 뭔지 자신은 짐작도 할 수가 없어서.
그걸 짐작할 수 있었다면, 아니, 이해할 수 있는 관계였다면 성희유는 도유를 이렇게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도유 씨는 제가 이러는 이유가 궁금하겠죠. 청신 씨. 청신 씨는 짐작되는 게 있을까요?”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서릿발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청신의 목소리가 끼어들자 도유가 숨을 삼켰다. 자신을 향한 살기가 아닌데도, 피부를 찌르는 청신의 기운에 아플 지경이었다. 그러나 도유는 그것에 더는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
정령의 힘이 더욱 끌어 올려지는 걸 느낌과 동시에 전신을 강타하는 고통이 더욱 커졌다. 신음도 내지 못하고 숨을 헐떡이며 괴로워하는 도유의 모습에 청신이 이를 으득 갈았다.
“도유 형은 아무런 죄가 없어. 성희유. 나에게 화가 난 거잖아. 지랄이든 보복이든 복수든 나한테 해야지 왜 도유 형을 끌어들여?”
평소에 성희유를 그나마 존중하던 청신은 그를 향한 예의를 완전히 때려치웠다. 짓씹듯 내뱉는 목소리에는 분노가 역력했다.
성희유는 그런 청신을 내려다보았다.
도유를 죽이기 전에 혼자 이곳으로 오라고 했더니 예상대로 혼자 온 그의 모습을 보며 과거의 저도 저랬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다시금 도유의 힘을 이용해 청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청신은 이곳에 들어온 순간부터 확실하게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변수가 있다면 흉성의 힘이었지만, 성희유는 과거 적성교가 도유를 노렸던 이유를 잘 알기에 청신이 흉성의 힘도 사용하지 못할 걸 알았다.
설령 사용한다 해도 이 영역 안에서 힘을 사용하면 도유가 크게 다칠 거라는 걸 알 테니, 이도 저도 못 한다.
“청신 씨 말이 맞아요. 도유 씨에겐 죄가 없죠. 저도 도유 씨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성희유가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 동생도 죄가 없었잖아요.”
성희유는 영연의 기억을 통해 어린 청신이 하는 말을 들었다.
송유원이 제 첫째 아들을 포기한 이유도 알게 되었다. 숨만 붙어 있다면 어떤 병이든 어떤 상처든 완치시킬 수 있다는 수천의 마도서로도 깨어나지 않는 아이를 포기한 진짜 이유를, 이제는 성희유도 알고 있었다.
“청신 씨가 준 마법 때문에 난 내 동생을 두 번이나 죽이게 됐어요.”
그는 여전히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무표정하게 저를 올려다보는 청신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역시 알고 있었나 보네요.”
청신의 발밑에서 새까만 힘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성희유는 도유의 몸에 빈틈없이 연결된 자신의 실을 통해 전해져 온 시각 정보를 이용해 그것을 보았다.
도유의 눈은 사물을 제대로 분간해 내지 못했지만 흉성에서 흐르는 부정적인 에너지의 흐름만큼은 희뿌연 세상에 그은 굵은 선처럼 선명하게 보았다.
성희유가 곧바로 실을 움직였다. 지면이 약간 흔들리고, 청신의 발밑에서 뻗어 나온 얇은 나무 덩굴이 순식간에 흉성의 힘을 차단시켰다. 곁에서 도유가 신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청신 씨는 제게 그 마법을 줬을 때, 무원이의 육신에 제 의식을 옮겨 육신을 유지하면 무원이의 의식이 떠오를 거라고 했었죠. 그런데 당신이 준 마법식을 다시 보니 전혀 그런 게 아니더라고요.”
내내 입가에 머금고 있던 웃음이 사라졌다. 주홍색 눈에는 지금까지 드러낸 적 없던 분노와 증오에서 비롯된 명백한 적의가 형형하게 번뜩이며 청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송유원으로부터 수천의 마도서의 힘으로 치유를 받은 뒤, 그는 자신이 빼앗은 영연의 기억이 조작되거나 날조되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그렇기에 그날 협회장실에서 빠져나온 뒤 줄곧 청신이 제게 주었던 마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살폈다.
식을 이루는 한 글자씩 뜯어보고 모든 자료를 참고해 그간 카단에 수집된 범법자의 마법을 뜯어보았다.
최후의 확인 방법으로, 자신의 힘을 처음으로 무원의 육신에 사용해 보았다. 살아 있다고, 의식이, 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던 아이의 육신은 저항 없이 기억을 내어 주었다.
‘희유 형아, 형아! 사랑해!’
해맑게 웃으며 품에 안겨 오던 동생의 목소리도,
‘희유 형, 나 없으면 혼자가 될 텐데…. 많이 울면 안 되는데….’
마지막 순간 죽음을 직감한 동생이 했던 생각마저, 마치 계속 알려 주고 싶었다는 것처럼 전부 흘러들어 온 덕분에 동생이 완전히 자신을 떠났음을 깨달았다.
