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옅은 미소를 머금은 백휘의 얼굴에는 거짓이 없었다. 진심으로 친구의 행복을 순수하게 기뻐하는, 어떻게 보면 안도한 것처럼 보이는 얼굴이었다.
“고마워, 휘야.”
그에 도유도 진심으로 웃으며 대답할 수 있었다.
솔직히 화영이 좀 독특한 경우고, 남자와 남자가 사귀는 것에 대해 아직까지는 차별적인 시선이 많은 세상이다. 내심 걱정하고 있었던 도유는 담백한 백휘의 반응이 고마웠다.
“전부터 궁금했는데요, 어째서 도유 형은 저 사람을 ‘휘야’라고 해요?”
“어?”
“연백휘. 이름이잖아요.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애칭으로 부르니까 질투 나요. 저는 애칭으로 안 불러 주면서.”
청신이 도유의 허리를 슬쩍 끌어안았다. 도유가 더는 백휘의 눈치를 살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기에 꾹꾹 참았던 행동 중 일부를 하는 느낌이었다.
“도유가 제대로 발음을 못 해서였어요.”
대답한 건 백휘였다. 백휘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도유가 저를 불러도 반응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이후엔 ‘저기’라고 부르거나 제 이명을 부르길래. 휘라고 부르라고 했어요.”
추억에 잠긴 눈으로 백휘가 도유를 부드럽게 응시했다. 도유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바로 들지 못했다. 사실 지금도 발음이 어렵다. 성희유가 백휘라는 이름을 자연스럽게 발음하는 걸 보면 여전히 부러웠다.
“…나도 발음이 어려운 이름이었어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바꿔야,”
“하지 마.”
곁에서 청신이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도유가 일갈했다. 흘끗 곁눈질한 미인의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한 걸 보자 입이 스르르 벌어졌다.
“나중에 애칭… 붙여 줄 테니까 지금은 참아.”
원했던 대답인지 청신이 사르르 눈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청신 씨는 도유와 계속 사귈 건가요?”
갑작스럽게 던져진 백휘의 질문에, 도유는 놀랐고 청신은 불쾌해했다.
“계속 사귀다뇨.”
“뭐?”
부정적인 언사에 도유가 멈칫하며 청신을 보았다. 그는 미간을 좁히고 백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언짢음이 가득 담긴 녹색 눈이 백휘를 쏘아본다.
도유를 안고 있지 않았다면 욕이라도 한 번 했을, 언뜻 보면 살벌한 표정이었지만 도유의 마음에 걸리는 건 그게 아니었다.
그는 살짝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계속 사귀다뇨’라니? 천년만년 평생 동안 함께할 것 같았던 청신이 그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게 어려웠다. 손끝이 떨려 주먹을 쥐어야 했다.
도유는 청신과 함께하기 위해서 그가 범법자라는 걸 알고도 모른 척했다. 평생 가슴에 묻어 두기로 했다. 그런데 청신이 도유와의 관계를 계속 이어 나갈 게 아니었다면 도유의 고뇌와 정신적인 고통은 무엇이었을까?
“계속 사귀지는 않을 겁니다.”
“…!”
“그럼요?”
평소에는 그 어떤 선율보다 사랑스럽고 감미로웠던 목소리가 지금 이 순간에는 굉장히 듣기 싫어졌다.
청신의 확신 어린 목소리에 심장 한구석이 지끈거렸다. 마음의 고통을 견디지 못한 푸른 눈이 가늘게 흔들린다. 주먹을 꽉 쥔 손등에 힘줄이 돋았다.
그때 청신이 백휘에게서 시선을 떼고 도유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가 눈부시게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결혼해야죠. 지금도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있으니 당연한 것 아닙니까?”
“…결혼?”
도유가 되물었다. 결혼? 누구와 누가? 그러나 도유의 의문에 답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좋네요. 결혼식 때 청첩장을 주실 수 있으신가요?”
“물론이죠.”
백휘는 그동안 같은 곳에 소속되어 있는 도유를 나름 걱정해 왔던 까닭에 도유에게 헌신적인 청신을 꿰뚫어 보고 만족했다.
그리고 청신은 그가 자신의 경쟁자가 아니며, 이미 뒷조사를 통해 백휘가 그간의 임무에서 성희유와 마찬가지로 도유를 몇 번이고 살려 줬던 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너그러워졌다.
장본인을 쏙 빼놓고 대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정신을 차린 도유는 황당했다. 결혼은 생각도 안 했다.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있었다는 것도 금시초문이었다.
다만 눈치가 있으니 다시 업무에 집중하려는 백휘 곁에서 청신을 추궁하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대신 ‘결혼이라니 무슨 소리야?’ 하는 질문을 담아 열심히 눈만 굴렸다.
도유의 의문을 읽은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물끄러미 그 고갯짓을 보던 청신이 행복하게 웃으며 말했다.
“도유 형, 그렇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으니 새끼 부엉이 같아요. 너무 귀여워요.”
