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그놈 때문에 내가 내 동생을 죽이고 말았어요. 그러니 그놈도 똑같이… 아니, 더 고통스럽게 괴로워하다 죽어야 해요. 그러니 백휘 씨.”
성희유가 환하게 웃으며, 밝은 어조로 말했다.
“도망쳐 줘요. 나와 도유 씨가 당신을 쫓을 수 있도록. 그놈을 죽일 함정을 만들 준비를 해야 하거든요. 알았죠?”
경애하고 존경하던 사람이 증오와 절망에 완전히 삼켜져 버렸다는 걸, 백휘는 이 순간 깨달았다. 그는 묻고 싶었다.
정말 그래도 괜찮겠냐고. 성희유는 도유를 버릴 패로 삼았다. 백휘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20년이 넘도록 지속되어 온 관계를 패로 삼아 복수를 하고 나면, 당신은 괜찮겠냐고 묻고 싶었다. 아니, 사실 묻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
복수를 마치면 당신은 어떻게 할 건지.
그러나 백휘는 끝내 질문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며 경애하는 이가 바라는 대답을 내뱉었다.
“알겠습니다. 성희유 씨가 원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일주일 후, 백휘는 성희유의 말대로 카단의 모든 연락과 목줄을 끊은 채 도주를 했다.
*
성희유의 연락을 받고 그와 합류하여 백휘의 추격에 나선 도유는 흙바닥에 나뒹구는 목줄을 보았다. 칼로 자른 듯한 초커는 백휘에게 부여된 것이 맞았다. 초커 한구석에 작게 표식이 있었기에 알아보는 데 어렵지는 않았으니까.
“여기서부터 추적을 하죠.”
“예.”
성희유의 말에 도유는 여기까지 타고 왔던 차의 트렁크를 열었다.
트렁크를 절반 넘게 채우고 있던 캐리어를 열자 추적과 탐지용으로 개발된 장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유는 장비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마법사를 추적하는 데 특화된 장비로, 조작하기 위해서는 세팅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기에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젠장.’
욕이 저절로 나왔다. 현 상황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이럴 때일수록 냉정하고 냉철하게 사고하며 평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그러기가 어려웠다.
그 심경을 대변하듯 떨리는 손이 계속 헛손질을 했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마음은 초조해지고 이대로 시간 경과가 되어 백휘를 사살하게 될까 겁에 질려 식은땀까지 흘렀다.
“도와드릴까요?”
성희유의 차분한 목소리에 초조함에 짓눌렸던 마음이 돌아왔다. 도유는 성희유를 보았다.
합류를 한 뒤로 백휘의 도주 예상 경로와 그와 교전할 시 대응 방법 등을 짧게 말한 뒤 입을 다물었던 성희유는 도유가 걱정됐는지 평소보다는 너그러운 시선을 보냈다.
여느 때처럼 아이의 외관이었으나 주홍색 눈이 품은 깊이만큼은 깊고 깊어서, 도유는 그의 눈을 보고 감화되듯 평정을 되찾은 것을 느꼈다.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서두르면 될 것도 되지 않으니 차분하게 해요.”
“알겠습니다.”
도유는 이런 상황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는 성희유가 진심으로 존경스러웠다.
성희유도 사람이니 공적이든 사적이든, 어느 쪽으로도 백휘의 도주에 충격을 받았을 텐데 이렇게 팀장으로서 평정을 유지하는 그의 모습은 정말 멋졌다.
어렸을 때도 성희유를 멘토로 삼았던 도유였지만, 평생 그처럼 되긴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다시 이런 일이 닥치면 지금처럼 감정적으로 굴지 않을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성희유 덕분에 평정을 찾은 도유는 방금 전보다 더 빠르고 떨림 없는 정확한 손놀림으로 장비 세팅을 해 나갔다.
달칵거리며 장비의 세팅을 마치고, 마석을 넣어 발동시키자 동그란 원판 부분에 동그란 빛 여러 개가 떠올랐다.
지구를 떠도는 달처럼 빛은 가운데에 떠오른 조금 큰 빛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듯 점점 거리를 벌리며 빙빙 돌았다. 도유는 마석을 새로 넣었다. 백휘의 마력을 주입시킨 마석이었다.
특수부의 마법사들은 주기적으로 자신의 마력을 주입시킨 마석을 성희유에게 제출해야만 했다. 지금처럼, 특수부 소속의 마법사가 도주할 경우나 임무 중 사고에 휘말려 실종될 경우 찾기 위해서였다.
마석에 깃든 마력을 추격하는 이 장비는 지금까지 단 한 명도 놓치지 않았다. 장비 아래 있는 작은 주머니에 백휘의 마석이 한가득이었기에 백휘가 죽은 게 아니라면 얼마든지 그를 찾아낼 수 있었다.
빙빙 돌던 빛이 멈췄다. 빛의 색이 바뀌었다. 보라색. 찾았다는 뜻이었다. 도유가 성희유를 보았다. 성희유도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멀리 가지 않았군요.”
“다행입니다.”
