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처음에는 도유에게 서운해하던 청신도 이번 일로 개인 의뢰가 많이 들어왔는지 아쉬워하면서도 한동안 도유에게 추근거리지는 않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이제 그것도 한계에 부딪힌 듯했다.
지이잉- 지이잉-
진동으로 해 둔 핸드폰이 울리는 걸 도유는 난처한 얼굴로 보았다. 화면에 뜬 이름은 이청신이었다.
언제나 기다렸고, 기분 좋게 받을 수 있었던 연락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곤란하기 그지없었다.
지난 한 달간 열심히 직접적으로 통화하는 걸 피하고 메시지로 전부 대체했건만, 이제 슬슬 받아야 한다는 예감이 들었다. 안 그럼 이 녀석이 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도유는 머뭇머뭇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도유 혀엉. 보고 싶어요. 오늘도 바빠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청신의 목소리에 슬픔이 가득하다.
듣는 사람의 심금을 울릴 정도로 너무나 슬프게 들리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오늘은 시간 돼’라고 대답할 뻔했지만 가까스로 말을 삼켰다.
“미안해. 청신아. 오늘은 개인 일정이 있어서 안 되겠어.”
[“잠깐도 안 돼요? 정 안되면 밤에 잠깐 만나서 굿나잇 키스라도 하게 해 줘요. 응?”]
“…미안. 언제 들어갈지 몰라. 아. 이제 슬슬 가야겠어. 이만 끊을게.”
[“도유 혀-.”]
말이 이어지기 전에 도유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다시 연락이 오지 않을까 싶어서 한동안 핸드폰을 노려보았지만 연락은 없었다.
도유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난간 위에 팔을 괴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바로 아래는 낭떠러지다. 산길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속. 살짝 고개를 들어 보면 우거진 나무들 너머로 저 멀리 도유가 어렸을 적에 지냈던 고아원이 보였다.
이곳은 어릴 때부터 줄곧 도유의 유일한 쉼터가 되었던 산이었다. 생각이 복잡해질 때, 혼자 있고 싶을 때 그는 이곳으로 와 지금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카단 본부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곳에 위치한 곳이라 그런지 지금까지 여기에 오면서 제지당한 적이 없었기에 유일한 쉼터라 할 수 있었다.
고아원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도유는 생각에 잠겼다. 그는 아직도 청신이 범법자로서 일반인에게 마법을 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청신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정말 그게 흉성으로 인한 대재앙을 예비하기 위한 행동이었던 것인지 이제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청신이 너무나 태평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면 공원에서 범법자의 마법이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 가는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했을 때부터 청신의 반응은 일반적인 사람과 거리가 멀었다.
‘이상하다’는 느낌보다, 다른 느낌이 강했다. 그게 무엇인지 곰곰이 곱씹어 본 뒤에야 도유는 그게 ‘무감정하다’는 느낌임을 깨달았다.
그는 타인의 죽음에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동정도 느끼지 않는 듯했다.
지금까지 청신과 함께했던 모든 상황들을 침착하게 하나씩 상기해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전에도 어렴풋이 느끼긴 했지만, 지금은 그 ‘차이’까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청신은 서도유를 대함에 있어서는 유난히 감정적이다. 감동하고 대신 아파할 줄 안다.
근본적으로 도유를 ‘이해’를 한다. 전에는 단순히 도유 자신을 대하는 것만 보고 타인에게도 좀 이러지 않을까 의심했지만.
이는 온전히 서도유에 한한 행동이었다. 마치 서도유가 감정을 인식하고, 느끼며, 감정적으로 사고하는 통로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이 괴리를 깨닫자 더욱 청신을 이해하기가 어려워졌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머리가 지끈거리다 못해 칼날을 머릿속에 넣고 들쑤시는 통증이 일었다.
근래에 청신을 피해 다니며 이러한 통증에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익숙해지기는커녕 더 심해져서 지금 당장 청신을 찾아가 따져 묻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
도대체 12살의 자신은 어렸던 청신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첫 만남이 어땠기에 그가 자신에게만 감정을 드러내며, 이렇게 대하게 된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멍청한 서도유.”
짓씹듯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니 더 멍청이가 된 기분이다. 혼란스러워서 청신을 피하고 있는 와중에도 그와의 관계를 깨고 싶어 하지 않는 자신을 두고 멍청이라는 말 외엔 달리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했다.
기억을 되살리는 쪽도 생각해 봤지만, 기억이 아예 지우개로 지워 버린 것처럼 사라져 버렸을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알기에 포기했다.
과거 적성교에서 발견되어 카단에 구조됐을 때 동일한 수법으로도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던 경험 때문이었다.
‘이 이상 하면 백치가 될 겁니다.’
당시 도유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을 사용했던 마법사는 그렇게 경고했다. 도유는 그 경고를 지금도 잊지 않았고, 그것이 사실임을 알았다.