육성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키스하고 싶은 듯이 입술을 핥는 청신의 모습에 도유는 매정하게 고개를 돌리고, 허리에 감긴 그의 손을 떨쳐 냈다.
“너 이제 곧 있으면 아카데미 갈 시간이잖아. 옷 갈아입어.”
“아직 시간 남았어요. 여차하면 마법으로 가면 되고요.”
“옷 갈아입어.”
싸늘한 도유의 어조에 청신이 뭔가를 느꼈는지 눈을 깜빡이다가 알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휘와 짧은 인사까지 주고받은 청신은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도유는 그 모습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누구 놀리나. 자기 멋대로 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청신의 말 한마디에 그렇게 단시간에 휘둘리게 된 자기 자신이었다.
“도유야.”
“아. 응?”
“괜찮아? 내가 괜한 걸 물어봐서 미안해.”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백휘의 목소리에 도유는 표정 관리에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확인하고 싶었어. 넌 예전부터 관계가 길어질수록 괴로워했었잖아.”
지금까지 특수부 제1팀에 함께 소속되어 왔던 팀원과, 같은 임무에 파견되었던 다른 팀 사람들을 말하는 것임을 도유는 바로 알아들었다.
언제나 배신이나 죽음으로 끝나는 관계. 그에 지친 도유가 한때는 임무에서조차 입을 닫고 살았던 걸 아는 백휘기에 더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유는 살짝 웃으며 속내를 털어놨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청신이는 괜찮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좀 전에 표정이 많이 안 좋았잖아.”
“결혼 이야기는 처음 들어서 잠깐 당황한 것뿐이야.”
백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이청신 씨가 널 굉장히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어. 너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이청신 씨가 결혼을 전제로 한다 했을 때 바로 납득했었는데 내 착각이었나 봐.”
“청신인 그렇다 쳐도, 내가 청신이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조금 전에?”
“아니. 천화 마을에서 말야.”
이번에는 도유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때 백휘가 본 장면이라고는 청신에게 덮쳐지기 일보 직전의 모습만 봤던 게 아니었던가. 도유는 잠시 얼떨떨해하며 기억을 더듬다가 대답부터 했다.
“그랬던가…? 어쨌든 난, 청신이랑 사귀어도 결혼은 전혀 생각하지 못해서 청신이가 그렇게 말했을 때 더 당황했던 것 같아.”
청신과 만나기 전 ‘사랑’이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도유에게는 너무나 생소하고 멀게만 느껴졌던 단어가 ‘결혼’이었다. 도유는 청신이 사무실에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을 확인한 뒤 말을 이었다.
“그래도 네 덕분에 알게 됐으니까. 고마워. 휘야.”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있었다는 건 금시초문이었지만.
어쨌든 가정을 이루는 건 도유가 어릴 적부터 바라 왔던 것이기에 생각해 보면 가슴께가 간질거리며 기분이 좋아졌다.
백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도유가 마주 웃으려던 때 팀장실 문이 열리는 게 보였다. 둘의 시선이 저절로 그리로 향했다. 여전히 원래의 몸인 성희유가 둘과 눈이 마주치자 들어오라고 말했다.
백휘와 도유는 의아해할 겨를도 없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팀장실로 들어갔다. 성희유는 그사이 책상 앞에 선 채로 태블릿을 조작하고 있었다.
“청신 씨는요?”
“탈의실에 갔습니다.”
“그럼 돌아오는 대로 전달해 줘요. 도유 씨, 백휘 씨, 지금 바로 현장으로 가서 인명 구조를 시작해 주세요.”
성희유가 든 태블릿을 내려놓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리모컨을 조작했다. 한쪽 벽면의 중심에 있는 대형 모니터에서 뉴스가 나오기 시작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화면과 빠르게 뜨는 자막들을 통해 무슨 일인지 파악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거대 싱크홀 발생… 대기업 C&V 본사, 바닥에 가라앉아.]
[건물 내부와 연락 안 돼… 구조 작업 난항, 인근 지반 붕괴 우려로 인근 주민 대피, 도로 통제]
“저게 무슨….”
“범법자의 마법입니다.”
단호한 목소리에 도유는 목석처럼 그 자리에서 굳었다.
심장이 무겁게 뛰기 시작했다.
“범법자의 마법이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소원 나무’ 사이트를 조사하다가 어제 범법자로부터 마법을 받은 사람의 정황을 포착했고, 카단에서는 계속 그 사람을 쫓고 있었습니다. 마법을 사용하기 전에 확보해서 불필요한 죽음을 막기 위해서요.”
성희유의 주홍색 눈이 관찰하듯 집요하게 도유의 얼굴 위에 머문다. 그가 말을 이었다.
“범법자로 추정되는 이로부터 마법을 받은 사람의 신원과, 저 건물에 근무하는 직원의 신원이 동일합니다. 소원이라 적은 내용이 저 건물의 규모와 완벽하게 일치해요. 신원에 대한 것은 저쪽을 봐 주세요.”
리모콘을 조작하자 태블릿의 화면이 모니터에 떴다.