진심으로 중얼거린 도유는 빛을 움켜쥐었다. 보라색으로 반짝이던 빛은 자연스럽게 도유의 손목에 휘감기며 팔찌 같은 형태로 변했다. 이제 추적 대상이 가까워지면 신호를 보낼 것이다. 도유는 바로 장비를 정리하고 트렁크를 닫았다.
“팀장님, 이 정도 거리는 정령의 힘으로 이동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차로 이동하면 명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어려우니까요.”
“정령의 힘을 쓰면 아프다 하지 않았던가요?”
걱정해 주는 걸까? 도유는 성희유의 마음이 고마워 웃었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제한이라도 걸릴 수 있잖아요.”
도유가 정령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성희유는 지금처럼 질문을 하지 않았었다.
이제 와 흥미가 생긴 것인지, 아니면 백휘를 제압할 때 필요한 전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고 싶은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도유는 의문을 제기하는 대신 그의 말에 대답했다.
“제한이라면 딱히 겪어 본 적은 없습니다. 한계까지 힘을 써 본 적이 없어서 아직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런가요. 정령이 도유 씨의 눈을 통해 적을 구분하는 것 같다고 했었죠? 백휘 씨가 눈을 가리는 마법을 사용할 경우엔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는 게 좋을까요?”
“제가 정신을 잃거나, 눈이 아예 보이지 않을 경우에는 정령도 힘을 빌려줄 수가 없으니 그때는 제가 다시 앞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지원 부탁드립니다.”
“음, 알았어요. 정령은 ‘적’의 구분을 도유 씨의 눈을 통해 하고, 힘을 사용하는 것도 오로지 그 눈을 통해 한다…. 맞지요?”
질문을 받은 순간 도유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꼭 취조를 받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백휘와 교전할 경우를 상정한다고 해도 이상했다. 그 감각을 곱씹어 보던 도유는 곧 자신을 채운 의문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깨달았다.
질문 자체가 이상했다.
자신이 아는 성희유라면, 도유와 백휘가 싸우는 것 자체를 막을 것이다. 서로의 성격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정령의 힘에 기대어 싸우게 하기보다 성희유가 혼자 백휘를 제압해 내려고 했을 것이다. 실제로 성희유가 혼자 백휘를 잡는 건 일도 아닐 터였다.
“도유 씨?”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겁니까?”
“아.”
성희유의 표정이 단번에 바뀌었다. 그의 씁쓸한 웃음을 본 순간 도유는 깨달았다.
성희유도 당황해하고 있었던 거다. 평정을 유지하고 있기에 공과 사를 철저하게 구분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게 착각이었다.
“미안해요, 도유 씨. 저도 아무래도 이 상황이 당황스러워서. 도유 씨에게 전부 맡기려는 건 아니었어요.”
도유가 예상했던 것과 다르지 않게,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낸 듯한 성희유의 말에 도유는 서둘러 말했다.
“아닙니다. 팀장님, 그러실 수도 있습니다. 팀장님의 말이 맞습니다. 저와 계약을 맺은 정령은 제 눈을 이용해서만 피아를 구분하기 때문에, 눈이 가려지면 힘을 쓰지 못합니다.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경우엔 사용 가능하긴 한데…. 조절이 어려워서… 아군도 다칠 수 있습니다.”
딱 한 번. 과거 임무에서 눈에 피가 들어가 피아 구분이 어려운 상태에서 힘을 썼다가 아군을 죽일 뻔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아찔한 감각이 지금도 선명했다.
“그렇군요. 그럼 도유 씨, 백휘 씨를 제압할 때 그가 마법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해 주실 수 있나요?”
도유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유가 지금까지 범죄를 저지른 마법사들을 상대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정령이 가진 고유의 힘 덕분이었으니까.
정령의 힘을 사용하면 마법사들은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정령의 힘은 마력의 흐름을 끊어 내는 힘이었다. ‘막을 수 있는 유일무이한 힘’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이 힘을 사용한 덕분에 도유는 지금까지 죽지 않고 마법사들이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만들고 제압할 수 있었던 거였다.
보통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된 마법사들은 당황하기 마련이다. 백휘는 도유와 몇 번 싸워 봤기에 곧바로 대응할 테지만 성희유가 있다면 잠시 다리를 묶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그러고 보니, 청신이에게도 이 힘이 통할까?’
정화는 시켜 봤지만 그를 정령의 힘을 사용해 제압해 본 적은 없었다. 마법은 당연히 사용하지 못하게 될 텐데, 흉성의 힘은 어떻게 될까.
“도유 씨.”
“네.”
반사적으로 대답하며 생각에서 빠져나온 도유는 성희유를 보았다.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도유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게 시험 삼아 써 보시겠어요?”
“네?”
“정령의 힘을 이용해서 마법사를 제압하는 그 힘이요.”
“하지만….”
도유가 머뭇거리자 성희유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잠깐이면 돼요.”
잘못 사용하면 아이의 몸과 연결한 의식이 끊길 수 있다는 걸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을 사람이 허락하니 도유는 거절할 명분도 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