그날 성희유는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었다. 끄집어낸 기억 속에서 들려온 무원의 목소리조차 너무나 반갑고 사랑스러워서. 그대로 영영 기억 속에 잠겨 버리고 싶을 정도로 감미로워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있다. 동생의 복수를 완전히 끝내기 위해서였다.
“내 의식이 무원이의 육신에 있으면, 무원이의 의식은 제 의식에 짓눌리게 되죠. 그래서 떠오르지 못하고 계속 눌리고 눌려서, 살 수 있었는데도, 다시 눈을 뜰 수 있었는데도 눈을 뜨지 못했던 거야.”
평온을 흉내 냈던 목소리는 갈라지고, 쇳소리가 났다. 분노로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성희유가 무표정하게 저를 올려다보는 청신을 노려봤다.
바로 전까지 성희유는 차분했고, 청신은 격정에 표정도 관리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둘을 바꿔 놓은 듯 반대가 되었다.
“그래서.”
청신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뭐? 희망을 바랐던 건 너야, 성희유. 난 네 요구에 따라 희망을 줬던 것뿐이지. 그게 왜 내 잘못이 되고, 도유 형을 위험에 끌어들인 이유가 되는 거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도유는 지금 제 눈이 제대로 보였다면 청신의 표정 또한 마찬가지일 것을 알았다.
너희가 희망을 바랐다. 그렇기에 희망을 줬다. 그것이 뭐가 문제냐.
“너도 내 어머니도, 내게 요구한 건 하나지. ‘이 아이가 깨어나게 해 달라. 언제까지고 기다릴 테니, 깨어나 주기를 바란다.’라고. 그래서 희망을 줬잖아.”
“하….”
청신의 말에 도유는 소름이 끼쳤다. 지금의 청신은 조금도, 성희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 또한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의 절박함을, 비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에 그는 저런 마법을 준 것이다.
의식을 옮겨 살리고자 하는 이의 몸을 대신 움직여 육신을 유지시키는 것으로 기다림에 희망을 품게 해 주고, 실상은 정말로 ‘기약 없는’ 기다림을 하게 되는 지독한 마법을.
완벽한 몰이해다. 청신은 사람을 이해하지 ‘않’는다. 못하는 게 아니다.
조금이라도 이해하려 들었다면 그는 지금 저런 말을 하는 대신 다른 말을 했을 것이다.
그것이 욕이 됐든, 성희유를 향한 동정이든 사과든 그것이 될 터였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며 의아해할 게 아니라.
도유는 청신을 알 수 없어졌다. 청신과 아카데미에서 만났을 때부터 줄곧 그가 보여 주었던 모습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면서 도유를 미지로 밀어 넣었다.
청신은 도유를 이해하고 있었다. 도유가 괴로워하거나 슬퍼하면 걱정하고 달래 주고 울먹이기도 했다. 기쁨에 젖어 몇 번을 울기도 했다.
그랬던 사람이 도유를 제외한 다른 사람을, 심지어 자신의 부모조차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가 이번에 범법자로서 일반인에게 마법을 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도유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몸을 떨었다.
“나는 마법을 줄 때 분명하게 말했어. ‘이 마법을 사용하면 언젠가 당신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진다’고.”
“지금 저와 말장난하자는 건가요?”
분노가 상한선에 이르니 되레 다시 냉정해진 성희유가 짓씹듯 내뱉었다. 청신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생명체를 보는 눈빛으로 성희유를 보았다.
“아니. 그럴 시간 따윈 없어. 너의 멍청한 착각을 알려 준 것뿐이지. 도유 형을 풀어 줘. 이 이상은 도유 형이 버티지 못해.”
정령과 계약을 맺은 건 도유였고, 성희유는 그의 몸에 연결한 실을 통해서 정령의 힘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설프게 흉내를 낸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미세한 조정이 어려워 한 번 힘을 쓰고, 유지할 때마다 불필요하게 큰 힘이 소모되었다.
그것은 도유의 육신에 걸리는 과부하로 이어졌다.
성희유는 청신을 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지금까지 성희유를 이해하지 못했던 청신은 이 순간 도유를 굉장히 걱정하고, 그가 고통스러워할 때마다 제 고통처럼 괴로워하고 있었다.
청신이 성인의 몸을 하고 있지만 몸만 큰 어린아이나 다를 바 없다 생각하며 그가 친절한 목소리로 권했다.
“제가 도유 씨를 풀어 주길 바란다면 죽으세요. 아. 정정하죠. 자살하시겠어요? 이청신 씨.”
“…….”
“자살하지 않으면 도유 씨를 죽이겠어요.”
“그랬다간 넌 내게 죽을 거야.”
청신의 목소리가 완전히 달라졌다. 성희유는 무엇이 두렵겠냐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