마지막으로 카단의 각 치유부 팀장들 입회하에,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마법을 받았을 때 다음은 버티지 못할 거라는 본능적인 생각이 들었으니까.
지이잉.
슬슬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주머니 속에 넣어 둔 핸드폰이 울렸다. 청신인가 싶어 잔뜩 긴장해서 핸드폰을 꺼내니 익숙한 번호가 보였다.
“네, 서도유입니다.”
[“도유 씨.”]
기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지난번, 성희유가 드물게 그답지 않은 모습을 보였을 때와는 조금 달랐지만 앳된 아이의 목소리는 한없이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도유는 이 다음 말을 듣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람과는 다르게 성희유는 자신이 할 말을 했다.
[“백휘 씨가 임무 복귀 중 연락을 끊고 도주했습니다.”]
“…도주를, 말입니까?”
믿어지지 않는 말에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방금 전까지 하고 있던 생각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혼란만 가득했다.
싱크홀에서 함께 구조 작업을 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임무에 투입된 백휘와 헤어지기 전, 도유는 그와 함께 식사를 했었다.
그때의 백휘는 도주의 기미가 전혀 없었다. 둘은 평범한 대화를 나눴다. 다음에 또 보자며, 이번에도 살아남자며 우스갯소리를 하고는 헤어졌다. 여느 때와 똑같이.
“착오가, 착오가 있는 게 아닙니까?”
[“진정하세요, 도유 씨.”]
잘못된 거다. 뭔가 잘못된 것이다. 단순히 어떤 사고가 발생해서 연락을 못 하는 상황이 된 것뿐이다.
난간을 꽉 움켜잡은 손이 덜덜 떨리는 게 보였다. 평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성과 감정은 도유를 놓아주지 않았다.
[“카단에서는 그가 24시간 내로 복귀하지 않을 시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입니다.”]
“마지막으로 있던 위치가 어디였습니까? 추적 장치는, 도주 방지 장치는 발동하지 않은 겁니까?”
[“백휘 씨는 뛰어난 마법사니까요. 그 정도는 족쇄 역할도 하지 못하죠.”]
“그, 그럼 시간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팀장님, 제가 시간 내로 휘를 데리고 본부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럼 징계만 받을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건 알 수 없죠.”]
“팀장님, 제발 그렇다고 해 주십시오. 휘는 그렇게 갑자기 도주할 성격이 아니란 거 팀장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도유의 표정이 완전히 허물어졌다.
카단의 특수부에서 20년을 넘게 일한 도유는 도주한 특수부 1팀의 팀원이 어떻게 되는지 잘 알았다.
동료에게 사살당할 것이냐, 자살할 것이냐. 그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다. 추격 및 사살 명령을 받은 팀원이 도주자를 잡지 못하면 본인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니 다들 필사적으로 잡고, 도망치는 것이다.
도유는 이 순간 역설적이게도 청신이 보고 싶었다. 그에게 매달려서 백휘를 도와 달라고, 살려 달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동안 그를 혼자 피했던 주제에 매달릴 염치가 없었다. 무엇보다 청신이 반기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이렇게 자신의 필요에 따라 그를 이용하려는 스스로를 자각하자 속이 울렁거려 도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단순히 징계로 끝날지는, 저와 도유 씨의 행동에 따라 다르겠죠.”]
“그 말씀은…!”
[“백휘 씨를 제한 시간 내에 찾아 문제없이 복귀하면, 사고를 위장하든 잠시 미쳤든 조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대신 저와 도유 씨만 가야 해요. 비밀리예요.”]
“알겠습니다. 당장 가겠습니다. 어디서 합류하면 되겠습니까?”
[“문자로 주소지를 남기죠. 차를 대기시켜 둘 테니 그리로 와요.”]
“예!”
죽는 사람이 나올 때까지 누가 도주한 이의 추격을 맡았는지 신경 쓰지 않는 상부였기에 도유는 희망을 품었다. 한시가 급하다. 연백휘는 뛰어난 마법사였다. 도유 자신의 실력이라면 24시간 내에 그를 잡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도유는 판단을 마치자마자 난간 위로 뛰어올라서 그대로 뛰어내렸다. 이대로 뒤돌아 산길로 차를 세워 둔 곳까지 내려가면 1시간이 넘게 소진된다. 그러나 이 아래로 바로 뛰어내리면 30분 이상이 감축된다.
휘이이-
바람 소리와 함께 아래로 떨어지던 몸이 보이지 않는 발판을 밟은 것처럼 허공을 디뎠다.
정령의 힘이었다. 도유는 그대로 허공에서 도약했다.
파도가 파도를 밀어 내는 것처럼 빠르게 허공을 이동한 도유는 성희유가 보낸 문자를 확인한 후 더욱 정령의 힘을 끌어 올렸다.
점점 멀어져 가는 도유의 모습을, 나무 위에 앉아 있던 새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것은 이내 날갯짓을 한 번 하더니 그대로 모래처럼 부스러져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